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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3 Artist's House 예술가의 집


지은이 | 멜라니 클리어, 옮긴이 | 김지선

2007, 예경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19936


650.8

아887ㅇ 5


● ART SPECIAL 5 


Artist's House | 예술가의 집


"우리 집의 저녁 조명은 너무나 멋져서, 난 대ㅈ낮의 햇빛보다 이게 더 좋습니다. ……꼭 한번 와서 직접 봐야 해요. 빛이 모든 대립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모습, 깊고 검은 그늘이 그림들을 에워싸는 그 모습을……" - 파블로 피카소


"나는 공간을 소유한 사람이 진정한 부자라고 생각한다. 커다란 빈 공간." - 앤디 워홀


피카소는 칸의 저택 '라 칼리포르니'의 계단에 나와 앉아 따뜻한 밤 공기를 만끽하며 와인잔을 기울였다. 클로드 모네는 프랑스의 작은 마을 '지베르니'에 들어가 정원을 천국처럼 가꾸며 대(大)화가로 발돋움했다. 프리다 칼로가 태어나고 자라고 죽음을 맞이한 '카사 아슬'을 살펴보지 않고는 그녀의 그림을 말할 수 없다. 이 책은 예술가들이 살았고, 작품활동을 했으며, 때로는 예술작품으로 지었던 말할 수 없이 매혹적인 집들로 우리를 부르는 아름다운 초대장이다.


한번쯤 위대한 예술의 무대 뒤편을 들여다보고 싶지 않던가?

피카소가 어떤 집에서 살았는지, 모네의 정원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마티스는 어떤 곳에서 그림을

그렸는지…… 직접 구경해보고 싶지 않던가?

이 책은 유명 예술가들의 사적인 공간 속으로

독자들을 안내하며, 그들의 삶과 작업을

현장 속에서 되새겨보는 특별한

기회를 마련해준다.

뉘른베르크의 뒤러하우스에서부터

프랜시스 베이컨의 아수라장 아틀리에

까지, 천국 같은 모네의 정원에서부터

호일로 도배한 앤디 워홀의 팩토리까지,

또 가우디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예술 건축

으로까지…… 이 책은 때로는 아늑하고 매력적인

집으로, 때로는 당혹스럽고 괴상망측한 작업실로

독자를 이끌며, 이제까지의 미술책들과는

전혀 다른 시각과 방식으로 거장들에게

성큼 다가서게 해준다.


프랜시스 베이컨

"나는 여기 이 카오스 속에서 마음이 편하다. 왜냐하면 카오스가 내 속에서 그림을 불러내기 때문이다."


버드맨

"이 집은 나 자신의 거울이다."


'청기사'

"얼마간 고전하던 끝에 나는 엄청난 도약을 이루어냈다. 자연의 모사에서…… 추상으로의, 즉 정수를 표현하는 일로의 도약."_가브리엘레 뮌터


블룸즈버리

"덩컨과 나는……수채물감으로 프라 안젤리코의 소형 복제화를……내 침실 벽면에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알브레히트 뒤러

"우리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낯설기 때문이다."


안토니 가우디

"모든 것의 근원은 바로 자연이라는 거대한 책 속에 있다 …… 내 아틀리에 앞에 있는 이 나무…… 그것이 바로 나를 가르치는 스승이니!"


프랭크 오 게리

"……온 세상을 대칭축 위에 지을 수는 없는 법이다."


알베르토 자코메티

"같은 얼굴, 탁자, 의자, 찻잔 하나라도 매일 새롭게 발견할 수 잇다. 이전보다 더 아름답고 더 진정한 모습으로."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

"입주자마다 창 밖으로 몸을 내밀 권리, 외벽 바깥쪽 손이 닿는 데까지 일체를 자신의 취향대로 꾸밀 권리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멀리 길거리에서도 저곳에 한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아볼 수 있도록."


프리다 칼로

"멕시코는 언제나처럼 특유의 혼잡함으로, 정신머리가 하나도 없는데, 시골 지방의 아득한 아름다움……그것만은 여전하다."


칼 라르손

"나의 그림은 나의 집과 같다.……요란한 것 하나 없고, 고품격의 취향도 아니다. 하지만 선량하고 건실한 작업."


지은이 멜라니 클리어Malanie Klier는 미술사가이며 현재 뮌헨에서 작가이자 기자로 활동중이다.


옮긴이 | 김지선은 서울대학교 독어교육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옮긴 책으로는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 <내가 읽은 책과 그림>, <햄스터야, 사랑해>,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 <베르트람 아저씨는 어디에?>, <도둑맞은 아이디어> 등이 있다.


차례


과거에는

다시 현재로


화가의 집

칼 라르손-문을 활짝 열고 화가의 집으로!

모네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계단 위 '청기사파'의 집으로

프리다 칼로-독자적 세계를 키워낸 요람

영상으로 담은 집 : 피카소의 빌라 '라 칼리포르니'

'버드맨'의 부화장


아틀리에

오귀스트 르누아르-올리브 농원 속의 집

앙리 마티스-니스의 지붕 위

알베르토 자코메티-황량한 산골동네와 파리의 판잣집

호안 미로-지중해 섬의 별장 아틀리에

앤디 워홀-모자공장 건물에서 나온 팝 아트

프랜시스 베이컨-화실에서 벌어진 감식작업


예술로서의 집

'자연건축' : 안토니 가우디의 <카사 바트요>

'자연건축' :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토목공학적 실험' : 플래티런 빌딩

'토목공학적 실험'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낙수장>

'예술을 위한 집' : 프랭크 게리의 구겐하임 미술관


용어 해설


과거에는



"우리가 아름다운 것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낯설기 때문이다."


알브레히트 뒤러,

뉘른베르크의 멋진 저택 소유자


'예술가의 집'이란……


……상당히 복합적이고 열린 개념이다. 수 세기에 걸쳐 어떤 건축양식상의 특정한 규정을 따른 것도 아니다. 엉성하게 대충 지은 임시거처도 있고, 시골의 개인별장도 있으며, 위풍당당한 초호화 건축물인 경우도 있다. 또한 이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인다. 예술가의 개인주택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예술적인 건축물, 미술관 건물, 아틀리에, 창작가들의 기관인 예술원 등의 다양한 의미들을 그야말로 '한 지붕 아래' 담고 있다.

윌리엄 블레이크, <신(神)>, 1824/27, 에칭 부조, 채색, 23.4×16.8cm, 맨체스터, 맨체스터 대학교, 휘트워스 미술관.

피에졸레에 있는 아르놀트 뵈클린의 빌라(위)와 아틀리에에서 작업하는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아래).


다시 현재로


고대의 예술가는 분명 공인된 사회적 지위를 누린 개인이었다. 존경받는 창작인의 위신은 중세 들어 크게 위축되어 일개 장인으로 전락한다. 르네상스에 이르러서야 주관을 가진 전문가라는 예술가상을 되찾게 된다.

베네치아의 리오델라 센사에 있는 작은 성은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서 화가 틴토레토가 거둔 대성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만토바에 있는 안드레아 만테나의 저택에 붙은 명칭은 '카사 디 노빌리' 즉 '귀족의 집'이다.


"사람은 자신의 거처와 상당히 관계가 깊어서, 집을 잘 관찰하면 거기 사는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기 마련이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아레초에 있는 유명한 예술사가 조르조 바사리의 저택 내부는 인문주의적 장식의 모범을 보여준다. 사진은 <미덕의 승리 홀>의 천장화.

대규모 공방을 운영했던 페터 파울 루벤스는 안트베르펜의 대저택에 고미술품을 소장하고 있었다.

뮌헨 렌바흐의 빌라 내부 모습. 아틀리에 입구 전실.

프란츠레겐텐슈트라세에 있는 뮌헨의 황제화가 프란츠 폰 슈투크의 빌라 외관. 당시의 수정판 사진.

무한한 창조정신 | 벽난로의 장식그림은 덩컨 그랜트가 직접 그린 것. 작업실로 썼던 이 방에 그는 주요 영국문학작품, 도자기, 회화들을 들여놓았는데, 회화는 주로 블룸즈버리 그룹의 것들이다. 1916년 바네사 벨이 로저 프라이에게 쓴 편지의 한 대목은 이렇다. "덩컨과 나는 …… 수채물감으로 프라 안젤리코의 소형 복제화를 열 배로 확대하여 내 침실 벽에 그리기 시작했답니다. …… 가망 없는 모험이지요."


화가의 집


"나의 그림은 나의 집과 같다.

고급 가구는 고사하고, 번듯한 옷장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나의 집.

그처럼 나의 그림은 너무나 수수하되

조화롭고 편안하다. 요란한 것 하나 없고,

고품격의 취향도 아니다.

하지만 선량하고 건실한 작업."


칼 라르손


아이들 방에서 다락방까지


여기서는 우리 함께 집 구경을 해보자. 문을 열어 집안을 들여다보고, 뒤란의 '헛간'도 보지. '아이들 방'에도 가보자. 프랑스에서는 기분 좋게 '부엌'이나 '정원'을 거닐어보고, 만찬도 즐겨보자. '식탁 코너'에 앉아 쉬다가, 알프스 고지대의 언덕길을 오르는 건 어떤가. 꽁꽁 얼게 추운 날, '응접실'에 모여앉아 수다를 떨고, 아늑한 스웨덴풍 '침실'에서 편히 쉬어볼까? 아니면 '다락방'에서 비둘기들과 친구하는 착한 꿈을 꾸는 건……


칼 라르손 - 문을 활짝

열고 화가의 집으로!


소박한 침실의 반질반질 윤이 나는 마루바닥 위에 옷을 홀딱 벗은 채 웃고 서 있는 어린아이. 햇살 환한 '아늑한 방' 안에서 몸을 쭉 뻗고 드러누워 느긋하게 낮잠을 자는 개……어느 누구보다도 더 다정하고 따뜻하게 우리를 맞아주는 화가의 입. 바로 스웨덴의 유명한 화가이자 판화가며 일러스트레이터인 칼 올로프 라르손의 집이다.

'릴라 휘트내스'의 베란다와 현관, 서쪽 면 일부(위). 물레방아 탁자에 둘러앉은 라르손 가족, 1906~07년(아래).

스웨덴의 겨울풍경. 1901년부터 라르손 일가가 살았던 순트보른의 '릴라 휘트내스'. 빨간 목조주택 앞에서 브리타가 썰매를 지치는 모습.


"칼 라르손 부부의 집에 오신 당신을 환영합니다!"

- 순트보른 집 현관 위에 쓰인 문구

남향의 거실에서 화분에 물을 주는 딸. 칼 라르손은 이 응접실을 '게으름의 사원'이라고 불렀다.

빨간색으로 칠한 가구들로 꾸민 식당(아래). 위는 라르손의 작품 <아빠와 엄마와 아기>. 1910. 태피스트리 작품 <4원소>와 잘 어우러지게 식당 의자에 맞춰 제작한 카린의 <해바라기 쿠션>.

침실 | 칼 라르손의 침실 중앙에 놓인 캐노피 침대의 수놓인 휘장은 카린의 작품. 흰색 인테리어의 침실 윗벽을 빨간색으로 칠한 책선반이(뒷면은 파란색 벽지를 발랐다) 마치 프리스 띠 장식처럼 둘려 있다.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모퉁이에서 옷매무새를 살피고 있는 화가의 모습이 살짝 보인다. 칼은 이 단순 소박한 공간에 애착이 강했고, 이곳에서 "천국의 침대에 누운 왕이라도 된 듯 행복하고 깊은 잠"에 들었다.

<목수와 도장공, 나의 친구들> | 라르손 부부의 주문대로 거실을 꾸미고 있는 목수 한스 아른봄과 페인트공 칼 오스카 페르손. 거울을 통해 그림을 그리고 있는 라르손의 모습이 비친다. 기능공들의 초상화 연작은 스웨덴의 전통적인 직업들을 재조명하고자 한 라르손의 각별한 노력으로 이해된다.

'릴라 휘트내스'에 대한 칼 라르손의 말 | "조촐하게 꾸민 우리집의 모습을 그림에 담아 선보입니다. …… 뽐내려는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만들어내기까지 나름대로 품이 많이 들었던 만큼, 자기 집을 아늑하게 꾸미고 싶어하는 많은 분들께 참고가 될 수도 있겠다 싶어서입니다."

<게 잡기> | 스웨덴에서 게 시즌의 시작은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행사에 든다. 각자 즐겁게 활동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을 담은 수채화 작품이다. 라르손 일가는 지금도 매년 8월이면 게 요리를 먹기 위해 '릴라 휘트내스'에 모두 모인다. 이제 일가는 수백 명으로 늘어났다. 이 대지와 가옥은 1940년에 발족한 가족협회에서 계속 관리하고 있다. "……우리집에 자식들이 대를 물려가며 오래오래 살면 얼마나 좋을까"라던 칼 라르손의 바람대로.


모네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클로드 모네, 그의 그림, 프랑스의 시골마을 지베르니에 있는 그의 집, 그리고 그 집에 딸린 온갖 꽃이 만발한 넓은 꽃밭과 연못정원 - 모두 서로 너무나 긴밀히 묶여 있어서 어느 것 하나 따로 떼어놓을 수가 없다. 이 인상주의 화가는 자신의 파라다이스에서 43년을 살고, 사랑하고, 작업했다. 눈부신 자연과 회화가 하나로 녹아든다.

위의 그림은 1899년 작 <일본식 다리>, 아래는 1921년 6월에 찍은 사진. 정치인 조르주 클레망소와 그의 딸 릴리와 함께 있는 모네.

지베르니 주변의 인상 : "모네가 사랑했던 이곳.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 잔잔히 흘러가는 엡트 강, 은빛으로 반짝이는 포플러 나무들……그리고 저 멀리까지 보이는 양귀비꽃 만발한 드넓은 밀밭." - 하이데 미켈스


"지베르니에 와서 클로드 모네를 직접 경험해야 한다. 그래야 그를 이해할 수 있고, 그의 성격, 그의 생활방식, 그의 깊은 내면의 본성을 파악할 수 있다."

- 귀스타브 제프로이

지베르니의 집과 정원 조감도.

지베르니의 집은 오늘날 복원되어 많은 방문객들이 찾고 있다.

클로드 모네가 그린 <화가의 정원에 난 길>(1901~02).

'파란색 응접실' | (위) 가족들이 모여 취미생활을 하는 장소였다. 모네는 플로베르를 즐겨 읽었다. 함께 카드놀이를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수를 놓기도 하였다. 방대한 양에 달하는 모네의 장서(특히 식물학 도서들)도 이곳에 두었다. (아래) 알리스 모네의 침실 벽에는 남편이 수집한 일본 판화들이 걸려 있다.

모네의 아틀리에 | '살롱 아틀리에'(위)는 작업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가족실이자 그림을 살펴보고, 작품들을 마지막으로 수정하고 전시하는 용도로 쓰였다. 모네가 현대적 건축물인 '수련 아틀리에'(아래)를 지은 것은 <대작>을 시작한 연후였다. 거대한 크기의 그림을 잘 살펴볼 수 있도록 아틀리에 중앙에 소파 두 개를 맞대놓았다.


계단 위 '청기사파'의 집으로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바이에른 알프스 고지대의 경사진 대지에는 가브리엘레 뮌터와 바실리 칸딘스키가 함께 살았던 시골집이 복원되어 있다. 무르나우 교외의 이곳에서는 시장 광장의 성이 내려다보이고, 병풍처럼 둘린 주변 산들의 전망이 탁월하다. '뮌터 하우스'는 한 바퀴 둘러볼 만하다. 한 계단 한 계단씩, 길은 아방가르드로 이어진다.

뮌터가 1931년에 그림에 담아둔 이 집은 뮌터의 사망 이후 35년간 다른 사람들이 살았다. 1998/99년에 착수한 복원작업을 통해 1909-14년 무렵의 '러시아 사람의 집'으로 되돌려놓았다. 칸딘스키와 뮌터가 함께 들어와 살기 시작하여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칸딘스키가 떠날 때까지의 시절이다.

가브리엘레 뮌터의 <이젤 앞의 자화상>, 1909년.


"사랑스러운 엘라 (……) 우리 악동화가에게 다정한 인사와 한없는 경의의 키스를, 당신의 사람."

- 바실리 칸딘스키가 가브리엘레 뮌터에게

칸딘스키는 거실의 식탁 코너에 자신의 유리그림들을 걸어두었다. '손 대면 끝' - 이것이 제작의 원칙이다. 추후의 수정이 전혀 불가능한 유리그림의 제작 방식을 일컫는다.

가브리엘레 뮌터, <식탁에 앉아 있는 칸딘스키와 에르마 보시>, 1912년.

1934년에 가브리엘레 뮌터가 그린 자화상은 보는 이의 시선을 다른 데로 유도한다. 칸딘스키가 없는 외로운 나날들에의 회상, <새들의 아침 식사>.

<즉흥 - 골짜기> | 1914년 7월 3일 가르미시 근처 횔렌탈 골짜기로 갔던 소풍에서 영감을 받아 칸딘스키가 그린 그림이다. 구상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는 칸딘스키의 이 과정은 뮌터 하우스와 그 주변을 배경으로 하여 진행된다.

 

프리다 칼로 -

독자적 세계를 키워낸 요람

 

프리다 칼로가 뜨겁게 사랑했던 '카사 아술'은 그녀가 사망한 지 단 4년 만에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그 4년간은 외부인이 거주한 적이 없다. 이는 엄청난 장점이었다. 원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오랜 시간을 들여 손보고 고칠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프리다 칼로를 이토록 생생하게 만날 수 있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 집은 그녀 스스로 창조해낸 우주의 중심이요 심장이다.

 

 

프리다 칼로가 사랑했던 유년의 집 '카사 아술'. 외벽이 코발트블루로 칠해진 이 집은 멕시코시티 교외였는데, 현재는 시에 편입되었다.

프리다가 이혼하고 혼자 살던 시기에 그린 자화상이다. 목을 칭칭 감아 죈 가시관에 죽은 벌새가 매달려 있다. 이 작은 새는 행복한 사랑의 부적이자 멋진 환생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프리다는 미술의 역사상 자기 감정의 생물학적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가슴과 심장을 찢은 유일한 예술가이다. (……) 탁월한 화가이자 멕시코 예술의 부활을 입증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

- 디에고 리베라

| "나는 인생에서 두 번의 대형 사고를 당했다. 하나는 전차 사고였고, 또 하나는 디에고였다."

아래 | 한 쌍의 연인 : "코끼리와 비둘기"(프리다의 어머니는 몸집 좋은 디에고 리베라와 가냘픈 프리다 칼로를 이렇게 불렀다), 40년대 중반 프리다의 침실로 향하는 계단 앞에서.

프리다의 병상이자 작업대였던 캐노피 침대가 공중에 둥실 떠 있는 모습이 상징적이다. 엄청난 폭발성과 동시에 또한 화려하게 꽃피는 내면을 지닌 채 옴짝달싹 못하는 해골(닫집 위에 얹어놓은 전통 폭죽)처럼 그녀는 자신이 무덤 속 같은 침상에 포박된 존재라고 느꼈던 것일까?

이젤 앞의 프리다. 벽에 걸린 <두 프리다>(1939)는 자신 안의 인디오적인 면과 스페인적인 면을 표현하고자 한 작품이다. 자아와 제2의 에고가 하나의 혈관으로 결합되어 있다. 책장에는 콜럼버스 이전 시대의 인물 조상(彫像)들이 있다.

프리다 칼로가 사망 직전에 그린 수박정물화 <viva la vida(인생만세)>에는 의미심장한 제명(題名)이 새겨져 있다.

프리다의 아버지, 사진사 길레르모 칼로가 1933년에 찍은 카사 아술의 안마당 모습.

카사 아술 | 이 파란 집에 살았던 두 사람의 이름은 벽에 새겨진 채 여전히 기억 속에 살아 있다. 부엌 벽면에 '프리다'와 '디에고'라는 이름이 모자이크로 박혀 있다.(위) 디에고의 침실. 모자들과 신발 한 켤레, 외투와 지팡이 등이 마치 지금도 여전히 사람이 드나드는 느낌을 준다. 침대 머리맡에 걸린 프리다의 사진이 시선을 끈다.(아래)

자화상 | 테와나의 여성 전통복장 차림의 프리다. 마치 원주민처럼 머리에 쓰개치마를 덮어썼다. 프리다가 외국에 체류할 때면 그녀의 독특한 전통 스타일의 의상(풍성한 검은 머리칼에 화려하게 감아올린 머리띠장식과 함께)은 관심과 감탄을 모았다.

 

영상으로 담은 집 : 피카소의

빌라 '라 칼리포르니'

 

파블로 피카소와 거장 사진작가요 그림에세이스트이자 종군 보도기자인 데이비드 더글러스 덩컨의 우정은 확실히 너무나도 특별했다. 17년이 넘도록 오랜 세월 유지된 깊고 막역한 두 사람의 관계는 1956년 첫 만남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피카소를 만나겠다고 미국에서 칸까지 날아온 손님을 욕조에 들어앉아 맞았다니!

 

"50년대 피카소의 세계에서 구심점이 되었던 '라 칼리포르니'에서는 하루하루가 달랐다. 때로는 그림들이 아틀리에를 가득 채우는가 하면, 어떤 때는 도자기 천지였다. 여기서 저기로 움직이기가 힘들 정도였다."

- 데이비드 더글러스 덩컨

윤곽선을 따라 오려낸 피리부는 목양신상을 잡고 있는 피카소. 그는 흥이 나면 이 신화 속 음악가처럼 온 방을 돌아다니며 춤을 춘다.

작품 활동이 왕성했던 칸 시절에 그린 드라이포인트 동판화 <타우로마키아>. 투우를 좋아한 피카소는 발로리스에서 투우장을 즐겨 찾았다.

애견 카불과 함께 있는 피카소와 자클린. 1962년, 무쟁.

<아틀리에의 자클린> | 피카소보다 50살 가까이 연하인 자클린 로크는 그의 인생의 마지막 동반자였다. 피카소는 그녀의 초상화를 여러점 그렸다. 이 그림은 그의 아틀리에임을 보여주는 사모바르 주전자, 탁자, 그리고 창 밖의 전망 등을 앙비앙스로 하여 작품으로 남긴 자클린의 프로필 초상.

브론즈로 길들인 염소 | 피카소는 자연스러움을 사랑했고 스스로 그렇게 살았다. <라 칼리포르니> 빌라 정원을 마음껏 누비고 다닌 염소 카브라를 모델로 해서 제작한 브론즈 조상. 옥외계단 앞에 세워두었다.

전망 | '라 칼리포르니'의 꼭대기 층에 위치한 아틀리에에서 칸 해변이 보인다. 피카소의 비둘기들이 사는 곳이다. 북쪽 지방(보브나르그성)으로 이사하느라 이 빌라를 떠나기 직전, 열린 아틀리에 문으로 한 떼의 비둘기들이 날아들었다. 마치 마지막 작별인사라도 나누겠다는 듯이……

 

'버드맨'의 부화장

 

옛날 옛적에……오버바이에른 알프스 높은 산에 1930년대에 지은 농가가 있었습니다. 어느 다재다능한 남자가 '버드맨'이 되어 아시아를 날아다니다가, 바트퇼츠 근처 황량한 '두메산골'에 내려앉았습니다. 그는 그곳을 운명의 장소로 삼아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것은 온통 새들로 뒤덮인 예술의 세계였습니다!

바트 퇼 츠 근방에 별난 "새집"이 있다. 그 집의 주인은 가끔 솜털 보송한 새로 변신하기도 하고, 새집 안에 웅크리고 들어가 있기도 하며, 스스로를 "버드맨"이라고 칭한다.

 

이 집은 나 자신의 거울이다. 땅에 단단히 뿌리내린 채, 새들을 통해 하늘과 연결된다."

- 버드맨

새의 집 | 현관. 나무판자들을 덧대 새들의 둥지를 꾸며놓은 모습이 일부 보인다. 뒤쪽에 보이는 트롤리에는 또 하나의 '버드맨 프로젝트'가 진행중. 바로 새 박물관이다.

 

아틀리에

 

"천재지변이라도 나면 모를까, 난 단 하루라도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는 걸 상상할 수 없다."

오귀스트 르누아르

 

 

작은 지형도―예술가의

 

영역

 

스튜디오들을 어떤 유형 내지 장소로 규정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이제 세계 곳곳의 아틀리에들을 간단히 둘러볼까 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 시대의 다수 대중은 창작의 현장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예술은 요즘 개개인의 집 또는 임대한 공간 속으로 몸을 감춘다. 이러한 아틀리에들을 은밀히 출입하는 이들은 주로 화랑 주인들, 화상들, 언론 등이다. '아틀리에 데이'나 되어야 다수 대중들이 들여다볼 수 있을 뿐이다.

카탈루냐의 화가 호안 미로가 작업하는 모습.

보르프스베데 예술가촌 출신 중 가장 유명한 여류화가인 파울라 모더존-베커가 1902년경에 그린 <집, 자작나무, 그리고 달>.

중궁인 화가 용보 자오는 자택 정원에 따로 개인 아틀리에가 있지만, 처음부터 이곳 예술인촌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곳에서만 작품을 할 수 있었어요. 이제 저는 자리를 잡았습니다. 막 활동을 개시하는 젊은 무명 화가들에게는 이와 같은 장소가 필요합니다. 이곳은 저의 성지입니다. 여기서 딱 만 년만 살고 싶어요."

 

예술이 태어나는 곳

 

아틀리에의 형태에는 아무 제한이 없다. 판자집(자코메티)에서 문 닫은 모자공장(워홀)까지, 올리브 농원의 유리구조물(르누아르)에서 집 안에 꾸며놓은 동화 같은 동방세계(마티스)까지 가지각색이다. 한 칸짜리 카오스 스튜디오(베이컨)에서 마음껏 늘어놓을 수 있는 널찍한 공간이라는 꿈의 실현(미로)까지 - 이 모두가 가능하다. 함께 들어가 보자.……

마카르트의 초호화판 아틀리에는 단순한 작업공간에서 '예술의 전당'으로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당시 빈 부르주아 가정과 살롱 문화에서 교양인의 메카가 되었다. 작업실이자 파티장(전설의 가장무도회들!)이었던 이 아틀리에는 현재 관광명소로서, 4시에서 5시까지 관광객에게 개방된다.

 

올리브 농원 속의 집

오귀스트 르누아르 |

 

"올리브 나무는 아주 지긋지긋합니다. 이놈이 나를 얼마나 곤욕스럽게 하는지 모르실 겁니다. 이건 회색만 빼고 온갖 색채가 다 들어 있는 나무입니다. 이제 그 나뭇잎들을 쳐다보기만 해도 진땀이 날 지경이랍니다. 한 줄기 바람에 나의 나무는 색조가 바뀌지요. 색은 잎사귀가 아니라 그 사이 공간에 들어 있습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레 콜레트'를 프랑스식 정원조성방식과는 반대로, 자연 상태 그대로 두었다. 일꾼들이 길가의 잡초를 제거하려 해도 만류할 정도였다.

1913년에 찍은 인상주의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사진.

