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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8 한국의 암각화


글, 사진 / 임세권

1999,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22914


082

빛12ㄷ  225


빛깔있는 책들 225


임세권-------------------------------------------------------------------------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있으며 박물관장을 지냈다. 저서로 『중국 변방을 가다』『안동문화의 재인식』(공저)『한국의 암각화(공저) 등이 있고, 주요 논문으로 「우리나라 선사암각화의 연대에 대하여」「한국과 중국의 암각화 비교 연구」「안동 수곡리 바위그림 유적」「한국 선사시대 암각화의 성격」「북한의 청동기시대 연구」 등이 있다.


|차례|


책 머리에

한국 암각화의 발견

암각화의 이해

한국의 암각화 유적

한국 암각화가 갖는 의미

참고 문헌

울주 반구대 암각화 탁본

한국 암각화 분포도

선명한 학 그림과 명문  반구대 마을 강가 절벽에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시회(詩會)를 하면서 새긴 많은 한시들과 사람 이름들, 학과 같은 그림들이 남아 있다.

반구대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  절벽이 연이어진 오른쪽으로 마치 대패로 깎은 듯이 반반한 바위면에 갖가지 형상의 동물과 인물 그림들이 펼쳐져 있다.


암각화의 기법

쪼아낸 그림  바위를 단단한 돌이나 다른 도구를 이용하여 두드려 쪼아서 형상을 묘사하였다. 울주 반구대 암각화.

갈아낸 그림  쪼아낸 뒤에 그 부분을 갈아서 더 깊고 매끈하게 만들었다. 남원 대곡리 암각화.

그어 새긴 그림  날카로운 금속 도구로 바위면을 그어서 가는 선으로 묘사하였다. 울주 천전리 암각화.

경주 석장동 유적의 환경  암각화들은 대체로 강가 절벽 중에서 사람의 팔이 닿을 정도로 그리 높지 않은 수직 바위면에 새겨져 있다.

안동 수곡리의 평면 암각화  산 능선 끝부분의 편평한 바위면에 암각화가 새겨져 있는데 하늘을 마주보고 있는 특이한 경우이다.

동물상  주로 사슴이나 고래, 호랑이 등이 그려져 있으며 배를 불룩하게 묘사한 그림이 많다. 이는 새끼를 밴 모습으로 생산의 풍요를 기원한 것이다. 울주 반구대 암각화.

그물에 갇힌 동물과 창을 맞은 고래  동물과 사람을 새긴 대표 유적인 반구대 암각화에는 수렵의 모습을 보여 주는 그림들이 있다.

반구대 암각화의 인물상  제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나 샤먼의 모습이다. 다리를 구부리고 두 팔을 머리 위로 들어올리거나 허리에 손을 대는 등 춤추는 형상이며 긴 나팔을 부는 사람도 있다.

천전리 암각화의 마름모꼴 도형  원이나 동심원, 삼각형이나 물결무늬처럼 추상적인 특징을 갖는 도형들은 상징성이 강하며 특정한 집단만이 알아볼 수 있는 부호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석검의 그림  주로 고인돌에 새겨져 있는 그림으로 영일 인비리(위)와 여수 오림동(아래) 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쭈어강의 암채화  중국 광시좡족 자치구의 쭈어강에 있는 약 200미터 높이의 절벽에는 40미터 높이까지 수많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안동 수곡리의 저수 시설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면 한쪽에는 의식을 거행할 때 이용한 것으로 보이는 깊이 팬 물 저장 시설이 있어 당시 종교 의식의 일면을 보여 준다.

추상 선각과 동물 면각  얕게 쪼아진 사슴 그림을 파괴하면서 굵은 선각의 추상 도형들을 새겼기 때문에 추상적인 도형들이 동물 암각화보다 후대에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울주 천전리 암각화.


고령 양전리 암각화의 태양신 얼굴  이마에 새겨진 U자형과 얼굴 양쪽의 오목하게 깎아낸 뺨, 굵은 점으로 묘사된 눈 · 코 · 잎, 턱밑을 제외한 얼굴 주위 3면에 마치 태양광선처럼 짧은 직선을 돌려놓은 점이 시베리아나 몽골, 중국 북부 암각화의 태양신과 비슷하다.

시베리아 암각화의 태양신 얼굴  시베리아나 몽골, 중국 등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이 얼굴 모습은 태양신을 상징한다. 우리나라의 신상이 사각형에 가까운 데 비해 시베리아 등지의 신상은 타원형이나 원형으로 되어 있다.

반구대의 경관  태화강 지류인 대곡천을 따라 약 1킬로미터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수십 미터에 이르는 높은 절벽이 병풍처럼 강물 한쪽을 막아 선다. 그 중에서도 대패질한 듯 반반한 수직 암벽 부분에 한국 암각화를 대표하는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가 그려져 있다.

반구대 암각화 상세도(붉은색은 면각 그림, 파란색은 선각 그림)

바위면 왼쪽의 고래 떼  바위면 왼쪽에는 스무 마리 이상의 고래들이 머리를 하늘로 향하고 떼지어 있어 대규모의 고래 떼가 한꺼번에 승천하는 듯 보인다.

반구대 암각화의 인물상  바위면 제일 위쪽에는 두 팔을 들어올리고 다리를 굽혀 춤추는 듯한 인물상이 있고(위), 왼쪽 맨 아래에는 팔과 다리를 수평으로 벌리고 손과 발에는 다섯 개씩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과장하여 표현한 인물상이 있다(아래).

신격화된 고래  왼쪽 암각화군 위에 있는 새끼 밴 고래(위)와 중앙 암각화군의 한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몸집의 고래(아래)는 위치와 크기, 형태에서 신격으로서의 신성성이 엿보인다.

가는 선으로 연결된 고래와 배  바위면 왼쪽으로 20명 가량의 사람이 타고 있는 가늘고 긴 몸체의 배와 작은 선각 고래가 연결되어 있으나 의도적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중심부의 육지 동물들  오른쪽 암각화군에서 약간 왼쪽으로 치우친 곳에는 암사슴이나 맷돼지 등으로 보이는 육지 동물들이 많은데 대부분 아랫배가 불룩하다.

투시법으로 그린 멧돼지  중앙부 위쪽의 멧돼지는 몸체에 가로세로 연결된 선들이 복잡하게 새겨져 있다. 이들은 모두 입에서 몸체 내부로 들어가는 선이 묘사되어 있어 투시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선각 몸체에 면각 꼬리를 가진 고래  머리를 아래로 향하고 있으며 오른쪽 꼬리를 훨씬 크게 묘사하여 크게 움직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몸체를 선각으로 표현한 것은 고래의 배 부분에 있는 주름을 묘사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힘차게 움직이는 듯한 호랑이와 고래 그림  면각의 동물들이 대부분 정적인 데 비해 선각으로 묘사한 동물들은 동감의 표현이 매우 뛰어나다.

생산의 풍요를 상징하는 선각 동물들  바위면 왼쪽 위에는 그물 속에 갇힌 동물이 있고 왼쪽과 중앙의 경계 부분에는 호랑이처럼 맹수류로 보이는 동물들이 잇다. 이 맹수류의 몸체에는 세로줄무늬나 점이 찍혀 있으며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여 걸어간다.

선각의 가면  얼굴 윤곽선이 거의 역이등변 삼각형이며 눈이나 코, 입 등도 거의 직선으로 표현되어 경직된 모습을 보여 준다. 특히 이마 윗부분이 직선으로 잘려 있어 가면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천전리 암각화 전경  물이 흐르는 곳보다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하는 앞으로 기울어진 장방형 암벽에 암각화가 그려져 있다. 너비 9.5미터, 높이 2.7미터 크기의 벽면은 비교적 매끈하다.

천전리 암각화 상세도  (붉은색은 면각 동물, 파란색은 선각의 추상 동형, 녹색은 가는 선 그림, 검은색은 신라시대의 선각 글씨)

큰 뿔을 가진 사슴 머리  뿔이 아름답게 강조된 사슴의 머리가 비교적 뚜렷이 보여 몸체를 새기지 않았거나 아니면 아주 얕게 형식적으로 쪼아냈을 가능성이 있다. 사슴의 큰 뿔이 숭배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추상화된 인물상  천전리 암각화에는 반구대의 가면과 비슷한 형태의 사람 얼굴과 거칠게 쪼아낸 미완성의 얼굴 그리고 얼굴을 크게 과장시킨 인물상 등이 있다.



양전리 암각화  사람 얼굴을 추상화시킨 듯한 도형과 동심원, 원 안에 네 개의 홈을 새긴 것 등 모두 29개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양전리 암각화의 동심원  고령과 천전리 암각화에는 공통으로 동심원이 나타나는데 주로 태양의 상징으로 본다.

안화리 암각화  바위면 아래쪽에 모두 네 개의 신상이 가로로 한 줄 새겨져 있다. 이마가 U자형으로 패어 있고 주변에 머리카락 모양이 없으나 단지 중앙 도형의 위쪽 한 변에만 머리카락이 있다.

칠포리 계곡 동쪽의 암각화  길이 3미터, 높이 2미터 크기의 암벽에 깊이 새겨진 대형 암각화로 모두 신상을 표현한 것이다. 머리카락이 없으며 도형 내부에 U자형 이마가 크게 새겨져 있다.

칠포리 계곡 서쪽의 암각화  바위의 대부분은 땅 속에 묻혀 있고 일부만 땅 위에 드러난 셈인데 하늘을 향하고 있는 수평면에는 신상 암각화가 남북 방향으로 배열되어 있고 비스듬히 흘러내린 동쪽 측면에는 길이 15, 6센티미터, 너비 10센티미터 내외의 작은 도형들이 20여 개 새겨져 있다.

여성 성기형 그림  측면에 새겨진 그림들 가운데에는 윗부분을 둥글게 처리한 역삼각형에 하단을 짧은 세로줄로 양분하거나 타원형의 내부를 세로로 양분한 여성 성기형 그림이 있다.

고인돌의 암각화  바닷가 가까운 곳에 있는 고인돌 측면이나 냇가의 바위 측면 등에 신상 암각화와 화살촉이나 마제 석검으로 보이는 암각화가 있다.

석장동 유적의 전경  경북 석장동의 서천에 인접한 수직 암벽에는 다양한 모양의 신상, 사람과 동물의 발자국, 태양으로 보이는 작은 도형들, 인물과 동물상 등이 새겨져 있다.

남향 바위면 왼쪽의 동물과 인물상  두 팔을 수평으로 벌리고 두 다리를 벌려 서 있는 사람이 굵은 선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동물은 머리가 분명치 않으나 앞뒤 한 쌍씩의 다리를 묘사하였다. 그 아래로 동물 발자국 모양의 도형이 있다.

상신리 암각화 유적  경주시 내남면 상신리 광석마을 남쪽 들판 한가운데 떨어져 있는 바위에서 여러 개의 변이형 신상 암각화와 동심원이 확인되었다.

봉황대 유적의 전경  봉황대 정상부에 하나의 큰 바위가 있고 그보다 약간 아래쪽에 또 하나의 바위가 있는데 암각화는 이 두 바위에 각각 3점씩 새겨져 있다.

위쪽 바위면의 암각화  왼쪽 한 점은 아래위로 긴 장방형이지만 마멸되어 내부의 자세한 모습을 거의 알아볼 수 없고 중간 도형과 오른쪽 도형은 그 형태가 분명하다.

아래쪽 바위면의 암각화  밑이 좁고 위로 가면서 넓게 벌어지는 형태이며 윗부분이 V자형으로 안쪽으로 꺾어진 것이 특이하다.

보성리 암각화 유적  산기슭 땅속에 묻혀 있던 바위는 경지 작업중 발견되었다. 바윗덩어리의 밑면은 편평하게 손질되었고 둘레도 약간씩 다듬어 긴 타원형으로 만들었다.

보성리 암각화의 부분  위아래로 긴 장방형으로 양 옆이 안으로 오목하게 들어간 활 모양이며 중간 허리에 가로줄을 그어 아래위로 양분하고 각각의 칸에 두 개씩의 점을 찍었다.

가흥동 암각화 전경  표면이 거친 화강암의 절벽이 아래위 두 층으로 이루어졌다. 그림의 형태는 세로로 긴 장방형이고 네 윤곽선을 모두 안으로 휜 반원으로 처리하였다.

인비리 암각화가 새겨진 고인돌 전경  높이 140센티미터, 너미 135센티미터 고인돌의 뚜껑들 남쪽 측면에 마제 석검 두 자루와 삼각형 마제 석촉으로 보이는 그림이 있다.

인비리 고인돌 측면에 새겨진 마제 석검과 석촉

오림동 고인돌 전경  여수시 오림동의 구릉지에 있는 고인돌 가운데 길이 268센티미터, 높이 172센티미터 크기의 고인돌(오른쪽에서 두 번째) 남쪽 면에 석검과 인물상이 새겨져 있다. 현재 체육공원 안에 옮겨져 있다.

마제 석검과 인물상  마제 석검은 손잡이가 통으로 되어 있으며 칼 끝을 아래로 하여 비스듬히 서 있다. 칼 왼쪽에는 가는 선으로 두 사람을 묘사하였는데 한 명은 다리를 벌리고 서 있으며 또 다른 한 명은 두 팔을 앞으로 내밀고 다리를 굽혀 앉은 것처럼 보인다.

수곡리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면  옛날부터 신선바위로 알려져 있던 바위 위에는 말굽 모양이나 윷판 모양의 그림 그리고크고 작은 구멍들이 많이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가운데 가장 확실한 우리나라 제천 의식의 거행 장소이다.

장대를 꽂았던 자리로 보이는 바위 구멍  삼면의 낭떠러지에는 길다란 장대를 꽂았던 자리로 보이는 긴 홈이 패어 있는데 바위 윗면에도 여러 개 보인다.

여성 성기형 암각화  바위면 남쪽에 비교적 고루 분포되어 있는데 타원의 한쪽이 트여 있고 원호는 대부분 이중으로 되어 있으며 반타원형의 중심에 직선을 그어 내부 공간을 둘로 나눈 것도 있다.

새 모양의 암각화  활처럼 구부러진 선의 양쪽으로 작은 꼭지가 붙어 있고 뒤쪽으로 뻗친 직선의 끝은 둘로 갈라져 있는데 이는 새의 머리와 다리 부분처럼 보인다. 전체 모습이 양 날개를 활짝 편 큰 새를 묘사한 듯하다.

윷판형 암각화  작은 원형 홈들을 배열한 윷판형 도형이다. 원형 내부를 십자형으로 분할하고 네 개의 내부 공간에 작은 원형 홈을 다시 하나씩 배치하였다. 원형 홈의 배치 상태가 윷놀이에 사용하는 말판과 완전히 일치한다.

사람 발자국 형태의 암각화  바위면 남쪽 끝부분에 길이 15센티미터, 너비 4~6센티미터, 깊이 2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발자국이 찍혀 있다. 발바닥과 발가락이 완전한 형태인 왼발의 모습이며 남쪽을 향하고 있다.. 

도항리 암각화가 새겨진 고인돌  길이 230센티미터, 너비 120센티미터의 긴 타원형의 고인돌 윗면에 7개의 동심원과 260여 개의 크고 작은 원형 홈들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다.

