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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1.14 2014-108 알렉산더 대왕
2014. 11. 14. 16:51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108 알렉산더 대왕


피에르 브리앙 지음, 홍혜리나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25


082

시156ㅅ  20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020


기원 전 334년 봄, 마케도니아의 왕인

알렉산더 3세는 스물두 살의 나이로 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소상시아의 연안을 향해 출항했다.

이로써 그리스인들은 '왕 중의 왕'인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의 제국을 정복하러 아프가니스탄과

인도까지 이르는 대(大)원정길에 나서게 되었다.

이 웅장한 서사시는 알렉산더가 제국의

아름다운 수도 바빌로니아에서 죽는 날까지,

약 십여 년 간에 걸쳐 펼쳐진다.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Philippos)의 아들로 태어났다.

펠리에 있는 궁전에서 가장 명성있는 스승들의

정성어린 가르침을 받은 그는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검술은 물론 운동과 사냥,

그리고 머리를 끄는 데까지 탁월함을 보였다.


스승들은 알렉산더에게 판단력과

도덕심을 심어 주는 것 못지않게

자신의 신체를 맹수처럼 강인하게 단련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알렉산더는 총명했을

뿐만 아니라 외모도 남달리 출중했다.

스승들은 알렉산더의 뛰어난 면모를 보면서

그의 찬란한 업적을 예견할 수 있었다.


필리포스가 죽자 알렉산더는 왕위를 계승햇다.

그 당시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의 맹주가 되었고

그리스는 페르시아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다.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은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5만의 군사를 이끌고 헬레스폰투스 해협을 건넜다.

페르시아왕 다리우스 3세는

우월감에 빠져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다리우스 3세 휘하의 장군들은 이에 맞서 싸울 준비를 했다.

그라니쿠스강 우안에 이오니아와 리디아의 지사

스피트리다테스가 페르시아 기병대를 소집했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알렉산더는 가까스로

죽음을 면했다. 그렇지만 저녁 무렵

그는 승기를 잡아 페르시아인을

발아래 굴복시켰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을 차례로 해방했다.

에페수스, 프리에나, 밀레투스, 마그네시아에서

민주정이 회복되었다.

겁을 먹은 다리우스 3세는

직접 나서서 알렉산더에 대항했지만

결국 이수스 전투에서 패해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

그의 가족과 보물들은 정복자의 손으로 넘어갔다.


시돈과 티루스가 함락되면서 이집트로 가는 길이 열렸다.

이집트 나일강 유역의 삼각지에 새 도시,

알렉산드리아가 건설되었다. 알렉산더가 '아몬신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았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후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메소포타미아의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는

또다시 도망쳤다. 페르시아인은 저항을 포기했다.

그들은 정복자에게 바빌론의 문을 열어 주었다.


여러 해가 흘렀다.

알렉산더는 그동안 페르시아, 파르티아, 마르기아나,

아라코시아, 박트리아, 소그디아나를 굴복시켰다.

이윽고 그는 인도의 문턱에 다다랐다.

모두들 그에게 무릎을 꿇고 공물을 바치며 지지를 표했다.

오직 인도왕 포로스만이 항복을 거부한 채

대규모 군대와 코끼리 200마리,

전차 300대를 동원해 대항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알렉산더가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패자에게 물었다. "어떤 대우를 바라는가?"

"왕이오." 포로스가 대답햇다.

그리하여 그는 왕좌를 지킬 수 있었다.

이 새 동맹자와 더불어 알렉산더는

동쪽으로 더 진군하려고 했다. 그러나 오랜 원정으로

지친 병사들은 더 이상의 원정을 거부했다.

알렉산더의 정복이 한계에 이른 것이다.


차례


제1장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

제2장 정복전쟁의 시작

제3장 주요 도시들의 병합

제4장 페르시아의 새로운 대왕

제5장 인더스강에서 페르시아만까지

제6장 마지막 나날, 그리고 마지막 계획

기록과 증언

그림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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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브리앙 Pierre Briant

피에르 브리앙은 툴루즈(Toulouse) 제2대학의 고대사 교수로서, '중세사 : 페르시아 지배기와 알렉산더 정복기, 그리고 후계자들의 시대'를 전공하고 있다. 역사학 교수이면서 문학박사인 그는 안티고네(알렉산더의 후계자 중 하나)에 관한 논문을 썼다. 주요 저서로 <알렉산더 대왕>, <고대 중동에서의 국가와 국가 원수들> 등이 있다.


옮긴이 : 홍혜리나

1965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불어불문과를 졸업한 후 동대학원에서 석사 학위 및 박사 과정을 이수 했다. 현재는 독일 유학 중이다. 번역서로는 <소설 카프카> <인간과 문화> 등이 있다.


제1장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


B. C. 4세기, 그리스 전체가 복수를 계획하고 있었다. 모두들 철천지원수 페르시아에게 '복수전'을 펼쳐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살라미스 해전과 마라톤 전투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둔 뒤로 2세기 이상 대치상태가 이어지다가 암울한 굴욕의 순간이 다가왔다.

