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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0. 12. 08:50 내가 읽은 책들/2018년도

2018-052 유네스코 선정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1

 

 

 

이종호 글 · 사진

2015, 북 카라반

 

대야도서관

SB108008

 

911

이75ㅎ  1

 

불국사와 석굴암부터 백제역사유적지구까지

 

UNESCO World Heritage of KOREA

 

한국이 자랑하는

세계문화유산

 

창덕궁, 종묘, 남한산성, 백제역사유적지구, 하회마을과 양동마을,

해인사 장경판전, 수원 화성, 강화 · 고창 · 화순 고인돌 유적, 조선 왕릉,

불국사와 석굴암, 경주역사유적지구,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한국의 건축물을 대변하는 궁궐은 많지만, 창덕궁이 유일하게 세계문화유산에 지명되었을 정도로 남다른 특이성을 갖고 있다. 세계에서 단일 목조 건물로 가장 규모가 큰 종묘와 남한산성도 한국의 자랑스런 세계문화유산이다.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백제역사유적지구와 하회마을과 양동마을, 해인사 장경판전, 수원 화성도 세계문화유산에 속한다. 한국은 '고인돌의 나라'로 불러도 좋을 만큼 많은 고인돌이 전국에 산재해 있는데, 특히 강화도와 전남 화순, 전북 고창 지역의 고인돌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세계에 유례가 없는 조선시대의 왕릉은 거의 전부 한양을 중심으로 100리 안에 잇다. 경주 지역은 1995년 한국의 간판스타라 볼 수 있는 불국사와 석굴암이 최초로 지정되었고, 2000년 경주역사유적지구라는 명칭으로 경주시 전부를 포괄해 지정되었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인 한라산천연보호구역, 성산일출봉, 거문오름 용암동굴이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종호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페르피냥대학에서 공학박사 학위와 과학국가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랑스 문부성이 주최하는 우수 논문상을 수상했으며 해외 유치 과학자로 귀국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등에서 연구했다. 과학기술처장관상, 태양에너지학회상,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상했으며, 기초 없이 빌딩을 50층 이상 올릴 수 있는 ‘역피라미드 공법’을 비롯해 특허 10여 개를 20여 개국에 출원하는 등 이론과 실제를 넘나들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그동안 『유적으로 보는 우리 역사』(전2권), 『과학문화유산답사기』(전3권), 『미스터리와 진실』(전3권), 『황금보검의 비밀』, 『과학 삼국유사』, 『과학 삼국사기』, 『고대 신전 오디세이』,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파라오의 저주』, 『천재를 이긴 천재들』(전2권), 『세계 불가사의 여행』, 『세계사를 뒤흔든 발굴』, 『노벨상이 만든 세상』,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한국의 유산 21가지』 등 100여 권을 집필했다.

 

차례

 

머리말

 

제1장 창덕궁

한국인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 궁궐

공간 구성과 배치
돈화문 | 금천교 | 진선문 | 인정문 | 인정전 | 상의원 | 내병조 | 선원전 | 선정전 | 희정당 | 대조전 | 경훈각 | 함원전 | 성정각 | 승화루 | 낙선재 | 궐내각사

한국 조원의 대명사, 후원
부용지 지역 | 연경당 지역 | 존덕정 일원 | 옥류천 일원

 

제2장 종묘

선왕에 대한 제사의 장소

종묘 제도

격식과 장엄함의 대명사, 종묘
신도와 어도 | 망묘루 | 향대청 | 공민왕 신당 | 재궁 | 정전 | 공신당과 칠사당 | 영녕전 | 악공청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

 

제3장 남한산성

역사의 현장, 남한산성

남한산성 돌아보기
남문 | 암문 | 수어장대 | 서문 | 군포와 매탄지 | 옹성과 치 | 북문 | 벌봉 | 여장과 포루 | 장경사 | 성벽 | 동문 | 동암문

남한산성 행궁

 

제4장 백제역사유적지구

공주

공주 공산성 | 공주 송산리 고분군 | 무령왕릉 | 무령왕릉의 출토 유물

부여

부여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 부여 능산리 고분군 | 부여 나성 | 부여 정림사지

익산

익산 왕궁리 유적 | 익산 미륵사지

 

제5장 하회마을과 양동마을

하회마을

한국의 4대 길지

3년을 적선하라

전통적인 유교마을

마을 전체가 역사 유물
양진당 | 충효당 | 화경당 | 염행당 | 주일재 | 하동고택 | 원지정사 | 작천고택 | 옥연정사 | 겸암정사 | 삼신당 | 병산서원 | 화천서당

양동마을

양동마을의 건축
관가정 | 무첨당 | 향단 | 서백당 | 상춘헌 | 근암고택 | 두곡고택 | 이향정 | 심수정 | 안락정과 강학당 | 동강서원 | 옥산서원 | 독락당

 

제6장 해인사 장경판전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

불력으로 외적을 격퇴하다

대장경을 만들다

고려 최대의 국책 프로젝트

장경판전

 

제7장 수원 화성

정조, 조선 제2의 도시를 짓다

신도시 건설이 최선이다

다목적 기능의 신도시

철저한 설계도면에 의한 다양한 건축

정조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정약용의 설계안

첨단 과학 기자재를 사용하다

수원 화성 돌아보기
장안문 | 북서적대와 북동적대 | 서북공심돈 | 화서문 | 서장대와 노대 | 서암문 | 서포루 | 서남각루 | 팔달문 | 남수문 | 봉돈(봉화대) | 창룡문 | 동북공심돈 | 연무대 | 화홍문 | 방화수류정 | 창성사 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

 

참고자료

 

■ 창덕궁은 지형지세를 활용한 자유로운 공간 구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주변 경관과 조화를 중시해 한국적인 궁궐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 돈화문에서 돈화는 『중용』의 '대덕돈화大德敦化'에서 취한 것으로 '교화를 도탑게 한다'는 뜻이다.

■ 금천교 네 모서리에 있는 산예라는 상상의 동물은 그 표정은 무섭지 않고 오히려 귀엽고 친근감을 준다.

■ 인정전 좌우로 회랑이 감싸고 회랑 안에는 네모난 널찍한 마당이 있는데, 이 마당이 만조백관이라고 할 때의 '조朝', 백관들이 모여서 왕에게 조회를 하던 뜰 곧 조정이다.

■ 선정전은 '정치를 널리 펼친다'는 뜻을 갖고 있는 편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 다포집이다.

■ 선정전이 공식적인 업무 공간이라면 희정당은 다소 사적인 업무 공간이다. 다시 말해 '여러 신하들을 한가로이 접견하는 곳'이다.

■ 대조전은 왕과 왕비의 침실이자 왕자와 공주의 탄생지였고, 어린 왕자와 공주를 교육하던 곳이었다.

■ 경훈각은 대조전 서북쪽에 있는 단층 건물로 초익공계의 무익공 양식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 성정각의 정문으로 들어서면 건물의 오른쪽에 정면 6칸 측면 2칸의 누마루가 있는데 남쪽에는 보춘정, 동쪽으로는 희우루가 있다.

■ 낙선재는 헌종이 후궁을 위해 마련한 사적인 공간이다. 낙선재에는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의 처소인 석복헌과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의 처소인 수강재가 있다.

■ 정조는 즉위하자 역대 왕과 자신의 시문과 글씨 등 왕과 직접 관련되는 자료들을 보관할 집을 후원에 짓게 하니 이것이 규장각과 주합루다.

■ 옥당은 '옥같이 귀한 집'이란 의미로 국가의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는 곳 혹은 출세가 보장되는 인재들이 모인 곳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 부용정은 후원의 꽃이라고도 불리는데 연꽃 모양을 형상화했다. 부용정 내부에 설치한 창은 팔각형으로, 인간을 의미한다.

■ 영화당에서 나와 왼편 담장으로 두 개의 문이 보이는데, 금마문과 불로문이다. 불로문(아래)은 창덕궁 안에서 돌로 된 유일한 문으로 늙지 않는 문이라는 뜻이다.

■ 궁궐 안의 다른 건물들이 단청과 장식을 화려하게 한 것에 비해 연경당은 단청을 하지 않았다.

■ 취규정(위)의 취규는 "별들이 문장을 주관하는 별자리로 모여든다"라는 뜻이며, 취한정의 '취한'은 "푸른 소나무들이 추위를 업신여긴다"라는 뜻이다.

■ 역대 왕들을 모신 종묘는 최고의 사당 건축이자 가장 숭고한 신전이다.

■ 조선의 종묘는 정면이 매우 길고 수평성이 강조된 독특한 형식의 건물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건축 유형이다. 종묘의 신위 배치도.

■ 신도는 혼령만이 드나드는 길이고 어도는 제사 담당자인 왕과 세자가 이동하는 의례의 길이다.

■ 망묘루는 "사당을 바라보며 선왕과 종묘 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 공민왕의 초상을 모신 사당에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가 한자리에 있는 영정과 공민왕이 직접 그렸다고 전해지는 <준마도>가 봉안되어 있다.

■ 정전은 신위를 모신 신실인 감실 19칸, 그 좌우의 협실 2칸의 박공지붕 건물로 왕의 신위가 늘어나면서 계속 증축되었다.

■ 칠사당은 왕실 제례 과정에 관여하는 7명의 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 영녕전은 제2대 정종이 사망하자 그의 신위를 봉안하기 위해 정전의 서쪽에 세운 별묘다.

■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조선시대의 모든 제례 중에서도 가장 격식이 높은 왕실 의례다.

■ 종묘대제는 2012년부터는 1년에 2차례씩 열리는데 '어가 행렬', '영녕전 제향', '정전 제향'으로 나뉘어져 더 품격을 높였다.

■ 남한산성의 남문은 성곽의 서남쪽에 있는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유일하게 문루에 현판이 걸려 있다.

■ 남한산성에 현재 남아 있는 암문은 모두 16개인데, 제6암문은 1637년 한밤중에 습격해온 청군을 크게 물리친 곳이라 하여, 이 부근을 '서암문 파적지'라고 부른다.

■ 장대는 전쟁 때나 군사훈련을 위해 마련한 장수의 지휘소여서 성내의 지형 중 높은 곳, 즉 지휘나 관측이 용이한 곳에 설치한다.

■ 장경사는 1894년 갑오경장으로 승군제도가 없어질 때까지 전국에서 뽑힌 270여 명의 승려가 교대로 산성을 보수하거나 경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 성벽을 보면 남한산성이 천혜의 요새라는 사실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오죽 했으면 '천작지성'이라고 했을까?

■ 동문은 일반적인 성문 구조로 되어 있으며, 거칠게 다듬어진 자연석을 막돌쌓기로 하고 면만 바르게 쌓았다.

■ 현절사는 병자호란 때 적에게 항복하기를 끝까지 반대했던 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우국충절을 기리는 사당이다.

■ 행궁은 정궁에 대비되는 용어로 왕이 궁궐을 벗어나 거둥할 때 머무는 별궁 또는 이궁, 임시궁궐을 말한다. 남한산성 행궁 배치도.

■ 좌승은 '앉아서 이긴다'라는 뜻으로 반드시 이길 만한 계책을 써서 적을 물리친다는 의미다. 남한산성 행궁 내의 좌승당.

■ 금서루는 공산성 답사의 시작이다. 원래 그 터만 남아 있었는데 성내로 진입하는 차도로 이용되다가 1993년에 복원되었다.

■ 공북루는 공산성의 북문이다. 옛 망북루의 터에 신축한 것으로 강 사이를 왕래하는 남북 통로의 관문이다.

■ 송산리 고분군은 나지막한 구릉에 있는데, 이곳은 예부터 '송산소'라고 불리던 곳이다.

■ 무령왕릉의 구조는 단순한데, 자연 암반을 파내어 공간을 만든 뒤에 벽돌을 쌓은 것이다. 무령왕릉 내부 모습.

■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108종 2,906점에 이르고 있으며 국보로 지정된 유물만도 12점에 달한다. 위에서부터 관모, 금제 뒤꽂이, 왕비 귀걸이, 왕비 금동 신발.

■ 부소산은 해발 100미터 정도의 나지막한 구릉으로 이곳에 고구려 군사를 방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왕궁과 시가를 방비하는 최후의 보루였던 부소산성을 건설했다. 부소산성 입구.

■ 능산리 고분군은 그 많은 고분 가운데 부여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봉분이 비교적 잘 남아 있고, 규모면에서도 큰 축에 드는 무덤들이 모여 있다.

■ 정림사지에서는 여러 시대에 걸친 유물이 출토되었지만, 그중에서 정림사지 탑은 백제 시대의 부여를 대표한다.

■ 왕궁리 오층석탑은 익산의 미륵사탑을 본떠서 만든 백제계 석탑으로 높이 9미터, 기단 면석에 두 탱주를 갖추었다.

■ 동서로 172미터, 남북으로 148미터에 이르는 미륵사터에는 서석탑(위), 1993년에 복원된 동석탑, 당간지주 2기 등이 남아 있다.

■ 서석탑 해체 과정에서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유물들이 발견되어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해체 보수 중인 서석탑.

■ 하회마을의 물길이 S자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학자들은 S자보다는 태극 모양을 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하회마을 전경.

■ 양진당은 풍산 류씨의 대종가로 문중의 대소사가 이곳에서 논의되었다. '입암고택' 현판은 입암 류중영을 지칭한다.

■ 충효당은 서애 류성룡의 종택으로 하회마을을 대표하는 가옥이다. '서애종택'이라고 부르지만, 현재의 충효당은 엄밀한 의미에서 서애 사후에 지은 집이다.

■ 화경당은 원래 만수당으로 불렸는데, 영남의 전형적인 사대부 집의 면모를 보여준다.

■ 염행당은 양진당, 충효당, 화경당과 더불어 하회마을을 대표하는 4대 건축물이다.

■ 작천고택은 양진당, 충효당 사이의 길을 따라 서쪽으로 낙동강을 향한 우측에 있다. 1934년 대홍수로 유실되어 현재는 안채만 남았다.