도항리 암각화의 동심원과 원형 홈들  동심원과 원형 홈들이 서로 겹쳐지지 않게 새겨져 있는데 밤 하늘에 뜬 별을 묘사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양아리의 추상 선각 암각화  남쪽을 향해 길게 누워 있는 펑퍼짐한 바위에 조선시대부터 금석문으로 알려진 문자가 있었으나 최근에 선사 암각화로 밝혀졌다.

경주 석장동 암각화  암각화가 집중적으로 새겨져 있는 남향 바위면의 중심부로 서쪽으로 가면서 약간씩 직각에 가깝게 꺾인 부분이 있다. 바위면 가장 윗부분에는 20~28센티미터 길이의 신상들 네 개가 30센티미터 내외의 간격으로 가로로 배치되어 있다.






저작자 표시
posted by 드무 황영찬

2014-087 아프리카 탐험 - 나일강의 수원을 찾아서


안 위공 지음, 한양환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20


082

시156ㅅ  15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5


탐험가들을 매료시킨 검은 대륙 아프리카.

원시 자연 상태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아프리카 내륙 지방은 탐험가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생명을 걸고 아프리카 오지를 답사하여

신비에 싸인 미지의 세계를 세상 사람들에게 소개했던

위대한 탐험가들, 그러나 이들의 업적은

유럽 열강을 부추겨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전락시키는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다음 날 나는 그 유명한

모시와투냐(Mosi-oa-Tounya) 폭포를 찾아나섰다.

칼라이(Calai)를 출발해서 얼마간의 항해 끝에 물보라에

싸여 있는 거대한 물기둥을 발견할 수 있었다. 폭포

가까이에 위치한 섬에 내린 순간 너무도 놀라운 장관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폭이 1,000미터나 되는 강이 겨우

20미터 반경에 불과한 웅덩이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일찍이 내가 본 적이 없는 이루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나는 이를 빅토리아 폭포라고

명명하고 그 근처에 백여 개의 복숭아와 살구씨,

그리고 상당한 양의 커피 씨앗을 뿌렸다.

한 원주민으로 하여금 둘레에 울타리를 치고 돌보도록

한 후 나는 바로 옆에 서 있는 나무 등걸에 내 이름의 약자를

새기고 그 밑에 1885년이라고 새겨 놓았다."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차례


제1장 검은 대륙의 발견

제2장 나일강의 수원을 찾아서

제3장 리빙스턴의 남아프리카 탐험

제4장 밀림 속으로

제5장 탐험가의 세계

기록과 증언

그림목록

찾아보기


안 위공 Anne Hugon

파리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젊은 여성학자이다. 수년 전부터 아프리카 대륙 탐험사에 관한 연구를 해왔으며, 메리 킹슬리(Mary Kingsley)의 탐험기를 번역하기도 했다. 리용 제2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는 그녀는, 현재 아프리카 대륙 내에서의 선교 활동사에 관한 글을 집필하고 있다.


옮긴이 : 한양환

1958년 공주 출생.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한 후 파리 제1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남대학교와 교원대학교에 출강하고 있으며, 아프리카 문제 연구소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다수의 아프리카 관련 논문을 썼으며, 번역서로는 <프랑스의 고용보험> <중국> 등이 있다.






제1장

검은 대륙의 발견


19세기 초엽까지도 아프리카 내륙지역은 전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땅(terra incognita)'이었다. 그후 탐험가들은 각 지역을 답사하여 하천과 산세를 확인했고 다양한 동식물군(群)에 대한 연구목록을 작성했으며 아프리카인과도 유대를 다져 왔다. 그러나 불과 1세기 후에 이 땅은 유럽 열간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탐험가들은 새로운 바람을 일으킴으로써 유럽 제국주의가 아프리카 대륙에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셈이다.

1300년대에 아프리카를 여행한 이븐 바투타도 낙타를 이용하여 아프리카 지리에 관해 많은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15세기에 제작된 세계지도는 당시 지리적으로 혼동되던 나일강과 니제르강이 텐트로 표시된 아프리카 왕국에서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보여 준다.

박물학자인 조지프 뱅크스경은 1768년 쿡 선장이 지휘한 태평양 탐험에 동참했고 2년 뒤에는 아프리카협회를 창설했다. 대무역상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여러 명의 과학자와 영국 황태자가 포함되어 있는 실질적인 후원자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노예폐지론자가 탄원서를 제출하는 이 그림은 1826년 발간된 아멜리아 오피의 《흑인의 비애》에 등장한다. 노예폐지론자들은 노예무역을 금지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탄원서를 제출하거나 인쇄물을 배포하여 여론에 호소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투쟁을 전개했다.(위) 19세기 노예폐지론자의 판화(아래)에서 쇠사슬에 묶인 흑인을 볼 수 있다. 노예폐지론자들은 흑인도 한 형제자매라는 형제애를 강조했는데, 이는 선의에서 우러나온 것이지만 그들의 태도는 스스로 큰형임을 자처하며 동정적인 인종차별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1840년 런던에서 개최된 노예해방협회의 총회장면. 1830년부터 노예제도는 영국령 식민지역 내네서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다. 노예폐지론을 찬성하는 계층은 주로 상류층 인사와 산업자본가였다. 특히 이들 산업자본가는 경제적 이해관계와 연관해서 노예폐지론을 지지했다.

선교사들이 저술한 기행문에서 볼 수 있듯이 교회를 포함해 학교와 진료소는 선교사업의 주요거점이었고 이들 부속기관에서는 다양한 자선사업을 벌였다. 리빙스턴은 개종(改宗)에 따르는 필요충분조건을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누구든 문자를 해독하고 기독교의 근본을 이해하지 않고는 세례를 받을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주장했던 것처럼 기독교의 개종이 순수한 영적 차원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당시 복음전도를 위해 선교사들은 개종한 자에게 그 대가로 연장이나 의복 따위 산업제품을 제공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물질적 대가를 바라고 거짓 개종한 사람들이 속출했다. 리빙스턴이 남아프리카인에게 설교하는 그림.

18세기 런던은 세계 상업의 중심지였고 아프리카와 연관된 모든 지적, 상업적 활동의 메카였다. 토머스 알롬의 그림은 19세기 런던항의 모습을 보여 준다. 영국 제2의 항구도시 리버풀은 검은 대륙과 노예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척할 수 있었지만,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노예무역 열기가 수그러들자 경기가 다소 침체되었다. 바로 이곳에서 수많은 탐험가들이 증기화물선을 타고 아프리카로 향했다.

장 밥티스트 마르샹

탐험가 새뮤얼 베이커가 그린 수채화는 라투카(Latooka), 장례식 춤을 묘사한 것이다. 종종 유럽인은 매혹적이긴 하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의식을 통해 원주민들로부터 성대하게 환대받았다.

리처드 버턴 경은 동양적인 품성과 이미지를 지니려고 했다. 그는 아편을 복용하고 방탕한 친구들과 어울렸으며 동성연애자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에 대한 이 같은 나쁜 평판은 그의 군경력을 손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총을 들고 열대림에 도전할 모든 준비를 갖춘 헨리 모턴 스탠리의 자신만만한 태도는 탐험가의 전형을 보여 준다.

리빙스턴이 제작한 빅토리아 폭포 지도.

셔와호를 표시한 지도. 리빙스턴. 왕립지리학회, 런던

지질학자로서 1843년부터 영국 왕립지리학회의 종신 회장을 역임한 로드릭 머치슨경은 논리정연하면서도 권위적이었으며 든든한 재력을 바탕으로 많은 추종자들과 더불어 과학발전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나일강 수원을 찾으려는 탐험대를 적극 후원해 주었다. 이에 감사하는 뜻에서 베이커는 앨버트호에서 내려오는 폭포에 머치슨이라 이름붙였다.

아홉 자녀들 중 일곱 명과 자리를 같이한 빅토리아 여왕. 스펙과 그랜트 등은 아프리카의 왕을 제압하기 위해 아무런 주저 없이 영국 여왕의 아들임을 자처하기도 했다.


제2장

나일강의 수원을 찾아서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라고 기록했다. 이집트 문명의 발상지인 나일강은 신성한 대상이었으며 오랫동안 지리학적 신비로 남아 있었다. 나일강은 과연 어디에서 흘러오는 것일까? 사람들은 나일강이 세상의 끝 또는 그 너머에서 발원한다고 생각했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뒤, 19세기에 이르러서야 탐험가들은 나일강의 신비를 벗길 수 었었다.

탐험가 존 해닝 스펙의 초상. 스펙은 나일강의 수원을 알아냈으나 자신의 업적을 인정받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위대한 탐험가 스펙은 세속적인 명성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70만 권의 장서를 소장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는 프톨레마이오스. 중세 말까지 사람들은 그의 저서를 많이 읽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유명한 저서 《지리학》이 15세기에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이 책을 참고해서 고대 아프리카 지도가 제작되었다.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아프리카 남부지방은 실체가 명확하지 않으며 서부 해안선 윤곽 역시 확실치 못하다. 그러나 나일강의 묘사는 어느 정도 정확성을 띠었다. 당시 사람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보다 헤로도토스의 견해를 더욱 일반적으로 받아들였다.

제임스 브루스는 많은 지식인들과 교류를 가졌으며 때때로 그들에게서 큰 도움을 받기도 했다. 한번은 항해 도중에 탐험기재를 분실하여 탐험을 중도에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때 뷔퐁이 루이 15세를 설득하여 그에게 필요한 자재를 급송해 준 적이 있었다. 브루스가 스린 에티오피아의 동식물.

고고학자이며 지질학자였던 카이요는 기린, 타조, 나일강 지역 주민들(그림은 전통복 차림을 한 나일강 연안 주민들이다), 메로웨 문명의 사라진 영광, 아비시리 폭포 등 아프리카의 여러 풍물에 매료되었다. 그는 한때 이집트인으로부터 배척당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맹수 사냥꾼으로 유명한 존 스펙은 식물학자이자 지질학자였다. 히말라야와 티베트 여행을 통해 스펙은 모험심을 길렀고, 훌륭한 탐험가로서의 자질을 갖출 수 있었다.

리처드 버턴은 동양의 풍물과 미지의 땅을 향한 모험에 매료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순례자로 변장하여 메카에 잠입한 것이 그의 최초 기행(奇行)이었다(위). 그는 아프리카 동부에 위치한 이교도 금단지역인 하라르(아래)에 은거하기도 했다. 뛰어난 언어학자인 버턴은 아랍어와 힌두어를 포함해 30개가 넘는 언어를 구사했으며, 《아라비안 나이트》와 인도의 외설스런 문학작품을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끝없는 야망을 지닌 버턴은 까다로운 성격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권위주의자로, 몹시 자만심이 강했으며 성마른데다가 전통적인 가치를 경시하기도 했다. 그는 하위직 외교관으로서 일생을 마쳤는데, 아래 사진은 트리에스테에 살고 있을 무렵인 그의 말년에 찍은 사진이다.


버턴은 탐험가들이 타고 다닌 당나귀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고집 세고 버릇도 나쁜 당나귀는 말과에 속하는 동물이 지닌 못된 버릇 네 가지를 가지고 있다. 뒷걸음질 치고 비틀거리고 뒷발로 차는가 하면 도망치기 일쑤이다."

스펙의 수채화.

스펙은 무테사왕을 비난했으나 스탠리는 그를 흠모했다.

"드디어 탐험의 목표가 달성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고대 나일강이 빅토리아 냔자호에서 발원한다고 생각했다. 일찍이 예언했던 것처럼 냔자호는 우리 종교의 창시자(모세)가 바구니에 실려 떠내려온 성스러운 강의 근원임을 확신했다"라고 리폰 폭포에 도착하던 날 스펙은 그의 일기에 이렇게 적어 두었다.

1880년에 제작된 이 판화는 콘도코로에서 이루어진 스펙과 그랜트와 베이커의 만남을 묘사하고 있다. "여러 척의 선박들이 정박해 있는 강가에서 우리는 멀리서 급히 뛰어오는 사람을 발견하고 우리가 찾고 있던 사람이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곧 오랜 친구인 베이커의 뜨거운 악수가 나를 착각에서 깨어나게 했다. 이 뜻밖의 해후는 무척 큰 감동을 주었다."

곤도코로에서

스펙

본국으로 무사히 귀환한 스펙과 그랜트를 위해 왕립지리학회에서 주최한 환영회는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열광하는 지지자들 앞에서 학회장은 이들에게 메달을 수여했다. 이 같은 모임은 유명한 탐험가가 참석할 경우 더욱 성황을 이루었다.

새뮤얼 베이커는 1821년에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에 나가는 대신 집에서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은 탓으로, 그는 보수주의적 기질과 강한 개인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 여러 차례 경험한 여행을 통해서도 이러한 편협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는 전투, 스포츠, 사냥에 참가하기 위해 스리랑카와 발칸 지역을 두루 여행한 적이 있다. 영국이 많은 식민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종적 우월을 자부하던 베이커는 19세기 인종차별주의적 이론이 대두되기 이전에 이미 앵글로 색슨족이 인간세계의 우등민족임을 확신하고 있었으며, 외국인 혐오감을 바탕으로 자신의 공적을 과시하기 위해 글을 쓰곤 했다. 그러나 그는 회화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 주었다. 수채화(위)에서 베이커는 쇼아에 있는 자신과 아내를 그렸으며, 아래 그림에서는 시르강 지역의 무인(武人)을 표현했다.

캄라시왕이 파견한 사절이 왕이 베이커를 스펙의 '형제'로 인정한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탐험가 새뮤얼 베이커가 그린 <앨버트 냔자호 항해>이다.


제3장

리빙스턴의 남아프리카 탐험


"나는 방대하고 비옥한 아프리카 대륙이 그 신비의 베일을 벗고 유럽인의 경제생활에 유용한 상업시장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 마지막으로 나의 기록이 이 미지의 대륙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 촉진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데이비드 리빙스턴

《선교여행과 남아프리카에서의 연구》

리빙스턴은 선교사, 탐험가, 문명의 사절로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유럽인과 아프리카인을 위해 봉사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나는 열 살 때 방적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했다."라고 리빙스턴은 탐험기에 적고 있다. 리빙스턴이 다닌 공장은 블랜타이어에 있었다. 그는 아침 6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일했다. 또한 야간학교에서 10시까지 수업을 받은 후 자정까지 공부에 전념했다.

"1840년, 3개월의 항해 끝에 나는 케이프타운에 도착했다. 소가 이끄는 마차를 타고 내륙으로 들어가기 위해 알고아만으로 향했다. …… 그곳에서 16년 간 의료봉사와 선교사업에 헌신했다."

리빙스턴

탐험기(期)기에서 식민지 경영기로의 과도기라 할 수 있는 1879년에서 1890년 사이에 조지프 톰슨 또한 잠베지강에서 대호수 지역까지 탐사를 벌였다. 지질학자인 톰슨은 5,000km를 탐험하여 이룬 지리학적 발견 성과보다 그 탐험방법을 통해 더욱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정력가였으나, 언제나 대원들을 사려 깊게 대했고, 분쟁 없이 평화로운 가운데 탐험을 수행해 나가려 노력했다.

