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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2. 23. 13:18 내가 읽은 책들/2018년도

2018-010 도착하지 않은 삶

 

 

 

최영미 시집

2009, 문학동네

 

시흥시대야도서관

SB034426

 

811.6

최64ㄷ

 

    먼길 떠나는 나그네가

살아서 떠들

           지상의 모든 길이

        영원히 푸른 하늘과 닿게 하소서

 

강철처럼 단련된 시들에서 사랑과 정치에 대한 정열적인 탐색, 놀랍게도 신선한 무모함이 페이지마다 터져나온다. _체이스 트위첼(시인 · 평론가)

 

최영미의 시는 관습과 예의를 따지는 체제에 정면으로 맞서는 위험스런 모험을 느끼게 한다. 그녀의 스타일은 바로 그녀의 독립성이다. 그녀의 시는 삶으로 쓴 시들이다. _제임스 킴브렐(시인)

 

성감각을 노래한 여성 시인은 어느 나라에나 있지만, 남성사회의 알력 아래서 여성의 삶을 깊이 생각해온 사상의 언어가 그녀에게는 있다. 시에 의해서 잉태된 언어를 이만큼 신중하게, 고독하게 기르고 있는 시인이 가장 이웃한 나라에 있다는 것은 정말 놀랍다. _사사키 미키로(시인), 아사히신문

 

최영미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서양사학과와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1992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속초에서」 외 8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꿈의 페달을 밟고』 『돼지들에게』, 산문집 『시대의 우울』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미술에세이 『화가의 우연한 시선』, 장편소설 『흉터와 무늬』, 번역서 『화가의 잔인한 손』 『그리스 신화』가 있다.
2002년 미국에서 출간된 3인 시집 『Three Poets of Modern Korea』는 2004년 미국번역문학협회상의 최종후보로 지명되었으며, 2005년 일본에서 발간된 시선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일본 문단과 독자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2006년 『돼지들에게』로 이수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미국 버클리 대의 초청으로 2009년 4월 시낭송 프로그램 ‘lunch poem'에 참가할 예정이다.

 

차례

 

제1부

일요일 오전 11시
종이 울리고
어느새
중년의 기쁨
다시는
아파트를 꿈꾸며
내 집
2007년의 사포
10월의 교정
11월의 낙엽
내일을 위한 기도



제2부

나무가 깡통에게 - 난지도를 지나며
Love of My Life?
글로벌 뉴스
세계는 지금
나무는 울지 않는다
손의 여행
활주로
얼음처럼 낯선
4월은 잔인한 달
사계절의 꿈
여기에서 저기로
한가한 오후
광장을 지나며
2008년 6월, 서울
지상 최대의 쇼-베이징올림픽 개막식
일상의 법칙들



제3부

온종일 집에서
허기와 객기
가장 쉬운 길
동시를 읽고
동시를 읽은 다음날
타인의 시
한여름, 부엌에서
지루하지 않은 풍경
행복
아이에게
똑똑한 아이
극장
자연의 합창
하늘의 소리
?
청개구리의 후회
그 여자
보낸 편지함
청동정원



제4부

아름다움이 너희를 자유롭게
교토의 바위정원
나의 여행
4월의 알리칸테
파리의 지붕 밑
발굴 현장
철길, 핏줄
사교적인 저녁식사
나쁜 평판
서투른 배우
어떤 동문회
1977년 12월 7일
나는 시를 쓴다


해설 | 사가와 아키 글로벌 시대의 세련된 지성
시인의 말

 

글로벌 뉴스

 

유프라테스 강과 홍해가 마르고 닳도록

죽음의 행진이 멈추지 않는다

강한 자는 강자의 방식으로

약한 자는 약자의 방법으로

신의 이름으로 사형을 집행한다

 

예수와 마호메트가 태어나 묻힌 곳에서

예언자들이 평화를 설교했던 성지에서

왜 매일 총질이 끊이지 않는가

 

예언자들이 틀렸거나, 당신들이 틀린 거야

 

밥을 먹다 한 사람이 공중으로 날아간다

섬광과 굉음은 있지만, 살인자의 얼굴은 없어

우리는 안심하고 텔레비전을 켜고

첨단기술로 생중계되는 비극은 구경거리가 된다

 

발레리나의 날씬한 허벅지에서 피 묻은 바지로

화면이 바뀌는 데 일 초도 걸리지 않아

아파할 시간도 없이,

말쑥한 정장 차림의 신사숙녀가

녹음테이프에 담긴 시신들을 쏟아내며

종달새처럼 재잘된다

요단 강 동쪽과 서쪽의 반응을

높낮이가 없는 건조한 음성으로

총알처럼 빠르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이것도 미친 것 아닌가

 

화성에 우주선을 보내고

배아를 복제하는 똑똑한 사람들이

왜 인류의 자기 파괴를 막지 못하나

 

립글로스가 매끄러운 입술에서 언제까지

자살폭탄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를 들어야 하나

비징한 고전음악에 깔린 어머니의 눈물을

사막에 몰아치는 복수의 회오리를……

 

종이 울리고

 

잠에서 깨어난 엘리베이터가

검정 구두들을 실어나른다.

금요일의 죄를 일요일에 속죄하려는,

피곤한 발들이

거대한 유리문 안으로 빨려들어간다.

 

시멘트 벽에 강림(降臨)한 거룩한 얼굴은

낡기도 전에 새로 칠해지고,

늙은 백인이 부러뜨린 십자가를

높이 세우는 까만 눈동자

할머니를 따라 주기도문을 외는 장밋빛 입술도

언젠가는 문밖으로 뛰쳐나가겠지

 

길 건너, 빌딩의 장막에 가려진 호숫가에는

신을 믿지 않는 부자들이

새벽부터 골프채를 휘두르고,

시끄러운 아침의 나라에 싫증난 사람들은

어디로든 떠나려 짐을 싸는데,

 

밤이 오기를 기다리며

나는 내 방을 떠나지 않는다.

미친 대한민국은 정치가들에게 맡기고

나를 천국으로 데려다줄 그,

잡지의 얼굴처럼 쉽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림을 내 것으로 붙들지 못해 탄식하면서

 

내일을 위한 기도

 

잘 가라 2007년, 어리석은 날들이여

봄부터 겨울까지 내가 도모했던 일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아가, 나무, 푸른 산이 보이면

초라한 한 해를 돌아보는 저녁이 춥지 않아

텔레비전에서 약속들이 쏟아질 때

나는 책장의 먼지를 털었다.

 

서해 바다를 덮은 검은 기름띠도

우리의 푸른 들판을 가리지는 못해

우리가 자신을 버리지 않는다면

누구도 우리를 버리지 못하며,

머리 위에서 해가 빛나는 동안, 희망은 죽지 않는다.

내일의 집을 지으며, 그대는 살아갈 힘을 얻으리니

 

이 냉혹한 별의 어느 서러운 구석에도

따사로운 정오의 햇볕을 허락하시는

당신을 믿지 않았던 저를 용서하시고,

 

사랑의 힘으로, 절망의 힘으로

거듭 태어나게 하소서.

시든 이파리에 생살이 돋고

제가 강인 줄도 잊어버린 흙바닥에 강물이 흐르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창가에 우정이 꽃피게

 

먼길 떠나는 나그네가

살아서 떠돌

지상의 모든 길이

영원히 푸른 하늘과 닿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라면

가난한 잠을 깨우는

새벽 종소리가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2008년 6월, 서울

 

광장엔 옛날 사진들이, 피 묻은 신문들이 붙어 있고

확성기에서 울려퍼지는 노래도

어쩜! 이십 년 전과 똑같지만,

큰길에서 느긋하게 나눠주는 선언문은

그때보다 두껍고 인쇄 상태도 좋다.

21세기의 IT강국에서 인쇄된

빨간 느낌표는 세련되었고

서 있는 얼굴들은 군사독재에 저항하던 80년대처럼

분노로 일그러지지 않았다.

종이컵 안에서 안전하게 타는 촛불처럼 온화한 눈빛.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는,

외치다가 내가 죽을 구호를 모르는 건강한 입술.

어깨에 부딪치는 익명의 팔을 견디지 못하고 나는

내 옆의 젊은이에게 촛불을 건네주고 지하로 들어갔다.

 

유모차 부대를 호위하는 청년들이 어찌나 멋있던지!

한국 남자들의 품종이 눈부시게 개량됐어.

역사는 이렇게 진보하는 거야.

친구와 수다를 즐기며 이탈리아 식당에서

칼을 들고 연어의 생살을 갈랐다.

입 안에 죄의식이 거품을 품지 않고

 

광장을 지나며

 

1981년 5월에 나는 순결한 하얀 운동화였다

독재자가 차려준 축제를 거부하려 학교를 뛰쳐나와

남학생과 어깨 걸고 행진하던 그날 이후, 나는 변했다

얼마나 많은 날들이 강물을 적시었나

정처없는 밤의 다리를 건너

쓸쓸한 도시의 창문들을 지나, 나는 늙었다

 

내 앞의길들을 토막내며 나는 걷는다

스무 살

서른 살

마흔의 내가

도서관에, 광장에, 카페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는,

그녀는 오지 않는다

1985년에도 1995년에도 그리고 2008년에도

 

내가 달라질 다른 곳을 헤매지만

아침에 깨어나면 제자리.

과거에 갇힌 시멘트 벽이 아니라

앞이 보이지 않는 정글에 던져졌다면,

삶은 더 단순했으리

 

서투르게, 능숙하게 벗겨진

신발들을 나는 절반도 기억하지 못한다

 

지상 최대의 쇼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그토록 어두웠던 나라이기에

우주가 놀라게 불꽃을 터뜨리며

천문학적인 돈을 불살라야 했나.

 

지상 최대의 쇼를 냉면에 말아먹는다.

편안히 집에서 실크로드를 순례하는 밤.

 

천년제국의 후예들이, 무너진 건물더미에 깔린

시체들이 일어나 북을 두드린다.

땅을 흔들고 하늘을 찢으며

스모그를 걷어버린 오천 년의 북소리.

 

한 몸처럼 움직이는 팔과 다리들.

진시황릉에 묻힌 병사들처럼

바둑판 위의 돌처럼, 전체의 일부로만 존재하는 육체들.

그 옛날 황제를 치장했던 궁녀들처럼

오로지 하룻밤을 위해 온통 칠하고 붙이고

춤추는 만리장성의 인형들.

 

두루마리 위에 펼쳐진

찬란한 역사의 모서리는 날카로웠고

금박을 입힌 위에 금을 덧칠한 듯 번들거리는

빛의 바다, 인간의 바다, 중화인민공화국.

 

얼마나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았으면,

열강에 짓밟힌 백견의 치욕을

기나긴 장정의 굶주림을 보상받으려

오늘밤 미친 듯 쏟아내는가, 불쌍한 아시아여.

동경과 서울이 간 길을 베이징, 너도 피하지 못하는구나.

서양의 근대문물이 얼마나 신기했으면,

봉건제에서 포스트모던으로 건너뛰어

2008년의 첨단기술로 버무린 무협지를 과시하는가.

백년의 어둠을 깨고

허공을 불지르며 질주하는 열차에

나는 브레이크를 걸고 싶었다.

 

교토의 바위정원

 

여기 들어오는 자는 신발을 벗어라

 

오래된 나무마루에 떨어지는 햇빛.

나무도 물도 없는 이상한 정원.

바깥은 꽃나무가 우거진 봄날인데

바위와 흙벽을 바라보며

 

벽을 넘지 않는 초월에 심취했던

사무라이들, 寺院의 탐미주의자.