이젤 앞에 몸을 굽힌 78세의 르누아르를 알베르 앙드레가 화폭에 담았다. 마비된 손가락들 사이에 붓을 끼워 고정시켰다. "천재지변이라도 나면 모를까, 난 단 하루라도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는 걸 상상할 수 없다."

- 오귀스트 르누아르

목가 | <목욕하는 여인들> 혹은 <님프들>은 위대한 인상주의 화가 르누아르의 마지막 그림이다. 여인의 누드를 자연의 풍경 속에 담은 이 그림은 그의 예술의 변주이자 결산이요 이별가라 하겠다. 모델들은 천을 걸친 채 정원에 있고, 화가는 정원화실 안에서 작업했다. 유리창을 통해 그는 자신의 모티브를 완벽하게 조망할 수 있었다.

 

니스의 지붕 위

앙리 마티스 |

 

"……니스의 은빛 광선, 그 강렬함과 선명함은 미술가의 감각에 안성맞춤이고 불가결한 요소 같습니다. 특히나 아름다운 1월이면 더욱 그렇지요."

이 초기작은 화실 창문에서 내려다 본 코발트 빛 바다와 번화하고 아름다운 거리 '영국인의 산책로'의 전망을 그린 것이다.

앙리 마티스는 니스 구시가 한복판에 자리잡은 이 건물 꼭대기 층을 '독차지'했다. 5층에는 넓은 'ㄱ'자 발코니가 있고 꽃시장과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유동의 경계 | 1929년 그린 <니스의 아틀리에에서>. 마티스의 그림은 '유동적'이다. 내부와 외부 세계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파스텔 색조의, 빛으로 충만한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 바다의 물빛은 책상 상판의 밝은 옥색으로 실내에 유입되고, 밝은 노란색 커튼은 실내에 떠 있는 태양이며, 종려나무의 진초록은 벽에 그려진 타일 무늬로 재현된다.

비전 | "나는 균형, 정화, 휴식의 예술을 꿈꾼다. 사람을 불안하거나 짜증나게 만들기보다 사업가건 문인이건 아무튼 정신노동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는 예술, 마치 육체의 긴장을 풀어주는 편안한 안락의자처럼 머리를 쉬게 해주는 그런 예술을 꿈꾼다." - 앙리 마티스

이완 | 다양한 소재의 천들로 아름답게 장식된 화실에서 모델 앙리에트 다리카레르를 스케치하는 마티스.(아래) 이러한 습작들에서 <목련이 있는 오달리스크> 같은 작품들이 나온다. "이런 애틋하고 나른한 분위기, 사람과 사물의 경계가 가물가물해지는 몽롱한 햇살 아래서 숯불처럼 은근히 타오르는 엄청난 긴장, 이는 순전히 회화적인 것으로, 구성요소들 간의 관계와 상호작용에서 나온다." - 앙리 마티스

니스의 오후 | 1922년 작 <니스의 실내, 시에스타>에서는 코트다쥐르 해안의 지글거리는 한낮의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창문은 열려 있고, 차양은 내려진 채, 세상이 고요하게 정지한 듯하다. 모델은 조는 듯 나른하게 안락의자에 누워 있다. 이 시절의 마티스의 그림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커다란 창문으로, 그가 그린 아틀리에나 실내 풍경 대부분에 창문이 보인다. 그에게 내부와 외부의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창문의 벽이 두 개의 상이한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황량한 산골동네와 파리의 판잣집

알베르토 자코메티 |

 

"같은 얼굴, 탁자, 의자, 찻잔 하나라도 매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이전보다 더 아름답고 더 진정한 모습으로."

양친이 사시는 고향 스탐파의 마을 길에 서 있는 알베르토 자코메티. 아래는 파리의 아틀리에 앞. 안쪽으로 주거공간이 딸려 있는 판잣집이다.

자코메티가 남동생 디에고의 고양이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브론즈 조상. 아침마다 "침대를 찾아오는" 고양이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스파르타 풍의 작업장 |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작업중인 자코메티.(위) 작업장은 그가 끊임없이 반죽하고, 이기고, 누르고, 빚으며, 형태를 만드는 실존주의적 예술, 독특한 '현상학적' 조소작품들로 가득하다. 미완성 작품들은 굳지 않도록 젖은 천으로 덮어두었다.(아래)

아틀리에 입구 | 자코메티의 아틀리에는 1층이다. 침대 위에 신문지, 방 한가운데에는 실물 크기 이상의 커다란 석고조상이 있는 단출한 공간. 계단을 올라가면 다른 예술가들의 작업장들이 나온다. 알베르토의 남동생 디에고의 작업실도 이 다세대 건물 내에 있었다.

 

지중해 섬의 별장 아틀리에

호안 미로 |

 

"……변화무쌍한 마요르카의 이런 하늘을 바라보는 게 나는 정말 좋았다. 그리고 밤이면 별똥별들이 수놓는 하늘과 반딧불들의 반짝임에 넋을 잃고 빠져들곤 했다. 그리고 바다, 밤이나 낮이나 한결같이 푸르디푸른……"

<청색 3부작>은 미로가 새 아틀리에에 들어와서 완성한 첫 3부작이자, 예술사의 중대한 이정표이다. 미로 스스로 이 작품을 일컬어, "이 그림들은 내가 이제껏 만들고자 시도했던 모든 것들의 완결이다."라고 평했다.

추상의 표현력 | 마요르카 집의 벽 앞에 앉아 자신의 구상을 검토하는 미로. 더러 그림의 '내구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작품을 야외에 내놓기도 했다. 그는 만년의 작품에서 기호적 세계의 새로운 차원을 제시하였다. "내가 추구하는 바는, 강도의 최대치와 낭비의 최소치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내 그림들에서 공백이 갈수록 더 중요해진다.

 

모자공장 건물에서 나온 팝 아트

앤디 워홀 |

 

"나는 공간을 소유한 사람이 진정한 부자라고 생각한다. 커다란 빈 공간. 내가 예술가로서 많은 쓰레기를 만들어내긴 하지만, 나는 텅 빈 공간들을 진정으로 믿는다."

'실버 팩토리' 시절에 나온 워홀의 <자화상>(1967)은 미국 팝 아트의 화신이었던 그의 자의식을 드러내 보여준다.

1965년, '실버 팩토리'는 뉴욕 히피들의 집합 명소였다. 알루미늄 호일로 씌운 작업장에서의 파티 모습.

예술작품 생산 | 1964/65년, 앤디 워홀과 제라드 멀란가가 캠벨 스프 캔 그림을 위해 실크스크린 날염 작업을 하는 모습. 워홀은 초기에는 멀란가 같은 조수들의 도움을 받다가, 수요가 점점 놀자 팩토리를 찾는 친구와 손님들까지 동원한다. 이후에 그는 일련의 작품 생산을 아예 상업 인쇄소에 맡겼는데, 이로 인해 날카로운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워홀 '오리지널' 작품의 '가치'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아틀리에의 워홀 | 시리즈로 생산된 자신의 팝 아트 예술, 그리고 이 장소의 본래 용도를 고려하여 워홀은 자신의 주거공간을 '팩토리'라고 명명하였다. 그는 그 뒤로 총 세 곳에 작업장을 갖게 되는데, 갈수록 점점 그 규모가 커졌다. 1967년 유니온 스퀘어 웨스트 33번지에 마련한 두 번째 작업장은 파티장보다는 사무실에 가까웠다. 그리고 1974년 8월에 이사한 브로드웨이 860번지의 세 번째 '팩토리'는 정식 사무실과 회의실, 그리고 멋진 식당 공간 등을 갖추었다.

 

화실에서 떨어진 감식작업

프랜시스 베이컨 |

 

"나는 여기 이 카오스 속에서 마음이 편하다. 왜냐하면 카오스가 내 속에서 그림을 불러내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집과 아틀리에가 있던 곳. 런던, 사우스 켄싱턴, 리스 뮤즈 7번가.

"나는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산다"고 프랜시스 베이컨은 주장했다. 그의 스파르타적인 주거공간을 두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을 듯.

색상표가 되어버린 아틀리에. 베이컨은 색을 섞을 때 팔레트 대신 주변의 평면들(문짝, 벽면 등)을 이용했다. 그는 아틀리에 벽면들을 가리켜, 자신의 '유일한 추상적 작업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970년에 그린 이 자화상은 베이컨의 작업방식을 잘 보여준다. 이 그림은 흑백 사진술에서 진일보한 신체 탐구다.

구제불능의 카오스 | "아틀리에란 현자의 돌을 찾는 연금술사의 작업장이 아니다. ― 그런 것은 우리 시대에 존재하지 않는다 ― 그보다는 오히려 화학자의 실험실에 가깝다." 2001년 5월부터 프랜시스 베이컨의 런던 스튜디오는 더블린 시립미술관 휴 레인 갤러리에서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영감의 원천이자 피난처 | 베이컨의 아틀리에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우주로서, 몇몇 친한 친구들만이 드나들 수 있었다. 그의 작업의 흔적들은 어느 것 하나 치워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겹겹이 쌓여갔다. 어느 대담에서 그는, 질서를 창출하는 것은 그림들이 해야 할 일로 생각한다고 말한 바 있다.

 

예술로서의 집

 

"모든 것의 근원은 바로

자연이라는 거대한 책 속에 있다.

…… 내 아틀리에 앞에 있는 이 나무……

그것이 바로 나를 가르치는

스승이니!"

안토니 가우디

 

규범의 저편

 

예술가의 집이라는 말에는 '예술로서의 집'이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여기서는 건축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겠다. 그러면서 거듭 묻게 되는 것은, 의뢰인의 의견과 요구가 예술가의 이념과 접점을 찾을 수 있을까, 있다면 과연 얼마만큼 가능할까 하는 문제이다. 자연건축, 토목공학적 실험, 혹은 미술관 건물 ― 상상력에는 한계가 없다.……

 

"서구의 문화는 늘 각종 질서만을 생각한다. ……대칭, 고전적인 비례규범, 중앙구도 등, 하지만 온 세상을 대칭축 위에 지을 수는 없는 법이다."

― 프랭크 오 게리

 

 

"건축은 응결된 음악이다."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가우디의 <카사 바트요> : 용의 비늘 같은 지붕에는 작은 탑들이 있고, 성가족의 머리글자가 금장으러 새겨져 있다. 위의 사진은 동화처럼 신비롭게 번쩍거리는 파사드 장식.

환상의 동물 | <카사 바트요>는 코끼리 다리 모양의 육중한 자연석 받침대와 바다뱀처럼 꿈틀거리는 파사드 표면이 대조를 이룬다. 태고의 용의 비늘을 연상시키는 세라믹 지붕도 햇빛을 받아 찬란한 광채를 발한다. 건물 뒷면은 분홍과 주홍빛의 작은 세라믹 파편들이 반짝거린다. 원통형 탑도 이웃한 건물들과 높이를 적당히 맞추었다.

유기적 건축 | "우리 현대 주택의 외벽들은 바로 우리 감옥의 담벼락이다. 획일적이고, 삭막하며 …… 따분하리만큼 공허하기 때문이다. 공동주택 건물에서 각 주거 단위마다 외벽을 독자적으로 개성있게 또한 유기적으로 꾸미는 일은 굉장히 중요하다. 외부에서 보더라도 공동주택 가운데 각 거주자의 집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잇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파사드에 관한 훈데르트바서의 원칙이다.

뾰족한 삼각형 모양이 다리미 형태를 닮아서 '플래티런 빌딩'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기능적 |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슬로건은 당시의 맨해튼 최고층인 <플래티런 빌딩>을 통해 당당하게 실현되었다. 그것은 매우 제한된 대지를 최적으로 살린 효율적인 설계였다. 그러나 대니얼 허드슨 번햄이 신고전주의 양식의 파사드를 택한 점을 두고 '시카고파'의 현대성을 놓쳤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잇었다.

화제를 불러일으킨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물 <낙수장>의 내부 모습.

천재적 업적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게 건축은 '응결된 음악'이다. 미국의 유력 건축가인 그는 이러한 이념을 실행에 옮긴다. 나무가 무성한 산비탈에 작은 개천이 통과하는 부지의 입지 조건은 그에게 천계와 같았다. 그리고 건축을 의뢰한 집주인이 (특히 비용과 관련하여!)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건축학도나 건축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순례지가 된 이 <낙수장>은 현재 박물관으로 쓰고 있다. 건축 자재 : 콘크리트, 잡석, 유리.

옴베르토 보초니의 미래파 예술은 건축가 프랭크 게리에게 영감을 주었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예술을 위한 집 | 불시착한 우주선을 연상시키는 외관의 거대한 미술관 건물은 내부 역시 시각적 역동성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제멋대로인 듯이 보이는 형태의 결합이 늘 새롭고 색다른 공간조각 작품으로서 작용한다.

 

프란츠 폰 렌바흐

>> "나의 빌라를 뮌헨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겠다."

 

앙리 마티스

>> "니스의 은빛 광선, 그 강렬함과 선명함은 미술가의 김각에 선명함은 미술가의 감각에 안성맞춤이요 불가결한 요소인 것 같습니다. 특히나 아름다운 1월이면 더욱 그렇지요."

 

호안 미로

>> "변화무쌍한 마요르카의 이런 하늘을 바라보는 게 나는 정말 좋있다."

 

클로드 모네

>> "내일부터 며칠 안에 맘에 드는 적당한 장소와 집을 찾아내야지, 그러기 전에는 발 뻗고 잠을 잘 수가 없게 생겼습니다."

 

렘브란트 반 레인

 

>> "분위기가 담기지 않은 그림은 아무 것도 아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

>>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만 해도 카뉴는 여유롭고 멋진 농촌마을이었다. 언덕마다 올리브와 오렌지 농원이 끝도 없이 이어졌었다." - 장 르누아르

 

페터 파울 루벤스

>> "건물은 그저 독채 하나이되, 중앙에 파티홀이 있고, 거기서 여러 칸의 이어지는 방들로 연결되는 개인주택 정도면 …… 궁전이라고 하겠다."

 

파블로 피카소

>> "우리집의 저녁 조명은 너무나 멋져서, 난 대낮의 햇빛보다 이게 더 좋습니다.……꼭 한번 와서 직접 봐야 해요. 빛이 모든 대립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모습, 깊고 검은 그늘이 그림들을 에워싸는 그 모습을……"

 

자코포 틴토레토

>> "아름다운 색들은 리알토의 상점들에서 살 수 있지만, 훌륭한 그림은 꾸준한 연구와 불면의 밤들을 통과한 예술적 재능이라는 보석상자 - 오로지 거기에서만 얻을 수 잇다."

 

앤디 워홀

>> "나는 공간을 소유한 사람이 진정한 부자라고 생각한다. 커다란 빈공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 "건축은 응결된 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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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드무 황영찬

2015-072 열하일기 1

 

박지원 지음 | 김형조 옮김

2014, 돌베개

 

대야도서관

SB102080

 

816.5

박78ㅇ  1 c. 2

 

새 번역 완역 결정판

 

사람들은 단지 인간의 칠정七情 중에서 오로지 슬픔만이 울음을 유발한다고 알고 있지, 칠정이 모두 울음을 자아내는 줄은 모르고 있네. 기쁨이 극에 달하면 울음이 날 만하고, 분노가 극에 치밀면 울음이 날 만하며, 즐거움이 극에 이르면 울음이 날 만하고, 사랑이 극에 달하면 울음이 날 만하며, 미움이 극에 달하면 울음이 날 만하고, 욕심이 극에 달해도 울음이 날 만한 걸세. 막히고 억눌린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버리는 데에는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 더 빠른 방법은 없네, 통곡 소리는 천지간에 우레와 같아 지극한 감정에서 터져 나오고, 터져 나온 소리는 사리에 절실할 것이니 웃음소리와 뭐가 다르겠는가?

 

생김새가 사뭇 다르고 옷차림이 다른  사방의 외국인들, 칼과 불을 입으로 삼키는 요술쟁이들, 라마불교와 그 승려 반선班禪, 난장이들……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비록 괴상망측하게 생긴 사람들이지만, 『장자』에서 말하는 도깨비나 물귀신과 같은 그런 부류는 아니다. 『열하일기』 안에는 진기한 새나 짐승, 아름답고 특이한 나무에 대해서도 그 생긴 모습과 특징을 완벽하게 묘사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등 길이가 천 리가 되는 새, 8천 년 묵은 신령한 참죽나무 등과 같은 장자』의 황당한 과장이나 거짓말을 어찌 이야기했으랴!

이제야 알겠다! 장자가 지은 외전外傳에는 실제도 있고 거짓도 있지만, 연암씨가 지은 외전에는 실제만 있고 거짓이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우언을 겸하면서도 끝내 이치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귀결시킨 방법은 서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

 

중국의 노래나 가요에 관한 것, 풍습에 관한 기록도 사실은 나라의 치란에 관련된 것들이고, 성곽과 궁실에 대한 묘사라든지, 농사짓고 목축하며 도자기 굽고 쇠를 다루는 것들에 대한 내용은, 그 일체가 기구를 과학적으로 편리하게 사용하여 민생을 두텁게 하자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길이 되는 내용으로서, 모두 『열하일기』 안에 들어 있다. 그리하여 『열하일기』라는 책은 글을 써서 교훈을 남기려는 취지에 어긋나지 않게 되었다.

- 유득공의 '머리말' 중에서

 

지은이 박지원朴趾源(1737~1805)

조선 후기의 저명한 문학가이고 실학파 학자로,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이다. 명문 양반가 출신으로 약관의 나이에 문명을 떨침으로서 장래 나라의 문운文運을 잡을 인물로 촉망을 받았다. 그러나 타락한 정치 현실과 속물적 사회 풍기를 혐오하여 과거 시험을 통한 출세를 진작 포기하고, 창조적 글쓰기와 학문에 몰두하였다. 재야의 양심적 지식인으로서 당파와 신분을 초월하여 인간관계를 형성하였으며, 특히 선비 곧 지식인의 자세와 역할에 대해 일생 동안 깊이 고민하고 성찰하였다. 그의 산문은 중세적 사유의식을 떨쳐버리는 참신한 작품이 대부분으로, 그를 민족문학사의 최고의 경지에 끌어올렸다. 특히 44세에(1780년) 중국을 여행하고 지은 『열하일기』는 당시 문단에 큰 영향력을 끼쳤을 뿐 아니라, 민족과 세계의 고전에 값하는 기념비적 저술이 되었다. 50세에 음직으로 벼슬에 나아가 이후 안의현감, 면천군수, 양양부사 등을 역임하며, 주체적 벼슬아치 혹은 부모 같은 목민관으로서의 훌륭한 치적을 남겼다. 문집 『연암집』을 남겼는바, 주옥과 같은 시와 산문, 『열하일기』, 『과농소초』 등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옮긴이 김혈조金血祚

1954년 경북 선산에서 출생하였다. 성균관대 한문교육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한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2년 이래 영남대 한문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며 공부하고 있다. 한국한문학의 산문 문학에 주로 관심을 두고 있으며, 특히 연암 박지원의 산문 문학을 집중적으로 탐구하였다. 연암의 산문 작품을 연구한 『박지원의 산문문학』이라는 저서와, 산문을 가려 뽑아 번역한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라는 역서가 있다. 연암체의 성립과 정조의 문체반정이라는 논문 이외에 연암의 문학과 관련한 다수의 논문이 있다.

 

차례

 

역자 서문 왜 다시 『열하일기』인가?

일러두기

 

머리말 「열하일기서」熱河日記序

 

압록강을 건너며 도강록渡江錄

머리말 「도강록서」 ⊙ 6월 24일 신미일 ⊙ 6월 25일 임신일 ⊙ 6월 26일 계유일 ⊙ 6월 27일 갑술일 ⊙ 6월 28일 을해일 ⊙ 6월 29일 병자일 ⊙ 7월 1일 정축일 ⊙ 7월 2일 무인일 ⊙ 7월 초3일 기묘일 ⊙ 7월 초4일 경진일 ⊙ 7월 초5일 신사일 ⊙ 7월 초6일 임오일 ⊙ 7월 초7일 계미일 ⊙ 7월 초8일 갑신일 ⊙ 7월 초9일 을유일 ⊙ 옛 요동 이야기 「구요동기」⊙ 요동 백탑에 대한 기록 「요동백탑기」 ⊙ 관운장 사당 구경 「관제묘기」 ⊙ 광우사 구경 「광우사기」

 

심양의 이모저모 성경잡지盛京雜識

7월 초10일 병술일 ⊙ 7월 11일 정해일 ⊙ 예속재에서 나눈 이야기 「속재필담」 ⊙ 가상루에서 주고받은 이야기 「상루필담」 ⊙ 7월 12일 무자일 ⊙ 골동품 목록 「고동록」 ⊙ 7월 13일 기축일 ⊙ 7월 14일 경인일 ⊙ 심양의 사찰 「성경가람기」 ⊙ 산과 강에 대해 요약함 「산천기략」

 

말을 타고 가듯 빠르게 쓴 수필 일신수필馹迅隨筆

머리말 「일신수필서」 ⊙ 7월 15일 신묘일 ⊙ 북진묘 관람기 「북진묘기」 ⊙ 수레 제도 ⊙ 연희 무대 ⊙ 시장 점포 ⊙ 객점 ⊙ 다리 ⊙ 7월 16일 임진일 ⊙ 7월 17일 계사일 ⊙ 7월 18일 갑오일 ⊙ 7월 19일 을미일 ⊙ 7월 20일 병신일 ⊙ 7월 21일 정유일 ⊙ 7월 22일 무술일 ⊙ 7월 23일 기해일 ⊙ 강녀묘 관람기 「강녀묘기」 ⊙ 장대 관람기 「장대기」 ⊙ 산해관 관람기 「산해관기」

 

산해관에서 북경까지의 이야기 관내정사關內程史

7월 24일 경자일 ⊙ 7월 25일 신축일 ⊙ 조선 그림의 목록 「열상화보」 ⊙ 7월 26일 임인일 ⊙ 백이 · 숙제 사당 관람기 「이제묘기」 ⊙ 난하에 배를 띄우고 「난하범주기」 ⊙ 사호석 이야기 「사호석기」 ⊙ 7월 27일 계묘일 ⊙ 7월 28일 갑진일 ⊙ 범의 호통 「호질」 ⊙ 7월 29일 을사일 ⊙ 7월 30일 병오일 ⊙ 8월 초1일 정미일 ⊙ 8월 초2일 무신일 ⊙ 8월 초3일 기유일 ⊙ 8월 초4일 경술일 ⊙ 동악묘 관람기 「동악묘기」

 

북경에서 북으로 열하를 향해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머리말 「막북행정록서」 ⊙ 8월 초5일 신해일 ⊙ 8월 초6일 임자일 ⊙ 8월 초7일 계축일 ⊙ 8월 초8일 갑인일 ⊙ 8월 초9일 을묘일

 

찾아보기

Illustration Credits

 

『열하일기』

◎ --- 도강록

도강록은 1780년 6월 24일(음력)부터 7월 9일까지의 일기이다. 연암이 사신 일행을 따라 중국에 들어가 겪은 첫 번째 체험을 기록한 것이다. 의주를 출발하여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의 요양까지 이르는 도중에서 일어난 일과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중심으로 일기체로 서술하였다.

도강록이란 말은 압록강을 건너며 기록한 글이라는 의미이긴 하지만, 그 말 자체에 이미 강을 건너서 남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뜻이 담겨 있다. 길에서 마주치는 이역의 풍경과 중국의 앞선 문화 문물 등을 범상히 넘기지 않고 붓끝으로 담아냈다. 중국의 선진 문화를 예리하게 관찰 분석 비판한 대목에서 붓끝은 자못 진지하게 돌아가다가도, 연도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견문과 체험의 대목에서는 붓끝이 경쾌하게 돌아간다. 옛날 분들이 이 도강록의 문체를 두고 이른바 소설식의 패사체稗史體라고 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도道가 강물과 언덕 중간에 있다고 설파한 대목, 조선의 강토에 대한 관심과 그 논변, 넓디넓은 요동 벌판을 마주하며 한 바탕 통곡하기 좋겠다는 이른바 호곡장好哭場 대목 등은 깊이 음미할 부분이다.

철릭  조선 시대 무관 복장의 하나로, 당상관의 철릭은 남색이고 당하관은 분홍색이다.

  현악기로 가야금과 비슷하게 생겼고, 줄이 13개이다. 연주할 때는 왼손으로 현을 누르고 오른손으로 판을 잡아서 현을 퉁긴다.

역주易州에 있는 형가의 기념탑과 비석

구련성의 옛 터  현재 성은 없고, 그곳에 옛 성터임을 알리는 작은 표지석만 있다.

봉황산 산성의 표석

변문진 표석

봉황성의 옛 거리

벽돌 가마  『천공개물』 초간본 삽도.

부필의 글씨

관제묘

가의

요동 벌판

누르하치

청나라 군사 조직 팔기병의 군복

『전운시』

원숭환의 석상

화표주

동의 백탑

근년에 새로 복원한 광우사 패루와 광우사  패루 뒤에 있는 것이 광우사인데, 그 규모가 대단히 크다.

 

◎ --- 성경잡지

성경盛京은 심양瀋陽의 옛 이름이다. '심양의 이모저모'라고 번역한 성경잡지는 7월 10일에서 7월 14일까지의 여행 기록과 심양에서 체류하며 겪은 내용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도에서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이 모두 새롭고 흥미로운 것이어서 점입가경의 느낌을 가지게 한다.

심양에 도착한 연암은 바로 이튿날부터 한밤중에 숙소를 빠져나와 중국의 젊은이들과 밤을 새워가며 필담 토론을 벌인다. 예속재와 가상루에서 그곳의 주인들과 갖가지 화제를 끄집어내어 문답하고 토론을 하는데, 이역의 풍물과 인사들에 대해서 연암이 얼마나 많은 지적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던가를 읽을 수 있다. 중국의 젊은이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연암을 자신의 상점에 초빙하여 밤을 새워가며 필담하는 장면에서 연암의 박식한 학문과 예술 취향 그리고 소탈한 면모가 여실하게 드러난다.

또한 중국인들에게 연암이 자기의 필력을 뽐내려고 점방의 간판 글씨를 써 주는 대목인 '기상새설'欺霜賽雪은 마치 소설에 복선을 깔아놓은 듯 흥미를 주며, 중국의 초상 제도를 관찰하려고 상가에 들어갔다가 얼떨결에 문상까지 하고 나오는 대목은 연암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폭소를 유발하는 흥미로운 장면이다.

백탑  심양시의 동릉구東陵區 20km 밖 백탑보에 있다.

향장  심양성 안의 향장으로, 일종의 가리개 구실을 하여 앞뒤를 차단한다.

숭정전

숭정전의 편액

정대광명 편액

봉황루

잔도

양자강과 백제성  양자강 가운데 섬같이 보이는 곳에 백제성이 있다.

천산의 입구

연암이 그린 <국죽도>菊竹圖

 

 

낙타  청나라 화암嵒, <천산적설도>天山積雪圖

청동으로 만든 골동품. 고(觚)(위), 이(彛)(가운데), 준(尊)(아래)

채경의 글씨

가산  괴석을 쌓아서 인조의 산을 만들어 연못 주변을 장식했다.