■ 병산서원은 한국 최고의 서원 건축으로 꼽힌다. 경내에는 복례문, 만대루, 입교당, 동재, 서재, 고직사, 장판각, 내삼문, 존덕사, 전사청 등이 있다.

■ 관가정은 풍수적으로 지맥이 흘러드는 위치에 있는데, 관가정이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을 담고 있다.

■ 향단은 검박함과는 거리가 멀다. 마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과시적 입지, 정면에서 보나 측면에서 보나 3개의 박공면이 강하게 드러나는 등 특이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 서백당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 전통 건축의 대표라 할 수 있으며 양동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다.

■ 심수정은 형을 위해 벼슬을 마다하고 노모 봉양에 정성을 다한 이언적의 동생 이언괄을 추모해 지어진 정자다.

■ 안락정은 양동마을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앞쪽에 툇마루를 둔 '일一' 자형의 평면집이다.

■ 옥산서원은 '동방오현'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이언적을 배향한 서원이고, 무변루는 끝이 없는 누각이라는 의미로 원래는 납청루였다.

■ 독락당은 정면 칸살이 4칸으로 일반적인 양식을 벗어나 있다. 이언적이 낙향한 이듬해 지어진 건물로 말년을 보냈는데, 옥산정사라고도 불린다.

■ 계정은 정자로 사용되었으며, 계곡의 반석 위에 가느다란 기둥을 세워 쪽마루를 덧댄 특이한 구조다. 편액은 한석봉의 글씨다.

■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은 불교 경전 일체를 한자로 새긴 현존 세계 유일이자 가장 완벽한 불교 문헌 목판 인쇄물이다. 가야산 해인사 입구와 팔만대장경 입구.

■ 목판의 양쪽에 새겨졌던 불전들은 원래 강화도의 선원사에 보관되었으나 1398년에 한양의 지천사를 거쳐 현재의 해인사로 이관되었다. 강화도 선원사터.

■ 일본은 1502년 오키나와 슈리성 밖의 원감지라는 연못에 건물을 짓고 고려대장경을 보관하기도 했다.

■ 유능한 각자공 1명이 경판 2장을 만들기도 어려웠을 텐데, 팔만대장경을 만들기 위해 동원된 연인원은 무려 100만 명이 넘는다.

■ 「팔만대장경」은 몽골군의 공포에서 고려인이 살아남아 싸워야 한다는 신념을 심어주었다. 해인총림海印叢林 입구.

■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들은 그 이름과는 달리 무슨 창고나 헛간처럼 생겼기 때문에 그 외관을 보고 실망하기도 한다.

■ 법보전은 앞의 건물과 같은 규격으로 나란히 놓여 있는데, 중앙 칸은 안쪽 높은 기둥열이 있는 곳까지 벽으로 되어 비로자나불상과 양측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봉안했다.

■ 「팔만대장경」은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목각판에 옻칠을 했다. 따라서 내구성이 강해 75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부패하거나 쥐와 좀벌레가 갉아먹는 일이 거의 없다.

■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정치 공간을 만들기로 했는데, 수원은 한양과 남쪽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상업활동을 위한 도시였다.

■ 정조는 사도세자의 시호를 장헌으로 고치고 어머니의 존호를 혜빈에서 혜경궁으로 높였다. 수원 <화성능행도> 일부.

■ 수원 화성이 다른 성곽과 차별되는 것은 상업적 기능과 군사적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도록 평산성 형태로 설계되었다.

■ 정조는 젊은 실학자 정약용에게 '삼남의 요충이요, 한양의 보장지지로 만세에 길이 의지할 만한 터'인 수원 화성을 건설토록 했다. 한강의 배다리 재현 모습.

■ 거중기는 적은 힘으로 큰 물건을 들어올림으로써 인력을 절약할 수 있고 무거운 물건이 떨어지는 사고로 인한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 수원 화성에는 4개의 성문이 있는데 북문인 장안문과 남문인 팔달문이 가장 크다. 장안문은 건물 높이만 해도 32척9치로 반원형의 둥근 벽체로 벽돌로 축조되었다.

■ 수원 화성에는 적의 집중적인 공격이 예상되는 화서문과 팔달문 근처에 서북공심돈과 남공심돈을 두었고, 동북공심돈은 구릉지에 있기 때문에 치성 위에 구축할 필요가 없어 성벽 안쪽에 독립적으로 원형으로 축조했다. 동북공심돈(위)과 서북공심돈과 화서문.

■ 서장대는 수원 화성에서 가장 높은 팔달산 정상에 있는데, 돌로 쌓은 대 위에 있는 2층 누각이다. 서장대(위)와 서노대.

■ 서포루는 수원 화성 서장대 북쪽으로 약 200미터 거리에 잇는 성곽 시설물이다. 성 몸에 '철(凸)' 모양을 붙여 치성을 만들고 그 위에 집을 지었다.

■ 팔달문은 한양의 남대문이나 동대문과 같은데 문루의 네 귀에 높은 기둥이 없는 것이 다르다.

■ 봉화대는 변방에서 발생하는 군사적인 긴급 사태를 중앙에 급히 알리기 위해 설치된 것이다.

■ 연무대는 전쟁 지휘소로 장수가 장병들을 모아 놓고 훈련을 하거나 지휘하는 곳이다. 그 주변에는 탁 트인 넓은 공터인 활터가 있다.

■ 방화수류정은 전시에 적군 감시와 지휘소 기능을 하면서도 평시에 휴식 공간으로 이용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

 

 

 

posted by 황영찬
2018. 9. 14. 13:58 내가 읽은 책들/2018년도

2018-050 임금의 도시

 

 

 

이기봉 지음

2017, 사회평론

 

대야도서관

SB128708

 

911.0028

이18ㅇ

 

서울의 풍경과 권위의 연출

 

너무나 익숙해서 보이지 않았던

우리 풍경의 재발견!

 

문명은 어떻게 권위를 시각화했는가?

서울의 3단계 풍경은 어떻게 권위를 연출해내는가?

풍경의 아름다움 너머 우리 풍경의 원리를 밝힌다!

 

"주변에서 쉽게 접하는 우리 풍경을 보고도 그 보편성과 특수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아름답다고만 했지 그 아름다움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인식되는지에 대해서는 간과했다."

 

이기봉

 

1967년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에서 태어나 수원 수성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지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 ·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2년 2월부터 2009년 3월까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책임연구원으로 일했으며, 그 후 현재까지 국립중앙도서관 학예연구사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고대도시 경주의 탄생』, 『지리학교실』, 『조선의 도시, 권위와 상징의 공간』, 『평민 김정호의 꿈』, 『조선의 지도 천재들』, 『근대를 들어올린 거인 김정호』, 『땅과 사람을 담은 우리 옛 지도』, 『슬픈 우리 땅이름』, 『천년의 길』 등이 있다.

 

차례

 

프롤로그 - 우리 풍경의 뿌리를 찾아서

 

1 임금의 도시, 서울의 탄생

    성씨가 다른 새로운 왕이 즉위하다 / 고려의 흔적을 지워라
    최후의 수단, 천도 / 천도를 둘러싼 임금과 신하의 줄다리기
    사는 곳이 곧 권력이다 / 명분을 가진 자가 모든 걸 가진다
    태조의 승리 / 마침내 태어난  '임금의 도시'

 

2 보이지 않는 서울의 풍경

    신도시 한양의 청사진 / 궁궐 앞에 주작대로 대신 시장이 있다?
    계승과 단절, 두 마리 토끼를 잡다 / 조선시대에 태평로는 왜 없었을까?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경복궁 / 과거 보러 가는 선비의 한양 구경
    시야를 통제하며 3단계 풍경을 만들다 / 나라의 근본, 종묘와 사직
    골육상쟁의 기억을 품은 창덕궁 / 세종의 효심, 창경궁
    왕기가 서린 경희궁 / 임금의 풍경을 연출하라

 

3 우리 전통건축물은 왜 작을까?

    위치가 바뀌면 풍경이 바뀐다 / 외국의 건축물은 왜 이리 거대한 걸까?
    하늘을 찌를 듯한 삼국시대의 탑들 / 권위를 시각화하는 또 다른 방법

 

4 한국 풍경의 기원을 찾아서

    서울 풍경은 유교 때문에 생긴 것일까? / 법흥왕, 죽음까지 혁신하다
    가장 오래된 3단계 풍경 / 풍수는 지배자를 위한 사상이었다
    명당은 살기 좋은 땅일까? / 지배와 피지배의 살풍경이 남아 있는 풍수
    땅의 논리인가, 하늘의 논리인가? / 하늘, 배경으로 밀려나다
    이데올로기의 풍경

 

5 장소가 만든 역사의 풍경

    거대도시 경주의 풍경 / 그 많던 높은 목탑들은 어디로 갔을까?
    낮은 석탑이 만든 감은사의 3단계 풍경 / 목탑에서 석탑으로
    궁예, 견훤, 왕건, 그리고 도시 삼국지 / 개성은 최초의 풍수 도시였다

 

6 임금과 공간의 정치학

    고려는 풍수 때문에 망한 걸까? / 위태로운 왕권과 훈요십조
    천도가 아니면 새 나라를?묘청의 서경천도운동 / 고려 최후의 시도
    풍수는 어떻게 한반도의 문화유전자가 되었나

 

7 방어력 없는 성곽의 비밀

    선조, 도성을 버리고 피난 가다 / 한양은 왜 무방비로 함락되었을까?
    명당은 방어에 유리할까? / 서울 성벽은 왜 해자가 없고, 낮을까?
    왜 높은 성벽을 만들지 않았을까?
    산이 드문 곳에는 높은 건물을 짓고, 산이 많은 곳에는 낮은 것을 만든다
    소 잃고 산성 고치기 / 산성의 나라가 된 조선

 

8 감시와 통제의 밤 풍경

    보신각의 종소리는 아름다웠을까? / 음모의 밤 / 야경꾼과 딱다기
    물시계는 누구를 위해 흘렀을까?

 

9 사라진 정원의 풍경

    우리나라에는 왜 정원이 별로 없을까? / 임금의 정원
    높고 웅장하게 솟은 경회루 / 조선의 미니멀리즘, 향원정
    골짜기에 숨겨진 절경, 창덕궁 후원 / 손가락이 아닌 달을 봐야 정원이 보인다
    외부로 펼쳐진 정원 / 가공하지 않은 자연 속 정원

 

에필로그 - 보이지 않는 우리 풍경을 어떻게 볼 것인가

 

 

태조 이성계의 어진

고려시대 홍건적과 왜적을 물리치며 불패의 무장으로서 명성을 쌓아가던 이성계는 자신을 따르는 강력한 사병세력을 기반으로 신진사대부의 지원을 받아 마침내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왕위에 오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왕조를 지키는 것이다. 새로 왕위에 오른 이성계에게는 새로운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해야 하는 과제가 놓여 있었다.

태조 왕건상

개성 현릉(왕건릉)에서 발견된 태조 왕건상. 머리에는 황제가 쓰는 통천관을 쓰고 있다. 불상 형식으로 제작된 왕건상은 불교의 나라였던 고려의 운명과 궤를 같이 했다. 원래 이 상은 개성 종묘에 봉안되어 제례에 쓰였는데, 이성계의 명에 의해 종묘와 함께 마전군으로 옮겨졌다가 유교예법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왕건릉에 매장되었다. 1992년 능 공사 중에 발견되어 북한의 국보로 지정되었다.

고려의 중심 개성

① 1720년쯤의 개성 모습(「광여도」). ② 공민왕릉. ③ 선죽교. 송악산을 등지고 세워진 개성은 제1의 명당이라고 불렸으며, 몽고의 침입 때문에 강화도로 옮긴 기간을 제외하고 왕건이 도읍한 이래 400여 년간 고려의 수도였다. 이성계가 모셨던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묘 등 도시 곳곳이 왕씨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또 이성계의 즉위를 반대하다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한 정몽주처럼 왕위를 찬탈한 이성계에 대한 반감이 상당했다. 이와 같이 개성은 여전히 고려의 도시여서 이성계에게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성계는 이를 극복하고 성공적인 왕조를 열기 위해 천도를 추진했다.

개성 첨성대와 서운관

고려시대 하늘을 관측했던 첨성대는 서운관에서 관리했다. 서운관은 하늘을 관측하고 절기를 측정하는 업무를 봤다. 서운관은 천문과 지리 현상을 모두 관장하고 그에 따른 길흉까지 점치는 기관이었다.고려가 쇠약해지면서 천도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질 때 큰 역할을 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도 존속하다가 세종 때에 관상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 1392

○ 1392.7.17 이성계 왕위 등극

 

    태조 : 왕조의 정당성과 왕권 강화를 위해서 천도가 필요하다. 한양으로 천도 시도.

    배극렴 · 조준 : 반대. 궁궐과 성곽을 짓지 않고 수도부터 옮기면 백성들이 곤란해질 것입니다.

 

● 1393

○ 1393.1.2

    태실중고사 권중화

    계룡산으로 천도 건의

 

    정요 : 왕비가 편치 못하고, 초적이 나타났으니

              (계룡산 행차를 중단해야 합니다).

    태조 : 내가 하지 못하면 후손들은 더욱 할 수 없을 것이다.

○ 1393.2.10

    계룡산 수도 건설 공사 시작

○ 1393.12.11

    하륜의 반대 상소로 계룡산 수도 이전 백지화

 

    하륜 : 계룡산은 국토에서 남쪽에 치우쳐 있고, 풍수상 '반드시 망할 땅'입니다.

              대신 무악을 천거합니다.

 

● 1394

○ 1394.8.11

    태조 무악 시찰. 서운관 관원과의 논쟁

 

    서운광 관원 : 무악은 좋지 못합니다. 개성에서 궁궐을 다시 짓는 게 좋습니다.

    태조 : 개성이 지기가 쇠했다고 상소를 올린 곳이 서운관이다. 다른 곳은 어디가 좋은가?

    서운관 관원 : 가장 좋은 명당은 개성이고, 그다음이 한양입니다.