리빙스턴은 그의 가족을 동반해 응가미호에 이르렀다.

"수레들을 포기한 지 열이틀째 되는 날. 1849년 8월 1일, 우리는 응가미호의 북동쪽 끝 호수의 만곡부에 도착했다. 우리는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그 아름다운 호수를 음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호수의 수심이 얕아 상업용 선박통로로 사용할 수 없는 점이 못내 아쉬웠다.

리빙스턴

리빙스턴이 잠베지강에서 수집한 노 젓는 흑인들의 뱃노래 중에, "아무도 모른다네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모른다네 그가 어디로 가는지."라는 구절이 있다. 리빙스턴은 "현지주민은 잠베지강을 영물(靈物)로 여겼다."라고 적고 있다. 앙골라에서 인도양까지 2,700km를 흐르는 잠베지강에는 계곡과 폭포가 많아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데 어려움이 따랐다. 위의 수채화는 리빙스턴의 소형증기선 마 로버트호이다.

리빙스턴이 일기를 적어 놓은 종이쪽지(위). 그는 가능한 한 장비를 줄이고자 했는데, 이 때문에 물자부족을 감수해야 했다. 풍경을 묘사하고 탐험행로를 설명하고 육분의(아래)를 이용해 지형지물을 측정하여 그 결과를 기록할 때 쓰는 종이는 무엇보다 귀한 물품이었다. 여행중에 쌓인 피로 때문에 탐험에 관련된 여러 사항을 모두 머릿속에 담는다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그때마다 기록해 두어야 했다. 또한 그는 탐험 도중 불운을 당했을 때 문서를 그들이 만나는 첫번째 백인에게 넘겨주라고 대원들에게 지시해 두었다.

"20분 간 항해한 끝에 우리는 '포효하는 연기'라고 불리는 물안개기둥을 발견했다. 거대한 기둥은 구름과 닿아 있는 듯했다. 밑동이 흰 물안개기둥은 위로 올라갈수록 색깔이 차츰 짙어졌기 때문에 땅에서 솟아오르는 연기기둥처럼 보이기도 했으며, 주변의 큰 나무들이 함께 어우러진 풍경은 이루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강기슭과 점점이 흩어져 있는 섬들에는 환상적인 나무들이 무성해 있었다."

리빙스턴

《선교여행과 남아프리카에서의 연구》

토머스 베인스가 그린 테테 지방을 흐르는 잠베지강 지도(위). 리빙스턴(가운데)과 치세라를 통과하는 리빙스턴 탐험대(아래)

리빙스턴은 노예무역에 대한 식민관청의 묵인을 신랄히 비판했다. "다음날 50명이 넘는 노예가 석방되었다. ……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듯이, 노예대상의 우두머리는 테테 지역에서 노예무역을 수행할 수 있는 권리를 관할 총독에게 허가받았음을 강조했다."

메어리 리빙스턴(위)은 잠베지강 유역에 머물고 있던 남편을 만나기 위해 영국을 출발했다. 강인한 체력과 아프리카에 대한 충분한 사전지식을 숙지했던 메어리였지만, 병에 걸려 동료 의사의 정성스런 치료에도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1862년 4월 사망했다. 그녀는 바오밥나무 아래에 안장되었다.(아래)

리빙스턴의 소형증기선 마 로버트. 정원 36명. 12톤 급 소형증기선은 1858년 탐험을 위해 특별히 제작되었다. 연료소비량이 많고 부식에도 약했던 마 로버트는 속력도 많이 낼 수가 없어 '천식환자(Ashmatic)'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베인스 그림.

스탠리와 리빙스턴의 역사적 만남을 스탠리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양측으로 늘어선 호기심이 가득한 원주민 사이를 지나 아랍인들이 서 있는 곳까지 갔다. '흰 수염을 기른 노인'을 발견한 나는 당장에 그에게 달려가 포옹하고 싶었지만 모여든 군중에 위축되었고 또 그가 나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몰랐기 때문에 그저 형식적인 예절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정중히 그에게 다가간 나는 헬멧을 벗어 들고…….

"잔잔한 호수는 하늘의 푸르름을 반사하며 에머랄드빛을 쏘아댔다."

탕가니카호에서 스탠리

범람하는 강과 싸우고 있는 리빙스턴과 그의 짐끈들.

리빙스턴은 작은 마을에서 그의 일생을 마감했다. 마지막까지 리빙스턴을 간호하던 흑인들은 기도하는 자세로 죽음을 맞이한 그의 최후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

리빙스턴의 유해가 잔지바르에 도착한 것은 1874년 2월이었다. 그의 시신은 각종 서류를 비롯한 그의 유품과 함께 아서 랭에게 전달되었고, 아덴에서 말와호에 옮겨져 4월 16일에야 영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리빙스턴의 시신은 사우샘프턴에서 런던으로 이송되었다. 친구들과 윌리엄 퍼거슨 경이 왼쪽 어깨에 남아 있는 상처자국으로 본인임을 확인했다. 이 상처는 1843년 사자에게 물려 골절상을 입었을 때 남은 것이다.

리빙스턴의 충실한 하인 제이콥 웨인라잇이 잔지바르항에서 고인의 유물을 지키고 있다.


제4장

밀림 속으로


"리빙스턴은 루알라바강을 항해해 내려간다는 것이 어리석은 모험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그렇다. 내가 다시 모험을 한다면 최소한 200명의 소총수를 동반할 것이다. 사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을 백인이 읽을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을 전지전능한 신의 섭리에 맡긴 채 나는 모험을 계속할 것이며 이 글을 계속 써 나갈 것이다."

스탠리

《탐험일기》

캐머런(위)은 1875년에 포르투갈 노예무역상의 활동지역을 횡단했다. 그는 이 지역에서 최초로 인류학적이고 식물학적인 탐사활동을 벌였고 지형을 자세히 관찰해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우기중에 행한 탐험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지만 31개월 간의 여정을 통틀어 사망자는 두 명에 불과했다. 로보이강을 건너는 캐머런 탐험대(아래).

티푸 티브는 중부 아프리카의 가장 유력한 대상으로, 잔지바르 왕의 통제에서 벗어나 낭궤지방에 군림했다. 그는 부하들을 파견해 노예와 상아를 약탈했다.

스탠리의 젊었을 때 모습. 존 롤랜즈는 1841년 영국의 웨일스 지방에서 하녀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14세 되던 해에 미국행 선박에 소년선원으로 고용되어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어떤 상인의 양자로 입양되어 헨리 모턴 스탠리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1865년에 기자생활에 입문한 스탠리는 《뉴욕 헤럴드》에 아비시니아에 관한 기사를 기재했으며 리빙스턴을 구출하여 전설적인 명성을 얻었다.

스탠리는 탐험을 함께한 세 명의 유럽인이 살아 대서양에 다다르지 못했음을 비탄했다. 열대기후에 적응하지 못한 개의 죽음도 슬픈 일이었다. 그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프랭크 포콕, 프레데릭 바커, 잔지바르의 소년, 에드워드 포콕, 칼루루.

애초에는 통째로 운반할 계획이었던 레이디 앨리스호의 분해품. 앨리스호를 여러 조각으로 분해한 사람은 잔지바르의 목수였다. 스탠리는 약혼녀 이름을 배에 붙였던 것인데, 그가 탐험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앨리스는 이미 결혼한 후였다.

아서 젭슨은 1887년 스탠리의 마지막 탐험에 참여했다.

1900년대에 등장하는 광고,

브라자가 프랑스의 이름으로 추진했던  야심적인 식민사업에는 적지 않은 비용이 소요되었다. 비록 스탠리의 대규모 탐험에 비길 바는 아니었지만, 제1차 오고웨강 탐사에 1만 7,500프랑을 지원받은 그는 이후 무려 4만 프랑을 지출했다. 브라자의 초상.

사람들은 인간과 유사한 고릴라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폴 뒤 샤이는 그의 저서 《적도 아프리카 모험과 그 탐사》에서 고릴라의 으르렁거림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밀림 속에서 들리는 소리 중에 고릴라의 포효만큼 괴이하고 무시무시한 것은 없다. 성난 개처럼 시작된 울부짖음은 깊은 저음으로 변하는데, 그것은 멀리서 들려 오는 천둥소리와 같다.

메어리 킹슬리의 인생행로는 매우 독특했다. 1862년에 의사와 하녀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30세 되던 해 한 달 간격으로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집을 떠났다. 독학으로 라틴어, 물리, 화학과 독일어를 습득했던 킹슬리는 열정적인 여행가였던 부친에게서 탐험가 자질을 물려받았다. 여행기와 과학서적이 가득한 부친의 서재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킹슬리는 대영박물관에 새로운 어류의 표본을 기증했음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 신종 어류는 지금도 그녀의 이름을 따라 킹슬리아에(kingsleyae)로 불리고 있다. 그녀는 거추장스러운 알코올이 담긴 어항을 항상 들고 다니면서 그 속에 직접 잡거나 혹은 현지 어부에게서 구입한 물고기를 보관했다.


제5장

탐험가의 세계


얼떨결에 아프리카 탐험에 도전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아프리카가 아마추어 탐험가에게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탐험의 성공 여부는 선두에 서는 탐험가의 노련함에도 달려 있지만, 무엇보다도 짐꾼과 안내인의 능력에 좌우된다고 볼 수 있다. 출발 전의 세밀한 준비작업은 출발 후의 지구력만큼이나 중요하다.

"탐험을 준비하는 사람은 잔지바르에 체류하는 동안 분주히 움직여야 한다. 시간은 쏜살같이 빠르고, 한 순간도 낭비하는 일없이 탐험하고자 하는 지역에서 필요한 피륙, 유리제품, 철사 등을 사들여야 한다."라고 스탠리는 그의 탐험일기에 적고 있다.

콩고를 탐험중인 프랑스 탐험가, 루이 미종 대위.

탐험가는 상류 계층 출신은 아니었지만, 다독(多讀)과 자연과학에 대한 열정으로 지식인 계층에 편입될 수 있었다.

인부들이 장 밥티스트 마르샹의 보트를 분해해 운반하고 있다.

19세기 초 상아 수출량이 증가한 것은 유럽 상류층에서 수요량 증가에 따른 결과였다. 피아노 건반, 당구공, 거실의 장식용품으로 사용되던 상아의 교역은 앙골라의 쵸크웨족이나 남웨지족의 생활에 사회적, 경제적인 대변혁을 초래했다. 현지에서는 무용지물에 불과한 상아가 결국 이들 원주민을 세계경제에 편입시킨 셈이었다. 그리고 현실적인 면에서는 상아를 넘겨준 대가로 소총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프랑스의 마르샹 대위는 150명의 세네갈인 소총수를 거느렸다. 다재다능한 흑인 병사들은 짐꾼 역할은 물론 장교의 시중을 드는 하인으로도 손색이 없었다. 프랑스 우편엽서는 당시 식민정책의 홍보를 위해 자국의 위대함을 상징하는 사진을 담곤 했다.

스탠리와 그의 일꾼을 묘사한 19세기 목판화에는 1871년부터 그의 시중을 들었던 칼룰루가 보인다. "나는 그가 일을 배우는 데 남다른 자질이 있음을 발견하고 하인으로 고용했다. 더 이상 일을 잘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였다. 셀림도 식탁에서 그만큼 내가 필요한 것을 빨리 알아채지 못했다. 칼루루의 생동감과 민첩성은 상상을 초월했는데, 그의 작고 검은 두 눈은 끊임없이 사물을 관찰하고 관찰을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점을 찾아낼 뿐만 아니라 곧 필요하게 될 일까지도 생각해 냈다." 칼룰루는 1877년 스탠리가 그의 이름을 붙인 콩고강의 폭포에 휘말려 사망했다.

파쇼다 사건의 영웅, 장 밥티스트 마르샹 대위의 활약을 소재로 한 선전물. 마르샹은 19세기 말 프랑스의 국민적인 영웅으로 부상했다. 그는 다카르와 지부티에 이르는 대서양-홍해의 연결축을 확보하기 위한 임무를 띠고 콩고강에서 나일강에 이르는 지역을 탐사했다. 1896년, 마르샹 대위는 대규모 탐험대를 인솔하여 나일강 상류로 진격하던 중 프랑스에 대항하는 세력을 평정이라는 명분으로 무차별하게 진압하기도 했다. 1898년 7월, 마르샹 탐험대가 수단의 파쇼다(오늘날 코독)에 도착해 프랑스 국기를 게양하려고 할 때, 호레이쇼 키치너가 지휘하는 2만에 달하는 영국과 이집트 연합군이 그곳에 도착했다. 영국과 프랑스 간에 외교적 위기상황이 야기되었다. 결국 프랑스가 11월에 철수명령을 내렸다. 파쇼다 사건으로 프랑스는 외교적 굴욕을 당했는데, 국내 민족주의자들은 이 사건을 애국주의를 고취하는 선전물로 삼았다.

스펙과 그랜트의 충성스런 수행원들. 리빙스턴은 현지인에게 아프리카 횡단을 도와 준 데 대해 감사를 표했다. "세켈레투가 황소 12마리와 괭이, 유리구슬 등을 제공했고 나는 그것으로 작은 배를 하나 살 수 있었다. 그의 관대함이 없었다면 탐험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결국 동부 해안까지 갈 수 있도록 지원해 준 것은 콜롤로족과 몇몇 아프리카 부족들인 셈이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히 감사할 것이다."

리빙스턴의 '발견여행'을 수행한 추마와 수시. 여기서 발견여행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개념이다. 오래 전부터 아프리카인은 유럽인이 발견한 지역을 지배하는 왕자였다.

사실상 아프리카 흑인과 몇몇 아랍인이 대육 내부 지리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공표하지 않은 것은 외부인이 그곳에 눈독들이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무바릭 봄베이는 스펙과 버턴 탐험대에 참여했다.

체체파리는 인간과 동물에게 잠자는 병을 불러일으킨다. 체체파리의 분포는 지역에 따라 달랐는데, 리빙스턴은 체체파리가 극성을 부리는 지방을 통과할 때는 밤을 이용해 이동했다.

인부를 권총으로 겨누고 있는 스탠리는 인부를 함부로 다룬 것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행군 도중 공개재판을 열어 처벌을 결정하기도 했다. 재판을 통해 사형을 선고받은 다섯 명 중 두 명의 살인자와 한 명의 탈주자에 대한 집행은 실행되지 않았다.

콩고 원주민의 지도자. 마코코의 초상.



1739년에 제작된 이 프랑스 지도는 아프리카 서부 해안을 나타내고 있다.


무테사왕이 베푼 성대한 환영식에 입장하는 스탠리.

망설임 끝에 몇몇 탐험가는 아프리카 축제에 동참했다. 우쿨리마와 어울려 춤추고 있는 그랜트.

탕가니카호 주변의 한 원주민 부락에서 환영의 뜻을 담은 상아를 증정받는 리빙스턴.


베이커는 언제나 차분함을 보여 주었다. 소 등에 올라타 흑인 전사들의 전투력을 평가하는 모습.

노예무역을 반대하면서도 탐험가들은 종종 그들의 안전을 위해 노예상들과 행로를 같이해야 했다.