동기창의 필적

「경직도」

연암이 쓴 편액 글씨 저실기측咀實其測

각 민족의 문자  오른쪽에서부터 만주(滿), 서번(藏), 중국(漢), 위구르(維), 몽고(蒙)의 글자이다.

청 태조 누르하치의 무덤인 복릉(위)과 청 태종의 무덤인 소릉(아래).

 

◎ --- 일신수필

일신수필은 7월 15일 신광녕에서 출발하여 7월 23일 산해관에 이르기까지 연도에서 본 이국의 풍물과 체험을 쓴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래 일신수필이란 말은 빠르게 달리는 역말 위에서 구경을 하고 지나가듯 보고 느낀 것을 생각나는대로 썼다는 뜻이다.

서문과 수레 제도를 논한 별도의 글에서 참다운 학문이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을 제시함으로써 선비에게 참다운 학문을 추구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7월 15일의 일기에는 저 유명한 '중국의 장관론'을 도도하게 펼쳤다. 연암은 중국의 장관이 깨진 기와 조각과 냄새나는 똥거름에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조선의 지배 이념을 주도하며 민족의 생활 경제를 낙후하게 만들고 있는 고루한 선비들에 대한 통렬한 반어적 비판이다.

수레 제도와 시장 및 다리 등에 대한 소상한 기술은 바로 북학北學의 구체적 내용의 하나이며, 아울러 중국 역사의 현장, 특히 명 · 청 교체기에 벌어졌던 치열한 전투 현장과 장수들에 대한 회고와 서술은 연암의 역사의식의 일단이다.

태산의 정상

노구교

변발을 한 공친왕恭親王(1871년경)

이성량 패루

광녕성의 쌍탑

북진묘

북진묘 앞의 돌사자

북진묘 마당의 비석들

사천 지방 검각의 관문

관운장의 소상

계문연수비  계문의 연수를 기념하여 세운 비석으로, 북경 해정구海淀區에 있다.

금주 고탑

청 태종 홍타이지

이자성의 동상

영원성 누각

원숭환

김홍도, <총석정>(《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

태호석

맹강의 소상

진의정

망해정  정자의 편액에는 징해루澄海樓라고 적혀 있다.

천하제일관이라는 현판이 걸린 산해관 제3문

명나라 소현蘇顯이 썼다는 천하제일관 현판

산해관 노룡두  만리장성이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

 

◎ --- 관내정사

관내란 산해관 안쪽을 가리키는 말이다. 곧 본편은 산해관에서 북경에 이르기까지 견문을 기록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도에서 마주치고 경험한 내용은 모든 것이 새롭고 흥미로운데, 특히 본편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사상사적 주제와 관련된 일련의 글들이다. 고사리 사건과 「호질」이 그것이다.

백이 · 숙제 사당을 지나며 음식으로 제공된 고사리와 그로 인해 벌어진 사단은 왜곡된 춘추대의를 비판한 글이다. 백이 · 숙제 및 고사리로 표상되는 춘추대의는 기실 명나라와 청나라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사상적 문제이다. 명나라를 높이고 오랑캐 청나라를 물리치자는 북벌론은 춘추대의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 고사리 파동은 바로 북벌론의 허구성을 통렬히 지적한 것이다.

「호질」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알려진 작품인데. 보다 근본적 시각에서 작품을 읽을 필요가 있다. 인간 중심의 문맹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그중의 하나이다.

과친왕 윤례

서위

창려현 갈석산

한유 소상

영평부의 고성

이광

변발

독락사(위)와 독락사 대불(아래)

관음지각  왼편 아래 태백太白이란 글자가 보인다.

동악묘

근대 초기의 조양문

서안에 복원한 아방궁

자금성 전경

정양문(왼쪽)과 적루敵樓

동악묘 패루

동악묘 별음

동악묘 비석


◎ --- 막북행정록

막북이란 사막 북쪽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대체로 만리장성 북쪽 변방을 의미하는 말로 쓴다. 막북행정록은 북경에서 열하까지 가는 동안의 체험, 특히 고생하면서 가는 길의 여정을 기록한 것이다.

압록강을 건너 40여 일 만에 도착한 북경이었으나, 황제는 북경에 있지 않고 열하에 있었다. 황제는 만수절 행사 전에 조선 사신을 열하에 도착하게 하라고 지시하였는바, 조선 사행으로서는 처음으로 열하를 가게 된 것이다. 일정이 촉박한 관계로 사행단은 그 숫자를 절반으로 줄이고, 밤낮을 달려서 갈 수 밖에 없었는데, 그 과정에서 갖가지 체험과 고생을 했다. 그 눈물 나는 고생과 그런 총중에도 장성을 빠져나가는 당시의 감회를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특히 북경에 체류하는 사람과 열하로 가는 사람의 이별 장면을 보고서 쓴 '이별론'은 탁월한 서정 산문이다. 인간에게 가장 큰 괴로움이 무엇일까? 이 문제를 도도하게 풀어낸 글이 바로 '이별론'이다.

<새연사사도>塞宴四事圖  만 · 몽이 연맹을 맺은 뒤 몽고는 청 왕조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매년 가을 사냥이 끝난 뒤 청 황제는 몽고인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면서 씨름 · 연주 · 말 길들이기 · 경마 등과 같은 활동을 벌였다.

피서산장 정문(위)과 열하 비석(아래)

첨운패루

지안문

고루(앞 건물)와 종루

자금성의 담벽

소현세자릉(소경원昭慶圓)  경기도 고양시 소재

밀운현 무령산霧靈山

불수감

고북구 관문  1910년대의 모습

쌍탑산

경추산  우측 하단의 사람을 통해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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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드무 황영찬

2015-071 고조선 사라진 역사


저자 · 성삼제

2005, 동아일보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48180


911.021

성523고


우리 역사 연구에서 가장 시급한 분야가 고조선이다. 일본의 보수 우익을 대변하는 학자들이 일본이 일으킨 전쟁을 미화하고 이웃나라를 경시하는 왜곡된 역사 교과서를 만들 수 있는 근거 중 하나가 고대사 왜곡에 있으며, 그 뿌리에 고조선 역사의 왜곡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배운 역사를 의심하라


'명도전은 고대 먼나라의 화폐다.' 국사 교과서에도 나오는 이 명제는 참일까, 거짓일까, 명도전 출토 지역이 옛 고조선의 영역과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중국 역사학자는 무슨 근거로 명도전이 고조선의 화폐라고 주장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 고조선 역사 논쟁은 추리소설처럼 흥미롭다.


성삼제

대구 농민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셰필드 대학에서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학교운영위원회에 관한 연구로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제35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서울시교육청, 서울대학교, 교육인적자원부에서 근무하며, 2001년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일본역사교과서 왜곡대책반 실무반장을 담당했다. 현재 교육인적자원부 지방교육재정담당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일본역사교과서

왜곡대책반비망록을 열며


"고조선 논쟁은 '다빈치 코드'보다 더 흥미롭고 복잡하게 얽혀 있다. 쟁점 하나 하나가 너무나도 역동적이어서 마치 생명체가 자라듯 새로운 것을 볼 수 있게 했다. 그래서 고조선을 통해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조망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것이 고조선 논쟁을 책으로 펴내는 이유다. 내 딸과 그 또래 청소년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썼지만, 나처럼 학창시절 일그러진 고조선 역사를 배운 어른들도 함께 봤으면 한다."


c o n t e n t s


서문

일본역사교과서왜곡대책반 비망록을 열며


1단군, 신화인가 역사인가

        단군기원의 의미

       수동태로 쓰인 우리 역사

       선생님도 믿지 않는 건국 기록

       <세종실록지리지>와 고조선

       기원전 7세기 문헌에 나오는 고조선

       단군은 가공의 인물인가


2한반도의 청동기시대는 언제부터인가

       청동기 역사가 이상하다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에 대한 대응 시나리오

      '이 씨 조선'도 고치지 않는 일본

      기원전 400년에서 기원전 4000년까지

      자고 나면 학설이 달라지는 게 고고학

      청동기 문명과 국가 건설

      청동기는 어디서 시작되어 어떻게 전파되었나

      청동기의 나라 고조선


3고인돌에 새겨진 역사

      고조선, 청동기, 고인돌

      전 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한반도에 있다

      영국의 스톤헨지와 한국의 고인돌

      고인돌의 건축 연대가 열쇠다

      고인돌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전파됐다

      한류보다 파급효과가 큰 고인돌 연구


4단군릉과 단군 뼈의 진실

      단군과 아브라함

     북한의 단군릉 발굴

     발굴은 인정하나 단군릉은 인정 못해

    50여 회측정, 동일한 결과

    유물 절대연대 측정의 한계

    조작된 결과인가, 잘못된 실험인가

    단군릉 논쟁은 빙산의 일각


5고조선은 대동강 유역에 있었나

    한사군 논쟁의 의미

    패수는 대동강인가

    《사기》에 기록된 위만조선과 한의 전쟁

    《사기》에 나타난 진실

    평양은 어디에 있었을까

    평양성이 왕험성이 아닌 4가지 이유

    한사군은 설치된 적이 없다

    국사 교과서와 한사군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역사

 

6명도전은 고조선 화폐가 아닐까

    명도전이 연나라 화폐가 아닌 이유

    고조선과 연나라는 전쟁 중이었다

    진시황의 도량형 개혁과 반량전

    명도전 출토 분포를 보면 고조선이 보인다

    명도전 유적과 패수의 위치

    명도전 연구가 필요하다

 

7일본은 《삼국유사》를 변조했나

    《삼국유사》 중종 임신본

    조선사편수회에서 울분을 터뜨린 최남선

    고조선 이전에 환국이 있었다

    재야 학자들이 하는 소리

    원본에 덧칠된 글자

    1904년 도쿄제국대 발행 《삼국유사》

    누가, 왜 고쳤을까

    변조되지 않은 《삼국유사》를 찾아서

    國인가 因인가, 이체자 논쟁

    환국은 환인의 오류가 아니다

    환국 · 환인 논쟁 왜 중요한가

    환국은 나라인가, 신인가

    일본의 역사 왜곡은 현재진행형

    국보급 고문서 변조는 국제적인 범죄행위

 

8위서 논쟁 속에 묻혀버린 고조선

    위서란 무엇인가

    영광스런 고대사를 위해 만든 책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기서와 비기들

    《규원사화》의 오류

    '문화'는 20세기 초 일본에서 수입된 말인가

    위서 논쟁 이전에 전문 감정이 필요하다

 

9《환단고기》에 기록된 천문 현상

    《환단고기》가 주목받는 이유

    붉은 악마와 치우천왕

    대종교 계통의 책이라 믿을 수 없다

    연개소문 아들 남생의 기록에 담긴 비밀

    발해 정혜 공주의 묘지와 《환단고기》

    천문학으로 《환단고기》의 비밀 푼다

    재야 사서의 비판적 연구가 필요하다

 

10고조선 논쟁은 계속돼야 한다

    고조선 역사, 불가피한 논쟁

    일제강점기 역사 말살과 왜곡의 상처

    역사 논쟁은 훌륭한 논술 교재

    단군조선은 우리의 과거이자 미래

 

    도표 · 고조선에 대한 견해 차이

 

단군 신화는 고조선이라는 국가가 세워지고 난 이후 만들어진 건국 신화가 구전되다가 고려 시대에 정리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틀어서 단군이나 고조선의 건국이 임의로 창작되었다거나, 몽고 침입 시에 민족의사를 강화하기 위해 꾸며낸 것이라고 주장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청동기시대가 중요한 이유는 고조선의 건국을 실재 역사로 보느냐 마느냐의 기준점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한국의 청동기시대의 상한 연대를 근거로 고조선의 건국을 실재 역사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주장하고 있다.

숭실대학 소장 여러꼭지잔줄무늬거울.

직경이 21센티미터 안에 0.3밀리미터 간격으로 1만 3000여개의 가는 선을 넣은 정교한 청동거울이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는 고인돌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전파되었다면, 청동기 문명도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전파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고인돌이나 청동기 문명이 고조선 지역에서 시작하여 유럽으로 전파되었음이 입증되면 이는 세계 고고학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것이다.

 

단군릉에서 발굴된 인골의 연대가 기원전 3000년으로 나온 것에 대해 학자들은 명쾌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두 기관에 연대 분석을 의뢰했더니 같은 연대치가 나와서 그대로 발표했다고 북한 측은 설명했다.

1993년 북한이 발굴한 단군의 유골.

 

《사기》에 나오는 왕험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평양 지역이라는 주장과, 오늘날 만리장성에서 가까운 난하 또는 요하 부근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 논쟁이 중요한 것은 왕험성이 어디냐에 따라 고조선 역사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고조선 영토에서 연나라 화폐 외에도 다른 종류의 고조선 화폐가 발굴되었다면 양국의 활발한 상거래를 통해 화폐가 오갔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고조선 영토에서 연나라 화폐인 명도전이 엄청나게 발굴되고 있는 데 반해 정작 고조선 화폐는 지금까지 단 한 개도 발굴되지 않았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까.

 

"《단군고기》는 광범한 고기록을 지극히 간략하게 요약하여 놓은 것이므로 그 편언척자片言隻字에도 중대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 그러므로 가령 한 자의 잘못이 잇다 할지라도 그것이 전문全文의 해석상 미치는 영향은 지극히 크다. 《삼국유사》의 《단군고기》 중에 석유환국昔有桓國이라고 되어 있던 것을 석유환인昔有桓因이라고 고친 천인淺人 이마니시 류(今西龍)의 망필妄筆을 인용한 것이 바로 그 하나다."(최남선)

1921년 교토 대학에서 발행한 《삼국유사》 영인본.

○안의 글자는 국国 자에 덧칠해서 인因 자로 만든 흔적이 보인다

1932년 고전간행회가 발행한 《삼국유사》 영인본.

○안의 글자는 도저히 인因 자라고 볼 수 없을 만큼 덧칠한 상태가 조악하다.

 

《규원사화》 위서 논쟁은 성경의 위서 논쟁과 기본 구조가 비슷하다. 위서인 성경을 위경僞經이라고 하는데 위경들은 당대에 썼으면서도 마치 오래 전에 기록된 것인 양 꾸며대기도 하고, 자신들이 속한 신앙집단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과거에 없던 일을 실제로 일어났던 것처럼 쓰기도 했다. 그래서 위경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위해 문서와 필체 감정기술이 동원됐다.

 

《환단고기》 진위 논쟁은 더욱 장려되어야 한다. 《환단고기》의 사료적인 가치를 부정하는 쪽이든, 《환단고기》가 우리나라 상고사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주장하는 쪽이든, 서로 귀를 열고 상대의 주장을 비판하고, 새로운 검증 기준을 찾아내는 비판적 《환단고기》 일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환단고기》의 오성취루 현상을 재현한 그림. (박창범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주제마다 치열하게 부딪치는 논쟁을 접하면서 역사란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에 되살아나고 있는 생명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논쟁 하나하나를 대할 때마다 마치 추리소설을 일는 것처럼 흥미진진했다. 정반대의 주장들을 접하면 어느 쪽의 논리가 선명하고 어느 쪽의 논리가 부족한지 알 수 있다. 고조선 역사 논쟁 자체가 훌륭한 논술 교과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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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드무 황영찬

2015-070 저녁의 연인들


황학주 시집

2007, 랜덤하우스



시흥시대야도서관

SB000031


811.6

황92저


문예중앙시선 20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선정 2007 우수문학도서


황학주의 시가 변했다. 이제, 어디서도 언어를 비틀고 왜곡하고 차단하는 불화의 테크닉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상처가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상처가 완전히 가실 수 있겠는가!) 어두운 숲이나 깊은 구멍 문고리 어머니 같은 은유적 언어들이 이를 감싸고 가린다. 그래서 그의 언어들은 읽는 이의 가슴으로 흘러들어와 기억의 풍경들을 밝혀주고 땡그렁땡그렁 울린다. 우리는 풍경에서 왔으며, 지금도 풍경 속에 있으며, 앞으로도 풍경 속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슬픈 그 풍경이 우리 마음을 울리고 우리 이마를 세차게 때린다.

- 최하림(시인)


황학주 시인을 뵙지 못한 것이 10여 년은 되었는가. 가을날 그의 새 시집 원고 『저녁의 연인들』이 도착했다. 첫 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마음은 붉어진다. 언제나 그러하듯 이 시집에서도 황 시인은 무척 말을 아낀다. 그리하여 한 줄 한 줄 숨을 죽이며 천천히 읽어나가야 한다. 읽다가 책장을 가끔은 접고 숨을 한번 내쉬어야 한다. ……내가 국경을 넘어 떠돌아다닐 동안 황 시인 역시 국경을 넘어다닌 흔적이 역력하다. 그 밑은 그리고 고즈넉하고 검고 따뜻하다. 서울 방학동 시절의 다정하나 스스로를 몰락 지경으로 이끌 것 같은 시정이 긴 세월 동안 따뜻하게 뭉쳐 있다가 너무 세게 펴 보이면 들킬세라 조용하게 숨죽여 있다. 서늘한 서정이라는 비수가 세계의 빛과 어둠을 향하여 은은한 빛을 보내고 있다. 『저녁의 연인들』이 당신에게 수줍은 말을 계속 걸어온다면 당신도 어쩌면 국경을 넘은 자인지도 모르겠다. 지정학적의 국격이 아니라 마음의 어느 국경. 그 안에서 견디는 자. 그 견딤의 순간들. 당신, 그리고 우리들 모두가 그리하여 이 시집의 동반자가 될지도 모르겠다.

- 허수경(시인)


황학주

1954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1987년 시집 『사람』으로 등단한 이래 『내가 드디어 하나님보다』『갈 수 없는 쓸쓸함』『늦게 가는 것으로 길을 삼는다』『너무나 얇은 생의 담요』『루시』 등의 시집을 펴냈다.


시인의 말


수줍은 중년이다.

고개를 숙여야 하는 낮은 집을 출입하고 있다.

이런 마음의 집에 '저녁' 외에 달리 무슨 이름을 달겠는가.

짝, 도 좋다.


2006년 가을

황학주


|차례|


● 제1부


화대

마음

쇠귀나물

오이밭에서

사과나무밭 밑동들

세일즈맨, 백 칸 건물 속으로

겨울 양수리

젓가락, 내 마음은

얼레지

탑이 있는 풍경

막 어두워지는 숲길


● 제2부


버스

북 치는 인형

그해 여름

흰 염소

꽃 없이

뉘엿뉘엿 눈발 속으로 가는 일

거기는

두 번째 가는 정선

어느 날

장독대

익어가는 달-백중 무렵

극장


● 제3부


저녁의 연인들

베네치아의 연인

열대야

덜 닦인 방

은디라이

옛 부두

비어(飛魚)

푸른 사과 속 같은


● 제4부


저수지

소렌토에 멈춘 저녁

종점을 기다린다

K의 이사

동강 한때

가슴검은도요

예전에, 방직공 목련

삭정이

내가 했던 일


● 제5부


그 집 뒤꼍

퇴근 열차

간병

두 남자

용산역

지루한 오후

노인

조선대 뒷산을 넘어 할머니에게 어머니 심부름을 다녔다

굽은 소나무 그림자


|작품 해설| 송승환(시인 · 문학평론가)

정지된 세계의 비유와 성찰


저녁의 연인들


침대처럼 사실은 마음이란 너무 작아서

뒤척이기만 하지 여태도 제 마음 한번 멀리 벗어나지 못했으니

나만이 당신에게 다녀오곤 하던 밤이 가장 컸습니다

이제 찾아오는 모든 저녁의 애인들이

인적 드문 길을 한동안 잡아들 수 있도록

당신이 나를 수습할 수 있도록

올리브나무 세 그루만 마당에 심었으면


진흙탕을 걷어내고

진흙탕의 뒤를 따라오는 웅덩이를 걷어낼 때까지

사랑은 발을 벗어 단풍물 들이며 걷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이 아니라면 어디 사는지 나를 찾지도 않았을

매 순간 당신이 있었던 옹이 박인 허리 근처가 아득합니다

내가 가고,

나는 없지만 당신이 나와 다른 이유로 울더라도


나를 배경으로 저물다 보면

역 광장 국수 만 불빛에 서서 먹은 추운 세월들이

쏘옥 빠진 올리브나무로

쓸어둔 마당가에 꽂혀 있기도 할 것 같습니다


당신이 올리브나무로 내 생에 들러주었으니

이제 운동도 시작하고 오래 살기만 하면.


북 치는 인형


누가 내 이야기를 한다 며칠째 학교 뒷문으로

기차가 지나간다


발 없는 아이가

나귀에 매달려

하굣길

10리를 간다


퇴짜 맞은 것은 만삭인 낮달도 마찬가지

아무도 낳을 생각이 없다


등교할 힘도 없는

놀미낭가이네 흙집 지붕 위

딸려 올라가는 소시지나무 열매가 때로 달려 잇다

불도 못 때주고 먹이지도 못하는

불모의 자지들


새 발자국 몇 개 빗방울 무늬로 찍힌 운동장

누가 내 이야기를 한다


며칠째 학교 뒷문으로

텅 빈

기차가 지나가면

낙엽들이 개처럼 쫓아나간다


서랍을 열면

가슴에 달빛처럼 접힌

나보다 더 아픈 사람

꿍짝꿍짝 발을 맞춘다


푸른 사과 속 같은


사탕수수밭 뒤쪽에

일렬횡대로 앉아

아침이면 사내들과도 함께 일을 보는


사과 베어 먹으며 돌아앉은 여자

엉덩이 한쪽에 푸른 멍이 들어 있다


얘들아, 버펄로 수레 조심하렴


늘어난 데 없이 번지는

한 채의 꽃구덩이가 일렁이며

등굣길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든다


푸른 사과 속 같은

여자의 그림자

사과씨 묻혀 있는 멍을 닦는다


버스


갑자기 버스가 나타났다

비 내릴 때 나의 마음을 태울 차가 저렇게 분명하게 오는 일이 거북하지 않나 일단 그렇지 않나

해 진 뒤에 마음은 배롱나무 계단을 오르내리는데

버스가 오면 나는 손을 들지도 않고 돌아서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보다 당신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불빛을 켠 밝은 내부, 담쏙 받아 든 자두 광주리 같은 저녁을 태우고 버스가 온다

버스가 오나 보러 나와 한번쯤은 세상이 우리에게 시간을 맞춰줄 수도 있지 싶다

당신을 먼저 집으로 보내는 것인데

2, 3일 후 4, 5일 후 무려하게 따라갈 수도 있지 싶다

우레 치는 길은 옷고름을 풀어가

버스가 오는 걸 미끄러지듯 받아 안는다

언젠가는 다가올 슬픔 중 가장 귀한

버스가 온다면 사랑하다고 꼬집는 묵언도 쓸데없을 것이다

그런 시간이면 가까스로 불이 붙는 라이터가 입술 주위를 밝힐 것이다

지금은 손을 들지 않고 버스를 보낼 수도 있는

누가봐도 생에게 또박또박 대꾸를 할 수 있는 시간 언저리


곧 버스가 끊기는 밤이 된다

슬프면 안 된다

그 뒤에는 자연사박물관이 있다


그해 여름


멀리 간 날이었다

무서우리만치 많은 나무들이 몰려왔다

다함이 있어야 혼이 들어간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박물관 앞에서 여자를 처음 보고서

눈을 감았다 뜰 때 아주 먼 시간이 어둔 화덕에 피어 있었다

찌그려 신은 한 켤레 시간을 세족시키며

여강(驪江) 가 꽃 피듯 일없이 여자가 앉았다

무슨 물고기를 먹은 그 오후와 저녁 사이

그 식당은 지금 없어졌다 침이 마르듯이


낌새가 없는 일이었지만 식당 뒤

공사장 붉은 흙더미와 고랑 흑백 어딘가에

수줍은 중년이 어떻게 손을 들고 있었나

오색을 다 내줘버린 자작나무

몸 떨군 가장자리로 가만가만 가져가는

저녁처럼 여자 혼자 살고 있는 곳

이승에서 하루쯤이면 갈 수 있는 곳

요행이 떠나면 잊을 수 있을 듯도 해

그 한나절은 기념이 되었다


알 수는 없었지만

마음이 피는 일엔 다함이 있어야 한다는 걸

여자가 눈짓해준 그해 여름


사과나무밭 밑동들


부석사 까치가 쪼고 있는 늙은 사과나무 밑동들


시간이 꼭꼭 씹어 쌓아둔 시커먼 밑동과 엉덩이를 맞대고

나는 눌러앉아 있었다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아닌 연애가 여물었다 떨어지고

점점 말수가 줄다 경청하는 귀만 커다랗게 남겨진 노인일까

베이고 없는 사과나무들

질질거리며 소변 보는 마지막 모습만 얼어 있었다

저녁은 그사이

망한 부석 아랫도리와 바닥 모를 말을 나누며

얼룩얼룩했다


저런, 자필 사인한 이별 같은 노을에

젖어 벌어지는 사과나무 한 그루

털썩 주저앉아

몇 해 전 내 몸에 들어오지 않았나 묻고 있었다


종점을 기다린다


종점을 기다린다 흰 우산살을 펴며


비가 쉬지 않고 새드는 가게 처마 밑

물받이가 비벼서 내려 보내는 빗방울

뭐라고 하나

빗소리

불 꺼진 창만 골라

사납게 뛰어들 때


허리띠를 풀면 내려가는 바지처럼

눈이 풀어지면 스르르 종점에 닿으련만 버스가 오지 않는다

정류장에서 매일 저녁 출생 지점으로 돌아가는

일용의 여행자, 상속받은 귀가를 기다린다

봄비에 젖어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하러 오라는 듯

눈이 흐린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다


거리는 파인 도마처럼 펼쳐져 있고

탈을 든 영혼처럼 손목을 놀리는 비

포플러나무가 팔을 붙인 채 염주비를 돌린다

빗소리를 감았다 풀었다 하는 배뇨를 참고 있는 사람의 골목이 먹갈치처럼 흘러가며


종점을 기다린다

낙수 고랑을 타고 그 한 집

불 꺼진 방으로 가는

 

극장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제 것을 주물럭거리며 아프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으로는 미완성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 누군가 젖을 살짝 들어올리면 동그래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멀그스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만 일어나라고 등 떠밀지 않아도

환하게 불 들어오며 종영될 인간 극장

 

익어가는 달

- 백중 무렵

 

혈흔을 감싸안고

이사 가는

밤마다 다리가 아픈

영생

 

예전에, 방직공 목련

 

날마다 달이 도장을 찍으러 오는

누이의 세숫대야 속에

목련이 졌다

 

그날 목련꽃이 쏟아진 마당에 사람들이 하루 종일 오가고

나는 운동화 끈을 푼 뒤란에서

한 10년 한자리서 눈 맞은 사람 하나 손잡아 끌었습니다

앞바다에 굴러 떨어뜨린 배추며 돼지 똥값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때 잡고 다니던 손처럼 고물고물 해안선을 건네준 후

아버지를 모아 난바다에 내다 버린 나는 자주 도시락이 없었고

나라도 집을 나가야 할 것 같은 점 많은 식구들이 있었다고

그렇게 쉽게 어른이 되었다고 해야 되었습니다

홑거적 속에서 날갯짓을 하며

너무 늦어 돌아가면 빚이 될 것 같은

목련,

씨줄과 날줄 끌어 녹슨 세숫대야를 방직하며

울컥 쏟아졌습니다

 

