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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28. 11:00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110 사탄과 약혼한 마녀

 

장-미셸 살망 지음, 은위영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26

 

082

시158ㅅ  21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21

 

Les sorcieres, fiancees de Satan

 

15세기 말부터 서구에는 마녀 사냥의

물결이 거세게 몰아닥쳤다. 행실이 나쁘다거나

무언가 의심쩍은 구석이 있는 사람은, 특히나

여자일 경우 어김없이 화형장의

불길 속으로 던져졌다. 이처럼 유럽을

광기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마녀 사냥의 배후에는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종교적 갈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인쇄술의 발달도 여기에 한몫을 했다.

악마론의 연구서들이 전 유럽으로 급속히

전파되었던 것이다.

 

"태생을 보면,

마녀에게는 배우자도 가족도 없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운석(隕石)같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괴물. 누가 감히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으리.

마녀는 어디 있는가. 접근이 불가능한 지 어느 곳,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얽히고 설킨 광야의 한끝이 아닐까.

혹은 한밤중 선사의 어느 고인돌 아래쯤,

그녀가 거기 있다 한들, 그녀는 여전히 혼자,

그러니 두렵지 않을 자가 누가 있나.

사나운 불길이 그녀를 에워싸고 있다고는 하지만

누가 이를 믿으랴. 그녀는 그저 한 여인일 뿐인데,

거칠고 무서운 삶이라 한들 그녀가 여자임을

잊게 할까, 여인의 본성을…….

 

모든 것은 사탄에서 비롯하나니, 살아 숨쉬며

저주하는 마녀들이란 사탄의 보금자리.

사람들은 마녀가 두렵다 말들 하지만, 마녀가 없다면,

그들은 권태로움에 죽을 것임을 고백해야 하리."

 

쥘 미셀레(Jules Michelet), <La Sorciere>

 


|차례|

 

제1장 마녀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제2장 마녀사냥

제3장 무자비한 사법장치

제4장 마법인가, 마술인가?

제5장 마법의 몰락

기록과 증언

그림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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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 미셸 살망 Jean-Michel Sallmann

1950년 1월에 태어난 장-미셸 살망은 파리 제10대학에서 근대사를 가르치고 있으며, 근대 이탈리아의 종교 · 문화사를 연구하고 있다. 이단 재판을 통해 16세기의 주술을 연구하며, <보물 탐색자와 운명의 장난꾼 : 16세기 나폴리의 초자연 현상에 대한 연구>(1988)를 출간한 바 있으며, 현재는 카톨릭교회 개혁기에 있어서 나폴리 왕국에 나타난 성인(聖人)과 성녀(聖女)에 관한 저서를 준비하고 잇다.

 

옮긴이 : 은위영

1964년 전주 출생.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파리 제10대학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번역서로는 <지식과 권력> 등이 있다.

 

제1장

마녀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마법은 암흑의 시대에만 존재하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마법은 세계와 세계를 움직이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을 표상하는 인식양식이다. 마녀들의 집회, 마법의 의식, 이단재판 그리고 화형은 시작과 끝을 가진 하나의 역사이며 아직도 인간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화가이며 조각가인 한스 발퉁 그린은 중세 말엽, 최초로 마녀사냥에 참여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악마에 대한 신화가 남부 독일에서도 비롯되었음을 보여 준다.

종교재판의 희생자들은 산베니토(sanbenito, 지옥의 옷)를 걸치고 화형대에 올랐으며 사람들은 처형 직전 산베니토를 벗겨 냈다. 또한 자손만대에 이르기까지 그 죄과를 미치게 한다는 의미에서 교회 입구에 그들의 이름과 함께 그들이 입었던 속옷을 내걸었다.

15세기 말과 16세기 초에 자행된 스페인 종교재판은 그 잔인함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렇지만 이 탄압의 주요한 희생자들은 개종한 유대인과 무어인 그리고 이교도 들이었다.

베로나 공회(公會)의 발표에 따르면, 보두교는 1184년 이래 프랑스, 이탈리아, 현재의 스위스 영내, 그리고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계속해서 전파되었다고 한다. 보두교인은 1555년부터 보두아 지역 골짜기에 교회를 세웠으며 예배를 통해 개혁사상의 부흥을 꾀했다. 16세기 중엽에서 17세기 말까지 있었던 여러 차례의 탄압으로 푸예, 칼라브르, 피에몽 등지에서 많은 보두교인이 처형당했다.

《구약성서》의 초기 판본에는 '야훼가 천지만물의 창조주의자 선과 악의 주관자'라고 이른다. 그러던 중 사탄 -- 히브리어로는 적(敵)을 의미한다 --의 형상이 신의 형상에서 분리되어 원죄의 근원으로 그려진 것은 B.C. 6세기부터이다.

"14세기 후반의 불행 -- 기근, 페스트, 백년전쟁 거듭되는 내란과 반란, 교회의 대분열(교황의 아비뇽 유폐에 따라 1378년에서 1417년까지 지속된 카톨릭 교회의 분열을 말한다 : 역주), 오스만투르크의 군사적 위협 --에 처한 중세인은 무한한 혼란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불행의 원인을 인간성의 과도한 발현과 교회의 타락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은 뒤범벅된 것처럼 보였으며 결말은 최후의 심판일 것이 분명했다."

J. 들뤼모

《원죄와 공포》

부르고뉴, 프랑슈콩테, 플랑드르, 아르투아의 군주 필리프 르 봉.

중세 말, 기독교는 신과 악마라는 모순된 관념 속에 부유(浮游)하면서 이원론적 특성을 드러냈다. 실제로 악마가 인간의 몸 속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마법사는 주문을 외워 바람을 일으키고 우박을 내리게 하고 미래를 예언하며, 어떤 사람으로부터 과실과 젖을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줄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이보다 놀라운 일도 얼마든지 행할 수 있다고 사람들은 전한다. 그러므로 남자든 여자든 죄인으로 판명될 경우에는 지체 없이 계율 속에 묶어 넣어야 하며, 군주는 반드시 그들을 처벌해야 한다."

《게르만 고적사》

제사에서 어린아이를 희생양으로 삼는 전형적인 제의적(祭儀的) 살인행위는 로마 군대가 기독교인과 충돌할 때 이미 저질러졌다. 기독교인은 곧 이어 유대인으로 대치되엇으며 나중에는 이교도와 마법사가 그 표적이 되었다. 13세기부터 프랑스 국왕은 여러 가지 조직적인 수법을 동원해 영토 내에 거주하는 유대인 추방을 번번히 자행했다. 이것은 종교적 열정에 따른 행위이기도 했지만, 그 배경에는 재정상의 필요성이 깔려 있었다.

근대에 주술이란 농촌사회의 특이한 현상이며 농민세계의 취약성을 표현해 준 것이었다. 흉작, 자연재해, 전염병의 원인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재물은 바로 마녀였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 가운데 플랑드르 지방의 농촌에 닥친 변화와, 농촌경제에서 목축이 갖는 중요성을 브뢰겔만큼 잘 보여 주는 화가는 없다.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플랑드르에서도 가축은 마법의 주요한 표적이 되곤 했다.

"악마의 환상과 헛것에 홀려 늘 사탄을 찾아다니는 악녀들이 확신에 차서 숨김없이 고백한다. 한밤중에 말을 타듯 동물들을 타고 이교도의 여신 다이에나, 그리고 숱하게 많은 다른 여자들과 함께 한밤의 죽음 같은 정적을 뚫고 수많은 제국들을 가로질러 간다고, 다이애나가 그들의 주인이기라도 하듯이 그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며, 그녀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특별한 날 밤에 모인다고 한다."

《카농 에피스코피》

마법의 집회를 그린 상상화들은 마녀들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가를 선명하게 드러내 준다. 중세에는 이처럼 마법사들이 반종교(反宗敎), 곧 악마의 대리자이며 광신자로 비쳤다. 악마가 변신하는 형태 또한 다양하여 그리핀(Griffin, 독수리의 머리, 날개, 발톱에 사자의 몸을 지닌 괴수 : 역주), 인간의 머리를 가진 용, 염소, 두꺼비 또는 온갖 추악한 괴물로 표현되고 있다. 악마의 목적은 오직 카톨릭의 열성적인 신자들을 배교(背敎)토록 하는 데 있었으므로, 이 집회의 의식이 커톨릭 의식과 비슷하다고 해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새로운 신자들은 악마에게서 다시 세례를 받았으며, 악마와 사랑을 나누어 태어난 아이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의식을 지낸 다음 식탁에 올렸다.


제2장

마녀사냥


15세기 말부터 서구는 마녀사냥의 물결에 휩싸여 1580년에서 1670년 사이에 그 절정에 다다른다. 이 물결은 때로 극한을 달려 사회적 재앙을 부르게 된다.

"그리고 바라건대 마법사들의 원수는 바로 나임을 알라. 그들의 증오가 극에 달하면 달할수록 그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나 또한 증오가 커져 그들을 하나도 남겨 놓지 않을 것이다."

앙리 보귀에

《마법사를 저주함에 부쳐》

아바돈, 아스타로트, 마몬은 사탄의 무리를 형성하는 수많은 일당들 가운데 하나이다. 마술사들은 미래를 예측할 때 그들의 이름을 부르곤 했다.

마법 탄압에 개입한 세력은 카톨릭 교회만이 아니었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까지 영국의 성공회도 마녀사냥에 나섰다. 그러나 앵글로 색슨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악마에 대한 신화를 갖고 있지 않았다. 마녀들은 화형이 아니라 교수형에 처해졌을 뿐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시민법을 위반했을 뿐 종교적 죄악을 범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1529년 앙제에서 태어나 1596년에 사망한 장 보댕은 툴루즈에서 12년 동안 로마법을 강의했으며 그 자신 마법사로 의심받기도 했다.

바오로 3세의 재위기간(1534~1549)에는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1542년에 창설된 종교재판 성소(聖所)와 1545년에 소집된 트리엔트 공의회가 그것이다.

사법관들이 쓴 마녀사냥에 관한 논설들은 16세기 말, 사법관들이 악마신화에 대한 믿음에 집착했음을 드러낸다.

마법의 집회가 없이는 악마의 마법도 없다. 심문을 시작한 판사의 유일하고도 최종적인 관심은 마법사나 마녀에게서 마법의 집회에 참석했다는 자백을 얻어내는 것이었다. 자백은 곧 사형선고로 이어졌으며, 자백을 얻기 위해서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집회준비

 

한스 발퉁의 판화(1514년)들은 대단히 시사적이다. 무엇보다도 오디새와 박쥐의 피, 종(鍾) 부스러기와 검정가루가 들어가는 고약 또는 마법의 기름을 보자, 마녀들 가운데 하나는 마편초 불 위에 얹은 작은 솥에 약물을 끓이고 있고 다른 마녀들은 마법의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쇠스랑이나 양을 타고 구름 속으로 사라질 채비를 하고 있다. 준비가 다 된 기름을 쇠스랑에 바르며 무시무시한 봉헌 주문을 외운다. 한 마녀는 해골로 채워진 쟁반을 하늘로 들어올리고 있고 다른 마녀는 흡사 곡식이나 방울이라도 된다는 듯이 태아의 작은 두개골로 폭주로 만들어 늘어뜨리고 있다. 이어서 그들은 마법의 집회에 참석해 마법사들과 함께 짝을 짓는데, 보귀에의 말을 빌리자면 세상에서 제일 사악한 결합이다. "아들이 어머니를 가리지 않고, 오빠가 여동생을 가리지 않고, 아버지가 딸을 가리지 않는 ……. 그들이 거기에서 어떤 음란한 짓을 저지르는가 하는 것은 독자의 상상에 맡기겠다."


"고적한 여기 한밤중을 떠도는 은밀한 공포가 내 오감을 사로잡네. 기기묘묘한  천 가지 형상을 나는 보네. 또는 본다고 믿네. 어둠 속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에 기대어, 저기 마법의 집회가 열리네."

무명씨가 남긴 17세기 글

저주의 죄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희생양이 되었던 여자들은 마을공동체에서 아주 특별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약초의 비밀을 알고 있는 여인네가 종종 있었다. 긴장이 고조되고 마법에 대한 풍문이 떠돌기 시작할 때, 여인들이 지닌 특별한 능력을 두려워했던 대중들은 제일 먼저 그들을 의심했다.

마법의 집회에 참석한 세속의 두 여인(귀부인과 그 하녀)이 나타나는 이미지는 흔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가 갖는 특정한 의미는 둘째치고 배경으로 펼쳐지고 있는 악마숭배 의식은 더욱 자세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전문가들은 두 가지 가정을 설정했다. 첫번째 가정에 따르면, 그림의 악마숭배에는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Janus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두 얼굴을 가진 신. 특히 로마 신화에서는 가장 중요한 神性으로 추앙되어 그와 어원을 공유하고 있는 주피터보다도 더 귀한 경배대상이 되기도 했다 : 역자)에 대한 로마적 의식이 재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드 랑크르는 이러한 가정과 무관하게 다음과 같이 기술한 바 있다. "자네트가 이야기하길…… 그(악마)는 야누스의 그림에서 본 것처럼 겉얼굴과 속얼굴 두 개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두번째 가정에 따르면, 이는 일반 평민들의 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역전시킨 축제의 한 종류라는 것이다. 이 경우 위와 아래의 의미가 바뀌어 위(지배자)에 있는 것이 아래(피지배자)로 환치되고 또한 아래에 있는 것이 위로 환치되어 묘사된다.

16세기의 유럽에서는 출판물의 제작과 유통은 행정관청과 교회의 철저한 통제 아래 있었다. 1559년 바오로 4세는 최초의 금서목록을 배포했다. 후임자들 또한 선임자의 정책을 이어받아 금서의 기준을 더욱 엄격하게 적용했다. 1571년, 파이 5세는 금서를 선정하고 관리할 목적으로 아예 추기경 특별 성성(聖省)을 제도화했다. 금서는 특히 이단서적들을 뜻했다. 마법이나 마술에 관련된 내용은 어차피 인쇄물의 형태로 세상에 나온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탄압조치와 관계가 없었다.


제3장

무자비한 사법장치


16세기, 마법은 이단과 마찬가지로 신에 대한 불경죄로 여겼으므로 세속법정은 기꺼이 종교재판을 수행했다. 그 같은 선택이 의미하는 바를 추론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결국 시골의 한 농부가 올가미에 걸려들었을 때, 몸을 다치지 않고 올가미에서 빠져 나올 가능성은 희박했다.

마법사냥은 잔인한 이미지와 극적인 측면을 넘어서서 형사재판의 합목적성까지 의심하게 만들었으며, 중세 말에서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는 동안 소송절차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 영향은 프랑스 대혁명 전야에 이르도록 계속되었다.

마녀의 부름에 화답하여 나타난 악마의 형상.

마법은 당시까지 유럽인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세계에 대하여 그들이 투사한 온갖 유형의 환상을 배출하는 통로였다. 16세기의 독자들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나 장 드 망드빌의 《여행》을 읽으며 아직 공상에 잠길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대륙의 발견과 더불어 수평선이 확장되면서 유럽인의 이국취미는 그 내용을 달리하게 되었다. 마법은 객관적인 지식이 오랫동안 억압했던 이러한 환상의 한 부분을 내재화시킨 것이다.

신명심판 또는 '신의 심판'은 그 기원이 게르만의 침입과 유럽의 기독교화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엄연한 사법현실이다. 그것은 무고한 사람이 신에게 버림받을 리 없다는 원칙에서 출발한다. 마녀들을 물에 던져 시험하는 선악(善惡)판별법은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서구 역사에 음울한 기억을 남겼던 종교재판은 사실 대규모 마녀사냥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종교재판의 경험이 없는 영국에서 더욱 혹독한 탄압이 이루어졌다.

종교재판 기구

기원을 따져 볼 때 종교재판은 중의적(重義的)인 성격을 갖는다. 의식(意識)을 심판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인데, 이는 로마 법령에 기초를 두면서 또한 동시에 스페인 법령체계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 그 관할권의 상층부에는 최고평의회가 자리잡고 있다. 의장에 해당하는 최고재판관과 평의원들은 세속의 군주가 임명했으며, 약 15개의 지방재판소를 통해 그 권능을 행사했다. 각 재판소는 반(反)기독교적 범죄를 단죄하는 데 신학적 논거를 제공할 것을 임무로 하는 여러 판사들과 소추를 담당하는 검사들로 구성되었다. 그 밖에도 종교재판소는 여러 '우인(友人)'의 협력을 받곤 했는데, 이들은 종교재판소에서 무보수로 일하는 일종의 경찰관 구실을 했으며, 지역 유지들은 우인이 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신앙의 이름으로

종교재판은 중세 말엽부터 점차 형사심판 체계로 변해 갔다. 콜베르의 형사대심령(刑事大審令)은 이러한 변화를 프랑스 법령체계 내에 정식으로 수용하는 계ㅏㄴ에서 기가 되었다(1670년). 이 절차는 피고소인에게 가히 '악마적인' 것이어서 그는 자신의 죄목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세상과 격리되어 고문과 싸우면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야만 했다. 다만 마법의 혐의에 연루되어 있는 한, 구체적인 물적 증거를 확보할 것을 의무화한 콜베르의 법령은 사실상 증거 수집이 무척 힘든 이 부분의 재판에서 미미하나마 하나의 발전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판사와 검사의 역할이 거의 구분되어 있지 않은 것과 재판이 비밀리에 진행되며 변호사가 없다는 것, 그리고 여전히 고문이 자행되는 것은 예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이러한 재판절차가 프랑스에서 공식적으로 폐기된 것은 1780년에 이르러서였다. 그런데 당시는 이미 유럽 전역에서 고문이 자취를 감추고 있을 때였다.

"사람을 죽이는 대가로 악마는 마법사들에게 어떤 보상을 하는가……?" 자백에 따르자면 …… "그가 세상의 모든 재물을 약속했나니."

1679년 5월 29일에 부비니에서 화형당한 고귀용의 재판기록

개종하지 않는 이교도를 기다리고 있는 형벌은 태형과 징역, 팔다리를 꺾어서 바퀴에 매달아 죽이는 차형(車刑), 그리고 화형 따위였다. 마녀들의 경우에는 이런 방법말고도 훨씬 간단한 대안이 있었다. 그들이 고문을 이기고 마법의 집회에 참여했음을 부인하는 데 성공했다 할지라도 모든 의심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향에서 추방당하거나 마을공동체에서 퇴거당했으며, 이것은 마녀라는 손가락질이 따라다니는 한 또 다른 형태의 사형이었던 것이다.

"(마녀들은) 저주의 불길 위에 솥을 얹어, 사람의 몸이나 동물에서 채집한 여러 성분과 독초들을 끓인다."

툴루즈 종교재판소에서 심판받았던 안 마리의 증언

마법의 주술을 걸기 위해서는 교수형에 처해진 사람의 이빨을 사용하는 것이 즉효라는, 세간의 믿음을 풍자한 고야의 그림.

1560년에서 1670년 사이에 남서부 독일은 가혹한 마녀사냥의 한 시기를 보냈는데, 이때 최소한 3,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비젠타이크 마을에서는 1562년 한 해 동안에 63명의 여자가 마녀로 몰려 화형대 위에 올랐으며, 오베르마르히탈에서는 1586년과 1588년 사이의 3년 동안, 43명의 여자와 11명의 남자가, 곧 전체 인구의 약 7%가 마법과 관련되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1560년에서 1670년 사이에 남서부 독일은 가혹한 마녀사냥의 한 시기를 보냈는데, 이때 최소한 3,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비젠타이크 마을에서는 1562년 한 해 동안에 63명의 여자가 마녀로 몰려 화형대 위에 올랐으며, 오베르마르히탈에서는 1586년과 1588년 사이의 3년 동안, 43명의 여자와 11명의 남자가, 곧 전체 인구의 약 7%가 마법과 관련되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제4장

마법인가, 마술인가?

 

북유럽, 특히 종교개혁으로 신교를 수용한 국가에 인접해 있는 카톨릭교 신봉 지역에서는 불에 의지하여 마귀를 쫓는 의식이 성행했다. 악마적 마법론은 이단론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반면,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와 같이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비교적 적게 노출되었던 지중해 연안 국가들에서는 '운명의 장난꾼들', 다시 말해 마법사나 마술사가 악마와 계약을 맺은 자들로 의심받지 않았다.

제의적(祭儀的) 마술은 마법과 별도로 발달되었다. 16세기에 절덩에 달한 마술은 오직 비기(秘記)의 전수자들만이 알고 있는 방법을 이용해 신의 비밀을 캐려 했다는 점에서 진정한 그노시스(gnosis, 신학에서 말하는 영적, 신비적 인식 : 역주)였다.

연금술은 2세기와 3세기에, 헬레니즘 풍의 신비주의 인식론이 유행하던 알렉산드리아에서 처음 모습을 나타냈다. 아랍 세계가 서구에 연금술을 전해 준 때는 12세기이다. 연금술사들은 만병통치약이며 금속을 금으로 변하게 하는 화금석(火金石)을 발견하기 위해 애썼다.

1583년, 전유럽에는 화금석의 비밀을 알아냈다는 소문이 퍼져 큰 소란이 일어났다. 3년이 지난 1586년에는 급기야 교황 시스티나 5세가 모든 형태의 예언을 금하는 특별 칙서, <하늘과 땅의 창조주>를 내리기까지 했다.

냄새와 맛이 고약했던 만드라고라(mandragora, 위)는 마취기능과 하제기능을 함께 각춘 약용식물이었으며, 사람들은 사형대 밑에서 자라는 만드라고라가 신비한 치유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마녀들의 상징이었던 뱀, 바실리스크. 그리스-로마 전설에 나오는 괴물로 사람들은 그것이 쳐다보기만 해도 당장에 죽는다고 믿었다.

몽환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몽유병자의 눈-쿠르베가 그린 이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이-은 투시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졌으며 낭만주의자들이 특히 환영하는 소재였다.