Esquisse des découvertes de R. F. Burton et de J.-H Speke dans l'Afrique orientale... / par V. A. Malte Brun - 1



아프리카의 강들에 산재하는 폭포와 급류는 증기선을 이용한 편안한 원정을 기대했던 탐험가들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윌리엄 해리슨의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 <월산>의 두 주인공.

아프리카 탐험가로 영원히 기억될 스펙과 그랜트.

《뉴욕 헤럴드》지의 사장. 제임스 고든 베넷.






저작자 표시
posted by 드무 황영찬

2014-086 HOW TO READ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레이 몽크 지음 | 김병화 옮김

2007, 웅진지식하우스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31811


082

하66ㅇ v. 1


우리가 철학자에 대해 관심을 가질 때는 대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철학자의 사상이 흥미를 끄는 경우와,

한 인간으로서 그 철학자가 흥미를 끄는 경우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두 가지 모두에서 흥미를 끄는 인물이다.

그의 철학은 현대 철학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그의 생애는 그의 철학에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도

충분히 흥미를 가질 만큼 독특했다.


●  ●  ●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도발적인 작가와 사상,

그들의 글을 원전으로 직접 만난다


현대 철학사의 획기적 전환을 이끌어낸

괴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평생 동안 오직 단행본 한 권, 논문 한 편, 서평 한 편만을 발표했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하는 새로운 방식, 철학이라는 주제의 역사에서 전례 없는 방식을 고안해냈다. 언어가 철학의 중심이라고 말하는 비트겐슈타인은 특이한 시적 글쓰기 방식 때문에 동료들과 현격하게 구분된다. 저자 레이 몽크는 비트겐슈타인의 사고 바탕에 우리 시대의 과학주의적 성격에 저항하고 비과학적 형태의 이해에 자율성과 고결성이 있음을 주장하려는 단호함이 있다고 말한다.

그가 철학에 접근하는 방법은 《논리-철학 논고》에서 제시되었던 견해, 즉 철학이 과학, 혹은 과학 비슷한 어떤 것일 수도 없다고 하는 입장을 충실하게 견지하려는 방식이었다. 그것은 원리들로 구축된 하나의 전체가 아니라 언어가 던지는 마술에 의해 빚어진 혼란을 청소하는 활동이다.


HOW TO READ 시리즈

위대한 사상, 세기의 저작을 원전으로 직접 만나는 특별한 기회, HOW TO READ 시리즈, 이 시리즈는 세계적 석학들의 안내를 받으며 사상가들의 저작 중 핵심적인 부분을 직접 읽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읽는 척 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제대로 읽을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우리시대 교양인을 위한 고품격 마스터클래스가 될 것이다.


레이 몽크 Ray Monk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수리철학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를 움직인 100대 인물에 철학자로는 유일하게 꼽힌 우리시대의 대표적 철학자다. 현재 영국의 사우샘프턴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국내에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작가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김병화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철학과에서 석 ·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번역 · 기획 네트워크 '사이에'의 위원으로 활동하고 잇다. 옮긴 책으로 《쇼스타코비치의 증언》《나의 기쁨과 슬픔 : 첼리스트 카잘스》《이 고기는 먹지 마라?》《공화국의 몰락》 등이 있다.


차례


■ HOW TO READ 시리즈를 열며

■ 저자 서문 | 철학을 하는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내다


1 케임브리지의 루트비히 | <케임브리지 리뷰>

2 세 단어로 철학을 청소하다 | 《논리-철학 논고》, 서문

3 세계를 그려보다 | 《논리-철학 논고》

4 명제란 무엇인가 | 《논리-철학 논고》

5 철학은 학설이 아니라 활동이다 | 《논리-철학 논고》

6 1929년, 케임브리지의 루트비히 | 《논리적 형식에 관한 몇 가지 언급들》

7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 | 《철학적 탐구》

8 합리주의를 뒤흔드는 언어 게임 | 《청색 책

9 상자 속의 딱정벌레, 사적 언어 | 《철학적 탐구

10 비트겐슈타인과의 대화 | 《철학적 언급들》, 서문 초고

11 과학과 예술의 결정적 차이 | 《철학적 탐구》, 제2부


■ 주

■ 비트겐슈타인의 생애

■ 함께 보면 좋은 자료

■ 역자 후기 | 비트겐슈타인을 이해하는 결정적 힌트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에 대해 가진 태도는 학술 기관에 몸담고 있는 전문적 철학자들이 보이는 지배적인 태도와는 아주 달랐다.

그는 철학을 일차적으로 직업으로서는 물론 학술적 주제로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볼 때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활동이었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사업가였던 것처럼 자신은 철학에 대해 사업적인 태도를 가졌다고 말하곤 했다.

마치 사업가가 책상 위에 쌓인 문제를 처리하는 것처럼 철학적 문제를 처리하고자 한 것이다.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애쓰지 않아야만 아무것도 상실되지 않는다.

하지만 말해질 수 없는 것은 말해진 것 속에-말로 할 수 없이-담겨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분명히 비트겐슈타인의 이념이 되었다.

표현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려고 시도하지 않음으로써 소통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세계'에 대한 논쟁은 다른 모든 철학적 문제처럼 우리 언어의 논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며, 그렇기 때문에 명제의 정확한 분석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비트겐슈타인은 믿었다.


의미 있는 명제는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상태를 그리는 것에 한정되는 데 비해, 윤리적이거나 미학적이거나 종교적인 가치는 세계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한다면 윤리적 사실이란 것은 없다.

윤리적 명제가 있을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철학의 과제는 우리 언어의 논리가 갖는 진정한 본성을 드러내고, 그럼으로써 그 논리가 오해되었을 때 발생하는 철학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일이다.

철학적 문제를 이런 방식으로 가장 잘 해결하려면 사례 연구 차원으로 내려가야 한다.

따라서 철학은 학설이 아니라 활동이다.


이러한 외관상 사소하고 기술적인 것 같은 양보를 하고 나면 전체 이론이 해체되어버리며, 비트겐슈타인에게는 《논리-철학 논고》의 이론에 난 구멍을 수리하는 정도가 아니라 논리학과 언어에 대한 자신의 접근법 전체를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하는 문제가 남는다.

1929년에 케임브리지에 돌아온 다음 해부터 그가 한 일이 이것이었다.


우리의 고찰에는 어떤 가설적인 것도 있으면 안 된다.

우리는 모든 설명(explanation)을 배제해야 하며, 기술(description)만 남겨두어야 한다.

이 기술은 철학적 문제들에서 그 빛, 즉 목적을 얻는다.

물론 이것들은 경험적 문제가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 언어의 작동 과정 및 설령 그에 대해 오해하게 만드는 충동이 있을지라도 그 과정을 우리가 깨닫게 만들어주는 방식을 조사함으로써 해결된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종류의 문장이 있는가?

단언문, 의문문, 명령문이 있다고?

문장의 종류는 수도 없이 많고, 우리가 '상징', '단어', '문장'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용도도 수없이 다양하다.

이런 다수성은 뭔가 단번에 영원히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종류의 언어, 새로운 언어 게임이 존재하게 되며, 다른 것들은 구식이 되고 잊혀진다.


한 사람이 그 자신의 내면적 경험, 즉 감정, 기분 등등을 자기 혼자만 사용하기 위해 음성적으로 표현하거나 글로 적을 수 있는 언어도 상상할 수 있을까?

-글쎄, 우리도 일상 언어에서 그렇게 하지 않던가?-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언어의 각 단어들은 말하는 인물에게만 알려질 수 있는 것, 즉 그의 아주 일차적이고 사적인 감각 지각을 지칭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다른 인물은 그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


내게는 그의 반대로 명료성, 명석성이 그 자체로서 귀중하다.

나는 건물을 쌓는 데는 관심이 없고, 지을 수 있는 건물의 기초를 명료하게 보는 관심이 있다.

그러니 내가 겨누는 과녁은 과학자들의 것과 같지 않으며, 나의 사고방식은 그들의 것과 다르다.


어떤 사람이 어떠어떠한 심리 상태에 있다는 것, 예를 들면 시늉만 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증거에 의거해 확신하는 것은 분명히 가능하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증거'에는 '계량 불가능한' 증거가 포함된다.


비트겐슈타인의 생애


1889년 4월 26일 빈에서 카를과 레오폴디네의 여덟 번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남.

1903~1906년 린츠의 실업학교에 다님.

1906~1908년 베를린의 샤를로텐부르크에 있는 기술고등학교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함.

1908~1911년 맨체스터에서 항공공학을 공부함.

1911년 버트런드 러셀에게서 배우기 위해 케임브리지에 감.

1913년 코피의 《논리의 과학》 서평을 <케임브리지 리뷰>에 발표함.

1913~1914년 노르웨이에서 혼자 살면서 논리학의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연구함.

1914년 6월 빈에 도착했으나, 여름을 보낸 뒤 다시 노르웨이로 돌아가려고 생각함.

1914~1918년 오스트리아 군대에 입대해 처음에는 러시아 전선에서, 다음에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복무함.

1918~1919년 이탈리아 포로 수용소에서 1년을 보냄. 《논리-철학 논고》를 완성함.

1919~1920년 빈에서 교사 수련을 받음.

1920~1922년 저지 오스트리아의 트라텐바흐의 초등학교에서 가르침. 《논리-철학 논고》가 출판됨.

1922~1924년 푸흐베르크의 초등학교에서 가르침. 프랭크 램지가 방문함.

1924~1926년 오테르탈의 초등학교에서 가르침.

1926~1928년 빈에서 건축가로 일함.

1929년 프랭크 램지와 함께 연구하기 위해 케임브리지로 돌아감.

1930년 램지의 죽음.

1931년 비트겐슈타인이 케임브리지에서 강의하기 시작.

1933년~1934년 강의하는 대신 학생들에게 《청색 책》을 구술함.

1934~1935년 소수의 학생들에게 《갈색 책》을 구술함.

1935년 소련을 방문.

1936~1937년 노르웨이에서 살면서 현재 《철학적 탐구》의 1부가 되어 있는 내용을 대부분 집필.

1938년 3월 12일 오스트리아와 나치 독일이 병합됨. 비트겐슈타인은 독일 시민이 됨.

1938년 4월 영국 시민이 됨.

1939년 2월 11일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철학 교수로 선출됨.

1941~1942년 런던의 가이 병원에서 짐꾼으로 일함.

1942~1944년 뉴캐슬에서 의학 연구 프로젝트의 실험실 조수로 일함.

1944~1947년 케임브리지에서 강의.

1947년 케임브리지 교수직을 사임.

1947~1949년 아일랜드에서 살면서 현재 《철학적 탐구》의 2부가 되어 있는 부분을 집필.

1950년 마지막으로 오스트리아를 방문.

1951년 4월 28일 케임브리지에서 사망.


저작자 표시
posted by 드무 황영찬

2014-085 사진, 새로운 눈


최건수 엮음

2014, BMK



대야도서관

SB100330


668

최14ㅅ


사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간단히 말하면 그냥 좋아서, 어떤 대가도 없이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가끔은 누군가 알아보기도 하고

한 수 배우고 싶다고 찾아오기도 한다.

그게 내가 알고 있는 성공의 노하우다.


2013년 3월 개강과 함께 9명의 사진 벗들과 책을 한 권 만들자고 의기투합했다.

나랑 일 년 동안 일 주일에 한 번씩 사진을 핑계 삼아 놀던 분들이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일 주일에 한 번 만나서(때때로 배우고 익히면서) 재미나게 놀았다(기쁘지 아니한가?) 남들보다 특별히 열심히 한 것도 없다.

때때로 만나 공부(?)하고 떠들고 놀다 보면 뭐 좀 남는 것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믿음으로 세월을 보냈다. 콩나물 시루에 부은 물이 다 빠져나갔다고 콩나물이 크지 않는 것은 아니다. 뭔가 계속 붓다 보면 사진도 조금씩 커갈 것이다.

이 여유로움으로 사는 인생이 즐겁다. 더 무엇을 욕심 낼 것인가?


차례


엮은이의 글

강혜숙 | 쓸쓸함을 위하여

김종성 | 겨울 오디세이

류태숙 | 사소한 신화

서병용 | 물의 뿌리

오은주 | 점 · 선 · 면

이동숙 | 봄부터 여름까지

이윤자 | 빛의 노래

이중찬 | 산의 명상

전효기 | 흰구름의 산책

후기


최건수

1953년에 태어났다. 1980년 이후 사진평론가, 사진가, 전시 기획자, 사진교육자로 살아오고 있다. 1989년 《동아미술제》에서 미술상을 수상했다. 1991년 제1회 개인전 《Reconstruction》을 시작으로 2009년 제9회《한국현대미술제》에서 <Soulwave>를 발표했고, 제1회《ABSGRAPHY》, 《2009 SIPA》 등을 통해 새로운 작업을 선보였다. 2013년에는 회갑 기념전 《TEXT》를 개최했다. 기획한 전시로 《우리 시대의 사진가》(1994), 《5028, 사람 그리고 景》(2007), 《한국사진의 프런티어》(2008), 자연과 사물》(2009), 《사진의 터》(2013) 등이 있다. 지은 책으로 『우리 시대의 사진가들』(1995), 『사진 그리고 삶』(1999), 『사진 속으로의 여행』(2004), 『한국사진의 프런티어』(2008), 『사진 읽는 CEO』(2009), 『제주 올레, 행복한 비움 여행』(2010), 『사진을 바꾼 사진들』(2011), 『TEXT』(2013), 『사진 직설』(2014) 등이 있다.

작은 세계에서 보는 큰 세계

세계가 걸어 들어온다

석산에서 만나는

억만 겁의 삶의 흔적


삶이 힘들 때

그 산에 오른다

말 없는 산이 나를 위무한다.


산다는 것은 꿈꾸는 것이리라

마음을 밟고 지나가는 초침 소리.

왜일까?

심장이 말랑말랑해진다.

어둠은 밝음을 다독이고…

생각은 늘 제멋대로

잠시 세월을 묶어두기

위해서는

생각을 멈출 필요가 있다.

알 수 없는 길을 걸었다.

이제는 가물가물한 무수한 소망들이

낙엽처럼 떨어져 뒹군다.

이를 어쩌나!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다고

세상을 쓸쓸하다고 말하지 말자.




저작자 표시
posted by 드무 황영찬

2014-084 한국의 나비


글 / 남상호●사진 / 남상호, 이수영

1999,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23146


082

빛12ㄷ  224


빛깔있는 책들 224


남상호-------------------------------------------------------------------------

1949년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생물학과 및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고려대학교 한국곤충연구소 연구원 및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대전대학교 생물학과 교수로 있다. 곤충 관련 논문 50여 편을 발표하였으며, 저서로는 『한국동식물도감 곤충편 · 』『유아용 그림책』『한국의 곤충』『원색도감 한국의 곤충』『한국곤충생태도감』 등 18권이 있으며, 『과학 앨범』 등 63권의 곤충 분야 책을 감수하였다.