두 남자

 

정신이 돌아오는 길목은 언제나 치욕이다

간병인 아줌마에게 엉덩이를 보이는 게

허, 화가 나는 아버지

 

허 참,

파르스름한 엉덩판에서 똥을 긁어내는 동안

 

쓰레받기 하나 비석처럼 들고 서 있는 내 그림자

이 진땀과 냄새 우려내는 데를 생각하고 잇다

 

자신의 것만은 아닌 똥물 진물 골목 위를 걷는

팔순, 침대 이쪽으로 기우뚱하는 순간에

저쪽을 흐지부지 잊어버린다

 

단 한 번도 동이 나지 않은 똥 웅덩이

한옆에서

슬쩍슬쩍 똥빨래를 만작대는 달빛에 나도 스며서,

 

쇠귀나물

 

유리병이 버려진 논물 위로

소의 귀 모양을 한 풀잎들이 나와

아, 아, 아, 입을 갖다 대며 쭈그리고 앉아 놀던 학교 길

손을 묻어 물을 만지면 꼼지락거리는 소녀가 느껴졌다

막 뜯은 편지 봉투처럼 가난한 마음을 들고

나이 많은 남자를 만나 배배 꼬인 연애를 하러 가던

누나는 중학교밖에 못 마치고

쇠귀나물 뽑힌 논에서 모를 심었다

 

쇠대나물 쇠태나물 쇠택나물 수사 곡사 급사 택사 물택사

버려지면 이름도 아무렇게나 불린다

물집 잡힌 하얀 꽃잎 우리 누나

중퇴한 교실 창 안에 대고 친구들에게 뭐라고 했나

쇠귀에 뭐라고 했나

소리치고 밀쳐도 남자는 꿈쩍을 않고

세상에 골똘해야 하는 일을 쇠귀에 속삭이는 일로 알았던

 

유리병 안에 들어간 나비가 팔랑거린다

쇠귀나물 잎 떨어진 자리가 구드러지고 있다

 

오이밭에서

 

오이 살색을 살피며 생각한다 싱싱하고 오톨도톨하던

몸의 나이에 신세 안 지고 올 수는 없었구나

자기 가시로 박음질된 오이의 몸에

넓삐죽한 칼을 대며, 자신을 깎아보지도 못한

물렁한 포대자루 못생긴 그림자 둑길 하나 두고 앉아 있다

 

살짝 잠이 모자란 오이가 잎 속에 있다

임신한 차림으로 길게 넘어진 오이 옆에

부은 목젖처럼 잎 하나가 돋는다

새끼들이 모두 나와 있는 오이밭

덩굴손으로 붙들고 있는 젖은 어머니들

 

가시 분화구 밑 싱싱한 지층을 섬벅 베어 문다

읽고 싶은 백 권의 기갈을 잃어버렸다 오이밭에서

물맛 좋은 가슴 한 짝 덜렁, 그랬다

물벼락 같은 오이 냄새 아래

땅벌레가 취해서 옴직옴직 돌아가는 참이다

 

막 어두워지는 숲길

 

숲길이 막 어두워져 더 걸어 들어갈까 말까 하는 갈피에서

무슨 빛인가 발그레하게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숲이 항아리를 씻어두었는지

무슨 빛인가,

 

여름날 길을 달리한 모든 가지들 위에

밥 묵은 손바닥처럼 얹히는 것이었습니다

노란 양푼을 업은 금달맞이꽃이 눈에 띄는 것이었습니다

 

그 길은 언젠가 두 사람이 걸어

이끼 앉은 돌 틈에서 목탑(木塔)을 들어내던 곳

찬 이슬을 지닐 때까지 구부러들어야 했던

어둠의 설움의 친정이었을,

 

숲에선 하루해를 핥아준 냄새가 나고

지하 대수층에 다니러 가는 해가 밤나무 밑으로 접어들면

마른 새가 엎드려 있어도 좋을

눈동자 같은 둥지가 밝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굽은 소나무 그림자

 

등 뒤에서 나의 가장 먼 곳의 문고리를 잡는 것이었다

등 뒤에는 오래 오래된 마룻장이 있었다

극락전까지 걸어가는 시월이면

등 뒤로 찔러오는 것처럼 깊어

슬픔과 함께 피어오르는 망향은 확인해줄 수도 없다

 

연못 수면에 살짝 쓰러진 꽃을

받쳐 들고

오래 걸어서 갈고리가 되도록 구부러진 가지로

극락전까지

핏줄을 대가는

그림자

 

은디라이

 

  국경을 건너는 소들도 우기(雨期)는 추워 자꾸 옆구리가 부딪친다. 넘어지지 읺으려고 벽에 가 먼저 부딪치던 시간들이 인간에게도 있었다. 옥수수밭이 피어나 달리는 목동 뒤로 돌아온다. 참 오래전 아버지 어릴 적부터 맨발로 다니며 넘어져본 일 없는 은디라이. 집 나간 황소 틀어쥐고 오던 날 쓰러진 옥수수꽃 위에 맨발 탈탈 털던 어린 은디라이. 내가 준 신발은 조금 작고 스웨터는 기장이 길다. 송아지는 친구라서 한 방에 재우고 염소는 아버지 꼭 닮은 의심이 들어 울타리 안에 밀어 넣던 은디라이. 내가 준 신발을 신고 멀리도 걸어 오늘도 돌아오지 않는다. 아직 만나지 못한 은디라이마저 잃어버린 나.

 

탑이 있는 풍경

 

눈 내리는 날 기우뚱 탑이 발목께를 보고 있다 어딘가에 구멍이 있다

 

한번씩 낫을 휘둘러 허공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눈을 춤추게 하는

바람, 날아 내리는 눈들이 구멍을 통해 쌓일 때

 

빈 마당은 점점 구멍이 배불러와 어디론가 빠지고 있겠구나

 

탑은 자기가 큰 구멍에 빠진 것을 모르거나 모른 척한다

 

두 번째 가는 정선

 

처음 가던 정선 고랑 파듯 고불탕고불탕 내려가던

 

마음으로는 벌써 다녀온 귤암리 가수리 많지

아무리 못 만들어도 저렇게 못생긴 소나무 하나는

 

물 내려가는 산자락에 낳을 수 있겠다 싶은

 

할머니 마음에 따라붙는 동강할미꽃

가는 팔목이 어여 어여 목줄을 당긴다

 

여기 어디쯤 5백 평은 너무 큰 땅

그 땅 쓸만한 시간이 있어서 어디엔가 당신이 살고 있을까

 

지겟다리를 받친 고목의 허리가 떠오르고

해는 빈 도시락 가방을 들고 기울었다

 

허벅지 홀쭉해진 시골 저녁에만 떠오르는 길을

어디선가 갈 수는 있겠지

 

땅에 관해서는 물이 알아봐줄 일이다.

 

베네치아의 연인

 

사랑이 풀꽃 반지를 만드는 때가 오면

가로등 지지지 제 몸 지지는 소리를 내고,

사랑이 배를 놓아 첫날밤 같은 한순간을 미끄러지면

부끄러움은 돛처럼 쫑긋한 귀가 서 있었다

 

불쑥 엉뚱한 섬이 나오는 골목을 지나

곤돌라는 낡은 기둥 같은 시간에 옆구리를 거꾸로 댔다

언제든 석양에서 되돌아 나갈 수 있다는 듯

그러니 우리는 함께 있지 못한 아침까지 인정할 것 같다

우리는 저렇듯 우박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고랑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으니 말이 많지도 않을 것 같다

 

쇄골 위에서 정전이 되자 사랑은 잠이 들고

긴 머리가 허리까지, 가물가물 물속으로 흘러갔다

사실은 가운을 여민 바다는 제 몸을 씻지도 못했다

오해를 피해 잊혀져가는 과거처럼 비치는

장신구는 본능의 하부에 풀어놓앗다 허벅지 안쪽 같은

둥글고 민감한 안 보이는 그곳

 

베네치아 빈 길에 잠자리에 든 이승들이

유실된 연인이 되어 물에 뜨고

물에 닿아 아픈 부위로 된 궁륭을 안았다

태양은 살 있는 모든 부위에서 번개처럼 빠져나가리라

사나흘쯤 밤낮이 심장 놓인 그대로 가고 잇었다

 

소렌토에 멈춘 저녁

 

올리브나무 박은 하늘이 풍덩 기울며

바다 공터를 여는

이 모퉁이

 

사랑은 온다 대리석 기둥 틈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해는 보랏빛 포도식초를 찍으며 구관과 신관 사이에

한옆으로 비껴 앉아 있다

 

사랑은

큰 포대자루 같은 절벽 위에서

바다 이야기를 꺼내면서부터이다

 

유람선이 동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섬은 바다에 잘 들어맞는다

그 뒤에까지 돌아가 보지 않아도

사랑은 과거에도 앞으로 좀 쏠려 있었다

 

열대야

 

불을 끈 늦은 밤, 2층 방문을 앞뒤로 다 열었다

너무 커서 짤 수 없는 빨랫감을 들고 아버지를 부르는 듯

아래층 노모의 목소리 마른 물받이통 타고 들리고

 

건넛방 창문마저 밀치는 순간

옆집 2층 열린 창 속으로 벗은 할머님의 전신

굽은 등에 비스듬히 수건을 두르고 있다가

황급히 냉장고 문을 닫으며 몸을 숨긴다

냉장고 불빛에 잠깐 어른한 노년의 알몸

후끈한 잠실에 비스듬히 앉은 고치 같았다

할머님 곁엔 재작년 돌아가신 그 댁 할아버님이

주전부리 오디 같은

너무 여물어 쇤 뽕잎 같은 걸로라도 누웠을 것 같고

 

아래층 아버지가 흠흠 일없이 마당을 거니신다

밖엔 바람이 좀 있다 하면서 2층의 기척을 살피는 중이셨다면

그 언젠가 언질을 주던 능소화 그림자와 함께였을 것이다

망측하게, 위층 애들이 있는데

아버지를 핀잔하는 어머니 한밤중 쌀 씻는 소리

 

오 뜨거운 것의 아름다움은 땅 저 아래쪽으로부터 오래전 내게 왔을 것

깊어지는 밤 달빛을 제 몸에 버무려서

옆집 담 위로 능소화가 쭉 올라와 들여다본다

 

덜 닦인 방

 

늘 덜 닦인 방에서

덜 갚은 빚처럼

몸서리치며 나누던 몸

 

한 국자쯤 고이고

다시 한 스푼쯤 차오르는

볕 한 줌을 시간 안에 나누느라고

 

우리여,

 

저수지

 

하얀 맨발의 연꽃잎 내려앉듯 해가 다 내려가고

흙에 접을 붙인 듯 불빛이 점점점 떠오른다

연인들이 몸의 구석구석에 노후로 깃들듯이

 

우리가 떠난 후에도

다는 안 가지고 싶어, 라고

연인들은 창문 한쪽에 써서 보여주고 있을까

문득 눈앞에나 서 있을 것 같은 펀펀한 엉덩이가

이 마음속에 언제 와 있었는지 놀라면서

수고로운 저녁을 느릿느릿 안아 들고 있을까

다 준다는 게 다 받고 싶다는 비명이었다는 것

 

그대 둥글게 앉아 있는 어둠 속으로 늦은 밥을 물리고 또 물렸다

그대 안쪽에서 가만히 받아주었다

옷가슴만한 봄이 숨죽이며 깜짝깜짝 놀라던

누가 보아도 그곳엔 저수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젖가락, 내 마음은

 

내 마음은 오래도록 바짝 마른 것에 가 있었다

 

고아원이 밤의 굴뚝을 울려대는

새 울음소리 뒤로 옮겨가고 없는 밤에

나는 시름해진 꿈들을

곧잘 눈에 잘 띄는 선반에올려놓곤 하던

젓가락처럼 몸이 긴 원장을 생각한다

 

이런 날 내 마음은

물배급차를 끌고 다닌 길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입에 물려 있던 물을 간신히 다른 입에 밀어 넣던 아이의

희미한 이름도 간직하고 있다

별이 두 개나 세 개씩 하룻밤에 떨어지면

흙칠을 한 호수 옆에 묻어야 했던 그 길을

 

가지고 있다 내 마음은

물이 없어 문을 닫은 고아원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주면

기력을 다한 살핏한 눈빛을 내 귀에 대고

고맙다고 하던 아이는

쪼개기 전의 나무젓가락처럼 두 다리가 바닥에 붙어 있었다

 

지평선에 해 빠질 동안

아이들을 세상 밖으로 가만히 달아나게 해주고 싶었다

마른 발등이 병실을 옮기는 긴 허방 붉디붉어도

우리는 무비*나 에이즈, 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지만

 

옮겨 심은 나무들이 더 이상 자라지 않아

어느 귀신이 그걸로 새 젓가락을 만들고 있으리라

 

* 동아프리카의 아이들이 에이즈를 부르는 말. '도둑'이라는 뜻을 가진 스와힐리어.

 

뉘엿뉘엿눈발 속으로 가는 일

 

여러 날 오체투지해가다

때 없이 잠에 빠뜨리는

서거나 쓰러지는 몸

 

당나귀 등에

눈밭 여기저기서 주운 나무토막 쇠똥이 모이는

자루가 삐뚜루 걸쳐 잇다

오늘 밤 달빛이 되는 영혼이 우둘투둘 들어 있는 것 같다

 

가죽 치마 깔고 쓰러지면

어디서는 눈보라가 어디서는 모래바람이

우는 마음을 알아듣는 것 같다

귀 뒤에선

나무 하나가 빗자루를 들고 휘어지고 있을 텐데

앞서 있던 전봇대들이 어느새 보이지 않는다

 

판자 조각을 댄 가죽 장갑 땅에 내리치면

낑낑대며 생의 한 귀퉁이 잡아 굴리느라

무릎뼈처럼 구부러지던 계절이 생각난다

내 안의 붉은 머리채에 낚여

꽈당 엎어지는

참, 사랑을 쉬는 일도 중요한 일이네

 

배꼽 속에 성산이 꼬르륵 부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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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드무 황영찬

2015-069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

 

권기봉 지음

2008, 알마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20320

 

911.6

권18ㅅ

 

서울은 알면 알수록 놀라운 사실을 만나게 되는 요술경 같았다. 눈에 들어온 것은 촌스러운 건물이었지만, 서울시의회 청사에는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우리 현대사의 질곡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무런 의심 없이 지나치던 보신각과 청계천이었지만, 그 안에는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은 진실이 숨어 있었다. '다이내믹 코리아'의 수도답게 서울의 변화 속도는 따라가기 벅찰 정도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강의 기적을 대변했던 청계고가도, 2열종대로 위풍당당하게 서 있던 삼일아파트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우리가 밥벌이의 고단함에 치여 허우적대는 사이 축적된 삶의 편린들은 소리 없이 사라져가고 있다.


여기 그런 게 있었어요?

 

우리가 알던 것과는 다르거나 숨겨져 있는

또는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 의미 · 장소 · 문화 · 일상을 재발견하다.

 

일상의 재발견  일상의 공간이기에 그저 무심하게 지나치는 공간이 겪어낸 역사적 사건을 떠올린다.

 ● 이순신이 세종로를 접수한 까닭은 무엇일까? ● 해방과 함께 태어나 전쟁과 함께 자란 용산동 해방촌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함께 평화시장을 가다 ● 남산에 오르면 친일미술가의 손으로 빚은 독립운동가의 동상을 볼 수 있다...


문화의 재발견  우리 주변의 장소와 건물이 가진 문화를 탐색한다.

단성사에 가면 100년 한국 영화의 역사를 볼 수 있다 ● 조만간 기억 속으로 사라질 세운상가는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빌딩이었다 ● 무참히 헐려버린 우이동 육당 최남선 고택을 찾아가다 ● 서울 최초의 커피숍 손탁호텔이 있던 자리를 찾아 정동을 걷다...


의미의 재발견  잘 알려진 곳이지만 이면에 있는 역사적인 의미를 재조명한다.

● 해방 이후 서대문 형무소의 역사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 '사대의 상징'을 헐고 '일제로의 종속'을 기념해 독립문을 세우다 ● '친일파 항일' '남과 북'이 불편한 동거 중인 국립현충원은 너무 시끄럽다 ● '기록'이 아닌 '기억'에 의지해야 하는 현실, 충무로 2가 100번지 한미호텔은 어디에?...


장소의 재발견  지나간 이야기를 숨긴 채 다른 모습으로 변해버린 장소를 찾아가 그때를 생각한다.

● 모든 집은 와우식으로! 날림공사의 원조 와우아파트가 무너지다 ● 유스호스텔로 변해 버린 옛 안기부 건물에서 하룻밤 묵어볼까? ● 남산 중턱에 있던 조선신궁은 서울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 리라초등학교 뒤에 가면 '군인의 신' 노기를 기리던 신사가 있다...


지은이 권기봉은 월악산국립공원에서 자란 산골소년, 서울대학교 지구과학교육과에 입학하면서 올라온 서울은 '원더랜드' 그 자체였다.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 공간이 궁금해 무작정 길을 나섰는데, 사람이 보이고 역사가 읽히고 그 배경이 되는 건물과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재발견한 메트로폴리스 서울에 대한 글쓰기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워낙 호기심이 많고, 여행 다니고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알고 싶은 것도 많은 그는 대학 시절부터 학보사 기자,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를 거쳐, 2005년 말에는 SBS 기자까지 되어버렸다. 적성과 딱 맞아떨어지는 기자 일을 하면서, '2002년 올해의 시민기자상' '2006년 SBS 특종상' 등을 타며 "오늘의 사건사고"를 취재 중이다. 사회부 기자로 살다 보니 그 좋아하는 여행도 쉽지 않다. 그래도 1년에 두세 번은 나름대로 긴 여행을 떠난다는 생각으로 다음 여행지를 구상하는 재미에 하루 피로를 잊는다. 서른 즈음에 와 있는 그는 요즘 제주도나 오키나와 같은 변방의 역사, 스포츠와 민족주의의 상관관계 등에 관심이 많다. 지금 이 순간을 유쾌하고 재미있게 살자는 삶의 자세로 오늘도 호기심 천국, 세상 속을 분주하게 걷고 있다.


차례


산책을 시작하며


1부 일상의 재발견


이순신 장군이 세종로를 접수한 까닭

세종로 '이순신 동상'을 찾아


청계고가는 갔어도 화두는 여전하다

지금은 사라진 '청계고가'를 걸으며


어머니가 가발공장에 취직하던 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평화시장'을 찾아


해방과 함께 태어나 전쟁과 함께 자라다

용산동 2가 '해방촌'을 찾아


'친일미술가'의 손으로 '독립운동가'의 동상을 빚다

남산공원 '김구와 안중근 동상'을 찾아


해방 60년 만에 닻 올리는 친일 역사 청산

'반민특위'가 있던 국민은행 명동지점을 찾아


침략과 수탈에서 평화 교류의 철도로

'서울역'을 찾아


2부 문화의 재발견


100년 한국 영화와 함께한 산증인

종로 3가 '단성사'를 찾아


실패한 조국 근대화의 상징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 '세운상가' 유람기


지금 이 순간에도 무참히 헐리고 있다

우이동 '육당 최남선 고택'을 찾아


외세를 이용해 외세를 막으려 하다

정동 '손탁호텔'터를 찾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장경근을 떠올리다

정동 '옛 대법원'을 찾아


'만들어진 전통' 제야의 종

종로 '보신각'을 찾아


3부 의미의 재발견


나머지 절반의 역사를 생각한다

현저동 '서대문 형무소'를 찾아


'사대의 상징'을 헐고 들어선 '일제로의 종속'

현저동 941번지 '독립문'을 찾아


'망자'가 아닌 '산자'를 위한 공간

논란이 끊이지 않는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철저히 유린된 제국의 상징

소공동 '환구단'을 찾아


김구만 남고 임시정부는 잊혀지다

평동 '경교장'을 찾아


'기록'이 아닌 '기억'에 의지해야 하는 현실

충무로 2가 100번지 '한미호텔'을 찾아


4부 장소의 재발견


모든 집은 와우식으로!

날림공사의 원조 '와우아파트'를 찾아


과거 청산 없는 화해란 있을 수 없다

《야생초 편지》의 저자 황대권과 함께 남산 '옛 안기부'를 찾아


진정한 민족대표는 누구인가?

인사동 '태화관'터를 찾아


'해방'은 됐을지언정 '독립'은 하지 못하다

남산공원 '조선신궁'터를 찾아


남산에 신사 유구가 있다!

리라초등학교 뒤 '노기신사'터를 찾아


이토 히로부미 죽어서도 조선을 파괴하다

장충동 '박문사'터를 찾아


초라한 서울시의회 청사가 가벼이 보이지 않는 이유

태평로 1가 '부민관'과 해방 후 '국회'가 있던 곳을 찾아


산책을 마치며

참고 문헌

사진 출처

과거권력과 현재권력 등 한국 사회의 '파워'가 교차하는 세종로, 그 한복판에 이순신 동상이 우뚝 서 있다.

1956년 8월 10일 옛 남산식물원 터에 '현직' 대통령인 이승만의 대형 동상이 들어섰다. 당시 언론들은 이 동상이 아시아에서 가장 큰 것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1964년 5월 16일 세종로에서 '애국선열' 37인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박정희 정권이 야심차게 추진한 애국선열 동상 건립사업은 그 자체로 부실 덩어리였다.

세종로에 한복판에 자리한 이순신 장군상. 박정희 대통령이 비명횡사하지 않았다면 새 모습의 동상으로 교체되었을 것이다.

일본 도쿄 야스쿠니신사 앞에 서 있는 '일본 육군의 아버지' 오무라 마스지로의 동상.

일제강점기 때 위생의 목적과 전쟁 물자 수송을 위해 시작된 복개사업은 40년 후인 1977년까지 계속됐다. 복개 중(위)과 복개 후(아래)의 모습.

1970년대 청계고가와 삼일빌딩은 정부의 해외홍보물에 수시로 등장하는 자랑거리였다. 삼일빌딩은 63빌딩이 들어서기 전까지 한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군사작전하듯 마구 덮어버린 청계천이 거침없이 다시 열렸다. 과연 청계천은 '복원'된 것일까?

'수많은 전태일들'이 일했던 작업장이 대부분 창신동 쪽으로 옮겨가, 지금의 평화시장은 그저 의류 도매시장일 뿐이다.

평화시장이 아닌 '착취시장'에 갓 취직했을 때 전태일의 눈에 들어온 것은 각혈하며 쓰러져가는 시다들이었다. 시다, 미싱보조사와 함께 찍은 위의 사진에서는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한미사 동료와 찍은 아래 사진에서는 맨 오른쪽이 전태일이다.

전태일은 평화시장의 노동착취 실태를 고발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까지 보냈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답장을 받지는 못했다.

2005년 평화시장 앞 버들다리 위에 전태일 흉상이 세워졌다. 그렇다고 우리 사회에 전태일 정신이 구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2003년 말까지만 해도 전태일이 분신한 자리에는 그의 죽음을 기리는 동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청계천 복원공사 와중에 뜯겨 나가고 말았다.

남산과 용산 미군기지 사이에 자리한 해방촌은 해방과 함께 태어나 전쟁과 함께 자랐다.

국회의사당 중앙현관에 서 있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대리석상. 둘 다 일제와 독재정권에 부역한 김경승의 작품이다. 땅달막한 몸집 등 모양새가 유려하지 않다.

남산공원에 있는 도마 안중근상(위), 백범 김구상(가운데), 김유신상(아래)도 모두 김경승의 작품이다. 김경승은 '친일'에서 '친독재'로 변신하여 명성을 이어갔다.

박정희 대통령이 세운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 앞에는 "민족정기의 전당"이라고 쓴 박 대통령의 글씨가 여전히 남아 있다. 정통성이 빈약한 독재정권은 '항일'마저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반민특위 본부가 있던 명동 국민은행 건물이다. 지금은 새 건물이 들어서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1949년 9월 5일 중앙청에서 열린 반민특위 조사부 책임자회의 기념사진으로, 원 안의 인물은 반민특위 중앙사무국 총무과장이었던 이원용 조사관이다.

이승만 대통령 등 집권세력이 조직적으로 방해하거나 반민특위 인사들에 대한 집단 암살이 시도되는 등 반민특위 활동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사진은 반민특위 전남조사부가 설치한 투서함의 모습이다.

1951년 7월 이승만 대통령이 해방 후 육군 참모총장과 외무부장관, 국무총리, 국회의장 등을 지낸 정일권 중장에게 훈장을 주고 있다. 이승만과 박정희 등 독재정권은 친일부역자들을 중용함으로써 정권의 기반을 다졌다.

반민특위가 있던 국민은행 명동지점 한쪽 구석에 (정부나 서울시가 아니라) 민족문제연구소가 세운 반민특위 표지석 한기가 서 있다. 글씨는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가 썼다.

경성역 2층에 있던 '그릴'은 일제강점기 때나 지금이나 그다지 변하지 않은 모습이다.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절반을 쏟아 부어 만든 경성역(현 서울역). 설계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설계한 독일인 게오르그 데 라란데와 츠가모토 야스시 도쿄 제국대 교수가 맡았다.

해군대장 출신으로 제3, 5대 조선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토.

강우규는 1919년 9월 2일 제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머커토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 1년 후 서대문 형무소에서 숨을 거두었다.

서울역 한쪽 구석에 강우규의 거사를 기록한 표지석 한 기가 쓸쓸하게 서 있다.

2007년 5월 17일 남쪽 열차(위)와 북쪽 열차(아래)가 강원도 제진역에서 만나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끊긴 경의선과 동해선이 연결됨으로써 남북 철도는 새로운 변화의 시대를 맞고 있다.

새 KTX 서울역과 옛 서울역.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 상영을 알리는 작은 간판이 흥미로워 보이는 1955년의 단성사로, 건물은 1934년 5차 완공 당시 그대로다. <피아골>은 빨치산 남자대원들이 한 여대원을 둘러싸고 벌이는 갈등을 그린 반공 영화였으나, 빨치산을 낭만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했다.

엘비스 프레슬리 주연의 <플레이밍 스타Flaming Star>와 말론 브란도 주연의 <애꾸눈 잭. 간판 등이 내걸린 1962년 4월 30일의 단성사.

<월하의 맹서>에 출연한 '최초의 본격적인 여배우' 이월화.

1926년 <아리랑>에 출연한 나운규와 신일선.

단성사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최고 개봉관의 지위를 누렸다. 사진은 <장군의 아들3>과 <서편제> 개봉 당시 단성사 앞에 영화를 보고자 몰린 관객.

2005년 2월, 10개 상영관을 갖춘 복합상영관으로 거듭난 단성사.

일제가 미군의 공습에 대비한 방공용 공터는 한국전쟁 후 빈민들 차지가 됐다. 사진은 종묘 맞은편 공터를 메운 판잣집으로, 이것을 없애고 지은 것이 '한국판 라데팡스' 세운상가다.

세운상가는 보행자전용로와 인공정원 등을 갖춘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빌딩으로 기획됐다. 사진은 세운상가 아파트 조감도.

1967년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이라'는 뜻으로 지은 세운상가는 완공 후 10여 년 만에 슬럼화됐다.