집시 여인들은 이미 16세기부터 마술의 세계를 넘나드는 무시무시한 점쟁이들로 여겨졌다. 위 그림은 집시 여인들이 자기들의 경험담을 늘어놓고 있는 장면으로 카라바조가 이를 유행시킨 이래 바로크 미술에서 흔히 다루는 주제가 되었다.

중세 말에 성행했던 강신술은 죽은 자들의 혼령을 불러내거나 매장된 시체를 찾아내 신묘한 처치를 하는 무술(巫術)이었다.


제5장

마법의 몰락


마녀사냥은 17세기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종교재판이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언제나 같은 결론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 마법에 대한 새로운 견해들이 성직자들 사이에서, 특히 의사들 사이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법의 문제를 통해 제기되는 것은 결국 기독교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문제이다.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여성이란 원죄로 각인되어 있는 존재이다. 여성은 악마의 심부름꾼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성의 육체 자체가 두려움을 자아낸다. 여성의 생리에 대한 몰이해가 인간의 모든 상상력을 극단으로 질주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보슈와 브뢰겔이 그린 악마들은 축제와 카니발에 나타나는 귀신들이나 다른 특별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데 비해, 리하카르트가 그린 악마들은 '현실주의적'이다. 격렬한 율동과 대비되는 썩어 들어가는 살은 그야말로 경이적이다.

장 비에는 16세기의 선구자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고립되어 있었다. 의사들이 마법에 관하여 의학적 견해를 용기 있게 개진하기까지는 1세기를 더 기다려야 한다.

17세기는 카톨릭 교회의 개혁기였다. 수도원의 급격한 증가와 엄격한 계율의 적용은 많은 갈등을 유발했다. 폐쇄된 공간에서 이루어진 신앙지도 사제들과 가족들의 간섭으로 여자들만 있는 수녀원에는 많은 문제가 일어났다. 마귀들린 사건들이 되풀이되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17세기에는 새로운 지적 움직임이 일어난 때이다. 이른바 계몽주의 시대인 것이다. 1653년에 사망한 가브리엘 노데는 마지랭과 크리스틴 드 쉬에드의 사서였다. 그는 마자랭을 도와 당대에 수많은 도서와 수고(手稿)들을 수집했다. 그는 마자랭의 보호와 면책특권을 누림으로써 자유주의 운동의 표상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노력도 프롱드의 난으로 말미암아 무로 돌아가고 말았다. 훗날 마자랭이 자신의 도서관을 재건할 수 있게 도와 준 이는 권좌에 복귀한 콜베르였다.

수녀원들은 교구청의 엄한 감독하에 운영되었다. 그들은 폐쇄생활의 규율이 훼손되거나 특정한 신비주의에 오염되는 것을 경계했으며 악마의 표정이 나타나는 일 따위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상부에 자주 보고되었던 신비적 견신(見神)도 17세기 수도생활의 중요한 특징을 이루었다. 이는 많은 경우 종교생활의 자율성을 요구하는 한 방편으로 수녀들 사이에서 자리잡았다.

17세기의 마법논쟁은 절대왕권의 강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리슬리외 추기경은 절대왕정의 가장 열렬한 옹호자였다.

"프란체스코회 락탕스 신부의 말에 따르자면 …… 그랑디에는 화형대의 형틀에 묶인 채로 자신을 불태울 나무들에 마법을 걸었는데 이는 악마가 불길을 억제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구마서(驅魔書) 위에 떨어졌을 호두알만큼 큰 흑점을 보고 이내 단념했던 게 아닌가 추정된다."

앙주의 공증인의 증언

한 증언은 잔 데장주 수녀를 '유혹의 가시덩굴에 얽히고 찢긴, 그러나 가장 혹독한 폭풍에도 맞서 싸운 한 떨기 아름다운 흰 백합'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마귀쫓기 시험은 그녀의 성녀로서의 평판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1663년에서 1683년까지 루이 14세의 재상을 지냈던 장 밥티스트 콜베르는 형사법규를 개정하지 않았다. 그의 주도로 1667년과 1670년에 공포된 두 법령은 개혁에 앞서 기존의 형사법규를 정리하고 확정하는 것이었다.

 

한 신념의 종언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오늘날에는 더 이상 귀신들린 자도, 마술사도, 점성술사도, 정령도 존재하지 않는다. 100년 전에는 무엇을 근거로 하여 이 모든 신비들이 가능했을까. 귀족들은 모두 성채에 갇혀 지냈고 겨울밤은 길었다. 이 귀중한 놀잇감이 없었더라면 모두 권태로 죽었으리라. 모든 성에는 뤼지낭성에 사는 멜뤼진(Melusine, 토요일이면 다리가 뱀으로 변하는 요정) 요정처럼 때가 되면 돌아오는 요정들이 살았거늘 …… 마을마다 마법사나 마녀가 살았고 군주들은 자기들을 위한 점성술사를 거느렸다. 여인들이 제각기 자기들의 경험담을 털어놓을 때, 귀신들린 자들은 들판을 질주했다. 악마가 넘보았던 것은 바로 이들, 혹은 이들이 넘보았던 것은 바로 악마였다."

볼테르《철학사전》

《이광치미 씨('이광치미' 씨는 '미치광이' 씨의 글자 수수께끼이다. 'Oufle'은 'le fou'의 역순)》는 마술서들에 대한 풍자이다. 이 책은 평생 마술과 마법에 관한 책만 읽고 현실을 허구로 사는 한 가난뱅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몽테스팡 후작 부인은 1667년에서 1677년까지 태양왕 루이 14세의 정부였다. 콜베르의 보고서가 그녀의 결백함을 증명하고 있지만 1676년에 처형된 브랭빌리에 후작 부인 사건과 20여 명을 처형함으로써 마무리된 '독살사건(1677~1681)' 때문에 후작 부인은 큰 곤욕을 치렀다.

"새로운 정신은 완전한 승리자였기에 그동안의 모든 싸움을 잊게 하다가 겨우 오늘날에야 그 승리들을 기억하게 해준다. 첫 시작의 고통과 비천하고 조아하며, 야만적이면서 잔인하게도 희극적인 그 시작의 형태들을 상기시키는 것도 쓸모없지만은 않았다. 박해 속에서 여인들이, 불운한 마녀들이 대중들에게 풀어 놓은 그 새로운 정신이란! …… 그녀들은 죽었고, 죽어야 했다. 어떻게? 무엇보다도 자기들이 발전시킨 과학의 진보로 인하여, 의학으로 인하여, 자연주의자들에 의하여, 바로 자기들이 힘써 지키려 한 이 모든 것들로 인하여, 마녀들은 언제나 죽었다. 그러나 요정은 죽지 않는다. 마녀들은 죽지 않는 요정으로 다시 태어나리라. 남자들의 일을 기꺼이 떠맡았던 지난 세기의 여인들은 그 대신 자신들의 고유한 역할을 잃어버렸다. 치료와 간병, 병을 낫게 하는 요정의 역할을 …… 반(反)자연은 빛을 잃었으니 반자연이 기울어 세계에 여명이 깃들일 그날은 멀지 않았다."

쥘 미슐레

《마녀》

마녀의 체포 장면에는 언제 어디서나 똑같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세속재판관들과 마을주민인 고소인들, 그리고 등장하지 않는 때도 있지만 마녀로 지목된 희생자. 그림은 17세기에 영국에서 제작된 삽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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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
2014. 11. 25. 17:07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109 서예 감상법

 

글, 사진 / 이완우

2009, 대원사


 

시흥시매화도서관

SH013807

 

082

빛12ㄷ  228

 

빛깔있는 책들 228

 

이완우-------------------------------------------------------------------------

대전에서 출생하여 한국외국어대학교 터어키어과를 졸업하였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석 · 박사과정을 졸업하고 한국서예사를 전공하였다. 현재 대전대학교 서예과 전임강사로 재직중이다. 논문으로는 「이광사 서예 연구」, 「석봉 한호 서예 연구」 등이 있다.

 

|차례|

 

서예를 감상하기 전에

서예에는 어떤 특성이 있는가

서예를 즐겁게 감상하려면

어떻게 감상할 것인가

형식에 맞게 감상하려면

서체에 맞게 감상하려면

서예 감상을 마치면서

찾아 보기

참고 문헌

 

서간  정약용(丁若鏞, 1762~1836년), 종이 바탕, 31.5×39센티미터, 서울대박물관 소장.

평안첩(平安帖) · 하여첩(何如帖)  동진 왕희지, 당나라 모본(摹本), 왕희지의 필적은 대부분 서간이라는 실용적 기능을 지녔으면서도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몽전첩(夢奠帖)  당 구양순, 종이 바탕, 25.5×16.5센티미터, 옛 서예가들은 점획을 신체에 비유하여 골, 근, 육, 혈이 고루 갖추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는데 구양순은 골을 강조한 뼈대가 강한 글씨를 썼다. 중국 랴오닝성박물관 소장.

시첩 부분  북송 휘종, 종이 바탕, 27.2×265.9센티미터(전체), 대상물의 형태를 뼈대 있는 필선으로 묘사해야 한다는 '골법용필'을 극대화한 경우로 뼈대만 남은 글씨이다.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백씨초당기(白氏草堂記)  청 등석여, 종이 바탕, 점획의 이상적인 형태와 선질을 구사하기 위해 서예가글은 끊임없는 연구를 해왔다. 「백씨초당기」에서는 점획이 강한 글씨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일본 개인 소장.

「최자옥좌우명(崔子玉座右銘)  청 오희재(吳熙載), 종이 바탕, 획이 가는 글씨로 여백의 효과를 한층 높여 준다. 일본 개인 소장.

장계명첩(張季明帖)  북송 미불, 종이 바탕, 세로 25.8센티미터, 글씨는 한 번 쓰면 돌이킬 수 없다는 일회성을 가진다. 그리고 쓴 사람의 심리 상태까지 자연스럽고 뚜렷하게 표출된 글씨라야만 가치 있게 평가된다.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예기비(禮器碑)」의 앞부분  동한 156년, 내용이 긴 비문을 쓸 경우 제작자는 전체의 필치를 고르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 비는 일정한 필치로 일관되어 있는 예이다.

백원첩(伯遠帖)  진(晉) 왕순(王珣), 종이 바탕, 25.1×17.3센티미터, 글씨는 글자를 읽지 않고 그 동세, 선질 등을 보는 것만으로도 조형미를 느낄 수 잇다. 중국 베이징고궁박물원 소장.

단조로운 장법  균일하고 안정적이어서 통일미가 있다. 「장미화시(薔薇花詩)」, 청 이병수(伊秉綬), 종이 바탕, 110×50센티미터, 중국 랴오닝성박물관 소장.

변화로운 장법  변화와 율동감을 주어 전체적인 조화미를 느끼게 한다. 「논화어(論畵語)」, 청 하소기(何紹基), 종이 바탕, 94×57센티미터, 중국 개인 소장.

자간에 비해 행간이 넓은 장법  「태산각석(泰山刻石) 진, 기원전 209년, 탁본.

자간에 비해 행간이 좁은 장법  「장경잔비(張景殘碑)」, 동한, 159년, 탁본.

자간과 행간이 비슷한 장법  「석고문(石鼓文)」, 전국시대, 탁본, 28×18.2센티미터.

자간과 행간을 무시한 장법  「적벽부(赤壁賦)」, 明 축윤명, 종이 바탕, 31.3×1001.7센티미터, 중국 상하이박물관 소장.

여러 짜임의 '之'자들  한 작품에서 같은 글자의 짜임을 다르게 하는 것도 반복적인 표현을 피하는 좋은 방법이다. 곳곳에 보이는 '之'자가 각기 다른 점획과 짜임을 취하고 있어 왕희지의 뛰어난 조형 감각을 여실히 보여 준다. 「난정서」, 동진 왕희지, 당나라 모본(摹本), 중국 베이징고궁박물원 소장.

방필의 글씨  붓을 댄 곳과 뗀 고 그리고 꺾는 부분이 모난 글씨는 강렬하고 각박한 느낌을 준다. 「시평공조상기」 부분, 북위, 5세기 말, 탁본.

원필의 글씨  붓을 댄 곳과 뗀 곳 그리고 돌린 부분이 둥근 글씨는 부드러우면서도 원만한 느낌을 준다. 「정희하비」, 북위, 511년, 탁본(위), 「현묘관중수삼문기(玄妙觀重修三門紀)」부분, 원 조맹부, 종이 바탕,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아래)

「후신첩(風信帖)」 부분  헤이안시대 쿠카이, 812년경, 종이 바탕, 28.8×157.9센티미터, 쿠카이는 왕희지와 안진경의 서풍이 결합된 중국적 취향이 강한 글씨를 썼다. 일본 교토 교오고고쿠사(敎王護國寺) 소장.

「교쿠센첩(玉泉帖)」 부분  헤이안시대 오노노미치카제, 종이 바탕, 27.4×188센티미터, 오노노미치카제는 왕희지 서풍의 골격에 가나 글씨의 운치를 융합하여 일본 특유의 서풍인 '와요'를 완성시켰다. 일본 궁내청 소장.

화기(畵記)  조선 이광사, 1746년, 종이 바탕, 33×177센티미터, 고전적인 두루마리 글씨는 대개 세로 40센티미터를 넘지 않는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행수가 홀수인 축과 짝수인 축  행수가 홀수면 전체의 장법이 안정적이나, 짝수면 자칫 무게나 필세가 한쪽으로 치우쳐 전체 균형이 깨지기 쉽다. 오언율시, 조선 이지정(李志定), 17세기, 종이 바탕, 96.3×54.3센티미터,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위), 칠언절구, 조선 이광사, 18세기, 비단 바탕, 105.4×56.3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아래)

서몽시첩(書夢詩帖)  조선 신위,  18세기, 비단 바탕, 38×23센티미터, 원래 대폭이던 것을 서첩으로 개장한 경우이다. 개인 소장.

매오영(梅五詠)  조선 신위, 19세기, 종이 바탕, 17.5×50센티미터, 글자를 줄여 쓰지 않고 아래로 갈수록 행간을 줄이는 방식을 사용하여, 위로 갈수록 펼쳐지고 아래는 차분히 모아지는 느낌을 준다. 개인 소장.

서간  조선 이이(李珥), 1559년, 종이 바탕, 25×28.8센티미터, 개인 사이의 의사를 전달하는 편지는 보통 인사말, 전하는 말, 마침말, 기일 및 서명 그리고 추신으로 구성된다. 개인 소장.

오언율시  조선 이황, 종이 바탕, 57×34센티미터, 보물 548호, 『퇴도선생필법(退陶先生筆法)』에 실려 있는 것으로, 흘림의 정도에 따라 운필의 속도는 조금씩 빨라졌지만 근엄한 획법과 단정한 짜임의 방식은 지속되어 있다. 개인 소장.

편액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 편액(위)은 김생이 썼다고 전하며,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편액(아래)은 공민왕이 썼다고 전하나 그들의 필적인 지 신빙하기 어렵다.

돈의문 편액  전(傳) 조윤덕(曺潤德),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유행한 설암풍으로 쓴 편액이다. 문화재관리국 소장.

지리산 천은사 편액  조선 이광사, 18세기 후반, 천은사의 화기를 막기 위해 물 흐르듯이 썼다고 한다.

춘종첩  원 설암, 1296년 씀, 조선시대 목판본, 설암체는 점획의 굵기가 굵고 획 사이의 여백이 매우 좁으며 점획의 시작, 끝, 전절 부분이 강조되는 특징이 있다. 개인 소장.

김약로묘표(金若魯墓表)  조선 한호, 1755년 건립, 한호의 『대자천자문』은 18세기 이후 비석 앞면의 제서로 집자되면서 널리 유행하였다.

호고연경(好古硏經)  조선 김정희, 19세기, 종이 바탕, 각 124.7×28.5센티미터, 예서 대련으로 의외의 짜임과 거침없는 필획을 구사하여 졸박하고 변화로운 특유의 품격을 보여 준다. 호암미술관 소장.

경남 양산 통도사 일주문의 주련  주련은 비바람에 노출된 곳에 걸리므로 종이에 쓴 것을 걸지 않고 이를 나무판에 새기고 건물의 분위기에 어울리게 색칠하여 건다.

서울 흥천사 만세루의 주련  사찰의 주련판 위아래에는 연화문 등의 문양이 새겨지고 이를 단청하여 불전을 장엄하기도 한다.

전남 영광 불갑사 대웅보전의 주련  사찰의 주련은 불경이나 논장에 있는 글을 쓰기도 하며 고승들이 지은 게송을 쓰기도 한다.

산씨반(散氏盤)  서주시대, 탁본, 고대 문자에 대한 금석학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옛 서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산씨반은 고졸한 서풍을 지닌 대표적인 금문으로 여겨진다. 원물은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역산각석  진, 기원전 209년, 송나라 모각본, 8세기 이전에 이미 원석이 부서져 당나라 탁본에 의해 10세기 때 다시 새겨졌다. 모각되면서 균제적 자형과 균일한 획으로 변질되엇다.

낭야대각석  진(秦), 기원전 209년, 탁본, 소전의 창시자인 이사의 글씨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원각일 뿐만 아니라 글자 수도 많이 남아 있다.

이씨삼분기  당 이양빙, 767년, 탁본, 이양빙의 전서는 획이 곡선적이고 형태가 부드러워 긴장감이나 위압감을 주지 않는다.

현묘관중수삼문기(玄妙觀重修三門記) 전액(篆額)  원 조맹부, 종이 바탕, 조맹부는 주요 서체를 터득하여 옛 서법을 재현하였다.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예서비  2세기 중 · 후반에는 수많은 예서비들이 세워져 한예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을영비(乙瑛碑)」, 동한 153년, 탁본(위), 「사신비(史晨碑)」, 동한 169년, 탁본(아래).

예서비  동한시대의 예서비들은 후대 비평가들로부터 다양한 품평을 이끌어내어 중국 서예사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는 원천이 되었다. 「조전비(曺全碑)」, 동한 185년, 탁본(위), 「장천비(張遷碑)」, 동한 186년, 탁본(아래).

임장천비(臨張遷碑)  청 하소기, 종이 바탕, 청대에는 금석학의 발전에 따라 그동안 위축되었던 전서와 예서가 신선한 생명력을 얻게 되엇다. 일본 개인 소장.

호주안씨묘지(湖州顔氏墓誌) 부분  청 등석여, 종이 바탕, 청나라 중반 이후의 서예가들은 이전과는 다른 신선한 서풍을 창출하여 학구적 성과와 예술적 성취를 함께 거두었다. 일본 개인 소장.

승선태자비(昇仙太子碑) 제액(題額)  당 측천무후(則天武后), 699년, 탁본, 비백은 궁궐 건물의 편액 글씨로 사용되는 등 주로 장식 서체로 쓰였다.

정희하비  북위 정도소, 511년, 원각(原刻), 중봉세의 부드러운 운필과 고풍스런 짜임으로 넉넉한 정취를 풍긴다.

장맹룡비  북위, 522년, 탁본, 방필의 방정한 골격이 잘 드러나며 호방하고 웅건한 풍격이 있다.

「황정경」 부분  동진 왕희지, 동진시대의 대표적인 해 필적으로 내용은 도교 경전이다.

공자묘당비(孔子廟堂碑)  당 우세남, 628년, 탁본, 우세남은 남조에 기반한 온화한 획법으로 근골을 함축한 듯한 점이 돋보인다.

안탑성교서(雁塔聖敎序)  당 저수량, 653년, 탁본, 저수량은 붓끝의 정취를 살린 가는 획법과 부드럽고 경쾌한 운필로 유명하다.

천복사다보탑감응비(千福寺多寶塔感應碑)  당 안진경, 752년, 탁본, 안진경은 중년에 명확한 획법과 정밀한 짜임의 깔끔한 서풍을 구사하였다.

현비탑비(玄秘塔碑)  당 유공권, 841년, 탁본, 유공권은 이전 명서가들의 장점을 선별적으로 계승하여 이를 자신의 서풍으로 발전시켰다.

만안교비(萬安橋碑)  북송 채양, 1059년 이후, 탁본, 송해의 대표적인 명서가 채양은 안진경의 서풍을 바탕으로 정형적인 해서를 구사하였다.

금강반야바라밀경  남송 장즉지, 종이 바탕, 세로 32.1센티미터, 장즉지는 필획 사이를 유연하게 연결시키는 등 송나라 해서의 특성을 잘 정리해낸 서예가이다. 일본 교토 지적원(智積院) 소장.

이사훈비(李思訓碑)  당 이옹, 739년 이후, 탁본, 사선 방향으로 삐침을 길게 빼는 것과 같은 이옹의 서풍은 조맹부의 해서에 영향을 끼쳤다.

「출사표(出師表)」  명 축윤명, 1514년, 종이 바탕, 축윤명은 종요의 필적과 왕희지의 소해 법첩을 적극 수용하여 예스러운 풍격을 이루어냈다. 일본 개인 소장.

「낙화시권(落花詩卷)」  명 문징명, 1504년, 종이 바탕, 문징명은 왕희지의 소해 필적을 보다 경쾌하고 산뜻한 필치로 되살려내었다. 일본 개인 소장.

「하첩표」  위 종요, 219년, 각첩, 세로 24.6센티미터, 종요가 국가의 전승을 축하하고자 임금에게 올린 글로 행서의 초기 발전 단계에 해당되는 필적이다. 일본 서도박물관 소장.

난정서  동진 왕희지, 당 풍승소(馮承素) 모본, 신룡반인본(神龍半印本), 종이 바탕, 24.5×69.9센티미터, 이미 진적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이나 여러 임모본이 전하므로 왕희지 행서의 장법이나 운필의 특징을 살피는 데에는 충분하다. 중국 베이징고궁박물원 소장.

집자성교서  동진 왕희지, 672년 집자, 탁첩, 26×13센티미터, 당나라 궁중에 소장된 왕희지의 행서와 초서 필적을 모아 집자한 것으로 다양한 자형과 짜임을 학습하는 데 효과적이다. 개인 소장.