 

바라볼 뿐 소유하지 않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이 무거워도

내려놓을 땅이 없었으니

남북이 십 미터인 직사각의 안뜰에서

 

위는 열리고 아래는 닫힌

유토피아, 혹은 감옥에서

아침마다 빗자루로 욕망을 쓸며

 

천하를 흑과 백으로만 재현한

그들이 떠난 뒤에도 검은 바위와 하얀 자갈은 남아

참선을 계속한다 흐트러지지 않는 곡선으로

 

16세기 일본의 상상력 속으로 들어가

열린 감옥이 내 방보다 편해서, 다리를 꼬았다 풀며

거기에 오기까지 내가 저지른 우여곡절을 지웠다.

지워지지 않는 총천연색을 정오의 광선에 태우며

단순한 흑백으로 돌아가고파.

 

발굴 현장

 

삼국시대, 백제라던가 통일신라였던가

노동에 지친 어느 장인의 실수로

기왓장에 찍힌 손자국.

두툼한 살결이 선명해

살아 숨쉬던 숨결이 느껴져, 선뜻 만지지 못했다

 

천년을 건너뛰어 내 앞에 서 있는

이름 없는 회색의 파편이

박물관에 보존된 보물보다 신비로워

금관을 장식하는 비취보다 또렷하게

내게 말을 건다

 

누구였을까?

얼마나 많은 기와를 구웠을까

富와 권력에 봉사하며

올려다보던 古都의 가을하늘.

그가 탐했지만 갖지 못했던 여자들.

그의 손끝에 닿았을 입술이며 가슴들이 환생해.

 

웃고 떠들며 情을 나누다

수천의 기와를 이고 운이 다하여, 허리가 꺾였을

목숨을 생각하며

 

오백 년이 지나 발굴된 文字의

지문(指紋)을 찍는다 피와 땀이 배인

진화(進化)의 흔적을.

 

어떤 동문회

 

젊은 그녀는 화창한 봄날 강물에 몸을 던졌고

 

누구는 유서를 남기고 4층에서 떨어졌고

 

누구는 암수술을 받은 뒤 계단에서 쓰러졌고

 

누구는 암수술을 받고 회복중이고

 

누구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을 모르고

 

누구는 뒤늦게 시험에 합격해 변호사로 일하고

 

누구는 사주팔자를 연구하는 도사가 되었고

 

그리고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화산이 타고 남은

재에 묻힌, 그녀는 날마다 자살을 꿈꾼다

 

그녀들과 학교를 다닌 나는

앞장서지는 않았지만 뒤에서 팔장끼지도 않은 나는

종이에 기억을 오려붙인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디서 그들과 나의 길이 갈렸는지, 이해하려고

 

중년의 기쁨

 

화장실을 나오며 나는 웃었다

 

끝난 줄 알았는데……

그게 다시 시작됐어!

 

젊어서는 쳐다보기도 역겨웠던

선홍빛 냄새가 향기로워,

가까이 코를 갖다댄다

 

그렇게 학대했는데도

내 몸의 시계는 멈추지 않았다

 

Love of My Life ?

 

너무 맑아

낚시꾼도 포기하고 돌아서

아무도 놀지 않는 연못.

깊은 물을 두려워 않던……

 

그는

나의 열린 문으로 들어온

날쌘 물고기.

 

노를 젓지 않아도 바람 부는 대로

움직이는 기술을 알던

능숙한 바람개비.

 

어느 겨울 아침, 황금비늘을 자랑하며

그는 떠났다.

 

그가 휘젓고 다닌 구석구석이

흉터와 무늬가 되어,

 

그가 일으킨 물결 밑에

꼼짝 않고 얼어붙어

비가 와도 나는 흐르지 못한다.

 

11월의 낙엽

 

가을비에 젖은 아스팔트.

돌아보면,

떨어질 잎이 하나 남아 있었나.

 

천둥에 떨고 번개에 갈라진 잎사귀.

심심한 아이들에게는 장난감이 되어주고

종이보다 가벼운 몸으로

더러운 뒷골목을 지키던 너.

 

허술한 나뭇가지에 목숨을 부지하고

식물의 운명에 순종했던,

상처투성이의 몸에 햇살이 닿으면

촘촘한 세월의 무늬가 드러나지만,

 

이대로 세차게 흔들리다

누군가의 가슴바닥에

훅, 떨어졌으면……

 

첫눈이 내려 무거운 눈을 매달고

허공에서 부서지기 전에,

순한 흙에 덮여 잠들었으면……

 

낙엽의 비문(碑文)을 읽을

그대는 지금 어디 있는가.

 

나는 시를 쓴다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혀를 깨무는 아픔 없이

무서운 폭풍을 잠재우려

 

봄꽃의 향기를 가을에 음미하려

잿더미에서 불씨를 찾으려

 

저녁놀을 너와 함께 마시기 위해

싱싱한 고기의 피로 더럽혀진 입술을 닦기 위해

 

젊은날의 지저분한 낙서들을 치우고

깨끗해질 책상서랍을 위해

 

안전하게 미치기 위해

내 말을 듣지 않는 컴퓨터에 복수하기 위해

 

치명적인 시간들을 괄호 안에 숨기는 재미에

부끄러룸을 감추려, 詩를 저지른다

 

청동정원

 

청도으로 빚은 나무가 못에 걸려 있네.

휘어진 가지에 사이좋게 마주 앉은

작은 새 한 쌍, 위에 매달린 종을

건드리면 청아한 울림이 떨어지지

 

그 밑에 누워서 음악도 듣고 책도 읽고

먼지가 이끼처럼 내려앉은 계절을 보내고

푸르던 잎이 퇴락한 왕조의 구릿빛으로 변하는데

나 말고는 지나간 사람이 없네

 

배반의 노래가 거실에 쌓이던

어느 날 나는 알았네

울리지 않는 종을……

수상한 그림자만 얼씬거리는

녹슨 청동정원에서

새와 단둘이 오래 살았네

 

문이 만 번쯤 열리고 닫히고

연애시를 백 편쯤 만드는 동안

누군가 천천히 지나가며

방울을 쓰다듬는 사람이 없어,

 

천둥처럼 울리기를 기다리며

단단히 문을 걸어잠그고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가

누워 있네 차가운 바닥에

두 마리 새들이 하나로 겹쳐져,

새도 나무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posted by 황영찬
2018. 2. 12. 15:29 내가 읽은 책들/2018년도

2018-009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 <상>

 

 

홍순민

2017, 눌와

 

대야도서관

sb121405

 

911.6

홍56ㄱ

 

왕조국가의 중심,

임금이 사는 곳

 

궁궐은 왕조국가 조선의 정점이자 핵심이었다

 

궁궐은 '임금이 사는 곳'이다. 임금은 왕조국가의 주권자이자 통치자이다. 그런 임금이 '산다'는 것은 일상생활을 넘어, 국정을 운영하고 통치행위를 하는 공적인 활동을 가리킨다. 임금은 궁궐을 벗어나는 일이 드물었다. 임금의 활동은 대부분 궁궐에서 이루어졌다. 궁궐은 임금의 존엄을 과시하고 정치적, 행정적 명령을 내는 곳이었다. 궁궐은 왕조국가의 중심이요, 최고의 관청이었다.

 

홍순민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조선 후기 정치사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여 조선 후기 국가경영의 실상을 밝혀보려 공부하고 있다. 정치의 배경이 되는 공간에 대한 관심에서 공간에서 살던 사람들과 그들의 삶의 꼴, 곧 문화로 탐구의 대상을 넓혀가고 있다. 도성과 궁궐에 대한 책을 쓴 데 이어 종묘, 그리고 조선시대 서울을 쓸 궁리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홍순민의 한양읽기: 도성》, 《한양도성, 서울 육백년을 담다》, 《조선시대사 1》(공저), 《서울 풍광》, 《우리 궁궐 이야기》등이 있다. 현재 명지대학교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에서 문화자원을 가르치고 있다.

 

차례

 

머리말

 

 

 

제1장

우리 땅 우리 서울


1 백두산 뻗어나려
   반도 삼천리

   산분수합, 산자분수령
   반도 삼천리의 배꼽, 서울


2 왕도 서울

   서울을 왕도로 만든 세 가지
   왕도의 예복, 도성
   서울 바닥
   묘사궁궐


제2장

임금이 사는 곳, 궁궐


1 궁궐이란 무엇인가

   궁궐, 그 낱말의 뜻
   궁궐은 아닌, '궁'들


2 궁궐의 짜임새

   오문삼조?
   궁궐의 여섯 공간


3 건물 읽기

   전통건축의 구조
   건물의 신분


제3장

궁궐의 역사


1 첫 번째 양궐체제

   궁궐 이해의 열쇠, 양궐체제
   영원한 법궁, 경복궁
   창덕궁과 창경궁의 탄생
   임진왜란, 궁궐을 삼키다
   정릉동행궁


2 두 번째 양궐체제

   광해군의 무리수
   동궐과 서궐
   궁궐 임어, 왕권의 발현


3 세 번째 양궐체제

   법궁 경복궁 중건
   고종의 이어, 이어, 이어


4 경운궁 단궐체제

   경운궁 시대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궁궐의 끝, 국망


부록

궁궐을 보는 눈

궁궐의 주제, 궁중문화
사람들의 삶의 꼴, 문화
공간, 시간, 인간 속으로
문화유산 만나기
전통문화의 기본 관념


참고 문헌 / 주석
도판 출처 / 고서화, 고지도

 

《여지도》 중 <조선일본유구국도>의 한반도 부분 | 백두산에서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거기서 갈라져나온 한북정맥의 끝에 매달린 붉고 탐스런 열매 서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기전도>, 《동국여도》| 서울은 바로 북쪽의 북한산성, 서북쪽 개성의 대흥산성, 서쪽 강화의 읍성 및 돈대와 문수산성, 남쪽 광주의 남한산성, 더 멀리 수원의 화성을 거느리고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한성전도>, 《고지도첩 | 도성은 내사산 등성이를 따라 한 바퀴 돈다. 내사산 바깥으로는 산줄기들이 겹겹이 감싸준다. 도성 안에서 모여든 물은 동으로 나가 중량천으로 합류하고, 중량천은 남으로 흘러 한강으로 합치고, 한강은 서쪽으로 가면서 성저십리 전체를 안아준다. (영남대학교박물관 소장)

서울의 내사산 | 북한산의 가장 남쪽 봉우리 보현봉에서 산줄기가 내려가면서 형제봉, 구준봉을 거쳐 백악으로 솟았다. 백악에서 동남쪽으로 흐른 줄기가 나지막하게 타락산을 이루었다. 백악에서 서남쪽으로 이어진 산줄기는 인왕산으로 이어지고, 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목멱산으로 마무리되었다.

《숙빈최씨소령원도》 중 <묘소도형여산론>의 산도(山圖) 부분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있는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무덤인 소령원(昭寧園)의 산도다. 산줄기는 가운데 무덤을 겹겹이 감싸고, 그 갈피갈피에서 물줄기가 모여들어 서북쪽으로 흘러 나간다. 이른바 명당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손들이 잘 되었나?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도성도>, 《조선강역총도》 | 도성의 문루가 숭례문과 흥인문, 돈의문, 광화문에만 있는 것으로 보아 도성 정비가 끝나기 전인 18세기 초의 것으로 보인다. 경희궁은 경덕궁으로 쓰여 있으며, 숮정문은 터만 있고, 광희문은 수구문으로, 남소문은 광희문으로 표기되어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도성 | 백악곡성에서 서편으로 도성이 구불구불 백악 정상을 휘감아 돈다. 저 멀리 인왕산 암봉을 돌아 목멱 정상을 넘고 넘어 사진에 보이지 않더라도 타락산을 더듬어 훑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인왕산 밑자락의 도성 옛 모습 | 도성 아래 순라길에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몇몇은 성 밑 마을에서 이제 막 올라오고 있다. 저 뒤편으로 인왕산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도성의 서쪽 소의문과 돈의문 사이 어디쯤일 것이다. (퍼시벌 로웰 사진, 1884년)

혜화문 옛 모습 | 도성의 동북쪽 문인 혜화문. 속칭 동소문이라고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네 정문(正門)의 하나가 되었다. 좌우에 성벽을 거느리고 고갯마루에 올라앉은 모습이 장하다. 강원도 함경도 방면에서 몇 날 며칠을 걸려 한양에 온 시골 사람들, 저 성문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이 뛰었을까? (《조선고적도보》)

불타기 전 숭례문 | 화재 바로 전날인 2008년 2월 9일에 찍은 숭례문 모습. 저때까지 유지되어오던 옛 모습이 하룻밤 새에 잿더미가 되었다. 보존은 어려운데 파손은 예측할 수 없는 위기 속에 들이닥친다.