박정희 정권에 있어 세운상가는 조국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1967년 11월 17일 세운상가 아파트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2003년 1월 19일 찾아간 우이동 최남선 고택은 지붕에 물이 새고 기둥에는 곰팡이가 스는 등 철저하게 방치되어 있었다. 고택은 답사 이후 며칠 지나지 않아 헐려버렸다.

철거 직전 집 주변에는 일본 황실 사진첩(위)이나 최남선이 다른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 등 흥미로운 지료들이 나뒹굴고 있었다(아래).

한 청년이 최남선에게 편지로 "선생님의 거룩하신 애족, 애국 정신으로 지도해달라"며 부탁하고 있다. 역사는 그렇게 윤색되어 있었다.

손탁은 4개 국어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배포가 커 주한 외국인들의 대모 역할을 했다. 조선왕실은 일본을 견제하고자 그런 그녀를 필요로 했다. 사진은 손탁과 그녀를 방문한 외국인들의 모습.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손탁호텔로, 박공(지붕 아래 삼각형 부분)에 '손타그 호텔'이라고 일본어로 씌어 있다.

덕수궁 중명전 마당에서 환담하는 더럼 스티븐스와 이토 히로부미. 두 사람 모두 한국인에게 처단당했다.

손탁호텔이 있던 자리에는 이화여고가 들어섰다. 손탁호텔은 사라졌지만 정동에서는 여전히 열강의 각축이 느껴진다.

1954년 5월 15일 미국 '군인의 날' 기념식을 마친 미군이 세종로에서 시가행진을 하고 있다. 자신들의 기념행사를 세종로에서 할 정도로 우리에게 미국의 존재는 막강했다.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을 제외하면 1978년까지 사법부 수장은 모두 친일부역자들 차지였다. 사진은 법원 인사를 둘러싼 이승만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옷을 벗은 뒤 이 대통령을 찾은 김병로 대법원장.

'제야의 종' 행사를 기획한 경성방송국은 정동 덕수초등학교 터에 있었다. 사진은 1927년 2월 16일 첫 방송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기념비다.

보신각은 원래 지금의 자리가 아니라 종로 탑골공원 옆에 있었다.

2층으로 중건된 현재의 보신각. 지금 걸려 있는 현판은 이승만 대통령이 썼다.

2008년 1월 1일 '제야의 종' 타종식이 열린 서울 보신각. 그 기원을 아는지 모르는지 올해도 어김없이 10만 명이 넘는 시민이 몰렸다.

서대문 형무소의 붉은 담과 감시탑 일부는 지금도 남아 있다.

서대문 형무소 옥사 내부.

사형장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위)과 사형집행 후 시신을 외부로 내보내는 통로(아래).

해방 후 미군정청과 독재정권도 정적이나 진보인사들을 탄압하는 데 서대문 형무소를 활용했다. 사진은 1959년 7월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당한 진보당 조봉암 당수(국회부의장, 초대 농림부장관)가 사형판결을 받는 모습으로 조봉암은 '북진통일'을 주창한 이승만에 반해 '평화통일'을 추구했다.

항일의 공간으로만 추억되는 서대문 형무소가 온전한 모습을 찾을 날은 언제일까.

1910년대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독립문과 영은문 주초. 독립문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세운 것이었으나 그것은 또 다른 종속을 의미했다.

독립문의 남과 북 편액은 각각 한글과 한자로 씌어 있는데, 모두 이완용이 썼다.

1979년 8월 15일, 독립문은 고가도로 건설을 위해 '獨立門址'라고 쓴 동판을 남겨둔 채 북서쪽으로 70미터 밀려났다.

독립문 옆에서 한 손에 신문을 들고 서 있는 필립 제이슨 동상. 그가 만든 《독립신문》은 개화사상을 고취하기는 했으나, 한게도 분명했다.

'또 다른 종속'에 불과한 것이 '독립'이라는 상징으로 조작되어 있는 현장.

충성분수대와 그 뒤에 있는 겨레의 마당 너머로 현충문과 현충탑이 보인다. 국립서울현충원은 '충성'과 '민족' 과잉의 현장이다.

1963년 4월 29일 여고생들을 도열시킨 가운데 아산 현충사를 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 이른바 '구국의 현장' 성역화 작업은 '군인정권'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데 주효한 수단이었다.

1962년 5월 5일 투병 중인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을 방문한 '일본 관동군 출신' 대통령.

장군들의 묘(위)는 촘촘하기만 한 사병 묘(아래)에 비해 각각 8배나 넓다. 게다가 묘비도 훨씬 크고 봉분까지 갖추고 있다.

본질적으로 국립현충원도 야스쿠니신사처럼 '망자'가 아닌 '산자'를 위한 공간이다.

네모난 담장 안에 원형 제단이 3단으로 쌓여 있고, 그 한가운데 원추형 지붕의 건물이 보이는 창건 당시의 원구단. 사진 왼쪽으로 지금도 남아 있는 황궁우와 삼문이 보인다.

일제는 환구단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조선철도호텔과 반도호텔 등을 지었다. 사진은 지난 1958년 8월 31일 화재가 난 조선호텔(옛 조선철도호텔).

고층빌딩에 둘러싸여 미처 외딴섬 같은 황궁우.

위로부터 일제강점기 때 세워진 조선저축은행(SC제일은행)조선은행(한국은행), 미츠코시백화점(신세계백화점 본점). 신세계백화점은 2007년 외장재를 교체해, 초기의 건물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1940년까지만 해도 환구단 대부분의 영역은 파괴됐어도 황궁우 삼문 앞에는 그나마 '공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위). 그러나 지금은 호텔을 너무 바짝 들여 짓는 바람에 문의 기능을 잃어버렸다(아래).

환구단 대문이 시내버스 차고지의 정문으로 쓰이고 있는 사실이 2007년이 되어서야 알려졌다.

해방정국 당시 암살은 정적을 제거하는 주요 수단이었다. 1949년 6월 26일 김구의 목숨을 앗아간 총알 구멍 너머로 그를 애도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종합병원 건물로 둘러싸여 병원 정문으로 전락한 경교장의 모습.

경교장은 2층 김구 집무실만 복원되어 있는 상태다. 김구가 앉아 있던 책상과 안두희가 총을 쏜 위치, 창문에 뚫린 구멍 등 암살 당시 상황으로 꾸며놓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살았던 이화장은 서울시가 이화장의 유지보수 비용을 부담하는 등 경교장과 달리 복원 상태가 양호하다.

1948년 4월 19일 김구의 북행을 만류하려고 모인 학생(위)과 결국 북행길에 나서 같은 날 38선 앞에 선 김구 일행(아래).

1945년 11월 3일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을 앞두고 찍은 단체사진. 그러나 그들의 환국 길은 결코 평탄치 않았다.

한미호텔의 전신인 혼마치호텔.

한미호텔 터에 들어선 신한은행 건물. 뒤늦게나마 신한은행이 한미호텔 관련 사료 찾기에 나섰다.

하루아침에 폭삭 주저앉아버린 와우아파트 붕괴현장. 붕괴되지 않고 서 있는 옆 동도 가파른 산비틀하며 얇은 기둥이 위태로워 보인다.

정부는 무허가 판자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변두리로 이주시키는 '배제정책'과 시민아파트를 지어 입주시키는 '포용정책'을 병행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포용된 빈민은 거의 없었다.

시민아파트 건립 사업은 정권 차원에서 추진됐다. 1969년 4월 21일 금화아파트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안기부가 떠나간 건물은 각각 TBS교통방송(위)과 서울시 별관(가운데), 문학의 집(아래) 등으로 쓰이고 있다. 특히 문락의 집은 안기부장 관사를 개조한 것이다.

온갖 고문이 행해졌던 안기부 별관 지하. 그러나 지금은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간첩을 잡아야 할 우리 정보기관은 간첩을 만들어내는 데에도 능숙했다. 사진은 1964년 8월 14일 '제1차 인혁당 사건'의 전모를 발표하고 있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옛 안기부 건물을 민주주의기념관 등으로 만들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결국 안기부 본관은 유스호스텔로 쓰이게 됐다.

학생 대표들은 탑골공원에서 멀지 않은 인사동 승동교회를 중심으로 3 · 1운동을 준비했다.

태화관 자리에 들어선 태화빌딩과 독립선언 표지석.

3 · 1 운동 당시 이른바 민족대표라고 불렸던 이들이 모였던 태화관.

1952년 7월 22일 한강철교 재개통식에서 시승용 기차를 타고 한강을 건너는 이승만 대통령(가운데).

1966년 7월 22일 열린 맹호, 청룡 교체부대 환송식.

조선싱궁으로 향하는 참도와 도리이로, 위 사진은 숭례문 쪽에서 힐튼호텔 쪽을 바라본 모습이고, 아래 사진은 힐튼호텔 앞 어린이 놀이터 근처다. 사람 크기와 비교해 보면 그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조선신궁의 전체 면적은 여의도 면적의 두 배에 가까운 43만 제곱미터나 됐다. 주요 건물은 안중근의사기념관과 지금은 없어진 남산식물원 일대에 있었다.

신사의 석등 받침으로 추정되는 석재는 뒤집혀 탁자와 의자, 장독받침 등으로 쓰이고 있다. 미타라이샤는 기증자와 기증연도가 명확하게 새겨져 있어 역사적 가치가 있지만, 흉물처럼 버려져 있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데다 무쓰히토 천황 장삿날 부인과 함께 할복자살함으로써 '군신'으로까지 추앙받는 노기 마레스케.

노기가 이끄는 일본군이 뤼순전투를 승리로 이끈 뒤 203고지에서 내려다본 뤼순항 사진으로, 침몰하거나 반파된 군함들이 보인다.

이토는 1963년부터 1986년까지 24년 동안 1,000엔권 지폐의 모델이었을 정도로 일본 역사에 있어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있던 박문사 본전.

일제는 조선왕실과 관련한 시설을 동물원이나 놀이공원으로 만드는 등 철저히 희화화했다. 사진은 1972년 4월 21일 촬영한 창경궁으로, 지금도 창경궁 대신 놀이공원의 의미를 지닌 '창경원'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다.

일제는 조선 5대 궁궐 가운데 하나인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을 떼어다 박문사 정문으로 삼았다(위, 가운데 박문사 정문 앞뒤 모습). 흥화문은 해방 후 경희궁으로 옮겨졌고, 지금 그 자리에는 흥화문의 모조품이 서 있다(아래).

태평로 국회 역시 숱한 정치 격변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었다. 사진은 1958년 12월 20일 야당 의원들이 국가보안법 통과를 저지하려고 철야농성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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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드무 황영찬

2015-068  The Blue Rider 칸딘스키와 청기사파

 

지은이 | 지빌레 엥겔스, 코르넬리아 트리슈베르거 / 옮긴이 | 홍진경

2007, 예경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19997

 

66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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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SPECIAL 4

 

The Blue Rider | 칸딘스키와 청기사파

 

"사람들은 칸딘스키로부터 새로운 미술의 시대가 열렸다고 말할 것이다."

- 알프레트 쿠빈

 

이 책은 칸딘스키를 비롯한 청기사파 화가들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다루고 있다.

청기사파는 추상화로 가는 길을 닦아 20세기 현대 미술의 서막을 열었다.

이 책은 세기 전환기 '뮌헨의 몽마르트르' 슈바빙 거리에서 새로운 예술을 향해 고군분투한 칸딘스키와 청기사파 화가들이 주인공이다. 칸딘스키와 그의 연인 가브리엘레 뮌터, 동물화가로 유명한 프란츠 마르크와 부인 마리아 프랑크, 아우구스트 마케, 알렉세이 야블렌스키와 부인 마리안네 베레프킨……또한 열정이 넘치는 예술가로서뿐만 아니라 인생과 사랑에서도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 선구자적인 여성 화가들도 만날 수 있다.

 

칸딘스키와 청기사파

 

최초의 추상화를 그려 현대 미술의 서막을 열다!

1911년 뮌헨에서 칸딘스키를 비롯한 몇몇 화가들은 이전의 어떤 미술가도 하지 않은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단체를 결성한다. 이들의 단체 이름이 청기사파이다. 이 화가들이 도달한 곳이, 바로 20세기 현대 미술을 정의하는 추상화였다. 칸딘스키가 주도한 청기사파는 3년이라는 짧은 기간 유지되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아니 영원히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았다. 추상화와 현대 미술이라는 '새로운 미술의 길'을 열어놓고……

 

지은이 | 지빌레 엥겔스는 기자로 활동하면서 광고 에이전시를 운영하고 있고, 코르넬리아 트리슈베르거는 작가이자 기자로 활동 중이다. 두 사람 모두 현재 뮌헨에 살고 있다.

 

옮긴이 | 홍진경은 홍익대학교 동양학과를 졸업하고, 쾰른대학교에서 서양미술사, 고전고고학, 교육학 전공으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쓴 책으로는 《베로니카의 수건》, 《인간의 얼굴 그림으로 읽기》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도상학과 도상해석학》(공역), 《미술사학의 이해》, 《당신의 미술관 1, 2》, 《집들은 어떻게 하늘 높이 올라갔나》 등이 있다. 홍익대학교 디자인 미술원(서초동)과 상명대학교 미술대학원 무대디자인과에 출강중이다.

 

1990

세계사

>> 빌헬름 황제, 베를린에서 통치함.

>> 파리에서 세계만국박람회 개최.

>> 미술계에서 유켄트슈틸 유행.

>> 독일에서 여성들의 대학 입학이 허용됨.

 

청기사파

>> 청기사파 화가들이 뮌헨의 예술가 부락인 슈바빙에 모여들기 시작함.

 

1909

세계사

>> 피카소 파리에서 야수파와 어울리며 입체주의라는 새로운 미술의 길을 모색함.

>> 이사도라 덩컨 자유로운 무용형식을 펼침.

 

청기사파

>> 칸딘스키, 뮌터, 베레프킨, 야블렌스키가 청기사파의 전신인 뮌헨 신미술가협회 결성함.

 

1910

세계사

>> 독일의 전위 미술가단체 '다리파' 베를린에서 신분리파전에 참가함.

>> 전기세탁기, 여성용 나일론 스타킹 발명됨.

 

청기사파

>> 마르크가 뮌헨 신미술가협회에 가입함.

>> 마케는 뮌헨에서 마르크를 만나고 그의 동료화가들과도 친해짐.

>> 칸딘스키는 미술사에서 최초의 추상화로 알려진 <구성 2> 제작함.

 

1911

세계사

>> 3월 8일 최초의 세계여성회의 개최.

>> 여성운동은 여성의 참정권 확보에 주력함.

>> 마리 퀴리, 노벨화학상 수상.

>> 빈에서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켄트슈틸이 코코슈카와 에곤 실레가 주도한 표현주의에 밀려 쇠퇴함.

 

청기사파

>> 뮌헨 신미술가협회에 내분 일어남.

>> 뮌터, 마르크, 칸딘스키가 탈퇴함.

>> 12월 18일 제1회 청기사 전시회 개최됨.

 

1912

세계사

>> '타이타닉호' 미국으로 항해 중 빙산에 부딪혀 좌초함.

>> 말레비치 등 러시아 전위 미술가들이 단체를 결성하고 작품을 공개함. 일례로 1912년 '당나귀 꼬리 전시회' 등.

 

청기사파

>> 칸딘스키의 미술이론서 <예술에서 정신적인 것에 대해>와 <청기사 연감> 발간.

>> 제2회 청기사파 전시회 개최.

 

1914

세계사

>> 제1차 세계대전 발발.

>> 다다이즘 시작됨.

>> 다다에서 시작된 초현실주의가 살바도르 달리와 만 레이 등에게 영향을 줌.

>> 찰리 채플린은 커다란 구두, 헐렁한 바지, 꼭 쬐는 조끼, 작은 중절모와 콧수염 등으로 분장한 '떠돌이' 캐릭터로 세계적인 배우가 됨.

 

청기사파

>>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청기사파 해체됨.

>> 칸딘스키는 모스크바로 돌아가고, 야블렌스키와 베레프킨은 스위스로 이주하고, 마케와 마르크는 군대에 징집됨. 마케는 1914년, 마르크는 1916년 전사함.

 

1933

세계사

>> 나치(국가사회주의) 독일의 현대 미술가들을 박해함.

>>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제국의 총리에 취임함.

>> 그로피우스, 클레, 칸딘스키가 교수로 있던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 폐교됨.

>> 수많은 미술가와 지식인들이 망명길에 오름.

 

청기사파

>> 청기사파 그림들이 나치 정권에 의해 '퇴폐 미술'로 낙인찍힘.

 

1938-45

세계사

>> 1939년 초-1945년 말 제2차 세계대전.

>> 1938년 나치 유대인 대탄압이 시작됨. 유대인의 예배당과 상점들이 약탈됨.

>> 1943년 험프리 보거트와 잉그리드 버그만이 출현한 <카사블랑카> 개봉.

>> 피카소, 미로, 달리 등의 스페인 미술가들이 프랑코의 파시즘 정권에 항의하는 작품 제작함.

 

청시가파

>> 칸딘스키는 1944년 파리에서, 베레프킨은 1938년 아스코나에서, 야블렌스키는 1941년 비스바덴에서 세상을 떠남.

>> 뮌터는 청기사파 작품들을 무르나우에 있는 자신의 집 창고에 숨김.

 

1949

세계사

>> 마오쩌둥,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 서독과 동독의 분단. NATO 설립으로 냉전시대가 시작됨.

>> 뉴욕에서 데 쿠닝, 잭슨 폴록 등 추상 화가들이 '성난 작가들' 결성.

 

청기사파

>> 뮌헨에서 제1회 청기사파 회고전 열림.

 

1957

세계사

>> 엘비스 프레슬리 세계적인 스타로 부상함.

>> 소비에트 연방국은 최초의 위성 '스푸트닉'을 발사함.

>> 유럽연합(EU)의 전신인 EC(유럽공동체)가 결성됨.

>> 피카소와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헨리 무어가 1950년대 조각미술계를 대표함.

 

청기사파

>> 뮌터는 보관하던 청기사파 작품들을 뮌헨의 렌바흐하우스에 기증함.

>> 청기사파 컬렉션은 중요한 후원자 베른하르트 쾰러에 의해 보강됨.

 

1962

세계사

>> 팝 아트, 미술계의 주류로 떠오름.

>> 마틴 루터 킹이 미국에서 흑인의 인권운동 시작함.

>> 노벨의학상이 DNA 연구자에게 돌아감.

 

청기사파

>> 뮌헨에서 청기사파 화가 중 뮌터가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남.

 

차례

 

그때 그 시절

'슈바빙의 보헤미안'

 

최고가 되기까지

'K'씨의 엄청난 능력

 

예술

추상화의 탄생

 

예술가들

친구이자 적

 

사랑

"마르크는 항상 나와만 춤을 추었어……"

 

지금도 우리 곁에

모두 한 지붕 아래에

 

그때 그 시절

 

"나는 뭔가 하고 싶은데, 그게 뭘까?

나는 뭔가를 동경하는데,

무엇에 대한 것일까?"

 

회화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다 :

러시아 태생의 미술가 바실리 칸딘스키는 자전거 마니아이기도 했다.

 

세기의 전환기 뮌헨에서는

 

…전통적 방식이건 새로운 방식이건 가리지 않고 창조적 영감을 찾아 다양한 미술활동과 작업들이 나타났다. 독일 바이에른 주의 수도 뮌헨은 젊은이들에게 파리처럼 매력 넘치는 예술의 도시였다. 이 거리에서 '청기사파'의 화가들도 활동하고 있었다.

가브리엘레 뮌터.

 

'아르 누보'

뮌헨에서는 프란츠 폰 렌바흐의 고전주의 역사화에 반대하는 흐름들이 나타났다. 이는 베를린과 빈보다 앞선 행보였다. 이러한 움직임이 칸딘스키와 친구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1902년 바실리 칸딘스키가 자신의 팔랑크스 미술학교 학생들과 함께 있는 모습(앞에서 오른쪽). 이 학생들 중에 이후 칸딘스키의 연인이자 인생의 동반자가 된 가브리엘레 뮌터(가운데)가 앉아 있다.

1901년 칸딘스키가 제1회 팔랑크스 전시회를 위해 제작한 포스터로, 유켄트슈틸과 상장주의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누군가로부터 친절한 말 한마디 못 듣는다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나 무거워졌다."

- 바실리 칸딘스키

당대의 명망 높은 화가 프란츠 폰 렌바흐가 마지막으로 그린 자화상. 그의 저택이었던 렌바흐하우스는 오늘날 '청기사파'의 중요 작품들을 전시하는 미술관이 되어 있다.

현대미술의 시발점이 된 인상주의 : 폴 세잔의 <연못 위의 다리>, 1890년.

유켄트슈틸의 '교황' 프란츠 폰 슈투크가 거주하던 빌라 슈투크의 음악감상실.

프란츠 폰 슈투크의 <천국의 수호자>, 1889년.

1902년 여름 코헬로 야외수업을 가던 중의 칸딘스키(왼쪽)와 팔랑크스 미술학교 학생들.

생 클루 공원 | 칸딘스키가 1906년 가브리엘레 뮌터와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그린 그림이다. 후기인상주의 기법을 사용한 작품으로는 가장 나중에 제작되었다. 이 작품에서 칸딘스키는 대상보다는 색채의 본성을 표현하려 했다. "인상주의자들이 말하는 빛과 대기의 문제는 내 관심거리가 아니다……내게 중요한 것은 신인상주의 기법이다. 그들은 대기를 놔두고 색채의 효과를 강조한다."

생 클루 공원의 오솔길 | 같은 시기 가브리엘레 뮌터가 그린 그림이다. 두 사람은 파리에 머무는 동안 근교의 이 공원을 즐겨 찾았다. 뮌터의 그림은 여전히 대상의 재현이라는 본질에 충실하다. 반면 칸딘스키의 가을빛이 완연한 오솔길에는 나무와 땅의 형체만을 간신히 알아볼 수 있다.

도시 앞에서 | 칸딘스키는 "뮌헨의 대기가 만들어내는 강렬하고 풍부한 색채"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도시의 풍경을 자주 그렸는데, 그중 하나가 1908년에 그린 이 그림이다.

말에 탄 연인들 | 칸딘스키의 초기작은 동화를 떠올리게 하는 초현실적인 장면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유년 시절에 들었던 러시아 전래동화와 중세의 기사 이야기나, 러시아 동화의 삽화나 유켄트슈틸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1907년 제작된 이 그림은 특히나 유명하다.

 

최고가 되기까지

 

"자랑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때때로

제시한 새롭고, 아름다운 길

현대 회화의 발전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바실리 칸딘스키는 특유의 카리스마로

화가 친구들을 추상의 세계로 이끈다.

 

'사기꾼' 협회

 

청기사파의 전신은 뮌헨 신미술가협회이다. 칸딘스키와 동료들은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해 뮌헨에서 전위적인 미술을 선보이려 했다. 하지만 관객과 언론의 매몰찬 반응만이 돌아왔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기꾼'이라는 비난까지 들어야 했다.

칸딘스키, <구성 5>, 1910년.

칸딘스키, <구성 2>.

칸딘스키, '청기사파전' 도록의 제호, 1911년 12월.

1911년 칸딘스키가 《청기사 연감》의 표지를 위해 그린 11점 수채화 중의 하나.

1903년 칸딘스키가 그린 <청기사>.

베른하르트 쾰러는 청기사 미술가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후원자였다. 쾰러의 조카와 마케는 결혼한 사이였다. 아우구스트 마케가 그린 쾰러의 초상화.

칸딘스키가 자신의 책 《예술에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초판을 위해 디자인한 표지.

1911년 프란츠 마르크가 그린 <푸른 말>은 청기사파의 상징으로 유명하다. 이 그림은 현재 뮌헨의 렌바흐하우스에 소장되어 있다.

《청기사 연감》을 위해 바실리 칸딘스키가 1912년 제작한 목판화.

아우구스트 마케는 이 그림 <청기사에 대한 조롱>을 통해 '대부' 칸딘스키와 결별을 선언한다.

나무들 | 청기사파는 배타적인 미술단체가 아니었다. 피카소나 들로네 등 여러 작가들이 이 단체의 전시회에 초대되었다. 블라디미르 부를리우크도 1911년에 그린 이 그림을 제1회 청기사파 전시회에 내놓았다. 칸딘스키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이 아방가르드 화가와 아즈베의 화실에서 작업하던 시절부터 알고 지냈다.

숲속의 노루 | 프란츠 마르크는 이 그림에 '숲속의 노루'(1911)라는 제목을 붙였다. 동물은 마르크에게 언제나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영적인 순수함과 구원을 상징하는 중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예술


"예술에서 나는 교황처럼

절대 무오류성을 지니며

황제처럼

독재적이다."


열정적인 정원사 칸딘스키.

높은 자의식과 확신을 가진 예술가 칸딘스키는

홀로 새로운 미술을 향한 길을 만들어갔다.


'대부' 칸딘스키!


지적이고 명민한 이 러시아 화가가 아니었다면, 청기사파의 결성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칸딘스키는 이 단체를 창립한 화가일 뿐만 아니라 미술이론의 기초를 세운 뛰어난 이론가이기도 했다. 그는 비구상 즉, 추상회화의 근거를 미술이론으로 정립했다. 미술이론의 영향력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진 20세기 초 칸딘스키는 미술이론가로서도 뛰어난 활약을 했던 것이다.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

클로드 모네의 <해질 무렵의 건초더미>, 1884년경.

여러 계열의 청색 : 칸딘스키가 그린 <무르나우의 교회>(1910)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칸딘스키는 1911년 그린 이 그림을 <즉흥 19a>이라 불렀다.

1912년 아우구스트 마케가 그린 <동물원 1>. 동물은 항상 마케의 관심거리였으므로, 이후 그의 수많은 그림에 등장한다.

프란츠 마르크는 1912년에 그린 이 그림을 <작은 황색 말>이라 불렀다.

가브리엘레 뮌터, <교회가 있는 풍경>, 1910년.

폭풍 | 마케는 제1회 청기사 전시회에 3점을 출품하는데, 이 그림(1911)도 그중 하나다. 전시회가 열리는 동안 마케는 청기사파를 신랄하게 비난하고는 동료들과 거리를 두었다. 제2회 전시회에도 참가하지만 이후 청기사파에서 완전히 탈퇴한다.

빗속에서 | 프란츠 마르크는 1912년 이탈리아 미래주의를 연상케 하는 이 그림을 선보이는데, 당시 많이 그려진 '순수한 동물화'와는 전혀 다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그려진 것은 프란츠 마르크, 부인 마리아 그리고 그들의 애완견 루시이다.

 

예술가들

 

"무능력자들……

화려한 색채를 걸친 아둔한 자들……

촌스런 옷을 입은 자들……

촌스런 옷을 입은 자들……

악질적인 촌뜨기들……

타고난 저능아들……"

 

청기사파 미술가들에 대해 당시의 한 비평가가 내뱉은 말이다. 그림 왼쪽부터 마리아 프랑크, 프란츠 마르크, 베른하르트 쾰러, 친구사이였던 하인리히 캄펜동크와 코마스 폰 하르트만 그리고 바실리 칸딘스키.