리스 도시글은 나름대로 힘을 지녔지만 페르시아에 전혀 대항하지 못했다. 그리스군은 페르시아왕의 장군들이 내리는 명령에 번번이 따라야 했다. 필리포스는 처음으로 페르시아 원정 계획을 세웠고, 그의 아들 알렉산더가 이를 추진해 나갔다.

B. C. 359년 필리포스는 마케도니아 수도 펠라 주변의 여러 소공국(小公國)들을 통합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마케도니아가 강국으로 부상한 것은 다음 몇 가지 사항만 봐도 알 수 있다. 즉, 그리스의 정치, 문화적 중심지로 떠오른 펠라의 시가지를 재정비했고, 트라키아의 새 광산을 손에 넣어 왕의 초상이 찍힌 금화와 은화를 대량 보급했고, 보병으로는 농부들을, 기마병으로는 귀족들을 징집하여 강력한 군대를 구성했으며, 여기에 금을 받고 지원한 용병들이 가세하여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베르기나의 왕묘

베르기나의 유적지 부근, 마케도니아 영토에 속하는 피에리 산맥 기슭에서 고고학자들은 헬레니즘 시대의 왕궁터 부근에 자리잡은 무덤을 여러 기 발굴했다. 거대한 봉분(지름 110m, 평균높이 12m)의 아래에서 호화롭게 장식된 거대한 돔형 무덤을 발견했는데, 그 안에는 갖가지 유물들이 도굴꾼의 손이 닿지 않은 채 그대로 간직되어 있었다. 특히 석관 속의 시신은 자줏빛과 금빛이 영롱한 눈부신 옷을 입고 있었다. 그곳에서 발견된 도자기 양식으로 추정해 보건대 이 돔형 무덤은 B.C. 4세기 무렵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필리포스 2세와 그의 부인들 가운데 한 명(클레오파트라가 가장 유력하다)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 베르기나는 여러 왕들이 매장된 마케도니아의 옛 수도 아이가이 지역이다. 상아로 만든 여러 작은 조상(彫像)들은 왕가(王家)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맨 위 왼쪽은 올림피아스, 맨 위 오른쪽은 알렉산더, 두번째는 필리포스이다.

왕의 무기들

왕의 시신과 함께 행사 때 입던 갑옷, 무기들이 부장(副葬)되었다. 가는 철판에 가죽과 피륙을 덮어 만든 갑옷은 수평, 수직으로 금조각들을 배열하여 장식했다. 앞부분은 여섯 개의 사자머리를 달아 치장했다. 갑옷은 전체적으로 전사가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정면에 아테네 여신의 얼굴을 장식한 높은 산 모양을 한 왕의 투구는 최초로 발굴된 마케도니아의 투구이다.

금으로 만든 고리토스(gorytos, 활과 화살을 넣는 케이스)에는 도시를 점령하는 전사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알렉산더의 어머니 올림피아스는 에페이로스에 사는 물로스족의 왕녀였다. 지나치게 권력 지향적이던 올림피아스는 필리포스 옆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었다. 이 때문에 그녀는 추방될 지경에 이르렀으나, 아들 알렉산더의 중재로 간신히 펠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나중에 아들은 아무리 먼곳으로 원정을 떠나도 어머니와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어느 날 테살리아인 필로니코스가 필리포스에게 13탈란트에 팔겠다고 부세팔로스란 말을 가져왔다. 사람들이 들판으로 나가 그 말을 타려고 했지만 말이 어찌나 고집이 센지 도저히 다룰 수가 없었다. …… 성미가 급한 필리포스가 그 말을 도로 데려가라고 지시하자 …… 알렉산더가 이렇게 탄식했다. "저렇게 훌륭한 말을 놓치다니, 수완과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라 감히 올라타지도 못하는구나!" 그 말을 들은 필리포스가 아들에게 말했다. "너보다 연륜이 높은 사람들을 그처럼 무시하다니, 그렇다면 네가 그들보다 이 말을 더 잘 다룰 수 있다는 거냐?" "물론입니다." 알렉산더가 대답했다. …… "만일 네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경거망동한 대가를 어떻게 치르겠느냐?" "제우스신의 이름을 걸고 이 말값을 치르겠나이다."

플루타르크

광대한 페르시아 제국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상비군이나 특별부대를 편성해서 주둔시켜야 했다. 대왕은 우선 창과 방패로 무장한 왕궁수비대를 활용할 수 있었고 긴급한 상황에서는 제국의 전민족들에게서 병사를 징집할 수 있었다. 위 그림은 왕궁수비대의 모습이 담긴 페르세폴리스 유적의 벽면 부조이다.