창의문 | 도성문들 가운데 유일하게 제자리, 제 모습을 지키고 있는 창의문.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5년 12월 2일 보물 제1881호로 지정되었다.

운종가 옛 모습 | 오늘날의 종로2가 YMCA 자리에 있었던 한성전기회사 옥상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광경. 널찍한 운종가 한가운데로 전차 선로가 가고 있다. 사진 왼편의 다른 건물들보다 조금 큰 건물이 보신각이다. 피마골 안에도 사람들이 다니고 있다. (《버튼 홈즈의 여행 강의》)

<수선총도>의 운종가 부분 | 운종가 가운데서도 중심부인 종루 근처와 그 아래 남대문로에는 주요 생필품을 파는 시전 점포들이 모여 잇었다. 사진의 아래에 가로로 그어진 선이 운종가이다. 그 주변에 시전의 이름들이 기재되어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1903년 서울 | 사진 왼쪽에 위에서 아래로 이어지는 굽은 선이 도성이다. 도성 밖으로도 시가가 이어져 있다. 중단에 숭례문이 우뚝하고, 그 안에 선혜청이 넓게 자리 잡았다. 도성 안이 도성 밖보다 지형이 높고, 도성 안에는 크고 중요한 건물들이 많은 데 비해서 도성 밖은 상대적으로 작은 집들로 채워져 있다. (일본 학습원대학 동양문화연구소 소장)

마포 옛 모습(위) | 한강변에 큰 마을이 형성되어 초가집과 함께 기와집들도 빽빽하게 들어찼다. 강안에 닿아 있는 배들의 돛대도 촘촘하게 줄을 지었다. 선착장으로 오가는 사람들, 골목골목에서 무언가 하는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숭례문 바깥 옛 모습(아래) | 소로 밭을 가는 뒤로 초가집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저 멀리 도성이 높다랗게 좌우로 지나가는데 숭례문이 우뚝 솟아 있다. 장한 모습이다. 사진의 왼쪽 아래로 만초천이 흘러간다. (《꼬레아 에 꼬레아니》)

남대문로 옛 모습 | 숭례문 문루 2층쯤에서 성 안을 바라보았다. 남대문로가 오른쪽으로 굽어 이어진다. 길 가장자리에 길게 이어지는 초가집은 도로를 침범하여 지은 가가(假家)다. 아직 종현성당이나 상동교회는 들어서지 않은 것으로 보아 1898년 이전 사진이다. (《토미 톰킨스와 더불어 한국에서》)

1915년 이전 보신각 | 단층으로 된 종각 건물에 흰색 바탕에 검은 글씨로 보신각 편액이 걸려 있다. 위치는 운종가와 남대문로가 만나는 삼거리 동남쪽 모퉁이이고, 정북을 바라보고 있다. 1915년에 옮기기 전임을 알 수 있다.

1915년에 옮긴 이후의 보신각 | 북에서 남으로 바라본 남대문로의 동쪽가에는 서양식 2층 건물들이 줄지어 있다. 사진의 왼편에 보신각이 서북쪽을 바라보면서 앉아 있다. 한복 입은 사람들 사이에 간간이 일본 옷을 입은 사람들이 섞여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앞 종루 주춧돌 | 원래 자리에서 발굴되어 서울역사박물관 앞마당으로 옮겨져 전시되어 있는 종루 주춧돌. 주춧돌 전부가 아니지만 이렇게 남아 있는 주춧돌만 보아도 종루가 얼마나 장대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현재 보신각 | 위치는 뒤로 물러났고, 좌향은 엉뚱하게 서북쪽을 바라보며, 철근콘크리트 2층 건물이다. 세부 모양과 장식도 근거를 찾기 어렵다. 게다가 달려 있는 종도 제 것이 아니다. 보신각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한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현재 기념비전(위) | '대한제국대황제보령망육순어극사십년칭경기념비'를 품고 있는 기념비전. 자리는 제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주위 건물이 사라지고, 높은 빌딩이 들어서고, 도로도 몇 차례 넓어지는 등 주변 환경이 변함에 따라 매우 옹색한 처지가 되었다.

기념비전 옛 모습(아래) |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던 기념비전. 하지만 이것도 원래 모습은 아니다. 원래는 기로소 행각 안에 있었다. (《꼬레아 에 꼬레아니》)

현재 광화문앞길 | 도로 안에 광장이 갇혀 있는 형국이다. 세종대왕 동상을 넘어 광화문으로 가까이 가기 전에는 광화문과 그 뒤 풍경을 보기 어렵다. 가까이 간들 곧바로 걸어가서 광화문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광화문앞길 옛 모습 | 길 동편과 서편에는 국가의 중추 관서들의 행각과 정문이 담처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정면에 광화문이 남면하며 주인으로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더 멀리는 백악 산줄기가 감싸주는데, 북한산 보현봉이 슬쩍 넘겨다보고 있다.

광화문앞길에 모인 사람들 | 사진 맨 왼쪽에 광화문의 반이 보이고, 그 앞으로 관아들의 행각과 문이 직선으로 이어져 있다. 광화문앞길을 흰 옷에 흰 갓 또는 삿갓 아니면 희고 검은 장옷을 입은 사람들과 아이들이 가득 메우고 있다. 전신주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1899년 이전이다. 그렇다면 1897년 명성왕후의 빈소를 경복궁에서 경운궁으로 옮긴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장이 된 경복궁 | 공진회장 광고탑에서 동남쪽을 찍었다. 중앙 약간 왼쪽에 근정문이 있다. 그 오른편에 크게 'ㅁ'자로 보이는 가건물이 공진회 제1호관이다. 오른쪽에 오벨리스크를 얹고 있는 것은 철도국 특설관이다. 그 오른편에 광화문이 있고, 광화문 앞으로 광화문통으로 이름이 바뀐 광화문앞길이 나 있다. (《조선물산공진회보고서》)

종묘 들어가는 길 | 운종가에서 북으로 방향을 틀면 운종가의 북쪽에서 운종가를 따라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제생동천을 건너게 된다. 그곳에는 당연히 돌다리가 걸쳐 있었다. 임금을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이 다리를 건너기 전에 탈것에서 내려야 했다.

<도성도>(부분)에 나타난 종묘, 사직과 궁궐 | 종묘가 서울의 중앙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경복궁을 기준으로 좌측에 종묘, 우측에 사직단을 지었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적어도 관념적으로는 종묘 자리부터 정하였고 그다음에 경복궁 자리를 잡았다고 《태조실록》은 말한다. 중국의 종묘와 조선의 종묘는 성격과 위상이 상당히 다르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창덕궁 | 돈화문의 남서쪽에 있는 빌딩에 올라가 동북쪽으로 바라본 창덕궁 전경. 응봉에서 길게 흘러내리는 산자락의 서쪽 기슭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창경궁 | 서울대학교병원 의생명연구원에서 서남쪽으로 바라본 창경궁 전경. 응봉에서 흘러내리는 산자락의 동쪽 기슭에 동향으로 자리 잡았다. 창경궁 너머로 서울 도심이 빌딩 숲을 이루었다.

경희궁 | 멀리 떨어진 빌딩에서 서북쪽으로 바라본 경희궁의 외전 영역. 새로 지은 건물들이지만 숲과 어울려 궁궐 분위기를 제법 낸다.

경운궁 | 서울시의회 별관에서 정북 방향으로 바라본 경운궁 전경. 야경인 덕분에 경운궁의 부자연스럽고 초라한 부분들이 가려져서 그런대로 궁궐다운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중국 베이징 자금성의 북문 | "고궁박물원"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자금성은 그 많은 왕조가 생겼다가 없어진 중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궁궐이다. 물론 현재 살아 있는 궁궐은 아니다. 고궁으로서, 박물관을 겸하고 있다.

창덕궁 인정전 일대 | 창덕궁 서쪽 건물 높은 곳에서 본 전경이다. 오래된 건물도 있고, 새로 지은 건물도 있지만 어쨌거나 모두 죽은 건물들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살지 않기 때문이요, 본연의 제 기능을 발휘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영조 어진> | 우리는 조선의 임금을 아주 먼 옛날 사람으로 생각한다. 반면에 조선의 임금을 우리의 임금으로 여기는 생각도 저변에 깔려 있다. 서로 어긋나는 이러한 생각을 정리하여 옛 사람들에 대하여 객관적이면서 정확한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경복궁 동십자각 옛 모습 | 높은 대 위에 잘 생긴 누가 있고, 그 안에 작은 방이 있다. 성상소다. 동십자각 바로 옆으로 삼청동천이 흘러내려 개천으로 들어간다. 그 삼청동천에 난간도 없는 돌다리가 걸려 있다.

<보인소의궤> 중 조선국왕지인 | 조선 임금의 존재와 권력을 알리는 대표적인 인장, 대보다. 전서체 한자와 청나라 글자로 새겼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함흥본궁 | 이성계가 임금이 되고 나서 함흥이 있는 자신의 잠저에 지은 건물이다. 이성계가 죽은 뒤에는 왕실의 사당으로 쓰였다. 늙고 굽은 소나무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른편에는 노둣돌이 보인다. 이 노둣돌을 밟고 내리는 이는 누구일까? (《조선고적도보》)

건구고궁 현판 | 주역 건괘(乾卦)는 여섯 효(爻) 모두 양효(陽爻, -)로 되어 있다. 구(九)는 양효를 가리킨다. 그 가운데 첫째, 곧 맨 아래 양효인 초구(初九)는 잠룡을 가리킨다. 아직 용이 되기 전 물에 잠겨 있는 상태다. 이러한 뜻을 담아 영조는 자신의 잠저였던 창의궁 정당에 이 "건구고궁"이라는 현판을 써서 걸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운현궁 노락당 |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고 있던 때는 그 위세에 걸맞은 규모를 갖추었지만, 이후 영역도 축소되고 건물들도 바뀐 것이 많다. 그 후손들이 지키지 못하고 지금은 서울특별시 소유로 관리되고 있다.

<인평대군방전도> | 타락산 기슭에 있던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집(위)을 그린 그림이다. 인평대군의 형으로서 나중에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집(아래)을 함께 포함하였다. 봉림대군의 집에는 조양루(朝陽樓), 인평대군방에는 석양루(夕陽樓)가 있어 서로 마주보며 형제 우애를 다졌다 한다. 정조 대에 집을 고쳐 짓고, 1792년(정조 16) 이 도면을 그렸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육상묘와 연호궁 편액 | 뒤편의 육상묘는 육상궁으로 승격되기 전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사당 이름이다. 연호궁은 숙빈 최씨의 며느리이자 영조의 후궁인 정빈 이씨의 사당 이름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신주가 한 건물에 동거하고 있는 셈이다.

