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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4. 21. 09:13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045 반 고흐 태양의 화가

 

파스칼 보나푸 지음 / 송숙자 옮김

1997,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3463

 

082

시156ㅅ 7  c.2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007

 

성직자의 길을 열망했던 반 고흐.

한때는 광산촌에서 '가지지 못한 자들'을 위해 정열을

불태웠지만 그의 운명은 캔버스를 떠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빛이 만들어 내는 갖가지 희롱을

화폭에 담고자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그는, 빛과 그림자가 소용돌이치는

화면을 통해 숱한 사람들의 비어 있는 내면을 향해 말을

걸어 왔다. 태양의 화가 반 고흐,

영혼의 화가 반 고흐의 그림에는 삶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진한 애착과 영혼을 꿰뚫는 투명한 관조가 넘쳐난다.

운명은 가혹했다.

그러나 영광은 계속된다. 반 고흐는 8년 동안

그림을 그렸다. 그는 경멸당했고 조롱받았으며

몰이해의 차가운 시선 속으로 던져졌다. 그의 그림에

관심을 갖는 사람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림을

그렸다. 그는 응시했고 깨달았다. 그리고 그림은

그를 응시했다. 자화상에서 그는 인간을

좇았고 몰아붙였다. 자신을 던져버린 순간,

그는 비로소 자신을 되찾았음을 깨달았다.

 

빈센트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신했고, 순수한 감성의

덩어리 속에서 희망을 그렸다.

쇄도하는 빛에 흔들리지 않는 그의 두 눈은 무언가를

확신하는 것 같았다. … 화가는 '인간'을 그렸다.

그리하여 그가 그린 자화상의

이면에는 운명을 향한 비극적이고 보잘것없으며

피할 수 없는 여정이 담기게 되었다.

자화상, 파리, 1886년.

자화상, 파리, 1887년.

자화상, 파리, 1887년.

회색 펠트 모자를 쓰고 있는 자화상, 파리, 1887년.

밀짚모자를 쓰고 파이프를 물고 있는 자화상, 아를, 1888년.

자화상, 아를, 1888년.

귀에 붕대를 감고 있는 자화상, 아를, 1889년.

자화상, 생레미, 1889년.

 

차례

 

제1장 불확실함과 고독

제2장 전도사와 스케치

제3장 가난과 초상화

제4장 노란색을 찾아서

제5장 발작 속의 한 가닥 빛

기록과 증언

그림목록

찾아보기

 

파스칼 보나푸 Pascal Bonafoux

파스칼 보나푸는 1949년에 출생했으며, 작가이자 미술사학자이다. 1980년과 1981년에는 메디치 별장에 기거하면서 박사학위 과정에 필요한 연구를 하였는데, 그가 택한 '서양화에서의 자화상'이라는 주제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미술사를 섭렵할 수 잇게 해주는 대단히 매혹적인 주제였다. <화가와 자화상> <렘브란트 자화상> <인상주의 화가들, 초상화와 뒷이야기들> <빈센트가 그린 반 고흐>와 같은 초상화에 대한 저술을 주로 남겼고, <중상>이라는 소설도 발표했다.

 

옮긴이 : 송숙자

1951년 서울 출생. 한양대학교 음악대학을 졸업한 후 파리에서 불어연수를 받았다. 현재 불어 및 영어 동시 통역관으로 일하고 잇으며, 전문 번역가로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잇다. 번역서로는 <새를 위하여> <현대 화가 비평선> <아방가르드와 노총각들> 등이 있다.

기숙학교에서 외로운 시절을 보내던 열세 살 때의 빈센트.

 

제1장

불확실함과 고독

 

1853년 3월 30일,

그루트 준데르트의 장로교 목사 사택에서는 사람들이 기대감에 들떠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다.

테오도루스 반 고흐 목사의 부인 안나가 이제 막 아이를 낳으려는 참이었다.