다리우스 대왕 때 이집트에서 제작되어 수사의 왕궁 입구에 세워진 이 기념상은 다민족에 대한 대왕의 지배를 상징하고 있다. 각 민족은 옷과 머리 모양으로 알아볼 수 있으며 상형문자로 표기되어 있다. 위에서부터 페르시아족, 메디아족, 엘람족, 박트리아족, 소그디아나족, 스키타이족, 리디아족, 아랍족, 이집트족, 인도족, 누비아족이다.

"테베시는 많은 수모를 겪었다. 그러던 중 품행이 단정한 유명한 귀부인 티모클레이아의 집이 트라키아 병사들에게 약탈당한 일이 있었다. 병사들이 부인의 재산을 터는 동안 그들의 우두머리가 부인에게 다가와 강제로 욕을 보였다. 그리고 나서 혹시 어딘가에 금은 보화를 숨겨 놓은 게 없는지 물어 보았다. 부인은 그렇다고 대답하고 그 우두머리만 정원으로 데려가 가장 값비싼 보화를 숨겨 놓았다며 한 우물을 보여 주었다. 트라키아인이 우물 속을 들여다보려고 몸을 숙이는 순간 부인은 그를 우물 안으로 밀어 넣고 돌을 가득 집어 던져 죽여 버렸다. 병사들이 부인을 포박해 알렉산더 앞에 데려갔을 때 알렉산더는 부인의 태도와 몸짓을 보고 한눈에 그녀가 용감하고 뛰어난 여자임을 알아보았다. 부인은 자기를 끌고 가는 사람들 뒤에서 겁먹은 표정도 짓지 않고 한치도 근심스러워하는 구석이 없이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왕이 신분을 묻자 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그리스를 해방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필리포스에 맞서 싸우다가 케로네아에서 전사한 테아게네스의 누이입니다.' 알렉산더는 부인의 분명한 대답과 당당한 태도에 탄복하여 자녀들과 함께 자유롭게 떠나도록 놓아주라고 명했다."

플루타르크

자신의 영지에서 대왕의 대리인이던 지사는 왕궁의 의례를 본떠 격식을 차려 가며 권한을 과시했다. 부조에 보이는 왕관과 파라솔도 그 예이다.

알렉산더가 정복하려고 한 페르시아 제국은 동서로는 이집트에서 인더스강 유역까지 4,000km, 남북으로는 시르다리야강(오늘날의 러시아)에서 페르시아만에 있는 호르무즈 해협까지 약 1,800km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 걸쳐 있었다. 제국은 다양한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란 고원과 이집트와 발루치스탄(게드로시아)의 사막지대, 나일강 유역과 바빌로니아, 박트리아의 평야지대, 힌두쿠시와 카프카스 산맥의 험준한 산악지대, 수평선이 끝없이 펼쳐지는 소아시아 연안의 지중해,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삼각지대 등등 이렇게 다양한 지역들을 알렉산더는 차례차례 정복해 나갔다. 페르시아는 전국 구석구석까지 도로망(왕도)을 정비하여 제국의 중심지와 지방을 하나로 연결시키고 있었다.

페르시아 귀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페르시아 왕은 속국들을 장악하고 있던 관리들과 장군들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었다. 페르시아인은 관모양의 독특한 머리쓰개로 알아볼 수 있다.

키루스 대왕이 정복활동을 펼친 지 30년이 흐른 뒤, B.C. 522년에서 B.C. 521년 사이에 제국 내에서 반란이 자주 일어났지만, 다리우스 대왕은 이를 진압했다. 대왕은 자신의 공적을 바빌로니아에서 엑바타나로 가는 길에 있는 베히스툰 바위 위에 새겨 넣었다. 여기서 대왕은 반란을 주도한 적 위에 발을 올려놓고 있고 반란에 가담한 왕들은 목에 밧줄이 매여 있다. 대왕 뒤에는 그가 권력을 장악할 때 공을 세운 여섯 명의 귀족 가운데 두 명이 서 있는데, 그중 한 명은 창꽂이를, 다른 한 명은 화살통을 들고 있다. 조로아스터교의 위대한 신 아후라마즈다가 위에서 굽어보고 있다.


제2장

정복전쟁의 시작


B.C. 334년 봄, 마케도니아군은 아비도스 부근의 소아시아 연안에 상륙했다. 육지에 발을 디딘 알렉산더는 땅에다 창을 꽂아 페르시아를 정복하겠다는 야망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이어 그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들에게 자신을 수호해 달라고 제식을 올렸다.

마케도니아의 군사적 우위를 확신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제국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원정에 열정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들에게 자신의 원정을 비호해 달라고 빌었다. 아래 그림은 알렉산더가 아킬레스의 무덤을 찾아가 경의를 표하는 장면이다.

미케도니아의 귀족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알렉산더도 훌륭한 기마병이 되기 위하여 강훈련을 받았다. 스승들은 그를 건장한 전사이자 왕국을 강력하게 통치할 수 있는 군주로 교육시켰다.

자기 또래의 '동료들'과 함께 성장한 알렉산더는 자연스럽게 그들 가운데서 조언자와 장군을 뽑았다. 펠라의 모자이크 위에 사자사냥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크라테레스도 이렇게 해서 선발된 인물이다.

