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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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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3.02 2018-012 서른, 잔치는 끝났다

2018-012 서른, 잔치는 끝났다

 

 

 

최영미 시집

1996, 창작과비평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03902

 

811.6

최64ㅅ

 

창비시선 121

 

나는 『창작과비평』에서 이 시인을 "교과서가 없는 시대에 고투하는 젊은 영혼의 편력을 도시적 감수성으로 정직하게 노래하고 있는 신인"이라고 소개했었다. 그녀의 첫시집을 교정지 상태에서 읽어나가면서 나는, 당분간은 그 무엇이라고도 이름붙일 수 없는 '한 시인'이 태어났음을 실감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독자들에게 쉽게 투과되는 시인에게서 새로운 시대의 예감은 감지되지 않는 법이어늘, 바라건대 그 불투과성(不透過性) 이 우리 시의 내일을 여는 "첫번째 사과의 서러운 이빨자욱으로" 전환되는 기적을 목격할 수 있게 되기를!

- 문학평론가 최원식

 

최영미의 시는 얼핏 보기에 도발적이다. 사람을 저으기 당황스럽게 하면서, 그러나 그의 시를 끝까지 따라가게 만드는 이 유혹의 빛은 삶을 지탱시켜주는 중요한 어떤 것, 이념이라든가 사랑이라든가 하는 것이 사라져버린 자리를 비춰주고는 문득 암전(暗電) 되고 만다. 나이 서른살에 "잔치는 끝났다"고 말하는 이 시집은 이념의 대홍수 이후 그것의 범람에 가담했던 세대의 기록으로 기억되겠지만, 시가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상처가 더 이상 명예가 아닌 때에 삶에의 자존심마저 훑어가버리고 없는, 아무도 들어가려 하지 않는 그 황폐한 곳에 스스로 거주하고자 하는 시인의 숙명을 받아들이는 자가 이 시대에 또 있다니(!) 반갑다.

- 시인 황지우

 

최영미는 여성시의 다양성이라는 공간 확장에 개성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개성적이라는 것은 최영미가 청춘과 운동, 사랑과 혁명 같은 서로 이질적인 요소들을 자신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질퍽하게 하나로 동화시켜가는 궤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궤적에는 불가피하게 싸움들이 끼여든다. 그 싸움의 대상들은 부조리한 사회일 수도 있고, 그 부조리한 사회에서 어떤 종류의 것이든 권력을 쥐고 있는 남성 전반일 수도 있다. 그의 시들은 어쩌면 어떤 싸움의 기록이다. 그는 그 싸움의 상처들로 만들어진 누더기 옷을 걸치고 있다("상처도 산 자만이 걸치는 옷"). 그래도 그가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누더기 옷을 통해, 그 투명한 알몸, 혹은 알몸의 투명성의 아름다움이 내비치기 때문이다. 싸움으로 질척거릴수록 더욱 투명해지는 아름다움이.

- 시인 최승자

 

崔泳美 시인

 

1961년 서울 출생

           서울대 서양사학과 졸업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수료

1992년 계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속초에서」 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차례

 

제1부 서른, 잔치는 끝났다


선운사에서

서른, 잔치는 끝났다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살아남은 자의 배고픔

혼자라는 건

속초에서

가을에는

그에게

마지막 섹스의 추억

먼저, 그것이

위험한 여름

어떤 족보

사랑이, 혁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어떤 사기


제2부 나의 대학


과일가게에서

목  욕

아도니스를 위한 연가

어떤 게릴라

우리 집

사는 이유

슬픈 까페의 노래

돌려다오

대청소

다시 찾은 봄

북한산에 첫눈 오던 날

폭풍주의보

인생

나의 대학


제3부 지하철에서


지하철에서 1

지하철에서 2

지하철에서 3

지하철에서 4

지하철에서 5

지하철에서 6

마포 뒷골목에서

새들은 아직도……

짝사랑

Personal Computer

茶와 同情

24시간 편의점

관록 있는 구두의 밤 산책

라디오 뉴스


제4부 내 마음의 비무장지대


생각이 미쳐 시가 되고……

꿈속의 꿈

영수증

사랑의 힘

어쩌자고

또다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자본론

한 남자를 잊는다는 건

歸去來辭(1992)