온천명  당 태종, 648년 탁본, 변화로운 짜임, 자신에 찬 운필, 유연한 붓끝의 움직임이 물씬 풍긴다. 프랑스 국립파리도서관 소장.

진사명  당 태종, 646년 탁본, 담담한 짜임, 침착한 운필, 장봉세의 간명한 획법이 눈에 뛴다. 중국 베이징도서관 소장.

「제질문고」  당 안진경, 758년, 종이 바탕, 28.8×77센티미터, 안징경이 안사의 난으로 살해된 조카의 영령을 추모한 제문으로 당나라 명서가의 진적으로는 매우 드문 예이다.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쟁좌위고」  당 안진경, 764년 탁본, 외형적 꾸밈이나 필획의 교묘함에 개의치 않고 솔직한 태도로 붓이 가는 대로 졸박한 필법을 이룬 안진경의 서풍은 솔직한 심회를 표현한 글씨로 높이 평가되면서 송대의 행서풍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 베이징고궁박물원 소장.

서간  송 소식, 종이 바탕, 소식은 송사대가의 한 사람으로 그의 글씨는 황정견 등에게 영향을 미쳤다.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의고  송 미불, 1088년, 비단 바탕, 미불은 이왕(二王) 행서의 전통을 새롭게 해석하여 후대의 서예사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예학명  남조 작자 미상, 514년경 탁본, 남조의 대표적인 마애각석으로 짜임이나 획법 등에서 황정견의 행서에 영향을 끼쳤다.

「송풍각시권(松風閣詩卷)」부분  송 황정견, 1102년, 종이 바탕, 34.2×554센티미터, 황정견은 풍부한 개성을 표현하여 왕희지의 전통에서 벗어나 행서의 표현 범위를 넓히는 선례가 되었다.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적벽부」 부분  원 조맹부, 1301년, 종이 바탕, 27.2×11.1센티미터, 조맹부의 행서는 왕희지 등의 고법을 바탕으로 가늘고 굵은 필선의 변화, 리듬감 있는 균형, 미묘한 붓끝의 연계성, 용필에서의 완벽성 등이 총체적으로 융화되어 있다.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문무첩(文武帖)  위 황상(皇象), 각본(刻本), 『순화각첩』 권3에 실려 있다.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장초 필적으로 당시 정비되어가던 금초 또는 해서의 영향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평복첩」  서진 육기, 종이 바탕, 23.8×20.5센티미터, 자연스러운 붓질의 편지 글씨이다. 겸손하고 꾸밈 없는 필치로 당시 초서가 장초로부터 금초로 변화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중국 베이징고궁박물관 소장.

십칠첩  동진 왕희지, 각첩, 행서와 초서의 집대성자로 불리는 왕희지는 장초나 금초를 모두 썼으며 이를 혼합한 초서도 썼다. 이 필적은 한 글자씩 떨어지는 독초(獨草)의 전형적인 예이다.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행양첩  동진 왕희지, 당대 모본, 24.4×8.9센티미터, 종이에 밀랍을 입힌 누런색의 경황이라는 종이에 구륵곽전의 방법으로 베꼈다. 미국 프린스턴대학교미술관 소장.

진초천자문  수 지영, 『진초천자문』은 현재 목적과 각본으로 전하는데, 이들 가운데 어느 것이 원형에 가까운지는 단언하기 어렵지만 후대에 지속적 영향을 준 것은 아마 각본이었을 것이다. 당나라 임본, 종이 바탕, 서첩 높이 24.5센티미터, 일본 개인 소장(위), 각본, 1109년 간행, 중국 베이징고궁박물원 소장(아래).

『서보』 부분  당 손과정, 687년, 종이 바탕, 27.2×898.24센티미터, 장지 · 종요 · 왕희지 · 왕헌지 등 고대 명서가들의 우열을 비교하는 등 이왕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 서예관을 보여 주는 유명한 서론이다.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중추첩  동진 왕헌지, 각본, 중추첩에 보이는 일필의 필세는 광초의 발단이 되었다고 한다. 송 미불이 임서하였던 것을 뒤에 새긴 것으로 『여청재첩(餘淸齋帖)』에 실렸다. 일본 개인 소장.

압두환첩  동진 왕헌지, 비단 바탕, 세로 26.1센티미터, 시원한 일필세를 보기는 어렵지만 운필이 교묘하고 유려한 아름다움이 있어 왕희지의 영향을 느낄 수 있다. 중국 상하이박물관 소장.

「고시사첩(古詩四帖)」 부분  전(傳) 장욱, 종이 바탕, 29.5×195.2센티미터, 장욱의 광초는 필획의 연명성이 강하고 짜임의 변화가 풍부하며, 획을 아래로 길게 빼거나 춤을 추는 듯한 쾌속함을 이루었다고 평가된다. 중국 랴오닝성박물관 소장.

「자서첩(自敍帖)」 부분  당 회소, 777년, 종이 바탕, 28.3×755센티미터, 회소가 어린 시절 불문에 들어가 틈틈이 글씨를 익혀 초서의 묘를 터득했다는 자전적 이야기를 쓴 것으로, 운필의 흥취가 매우 천연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자서첩」 말미의 낙관 부분

 「이백시권」 부분  송 황정견, 종이 바탕, 37×392.5센티미터, 회소의 서풍을 바탕으로 특유의 짜임새와 운필의 완급을 가미하였다. 일본 교토 후지이유린관(藤井有隣館) 소장.

초서시축  명 부산, 종이 바탕, 명나라의 광초는 파격적인 장법과 점획의 태세와 윤갈의 효과를 극대화시킨 서풍으로 대중화되어 갔다. 일본 개인 소장.

 

 

 

posted by 황영찬
2014. 11. 14. 16:51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108 알렉산더 대왕


피에르 브리앙 지음, 홍혜리나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25


082

시156ㅅ  20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020


기원 전 334년 봄, 마케도니아의 왕인

알렉산더 3세는 스물두 살의 나이로 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소상시아의 연안을 향해 출항했다.

이로써 그리스인들은 '왕 중의 왕'인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의 제국을 정복하러 아프가니스탄과

인도까지 이르는 대(大)원정길에 나서게 되었다.

이 웅장한 서사시는 알렉산더가 제국의

아름다운 수도 바빌로니아에서 죽는 날까지,

약 십여 년 간에 걸쳐 펼쳐진다.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Philippos)의 아들로 태어났다.

펠리에 있는 궁전에서 가장 명성있는 스승들의

정성어린 가르침을 받은 그는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검술은 물론 운동과 사냥,

그리고 머리를 끄는 데까지 탁월함을 보였다.


스승들은 알렉산더에게 판단력과

도덕심을 심어 주는 것 못지않게

자신의 신체를 맹수처럼 강인하게 단련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알렉산더는 총명했을

뿐만 아니라 외모도 남달리 출중했다.

스승들은 알렉산더의 뛰어난 면모를 보면서

그의 찬란한 업적을 예견할 수 있었다.


필리포스가 죽자 알렉산더는 왕위를 계승햇다.

그 당시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의 맹주가 되었고

그리스는 페르시아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다.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은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5만의 군사를 이끌고 헬레스폰투스 해협을 건넜다.

페르시아왕 다리우스 3세는

우월감에 빠져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다리우스 3세 휘하의 장군들은 이에 맞서 싸울 준비를 했다.

그라니쿠스강 우안에 이오니아와 리디아의 지사

스피트리다테스가 페르시아 기병대를 소집했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알렉산더는 가까스로

죽음을 면했다. 그렇지만 저녁 무렵

그는 승기를 잡아 페르시아인을

발아래 굴복시켰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을 차례로 해방했다.

에페수스, 프리에나, 밀레투스, 마그네시아에서

민주정이 회복되었다.

겁을 먹은 다리우스 3세는

직접 나서서 알렉산더에 대항했지만

결국 이수스 전투에서 패해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

그의 가족과 보물들은 정복자의 손으로 넘어갔다.


시돈과 티루스가 함락되면서 이집트로 가는 길이 열렸다.

이집트 나일강 유역의 삼각지에 새 도시,

알렉산드리아가 건설되었다. 알렉산더가 '아몬신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았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후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메소포타미아의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는

또다시 도망쳤다. 페르시아인은 저항을 포기했다.

그들은 정복자에게 바빌론의 문을 열어 주었다.


여러 해가 흘렀다.

알렉산더는 그동안 페르시아, 파르티아, 마르기아나,

아라코시아, 박트리아, 소그디아나를 굴복시켰다.

이윽고 그는 인도의 문턱에 다다랐다.

모두들 그에게 무릎을 꿇고 공물을 바치며 지지를 표했다.

오직 인도왕 포로스만이 항복을 거부한 채

대규모 군대와 코끼리 200마리,

전차 300대를 동원해 대항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알렉산더가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패자에게 물었다. "어떤 대우를 바라는가?"

"왕이오." 포로스가 대답햇다.

그리하여 그는 왕좌를 지킬 수 있었다.

이 새 동맹자와 더불어 알렉산더는

동쪽으로 더 진군하려고 했다. 그러나 오랜 원정으로

지친 병사들은 더 이상의 원정을 거부했다.

알렉산더의 정복이 한계에 이른 것이다.


차례


제1장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

제2장 정복전쟁의 시작

제3장 주요 도시들의 병합

제4장 페르시아의 새로운 대왕

제5장 인더스강에서 페르시아만까지

제6장 마지막 나날, 그리고 마지막 계획

기록과 증언

그림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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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브리앙 Pierre Briant

피에르 브리앙은 툴루즈(Toulouse) 제2대학의 고대사 교수로서, '중세사 : 페르시아 지배기와 알렉산더 정복기, 그리고 후계자들의 시대'를 전공하고 있다. 역사학 교수이면서 문학박사인 그는 안티고네(알렉산더의 후계자 중 하나)에 관한 논문을 썼다. 주요 저서로 <알렉산더 대왕>, <고대 중동에서의 국가와 국가 원수들> 등이 있다.


옮긴이 : 홍혜리나

1965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불어불문과를 졸업한 후 동대학원에서 석사 학위 및 박사 과정을 이수 했다. 현재는 독일 유학 중이다. 번역서로는 <소설 카프카> <인간과 문화> 등이 있다.


제1장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


B. C. 4세기, 그리스 전체가 복수를 계획하고 있었다. 모두들 철천지원수 페르시아에게 '복수전'을 펼쳐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살라미스 해전과 마라톤 전투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둔 뒤로 2세기 이상 대치상태가 이어지다가 암울한 굴욕의 순간이 다가왔다.

리스 도시글은 나름대로 힘을 지녔지만 페르시아에 전혀 대항하지 못했다. 그리스군은 페르시아왕의 장군들이 내리는 명령에 번번이 따라야 했다. 필리포스는 처음으로 페르시아 원정 계획을 세웠고, 그의 아들 알렉산더가 이를 추진해 나갔다.

B. C. 359년 필리포스는 마케도니아 수도 펠라 주변의 여러 소공국(小公國)들을 통합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마케도니아가 강국으로 부상한 것은 다음 몇 가지 사항만 봐도 알 수 있다. 즉, 그리스의 정치, 문화적 중심지로 떠오른 펠라의 시가지를 재정비했고, 트라키아의 새 광산을 손에 넣어 왕의 초상이 찍힌 금화와 은화를 대량 보급했고, 보병으로는 농부들을, 기마병으로는 귀족들을 징집하여 강력한 군대를 구성했으며, 여기에 금을 받고 지원한 용병들이 가세하여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베르기나의 왕묘

베르기나의 유적지 부근, 마케도니아 영토에 속하는 피에리 산맥 기슭에서 고고학자들은 헬레니즘 시대의 왕궁터 부근에 자리잡은 무덤을 여러 기 발굴했다. 거대한 봉분(지름 110m, 평균높이 12m)의 아래에서 호화롭게 장식된 거대한 돔형 무덤을 발견했는데, 그 안에는 갖가지 유물들이 도굴꾼의 손이 닿지 않은 채 그대로 간직되어 있었다. 특히 석관 속의 시신은 자줏빛과 금빛이 영롱한 눈부신 옷을 입고 있었다. 그곳에서 발견된 도자기 양식으로 추정해 보건대 이 돔형 무덤은 B.C. 4세기 무렵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필리포스 2세와 그의 부인들 가운데 한 명(클레오파트라가 가장 유력하다)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 베르기나는 여러 왕들이 매장된 마케도니아의 옛 수도 아이가이 지역이다. 상아로 만든 여러 작은 조상(彫像)들은 왕가(王家)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맨 위 왼쪽은 올림피아스, 맨 위 오른쪽은 알렉산더, 두번째는 필리포스이다.

왕의 무기들

왕의 시신과 함께 행사 때 입던 갑옷, 무기들이 부장(副葬)되었다. 가는 철판에 가죽과 피륙을 덮어 만든 갑옷은 수평, 수직으로 금조각들을 배열하여 장식했다. 앞부분은 여섯 개의 사자머리를 달아 치장했다. 갑옷은 전체적으로 전사가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정면에 아테네 여신의 얼굴을 장식한 높은 산 모양을 한 왕의 투구는 최초로 발굴된 마케도니아의 투구이다.

금으로 만든 고리토스(gorytos, 활과 화살을 넣는 케이스)에는 도시를 점령하는 전사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알렉산더의 어머니 올림피아스는 에페이로스에 사는 물로스족의 왕녀였다. 지나치게 권력 지향적이던 올림피아스는 필리포스 옆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었다. 이 때문에 그녀는 추방될 지경에 이르렀으나, 아들 알렉산더의 중재로 간신히 펠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나중에 아들은 아무리 먼곳으로 원정을 떠나도 어머니와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어느 날 테살리아인 필로니코스가 필리포스에게 13탈란트에 팔겠다고 부세팔로스란 말을 가져왔다. 사람들이 들판으로 나가 그 말을 타려고 했지만 말이 어찌나 고집이 센지 도저히 다룰 수가 없었다. …… 성미가 급한 필리포스가 그 말을 도로 데려가라고 지시하자 …… 알렉산더가 이렇게 탄식했다. "저렇게 훌륭한 말을 놓치다니, 수완과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라 감히 올라타지도 못하는구나!" 그 말을 들은 필리포스가 아들에게 말했다. "너보다 연륜이 높은 사람들을 그처럼 무시하다니, 그렇다면 네가 그들보다 이 말을 더 잘 다룰 수 있다는 거냐?" "물론입니다." 알렉산더가 대답했다. …… "만일 네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경거망동한 대가를 어떻게 치르겠느냐?" "제우스신의 이름을 걸고 이 말값을 치르겠나이다."

플루타르크

광대한 페르시아 제국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상비군이나 특별부대를 편성해서 주둔시켜야 했다. 대왕은 우선 창과 방패로 무장한 왕궁수비대를 활용할 수 있었고 긴급한 상황에서는 제국의 전민족들에게서 병사를 징집할 수 있었다. 위 그림은 왕궁수비대의 모습이 담긴 페르세폴리스 유적의 벽면 부조이다.

다리우스 대왕 때 이집트에서 제작되어 수사의 왕궁 입구에 세워진 이 기념상은 다민족에 대한 대왕의 지배를 상징하고 있다. 각 민족은 옷과 머리 모양으로 알아볼 수 있으며 상형문자로 표기되어 있다. 위에서부터 페르시아족, 메디아족, 엘람족, 박트리아족, 소그디아나족, 스키타이족, 리디아족, 아랍족, 이집트족, 인도족, 누비아족이다.

"테베시는 많은 수모를 겪었다. 그러던 중 품행이 단정한 유명한 귀부인 티모클레이아의 집이 트라키아 병사들에게 약탈당한 일이 있었다. 병사들이 부인의 재산을 터는 동안 그들의 우두머리가 부인에게 다가와 강제로 욕을 보였다. 그리고 나서 혹시 어딘가에 금은 보화를 숨겨 놓은 게 없는지 물어 보았다. 부인은 그렇다고 대답하고 그 우두머리만 정원으로 데려가 가장 값비싼 보화를 숨겨 놓았다며 한 우물을 보여 주었다. 트라키아인이 우물 속을 들여다보려고 몸을 숙이는 순간 부인은 그를 우물 안으로 밀어 넣고 돌을 가득 집어 던져 죽여 버렸다. 병사들이 부인을 포박해 알렉산더 앞에 데려갔을 때 알렉산더는 부인의 태도와 몸짓을 보고 한눈에 그녀가 용감하고 뛰어난 여자임을 알아보았다. 부인은 자기를 끌고 가는 사람들 뒤에서 겁먹은 표정도 짓지 않고 한치도 근심스러워하는 구석이 없이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왕이 신분을 묻자 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그리스를 해방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필리포스에 맞서 싸우다가 케로네아에서 전사한 테아게네스의 누이입니다.' 알렉산더는 부인의 분명한 대답과 당당한 태도에 탄복하여 자녀들과 함께 자유롭게 떠나도록 놓아주라고 명했다."

플루타르크

자신의 영지에서 대왕의 대리인이던 지사는 왕궁의 의례를 본떠 격식을 차려 가며 권한을 과시했다. 부조에 보이는 왕관과 파라솔도 그 예이다.

알렉산더가 정복하려고 한 페르시아 제국은 동서로는 이집트에서 인더스강 유역까지 4,000km, 남북으로는 시르다리야강(오늘날의 러시아)에서 페르시아만에 있는 호르무즈 해협까지 약 1,800km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 걸쳐 있었다. 제국은 다양한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란 고원과 이집트와 발루치스탄(게드로시아)의 사막지대, 나일강 유역과 바빌로니아, 박트리아의 평야지대, 힌두쿠시와 카프카스 산맥의 험준한 산악지대, 수평선이 끝없이 펼쳐지는 소아시아 연안의 지중해,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삼각지대 등등 이렇게 다양한 지역들을 알렉산더는 차례차례 정복해 나갔다. 페르시아는 전국 구석구석까지 도로망(왕도)을 정비하여 제국의 중심지와 지방을 하나로 연결시키고 있었다.

페르시아 귀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페르시아 왕은 속국들을 장악하고 있던 관리들과 장군들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었다. 페르시아인은 관모양의 독특한 머리쓰개로 알아볼 수 있다.

키루스 대왕이 정복활동을 펼친 지 30년이 흐른 뒤, B.C. 522년에서 B.C. 521년 사이에 제국 내에서 반란이 자주 일어났지만, 다리우스 대왕은 이를 진압했다. 대왕은 자신의 공적을 바빌로니아에서 엑바타나로 가는 길에 있는 베히스툰 바위 위에 새겨 넣었다. 여기서 대왕은 반란을 주도한 적 위에 발을 올려놓고 있고 반란에 가담한 왕들은 목에 밧줄이 매여 있다. 대왕 뒤에는 그가 권력을 장악할 때 공을 세운 여섯 명의 귀족 가운데 두 명이 서 있는데, 그중 한 명은 창꽂이를, 다른 한 명은 화살통을 들고 있다. 조로아스터교의 위대한 신 아후라마즈다가 위에서 굽어보고 있다.


제2장

정복전쟁의 시작


B.C. 334년 봄, 마케도니아군은 아비도스 부근의 소아시아 연안에 상륙했다. 육지에 발을 디딘 알렉산더는 땅에다 창을 꽂아 페르시아를 정복하겠다는 야망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이어 그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들에게 자신을 수호해 달라고 제식을 올렸다.

마케도니아의 군사적 우위를 확신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제국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원정에 열정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들에게 자신의 원정을 비호해 달라고 빌었다. 아래 그림은 알렉산더가 아킬레스의 무덤을 찾아가 경의를 표하는 장면이다.

미케도니아의 귀족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알렉산더도 훌륭한 기마병이 되기 위하여 강훈련을 받았다. 스승들은 그를 건장한 전사이자 왕국을 강력하게 통치할 수 있는 군주로 교육시켰다.

자기 또래의 '동료들'과 함께 성장한 알렉산더는 자연스럽게 그들 가운데서 조언자와 장군을 뽑았다. 펠라의 모자이크 위에 사자사냥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크라테레스도 이렇게 해서 선발된 인물이다.

마케도니아와 페르시아 사이의 첫번째 전투는 그라니쿠스강에서 벌어졌다. 양편 모두 소수의 기마대만이 전투에 참가했다.


"'왕의 혈족들'이 힘을 모아 알렉산더에게 투창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들은 알렉산더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육탄전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알렉산더는 그런 위험한 상황에서도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갑옷에 두 번, 투구에 한 번, 트로이의 아테네 여신 신전에서 가져온 방패에 세 번 창을 맞았지만 그는 주춤거리기는커녕 오히려 불굴의 용기를 발휘하여 갖은 위험에 맞서 당당히 싸웠다. 그 결과 땅바닥에 쓰러진 것은 그가 아니라 페르시아의 수많은 명장들이었다."

디오도로스

"당시 아르테미스 여신은 알렉산더의 출산에 참견하느라 신전이불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에페수스에 머물고 있던 점성가들은 한결같이 신전이 파괴된 걸 보고 불행이 닥칠 것이라고 예견했으며, 그날이 아시아에 큰 재앙과 참화를 가져온 날이라고 주장했다."

마그네시아의 헤게시아스 플루타르크의 책에 인용됨

고르디온의 신전에 있는 매듭에 관한 일화를 묘사한 르네상스 시대의 벽화.


"매듭은 산수유나무 껍질로 만들어졌는데 아무도 그 매듭의 시작과 끝을 알지 못했다. 이 매듭을 풀 방법을 찾지 못하자 알렉산더는 그것을 그대로 두지 못하고 …… 이렇게 저렇게 해보다가 안 되자 단칼에 두 동강냈다고 한다. 하지만 아리스토불로스는 알렉산더가 수레에서 쐐기를 뽑는 동시에 매듭을 잡고 수레의 채에 연결된 멍에를 당겨 매듭을 풀었다고 전한다."

아리아누스

왕실수비대의 사수들은 불사조란 칭호를 갖고 있었다. 헤로도토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이유는 한 사람이 싸우다가 쓰러지면 체격이 비슷한 다른 사람이 곧바로 그 대신 싸우기 때문이라고 한다. 긴 창으로 무장한 이들은 등에 화살통을 지고 있었다.