마케도니아와 페르시아 사이의 첫번째 전투는 그라니쿠스강에서 벌어졌다. 양편 모두 소수의 기마대만이 전투에 참가했다.


"'왕의 혈족들'이 힘을 모아 알렉산더에게 투창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들은 알렉산더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육탄전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알렉산더는 그런 위험한 상황에서도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갑옷에 두 번, 투구에 한 번, 트로이의 아테네 여신 신전에서 가져온 방패에 세 번 창을 맞았지만 그는 주춤거리기는커녕 오히려 불굴의 용기를 발휘하여 갖은 위험에 맞서 당당히 싸웠다. 그 결과 땅바닥에 쓰러진 것은 그가 아니라 페르시아의 수많은 명장들이었다."

디오도로스

"당시 아르테미스 여신은 알렉산더의 출산에 참견하느라 신전이불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에페수스에 머물고 있던 점성가들은 한결같이 신전이 파괴된 걸 보고 불행이 닥칠 것이라고 예견했으며, 그날이 아시아에 큰 재앙과 참화를 가져온 날이라고 주장했다."

마그네시아의 헤게시아스 플루타르크의 책에 인용됨

고르디온의 신전에 있는 매듭에 관한 일화를 묘사한 르네상스 시대의 벽화.


"매듭은 산수유나무 껍질로 만들어졌는데 아무도 그 매듭의 시작과 끝을 알지 못했다. 이 매듭을 풀 방법을 찾지 못하자 알렉산더는 그것을 그대로 두지 못하고 …… 이렇게 저렇게 해보다가 안 되자 단칼에 두 동강냈다고 한다. 하지만 아리스토불로스는 알렉산더가 수레에서 쐐기를 뽑는 동시에 매듭을 잡고 수레의 채에 연결된 멍에를 당겨 매듭을 풀었다고 전한다."

아리아누스

왕실수비대의 사수들은 불사조란 칭호를 갖고 있었다. 헤로도토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이유는 한 사람이 싸우다가 쓰러지면 체격이 비슷한 다른 사람이 곧바로 그 대신 싸우기 때문이라고 한다. 긴 창으로 무장한 이들은 등에 화살통을 지고 있었다.


"페르시아인이 불사조라 부른 1만 명 가량의 군인들이 곧장 진군하기 시작했다. 야만인의 호사스런 장신구로 치장한 그들의 모습은 더욱더 위풍당당했다. 그들은 금목걸이와 금실로 수를 놓은 옷가지들, 보석이 박힌 소매 달린 긴 옷을 입었다."

퀸투스 쿠르티우스

전쟁터에서 처음으로 알렉산더와 맞붙은 다리우스 3세는 전차 위에서 투창수들의 호위를 받으며 싸웠다.


"알렉산더는 다리우스 3세를 찾아내기 위해 곳곳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의 모습이 눈에 띄자 알렉산더는 그를 지나쳐 기마병들과 함께 전투가 벌어지는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그는 페르시아인에게 이기기보다는 더 큰 승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디오도로스

알렉산더와 다리우스 3세가 참전한 모습을 묘사한 그림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으로 유명한 이수스 전투장면을 그린 모자이크 벽화이다. 이것은 폼페이에 있는 목신 파우누스의 사당에서 발견한 것으로, 알렉산더가 죽은 뒤 에레트리아의 필로크세노스가 그린 것을 복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왕은 친구 헤페스티온을 데리고 여자들을 찾아갔다. 두 사람은 같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헤페스티온이 용모로 보나 체격으로 보나 더 뛰어났기 때문에 시시감비스는 그를 왕으로 여기고 그 앞에 넙죽 엎드렸다. ……"

"…… 반응이 없자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알렉산더 앞에 재차 엎드렸다. 그러자 알렉산더는 입을 열고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아무 걱정 마십시오.' 역시 알렉산더다운 말이었다. 늙은 여인을 어머니라 부름으로써 여인네들을 따뜻한 인간애로 대할 것임을 암시했던 것이다."

디오도로스

동전을 통해 왕의 영웅적인 이미지가 널리 유포되었다. 정복자는 이집트의 아몬신처럼 숫양뿔을 달고 있다. 아몬신이 시와의 오아시스에서 알렉산더에게 세계지배를 약속했는지도 모른다.

이집트에 입성하자 알렉산더는 지방귀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또한 파라오의 비호를 받은 사제들과 화합했고 룩소르에서는 신전에 예배소를 꾸몄다. 이 예배소의 벽 부조에서 알렉산더(부조의 오른쪽)는 파라오의 모습으로 자신이 숭배하는 미노스신 앞에 서 있다.


제3장

주요 도시들의 병합

 

3년 간 알렉산더는 정복에 정복을 거듭했다. 자신의 군대와 함께 수천 킬로미터를 달렸고 수많은 도시와 나라를 굴복시켰다. 하지만 다리우스 3세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 주지는 못했다. 한편, 다리우스 3세는 이수스에서 패한 이후로 바빌론에서 군대를 새롭게 편성했다. …… B.C. 331년 봄, 마케도니아인은 메소포타미아로 또다시 길을 떠난다.


