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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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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 로댕 - 신의 손을 지닌 인간


엘렌 피네 지음 / 이희재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36


082

시156ㅅ  31


시공디스커버리 총서 31


현대의 미켈란젤로, 조각의 거장이란

화려한 말이 뒤따랐던 천재 조각가 로댕.

그가차가운 조각들 속에 인간의 고뇌와 열정, 애증을

그대로 담을 수 있었던 것은, 로댕 자신이 너무도

열정적이고 감성적이었기 때문이다. 제자 카미유 클로델과의

복잡하고도 열렬한 연애조차 뛰어난 천재성의

상징으로 용납될 만큼 극도의 추앙을 받았던 로댕은,

20세기 현대 조각의 창조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별의 순간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이 남자들이

어떻게 여행을 시작했는가를 생생히 표현했으며,

각자의 가슴이 삶의 기억으로 가득 차

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기억을 짊어진 채 이제 유서 깊은

도시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지푸라기처럼 버릴 각오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눈앞에 나타난 여섯 사내는 비슷한 두 형제를

제외하고는 생김새가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스스로 그러한 결정을

내렸으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고 있었다. 그것은 생에 매달리려 하는

육신의 고통을 이겨내고 영혼의 길을

따르는 삶이었다……."

"그는 팔을 축 늘어뜨린 채

세월의 무게게 지친 듯

무거운 걸음을 옮겨 놓는

노인을 만들어 냈다. ……

그는 열쇠를 든 사내를

깎아 냈다. 사내 안에는

아직 살아야 할 숱한 세월이

남아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은

갑작스럽게 다가온 이 마지막

순간으로 응축되어 있었다.

…… 그는 정신을 집중하려는

듯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고독을 맛보려는 듯이, 숙인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쥔 남자를 창조해

냈다. 그는 두 형제를 다듬어 냈다.

한 사람은 뒤를 돌아보고, 또 한

사람은 굳은 결심을 한 듯 아니면 다

체념하고 사형집행인에게 이미

목숨을 내놓은 듯 고개를 떨구고

있다."


"그리고 그는 '막 생명이

빠져 나가는'

남자(귀스타브

주프루아)의 수수께끼

같은 몸짓을 만들어 냈다.

발걸음을 뗀 그는

다시 한번 고개를

돌린다.

도시가

아니라.

눈물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동료들이 아니라,

스스로를

마지막으로

돌아보기

위해서……."


"이 손짓은 모든 불확실성, 아직

도래하지 않은 행복, 이제부터

헛되이 기다려야 할 슬픔, 어디에

살고 있을지 모르나 그가 언젠가

만나야 할 사람들, 미래와

그 이후의 모든 가능성. 늘

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리라.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종착점에서

고요히

찾아오리라 믿었던

죽음 이후의 모든

가능성을 놓아 버리고

있다."


차례


제1장 타고난 예술가

제2장 배고픈 시절

제3장 걸작, 또 걸작

제4장 새로운 인간

제5장 명성

기록과 증언

참고문헌

그림목록

찾아보기


로댕 Rodin, les mains du genie


엘렌 피네 Helene Pinet

1976년부터 로댕 박물관 사진부 큐레이터로 활동하기 시작한 엘렌 피네는, <로댕의 사진들>을 비롯해 <로댕> <조각가> <그 시대의 사진들>과 같은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옮긴이 : 이희재

서울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였고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26번 <마티스>와 30번 <고갱>이 있으며, 그의 <말하기의 다른 방법> <포크는 왜 네 갈퀴를 달게 되었나> <꿈과 상상의 여행> <추적> 등이 있다.


제1장

타고난 예술가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는 위대한 인물이지만 우리는 그들과 능히 겨룰 수 있다.' 너는 이렇게 말했지. 우리가 환상으로 충만한 별세계에 살고 있던 그 무렵에 말이야. 그때 우리는 구름 사이로 빠끔 공간이 열리면서 우리 머리 위로 쏟아지던 햇무리를 볼 수 있었어. 너는 그때 잠시 숨을 멈추고는, 저 암흑을 꿰뚫고 스무 살 청년 앞에 어떤 운명이 가로놓여 있는지 알아내고 말겠다고 말했지."

조각가 레옹 푸르케

젊은 로댕(1862경, 아래), 위는 프랑수아 비아르가 그린 <4시의 살롱>.

에콜 데 보자르는 새로운 조류에 적대적이었다. 그곳에 입학하려면 여러 단계의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일단 입학을 한 뒤에도 학생들은 학기마다 재입학을 허락받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으며, 시험결과에 따라 자리를 배정받았다. 6개월마다 치르는 시험에 무난히 합격한 학생들도 시험성적에 따라 데생 시간에 앉는 자리가 달라졌다. 성적이 안 좋은 학생은 한 학기 내내 모델의 등만 보고 데생을 해야 했고, 시험에서 메달을 딴 사람만이 영구 지정석에 앉을 수 있었다. 위는 앙리 제르베가 그린 <그림 심사위원들>이다.

이 자화상은 로댕이 가게 창문을 깨뜨리면서 넘어진 1859년 이전에 그려졌음에 틀림없다. 이 사고로 남은 커다란 흉터를 로댕은 수염을 길러 감추었다, 로댕의 전기작가인 쥐디트 클라델은 이렇게 쓰고 있다. "수줍어하는 젊은이의 이목구비에서 무의식적인 자기확신이 얼마나 강하게 풍겨 나오고 있는가! 수염을 기르지 않은 어린아이에 가까운 얼굴, 곧은 콧날, 가슴속에 묻어 둔 결코 흔들리지 않는 결심을 드러내는 듯 반듯하게 다문 입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포물선을 그리며 한곳으로 모인 그의 눈썹은 결코 느슨해지지 않을 활시위처럼 팽팽한 긴장을 보여 주고 있다.

위와 비슷한 확고함은 로댕이 1959년에 제작한 아버지의 흉상에도 나타난다. 흉상에는 로마의 원로원 의원을 연상시키는 범접키 어려운 위엄이 서려 있다.

로댕과 마리아(이 사진은 1859년경에 촬여한 것이다)는 무척 사이가 좋앗다. 그녀는 로댕의 정신적 지주였으며 누구보다 로댕의 예술가적 자질을 확신했기 때문에 부모님 앞에서는 동생의 방패막이가 되어 주엇다. 신앙심이 깊었던 누이는 자식으로서의 책무와 종교적 자세에 대해서도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성령회를 창시한 에마르 신부는 신출내기 수사가 수도원 뜨락의 광에서 작업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로댕 앞에서 모델로 섰던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에마르 신부도 흉상에 표현된 자신의 모습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는 이마 위로 말려 올라간 머리 터럭이 꼭 악마의 뿔 같다고 불평했다. 로댕이 흉상을 들여다보고 있다.

 

제2장

배고픈 시절

 

"생활을 꾸려 나가기 위해서는 이 일 저 일 가릴 형편이 못 되었다. 나는 청동을 마무리했고 대리석과 돌을 다듬었으며 은(銀)세공장에서 장신구와 보석을 깎았다. 역작을 만드는 데 쏟아 부었어야 할 노력을 그렇게 엉뚱한 곳에다 분산시켜 허비한 시간이 못내 아쉽다. 그러나 생활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오귀스트 로댕

 

 

1864년의 로댕.

 

알베르 에르네 카리에 벨뢰즈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진 <거인족의 항아리>는 사실 로댕의 작품이다.

"나의 모델은 도시 여자의 우아함은 갖고 있지 않았지만 농부의 딸다운 활기 넘치는 육체와 단단한 살집을 갖고 있었다. 그녀의 활발하고 솔직하며 강인한, 왠지 남성적인 분위기가 오히려 여체의 아름다움을 살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왕 말이 난 김에 한마디만 더 보태자면, 그녀는 언제라도 나에게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를 위해 평생 그렇게 살았다." 로댕은 평생의 반려이며 모델인 로즈 뵈레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녀는 <꽃모자를 쓴 젊은 여인>(위)과 <미뇽>(아래)의 주인공으로 오인받아 왔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살롱전에서 처음으로 참가하면서 로댕은 카탈로그에 자신을 '바리예와 카리에 벨뢰즈의 제자'로 소개했다. 카리에 벨뢰즈는 싸구려 골동품을 만들어 내는 작가로 무시당했지만 실은 재능 있는 도안가이며 조형가였다. 그는 대형 조각물의 값싼 아연 소형 복제품부터 정교한 장식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을 대량 생산하기 위한 기술혁신을 감행했다.

때때로 로댕은 한 장의 종이 위에 고대 조각을 본딴 데생, 중세 미술이나 미켈란젤로를 모사한 습작을 뒤죽박죽으로 그려 넣었다. 그의 작품에 깃들인 창조력의 열쇠를 여기서 일부 찾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미지들의 관계가 항상 뚜렷한 것은 아니다.

<청동의 시대>를 위해 포즈를 잡은 오귀스트 네트(위). 문제의 석고상(가운데). 훗날 프랑스 정부가 구입한 청동상(아래).

 

"(코가 주저앉은 남자.가 얼굴에서 무엇을 찾아낼 수 있는지 보여 주었다면, <청동의 시대>는 로댕이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육체를 다룰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세례 요한>(위)과 <걸어가는 남자>(가운데와 아래).