 

친구이자 적

 

 

칸딘스키가 이끌어간 청기사파는 사실 저마다 다른 개성을 가진 작가들의 모임이었다. 이 단체의 회원들은 언제나 서로에게 호의적으로 대하거나, 서로를 존중하지만은 않았다. 그들이 서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직접 들어보자.

 


 

 

 

아들 발터와 함께 한 아우구스트와 엘리자베트 마케 부부, 1912년, 본.

 

1905년 칸딘스키가 그린 인생의 동반자 가브리엘레 뮌터의 초상화.

 

야블렌스키와 그의 아들 안드레아스, 190년.

 

가브리엘레 뮌터가 그린 마리안네 베레프킨의 초상화.

1906년 가브리엘레 뮌터가 그린 초상화(위) 그리고 1871/72년 오데사에서 지낸 어린 시절의 모습(아래).

 

"벌 받을 생각이 아니라면 다른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서서는 안 된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큰 짐이 될 수 잇으며, 때로 역겨운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까."

- 바실리 칸딘스키

1908년 칸딘스키가 그린 <바이에른의 가을>.

가브리엘레 뮌터가 무르나우에서 구입한 집. 이 집은 칸딘스키 때문에 '러시아인의 집'이라고 불렸다.

바실리 칸딘스키, <구성 8>, 1923년.

바실리 칸딘스키, 1938년 파리의 아틀리에에서.

뮌헨 - 이자르 강 | 안톤 아츠베와 프란츠 폰 슈투크로부터 아카데미 미술교육을 받았지만 칸딘스키는 야외에서의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자연에서 받은 인상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이 그림은 1907년까지 야외에서 그린 그림 중 하나로, 후기인상주의의 영향이 엿보인다.

칼뮌츠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가브리엘레 뮌터 | 칸딘스키는 1903년 이 그림에 사용된 기법을 '순간 묘사'라고 명명했다. 팔랑크스 미술학교의 제자였던 엘라 뮌터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마을 나프탈의 야외 수업에 참여했다.

인상 3 | 1911년 칸딘스키가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공연을 보고 온 직후 그린 그림이다. 칸딘스키는 이 그림의 제목을 '인상', 즉 외적인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인상이라고 붙였다. 지배적인 효과는 '노란 소리', 즉 소리의 인상에 대한 선언이다.

낭만적인 풍경 | 이 그림에 대해 칸딘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10년 <낭만적인 풍경>을 그렸다. 이 제목은 고전적인 낭만성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미래의 낭만성은 실제 매우 깊고,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낭만성은 불꽃을 일으키며 타들어가는 한 조각의 얼음덩어리이다. 사람들이 얼음덩어리의 불꽃은 못 보고 얼음덩어리만 느낀다면 불행해질 것이다."

붉은 반점 2 |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칸딘스키는 미술에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전쟁 직후에 제작된 이 그림은 칸딘스키가 새로운 시기로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시기 칸딘스키는 러시아의 말레비치나 타틀린의 구축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칸딘스키는 기하학적 특성에 대해, "삼각형의 한 꼭짓점과 원의 만남은 미켈란젤로가 그린 신과 아담의 손가락 접촉만큼이나 심오한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구성 10 | 칸딘스키가 생을 마감하기 직전인 1939년에 제작한 그림이다. 이 해 칸딘스키는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다.(독일에서는 이미 퇴폐 미술가로 낙인찍힘.) 1939년은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해이기도 하다. 이 무렵 칸딘스키의 작품은 규모가 줄어드는데, 이를 꼭 물자 부족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1909년 그린 <이젤 앞에서의 자화상>.

가브리엘레 뮌터, <어부의 집>, 1908년 전성기 시절의 작품.

 

"누군가 내 그림을 감상한다면 그 속에서 선을 그리는 화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 가브리엘레 뮌터


1897년 자전거를 타는 엘라 뮌터의 모습. 당시 어린 소녀가 자전거를 타는 것은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가브리엘레 뮌터, <푸른색 위의 사과들>, 1908/09년.

화구를 들고 있는 가브리엘레 뮌터, 1902년 코헬에서.

1918년 코펜하겐 전시회를 위해 가브리엘레 뮌터가 제작한 포스터.

1949년 뮌헨의 미술관에서 개최된 청기사파 회고전에 참석한 뮌터와 아이히너.

흰색의 벽이 있는 풍경 | 1910년에 그린 '전형적인' 가브리엘레의 작품. 그녀는 자연을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추상화했다. 대상이 있는 주제들, 말하자면 풍경, 집, 벽면 등은 그대로 나타난다. 하지만 검은색 윤곽선이 둘러지고 그 안은 색면으로 채워졌다.

눈이 온 광장 1 | 칸딘스키가 뮌터의 그림에 대해 "뮌터, 인적이 드문 곳에서 소리를 치거나 갑자기 생과 죽은 것에 대한 재미있는 소리들이 들려올 것 같은 어두운 소박함의 세상"이라고 표현한 지 1년 후에 제작된 그림이다.

노란 나무가 있는 가을 풍경 | 무르나우 시절 가브리엘레의 그림은 후기인상주의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시작한다. 형태는 극단적으로 단순화되고, 색채 대비는 더욱 강렬해졌다. 이 그림은 1909년 제작되었다.

병자(병病者) | 1917년 가브리엘레가 스톡홀름에서 하염없이 칸딘스키를 기다릴 때 그린 그림이다. 이 시기의 그림들은 당시 그녀의 감정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건조한 색채가 당시 그녀의 절박한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새들의 아침 | 1930년대 초 무르나우로 돌아온 가브리엘레는 다시 그림에 몰두했다. 이 시기 그녀는 자신의 표현주의적인 뿌리에 골몰한다. 이 그림은 1934년 제작된 초상화로, 과거의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프란츠 마르크의 세 모습. 1913년 진델스도르프와 뮌헨에서의 모습(위, 가운데), 그리고 1910년 아우구스트 마케가 그린 스케치(아래).

<유수프 왕자의 레몬색 말과 불꽃색 황소>는 1913년 마르크가 친구인 여류시인 엘제 라즈커 실러에게 보낸 엽서 그림이다.


"정신적인 것에 있어서는 수치가 아니라 관념의 강도가 승리를 결정짓는다."

-프란츠 마르크

마르크는 1908-10년 사이에 수많은 말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곧 찢어버렸다. <렝그리스의 거대한 말 1>은 후에 찢어진 부분들을 이어붙여 복원한 것이다.

마르크는 1907년 <바닷가의 기사>를 첫 번째 아내 마리쉬누어와 함께 떠난 오스트제 여행에서 그렸다.

1910년 아우구스트 마케가 그린 프란츠 마르크의 모습.

1913년 <푸른 말의 탑>. 원작은 1945년 사라졌다.

노란 소 | 마르크는 다음과 같은 색채 상징이론을 주장했다. "푸른색은 건조하고, 영적이고, 남성적인 원칙에 해당한다. 노란색은 부드럽고, 밝고, 감각적이고, 여성적인 원칙에 해당한다. 붉은색은 잔인하고, 무거운 재료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이 이론에 상당히 합당해 보인다. 1911년 그린 이 그림은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거대한 푸른 말들 | 1911년 프란츠 마르크가 그린 그림이다. '푸른 말'이라는 모티브는 오늘날까지 청기사파와 동일어로 여겨지고 있다.

푸른 고양이와 노란 고양이 | "나는 동물화라고 명명하고 싶을 만큼 미술을 동물화 시키는 것보다 더 행복한 방식은 볼 수 없다." 마르크는 1912년 일련의 동물 그림을 제작하는데, 이 그림도 그중 하나이다.

호랑이 | 프란츠 마르크가 제작한 위대한 작품 중의 하나(1912)이다. 이 그림에는 추상화 과정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아우구스트 마케.

1913년 마케가 그린 <햇살이 드는 길>.

 

"칸딘스키의 초기 작품은 내게는 좀 공허하게 느껴진다.……

-아우구스트 마케

아직 학생 시절이던 1906년에 그린 마케의 <자화상>.

마케와 부인 엘리자베트, 엘리자베트의 삼촌 베른하르트 쾰러. 쾰러는 청기사파의 막강한 후원자였다.

마케의 <모자를 쓴 화가의 부인>은 약혼녀 엘리자베트를 그린 것이다. 결혼하기 바로 직전에 그렸다.

말을 탄 인디안 | 마케가 청기사파의 관념에서 영감을 얻어 1911년 그린 그림이다. 이 무렵 마케는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원시문화의 미술에 푹 빠져 있었다.

나무 아래서 햇빛을 받고 있는 아이들 | 마케는 청기사파를 탈퇴한 직후인 1913년에 이 작품을 그렸다. 당시 그는 본에서 젊은 미술가들을 모아 오늘날 '라인 인상주의'라 알려진 운동을 주도했다. 이 미술가들은 마케와 마찬가지로 대상을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을 그렸다.

알렉세이 야블렌스키 1912년의 <자화상>.

1887년 젊은 중위 때의 야블렌스키의 모습.

야블렌스키, <푸른 찻잔과 사과가 있는 정물>, 1904년.

 

"야블렌스키의 초상화를 그린 적이 있다. 그는 늘 그렇듯이 포동포동한 얼굴로 칸딘스키의 미술이론을 엿듣는 모습이었다."

- 가브리엘레 뮌터, 자신의 작품 <경청(야블렌스키의 초상화)>에 대해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 알렉세이 야블렌스키, 마리안네 베레프킨, 안드레아스 야블렌스키, 가브리엘레 뮌터 / 무르나우, 1908년.

야블렌스키, <오버스도르프 풍경>, 1912년.

가브리엘레 뮌터, <경청(야블렌스키의 초상화)>, 1909년.

무용가 알렉산더 사하로프의 초상 | 1909년 야블렌스키는 30분간에 걸친 친구들의 설명을 듣고 이 그림을 그렸다. 사하로프는 아직 물감이 채 마르지 않은 그림을 격하게 뺏어 들었다. 겁이 난 야블렌스키는 언제나처럼 다시 잘 그리겠다고 말했다.

마리안네 베레프킨의 세 모습. 자화상(1910년)과 두 점의 사진.

마리안네 베레프킨, <무용가 사하로프>, 1909년.

 

"나 스스로의 고문을 막을 수 없다면야, 내가 정말 진정한 미술가가 될 수는 있을까."

-마리안네 베레프킨

베레프킨, <붉은 나무>, 1910년. 이 작품은 그녀가 일본 목판화에 매료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마리안네 베레프킨. 1930년경 아스코나의 아틀리에에서.

쌍둥이 | 마리안네 베레프킨의 1909년 작품. 그녀를 매혹시킨 노르웨이 출신의 화가 에드바르드 뭉크의 영향이 엿보인다.

비극적 분위기 | 마리안네 베레프킨의 1910년 작품. 야블렌스키와의 비극적인 관계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사랑


"오직 당신을 통해서

나는 진정한 위대함

이를 수가 있소."


바실리 칸딘스키가 연인이자 뮤즈, 그리고 동료였던 가브리엘레 뮌터에게 쓴 글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서


바실리 칸딘스키와 가브리엘레 뮌터, 마리안네 베레프킨과 알렉세이 야블렌스키, 프란츠 마르크와 마리아 프랑크, 이 세 미술가 커플은 당시의 관습을 따르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길든 짧든) '부적절한' 동거를 하고 있었다. 또한 남자든 여자든 모두 열정이 넘치는 예술가로서 예술에서뿐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새로운 길을 찾아갔다.

베레프킨과 야블렌스키, 젊은 시절 러시아의 아틀리에에서.

1910년 가브리엘레 뮌터가 연인 칸딘스키와 공동으로 그린 <조각배 소풍>.

가브리엘레 뮌터, <풍경화를 그리는 칸딘스키>, 1903년 초.

첫 번째 부인 안나, 어머니와 차를 마시는 칸딘스키.

1930년 가브리엘레 뮌터가 그린 <러시아인의 집>.

1913년 자신의 그림 <작은 기쁨> 앞에 선 칸딘스키.

칸딘스키와 결혼한 니나, 1921년.

가브리엘레 뮌터, <차가 놓인 탁자 앞의 칸딘스키>, 1910년.

애견 루시와 함께 있는 프란츠 마르크와 마리아 프랑크, 1911년 렝그리스에서.

프란츠 마르크, <주홍색 누드>, 1910년, 모델은 부인인 마리아 프랑크.

프란츠 마르크, <고양이와 함께 있는 누드>, 1910년, 모델은 마리아 프랑크.

프란츠 마르크, <고양이와 함께 있는 여인 2>, 1912년.

프란츠 마르크와 그의 반려자 마리아 프랑크, 1908년 렝그리스에서.

아우구스트 마케의 스케치, <본의 아틀리에에서 마리아와 프란츠 마르크>, 1912년.

가브리엘레 뮌터, <야블렌스키와 베레프킨>, 1909년, 야외스케치 여행 중의 장면.

일랴 레핀, <붕대를 맨 마리안네 베레프킨의 초상>, 1888년.

야블렌스키는 1900년 15살의 어린 가정부 헬레네의 초상을 그린다. 헬레네는 2년 후 야블렌스키의 아들 안드레아스를 낳았다.

야블렌스키, <마리안네 베레프킨의 초상>, 1905년.

야블렌스키와 부인 헬레네, 1929년 비스바덴에서.

 

지금도 우리 곁에는

 

"나는 단지

작품들한데 모아

놓아야 했다."

 

청기사파와 이 단체의 보물 같은 그림들을 지킨 수호천사 가브리엘레 뮌터와 그녀의 반려자 요하네스 아이히너, 1955년 뮌헨에서 열린 '추상적 즉흥' 전시회의 개막식에서.

 

청기사파의 발자취

 

한 시대의 유산인 뮌헨의 미술가 그룹과 세계적으로 이름난 그들의 작품들, 시대를 앞서간 여성 미술가들과 남성 미술가들에 대한 회고전. 그 들의 창조 정신은 오늘날 미술관과 기념관, 그리고 예술가의 이름을 딴 상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뮌터의 그림 <러사아인의 집 실내>(1909)에 따라 새로 복원된 아틀리에.

1910년 칸딘스키가 직접 칠한 계단의 난간도 복원되었다.

프란츠 마르크 미술관.

비스바덴 미술관.

가브리엘레 뮌터 상.

청기사파 컬렉션의 고향인 뮌헨의 렌바흐하우스.

무르나우의 집. 의자가 놓인 벽면에 가브리엘레는 중요한 청기사파 그림들을 보관했다.

가브리엘레 뮌터, 1957년 1월.

 

작품의 변천 과정

청기사파 화가 개개인의 변천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바실리 칸딘스키

1907

1908

1910

1939

 

>> "그는 아시아인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저급하게 보이지만, 무척 재미있으며, 그리고 완벽히 비밀스러운 그림을 그린다."

(마케가 칸딘스키에 대해)

 

가브리엘레 뮌터

1903

1908/1909

1910

1918

1934

 

>> "뮌터의 그림은 정말 독특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소박함을 지니고 잇다. 절대적인 자연성, 건조하며 낮은 채도……그것이 그녀 그림의 본질이다. 바로 그 안에 선함과 사랑이 존재한다. 나는 그녀의 그림에서 많은 즐거움을 느낀다."

(쇤베르크가 뮌터에 대해)

 

프란츠 마르크

1908

1910

1911

1911

1912

 

>> "다른 화가들보다 젊은 이 화가는 동물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보다는, 들판과 숲 속에 묻혀드는 소나 노루 등을 그려 마르크 자신의 세계관을 내보이고 있다."

(칸딘스키가 마르크에 대해)

 

아우구스트 마케

1906

1911

1912

1912

1913


>> "그것은 일상적이며 우연한 삶의 진정한 시(詩)이자 비전들이었다. 그는 끊이지 않는 기쁨과 정열로 자신의 삶을 작품 속에 녹여냈다."

(엘리자베트가 남편 마케에 대해)


알렉세이 야블렌스키

1900

1904

1909

1912

1936


>> "나는 색채를 통해 나타낼 수 있는 모든 형태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있다."

(야블랜스키)


마리안네 베레프킨

1909

1910

1910

1910


>> "자신이 느낀 인상을 색채의 멜로디 속으로 녹여낼 수 있다면, 그는 비전의 대가이다. 자신의 생각을 형상화하기 위해 자신이 느낀 가시적인 인상을 색채의 멜로디라는 단순한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그는 그 자신의 대가이다. 사람들은 이 같은 기준으로 미술가들을 판단해야 한다."

(베레프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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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드무 황영찬

2015-067 화엄사

 

글 / 정병삼, 김봉렬, 소재구●사진 / 손재식

2005, 대원사

 

 

시흥시매화도서관

SH013818

 

082

빛12ㄷ  241

 

빛깔있는 책들 241

 

정병삼(연혁)-------------------------------------------------------------------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졸업하였다(한국불교사 전공). 1983년부터 간송미술관연구원을 거쳐 1991년부터 숙명여자대학교 문과대학 한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간송미술관 연구위원으로 있다. 저서로는 『의상 화엄사상 연구』, 『그림으로 보는 불교이야기』, 『일연과 삼국유사』 등이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는 「통일신라 관음신앙」, 「의상 화엄사상의 사회적 의의」, 「통일신라 불교 철학」, 「진경시대 불교의 진흥과 불교문화의 발전」, 「추사의 불교학」 등이 있다.

 

김봉렬(건축)-------------------------------------------------------------------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울산대학교 건축학과 교수와 문화 관광부 문화재전문위원, 김수근 문화재단 전문위원, 한국건축역사학회 상임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건축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건축의 재발견(전3권)『한국의 건축 - 전통 건축편』, 『법주사』, 『한국 건축과 만남』(전3권) 등이 있고 한국 건축에 관한 30여 편의 연구 논문과 다수의 현대 건축 비평들이 있다.

 

소재구(유물)-------------------------------------------------------------------

국민대학교 국사학과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에 근무하고 있으며 「원각사지 10층석탑의 연구」, 「동문선의 불탑자료」, 「우리나라의 불탑」, 「고달원지 승탑편년의 재고」 등 여러 편의 논문이 있다.

 

손재식(사진)-------------------------------------------------------------------

신구대학교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불교 문화와 자연을 소재로 하는 작업을 주로 해오고 있다. 그동안 십여 권의 빛깔있는 책들에 이와 관련된 사진을 실었고 웅진출판사의 『한국의 자연탐험』 작업에 참여하였다. 현재 『사람과 산』의 객원 편집위원으로 있다.

 

|차례|

 

천년의 화엄 성지, 화엄사

화엄사의 역사

화엄사의 건축

화엄사의 유물

화엄사 가는 길

참고 문헌

효대에 있는 석등.

남악사 전경  신라 이래 국가에서 명산 대천으로 지목받아 제사지내던 곳으로 화엄사 초입에 있다.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사경  현존하는 신라 최고의 사경으로 백지 14미터에 각행 31자로 묵서하였다.

효대  각황전 뒤 언덕에 있는 이곳 효대에는 불국사의 다보탑과 쌍벽을 이루는 4사자3층석탑과 배례석, 석등 등이 서로 마주보는 상관 관계를 보이고 있는데, 이것이 어버이에게 효성을 드리는 모습으로 전화되어 효성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도선국사 영정  신라에서 고려에 걸쳐 이름을 드날렸던 도선국사는 15살에 이곳 월유산 화엄사에서 승려가 되어 화엄을 배웠다. 도갑사 소장.

가람 구성  거대한 석탑을 경계로 단 위와 단 아래로 나누어지는 화엄사의 가람은 중심 전각인 대웅전과 각황전은 단 위에, 보제루와 승방 요사들은 단 아래에 자리잡았다.

화엄사 배치도.

동서주축선상에서 본 북면.

만월동에서 바라본 범종각 및 중심 사역.

각황전  초창 때의 장륙전은 화엄석경을 위주로 한 강당 공간이었지만, 1702년 계파선사에 의해 중건되면서 각황전은 완벽한 예불 공간으로 바뀌었다.

각황전 중수 후 평면도(1층).

1 · 2층 모두 내외 2출목을 보이고 있는 각황전의 공포.

각황전 내부  전형적인 예불용 공간으로 3불 4보살이 모셔진 내부의 전면 바닥에는 가설 마루를 깔았고, 2층 외벽에 단 창문을 통해서 은은한 햇빛이 불상들의 얼굴을 비춘다.

대웅전 전경  정면 5칸 측면 3칸의 대웅전은 임진왜란 이후인 1630년에 중건되었다.

대웅전 측면  측벽 중앙칸에는 X자 모양으로 결구한 가세가 설치되어 독특한 외관을 이룬다.

대웅전 평면도.

원통전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로 크기나 형태로 볼 때 각황전과 대웅전의 중간에서 두 중심 건물을 연결해 주는 매개체와도 같다.

보제루와 1층의 기둥들  1층에는 기둥만 세우고(아래), 2층에는 우물마루를 깐 전형적인 누각 형식을 취했으나 누 아래로의 출입은 불가능하다.

보제루 1층평면도.

대웅전에서 바라본 명부전  주심포 형식의 공포와 풍판을 단 맞배지붕 집으로 단정한 인상을 준다.

나한전  나한전은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이익공 형식을 취한 맞배지붕 집으로 각황전과 원통전 사이를 연결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영전  영전은 원통전과 대웅전 사이에 있는 전각으로 정면 55칸, 측면 3칸의 규모를 가지고 있는 맞배지붕 집이다.

일주문  절의 진입로 입구에 세워진 작은 산문으로 절의 경계에 담장을 쌓고, 좌우로 두 개의 기둥을 세운 다음, 대문과 같은 모양으로 널판문을 달았다.

천왕문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측면이 두꺼워서 외관이 당당해 보이며, 기둥이 높아 훤칠해 보인다.

천불보전  정면 3칸, 측면 3칸의 불전으로 가운데 칸이 양 협간보다 2배 정도 넓다.

천불보전  내부와 대방채의 생나무 기둥  계단형 불단에는 1,000구의 작은 불상들이 봉안되어 있으며(위), 모과나무를 생긴 그대로 잘라서 사용한 것으로 Y자형으로 갈라진 나무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다. 한국 건축의 자유분방한 성격을 여실히 보여 준다(아래).

4사자3층석탑  우리나라의 사자탑 가운데에서 가장 우수하면서도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 사자탑 앞에는 머리에 석등을 이고 있는 석조 공양보살좌상이 탑을 향하여 공양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4사자3층석탑의 사자상  윗기단의 각 모서리에는 연꽃을 머리 위에 인 채로 윗단의 덮개돌을 떠받치고 있는 사자상을 배치하였다. 한가운데에는 공양상이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서 있어 네 사자의 호위를 받고 있는 듯하다.

동5층석탑  모양새는 비슷하나 단층 기단이며 아무런 새김 장식이 없다는 점이 2층 기단에 새김 장식이 풍부한 서5층석탑과 대조를 이룬다.

서5층석탑과 탑신부의 여러 가지 조각 장식  2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이 탑의 꼭대기에는 간단한 상륜 부재를 장식하였으며(위), 1층의 몸돌 4면에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여 배치하였다(아래).

원통전 앞 사자탑  화엄사에만 존재하는 탑으로 사자탑 형식의 2층 기단을 구성하였고, 탑신부는 단층으로 되어 있다.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 또는 그 이후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각황전 앞 석등  각황전의 위용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제작된 이 석등은 여러 가지 무늬 장식과 받침부의 변화 있는 조형으로 완화시켰으며, 상륜부를 강조함으로써 석등의 규모를 한층 신장시키는 효과를 얻었다.

당간지주  지주 끝부분이 앞뒤로 둥글게 깎여 있으며, 측면 모서리의 모를 죽이는 방식이 중간부까지만 나타나고 있어 색다른 느낌을 준다.

화엄석경  통일신라시대 벽면을 장식했던 석경의 전돌 모양 조각들을 통해 경전의 내용과 함께 변상도를 새겼을 가능성도 추측해 볼 수 있다.

벽암대선사비  임진왜란 때 승장으로 활약하고 화엄사 중건 사업에 헌신하다 입적한 벽암대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이 비는 거북돌과 이맛돌의 형태가 소박하고 친근한 향토적인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구층암 3층석탑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하고 있는 이 석탑은 탑이 무너지고 난 뒤 절집이 들어서면서 탑과 건물의 향배가 어긋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구층암 석등  8각석등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 이 석등은 전체적으로 매우 단정하다. 고려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신라 석등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대웅전 목조 삼신불좌상  화려하게 장엄된 내부에는 주존불인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석가여래불을, 왼쪽에는 노사나불을 봉안하였으며, 각 불상 위에는 독립된 닫집을 설치하였다.

각황전 목조 칠존불상  3구의 불상과 4구의 보살상들은 거구의 신체를 표현하면서도 외모의 변화를 억제하고 조형적인 통일성을 유지하였다.

사천왕상  흙으로 빚어낸 소조상으로 천왕문의 오른쪽에 있다. 갑옷을 입고 걸터앉은 자세로 비파를 들고 있는 소조상이 동방지국천왕이며, 갑옷을 입고 왼손에 칼을 쥐고 있는 것이 남방증장천왕이다.

인왕상과 동자상  인왕상은 가람의 출입문을 지켜 주는 역할을 맡고 있으며, 바로 뒤편에 용맹을 상징한다는 문수동자가 사자의 등에 걸터앉아 있다.

화엄사 괘불  색채가 곱고 균형 잡힌 구도와 치밀한 선의 움직임이 돋보이는 이 불화는 임진왜란 이후 불타 버린 전각들을 중창하고 난 뒤 벽암대사를 비롯한 승려와 불자들이 공을 들이고 왕실을 축원하며 제작한 것이다.