<화성행행도병> 중 서장대야조도 | 1795년(정조 19)에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에 갔다 오는 장면을 그린 여덟 폭 병풍 중 서장대에서의 야간 군사 훈련 장면이다. 가운데 화성행궁이 보이는데, 행궁으로서는 규모가 크고 짜임새가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화성행궁 | 2003년에 복원을 마친 화성행궁을 팔달산 쪽에서 내려다본 모습이다. 이 행궁은 정확한 위치에 옛 모습대로 복원되었는가? 그래서 과연 여기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나는 아무리 보아도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남한산성행궁 | 인조가 유사시를 대비해서 지은 시설인데, 실제로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활용하였다. 사라졌던 것을 복원하긴 하였으나 의문이 남는다.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오랜 시간의 층위가 쌓여 있는데…. 그것을 살리는 방법은 정녕 없었을까? 아쉽고 안타깝다.

<오문삼조>, 《삼재도회》 | 고문(皐門)에서 노문(路門)까지 다섯 문이 구역을 나누고 있다. 외조, 치조, 연조는 명확하게 표기되어 있지 않다. 두 번째 고문(庫門) 안에 가석(嘉石) 등이 있고, 그 좌우에 종묘와 사직이 표기되어 있다. 종묘와 사직의 위치와 위상이 우리나라와 다른 점이 있다.

조선 후기에 조선 전기 경복궁의 구조를 추정해 그린 지도인 <경복궁도>(국립중앙도서관 소장)에 궁궐의 여섯 공간을 각각 다른 색으로 표시하였다.

경복궁 외전 구역 | 광화문 안에 홍례문, 홍례문 안에 영제교, 영제교 건너 근정문, 근정문 안에 근정전, 광화문 밖에서 근정전에 이르기까지 문을 셋, 다리를 하나, 총 네 개의 경계를 지나야 한다. 어느 문이 고문(皐門)이고 또 고문(庫門)이며, 치문이며 응문인가? 어느 공간이 외조이고 치조인지 연결시키기가 어렵다.

근정전 | 근정문 안이자 근정전 앞에는 회랑으로 둘러싸인 넓은 마당이 열린다. 이를 조정이라고 한다. 저 조정에 가득 차게 들어선 많은 관원들, 곧 만조백관을 그려본다.

창덕궁 인정전 | 정면 5간 측면 4간에 중층 지붕의 다포식 건물이다. 2층 기단 위에 좌우 대칭을 하고 있어 매우 엄격한 느낌을 준다.

<정아조회지도> | 정아란 궁궐을 가리킬 수도 있고 여기서처럼 조정을 가리킬 수도 있다. 조정에서 조회할 때 각 참여자들이 자리 잡을 위치를 밝힌 도면이다. 조회에 참여하는 인원수가 대단히 많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경복궁 강녕전 내부 | 강녕전은 경복궁의 내전이다. 그에 걸맞게 그 내부도 널찍하다. 가운데 대청마루의 양쪽으로 온돌방이 있고, 마루와 대청마루 사이는 들어 올릴 수 있는 분합문으로 나뉘어 있다.

<무신진찬도병> 중 통명전진찬도 | 통명전은 창경궁 중궁전의 정전이다. 외부의 남성들은 원칙적으로 들어올 수 없다. 통명전에서의 진찬은 그러므로 여성들의 진찬, 내진찬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경복궁 사정전 일원 | 사정전은 경복궁의 편전이다. 편전은 임금과 관원들이 만나서 국정을 논의하는 회의공간이다. 가운데 편전의 정전인 사정전은 하나의 마룻방으로 되어 있는 데 비해 그 동편에 만춘전, 서편에 천추전은 가운데 마루를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갖추고 있다.

<호조>, 《숙천제아도》 | 19세기의 문관인 한필교가 자신이 근무하였던 관서들을 그림으로 그려 모은 화첩인 《숙천제아도》 가운데 호조의 그림이다. 호조는 광화문앞길에 있었다. (하버드대학교 엔칭도서관 소장)

경복궁 함화당 | 경복궁의 중궁전인 교태전의 북쪽, 생활기거공간으로 분류할 수 있는 영역에 있다. 동쪽으로는 집경당이 연결되어 있으며, 주변의 행각은 일제강점기 때 사라졌다가 근년에 복원되었다.

창덕궁 소요정 | 동궐의 후원 옥류천 영역의 한가운데에 있는 정자다. 소요정의 이름 중 '소요'는 《장자》에 나오는 표현으로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후원은 이렇게 자연에 안기고자 하는 공간이었다.

경복궁 강녕전 월대 | 건물에 월대가 있다는 것은 그 건물이 그럴 만한 격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였다. 경복궁에서 임금이 머무는 대전 강녕전 역시 그러하였다.

창경궁 경춘전 | "경춘전은 정면 (     )간, 측면 (     )간 해서 전체 (     )간 건물입니다" 건물을 보면 먼저 바닥의 규모부터 보는 것이 좋습니다. (    ) 속에 알맞은 숫자를 써 넣으세요.

종묘 정전의 기둥들 | 종묘 정전은 벽과 문을 맨 바깥 기둥에 내지 않고 한 간 뒤로 물러서 냈다. 그 결과 전면 한 간은 회랑이 되었고, 맨 바깥 기둥은 노출되었다. 배흘림기둥이 길게 늘어서서 빚어낸 모습이 매우 깊고 긴 울림을 준다. 그런데 가까이 보이는 왼편 기둥은 원이 아니라 네모다. 정전의 기둥이 아니라 익랑 기둥이기에 격을 낮추었나 보다.

지붕의 다양한 형태들

전당합각재헌루정 | 건물 이름의 끝 글자들을 보면 건물의 격과 모양, 기능까지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편액 자체도 대체로 크고 화려한 데서 작고 간결한 데로 바뀌어간다. 건물 이름을 들으면 어렴풋이나마 건물이 보인다. 위로부터 근정전, 양화당, 곤녕합, 경훈각, 낙선재, 영춘헌, 주합루, 함인정.

창경궁 명정전 | 외전의 정전으로서는 그리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으나 광해군 대에 다시 지은 이래 큰 화재를 입지 않아 그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외부 내부 여러 곳에 변형된 부분이 다수 잇음에도 국보로 지정된 근거다.

창경궁 양화당 | 창경궁 중궁전의 정전인 통명전 동편에 있다. 정면 6간 측면 4간 단층 이익공 팔작지붕이다. 건물 크기에 비해 높이가 다소 낮아 보이기는 하지만 당당한 기품을 갖고 있다.

창덕궁 낙선재 | 헌종 대에 후궁으로 맞이한 경빈 김씨의 거처로 지은 건물이다. 그 뒤로도 주로 후궁과 같은 왕실 여성들이 쓰던 건물이다. 높지 않은 기단에 계단이 셋 놓여 있다. 그 앞에는 노둣돌도 있다. 왼편에 앞으로 누마루가 돌출되어 전체적으로 'ㄱ'자 모양을 하고 있다. 웅장하고 화려하지는 않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부분이 많다.

창덕궁 태극정 | 동궐 후원 가운데 가장 북쪽에 흐르는 옥류천변에 있는 다섯 정자들 가운데 가장 상류에 있는 정자다. 장대석으로 네모반듯하게 쌓은 기단 위에 네 기둥을 세우고 난간을 둘렀다. 지붕은 사모지붕인데 모임 부분에 절병통을 얹었다. 아주 엄격한 분위기를 풍긴다.

<무신진찬도병> 중 인정전진하도 | 1848년(헌종 14) 3월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육순(六旬)과 왕대비 신정왕후의 망오(望五), 곧 41세가 됨을 기념하는 진찬 행사를 열었다. 이를 그린 병풍 가운데 헌종이 인정전에서 신하들에게 진하를 받는 부분이다. 구름에 잠긴 소나무가 뒤에서 받쳐주고 잇어 이곳이 인정전임을 알려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왕조 '법궁-이궁 양궐체제'의 변천

만월대 | 고려의 수도 개성에는 궁궐이 여럿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크고 대표적인 궁궐이 만월대에 있었다. 뒤편의 임신한 여인이 누워 있는 형상의 산이 바로 송악산이다.

<조선태조어진> |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의 어진은 조선 말기의 모사본이다. 얼마나 태조 이성계의 본성과 인상을 드러냈는지 알 수 없으나, 이 그림이 주는 인상은 후덕한 군주보다는 단단한 무장의 그것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전주 경기전 소장)

북한산 신라 진흥왕순수비 | 북한산에거 서쪽으로 뻗어나간 등성이 가운데 비봉 꼭대기에 있었다. 추사 김정희가 이것이 진흥왕순수비임을 밝혔다. 당연히 "무학오심도차(無學誤尋到此)"라고 여섯 자가 새겨져 잇지는 않다. 지금 비석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경조오부>, 《동여도》 | 경조란 서울이란 뜻이다. 행정적 공식 도시 이름은 한성부. 한성부의 행정 구역은 다섯 부로 구성되었다. 5부는 처음에는 도성 안만을 포함하였지만, 점차 도성 밖에도 사람들이 많이 살게되면서 부 아래의 행정 구역인 방(坊)이 설치되었다. 행정 구역을 넘어 넓은 범위의 서울은 이 지도에 포함된 지역, 곧 북으로 북한산 기슭, 남서로 한강을 경계로 하였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경복궁 근정전 | 사방을 행각으로 둘러싼 안 넓은 마당을 박석으로 덮었다. 2층 기단에 돌난간을 두르고 정면 5간 측면 5간에 겹지붕을 한 건물이 위엄 있게 자리 잡았다. 임금이 정사를 돌보는 곳이 아니라, 신하들이 임금에게 충성의 의식을 치르는 공간이다.

<경복궁전도> | 임진왜란 이전의 경복궁의 모습을 당대에 그린 것은 전해지지 않는다.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기억에 의존해 그린 개념도들이다. 그 가운데 이 서울역사박물관 소장본은 마치 산도처럼 주위 산줄기의 흐름을 공들여 그렸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도성 말바위에서 바라본 경복궁 전경 | 교태전으로부터 강녕전, 사정전, 근정전, 광화문이 일직선으로 축을 맞추고 있다. 광화문 앞으로는 광화문앞길이 열린다.

창덕궁 금천교 | 손에 피를 많이 묻힌 임금 태종 대에 건설된 다리이다. 하지만 저기 조각되어 있는 석수들의 표정은 살벌함과는 거리가 멀다. 부드럽고 재미있어 친근감을 준다.

변박, <부산진순절도> | 부산진을 공격하는 왜군이 타고 온 배가 바다를 덮었다. 이미 상륙하여 성 밑에까지 다가와 아우성치는 왜군이 새까맣다. 성 위에서 이를 바라보며 싸우는 조선 사람들의 수효는 많지 않다. 목숨을 바쳐 싸우다 간 이들의 심정…. 그것을 잊지 말라고 이 그림은 말한다. (육군박물관 소장)

정선, <경복궁도> | 무너지다 만 궁성 안에 경회루 돌기둥과 근정전 기단의 흔적만 있는데, 빈터를 지키는 군사들의 건물이 덩그렇다. 뒤편은 빽빽한 숲을 이루었다.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영묘조구궐진작도> | 1767년(영조 43) 12월 16일 영조는 태종이 태조에게 오래 사시라는 뜻으로 술 잔을 올렸던 옛일을 본받아서 경복궁 근정전 터에서 관원들로부터 술 잔을 받는 의식인 진작례를 베풀었다. 2층 월대와 중앙의 계간, 모서리의 동물상 등이 근정전 터임을 알려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선조실록》(왼쪽)과 《선조수정실록》(오른쪽) | 실록은 오랜 기간 여러 사람이 사초를 작성하고, 임금 사후에 사초와 함께 여러 자료들을 편집하여 작성하였다. 그런만큼 엄정하였다. 하지만 기록자와 편집자의 주관을 모두 배제할 수는 없었다. 권력을 잡은 집단이 급격하게 바뀌면 실록을 없애지는 못하고 수정본을 작성하였다. 그 수정한 실록이라고 해서 객관적이고 엄정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자신들의 입장과 관점을 강하게 반영하였다.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일본 규슈 구마모토성 | 가토 기요마사가 임진왜란 뒤인 1601년부터 7년간 쌓은 성이다. 규모가 크고, 자연 지형을 이용한 축성 기술이 잘 살아 있다. 가토가 임진왜란에서 얻은 경험이 녹아들어 있다고 한다.