 

"어느 닐 아침 누군가 작업실 문을 두드렸다. …… 모델이 되겠다고 아브루치에서 나를 찾아온 농보였다. …… 나는 그이를 보는 순간 확고한 믿음을 가졌던 예언가 세례 요한을 떠오렸다. 사내는 옷을 벗은 다음 회전대 위에 올라섰다. 지금까지 한 번도 포즈를 잡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두 발로 굳게 버티면서 머리를 들고 상체를 곧게 폈다. 컴퍼스처럼 벌어진 두 다리가 몸무게를 똑같이 받쳐 주고 있었다. 그 솔직담백한 자세가 너무나도 마음에 들어서 나는 소리를 질렀다. '바로 걷는 사람의 모습이로군!' 나는 그이를 당장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오귀스트 로댕


제3장

걸작, 또 걸작


"한순간 관능에 따르는 고통을 보여 주는가 싶으면, 다음 순간 그는 관능을 찬양한다. 그는 삶의 고통, 죽음의 공포, 지옥 그 자체의 공포를 표현할 줄 알았다. <칼레의 시민>에서 그는 역사를 대변했고, <빅토르 위고>에서는 자연성의 요란한 분출을 표현했으며, <발자크>에서는 인간의 다면성을 보여 주었다."

미술평론가 옥타브 미르보

뫼동에 있는 로댕의 작업실. 릴케는 이렇게 썼다. "수천 개의 작품 사이를 거닐다 보면…… 창조주의 두 손에로 이끌리게 된다."

<지옥문>을 위한 최초의 구성. 문이 여덟 개의 패널로 구분되어 있는 것은 피렌체의 교회에서 본 로렌초 기베르티의 문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로댕은 건축적 구성논리보다는 형태적 연결성을 중시하게 되었다.

<지옥문>을 위한 습작(점토 습작).

<지옥문>을 위한 데생.


"밀착된 부분이 늘어날수록 두 몸뚱이는 유기적으로 가까운 화합물처럼 불 같은 충동으로 서로에게 파고들었다. 그들이 엮어 낸 새로운 결합은 아주 긴밀하게 녹아들면서 하나의 유기적 전체를 이루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릐 얼굴은 평범했다. 두툼한 코, 혈색이 안 좋은 눈꺼풀 밑으로 반짝거리는 눈동자, 길게 늘어뜨린 누런 구레나룻, 짧게 깎아서 뒤로 빗어 넘긴 머리카락, 둥그스름한 머리, 그 머리는 그가 전잖으면서도 만만치 않은 고집의 소유자임을 암시하는 듯했다. 내가 상상하는 예수의 사도들에 딱 부합되는 인물이었다."

쥘과 에드몽 드 공쿠르 《일기》. 1878년 4월

<지옥문>의 석고상.


지옥문

"그는 자기 손보다 클까 말까 한 수백 점의 인물상에 인생의 모든 정념, 온갖 쾌락의 절정, 갖가지 악의 무거운 짐을 담아 냈다. 그는 온몸을 비벼대며 동물처럼 바짝 달라붙어 이빨을 드러내고 서로의 몸을 깨물면서 한 마리의 짐승처럼 뒤엉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육체들을 창조했다. 그 육체들은 얼굴처럼 귀를 기울이고, 무언가를 집어 던지려는 팔처럼, 육체의 사슬처럼, 화환과 덩굴손처럼 뻗어 나가고 있다. 고통의 뿌리로부터 악의 즙이 솟아오르는 인간들의 군상이 거기 있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옥문>의 왼쪽 상인방.

<세 망령>.

<추락하는 사람>.

<돌아온 탕아>.

<사랑의 도피>.

생각하는 사람

"그는 말없이 생각에 잠긴 채 앉아 있다. 그는 행위하는 인간의 모든 힘을 기울여 사유하고 있다. 그의 온몸이 머리가 되었고 그의 혈관에 흐르는 피는 뇌가 되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브>(첫번째)의 모델이던 이탈리아 여인이 임신중이어서 로댕은 작품을 끝없이 수정해야 했다. 자식들을 집어삼키는 <우골리노>(두번째). <아담>(세번째)과 <이브>의 거대한 형상은 <지옥문>을 장식했다. <한때는 투구 제작자의 아리따운 아내였던 여인>(네번째).

1887년의 로댕.

 

"뛰어난 흉상은 모델의 도덕적, 육체적 현실을 드러내고 내밀한 생각을 표현하며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장점과 약점을 파고든다. 모든 가면이 벗겨진다. …… 예술가는 순전히 감수성에만 의존해 계몽가, 예언가가 된다."

오귀스트 로댕

빅토르 위고의 동상(위)과 에칭(아래)이다.

 

"모델 앞에서 나는 마치 초상화를 그릴 때와 같이, 진실을 그대로 옮기고자 하는 욕망에 휩싸여 작업한다. 나는 자연을 수정하지 않으며 나 자신을 모델 안에 집어 넣는다. 모델이 나를 이끈다. 나는 오직 모델을 통해서만 작업할 수 있다. 인간의 형상은 나를 강화시키고 나에게 자양분을 준다."

오귀스트 로댕

5년간 카미유 클로델과 한 작업실에서 일하면서 로댕은 갖가지 문제에 조언을 주었으며 그녀를 모델로 쓰기도 했다.

<칼레의 시민>에 등장하는 한 인물의 손이 붙어 있는 카미유의 석고 흉상(위). <사색>(아래)에 대해 릴케는 "돌의 무거운 잠에서 서서히 솟아오르는 삶을 바라보는 초월적인 시선"이라 평했다.

욕망과 순결이 함께하는 포옹

"남자는 고개를 숙였고 여자는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입은 두 존재의 내밀한 합일을 봉인하는 입맞춤 속에서 만난다. 입술과 입술의 만남으로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 이 입맞춤은, 비범한 예술의 마법을 통해, 그 사색적인 표현에서뿐 아니라 목덜미에서 발바닥까지 두 사람의 온몸을 똑같이 관통하는 전율 속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모든 뼈와 근육과 신경과 살이 구부러지고 펼쳐지고 부풀어오르면서 숭고하게 다가오는, 남자의 등을 이루는 모든 섬유질 속에서, 연인의 다리를 부비기 위해 움직이려는 듯 서서히 뒤틀리는 남자의 다리 속에서, 열정과 교태에 휩쓸려 자신의 존재 전부를 들어올리고 있는 바닥에 닿을락말락 한 여자의 발 속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귀스타브 주프루아

카미유의 재능을 파악한 로댕은 이렇게 단언했다. "나는 그녀에게 황금밭을 알려 주었지만 그녀가 발견한 황금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다." <오로라>(위)는 카미유를 모델로 해 만들어졌다. 작업중인 카미유(아래).

"여자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잇다. 너그러움, 자부심, 참을성을 담은 표정으로 여자는 남자를 내려다본다. 남자는 꽃밭에 파묻힌 듯 여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그 역시 무릎을 꿇고 있지만 여자보다 훨씬 더 밑으로 돌을 파고들엇다. 그의 손은 쓸모 없는 공허한 물건처럼 뒤로 뻗어 있다. …… 이 작품 안에는 어딘지 연옥의 분위기가 살아 있다. 천국은 가깝지만 아직은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옥 또한 가까워 아직은 완전히 잊혀지지 않았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영원한 우상>에 대해

옷을 입지 않은 상태의 '장 데르'.

14세기의 기록은 이렇게 전한다. 1347년 칼레시를 포위한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는, 칼레시의 중요 인사 여섯 명이 모자와 신발을 신지 않고 목에 밧줄을 두른 채 칼레시와 성곽의 열쇠를 들고 시를 떠난다는 조건으로 시민들을 살려주겠다고 약속했다. 로댕이 제시한 최초의 소형 모형은 군상으로 제작되었다.

칼레의 시민

'피에르 당드리외'의 누드 점토모형을 다듬고 있는 로댕(위). 옷을 입힌 '외스타슈 드 생피에르'의 점토 모형(아래). 로댕은 자주 편지를 띄워 칼레시장에게 작업의 진척사항을 알렸다. "누드상, 다시말해서 의상 아래 부분은 모두 끝냈습니다. 비록 옷에 가려 눈에 보이지 않기는 하지만, 이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란 걸 아마 나중에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제4장

새로운 인간


"만일 진실이 몰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것이라면 후세인들은 나의 <발자크>를 파괴할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영원한 것이므로, 나는 나의 작품이 받아들여지리라 장담할 수 있다. 사람들이 비웃는 이 작품, 마음먹은 대로 부수기가 여의치 않으니까 기를 쓰고 조롱하는 이 작품은, 나의 필생의 역작이며 미학적 동력이다. 이것을 창조한 날부터 나는 새로운 인간이 되었다."

오귀스트 로댕

살롱전에서 거부당한 발자크 상이 뫼동의 정원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발자크의 두 모습.

1914년 2월의 로댕.


"여러 해 동안 로댕은 이 인물에게 온통 빠져들었다. 그는 발자크의 고향을 방문해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투렌의 풍광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그는 발자크의 편지를 읽었으며 발자크의 초상화를 연구했다. 그리고 발자크의 작품을 꾸준히 여러 번 반복해 읽어 나갔다. ……발자크의 정신에서 자극을 얻은 로댕은 차츰 작가의 외관을 다듬어 나가기 시작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형태에서 형태가 나오듯이 로댕의 구상은 서서히 무르익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발자크를 보았다. 그는 힘차게 앞으로 내딛는 당당한 체구의 소유자로서 육중한 몸집이 늘어진 외투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굵은 목덜미까지 내려왔으며 풍성한 머리털 속에서 자신의 창조적 열정으로 끓어오르는 얼굴. 자신의 구상에 매혹된 얼굴이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얼굴은 근본적인 힘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생산적인 힘으로 넘쳐흐르는 발자크, 시대를 창조하고 숱한 운명을 쏟아 낸 사람의 얼굴이었다. …… 그것은 강한 집중력과 비장감이 엄습한 순간에 로댕이 본 발자크의 모습이었다. 로댕은 그 모습을 충실하게 살려 나갔다. 로댕의 구상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발자크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자세로 서 있게 될 것이다. 두 발은 약간 벌린채 팔짱을 끼고 있다. 그는 허리띠가 달려 있지 않은, 바닥까지 내려오는 긴 가운을 입게 될 것이다."