이수영-------------------------------------------------------------------------

1953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으며, 10여 년 동안 국내외를 다니며 곤충의 세계를 촬영하여 왔다. 1996년 3월부터 1997년 1월까지 용인 에버랜드에서 곤충사진전을 개최한 바 있다. 저서로는 '한국의 자연탐험' 시리즈 가운데 『야생벌』『사슴벌레』『메뚜기』『개구리』『장수풍뎅이』『반딧불이』 등 생태서적 6권과 『한국곤충생태도감』(5권) 『곤충을 찾아서』 등이 있다. 현재 출판, 신문, 잡지 분야에서 곤충사진가로 활동중이며, 한국 생태사진가협회 홍보이사로 있다.


|차례|


우리나라의 나비 실태

나비와 나방

나비의 한살이

계절에 따른 나비의 출현

나비들이 즐겨 사는 곳

우리나라의 주요 나비

보호가 필요한 나비

한국산 나비 목록 일람표

찾아 보기

참고 문헌

산네발나비

흰무늬왕불나방


호랑나비의 한살이




배추흰나비

조흰뱀눈나비

네발나비

번데기

모시나비

애호랑나비(이른봄애호랑나비)

Luehdorfia puziloi(Erschoff)

모시나비

Parnassius stubbendorfii Menetries

꼬리명주나비

Sericinus montela Gray

사향제비나비

Atrophaneura alcinous (Klug)

호랑나비

Papilio xuthus (Linnaeus)

산제비나비

Papilio maackii Menetries

제비나비

Papilio bianor (Cramer)

기생나비

Leptidea amurensis (Menetries)

북방기생나비

Leptidea morsei (Fenton)

남방노랑나비

Eurema hecabe (Linnaeus)

극남노랑나비

Eurema laeta (Boisduval)

각시멧노랑나비

Gonepteryx aspasia (Menetries)

멧노랑나비

Gonepteryx rhamni (Linnaeus)

노랑나비

Colias erate (Esper)

갈구리나비

Anthocharis scolymus (Butler)

대만흰나비

Pieris canidia (Sparrman)

배추흰나비

Pieris rapae (Linnaeus)

큰줄흰나비

Pieris melete (Menetries)

줄흰나비

Pieris napi (Linnaeus)

풀흰나비

Pontia daplidice (Linnaeus)

참까마귀부전나비

Fixsenia eximia (Fixsen)

큰주홍부전나비

Lycaena dispar (Haworth)

작은주홍부전나비

Lycaena phlaeas (Linnaeus)

남방부전나비

Pseudozizeeria maha (Kollar)

암먹부전나비

Everes argiades (Pallas)

푸른부전나비

Celastrina argiolus (Linnaeus)

산꼬마부전나비

Plebejus argus (Linnaeus)

부전나비

Lycaeides argyrognomon (Bergtraisser)

작은홍띠점박이푸른부전나비

Scolitantides orion (Pallas)

뿔나비

Libythea celtis (Laicharting)

왕나비

Parantica sita (Kollar)

봄어리표범나비

Mellicta britomartis (Assmann)

여름어리표범나비

Mellicta ambigua (Menetries)

작은은점선표범나비

Clossiana perryi (Butler)

큰표범나비

Brenthis daphne (Denis et Schiffermuller)

흰줄표범나비

Argyronome laodice (Pallas)

큰흰줄표범나비

Argyronome ruslana (Motschulsky)

암끝검은표범나비

Argyreus hyperbius (Linnaeus)

은줄표범나비

Argynnis paphia (Linnaeus)

은점표범나비

Fabriciana adippe (Linnaeus)

제이줄나비

Limenitis doerriesi Staudinger

제일줄나비

Limenitis helmanni Lederer

별박이세줄나비

Neptis pryeri Butler

황세줄나비

Neptis thisbe Menetries

중국황세줄나비

Neptis tshetverikovi Kurentzov

두줄나비

Neptis rivulatis (Scopoli)

북방거꾸로여덟팔나비

Araschnia levana (Linnaeus)

거꾸로여덟팔나비

Araschnia burejana Bremer

네발나비(남방씨-알붕나비)

Polygonia c-aureum (Linnaeus)

산네발나비(씨-알붐나비)

Polygonia c-album (Linnaeus)

청띠신선나비

Kaniska canace (Linnaeus)

큰멋쟁이나비

Vanessa indica (Herbst)

작은멋쟁이나비

Cynthia cardui (Linnaeus)

먹그림나비

Dichorragia nesimachus (Doyere)

황오색나비

Apatura metis Freyer

번개오색나비

Apatura iris (Linnaeus)

은판나비

Mimathyma schenckii (Menetries)

밤오색나비

Mimathyma nycteis (Menetries)

유리창나비

Dilipa fenestra (Leech)

대왕나비

Sephisa princeps (Fixsen)

물결나비

Ypthima motschulskyi (Bremer et Grey)

애물결나비

Ypthima argus Butler

산지옥나비

Erebia neriene (Bober)

도시처녀나비

Coenonympha hero (Linnaeus)

굴뚝나비

Minois dryas (Scopoli)

조흰뱀눈나비

Melanargia epimede (Staudinger)

부처나비

Mycalesis gotama Moore

부처사촌나비

Mycalesis francisca (Cramer)

왕팔랑나비

Lobocla bifasciata (Bremer et Grey)

왕자팔랑나비

Daimio tethys (Menetries)

멧팔랑나비

Erynnis montanus (Bremer)

수풀알락팔랑나비

Carterocephalus silvicola (Meigen)

참알락팔랑나비

Caterocephalus diekmanni (Graeser)

돈무늬팔랑나비

Heteropterus morpheus (Pallas)

지리산팔랑나비

Isoteinon lamprospilus C. et R. Felder

유리창떠들썩팔랑나비

Ochlodes subhyalina (Bremer et Grey)

수풀떠들썩팔랑나비

Ochlodes venatus (Bremer et Grey)

황알락팔랑나비

Potanthus flavus (Murray)

줄점팔랑나비

Parnara guttata (Bremer et Grey)




저작자 표시
posted by 드무 황영찬

2014-083 대한민국 기차여행의 모든 것


병국 · 박준규 · 정진성 지음

2014, 지식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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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괜찮은 여행을 즐기려면 자신의 여행에 대한 취향부터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박2일을 즐길 만한 체력을 갖췄는지?"와 같은 기초적인 질문에서부터 "내가 좋아하는 여행의 모습은 자연 관광인지, 도시 구경인지, 쇼핑몰만 크면 되는지, 그저 풍경 좋은 곳으로 기차만 타고 다녀도 즐거운지"에 대한 질문에 어느 정도 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또 하나 준비해야 할 것은 '기차 탄다는 것'의 즐거움을 이해하는 것이다. 먼 곳은 왕복 10시간 이상 기치만 타고 가야 하는데, 내려서 잠깐 구경하고 집에 오는 것만 생각한다면 절대 행복한 여행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기차여행은 목적지만큼이나 차창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여행 코스가 무척 중요하다.


임병국 | badajr@naver.com

한국의 기차역을 모두 답사하고 등록문화재 지정(16개)에도 참여했다. 점점 사라져가는 간이역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간이역 여행》을 출간한 바 있으며, 코레일 사보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우리가 지키고 가꿔야 할 한국의 개념 여행지 발굴과 우리만의 독특한 철도문화를 알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박준규 | pcfixman@hanmail.net

                   http://facebook.com/pcfixman

코레일 명예기자, 사보 취재기자, 고객대표, KTX 탑승 1호 승객, 망상역 명예역장, 청량리-정동진을 기차로만 300회 이상 완주하는 등 자타공인 대한민국 기차여행 전문가다. 오늘도 기차여행의 활성화를 위해 열심히 여행 중인 그는, 블로그와 페이스북 그리고 카페에 최신 여행정보를 실시간으로 포스팅하는 부지런한 여행작가다. 기차여행 떠날 때 그의 컨설팅은 필수!


 정진성| serm001@naver.com

네이버 철도동호회 '엔레일'의 운영자이자 국내 유일의 철도잡지 <레일러> 기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휴일만 되면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변신하여 행방이 묘연해지기 일쑤이다. 혼자 알기 아까운 아름다운 기차여행지를 소개하는 데 탁월한 감각을 지녔다.


철도동호회 엔레일

http://nrail.net

망상역 명예역장 블로그

http://traintrip.kr

기차여행기를 적는 사람들

http://cafe.daum.net/traintripwrite

철도 전문 매거진 레일러

http://cafe.naver.com/railers


CONTENTS


INTRO  내가 원하던 진짜 괜찮은 기차여행

           기차여행 갈 때 꼭 챙기자


PART 1

기차 여행자들을 위한 특별한 팁


01 기차표, 이렇게 구입하자

02 할인! 할인! 알면 돈 번다

03 기차, 알차게 이용하자

04 기차여행 고수들만 아는 팁

05 기차여행 업그레이드 노하우 Best 10

06 기차여행에 도움이 되는 사이트 Best 7

07 코레일 여행상담센터

08 기차여행 전문 여행사 총정리

09 열차 소개


PART 2

기차여행의 고수 3인이 추천하는 Best 코스


01 당일 코스

    박준규 추천 | 부산역

    임병국 추천 | 광천~청소 둘레길

    정진성 추천 | 경주역

02 무박2일 코스

    박준규 추천 | 정동진역, 강릉역

    임병국 추천 | 목포역

    정진성 추천 | 원주역, 해운대역

03 1박2일 코스

    박준규 추천 | 순천역, 곡성역

    임병국 추천 | 예천~안동 문화여행

    정진성 추천 | 영동지방 정복 프로젝트

04 2박3일 코스

    박준규 추천 | 울릉도, 독도여행

    임병국 추천 | 남남여행

    정진성 추천 | 사랑해! 충청

05 자유여행패스를 이용한 3일 코스

    박준규 추천 | 강원도 완전정복

    실전! 자유여행패스를 이용한 3일 코스 짜기

06 내일로여행자를 위한 전국일주 코스(4일 이상)

    박준규 추천 | 강원도, 경상북도, 부산

    임병국 추천 | 반시계 방향 남부지방 일주

    정진성 추천 | 내일로와 함께하는 전국일주

    유서 깊은 도시로 떠나는 내일로여행 일정표


PART 3

한국의 특별한 관광열차 & 여행 Best 13


01 교육전용관광열차(E트레인)

02 와인시네마트레인

03 레일크루즈 해랑

04 바다열차

05 중부내륙순환열차(O트레인)

06 협곡열차(V트레인)

07 경북관광순환테마열차

08 에코레일자전거열차

09 남도해양관광열차(S트레인)

10 꼬마열차

11 팔도장터관광열차

12 부울경관광테마열차(BUGs-Train, 침대열차)

13 평화생명벨트열차(DMZ트레인)


PART 4

테마가 있는 기차여행


01 명승고적을 찾아 떠나는 기차여행 | 백양사역, 기장역

02 맛집 여행 | 안동역, 전주역, 춘천역

03 전망이 있는 숙박여행 | 목포역, 정동진역

04 산으로 계곡으로 | 소백산역, 동해역

05 박물관 기행 | 청주역

06 도시 습격 프로젝트 | 대전역, 대구역, 부산역, 광주역

07 바다가 보이는 기차여행 | 강릉역, 정동진역

08 느림의 미학을 느낄 수 있는 기차여행 | 영동선, 경전선, 경북선

09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기찻길을 찾아서 | 동해남부선, 경전선, 장항선, 중앙선

10 오지 간이역을 찾아 떠나는 소박한 여행 | 양원역, 승부역, 화본역, 각계역, 신림역

11 철길 풍경이 있는 기차여행 | 아우라지역

12 기차만 타고 다니는 'only 기차여행' | 추전역, 승부역

13 기차와 버스를 함께 타고 떠나는 복합여행 | 정바레

14 영화 촬영지를 찾아 떠나는 기차여행 | 옛 구둔역, 옛 곡성역, 공전역

15 스탬프 습격 프로젝트 | 전국

16 프로스포츠와 함께하는 기차여행 | 부산역, 전주역, 태백역

17 폐선 따라 걷는 여행 | 레일길

18 역사를 찾아 떠나는 가족여행 | 온양온천역, 창원역, 함백역

19 대한민국 럭셔리 기차여행 | 레일크루즈 해랑

20 四계절 축제 기차여행 | 진해, 보령, 정읍, 화천


PART 5

지역별 대한민국 기차여행의 모든 것


강원도

01 강릉역 / 정동진역

02 태백역 / 추암역

03 동해역 / 추암역

04 망상역

05 정선역 / 아우라지역

06 영월역

07 춘천역 / 강촌역


전라도

01 보성역

02 여수엑스포역 / 순천역

03 남원역 / 곡성역

04 목포역

05 군산역

06 전주역

07 정읍역 / 백양사역

08 광주역 / 광주송정역


충청도

01 대천역

02 제천역 / 단양역

03 홍성역

04 충주역 / 삼탄역

05 천안역 / 온양온천역

06 대전역 / 옥천역

07 논산역 / 연산역

08 영동역


경상도

01 경주역 / 포항역

02 진주역

03 영주역 / 풍기역

04 김천역 / 구미역

05 부산역 / 해운대역

06 동대구역

07 안동역 / 예천역

08 밀양역 / 청도역

09 창원역 / 진해역

10 봉화역 / 승부역

11 점촌역


수도권

01서울역

02 수원역

03 임진강역 / 도라산역

04 연천역 / 신탄리역

05 가평역 / 청평역

06 인천역 / 인천국제공항역

07 백마고지역


부록 기차여행자들을 위한 추천 숙소


특별부록

전국 기차역 연계 시티투어 코스 BEST 29 핸디북



저작자 표시
posted by 드무 황영찬

2014-082 서양 고전음악 감상법


글, 사진 / 조성진

1999,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23145


082

빛12ㄷ 223


빛깔있는 책들 223


조성진-------------------------------------------------------------------------

1947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오스트리아 빈대학과 빈국립음대, 독일 함부르크대학과 미국 인디애나대학교 대학원에서 연극학, 음악학, 오페라 연출을 전공하였다. 1980년부터 「아이다」를 시작으로 「꿈」, 「코지 판 투테」, 「피가로의 결혼」, 「앨버트 헤링」 등 많은 오페라를 연출하였다. 1995년부터 1998년까지 예술의전당 초대 예술 감독으로 재직하였다. 저서에는 『오페라 감상법』이 있다.


|차례|


머리말

고전이란 무엇인가

감상의 시작

고전음악의 장르

음악사의 큰 산맥들

올바른 감상을 위하여

연주회장에서의 매너

감상과 병행할 일들

음악 발전을 위하여

부록 - 1600년 이후의 주요 작곡가

마르타 아르헤리치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1960년대 중반에 뛰어난 젊은 피아니스트로서 세계에 소개된 이후 오늘날까지 그명성을 잃지 않고 있다.

18세기의 오페라 공연  하이든이 오래 재직했던 에스터하지 궁에서 자신의 오페라를 공영하는 광경. 이처럼 귀족이 존재했던 시기의 작곡가들은 대개 귀족이 소유한 개인 오케스트라의 악장이었다.

1780년경의 모차르트 가족  볼프강 아마데우스와 손위 누이 마리아 안나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있고 그 앞에 자녀를 위해 헌신적이었던 부친 레오폴트가 바이올린을 들고 있다. 벽에 걸린 초상화는 작고한 모친 안나 마리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독일을 대표할 뿐 아니라 유럽에서 가장 전통적이고 권위있는 오케스트라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주무대인 베를린 필하모닉 홀은 전통에서 벗어난 현대적 스타일의 콘서트 홀을 대변한다.