"페르시아인이 불사조라 부른 1만 명 가량의 군인들이 곧장 진군하기 시작했다. 야만인의 호사스런 장신구로 치장한 그들의 모습은 더욱더 위풍당당했다. 그들은 금목걸이와 금실로 수를 놓은 옷가지들, 보석이 박힌 소매 달린 긴 옷을 입었다."

퀸투스 쿠르티우스

전쟁터에서 처음으로 알렉산더와 맞붙은 다리우스 3세는 전차 위에서 투창수들의 호위를 받으며 싸웠다.


"알렉산더는 다리우스 3세를 찾아내기 위해 곳곳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의 모습이 눈에 띄자 알렉산더는 그를 지나쳐 기마병들과 함께 전투가 벌어지는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그는 페르시아인에게 이기기보다는 더 큰 승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디오도로스

알렉산더와 다리우스 3세가 참전한 모습을 묘사한 그림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으로 유명한 이수스 전투장면을 그린 모자이크 벽화이다. 이것은 폼페이에 있는 목신 파우누스의 사당에서 발견한 것으로, 알렉산더가 죽은 뒤 에레트리아의 필로크세노스가 그린 것을 복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왕은 친구 헤페스티온을 데리고 여자들을 찾아갔다. 두 사람은 같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헤페스티온이 용모로 보나 체격으로 보나 더 뛰어났기 때문에 시시감비스는 그를 왕으로 여기고 그 앞에 넙죽 엎드렸다. ……"

"…… 반응이 없자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알렉산더 앞에 재차 엎드렸다. 그러자 알렉산더는 입을 열고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아무 걱정 마십시오.' 역시 알렉산더다운 말이었다. 늙은 여인을 어머니라 부름으로써 여인네들을 따뜻한 인간애로 대할 것임을 암시했던 것이다."

디오도로스

동전을 통해 왕의 영웅적인 이미지가 널리 유포되었다. 정복자는 이집트의 아몬신처럼 숫양뿔을 달고 있다. 아몬신이 시와의 오아시스에서 알렉산더에게 세계지배를 약속했는지도 모른다.

이집트에 입성하자 알렉산더는 지방귀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또한 파라오의 비호를 받은 사제들과 화합했고 룩소르에서는 신전에 예배소를 꾸몄다. 이 예배소의 벽 부조에서 알렉산더(부조의 오른쪽)는 파라오의 모습으로 자신이 숭배하는 미노스신 앞에 서 있다.


제3장

주요 도시들의 병합

 

3년 간 알렉산더는 정복에 정복을 거듭했다. 자신의 군대와 함께 수천 킬로미터를 달렸고 수많은 도시와 나라를 굴복시켰다. 하지만 다리우스 3세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 주지는 못했다. 한편, 다리우스 3세는 이수스에서 패한 이후로 바빌론에서 군대를 새롭게 편성했다. …… B.C. 331년 봄, 마케도니아인은 메소포타미아로 또다시 길을 떠난다.


B.C. 331년 가을부터 B.C. 330년 봄 사이의 몇 달 동안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왕이 머무르던 왕궁들(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 파사르가다이)을 차지했다. 그는 도시마다 승전자로서 당당하게 입성했다.

 

"마케도니아인은 의기양양하게 전차들을 에워싸고 무장을 해제시켰다. 마부와 말에게 엄청난 재앙이 덮친 셈이었다. 마부는 미친 듯이 날뛰는 말을 더이상 통제할 수 없었다. 말은 머리를 마구 흔들어댓고 그 바람에 멍에가 떨어져 나갔다. 자기 진영으로 돌진하는 전차도 생겼다. 상처 입은 말은 죽은 병사들을 끌고 다녔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말은 제자리에 멈출 수도, 앞으로 나아갈 기력도 없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규모 그룹을 이룬 사두이륜전차들이 닥치는 대로 적군을 죽이면서 마지막 대열까지 이르렀다. 땅에는 몸통에서 잘려 나온 사지들이 나뒹굴었다. 병사들은 부상당한 상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치고 불편한 몸을 이끌고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무기를 놓지 않고 용감히 싸웠다."

퀸투스 쿠르티우스

브뢰겔이 놀라운 상상력으로 표현한 혼란스런 교전장면(아래)과 B.C. 4세기 그리스 화병 위에 그려진 세련된 그림(위) 모두 다리우스 3세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을 잘 보여준다. 그리스 화병은 말을 탄 알렉산더와 비무장한 채 전차에 올라탄 다리우스 3세의 모습을 통해 전투의 결과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패색이 짙어지자 다리우스 3세는 이수스 전투에서와 마찬가지로 싸움터에서 달아나고 말았던 것이다.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채찍소리를 들었다. 채찍을 든 마부가 왕의 말들을 쉬지 않고 후려쳤다. 이것이 다리우스 3세가 달아나면서 남긴 유일한 흔적이었다.

퀸투스 쿠르티우스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승리한 뒤 알렉산더는 바빌론에 당당히 입성했다. 그림은 샤를 르브룅이 루이 14세를 위해 베르사유궁에 그린 그림을 모방한 태피스트리이다.

"알렉산더의 모습은 리시포스가 제작한 조상들에서 가장 잘 표현되었다. 알렉산더도 리시포스가 자신의 조상을 제작해 주기를 원했다."

플루타르크

엘람의 옛 수도인 수사는 B.C. 520년 무렵부터 다리우스 1세가 단장하기 시작했다. 바빌론의 예술가들은 아시리아의 조상을 본떠 거대한 왕궁을 디자인했다. 외벽에 자리한 이 날개 달린 스핑크스들은 수호신의 일종이었다.

바빌론의 성도(聖道)는 푸른색 유약을 칠한 벽돌로 장식한 이시타르의 문을 기점으로 시작된다. 이 벽돌 위에는 신화 속의 동물들과 실재하는 동물들(용과 황소 575마리, 사자 120마리)이 새겨져 있다.

키루스 대왕은 페르세폴리스 근처에 위치한 돌무덤 속에 묻힌 자신의 후계자들과 달리 수도인 파사르가다이에 자신의 능을 만들게 했다.

"이 방에 키루스 대왕의 유해가 들어 있는 금으로 된 관이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금으로 세공된 다리가 달린 침대가 있었다. 침대에는 바빌론산 이불과 자줏빛 망토가 깔려 있었다. 무엇보다도 바빌론에서 만든 페르시아식 의복과 소매 달린 옷들이 눈에 띄었다."

아리아누스

드넓은 평야를 굽어보는 높은 언덕 위에 건설된 페르세폴리스는 다리우스 1세가 건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마지막 왕들이 재임하는 기간까지 공사가 계속되었다. 왕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거나 기존의 건물이 개축되곤 했다.

궁의 전면은, 여기에 재현해 놓은 다리우스 1세의 왕궁처럼 권력의 심장부다운 호사스러움을 과시하는 색벽돌로 장식되어 있었다. 원주의 소벽 위, 측면의 원반 속에는 인간의 형상을 한 위대한 신 이후라마즈다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왕궁은 페르시아의 파라다이스라고 소문난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이 정원은 주변 풍경에 사치스러움을 더해 주었다.


제4장

페르시아의 새로운 대왕


다리우스 3세는 기우가멜라 전투에서 패배한 뒤 페르시아 제국의 여름 궁전이 있는 엑바타나로 피신했다. 그는 그곳에서 금은으로 뒤덮인 휘황찬란한 왕궁과 신전 속에 파묻혀 복수를 계획했다. 그는 전열을 정비하여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알렉산더와 정정당당하게 싸워 보고 싶었다. 이번에는 행운의 여신이 자기 편이기를 기대하면서…….

19세기 말 옥수스 강 기슭에서 금은으로 만든 세공품들이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은 정착민들이 살던 지역과 스키타이족이 거주한 스텝 지역 간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 주는 증거이다. 의자가 설치된 이 황금 4두 마차상도 그 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 스텝 유목민들이 쓰던 전차를 축소한 것으로 보인다. 헤로도토스는 유럽의 스키타이족(우크라이나)은 '이동가옥'인 수레에서 사는 것이 특징이라고 기록했다.

스키타이의 기사들은 페르시아군의 정예부대를 구성했으며, 페르시아 전쟁중 그리스에서 벌어진 초기 전투에서부터 참가했다. 스키타이 전사들은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를 도와 싸움을 치렀고, 베소스, 스피타메네스와 합류했다가 알렉산더에게 분쇄되었다.

약사르테강 건너에 사는 일부 스키타이족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B.C. 516~515년 다리우스 1세는 스키타이의 슌 카왕과 싸워 이겼다. 그의 모습은 반란을 일으킨 다른 왕들과 함께 베히스툰 바위에 새겨져 있다. 그는 뾰족한 모자를 쓰고 있어 쉽게 알아볼 수 있는데, 이 모자를 보고 페르시아인은 이 종족을 '화살처럼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쓴 스키타이족'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란의 귀족들과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 알렉산더는 B.C. 327년 박트리아의 아름다운 로크사네 공주와 정략결혼을 하기로 결심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의 측근들도 박트리아 공주들과 결혼하도록 권유했다. 성대하게 치러진 결혼식은 마케도니아의 전통을 따랐는데, 이것은 결혼으로 패배자들과 완전히 동화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밝혀지는 의도였다. 게다가 충성심을 확인하기 위해서 유대를 맺은 귀족들에게는 신의의 표시로 볼모를 보내게 했다. 이렇게 해서 로크사네의 아버지인 옥시아르테스는 두 아들을 정복자에게 딸려 인도로 보내야 했다.

"욕정에 사로잡힌 알렉산더는 자기 나라의 풍속대로 빵을 가져오게 했다. 마케도니아에서 빵은 육체적 결합을 의미하는 신성한 상징이었던 것이다. 그는 칼로 그 빵을 잘라 신부와 나눠 먹었다. …… 그리하여 아시아와 유럽을 지배하는 왕이 포로와 결혼으로 맺어지게 되었고 이 포로는 피정복민들을 다스릴 아이를 낳게 되었다."

퀸투스 쿠르티우스

알렉산더는 공식적인 알현의식을 강요하는 등 페르시아 궁정예법에 따랐다. 왕좌에 위엄 있게 앉은 대왕이 방문객을 맞고 있는데 이 방문객은 상체를 완전히 숙이고 왕의 오른손에 입을 맞춰야 했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를 왕이 자신을 신과 동일시하는 증거로 오인하고 '프로스키네즈(Proskynese)'라 불렀다.

 

제5장

인더스강에서 페르시아만까지

 

B.C. 516~515년, 다리우스 1세가 간다라와 신드를 정복했다. 그러나 2세기 후부터 아케메네스 왕조의 권위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B.C. 326년 인도의 여러 왕국들은 인더스강 유역과 그 지류의 영토를 되차지했다. 알렉산더는 자신이 페르시아의 옛 영토를 되찾겠다는 야심에 불타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사이에는 카이바르 고개가 버티고 있다. 해발 1,100m, 길이 50km인 이 협곡은 중간 지점에서 폭이 좁아진다.

"포로스는 주위에 코끼리 40마리를 거느리고 적진을 향해 돌진하여 치명적인 손실을 입혔다. 그는 다른 기사들보다 덩치가 크고 힘도 셌으며 2.2m가 넘는 장신이었다. …… 또한 그는 쇠뇌 같은 힘으로 창을 던졌다."

디오도로스


"인도 보병대의 사상자는 족히 2만 명은 되었다. 기마병은 약 3,000명이 죽었고 전차들은 모두 파괴되었다. 포로스의 두 아들도 유명을 달리했다. 코끼리와 전차를 지휘하던 사령관들과 기마부대의 사령관, 그리고 포로스 군대의 장군들 모두가 같은 운명이었다."

아리아누스

"몇몇 기사를 거느린 알렉산더는 앞장서서 말을 타고 포로스를 만나러 갔다. 그는 말을 멈추고서 포로스의 체격과 잘생긴 얼굴, 굽힐 줄 모르는 투지에 감탄을 표했다. 한 용감한 인간이 또 다른 용감한 인간을 만난 셈이었다. 그러고 나서 알렉산더는 포로스에게 어떻게 대우받기를 원하는지 물어 보았다. 포로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왕으로 대해 주시오.'"

아리아누스

탁실라왕이 알렉산더에게 항복하자 포로스는 독립을 유지하고 인도 북부에서의 주도권을 지키기 위해서 알렉산더에게 대항하기로 했다. 이 10드라크마짜리 은화에는 전쟁이 두 왕 - 한 사람은 말을 타고 또 한 사람은 코끼리를 타고 있다 - 사이의 싸움으로 표현되어 있다.

알렉산더가 인도에서 거둔 승리를 찬양하기 위해서 그의 후계자들은 코끼리 가죽을 머리에 쓴 왕의 모습을 조각했다.

왕이 죽었다는 헛소문이 후방에 파다하게 퍼진 시기에 포로스를 이긴 것은 아시아 원정 가운데 가장 값진 승리였다. 따라서 알렉산더가 거둔 이 승리를 소재로 한 그림들이 수없이 그려졌다. 귀스타브 모로의 그림도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


"젊은 정복자는 그의 발치에 엎드린 모든 피정복 민족들을 다스렸다. 막강하고 찬란한 왕권이 수립된 인도의 작은 계곡에는 환상적인 신전들, 성스러운 호수들, 신비와 공포로 가득 찬 지하세계 등 인도의 모든 모습이 담겨 있다. …… 그리고 그리스, 찬란하고 아름다운 그리스의 영혼이 꿈과 신비로 가득 찬 이 먼 미개척지에서 찬란한 빛을 발했다."

귀스타브 모로


"사냥꾼들은 '사로잡은 코끼리들'을 마을로 데려와서 우선 식용 갈대와 풀을 주었다. 하지만 코끼리들은 드러누운 채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자 인도인의 코끼리들을 둘러싸고 북과 심벌즈를 치면서 노래를 불러 주었고 그제서야 코끼리들은 먹기 시작했다. 사실 코끼리는 영리한 동물이다. …… 전쟁터에서 죽은 주인의 시신을 수습하여 운반해서 사람들이 장례를 치르게 해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올 정도이다. 어떤 코끼리들은 주인이 땅바닥에 쓰러져 있을 때 방패구실을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코끼리들은 주인이 쓰러졌을 때 그를 보호하려고 직접 싸우기도 했다. 성이나서 주인을 죽인 코끼리가 절망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리아누스

 

제6장

마지막 나날, 그리고 마지막 계획

 

정복전쟁에 나서 자리를 비운 지 6년, 알렉산더는 제국이 심각한 혼란에 빠져 있음을 알게 도었다. 그가 임명한 지사들과 관료들 중 대다수가 직무태만에 빠져 있거나 직위를 ㄴㅁ용하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왕이 죽었다는 헛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던 탓이었다. 이제 알렉산더의 최우선 목표는 정복한 나라들과 도시들을 다시 장악하는 것이었다.

B.C. 325년, 알렉산더의 여생은 2년 남짓 남아 있었다. 그는 이제는 자기 차지가 된 옛 페르시아 제국의 주요 도시들을 왕래하면서 마지막 2년을 보냈다. 그렇지만 마지막 긴 여행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빌론에서 출발하여 오늘날 고고학계의 가장 큰 불가사의로 남아 있는 그의 무덤이 있는 알렉산드리아까지 상여를 타고 가는 여행이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그곳에 가서 묵념을 올렸을까? 17세기의 이 그림은 그런 상상을 가능하게 해준다.

알렉산더는 일부 지사들에게서 보이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확산될 것을 우려하여 반란이 일어날 때마다 강경한 조처를 취했다. 퀸투스 쿠르티우스는 왕이 지나치게 가혹하게 진압했다고 누누이 강조햇다. 로마 시대의 역사책을 복제한 중세의 한 필사본에 들어 있는 이 채식삽화들은 그 사실을 입증해 준다.

 

"(메디아의 장군들이 일으킨) 사태에 관한 소식을 들은 왕은 그들을 즉각 체포할 것이며 구제의 여지가 없음을 통보했다. 사실 그들은 알렉산더가 인도에서 무사히 귀환하기를 바랐거나 믿었더라면 감히 그 같은 범죄를 저지를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왕은 이들을 투옥시켰고 그들의 배신행위에 동조한 병사 600명을 처형시켰다. 같은 날, 페르시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주동자들이 사형에 처해졌다."

퀸투스 쿠르티우스

5년 전에 일어난 화재로 도시가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왕 중 왕(王中王), 즉 대왕이 되고자 하는 알렉산더는 페르세폴리스를 매우 중요한 도시로 여겼다. 페르세폴리스는 새 제국의 수도가 되지는 못했지만 이후로도 페르시아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는 전에 자신이 불을 지른 적이 있는 -- 나는 이 행위에 찬동하지 않았다 -- 페르시아의 왕궁으로 향했다. 하지만 현자에 와본 알렉산더는 자신이 저지른 행위가 떳떳하지 못했음을 까달았다."

아리아누스

"알렉산더는 (파사르가다이에서) 석관과 침상을 빼고는 텅비어 버린 키루스 대왕의 무덤을 발견했다. 불경한 자들은 석관 뚜껑을 열고 키루스 대왕의 시신을 밖으로 내던져 버렸고, 들고 가기 쉽도록 석관의 일부를 떼어 내고 일부는 아예 없애 버렸다. 하지만 일이 여의치 않자 그들은 석관을 원래 있던 자리에 내동댕이친 채 도망가 버렸다."

아리아누스

"'내가 앉아서 명령만 내리면서 이 모든 것을 얻었단 말이오? 그대들 중에서 내가 그것을 얻으려고 애쓴 것 이상으로 나를 위해 애쓴 자가 있소? 자, 그러니 갑시다! 부상당한 사람이 상처를 내보인다면 나도 내 상처를 보여 주겠소! 나는 그대들의 부와 영광을 위해 싸우다가 부상당했소! …… 사실 요즘 나는 고향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이제 군복무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되돌려보낼 생각이었소. 하지만 그대들 모두 가겠다면 그렇게 하시오!' 이렇게 말하고서 그는 자신의 거처로 되돌아갔고 측근들 앞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사흘 뒤 그는 왕궁으로 페르시아의 간부들을 불러모았고 그들에게 부대별로 지시를 내렸다. …… (마케도니아인에게) 페르시아인과 왕 사이에 진행되고 있는 일이 전해지자 …… 그들은 모두 왕궁으로 달려가 알렉산더가 자신들을 통촉해 주지 않는 한 문에서 한 발짝도 물러날 수 없다며 울부짖었다. (이를 보고) 알렉산더가 밖으로 나왔고 …… 그 역시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아리아누스

 "알렉산더는 바빌론에서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 동료들로부터 왕국을 누구에게 넘겨주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최선책은 동료들이 나의 죽음을 기리는 장렬한 싸움을 치르는 것일게요.' 결국 그의 말대로 되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동료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동료들이 최고봉의 자리를 놓고 다투었고 수많은 전투를 치렀기 때문이다."

디오도로스

시돈에서 발굴된 석관

19세기에 시돈에서 왕실묘지가 발굴되면서 지방군주의 무덤 몇 기가 빛을 보았다. 그중 하나는 대대로 알렉산더의 석관으로 여겨져 왔다. 거기에는 전투장면과 사냥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그것들은 당시 막 개발된 다색배합(多色配合)으로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다. 그 시대의 조각판 중 하나에는 사자가죽을 머리에 쓴 마케도니아 기마병이 묘사되어 있다. 쓰러지는 말 위에 탄 한 페르시아인 앞에서 앞발을 든 말에 타고 있는 이가 바로 알렉산더이다. 이 장면은 전쟁터에서 보여 준 왕의 용맹스런 행위를 다소 과장되게 재구성한 것 같다. 이수스 전투가 끝나자 시돈은 알렉산더에게 아무런 저항없이 항복했고 알렉산더는 아브달로님에게 왕권을 넘겼다. 아마도 아브달로님이 그리스의 예술가에게 이 석관을 주문해서 정복자의 공적을 칭송하는 장면들을 그리도록 분부했을 것이다.

전쟁과 사냥

예술가는 전투장면 옆에다가 페르시아와 마케도니아 양국 모두에서 왕권의 상징으로 통하는 사냥장면들을 석관의 여러 판에 새겨 놓았다. 그에게는 이것이 왕의 눈에 들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사냥은 사자, 표범, 사슴 등 온갖 종류의 짐승들을 보호하는 구역에서 했다. 퀸투스 쿠르티우스가 전하는 바로는 사냥은 대규모로 이루어져서 박트리아에 있는 한 야생동물의 서식지에서 단체사냥이 끝날 무렵이면 4,000마리 이상의 짐승들이 알렉산더와 그 일행의 손에 죽었다고 한다. 석관의 부조는 시돈에 있는 페르시아 동물천국에서 왕이 참가한 단체 사냥장면을 묘사한 듯하다. 이날 사냥에서 왕의 친구인 리시마크가 사자에게 물려 중상을 입었다. 여기서 두드러진 점은 전투장면과 반대로 페르시아인과 마케도니아인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야수들을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술가는 알렉산더가 의도한 마케도니아와 이란 간의 협력정책을 상징적으로 묘사하려 한 것이다.

알렉산더가 죽은 뒤 오리엔트는 두 개의 큰 왕조 -- 하나는 프톨레마이오스(위)가 이집트에 세운 것이고 또 하나는 소아시아의 셀레우코스(아래)가 인더스강 유역에 세운 왕조이다 -- 의 지배하에 놓였다. 새로운 왕들은 자신들의 얼굴을 새긴 주화를 발행했다.

알렉산더는 《일리아드》를항상 머리맡에 놓아 두고 보았으며 트로이 전쟁의 영웅들을 모델로 삼았다. 그리고 출항할 때마다 아킬레스에게 경배를 올렸다. 허버트 로버트의 이 그림은 알렉산더가 가상의 트로이의 신전과 묘지들 사이에 서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플루타르크는 알렉산더와 카이사르를 같은 수준에 올려놓았다.