발자크를 옹호하는 진영에는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위), 화가 클로드 모네 같은 쟁쟁한 작가와 예술가가 많이 가담하고 있었다. 모네는 로댕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실컷들 떠들라고 하십시오. 당신은 전무후무한 업적을 쌓았으니까요." 논쟁은 예술의 영역을 넘어섰고 일반 대중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갖기에 이르렀다. 1898년 살롱전에 출품된 <발자크>(아래)는 비대한 괴물, 형체 없는 뚱뚱보, 거대한 태아(胎兒)라는 혹평을 받았다.

 

카미유 클로델(위)과 결별한 다음 로댕은 1896년부터 로즈 뵈레(가운데)와 뫼동의 빌라데브릴랑(아래)에서 살았다. 그는 철거되던 이시성(城)에서 구한 건물 정면을 이 집에 덧붙였고, 1900년 회고전을 가진 후에는 알마 전시관에 있던 별채를 옮겨 놓았다. 

언제나 남편을 '로댕 선생님'이라고 칭했던 로즈 뵈레는 로댕이 퍼부어대는 온갖 모욕과 바람기를 견뎌 냈다. 그러나 카미유 클로델은 로댕을 다른 여인과 공유하기를 거부했고 그에게 의존하지 않으려 했다. 그녀는 자기 스스로 일어서고자 했으며 자신의 예술적 성공은 어느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재능 덕분이라고 굳게 믿었다. 로댕은 카미유가 1888년경에 만든 자신의 흉상을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아주 높은 받침대 위에서 뫼동의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칼레의 시민>. 로댕은 이렇게 높은 받침대를 원했다.

뮤즈와 함께 있는 작가의 모습을 그린 <빅토르 위고>의 완성품은 1897년 살롱전에 전시되었다. 1906년, 로댕은 <비극의 뮤즈>와 <사색>을 여기서 분리해 두 형상을 별개 작품으로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제5장

명성

 

"나의 '조각'을 보여 주고 내가 이해하는 조각의 내용을 드러냄으로써 나는 예술에 무언가를 기여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고 로댕은 말했다. <발자크>로 물의를 빚고 카미유 클로델과 갈라선 뒤 로댕의 관심사는 달라졌다. 그는 마침내 경제적 안정을 이루었으며 그의 작품세계도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로댕은 남은 힘을 자신의 모든 조각과 소장품을 전시하는 박물관을 세우는데 쏟아 부었다.

몇 안 되는 컬러 사진(위, 1907). <대성당>(아래).

 

"명성이 찾아들기 전 로댕은 외로웠다. 그리고 그가 일구어 낸 명성은 그를 전보다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따지고 보면 명성이란, 새로운 이름의 주변부에 응축된 오해의 총화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로댕은 캄보디아의 전통무용(네번째는 마르세유에서 열린 식민지 박람회에 참석한 캄보디아 왕을 수행한 한 무희를 스케치하는 로댕)과 러시아 발레단의 율동미(첫번째와 두번째는 니진스키의 두 모습으로, 온몸이 잠재된 에너지를 분출해 내려는 듯 용수철마냥 표현되어 있다)에 빠져들었다. 미국의 미술수집가 케이트 심슨(세번째)과 그에게 강한 인상을 준 일본 여배우 하나코(다섯번째)의 흉상(여섯번째)도 만들었다.

로댕과 <신의 손>.

"누드는 진정한 나의 종교이다"

1900년경부터 로댕은 여성의 누드 선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지금 남아 있는 이 도발적인 그림들-에로틱한 누드와 레스비언 커플을 포함해-은 모두 1,500점이 넘는다. 상징주의 시인이며 비평가인 아서 사이먼스는 이렇게 썼다. " 이 놀라운 누드화에서 우리는 드가를 능가하는 단순성으로 묘사되고 있는 여성을 발견한다. 동물로서의 여성, 어떤 면에서는 백치로서의 여성이다. 일본인이라도 이처럼 빛나는 휘갈김을 통해 그림을 단순화시키지 못했다. …… 이것들은 조각가의 데생, 조각가의 노트이며, 따라서 조각가의 눈에 비친 형태를 화가보다 더욱 간명하고 더욱 담백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것들은 화가의 데생과 다른 언어로 발언하며, 그 과정에서 선에서 빛을 포착하는 지점들, 윤곽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곡선을 찾아 나간다. 화가의 데생을 볼 때 우리는 색을 본다. 그러나 조각가의 압축된 이 노트에서 우리는 마치 대리석을 손끝에 만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내 눈이 본 것을 나의 손은 어느 만큼 느끼는가?"

"작업에 임할 때 나는 사람의 육체에 관한 완벽한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육체의 구석구석에 관한 깊은 '느낌'을 갖고 잇어야 한다는 사실을 당신은 모르나요? 말하자면 나는 인간의 육체가 그리는 선을 육화시켜야 하는 겁니다. 그 선들은 나의 본능에 깊이 뿌리박혀 있으며 나 자신의 일부가 되어야 하지요. 나는 손끝에서 그것들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나의 눈에서 나의 손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나는 내가 이해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어요. 보세요! 이 데생은 무엇입니까? 이 양감을 표현하면서 나는 모델로부터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어요. 왜냐고요? 어느것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는 확신을 갖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모델을 종이에 표현하는 기술문제가 모델에 대한 나의 감정, 눈으로 손으로 전달되는 느낌의 흐름을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눈을 떨구는 순간 그 흐름은 멈추어 버립니다. 나의 데생이 나 자신을 검증하는 유일한 수단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지요. …… 나의 목표는, 내 눈이 본 것을 나의 손은 어느만큼 느끼는가를 검증하는 데 있습니다."

오귀스트 로댕

앤서니 루도비치의 《오귀스트 로댕의 개인적 추억》(1926)에서

 

릴케는 비롱관에서 로댕에게 받은 책상을 고맙게 여겼다. 그것은 "나의 원고를 마을처럼 펼쳐 놓을 수 있는 드넓고 비옥한 벌판이 될 것이다."

로댕은 이집트 청동상, 작은 조각, 페르시아 소품, 그리스-로마의 흉상과 토르소를 수집했다. 이것들은 헛간, 뜰, 작업실, 식탁까지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뫼동의 이시성(城) 앞에 있는 로댕의 무덤을 <생각하는 사람>이 굽어보고 있다. 로댕은 로즈 뵈레 옆에 묻혔다. 장례식에는 로댕의 친구들과 각계 인사들이 참석했다.

 

 

 

 

 


저작자 표시
posted by 드무 황영찬

2015-051 萬人譜 19 사람과 사람들


高銀

2004, 창비




시흥시대야도서관

SB001807



811.6

고67만  19

 

창비전작시

 

시인 고은은 20여년 전부터 한국사에 드러나고 숨겨진, 스러지고 태어나는, 추앙받고 경멸당하는, 아름답고 추악한, 떳떳하고 비굴한, 그 수많은 사람들을, 붓 대신 언어로, 그림 대신 시로, 거대한 민족사적 벽화를 그리고 있는 중이다. 거기에는 한국인이라면, 아니 인간이라면 지을 수 있고 짓지 않을 수 없는 숱한 표정들이 늘어서 있고 그들의 천태만상의 갖가지 삶의 모습들이 벅적거리고 있으며 절망과 한(恨), 운명과 열정, 기구함과 서러움의 삼라만상적 인간상들이 복작거리고 있다. 그것은 삐까쏘의 「게르니까」보다 더 착잡하고 내가 멕시코씨티의 정부청사 안에서 보았던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보다 더욱 거창한 서사를 담은 우리 한민족의 벽화를 이루고 있다. 고은은 『만인보』라는 벽화-민족사를 통해 우리의 고통스러운 역사를 되새김질하며 그 역사를 만들어오고 혹은 그것에 짓밟힌 만상의 인간들을 사랑하며 껴안고 뺨 비비며 삶의 진의와 세계의 진수를 손가락으로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고은이 그린 사람들에게서 한을 듣고 그가 그린 세계에서 향기를 맡으며 그의 만인화(萬人畵)에서 세계와 시대를 읽는다. 그리고 이제, 나는 여기 그가 그려준 거대한 벽화를 보며 분노와 치욕 그리고 운명과 사랑이 점철된 그의 '역사'를 듣고 오늘의 삶을 생각한다.

■ ■ ■ 김병익  문학평론가, 인하대 초빙교수

 

 

고  은  高  銀

1958년 처녀시를 발표한 이래 시 · 소설 · 평론 등에 걸쳐 130여권의 저서를 간행했다. 서사시 『백두산』『만인보』와 『고은시선집』 1 · 2 『고은전집』(전38권)을 출간했다. 현재 세계 시아카데미 회원(한국대표)이다.