범종각 범종  보제루 옆 종루(범종각) 안에는 화엄사에서 가장 큰 규모의 범종이 걸려 있는데, 이 범종에는 18줄의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내용에 의하면 조선 숙종 때에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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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드무 황영찬

2015-066 萬人譜 23

 

高銀

2006, 창비

 

 

시흥시대야도서관

SB001811

 

811.66

고667만  23

 

창비전작시

 

스웨덴 Svenska Dagbladet가 뽑은 '2005 올해의 책'

 

옛일은 참혹했던 일까지도 향수를 느끼게 한다. 이번 고은 선생의 『만인보』에 그려진 4 · 19도 그러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것은 지금의 눈에 비치는 당시의 일들이 어떤 순진성 또는 순수성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령 신문팔이 소년의 용기가 계엄군을 돌아서게 하는 이야기는 그러한 순진성 또는 순수성을 드러내준다. 이것이 드러나는 것은 물론 시인의 시심이 그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만인보』는 민족 또는 민중의 서사시이다. 서사시에는 영웅이 있게 마련이고, 이 시의 영웅은 민중이지만, 모든 것이 민중이데올로기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만인보』는 정치와 관련 없는 민중의 삶, 더 나아가 혁명의 적에게도 열려 있다. 여기에 실린 「어느 임종」은 죽음에 임하여, 독수리에게 자신의 주검을 내맡기며, 내생을 사절하는, 도인의 초탈을 읊고 있다. 『만인보』의 시심은 정치를 넘어, 이러한 초연함과 일치하고, 다시 한 없는 자비심과 일치한다. ● 김우창 문학평론가, 고려대 명예교수

 

『만인보』는 이번 세기 세계문학에서 가장 탁월한 기획 가운데 하나다. 그 시들은 더할나위 없이 감칠맛 나고, 사람들 삶의 세목으로 충만하다. ● 로버트 하스(Robert Hass) The New York Review of Books 서평

 

그는 무엇보다 시적 영감을 얻은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적, 정신사적 영향력을 지닌 백과사전이다. 통찰력과 풍자와 온정을 갖고 이 차가운 불빛 속에서 인간적 자연의 하약함과 유혹을 드러내 보여준다. ● 얀 칼손(Jan Karlsson) Kristianstadsbladet 서평

 

윤회하는 세속의 그의 인물들은 무아의 경지에서 가장 강하다. 시들 속의 이야기는 마술퍼럼 마을과 밭과 개들, 그리고 새들과 인간들과 시간의 흐름을 내포한다. ● 스웨덴 국영라디오 'P1' 서평

 

 

고  은 高  銀

1958년 처녀시를 발표한 이래 시 · 소설 · 평론 등에 걸쳐 140여권의 저서를 간행했다. 서사시 『백두산』『만인보』와 『고은시선집』 1 · 2 『고은전집』(전38권) 등을 출간했고, 전세계 10여개 언어로 50여권의 시집 · 시선집이 간행되어 큰 반향을 얻고 있다. 현재 세계 시아카데미 회원(한국대표)로 세계시단이 주목하는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차례

 

어느날 밤 / 조상매 / 장영옥 / 최봉옥 / 지복수 / 어느 방 / 이흥수 / 국가보안법 위반 제1호 / 황규직 / 윤삼이 아버지 / 궁녀 길례 / 매린(買隣) / 재회 / 횃불데모 / 김태석이 / 금홍 / 임기택 / 지영헌 / 김태연 / 이수돌의 낙서 / 민병록 / 김영기 / 101세 광대 / 김용준 / 한정기 / 남재섭과 심혜옥 / 동굴대궐 / 조선관 / 이승만의 개 / 김영달의 막걸리 / 박종표 / 이강희 / 박찬원 / 송규석 / 전한승 / 노희두 / 어느 여중생 / 마누라의 일 / 이한광 / 쎄단 / 자매봉 / 천인복 / 양대춘 / 이연하 / 김영호 / 함장호 / 이성희 / 손경호 / 박춘봉 / 이상관 과장 / 그 3천여명 / 이현란 / 이장선 기자 / 임용학 / 국보 미륵반가사유상 / 장경근 / 박지수 / 유도 6단 / 이석제 / 김명시 / 윤건중 / 백남의 / 박마리아의 어머니 / 한정봉 / 신도환의 꿈 / 최경자 / 송시환 / 이기태 / 김종진 / 안정수 / 신경식 / 김용실 / 두 미루나무 / 이한수 / 이기태의 애인 / 강수영 / 임종 / 어느 사상범의 주술 / 약광 / 어느 인생역정 / 박기병 / 김철규 / 오성원 / 전무영 / 그 손녀 / 한성여중 진명숙 / 천막 대폿집 / 어린 고물장수의 꿈 / 인걸이 어머니께서는 / 김흥한 / 복취루 배달원 / 막내 오줌 / 김진호 당수 / 도둑 내외 / 김정보 영감 / 닭 / 김택수 / 그 골방 / 어느 석녀 / 거지 필남이 / 가짜 / 조용수의 마지막 / 한 노인의 나라 운수풀이 / 돈 사람 윤청일 / 여숙희 / 영옥이 / 청계천 판잣집 / 전순의 / 깡패 참회행진 / 갈치장수 / 우는 남자 / 가영훈의 아내 / 끄나풀 우만철 / 노점상 임태길 영감 쌍영감 / 황금찬의 9천 미터 / 전남편 / 엄진달 면장 / 1965년 11월 19일 저녁 / 남대문시장 입구 / 옥채금 / 해월의 따님 / 야반도주 / 변영태 / 꿈 / 송철원 / 술 한잔 여본걸 씨 / 길자 / 박벽하 스님 / 황태성 / 가수 한명숙 / 부활 / 6 · 3의 시대 개막 / 밤섬 윤옥녀 / 어린 종 견동이 / 머리칼 장미 / 천상병 / 박종홍 / 수번 710번의 죽음 / 강태원 원장 / 홍어배 임태섭이 / 그 갓난아기 / 구재학당의 밤


해설 「아, 4 · 19」 / 김윤식


장영옥


자동차 운전사였다

그날

거리에 있었다

그날

거리에서 쓰러졌다


차주는 다른 운전사를 구했다


누군가가 이 반생의 생이야말로 허무가 아니라 한다


이흥수


아버지가 야당 민주당원이었다


서울대 문리대 3학년 중퇴

육사 8기

국방부 정보과

김종필 동기


그러나 그는 육군소위로 제대한 뒤

을지로

종이가게에 다니고 있다


평범밖에 아무것도 없었다

평범한 낮

평범한 밤


아내

두 아들


4월혁명의 거리에 평범하게 몸 바쳤다

어디에나 평범하게 아니 평범하지 않게 생과 사 있다


궁녀 길례


고려 만월대의 새벽이야

닭이 울어서 연다

고려 만월대 충렬왕의 새벽이야

닭이 울어서 연다


마마께서는

아직 눈을 뜨지 않으셨으나

간밤 부름받은

궁녀 길례는 성은 입은 몸으로 깨어나서

꿈인가

생시인가

제 옷 속의 몸 여기저기 손대어보았다


이로부터 길례의 시대 연다


고려 만월대 궐내에서는 때를 알리는

수탉 일곱 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진한 운우지정 뒤

닭 우는 소리 시끄럽다고

그 닭들을 다 없애는 길례의 시대 연다


더이상 고려 만월대의 새벽은 없다 긴 긴 밤 있다


재회


강이 없었다면

어쩔 뻔했는가


달이 없었다면

국자별 북두칠성이 없었다면

어쩔 뻔했는가


아 이 세상에 포옹이 없었다면

어쩔 뻔했는가


전란 때 헤어진 뒤

다시 만난

두 사람


눈 맞으며 오래오래 포옹을 풀지 않는다

눈 내리는 날 없다면

어쩔 뻔했는가


진오식과 현상희


남재섭과 심혜옥


제주도 산지포


밤 뱃고동소리 들으면서

잠든 너를 바라본다


멀리 도망쳐와서 너는 이제 어엿이 내 아내이구나


돌아가지 않으리

돌아가지 않으리


구름 쓴 한라산 밑 귤꽃 피어 있구나

두 몸 꽁꽁 묶어 여기 살리 곧 아기 낳으리


천인복


너 포항 영일만

가슴 넓은 바다를 두고 온


서울 을지로 그 궤짝 같은 방

서울프린트사 등사원


너 가슴 뜨거운

4월의 거리로 나선


처음으로 경무대 앞 당당히 앞서가다

거꾸러진


네 어머니의 통곡 속의


박춘봉


남산동 산동네 판잣집

스물일곱살

스물일곱살이면 뭘 해

스물아홉살이면 뭘 해

소금가마니

어깨에 저나르는 하루 저물면

어깨가

욱신욱신

스물일곱살이면 뭘 해

스물아홉살이면 뭘 해


4월 26일 낮 1시

영등포 연흥극장 앞 데모 속에 있었다

일 나가지 않고

데모 속에 있었다


영등포 연흥극장 앞 데모 속에 있었다

일 나가지 않고

데모 속에 있었다


영등포연합의원에 실려와 눈감았다

여기저기 몽둥이자국

가슴팍 칼자국


스물일곱살이면 뭘 해

이제사 죽어 파리 들끓는 판잣집 지전(紙錢)도 없이 싹 벗어났다


임용학


쉰살은 넘은 듯

막일꾼인 듯


4월 26일 밤

세브란스병원에 실려온 주검

다른 주검의 가족들 울음소리로

덩달아 외롭지 않았다

며칠 뒤

누가 와서 임용학이라는 이름을 불러주었다


아직 그 주검 누가 찾아가지 않았다

시시한 무관심

시시한 관심

시시껄렁한 타인들이 이 세상 한쪽이었다


바람 왜 부노


김종진


문리고등공민학교 1학년

고학생

자취방에는

담요 한 장

왜간장 두홉들이 절반

양재기 하나

밥그릇은 있고

국그릇은 없다


4월 26일

중학생

고등학생 데모


문리고등공민학교를 대표해서

스물두살

늙은 1학년 야간학교 학생 김종진도 나아갔다


머리 관통상


그날 밤9시경 병원 임시 안치실 시신번호가 붙었다

18번 김종진


안정수


소년은 열여덟살

소년은 부모가 없다

소년은 학생이 아니다

소년은 다니는 공장도 없다 처음부터 빈털터리였다


동대문경찰서 앞에서 즉사

M1 소총 총탄이

소년의 빈털터리 생을 뚫었다


누가 찾아가지도 않는 주검


어쩌다 이 세상에 제 이름 하나 붙어 있었다

안정수


이한수


남대문 아래에 죽어 있더라

열아홉살

용산고 졸업하고

사범대 가려던

죽어 아무 말 없더라


쉬파리가

네 주검 알아보고 와 있더라


혁명이란 너의 죽음을 지나가는 행렬이더라


이기태의 애인


오늘도 기태씨가 걸었던 길을 걸었어요

경희대 벚나무길

정문 앞

제일다방에 가서

기태씨가 마시던

모닝커피를 시켜서 마셨어요

지금 이대통령은

하와이로 떠났어요


기태씨가 숨 거둔

수도의대부속병원에는

이제 혁명 사망자와 부상자 하나도 누워 있지 않아요


오늘도 나는 기태씨가 달려가던 길

종로5가

종로3가를

시내버스로 지나왔어요

이제 나는 4 · 19묘지에 가지 않을 거예요

이제 나는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거예요 사랑하던 당신이여 안녕


강수영


사과꽃 졌다

경남고 3학년이

이 세상의 끝


할 수 없구나

네 시작은

다음 세상


이 세상의 행로는 네 시작도 끝도 바로 지워버렸다

개가 짖는 밤 이슥하구나


임종


할아버지와 어린 손자 둘이 살고 있었다

그 오막살이

처마에는 참새 몇 마리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 오래 누워 있었다

어린 손자가

오릿길 약방에 가서 약 지어왔다

숨찬 손자


할아버지 전세중 손자 전대양


할아버지 약 지어갔어요

하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눈떠

이놈 대양아 약 지어갔어요가 아니라

약 지어왔어요라고 다시 말해라


할아버지 약 지어왔어요

하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음 진 모습 이미 숨졌다


오성원


1939년

경남 창원에서 첫울음 울다

1960년 3월 15일 그날

경남 마산에서 숨지다


살아 있을 때

국숫집 지나가면 국수가 먹고 싶었다 구름을 보면 구름이 되고 싶었다


한성여중 진명숙


한성여중 2학년 진명숙


   시간이 없는 관계로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선거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위하는 길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가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니 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요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하여주세요


열다섯살 소녀는 이 유서를 남기고

미아리고개 시위에 참가

총알을 맞고 쓰러졌다

얼굴 명중

누구인지 알 수 없는 피투성이 얼굴

눈도 코도 없어진 얼굴


갈치장수


하루 내내 갈치 쉰 마리 예순 마리 받아다

팔러 다니는 아낙

갈치 다라 이고

이 마을 저 마을 팔러 다니는 아낙


날 저물어 돌아가면


하루 내내 누웠다 앉았다 하던 사내

아이들 잠자기를 기다렸다가

지친 마누라 벌렁 눕혀

천상의 낙을 베푸누나


어흐

어흐

어흐


끝난 뒤

진땀 비지땀 알몸뚱이 이대로

사내 담배 빼앗아 연기 한 모금 뿜어내는 마누라


아이고 당신 없으면 나 못 살아


노점상 임태길 영감 썅영감


무허가 노점상

단속반이 납시는 날

오늘도 썅

아까부터 주전자에 담아온 막걸리

오로지 그것만이

이 세상의 벗이었다


재작년에

마누라

망우리 무덤으로 가고

오로지 막걸리 한 주전자

그것만이

이 세상의 벗


내일은 국군의 날이라 한다

아들은 빽 없어

강원도 화천 일선부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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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드무 황영찬

2015-065 환단고기를 찾아서 3 중국이 날조한 동북공정을 깨라

 

신용우 장편소설

2013, 작가와비평

 

 

대야도서관

SB102416

 

813.7

신65ㅎ  3

 

중국 정부가 감춰둔

      우리 역사서에 실려 있는 영토의 진실!

껍데기 벗은 동북공정의 실체와 낱낱이 해부된 그 허상의 백서!

 

환단고기를 찾아서 3

중국이 날조한 동북공정을 깨라

 

신용우의 소설에서 역사는 살아 숨 쉰다. 그는 역사를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미래를 설계하는 지침으로 삼는다.

일본은 예로부터 광개토대왕의 비문까지 고쳐가면서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우리의 고조선에서 대진국 발해의 역사까지

앗아가려 하고 있는 이 판국에 우리 역사가들은 무엇을 하는가?

여기 소설가 신용우가 우리의 자랑스런 고조선과 고구려, 대진국 발해의 역사와 광역을

현실로 가져와 되살려 놓는다. 또한 그 역사들이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증거들을 제시한다. 그 특유의 메타픽션적 역사 접근은 역사가 과거에 묻혀

숨 막히는 것을 방관하지 않고 우리 곁에서 함께 웃고 숨 쉬게 한다.

특히 유난히 왜곡된 부분이 많은 우리나라 역사의 찢기고 기워진 아픈 구석을 찾아 명쾌하게 치료한다.

그의 작품을 읽고 나면 십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기분을 느끼는데, 이는 그만의 매력이다.

이번 작품에서도 신용우는 여지없이 그 매력을 발산한다. 일제에 의해 깊은 상처를 입은

우리의 역사를 그가 소생시키고 있다. 일제가 우리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거둬들인 역사와 문화,

예술 서적이 총 51종 20여만 권이라는 기록이 그의 눈을 비껴 갈 수는 없었다.

그 책들의 행방을 추적해 나가는 것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우리가 흔히 말하듯이 잃어버린 역사가 아니라 반드시 찾을 수 있는 역사라는 것을

그가 우리 앞에 보여주고 있다.

부디 이 작품이 우리나라 역사바로세우기에 큰 몫을 하기를 바라며,

이런 작품을 쓰는 신용우 작가의 노력이야말로 우리 후대를 위해 가장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민용태(시인, 스페인 왕립 한림원 위원, 고려대 명예교수)

 

 

지은이 신 용 우

1957년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했다. 제21회 외대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장편소설 『천추태후』, 『명성황후는 시해당하지 않았다』, 『요동묵시록』(상, 하), 『요동별곡』, 『도라산 역』(1, 2), 『철수야! 안 철수?』를 출간했다. 그중 『요동별곡』은 세계일보 스포츠월드 연재소설로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 교양도서로 선정되었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라는 역사관을 바탕으로, 역사를 연구하고 배우는 목적은 역사를 거울삼아 인류의 평화로운 미래를 설계하기 위한 것임을 강조한다. 왜곡된 역사는 아무 의미가 없음을 역설하며 일본과 중국에 의해 찢기고 왜곡된 우리나라 역사바로세우기를 주제로 소설을 쓴다. 요동 수복과 대마도 되찾기, 통일에 대한 관심 역시 역사 속에서 그 뿌리를 찾아 글로 표현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역사를 바로 알리고 올바른 역사를 바탕으로 풍성한 삶과 희망찬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라는 역사관을 소설로만 쓰는 것이 아니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우리 민족의 웅대한 기상을 가슴에 담고, 역사를 거울삼아 현실의 삶에 투영시킴으로써 보다나은 현재의 삶과 미래를 설계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방송, 기업, 관공서, 교사연수회, 학생특강, 포럼 등 각종 매체와 단체 등에서 각각의 눈높이와 특성에 맞게 역사 특강을 하고 있으며 신문과 잡지 등에 칼럼을 쓰고 있다.

 

차례

 

작가서문 : 동북공정과 요하문명론의 엄청난 음모를 똑바로 알고 대처해야 한다

 

프롤로그 : 우리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구려벌

 

1. 동북공정은 중국 2대 주석 화궈펑의 작품

2. 감각보다 진한 피

3. 만주라는 보물을 조선에 돌려주어서는 안 된다

4. 첸쉐썬 박사

5. 스탈린이 가지고 논 김일성과 마오쩌뚱의 6.25 동란

6. 첸쉐썬이 실패한 대약진운동

7. 피를 부르는 문화대혁명의 신호탄

8. 문화대혁명과 화궈펑

9. 화궈펑의 벼락출세

10. 화궈펑의 무혈 쿠데타

11. 환단고기와 동북공정의 시작

12. 동북공정의 시발은 194년

13. 피는 바꿀 수 없어도 신분은 바꿀 수 있다

14. 물은 막아도 피는 못 막는다

 

에필로그 : 메아리는 언젠가는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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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드무 황영찬

2015-064 세잔 - 사과 하나로 시작된 현대 미술


미셸 오 지음, 이종인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38


082

시156ㅅ  33


시공디스커버리총서 33



"나는 당신에게 회화의 진실을 말할 의무가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당신에게 보여 드리겠습니다."

평생 미술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독창적인

천재 세잔은 회화의 진실을 전달하겠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세상사와는 담을 쌓은 채

그리고 또 그렸다. 마침내 세잔은 색채의 논리를 규정하고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여 '자신의 감각을

실현하는 일'에 성공했다. 그의 작업은 곧 20세기

현대 미술의 새로운 지평이 되었다.


"자연의 모든 물상은

색채를 갖고 있으므로, 데생과

색채는 결코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색을 칠해 나감에 따라 데생도

이루어지는 것이며, 색의 조화가

이루어질수록 데생도

더욱 확실해지는 것이다. 색채가

풍부해질 때 형태는 가장 풍만해진다.

색조의 대비 및 관계가 데생과 형태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무척이나 천천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자연이 아주 복잡한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은 끝이 없습니다."

"그림이란 색채, 형태 공간 따위 다양한 관계 속에서 어떤 조화를 찾아내는 일입니다. 그렇게하여 그것을 새롭고 독창적인 논리에 따라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자연에 대한 강렬한 느낌 - 나는 그런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 이 미술적 개념을 이해하는 근본적 바탕이 되고 이 바탕에 의존해서 모든 미래의 작품들이 그 장엄함과 아름다움을 획득한다고 볼 때,


우리의 정서를 표현하는 수단에 관련한 폭넓은 지식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지식은 오로지 오랜 동안 쌓아 온 경험을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습니다."


"명암(빛과 그림자)은 곧 색채의 관계입니다. 이 두 가지 중요한 우연적 요소는 색 자체의 강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색과 색이 함께 어울릴 때의 공명도(共鳴度)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림자도 빛만큼이나 어엿한 색채입니다. 단지 명도(明度)가 떨어질 뿐이지요. 그러므로 명암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색조(色調)가 맺는 관계일 뿐입니다."


"(그림에는) 대비(對比)가 있을 뿐, 선(線)이나 모델링(modelling, 대상에 입체감을 주는 것 : 역주)은 없습니다. 그것은 명암의 대비가 아니라, 색채감(sensation of color)의 대비를 뜻합니다."


"모델링은 색조의 관계를 정확하게 맞추었을 때 얻어집니다. 색조를 조화롭게 병치(倂置)시켜 완성을 이루었을 때, 비로소 그림은 스스로 모델링을 갖추게 됩니다."


차례


Cezanne, "Puissant et solitaire"


제1장 유년 시절

제2장 인상주의 시대

제3장 자연과 평행한 조화

제4장 "이제 약속의 땅이 보입니다"

기록과 증언

참고문헌

그림목록

찾아보기


미셸 오 Michel Hoog

파리 로랑제리 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인 미셸 오는, '로베르 들로네' '19세기 러시아 회화의 리얼리즘과 시정' '르 두아니에 루소'와 같은 굵직한 전시회를 주최한 바 있다. 1971년부터 파리에 있는 에콜 드 루브르의 교수로 활동하고 있으며, 그가 펴낸 수많은 미술 서적들은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판되기도 하였다.


옮긴이 : 이종인

1954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였고, 한국 브리태니커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번역서로는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번 <문자의 역사> 23번 <셰익스피어> 28번 <붓다> 32번 <미라>가 있으며, 그외 <절망이 아닌 선택> <증발> <때로는 낯선 타인처럼> 등이 있다.


제1장

유년시절


"은행가이신 우리 아버지는 자신의 책상 뒤에서 화가가 나타났다는 것을 아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남부 프랑스의 한적한 마을 출신인 한 총명한 학생은 이렇게 말하면서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내비쳤다. 당시 은행가이던 그의 아버지가 반대했을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었다.

세잔은 자신의 사진(아래, 1860년대 초만 해도 사진은 신기한 물건이었다.)을 보면서 그린 초상화(위, 1861~1862)를 고의적으로 보기 흉하게 처리했다. 누런 안색, 응시하는 눈, 험악한 인상은 악마를 연상시킨다. 훗날 제작된 초상화들도 웃지 않는 표정으로 유명하지만, 이 초상화만큼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지는 못했다.

세잔의 누이인 마리 세잔의 초상화(위, 1866년경). 세잔의 초기 시대에 그린 몇 안 되는 여자 초상화이다. 물감은 팔레트 나이프를 사용하여 두텁게 칠해져 있는데, 세잔은 임파스토(impasto)라고 하는 이런 빠르고 거친 붓질을 애용했다. 이 기법은 널리 통용되던 관학적인 기법이나 당시 엑스에서 가르치던 부드럽고 장식적인 붓질과 성격을 달리한다.

 

세잔의 외삼촌 도미니크 오베르의 초상화
(아래, 1866)는 약 10점 정도 제작되었다. 그는 조카를 위해 군말없이 모델이 되어 주었다.

 

 

"물결치는 파도 위로 나는 달아낫다. 몇 년간 행복한 세월이 흘렀다.

우리의 날랜 두 팔이 부드러운 파도 위로 뱀처럼 헤엄쳤을 때

안녕, 포도주로 익힌 행복한 날들이여! 대어를 낚는 행운이 따르기를!"

세잔

18558년 4월 9일 에밀 졸라에게 쓴 편지

이탈리아 이민의 아들인 루이 오귀스트 세잔은 1848년 엑스에 은행을 차렸고, 큰부자가 되었다.

<4계절> 벽화(당초 자 드 부팡의 벽에 그린 것이었으나 현재는 파리의 프티 팔레 박물관에 옮겨져 있음)는 그림을 그려 넣은 벽지나 로맨틱한 커튼에 등장할 법한 여인을 그리고 있다. 아름답고 우아한 여자를 등장시킨 가을(위)과 (아래)은 이탈리아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를 연상시킨다. 야망이 엿보이는 이 초심자의 작품이 보여 주는 예리한 데생, 분명한 윤곽, 긴 팔 등은 세잔이 아이로니컬하게도 이 그림에 '앵그르'라고 서명한 이유를 말해 준다. 신고전파 화가인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는 관학적 화풍의 교과서적 전범이었던 것이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그린 이 데생은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의 효시이다. 이 그림은 1859년 1월 17일 에밀 졸라(아래)에게 보낸 편지의 여백에 그린 것으로, 세잔은 "죽음이 이곳을 지배하고 있다."고 제목을 달아 낳았다.

1863년에 사망한 외젠 들라크루아는 세잔 세대의 많은 화가들의 우상이었다. 이 그림은 세잔이 그린 들라크루아의 초상(1864~1866).

<노인의 두상>(위, 1865~1868)은 도미니크 외삼촌을 그린 초상화보다 훨씬 더 감각적이고 정교하다. <메데아와 자식들>(아래, 1879~1882)은 들라크루아의 작품의 모사작이다.

시인이자 미술비평가였던 안토니 발라브레그는 엑스 출신이었고 파리의 카페를 즐겨 찾던 소집단의 멤버였다. 무뚝뚝한 시골뜨기 세잔은 파리의 예술가들이 즐겨 드나들어 파리 예술계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지던 카페 게르부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잔은 화난 사람처럼 입을 다물고 있거나 자기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미친 듯이 화를 냈다. 마네의 심기를  건드린 적도 있었다. "마네 씨, 난 악수하지 못하겠소. 1주일 동안 손을 닦지 않은 터라."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1863)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페트 샹페트르>(1510경, 이 작품은 한때 조르조네의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했다.)를 모델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은 옷 입은 남자들 사이에 있는 벌거벗은 여체 때문에 부도덕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살롱에서 낙선한 화가들은 자기 작품을 알릴 기회가 없었다. 1863년. 낙선자들은 전시회장의 옆건물에서 낙선전을 열었다. 당시의 신문 만화에서 알 수 있듯, 낙선전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얘야, 모자를 벗으려무나. 이 불행한 자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해야지."

세잔은 기법과 주제를 성공적으로 결합시켰다. 폭력적인 장면(1867~1868년경에 제작한 <살인>)이나 어느만큼은 풍자적인 초상화를 그릴 때는 아주 신속하게 작업을 했다. 두터운 붓질과 빈번한 팔레트 나이프의 사용이 엿보이는 것이다. 반면 평온한 분위기를 담고 있는 정물화는 부드럽고 사색적인 붓질로 처리하곤 했다.

졸라에게 책을 읽어 주는 폴 알렉시스

그 역시 엑상프로방스 출신인 폴 알렉시스는 졸라의 제자였고 그의 비서로 지내기도 했다. 위 그림(1869~1870)에서 알렉시스는 책 읽어 주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이 그림은, 만족스럽지 않은 작품은 파기해 버리는 세잔으로서는 이례적인 미완성작이다. 간단히 스케치만 되어 있는 졸라의 모습은 그림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날카로운 대조를 보인다. 옆모습을 보이며 앉아 있는 알렉시스는 이 그림보다 1~2년 전인 1868년에 제작된 마네의 유명한 그림 <졸라>(아래)를 연상케 해준다. 이 그림은 졸라가 죽고 여러 해가 지난 뒤 촐라의 다락방에서 발견되었다.

세잔은 아버지가 읽고 있는 신문의 제자(題字)를 일부러 나오게 그렸다. 그 신문은 아버지가 평소에 보던 신문이 아니라, 1866년 4월과 5월에 살롱을 성토하는 기사를 게재한 《에베느망》지였다. (살롱을 '바보들의 집단'이라고 꼬집었다.) 졸라는 필명으로 게재한 글에서 살롱을 통렬히 논박하여 물의를 일으켰고, 이 신문의 편집인은 졸라의 기사를 게재하지 못하게 조처하는 한편, 졸라를 해고해 버렸다. 젊은 세잔이 그린 정물화-<설탕그릇, 배, 푸른 컵이 있는 정물>(가운데, 1863~1865)-가 안락의자 뒤에 걸려 있다. 루이 오귀스트 세잔이 아들의 정물화에 등을 돌리고 있다는 사실에 어떤 상징적 의미를 부여해야 할까?