월산대군 사당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다. 사당 남쪽 큰길 건너에는 월산대군의 묘가 있다. 임금의 형. 어찌 보면 동생 성종보다 더 임금이 될 자격을 갖추었으나 임금이 되지 못한 사람. 그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떠돌며 전해오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경운궁 즉조당 | 인조반정 후 인조가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서궁, 곧 경운궁에 와서 즉위하였다는 건물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함인지 조선 후기 내내 보존되었다. 1904년 화재에 불타서 바로 다시 지었다.

광해군묘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에 있다. 쫓겨난 임금은 임금이 아니다. 종묘에 그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그 무덤도 능이나 원이 아닌 묘이고, 외지고 좌향도 좋지 않는 곳에 그 규모나 치장도 웬만한 양반만도 못한 묘로 남았다.

<원종어진> | 인조의 생부 정원군의 초상화이다. 백택 흉배를 한 것으로 보아 임금이 아닌 종친 신분을 표현하였다. 추존되어 '원종어진'이란 이름으로 불리긴 하나, 임금이 아닌 임금의, 어진이라고 불리나 어진이 아닌 초상화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남한산성 우익문 | 남한산성의 서문으로, 서울과 가장 가까운 거리로 통하는 문이다. 위의를 차리기에는 바깥 지형의 경사가 너무 급하다. 긴급하게 드나드는 문,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이 문을 나서서 삼전도로 갔다.

<동궐도> | 동궐, 곧 창덕궁과 창경궁 그리고 그 후원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그린 기록화. 새가 내려다보는 관점의 부감법을 써서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건물들을 사선으로 배치하였다. 동궐을 이해하는 데 더 없이 도움을 주는 자료이나, 또 한편으론 그림은 그림일 뿐, 사진이나 실측 도면은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한양도>, 《천하도》 | 위백규(魏伯珪)가 1770년에 그린 지도를 1822년에 그의 후손인 위영복(魏榮馥)이 목판으로 제작, 간행하였다. 당시 도성 내부에 묘사가 매우 소박하고 부정확한데, 유독 경희궁이 강조되어 잇는 것이 눈에 띈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경희궁 | 네모반듯한 회랑 안에 숭정전이 자리 잡고 잇고, 그 뒤로 자정전, 그 서편에 태녕전이 잇다. 바로 뒤편에서 인왕산이 이 모두를 받쳐주고 있다.

<연잉군초상> | 후일 영조가 된 연잉군이 사모를 쓰고, 백택 흉배를 단 녹색의 단령을 입고 있어 종친 신분을 드러내고 있다. 갸름한 얼굴에 째진 눈꼬리가 <영조어진>의 인상과 통한다. 그의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 문제는 신임옥사의 원인이 되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사도세자의 영지(令旨) | 1761년(영조 37) 4월 3일 사도세자가 평양에 갔을 때 내린 명령서. 평양부에 사는 통덕랑 서필영이라는 사람의 자손에게 부과하는 잡역을 면제해주라는 내용이다. 마지막에 사도세자가 수결(手決)을 하였다. 이듬해 임오화변으로 사도세자는 죽음을 맞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경희궁 금천교 | 적지만 옛 부재가 남아 있어 이를 근거로 옛 모양을 추정하여 다시 지었다. 정문 흥화문 자리는 구세군회관이 차지하였고, 외전 내전으로 들어가는 길은 서울역사박물관이 가로막았다. 지금은 물길도, 궁궐도 사라졌지만, 본래는 이 다리를 건너면 궁궐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무진진찬도병> | 1868년(고종 5) 익종비 신정왕후의 회갑을 기념하는 진찬 장면을 8폭 병풍으로 꾸몄다. 경복궁을 중건하고 열린 첫 큰 행사였다. 오른쪽부터 1폭과 2폭은 근정전진하도, 3폭과 4폭은 강녕전진찬도, 5폭에서 7폭은 강녕전익일회작연도이고, 8폭은 좌목이다.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 소장)

경희궁 후원에서 바라본 경복궁 전경 | 저 멀리 겹지붕이 불쑥 솟은 근정전, 그 뒤에 사정전, 그보다 조금 가까이에 경회루가 보인다. 1876년의 화재로 내전이 불탄 후 복구하기 전에 찍은 사진이다. 반면 가까이 경희궁에는 별다른 건물은 보이지 않고 나무만 무성하다. 궁성도 무너진 부분이 군데군데 눈에 뜨인다. 사진 상태가 좋진 않지만 19세기 말 경복궁과 경희궁의 상황을 동시에 보여준다.

당백전 | 엽전 100개의 명목가치를 갖는 돈이다. 앞면에는 상평통보, 뒷면에는 호대당백이라고 새겨져 잇다. 실질가치가 명목가치를 따라가지 못하면 그 돈은 경제 질서, 나아가서는 사회에 큰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흥선대원군초상> | 흥선대원군 자신이 제발을 직접 써 넣었다. "내가 61주갑 되던 해의 초상이다." 경진년, 그러니까 1880년(고종 17) 여름에 그렸다. 이미 실권을 잃은 후의 일이다. 검은 건을 쓰고 푸른 포를 입었는데 인상이 강하다. 흥선대원군은 끝내 권력에 대한 야심을 버리지 못하였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창덕궁 농수정의 고종 | 미국인 퍼시벌 로웰은 1883년 조선의 미국 수호통상사절단을 안내한 인연으로 1883년 12월부터 3개월간 조선을 방문하였다. 그때 고종의 사진을 찍었다. 고종이 1876년의 화재로 창덕궁에 이어해 있을 때의 일이다. (퍼시벌 로웰 사진, 1884년)

러시아공사관에서 고종과 순종이 머물렀던 방 | 서양식 침대와 실내 장식이 화려하다. 하지만 한 나라의 임금이 외국 공관에서 1년이나 머물렀다는 사실은 그 공간이 아무리 화려하다 한들 씁쓸한 뒷맛을 지우기 어렵다. (《이왕궁비사》)

옛 러시아공사관 탑 | 러시아공사관은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본채는 다 없어지고 동북 모서리에 있던 탑 부분만 무슨 지표인양 남아 있다.

경복궁 곤녕합 | 곤녕합 일대는 건청궁 안 왕비의 거처이다. 그중에서도 사진에 찍힌 누 부분의 이름이 옥호루인데, 이곳이 바로 1895년 을미사변의 현장이다. 뒤의 서양식 건물은 외국인들의 숙소로 쓰였던 관문각이다.

미국공사관 옛 모습 | 1905년 9월 방한한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딸 앨리스와 총영사 고든 패덕 등 미국인들. 그리고 대한제국 군인 몇이 미국공사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였다. 미국공사관 건물은 한옥 골격을 유지하면서 전면에 현관을 추가 설치하였다.

원구단 | 대한제국에서 외국 귀빈을 머물게 하기 위해 지은 대관정에서 본 모습이다. 왼편에 있는 건물이 원구단 정문, 중앙부에 보이는 3층 지붕 건물이 황궁우, 중단 오른편에 흰 기단에 흰 지붕이 보이는 부분이 원구단이다. (《버튼 홈즈의 여행 강의》)

경운궁 함녕전 | 고종의 거처였을 뿐만 아니라, 1904년 화재를 입어 다시 짓기는 하였으나, 처음부터 오늘까지 경운궁을 지키고 있다는 점에서 경운궁의 중심 건물이다.

1902년 경운궁 전경 | 모습을 갖춰가는 경운궁 서측 부분 전경. 아직 궁성은 완성되지 않았고, 내부 건물들도 온전히 다 갖추어지지 않았으나 2층 건물 중화전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1904년 경운궁 화재 | 1904년 4월 14일 화재로 불타버린 경운궁 중심 구역. 아직도 연기가 나고 있다. 보는 우리 가슴도 타들어간다.

1904년 일본군의 전첩축하회 | 러일전쟁의 첫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창덕궁 후원에서 축하회를 열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기단과 아래층 규장각은 물론 2층 주합루까지 일본인들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대안문 편액 | 대안문 편액. 주변의 테두리가 떨어져 나가고 퇴색되었지만 단정한 글쎄에는 기품이 배어 있다. 글씨 부분에 검은색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흰색 바탕에 검은 글씨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현재의 중화전 | 기단에 견주어도 건물의 높이가 낮다. 1904년 화재 뒤 다시 지으면서 겹지붕을 홑지붕으로 만든 결과다.

을사늑약 기념사진 | 조약을 체결한 것을 기념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하여 일제의 고위 관원들이 대관정에서 기념사진을 박았다. 그러나 비준 절차를 마치지 않았으므로 조약은 법적으로 체결되지 않았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 |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렸으나, 만국이란 말에는 세계 모든 나라가 아니라 힘 있는 나라들만 포함되었다. 고종이 파견한 특사들은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다.

헤이그 특사 위임장(영인본) | 고종이 특사들에게 준 위임장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위임된 권한은 발휘되지 못하고 말았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창덕궁 인정전 | 인정문에 외벽이 생기고 거기 판문이 아닌 작은 문이 달렸다. 회랑에도 문이 생겼다. 회랑이 아닌 접견실 등 건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인정전 용마루 전면에 다섯, 인정문 용마루 전면에 셋, 오얏꽃 문양이 박혔다. (《순종황제 서북순행 사진첩》)

인정전 앞의 순종 |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1월 27일부터 2월 3일까지 순종에게 현재 서울역인 당시의 남대문역을 출발하여 평양, 신의주 등 서북 지역을 순행하게 하였다. 순종이 돌아온 뒤 인정전 앞에서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다. 순종의 왼쪽에 이토 히로부미가 있다. (《순종황제 서북순행 사진첩》)

창덕궁 인정전 내부 | 인정전 용상의 단이 없어지고 맨 마룻바닥에 서양식 의자가 놓여 있다. 임금의 자리가 아니라 파티의 주인이 되는 총독이나 정무총감의 자리다. 그 뒤에는 일본식 가리개 위에 공작인지 뭔지 모를 일본풍의 새 그림이 걸렸다.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닫집이 도리어 어색하다. (《인정전 사진첩》)

순종 경술국치 위임장 | 1910년 8월 29일 순종이 병합조약을 체결하러 가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준 위임장. '척(坧)'이라는 순종의 본명을 쓴 수결(手決)이 못났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데라우치 마사타케 | 뜻밖에 합병 문제를 용이하게 해결하고 그는 이렇게 썼다. "가가(呵呵)." 사진에서도 속으로는 가가대소(呵呵大笑)하고 있을 것이다.

통감 관저 | 대한제국을 일본이 집어삼키는 형식상의 절차인 조약안에 도장을 누른 장소인 통감 관저. 목멱산 북쪽 기슭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흔적만이 남아 있다. (《순종황제 서북순행 사진첩》)

창덕궁 대조전 흥복헌 | 1910년 8월 22일 이완용이 순종으로부터 전권위임장을 받은 곳. 그날 경술국치의 출발점이다. 다만 1917년 창덕궁 화재 때 불타 새로 지었기 때문에 그때의 그 건물은 아니다.