 

차례

 

어느 부부 / 연안 차씨 / 유해진 경위 / 토지국민학교 마당 / 오라리 / 청계천 3가 / 권애라 / 남산 언저리 / 송호식 모자 / 사명 / 도깨비 길달 / 고무신 한짝 / 토말 쌍봉이 / 김성주 1 / 김성주 2 / 고려 팔관회 / 남강전투 / 김지웅 / 남은 동생 / 천동이 / 김진열 / 현종 이후 / 남일병 / 방공호 / 상복이 / 유철 / 주명철 대위 / 김개남 / 밤행군 / 오대산 / 이만종이 / 그 무명 철학자 / 양진봉 하사 / 유관순 / 정일권 / 강성병 / 최익한 / 공서방 / 생일 / 위장결혼식 / 전태욱 / 박관혁 / 아낙 / 유상국 / 이영근 / 가막골 / 육군대위 고명곤 / 버린 이름 / 김소운 / 기황후 / 어부 피용구의 저승 / 한 여학생의 생애 / 오늘의 밥상 / 제비꽃 / 부청하 / 모본왕 / 하종숙 / 박영덕 / 귀신 여인 / 임환섭 / 강경 / 한재덕 / 대야성 함락 / 영랑 용아 / 키무라 타께오 / 절 / 조옥자 / 김정길 / 배순호 경사 / 삼태기 스님 / 타찌하라 세이슈 / 이기붕 / 이영원 / 임지훈 / 김소희 / 그의 행적 / 김춘길 소위 / 연등회 / 박천노인 / 이희주 / 오장원 / 홍제동 화장장 / 첫눈 / 을동이 / 아기 / 이달수 / 앨리스 현 / 외아들 상권이 / 그 아기 / 백형복(白亨福) / 서상훈 씨 / 길선주 목사 / 김규동 / 임경술 / 어느 어머니 / 할망구집 / 완월동 / 대륙의 10일 / 이장돈 마누라 / 오충남 / 어느 제자 / '폐허' 동인 / 미친 사내 / 관악산 연주암 / 한탄강 / 그 중학생 / 꼬마 존 / 장덕운 / 팔당 노인 / 을지로 1가 / 그들 / 만명부인 / 편종수 / 추교명 / 통불 / 장현 / 박근상 / 만성이 / 모함 / 지처사 / 영덕포구 / 이삼봉이 마누라 / 어린 안인석 / 민상기 / 을불 / 9 · 28수복 직후의 어느 풍경 / 조명희 / 김인종 / 남포동 거지 / 옥선이 / 인애 / 춘삼월 / 서면 주막 / 을지로 1가 파출소 / 성균관 과거장 / 환생 / 최훈장 / 그 피리소리 / 유진태 / 정수환 / 향도계 지길중 / 허윤석 / 이계선 / 이형도 중령 / 광복이 / 쇼리 팍 / 탄생 / 한순례 여사 / 신상봉 / 해인사 인민위원 / 두 청년 / 이정송 / 채호석 / 이일웅 / 임후남 여사 / 장명구 / 술꾼 윤구연 장수


유관순


충청도 천안 목천 만화천 감돈다

열여섯살 소녀 유관순

매봉에 올라

그녀가 보낸 봉화에 호응

천안

안성

진천

청주

연기

목천 여섯 곳을

산봉우리마다 봉화가 오르는 감격에 벅찼다


그뒤 아우내장에 모여든 만세소리

일본 헌병의 발포

일본 경찰의 폭거로

조선의 남녀노소 쓰러졌다


유관순 체포되었다

총대 얻어맞아

어린 등뼈가 튀어나왔다

젖가슴 칼에 찔려

옆구리 등짝으로 관통 피고름이 나왔다

자궁도 파열


그런 몸으로 감방에서 만세를 불렀다

다음해 1920년 10월 12일 새벽

먼동 튼 철창 바라보며 눈감았다

일제는 유관순 일가의 호적을 아주 말소시켰다


정일권


어린 시절 창호지 찢어진 가난 잊어버려라

북관 돌무지 출생지 떠난 이래

행복밖에 모르는 평생

암흑의

식민지도 행복

해방도 행복

전쟁도 더더욱 행복

전선 시찰의 밤엔

후방에서 스리쿼터에 미녀가 실려왔다

전쟁 이후도 내내 행복


이런 사람도 한국사람이었다


기황후


한 처녀의 커다란 운명 있다 사막 꽃이 아니라 사막이었다


1333년 원나라 공녀(貢女)로 끌려갔다

울음의 길

한나라 도읍 연경 대궐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의 눈에 번쩍 들었다

울음 접고

궁녀의 길 익혀갔다

몽골어

몽골 풍습을 익혔다

고려 풍습을 애틋하게 익혔다

용꿈 뒤 별궁에서 순제의 눈에 들었다

운우지정이 깊었다

황후 타나시리가

온갖 학대를 다했다


황후 축출의 정변이 일어났다


기궁녀는

순제의 아들 아이시리다라를 낳았다

황후 책봉

그로부터 고려여인 기황후가

원나라 전권을 떡 주무르고 양념 주물렀다

속국 고려에서도

그녀의 친정에서 권력을 주물렀다


고려 금강산 장안사도

원나라 황실 원찰이 되어 범패소리 바라소리 쉬지 않았다

보덕암도

기황후의 원찰

묘향산 보현사도

원나라 태자의 원찰이 되었다


고려 충숙왕은 기황후의 하인이 되어

기황후의 서찰 분부를 엎드려 받드는 변방 제후였다


부청하


제주 북촌

사람들 3백20명이 잡혀왔다


할머니가 말했다

네 아버지도 죽었다

너마저 죽으면 대가 끊긴다

너는 이 할미 치마 속으로 들어오너라


싸이렌이 울렸다


일제히 총소리가 났다

모두 일어섰다가

풀썩

풀썩 쓰러졌다

비명도 몇개 없었다


부대장은

막 제주도에 상륙한 병사들마다

사람 죽인 경험이 없어서

사람 죽이는 경험을 위해서

3대대 전원에게

총살작전을 명령했다


죽은 할머니의 치마 속에서

손자 살아 있었다


부청하

혼자 웃자라며

할머니가 보고 싶으면

아버지

어머니가 보고 싶으면

난바다 저쪽까지

마구 헤엄쳐갔다


중학교 중퇴하고 밀선을 탔다 이마 주름 여섯개였다


모본왕


고구려 5대 모본왕

무엇하러 이런 사람이 나오는가

무엇하러 이런 왕이 나오는가

모를 일


신하의 여인을 빼앗고

백성의 물건을 빼앗았다

남의 땅도 빼앗아

모본벌을 늘여놓았다


날마다 백성 괴롭혀야

사는 보람

밤마다 신하 괴롭혀야

왕의 보람

참다참다 늙은 신하가 울며 간하였다


폐하 부디 선정을 베푸소서


알았소 내가 깊이 생각하겠소


뜻밖에 이 대답을 들은 신하

죽음을 각오하고 간한 터라

기쁨 넘쳐 어전을 물러났다

왕이 활을 쏘아 돌아가는 신하의 등을 뚫었다


뒷날 신하 두로가

포학무도한 왕의 가슴에 탈을 박았다

다음날 아무도 시해라 하지 않았다

6대 왕좌는 모본왕의 아들이 아니라

다른 왕손을 추대했다 비로소 나라가 제자리에 섰다


이기붕


남을 모르는

이승만 집사로 시작해서

나를 모르는

이승만 집사로 끝난

어느 그림자


여기 끼니 거른 듯 슬픈 사진 한 장





저작자 표시
posted by 드무 황영찬

2015-050 말러, 그 삶과 음악

 

스티븐 존슨 지음, 임선근 옮김

2011, PHOTONET


 

시흥시대야도서관

SB046637

 

670.99

존57ㅁ

 

Mahler His Life and Music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 시리즈 6

 

Gustav

Mahler

1860 - 1911

 

구스타프 말러 Gustav Mahler

 

구스타프 말러의 음악 사전에 추상이나 현실도피는 아예 없었다.  

그는 '교향곡은 세계와 같아야 하고 모든 것을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주장한 이상과 눈부시게 합치하는 삶을 살았다. 말러가 남긴 작품들은

폭넓은 정서와 뛰어난 창의성으로 작품 한편이 하나의 세계인 것처럼 느껴진다.

말러는 프리즘을 통과한 그의 경험 세계는 모두 독특한 음악으로 거듭났다.

 

이 책은 인간 말러와 작곡가 말러의 성장을 따라가며 그 경험 세계를 펼쳐 보여준다.

인간 말러의 기쁨과 슬픔, 나아가 오늘날 말러를 클래식 애호가의 가장 폭넓은 사랑과 경배를 받는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만든 예술적 동력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이 멀티미디어 전기에는 다음의 내용이 포함됩니다.

1 말러의 작품 세계를 직접 개괄적으로 느껴볼 수 있는 CD 두 장

2 낙소스 웹사이트의 '말러의 생애와 음악' 콘텐츠 자유이용권

(CD에 담지 못한 많은 음악과 보너스 재료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스티븐 존슨 Stephen Johnson

맨체스터 노던 스쿨 오브 뮤직Northern School of Music, Manchester.

리즈Leeds 대학교의 알렉산더 고어Alexander Goehr 교수 문하,

맨체스터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 뒤로 《인디펜던트 The Independent》와

《가디언 The Guardian》에 정기적으로 기고하였고

《스코츠맨 The Scotsman》의 수석 음악 비평가로 활동했다(1998-9).

BBC 방송국의 라디오 제3, 4 채널과 월드 서비스에 자주 출연해왔다.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 브루크너 사후 100주년 기념

브루크너 특집 시리즈 14편이 있다.

《Bruckner Remembered》(파버Faber 출판사, 1998)의 저자,

《The Cambridge Companion to Conducing》(CPU 2004)의

기고가이고, BBC 라디오 제3채널의 '디스커버링 뮤직Discovering Music'

프로그램 고정 진행자이다. 2003년 아마존닷컴의 '올해의 고전음악 저술가

Amazon.com Classic Music Writer of the Year'로 뽑혔다.

 

임선근 Lim Sun Kun

<샘이깊은물> 기자를 거쳐 출판 기획과 편집 일을 해왔다.

현재 문화예술계간지 <코리아나> 기획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집에 있는 낡은 LP 음반 재킷 읽기가 취미이다.

낙소스 CD 초기의 충격(낮은 가격과 굉장한 내실)을 잊지 못하는

낙소스 레이블 애호가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시리즈 제1권

<모차르트, 그 삶과 음악>을 번역했다.