B.C. 331년 가을부터 B.C. 330년 봄 사이의 몇 달 동안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왕이 머무르던 왕궁들(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 파사르가다이)을 차지했다. 그는 도시마다 승전자로서 당당하게 입성했다.

 

"마케도니아인은 의기양양하게 전차들을 에워싸고 무장을 해제시켰다. 마부와 말에게 엄청난 재앙이 덮친 셈이었다. 마부는 미친 듯이 날뛰는 말을 더이상 통제할 수 없었다. 말은 머리를 마구 흔들어댓고 그 바람에 멍에가 떨어져 나갔다. 자기 진영으로 돌진하는 전차도 생겼다. 상처 입은 말은 죽은 병사들을 끌고 다녔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말은 제자리에 멈출 수도, 앞으로 나아갈 기력도 없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규모 그룹을 이룬 사두이륜전차들이 닥치는 대로 적군을 죽이면서 마지막 대열까지 이르렀다. 땅에는 몸통에서 잘려 나온 사지들이 나뒹굴었다. 병사들은 부상당한 상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치고 불편한 몸을 이끌고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무기를 놓지 않고 용감히 싸웠다."

퀸투스 쿠르티우스

브뢰겔이 놀라운 상상력으로 표현한 혼란스런 교전장면(아래)과 B.C. 4세기 그리스 화병 위에 그려진 세련된 그림(위) 모두 다리우스 3세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을 잘 보여준다. 그리스 화병은 말을 탄 알렉산더와 비무장한 채 전차에 올라탄 다리우스 3세의 모습을 통해 전투의 결과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패색이 짙어지자 다리우스 3세는 이수스 전투에서와 마찬가지로 싸움터에서 달아나고 말았던 것이다.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채찍소리를 들었다. 채찍을 든 마부가 왕의 말들을 쉬지 않고 후려쳤다. 이것이 다리우스 3세가 달아나면서 남긴 유일한 흔적이었다.

퀸투스 쿠르티우스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승리한 뒤 알렉산더는 바빌론에 당당히 입성했다. 그림은 샤를 르브룅이 루이 14세를 위해 베르사유궁에 그린 그림을 모방한 태피스트리이다.

"알렉산더의 모습은 리시포스가 제작한 조상들에서 가장 잘 표현되었다. 알렉산더도 리시포스가 자신의 조상을 제작해 주기를 원했다."

플루타르크

엘람의 옛 수도인 수사는 B.C. 520년 무렵부터 다리우스 1세가 단장하기 시작했다. 바빌론의 예술가들은 아시리아의 조상을 본떠 거대한 왕궁을 디자인했다. 외벽에 자리한 이 날개 달린 스핑크스들은 수호신의 일종이었다.

바빌론의 성도(聖道)는 푸른색 유약을 칠한 벽돌로 장식한 이시타르의 문을 기점으로 시작된다. 이 벽돌 위에는 신화 속의 동물들과 실재하는 동물들(용과 황소 575마리, 사자 120마리)이 새겨져 있다.

키루스 대왕은 페르세폴리스 근처에 위치한 돌무덤 속에 묻힌 자신의 후계자들과 달리 수도인 파사르가다이에 자신의 능을 만들게 했다.

"이 방에 키루스 대왕의 유해가 들어 있는 금으로 된 관이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금으로 세공된 다리가 달린 침대가 있었다. 침대에는 바빌론산 이불과 자줏빛 망토가 깔려 있었다. 무엇보다도 바빌론에서 만든 페르시아식 의복과 소매 달린 옷들이 눈에 띄었다."

아리아누스

드넓은 평야를 굽어보는 높은 언덕 위에 건설된 페르세폴리스는 다리우스 1세가 건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마지막 왕들이 재임하는 기간까지 공사가 계속되었다. 왕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거나 기존의 건물이 개축되곤 했다.

궁의 전면은, 여기에 재현해 놓은 다리우스 1세의 왕궁처럼 권력의 심장부다운 호사스러움을 과시하는 색벽돌로 장식되어 있었다. 원주의 소벽 위, 측면의 원반 속에는 인간의 형상을 한 위대한 신 이후라마즈다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왕궁은 페르시아의 파라다이스라고 소문난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이 정원은 주변 풍경에 사치스러움을 더해 주었다.


제4장

페르시아의 새로운 대왕


다리우스 3세는 기우가멜라 전투에서 패배한 뒤 페르시아 제국의 여름 궁전이 있는 엑바타나로 피신했다. 그는 그곳에서 금은으로 뒤덮인 휘황찬란한 왕궁과 신전 속에 파묻혀 복수를 계획했다. 그는 전열을 정비하여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알렉산더와 정정당당하게 싸워 보고 싶었다. 이번에는 행운의 여신이 자기 편이기를 기대하면서…….