○ 1394.8.12

    태조, 한양으로 행차

 

    태조 : 형세를 보니 도읍으로 삼을 만하다. 조운이 잘 통하고, 사방으로 거리가 균등해 나라 ㅇㄴ영에 편리할 것이다.

    무학대사 : 사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도읍이 될 만합니다.

    신하들 :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 한다면 한양이 좋습니다.

 

    정도전 : 국가의 흥망은 인간 세계에 있는 것이지 지기의 성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석린 : 무악은 수도로 삼기에 너무 좁습니다.

    이직 : 수도 이전은 하늘과 백성들을 설득시킨 후에 가능합니다.

○ 1394.8.24

    한양으로 천도 확정

○ 1394.10.25

    태조 한양으로 천도 선언

○ 1394.10.28

    한양에 도착하여 집무 시작

개성 성균관

공민왕 때 유학을 전담하게 된 성균관은 조선 건국의 핵심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을 대거 양성한다. 나라의 흥망이 풍수에 있지 않다고 말하는 정도전은 강경한 유학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정도전을 제외한 다른 개국공신들은 오랫동안 이어온 풍수를 판단 근거로 인정함으로써 신진사대부 역시 풍수의 영향력 안에 있음을 보여준다.

「한양도성도」

18세기 후반 편찬된 『여지도』에 수록된 지도로 시각적으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궁궐과 종묘사직, 산세, 간선도로 등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지도를 보면 한양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를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복궁

종묘

사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남대문(숭례문)

동대문(흥인지문)

북대문(숙정문)

수선전도로 본 한양의 도시 설계

한양은 북쪽으로는 북악산, 남쪽으로는 남산, 서쪽으로는 인왕산, 동쪽으로는 낙산에 둘러싸여 있고, 청계천이 한가운데로 지나가는 지형이다. 조선 건국 때 정궁으로 지어진 경복궁이 왼쪽에 자리잡고 있고, 종묘는 궁궐 왼쪽에 사직은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동대문과 서대문을 잇는 동서대로는 직선으로 곧게 나 있는 반면, 남대문에서 시전으로 이어지는 남대문로는 활처럼 휘어져 있다. 서대문은 일제에 의해 철거되어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육조거리 : 정무를 담당한 여섯 부서,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와 한성부 관청이 있었다.

 

운종가 :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이는 거리라는 의미로 국가에 물자를 보급하는 시전이 설치되어 중심 상업 지역 기능을 했다.

한양과 북경의 도시 구조 비교

두 도시 모두 『주례』「고공기」를 바탕으로 건설되었지만, 구조에서 확연한 차이를 볼 수 있다. 북경의 경우, 한눈에 보기에도 직사각형과 좌우대칭의 형태로 엄격하게 '좌묘우사', '전조후시'의 원리가 적용되어 있다. 자금성에서 천안문을 거쳐 외성 정문인 영정문까지 마차 아홉대가 나란히 지날 수 있는 대로가 직선으로 놓여 있다. 반면 한양의 경우 경복궁이 중앙에 위치해 있지 않고, 시장이 경복궁 앞에 위치해 '전조후시'의 원리가 지켜지지 않았다. 또한 경복궁과 남대문까지 직선대로를 만들지도 않았다.

숭례문(남대문)에서 광화문 가는 길

숭례문에서 경복궁으로 가기 위해서는 직선도로 대신 두 번에 걸쳐 꺾어지는 복잡한 길로 돌아가야 했다. 숭례문에서 출발해서 지금의 종로인 운종가에서 한번 꺽고, 육조거리 앞에서 다시 한 번 꺽어야 경복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1900년대 남대문로

1900년대 구한말 당시 남대문로의 모습. 임금이 사는 궁과 정문인 남대문까지의 길이 휘어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건물들 너머로 북악산이 보인다. 낮은 초가집과 기와집으로 이뤄진 풍경에서 북악산은 지금보다 훨씬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광화문광장(육조거리)에서 본 경복궁

어느 대문에서 어느 길로 와도 보이지 않던 경복궁이 육조거리로 들어서는 순간 북악산과 함께 시야에 펼쳐진다.

육조 거리에서 바라본 광화문 옛 풍경

고층건물이 즐비한 오늘날 과거의 광화문 풍경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현대의 흔적을 지우고 조상들이 보았을 권위의 풍경을 그려보아야만 우리 풍경을 이해할 수 있다.

종묘의 3단계 풍경

하늘에서 종묘를 내려보면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과 정전의 방향이 일치하지 않고 틀어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진입로에서부터 외대문과 보현봉을 일치시키기 위해 진입로가 정북이 아니라 서북북 방향을 향해 있다.

「동궐도」로 본 창덕궁 구조

정문과 정전이 일직선상에 위치한 일반적인 궁궐들과 달리 창덕궁은 특이하게 돈화문에서 인정전까지 진입로가 어긋나 있다. 돈화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고, 금천교를 건너 왼쪽으로 꺽어야만 정전인 인정전이 나온다. 이렇게 조성한 이유는 창덕궁 앞에 종묘가 있어서 3단계 풍경을 위한 진입로 조성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창덕궁의 독특한 궂는 3단계 풍경을 만들기 위한 노력의 결과이다.

 

돈화문 안의 보현봉

돈화문 앞에서 바라보면 문 틀 안에 보현봉이 한 폭의 그림처럼 자리잡고 있다. 서울이 산에 둘러싸인 지형이라 해도 이런 멋진 광경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돈화문을 보현봉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세웠으며 이 문이 엄밀한 구도 하에 건축되었음을 보여준다.

함춘원 방향에서 본 창경궁의 3단계 풍경

창경궁은 이미 지어진 종묘와 창덕궁 때문에 3단계 풍경을 연출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종묘와 창덕궁처럼 하늘산을 보현봉이 아닌 인왕산 왼편의 안산으로 잡아 창덕궁과 전혀 다른 새로운 풍경을 구현했다.

「동궐도」속 창덕궁과 전경

창덕궁과 창경궁은 쌍둥이처럼 바로 옆에 붙어 있다. 창덕궁은 정전, 정문, 진입로가 남향이지만 창경궁은 동향이다. 홍화문 앞부터 함춘원의 언덕이 시작되기 때문에 나중에 지어진 창경궁은 지형의 제약을 받았고, 그 결과 3단계 풍경의 하늘산도 바뀌었다.

경희궁의 3단계 풍경

경희궁 역시 창덕궁과 마찬가지로 숭정문 방향과 진입로를 조정해서 인왕산을 배경으로 하는 3단계 풍경을 구현하고 있다.

거리에 따른 북악산과 광화문 비율 변화

조선시대에 없었던 태평로에서 광화문을 바라보면 북악산에 비해 경복궁은 매우 작게 보인다. 궁궐이 초라하게 보인다는 것은 임금의 권위가 약화되는 일이다. 이 때문에 한양의 도시계획자들은 하늘 - 산 - 궁이라는 세 가지 요소의 적절한 비율을 유지하기 위해 숭례문에서 경복궁까지 직선도로를 만들지 않았다.

근정전의 앞뜰

근정전의 아름다운 자태도 유심히 살펴봐야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앞뜰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앞뜰의 규모에 따라 근정전의 크기와 느낌이 달라지기 때문에 너무 넓어서도 좁아서도 안 된다. 근정전의 크기에 비례해서 앞뜰도 조성되었다. 거대한 북악산이 근정전과 일치되어 근정전 뒤로 숨어들어 간 것처럼 보이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

5층 목조건물인 법주사의 팔상전은 상륜부의 높이까지 22.7m로 조선시대 가장 높은 건축물이다.

① 자금성 태화전과 ② 오사카성 천수각

자금성의 정전인 태화전은 3단 월대 때문에 시각적으로 경복궁 근정전보다 훨씬 거대하게 다가온다. 오사카성의 천수각 역시 높은 축대 위에 지어져 우뚝 솟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처럼 축대나 언덕 위를 이용해 건축물을 더욱 높게 느껴지게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세계의 거대건축물

① 태국의 왓아룬 사원. ② 티베트의 포탈라궁. ③ 이탈리아의 밀라노 대성당. ④ 인도의 타지마할. ⑤ 이집트의 피라미드. 아름다운 세계의 거대건축물의 감상은 잠시 뒤로 하고 그 너머를 살펴보자. 공통적으로 주변에 다른 높은 자연물 혹은 인공물이 없다. 우리에게 익숙한 건물 너머 우뚝 솟은 산이 있는 풍경은 세계적으로 보면 결코 보편적인 풍경이 아니다.

황룡사 복원도

황룡사 9층 목탑은 낮게 잡은 추정치조차 80m에 가까워서 23m를 넘지 못했던 조선시대 어떤 건축물과 비교해도 압도적인 높이를 자랑한다. 하지만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되어서 실제 모습이 어땠는지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남아 있지 않지만 삼국시대에는 높은 목탑들이 많이 건축되었다.

복원된 미륵사지 석탑

미륵사지는 목탑을 중앙에 두고 두 개의 석탑이 양옆에 세워졌다. 복원된 석탑의 높이는 27.7m이다. 중앙에 있었던 목탑은 50m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사는 황룡사와 같은 시기 세워졌는데 미륵사 목탑을 세웠던 백제의 기술자가 황룡사9층목탑에도 참여하였을 것이다.

인왕산에서 본 경복궁

인왕산 기슭에 위치한 배화여자대학교에서 내려다본 서울 시내 전경이다. 지금은 고층건물에 가려져 잇어 상단부만 보이지만 과거에는 경복궁 전체와 내부까지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경복궁처럼 다른 곳에서 궁궐 안을 조망할 수 있다는 것은 보편적인 모습이 아니다. 임금의 권위를 손상시킬 뿐 아니라 경비 등 안전상 문제까지 있다. 이처럼 궁궐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장소가 궁궐 가까이에 존재한다는 것은 여러 모로 일반적인 경우라고 할 수 없다.

종묘 정전

종묘는 유교사회였던 조선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유교에서 조상에 대한 제사만큼 중요한 의식은 없었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가장 먼저한 일 역시 종묘를 짓는 일이었다. 그래서 역대 왕과 왕비들의 신주를 모신 종묘는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로 여겨졌다. 신주가 늘어남에 따라 계속 증축하였고, 그 결과 지금처럼 옆으로 길다란 모습이 되었다.

경주 대릉원의 황남대총

고대로 갈수록 고분의 크기는 곧 지배자의 권력과 비례했다. 대릉원에는 왕과 왕비,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대형고분이 총 23기가 모여 있다. 이 고분들은 신라가 지방 지배를 강화하여 고대국가체제로 넘어가면서 지배층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알려준다. 이 중 황남대총은 대릉원의 고분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누구의 무덤인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두 개의 무덤으로 이루어져 잇으며 남분은 남자, 북분은 여자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네페리티티 흉상

아크나톤이 주도한 개혁의 영향을 받은 아마르나 예술의 대표작이다. 측면얼굴을 보여주는 기존 이집트 예술의 정통을 깨고 사실주의 묘사가 두드러진다. 아크나톤의 개혁이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 · 문화 · 사회 전반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준다. 관습법에서 율령의 통치체제로 발돋움하는 법흥왕 시기에도 사회 전 분야에서 변혁의 바람이 불었을 것이다.

감은사지 전경

감은사는 문무왕 수중릉으로 알려진 대왕바위 근처에 있다. 과거 감은사지의 진입로는 현재 논밭과 도로로 변해서 정면 방향을 제대로 감상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진입로를 지나쳐서 감은사지 오른쪽에 만들어진 주차장을 통해 절터로 올라가 탑을 감상하고 돌아간다. 감은사지뿐만 아니라 많은 유적지가 이렇게 주차장에서부터 관람을 시작하게끔 동선이 짜여 있다. 문화유산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문화재 자체도 중요하지만 문화재가 만들어내는 풍경을 감상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절의 건축자가 의도했던 대로 원해 정문 진입로에서부터 문화재를 감상하는 것이 중요하다.

탑평리 7층 석탑(위)과 신세동 7층 전탑(아래)

탑평리 7층 석탑은 남아 있는 신라 석탑 중 가장 높은 탑으로 높이가 14.5m이다. 신세동 7층탑은 벽돌로 쌓아올린 높이 17m의 전탑으로 현존하는  신라 탑 중 가장 높다. 거대목탑들이 많았던 삼국시대와 달리 통일신라 이후에는 10m 안팎의 3층 석탑이 주류가 되었다.

감은사지 3층 석탑

신라 최초의 3층 석탑인 감은사지 3층 석탑은 당시 경주시내에 세워졌던 높은 탑들에 비해 작은 규모이다. 경주를 벗어나 산이 배경에 놓이면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석가탑

감은사지 3층 석탑과 석가탑은 같은 3층 석탑이지만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초기 3층 석탑인 감은사지 3층 석탑은 화강암을 사용한 목탑 양식으로 육중함과 웅장함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 8세기 중반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불국사의 석가탑은 아름다운 비례와 날렵함을 구현했다.

① 철원 도성 복원도

궁예는 중국 도성을 본따 평야지대인 철원에 도성을 세움으로써 자신의 웅대한 이상을 담아냈다. 사각형의 도성과 직선으로 뻗은 도로망에서 알 수 있듯이 한양보다 중국의 도성과 훨씬 닮아 있다.

② 후백제의 견훤이 수도로 삼았던 동고산성

견훤의 궁궐이 있었던 동고산성은 평야지대인 철원과 달리 낮은 산정상에 자리를 잡고 있다. 삼국시대와 후삼국시대의 많은 도시들이 동고산성처럼 방어에 유리한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③ 위에서 내려다 본 경주 시가지 원경

천년고도 경주는 풍수적으로 명당과 거리가 멀다. 경주는 산과 멀리 떨어져서 하천을 낀 평야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평야지대에 입지한 도시가 세계적으로 꽤 있는 편이지만 방어에 좋은 구릉에 만들어진 도시가 더 많았다.