멜로스 현악 4중주단  19세기 독일 작곡가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폭넓은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는 현재 독일을 대표하는 중견 현악 4중주단이다. 왼쪽부터 빌헬름 멜허, 게르하르트 포스, 헤르만 포스, 페터 부크.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20세기 러시아의 작곡가로 리스트처럼 피아노의 대가였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이 무지치

리카르도 무티

레너드 번스타인

모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볼프강 자발리쉬

주빈 메타

구스타프 말러의 지휘 모습  1899년 빈의 신문에 나온 말러의 모습이다. 말러는 빈의 왕립 오페라 하우스를 이끌면서 타협을 모르는 지휘로 뛰어난 작품 해석을 했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유럽에서 가장 전통적이자 가장 보수적인 성향의 오케스트라이기도 하다. 그들만의 독특한 사운드를 지킨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의 연주를 뒷받침해 주는 데 주연주장인 빈의 무직페라인 홀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무직페라인 홀은 유럽에서 가장 음향이 좋은 몇 안 되는 전통적인 연주장 중의 하나이다.

칼 뵘  모차르트와 슈트라우스를 중심으로 독일계 음악을 주된 레퍼토리로 하는 오스트리아 지휘자이다. 거의 전적으로 음악적인 바탕 위에서 출발하는 오스트리아풍의 꼼꼼한 지휘를 대표한다.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기돈 크레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1850년의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슈만 부부  클라라는 뛰어난 현역 피아니스트였고 두 사람은 부부애로도 유명했다. 슈만의 피아노곡들은 거의 모두 표제음악들이다.

현악 4중주  20세기가 끝나가는 이 시점에서도 현악 4중주는 전통적인 실내악의 중심을 이룬다. 세계적 현악 4중주단인 독일의 멜로스 현악 4중주단.

후고 볼프  오스트리아 작곡가 로거의 가곡에만 전념했고 독일어의 언어 멜로디를 파고들어 독특한 경지를 이룩했다.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18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독일 출신이지만 주로 영국에서 활약했다. 18세기 오페라의 거장이었다가 말년에는 「메시아」를 비롯한 걸작 오라토리오들을 썼다.

17세기의 오페라 하우스  베네치아의 상인들은 1637년 상업적인 오페라 하우스를 만들어 귀족과 평민을 한꺼번에 관객으로 받아들였다. 헨델이 오페라 작곡가로 활약할 당시의 런던 코벤트 가든 오페라 하우스.

헨리 퍼셀  음악사에서 영국은 대륙에 견줄 만한 작곡가들을 많이 배출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헨리 퍼셀은 근대 음악 초창기에 이미 우뚝 선 대가이다.

안토니오 비발디  비발디의 화려하고 부담없는 곡들은 1960년대 초부터 일반에게 인기를 끌게 되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세 명의 아들들  바로크 음악의 마지막 대가 바흐(왼쪽)와 아들 세 명의 1730년경 모습이다. 바흐의 아들들은 바로크 음악이 고전주의로 넘어가던 시기에 변화를 잘 이끌어 나간 작곡가들이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모차르트의 작품 세계는 인류 문화사상 드물게 균형미를 보이고 있다. 모차르트의 처남이었던 요셉 랑게가 1789년에 그린 미완성 유화.

18세기의 오스트리아 빈  라틴 문화와 게르만 문화가 만나는 시점에 음악의 중심지가 된 이곳은 과거에는 동양 문화를 만나는 통로였고 19세기에는 동유럽 문화가 접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18세기 말에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을 중심으로 이른바 '빈 고전주의'가 형성되었다.

요제프 하이든  18세기 말의 대가로 특히 1780년 이후 교향곡과 현악 4중주의 걸작들을 내놓으면서 프랑스 혁명 전야의 세대로부터 추앙받았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귀족 사회가 존재하던 시절에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지만 그의 대작들은 귀족의 몰락 이후에 나왔다. 자신의 개성적인 예술 세계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던 19세기 최초의 거장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후 19세기 작곡가들의 우상이 되었다.

프레데리크 쇼팽  섬세한 피아니스트였던 그는 거의 모두 주옥 같은 피아노곡들을 남겼다. 슈만의 피아노곡과 달리 쇼팽의 곡들은 표제음악이 없다.

로베르트 슈만  낭만주의적 상상력과 확고한 음악적 기반의 조화를 적절하게 이루어 피아노곡뿐 아니라 모든 장르에 깊이 있고 섬세한 명곡을 남겼다.

프란츠 리스트  화려한 기법의 피아노 연주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그는 오늘날 피아노 연주의 뿌리이다.

슈베르트와 그의 연주를 들으러 온 친구들  슈베르트는 세속적인 야심없이 친구 집을 전전하며 살았고 그런 슈베르트를 중심으로 많은 친구들이 모였다.

엑토르 베를리오즈  프랑스 낭만주의를 가장 극명하게 대표하는 작곡가로 작품수는 많지 않으나 거의 모두 이전의 전통적인 기법을 탈피해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려 했다. 1846년 빈의 신문에 난 이 캐리커처는 베를리오즈가 전통 음악에 익숙했던 청중에게 충격을 주는 장면을 풍자하고 있다.

니콜라이 림스키 코르사코프  '러시아 5인조' 중의 한 사람으로 자신의 곡을 발표하면서 미완성으로 남긴 동료의 곡들을 틈틈이 마무리해 발표하는 공로를 세우기도 했다.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  러시아 민족 음악을 대변했던 '5인조' 중의 한 사람이다. 음악적 기법의 기초가 약했지만 오히려 그런 이유 때문에 러시아의 원초적인 정서를 담은 독특한 곡들을 남겼다.

얀 시벨리우스  전세계에서 애호를 받는 거의 유일한 핀란드 작곡가이다. 그의 음악은 보편적 정서에 호소하면서도 핀란드의 분위기를 빼놓지 않는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

안토닌 드보르자크  체코 출신의 작곡가로 19세기 후반 이전까지 주변에 머물러 있던 동유럽 음악들을 세계에 알리는 데 큰 몫을 했다. 그의 음악은 확고한 음악적 기반 위에 대중적인 친화력을 가지고 있어 아직도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베드르지히 스메타나  드보르자크와 더불어 동유럽의 정서를 정감있게 보여 준 체코 작곡가이다. 드보르자크가 기악곡을 위주로 한 데 반해 스메타나는 오페라를 여러 편 남겼다.

빈에 있던 브람스의 작업실  북독일 함부르크 출신인 브람스는 1872년부터 죽던 해인 1897년까지 오랜 세월을 빈에서 살았다.

요하네스 브람스  19세기 후반 독일 음악의 보수적 맥을 이은 대표자이다. 음악의 모든 장르에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단 한 편의 오페라도 쓰지 않은 것은 과연 바그너 반대 진영의 우두머리다운 인상을 준다.

구스타프 말러  독일 현대 음악의 문을 연 작곡가이자 20세기 지휘의 기초를 닦은 연주가로 1차 대전 전야의 불안한 정서를 대변하는 대규모의 교향곡들을 남겼다.

안톤 브루크너  오스트리아의 작곡가로 종교적 성찰을 담은 깊이 있고 규모가 큰 교향곡들을 남겼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20세기의 작곡가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고 일찍 작품 활동을 시작해 많은 곡들을 남겼다.

클로드 드뷔시  프랑스 작곡가로 전통적인 화성을 벗어나 독특하고 새로운 경지를 보여 줌으로써 20세기 음악의 문을 열었다.

프란츠 슈베르트  정장을 한 그림의 인상과는 달리 실제의 슈베르트는 세속에 초연한 자세로 살았던 사람이다. 빌헬름 리더가 1825년에 그린 그림이다.

드보르자크의 슬라브 무곡 악보 표지

바이올리니스트 안네소피 무터와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무터는 13세 때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데뷔하여 세계적 재능으로 소개된 이후 성장 시기를 잘 극복했고 개인적인 고뇌도 겪으면서 현재 세계를 대표하는 여성 연주가의 하나가 되었다.

게오르크 솔티

니콜라 랑크레의 음악 레슨  18세기 전반 프랑스 귀족의 음악 생활을 보여준다. 이런 사실적인 그림들은 당시의 풍속뿐 아니라 악기의 모양과 연주법을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니콜로 파가니니  생전의 파가니니는 피아노의 리스트처럼 눈부신 기법의 화려한 연주로 유명했다. 그림은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의 현이 끊어지도록 열정적인 연주를 하는 모습이다.

오토 클렘페러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1914년 초창기 음반 녹음  녹음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에는 오케스트라의 규모를 줄여야 했고 곡의 길이도 짧게 했다. 사진의 지휘자는 영국의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

피아노 4중주  피아니스트 에밀 길렐스와 아마데우스 현악 4중주단의 멤버들이 브람스의 피아노 4중주를 연주하고 있다. 피아노 4중주는 특히 피아노와 현악기들의 사운드 균형이 중요하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리스트  1840년 빈의 화가 요셉 단하우저가 그린 그림으로 예술인들이 자주 모이던 전형적인 파리의 살롱이다. 왼쪽부터 문학가 알렉상드르 뒤마, 빅토르 위고, 조르지 상드, 뒤쪽에 파가니니와 로시니, 등을 돌리고 앉은 여인은 리스트의 애인이었던 마리 다구이다.

영국 버밍햄에 있는 인터내셔널 컨벤션센터 심포니 홀  연주회에 가는 이유는 단순히 음악적 지식을 얻거나 선율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일상과는 다른 고양된 체험을 하기 위해서이다.

밤베르크 심포니 오케스트라  전통있고 수준 높은 독일의 지방 오케스트라인 밤베르크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1993년에 개관된 콘서트 홀에서 연주하고 있다.

오브 에이틴스 센튜리 오케스트라  바로크 음악뿐 아니라 19세기 초까지의 음악도 과거 악기로 연주하는 단체가 많아졌다. 지휘자는 프란스 브뤼헨.

영국왕 조지 1세와 헨델  헨델의 「물 위의 음악」은 왕의 노여움을 풀어 주기 위해 헨델이 템즈 강에서 왕의 배를 따라가면서 연주하도록 한 곡이라는 일화가 있다.


고전음악 감상의 10계명


1. 음악을 듣는 계층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2. 지식에 의존하지 말고 자유로운 느낌을 가지라.

3. 그러나 지식을 섭취하면서 감상하라.

4. 시간이 있을 때 듣지 말고 시간을 만들어서 들으라.

5. 흥미가 연결되도록 하고 중간에 포기하지 말라.

6. 인격이 높은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듯한 자세로 들으라. 결코 수동적이지 말고 질문하라.

7. 취한 상태, 몸이 피곤한 상태에서 듣지 말라.

8. 음반을 들을 때는 연구하는 자세로 들으라.

9. 음반을 들으면서 반드시 실제 연주를 들으라.

10. 연주가를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말라.



저작자 표시
posted by 드무 황영찬

2014-081 코끼리 - 세계의 기둥


로베르 들로르 지음, 이한헌 옮김

1995,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19


082

시156ㅅ  14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014


4천 년 동안이나 인간과 공존해 온 코끼리,

인간 대신 무거운 짐을 들어주는 충실한 일꾼으로,

귀중한 상아의 제공자로, 서커스 공연에선

빼놓을 수 없는 재간동이로 코끼리는

인간에게 많은 이로움을 주었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이 불러일으킨 결과는 참혹하다.

코끼리의 수는 격감되고 있고, 이대로 계속된다면

멀지 않은 미래에 인간들은 박제된 코끼리만

보게 될지도 모른다.


티무르의 후예 바부르(Babur : 1483 - 1530)는

장차 인도를 지뱌하게 될 무굴 제국을 창건하였다.

뛰어난 정치가이자 군사 전략가, 역사가, 시인으로

이름을 날린 그의 진면목은 투르크어로 씌어진 그의

자서정 <바부르나메 Babur-nameh>에 잘 나타나 있다.

세계의 명저 중 하나인 그의 자서전 속에는

코끼리가 자주 등장한다.


"인도인들이 하티(Hati)라고 부르는 코끼리는

인도의 특이한 동물 가운데 하나이다. 코끼리는

거대한 체구와 뛰어난 지능을 갖춘 동물이다.

이 동물은 사람의 말을 모두 알아듣고,

사람의 명령을 그대로 따른다."


"인도의 군대에는 코끼리를 보유한 사단이 있으며, 이들은 코끼리와 함께 전투에 참가한다. 무거운 짐을 싣고서도 코끼리들은 강과 급류를 쉽게 건넌다. 그러나 코끼리들은 엄청나게 많은 사료를 필요로 해, 두 무리의 대상(隊商)에 속해 있는 낙타들이 먹는 만큼 먹어 치운다."


"나는 코끼리와 코뿔소가 서로 맞닥뜨리면 어떤 행동을 보일까 궁금해했다. 코끼리 조련사가 코끼리를 계속 앞으로 몰아붙이자, 코뿔소는 그만 견디지 못하고 반대쪽으로 꽁무니를 빼고 말았다."


"식사 전에 사람들이 나에게 선물을 바치는 동안, 우리들 정면에 있는 섬에서는 성난 낙타들과 코끼리들이 싸움을 치르고 있었다. 격투장 한쪽에서는 숫양끼리 맞서기도 했고, 다음은 격투사들의 차례였다." (아그라에서)


바부르는 기병대와 함께 코끼리를 전투부대로 편성하기도 했다.


차례


제1장 코끼리의 가계

제2장 아시아와 아프리카, 양면성을 띤 하나의 이미지

제3장 서구의 기억

제4장 사냥에서 살육으로

기록과 증언

그림목록

찾아보기


로베르 들로르 Robert Delort

문학 박사이자 이학 학사인 로베르 들로르는 파리 제8대학과 제네바 대학에서 중세 역사를 가르쳤으며, 중세에 관한 수많은 저서들을 펴냈다. 그가 동물사의 기초를 세우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쓴 <동물들은 역사를 갖고 있다>는 세계 각국어로 번역 출간되어 많은 사람의 관심을 모았다. 현재 그는 생태환경사를 연구하고 있다.


옮긴이 : 이한헌

1958년 광주 출생.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홍익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밟았다. 현재 외국어대학교와 강원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에릭 루이의 <인간과 언어예술> 등이 있다.