내 속의 가을

담배에 대하여

어떤 輪廻

내 마음의 비무장지대


발문 - 김용택

후기

 

서른, 잔치는 끝났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 ! 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에게

 

내가 연애시를 써도 모를거야

사람들은, 그가 누군지

한 놈인지 두 놈인지

오늘의 그대가 내일의 당신보다 가까울지

비평가도 모를거야

그리고 아마 너도 모를거야

내가 너만 좋아했는 줄 아니?

사랑은 고유명사가 아니니까

때때로 보통으로 바람피는 줄 알겠지만

그래도 모를거야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오는 건 습관도

뭣도 아니라는 걸

속아도 크게 속아야 얻는 게 있지

내가 계속 너만을 목매고 있다고 생각하렴

사진처럼 안전하게 붙어 있다고 믿으렴

어디 기분만 좋겠니?

힘도 날거야

다른 여자 열 명은 더 속일 힘이 솟을거야

하늘이라도 넘어갈거야

그런데 그런데 연애시는 못 쓸걸

제 발로 걸어나오지 않으면 두드려패는 법은 모를걸

아프더라도 스스로 사기칠 힘은 없을걸, 없을걸

 

마지막 섹스의 추억

 

아침상 오른 굴비 한 마리

발르다 나는 보았네

마침내 드러난 육신의 비밀

파헤쳐진 오장육부, 산산이 부서진 살점들

진실이란 이런 것인가

한꺼풀 벗기면 뼈와 살로만 수습돼

그날 밤 음부처럼 무섭도록 단순해지는 사연

죽은 살 찢으며 나는 알았네

상처도 산 자만이 걸치는 옷

더이상 아프지 않겠다는 약속

 

그런 사랑 여러번 했네

찬란한 비늘, 겹겹이 구름 걷히자

우수수 쏟아지던 아침햇살

그 투명함에 놀라 껍질째 오그라들던 너와 나

누가 먼저 없이, 주섬주섬 온몸에

차가운 비늘을 꽂았지

 

살아서 팔딱이던 말들

살아서 고프던 말들

살아서 고프던 몸짓

모두 잃고 나는 씹었네

입안 가득 고여오는

마지막 섹스의 추억

 

목욕

 

한때 너를 위해

또 너를 위해

너희들을 위해

씻고 닦고 문지르던 몸

이제 거울처럼 단단하게 늙어가는구나

투명하게 두꺼워져

세탁하지 않아도 제 힘으로 빛나는 추억에 밀려

떨어져 앉은 쭈그렁 가슴아 ---

살 떨리게 화장하던 열망은 어디 가고

까칠한 껍질만 벗겨지는구나

헤프게 기억을 빗질하는 저녁

삶아먹어도 좋을 질긴 시간이여

 

슬픈 까페의 노래

 

언젠가 한번 와본 듯하다

언젠가 한번 마신 듯하다

이 까페 이 자리 이 불빛 아래

가만있자 저 눈눗음치는 마담

살짝 보조개도 낯익구나

 

어느 놈하고였더라

시대를 핑계로 어둠을 구실로

객쩍은 욕망에 꽃을 달아줬던 건

아프지 않고도 아픈 척

가렵지 않고도 가려운 척

밤 새워 날 세워 핥고 할퀴던

아직 피가 뜨겁던 때인가

 

있는 과거 없는 과거 들쑤시어

있는 놈 없는 년 모다 모아

도마 위에 씹고 또 씹었었지

호호탕탕 훌훌쩝쩝

마시고 두드리고 불러제꼈지

그러다 한두 번 눈빛이 엉켰겠지

어쩌면……

부끄럽다 두렵다 이 까페 이 자리는

내 姦飮의 목격자

 

나의 대학

 

이제 어쩌면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 떠난 뒤에 더 무성해진 초원에 대해

아니면, 끝난 줄 모르는 계단에 대해

우리 시야를 간단히 유린하던 새떼들에 대해

 