송악산을 등지고 있는 만월대터

왕건이 도읍한 개성은 여러모로 한양과 많이 닮아있다. 고려 제일의 명당으로 꼽힌 개성은 사실 궁궐이 들어서기에 지형이 고르지 못했는 데 높은 축대를 사용해 이를 해결하였다. 만월대 너머로 송악산이 보이면서 서울에서 볼 수 있는 3단계 풍경과 같은 구도임을 알 수 있다.

개성의 외성과 황성, 궁성의 구조

개성은 지형에 맞게 동서대로와 남북대로를 만들었다. 외성의 남대문인 희빈문에서 출발해서 남북대로를 따라 황성의 동문인 광화문을 서쪽으로 들어가 북쪽으로 꺾기까지 만월대의 정궁을 볼 수 없다. 지형부터 성과 도로망까지 한양과 유사한 구조임을 알 수 있다.

일월오봉도

용상 뒤에 놓는 병풍으로 해와 달은 왕과 왕비를 상징한다. 임금이 용상에 앉았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그림이다. 다양한 자연물을 이용해 임금의 권위를 표현했으며, 권위를 시각화하려는 싣의 일환이다.

도선국사

신라 말에 할동했던 도선은 풍수지리의 대가였다. 훈요십조에서 볼 수 잇듯이 왕건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고려시대 활발했던 임금풍수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 왕건(942년)

서경에서 3년마다 백일 이상 머무를 것(훈요십조)

호족 사이의 위태로운 왕권

 

● 숙종(1099년)

김위제의 주장에 따라 남경 재창설

여진의 성장

 

● 인종(1135년)

묘청의 난(서경 천도 운동)

이자겸의 난과 금나라의 성장

 

● 공민왕(1360년)

한양과 백악으로 시도

원나라의 쇠퇴와 외적 침입

 

부산진순절도

임진왜란의 시작을 알리는 왜군의 부산진 침략을 그린 기록화. 영조 때 화가 변박이 그렸다.

한양 도성 성곽

18km에 이르는 한양 성곽은 언뜻 보기에는 단단한 방어 준비로 보인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차례 큰 전쟁에서 서울의 성곽은 전투 한번 제대로 치루지 않고 함락됐다.

콘스탄티노플 성벽과 단면도

동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명성이 높았다. 방어를 위해 해자와 삼중의 성벽을 갖추고 있었으며 성벽 높이는 10미터가 넘었다. 성벽을 넘기 위해 다양한 공성도구가 사용되었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그러나 1453년 콘스탄티노플은 20톤 무게의 초대형 우르반 대포를 동원하고 방어군보다 열 배가 넘는 군사를 동원한 오스만 제국에 50일 넘는 공방전 끝에 마침내 함락된다.

옹성이 축조된 흥인지문 성벽

동대문(흥인지문)은 4대문 중 유일하게 옹성이 축조되어 있지만 실제 방어를 위해서가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가 강했다. 풍수에서 볼 때 서울은 동쪽이 약해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이름에 之를 넣어서 4자로 짓고, 옹성을 쌓았다.

중국의 산해관 성벽

만리장성 동쪽 끝에 위치한 산해관은 천하제일관이라는 현판대로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던 청나라조차 넘지 못한 요새였다. 높이 14m에 달하는 성벽을 자랑하는 산해관을 청나라는 무력으로는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의 협력으로 간신히 통과할 수 있었다.

오사카성의 해자

넓은 해자는 성벽과 함께 평지에 위치한 성의 방어력을 높이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해자는 성벽으로의 접근성과 기동성을 떨어뜨리는데,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너비와 깊이를 갖추어야 한다.

풍납토성

풍남토성은 발굴 초기에는 도성을 방어하는 작은 토성 정도로 여겨졌다. 그러나 추가 발굴조사를 통해 많은 유물과 함께 10m가 넘는 토성과 해자가 발견되면서 거대한 규모가 드러났다. 현재는 백제의 수도 위례성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구려가 쌓았던 백암산성

중국과 잦은 전투를 벌여야 했던 고구려성은 높은 성벽과 치 같은 방어력을 높이는 구조로 축조되었고, 중국 요령성의 백암산성처럼 지형을 최대한 활용해 지어졌다.

경천사지 10층 석탑

충목왕 때 세워진 경천사지 10층 석탑은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화려하고 장식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원나라의 부마국이었던 고려는 사회 전반에서 원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이런 상항에서도 풍수의 전통은 뿌리 깊게 자리 잡아 풍수에서 파생된 건축원리가 조선까지 이어진다.

한양도성과 동일한 도시 원리의 낙안읍성

낙안읍성의 구조는 한양과 동일한 도시원리로 그대로 옮겨놓았다. 남문 밖 진입로에서부터 걸어오면 금전산이 남문 위로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읍성 안으로 들어서면 읍성에서 궁의 역할을 하는 동헌이 보이지 않는다. T자로 난 대로의 왼쪽으로 꺽어 가다가 동헌 앞에서 비로소 오른쪽을 돌아보면 동헌과 금전산이 하나처럼 펼쳐진 풍경을 볼 수 있다.

남한산성의 성벽

남한산성의 성벽 높이는 평지성에 비해 높지 않지만 산비탈 자체가 성벽 역할을 하면서 높은 방어력을 가지게 해준다.

남한산성 행궁

병자호란으로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조선은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산성 내부에 행궁을 지으면서 장기항전을 준비했다.

제야의 종 행사

오늘날 제야의 종 행사는 지나간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축하하는 송구영신의 상징적인 행사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조선시대 백성들에게 보신각종은 지금보다 훨씬 권위적인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보신각종은 통금 사이렌처럼 출입을 제한하고 시간을 통제하기 위한 기준이었다.

보신각

보신각은 종로 통운교에 설치되어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렸다. 매일 오전 4시에 33번을 타종하고 오후 10시에 28번 타종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때 복구했으며, 현재의 보신각종은 세조 때 주조한 원각사종을 사용하고 있다.

자격루 모형

현재 덕수궁에 있는 자격루는 물받이통과 항아리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장영실이 만들었던 자격루는 일정 시간이 되면 자동으로 종이 치게 설계된 정교하게 만들어진 기계장치였다.

세종 때 만들어진 다양한 발명품

위에서부터 앙부일구, 측우기, 혼천의이다. 조선시대에는 자연현상을 관찰하고 측정하기 위한 다양한 도구가 발명되었다. 발명품들의 가치도 중요하지만 왜 이러한 발명품들이 만들어졌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러한 발명품들은 예측할 수 없던 날씨와 시간과 같은 자연현상을 통제의 영역으로 편입시키고자 한 노력의 일환이다.

웅장한 경회루 전경

경회루는 여러모로 독특한 정원이다. 규모에서 경회루는 중국과 일본의 일반적인 누각보다 훨씬 더 큰 규모를 자랑한다. 또 연못과 연못 안의 섬 모두 사각형의 단순한 구조를 띠고 있는 점 역시 특이하다. 정원을 만들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담을 두르고 나무를 심어 시야를 막고 분리된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경회루 왼쪽으로 보이는 인왕산에서 알 수 있듯이 경회루는 탁 트인 시야를 보여준다.

동양의 대표적 정원들의 사계절

① 졸정원, ② 퇴사원, ③ 고락쿠엔, ④ 금각사. 이 정원들은 연못과 누각을 만들고, 수석 등을 배치해서 장소마다 , 또 같은 장소에서도 시선에 따라, 그리고 시간과 계절에 따라 다른 풍광을 보여준다. 동양의 이상적인 정원은 분리된 공간에 무릉도원의 이상적 모습을 담고자 했다.

성락원

성락원은 철종 때 이조판서 심상응의 별장이었다. 중국과 일본의 정원과 마찬가지로 공간을 세분화해서 시시각각 달라지는 풍경을 구현하고 물줄기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주었다.

경회루 전경

자연경관에 대한 시각적 경험을 극대화하기 위해 경회루의 크기는 커졌고, 대신 자연과 대비되는 인공연못을 최대한 단순하게 만들었다.

경회루 누각에서 본 풍경

경회루에서는 멀리 인왕산과 경복궁의 여러 전각이 한눈에 들어온다. 자연스럽게 다듬어진 기둥이 액자틀 역할을 하는 동시에 인왕산이 한 폭의 그림에 담긴 것처럼 펼쳐진다. 아기자기하게 꾸민 내부의 인공경관을 감상하는 중국과 일본의 누각과 달리 경회루는 탁 트인 외부 경관을 감상하기 위해 만들었다.

조선 3대 누각이었던 촉석루

밀양읍성의 영남루와 평양성의 부벽루와 함께 3대 누각으로 불렸던 촉석루는 남강 옆에 세워졌다. 경회루와 마찬가지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풍경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연의 풍광을 감상할 수 있게 큰 누각을 지었다. 도시입지에 풍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한국은 중국 · 일본과 달리 도시 가까이에 큰 산이 들어서 있었다. 그 결과 공간을 분리해서 인공적으로 꾸미기보다 이미 도시 안에 들어와 있는 자연공간을 이용하는 경관 감상이 더 유행하였다.

향원정

지금의 향원정은 고종 때 지어진 것으로 경회루와 동일한 조성원리가 적용되었다. 높게 솟은 북악산과 인왕산을 가리지 않고 연못과 인공섬을 단순하게 원형으로 만들어서 화려한 자연과 조화를 추구했다.

비원의 여러 모습

위에서부터 차례로 ① 부용정. ② 청의정. ③ 애련정이다. 창덕궁은 평지에 자리 잡은 경복궁과 달리 산줄기 허리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를 이용하여 골짜기 자체를 밖과 단절된 공간으로 사용했다. 비원을 둘러싼 산과 능선이 담장 역할을 하면서 골짜기 안의 화려한 자연 자체가 정원의 풍경이 된 것이다.

세검정도

조선시대 정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자 자체보다 정자가 위치한 공간과 풍경을 살펴봐야 한다. 그래서 밖에서 정자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정자 안에서 펼쳐지는 풍경이 중요하다. 한국 정원이 중국, 일본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는 이유는 도시 가까이에 산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별다른 인공적인 요소 없이도 뛰어난 풍광이 있는 곳에 정자를 세움으로써 풍류를 즐길 수 있었다.

인공정원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안압지

문무왕 때 조성된 안압지는 신라가 망하면서 폐허가 되었다가 1975년 발굴되면서 복원되었다. 굽이치듯이 설계된 연못의 외양은 동양의 인공정원 방식을 잘 보여준다. 굽이치듯이 설계된 연못의 외양은 동양의 인공정원 방식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현재 복원된 안압지는 인공정원에서 가장 중요한 외부와의 차단이 안 되어 있어서 과거의 정취를 온전히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posted by 황영찬
2018. 8. 31. 13:27 내가 읽은 책들/2018년도

2018-048 관동대로

 

 

신정일 지음

2008, 휴머니스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26066

 

981.102

신74ㄱ

 

· · ·

송강 정철이 관동팔경을 노래한 길

한강 지나 대관령 넘어 동해에 이르는 자연과 생명의 길

서울에서 평해까지 구백이십 리 열사흘 길에 깃든 역사와 문화를 되새긴다.

 

서울에서 평해까지 옛길을 걷다

영남대로와 삼남대로를 다 걷고 나니 왠지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그 이유는 평해로, 즉 관동대로를 아직 걷지 못했기 때문이다. 관동대로는 수도 한양과 경기 지방의 동부와 강원도를 이어주는 길이다. 다른 옛길과는 달리 자연이 온전히 보존되어 강바람과 산내음을 즐기며 걸을 수 있었고, 율곡, 신사임당, 김시습, 허균, 정철, 이색 등 역사적 인물들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여러 명의 우리땅걷기 도반들이 함께하여 옛길 걷는 기쁨을 나누기도 했다. 지난 몇 년간 사라진 옛길을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영남대로, 삼남대로 그리고 관동대로를 가슴과 발에 새겼다. 답사를 준비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지도 작업이다. 언제나 해왔던 일인데도 새로 걸어가야 할 곳을 살필 때마다 설렘과 두려움이 함께 한다. 이제 이 길의 끝에서 새로운 길을 생각한다.

 

한강 물길 지나 대관령 넘어 동해까지

지도 위 점선으로 남겨진 옛길 관동대로를 되짚어본다

 

첫날 흥인지문에서 남양주 다산 생가까지 : 밤마다 길을 걷는 꿈을 꾸다

이틀째 마재에서 용문까지 : 매연은 보약이요 소음은 풀벌레 노랫소리이니

 

사흘째 용문에서 원주 문막까지 : 산속이 넓게 열렸으나 지세가 깊이 막혔고

 

나흘째 문막에서 횡성까지 : 원주는 몰라도 문막은 안다

 

닷새째 횡성에서 문재 정상까지 : 돈 되지 않으면 걷지 마소

 

엿새째 평창에서 대화장까지 : 좋은 경치 기묘하여 그려내기 어렵네

 

이레째 진부에서 횡계까지 : 가을비는 지루한 장마처럼 내리지 않는다

 

여드레째 대관령에서 강릉까지 : 한양에서 나귀 타고 이레 걸린 대관령

 

아흐레째 정동진에서 망상 해수욕장까지 : 길은 거역할 수 없는 나의 운명이다

 

열흘째 동해역에서 삼척까지 : 여행을 많이 다닌 사람일수록 준비는 소홀해지고

 

열하루째 삼척 동막에서 호산교까지 : 아는 것이 있어도 아는 척하지 말자

 

열이틀째 삼척 신남리에서 울진 매화리까지 : 타관에서 온 나그네는 바로 길을 묻는 사람

 

열사흘째 매화리에서 평해까지 : 길 끝에서 언제나 또 다른 길은 시작되고

 

 

 

신정일 辛正一

 

그는 여간해서 집에 붙어 있질 않는다.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많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길 위에서 먹고 쉬고 자는 사람이다. 금강, 섬진강, 한강, 낙동강, 영산강을 따라 걸었고, 400개가 넘는 산을 오르내렸다. 최근 몇 년간 조선시대 주요 간선도로 걷기에 집중하여 부산에서 서울에 이르는 구백육십 리 길 영남대로와 해남에서 서울에 이르는 구백이십 리 길 삼남대로를 걸었고, 지난 2007년에는 서울에서 평해에 이르는 구백이십 리 길 관동대로를 열사흘 동안 걸었다. 《관동대로》는 《영남대로》와 《삼남대로》에 이어 '옛길을 걷다' 시리즈를 일단락 짓는 책이다.