1년 전 같은 날 그녀는 빈센트 윌렘이라고 이름지어 준 아기를 사산했는데, 이날 새로 태어난 아기 이름도 똑같이 빈센트 윌렘 반 고흐라고 지어 주었다.

브라반트 북쪽에 있는 빈센트의 생가.

빈센트의 부친 테오도루스 반 고흐. 검소한 칼뱅파 목사로 평생을 바쳤다.

빈센트의 모친 안나 코르넬리아 카르벤투스.

빈센트가 어렸을 적에 그린 작품이 몇 점 남아 있으나 그 작품들에서는 빈센트의 천재성을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천재성은 뒤늦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1862년에 그린 이 그림은 아홉 살 된 소년의 솜씨로는 놀랄만한 재능을 엿보게 해 과연 그의 작품인가 하는 논쟁이 일었다.

열여덟 살 때의 빈센트.

<물에서 탄생하는 비너스>라는 이 작품에는 "1808년에서 1848년까지 앵그르가 그린 작품"이라고 쓰여 있다. 작품을 처음 시작한 지 40년 만에 완성한 것이다.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린 스케치로서 램스게이트에 있는 스톡스의 학교 교실에서 바라본 전경이다.

"최근에 런던의 모습을 묘사한 도레의 그림을 보았는데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였소. 그리고 걸인들의 야간숙소를 묘사한 그림에서는 고결함마저 느낄 수 있었다오."

라파르트에서

1882년 9월

빈센트가 찬미했던 작품으로 램브란트가 1648년 그린 <엠마오집에서의 성찬>. 그가 이 그림을 유난히 좋아했던 것은 이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신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고 또 램브란트를 신을 증거해주는 화가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작품은 언제나 변함없이 고귀하고, 더할 나위 없이 위대하며, 영원으로 승화되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시적인 차원에서 작업하고 스스로 시인이었던 램브란트는 자연에 충실한 작업 이상의 것을 이루었던 창조자였다."

1876년 11월에 쓴 편지 여백에 빈센트가 펜으로 스케치한 아이슬워스에 있는 피터햄 교회와 턴햄 그린 교회.

루벤스의 영향을 받은 렘브란트의 1633년 작품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그러나 루벤스와 달리 렘브란트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의 묘사보다는 거친 듯한 사실주의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빈센트는 렘브란트의 그런 기법을 무척 좋아했다.

1884년 작품 <누에넨교회를 나서는 사람들>.

 

제2장

전도사와 스케치

 

빈센트의 믿음은 승리를 거두었다. 신앙심에 불타던 빈센트는 부친과 조부를 따라 목사가 되기로 했다.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암스테르담에 있는 신학대학을 졸업해야 했고, 따라서 오랜 동안 고된 입학시험 공부를 해야 했다. 반 고흐 목사는 아들에게는 헌신적이었으나 빈센트의 공부를 위한 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빈센트가 하려는 일이 가문의 전통을 잇는 일이라고 판단한 숙부들은 암스테르담에 온 빈센트를 반갑게 맞이해 주고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1857년 5월 1일 그루트준테르트에서 태어난 테오는 빈센트의 유일한 형제였다. 그는 끊임없이 빈센트를 돌보아 주면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주었다.

1827년 해군 장교였던 요한네스 숙부는 얼마 전에 부인을 잃고 조선소와 가까운 곳에 있는 대저택에서 홀로 살고 있었다. 성인이 된 자녀들을 모두 떠나 보낸 숙부는 조카인 빈센트가 집에 거처하면서 신학대학 진학을 위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1878년 4월 30일 테오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와 함께 보낸 스케치로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암스테르담 인근의 전원풍경을 서투르게 묘사한 풍경화이다.