 

Contents

차례

 

서문

 

제1장

삼중의 이방인

 

제2장

방랑자

 

제3장

부활

 

제4장

세계를 담은 교향곡

 

제5장

알마

 

제6장

행복한 가정과 '비극적' 교향곡

 

제7장

에로스 찬미

 

제8장

파국

 

제9장

그대를 위해 살고 그대를 위해 죽으리

 

부록

책에 나오는 인물들

용어집

CD 수록곡 해설

연표

역자후기

참고문헌

 

www.naxos.com/naxosbooks/mahlerlifeandmusic

웹사이트의 말러 전용공간 주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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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창에서 ISBN_ 1843791145, 암호_ Lieder)

CD에 수록된 전곡

말러와 동시대 작곡가들의 음악

동시대의 문화예술, 정치 관련 사건과 나란히 보는 말러의 생애 연표


CD 1 
1. 교향곡 제5번 3악장: 스케르초 _ 19:36 
Symphony No.5. Movement 3: Scherzo 
Polish National Radio Symphony Orchestra; Antoni Wit 
폴란드 내셔널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안토니 비트 

2.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제4곡: ‘내 사랑의 푸른 두 눈은’ _ 4:49 
Leider eines fahrenden Gesellen. No. 4: 'Die zwei blauen Augen' 
Hidenori Komatsu, baritone; Hanover Radio Philhamonic Orchestra; Cord Garben 
히데노리 고마츠, 바리톤; 하노버 라디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코르드 가르벤 

3. 교향곡 제1번 3악장: 끌지 않고 장엄하면서 차분하게 _ 9:59 
Symphony No.1. Movement 3: Feierlich und gemessen, ohne zu schleppen 
Polish National Radio Symphony Orchestra; Michael Halasz 
폴란드 내셔널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미카엘 하라즈 

4. 교향곡 제3번 4악장: 아주 느리고 신비스럽게. ‘오, 인간이여, 조심하라!’ _ 9:35 
Symphony No.3. Movement 4: Sehr langsam. Misterioso. 'O Mensch, gib Acht!' 

5. 교향곡 제3번 5악장: 활발한 속도와 대담한 표현으로 ‘세 천사가 노래 부르네’ _ 4:12 
Symphony No.3. Movement 5: Lustig im Tempo und keck im Ausdruck. ‘Es sungen drei Engel’ 
Ewa Podles, contralto; Cracow Boy's Choir; Cracow Philharmonic Chorus, Polish National Radio Symphony Orchestra: Antoni Wit 
에바 포들레스, 콘트랄토; 크라쿠프 소년 합창단; 크라쿠프 필하모닉 코러스; 폴란드 내셔널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안토니 비트 

6. 교향곡 제7번 2악장: 밤의 음악 _ 16:56 
Symphony No.7. Movement 2: Nachtmusik I 
Polish National Radio Symphony Orchestra; Michael Halasz 
폴란드 내셔널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미카엘 하라즈 

7. 교향곡 제4번 4악장: ‘천국의 삶’ _ 9:34 
Symphony No.4. Movement 4: Sehr behaglich. 'Das himmlische Leben' 
Lynda Russell, soprano; Polish National Radio Symphony Orchestra; Antoni Wit 
린다 러셀, 소프라노; 폴란드 내셔널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안토니 비트 

CD 2 
1. 뤼케르트 가곡 제3곡: '이 세상은 나를 잊었네' _ 7:00 
Ruckert Leider. No.3: 'Ich bin der Welt abhanden gekommen' 
Hidenori Komatsu, baritone; Hanover Radio Philhamonic Orchestra; Cord Garben 
히데노리 고마츠, 바리톤; 하노버 라디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코르드 가르벤 

2. 교향곡 제5번 4악장: 아다지에토 _ 12:03 
Symphony No.5. Movement 4: Adagietto 
Polish National Radio Symphony Orchestra; Antoni Wit 
폴란드 내셔널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안토니 비트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Kindertotenlieder 

3.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제4곡: '얼마나 자주 나는 아이들이 잠깐 산책 나갔다고 생각하는지' _ 2:52 
Kindertotenlieder. No.4: 'Oft denk' ich...' 

4.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제5곡: '이 같은 날씨에, 몰아치는 폭풍우 속에' _ 6:40 
Kindertotenlieder. No.5: 'In diesem Wetter' 
Hidenori Komatsu, baritone; Hanover Radio Philhamonic Orchestra; Cord Garben 
히데노리 고마츠, 바리톤; 하노버 라디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코르드 가르벤 

5. 교향곡 제6번 제2악장: 스케르초. 묵직하게 _ 12:52 
Symphony No.6. Movement 2: Scherzo. Wuchtig 
Polish National Radio Symphony Orchestra; Antoni Wit 
폴란드 내셔널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안토니 비트 

6. 대지의 노래 제2악장: '가을에 쓸쓸한 자' _ 8:56 
Das Lied von der Erde. Movement 2: 'Der Einsame im Herbst' 
Ruxandra Donose, mezzo-soprano; National Symphony Orchestra of Ireland; Michael Halasz 
룩산드라 도노세, 메조 소프라노; 아일랜드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 미카엘 하라즈 

7. 교향곡 제10번 제1악장: 아다지오 _ 26:23 
Symphony No.10. Movement 1:Adagio 
Polish National Radio Symphony Orchestra; Robert Olson 
폴란드 내셔널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로버트 올슨

 

Chapter 1

Three Times Homeless

제1장

삼중의 이방인

 

"나는 삼중의 이방인이다. 오스트리아인 사이에서는 보헤미아인이요, 독일인들 사이에서는 오스트리아인이며, 세계인 사이에서는 유대인이다." 말러는 전 생애에 걸쳐서 진정한 정착 없이 아웃사이더로 살았다.

 

 

구스타프의 아버지 베른하르트 말러.

말러와 여동생 유스티네. 1899년 빈.

1865년. 다섯 살 때의 구스타프 말러.

말러가 어린 시절을 보낸 이글라우의 집.

1872년의 말러 모습. 사촌과 함께 찍었다.

 

Chapter 2

Wanderer

제2장

방랑자

 

슈베르트의 감동적이고 육감적인 우수의 비밀에 말러보다 더 가까이 접근한 사람은 없다는 로망 롤랑의 말을 가장 잘 확인시켜주는 것이 바로 <방랑하는 젊은이의 노래>이다.

1884년의 말러.


Chapter 3

Resurrection

제3장

부활


제2번 교향곡으로 말러는 작곡가로서 야망과 자신감을 한층 드높였다. 장대한 피날레는 합창과 오르간의 등장에다 네 대에서 여섯 대로 불어난 트럼펫, 여섯 대에서 열 대로 늘어난 호른에 힘입어, 충분히 방대했던 오케스트라 규모를 더욱더 확장시켰다. 실로 독일 교향곡 분야의 신기록이었다.


Chapter 4

Beyond All Bounds

제4장

세계를 담은 교향곡


말러는 이렇게 말했다. "교향곡은 세계와 같아야 한다. 모든 것을 포용해야만 한다." 모든 것을 두루 끌어안는 이 포용성이 그의 교향곡 철학의 핵심이라면 제3번 교향곡은 그가 만든 최고로 '교향곡적인' 작품이라 할 만하다.

슈타인바흐에 있는 말러의 작곡 오두막.


Chapter 5

Alma

제5장

알마


말러에게 결혼은 완전히 새로운 창작 시대를 열어주었다. 말러는 누군가를 사랑해야만 하고 한번 그러기로 마음먹으면 폭발적으로 사랑을 쏟아 붓는 유형의 남자였다. 개성과 경험을 원료로 삼는 예술가로서 그러한 성정이 그의 음악에 끼친 영향 또한 지대했다.

뵐러가 그린 지휘하는 말러의 캐리캐처.

알마 말러의 1910년 무렵 모습.

에밀 올릭Emil Orlik이 1902년에 그린 말러 초상 스케치.


Chapter 6

Heights and Depths

제6장

행복한 가정과 '비극적' 교향곡


말러는 니체가 '공포의 예술적 정복'이라고 일컬은 바를 강력하고 능란하게 표현하는 자신의 기량을 즐기고 있는 것만 같다. 한마디로 제6번 교향곡은 말러의 오케스트라 장악력이 눈부시게 빛나는 작품 중 하나로 손꼽을 수 있다.

교향곡 제6번 자필 악보의 첫 장.


Chapter 7

A Hymn to Eros

제7장

에로스 찬미


플라토닉 러브, 예수, 그리고 괴테의구원하는 '영원한 여인'은 모두 같은 개념의 다른 표현이니 그것은 천지를 창조한 태초의 에로틱 러브이다. 제8번 교향곡은 그러므로 창조주로서의 사랑과 구원자로서의 사랑에 대한 찬가이자 그가 사랑하는 복잡한 알마에 대한 찬가라고도 말할 수 있다.

빈 오페라 하우스의 발코니에 있는 말러. 1907.

1908년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자신의 제7번 교향곡을 리허설 중인 말러.

1910년 뮌헨의 말러 교향곡 제8번 초연 포스터.

말러와 알마. 로마, 1907.


Chapter 8

Catastrophe

제8장

파국


<대지의 노래>에서 말러의 탁월한 혁신성은 정점에 달한다. '내 인생 그 어느 때보다 목마르다'는 말러의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죽음에 직면함하여 드높이 고조된 정서는 예술가 말러를 창의의 새 경지로 몰고 갔다. 독창적인 음의 세계뿐 아니라 선명한 음악적 이미지를 듣는 이의 기억 속에 뚜렷이 각인시킨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Chapter 9

'To Live for You, To Die for You'

제9장

그대를 위해 살고 그대를 위해 죽으리


알마는 말러의 구원자, 구세주이다. 제10번 교향곡에는 말러의 격한 감정 변화, 알나와의 관계에 대한 미칠 듯한 희망과 고통스러운 공포가 담겨 잇다. 1910년 여름에 그가 쏟아낸 시는 이 새 교향곡의 모토와도 같다. '내 열망의 전율을, 그대 품에 안길 때의 신성한 행복과 그 영원성을, 이 한 곡의 위대한 노래에 응축시킬 수 있기를'

뉴욕에서의 말러. 1910.

뵐러가 그린 지휘하는 말러 캐리캐처.