혼자 걷는 것만으로는 마음에 차지 않아 20년 전 '우리땅걷기' 모임을 만들어 수천 명의 길동무와 함께 우리 땅 방방곡곡을 걸었다. 그는 요즘 마음이 설렌다. 동해안 해안선을 따라 부산 해운대와 두만강 하구를 잇는 동해 트레일에 대한 생각 때문이다. 아직 북녘땅을 밟는 것이 어렵지만 길만 열린다면 에스파냐의 산티아고 순례 길 못지않은 걷기 코스가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물론 길이 열린다면, 누구보다 먼저 길을 떠날 사람이다.

그간 두 발로 써내려간 책으로는 《다시 쓰는 택리지》(전 5권), 《대동여지도로 사라진 옛고을을 가다》(전 3권), 《한강 따라 짚어가는 우리역사》, 《영남대로》, 《삼남대로》등이 있다. 그 외 《한국사의 천재들》(공저),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공저), 《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 《똑바로 살아라》등 다양한 역사교양서를 집필했다.

 

차례

 

서문  과거와 현재가 살아 숨 쉬는 관동대로

 

첫 구간

 

첫 구간 지도

 

첫날  | 밤마다 길을 걷는 꿈을 꾸다 |

             흥인지문에서 남양주 다산 생가까지

 

              시작이 반이다 | 동대문에서 만난 나그네들 | 십리 갈 길손과 천리 갈 길손의 차이 | 서

              울을 떠나면서 | 신설동을 지나서 가는 관동대로 | 중랑천 아래를 흐르는 냇물 | 망우리

              고개를 넘자 구리에 이르고 | 나그네가 나그네에게 길을 묻다 | 그 이름 높았던 석실서원

              | 내일이면 나는 도로 산으로 가네 | 김씨가 사라진 자리에 조씨가 들어서다 | 평구에서

              총총히 작별 인사 나누면서 | 한강물이 크게 소가 되었으니 덕소 | 길을 나섰으니 돌아갈

               길이 없다 | 다산이 태어난 늠내리

 

이틀째  | 매연은 보약이요 소음은 풀벌레 노랫소리이니 |

                마재에서 용문까지

 

               두 강줄기가 모이는 모서리 | 지난 일 아득해 온통 꿈인데 | 서거정이 극찬한 수종사 | 모

               든 길은 매연과 소음으로 넘쳐나고 | 귀와 눈은 열고 마음은 비우고 | 누 밖에는 긴 강이

               요 들 밖에는 산인데 | 양근나루는 서울로 가던 길목 | 길은 흐르는 강과 같다 | 정다운

               사람과 이별할 적에

 

사흘째  | 산속이 넓게 열렸으나 지세가 깊이 막혔고 |

                용문에서 원주 문막까지

 

                꿈속에서 꿈을 꾸다 | 산속이 넓게 열렸으나 지세가 깊이 막혔고 | 한가한 가운데 일이

                많으니 산 구름이 웃는다 | 남쪽 고개 구름은 북쪽 고개 구름과 잇닿아 있고 | 구둔재를

                넘어가는 길 | 제대로 된 길만 만나도 행복하다 | 재는 넘을수록 높고, 내는 건널수록 깊

                다 | 걱정도 쓰라림도 먹은 뒤 이야기 | 밤이 오면 쉴 곳이 있을 것인가 | 문막다리로 해

                서 문막장 보러 다녔어 | 관리들 욕을 했던 욕바위 | 달래강이 변하여 섬강이 되다

 

나흘째  | 원주는 몰라도 문막은 안다 |

                문막에서 횡성까지

 

                잠이 보약이다 | 조엄의 묘가 있는 작동 | 반가운 나그네는 오면 반갑다 | 십리 밖에 서

                있어도 오리나무 | 들이 적어 부드럽고 근면하다 | 실로 동쪽 지방의 아름다운 고을이다

                | 보부상들이 자주 드나들었던 원주 | 남이 갓 쓰고 장에 가니 투가리 쓰고 간다 | 뭐 할

                라고 걸어가요 | 치악산에 얽힌 전설 | 게으른 놈이 책장 센다 | 달을 보고 그해의 농사

                를 점치다 | 마고 할미 전설이 깃든 들언지 바우 |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만 남았다

 

닷새째  | 돈 되지 않으면 걷지 마소 |

                 횡성에서 문재 정상까지

 

                 어딜 가나 돈타령 | 여기는 전재 정상입니다 | 안흥에서 찐빵을 안 먹고 갈 수 있나 | 그

                 리운 송이버섯 향기 | 골짜기가 좁아 사람 살 곳은 적은데

 

두 번째 구간

 

두 번째 구간 지도

 

엿새째  | 좋은 경치 기묘하여 그려내기 어렵네 |

              평창에서 대화장까지

 

                 할 말은 조금 남겨두라 | 가을 산이 능히 병객을 치료한다 | 옛 역이 깊은 산속에 자리하

                 여 | 나그네 가는 길이 많이 높아서 | 이원수와 주모가 만난 대화 주막 | 율곡의 어머니

                 사임당 신씨 | 조선 중기의 대학자 율곡 이이 | 대화리 서쪽에 있는 아홉사리고개

 

이레째  | 가을비는 지루한 장마처럼 내리지 않는다 |

              진부에서 횡계까지

 

                  길이 끝나는 산에 구름은 잔뜩 끼어 있고 | 이별의 장소, 누정 | 정자는 사람이 모이고

                  머무르는 곳 | 내 속은 온통 따뜻해 | 적멸보궁이 있는 상원사 | 비 내리는 옛길을 걸으

                  며 | 두메산골 횡계리의 탈바꿈 | 대관령의 첫머리 횡계

 

여드레째  | 한양에서 나귀 타고 이레 걸린 대관령 |

                대관령에서 강릉까지

 

                    가을에서 겨울로 들어서다 | 길은 국사성황당에 이르고 | 울면서 넘고 넘어와 웃는 대

                    관령 | 강릉의 산수가 천하의 제일 | 강릉 김씨의 시조 | 길손들이 쉬어가던 제민원 |

                    강릉부 서쪽에 있던 구산역 | 몇 집 되는 초가집은 모두 그림 같아 | 김씨, 치씨, 소나

                    무가 많다 | 관동별곡의 고장 | 허균과 허난설헌 | 걷는 것은 중노동이다 | 채재공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 | 오늘 못 가면 내일 가면 되지

 

아흐레째  | 길은 거역할 수 없는 나의 운명이다 |

                정동진에서 망상 해수욕장까지

 

                    안인진에 있는 해령사 | 바닷가 마을 정동진 | 마음 졸이며 밤재 터널을 지나다 | 맑은

                    물 흐르는 옥계 | 걷는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안다 | 길은 거역할 수 없는 나

                    의 운명이다

 

세 번째 구간

 

세 번째 구간 지도

 

열흘째  | 여행을 많이 다닌 사람일수록 준비는 소홀해지고 |

                동해역에서 삼척까지

 

                    여행, 삶의 또 다른 축복 | 어둠 속에서 길은 시작되고 | 그대여 묵호를 아는가 | 가을

                    풍경이 절정인 죽서루 | 육향산 아래에 있는 척주동해비 | 나그네는 조그마한 일에도

                    감격해야 하고 | 기러기는 저물어도 쉬지 않는다 | 길은 늘 내 삶의 곁에 있고

 

열하루째  | 아는 것이 있어도 아는 척하지 말자 |

                 삼척 동막에서 호산교까지

 

                      공양왕 무덤이 있는 궁촌 |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 | 아름다운 초곡입니다 | 한

                      줄기 저녁노을에 산이 붉게 물든다 | 세월의 무게가 쌓인 돌무더기 | 진달래가 두 번

                      피면 가을날이 따뜻하다 | 믿을 것은 지도뿐인데 | 이 길이 아닌가 보다 | 소공령을

                      지나가는 차마고도 | 오후가 저무는 길가에서 홍시를 따다

 

열이틀째  | 타관에서 온 나그네는 바로 길을 묻는 사람 |

                  삼척 신남리에서 울진 매화리까지

 

                       점선이 보이는 길에 옛길이 남아 있고 | 옛길 그대로 남아 있는 관동대로 | 싼값으

                       로 열남도 되고 열녀도 되고 | 날마다 맛 좋은 집 | 나뭇잎 밟는 소리를 선물로 주다

                       | 남사고를 모신 화산사 | 나그네 베개에 날이 차니 꿈 못 이루는데 | 망양정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니 | 남사고가 태어난 수곡리 | 성류굴이 있는 울진 | 길에서 아는 사

                       람을 만나다

 

열사흘째  | 길 끝에서 언제나 또 다른 길은 시작되고 |

                  매화리에서 평해까지

 

                       11번지가 좋으니 걸을 수 있다 | 망양정이 나라 안에 으뜸가는 정자 | 누가 꽃을 꺽

                       어줄 것인가 | 울진과 평해의 경계 망양교 | 옛길에 새로운 길이 들어서고 | 마지막

                       으로 무를 서리하다 | 비단같이 맑았던 금강 | 소나무 숲 너머로 달이 떠오르고 | 이

                       산해의 유배지 평해 | 월송 황씨의 본고장 월송리 | 중봉 조헌의 유배 생활 | 어딘가

                       로 늘 떠나는 꿈을 꾼다 | 평해는 군이었다

 

우리땅걷기 길벗들의 답사 후기

역사의 길에 발자취를 남기다

정말 원한다면 길을 나서라

 

18세기 진경문화와 북학사상의 산실이었던 석실서원 터

서원부원군 한확의 묘와 다산 정약용 생가가 있는 능내리

양문에서 지평으로 넘어가는 그루(그릇)고개

택풍당 입구 표지석

섬강이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한 김제남 신도비  신도비란 왕이나 고관의 무덤 근처에 세워 죽은 이를 기리는 비석이다. 김제남은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의 아버지로, 광해군 때 외손자 영창대군의 역모사건에 휘말려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인조반정 이후 복권되어 신도비가 세워졌다.

가파른 고개를 올라가 만난 교항리 석조 불두  임진왜란 때 왜병을 물리치기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오지만 토속적인 얼굴과 머리만 따로 지연석 위에 올려놓은 양식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안흥 찐빵 축제를 위해 만들어놓은 섶다리아 징검다리

더운 날씨에 숨이 턱까지 차오르자 나타난 문재 터널

대관령 옛길 표지석

관동팔경의 하나인 삼척 죽서루

척주동해비

삼척 소공대비  황희 정승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월송리 소나무 숲

월송정 관동팔경의 하나로 울진 평해에 있다.

 

 

 

 

posted by 황영찬
2018. 8. 24. 15:48 내가 읽은 책들/2018년도

2018-047 고구려 소수림왕 6 구부의 꿈

 

 

 

김진명 역사소설

2016, 새움

 

대야도서관

SB112084

 

813.7

김78ㄱ  6

 

"공자를 폐하고

한(漢)의 바다를

멸하리라!"

 

미천왕 을불, 고국원왕 사유, 이후 4년,

긴 침묵 끝에 소수림왕이 되어 돌아온 김진명!

진정한 <고구려>의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김진명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베스트셀러로 이름을 세상에 알린 작가이다. 대부분은 작가들이 신춘 문예나 전국적인 규모의 문학상을 통해서 등단한 반면 김진명은 그러한 이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말 그대로 장편 소설 두 권으로 문단에 나타나서 천문학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자리 잡았다. 그 후로 발표하는 소설마다 김진명은 대중적인 호응을 얻으며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그만한 대중적 인기를 가진 작가는 한국에 드문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김진명은 문학적인 평론에 있어서는 그리 큰 작가로서 취급되고 있지는 못하다. '극단적 민족주의자'라거나 '과도하고 거친 상상력의 작가'라는 편이 김진명을 따라다니는 일종의 꼬리표이다. 그러나 작가 자신은 그러한 평가에 신경쓰고 있지 않다. 작가 자신은 "다만, 나는 작품 한 편 한편마다에 목숨을 다해 내가 아닌 우리의 문제를 담아낼" 뿐이라 답하고 있다.

문학이나 습작과는 거리를 가졌던 김진명은 어려워진 가정 형편과 80년대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불행을 당한 형의 영향을 받으며 소설가가 되었다고 한다. 김진명의 문제 의식은 체계적이고 정돈된 서구 사회와 한국 사회의 차이점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의 문제 의식은 한국 사회가 어떻게 하면 보다 나은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인가이다. 그런 점에서 김진명은 과거 한국의 현대사를 뒤돌아보고 다양한 시각에서 문제들을 검토하고자 노력한다. 그 결과 그의 소설들은 통념을 뒤집는 역사 해석과 인물 평가, 사건 이해를 함축한다. 아마 이 과감한 문제 제기와 이해 방식이 독자를 김진명의 소설로 끌어들이는 주요한 흡인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또한 속도감있는 김진명의 문체 역시 독자들이 소설에 몰입할 수 있게 한다.