1879년 여름, 빈센트가 보리나주에 체류할 때 그린 <어깨에 삽을 메고 있는 사람>. 1880년 9월 24일 빈센트는 테오에게 다음과 같이 적어 보냈다. "광부나 방직공은 아직도 다른 사람들과 다른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많은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 언젠가 이들의 모습을 그리게 되고 그로 인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질 수가 있다면 매우 행복할 것이다. 깊이 좌절한 이 사람은 광부이다. 그리고 꿈꾸는 듯한 분위기, 조금은 생각이 없는 듯이 보이며 거의 몽유병자와 같은 사람들은 옷감을 짜는 사람들이다. 나는 이들과 2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살아오면서 그들의 독특한 성격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1878년 11월 빈센트가 그린 <채탄광>이다. 이곳은 광부들이 자주 드나들던 주막집으로 예인선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빈센트가 거주하던 샤를드쿠룩이라는 광부의 집으로 작자는 미상.

1881년 4월 빈센트가 스케치한 <귀가하는 광부들>. 피로에 지친 이들의 모습은 단순히 선택한 그림의 주제라기보다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생활하면서 매일 그가 목격했던 삶의 실상이었다.

1885년 10월 그린 <성서가 있는 정물>. "마네의 습작에 관한 너의 이야기의 답장으로 검은 바탕에 가죽 제본이 되어 있는 성경이 펼쳐진 정물을 보낸다. 앞면 배경은 황갈색과 레몬빛으로 처리했는데 어느 날 단숨에 그린 것이다."

"매우 긴 시간 동안 외로움이나 걷는 자유조차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은 분명 오랫동안 굶은 것만큼 고통스러울 것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가정, 우정, 애정 그리고 우정어린 교감의 필요성을 실감하고 있다. 나는 소화전이나 가로등과 같이 금속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현명하고 인격을 갖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공허감과 무엇인가 결핍된 감정을 가지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네가 나를 찾아와 준다면 얼마나 기쁘겠니. 그러면 내가 이야기하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 둘이 서로 이질적인 느낌을 갖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족들과도 소원해지지 않을 수 있겠지. 그러나 당분간은 가족과 함께 있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이곳에 더 머물러 잇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

테오에게

1879년 10월 15일

1859년 쥘 브레통이 그린 <이삭 줍는 여인들>. 빈센트에게 브레통이 중요하게 생각되었던 것은 그가 다른 화가들처럼 고대역사, 신화 등을 주체로 선택하기보다는 농민들을 주로 그렸다는 점에서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빈센트는 자신이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 스케치를 그려 보냈다.

"눈이 오는 날 아침. 어슴푸레한 새벽 가시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선 오솔길을 따라 갱도로 향하는 석탄 줍는 여인과 남자의 모습을 서투른 솜씨로 스케치해 보았다. 배경에 희미하게 하늘로 치솟은 거대한 건물은 광산 건물이다."

테오에게

1880년 10월 20일

"눈이 오는 날 아침. 어슴푸레한 새벽 가시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선 오솔길을 따라 갱도로 향하는 석탄 줍는 여인과 남자의 모습을 서투른 솜씨로 스케치해 보았다. 배경에 희미하게 하늘로 치솟은 거대한 건물은 광산 건물이다."

테오에게

1880년 10월 20일

빈센트가 반복해서 그린 광부들은 여러 해 뒤 에밀 졸라가 쓴 《제르미날》이라는 소설의 주제가 되었다.

 

제3장

가난과 초상화

 

1880년 10월, 빈센트는 스물일곱 살이 되었다. 그는 구필 화랑 브뤼셀 지점 책임자인 슈미트를 찾아가서 화가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슈미트는 한때 구필 화랑에서 일했던 빈센트를 정중하게 맞았으나, 예술가로서의 뒤늦은 출발에 회의를 가졌다.

"팔레트를 하나 쓰는 것이 작업하기에 더 편리하고 색깔도 훌륭하게 만들어 낼 수 있다.

오랫동안 빈센트는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인물화'라고 불렀던 그림만을 그렸다. 그 속에는 사람들의 외모보다는 움직임과 자세가 일하는 모습을 통해 묘사되었다. 1882년에 그린 <울고 있는 노인>은 노인의 초상화가 아니라, 한 남자의 절망을 그리고 있다.