제1장

코끼리의 가계(家系)


"매머드가 울하므르족을 가로막았다. 매머드는 부드러운 풀을 뜯어먹고 짓밟으며 뿌리째 뽑아 버렸다. 세 사람의 눈에 비친 매머드들은 행복하고 위험을 모르는 멋진 존재였다. 매머드의 거대한 발 밑에서는 큰 사자도 깨지기 쉬운 질그릇이나 다름 없었다. 매머드의 상아는 떡갈나무를 뿌리째 뽑아 버릴 수도, 화강암처럼 단단한 머리는 나무를 산산 조각 낼 수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너무나 부드러운 코를 가진 매머드를 보면서, 나오(Naoh)는 '매머드는 지상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의 우두머리'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스니, 《불을 찾아서》

왼쪽부터 모에리테리움(Moeritherium), 피오미아(Phiomia), 팔라에오마스토돈(Palaeomastodon), 곰포테리움(Gomphotherium), 데이노테리움(Deinotherium), 마스토돈(Mastodon), 맘무투스(Mammuthus), 록소돈타(Loxodonta) 등이 보인다. 이들은 모에리테리움의 가계를 형성한다. 모에리테리움은 매머드나 아프리카코끼리보다 더 큰 마스토돈보다 예닐곱 배 작다. 데이노테리오이데아(Deinotherioidea)는 19세기 과학자들의 눈에 그 최후 생존자들의 모습이 무서운 형상(deinos)으로 비쳐졌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엘레판토이데아(Elephantoidea)는 경직성을 뜻하는 'gomphos'와 야생동물을 뜻하는 'therion'이 결합된 곰포테리오이데아(Gomphotherioidea)를 포함한다. 마스토돈은 원형돌기(mammelon) 형태의 어금니네서 착상해 퀴비에가 붙인 이름이다.

선사시대인은 매머드를 즐겨 그렸다. 프랑스의 페슈메를에서 발견된 이 벽화도 그러한 예들 중 하나이다. 둔부에서 뒷머리로 흐르는 선이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자못 흥미롭다.


제2장

아시아와 아프리카,

양면성을 띤 하나의 이미지


수천 년 동안 아시아는 코끼리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아이사에서 코끼리는 신성시되거나 신격화되었고, 우수한 투사로서, 사냥의 동반자로서, 때로는 다정하고 충성스런 친구로서 인간과 공존해 왔다. 반면에 아프리카 문명권에서는 코끼리를 동물의 왕으로 존중하면서도, 코끼리와 목숨을 건 격렬한 싸움을 계속해 왔다.

아프리카를 비유한 시칠리아의 벽화.

아시아에서 코끼리는 숲 속 황무지를 개간하거나 습지에서 작업하는 데 주로 이용된다. 코끼리는 전력을 다해 이마로 나무를 들이받아 쓰러뜨린다. 그래도 나무가 쓰러지지 않으면 앞발을 사용하기도 한다. 일단 뿌리가 뽑힌 나무는 가지를 잘라 내고 통나무 형태로 자른다. 그러면 코끼리가 코로 말아 올려 상아 위에 올린 다음 운반한다. 그러나 매우 무거운 통나무들은 모래 위나 진창 속을 지나 뗏목을 흘려 보낼 수 있는 강이나 선창가까지 끌고 간다. 통나무를 끌고 가는 코끼리는, 긴 상아와 그 나이와 함께, 막강한 힘과 많은 경험을 추측케한다. 조련사의 감시를 받으며, 쌍둥이처럼 함께 일하고 있는 두 마리의 젊은 코끼리들은 암컷이다.

사로잡힌 수컷 한 마리가 나무에 매여 있다. 악바르가 코끼리를 살펴보고 있다. 수많은 하인들이 그를 수행하고 있고, 그 코끼리를 길들이는 데 이용할 길들여진 코끼리들도 대동하고 있다.


제3장

서구의 기억


1886년 찰스 F. 홀더의 뛰어난 저서 《상아의 왕》은, 오랜 옛날부터 중요한 상아 공급원이었던 아프리카코끼리에게 25장 중 단 한 장만을 할애했다. 그후 93년 뒤인 1979년 월트 디즈니는 너무도 진부한 다음과 같은 말을 편지에 적어 보냈다. "모든 코끼리가 아프리카에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아시아에도 역시 코끼리가 있다." 10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사이에 서구 문명은 코끼리 이야기가 나오면 아시아를 '망각'한 채, 우선 흑아프리카를 먼저 떠올리게 된 것이다.

<피지올로구스(Physiologus)>는 12~15세기에 서구에 널리 전파된 작품이다. 이 작품에 따르면 코끼리가 새끼를 낳으려면, 신부인 암컷이 마치 이브처럼 먼저 맛을 본 뒤 건네준 맨드레익(mandrake, 중세에 마법에 쓰인 것으로 알려진 가지과의 약용식물 : 역주)의 열매를 수컷이 받아먹어야 한다. 곧바로 수태가 된 암컷은 커다란 호수를 찾아가서, 그곳에서 악마의 화신인 용의 방해를 이겨내고 새끼를 낳는다.

파라오 프삼틱 3세는 페르시아 왕 캄비세스에게 펠루지움 전투(B.C. 525년)에서 패배한 후, 포로가 되어, 정복자의 명령에 따라 처형되었다. 스핑크스와 피라미드 아래서 이루어진 이집트 정복은 동쪽에서 데려온 수많은 코끼리들 덕분에 가능했다. 이 그림의 '전형적인' 세부사항은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서 가져온 19세기의 '역사적 문화유산'과 미술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둔 것이다.

에트루리아 접시는 코끼리 등에 망루가 설치된 것으로 보아 피루스가 공격에 이용했던 아시아코끼리를 형상화한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여기에 묘사된 아시아코끼리(귀가 작고 등이 둥근 것을 통해 알 수 있다)의 암컷은 아프리카코끼리에게서나 볼 수 있는 특징들(상아와 긴 꼬리)을 지니고 있다.

B.C. 255년, 아프리카에 상륙한 로마의 집정관 레굴루스는 카르타고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평화조건을 강요했다. 카르타고의 크산티포스는 기병대로 하여금 로마 군단을 포위토록 했다. 로마군은 깊숙이 돌진해 온 코끼리 100마리에게 쑥밭이 되었고, 뒤를 이어 카르타고 보병이 로마 군단을 철저히 격파했다. 그러나 B.C. 202년 자마 전투에서는 제대로 길들여지지 않은 카르타고의 코끼리들이 등을 돌려 자기 군대에게로 덤벼들었고, 덕택에 로마의 동맹군인 누미디아 기병대는 마음놓고 카르타고군을 칠 수 있었다. 후세에 많은 화가들이 이 전투를 화폭에 담았다.

한니발의 원정 당시 가장 커다란 장애물은 자연이었다. 코끼리는 고여 있는 물에서는 헤엄을 잘 치지만, 론강처럼 흐르는 물에서는 오랫동안 버티지 못한다. 따라서 뗏목을 둘씩 연결해서 일종의 부교를 만들어야 했다. 폭이 30m, 길이가 60m에 달하는 부교는 바닥에 흙을 깔아 놓아, 코끼리들이 땅 위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하여 부교가 흔들리더라도 놀라지 않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암컷들이 앞장을 선 코끼리들은 마침내 반대편 강둑에 무사히 도달하게 되었다.

아슬아슬한 공포의 순간이 있었다. 겁에 질린 일부 코끼리들은 감히 뗏목을 벗어날 엄두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별탈없이 강을 건넜다. 그러나 나머지 코끼리들은 흐르는 강물 속에 뛰어들어 헤엄을 치기 시작하더니 제각기 반대편 제방에 도달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몇몇 조련사들이 익사했지만 57마리의 코끼리는 모두 강을 건너 알프스 산맥을 넘을 채비를 했다.

B.C. 217년 트레비아 전투에서, 삼중으로 전선을 형성한 로마 군단을 향해 카르타고 코끼리들이 무시무시한 공격을 가했다. 앞세대의 병사들이 코끼리와 싸운지 30년이 흐른 지금, 로마 군단의 대부분 병사들은 이 괴물 같은 코끼리와 맞서 싸우는 것이 처음이었다. 조련사들이 변덕스러운 코끼리가 대오를 벗어나지 못하게 조종하는 동안, 버드나무 잔가지 따위로 만든 망루 속의 사수들이 로마 보병의 기세를 꺾었다. 뒷걸음질 치던 로마 군단의 보병들은 매복해 있던 카르타고 기병대에게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승리한 집정관들에게는 로마에서 개선행진을 벌일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 집정관이 승리한 군대의 맨 앞에 서고, 적군들의 포로들이 뒤를 따랐다. 베네벤토에서 피루스를 물리친 쿠리우스는 사로잡은 여덟 마리 코끼리 중 네 마리를 자신의 개선행진에 동원했다.

로마에서는 대(大) 중개상인들이 거래를 통해 야생동물을 원형경기장에 넘겼다. 피아자 아르메니아의 큰 별장을 묘사한 모자이크화를 통해 로마의 중개상인들 중 일부는 시칠리아에서 온 사람들이었을 거라고 추정할 수 있다.

언뜻 보기에 그림의 상징체계는 간단하다. 인사라도 하려는 듯이 코를 치켜 올린 채 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대결자세를 취하고 있는 무모한 코끼리의 모습을 그린 듯하다. 그러나 그림의 구도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물과 잔뜩 구름이 낀 하늘 사이에 우뚝 선 어두운 빛깔의 코끼리를 부각시키고 있다. 기다란 코를 들어올린 코끼리의 모습은 자그마한 인간들이 살생무기 주위에 몸을 숨기고 있는 창백한 빛깔의 납작한 배를 압도한다. 사정거리가 너무 짧아 포격은 코끼리에게까지 미치지 못한다. 포격으로 생긴 물기둥은 그림을 두 부분으로 나누면서, 코끼리 코와 배의 상층부 사이의 수직적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1858년 이 그림을 그린 영국 확가 바네스의 의도는 이러한 대립관계를 통해 단지 식민지 개척이 기승을 부렸던 시대의 정신을 반영하고자 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좀더 심오한 다른 의미가 부여될 수도 있다. 탁월한 기법과 재능을 갖춘 화가는 그림을 보는 사람의 머릿속에 나름대로의 판단과, 뇌리를 떠나지 않는 강렬한 인상을 심어 준다.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코끼리가 일상생활 속에 도입되었다. 예를 들자면 프랑스 담배종이의 선전광고.

코끼리 - 왕의 신인동형론(神人同形論)은 <바바르>의 수백만 어린이 독자들에게 다소 의도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제4장

사냥에서 살육으로


현재 생존해 있는 코끼리의 수를 조사하는 일은 끈기 있는 노력을 요구하는 역동적인 작업이다. 생식 가능 기간이 대단히 길기 때문에 코끼리 암컷 한 마리는 여러 마리의 새끼를 낳을 수 있다. 그리고 포식동물로부터 잘 보호된 어린 코끼리는 다수가 성년기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남획과 자연의 황폐화로, 현재 코끼리는 위기상황에 처해 있다.

함정을 이용한 사냥은 길들여진 코끼리와, 많은 사람을 필요로 한다. 장성한, 따라서 위험스러운 수컷이 좁고 둥근 함정에 빠졌다. 함정 안에서 독을 바른 예리한 말뚝이나 다른 코끼리 살생도구를 찾아볼 수는 없다. 가죽띠나 가죽끈과 밧줄을 이용하는 것은 코끼리를 함정에서 끌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실 수십 명의 사람으로도 역부족이고, 투박한 도르래로 사용되는 커다란 통나무도 코끼리의 무게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 동원된 사냥도구들은 모두 코끼리가 밖으로 나왔을 때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함으로써, 코끼리가 사람들을 상아로 꿰뚫거나 코로 후려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그림에서도 사람들은 삽을 이용해서, 팠던 흙으로 함정을 조금씩 메우고 있다. 이렇게 해서 함정 밖으로 나온 코끼리는 이미 붙잡혀 매여진 동료들과 다시 얼굴을 맞대게 된다.

레스푸그의 상이나 빌렌도르프의 상

파리 국립 자연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매머드 골격.




저작자 표시
posted by 드무 황영찬

2014-080 서원 건축


글, 사진 / 김봉렬

1998,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23144


082

빛12ㄷ  222


빛깔있는 책들 222


김봉렬-------------------------------------------------------------------------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원 시절에는 건축연구소 아키반과 삼정건축에서 실무를 익혔다. 울산대학교 건축학과 교수와 문화관광부 문화재전문위원, 김수근 문화재단 전문위원, 한국건축역사학회 상임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건축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의 건축 - 전통 건축편』『법주사』『한국 건축과 만남』(전3권) 등이 있고, 한국 건축에 관한 30여 편의 연구 논문과 다수의 현대 건축 비평들이 있다.

도면 작성에 도움 주신 분

서울대학교

영월대학

삼성건축

도용호

김은중

조상순


|차례|


서원, 성리학 그리고 사림파

성리학적 정신과 서원 건축

서원 건축의 입지와 배치 형식

서원의 기능과 건물

서원 건축의 역사

서원 건축 순례

소중한 건축 자산, 서원

참고 문헌

도동서원 강당

안향 영정  백운동서원(소수서원)에는 성리학을 이 땅에 최초로 수입한 회헌 안향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흥암서원 전경  교육 시설과 종교 시설이 결합된 서원 건축은 사람들의 성리학적인 정신 세계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도산서당에서 도산서원으로 연결되는 진입로  앞쪽의 도산서당 영역에서 뒤쪽의 서원으로 연결되는 진입로의 한쪽을 벽과 담의 수직면으로 구성하였고, 다른 한쪽은 수평적인 화단으로 중첩시켜 자연스럽다.

도동서원 강당의 원장석에서 바라본 전경  강당의 원장석에 앉아 앞을 내다보면 안산을 향해 배열된 누각과 정문의 축선이 강렬하게 드러난다.

병산서원 강당  서원의 마당은 철저하게 인위적인 건물들로 둘러싸인 인공적인 장소이다. 누각에서 본 강당 기단부의 커다랗게 뚫린 아궁이와 돌출된 계단이 주요한 형태 요소가 된다.

대둔사 대웅전  사찰의 대웅전에서는 뒤로 산이 배경을 이루어 건물과 자연이 일체화되고 있으나 서원에서는 주변 자연을 인지할 수 없도록 건물 위치를 정하고 거리를 조절한다.

도산서원도 부분  서원이 자리잡을 이상적인 장소는 교육과 연구를 위해 번화한 곳에서 격리된 한적한 곳이어야 한다. 강세황. 1751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필암서원 풍수형국도  서원은 강이나 내를 앞으로 면하고 나머지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장소에 입지한다.

무성서원 강당에서 본 사당  서원은 대개 앞쪽에 강당을 중심으로 한 강학 공간을, 뒤쪽에 사당을 중심으로 한 제향 공간을 배열한 건축 형식이다.

도동서원 전경  오른쪽부터 누각, 정문, 강당, 사당(소나무에 가려진 부분)이 일직선상에 배치되고 강당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대칭으로 놓여 있다.

1.강당(중정당)  2.사당  3.외삼문과 수월루  4.환주문  5.동재(거인재)  6.서재(거의재)  7.장판각 8.내삼문  9.증반소  10.일각문 11.사주문  12.전사청  13.문간채  14.곡간채  15.변소 16.비각  17.서원목(행단)

도동서원 구성도

남계서원 강당과 재실  강당은 강회의 공간으로 사용되며 평상시에는 학생 접근이 제한되는 교수진 전용의 건물이다. 강당 좌우로는 유생들의 기숙사에 해당하는 2개의 재실을 놓는다.

창절서원 문루  누각은 학생들이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역할을 한다. 때때로 누각 위에서 사회를 열어 서원 구성원들의 풍류를 겨루기도 하였다.