19세기 말 옥수스 강 기슭에서 금은으로 만든 세공품들이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은 정착민들이 살던 지역과 스키타이족이 거주한 스텝 지역 간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 주는 증거이다. 의자가 설치된 이 황금 4두 마차상도 그 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 스텝 유목민들이 쓰던 전차를 축소한 것으로 보인다. 헤로도토스는 유럽의 스키타이족(우크라이나)은 '이동가옥'인 수레에서 사는 것이 특징이라고 기록했다.

스키타이의 기사들은 페르시아군의 정예부대를 구성했으며, 페르시아 전쟁중 그리스에서 벌어진 초기 전투에서부터 참가했다. 스키타이 전사들은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를 도와 싸움을 치렀고, 베소스, 스피타메네스와 합류했다가 알렉산더에게 분쇄되었다.

약사르테강 건너에 사는 일부 스키타이족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B.C. 516~515년 다리우스 1세는 스키타이의 슌 카왕과 싸워 이겼다. 그의 모습은 반란을 일으킨 다른 왕들과 함께 베히스툰 바위에 새겨져 있다. 그는 뾰족한 모자를 쓰고 있어 쉽게 알아볼 수 있는데, 이 모자를 보고 페르시아인은 이 종족을 '화살처럼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쓴 스키타이족'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란의 귀족들과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 알렉산더는 B.C. 327년 박트리아의 아름다운 로크사네 공주와 정략결혼을 하기로 결심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의 측근들도 박트리아 공주들과 결혼하도록 권유했다. 성대하게 치러진 결혼식은 마케도니아의 전통을 따랐는데, 이것은 결혼으로 패배자들과 완전히 동화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밝혀지는 의도였다. 게다가 충성심을 확인하기 위해서 유대를 맺은 귀족들에게는 신의의 표시로 볼모를 보내게 했다. 이렇게 해서 로크사네의 아버지인 옥시아르테스는 두 아들을 정복자에게 딸려 인도로 보내야 했다.

"욕정에 사로잡힌 알렉산더는 자기 나라의 풍속대로 빵을 가져오게 했다. 마케도니아에서 빵은 육체적 결합을 의미하는 신성한 상징이었던 것이다. 그는 칼로 그 빵을 잘라 신부와 나눠 먹었다. …… 그리하여 아시아와 유럽을 지배하는 왕이 포로와 결혼으로 맺어지게 되었고 이 포로는 피정복민들을 다스릴 아이를 낳게 되었다."

퀸투스 쿠르티우스

알렉산더는 공식적인 알현의식을 강요하는 등 페르시아 궁정예법에 따랐다. 왕좌에 위엄 있게 앉은 대왕이 방문객을 맞고 있는데 이 방문객은 상체를 완전히 숙이고 왕의 오른손에 입을 맞춰야 했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를 왕이 자신을 신과 동일시하는 증거로 오인하고 '프로스키네즈(Proskynese)'라 불렀다.

 

제5장

인더스강에서 페르시아만까지

 

B.C. 516~515년, 다리우스 1세가 간다라와 신드를 정복했다. 그러나 2세기 후부터 아케메네스 왕조의 권위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B.C. 326년 인도의 여러 왕국들은 인더스강 유역과 그 지류의 영토를 되차지했다. 알렉산더는 자신이 페르시아의 옛 영토를 되찾겠다는 야심에 불타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사이에는 카이바르 고개가 버티고 있다. 해발 1,100m, 길이 50km인 이 협곡은 중간 지점에서 폭이 좁아진다.

"포로스는 주위에 코끼리 40마리를 거느리고 적진을 향해 돌진하여 치명적인 손실을 입혔다. 그는 다른 기사들보다 덩치가 크고 힘도 셌으며 2.2m가 넘는 장신이었다. …… 또한 그는 쇠뇌 같은 힘으로 창을 던졌다."

디오도로스


"인도 보병대의 사상자는 족히 2만 명은 되었다. 기마병은 약 3,000명이 죽었고 전차들은 모두 파괴되었다. 포로스의 두 아들도 유명을 달리했다. 코끼리와 전차를 지휘하던 사령관들과 기마부대의 사령관, 그리고 포로스 군대의 장군들 모두가 같은 운명이었다."

아리아누스

"몇몇 기사를 거느린 알렉산더는 앞장서서 말을 타고 포로스를 만나러 갔다. 그는 말을 멈추고서 포로스의 체격과 잘생긴 얼굴, 굽힐 줄 모르는 투지에 감탄을 표했다. 한 용감한 인간이 또 다른 용감한 인간을 만난 셈이었다. 그러고 나서 알렉산더는 포로스에게 어떻게 대우받기를 원하는지 물어 보았다. 포로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왕으로 대해 주시오.'"