토블라흐의 말러 작곡 오두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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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드무 황영찬

2015-049 청동기 문화

 

글, 사진 / 이건무

2006, 대원사


 

시흥시매화도서관

SH013816

 

082

빛12ㄷ  239

 

빛깔있는 책들 239

 

이건무-------------------------------------------------------------------------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를 졸업한 뒤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장, 국립광주박물관장,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을 역임하였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으로 있다. 1994년에는 한국고고미술연구소에서 주관하는 동원학술논문상을 수상하였다. 주요 논문으로 「한국 청동 의기의 연구」, 「유문동과고」, 「한국식동검문화의 성격」, 「한국식동검의 조립식 구조에 대하여」, 「한국의 청동기 문화」, 「한국청동기 문화의 성립과 전개」 등 수십 편이 있다.


 

|차례|

 

머리말

청동기란 무엇인가

청동기시대의 생활상

청동기 문화의 역사와 특성

청동기 제작 기술

맺음말

부록 - 용어 설명

참고 문헌

요령식동검

승주 대곡리 마을 전남 승주군(지금의 순천시) 대곡리의 청동기시대 마을 전경이다. 강가의 평탄한 대지를 택해 여러 채의 움집을 지어 마을을 형성하였다. 현재는 주암댐 건설로 수몰된 상태이다.

울주 검단리 마을 경남 울주군 검단리 마을 유적은 해발 100미터 정도의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주위에는 도랑을 설치하였다. 사진 : 부산대학교박물관

부여 송국리 마을 유적의 울타리 울타리는 마을의 방어 시설로서 송국리 마을 유적의 외곽에서 발견되엇다. 기둥의 직경이 0.5미터나 되며 기둥 구멍 사이의 폭은 약 1.8미터이다.

울산 무거동 논 유적 청동기시대 전기 유적으로, 여기서는 마을과 논이 함께 발견되었다. 사진에 나타난 논과 수로의 흔적을 통해 이 시기에 이미 논농사를 위한 조성 기술 · 관개기술이 상당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진 : 경남대학교박물관, 밀양대학교박물관

어은1지구 유적의 밭 경남 진주 대평리에 위치한 어은1지구 유적이다. 강가의 모래사장에 만들어졌으며 전체 규모가 4,000여 평에 이른다. 이랑과 고랑이 뚜렷하며 주변에서는 마을 유적이 발견되었다. 작은 사진은 요즈음 텃밭 경남 진주 대평리 소재

농경문청동기(앞면) 대전 지역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청동 의기이다. 앞면에는 남자 두 사람이 각각 따비와 괭이를 가지고 밭을 가는 장면과 여성이 그릇에 무엇인가를 담는 장면이 새겨져 있으며 , 뒷면에는 Y자로 갈라진 나뭇가지에 매와 같은 형상의 새가 앉아 있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따비 밭을 가는 데 사용하는 농기구로 근래에도 농촌에서 볼 수 있었다.

그물추(어망 복원) 청동기시대의 어로 행위를 증명할 만한 자료이다. 그물어구가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물에 매달려 있던 그물추는 많이 발견되고 있다. 그물추는 흙을 구워 만든 것과 작은 돌의 양면을 쪼아내거나, 홈을 내어 만든 것이 있다.

반구대 암각화 경남 울주군 소재 반구대 암각화에는 배를 타고 바다에서 집단으로 고기잡이를 하는 장면과 고래 등에 작살이 꽂혀 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견갑형동기 경주 지역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청동 의기에는 표범 또는 사슴과 같은 짐승이 그려져 있는데, 특히 사슴 한 마리에는 화살이 꽂혀 있어 사냥 의식과 관련된 의기로 추정할 수 있다. 일본 동경국립박물관 소장

곱은옥(위)과 대롱옥(아래) 청동기시대의 곱은옥은 천하석으로 만들었으며, 대롱옥은 벽옥으로 만들었다. 곱은옥은 귀고리나 수식(펜던트)에, 대롱옥은 여러 개를 연결하여 목걸이로 사용하였다.

양전동 암각화 경상북도 고령군 양전동 유적의 암각화에는 기하 문양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청동기인의 주술과 기원을 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뼈피리 함북 웅기군 굴포리 유적 청동기시대층에서는 새의 다리뼈를 잘라서 만든 뼈피리가 출토되었다.

원개형동기 한국식동검문화의 성립기에 사용된 청동 의기 가운데 하나이다.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징과 같은 역할을 한 일종의 무구로 추정된다.

북방식 고인돌 북방식 고인돌은 주검을 안치하는 곳(주검칸)이 지상에 드러나 있다. 황해도 은율의 북방식 고인돌처럼 윗돌의 크기가 8미터에 달하는 것도 있다.

화순 고인돌 채석장 고인돌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큰 돌을 떼어낼 수 있는 채석장이 필요하다. 전남 화순 효산리에서도 채석장 유적이 발견되었다.

초포리 유적 전남 함평 초포리 유적은 나무널 주위에 돌을 채운 형식의 무덤이다. 이 유적에서는 한국식동검 · 청동거울 · 의기 등의 껴묻거리가 다량 출토되었다.

미송리형토기 무문토기 형식 중에서 평안도 지방과 요동 지역 일대에 주로 분포하는 토기로 짧게 밖으로 퍼진 목과 부른 배 그리고 띠고리 손잡이를 가진 작은 항아리 모양이다.

구멍무늬토기 우리나라 동북 지방(함경도)을 대표하는 무문토기로 깊은 바리 모양에 입부분 바로 아래쪽에 구멍무늬를 한 줄 돌린 것을 특징으로 한다.

팽이형토기 우리나라 서북 지역(평안남도 · 황해도)을 대표하는 무문토기로 독 모양과 항아리 모양의 두 가지 형식이 있다. 입을 겹으로 감싸 넘기고 겹싼 부분에는 짧은 빗금무늬를 새겼으며 밑굽은 몸체에 비해 아주 작아 불안정하게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적색마연토기 토기를 만들어 굽기 전에 그릇 표면에 산화철을 바르고 잘 문지른 뒤 구우면 붉은색으로 발색이 된 토기가 나오게 된다. 이러한 토기는 일상 생활 용기보다는 제사용 · 의례용 · 부장용 또는 특수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듯하다.

송국리형토기 짧고 밖으로 약간 벌어진 구연(口緣)과 배부른 동체를 특징으로 하는 무문토기 형식의 하나로 충남 부여 송국리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어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점토대토기 청동기시대 후기를 대표하는 무문토기 형식으로, 입을 둥글게 겹싸 넘긴 것을 특징으로 한다. 한국식동검문화를 대표하며, 중국 요동성과 일본 큐슈 지방에서도 이러한 형식의 토기가 발견되고 있다.

목긴항아리(흑색토기장경호) 점토대토기와 함께 청동기시대 후기를 대표하는 무문토기 형식이다. 소형의 목이 긴 항아리 형태로, 대부분이 검은색을 띠며 일부는 그릇 표면이 곱게 문질러져 있다.

각종 반달칼 반달칼은 반달 모양이 일반적이나 빗 · 배 · 장방형 · 삼각형 등 그 형태가 다양하게 나타난다.

낫과 곰배괭이 돌로 만든 농경 도구로는 경작용의 곰배괭이와 수확용의 낫 그리고 반달칼 등이 있다.

곤봉두(별도끼) 곤봉두는 지휘자가 지니고 있던 일종의 위의구였을 가능성이 많은 도끼와 같은 무기이다. 둥근 형태의 날을 가진 달도끼와 날이 여러 개로 나뉜 별도끼가 있다.

썰개 석기를 만들기 위해 점판암과 같은 석재를 자르는 데 사용된 도구이다. 앞뒤로 직선 왕복 운동을 통해 석재를 자른다.

농경문청동기(뒷면) 대전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농경문청동기의 뒷면에는 Y자 형태의 나뭇가지에 매와 같은 새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어 솟대와 같은 형상을 보여 준다.

솟대 오늘날의 솟대 모습. 높은 장대 위에 새 두 마리가 마주하고 있다. 전북 남원 호경리 마을

검파형(대쪽 모양)동기 검파형동기는 3점이 세트로 출토된다. 대전 괴정동 유적 출토

검파형동기 부분 충남 예산 동서리 돌널무덤에서 출토된 검파형동기에는 손이(위), 아산 남성리 돌널무덤에서 출토된 검파형동기에는 사슴이(아래) 그려져 있어 시베리아 샤머니즘과의 관련성을 말해 준다.

요령식동검 요령식동검은 칼몸과 칼자루 그리고 칼자루끝장식의 세 부분을 조립해서 사용하게 되어 잇다. 각종 요령식동검의 칼몸 형태는 기본적으로 비파형이지만 시대가 내려가면 점차 폭이 좁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요령식동검의 T자형 손잡이 요령식동검의 손잡이는 T자형이다. 손잡이의 표면에는 기하 문양이 새겨져 있다. 황해도 신천에서 출토된 것을 비롯하여 4점이 알려져 있다.

한국식동검 한국식동검은 요령식동검과 마찬가지로 칼몸과 칼자루 그리고 칼자루끝장식을 서로 결합하여 사용하게끔 되어 있지만, 칼몸이 직선화되고 결입부와 마디가 뚜렷한 것이 특징이다.

한국식동검과 칼자루끝장식 요령식동검문화기의 마제석검과 한국식동검문화기 초기의 동검에는 철광석제나 토제 칼자루끝 장식이 많이 사용되었다.

칼자루끝장식이 부착된 동검

나팔형동기 나팔형동기는 충남 예산 동서리 돌널무덤 유적에서 출토된 것이 유일하다. 청동 의기로 여겨지는 것이나, 중국 요령 지역에서는 이러한 동기가 말머리 장식으로 사용되었다.