아실 앙프레르의 초상화는 폴 고갱의 친구이며 화가인 에밀 슈프네케의 소유였다가 다시 반 고흐의 모델이며 화가인 외젠 기욤 보흐의 손으로 넘어갔다. 세잔은 후년에 이 그림을 파기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으나, 세상사람들은 언제나 이 작품에 깊은 관심을 보여 왔다-오로지 그 크기와 풍자적인 면모 때문이기는 하지만 이 그림은 1870년 이전, 세잔이 살롱 입선을 노리고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세잔은 당시 스타일, 혹은 그 자신이 말하는 '원칙'을 찾아내기 위해 탐구에 탐구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세잔은 자신의 감각을 분석하기보다는 과거 대가들의 그림을 연구하는 일에 더 몰두하고 있었다. 정면에서 바라보는 시점, 강렬한 색채, 풍자적 분위기, 대문자로 적어 넣은 제목 따위가 고풍스런 기법과 간판쟁이의 손놀림이 뒤범벅되어 있음을 잘 보여 준다. 그림 속의 안락의자는 아버지의 초상화와, (비록 아무도 앉아 있지 않지만) 1866년에 제작된 <탄호이저 서곡>에서 다시 한번 등장한다.

앙프레르를 스케치한 것.

세잔은 전통적인 테마에서 많은 것을 빌려 왔지만,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림보에 있는 그리스도>(첫번째, 두번째) 이외에는 종교화를 별로 그리지 않았다. 이 그림속의 그리스도는 프라도 박물관에 소장된 세바스티노 델 피옴보의 그림에서 모사한 것이고, 막달라 마리아(네번째, <비탄>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음)는 루브르에 있는 도메니코 페티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엑상프로방스 출신 친구인 포르튀네 마리옹은 세잔이 파리 교외로 산책을 나갈 때 자주 동무해 주었다. 그는 지질학자이며 아마추어 화가였다. <야외사생을 나가는 마리옹과 발라브레그>(1866)에는 두 친구가 야외작업을 위한 복장을 하고 나온다. 세잔이 외광파에 대한 관심을 처음으로 선언한 작품이다.

이 풍경화(1865~1867)에서 두텁게 느껴지는 형태가 나무인지 암석인지 확실하지 않다. 세잔은 모델의 얼굴을 표현할 때와 똑같은 정열을 가지고 야생적이고 원시적인 자연을 그렸다.

<대주연>(1870년경)은 아주 큰 화폭에 그려졌다. 세잔은 자신의 스타일을 완전히 바꾼 다음인 1895년에 가졌던 개인전시회에서 이 그림을 반드시 전시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이 시대(1866~1870)의 가장 인상적인 그림 중의 하나가 뤼 드 라 콩다민에 있던 졸라의 집에서 제작되었다. 세잔은 이 그림을 완성하여 졸라에게 선물했다. <유괴(강간)>(1867)는 세잔의 의도대로 366~457cm에는 못 미치고 89~117cm로 완성되었다. 콤마(,) 같은 터치로 그려진 초록색 초원은 마치 험난한 바다 같다. 이런 배경에 서 있는 구릿빛 거인의 누드는 앞으로 튀어나와 보인다. 사내는 양팔로 청흑색 머리카락을 한 창백한 여인을 안고 있다. 여인의 엉덩이에서 진청색 천이 흘러내린다. 초록색 평원과 푸른색 물체에 둘러싸인, 여인의 흰색 피부와 사내의 구릿빛 피부가 강렬한 조화를 이룬다. 저 멀리 배경에 흰 구름을 인 산은 생트빅투아르를 연상시킨다. 화면 왼쪽에 있는 두 소녀의 핑크 빛 육체가 구성에 생기를 준다."

존 리월드

《세잔 전기》(1986)

<두개골과 초가 있는 정물>(1865~1867)은 세잔의 전형적인 초기 정물화이다. 소재 선택에서는 전통에 충실한 면을 보이나 그 기법과 조명에서는 매우 현대적이다.

바늘이 없이 표현된 검은 시계는 졸라의 것이다. 탁자 밑으로 흘러내리는 테이블보는 엑스 교외의 채석장에서 볼 수 있는 바위의 표면을 연상시킨다.

<탄호이저 서곡>(1866경)은 몇 개의 직각(안락의자, 등받이 있는 소파, 작은 의자, 피아노 치는 소녀의 팔, 피아노)을 이용해 단단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림 속의 소재는 캔버스의 면과 수직 혹은 수평을 이룬다. 은은하게 퍼진 빛, 차분하게 가라앉은 색채, 안락의자의 미묘한 반사광은 베르메르나 사르댕 같은 시적 분위기를 전해 준다. 글레이즈(마른 색채 위에 칠하는 밝은 빛)의 터치로 회색과 흰색은 가볍게 진동하고 있다.

풍자만화가 스톡이 그린 세잔의 초상. 1870년 살롱에서 낙선한 아실 앙프레르의 초상화와 누드(이 그림은 전하지 않음)가 함께 그려져 있다. "팔레트 나이프, 페인트브러시, 붓 따위 여러 가지 화구로 그림을 그리는 쿠르베, 마네, 모네 등이여, 당신들은 모두 유행에 뒤떨어졌소이다, 여기 당신들의 스승 세잔을 소개하나니!" 이 풍자만화는 1870년 봄에 출간된 스톡의 주간 잡지에 수록되었다.

초기에는 그리 흔하지 않던 여성의 초상화는 오르탕스 피케를 만난 1869년 이후로 그 수가 많아졌다. <붉은색 안락의자에 앉은 세잔 부인>(1877).

철로를 부설하기 위해 허리를 잘라낸 언덕이 살벌하게 다가서는 이 풍경화(1870)는 엑스 교외에서 제작되었다. 언덕 뒤로는 생트빅투아르산이 주변을 제압하고 있다. 이 풍경화에서 처음 등장한 생트빅투아르는 그뒤 한참 잊혀졌다가 만년에 자주 등장한다.

 

제2장

인상주의 시대

 

전쟁이 터지기 몇 년 전부터 피사로는 파리 북방의 퐁투아즈라는 곳에서 젊은 제자 화가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었다. 세잔은 1872년에 오르탕스 피케와 어린 아들 폴을 데리고 그 그룹에 합류했다. 이제 불안에 떨며 자기분석에 열중하던 청년기가 막을 내리고 약 10년 가까이 평온한 시기가 이어진다.

퐁투아즈 근교의 전원풍경은 세잔의 예술적 발전에 큰 자극제가 되었다. 색채는 밝아졌고 흑과 백의 강렬한 대비는 사라지고 밝은 색채의 화음이 등장했다. <오베르에 있는 작은 집>(1873~1874경).

모네와 르누아르가 표현한 것처럼 인상파 운동은 즉흥성의 결과이거나 우연한 발견마냥 하루 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피사로, 모네, 르누아르, 기요맹 들은 근 10년 동안 한가지 방향으로 작업을 계속해 왔던 것이다. 위에서 아래로, 르누아르(프레데릭 바질, 1867), 기요맹(세잔, 1869~1872), 시슬레(르누아르, 1874), 모네(르누아르, 1875), 오베르로 야외작업을 나가는 세잔.

'겸손하고 위대한' 피사로 - 세잔은 자신에게 늘 조언을 아끼지 않은 피사로를 그렇게 불렀다 - 의 지도를 받으면서 세잔의 팔레트는 눈에 뛸만큼 밝은 색으로 바뀌었다. 위는 피사로의 <퐁투아즈에 있는 집들>, 아래는 세잔의 <메당의 집>(1879~1881경).

1874년 제1회 인상파 전시회 개최를 추진하기 위해 화가, 조각가, 판화가 등 무명 예술가 30여 명으로 모임이 결성되었다. 유명한 사진가인 나다르(펠릭스 투르나숑)가 자신이 사용하던 카퓌신 35번가의 스튜디오를 빌려 주었다. 세잔의 강렬한 그림이 관람객에게 혐오감을 줄지도 모른다고 동료들이 우려했지만, 피사로는 세잔의 그림을 꼭 출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네도 세잔을 편들어 주었다.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는 유사한 특징이 발견되지만 <오베르쉬르우아즈에 있는 목매 죽은 사람의 집>(1872~1873)은 다른 개성을 담고 있다. 그림의 구성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 선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고, 지붕, 벽, 언덕은 삼각형 모양이다. 이곳저곳에 짙은 물감이 팔레트 나이프로 발라져 있다.

 

"자네는 이런 시간에 나보고 그 <현대판 올랭피아> 얘기를 하라는 건가? 흑인 하녀가 쪼그리고 누운 추악한 여자의 몸에서 베일을 걷어 내는 광경을 넋놓고 쳐다보는 저 한심한 친구! 혹시 자네는 마네의 <올랭피아>를 기억하나? 그 작품은 이 세잔이라는 사람의 작품에 비하면 데생, 정확도, 마무리 등이 탁월한 걸작이지."

루이 르루아

《르 샤리바리》 1874년 4월 25일

<현대판 올랭피아>의 두번째 그림(위, 1873경), <현대판 올랭피아>의 첫번째 그림(아래, 1867경), 마네의 <올랭피아>(가운데, 1863).

1880년경의 세잔(위)과 <세 명의 목욕하는 여자>의 습작(아래, 1895경).

 

"붓이나 연필을 한 번도 잡아 보지 않은 사람들이그가 데생을 할 줄 모른다고 말한다. 또 그림이 부정확하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정확한 것이 아니라 고도의 기술을 통해 얻어진 세련됨이다."

조르주 리비에르

《랭프레시오니스트》 1877년 4월 14일

열광적인 미술작품 수집가인 빅토르 쇼케(위, 1877경)에게 보낸 1866년 5월 11일자 편지에서 세잔은 그를 존경한다고 말한 다음 자기는 야외작업에 매력을 느낀다고 털어놓았다. "우리 둘 다 들라크루아를 좋아한다는 점을 하나의 매개로 하여 감히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처럼 놀랍고 안정된 지성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 지성은 당신에게 얼마나 많은 목표를 달성하게 해주었단 말입니까! …… 그러나 나는 그런 행운을 타고난 것 같지 않습니다. …… 그것말고는 나에게 특별한 불만이 없습니다. 자연의 광대무변한 울타리인 하늘은 늘 나를 매혹시킵니다. 그것을 쳐다볼 때마다 기쁨에 잠깁니다." <자 드 부팡의 풀장>(아래, 1878~1879경).

고갱은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의 그림을 수집하여 오노레 도미에와 조앙 바르톨트 종킨트 옆에 걸어 놓았다. 고갱은 세잔의 작품도 석 점 갖고 있었다. 이들 중 하나인 <커피포트가 있는 정물>(1880경)은 고갱 자신의 그림 <여인 초상>(1890)의 배경에도 등장한다. "세잔의 이 정물화는 내가 갖고 있는 보물 중의 보물이야. 내가 빈털터리가 되더라도 이 그림은 갖고 있을 거야." 고갱은 1888년 6월에 친구 에밀 슈페네케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수프 그릇이 있는 정물화>(위)는 1877년경 퐁투아즈에 있는 피사로의 집에서 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평범하고 둥근 정물 위로 쏟아지는 빛은 정교한 반사광으로 처리되어 있으며, 그림자는 거의 생략되었다. 당시 루브르 박물관은 샤르댕의 위대한 정물화 열 점을 사들였는데, 이 그림은 샤르댕의 정물화를 연상시킨다. 샤르댕의 <은제 술잔>(아래).


"나는 내가 주위의 화가들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에 대한 이런 확신감은 오랜 각고 끝에 얻어진 것입니다. 나는 물론 열심히 일하지만 세련된 것을 만들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세련된 것은 바보들이나 좋아하는 것이지요. 보통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은 쟁이들의 기교의 결과물에 불과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그림은 예술적 가치가 부재하는 속된 것입니다. 나는 나의 비전을 달성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지식과 진설을 신장하는 즐거움이 잇기 때문입니다."

세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1874년 9월 26일

오베르의 파노라마적 풍경을 그린 작품(1873~1875).


"이곳의 햇빛은 정말 기가 막힙니다. 모든 물체가 마치 실루엣으로 축소되어 버리는 느낌입니다. …… 오베르 출신의 풍경화가들이 이리로 내려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세잔

카미유 피사로에게 보낸 편지 1876년 7월 2일. 에스타크

<마르세유와 마리섬>(1882경).

<라크루아 신부의 집>은 제작년도(1873)와 서명이 분명하게 들어 있는 몇 안 되는 그림 중의 하나이다. 세잔은 약 20점에 서명을 했고 약 10점에 제작년도를 적어 넣었다. 이것이 세잔 작품의 정확한 제작년도를 결정하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이다.

<맹시의 다리>(1879).


"다리를 그림 한가운데 놓고 이어 다리 옆에다 두 개의 아치를 구도의 요소로 삼은 다음, 마지막으로 앞에다 나무를 배치해 다리의 전경으로 삼았다. 왼쪽의 아치는 물에 강렬하게 어리면서 앞으로 튀어나와, 다리와 나무의 두 공간을 연결시켜 준다. 이러한 구도적 균형은 변하고 있는 듯한 물빛으로 더욱 단단하게 뒷받침되고 잇다. 물빛의 한가운데가 짙은 초록이지만 양옆은 옅은 갈색을 띠고 있음도 주목할 만하다. 다리 위쪽의 잎새 처리도 인상적이다. 세잔은 모자이크 같은 터치로 녹색과 흰색을 다양하게 변조시켜 마치 물방울이 퍼지는 듯한 빛의 효과를 이룩해 내고 있는데, 이것은 세잔이 인상파 수법에 정통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렇게 하여 세잔이 자연에서 느낀 풍성함과 여러 선들이 잘 어우러져 절묘한 회화적 공간이 창조된다. 그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화가의 정서적 긴장을 '경험'하게 ('보는' 것이 아니다) 해준다. ……이 그림은 인상주의가 획득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개척하고 있으며, 노대가(老大家, 15세기와 18세기 사이에 배출된 대가들)의 권위와 세잔 시대의 새로운 광학(光學)이 잘 결합된 찬연한 금자탑이다."

리처드 베르디

《세잔》(1992)

<맹시의 다리>

"세잔은 사전에 깊이 생각하지 않은 붓질을 단 한 획도 한 적이 없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할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사람의 눈을 시원하게 하는 절묘한 색채감으로 사물의 본질을 구성하는 색채의 마술사였다,"

에밀 베르나르

《폴 세잔에 대한 회상》(1921)

세잔은 절대로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화상을 그렸으며, 심리를 표현한다기보다는 외형적 리얼리티를 추구하려고 노력했다. 두번째부터 아래로, 1880년, 1875년, 1877~1878년에 그려진 자화상. 맨 마지막 작품은 한때 피사로가 소장했다.

 

제3장

자연과 평행한 조화

 

 

 

"그림의 올바른 길을 찾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네." 세잔은 1879년 9월 24일 졸라에게 털어놓았다. 인상파 수법을 7~8년 시험한 끝에 세잔은 반사광과 색채의 그림자에 대한 분석을 최대한 해보았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1880년경부터는 세잔의 작품에 인상파의 수법과 다른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것이 과거의 수법과 갑작스런 결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수채화로 그린 <화분>(아래, 1883~1887>. 유연한 꽃줄기와 미동하는 듯한 빛이 나란히 늘어선 화분의 균일감을 깨뜨리고 있다. 세잔은 수채화에서 새로운 표현수단을 발견했다. 세잔 이전의 프랑스 화가 중에서 세잔처럼 수채화를 잘 활용한 화가는 몇 되지 않는다. <정원에 앉아 있는 세잔 부인>(위, 1879~1882).

<나무와 집>(위, 1885~1887)의 밝고 옅은 물감칠과 미묘한 색조는 수채화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검은 나뭇가지들이 확 트인 밝은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이 그림의 구성은 세잔의 작품 중에서도 돋보인다. 미술학교 선생이던 질베르에게 배운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풍경화를 그려 볼 생각이었을까? 아래는 <나무와 지붕>(1882~1883경).

세잔은 자 드 부팡에서 평화와 정적을 얻었다. 그는 그 건물(<자 드 부팡의 저택과 농가>, 1885~1887경). 멋진 호수, 공원, 나무 등을 4계절 내내 그렸고, 정원에서는 농부들과 인부들이 모델을 서 주었다. 세잔의 어머니가 사망한 지 2년째 되던 1899년 이 집은 세잔 누이의 강권으로 매각되었다. 세잔은 이사를 가기 전에 소지품을 대부분 불태워 버렸다.

<에스타크에서 본 마르세유만>(위, 1879경). <에스타크만>(아래, 1879~1883).

 

"남프랑스의 바다풍경,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푸른 바다, 울퉁불퉁한 바위산, 뜨거운 열기 속에 몽롱하고 나른해 보이는 사물, 강한 구도를 갖춘 해변들이 아주 솔직하고 세밀히 묘사되어 있다."

귀스타브 제프루아

《르 주르날》 1894년 2월 1일

<에스타크와 샤토 디프의 풍경> (1883~1885).

세잔은 종종 넓게 펼쳐진 풀경의 전경에 외딴 나무를 돌출시키곤 했다. 여기 <커다란 소나무>(1885경)에서는 나무가 화폭을 거의 다 차지하여 풍경을 가리고 있다. 가지들 사이로 땅과 하늘을 구분하기도 쉽지 않다. 세잔은 이 그림에서 나무껍질, 잎새, 땅빛깔 등을 자세히 묘사하지 않는다. 수채화에서처럼 선영(線影)이 드러나는 비스듬한 붓질로 풍경화에 일체감을 주고 있다. 수직축과 수평축이 교차하는 부분에 많이 구사된 노랑색은 나무를 실제보다 더 커 보이게 해준다. <생트빅투아르산>과 같은 장대한 구도는 없지만, 세잔이 시골풍경화에 종종 부여한 종교적 분위기가 그대로 배어 나오고 있다.

<부엌의 정물>(1888~1890)에 나오는 사물들은 두 개나 세 개 시점에서 바라본 모습들이다.

 

"천재 세잔은 그림의 전체적 구도를 재배열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전체로서의 그림을 보면 원근법의 왜곡이 더 이상 왜곡되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림이 하나의 정상적 비전을 획득하여, 새로운 질서가 그 안에서 탄생하고 또 그림 속의 사물은 지금 막 우리들 눈앞에 나타나 한데 집합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모리스 메를로 퐁티

《센스와 넌센스》(1948)

<푸른 화병>(1885~1887)은 세잔의 중기 그림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다. 이 그림 속에서 서로 아무런 연관이 없는 상징적 사물들로 이루어진 구성은 놀라운 회화적 공간을 창출하고 있다. 오른쪽에 있는 선은 문인지 혹은 벽지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색채는 캔버스에 통일성을 부여하면서 그림자 부분마저도 밝게 해주고 있다. 빛의 방향은 의도적으로 무시되고 있다.

사과와 비스킷

완숙기에 그려진 단순한 그림 중의 하나인 <사과와 비스킷>(1879~1882)은 평온기에 제작되었음을 알려 주는 특징을 잘 드러낸다. 궤짝 위에 올려놓은 접시 하나와 사과들은 완벽한 구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수채화의 뉘앙스를 풍기는 섬세한 색감(色感, 비스킷은 분홍, 접시는 연한 청색), 교묘하게 꾸민 단순함, 정물 주변의 절묘한 공간처리 등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이 정물화는 프랑스 화가 루뱅 보갱, 스페인 화가 프란치스코 드 주르바란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세잔이 이들 화가의 정물화를 보았을 것 같지는 않다.

유년시절의 사과

사과는 세잔의 스타일 실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가 정물화의 소재로 늘 사과를 선택했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세잔에게 사과는 전통적인 성애의 상징 이외에도 유년의 투쟁을 나타내는 사물이었다. 학생 시절 동급생인 졸라가 학생들에게 놀림당하는 것을 도와 주었던 세잔은, 졸라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사과를 건네받았던 것이다. 세잔은 훗날 사과 정물화를 많이 그렸다. 그는 "사과로 파리를 정복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사소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사과를 그려서 유명한 화가가 되겠다는 뜻이리라. 그림은 <테이블 위의 정물>(1883~1887)이다.

메당의 저택 서재에 앉아 있는 졸라. 1897년경에 찍은 사진.

세잔은 여러 화가들에게 지중해의 햇빛을 발견하도록 권했다. 에스타크에 있던 세잔은 모네, 르누아르, 그리고 조르주 브라크, 라울 뒤피들의 방문을 받았다. <에스타크에서 본 마르세유만>(위). <자화상>(아래, 1880).

에스타크의 바다

세잔이 에스타크 바다말고 다른 바다를 그린 적은 거의 없다(이 그림은 1883~1886년에 제작된 그림). 그러나 에스타크의 산업화가 촉진되자,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그는 이곳을 찾지 않았다. 세잔은 1902년 9월 1일 대녀(代女)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에스타크 해변은 한때 대단히 아름다웠지. 그러나 진보라는 괴물이 이 고장에도 닥쳐왔어. 그 두 발 달린 동물은 아름다운 해변을 기괴한 부두로 바꾸어 놓았는데, 그러고도 부족했는지 가스등을 달았고, 더욱 한심하게도 전등을 달았어.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세상이 되었어!"

모네나 시슬레가 그린, 햇빛 속에 반짝이는 포플러에 비교해 볼 때, 세잔의 포플러는 청동처럼 부동(不動)하는 견고함을 간직하고 있다. 음영 속에서 보이는 이 미묘한 밝음은 1885~1890년 사이에 그려진 웅장한 풍경화의 특징이다. 이들 풍경화에서 세잔은 푸생의 영웅적 풍경화가 갖고 있는 시적 평온함을 획득한다. 위에서부터 세잔의 <포플러>(1879~1882), <포플러>(모네, 1891), <루앵 인근의 모레>(시슬레, 1892).

생트빅투아르산은 시나이, 타보르, 올림피아 등과 어깨를 겨루는 성산(聖山)이 되었다. 생트빅투아르라는 이름(그 기원은 불분명함)부터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생트빅투아르산을 그린 이 그림은 1885년경에 제작되었다. 전경에 외로운 소나무를 배치한 구성은 풍경 전체에 깊이를 주기 위한 것으로서 파격적이면서도 대담하다.

<생트빅투아르 산>(위, 1882~1885) <생트빅투아리 산>(아래, 1885~1887).


"르톨로네 마을에서는 그 산이 보인다. 민둥산이기 때문에 색채라기보다 한줄기 섬광이 지나가는 흑백의 산일 뿐이다. 어떤 때는 그위에 떠 있는 구름이 산과 혼동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정반대이다. 그 멋진 산은 일견 보기에 하늘에서 갑자기 솟아난 것 같은 느낌이다. 태곳적에 석화(石化)된 듯한 연속되는 습곡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어쩌면 산밑둥에서 수직으로 솟구쳐 오르는 바위절벽이 지닌 동세(動勢)는 이런 감상을 더욱 강화해 준다. 생트빅투아르는 산과 똑같은 색깔의 하늘에서 흘러 내려와, 아니 우주공간에서 솟아 나와 거대한 암석덩어리로 굳어 버린 듯한 느낌을 준다."

페터 한트케

《생트빅투아르산의 교훈》(1980)

 

분명하고 단순한 양감(量感)을 보여 주는 세잔의 오르탕스 피케의 초상화는 입체파 화가들에게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움직이는 인물이 등장하는 <마르디 그라>(두번째, 1888)는 1870년 이후의 작품경향으로 볼 때 희귀한 그림이다. 세번째 스케치는 <마르디 그라>를 위한 습작이고, 네번째는 <커피포트와 여자>(1890~1895)이다. <온실 속의 세잔 부인>(첫번째, 1891~1892)은 오르탕스 피케를 그린 유명한 그림으로, 오르탕스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이 미완성 작품 속에서 더욱 돋보인다.

세잔의 자화상은 그의 초상화 중에서 가장 생기빌랄하고 가장 적극적이다. <자화상>(첫번째, 1895경). 두번째부터 <부드러운 모자를 쓴 자화상>(1890~1894), <중산모를 쓴 자화상>(1883~5), 한때 드가가 소장했던 <자화상>(1879~1882).

<다섯 명의 목욕하는 여자>(1879~1882>. 파블로 피카소가 한때 이 그림을 소장했다.

<목욕하는 남자들>(1890~1894)

 

제4장

"이제 약속의 땅이 보입니다"

 

세잔은 오로지 내적 확신만을 길잡이삼아 멀고 험한 길을 걸어왔다. 그는 많은 장애를 극복했고 그의 작품은 회화사에 새 지평을 열었다. 세잔은 1903년 1월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에게 수줍게 고백한다. "저는 약간의 진경(進境)을 개척했습니다. 그렇지만 왜 이렇게 많은 시간과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까? 예술은 순수한 마음을 완전히 바쳐야만 그 결실을 볼 수 있는 사제직 같은 것입니까?"

 

정물화, 인물화, 풍경화 가릴 것 없이 세잔은 자신의 모티프를 재치 있고 자유롭게 처리했다. <앉아 있는 발리에>(위, 1906년), <정물 : 사과, 배, 그리고 그릇>(아래, 1900~1904).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초상>(아래, 1899)과 볼라르의 화랑에서 1898년에 개최된 세잔 개인전시회의 카달로그(위).

세잔은 정물화의 대상으로 과일이나 병 같은 간단한 사물을 골랐고 정물의 부동상태에 움직임과 유연을 주기 위해 식탁보를 배치하곤 했다. <양파가 있는 정물>(첫번째와 세번째, 1895경)의 부분, <사과와 오렌지>(두번째와 네번째, 1895~1900경)의 부분.

수욕도 시리즈를 그리던 시기에 카드놀이하는 사람이라는 주제에 그토록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야외에서 실루엣 처리되어 마치 사람이 아닌 듯 보이는 <수욕도>의 등장인물과는 달리,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은 집중된 표정과 밀폐된 공간에서 서로 마주앉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카드놀이하는 사람>(위, 1890~1892)은 필라델피아에 있는 반스재단의 소장품으로 세잔의 소장품으로, 세잔의 그림 중 가장 큰 것 가운데 하나이며, 강한 집중과 긴장을 전해 준다. 훨씬 평온한 느낌을 주는 아래의 <카드놀이하는 사람>(1890~1892)은 뉴욕메트로폴리탄 예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등장인물들 간의 대치상황이 훨씬 완화되어 있다.

<카드놀이하는 사람> 시리즈에서 세잔은 무의식적으로 아버지와의 투쟁, 아니면 자기 자신과의 투쟁을 표현하려 하지 않았을까? 카드는 화가 세잔의 무기와 작업을 상징한다고 생각되어 왔다. 그 당시 미술평론가들의 용어로 보나, 게르부아 카페의 테이블에서 흘러다녔던 말로 보나, 카드는 마네와 인상파 화가의 단순화된 스타일과 평면구성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 석 점의 <카드놀이하는 사람>-두 점은 1890~1895년 사이에 제작(첫번째와 두번째)되었고 나머지 하나(네번째, 세번째는 부분 확대)는 1890~1892년에 제작되었다-은 두 명의 대결구도로 구성을 축소했다.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그리고 잇는 이 석 점의 그림은, 쓸데없는 배경을 생략한 가운데 자유분벙한 기법과 단호한 붓질을 통한 색채처리를 보여 준다.

<사과와 오렌지>(위, 1895~1900경), <양파가 있는 정물>(가운데, 1895경), <큐피드 석고가 있는 정물>(아래, 1895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