아리아누스

탁실라왕이 알렉산더에게 항복하자 포로스는 독립을 유지하고 인도 북부에서의 주도권을 지키기 위해서 알렉산더에게 대항하기로 했다. 이 10드라크마짜리 은화에는 전쟁이 두 왕 - 한 사람은 말을 타고 또 한 사람은 코끼리를 타고 있다 - 사이의 싸움으로 표현되어 있다.

알렉산더가 인도에서 거둔 승리를 찬양하기 위해서 그의 후계자들은 코끼리 가죽을 머리에 쓴 왕의 모습을 조각했다.

왕이 죽었다는 헛소문이 후방에 파다하게 퍼진 시기에 포로스를 이긴 것은 아시아 원정 가운데 가장 값진 승리였다. 따라서 알렉산더가 거둔 이 승리를 소재로 한 그림들이 수없이 그려졌다. 귀스타브 모로의 그림도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


"젊은 정복자는 그의 발치에 엎드린 모든 피정복 민족들을 다스렸다. 막강하고 찬란한 왕권이 수립된 인도의 작은 계곡에는 환상적인 신전들, 성스러운 호수들, 신비와 공포로 가득 찬 지하세계 등 인도의 모든 모습이 담겨 있다. …… 그리고 그리스, 찬란하고 아름다운 그리스의 영혼이 꿈과 신비로 가득 찬 이 먼 미개척지에서 찬란한 빛을 발했다."

귀스타브 모로


"사냥꾼들은 '사로잡은 코끼리들'을 마을로 데려와서 우선 식용 갈대와 풀을 주었다. 하지만 코끼리들은 드러누운 채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자 인도인의 코끼리들을 둘러싸고 북과 심벌즈를 치면서 노래를 불러 주었고 그제서야 코끼리들은 먹기 시작했다. 사실 코끼리는 영리한 동물이다. …… 전쟁터에서 죽은 주인의 시신을 수습하여 운반해서 사람들이 장례를 치르게 해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올 정도이다. 어떤 코끼리들은 주인이 땅바닥에 쓰러져 있을 때 방패구실을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코끼리들은 주인이 쓰러졌을 때 그를 보호하려고 직접 싸우기도 했다. 성이나서 주인을 죽인 코끼리가 절망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리아누스

 

제6장

마지막 나날, 그리고 마지막 계획

 

정복전쟁에 나서 자리를 비운 지 6년, 알렉산더는 제국이 심각한 혼란에 빠져 있음을 알게 도었다. 그가 임명한 지사들과 관료들 중 대다수가 직무태만에 빠져 있거나 직위를 ㄴㅁ용하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왕이 죽었다는 헛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던 탓이었다. 이제 알렉산더의 최우선 목표는 정복한 나라들과 도시들을 다시 장악하는 것이었다.

B.C. 325년, 알렉산더의 여생은 2년 남짓 남아 있었다. 그는 이제는 자기 차지가 된 옛 페르시아 제국의 주요 도시들을 왕래하면서 마지막 2년을 보냈다. 그렇지만 마지막 긴 여행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빌론에서 출발하여 오늘날 고고학계의 가장 큰 불가사의로 남아 있는 그의 무덤이 있는 알렉산드리아까지 상여를 타고 가는 여행이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그곳에 가서 묵념을 올렸을까? 17세기의 이 그림은 그런 상상을 가능하게 해준다.

알렉산더는 일부 지사들에게서 보이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확산될 것을 우려하여 반란이 일어날 때마다 강경한 조처를 취했다. 퀸투스 쿠르티우스는 왕이 지나치게 가혹하게 진압했다고 누누이 강조햇다. 로마 시대의 역사책을 복제한 중세의 한 필사본에 들어 있는 이 채식삽화들은 그 사실을 입증해 준다.

 

"(메디아의 장군들이 일으킨) 사태에 관한 소식을 들은 왕은 그들을 즉각 체포할 것이며 구제의 여지가 없음을 통보했다. 사실 그들은 알렉산더가 인도에서 무사히 귀환하기를 바랐거나 믿었더라면 감히 그 같은 범죄를 저지를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왕은 이들을 투옥시켰고 그들의 배신행위에 동조한 병사 600명을 처형시켰다. 같은 날, 페르시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주동자들이 사형에 처해졌다."

퀸투스 쿠르티우스

5년 전에 일어난 화재로 도시가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왕 중 왕(王中王), 즉 대왕이 되고자 하는 알렉산더는 페르세폴리스를 매우 중요한 도시로 여겼다. 페르세폴리스는 새 제국의 수도가 되지는 못했지만 이후로도 페르시아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는 전에 자신이 불을 지른 적이 있는 -- 나는 이 행위에 찬동하지 않았다 -- 페르시아의 왕궁으로 향했다. 하지만 현자에 와본 알렉산더는 자신이 저지른 행위가 떳떳하지 못했음을 까달았다."