연필 스케치에 그림물감을 가미한 <피로>는 한때 라파르트가 가지고 있던 것으로 벽난로 앞에 앉아 있는 병든 노인의 모습이 담겨 있다.

빈센트는 자신이 쉬지 않고 스케치하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다 스케치를 해 넣곤 했다.

1881년 사촌 모베의 화실에서 지도를 받으며 그린 <양배추와 나막신>. 빈센트가 처음으로 그린 유화작품이다.

안톤 모베는 헤이그파(派)를 이끄는 화가 중의 하나였다.

안톤 모베가 1876년에 그린 <슈베닝겐 해안의 고기잡이배>. 빈센트도 헤이그에서 멀지 않은 이곳에서 해변가의 배와 어부를 정기적으로 그렸다.

1882년 4월 헤이그에서 그린 <위대한 여인>. 작업 중 빈센트는 테오에게 이렇게 적어 보냈다. "동봉한 그림은 큰 작품에서 간결하게 스케치한 것이다. 토머스 후드가 지은 시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자신이 부자임을 부끄러워하면서 밤잠을 못 이루는 부잣집 여인 이야기가 나온다. 그 여인은 옷을 사러 나갔다가 비좁은 방에서 결핵에 시달려 창백하게 여윈 여자 재봉사를 보았다고 한다. 한마디로 이 그림은 고민에 싸여 잠들지 못하는 창백한 여인의 모습을 그렸다.

1886년 빈센트가 석고상을 모델로 그린 그림.

빈센트는 동거하던 크리스틴의 아이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크리스틴은 1882년 7월 2일 윌렘이라는 아이를 낳았고 이 아이 외에도 다섯 살 된 윌렘미나라는 딸이 있었다. 1883년 3월 요람에 있는 아기와 소녀를 스케치했다. 당시 빈센트는 어린아이들을 보면서 자신의 평생 꿈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화실에는 아기요람과 어린이용 의자가 하나 있다. 이제 우울한 분위기란 찾아볼 수 없다. 생명력과 활기가 충만한 집안은 청결하고, 명랑하며 밝고 쾌활하다. 꼭 필요한 가구와 침구, 그림에 필요한 재료가 모두 구비되어 있다. 물론 네 도움이 없었다면 새 화실을 마련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네 덕분에 더 열심히 작업할 수가 있다."

1882년 10월에 그린 <교회 안에서>. 빈센트가 복음전파를 소망했던 신자들이 모델이 되어 주었다.

1882년에 그린 <비탄>. 얼굴을 파묻은 나체의 여인. 크리스틴은 잔뜩 웅크리고 있다. 빈센트의 가족은 크리스틴을 받아 주지 않았고 빈센트도 어쩔 수가 없었다. 빈센트가 이 작품에서 시도했던 것은 사실주의적 기법이 아니라 상징과 신화적인 특성이었다. 그는 <비탄>이 알브레히트 뒤러의 <서글픔>에 비견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드렌테에서 빈센트는 자연을 화폭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1883년 9월에 그린 <농가>(위). 이보다 한 달 먼저 제작한 어부(아래).

밀레가 1857년에 그린 <만종>.

"밀레는 모든 면에서 귀감이 된 젊은 화가들의 아버지이다. 나 역시 그에 동의하고 단순성에 대한 그의 신조를 믿는다."

테오에게

1885년 4월

1883년 10월에 제작한 <토탄을 채취하는 여인들>. 드렌테에 머무는 동안 빈센트가 사용했던 어두운 색체가 두드러져 보인다. 빈센트의 목표는 그림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화폭에 담는다는 것, 또 그들을 위해 그린다는 것이었다.

<누에넨 농촌여인의 얼굴>(1885년, 위)과 <바느질하는 농촌여인>(1885년, 아래). 어느 날 그림을 그리기 위해 밖으로 나간 빈센트는 그루트라는 농부의 집을 지나게 되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려고 그 집에 들어갔을 때는 가족이 식사를 하려는 참이었다. 빈센트는 섬광과 같은 신비감을 느꼈다. 빈센트는 보리나주에 있을 때부터 '평범한' 인간의 비극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단순한 품성에 깊이 매혹되어 왔다. 그는 즉시 '이 평범한 노동자'를 그려 나갔다.