흥미롭게도 김진명은 가장 좋아하는 책으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꼽고 있다. 김진명은 이 책이 주는 주제 의식뿐만 아니라 글쓰기의 간명함에 감동받았다고 한다. 그만큼 김진명은 간단하고 명확한 글을 쓰고 있으면 그 글은 대중의 지속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김진명의 대표작으로는 한일 관계의 새로운 지형도를 펼쳐 보임으로써 베스트셀러가 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일제의 문화재 약탈과 광개토대왕비의 비밀을 파헤친 『몽유도원(구판 : 가즈오의 나라)』, 금융 대란과 함께 찾아온 우리의 정신 문화 위기와 그 극복을 위한 『하늘이여 땅이여』, 한국 현대사 최대의 미스터리 10.26을 통해서 미묘한 한미 관계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보여준 『1026(구판 : 한반도)』, 고대사 문제를 새롭게 조명해낸 『천년의 금서』,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나라 고구려의 이야기를 최근의 국제정세와 함께 풀어낸 『고구려』 등 다수의 작품이 있다

 

차례

 

한(漢)의 바다

누구의 탓인가

구부의 손바닥

부처의 여인

선비

보이지 않는 것들

복조리나 주어라

흙색 깃발 아래서

불편한 군사

하나뿐인 벗

제왕과 공자

뿌려두었던 씨앗

혼자라도 가겠다

서어산

모용선비의 왕

요서 정벌

두 전쟁

서어산에 오른 불길

왕위에 어울리지 않는다

구부의 군사

 

 

posted by 황영찬
2018. 8. 21. 12:28 내가 읽은 책들/2018년도

2018-046 고구려 고국원왕 5 백성의 왕

 

 

김진명 역사소설

2016, 새움

 

능곡도서관

SF081805

 

813.7

김78ㄱ  5 c. 5

 

"우리 젊은이들이

           <삼국지>를 읽기 전에

    <고구려>를 먼저 알기 바란다."

 

김진명

 

부산 출생. 첫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이후 발표하는 책마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현실과 픽션을 넘나들며 시대의 첨예한 미스터리들을 통쾌하게 해결해주고, 일본ㆍ중국의 한반도 역사 왜곡을 치밀하게 지적하는 그의 작품에 일관되게 흐르는 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사랑이다. 그의 소설들이 왜 하나같이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환호를 받는지, 그의 작품을 읽어본 이들은 알고 있다. 뚜렷한 문제의식을 지닌 작가, 김진명. 그의 작품으로는 우리나라 최고의 베스트셀러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비롯해, 철저한 고증으로 대한민국 국호 韓의 유래를 밝힌 <천년의 금서>,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어떤 역사논리로 이루어졌는가를 명확히 규명한 국보급 대작 <몽유도원>, 충격적인 명성황후 시해의 실체를 그린 <황태자비 납치사건>, 한국 현대사의 최대 미스터리 <1026>, 한국인을 지켜주는 보이지 않는 힘을 그린 밀리언셀러 <하늘이여 땅이여>, 인류를 구원할 마지막 지혜를 다룬 <최후의 경전>, 돈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그려낸 <카지노> 등과 자신의 집필과정을 기록한 작품 <대한민국 7대 미스터리-김진명 작가노트>가 있다.

 

차례

 

꿈은 징조가 아니다

다 묶지 못한 매듭

오늘을 보고, 내일을 보고

사유의 길

사신은 어디로

대륙을 자르다

평곽의 전화

재사의 길

흩어지다

누구를 위한 나라이냐

알 수 없는 소년

해를 쫓는 이유

이상한 장군

구부의 소

약속을 지키다

형제가 건넨 붉은 꽃

최후의 전쟁

태왕은 존재해야 하는가

기다리는 이 없어도

간도, 쓸개도, 염통도

농부가 밉구나

이련의 분노

백성의 왕

 

 

 

 

posted by 황영찬
2018. 8. 17. 13:30 내가 읽은 책들/2018년도

2018-045 고구려 고국원왕 4 사유와 무

 

 

김진명 역사소설

2016, 새움

 

능곡도서관

SF081804

 

813.7

김78ㄱ 4 c. 5

 

"우리 젊은이들이

           <삼국지>를 읽기 전에

    <고구려>를 먼저 알기 바란다."

 

김진명

 

부산 출생. 첫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이후 발표하는 책마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현실과 픽션을 넘나들며 시대의 첨예한 미스터리들을 통쾌하게 해결해주고, 일본ㆍ중국의 한반도 역사 왜곡을 치밀하게 지적하는 그의 작품에 일관되게 흐르는 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사랑이다. 그의 소설들이 왜 하나같이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환호를 받는지, 그의 작품을 읽어본 이들은 알고 있다. 뚜렷한 문제의식을 지닌 작가, 김진명. 그의 작품으로는 우리나라 최고의 베스트셀러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비롯해, 철저한 고증으로 대한민국 국호 韓의 유래를 밝힌 <천년의 금서>,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어떤 역사논리로 이루어졌는가를 명확히 규명한 국보급 대작 <몽유도원>, 충격적인 명성황후 시해의 실체를 그린 <황태자비 납치사건>, 한국 현대사의 최대 미스터리 <1026>, 한국인을 지켜주는 보이지 않는 힘을 그린 밀리언셀러 <하늘이여 땅이여>, 인류를 구원할 마지막 지혜를 다룬 <최후의 경전>, 돈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그려낸 <카지노> 등과 자신의 집필과정을 기록한 작품 <대한민국 7대 미스터리-김진명 작가노트>가 있다.

 

차례

 

모용황

아버지와 아들

고구려의 두 왕자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

동맹제

태자 책봉

왕자의 슬픔

을불의 이유

노장의 귀환

최비의 웅지

동맹군

번개가 가른 성패

눈 위에 서리가 내리고

잘못 뿌린 씨앗

동맹의 끝

모용부의 천하

색다른 태자

모용부의 사유

뜻밖의 구원자

하성 공방

여노

한순간의 분노

창조리의 길

잘못 쏘아진 화살

엇갈린 칼

남자의 사랑

미천왕

 

 

 

posted by 황영찬
2018. 8. 16. 11:25 내가 읽은 책들/2018년도

2018-044 고구려 미천왕 3  낙랑 축출

 

 

김진명 역사소설

2012, 새움

 

시흥시중앙도서관

SA219275

 

813.7

김78ㄱ 3 c. 2

 

"우리 젊은이들이

           <삼국지>를 읽기 전에

    <고구려>를 먼저 알기 바란다."

 

김진명

 

부산 출생. 첫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이후 발표하는 책마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현실과 픽션을 넘나들며 시대의 첨예한 미스터리들을 통쾌하게 해결해주고, 일본ㆍ중국의 한반도 역사 왜곡을 치밀하게 지적하는 그의 작품에 일관되게 흐르는 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사랑이다. 그의 소설들이 왜 하나같이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환호를 받는지, 그의 작품을 읽어본 이들은 알고 있다. 뚜렷한 문제의식을 지닌 작가, 김진명. 그의 작품으로는 우리나라 최고의 베스트셀러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비롯해, 철저한 고증으로 대한민국 국호 韓의 유래를 밝힌 <천년의 금서>,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어떤 역사논리로 이루어졌는가를 명확히 규명한 국보급 대작 <몽유도원>, 충격적인 명성황후 시해의 실체를 그린 <황태자비 납치사건>, 한국 현대사의 최대 미스터리 <1026>, 한국인을 지켜주는 보이지 않는 힘을 그린 밀리언셀러 <하늘이여 땅이여>, 인류를 구원할 마지막 지혜를 다룬 <최후의 경전>, 돈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그려낸 <카지노> 등과 자신의 집필과정을 기록한 작품 <대한민국 7대 미스터리-김진명 작가노트>가 있다.

 

차례

 

서진의 조건

숙신의 반란

두 역적

천하지계

낙랑의 두 여인

최비의 분노

개마대산의 전설

칼을 빌리는 꾀

진군보다 어려운 퇴군

사면초가

혼례 비용

기다림의 끝

물러서는 사람과 끌어내는 사람

서안평

십 년을 기다린 서진

두 개의 깃발, 두 개의 봉화

이상한 선봉군

인과의 힘

숫자의 비밀

신출귀몰한 용병

무계의 계

장창 방진

낙랑 축출

 

 

 

 

posted by 황영찬

2018-042 고구려 미천왕 2 다가오는 전쟁

 

 

 

김진명 역사소설

2016, 새

 

능곡도서관

SF081802

 

813.7

김78ㄱ 2 c. 5

 

"우리 젊은이들이

           <삼국지>를 읽기 전에

    <고구려>를 먼저 알기 바란다."

 

김진명

 

부산 출생. 첫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이후 발표하는 책마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현실과 픽션을 넘나들며 시대의 첨예한 미스터리들을 통쾌하게 해결해주고, 일본ㆍ중국의 한반도 역사 왜곡을 치밀하게 지적하는 그의 작품에 일관되게 흐르는 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사랑이다. 그의 소설들이 왜 하나같이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환호를 받는지, 그의 작품을 읽어본 이들은 알고 있다. 뚜렷한 문제의식을 지닌 작가, 김진명. 그의 작품으로는 우리나라 최고의 베스트셀러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비롯해, 철저한 고증으로 대한민국 국호 韓의 유래를 밝힌 <천년의 금서>,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어떤 역사논리로 이루어졌는가를 명확히 규명한 국보급 대작 <몽유도원>, 충격적인 명성황후 시해의 실체를 그린 <황태자비 납치사건>, 한국 현대사의 최대 미스터리 <1026>, 한국인을 지켜주는 보이지 않는 힘을 그린 밀리언셀러 <하늘이여 땅이여>, 인류를 구원할 마지막 지혜를 다룬 <최후의 경전>, 돈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그려낸 <카지노> 등과 자신의 집필과정을 기록한 작품 <대한민국 7대 미스터리-김진명 작가노트>가 있다.

 

차례

 

숙신

주 대부의 시련

군사 원목중걸

최비의 셈법

한상보도

일진일퇴

밥 푸는 을불

아달휼

을불, 숙신을 얻다

세상에 나온 청패

병법을 역이용하다

옥에 갇힌 재사

대방지계

재사의 정체

번나발과 태수

최비의 초청

동생이 되어버린 모용외

다루를 찾는 부녀

숙신의 세월

창조리의 손님

기상천외의 지략

평양성

 

posted by 황영찬

2018-041 고구려  미천왕 1 도망자 을

 

 

김진명 역사소설

2016, 새움

 

능곡도서관

SF081801

 

813.7

김78ㄱ  1 1

 

"우리 젊은이들이

           <삼국지>를 읽기 전에

    <고구려>를 먼저 알기 바란다."

 

김진명

 

부산 출생. 첫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이후 발표하는 책마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현실과 픽션을 넘나들며 시대의 첨예한 미스터리들을 통쾌하게 해결해주고, 일본ㆍ중국의 한반도 역사 왜곡을 치밀하게 지적하는 그의 작품에 일관되게 흐르는 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사랑이다. 그의 소설들이 왜 하나같이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환호를 받는지, 그의 작품을 읽어본 이들은 알고 있다. 뚜렷한 문제의식을 지닌 작가, 김진명. 그의 작품으로는 우리나라 최고의 베스트셀러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비롯해, 철저한 고증으로 대한민국 국호 韓의 유래를 밝힌 <천년의 금서>,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어떤 역사논리로 이루어졌는가를 명확히 규명한 국보급 대작 <몽유도원>, 충격적인 명성황후 시해의 실체를 그린 <황태자비 납치사건>, 한국 현대사의 최대 미스터리 <1026>, 한국인을 지켜주는 보이지 않는 힘을 그린 밀리언셀러 <하늘이여 땅이여>, 인류를 구원할 마지막 지혜를 다룬 <최후의 경전>, 돈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그려낸 <카지노> 등과 자신의 집필과정을 기록한 작품 <대한민국 7대 미스터리-김진명 작가노트>가 있다.

 

차례

 

작가의 말

 

마성의 등장

을불

낙랑군

떠나는 을불

세 가지 물음

저가와 여노

엉뚱한 상인

재색을 겸비한 여인

모용외

두 영웅, 마주치다

낙랑지계

직찰대

백제의 자객

깊고 깊은 계략

양운거

 

posted by 황영찬

2018-040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① 고조선 · 삼국

 

 

 

서의식 지음

2015, 가람기획

 

대야도서관

SB108495

 

911

뿌298ㄱ2 1

 

쟁점과 사료로 풀어쓴 새로운 한국사

 

풍부한 사료와 충실한 해설로 다시 읽는 한국사

 

고조선의 건국에서 신라의 삼국통일까지

우리 역사의 시원 속으로!

 

사람이 제구실을 하며 올바로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를 하나만 지적해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내력來歷을 거짓이나 꾸밈없이 제대로 기억하는 일이라 할 것이다. 기억상실증에 걸려 부모와 형제, 스승과 친구를 알지 못하고 자기가 누군지 어떤 일을 하던 사람인지도 알지 못한 채 살고 있다면 설령 그 삶이 유복하더라도 그것을 그의 정당한 삶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력을 잘 기억하는 것은 곧 나를 나일 수 있게 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그리고 그 기억은 거짓 없는 사실에 기초한 것이어야만 한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고 해도 진짜라고 믿었던 집안의 족보가 조작되었다면 자기의 뿌리를 의심하고 방황하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일 터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력을 우리는 ‘역사歷史’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역사를 자신의 존망을 걸고 똑바로 알아야만 한다. 역사란 그저 단순한 호기심에서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것이 아니다. 자기 역사를 모르고서는 사람이 제 구실을 할 수가 없고 자기 역사를 잘못 알아서는 남의 삶을 사는 것이 되기에, 정신을 차리고 온갖 힘을 다하여 이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같은 이치로, 우리가 한국 사람으로서 이 시대를 올바로 살아가려면 우리 역사 곧 국사를 바르게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국사는 우리 민족이 지금까지 살아온 내력에 대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개정 신판 간행사」에서

 

지은이

서의식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및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사학과에서 문학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신라의 정치구조와 신분편제』(2010), 『한국고대사의 이해와 ‘국사’ 교육』(2010)이 있다.