 



posted by 황영찬
2014. 11. 13. 16:25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107 늦게 온 소포


고두현 시집

2002, 민음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28139


811.6

고26늦


고두현

1963년 경남 남해 출생

경남대 국문과 졸업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등단


차례


1 땅 이야기


빗살무늬 추억 / 달과 아이들 / 횡단보도 / 손바닥에 빗물 고이네 / 늦게 온 소포 / 연밥을 따며 / 해금(海琴)에 기대어 / 땅 이야기 / 상생(相生) / 발왕산에 가보셨나요 / 상원사 / 남으로 띄우는 편지 / 4월 장자(莊子) / 장수잠자리 / 외포리에서 / 칡꽃 / 봄 꽃 편지 / 인동당초 벽화 / 불목하니 / 직녀


2 밥에 관한 생각


보고 싶은 마음 / 오목 / 산할미꽃 / 참회 / 먼 그대 / 묵언 / 산에 가야 맛을 알지 / 남해 금산 큰 새 / 말씀 / 사람들 산에 오르다 / 산감나무 / 허암사 빈 절에 얽힌 / 겨울 두타산 / 밥에 관한 생각 / 풋고추 / 헌 집에 들며


3 유배시첩(流配詩帖)


남해 가는 길 / 울타리 밖에 채마밭을 짓고 / 안부 / 적소에 내리는 눈 / 꿈에 본 어머님 / 구운몽 / 잎 속의 바다 / 세 발 까마귀 / 월광(月光) 소섬 / 희방사 길 / 꿈꾸는 돌기둥 / 그리운 굴뚝 / 사랑니 / 집 짓기 / 마음의 등짐 / 참 예쁜 발 / 끈


4 참나무와 함께 자다


책성의 목책 울타리 / 자작나무 숲 / 발해 금(琴) / 발해 자기 / 푸른 기와로 지붕 얹고 / 발해 맷돌 / 그리운 그대 느릅나무 강 / 노성의 벼 / 수이푼강 / 도읍 / 참나무와 함께 자다 / 줄 없는 현금(玄琴) / 신라 가는 길 / 길이 끝나는 곳에 / 옥주에서 들은 얘기 / 콩밭 / 그 우물 아직 / 쑥무덤


늦게 온 소포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닫지 못한다.

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

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

어머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

빈 지붕만 지키는 쓸쓸함

두터운 마분지에 싸고 또 싸서

속엣것보다 포장 더 무겁게 담아 보낸

소포 끈 찬찬히 풀다 보면 낯선 서울살이

찌든 생활의 겉꺼풀들도 하나씩 벗겨지고

오래된 장갑 버선 한 짝

해진 내의까지 감기고 얽힌 무명실 줄 따라

펼쳐지더니 드디어 한지더미 속에서 놀란 듯

얼굴 내미는 남해산 유자 아홉 개.


「큰 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몃 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울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리라」


헤쳐놓았던 몇 겹의 종이

다시 접었다 펼쳤다 밤새

남향의 문 닫지 못하고

무연히 콧등 시큰거려 내다본 밖으로

새벽 눈발이 하얗게 손 흔들며

글썽글썽 녹고 있다.


땅 이야기


내게도 땅이 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상주중학교 뒷산

철 따라 고운 꽃 피지도 않고

돈 주고 사자는 사람도 없는

남해 상주 바닷가 언덕

한 평 못 차는 잔디 풀밭 거기

평생 남긴 것 없는 아버지의 유산이

헌 옷으로 남아 있다.


저 눕고 싶은 곳 찾아

아무데나 자리잡으면 그 땅이 제 땅 되는

우리들 아버지의 아버지대로부터

사람들은 기억하기 위해 무덤을 만들고

더욱 잊지 않기 위해 비를 세웠다지만

중학에 들어가자마자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나는 학교 옥상에서 그 언덕빼기

공동묘지를 바라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세우질 못했다.


철 들고 부끄럼 알 때 즈음

흙이 모여 돈이 되고 묘 자리도 잘라서 팔면

재산이 된다는 나라

시내버스로 휴일 한나절

쉽게 벌초도 하고 오는 근교 공원묘지

아파트처럼 분양을 받고

중도금 잔금 치러가며 화사하게 다듬은

비명들 볼 때마다 죄가 되어

나도 햇살 좋은 곳 어디

한 열두 평쯤 계약을 할까.


그런 날은 더 자주 꿈을 꾸고

잠 속에서 좁은 자리 돌아누우며

손 부비는 아버지

고향길 멀다는 것만 핑계가 되는 밤이

깊어갈수록 풀벌레 소리 적막하고

간간이 등 다독이는 손길 놀라

잠 깨보면 쓸쓸한 봉분 하나

저녁마다 내 곁에 와 말없이 누웠다가

새벽이면 또다시 천리 남쪽 길 떠나는

아픈 내 땅 한 평.


밥에 관한 생각


냉장고 문에

에티오피아 아이들

굶는 사진 붙여놓고 석 달에 한 번

용돈으로 성금 채우는 건이 녀석,

장난치다가 짐짓

눈길 굵어지는 표정


아내가 달덩이 같은

밥상을 들고 들어올 때

누군가 수저를 놓고 쨍, 지구의

반대편으로 돌아가는 소리

들린다.


먹는 일의 성스러움이란

때로 기품 있게 굶는 일.

식구들 모여

오래오래 냉장고 문을

바라보는 것이기도 하다.


남해 가는 길

- 유배시첩 · 1


물살 센 노량 해협이 발목을 붙잡는다.

선천(宣川)서 돌아온 지 오늘도 몇 날인가.

윤삼월 젖은 흙길을

수레로 천 리 뱃길 시오 리

나루는 아직 닿지 않고

석양에 비친 일몰이 눈부신데

망운산 기슭 아래 눈발만 차갑구나.

내 이제 바다 건너 한 잎

꽃 같은 저 섬으로 가고 나면

따뜻하리라 돌아올 흙이나 뼈

땅에서 나온 모든 숨쉬는 것들 모아

화전(花田)을 만들고 밤에는

어머님을 위해 구운몽(九雲夢)을 여끙며

꿈결에 듣던 남해 바다

삿갓처럼 엎드린 앵강에 묻혀

다시는 살아서 돌아가지 않으리.


*앵강은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이 만년에 유배 살던 남해 노도(櫓島) 앞바다 이름이다.


참나무와 함께 자다


산이 짙어 작잠누에를 쳤더니

산은 간데없고 명주폭 흰 치마에

깁옷 입은 발해 며느리

갓 시집 온 고치 속에서 달빛만 뽑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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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
2014. 11. 11. 12:54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106 HOW TO READ 프로이트 Sigmund Freud

 

조시 코언 지음 | 최창호 옮김

2007, 웅진지식하우스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31817

 

082

하66ㅇ v. 7

 

"물론 우리는 프로이트 이론을 믿어요!" 나

"내 안에는 근친상간의 욕망이 숨어 있답니다"와 같은 반응과

"그의 이론은 완전히 엉터리지"나 "우리 어머니? 어디 아픈 것 아니야?

너야말로 상담이 필요한 것 같은데…"와 같은 정반대의 반응이

아무런 문제 없이 공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프로이트에 대한 수용과

거부 또는 이해와 무지가 공존하는 시대에

다시 우리는 "프로이트로의 복귀"를 고민한다.

 

HOW TO READ

●  ●  ●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도발적인 작가와 사상,

그들의 글을 원전으로 직접 만난다

 

인간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혁신적 이론가, 프로이트

 

이 책은 프로이트의 날카로운 통찰력이 인간의 내면세계를 얼마나 풍부하고 복잡하며 신비로운 존재로 변화시켰는지 보여준다. 또한 프로이트의 흥미롭고 자극적인 이론이 히스테리, 변태, 실언, 꿈, 농담, 상담 치료, 사랑(타인을 향한 사랑과 자기애) 그리고 죽음 같은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소한 말과 행동 속에도 심오하고 복잡한 의미가 숨어 있다는 점을 밝혀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프로이트를 정확히 알고 싶다면 프로이트의 모든 이론이 무의식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명료함을 최우선시 하던 19세기 과학계 분위기에서, 프로이트가 확고부동이라는 틀을 허물어트리고 '무의식'이라는 경험의 영역으로 과감히 뛰어 들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HOW TO READ 시리즈

위대한 사상, 세기의 저작을 원전으로 직접 만나는 특별한 기회, HOW TO READ 시리즈, 이 시리즈는 세계적 석학들의 안내를 받으며 사상가들의 저작 중 핵심적인 부분을 직접 읽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읽는 척 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제대로 읽을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우리시대 교양인을 위한 고품격 마스터클래스가 될 것이다.

 

조시 코언 Josh Cohen

런던의 골드스미스대학교 영문학 및 비교문학 교수다. 현대 문학, 철학, 정신분석학 등에 관련한 다양한 저술 활동을 펴고 있다. 대표작 《일시적으로 중단된 아우슈비츠》를 통해 나치의 대량 학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정신분석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최창호

중앙대학교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국 창의성인력개발원 대표 및 시사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무엇이 사람을 움직이는가》《그래, 이게 바로 나야》《심리학이란 무엇인가》《연구실 밖으로 나온 심리학》《나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등이 있다.

 

차례

 

■ HOW TO READ 시리즈를 열며

■ 저자 서문 : 인간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혁신적 이론가, 프로이트

 

1 히스테리의 시작

: 《과학적 심리학 연구》

2 무의식의 세계

: <무의식>

3 무의식의 위트, 꿈

: 《꿈의 해석》

4 재미있는 무의식

: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

5 "나는 타자다"

: <부정>

6 친숙한 존재의 낯선 모습

: <기이한 현상>

7 근친상간의 환상

: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8 모호한 욕망의 대상, 나르시시즘

: <나르시시즘에 관하여>

9 가장 모호한 욕망의 대상, 죽음 충동

: 《쾌락원리를 넘어서》

10 사디즘과 마조히즘

: <마조히즘의 경제적 문제>

 

■ 자료 출처

■ 주

■ 프로이트의 생애

■ 함께 보면 좋은 자료

■ 역자 후기 : 의식의 세계를 넘어 무의식의 세계로!

 

1

히스테리의 시작

: 《과학적 심리학 연구

 

프로이트는 히스테리 증상이 특정한 병인, 즉 환자가 "경험하고 싶지 않거나 차라리 잊고 싶어 하는 나쁜 기억"에서 시작된다고 설명하였다. 이런 기억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울 때면 환자들은 이것을 마음 한쪽 구석에 가둬놓고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주변에 튼튼한 방어벽을 쌓아두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방어벽을 쌓는다고 해서 기억 자체가 사라질 수는 없다. 우리가 방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고통스러운 기억을 다른 모습으로 바꾸거나 다른 장소로 옮기는 것뿐이다.

 

2

무의식의 세계

: <무의식>

 

무의식에 속한 모든 과정에는 시간성이 결여되어 있다. 즉 무의식의 과정은 현실 속 시간의 순서를 따르지 않으며 시간이 지나도 변화하지 않는다. 이것은 시간의 흐름과 전혀 무관한 존재다. 다시 말해 시간성은 의식의 활동과 관계될 뿐이다.

 

3

무의식의 위트, 꿈

: 《꿈의 해석

 

의식이 깨어 있을 때 나는 위트가 전혀 없는 사람이다. 만약 내 꿈이 흥미롭다면 그것은 내가 한 짓이 아니다. 다만 꿈이 생성될 때 내가 처한 특이한 심리적인 상황에 따라 저절로 만들어졌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농담과 코믹의 법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꿈이 독창적이고 흥미롭게 변한 이유는 쉬우면서도 직접적인 길이 막혀 있기 때문이다. 꿈은 의식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돌아갈 수밖에 없고, 그러는 과정에서 독창적이고 흥미롭게 바뀔 수밖에 없는 것이다.


4

재미있는 무의식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


무의식은 대단히 교활하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통하지 않을 때에 무의식은 "아주 어처구니가 없거나 피상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그 모습을 드러낸다. 더 나아가 프로이트는 꿈 분석을 통해 무의식이 의식으로 넘어가는 우회로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결코 자만심 때문에 실수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발견하였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이러한 발견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농담에는 무의식이 너무 지나치지도 약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농담의 강도가 너무 강하지도 그렇다고 약하지도 않았다."


5

"나는 타자다"

: <부정>


"내 생활 속에 깃들어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내 나머지 정신세계와 연결되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을 때에는 내 안에 또 다른 존재로 인정해야 한다." 정신분석은 결국 '내'가 말을 할 때면 마치 복화술처럼 가까우면서도 멀리 있는 것 같은 또 다른 존재가 내 안에 존재한다는 충격적인 사실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 '다른 사람'은 다른 말로 무의식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6

친숙한 존재의

낯선 모습

: <기이한 현상>


'우리 앞에 나타난 기이한 존재는 실제로 전혀 새롭거나 생소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정신 속에 이미 친숙하게 오랫동안 존재하던 어떤 것이라고 보아야 하며, 단지 억압의 과정을 거쳐 그 친숙함을 잃었을 뿐이다.' 억압을 당해 무의식으로 떨어진 충동이 다시 떠오를 때면 항상 기이한 가면을 쓰고 등장한다. 억압당한 우리의 정신은 극히 친숙한 존재를 알아보지 못한다. 억압당한 충동이 정신으로 돌아올 때 그토록 기이하게 보이는 것도 바로 친숙함을 잃었기 때문이다.


7

근친상간의 환상

: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프로이트는 "대단히 역설적인 말이라 수긍하기 힘들겠지만 진정으로 사랑하면서 자유롭고 행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여성에 대한 경외심을 극복하고 자신의 어머니나 여동생을 향한 근친상간의 환상을 사실로 인정해야 한다"라고 썼다.


8

모호한 욕망의 대상,

나르시시즘

: <나르시시즘에 관하여>


성인의 성생활에서 이 자기애는 '나르시시즘'이라는 형태를 빌려 주기적으로 복원된다. 따라서 나르시시즘적인 사랑을 하는 자는 나르시스 신화처럼 대상에 자기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나타날 때에만 그 대상을 사랑할 수 있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적인 사랑이 어떤 면에서는 '의존적'사랑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나르시시즘적인 사랑은 다른 무엇보다 자기애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유아에게 나타나는 타인에 대한 집착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이 확장된 것에 불과하다.


9

가장 모호한

욕망의 대상, 죽음 충동

《쾌락원리를 넘어서》


'변화의 진보'의 힘에 따르는 것처럼 보이는 생명현상은 사실 그 반대의 것, 생명체가 취하는 다양한 위장술 중에서도 가장 원초적이며 기만적인 기면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가면 밑에는 '나이가 많든 적든 한가지로 태곳적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힘'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모든 생명체의 목표는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괴상한 관점에서 보자면 진화의 최고 단계에서 쾌락에 이끌리는 인간의 모습은 다름 아닌 "각자의 방식대로 죽기"를 열망하는 생명체의 원초적 충동을 감춘 최신 위장술일 뿐이다.


10

사디즘과 마조히즘

: <마조히즘의 경제적 문제>


결국 쾌락원리를 '넘어서(beyond)' 우리가 발견한 것은 마조히즘이 사디즘의 또 다른 형태라는 사실이다. 이제 드디어 우리는 "사디즘의 원형은 마조히즘과 동일한 존재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사디즘은 죽음 충동에 맞서서 리비도가 승리하였음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며 마조히즘은 리비도에 대항하여 죽음 충동이 승리하였음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프로이트의 생애


1856년 5월 6일 프라이베르크 모라비아에서 출생.

1860년 가족과 함께 빈으로 이주.

1873년 의과대학 진학.

1876~1882년 빈 생리학 연구소의 브뤼케(Ernst Brucke) 밑에서 일함.

1877년 뱀장어와 칠성장어의 해부학에 관한 책 처녀 출간.

1881년 의사 자격 취득.

1882년 베르나이스(Martha Bernays)와 약혼.

1882~1885년 빈 종합병원에 재직.

1882년 브로이어(Josef Breuer)에게 안나 오(Anna O.) 사례에 관해 들음.

1884~1887년 코카인의 의학적 용도에 관해 연구.

1885년 신경 병리학 분야의 강사(Privatdozent)로 임명됨.

1885~1886년 파리 살페트리에르(Salpetriere)의 샤르코(Jean Martin Charcot) 밑에 서 수학. 신

            경증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됨.

1886년 베르나이스와 결혼. 신경증 환자 치료를 위한 개인 병원 개원.

1887년 환자 치료에 최면요법 도입. 여섯 자녀 중 장녀인 마르타(Martha) 출생.

1887~1902년 플리스(Wilhelm Fliess)와 우정을 다지며 서신 교환.

1889년 낭시에서 베른하임(Hyppolite Bernheim)의 최면 치료 현장 목격.

1891년 실어증에 관한 논문 완성.

1893년 브로이어와 함께 신경증에 관한 의학적 발견을 다룬 《예비 대화 Preliminary               

           Communication》 출판

1893~1898년 신경증, 강박증, 불안증에 관한 여러 편의 짧은 논문 완성.

1895년 브로이어와 함께 《히스테리 연구 Studies on Hysteria》 출간. 《과학적 심리학 연구    

          Project for a Scientific Psychology》 미완성 초안을 작성하여 플리스에게 보냄. 프로이트

          사후 1950년에 출간됨.

1896년 '정신분석(psychoanalysis)'이라는 용어 사용 시작. 80세를 일기로 부친 사망.

1897년 자가 분석(self-analysis) 시작. 실질적 성폭행 경험에서 유래한 신경증에 기초한 '유혹 이

            론(seduction theory)'을 폐기하고 '유아 성욕론(infantile sexuality)'을 채택함.

1900년 《꿈의 해석 The Interpretation of Dreams》 출판

1901년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 The Psychopathology of Everyday Life》 출판.

1905년 '도라(Dora)'의 사례 발표.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Three Essays on the Theory of 

           Sexuality》,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 Jokes and Their Relation to the Unconscious》 출판.

1906년 취리히의 정신과 의사 융(Carl Gustav Jung)이 정신분석학의 열렬한 신봉자로 나서게 됨.

1908년 잘츠부르크에서 세계 최초로 국제 정신분석학 회의 개최.

1909년 융과 함께 미국을 방문하여 '정신분석학에 대한 다섯 번의 강연(Five Lectures on 

            Psychoanalysis)' 실시. '리틀 한스(Little Hans)'와 '쥐 사나이(Rat Man)' 사례 소개.

1911년 프로이트 신봉자였던 아들러(Alfred Adler)가 최초로 정신분석학 이탈 운동 조직. 정신병자

            였던 슈레버(Shreber) 판사의 회고록을 분석하여 논문으로 발표.

1913년 《토템과 터부 Totem and Taboo》 출간.

1914년 융이 정신분석학과 결별하고 자기만의 학과를 창설.

1915년 '초심리학(metapsychological)'에 관한 여러 편의 논문 저술. 이 중 다섯 편만이 현재까지 

            전해짐.

1915~1917년 《정신분석 입문 Introductory Lectures on Psychoanalysis

1920년 차녀 소피(Sophie) 사망. 《쾌락원리를 넘어서 Beyond the Pleasure Principle》 완성.

1921년 《집단 심리학과 자아분석 Group Psychology and the Analysis of the Ego》 출간.

1923년 《자아와 이드 The Ego and the Id》 출간. 암 진단 받음.

1926년 《억압, 여러 가지 증상과 불안증 Inhibitions, Symptoms and Anxiety》 출간.

1930년 《문명과 욕구불만 Civilisation and Its Discontents》 출간. 95세를 일기로 모친 사망.

1933년 새로 집권한 나치당이 베를린에서 프로이트의 책을 분서함.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자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피난. 《정신분석학 개요 An Outline 

             of Psychoanalysis》 출간.

1939년 9월 23일 런던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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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
2014. 11. 11. 08:33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105 주말엔 서울여행

 

· 사진 유철상

2014, 상상출판

 

대야도서관

SB100690

 

981. 1602

유83ㅈ

 

서울여행 223곳! 코스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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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람의 평생 소원은 북경을 한 번 밟고 죽는 것이란다. 우리에게도 서울이 있건만 여태 그 소중함을 모르고 살아왔다. 서울의 볼거리, 먹거리, 쇼핑거리뿐만 아니라 숨겨진 역사 이야기까지 총 망라해 전철패스 한 장이면 600년 도읍지 서울이 내 것이 된다.

>이종원 『우리나라 어디까지 가봤니? 56』 저자

 

서울은 대한민국 관광 1번지다.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도 해마다 늘어나면서 서울이 세계적인 관광 명소로 뻗어나가고 있다. 첨단 유행과 전통이 공존하고, 도심에 북한산과 한강이라는 아름다운 자연이 자리한 서울은 여행지로 숨겨진 매력을 품고 있다.

『주말엔 서울여행』은 서울을 권역별로 소개하고 있어 굳이 여행이 아니더라도 산책을 나서듯 구석구석 찾아다니는 재미를 선물한다.

>이성곤 월간 《바앤다이닝》발행인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5개의 궁과 종묘에서 한국 건축미의 정수를 만날 때, 전통과 현대의 멋스러움이 사이좋게 어우러진 인사동과 삼청동과 북촌을 거닐 때, 초대형 재래시장인 남대문시장과 세계인의 쇼핑 천국인 명동을 휩쓸고 다닐 때 서울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된다. 이 책은 여행작가 유철상이 부지런하고 알차게 소개한 서울여행 가이드북의 정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성환 《스포츠한국》기자

 

글 · 사진

유철상

 

선운사가 있는 고창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들판에 앉아 지평선 너머의 세상을 동경하며 자랐고, 청년 시절부터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특히 문화유산 답사를 좋아했다. 시와 소설을 썼고 대학교 3학년 때 《광주매일》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당선되었다. 동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중앙일보 레저주간지 《FRIDAY》에서 여행전문기자로, 여행정보매거진 월간 《AB-ROAD》에서 편집장으로 일했다. 여행전문기자의 노하우를 살려 랜덤하우스코리아에서 여행출판팀 편집장으로 일했고, 현재는 상상출판 대표로 있다.