"이번 주에는 저녁 또는 낮, 아니면 밤낮을 동시에 해도 상관없겠지만 감자 접시를 놓고 둘러앉아 있는 농촌사람들을 그려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성공할지 혹은 실패할지 알 수는 없지만 각기 다른 형태로 스케치를 시작할 예정이다."

테오에게

1885년 4월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처음 스케치할 때부터 빈센트는 오두막 내부의 어둠이 주는 뉘앙스를 강조하고 싶었다. 정신적 기둥인 렘브란트와 할스가 이룩했던 것처럼 어둠을 만질 수 있는 구체로 형상화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램프 불빛 아래서 감자 접시 하나를 두고 감자를 집어 먹는 사람들을 강조하고 싶었다. 몸소 일하면서 정직하게 식량을 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 보고 싶었다."

테오에게

1885년 4월

"프란스 할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어 얼마나 즐거운지 모르겠다. 그것은 다른 화가들의 작품과 전혀 다르다. 작품 곳곳이 세심하게 다듬어져 있다." 빈센트가 암스테르담에서 보았다는 그림은 사실 <행복한 주정꾼>(부분,)이라는 작품은 아니었지만 이와 비슷한 할스의 그림이었다.

<추수하는 사람>(1885).

"내 자신이 농민화가라는 생각이 틀림없는 사실로 느껴진다. 너 또한 언젠가는 내 생각에 동의할 것이다. 광부나 토탄 채취꾼, 농부, 직조공의 집 난롯가에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저녁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다. 물론 생각하기조차 피곤한 때는 그렇지 않지만 말이다.

테오에게

1885년 4월

<선착장>(위), 앤트워프 인근 로이어 제방 아래쪽을 묘사한 1885년 작품이다. 이 그림을 그릴 때만  하더라도 빈센트는 색체에 많은 관심을 두지 않아 그가 사용하는 색체는 흐릿한 중간 색조에 머무르고 있었다. <뒤에서 본 집>(아래)은 앤트워프의 집을 그린 것으로 이때부터 밝은 색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화실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낡은 집의 뒷부분을 밝은 색조로 처리했기에 빈센트의 전체 작품목록을 만든 파유조차 이 그림을 파리 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착각했다. 어두운 색조로 그린 <감자 먹는 사람들> 이후로 빈센트는 차츰 밝은 색채를 사용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탬버랭이라는 선술집에서 빈센트가 그린 아고스티나 세가토리의 모습.

 

제4장

노란색을 찾아서

 

1886년 2월 20일, 테오는 몽마르트 거리 19번지에 있는 구필 화랑에서 빈센트가 보낸 짧은 전갈을 받았다. 그 내용은 빈센트가 파리에 막 도착했으며, 루브르에 있는 살롱 카레에서 가능한 한 빨리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빈센트가 그처럼 서둘러 파리에 온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테오와 같이 생활하면 생활비를 절약할 수가 있고, 다른 한 가지는 코르몽의 화실에서 그림수업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클러시 거리. 정원과 포도밭에 둘러싸인 몽마르트르의 풍차 그리고 파리의 지붕은 빈센트가 즐겨 그렸던 소재이다.

1886년 상반기나 1887년 여름 파리에서 그린 자화상.

코르몽이 작업하고 있는 캔버스 뒤에 모자를 쓴 툴루스 로트렉이 앉아 있다. 학생들, 뒤편에 에밀 베르나르의 모습이 보인다.

빈센트는 1887년 코르몽의 아틀리에에서 로트렉을 만났다. 로트렉이 파스텔로 그린 빈센트의 초상화. 두 사람은 화실과 카페에서 우정을 나누었다.

존 러셀이 유화로 그린 빈센트의 초상화.