도산서원 장판각  목판본이나 서책류가 습기에 노출되면 쉽게 상하기 때문에, 장판각이나 장서각 건물들은 흔히 판벽의 나무집으로 만들어진다. 사방을 둘러싼 나무판들이 내부의 습도를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옥산서원 경각  학문 도야에 필수적인 것은 서적이며, 서적을 보관할 수 있는 시설 역시 교육 기관의 필수 기능이다.

무성서원의 사당

홍살문  선현들의 위패를 봉안한 신성한 지역임을 의미하는 유교적 시설물로 서원 입구에 세워진다. 필암서원의 홍살문 뒤로 확연루가 보인다.

도동서원의 차(炊)  이중으로 쌓은 담장의 굴뚝 같은 구멍 속에 제문을 넣고 불태우는 일종의 망료위다.

도난문화재 편집사진자료

회연서원의 정료대  밤중에 관솔불을 밝히기 위해 강당 앞에 세워 둔 옥외 조명 장치이다.

소수서원 전경  소수서원을 비롯한 초기의 서원 건축은 형식이라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자유스러웠던 것 같다. 물론 서원이 갖추어야 할 최소의 기능인 강당, 사당, 기숙사, 장판각 등은 구비되었지만 이들 사이의 규범적인 질서를 찾아내기는 무척 어렵다.

병산서원 구성도

필암서원  급증기의 서원들은 완전한 건축 형식적 틀을 구축하게 된다. 중심축선상에 누각과 대문, 강당, 사당을 일렬로 세우고 필요 시설들을 여기에 부가하는 형식이다.

필암서원 전도  출전 『필암서원지』

월봉서원 전경  19세기 말 이후에 복원된 서원의 전형을  보여 준다. 동서재의 교육 기능은 약화되거나 사라지고 향사 기능만 유지되어 사당이 가장 높은 위계를 차지한다. 건물들의 배열이 극히 형식적이고 외부 공간의 짜임새가 흐트러졌다.

경렴정  유생들의 휴식을 위해 개울가에 세워진 정자 안에는 유명 시인과 묵객들의 시구들이 걸려 있다.(소수서원)

소수서원 배치도

일신재와 직방재  3칸씩의 일신재와 직방재는 하나의 건물로 연결된 '연립형 기숙사'다. 2칸의 온돌방과 1칸의 마루방으로 된 양재는 좌우 대칭으로 구성되었다.(소수서원)

명륜당  건축적인 형식을 모색하던 초기의 서원에서는 관학인 향교 건축의 명칭들도 사용하였다.(소수서원)

지락재  학구재와 지락재에서는 건물 자체의 완결성보다는 건물을 무엇인가 담기 위한 틀이요, 그릇으로 생각한 초기 성리학자들의 건축관을 읽을 수 있다.(소수서원)

남계서원 배치도

남계서원의 홍살문과 정문 누각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설립된 유서 깊은 서원이다. 어귀에는 홍살문과 하마비가 서 있어 품격을 더해 준다.

시습당에서 바라본 영귀루  평지에 조성된 서원답게 건물들의 높이가 낮고 옆으로 길쭉한 수평적인 형태를 취하였다.(서악서원)

시습당 내부  시습당의 대청 쪽으로 난 방의 개구부는 모두 창이다. 출입은 정면 벽에 난 문으로 가능하다.(서악서원)

읍청루  급한 경사지 위에 위치하여 3칸의 문루가 더욱 높아 보인다. 입지와 건물 구성에서 상주와 선산 지역 서원과 향교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금오서원)

7조 규약  금오서원 강당에는 서원 내에서 지켜야 할 7가지 금기 사항들을 적어 놓았다.

옥산서원 배치도

독락당 계정  이언적이 낙향 은거하여 경영하던 독락당은 옥산서원과 동일한 건축적 어휘를 가진 곳으로, 옥산서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보아야 할 필수적인 건축물이다.

체인묘  정교하게 축조된 기단과 계단이 사당 마당의 정숙함을 고양시킨다. 체인묘의 북쪽에는 희재의 신도비를 위한 비각이 있다.(옥산서원)

구인당에서 무변루를 본 모습  바깥의 경승을 폐쇄적인 문루 건물이 가로막고 있다. 옥산서원 전반에는 폐쇄적인 공간 개념이 배어 있다.

도산서원 배치도

전교당  4칸으로 구성된 규모가 이채롭다. 통상적으로 있어야 할 오른쪽의 원장실이 없으며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퇴계의 사당인 상덕사가 나타난다.(도산서원)

농운정사  창과 문이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으며 오른쪽이 상급반인 상재이고 왼쪽이 하재이다. 창호의 구성에서도 상하재 간의 위계가 나타난다.(도산서원)

도산서당  퇴계가 직접 설계한 건물로 퇴계의 소박하면서도 엄격한 건축적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두 칸 마루 가운데 왼쪽 것은 고정 마루, 오른쪽은 가설 마루의 개념을 보여 준다.(도산서원)

도동서원  질서와 규범의 정신으로 꽉 짜여져 조직된 건축물이다. 18개의 좁고 긴 석단들로 비교적 급한 경사지의 터를 닦았다.

도동서원의 집합적 입면도(위), 주축 단면도(아래)

입교당 내부  강당인 입교당 내부의 대청과 방 사이에 난 개구부이다. 왼쪽이 창이고 오른쪽은 문이다. 문 뒤에는 방의 이름인 경의재라는 현판을 걸어 놓았다.(병산서원)

존덕사 내부  사당의 내부는 술잔과 향로와 제수를 진설하는 크고 작은 3개의 제상으로 구성되었다. 오른쪽의 것은 류성룡의 아들인 류진의 위패와 제상이다.(병산서원)

병산서원 배치도

만대루  만대루는 외부 경관에 대한 시각적 틀이다. 강당 대청 가운데 원장 선생의 자리에 앉으면 만대루의 마루면과 지붕 사이로 낙동강의 흐름이 포착된다.

흥암사  흥암서원의 사당으로 장대석 3벌대의 당당한 기단이 인상적이지만 상부 건물의 구조와 부재는 빈약하다. 아래는 현판.

진수당 내부의 지붕틀  대들보 위에 세워진 항아리 모양의 동자대공이 장식적이다.(흥암서원)

청월루에서 본 온휘당  전형적인 5칸 강당이며 동서재가 없다. 사당이 강당에 비해 크고 높아서, 제향 중심으로 기능이 변한 18세기 초 서원 건축의 형식을 대표한다.(옥동서원)

청월루  옥동서원의 가장 특징적인 건물이다. 회보문이라는 이름의 아래 출입구는 3칸, 위의 누각부는 5칸이다. 양 옆 축대 위에 다리를 놓듯이 세운 복합 건물이다.

돈암서원 배치도

내삼문  사당 영역에 들어가는 안대문이다. 보통은 3칸의 소슬대문 형식으로 구성되지만 돈암서원에서는 3개의 문으로 분리시켰다. 들어갈 때는 동쪽문, 나올 때는 서쪽문을 사용하는 '동입서출'의 예법을 따랐다.

응도당  칸살이 넓고 높이가 훤칠한 건물이다. 본체는 매우 높은 맞배지붕을 이루며, 양 측면에 가적지붕을 단 희귀한 형태를 취하였다.(돈암서원)

응도당의 장식 부재  구심포 구조의 첨차와 화반들이 마치 절집에서 표현되는 것과 같이 매우 장식적이다.(돈암서원)

노강서원 강당  돈암서원의 응도당과 같은 형식이다. 5칸의 맞배지붕의 몸체 좌우로 가적지붕이 붙고, 높은 바닥면 등이 이 지방 강당 건축의 지역적인 형식을 엿보게 한다.

강당의 장식 부재  공포 형식은 익공계가 변형된 주심포식이며 기둥 사이에 복화반을 설치하여 장식적인 경향을 드러낸다.(노강서원)

노강서원 배치도

우동사 쪽에서 본 청절당  앞면 전체에 분합문을 달아 여름에 모두 들어올리면 확연루에서 사당까지 시선이 통과하게 된다.(필암서원)

필암서원 배치도

무성서원  무성서원 강당인 명륜당의 대청은 앞뒤가 완전히 개방되어 마치 카메라에 포착되듯 사당의 전경이 드러난다. 무성서원과 같은 구성은 제향 기능이 위주가 된 후기의 서원 건축에서 나타나고, 사당에 강당이 부속된 듯 보인다.

무성서원 배치도

창절서원 육신사  전면 5칸의 규모로, 조사된 서원의 사당 가운데 가장 크다.

파산서원 사당  한국전쟁 때에 서원 전체가 불타 버린 후 사당 부분만 복원되었다.

자운서원의 사당과 묘정비  남한에 있는 율곡의 서원 가운데는 가장 유명한 곳으로 대원군 때 훼철되었다가 뒤에 제향 공간만 복원되었다(위). 사당 옆에는 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비석이 있는데 당대의 명필이며 노론의 영수였던 김수증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아래)

우저서원 여택당  4칸의 흔치 않은 규모지만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다. 방의 벽 하부에는 경기, 충청 지방에서 유행한 방화벽을 덧붙여 마치 일상적인 살림집 형태같이 되었다.

심곡서원 내삼문과 사당  외삼문과 강당, 내삼문, 사당을 중심축선상에 배열하였다. 3칸의 사당은 사각 초석 위에 사각기둥을  쓴 소락한 모습이다.

용연서원  정문, 강당, 사당만으로 이루어진 가장 간략한 규모의 서원 건축이다. 한국전쟁 때 사당만 남고 모두 훼손되었는데 최근 강당과 정문을 복원하였다.

내삼문과 기단부  초석과 기단석, 계단석을 정교하게 다듬은 솜씨나 정치한 결합법 등은 이 서원이 당시에 최상급의 건축이었음을 입증한다.(덕봉서원)

덕봉서원  5칸의 길쭉한 모습으로 1960년대 고쳐 지어 원형이 많이 바뀌었지만, 전면의 높은 사각초석은 경기 지역의 고급 건축에 자주 쓰였던 궁궐 형식을 엿보게 한다.


저작자 표시
posted by 드무 황영찬

2014-079 공명의 시간을 담다


구본창

2014, 컬처그라퍼



대야도서관

SB099966


660.4

구45ㄱ


사물의 영혼을 훔치는

한 사진가의 필름 속에 스며든

시간과 인연의 기억


사라져 가는 일상의 순간순간을 기록하며

그 매 순간의 공명을 담아내는 것이 사진가의 일이다


"잘 들리지 않는 떨림이나 사소한 일상이 아름답게 빛나는 순간들, 삶의 표면 아래 감춰진 자국들, 스쳐 지나기 쉬운 수많은 이야기를 사전에 담아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는 것, 사진가로서 나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사진 매체의 실험적 가능성을 개척해 온 국내의 대표 사진가.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 후 독일 함부르크 조형미술대학에서 사진 디자인을 전공, 디플롬 학위를 취득하였다. 계원예대, 중앙대, 서울예대 등에서 강의하였고 현 경일대학교 사진영상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로댕 갤러리(2001), 피바디에섹스 박물관(2002), 국제 갤러리(2006), 필라델피아 미술관(2010) 등 국내외에서 40여 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그의 작품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휴스턴 뮤지엄 오브 파인아트, 교토 가히츠칸 미술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리움미술관 등 다수의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으며, 작품집으로는 한길아트에서 출간된 『숨』, 『탈』, 『백자』, 일본 Rutles에서 출간된 『白磁』, 『Everyday Tresures』 등이 있다.


시간을 수집하는 사진가


차례


프롤로그 \ 사진가로 산다는 것


01 낡은 시간을 수집하다

02 비상飛上

03 자신의 사진을 찍으라

04 나와 화해하는 방법

05 운명 속의 존재들

06 슬로우 토크

07 목적이 있는 것과 없는 것

08 도구와 방법

09 사진가의 여행

10 사물에 귀 기울이다

11 일상의 보석

12 잃어버린 얼굴들

13 마음의 그릇

14 비어 있기에 아름답다

15 상흔傷痕

16 내 마음속의 폴더들

17 볼 수 있는 만큼 보인다

18 교감의 통로


에필로그 \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독


ⓒAxel Beyer



함부르크. 1980

독일 유학 시절에 찍은 스냅사진들, 구도와 명암 대비가 부각된 간결함을 추구하였다.

함부르크 전철역. 1980

처음으로 나만의 이야기를 담기 시작한 <일 분간의 독백> 시리즈. 1980-1984

<긴 오후의 미행> 시리즈. 1985-1990

<기억의 회로> 시리즈. 1988

<탈의기> 시리즈. 1988

<열두 번의 한숨> 시리즈. 1985

<생각의 바다> 시리즈. 1990

<빛을 찾아서>. 1982

유학 시절 집 안에 들어온 빛에 비친 그림자를 촬영하였더니 옆 모습이 밥 딜런의 앨범 사진을 연상기키는 셀프 포트레이트가 되었다.


<굿바이 파라다이스> Box 시리즈. 1993

<굿바이 파라다이스> Blue 시리즈. 1993

<굿바이 파라다이스> 전시. 서미 갤러리. 1993

<태초에> 시리즈. 1995-1996

<태초에> 시리즈. 1998

<태초에> 시리즈. 1994

<태초에> 시리즈. 1991

<태초에> 시리즈. 2002

<숨> 시리즈. 1995

<숨> 시리즈. 1995

<시간의 그림> 시리즈. 1998

<오션> 시리즈. 2002

<리버 런> 시리즈. 1998

<자연의 연필> 시리즈. 2000

<화이트> 시리즈. 1999

<스노우> 시리즈. 2011

<스노우> 시리즈. 2001


ⓒ《보그》. 2002년 12월 호

<기쁜 우리 젊은 날>의 주연배우 황신혜


로마. 1983

<사진 새시좌전> 포스터.

런던 트래펄가 광장. 1983

<백자> 시리즈. 오사카 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2006

도쿄 이타미 준 건축설계 연구소에서 그의 백자 컬렉션을 촬영하는 장면. 2010




<비누> 시리즈. 2006

<비누> 시리즈. 2004

<비누> 시리즈. 2006

<샤스루> 시리즈. 2003-2004


<탈> 시리즈. 가산오광대. 1998-2003

<탈> 시리즈, 북청사자. 1998-2003

<탈> 시리즈. 강릉관노. 1998-2003

<탈> 시리즈. 가메 탈. 2009

<백자> 시리즈. 런던 대영박물관 소장. 2006

<백자> 시리즈. 서울 리움미술관 소장. 2005

<백자> 시리즈. 오사카 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2005

<백자> 시리즈. 오사카 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2006

<백자> 시리즈. 서울 리움미술관 소장. 2005

<백자> 시리즈. 교토 고려미술관 소장. 2004

<인테리어> 시리즈. 2003

<인테리어> 시리즈. 2004

<곱돌> 시리즈. 도쿄 민예관 소장. 2007

<침묵의 무기> 시리즈. 2010

왼쪽  \ <침묵의 무기> 시리즈. 6.25 당시 아들이 전사한 101세 박외연 할머니. 2010

오른쪽 \ <침묵의 무기> 시리즈. 1953년 4월 12일 강원도 금화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故김종철 하사가 전쟁터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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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드무 황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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