하도(위)와 이를 아라비아 숫자로 다시 정리한 도표(아래)

낙서(위)와 이를 아라비아 숫자로 다시 정리한 도표(아래)

복희팔괘차서

복희팔괘방위(위)와 문왕팔괘방위(아래)

오행사상의 오행과 상생상극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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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08 툭, 건드려주었다

 

 

 

이상인 시집

2016, 천년의 시작

 

대야도서관

SB110703

 

811.7

시72ㅊ  203

 

시작시인선 0203

 

지그시 거침없음, 이게 이상인 시의 묘한 매력이다. 각별하거나 사람을 놀리게 할 만큼 이마에 탁 부딪히는 선뜻함은 아닐지라도 넉넉하게 잡아끄는 힘을 지니고 있는 시들이다. "세월을 견디며 삭아가는" 이야기들은 은근한 듯하면서 더러는 "폐허처럼 깊은" 추억의 각인이 되기도 한다. "내면에 파동치는" 울림이 깨끗하고 말간 섬진강 은어처럼 튀어 오를 때 맛보게 되는 시인의 언어가 실은 담백하다. 이 시집에서 "밥물처럼 자갈자갈 끓어넘치는" 사랑스러운 참새 소리를 발견함이라거나 낚싯대로 "힘차게 파닥이며 따라 올라오는 냇물"을 낚아채는 뚝심의 시법이 미더운 한편으로 시인에게 "밑받침으로 얹어주"는 작은 생명들의 깨우침이 노을빛으로 어지간히 아름답다.

- 강인한(시인)

 

질주하는 승용차며 트럭들의 굉음으로 전쟁터 같은 고속도로지만 바로 옆의 야산 하나만 훌쩍 넘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울울한 숲과 숲의 고요가 있는데 이상인이 그렇다. 그 숲의 끝자락에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저수지가 하나 있고 저수지엔 커다란 달이 가득 차 있는데 이상인의 시가 그렇다. 그 저수지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적절한 절제의 기예로 균형 잡힌 시를 건져 올리는 시인이 이상인이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늘 달빛이 묻어 있고 바닥에는 익숙한 일상의 고요가 있다. 어두운 밤이지만 어둡지 않고 환한 대낮이지만 눈부시지 않다.

- 박두규(시인)

 

이상인

 

전남 담양 출생.

1992년 『한국문학』으로 등단.

시집 『UFO 소나무』『연둣빛 치어들』『해변주점』이 잇음.

 

시인의 말

 

아무 생각 없이 꽃이 핀다.

이내 꽃이 진다.

 

생의 행간에서

보너스처럼 새가 울어준다.

 

이런저런 날은

마음대로 구부러진 문장 길

시 한 편으로

마냥 서성거리다가

시외버스처럼 점점 멀어져가고 싶다.

 

2016년 봄 풍진이와 발미에서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소 울음소리
현미밥을 지으며
문장리
이륜耳輪
선암매
순천역이 가슴속에서 떠나갔다
둥근 하늘
쥐눈이콩
툭, 건드려주었다
물방울
반짝이는 어둠
뻐꾸기 둥지
황태찜
민들레 우주선
풍진이의 봄날
경經, 중얼거리다


제2부
애기사과
하늘로 밀려가는 파도들
풍진이의 겨울
여명
오리들의 묵념
폐자전거
세 명의 내가 쓴 시
휘리릭 휘리릭
매미
어머니의 눈
난꽃
빨간 신호등 건너기

번데기
황금 붕어
붉은 주머니


제3부
목이전木耳傳
시래기
소쩍새 울음
한 무리의 은어
수숫대
천둥
보리밭
12월
이상인 씨의 농사法
마루
낚시하는 잠자리
빨래방을 나오며
겹겹의 배춧잎
들깻잎
제비꽃 무덤
애장 터에서


제4부
섬진강 노을
식구
콩꽃
고구마
태풍
백설白雪
백일홍
황사
대추나무
꽃무릇 사랑
망가진 소리판 한 장
벚꽃
수평선
대나무처럼
삶이 나를 속일지라도
월산 이현도 씨네 매화나무


해설
염창권 겹으로 짠 우주그물에서 날아온 나비

 

둥근 하늘

 

나비 한 마리가 무밭을 뒤집다.

손바닥 푸른 손금 안에, 생각을 낳는지

소리도 없이 몇 초씩 머물러서

내 등허리 간지럽다.

 

문득 어깨를 들썩여보니

노란 알에서 깨어난 추억들이 스멀스멀 기어 다닌다.

 

얼마를 아슬아슬 디디며 견디어야

둥근 하늘에 구멍이 뚫리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나

 

나부끼는 생, 몇 장 독파하고 나니

펼치는 힘찬 나비의 날갯짓

허공에 물결무늬 투명하게 새겨진다.

 

콩꽃

 

광주 망월 무덤가에

혼자 피어 있는 노란 콩꽃을

두 손 모아 감싸고 오다가

옛 전남도청 앞에서 살며시 펼치자

 

노오란 나비 한 마리

멈칫하더니

팔랑팔랑 아픈 기억을 폈다, 접었다

훨훨 날아간다.

 

어둡고 찬 세월 속에 오래 갇혀 있던

그 맑디맑은 이름 하나

이제 막 푸른 하늘 속으로

손뼉 치듯 날아갔다.

 

백설白雪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는 것일까

흰나비들이

하늘을 가득 채우더니

메마른 마음을 깊이깊이 뒤덮는다.

 

이런 날은

뼈마디 부서지도록 열심히 살아온 시간을

한 장 한 장 되넘겨가며

꼼꼼하게 읽어보고 싶어진다.

 

아직 그려지지 않은

앞으로 살아갈 날들의 여백을

아득한 그리움으로 스케치하고 싶어진다.

 

지금까지

나는 따뜻한 사랑으로 그대를 건너왔다.

여기서 만난

흔적 없이 저편으로 건너간 모든 인연이

 

은은하게 빛나는 추억 위로

무수히 쏟아져 내리는 흰나비 떼처럼

온 세상을 가득 메웠다.

 

여명

 

저물녘 대숲에 슬그머니 숨어드는

비둘기 한 마리

대나무가 푸른 깃을 펼쳐 안아 들인다.

 

그때부터였다.

파도처럼 물결치는 대숲을 따라

비둘기는 흔들리고 흔들리며 잠을 청한다.

허리 휘는 대나무들과 하나가 되어

꿈속에서도 흔들린다.

함께 흔들리지 않으면

푸드덕 땅에 떨어지거나

여지없이 달려드는 날카로운 발톱

 

쏴쏴 밤새 가슴 쓸어대는 소리

긴 장대 하나에 의지한 어두운 밤은

눈썹 반짝이는 별들을 유난히 끄먹거리게 하듯

날마다 세상은,

흔들흔들 삶을 이리저리 마구 흔들어대는데

 

터벅터벅 걸어서 불쑥 당도한 새벽에

동네 개들이 깜짝 놀라

컹컹 어둠을 하얗게 짖을 때까지

자꾸 휘어지는 댓가지 하나 꼭 붙들고 흔들리고

흔들리다.

마침내 숨 트는 갓밝이 속으로

 

툭, 건드려주었다

 

벼랑 돌 하나를 굴려주었다.

일억 이천만 년 동안 나를 기다려

비탈길 하나를 굴러 내린다.

 

한 번의 구름을 위해

수만 번의 심호흡과 몸을 둥글게 말아가며

자세를 가다듬었을 것이다.

 

그 오랜 침묵의 무게를 벗고

파닥 날개를 펴는 새처럼

땅을 박차고 힘껏 뛰어 내려갔을 것이다.

 

단 한 번의 밀어줌으로

간단없이 급한 비탈의 경계를 넘어

다음 생에 당도한 바위 조각,

거기서 또다시

누군가 툭, 건드려주는 일이 또 생길 듯이

깊은 꿈을 꾸듯 기다려야 한다.

 

애기 사과

 

   밑줄 그으며 몇 번씩 침 묻혀 넘겨본 생을 뒤적여보면 한 길 건너 모퉁이에 얼른 어른이 되고 싶은 내가 서성거리고 있었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대를 애타게 기다리다가 다 자라지 못한 생각들을 이듬해 봄 탐스러운 꽃으로 만들어 매달아보곤 하였네.

 

   하르르 그 꽃잎들 지고, 그대도 없이 주렁주렁 품에 안아 키운 다 자란 작은 애인들이 너도나도 얼굴을 붉히는 동안 벌써 시린 발목을 동여매고 가는 야금야금 벌레 먹은 백년 세월의 그림자.

 

   자꾸만 어른이 되지 못한 푸른 비애와 당신을 만나지 못한 노란 그리움들이 군데군데 차돌 박힌 땅바닥을 치며 뚝뚝 떨어져 나뒹굴고

 

   그렇게 흔들리는 세연世緣의 가지를 붙잡고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쭈글쭈글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죽어라 손을 놓지 못하던 하, 수상한 세월이 있었네.

 

난꽃

 

어디선가 줄지어 힘차게 날아온

다섯 마리 기러기 가족,

제일 뒤쳐져 따라온 막내가 좀 비실거린다.

 

비실거려 내가 가끔 물 뿌려주고

맑게 닦아놓은 하늘길을 일렬로 통과 중이다.

 

반갑게 손 흔들며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주어 참 고맙다는 말 건네려는데

기럭기럭,

소리 없는 그 향기 허공에 그득하다.

 

선암매

 

비사표 당성냥 한 줌씩 들고 위태로이 서서

화악, 불 싸질러버릴 태세다

 

난 그 성냥개비 하나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오래 만지작거린다

 

일어나지 않은,

말없이

말할 줄 아는 충동마저 깡그리 태워버릴

얼음덩이 같은 화염을 생각하며

 

민들레 우주선

 

항암에 좋다는 흰민들레

우물가에서 깨끗이 씻어 마루에

가지런히 뉘어놓았다.

잎과 뿌리가 시들시들해질수록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꼭 다물었던 꽃망울을 터뜨리며

다급하게 둥근 우주 하나씩

세상에 피워놓는다.

 

사지가 깡마르고 심하게 뒤틀리는

생의 마지막 찰나까지

온힘을 다해 토해놓은

아름다운 우주선들

한순간 바람에 힘껏 솟구쳐

민들레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는

새로운 세계로 환하게 날아간다.

 

붉은 주머니

 

꺾어온 감 한 가지 벽에 걸렸다.

빵빵하게 속살 차오른 가슴들

떫은 젊음을 뽐내며

세상 이곳저곳을 손전등처럼 환히 비추더니

농익어 군침 돌게 했다.

 

이제 그 퉁퉁 불어터질 것 같던 것들이

잔주름이 잡히고 자신도 버겁다는 듯이

아래로 고갤 수그렸다.

선홍색으로 물들었던 볼에도

어느덧 내려앉은 검은 반점들

몸이 졸아들어 삶도 가벼워졌다.

 

먹지도 못하니 버리기로 하고

먼지 앉은 그것들을 만지작거리는데

작고 딱딱한 게 부딪히는 느낌

둥근 자궁 속에서 새근새근 잠들었다가

화들짝 놀라 깨어나는 소리

 

늙어서도 몇 개의 씨를 소중하게 품고

끈질기게 버티어낸

붉은 주머니

 

식구

 

동박새가 매화 가지 사이에서 날아오더니

쮸 쮸, 찌이, 찌이, 쮸 쮸

빠른 장단으로 옹알이하며

스스럼없이 동백나무 품으로 파고든다.

기다렸다는 듯이

푸른 옷섶을 여미며 받아 안는다.

눈썹 닮은 또 한 놈이

쮸 쮸, 찌이, 찌이 부리나케 날아와

함께 꿀을 빤다.

어리광부리듯이 이 꼭지 저 꼭지

돌아가며 꿀을 먹고는

만개한 벚꽃 속으로 장난처럼 사라진다.

그 뒷모습을 쫓는 동백나무의 무수한 눈동자가

스물네 시간, 사방팔방으로 열려 있다.