1887년 봄. 빈센트는 레픽거리에 있는 화실에서 바라본 전경을 묘사했다.

당시 인기 있던 일본파의 화풍은 빈센트를 매료시켰고 그의 스타일에 큰 영향을 주었다. <배우>.

빈센트가 정기적으로 베르나르를 만나러 가곤 했던 아니에르는 인상주의 화가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의 발자취를 따라 빈센트도 1887년 여름 이곳에 이젤을 세우고 <아니에르 강변 도로>를 그렸다.

1887년 여름 파리에서 그린 자화상 습작 중 하나이다(왼쪽 위는 본래 잘려져 나갔다).

빈센트는 아를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주제인 전원풍경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아를의 밀밭>(위)과 <추수>(아래)에서는 빛의 처리와 색체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제 색채와 빛이 충만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1888년 4월과 5월 사이에 그린 <꽃이 핀 과수원>. 프로방스에서는 과일나무들이 일찍 꽃을 피웠다. 빈센트는 새로운 환경에 매혹되어 흐드러지게 꽃이 핀 편도나무, 벚나무, 복숭아나무들을 풍부한 색채로 완성했다. 모베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베를 회상하며'라는 글을 써 넣은 작품도 이것과 유사하다.

1888년 9월에 그린 아를에서 빈센트가 살았던 집. 이 집은 단순히 작업하는 공간이 아니라, 다른 화가와 생활하면서 미래의 그림을 완성하겠다는 그의 꿈을 실현시켜 준 곳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 1888년 9월 18일부터 1889년 2월 9일까지 반년도 채 살지 않았다.

"오늘 나는 이 건물의 오른 채에 세 들었다. 방이 네 개 있는데 두 방에는 캐비닛이 갖추어져 있다. 볕이 잘 드는 이 집의 외부는 노란색, 내부는 흰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월세는 15프랑이다. 2층 방을 침실로 만들어 그곳에서 잠들고 싶다. 밖은 노란색, 안은 흰색, 햇빛을 한껏 받으며 캔버스를 마주할 수 있다니 운이 좋은 것 같다."

테오에게

1888년 5월 1일

빈센트가 1888년 12월에 그린 <고갱의 의자>는 고갱의 부재에 따른 빈센트의 후회와 절망을 나타낸다.

1888년 10월에 그린 <빈센트의 침실>은 후에 빈센트가 병원에 있는 동안 두 번이나 복제했던 그림으로 노란 집에서의 행복했던 시절의 상징이기도 하다.

5년이라는 세월 동안 빈센트의 화법은 완전히 변화했다. 슈베닝겐 시절 그는 색채가 없는 윤곽을 선호했다. 그러나 1888년 6월 생트마리 해안에서 그린 <해변가의 고기잡이배>에서는 색채가 그림에 윤곽을 주고 잇음을 알 수 있다. 위에 보이는 스케치는 같은 해 편지에 그려 넣은 것이다.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마다 빈센트는 작업중인 그림의 스케치를 그려 넣곤 했다. 1888년에 완성한 <생트마리 거리>의 스케치를 보낼 때에는 테오가 이해하기 쉽도록 색채계획을 삽입해 넣어 눈길을 끈다.

<밤의 카페 테라스>. 1888년 9월, 빈센트는 램프와 밤하늘의 별 따위 모든 종류의 빛을 이용하여 작품의 빛을 창조하고 싶어했다.

빈센트가 아를에 체류하던 시절 유일한 친구였던 조제프 롤랑을 그린 <우체부 롤랑>. 1889년 1월과 2월에 여섯 차례나 그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자화상에서 고갱은 자신을 장 발장처럼 고귀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지닌 모습으로 묘사하고 싶어했다.

해바라기는 빈센트의 상징이었다. 빈센트는 1888년 8월 28일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더욱 단순한 기법으로 <해바라기>를 그리고 있다고 썼다. 오랜 동안 빈센트가 남긴 열 점의 <해바라기>에서 단순미를 발견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1987년 그중 한 점이 4천만 달러에 팔렸다.