견갑형동기 경주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한다. 청동 의기 가운데 하나로 표면에 표범(또는 호랑이)과 사슴 등이 그려져 있다. 사슴 한 마리는 화살에 맞은 모습을 하고 있어 수렵과 관련된 제의에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원형유문동기 전북 익산 지역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청동 의기의 하나이다. 바깥쪽은 방사상, 안쪽은 십자형으로 구성하여 태양을 상징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십자일광문의 모티프는 시베리아 지역에서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고운무늬거울 한국식동검문화 발전기에 제작된 고운무늬거울은 뒷면에 새겨진 기하학적 문양이 아주 곱고 가늘다. 햇빛을 반사하는 기능을 가진 것이라 대부분 뒷면의 무늬가 태양무늬이다.

방울류 세트 청동 의기 가운데 방울류는 우리나라에서만 보이는 특유의 것으로 간두령 · 쌍두령 · 조합식쌍두령 · 팔주령의 4종이 세트로 되어 있다.

거푸집 세부(도끼 상부) 투겁도끼는 도끼자루를 끼우기 위해 내부에 자루를 끼울 공간이 마련되어야 한다. 따라서 거푸집의 투겁 바로 위쪽에는 공간을 만들기 위한 속틀이 매달릴 수 있도록 조그만 홈이 파여 있다.

각종 거푸집 거푸집은 활석으로 만들어진 것이 많으며, 대부분 같은 모양이 새겨진 2매를 합쳐서 사용하게 된다. 전남 영암에서 일괄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거푸집에는 무기 · 공구 · 거울 · 낚싯바늘 등이 새겨져 있다.

 

 

거푸집 세부(도끼 상부) 투겁도끼는 도끼자루를 끼우기 위해 내부에 자루를 끼울 공간이 마련되어야 한다. 따라서 거푸집의 투겁 바로 위쪽에는 공간을 만들기 위한 속틀이 매달릴 수 있도록 조그만 홈이 파여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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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드무 황영찬

2015-048 Egon Schiele 에곤 실레


지은이 | 이자벨 쿨, 옮긴이 | 정연진

207, 예경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19934


650.8

아887ㅇ  2


●ART SPECIAL 2


"나는 모든 몸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그려낼 뿐이다."

- 에곤 실레



독특한 색감과 터치, 에로틱하고 과감한 인체묘사로 세기말 오스트리아의 불안한 시대정신과 아름다움을 전하는 에곤 실레!!! 이 책은 실레의 인생과 작품, 그 주변의 여인들의 이야기뿐만아니라, 그가 태어난 지 100년이 넘게 지난 현재, 어떤 모습으로 조명되고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매혹적이지만 다소 충격적이기까지 한 초상화와 자화상 외에도 진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풍경화까지 실레의 아름다운 작품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귀한 사진 자료나 독특한 지면 구성 또한 읽는 이의 눈과 정신을 사로잡을 것이다.


에곤 실레 Egon Schiele(1890-1918)

짧지만 강렬했던 삶을 살았던 오스트리아의 화가. 독특한 색깔과 터치, 에로틱하고 과감한 인체묘사로 유명하다. 스물여덟의 나이로 삶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성에 대한 강박, 고독, 죽음 등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1890년 빈 근처 툴른에서 태어난 실레는 학창시절 아르 누보의 일환인 독일의 유겐트슈틸 운동에서 영향을 받는다. 그 무렵 빈 현대미술의 거장인 구스타프 클림트를 만났으며, 그 결과 화려하고 장식적인 초상화를 그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색과 동떨어진 독특한 색감과 선명한 윤곽선으로 자신만의 독자적인 양식을 개발하게 된다. 그는 처음부터 인물 표현에 몰두했고, 성적인 주제를 노골적이고 자극적으로 묘사해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1909년 동료들과 '신예술 그룹'을 결성했으며, 1911년부터 유럽 곳곳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1918년 빈에서 열린 분리파 전시회 때에는 실레의 작품을 위한 특별 전시실이 따로 마련되기도 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다.


변천사

에곤 실레의 작품들을 한 눈에 펼쳐보면 그 예술적 다양성을 느낄 수 있다.

초기의 사실주의에서 말기의 표현주의까지, 다채로운 유화에서 미니멀한 드로잉까지,

그리고 개성 강렬한 초상화에서 멜랑콜릭한 풍경화까지…….


초상화

1910

1912-1913

1913

1910

1918

>> "이 사람처럼 색을 만들어 내고, 색을 섞어 내고, 또 색을 아름다운 화음처럼 펼쳐내는 예를 나는 지금껏 보지 못했다네." - 하인리히 베네쉬, 에곤 실레에 대해.


풍경화

1907

1911

1912

1916

1917-18

>> "나는 들판을 지나 저 둥근 언덕을 넘어 쉬지 않고 달려가 흙에 입맞춤 하고 싶네……. 부드럽고 따듯한 들꽃 내음 가득 마시고 싶네……." - 에곤 실레, 자연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면서.


소묘

1910

1914

1915

1917

1918

>> "실레의 작품에서 나체만을 보는 사람들은, 외설스런 나체 이외에 아무것도 보지 않는 사람들은 도저히 깨우칠 도리가 없다."-아르투어 뢰슬러, 실레의 친구이자 수집가


차례


그때 그 시절

빛과 그림자


최고가 되기까지

신新 예술가로 출발하다


예술

화가와 거울과 사다리


철도 역장의 아들에서 예술가로


사랑

사랑은 셋에서 하나를 버리는 것


지금도 우리 곁에

뒤늦은 명성


그때 그 시절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우리의 고향 빈

이 시대 예술의 원천이라네."

오토 바그너, 1903년


왈츠음악과 세계대전 사이에서

에곤 실레가 시골에서 보낸 시간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빈은 그에게 고향 같은 곳이었다. 빈은 실레가 예술가로서 명성을 쌓기 시작한 곳이기 때문이다. 군주제 수도의 상징이던 빈은 당시 현대적 대도시로 탈바꿈하던 시기였고, 수많은 예술가도 모더니즘의 바람에 합류하고 있었다. 아르투어 슈니츨러는 펜대를, 구스타프 말러는 지휘봉을, 구스타프 클림트는 붓을 잡고 말이다.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여인의 초상화는 에곤 실레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청색과 금색이 어우러진 드레스를 입은 그림 속 여인은 클림트의 애인이자 절친한 친구인 에밀리에 플뢰게로, 클림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분리파 미술관, 1897-1899년.


"오스트리아에선 누구나 자기가 아닌 다른 존재로 변한다."

- 구스타프 말러


"전통은 불꽃을 계속 살리는 것이지, 잿더미를 숭상하는 것이 아니다."

- 구스타프 클림트

빈 시민들은 친근한 단골카페를 자주 찾아 신문을 읽거나, 빈 커피를 마시거나, 삼삼오오 모여 토론을 즐겼다. 미하엘러 광장에 위치한 그리엔슈타이들 카페는 빈 모더니즘의 집결지와 같은 곳이었다.

유겐트슈틸 예술가들이 정진하던 목표는 총체예술이었다. 총체예술 장르에 포스터가 빠질 리 없다. 위는 '빈 공방'을 홍보하는 포스터로, 마리아 리 카르츠 작품이다.

실레는 스스로를 '은으로 된 클림트'라고 칭하곤 했다. 그렇다면 이 1910년 사진의 주인공인 '오리지널' 클림트는 금인 셈일까?

외면 | 구스타프 클림트의 대작 <베토벤 프리즈>는 예술 애호가들로부터 외면당했다. 그들의 눈에는 빈 분리파 미술관의 벽을 장식한 이 24미터 길이의 작품이 아름답지도 않을 뿐더러 경외심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1902년 클림트에 의해 탄생한 베토벤 기념전시회는 결국 엄청난 재정적 손해만 끼치고 막을 내렸다.

유토피아 | 클림트가 거장 베토벤을 기리며 제작한 이 벽화는 "예술과 사랑을 통한 인간의 구원"이라는 클림트 자신의 유토피아를 표현한 것이다. 작품 속 영웅은 온갖 위험과 폭력을 이겨내고 사랑하는 여인의 포옹을 통해 구원받는다.


최고가 되기까지



"이 사람처럼, 색을 만들어 내고,

색을 섞어 내고, 또 색을

아름다운 화음처럼 펼쳐내는 예를

나는 지금껏 보지 못했다네."

하인리히 베네쉬


스타 예술가

자긍심 강한 성격의 에곤 실레는 이미 18세에 처음으로 전시에 작품을 출품하는 경험을 쌓았다. 실레는 대중의 관심부족에 대해 불만을 가질 일이 없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가까운 지인들의 평가가 후하지 못했더라도 그에게는 그를 꾸준하고 열렬히 지원하는 후원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레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대단했다.

실레의 벗이자 작품수집가였던 베네쉬는 이미 1917년에 실레가 그린 드로잉을 70점이나 소유하고 있었다.


"나는 동시에 모든 역할을 맡고 있다. 하지만 절대 모든 종류의 일을 동시에 하진 않는다."

- 에곤 실레, 1910년경

1914년에 찍은 이 사진처럼, 실레는 카메라 앞에서 즐겨 포즈를 취하곤 했다.

창설되자 마자 전시회를 가진 '노이쿤스트그루페(신예술 그룹)'의 포스터. 안톤 파이슈타우어의 디자인이다.


"우리는 인재들이 오스트리아를 떠나는 일이 더 이상 없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오스트리아가 이룩했던 과거의 영광을 다시 한번 맛볼 수 있기를 ……."

- 에곤 실레

예술평론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아르투어 뢰슬러는 실레의 돈독한 동반자이자 열렬한 후원자였다.

아르투어 뢰슬러는 일찍이 실레의 재능을 발견하고 가까이 지냈다. 사진은 두 사람이 트라운 호숫가에서 여름날을 즐기는 모습이다.

부유한 주류공장장 아우구스트 레더러는 실레에게 아들 에리히의 초상화를 그려줄 것을 의뢰했다.

표현주의 표방을 위해 출간된 독일 간행지 《디 악치온》은 1916년에는 한 회분을 모두 실레의 시로 채워 발간한 바 있다.