 

차례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개정 신판 간행사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초판 간행사

「고조선 · 삼국편」 전면 개정판 머리말

초판 머리말

 

Ⅰ. 원시

        1. 지금 우리가 사는 땅에 인류가 처음 등장하다

           인류의 등장과 현생인류의 시작

        2. 우리 조상들이 요서 지방에 터전을 마련하다

            빗살무늬토기 문화와 동이

        3. 원시의 동이 사회에서 문화가 일어나다

            동이 문화의 발흥

        4. 황하 유역의 세력과 다투며 요서의 예맥 사회가 요동치다

            동이 사회의 변동

        5. 인의를 중시한 예맥 문화가 사방으로 전파되다

            예맥 사회와 문화

 

Ⅱ. 고대 사회의 형성

        1. 청동기 시대가 열리다

            청동기 문화의 성격과 전개

        2. ‘단군사화’가 담고 있는 우리나라 고대사상像

            단군사화의 내용과 그 역사성

        3. 단군왕검이 조선을 건국했으나 정권을 기자에게 넘기다

            왕검조선의 건국과 사회 변동

        4. 기자조선(진국)에서 삼한이 나오다

            기자조선과 진국

        5. 위만조선과 진국의 지배층이 따로 살길을 찾다

            위만조선의 흥망과 예맥 사회의 변동

        6. 예족의 일부가 동진하여 따로 나라를 세우다

            부여 · 예 · 옥저

 

Ⅲ. 고대 사회의 재편

         1. 진국체제의 부활을 꿈꾸며 진한이 신라로 일어서다

             진한과 신라

         2. 고구려가 건국하여 북방의 여러 나라를 통합하다

             고구려의 건국

         3. 백제가 건국하여 마한을 재편하다

             백제의 건국

         4. 변한 제국이 가야 연맹을 결성하다

             가야와 변한

         5. 예맥족 일부가 바다를 건너 일본 열도로 향하다

             예맥족의 일본 열도 도항 이주

 

Ⅳ. 고대의 정치 체제와 사회 구성

        1. 지배층과 피지배층

            제가와 하호

        2. 함께 논의하고 합의하여 정치를 운영하다

            공론·합의 기구와 정치 체제

        3. 통치 계급의 두 부류

            수장층과 종사자층

        4. 이중적 신분 구성

            신라의 골품 제도와 중위제

        5. 지방에 살아도 부에 소속한 사람이 서울 사람이었다

            왕경인과 지방민

 

Ⅴ. 고대 정치의 전개

        1. 부 중심으로 권력을 나누고 지방을 지배하다

            삼국의 부와 부체제

        2.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 체제를 정비하다

            삼국의 율령과 그 성격

        3. 왕족을 지방 장관으로 파견하여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다

            중앙집권적 지배 체제의 성립과 운용

        4. 지배층에게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주다

            식읍과 녹읍

        5. 국왕이 빈민을 구휼하고 민생을 돌보다

            진대법과 제방 · 시사

 

Ⅵ. 고대의 문화

         1. 고구려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고분벽화

             고구려 고분벽화와 그 세계

         2. 삼국이 불교를 받아들이다

             삼국의 불교 수용

         3. 무령왕릉에 숨겨진 백제의 역사와 문화

             무령왕릉

         4. 백성을 가르치고 인재를 양성하다

             삼국의 교육제도

         5. 신라가 젊은 인재를 양성하다

             화랑과 국선

         6. 역사를 편찬하다

             삼국의 역사 편찬

         7. 백제가 요서 지방을 영유하고 일본과 교류하다

             백제의 해외진출과 교린

         8. 삼국이 일본에 문화를 전하다

             삼한 · 삼국 유민의 일본 열도 진출

 

Ⅶ. 통일전쟁의 전개

         1. 삼국이 통일을 위해 다투다

             삼국 통일전쟁의 기본 줄거리

         2. 고구려가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고조선의 옛 땅을 많이 회복하다

             광개토대왕릉비

         3.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다

             진흥왕 4대 순수비와 적성비

          4. 고구려, 수·당의 침입을 물리치다

              살수대첩과 안시성 싸움

          5. 삼국통일의 역사성과 의미

              신라의 삼국통일과 그 의미

 

부록

        고조선·삼국 왕 계보도

        연표

        찾아보기

        각 장별 아이콘 설명

 

 

홍적세 후기의 한반도와 주변 지형

홍적세는 세계적으로 기후가 매우 추웠던 시기로 빙하시대라고도 한다. 200만 년 전에 시작해 1만 2000년 전쯤에 끝났다. 오늘날 한반도 지형은 마지막 빙하기인 뷔름빙기가 끝나고 충적세(마지막 홍적세 빙기인 뷔름빙기가 끝나서 기후가 따뜻해진 뒤부터 현재까지로 후빙기라고도 한다)로 접어든 1만 2000년 전에 이루어졌다. 이때 빙하가 녹아서 올라간 해수면 높이가 100m 이상이나 되었다고 한다.

라미피테쿠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우리나라 구석기 유적 분포도

우리나라 구석기 시대 유적은 1935년 함경북도 동관진(오늘날 온성군 강안리)에서 처음 발견한 이래 지금까지 50곳 정도 더 발견했다. 남한에서는 1964년에 공주 석장리에서 구석기 유적을 찾아낸 뒤로, 1978년에는 연천 전곡리, 1988년에는 파주 가월리와 주월리에서 국제 학계에 주목을 받은 대규모 구석기 유적을 찾아냈다. 하지만 유물 연대와 성격 등은 여러 설이 제기되어 아직 정확한 판단은 내리지 못하는 실정이다.

연천 전곡리 주먹도끼(양면핵석기)

외날찍개(위)와 쌍날찍개(아래)

주먹도끼는 재료가 되는 돌에서 먼저 큰 파편을 떼어낸 다음, 떼어낸 돌의 양면을 돌아가며 엇갈리게 쳐서 만들었다. 손에 쥐고 사용했기 때문에 주먹도끼라고 부르며, 양면을 떼어내고 알맹이를 썼기 때문에 양면핵석기라고도 부른다. 프랑스 아슐에서 이 같은 주먹도끼가 처음 발견되었기 때문에 흔히 아슐리안형 석기라고 부른다. 구석기인들은 처음에 냇돌이나 돌덩이의 한쪽 면을 떼어서 날을 세운 찍개를 썼지만, 이어서 손에 쥐기 좋도록 형태를 다듬은 주먹도끼로 발전시켰다.

석기 만드는 방법

복원된 흥수아이 1호

충북 청원군 문의면 노현리 두루봉 흥수굴에서 나온 어린아이 뼈를 복원한 모습. 흥수굴에서는 5~7세 정도인 두 어린아이 뼈가 거의 완전한 상태로 나왔다.

간석기

돌 전면을 갈아 만든 것이 많지만, 연대가 오래된 것 가운데는 필요한 부분만 갈아 만든 것도 적지 않다. 신석기 시대부터 간석기를 만들어 썼으나, 청동기 시대에 들어와 종류가 다양해지고 형태가 정형화되었다. 청동기 시대에도 농기구는 여전히 석기였다.

여러 가지 고기잡이 도구

서울 암사동 움집 마을 복원

1925년 한강 대홍수 때 일부가 망가진 채로 발견된 이후 1967년부터 다시 몇 차례 발굴 조사한 결과, 수렵 · 채집으로 생활하며 마을을 이룬 듯한 집터 5기와 빗살무늬토기 몇 점, 그리고 돌도끼 · 돌화살 등 석기가 많이 나왔다. 집터는 둥근꼴과 사다리꼴로 된 길이 5.5m, 깊이 1m인 움집터로 화덕 자리도 있었다. 유물은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해보니 기원전 3000년으로 나왔다.

조가비 가면

부산 동삼동 신석기 유적에서 나왔으며, 주술사가 악귀나 재액을 물리치는 데 쓴 듯하다.

여신의 얼굴

우하량 여신묘 유적에서 출토된 높이 22.5cm, 폭 23.5cm의 여성 두상이다. 앞면은 선홍색을 띠며, 입술 부분에는 홍색 칠을 했다. 머리 뒤쪽 부분은 없는 데 형태로 보아 벽에 붙였던 것으로 추츨된다.

곰발소조

우하량 여신묘에서 발견된 곰발 모양의 소조. 이로써 제사의 주신이 웅녀였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해졌다.

우하량 2지점 발굴 당시

우하량 2지점 제단

동산취 원형 제단

동산취 유적의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원형 제단이다. 동산취 유적은 야트막한 구릉들이 널리 펼쳐진 지역에서 그중 가장 높은 구릉의 정상에 조성되어 다른 구릉들에서 우러러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사해 출토 토기(위), 국보 195호 토우장식장경호(아래)

요녕성(遙寧省) 부신(阜新) 사랍향(沙拉鄕) 사해(査海)에서 출토된 토기(위). 두꺼비와 뱀(용)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국보 195호 신라 토우장식항아리(아래)에 같은 주제의 토우 장식이 보인다.

반달모양돌칼

곡식의 낟알을 거두는 데 쓰던 청동기 시대 도구. 한쪽이 곧고 다른 한쪽의 둥근 모양이 마치 반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돌칼의 한복판이나 등 쪽에 구멍이 한 개 내지 두 개 뚫려 있는데 이 구멍 사이에 끈을 꿰어 끈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사용했다. 요하 유역에서부터 한반도 남단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출토된다. 이 지역에 반달모양돌칼이 많이 나오는 사실은 당시 생산 활동에서 농업이 차지한 비중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칼은 일본으로도 전파되었다.

농경문 청동기

정확히 어디서 나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전광역시에서 나왔다고 전한다. 앞뒤 양면에 그림을 새겼는데, 앞면에는 새 두 마리가 나뭇가지에 앉아 서로 마주보는 모습을, 뒷면에는 밭을 가는 남자를 새겼다. 머리채가 긴 사람이 따비를 두 손으로 잡고 발로 힘차게 밟고 있으며, 그 밑에 보이는 가는 선은 밭고랑이다.

대곡리 출토 유물

여기서 나온 유물 가운데 잔무늬거울은 기하학 무늬가 아주 섬세하여 당시 주조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다다랐음을 보여준다. 제작 기술로 미루어, 기원전 3세기의 유물로 추정하고 있다.

민무늬토기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토기. 신석기 시대에 유행하던 빗살무늬토기가 청동기 시대에 들어오면서 점차 없어지고 대신에 민무늬토기가 사발 · 보시기 · 접시 · 잔 · 항아리 등으로 널리 쓰였다. 대개 적갈색을 띠고 있는데, 노천에서 낮은 온도로 구웠기 때문이다. 빗살무늬토기는 뾰족바닥과 둥근바닥이 많았지만 민무늬토기는 대부분 납작바닥이다. 철기 시대에도 민무늬토기가 쓰였지만 이는 청동기 시대 것과 질적으로 다른 경질 토기이다.

강화도 고인돌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에 있는 청동기 시대 고인돌. 화강암으로 만든 덮개돌 크기가 길이 7.1m, 너비 5.5m에 이르는 대형 고인돌이며 지상에서의 높이는 2.6m이다. 대략 남북 방향으로 놓인 긴 굄돌 두 개로만 덮개돌을 떠받쳤다. 근처 삼거리 · 하도리 등에도 고인돌이 10여 기 남아 있어 당시 사히 규모가 대단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삼국유사

삼국사기

제왕운기

무씨 사당 화상석 벽화

산동성 가상현(嘉祥縣)에서 청나라 건륭 연간에 발굴된 무씨 사당 후석실 벽화. 서기 147년 중국 한나라 시대에 만들었으며 『삼국유사』가 전하는 단군 사적과 매우 비슷한 내용을 보여준다.

여러 가지 철기

철로 만든 농기구는 대규모 농경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는 곧 계급 사회를 불러 왔다. 전쟁 형태도 보병전에서 철로 만든 긴 칼과 말을 이용한 기마전으로 바뀌었다. 진나라, 한나라가 강대국이 된 까닭은 바로 이 철기를 발판으로 한 강력한 군사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울진봉평리신라비

이 비의 비문은 기존 문헌 사료에 나타나지 않은 내용을 적잖이 담고 있어서 신라사 연구에 커다란 활력을 불어넣었다. 먼저 신라 정치사에서 핵심 주제인 6부 문제와 관련해 '신라육부'라는 구절이 주목된다. 『삼국사기』에는 '진한육부'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진한이 곧 신라임을 일러주는 표기 변화이다. 또 '노인(奴人)'과 '노인법(奴人法)'이란 용어가 보이는데 여기서 노인은 간(干)에 예속된 존재로서, 법흥왕 때의 노인법은 그동안 노인이 받아오던 차별을 없애 일반인으로 편제하는 내용을 담은 법이다.

오르혼 강변에 있는 옛 돌궐비

몽골고원 오르혼 강기슭에 서 있는 옛 돌궐비에는 고구려가 'Bokli'로 표기되어 나타난다. 돌궐어에서는 B가 M의 음가를 갖기도 하므로 고구려가 '무구리(畝久理)'로 되어 있다. 모두 맥구려(貊句麗)의 표기라 할 것이다. '맥'과 '구려'는 같은 뜻이므로,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동의어 중첩의 용어로서, 여러 맥족이 모여 건설한 나라임을 나타낸 이름이라고 하겠다.

석촌동 백제 고분

서울시 송파구 석촌동에 있는 백제 무덤으로서 가장 규모가 큰 3호분은 순수 돌무지무덤이다. 기단은 3단까지로 제3단 바닥에서 돌넛널인 딸린 덧널을 확인했다.

서울 몽촌토성 전경

서울 송파구 방이동에 있는 백제 읍성으로서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평지 위에 자연 구릉을 방벽 삼고 구릉이 낮거나 끊어진 부분과 출입문 좌우벽은 다져쌓기를 한 토성이다. 전체적으로 마름모꼴이며 성 동서남북에는 출입구가 트여있는데, 동쪽에 조그만 외성이 있다. 시루 · 세발토기 · 낫 · 손칼 · 화살촉 같은 갖가지 철기와 중국 서진 시대 회유전문토기, 고구려 유물도 함께 출토되었다.