(사)한국여행작가협회 정회원이며, 신문과 잡지, 사보에 여행칼럼을 쓰고 여행기를 연재했다. KBS, EBS, YTN 등에서 여행 패널로 참여해 구석구석 아름다운 우리나라를 소개하고 있으며 《경인일보》 레저전문위원을 지냈다.

저서로 『괌 · 사이판 셀프 트래블』, 『우리나라 가족여행 바이블 100』, 『사찰여행 42』, 『대한민국 럭셔리 여행지 50』, 『행복한 가족여행 만들기』, 『내 마음속 꼭꼭 숨겨둔 여행지』, 『감성여행』, 『절에서 놀자, 템플스테이』가 있으며, 『걸어유 충남도보여행』, 『대한민국 걷기 좋은 길 111』, 『호젓한 여행지』 등 12권의 공저가 있다.

 

|목차|

 

프롤로그

서울메트로 및 수도권 전철 노선도

서울의 축제와 실속여행 추천코스

 

HOT PLACES IN SEOUL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문화의 거리  인사동

한국 최고의 재래시장과 쇼핑타운  남대문

유행을 선도하는 서울 최고의 번화가  명동

서울 속에서 세계를 느끼는 관광특구  이태원

음악과 미술 그리고 클럽의 메카  홍대 앞

최신 유행과 문화가 어우러진 쇼핑거리  이대 앞

공연 문화의 일번지  대학로

한국 최고 패션 쇼핑의 천국  동대문

퓨전 문화와의 행복한 만남  강남역

트렌드세터들이 모이는 젊음의 거리  압구정동

대한민국 비즈니스와 복합쇼핑몰의 메카  삼성동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은 테마파크  롯데월드

 

Zone 1 궁궐

001 조선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하던 최대의 법궁  경복궁

002 거대한 정원처럼 아름다운 궁궐  창덕궁

003 우리나라의 으뜸가는 정원을 갖춘 궁궐  창덕궁 후원

004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가 깃든 궁  창경궁

005 대한제국의 아픈 상처가 남아 있는 궁궐  덕수궁

006 조선의 위기를 겪은 임시 궁궐  경희궁

007 파란만장했던 역사 공부와 운현궁 한 바퀴  운현궁

008 조선왕조의 정신이 깃든 곳  종묘

009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의 궁중음악  종묘재례악

010 한국인의 일생과 생활사를 관람할 수 있는 곳  국립민속박물관

 

Zone 2 도심

011 새롭게 태어난 서울의 명품 산책로  청계천

012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서울의 대표 광장  광화문광장

013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던 제천단  환구단

014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  숭례문

015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016 산책을 즐기며 감상할 수 있는 도심 속 미술관  성곡미술관

017 서울 시민들의 명품 도심 광장  서울광장

018 인사동을 예술로 승화시킨 테마 공간  쌈지길

019 차와 떡이 만난 전통문화공간  아름다운 차 박물관

020 미로처럼 이어진 신비로운 한옥마을길  북촌한옥마을

021 전통과 현대, 예술과 꿈이 공존하는 곳  삼청동길

022 종로의 시작이자 강북 도심의 중심  보신각

023 도심 속에 자리한 한국불교의 중심  조계사

024 대한제국의 흔적이 남아 있는 길  정동길

025 한적한 공원 같은 도심 속 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026 서울 시내의 대표적인 데이트 코스  덕수궁 돌담길

027 한국의 대표 공연이 펼쳐지는 곳  정동극장

028 세계를 강타한 창작극 <난타> 전용극장  난타전용관(정동)

029 농업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박물관  농업박물관

030 민주화의 상징이자 명동의 중심지  명동성당

031 전통공연도 즐기고 온가족이 즐거운 산책코스  남산골 한옥마을

032 서울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문화공간  남산공원

033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서울의 상징  N서울타워

034 인심이 넘치는 대한민국 최초의 상설시장  광장시장

035 오천 년 한민족의 문화가 집약된 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036 서울에서 가장 이국적인 분위기의 관광명소  이태원

037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미술관  리움미술관

038 을지로에 위치한 건어물 전문 전통시장  중부시장

039 서울 도심을 아름답게 품은 성곽길  서울성곽

 

Zone 3 서부권

040 쓰레기 매립지에서 레포츠공원으로 재탄생  월드컵공원

041 억새꽃이 하늘거리는 전망포인트  하늘공원

042 문화와 예술이 어우러진 젊은이들의 놀이터  홍대 앞

043 예술과 작품이 직거래되는 난장  홍대 프리마켓

044 대학가를 품고 있는 젊은이들의 해방구  신촌

045 카페와 공연이 가득한 젊은 작가들의 아지트  합정동

046 한강을 바로 곁에 두고 즐거운 캠핑놀이  난지도캠핑장

047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품은 근대식 감옥  서대문형무소

 

Zone 4 동부권

048 서울성곽의 쉼터이자 대학로의 숨겨진 휴식공간  낙산공원

049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 성균관의 보배  명륜당

050 동대문을 중심으로 이어진 서울성곽  동대문성곽공원

051 성북동을 천천히 거닐며 찾아낸 문인의 향기  수연산방

052 요정에서 사찰로 변신한 아름다운 절집  길상사

053 아름다운 정원을 품은 전통공연장  삼청각

054 대한민국 수도를 품은 서울의 진산  북한산

055 소원이 이루어지는 북한산의 불교성지  도선사

056 쉬고 싶을 때 언제나 쉴 수 있는 둘레길  북한산둘레길

057 민주화의 상징이자 열사들의 안식처  국립 4 · 19 민주묘지

058 파란 눈의 스님들이 친숙한 사찰 화계사

059 산세가 수려한 수도권의 천하절경  도봉산

060 서울숲에 사는 꽃사슴과 친구 해요  서울숲

061 한강 수상스포츠의 메카이자 휴식공간  뚝섬시민공원

062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벼룩시장  서울풍물시장

063 고미술품을 즉석에서 구입할 수 있는 곳  답십리 고미술상가

064 아이들과 함께 가면 하루 종일 즐거운 놀이터  어린이대공원

065 대한민국 한방의 모든 것을 만날 수 있는 곳  서울약령시

066 한의약의 발전사도 보고 한방체험도 즐긴다  한의약박물관

067 수많은 사람이 모여드는 서울 최대 재래시장  경동시장

068 우리나라 최초의 수목원에서 즐기는 도심 속 삼림욕  홍릉수목원

 

Zone 5 강남권

069 한강을 따라 자리 잡은 시민들의 휴식공간  한강시민공원(반포지구)

070 한성백제의 수도를 증명하는 유적지  몽촌토성

071 88올림픽 이후 탄생한 시민들의 공원  올림픽공원

072 신석기 사람들이 살았던 움집으로 초대  암사동 선사주거지

073 놀이와 쇼핑을 한번에 즐기는 놀이동산  롯데월드

074 생생한 모형으로 보는 한국의 민속  롯데월드 민속박물관

075 송파산대놀이와 전통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공연장  서울놀이마당

076 강남 한복판에 펼쳐진 숲이자 스포츠공원  양재시민의숲

077 거대한 공원처럼 조성된 예술공간  예술의전당

078 국악의 역사와 악기를 한눈에 볼 수 잇는 곳  국립국악원

079 첨단 IT 정보를 이용해 디지털 자료 열람  국립디지털도서관

080 물고기와 수생식물의 서식지이자 산책코스  양재천

081 비즈니스와 IT산업의 중심지  테헤란로

082 쇼핑, 영화, 전시회를 한꺼번에 즐기는 복합 쇼핑몰  코엑스

083 세계 속에 스며든 발효의 미학과 독특한 연금술  김치박물관

084 추사의 예술인생이 갈무리된 보금자리  봉은사

085 빌딩숲 속 오아시스인 조선의 왕릉  선정릉

086 대한민국 트렌드세터들의 아지트  청담동 패션거리

087 카페거리와 부티크와 갤러리 천국  가로수길

088 한국 속의 작은 프랑스  서래마을

089 수준급의 고미술과 도자기 전시  호림박물관

090 우리 겨레의 영원한 스승 안창호 기념공원  도산공원

091 신선한 문화를 파는 에르메스 플래스십 스토어  메종 에르메스 도산파크

 

Zone 6 서부강서권

092 신선들이 내려와 놀다 갔던 낙원  선유도

093 한강시민공원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곳  여의도한강공원

094 국내 최초로 조성된 생태공원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095 대한민국 최대의 수산시장  노량진수산시장

096 서울을 대표하는 랜드마크  63시티

097 문화와 쇼핑이 어우러진 복합쇼핑몰  타임스퀘어

098 한의사가 된 듯한 다채로운 한방체험  허준박물관

099 외국인들을 매료시킨 김포공항 복합쇼핑몰  롯데몰 김포공항

100 한강의 매력을 온몸으로 느낀다  한강 자전거길

 

Zone 7 서울근교

01 걸으면 더욱 좋은 서울랜드 왕벚꽃 순환도로  서울대공원 벚꽃길 산책

02 솔숲 울창한 왕릉을 거닐며 숨겨진 보물찾기  구리 동구릉

03 유네스코가 인정한 조선의 성곽  수원화성

04 가을의 여신 붉은 단풍이 부른다!  소요산 단풍산행

05 남한산성 성곽 따라 울창한 숲속을 거닐다  남한산성

06 영화처럼 사랑이 시작되는 데이트 코스  남이섬

 

 

 

 

posted by 황영찬
2014. 11. 10. 09:36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104 옛 전돌

 

글, 사진 / 김성구

2003, 대원사


 

시흥시매화도서관

SH013806

 

082

빛12ㄷ  227

 

빛깔있는 책들 227

 

김성구-------------------------------------------------------------------------

경희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교토국립박물관에서 연수하였다. 부여 · 진주 · 대구 등의 국립박물관장과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을 역임하고,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옛기와』가 있고, 주요 논문으로는 「백제의 와전」「백제 · 신라의 와요」「한국 고대사원의 가람배치」 등이 있다.

 

|차례|

 

책 머리에

전돌의 기원

전돌의 분류

전돌의 변천

전돌의 제작과 가마터

맺음말

참고 문헌

십장생 굴뚝 전돌은 독특한 조형적 특성을 발휘할 수 잇기 때문에 그 동안 건축 문화의 발달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이 굴뚝은 샛담의 일부를 개조한 것으로 장생불사를 상징하는 십장생무늬를 감입하였다. 조선, 경복궁 자경전.

보상화무늬 전돌 보상화무늬가 장식된 화려한 전돌로 네 방향으로 부설될 수 있도록 각 모서리에도 네 쪽으로 나누어진 작은 꽃잎을 새겼다. 통일신라, 경주 안압지 출토, 가로 32.7×세로 31.2×두께 7.3센티미터, 경북대학교박물관 소장.

기하학무늬 전돌 기하학무늬는 마름모무늬 · 문살무늬 · 반원무늬 · S자무늬 · 동전무늬 등 매우 다양한데, 전돌의 긴 측면에는 마름모무늬와 다른 무늬가 조합되어 새겨진 것이 많다. 낙랑, 평양출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문자 전돌 왼쪽부터 원흥 3년 · 건흥 4년 · 건무 9년 · 태강 9년 · 경원 원년 · 태강 7년의 기년명이 새겨져 있으며 특히 원흥 3년, 건무 9년의 기년명이 새겨진 전돌에는 제작자의 성씨나 이름이 새겨져 있어 이채롭다. 낙랑, 평양 출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무녕왕릉 북벽 무늬 전돌을 4평 1수 방식으로 쌓아 올렸다. 북벽에 설치된 벽감에는 등잔이 놓여 있는데 연꽃이나 인동이 새겨진 전돌의 무늬가 제법 화려하다. 백제, 공주 소재.

화성 북암문 화성은 조선 정조 20년에 완성되었는데 성벽의 대부분이 벽전돌로 축조되었다. 북암문은 조그만 홍예문으로 쐐기 모양의 설형 전돌과 장방형 전돌로 쌓아 올렸다. 조선, 수원 소재.

수원 화성 장안문의 옹성 고대에는 건물의 벽이나 성곽, 담장이나 굴뚝 등을 쌓기 위한 벽전돌이 소수 예가 제작되었으나 조선시대에는 궁궐의 담장과 화성을 쌓기 위해 많은 수량이 제작, 사용되었다.

대안탑 당나라 때 만들어진 중국의 대표적인 전탑이다. 중국 시안시 자은사 소재.

분황사 모전석탑 우리나라 전탑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안산암을 전돌과 같이 가공하여 축조한 것으로 초충 탑신의 4면에 감실을 마련하고 인왕상을 배치하였다. 국보 제30호, 고신라, 현재 높이 9.3미터, 경주 보황동 소재.

송림사 5층전탑 1959년에 해체, 수리되었는데 높이가 16.13미터로 장중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기단은 외장(外裝)을 돌로 축조하고 있는데 모서리기둥과 버팀기둥이 조각되었고 그 위에 9단, 7단, 7단, 6단, 4단으로 점차 체감되어 일정한 비례를 보이고 있다. 보물 제189호, 통일신라, 칠곡 구덕동 소재.

귀면무늬 전돌 사다리꼴의 특수 전돌로 무섭게 의장된 귀면의 두 귀는 전돌의 상단부 좌우에 높이 솟아 있었으나 파손되었다. 통일신라, 경주 출토, 가로 32.5~35.5×세로 16×두께 6.5센티미터,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전불 녹유가 사유된 연좌상의 전불로 일부가 파손되긴 하였으나 좌상의 여래불상이 3열로 연속 배치되고 있다. 벽면에 장엄용으로 사용되었을 경우 천불상을 연상할 수 있다. 통일신라, 출토지 미상, 가로 14.5×세로 26센티미터, 부산시립미술관 소장.

무녕왕릉 현실 땅 밑에 광을 파고 무늬 전돌로 축조하였다. 북쪽에 장방형의 현실을 두고 남쪽 벽 중앙에 널길이 있는 전실분으로 묘실은 터널형이다. 묘실의 전돌 쌓기는 4평 1수 방식을 따르고 있다.

송산리 6호분 현실 무늬 전돌로 축조된 전실분으로 묘실은 동서로 긴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전돌쌓기는 밑에서부터 10평 1수, 8평 1수, 6평 1수, 4평 1수로 무녕왕릉의 전돌쌓기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연꽃무늬 전돌 2매 1조로 조합되어 하나의 꽃 모양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의장된 전돌(왼쪽, 가로 33.7×세로 8.6~15×두께 4.2센티미터)과 반절된 연꽃이 배치된 가운데 모서리에 잎이 마주난 인동무늬를 함께 새기고 있는 전돌(오른쪽, 가로 31.5×세로 13×두께 4센티미터)이다. 백제, 공주 무녕왕릉 출토,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연꽃무늬 전돌 2매 1조로 반절된 연꽃무늬 전돌(왼쪽, 높이 11센티미터)과 장방형 전돌의 좁은 측면을 두 구간으로 나누어 두 개의 연꽃무늬를 새긴 전돌(오른쪽, 가로 20.5×세로 14×두께 8센티미터)이다. 수요처가 부여에서 멀리 떨어진 공주의 무녕왕릉과 송산리 6호분에서 확인되어 직접적인 수급 관계를 밝힐 수 있었다. 백제, 부여 정동리 가마터 출토,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동전능격무늬 전돌과 동전무늬 전돌

연꽃사격무늬 전돌 장방형 전돌의 긴 측면을 세 구간으로 나누고 좌우 양쪽에는 연꽃무늬를, 그리고 그 중간에는 사격무늬를 배치하였다. 백제, 공주 무녕왕릉 출토, 가로 15.9×세로 32.2×두께 4센티미터,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문자 전돌(아래)과 명문 세부(위) 널길의 폐쇄 전돌로 사용되었는데, '양관와위사의'라는 글자가 새겨져 전돌의 제작 과정이나 전실분의 축조 배경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백제, 공주 송산리 6호분 출토, 가로 31.3×세로 13.8×두께 4.4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연꽃무늬 전돌 표면에 7엽의 연꽃무늬를 새긴 장방형 전돌로 연꽃잎 안에 떡잎이 장식된 7세기 전반경의 양식을 보여 주고 잇다. 백제, 부여 궁남지 출초,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산경무늬 전돌 산경무늬 전돌은 두 종류가 출토되었는데 산, 나무, 불, 바위가 구름과 함께 잘 묘사되고 있는 한 폭의 아름다운 산수화를 연상케 한다. 백제, 부여 외리 유적 출토, 가로 29×세로 29×두께 4.5센티미터(위), 가로 28.7×세로 29.1×두께 4센티미터(아래),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귀형무늬 전돌 귀형은 동물 얼굴을 한 귀신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그 대좌가 각각 연꽃과 암반으로 이루어져 서로 다른 차이를 보이고 있다. 백제, 부여 외리 유적 출토, 가로 29×세로 29.4×두께 4.2센티미터(위), 가로 29.1×세로 29.2×두께 4.1센티미터(아래),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봉황무늬 전돌과 반룡무늬 전돌 봉황과 용은 『예기』에 기록된 것과 같이 기린 및 거북과 함께 4령으로 신성시되고 있는데, 백제의 무늬 전돌에 채용되고 있어서 당시에 유행한 길상과 벽사사상의 정신적 의지를 살펴볼 수 있다. 백제, 부여 외리 유적 출토, 가로 29×세로 29×두께 4.3센티미터(위), 가로 29.3×세로 29.3×두께 4.4센티미터(아래),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연꽃무늬 전돌과 구름무늬 전돌 연꽃무늬 전돌은 10엽의 연꽃잎을 반부조형으로 크게 배치하고, 꽃잎 안에 인동무늬 떡잎을 새기고 있는데 7세기 전반경의 장식적인 특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구름무늬 전돌에는 구슬 모양의 테두리를 두르고 8엽으로 의장된 상서로운 구름이 우회하고 잇으며 안쪽에 8엽의 연꽃무늬를 다시 새겼다. 백제, 부여 외리 유적 출토, 가로 28.8×세로 28.5×두께 4센티미터(위), 가로 29×세로 28.5×두께 4.4센티미터(아래),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특수 전돌 연꽃무늬와 인동무늬가 새겨진 특수 전돌이다. 전돌의 뒷면과 윗면에는 네모 난 구멍이 두 개씩 뚫려 있고, 양 측면에도 한 개씩의 구멍이 뚫려 있어서 특수한 곳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 부여 군수리 절터 출토, 가로 28×세로 14×높이 14.9센티미터,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사냥무늬 전돌 토끼와 사슴을 쫓는 말 탄 무사가 묘사된 전돌로 사찰에서 사냥무늬가 새겨진 전돌이 사용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한데, 영묘사라는 절 이름과 관련하여 호국의 뜻이 내재된 것으로 생각된다. 고신라, 경주 영묘사터 출토, 가로 33×세로 14×두께 5.3센티미터,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보상화무늬 전돌 탁본 보상화무늬를 주무늬로 표면에 크게 배치하고 네 모서리에는 보상화의 분화가, 그리고 측면에는 사슴과 보상화당초무늬가 대칭을 이루면서 새겨지고 있다. '조로2년……'의 명문이 새겨진 보상화무늬 전돌과 똑같은 동범전이다. 통일신라, 경주 안압지 출토.

명문이 새겨진 보상화무늬 전돌 '조로2년 한지벌부 군약소사……'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 이를 통해 전돌의 제작 연대 및 날짜는 물론 군약이라는 사람의 이름과 직급, 그리고 출신지 또는 전돌의 제작지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통일신라 680년, 경주 안압지 출토, 두께 7센티미터,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탑상무늬 전돌 여래상으로 신광과 두광의 광배를 갖추었고, 탑은 옥개에 풍탁을 단 3층탑으로 의장되고 있다. 통일신라, 경주 석장사터 출토,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박물관 소장.

누각무늬 전돌 공중누각과 같은 기와집 두 채가 구름을 사이에 둔 채 부조되고 있어 신라시대 건물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통일신라, 경주 출토,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누각귀면무늬 전돌 전탑의 모서리에 사용된 탑전돌로 반절된 귀면과 누각을 부조시키고 있는데 풍탁을 달았던 흔적으로 보이는 구멍이 나 있다. 통일신라, 울산 중산리 절터 출토,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불령사 전탑 무너진 것을 근래에 다시 세운 것으로 6층까지 남아 있다. 불령사 탑의 전돌은 탑상무늬 전돌과 누각무늬 전돌, 그리고 당초무늬 전돌 등 세 종류로 구분되고 잇다. 통일신라, 청도군 매전면 소재.

조탑동 5층전탑 기단 위에 화강석으로 초층 옥신을 축조하고 남쪽에 감실을 마련하고 그 좌우로 인왕상을 양각하였다. 초층 옥개부터 무늬 전돌로 쌓아 올렸는데 각 층이 점차 체감되고 있다. 보물 제57호, 통일신라, 안동 조탑동 소재.

신세동 7층전탑 높이가 17미터 가량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전탑에 속한다. 탑 기단의 사방에 신장상을 새긴 판석이 있고 초층 옥신의 남면에 감실이 마련되어 있다. 국보 제16호, 통일신라, 안동 법흥동 소재.

동부동 5층전탑 탑 기단을 화강석으로 쌓았고 탑신부를 무문 전돌로 축조하였는데 옥신의 각 층에는 감실이 있다. 2층의 옥신 남면에는 인왕상을 조각한 판석을 감입하였는데 옥개의 낙수면에는 기와를 이었다. 보물 제56호, 통일신라, 안동 문흥동 소재.