<해바라기를 그리고 있는 빈센트>. 1888년 11월 고갱작. 이 그림을 보고 빈센트는 "영락없는 내 모습이다. 그런데 광인의 모습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귀를 자른 지 불과 한 달 후, 1889년 1월에 그린 자화상(위). 빈센트는 광기를 다스리기 위해 다시 그림을 시작했다. 빈센트가 귀를 자른 소식을 다룬 1888년 12월 30일 자 《공화주의자 소식》(아래).

오베르에 있는 교회. 1890년.

 

제5장

발작 속의 한가닥 빛

 

1888년 12월 25일. 최악의 날이 오고야 말았다. 심한 정신착란 증세로 고통을 받고 있던 빈센트는 아를 시립병원 독방에 감금되었다. 파리에서 형의 소식을 듣고 서둘러 아를에 온 테오도 기진맥진해 있었다. "별다른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가 이렇게 죽어 가야 할 운명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지는 듯 고통스럽다."

꽃이 핀 가지의 스케치.

1889년에 그린 <아를요양원 정원>. 시립병원의 의사들은 빈센트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가 '감금되기' 전까지 짧은 기간 동안 그는 병원 정원을 즐겨 다루었다.

빈센트가 아를에서 치료를 받던 시절에 찍은 닥터 레의 사진(아래). 병원에서 퇴원하고 나서 빈센트는 닥터 레의 초상화를 그려 주었는데 닥터 레의 모친은 그 초상화를 무척 싫어해 닭장 울타리에 난 구멍을 막는 데 사용했다.

1890년 5월 작품 <양손에 얼굴을 묻고 있는 노인>(아래). 이보다 8년 전에 빈센트는 헤이그에서 울면서 앉아 있는 한 노인을 스케치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버림받은 노인의 모습을 빈센트가 끊임없이 주제로 삼은 것은 자신의 혼란과 처지를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켜 준다. 위의 그림은 생레미 요양원의 광고이다.

생폴 드 무솔 요양원의 모습으로 현관(위), 빈센트의 방(가운데)과 창문(아래)이다.

1890년 4월에 그린 <양귀비 밭>. 색채가 형태를 구성하면서 빛과 공간감을 전달해 준다.

1889년 생레미 요양원에서 찾아낸 소재를 그린 <붓꽃>이다. 그림을 그리는 작업은 그의 환각증세를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889년 9월에 그린 <별이 빛나는 밤>. 아를에 머무는 동안 빛의 힘을 발견했던 빈센트에게 이 작품은 그의 예술에 향한 도전이었고 꿈의 실재화였다. 그보다 1년 전에 테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도시와 마을을 상징하는 지도의 검은 점들이 나를 꿈꾸게 만들듯이 별은 나를 꿈꾸게 한다. 타라스콩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하듯이 별들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죽음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1890년 1월에 그린 <낮잠>. 생레미 요양원에서 외출을 금지당한 채 모델을 구할 수 없었던 빈센트는 심리적인 압박감을 견딜 수가 없었고, 렘브란트, 들라크루아, 도레 등과 같은 대가들의 작품을 모방했다. 이 작품은 라비에유가 밀레의 <오후 4시>라는 작품을 판화로 제작한 것을 보고 그린 그림이다.

프로방스에 머물던 마지막 시기에 그린 실편백나무. 이곳에서 빈센트는 아를에서 집중적으로 그렸던 과일나무 대신에 이 나무를 즐겨 그렸다.

"그것은 햇빛 찬란한 풍경에 찍혀진 검은 얼룩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상상해 낼 수 있는 가장 흥미롭고 어려운 검은 점이다. 이것은 파란색 바탕,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파란색 속에서 보아야 한다."

"실편백나무는 언제나 나를 사로잡는다. 해바라기를 그리기 위해서 그랬던 것처럼 실편백나무를 그리기 위해서 캔버스를 만들어야겠다. 그 이유는 실편백나무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처럼 놀랄 만한 균형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품위있는 푸르름이란……."