청유형 어미로 끝나는 동사들, 머뭇거리며 섞이던 목소리에 대해

여름이 끝날 때마다 짦아지는 머리칼, 예정된 사라짐에 대해

혼자만이 아는 배신, 한밤중 스탠드 주위에 엉기던 피낸새에 대해

 

그대, 내가 사랑했을지도 모를 이름이여

 

나란히 접은 책상다리들에 대해

벽 없이 기대앉은 등, 세상을 혼자 떠받친 듯 무거운  어깨 위에 내리던 어둠에 대해

가능한 모든 대립항들, 시력을 해치던 최초의 이편과 저편에 대해

 

그대, 내가 배반했을지도 모를 이름이여

 

첫번째 긴 고백에 대해

너무 쉽게 무거웠다 가벼워지던 저마다 키워온 비밀에 대해

눈 오는 날 뜨거운 커피에 적신 크래커처럼 쉽게 부서지던 사랑에 대해

 

암것도 할 수 없었던 어느날 오후에 대해

아, 그러나, 끝끝내, 누구의 무엇도 아니었던 스무 살에 대해

 

그대, 내가 잊었을지도 모를 이름이여

 

그렁그렁, 십년 만에 울리던 전화벨에 대해

그 아침, 새싹들의 눈부신 초연함에 대해

 

이 모든 것들에 대해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요

행여 내 노래에 맞춰 춤을 춰줄, 아직 한 사람쯤 있는지요

 

지하철에서 1

 

나는 보았다

밥벌레들이 순대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새들은 아직도……

 

아스팔트 사이 사이

겨울나무 헐벗은 가지 위에

휘영청 쏟아질 듯 집을 짓는구나

 

된바람 매연도 아랑곳 않고

포크레인 드르륵 놀이터 왕왕시끌도

끄떡없을 너희만의 왕국을 가꾸는구나

부우연 서울 하늘 무색타

까맣게 집을 박는구나

 

봄이면 알 낳고 새끼 치려고

북한산 죽은 가지 베물고

햇새벽 어둠 굼뜨다 훠이훠이

부지런히 푸들거리는구나

 

무어 더 볼 게 있다고

무어 더 바랄 게 있다고

 

사람 사는 이 세상 떠나지 않고

아직도

정말 아직도 집을 짓는구나

 

게으른 이불 속 코나 후빌 때

소련 붕괴 뉴스에 아침식탁 웅성거릴 때

소리없이 소문없이

집 하나 짓고 있었구나

 

자꾸만 커지는구나

갈수록 둥그래지는구나

 

봄바람 싸한 냄새만 맡아도

우르르 알을 까겠지

 

모스크바에서도 소리없이

둥그렇게 새가 집을 지을까?

 

내 가슴에 부끄러움 박으며

새들은 오늘도 집을 짓는구나

 

내 마음의 비무장지대

 

커피도 홍차도 아니야

재미없는 소설책을 밤늦도록 붙잡고 있는 건

비 그친 뒤에도 우산을 접지 못하는 건

짐을 쌌다 풀었다 옷만 갈아입는 건

어제의 시를 고쳐쓰게 하는 건

커피도 홍차도 아니야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어

돌아누워도 엎드려도

머리를 헝클어도 묶어보아도

 

새침 떨어볼까요 청승 부려볼까요

처맨 손 어디 둘 곳 몰라

찻잔을 쥘까요 무릎 위에 단정히 놓을까요

은근히 내리깔까요 슬쩍 훔쳐볼까요

들쑥날쑥 끓는 속 어디 맬 곳 몰라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가슴속 뒤져보면

 

그래도 어딘가 남아 있을, 잡초 우거진

내 마음의 비무장지대에 그대, 들어오겠나요

어느날 문득 소나기 밑을 젖어보겠나요

 

잘 달인 추억 한술

취해서 꾸벅이는 밤

너에게로, 너의 정지된 어깨 너머로

잠수해 들어가고픈

 

비라도 내렸으면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