아리아누스

"알렉산더는 (파사르가다이에서) 석관과 침상을 빼고는 텅비어 버린 키루스 대왕의 무덤을 발견했다. 불경한 자들은 석관 뚜껑을 열고 키루스 대왕의 시신을 밖으로 내던져 버렸고, 들고 가기 쉽도록 석관의 일부를 떼어 내고 일부는 아예 없애 버렸다. 하지만 일이 여의치 않자 그들은 석관을 원래 있던 자리에 내동댕이친 채 도망가 버렸다."

아리아누스

"'내가 앉아서 명령만 내리면서 이 모든 것을 얻었단 말이오? 그대들 중에서 내가 그것을 얻으려고 애쓴 것 이상으로 나를 위해 애쓴 자가 있소? 자, 그러니 갑시다! 부상당한 사람이 상처를 내보인다면 나도 내 상처를 보여 주겠소! 나는 그대들의 부와 영광을 위해 싸우다가 부상당했소! …… 사실 요즘 나는 고향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이제 군복무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되돌려보낼 생각이었소. 하지만 그대들 모두 가겠다면 그렇게 하시오!' 이렇게 말하고서 그는 자신의 거처로 되돌아갔고 측근들 앞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사흘 뒤 그는 왕궁으로 페르시아의 간부들을 불러모았고 그들에게 부대별로 지시를 내렸다. …… (마케도니아인에게) 페르시아인과 왕 사이에 진행되고 있는 일이 전해지자 …… 그들은 모두 왕궁으로 달려가 알렉산더가 자신들을 통촉해 주지 않는 한 문에서 한 발짝도 물러날 수 없다며 울부짖었다. (이를 보고) 알렉산더가 밖으로 나왔고 …… 그 역시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아리아누스

 "알렉산더는 바빌론에서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 동료들로부터 왕국을 누구에게 넘겨주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최선책은 동료들이 나의 죽음을 기리는 장렬한 싸움을 치르는 것일게요.' 결국 그의 말대로 되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동료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동료들이 최고봉의 자리를 놓고 다투었고 수많은 전투를 치렀기 때문이다."

디오도로스

시돈에서 발굴된 석관

19세기에 시돈에서 왕실묘지가 발굴되면서 지방군주의 무덤 몇 기가 빛을 보았다. 그중 하나는 대대로 알렉산더의 석관으로 여겨져 왔다. 거기에는 전투장면과 사냥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그것들은 당시 막 개발된 다색배합(多色配合)으로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다. 그 시대의 조각판 중 하나에는 사자가죽을 머리에 쓴 마케도니아 기마병이 묘사되어 있다. 쓰러지는 말 위에 탄 한 페르시아인 앞에서 앞발을 든 말에 타고 있는 이가 바로 알렉산더이다. 이 장면은 전쟁터에서 보여 준 왕의 용맹스런 행위를 다소 과장되게 재구성한 것 같다. 이수스 전투가 끝나자 시돈은 알렉산더에게 아무런 저항없이 항복했고 알렉산더는 아브달로님에게 왕권을 넘겼다. 아마도 아브달로님이 그리스의 예술가에게 이 석관을 주문해서 정복자의 공적을 칭송하는 장면들을 그리도록 분부했을 것이다.

전쟁과 사냥

예술가는 전투장면 옆에다가 페르시아와 마케도니아 양국 모두에서 왕권의 상징으로 통하는 사냥장면들을 석관의 여러 판에 새겨 놓았다. 그에게는 이것이 왕의 눈에 들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사냥은 사자, 표범, 사슴 등 온갖 종류의 짐승들을 보호하는 구역에서 했다. 퀸투스 쿠르티우스가 전하는 바로는 사냥은 대규모로 이루어져서 박트리아에 있는 한 야생동물의 서식지에서 단체사냥이 끝날 무렵이면 4,000마리 이상의 짐승들이 알렉산더와 그 일행의 손에 죽었다고 한다. 석관의 부조는 시돈에 있는 페르시아 동물천국에서 왕이 참가한 단체 사냥장면을 묘사한 듯하다. 이날 사냥에서 왕의 친구인 리시마크가 사자에게 물려 중상을 입었다. 여기서 두드러진 점은 전투장면과 반대로 페르시아인과 마케도니아인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야수들을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술가는 알렉산더가 의도한 마케도니아와 이란 간의 협력정책을 상징적으로 묘사하려 한 것이다.

알렉산더가 죽은 뒤 오리엔트는 두 개의 큰 왕조 -- 하나는 프톨레마이오스(위)가 이집트에 세운 것이고 또 하나는 소아시아의 셀레우코스(아래)가 인더스강 유역에 세운 왕조이다 -- 의 지배하에 놓였다. 새로운 왕들은 자신들의 얼굴을 새긴 주화를 발행했다.

알렉산더는 《일리아드》를항상 머리맡에 놓아 두고 보았으며 트로이 전쟁의 영웅들을 모델로 삼았다. 그리고 출항할 때마다 아킬레스에게 경배를 올렸다. 허버트 로버트의 이 그림은 알렉산더가 가상의 트로이의 신전과 묘지들 사이에 서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플루타르크는 알렉산더와 카이사르를 같은 수준에 올려놓았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