 

순천역이 가슴속에서 떠나갔다

 

순천만 비상하는 흑두루미를 배경으로

흐릿하게 찍힌 사진 속에서

불현듯 되살아 나온다.

역전 콩나물국밥 집 해월식당에 남은

이빨 자국 하나 꽉 문 깍두기

 

그저 이렇게 저렇게 왔다가 가면서

폐허처럼 깊은 그리움을 남긴다.

무수한 발자국 위에 또 하나

지워지지 않는 인연의 흔적을 찍듯이

 

마음만큼 뜨겁던 세월의 뚝배기도

어느덧 바람처럼 뚝딱 비워지고

더러 보내고 남는다는 것이

몸 깊숙이 박힌 이빨 자국 하나 품고

오래 견디는 일이거니

 

무리 지어 날아와 혼자이듯 앉았다가

대오를 이루어 날아가는 철새처럼

우리는 늘

깊은 상처를 서로 어루만지며

서둘러 떠나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문장리

 

사람들은 짧은 문장 안에서 산다.

 

잠시도 문장을 벗어나 본 적 없는 명사들이

서툴게 쓴 문장 길을 어슬렁거리고

문장의 크기만큼 열리는 오일장에는

싸고 풋풋한 언어들이 넉넉하게 팔린다.

몇 대째 한 문장에서 함께 사는 이들

고치고 고쳐도 허술한 생을 베개 삼아

저녁이면 30촉짜리

밝은 주제 하나 켜놓고 잠든다.

 

개구리 떼도 긴 문장 속에서 운다.

 

어쩌다 문장을 펄쩍 뛰쳐나간 놈들은

소문처럼 아침 안개로 떠돈다.

별들마저 새까만 밤하늘의 첫 페이지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으로

세상에서 가장 슬픈 전설을 수놓는

이 문장 안에서, 문장 사람들은

서로 뜻이 잘 통하는 한 구절 문장일 뿐.

부대끼며 힘들게 살다 보면

눈인사만 나누어도 금방 친숙해지듯이

짧고 간결한 내용의 문장들이

다시 태어나고 새롭게 고쳐 쓰이다가

결국은 삶의 비틀린 얼룩 자국처럼

세월의 비누로 깨끗이 지워져가는 것이다.

 

짧고 긴 문장 안에 사는 것들이 많다.

 

경經, 중얼거리다

 

시시로 변해가는 저문 풍경을

귀에 담아두려고

뜰에 흔들의자를 내놓고 있는데

나무들이 꽃들이 나를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대추나무 사이로 내려앉는 새도

저희끼리 무어라 속삭이며 중얼거린다.

강조할 점이 있다는 듯이

내 이마에 한참을 머물다 방점을 찍는

흰나비 한 마리

일어났다 흩어지는 구름이나 무심히 바라보다가

대숲을 뒤적이는 바람 소리

조금 엿듣고 있을 뿐인데

도대체 무슨 내용이 쓰여 있기에

나를 읽고 또 읽으려 애쓰는 것인지.

 

만 권의 책을 공부해도 몸에 넣지 못하고

천 번의 이별과 사랑을 기약해도

그 뜻을 듣지 못하는 내 귀 근처를

볼멘소리로 다가온 모기 한 마리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물방울

 

목욕탕 한쪽에 누워 있는데

누군가 내 이마를 툭 친다.

내가 누울 때부터 점점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

아마도 내가 천장에 매달려 있는 것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또 생겨난 물방울 하나가

이번엔 내 오른쪽 귀를 때리고 잘게 부서진다.

저 헛생각처럼 자꾸 생겨나고 있는

크고 작은 물방물들은 나를 바닥으로 여기겠지만

나는 천장이 바닥으로 보인다.

내가 물방울들 사이로 떨어질 것 같아

잠시 몸을 움츠리는 찰나에도

이 세상 여기저기에서는

물방울들이 끊임없이 태어나서 자라고

잠시 매달려 살다가

순식간에 떨어져 흔적도 없이 부서져갈 것이다.

 

내 살아온 만큼의 무게로 떨어져

가닿아야 할 지 천장 너머 무궁한 바닥,

아득하게 깊다.

 

 

 

posted by 황영찬

2018-007 톈산 산맥 아래에서

 

 

 

최석

2016, 천년의 시작

 

대야도서관

SB110702

 

811.7

시72ㅊ 198

 

시작시인선 0198

 

한때 소련(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 속하였던 러시아와 시베리아, 중앙아시아는 스탈린에 의해 1937년 10월부터 1938년 4월 사이에 연해주 일대에서 강제 이주당한 20여만 명의 고려인(까레이스끼)과 그 후예들의 발자취가 짙게 배인 광활한 땅으로 이른바 CIS(독립 국가 연합) 지역이다. 이들 나라에는 고려인 후예들뿐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날아 들어간 '한인韓人'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영주권을 취득하거나 장기간의 체류를 하면서 한인 동포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카자흐스탄 공화국의 제2의 도시 알마티에 거주하는 한인 동포 최석 시인의 새 시집 『톈산 산맥 아래에서』는 디아스포라(추방된 자들)의 후예인 고려인과 1990년대 후반 국교 수립 이후 새로운 형태의 노마드(유목민)로 들어간 한인들의 애환과 삶의 치열함 혹은 '척박한 광야에서의 삶'을 담아낸 중앙아시아 코리안 문학의 탄력과 에너지로 작동하여 울림이 크다. 「부룬다이 가는 길」「부음」「그라프가 늙는다」 등의 시편은 우리 시대 노마드 문학Normad Literature의 드넓고 독창적인 지평선을 보여준다.

- 김준태(시인 · 조선대 교수)

 

최석

논산 출생으로 1987년 무크지 『현실시각』과 1989년 계간 『현대시세계』를 통해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1997년에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여 그곳에 살고 있다. 2,000년대 초 정상진, 양원식, 이정희 등의 고려인 문인들과 한국에서 이주한 작가들을 모아 중앙아시아문인협회를 결성하였고 2006년 고려인문예지 『고려문화』를 창간하여 편집주간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1년 해외 문인들에게 주는 이병주국제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시집으로는 『작업일지』(청하, 1989년)가 있다.

 

시인의 말

 

톈산의 발치에 앉아

고추 잎을 딴다

아무것도 맺지 못한 흰 꽃들

여린 간니들이 갈볕 아래 환하다

오랜 밤을 견딘 기억들이 펼쳐놓으니

허술하기만 하다

조바심을 내던 빈 자루에

칠성무당벌레 한 마리 기어오른다

존재한다는 것은 만만하지 않다

광야가 비어가니

곧 겨울이 올 것이다

 

2015년 가을 알마티

최  석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서시
부룬다이 가는 길
개양귀비꽃의 소묘
천 년의 풍경
봉분의 역사
더께에 대하여
귀뚜라미 보일러
그리운 최영 장군
산해진미론
알마굴에 대한 비망록
그라프가 늙는다
매명의 시
털 이야기
부음
저 푸른 초원 위에
차를 마시며
김 가이의 봄
해방 60주년의 점심 식사
고려인을 위하여
마경준 동무를 곡함
하여가
홍범도를 그리며
한 여인의 짧은 기록
모정의 세월
뚜르겐스키 적포도주
개떡
아버지
고슴도치의 시
꽃이 피다
이사 가던 날
여름날
자작나무의 시

제2부
실크로드는 없다
맛있는 피클
예르쟌
낙하의 비밀
톈산에서 만나는 동해 바다
새참
독서
톈산 산맥
떠도는 냄새
희망에 대하여
고수를 찾아서
또 고수를 찾아서
냄비에 대한 편견
폼생폼사
밭고랑 한 줄을 일궜을 뿐인데……
첫 눈

비극적 상상력
KBS World
소원의 나무
또 다른 외전
기억의 고집
위그르의 수박가게
배설론
호두나무 연대기
영웅시대
소나무
선악과에 대하여
배달되는 봄
우화의 세계
하렘을 찾아서
사막의 꿈

해설
홍용희 톈산에서의 실존을 위하여

 

톈산 산맥

 

산맥이 튀어 오른다

하늘을 탐하는

이교의 창검처럼 불안하다

차안에서 피안까지

가야 할 길은 먼데

산맥은 자꾸만 경계를 만든다

원래 저 산은

흉노와 짱깨들이 만든 소도가 아니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는

파미르의 속살이 아니다

지구라트를 세우던 습성과

말을 버리고 주먹을 사용하던 관성 때문에

생겨난 저주이다

그런 추가 조항 때문에

간혹 산이 운다

 

서시

 

톈산은 늘 거기 있었지만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일 년 내내 한텡그리 봉은 흰 눈을 건처럼

두르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다

사는 것이 뭔지

고개를 숙인 채 인상만 찡그린다

검색어만으로 접선이 완료되는 인터넷의 대낮에

두고 온 한국의 친인척과 연고가

끊어지고 있는 사이

끊고 있는 사이

딸과 아들은 유창한 러시아어를 구사하며

국적 없는 세계화의 꿈나무로 자라고

노린내 나는 양고기를 주식처럼 좋아한다

불확실한 미래

아이들에겐 조국이 없다

국적조차 모호하다

비닐봉지에 담긴 김치 한 보시기에

쉬어 꼬부라진 향수병이나 도지는

알마티의 저녁

석양은 지평선 끝에 닿지도 않고

장엄하게 벌개지는데

눈만 들면 보이는 톈산의 뭇 봉들이

오늘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보이지 않는다

 

더께에 대하여

 

알마티 가가리나 115번지

여기가 우리 집

아들 현상이가 착상이 되었을 때 이사와

이제 일곱 살이 되었으니 우리는

이곳에서 8년째 살고 있는 셈이다

아이들에게는 고향과 진배없지만

나는 언제나 낯설다

오래 살아도 삶에 더께가 끼지 않는다

인간들이 낯설고 땅이 낯설다

냄새가 낯설고 맛이 낯설다

체위가 낯설고 오르가슴이 낯설다

낯설음은 불안함이고

낯설음은 극단적 선택을 강요한다

끝내 아내가 낯설고

내가 낯설다

낯설음에 대한 익숙함

그것은 삶의 더께가 아니고 관성일 뿐이다

물이 끓고 있다

주전자 속에서 달아나려 하는

수많은 세월의 미립자들, 하모니카

소리를 내며 몰려나오는 수증기처럼

간혹 깨끗이 증발해버렸으면 싶다

허옇게 둘러붙은 석회 앙금

박박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데

그것이 내 삶의 더께일까?

 

여름날

 

노을진 들판을 바라보고 있으면

배가 고프다

논에 피사리 간 아버지와 어머니는

여태 돌아오지 않고

시렁에 놓인 보리밥 소쿠리는 비어 있다

텃밭에 늙은 가지를 따

먹다 집어던지고

아릿한 입맛만 다신다

잠자리를 쫓는 것도

흙장난도 시들해지는 저물녘

뒷집에선 저녁연기 잦아들고

나직한 토장국 냄새

담을 넘어오는데

싸하니 횟배가 아프다

어머니는 언제나 돌아올까?