수로왕릉

고라이 신사(위), 고라이 산 도로표지(아래)

가나가와 현(神奈川県) 나카 군(中郡) 오이소쵸(大磯町)에 있는 다카쿠신사(高来神社)의 입구에는 원래 이 신사가 고라이 신사(高麗神社)였음을 알려주는 푯돌이 놓여 잇다. 고라이 신사 뒷산의 이름이 고라이 산(高麗山)이어서 이곳이 본디 고구려로부터 건너 온 도래인(渡來人)들의 밀집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류지 안내석

안악3호무덤 행렬도

안악3호무덤은 황해도 안악군 오국리에 있는 고구려 벽화 무덤이다. 이 무덤은 규모가 남북 33m, 동서 30m, 높이 6m에 이르는 웅장한 무덤으로, 4세기 동방 문화를 대표하는 세계적 유적으로 손꼽힌다. 무덤칸은 언덕을 파내고 반지하에 돌로 쌓았는데, 널길 · 널방(선실) · 앞방 · 좌우 옆방 · 널방(현실) · 회랑 등으로 마치 지하 궁전처럼 지었다. 이 벽화는 널방(선실) 동벽에서 북벽으로 이어지는 'ㄱ'자 회랑에 그린 행렬도이다. 행렬은 소가 끄는 수레에 탄 주인공을 중심으로 주변에 남녀 시종들이 있고, 앞에는 보병 악대와 곡예꾼들, 뒤에는 기마 악대와 기마 기수, 맨 바깥에는 호위 보병과 기병들로 구성되었다.

안악3호무덤 서쪽 옆방 서벽 남자 주인공

이 주인공은 고구려에서 왕만 썼다는 백라관을 쓰고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것으로 보아 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남벽에는 여주인을 그렸고, 옆방과 동쪽 옆방에는 디딜방아를 다루는 하녀, 마굿간, 외양간, 용두레 우물, 부엌 등 고구려 생활상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영일냉수리신라비

이 비는 말추(末鄒)와 사신지(斯申支) 두 사람이 국가를 상대로 절거리(節居利)의 재(財)에 대해 자신들이 일정한 권리가 있음을 주장한 사실과 관련하여 이를 일절 불허함을 공론으로 밝혀 후세에 남긴 내용을 담고 있다. '절거리'는 조세선납인의 직명(職名)으로 짐작된다.

단양적성비

신라 제24대 진흥왕 때 세운 비석이다. 단단한 화강암을 물갈이한 뒤 글자를 아로새겼다. 이사부를 비롯한 여러 신라 장군이 왕명을 받고 전투에 나가 고구려 지역인 적성을 공략한 뒤, 자기들을 도와 공을 세운 적성 출신 야이차와 가족 등 주변 인물을 포상하고 적성 지역 백성들을 위로하고자 비를 세운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창녕순수비

진흥왕이 창녕 행차 때 모인 신하들을 알려주는 수가인명(隨駕人名)이 있어, 갈문왕 · 대등 같은 중앙 귀족을 비롯하여 영역 확보를 위한 전진 기지의 군사령관인 사방군주 · 당주 · 촌주 등 당시 신라 지배 체제를 살피는 데 도움이 된다. 진흥왕 22년(561)에 세웠는데, 이로 보아 그 이전에 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황초령순수비

신라 진흥왕 29년(568) 황초령에 건립한 순수비로 함경남도 장진군에 잇는 비석이다. 비문에는 비를 세우게 된 연유와 의의, 그리고 진흥왕의 업적과 순회한 목적, 수행한 사람들의 직위, 이름들이 적혀 있다.

천마총 금관

삼국의 고분군 분포

집안의 고구려 고분 분포

장군총(위), 장군총 평면도(아래)

길림성 집안현 통구(通溝)에 있는 고구려 고분이다. 1905년 일본인 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에 의해 처음 학계에 알려졌다. 무덤의 형태가 온전히 남아 있어 왕릉으로 상정되었으며, 광개토대왕릉, 산상왕릉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잇으나 대체로 장수왕의 무덤으로 본다.

태왕릉 묘실

무기단적석묘

천마총 천마도

바로 하늘로 날아오를 듯 생생한 천마다. 이 그림은 말이 달릴 때 말 탄 사람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 양쪽에 늘어뜨려 놓는 말다래에 그렸다. 자작나무 껍질을 여러 겹 겹쳐 그 위에 고운 자작나무 껍질을 입혀 각각 사격바무늬로 14줄씩 누비고 가장자리에는 너비 1.2m짜리 얇은 가죽단을 돌렸다. 천마는 예부터상제가 하늘에서 타고 다닌다는 신령스러운 동물로 여겼다. 천마 몸에 있는 반달무늬는 남주 러시아에 토대를 둔 고대 스키타이 미술에서 보석으로 장식한 습관에서 비롯된 듯하다. 최근에는 천마도 속 동물이 기린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삼실총 역사상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고구려 고분으로 세 개의 널방으로 구성된 구조로 인하여 삼실총(三室塚)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공성도 · 역사도 · 신선도 · 사신도 등 다양한 벽화가 그려져 있으며, 특히, 역사상(力士像), 갑주무사상(甲胄武士像), 장사상(壯士像), 개마무사상(鎧馬武士像) 등 인물상이 돋보인다.

무용총 무용도

무용총이란 이름은 바로 이 춤추는 그림이 잇다고 해서 붙인 것이다. 널방 동남벽에 무덤 주인으로 보이는 기마 인물을 중심으로 오른편에다 출타하는 주인을 노래와 춤으로 전송하는 모습을 새긴 그림이다. 고구려 옷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점박이무늬 옷에 긴 소매를 늘어뜨리고 소매춤을 추고 있다.

무용총 수렵도

고구려에서 사냥은 군사 훈련이자 가장 인기 있는 체육 종목이었다. 동맹 같은 국가 제사가 있을 때는 왕도 직접 대규모 사냥에 참가하곤 했다. 무용총 널방 오른쪽 벽에 그린 사냥도에는 조우관을 쓴 무사 하나가 달리는 말 위에서 호랑이를 겨누어 활 시위를 당기고 잇다. 조우관은 벼슬아치들이 쓰던 관으로 관모 양옆에 새 깃털을 꽂아 벼슬의 높고 낮음을 가렸다.

무용총 접객도

무용총은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있다. 광개토대왕릉비 북서쪽 약 1km 지점에 각저총과 나란히 자리잡았다. 접객도는 널방 장벽에 있다.

해신과 달신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고구려 오회분 4호묘 벽화이다. 하반신은 용의 모습을 한 신들이 각각 삼족오가 있는 해와 두꺼비가 그려진 달을 머리 위로 받들고 있다.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다양한 상상 속 그림은 우리나라 고대 문화의 일면을 보여준다.

이차돈순교비

헌덕왕 9년(817)에 만든 듯한데, 그렇다면 527년에 이차돈이 순교한 지 무려 290년 뒤에 이차돈을 기리고자 세운 셈이므로 왜 이리 늦어졌는지 자못 궁금하다. 모두 6면으로 되어 있고 제1면에는 이차돈이 순교하는 장면을 돋을새김 했고, 제2~6면에는 정간(井間)을 치고 정간마다 글자를 새겨 넣었다. 경주시 백률사에 있다가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무령왕릉

1971년 7얼 6일. 1,442년 동안 잠들어 있던 무령왕과 왕비가 부활했다. 무덤 들머리가 벽돌과 백회로 빈틈없이 막혀 있어 도굴꾼의 손이 전혀 닿지 않은 채 수많은 껴묻거리와 함께 고스란히 세상 빛을 보았다. 왕과 왕비는 머리 방향을 들머리인 남쪽으로 두고 각각 널방 동쪽과 서쪽에 자리잡았다. 널방 둘레는 연꽃 무늬를 새긴 벽돌이 빼곡하다. 무령앙릉은 중국에서 한나라 이래 남조에서 왕과 지배층 사이에 유행하던 벽돌무덤이다. 길이모쌓기와 작은모쌓기로 번갈아 쌓았고, 아치를 이룬 천장까지 최고 높이는 2.93m이다.

무령왕릉 지석, 매지권

'다리' 새김 은팔찌

왕비의 왼쪽 팔목에 끼여 있던 은팔찌로 팔찌 안쪽에 "庚子年二月多利作大夫人分二百州主耳"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다리'라는 장인이 대부인 곧 왕비를 위해 왕비가 돌아가기 6년 전인 경자년(520)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팔찌 바깥면에는 용 세 마리가 힘차게 감돌고 있다.

『화랑세기』 필사본

신라 성덕왕 때 학자 김대문(金大問)이 화랑의 유래를 적은 책으로, 판본이 전하지 않고 『삼국사기』에 아주 일부만 인용되어 있다. 그런데 1989년에 조선 후기 필사본으로 보이는 『화랑세기』를 김해에서 발견했다. 이 필사본은 모두 16장 32면으로 후반부가 일부 빠졌다. 여기에 나오는 내용은 충격적으로 근친혼 · 동성애 · 다부제(多夫制) 등 고대 사회 실상을 생생하게 그려놓았다. 아직 진본인지 판명되지 않았지만 진본이라면 고려 시대 이전에 쓴 역사책으로, 유교 영향을 받지 않은 역사책 가운데 최초로 발견한 역사책인 셈이다.

울주 천전리 각석

울산 대곡리(반구대)에 있는 바위그림 유적인데, 선사 시대 바위그림뿐만 아니라 신라 화랑이 남긴 글씨도 남아 있다. 이곳에는 계곡이 있는데 울산에서 경주로 가는 실목이며 뱃길을 따라 경주로 들어갈 수도 있어, 선사 시대를 비롯하여 삼국 시대에도 주요 길목인 듯하다. 그래서 선사 시대 그림과 신라 화랑이 새긴 글씨가 동시에 있는 듯싶다. 신라 화랑들이 새겨놓은 이름 · 간지 · 관명이 바위 아래쪽에 있다.

칠지도

곧은 칼몸 좌우로 가지 모양 칼이 셋씩 나와 있어 칼날이 모두 7개이므로 칠지도라는 이름을 붙였다. 칼몸 앞뒤에는 60글자 정도가 금상감(金象嵌)되어 있고 테두리를 가는 금선으로 둘렀다. 이 글자 풀이와 관련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는 등 그동안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하지만 백제 왕의 '말'을 극존칭인 '성음'이라고 한 점과 상대방 왜왕에게는 경어가 전혀 없다는 내용으로 미루어 백제가 왜왕한테 하사한 칼이 분명하다. 길이 74.9cm짜리 철제 칼로 오늘날 일본 나라 현 덴리 시 이소노카미신궁에 있다.

고마 신사 현판

일본에서는 고구려를 '高麗'라고 쓰고 고마라고 읽는데, 고려가 아니라 고구려임을 밝혀 '고'자와 '려'자 사이에 '구'자를 새겨 넣은 현판이다. 글씨를 쓴 조선인 정삼품 조중응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다.

백제왕신사

오사카(大阪) 히라가타(校方市)에 위치한 신사이다. 백제가 멸망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왕족의 후손이 지었다고 하며, 백제국왕과 우두천왕(牛頭天王)을 모시고 있다. 이 신사는 백제왕의 조상을 모신 곳으로 백제 계통과의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준다.

오사카 난바의 백제역

백제사(히가시오미) 전경

시가 현(滋賀県) 히가시오미 시(東近江市)에 있는 천태종 사원. 스이코 천황 14년(606), 고구려 승려 혜자(慧慈)와 함께 이곳에 온 쇼토쿠 태자가 건립했다고 한다. 백제의 용운사(龍雲寺)를 본따 절을 지었다고 하여 백제사라 한다.

나라의 백제사

나라 현(奈良県) 기타가츠라기 군(北葛城郡) 고료쵸(広陵町)에 있는 사찰. 전승에 의하면 이 절이 자리잡은 곳은 백제대사(百済大寺)의 고지라고 한다. 백제대사는 7세기 전반에 창건된 관사로서 나중에 헤이조쿄로 이전 대안사(大安寺)가 되었다.

백제사(히가시오미) 안내문

백제사(히가시오미) 연혁

신라선신당

미카도 신사 본전

왕인 박사 묘

백제는 왜와 오랫동안 교류하면서 많은 사람이 직접 건너가 선진 문물을 전했다. 왕인도 그중 한 사람인데 우리 기록에는 없고 일본 기록에만 나온다. 근초고왕 때 건너간 아직기가 소개해 왕인이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건너갔다. 이때 백제는 제철 기술자 · 직조공 · 양조 기술자 등을 함께 보냈다.

광개토대왕릉비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있다. 높이 5.34m, 각 면 너비가 1.5m에 이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414년에 장수왕이 고구려 제19대 왕인 아버지 광개토대왕을 기리고자 세웠으며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한다. 고구려 건국 내력과 광개토대왕의 대외 정복 활동, 왕릉 관리 문제가 담겨 있다.

광개토대왕릉비 탁본

호우총 청동합

경북 경주시 노서동 고분군에 있는 신라 무덤에서 청동호우(壺玗)가 나와 이 무덤을 호우총이라 불렀다.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 岡上廣開 土地好太 王壺玗十)'이라는 글을 예서체로 돋을새김해 놓았는데, 장수왕 3년(415)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씨는 광개토대왕릉비의 글꼴과 매우 비슷하며, 광개토왕을 기념하는 의례행위에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산진흥왕순수비

진흥왕이 북한산 일대를 두루 돌아다니며 살피고, 이를 기념하여 세운 비다. 비신 뒷면에 총탄 자국이 마구 박혀 있는 등 여러 군데가 이미 심하게 손상되었으며, 더 망가질까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진흥왕의 다른 순수비는 자연석을 그대로 썼지만 이 비석은 직사각형으로 다듬은 석재로 자연암반 위에 2단으로 층을 만들어 세웠다. 1816년과 이듬해에 추사 김정희가 직접 와서 비문을 읽은 사실이 새겨 있다.

충주고구려비

충북 충주시에서 발견된 고구려 석비로 일반적으로 중원고구려비로 알려져 있다. 비의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대체로 장수왕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마모되었지만,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알려주는 표현이 확인되어 사료로서 가치가 매우 크다.

살수대첩 민족화

로만 글라스

황룡사9층목탑 모형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