채유 사천왕상전과 복원도 경주 사천왕사의 목탑터에서 출토된 것으로 목탑의 벽면에 감장된 것으로 보인다. 갑옷을 입은 사천왕상의 탄력 있는 신체 표현과 사귀의 고통스러운 표정 등에서 통일신라 초기의 사실적인 조각 솜씨를 엿볼 수 있다. 통일신라, 경주 사천왕사터 출토, 가로 69.5센티미터,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연기법송'명 전불 장방형의 구획 안에 불상을 5구씩 두 줄로, 불탑을 5기씩 두 줄로 하여 각각 불상 10구와 불탑 10기를 음각하였다. 그리고, 탑과 탑 사이에 연기법송을 세로 네 줄로 새기고 있다. 통일신라, 경주 석장사터 출토.

연꽃무늬 전돌 정방형의 부전돌오 중심에 중판 양식의 연꽃무늬를 배치하고 그 둘레에 연화당초무늬를 새겼는데 발해에서 가장 성행한 무늬 전돌이다. 발해, 중국 길림 동경성 출토.

신륵사 전탑 탑 기단은 잘 다듬은 돌로 7단으로 높이 쌓았고 옥신과 옥개는 초화무늬가 새겨진 무늬 전돌로 축조하였는데 그 층수는 6층까지만 남아 있다. 고려, 여주 신륵사 소재.

신륵사 전탑 세부 탑신은 정방형과 장방형의 무늬 전돌로 축조되었다. 정방형 전돌은 두 측면에 초화무늬가 새겨져 모서리용으로 제작되었고, 장방형 전돌은 긴 측면과 짧은 측면에 초화를 새겼다. 초화무늬는 반절된 모양으로 2매의 전돌을 쌓아 올릴 때 하나의 꽃 모양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청자 전돌 가마터 청자 발생 초기에 해당하는 가마터이다. 가마의 길이가 40여 미터가 되는 반지하식 굴가마로 측면과 바닥이 잘 남아 있는데 측벽은 무문 전돌을 쌓아 만들었다. 고려, 시흥 방산동 소재.

덕수궁 유현문과 담 벽전돌로 높게 쌓여진 유현문의 홍예와 좌우로 연결되는 담장이 높낮이의 지형과 잘 조화되고 있다. 그리고 전돌의 특이한 조적과 색깔 차이가 궁궐 담장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꽃담 궁궐의 담은 전돌을 쌓아 올리는 조적의 방법과 줄눈의 차이, 그리고 전돌의 색깔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주고 잇다. 때로는 여러 가지 꽃무늬나 길상무늬 등이 의장되고 있어서 꽃담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아담하고 간결한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다.

경복궁 아미산 굴뚝 교태전 후원에 4기가 있다. 몸체는 6각형으로 각 면에 십장생과 매난국죽 그리고 길상무늬를 전돌로 짜맞추고 있다. 연기가 나오는 연가를 대여섯 개 정도 설치하고 지붕에 기와를 이었다.

덕수궁 함녕전 굴뚝 벽전돌로 조직된 4각형의 굴뚝이다. 몸체의 남쪽 면에 '수(壽)'자 무늬를 색깔 있는 전돌로 짜맞추고 있는데 지붕에 기와를 얹고 큰 연가를 설치하였다.

팔달문 전경 돌과 전돌을 사용하여 화성을 축조하였다. 여기에 사용된 돌과 전돌의 수량은 각각 18만 7,000개와 69만 5,000개에 이르고 기와는 53만 장이나 되었다.

전돌의 제작 과정 (『천공개물』에서)

평가마와 굴가마 가마의 천장과 몸체가 땅 속에 묻혀 있는 지하식 가마(위)이다. 평가마는 소성실 바닥에 단이 없는 무계단식 가마로 연도의 배연구가 세 개인 점이 특이하다. 굴가마(아래)는 소성실 바닥에 기와편으로 단이 축조된 계단식 가마로 연도의 배연구는 한 개이다. 백제, 부여 정암리 가마터.

 

 

 

 

posted by 황영찬
2014. 11. 4. 09:14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103 바흐 - 천상의 선율

 

폴 뒤 부셰 지음, 권재우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24

 

082

시156ㅅ 19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019

 

Magnificat Jean-Sebastien Bach, le cantor

 

 

독실한 신앙심으로

신의 영광을 찬미했던 바흐.

그가 남긴 완벽한 걸작에는 인간과 하느님의 길을

오가는 선율이 흐르며, 그 내면에는 놀라운

천재성과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고매한 인격이 있다.

동시대인들은 그에게서 뛰어난 오르간 주자의

모습만을 보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의 음악을 들으며 위대한 음악가의

영혼을 느낀다.

 

"쳄발로로 연주하는

48곡의 유명한 푸가는 아름다운 시보다도 우리

마음속 깊이 파고든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분명 태초의 순수한 계율을 내면에

간직하고 있다. 나는 바흐를 가장 잘 표현한 괴테의

말을 잊을 수 없다. '천지창조 이전에 하느님이

자신과 나눈 대화.' 지상 천국이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은,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숙명이 유보된 채

우리의 순수함이 신의 은총인 어린이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순간을 의미한다."

알랭, <음악잡지> 1932년

 

차례

 

제1장 마르틴 루터 안에서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제2장 수련기

제3장 위대한 오르간 연주자

제4장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제5장 칸토르 바흐

제6장 음악의 헌정

기록과 증언

레코드 목록

참고문헌

악보목록

그림목록

찾아보기

 

폴 뒤 부셰 Paule du Bouchet

1951년에 태어난 부셰는 철학과 음악을 전공하였다. 그녀는 철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재즈 피아니스트로 활동했으며, 어린이를 위한 음악 교육에 열성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현재 갈리마르사의 발견 총서 중 음악 분야를 책임지고 있으며 청소년과 대중의 음악 이해를 위한 다수의 저서로 발표하였다.

 

옮긴이 : 권재우

1962년 서울 출생. 한국 외국어대학교 불어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현재 DRT International에서 통역 및 번역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2번 <극지방을 향한 대도전>과 <완전 범죄> <목노리의 씨앗> 등이 있다.

 

제1장

마르틴 루터 안에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1685년 3월 23일, 아이제나흐에 위치한 성 게오르크 교회에서 '시 음악가'인 요한 암브로지우스 바흐는 그의 넷째 아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아이는 가문의 전통에 따라 요한이란 이름과, 대부의 이름 제바스티안을 받았다. 바로 이곳 성 게오르크 교회의 설교단에서 150여 년 전에 루터는 교황에게 맹렬하게 도전하며 종교개혁의 포문을 열었다. 역사적인 우연의 일치인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일생 동안 종교개혁의 상징적 가치를 대변한다.

1685년 독일의 정치 양상과 제반 제도는 37년 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형성되었던 것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즉, 영토는 서로 다른 체제를 가진 다수의 공국으로 분할되었고, 제후들은 자국에서 절대권력을 휘두르면서 공국 간은 물론 주변 강대국과 동맹조약을 체결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루터교를 신봉한 소도시 아이제나흐는 작센-아이제나흐 독립공국의 중심지였다.

아이제나흐에서의 음악활동은 교회음악을 맡았던 요한 크리스토프(위)와 시립악단을 맡았던 요한 암브로지우스(아래)가 주도했다.

한스 바흐(바흐 가문의 조상이었던 파이트의 형제임이 분명함)는 뉘르팅겐 궁정예술가가 되기 전인 1580년경 목수일을 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초상화 둘레에 쓰인 라틴어 문구로 확인할 수 있다. "익살맞은 유명한 궁정의 광대이자 코믹한 바이올린 연주자인 한스 바흐는 근면하고 예의바르며 신앙심 깊은 사람이다."

제바스티안이 4학년으로 입학했던 오르트루프의 라틴어 학교는 평판이 좋았다. 재학생수가 많았던 것이 그 증거라 할 수 있는데, 1695년 당시 인구 4,000명이 채 못 되는 도시에서 재학생은 300명이나 되었다. 교과내용은 라틴어, 문장 연습, 그리스어 입문, 《신약성서》 강독, 수사학, 수학, 지리, 자연과학이 포함되었고, 거기에다가 성악과 음악 일반에 관한 깊이 있는 연구(주당 4~5시간)까지 추가되었다.

바흐 소유가 언급된 루터교 《성서》의 속표지.

이탈리아 사람 자롤라모 프레스코발디는 건반악기 음악의 위대한 천재였으며 특히 오르간의 대가였다.

"나에게 와서, 내 작품의 음악양식과 연주법에 대해 여러 차례 충고를 해주었던 걸출한 쳄발로 거장들 중 몇몇 사람들의 겸손한 태도로 미루어 볼 때, 내 곡을 호의적으로 평가한 곳에서는, 내가 그들의 음악을 완성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일러준 것을 내게 감사하리란 기대를 갖게 되었다."

쿠프랭(아래)

1717년

"함부르크에서는 라이네케(라이켄)란 뛰어난 오르간 연주자이자 작곡가의 예술이 번창했다."

F. W. 마르푸르크

《악성(樂聖)들의 전설》

(1760)

 

제2장

수련기

 

1702년 부활절, 제바스티안은 뤼네부르크의 성 미카엘 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그는 17세로서 대학에 입학할 나이였다. 하지만 대학 입학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음악이 그의 직업이자 생계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는 오르간 연주자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바흐 가문 출신답게 그는 고향인 튀링겐으로 눈을 돌렸다. 장거하우젠, 아이제나흐, 아른슈타트 등 세 곳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1241년에 함부르크와 공동으로 한자동맹을 결성한 부유하고 발전된 도시 뤼베크에는 고딕양식 교회의 높은 첨탑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다. 그리고 북스테후데라는 카리스마적 존재가 활동하고 있었다. 후진 양성과 대중 연주를 통한 선구적인 활동으로 그는 독일 음악계의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1637년경에 태어난 북스테후데(그림의 왼쪽)는 1668년 뤼베크의 성 마리아 교회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되어 1707년 사망할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북독일 최고의 오르간 음악가인 그의 작품은 니콜라우스 브륀스와 게오르크 뵘 등 많은 젊은 작곡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음악분야에서 루터의 활동은 '노래하는 것은 두 배로 기도하는 것'이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을 따랐다. 루터는 음악을 좋아하여 직접 연주하기도 했다. 그는 노래를 했고 플루트와 류트를 연주했다. 음악은 그에게 마르지 않는 영적인 샘이자 하느님과의 확실한 매개체였다. 1524년에는 일반인을 위한 최초의 체계적인 예배용 성가집이 출간되었다. 여기에는 43곡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그중 독일어로 된 23곡은 마르틴 루터의 것이었다. 또한 그외에도 코랄 <내 주는 강한 성이로다>(위 악보)를 비롯한 13곡의 다른 노래들도 있었다. 루터가 작곡한 36곡의 코랄은 16~17세기의 모든 예배용 성가집의 근간이 되었다.

1581년 화재로 폐허가 된 소도시 아른슈타트는 점차 재건되었다. 1684년 '새교회'라 명명된 교회의 장엄한 낙성식이 있었다. 주민들이 모금을 하여 1699년 새 오르간을 제작하기로 결정되었고, 1703년 완성되었다. 바로 이 오르간으로 훌륭한 연주를 하여 바흐는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대체 그가 어떤 권리로 요즘 수상한 젊은 처녀를 불러들여 함께 연주를 하는지 그에게 물어 봅시다."

아른슈타트 장로회의 보고서(1706년 11월)

바흐의 초기 칸타타들은 1712년경까지는 파헬벨, 뵘, 북스테후데와 바흐 가문 선조들의 작품들과 유사했다. 일반적으로 기악부는 짧았고 리듬과 사용된 성부의 수뿐만 아니라 박자에서도 상호간에 조화를 이루었다. 성악군이 기악군과 경쟁하는 콘체르타토의 원칙이 폭넓게 사용되었다. 또한 마찬가지로 아리오소(arioso)도 가장 중요한 형식이었다. 아리오소란 리토르넬리(ritornelli, 기악의 짧은 종결부)로 분할되는 일종의 레치타티보였다.

 

제3장

위대한 오르간 연주자

 

1708년 7월, 바흐는 작센-바이마르 공 빌헬름 에른스트에게 궁정교회의 오르간 연주자 자리를 제안받고 바이마르에 정착했다. 그는 이미 전주곡과 푸가, 소나타, 파르티타, 토카타, 코랄, 칸타타 등 수많은 장르를 섭렵했다. 그러나 그가 튀링겐 지역에서 유명해진 것은 작곡 실력보다 오르간 연주 실력이었다.

"받침대가 세워진 난간 뒤로 흑백 바둑판 무늬 바닥에 제단이 있엇다. 그 위로는 피라미드 형태의 천개(天蓋)가 천장에서부터 드리워져 있었다. …… 사실(私室)로 연결된 공의 단상이 제대를 향하고 있었던 것은 아마도 지붕밑 회랑에 놓인 오르간을 보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C. S. 테리(1930년)

작센-바이마르 공 빌헬름 에른스트는, 자신의 공국을 확장하거나 다른 공국과의 연합을 결성하거나 통치지역의 경계를 부흥시키는 일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집착이라 할 정도로 몰두했던 종교를 제외하면 문화만이 그의 유일한 관심사였다. 그는 오페라단을 결성하고, 실력 있는 음악가를 궁정음악가로 임명했으며, 고전학 관련 자료실과 전시실을 만들었다.


빌헬름 4세가 건축한 빌헬름스부르그성은 통치자의 숙소인 로테스 슐로스와 골데스 슐로스, 두 개의 성으로 이루어졌으며, 주위에 성곽을 쌓아 놓았다. 빌헬름스부르크성은 1774년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그 자리에 새로 슐로스 괴테성이 세워졌다.

성 마리아 교회(위)는 1713년에 오르간 제작자인 크리스토프 쿤치우스 덕분에 새로운 오르간을 보유하게 되었다. 바흐는 당시 수리중인 바이마르의 오르간보다 성능이 우수한 이 오르간에 더 마음이 끌렸다.


1684년 태어난 발터는 바흐의 육촌이다. 1707년에 바이마르에 있는 성 베드로와 바오로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다.

'이탈리아 양식의 협주곡'이라는 개념은, 코렐리의 열렬한 찬양자인 게오르크 무파트 같은 작곡가들의 활발한 활동으로 독일 음악계에 수용되었다. 무파트는 자신의 기악곡 모음집(1701년) 서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나는 이탈리아 협주곡이 지닌 다양성에 주목했다. 이 협주곡 가운데 몇 곡은 내가 작곡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하모니'를 지닌 그런 이탈리아 음악을 독일에 소개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16세기 이후 이탈리아의 작곡가들은 대개 바이올린 연주의 대가들이었다. 당시의 연주실력은 오늘의 명 바이올리니스트들에 비해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다. 비발디의 동시대인은 이구동성으로 그를 진정한 바이올린의 천재로 꼽았다. 아르농쿠르 역시 그들과 같은 심정이었다. "바로크 양식과 마찬가지로 바이올린은 진정한 이탈리아의 산물이다. ……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이 점차 전유럽을 휩쓴 것과 마찬가지로 바이올린은 기악의 중심이 되었다." (《음악 대담》, 1984년)

텔레만은 당대의 가장 저명한 작곡가였다. 그는 열두 살에 첫 오페라를 작곡했고 리코더, 바이올린, 쳄발로 등을 연주할 수 있었다. 그는 전유럽에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떨쳤으며, 특히 1730년에는 파리애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음악양식의 발전에 늘 앞장선 그는 이탈리아 양식과 프랑스 양식을 완벽하게 구사했고 이 두 양식의 결합에서도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했다.

리옹 출신의 루이 마르샹(아래)은 열 살 때부터 왕궁의 오르간 연주자로 봉직했다. 그는 1717년에 독일 순회연주를 시도했는데, 망신살이 뻗쳤던 드레스덴(위)의 에피소드는 연보에도 기록되어 전한다. 그는 파리로 돌아가 성 프란체스코회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일했으며 그곳의 수도사들을 가르쳤다.

 

제4장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1718년 11월 15일, 쾨텐에서 거행된 바흐의 일곱번째 아기의 세례식에 고귀한 대부와 대모들이 모였다. 레오폴트 공의 일가 세 사람과 지체 높은 귀족 두 사람이 참석한 것이다. 이는 제바스티안이 얼마나 신망을 받고 있었는지를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는 자신보다 아홉 살 연하인 공과 친구처럼 지냇다. 카펠마이스터로서 그가 연봉 400탈러를 받은 것은 궁정의 대신과 같은 대우였다.


 

바흐가 도착했을 때 인구가 5,000명이었던 작센의 작은 도시 쾨텐(아래)에는 1603년 이후 안할트 공국의 분할로 탄생된 소공국이 자리잡고 있었다. 넓고 쾌적한 쾨텐의 왕궁은 중앙의 웅장한 성과 화려한 프랑스식 정원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레오폴트 공은 기젤라 아그네스 폰 라트의 아들이다. 아그네스가 신봉한 루터교는 칼벵파의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레오폴트는 교양 있는 제후이며 나무랄 데 없는 음악가이기도 했다. 그는 바이올린과 비올라 다 감바를 다룰 줄 알았고 황홀하리만큼 노래를 잘 불렀다. 바흐는 "그는 음악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음악을 알고 있다."라고 말했는데, 아마 그 이상의 천사는 없을 것이다.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여섯 개의 작품들과 무반주 첼로를 위한 여섯 개의 모음곡들이 고난도의 연주기교를 필요로 하는 것을 보면, 바흐는 비르투오소들을 염두에 두고 작곡했음을 알 수 잇다. 바이올린 연주가로는 두 사람을 떠올릴 수 있다. 첫번째 인물은 J. G. 피젠델인데, 그는 독일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로 명성을 날렸고,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작품을 직접 작곡하기도 했다. 또한 비발디와 알비노니, 텔레만도 그에게 소품들을 헌사했다. 두번째 인물은 쾨텐 궁정의 수석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J. 스피스였다. 그러나 바흐 자신도 바이올린 연주 실력이 상당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가 처음 고용계약을 맺은 것도 바이올린 연주자로서였다. 테크닉 문제를 놓고 사람들은 한때 가당찮은 가설을 내놓은 적이 있었다. 즉, 바흐 시대에는 활이 구부러지고 짧아서 두 현을 동시에 누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도 연주가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곡들은 첼로 연주자인 크리스티안 베른하르트 리니케나 아니면 비올라 다 감바 연주자인 크리스티안 페르디난트 아벨 - 그는 뛰어난 첼로 연주자이기도 했다 - 을 위해 작곡했을 것이다.

포르켈은, 바흐와 그의 세 아들들은, "유년시절부터 화목한 가정에서 훌륭한 음악을 들을 기회를 누렸다."고 전해 준다.

날마다 '궁정'에서 연주회가 열릴 때면 레오폴트는 아름다운 바리톤으로 노래를 불렀다. 혹은 통주저음을 연주하기 위해 쳄발로 앞에 앉아 있거나 비올라 다 감바를 연주했다. 궁전에는 그가 독일과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가져온 귀중한 악기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악기를 구입하는 임무를 맡은 바흐는 당대의 일급 현악기 제조인들, 특히 슈타이너에게서 악기를 공급받았다.

바흐는 독일 음악의 중심지라는 함부르크의 명성보다는 성 야곱 교회의 오르간에 더 마음이 끌렸다. 그가 그 자리를 간절히 원한 것은 바로 그 오르간 때문이었다.

 

몇 년 전에 한 비르투오소가 어떤 주요 도시의 오르간 연주자 자리에 지원했다. …… 유복한 장인의 아들 역시 그 자리에 지원했는데, 그의 연주는 손가락의 힘이 아니라 돈의 힘으로 훌륭해 보이는 것 같았다. 결국 자리는 장인의 아들에게 돌아갔다.

마테존

1728년

에르트만 노이마이스터.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은 본래 제목이 아니다. 이 이름은 역사가인 스피타가 1873년에 붙였다.

 

후작의 음악가들은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한 번도 연주한 적이 없다. 무관심 속에서 서가에 꽂혀 있던 바흐의 귀중한 자필원고는 수많은 협주곡 악보들과 섞여 있다가 후작이 죽자 그의 후손들이 나눠 가졌다.

<골트베르크 변주곡>과 <이탈리아 협주곡>을 제외하고 바흐는 어떤 악기로 그의 쳄발로곡을 연주해야 할지 명시하지 않았다.

바흐가 재혼한 지 8일 만인 1722년 12월 11일에, 레오폴트 공은 사촌인 안할트-베른부르크의 프레데리카 헨리에타와 결혼했다. 공의 결혼 축하 행사는 다섯 주일이나 계속되었는데, 바흐는 그 기간에 두 곡의 칸타타(아쉽게도 소실되었다.)를 작곡했다. 그 하나는 부부의 앞날을 축복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새로 맞이한 공의 부인에게 헌정하는 곡이었다.

1723년 라이프치히로 떠날 무렵 바흐의 아이들은 모두 다섯이었다.카타리나 도로테아가 열다섯 살, 빌헬름 프리데만이 열네 살, 카를필리프 에마누엘이 여덟 살, J. 곳프리트 베른하르트가 일곱 살, 그리고 갓난아이 크리스티아나 수잔나 헨리에타(1726년에 사망)가 있었다. 1724년에서 1742년 사이에 12명의 아이들이 더 태어났다. 그중 다섯 아이만이 다섯 살을 넘겼다. 마리아 바르바라가 여윈 세 명의 아이들까지 합해서 바흐는 모두 20명의 아이들을 낳았지만 그중 10명이 어린 나이에 죽고 말았다.


제5장

칸토르 바흐


1722년 6월 5일,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학교의 칸토르인 요한 쿠나우가 세상을 떠났다. 신교의 보루이자 인구 2만의 권위 있는 대학도시인 라이프치히는 음악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칸토르는 악장의 임무뿐 아니라 그 도시의 모든 교회들을 총괄하는 '음악감독'으로서, 1212년 학교가 설립된 이후로 위대한 칸토르들이 계보를 이루며 위업을 쌓고 있었다. 바흐는 이 자리에 지원했다.