자꾸만 까치발로 내다보는 들길

저녁해는 먹다 버린

가지 꽁다리만큼도 안 남았다

땅거미에 젖어드는 빈집

기다림에 지쳐 설핏 잠이 든다

어머니 밥 짓는 소리

초저녁 별이 뜨고 있다

 

개떡

 

봄이 좋아지기 시작한다

그것도 쌓인 눈을 비껴가며 돋아나는 초봄이

좋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좌

문득 개떡이 먹고 싶다

거무튀튀하고 못생긴 쑥개떡

어머니의 뭉그러진 지문이 남아 있는 쑥개떡

무슨 새참한 맛이 있겠냐마는 지금

먹고 싶은 것은 어릴 적의 그리움 아니냐

다북쑥 소담한 논두렁을 타고

뭉기적뭉기적 넘어오던 봄바람

까르르르 목젖이 보이도록 웃어대던 예닐곱 살

마른버짐 번성한 까까머리 동무들 아니냐

논산시 채운면 새터마을

나싱개 자운영 벌금자리

무성하던 어린 날 들녘으로 돌아가고 싶다

고향을 잊어버린 두 아이들에게

내 어린 날의 봄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고 싶다

"옛날에 저 둠벙 속에는 이무기가 한 마리 살았었는데……"

새로운 봄 이야기를 만들어주고 싶다

아마도 내가 내게 하고 싶은 이야기일 것이다

 

고려인을 위하여

 

중앙아시아에서는 스스로 고려인이라 부른다

그들에게는 조국이 없다

없어져버렸다

원동遠東에서 기차에 실려

화물칸에 실려

뾰족한 송곳처럼 서서

분노를 세우고

공포를 세우고

도착지도 모른 채 뿌려진 곳

중앙아시아 눈이 부신 햇살 아래 펼쳐진

소금꽃 핀 광야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는 곳

아직도 그들이 산다

두더지처럼 땅굴을 파고 살던 그들이

이제는 번듯한 집에서 산다

땅굴 속에서도 죽지 않은 사람들은

장군도 되고 영웅도 되고

가수도 되고 첩이 되기도 했다

그때 핏덩이였던 사람들조차

이제 다 죽었다

원동을 그리며 죽었다

그들의 자식 자식의 자식들이 살아간다

동해물과 백두산을 모르고도 살아간다

그들의 조국은 카자흐스탄이고 우즈베키스탄이다

어쩌면 원동일지도 모른다

원동에 가면 조선이 보이고 한국이 보인다

제발 신파조로 그들을 대하지 마라

고려인은 눈물을 싫어한다

 

새참

 

"어이 오게나"

허리 굽은 강태수가

찬물에 밥을 말아 먹고 있다

 

몽롱한 나르꼬지 몇 포기

돌각밭에 기대어 흔들거린다

모다 힘이 든 게지

 

눈물 콧물 닦고

일찍 뜬 쪽달만

먼 산만 바라보고 있다

 

마경준 동무를 곡함

 

고려인 인명 자료를 뒤적이다 만난 사람

강제 이주의 열차를 타고 서쪽으로

서쪽으로 36일을 달려와

흰 눈밭에 빨간 피를 한 움큼 뱉어낸 사람

추웠다던 그 겨울

잘 먹어야 낫는 구멍 난 폐 덩어리를 품으며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 그러하거늘

크즐오르다 부르노예 정거장 부근에서

불행히 세상을 떠난 사람

질긴 한 목숨이었거늘

인명록에 기록할 만한 사유가 없어

잊혀져야 하는

1938년 6월 10일 레닌기치의 역사歷史

빠알간 개양귀비꽃 벌판에서

돌림병처럼 꽃대를 올리는

마경준

동무

 

김 가이의 봄

 

우슈토베의 농법은 진보하지 않는다

한때는 레닌의 이름을 붙였던 꼴호즈 언저리에

김해나 경주쯤이 본관이었을 김 가이가

씨를 덮는다 고집도 없이

밋밋한 사람처럼

땅을 헤집고 씨앗을 덮는다

동쪽의 끝에서 기차를 타고 왔을 흑역사를

덮고 또 덮어서 싹을 틔운다

갈무리된 순한 눈빛은 씨감자마냔 둥그랗다

남도 어디선가 마났을 법한 동무

김 가이의 덩이줄기가 궁금했지만

캐낼 것이 없는 마른 기침뿐

그는 우스토벤스키

진보하지 않는 저 땅으로 들어갈 것이다

쏟아져 있는 씨감자들이

촉수를 틔우고 있는

김 가이의

텃밭

 

해방 60주년의 점심 식사

 

흘레브

고려인들은 떡이라고 부르는 빵

옛날 봉놋방에 굴러다니던

목침 같다 해방 직후

소련군이 그랬다는 것처럼 사실

그것을 베고 잠을 자본 적도 있었다

깨어나서 뜯어먹어 본 적도 있었다

오늘 점심으로

고려인 통역 아줌마와 함께

흘레브를 먹는다

한민족의 근현대사를 먹는다

그녀는 떡을 먹는 것이고

나는 빵을 먹는다

그녀는 고기에 곁들여 먹고

나는 김치를 얹어서 먹고

그녀는 일용할 양식을 먹고

나는 대용식을 먹는다

바라보며 멋쩍게 웃는다

같은 피를 가졌어도

서로 신토불이다

 

톈산에서 만나는 동해 바다

 

요거는 동태국

요거는 네덜란드에서 온 수꿈부리야

배소배소의 땅에서는 나름 귀한 것들

먹어봐요

안 먹으면 죽어요

눈이 십 리는 들어간 내게

쥐어주는 숟가락

간간한 갯내가 슬그머니

빈속에 들어앉는다 혹여

캡슐 하나로 한 끼를 때울 수 있다면

우리들의 저녁은

얼마나 서러운 바리때였을까

관음보살의 아우라로 빛나는

그대 뒤로

등 푸른 바다가 걸려 있고

짤랑짤랑 반짝이는

저 금초롱

물고기들

 

하여가

 

카자흐 사람들은 우리 보고

마늘 냄새가 난다 하고

우리는 도리어 노린내가 난다 하고

양파 냄새가 난다 하고

식재료가 다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살다 보면 무뎌지는 법

이젠 양고기도 제법 먹는다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별게 아니다

벌써 카자흐인과 한국인의 교배종이

땅 위에 등장한 지 오래

애비의 성을 따르든

에미의 성을 따르든

결국 카자흐인이 된다

된장국을 끓인다

알마티의 애호박과 타쉬겐트에서 실어온 감자

남해 바다 멸치에 고려인 된장을 넣어 끓인

애매모호한 국물 끓일수록

진해지는 한민족의 눈물처럼

몸속 깊숙이 된장의 냄새가 든다

 

차를 마시며

 

톈산의 눈 속 낡은 집이

차를 마신다 보성에서 채집한

곡우의 봄소식은 아직 쌀쌀하고 춥다

창밖에는 카자흐의 초원에서

몰려오는 눈발이 조용히 나리고

나리다가 지겨우면

창문에 이마를 대고 들여다본다

 

차를 마시며

간혹 순천만을 적시고

지리산 자락으로 올라가는 찬바람 소리와

불순한 운주사

천불천탑의 꿈을 덮던

속 너른 눈발이 보일 듯도 하지만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로 인해 세상의 모든 것은 쌓인다

슬픔이 쌓이고

얼굴이 쌓인다

 

보성차가 끓는다

구증구포의 숨결이 부대끼며 끓는다

톈산 북로의 말 울음소리와

결기 푸른 대숲의 바람 소리를

교접하려는 단꿈이

혼자서

끓는다

 

고슴도치의 시

 

  현상이는 내가 늦게 얻은 자식 만으로 일곱 살이다 말도 징그럽게도 안 들을 나이 그래도 하루가 다르게 크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놈도 여느 아이와 다를 바 없는 로봇 마니아다 로봇들을 가지고 진종일을 논다 한국 로봇을 가지고 러시아 말로 논다 혼자서 묻고 혼자서 대답하고 레이저 포를 쏘고 적의 부메랑에 맞아 쓰러진다 신기하여라 별난 효과음을 다 낸다 가끔은 저놈이 한국인인지 러시아 사람인지 분간이 안 간다 부끄럽지만 나도 이제 고슴도치 조건 없이 예쁘다 바라느니

  틀을 만들지 말 것

 

꽃이 피다

 

아버지가 녹슨 라이터를 닦고 있다

몰골이 많이 상한 라이터

Zippo도 아니고

Zippon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논에서 김을 매다가 잃어버린 라이터

나락을 베다가 찾아낸 라이터

한때 반짝이던 광택의 시간도 지워지고

녹물이 번성한 Zippon의 깊은 수심

불이 붙지 않는 아버지를 아버지가 닦고 있다

 

어느

봄날

일리 강을 따라가는 묵은 길가에서 만나다

붉은 꽃 푸른 꽃

노랗고도 하얀 꽃

Zippon 꽃들

지천이다

 

맛있는 피클

 

피자집에서 피자를 먹다

물컹한 피클을 먹다 생각을 하다

투명하게 빛났을 스무 살

치렁한 갈색 머리

깊고도 푸른 눈빛을 빛내며

또박또박 깜사몰스카야거리를 활보했을

러시아의 여인

꼬뮤니스트 갈리나 니꼴라이나

뚱뚱해진 정년을 넘긴 후에야

우리 세탁소의 바지 프레스를 눌렀던 여인

무릎의 지친 흔적을 곱게 펴던

갈리나 니꼴라이나

내 딸애의 입속에 피클을 넣어주던

오 갈리나 니꼴라이나

그녀가 빚은 상큼한 향기

아삭한 피클을 먹을 수 없음에

다시 먹을 수 없음에

눈시울이 시큰하다

 

부룬다이 가는 길

 

알마티 시가지를 조금만 벗어나면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광야다

기차를 타고 며칠을 달려도 지평선이 보인다

누군들 주눅이 들지 않겠는가

쥐코밥상만 한 한국의 땅덩이에 한숨이 나고

아등바등거리는 오늘의 삶에 눈물이 난다

죽어서도 묻힐 땅조차 없는 우리들

이승에 움집 하나도 내 것이 아닌 바에

죽어 한 줌 재로 날린들 무에 대수겠는가

친했던 고려인의 하관을 마치고 온 후로

부룬다이 모래 한 점 섞이지 않은

대지의 속살을 만지고 난 후로

문득 이곳에 뼈를 묻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업보이거늘

살고 죽는 일이 어디 내 소관일까 마는

 

그라프가 늙는다

 

그라프

몸도 크지만 대가리가 기형적으로 큰 개

처음 저놈을 만났을 때 눈빛이 형형했었다

그때가 벌써 다섯 살

털은 반지르르하고 골격은 단단하게 바라졌었다

뼈다귀를 삶아주면 밤새

우둑우둑 씹어 삼키는 소리

그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깊은 잠에 들었다

저놈은 우리 집의 수난사를 잘 알고 있다

첫 번째 강도가 들던 날

나를 먼저 물어뜯었고

두 번째 강도가 들던 날은 달아났다

달아났다 아침에 들어왔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개답지 못한 개

그래도 저놈을 버리지 못했다

첫정이었다

우리의 식구였다 간혹

줄을 끊고 담을 넘어

발정이 난 암캐를 찾아갔고

다음 날이면 상처를 입고 들어와 며칠을 앓았다

그렇게 십수 년을 혼자서 살고 있다

개에게도 슬픔이 있다

언제부턴가 조금씩 미쳐가고 있는 그라프

비 오는 날은 눈에 광기가 돋고

폐부에서 끌어올리는 소리로

밤새워 운다 깊은 상처가 있었으리라

노쇠한 구도자처럼 구부러진 그라프

그라프가 늙는다

내가 늙는다

 

부음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텃밭에 나간다

하는 일이라는 게

단순히 잡초를 뽑는다든지

고추 대에 북을 돋우는 것이 고작이지만

땡볕이라도 그 일이 즐겁다

식구들마저 촌놈의 근성으로 치부하는 눈치지만

옛말 그른 것이 어디 있는가

땅이 아니 흙은 거짓말을 않는다

뿌린 대로 나온다

정성대로 큰다

거기서 배우는 때늦은 사랑법

새로운 씨앗이라면 뭐든 뿌려보고 싶다

새로운 기쁨이 싹을 틔울 것 같다 오늘

그대의 소식을 듣는다

땅에 묻는다

꽃으로 피지 못한

그대는 어떤 꽃이었을까?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