테오에게

1889년 6월 25일

1890년 6월 오베르에서 그린 <닥터 가셰의 초상>. 가셰는 흥미로운 인물이었으나 빈센트는 그를 절대적으로 믿지는 않았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친구였던 그는 피사로, 세잔을 비롯해서 많은 화가들을 자신의 집에 초청하여 머물도록 했다. 가운데 판화는 가셰가 직접 제작한 것이고, 위의 것은 테오에게 보낸 편지의 스케치이다.

1890년 7월에 그린 <오베르 들판>. 오베르에 머무는 동안 끊임없는 창작열은 그를 괴롭혔다. 당시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5월 21일과 7월 23일 사이에 수십 점의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 작품 가운데에는 뛰어난 것도 있다. 닥터 가셰와 그의 딸, 라부의 딸 초상화, 인물없는 풍경화 등이 그것이다.

1890년 6월에 그린 <오베르성>. 지난 100년 동안 이곳의 풍경은 현저하게 변화되었다. 그러나 막상 빈센트가 이젤을 세웠던 장소들을 찾아가 보면 빈센트가 그림에서 묘사했던 모습과 유사하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1890년 7월에 그린 <푸른 하늘과 흰구름>. 빈센트의 후기 그림에 영향을 준 일 드 프랑스의 하늘은 프로방스의 청명한 하늘과는 대조적으로 구름이 많이 끼어 있었고 끊임없이 변화했다. 빛 속에서 감도는 작은 회색 구름은 빈센트가 좋아했던 코로와 부댕의 그림에서 묘사된 그것과 연관성이 있다.그러나 빈센트는 배가 앞으로 항해해 나가듯이 구름이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 즉 사슬처럼 연결하는 형태로 묘사했다.

1890년 오베르에서 그린 <초가집>. 빈센트가 오베르에 도착한 해 5월 21일, 빈센트는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림에 묘사된 장소에 대해 "이곳은 매우 아름답다. 그중에서도 특이한 것은 요즘 점차 찾아보기가 어려운 초가집이 많다는 것이다." 이어 "아름다움이 깊이 배어 있는 이곳을 그림으로 그려 보고 싶다."라고 쓰고 있다. 빈센트는 그림의 소재가 될 만한 곳을 찾아 오베르 전역을 누비고 다녔다. 오아즈 제방에서 해가 저물기 전까지 "낡은 초가지붕과 완두콩밭, 꽃이 피어 있는 앞마당, 그리고 밀밭이 있는 뒤편 언덕 등을 묘사한" 그림을 그렸다.

1890년 오베르에서 그린 <까마귀가 있는 보리밭>. 빈센트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서신에서 그러한 사실을 증명할 만한 내용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지방 신문에 게재되었던 빈센트의 사망 기사. 빈센트가 세상을 떠난 후, 1년이 지나지 않아 그토록 형을 사랑했던 테오도 우트레히트에서 세상을 떠났다. 1914년 테오의 화장된 유해는 오베르에 옮겨져서 형의 무덤 옆에 안치되었다.

1888년 10월 테오에게 보낸 스케치가 그려진 편지.

빈센트가 살아있던 마지막 몇 주일 동안 노트에 연필로 그린 스케치.

1889년 작품으로 고갱의 자화상.

 

 

1878년 7월 빈센트가 그린 에텐과 그 주변 지역 지도.

드니의 집.

누에넨에 있던 목사관.

파리 레픽 거리에 있던 화가의 아파트.

1887년부터 1888년까지 빈센트가 아를에서 살았던 집.

제2차 세계대전중에 파괴된 아를의 랑글로아 다리.

생레미 드 프로방스에 있던 생폴 드 무솔 요양원.

빈센트가 그린 요양원 정원.

생레미 드 프로방스 요양원 정원.

오베르에 있는 카페를 겸한 집으로 이곳에서 빈센트가 세상을 떠났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