라이프치히는 상업의 요충지로서 해마다 세 번씩 유명한 박람회가 열려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13세기 로마 양식으로 건축된 성 토마스 교회(위)는 15세기에 고딕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음의 천재 바흐는 거대하고 경사가 급한 교회 지붕을 타고 흐를 음량을 감안하여 자신의 성스러운 음악을 작곡했다.

성 토마스 학교는 라이프치히에서 거행되는 모든 장례식 - 가난한 사람들과 아이들의 장례식은 제외 -과 때로는 결혼식에 참석할 임무를 맡고 있었다.


장례식에서 부를 코랄과 모테트를 정하는 사람은 칸토르이다. 결혼식 참석에 대한 사례금은 1탈러이며 그 이상을 요구할 수는 없다. 음악과 악기는 모두 칸토르가 관리하며, 교회의 오르간 주자와 음악가들을 지휘하는 것도 칸토르의 임무이다. 성탄절과 춘절기의 합창 연주 때문에 부당하게 정상 수업을 중지해서는 안 된다. …… 장례식에는 검은색 정장에 망토를 갖춘 제복을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앉는 순서대로 장례행렬을 따르며, 합창할 때에는 화음을 정확하게 맞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 토마스 학교에 대한

라이프치히 시상임참사회

규정'에서 발췌

학생들의 가장 큰 수입은 거리에서 코랄을 들려주는 이른바 합창연주의 대가였다. 합창연주는 1주일에 세 번, 수요일, 금요일, 일요일 오후 세 시간 동안(단 그 시간에 장례식이 없을 경우)만 허락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번 돈은 매주 목요일과 일요일에 모금을 담당한 여덟 명의 어린 학생들이 헌금함을 들고 나가 받아 왔다.

 

"2시경, 음악가와 그의 가족들이 성 토마스 학교의 새로이 단장한 숙소에 입주하기 위해 두 대의 마차를 타고 도착했습니다."

1723년 5월 29일

홀슈타인에서 온 서한에서

요한 하인리히 에르네스티(아래)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1691년에 같은 대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680년 이래 성 니콜라이 교회의 설교자이자 토마스 학교의 공동 교장을 맡았던 그는 1684년 이 학교의 교장직에 취임했다. 오랜 전통을 지닌 토마스 학교는 라이프치히의 초등 · 중등 학교를 이끌어가는 두 축 가운데 하나였다. 또 다른 축인 성 니콜라이 학교는 부유층의 학교로 자리를 잡았고, 성 토마스 학교는 가난한 계층의 학교였다. 성 토마스 학교에서는 음악을 가르친 반면에 성 니콜라이 학교는 음악교육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바흐는 1735~1736년 겨울에 <마태 수난곡>을 공들여 완성했는데, 하느님의 말씀은 붉은색 잉크로 적어 넣었다.

j. 마티아스 게스너가 성 토마스 학교의 교장에 임명된 것은 바흐에게는 너무나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두 사람은 1715년 게스너가 바이마르에서 검열관과 도서관 사서직으로 일하던 무렵, 바이마르에서 처음 만난 이래 굳건한 우정을 다져 왔다. 오늘날 게스너는 고전문헌학의 선구자로 인정받고 있다.

 

라이프치히의 콜레기움 무지쿰, 매주 금요일마다 겨울에는 저녁 8시에서 10시 사이, 여름에는 4시에서 6시 사이에 카타리나가(街)에 있는 침머만 카페에 나왔다. 그러나 토요일에는 페터가의 무도회장, 수요일에는 장터 광장의 레흐만 카페, 목요일에는 헬비크 카페 등 다른 공공장소에서도 공연을 가졌다. 또한 여름에는 빈트뮐레 공원에 위치한 침머만 카페의 분점에서도 공연을 했다.

학생회

초기의 음악단체들은 학생들이 추진하여 16세기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어릴 때부터 기악과 성악 교육을 받아 온 음악적 자질이 뛰어난 독일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음악모임을 가졌다. 점차 대학에서는 연주회다운 연주회를 열 수 있는 조직적인 음악단체를 구성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1702년에 텔레만이 창립한 콜레기움 무지쿰은 대중적인 연주회를 위한 독일의 초기 음악 단체들 중 하나였다. 학생들과 전문 음악인들의 모임인 콜레기아 무지카(그림은 예나의 콜레기아 무지카)는 새로운 레퍼토리 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콜레기움 무지쿰은 교회나 오페라 극장, 궁정 등에 소속되는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단체였다. 라이프치히에는 바흐가 맡은 콜레기움 무지쿰말고도 다른 음악단체가 있었다. 1708년 이래 쿠나우의 제자인 J. 프리드리히 파슈가 창설한 유사한 단체가 활동했다. 20여 명의 기악연주자들로 구성된 이 단체는 수요일 저녁 레흐만 카페에서 음악을 들려주곤 했다.

18세기에는 악보 첫머리나 말미에 S. G. D.(또는 D. S. G. '오직 하느님께 영광'), 또는 J. J.(Jesu Juva, '구세주 예수')라는 철자를 기입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하이든의 원고에서도 비슷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스물일곱 살의 젊은 나이로 교장에 부임한 J. 아우구스트 에르네스티는 1731년 이래 성 토마스 학교의 교감직을 맡고 있었다. 탁월한 지성인이자 문헌학자이며 신학자에다가 뛰어난 작가였던 에르네스티는 음악을 시간 낭비로 여겼다. 더욱이 학교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교과제도를 개편할 필요성을 인식한 그는, 바흐의 요구사항들을 자신이 세운 학교의 발전계획에 맞서는 장애물로 생각했다. 그는 음악을 하는 학생들에게 여인숙의 싸구려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고 싶으냐고 빈정댔다. 이러한 뿌리깊은 경멸은 오랫동안 내재되어 온 불화를 폭발시킬 수밖에 없었다.

 

제6장

음악의 헌정

 

이제 이야기는 바흐의 말년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오래전의 일이고 사람들의 기억에도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어 그의 말년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그는 어렵지만 꿋꿋하게 지냈을 것이다. 바흐는 왕성한 활동을 했던 라이프치히를 떠났다. 오르간 감정사로 일한 알텐부르크, 괴를리츠, 초르타우, 나움부르크와 언제 가도 환영을 받은 드레스덴, 그리고 에마누엘이 사는 베를린으로 옮겨 다녔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음악을 싫어하던 부왕 몰래 일곱 살 때부터 베를린 성당의 오르간 주자인 고틀리프 하이네에게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다음에는 크반츠에게 플루트를, C. 하인리히 그라운에게 작곡을 배웠다. 그는 음악가로서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날 저녁 국왕은 자신의 연주회를 잊은 채 이미 노(老)바흐라고 불리던 그에게 질버만이 제작한 피아노포르테들을 연주해 보라고 했다.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피아노포르테가 놓인 이방 저방으로 따라다녔고, 바흐는 들어가는 방마다 즉석에서 연주해야 했다. …… 왕은 그후 며칠간 바흐를 데리고 다니며 포츠담에 있는 모든 오르간을 시연하게 했다."

포르켈

《J. S. 바흐의 생애》(1802년)

<음악의 헌정>에 포함된 열 개의 카논은 바흐의 최고 역작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왕이 해결해야 할 난해한 부분을 일부러 만들었다. 그는 그중 세 군데에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라틴어 문구를 자필로 적어 넣었다.

1736년에 정기간행물인 《음악총서》를 창간한 로렌츠 크리스토프 미츨러는 오래 전부터 자신이 창설한 음악협회에 스승이 가입해 줄 것을 희망했다. 음악협회의 회원수는 총 20명으로 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회원들 모두 뛰어난 음악가들이었다. 텔레만이 1739년에 가입했고, 헨델은 1745년에, 그리고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1755년에 가입했다. 최소한 1년에 한 번씩 회원들은 협회에 학술보고를 할 의무가 있었다.

J. S. B라는 문자가 대칭되어 나타나는 바흐의 봉인에는 상징적인 숫자가 숨어 있다. 왕관 위의 뾰족한 장식 일곱 개, 중앙의 꽃잎 세 개, 그리고 주위의 장식 다섯 개가 그것이다.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1714~1788).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1710~1784).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바흐(1732~1795).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1735~1782).

1885년 5월 16일에 있은 《마테 수난곡》 공연.


 

 

 

posted by 황영찬
2014. 11. 3. 15:48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102 HOW TO READ 다윈 Charles Darwin


마크 리들리 지음 | 김관선 옮김

2007, 웅진지식하우스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31816


082

하66ㅇ v. 6


다윈은 당시의 일반 독자들을 위해서 글을 썼기에 그의 작품에는

전문 용어가 거의 없고 복잡한 수학 계산도 들어 있지 않다.

만약 비전문가가 코페르니쿠스, 뉴턴, 아인슈타인의 작품을 읽고자 한다면

수고에 비해 얻는 것이 거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최근 훌륭한 과학자들의 논문도 단지 소수 전문가들만이

그들은 논문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윈은 거의 유일한 예외다.


HOW TO 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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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도발적인 작가와 사상,

그들의 글을 원전으로 직접 만난다


철학, 신학, 문학, 공학, 예술을 넘나든

생물학의 혁명가, 다윈


복잡하고도 어려운 임무를 논리적으로 풀어나가는 데 천부적 재능을 발휘하며, 생물학에 일대 혁명을 불러일으킨 과학자, 다윈. 그가 남긴 유산은 진화와 자연선택에 대한 방대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이론들이다. 폭넓고 독창적인 그의 이론은 사후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유전학과 새롭게 늘어난 DNA에 관한 지식은 오히려 다윈의 이론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그는 자연 속의 방대한 현상들을 깊이 있게 논의하면서 자신의 이론들을 검증했다. 저자 마크 리를리는 다윈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을 《종의 기원》《인간의 유래》《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과 같은 원전에서 직접 찾아내 논의함으로써 다윈을 이해하는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HOW TO READ 시리즈

위대한 사상, 세기의 저작을 원전으로 직접 만나는 특별한 기회, HOW TO READ 시리즈, 이 시리즈는 세계적 석학들의 안내를 받으며 사상가들의 저작 중 핵심적인 부분을 직접 읽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읽는 척 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제대로 읽을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우리시대 교양인을 위한 고품격 마스터클래스가 될 것이다.


마크 리들 Mark Ridley

옥스퍼드대학교 동물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대학원 시절 도킨스 박사의 연구원이었으며, 애틀란타의 에모리대학교,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을 했다. 그는 대학교재로 사용되는 《진화론》과 《멘델의 악마》를 저술했으며, 《진화론》과 《다윈선집》의 편집을 맡기도 했다.


김관선

고려대학교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곤충의 뇌 발생에 관한 연구로 이학석사,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남대학교 생명과학과 교수로 재직 중, 미국으로 건너가 페어리디킨슨대학교 컴퓨터 사이언스 대학원 과정을 마쳤다. 현재 미국 뉴저지에서 수학과 생물 관련 교재를 연구개발하고 있으며, 주요 연구 분야는 곤충의 신경계 발생이다. 주요 저서로 《세포생물학》《세포의 미세구조》《생물통계학》《대학생물학》 등이 있다.


차례


■ HOW TO READ 시리즈를 열며

■ 저자 서문 | 현대 문명의 모든 분야에 흔적을 남긴 과학자


1 오랜 논쟁 하나

: 《종의 기원》, 생존경쟁

2 자연의 설계도, '자연선택'

: 《종의 기원》, 생존경쟁

3 진화론 vs. 창조론

: 《종의 기원》, 이론의 어려움

4 새로운 종의 기원

: 《종의 기원》, 잡종

5 생물의 갑작수러운 출현과 실종

: 《종의 기원》, 지질학적 기록의 불완전에 대하여

6 화석은 알고 있다

: 《종의 기원》, 요약과 결론

7 인간 진화의 수수께끼, 이타주의

: 《인간의 유래》, 원시 시대와 문명 시대에 일어난 사회적 재능과 도덕적 재능의 발달

8 길들여진 인종은 진화할까 퇴화할까

: 《인간의 유래》, 원시시대와 문명 시대에 일어난 사회적 재능과 도덕적 재능의 발달

9 생존보다 번식을 택하다

: 《인간의 유래》, 성선택

10 다윈, 감정 표현의 비밀을 벗기다

: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


■ 다윈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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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 후기 : 21세기에도 여전히 유용한 다윈


1

오랜 논쟁 하나

: 《종의 기원》, 생존경쟁


개별적 창조 이론에 따르면 현존하는 모든 생물의 조상들은 현생종과 매우 유사하며

모든 현생종은 공통 조상에서 갈라져나온 것이 아니라 모두 개별적인 기원을 갖는다.

다윈은 오늘날의 생물체들이 진화의 산물인지 아니면 개별적 창조의 산물인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진화의 산물이라고 결론지었다.


2

자연의 설계도,

'자연선택'

: 《종의 기원》, 생존경쟁


왜 종들은 일정한 정도로 그 간격을 유지한 채 자신만의 상태를 유지하지 않는가?

왜 그들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원래로 돌아와 서로 비슷해지지 않는 것인가?

만약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단 하나의 공통 조상을 갖는다면,

그 공동 조상으로부터 일어나는 거의 모든 유형의 진화는 두 가지로 나누어지며 퍼져나갈 것이다.

다윈에게 생태적 관련성과 여러 유형의 경쟁은 적응에 의해 일어나는 자연 속의 모든 설계도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였다.


3

진화론 vs. 창조론

: 《종의 기원》, 이론의 어려움


시계와 같이 복잡한 기계를 볼 때 우리는 누군가 시계를 만들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복잡한 기계를 보면서 설계자의 존재를 유추할 수 있듯이,

우리는 자연 속에서 복잡한 생물체를 보면서 신이 존재한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눈의 진화 방식에 대해 생각했을 때 엄청나게 많은 수의 변화가 필요한 것처럼 보였고

각각의 변화는 작은 무작위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에 의한 확산이 필요하므로

거의 불가능할 정도의 긴 시간이 필요해야만 했었다.

그러나 눈의 진화에 관한 전 과정이 50만 세대 정도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자연선택은 그 결과가 누적될 수 있기에 매우 강력하다.


4

새로운 종의 기원

: 《종의 기원》, 잡종


오래전 지구상에는 단 하나의 조상 종만이 있었다. 그후 긴 세월을 거치며

그 중의 일부 구성원들이 진화되어 나머지 구성원들과 번식의 특징이 달라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한 종이 두 종으로 진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윈에게 교잡의 주제, 즉 두 종이나 서로 다른 두 변종의 상호교배에 의한 잡종의 형성은

새로운 종의 기원과 그렇게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이 아니었다.

다윈의 견해에 따르면 변종은 종의 시작점에 해당한다.

새로운 변종들을 만드는 작용이 오랫동안 작용하기만 한다면 새로운 종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윈의 이론에 따르면 변종들은 서서히 종으로 변해갈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변종과 종을 구별하는 기준은 명쾌하게 구별될 수가 없다.


5

생물의 갑작스러운

출현과 실종

: 《종의 기》, 지질학적 기록의

불완전에 대하여


지층 기록이 중요한 이유는 여러 종의 갑작스러운 출현과 절멸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윈 시절에 얻어진 여러 증거들을 볼 때, 몇몇 동물 집단 모두가 초기 화석 지층에서 비교적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것 같았다.

그의 해답은 앞의 인용문 시작에서 볼 수 있듯 잃어버린 지층이었다.

특히 다윈은 초기 삼엽충 이전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엄청나게 긴 시기가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다윈의 두 번째 문제는 갑작스러운 절멸이었다.

다윈은 우수한 새로운 종과 그렇지 못한 낡은 종 사이의 경쟁에서 절멸이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최소 몇 번의 대량 절멸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6

화석은 알고 있다

: 《종의 기원》, 요약과 결론


다윈은 화석 기록으로 자기의 논의를 시작했다. 진화를 보여주는 가장 단순한 화석상의 증거는

한 구조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다른 구조로 변해가는 일련의 변화 과정일 것이다.

파충류의 화석이 먼저 나오고 다음으로 어류 화석이 나오고 맨 마지막으로 양서류의 화석이 나온다면

진화론의 입장에서 놀라운 일이 될 것이다. 해부학적 구조를 기준으로 본다면

어류 → 양서류 → 파충류의 순서로 진화했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실제 화석의 순서는 우리가 예상한 대로다.

그러나 만약 어류, 양서류, 파충류가 개별적으로 창조되었다면 화석 기록의 중간 시기에

해부학적 중간형을 기대할 이유가 없다.


7

인간 진화의 수수께끼,

이타주의

: 《인간의 유래》,

원시 시대와 문명 시대에 일어난

사회적 재능과 도덕적 재능의 발달


모든 자기희생 행동은 자연선택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타주의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난다.

종교적 견해에 따르면 우리의 지적 재능과 도덕관념은 우리와 짐승을 구별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체는 동물들과 어느 정도 닮아 있으나 인간의 도덕관념은 어떠한 동물에서도 찾아보기가 어려우며

지구상 모든 동물 중에서 인간에게만 부여된 신성한 특징인 것이다.

그러나 다윈은 인간이 아닌 동물에서 도덕의 흔적을 추적해 도덕이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보임으로써

생존경쟁과 이타주의의 공존에 대한 답을 찾으려 했다.


8

길들여진 인종은

진화할까 퇴화할까

: 《인간의 유래》

원시 시대와 문명 시대에 일어난

사회적 재능과 도덕적 재능의 발달


'문명화된 국가'라는 표현을 통해 다윈은 의료, 건강, 복지 체계가 갖추어져 '제거 과정을 저지'하는 사회를 생각했다.

예를 들어 예방접종은 전염병으로 죽을 수도 있는 사람들을 살린다.

그러므로 어떤 사회에서는 자연선택의 작용이 느려지거나 아예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윈도 언급했듯이 결혼 사장을 통한 자연선택은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

생활사의 이른 시기에 자연선택이 더 작용할 가능성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자연선택의 작용이 늦춰지지 않고 유전적 멸망의 길로 가지 않음으로써,

문명은 인간의 가장 고귀한 부분을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9

생존보다

번식을 택하다

: 《인간의 유래》, 성선택


공작의 긴 꼬리가 없었더라면 공작은 생존확률이 더 높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작은 꼬리를 진화시켰다.

공작의 꼬리는 틀림없이 적응을 방해하는 특징임에 틀림없다.

이 경우 적응을 설명하는 데 자연선택이 성공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반대인 것 같다.

자연선택의 작용이 강했다면 공작의 꼬리 같은 구조는 존재하지 않았어야 한다.

자연선택을 이용해 '수컷의 거친 호전성과 공격 무기', '화려한 색깔과 장식,

그리고 가창력'을 설명하려면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성선택의 특별한 힘은, 번식기가 아닌 시기에 수컷의 효율을 감소시키면서까지 그러한 구조의 진화를 일으켰다.


10

다윈, 감정 표현의

비밀을 벗기다

: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


사람과 여러 원숭이들은 웃을 때 동일한 안면 근육을 사용하듯이

유연관계가 있는 종들의 일부 표정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그들이 하나의 공통 조상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비교적 쉽게 이해가 된다.

자연사의 다른 모든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감정 표현의 분야에서도

개별적인 창조의 견해에 치명타를 날릴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인간의 경우 극도의 공포에서 털이 곤두선다든지 화가 많이 났을 때 이를 드러내는 것과 같은 일부 표현은

한때 지금보다 훨씬 더 하등했으며 동물과 다를 바 없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한 이해될 수 없는 것들이다.


다윈의 생애


1809년 2월 12일 영국의 슈루즈버리에서 출생. 아버지 로버트 워링 다윈(Robert Waring Darwin)은 성공한 의사였고 어머니 수잔나(Suzannah)는 도자기 제조업자 집안 출신이다.

1818년 슈루즈버리 학교 입학.

1825년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에든버러대학교에 진학.

1827년 법관이 되기 위해 케임브리지대학교에 진학.

1831~1836년 비글호에 승선해 남아프리카, 갈라파고스제도 등 전 세계를 돌아다님.

1837년 런던에서 생활, 종의 변화(즉 진화)에 관한 노트 시리즈를 시작함.

1839년 후일 《비글호 항해기 The Voyage of the Beagle》라고 알려진 책을 출판함. 

             엠마 웨지우드(Emma Wedgwood)와 결혼.

1842년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를 개괄적으로 설명하는 평론을 집필했으나 출간하지는 않음. 《산호             초의 구조와 분포 The structure and distribution of coral reefs》 출간. 켄트의 다운 하우스             (Down House)로 이사. (이 집은 다윈 가문의 여러 물건들이 보관되어 있으며 일반에게 개              방되어 있다. 다윈 시절 한 정부 관리가 'Down' 마을이 'Down' 카운티와 혼동되는 것을 피             하기 위해 'Downe'으로 이름을 바꾸었기 때문에 가끔 철자의 혼란이 생긴다. 다윈 자신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의 철자를 바꾸지 않기로 했다.)

1844년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을 설멸하는 더 긴 에세이를 집필했으나 출간하지 않음.

1846~1856년 따개비의 분류에 대해 연구.

1856년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에 대한 방대한 분량의 책을 쓰기 시작.

1858년 월리스로부터 편지를 받음. 편지는 다윈의 진화론과 비슷한 이론을 담고 있었다. 런던의 린

             네 학회에서 월리스와 공동 명의로 논문을 발표.

1859년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발간.

1862년 《영국산 난초와 외래 난초가 곤충의 도움으로 수정이 일어나게 해주는 여러 가지 구조에

             관하여 On the various contrivances by which British and foreign orchids are fertillised

             by insects…》 발간.

1868년 《가축과 재배 작물의 변이 The Variation of Animals and Plants under Domestication

              발간.

1871년 《인간의 유래 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 발간.

1872년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 The Expression of the Emotions in Man and Animals》 발간.

1875~1880년 여러 식물학 관련 서적 발간.

1881년 《벌레의 작용으로 인한 곰팡이의 형성 The Formation of Vegetable Mould through the

             Action of Worms》 발간.

1882년 4월 26일 다운 하우스에서 사망.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에 묻힘.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