실레가 그린 빈 분리파 제49회 전시회 포스터. 1918년 초에 생을 마감한 클림트를 위해 빈 의자가 마련되어 있다.

실레는 사진 속 그림처럼 작품에서 헐벗은 나무와 같은 늦가을 분위기를 자주 연출했다.

아버지와 아들 | 실레가 만난 첫 수집가는 그의 삶의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하인리히 베네쉬와 오토 베네쉬 부자를 그린 초상화는 기하학적 모티브를 통해 표현되었으며, 실레의 그림들이 으레 그렇듯, 피부색도 자연 본래의 색과는 거리가 멀다.

스승에서 모델로 | 클로스터노이부르크에서 실레에게 회화를 가르쳤던 막스 카러를 그린 이 작품은 실레의 초기 표현주의 초상화 중 하나다. 실레는 스승을 전체 구도에서 오른쪽 구석으로 몰고 왼쪽을 비워 두었다.

친구이자 후원자 | 아르투어 뢰슬러 또한 당연히 실레에게 초상화를 의뢰했다. 흙색이 지배적인 이 화풍 속 모델은 깊이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다. 가운데 위치한 큼직한 손이 시선을 끈다.

옷 바꿔 입기 | 이 그림 속에 보이는 모습은 평범한 디자인의 치마를 입은 에디트 실레이지만, 원래는 체크무늬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림의 구입자인 빈 벨베데레 박물관장은 국립박물관에 걸기엔 옷의 분위기가 너무 화려하다는 이유로, 치마를 다르게 덧그려 달라고 요청했다.

은밀한 밀착 | 실레는 초기 초상화에 자주 나타나곤 했던 초록빛 피부색을 <포옹>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다. 이 그림은 1918년 분리파 미술관의 대전시회에 선보였던 작품이다. 그림의 주인공은 에곤과 에디트가 아닐까?

어두운 비전 | 꽤 큰 규격의 유화인 <죽음과 소녀>도 1918년 분리파 미술관의 대 전시회에 출품되었던 작품이다. 그림 속 붉은 머리 소녀의 모델은 실레의 애인인 발리 노이칠로 추정된다.


예술



"예술

현대적일 수 없다.

예술은 그 자체로

영원한 것이다."

에곤 실레


항상 새로운 물가를 찾아서

실레는 지칠 줄 모르는 예술가였다. 12년의 창작기간 동안 그는 드로잉, 수채화, 시각디자인을 포함한 도화지 작품 2000점, 유화 300점, 그리고 방대한 양의 시를 남겼다. 실레의 작품세계에서 이기적 도도함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실레의 관심은 온통 자기 예술과 이를 통해 대변되는 그 자신뿐이었다. 실레가 가장 즐겨 그렸던 모티브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실레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기 전까지 자화상을 100여 점이나 남겼다.

실레가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시각은 비정하리만치 예리했고, 모든 미술 형식을 벗어나는 행위였다.


실레의 풍경화들은 그 특유의 자극적인 나체화의 그늘에 가려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했다. 이 <나무 네 그루>라는 그림이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성을 보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예술학교 학생증에 부착되었던 실레의 사진.


"어떤 이들은 잔인한 전쟁의 공포를 느끼고서야 예술이 단순히 사치생활의 일환 그 이상이라는 걸 깨닫는 모양이네."

- 1917년 3월 2일, 실레가 안톤 페슈카에게

빈 현대미술의 거장, 구스타프 클림트.

빛나는 장식을 배경으로 잠든 다나에의 모습에서 클림트 풍의 양식이 물씬 느껴진다.

1909년 신예술그룹 회원의 초상을 그린 실레는 <화가 안톤 파이슈타우어의 초상>에서 클림트와는 달리 배경에 어떤 장식도 하지 않는다.

<은둔자들>을 연상케 하는 <후광이 있는 두 남성>은 빈 공방에서 작업한 엽서 디자인이었는데, 결국 대량 인쇄되지는 않았다.

반영 | 실레의 작업에는 거울이 자주 쓰였다. 1910년 연필로 그린 이 인체 드로잉에선 실레도 모델이 되었다.

주관적 시각 | 구두 끝까지 다 그리기엔 종이가 모자랐던 걸까? 실레는 대상에서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부분까지만 그려 버리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 이외의 것은 모두 과감히 생략해 버리거나, 부스러기만 남겼다.

스캔들 | 세기말 빈에서 동성애는 금기사항이었다. 하지만 실레에게 금기라는 단어는 통용되지 않는 모양이다. <레즈비언 커플>이란 제목의 이 작품은 실레가 수없이 다룬 동성애 주제의 작품들 중 하나일 뿐이다. 여기서도 실레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곳만 그리고 나머지 신체부분은 아예 암시조차 하지 않는다.

묘하게 오려낸 컷 | 종이 위에 보이는 것은 다리, 골반, 팔뿐. 위로 걷어 올린 웃옷의 녹색을 제외하고는 어떤 색도 사용하지 않았다. 구아슈로 강조한 선만이 몸의 선을 드러낼 뿐이다.

수집광 | 책 더미를 배경으로 앉아 있는 후고 콜러 박사는 예술적 감각을 갖춘 사업가로, 엄청난 양의 서적을 보유하고 있는 인물이었고, 실레 또한 콜러 박사의 이런 이미지를 그림 속에 영원히 보존한다. 실레는 이 그림만큼 공간의 배경에 공을 들인 적이 일찍이 없었다. 실레가 요절하기 몇 달 전에 그린, 거의 마지막 작품이다.

공허한 눈빛 | 카를 자코브셰크는 실레가 예술학교에 나가던 시절 학급동료이자, 신예술그룹의 창립멤버였고, 피스코의 갤러리에서 열린 첫 전시회에도 참여한 바 있다. 하지만 자코브셰크는 불행히도 창작예술가로서는 운이 잘 풀리지 않았고, 결국은 미술교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신세가 되었다. 수척하게 마르고, 까칠한 수염에 구겨진 양복 안에는 셔츠도 입지 않은 초라한 모습의 친구, 실레가 그린 이 초상화에선 미화되지 않은 현실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삶과 죽음 | 시체처럼 창백한 엄마와 아기의 모습에서 실레를 사로잡았던 삶과 죽음의 세계가 엿보인다. 이 그림의 배경에는 실레가 직접 겪어야 했던 1차 세계대전도 잇지만, 그의 가족사도 있다. 실레는 어렸을 때 누나를, 그리고 청소년기에 아버지를 잃는다.

가족 | 실레는 1918년 전쟁 당시엔 이 유화에 <쭈그리고 앉은 두 사람>이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그가 죽은 후에 제목이 <가족>으로 바뀌고 이 작품이 초상화라는 분석이 내려졌다. 실제로 그림 속 남성의 얼굴을 보면 실레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그림 속의 여인은 아내 에디트가 아니고, 게다가 여인의 다리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아이는 뒤늦게 덧그려진 것이다. 이전에는 대신 꽃다발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변두리 | <변두리> 혹은 <주택가 Ⅲ> 속에는 점점이 작은 인물들이 배치되어 전체적 분위기를 밝게 유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알록달록한 집들은 왠지 스산해 보인다. 온통 까만 창문에다 불빛이 내비치는 집도 없다. 검게 채워진 배경은 다채로운 집들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색의 유희 | <변두리의 집과 빨래>에서 관찰자는 좁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 집들을 바라보고 잇다. 저택 2층의 벽면, 그리고 빨래들은 회색 빛 벽에 비해 강한 색채를 띤다.




"난 이 모든 걸 앞으로도 겪을 것이라는게

기쁘다오. 왜냐하면 이런 슬픈 경험이야말로

창조적 인간을 빚어내기 때문이지."

에곤 실레


짧고, 그리고 굵게

…에곤 실레는 그렇게 살다 갔다. 소도시 툴른의 따분함도 어린 실레의 그림욕구를 누르진 못했다. 실레는 오히려 오고 가는 열차든, 남부 오스트리아의 풍경이든,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면 모두 열정을 가지고 관찰했다. 성장한 실레는 결국 스스로의 거대한 잠재력에 이끌려 빈으로 향한다. 21세의 실레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정의를 내리듯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간이다. 나는 죽음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한다." 실레의 짧고 굵었던 인생을 이보다 더 잘 드러낸 문장이 있을까.

게르티는 오빠 실레의 그림뿐 아니라 빈 공방에서도 모델 역할을 했다.



붓과 팔레트를 손에 든 15세의 에곤 실레. 카메라를 바라보는 눈길이 아직은 수줍기 짝이 없다.


"나는 나를 사랑했다…….

나는 분노에 찬 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에서 분노가 사라지도록 그들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려 했고,

나를 시기하는 사람들에겐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주며 말해주려 했다.

난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고……."

-에곤 실레, <상상>에서

실레 가족은 아버지의 직업 상 툴른 역사에서 살았다.

실레의 부모인 마리 수쿱아돌프 실레가 약혼 당시 찍은 사진.

실레 가족은 1904년 빈 북쪽의 클로스터노이부르크로 거처를 옮긴다. 클로스터노이부르크는 후에 실레의 작품에 여러 번 등장한다.

판토마임 공연 중인 실레의 친구 에르빈 도메니크 오젠과 무용수 모아.

두 화가들. 후에 매제가 된 신예술그룹 회원 안톤 페슈카와 크루마우에서 함께 한 에곤 실레.

신입생 | 에곤 실레가 빈 예술학교에 입학하기 몇 주 전 그린 자화상이다. 당시 실레는 16세였다. 실레는 이 작품에서 목탄뿐 아니라 바림 효과나 스프레이 기법을 적절히 사용하고 있는데, 특히 스프레이 효과는 당시 분리파 화가들도 즐겨 쓰는 기술이었다.

자기초상 | "난 내가 예술가로서 엄청난 성장을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양한 경험을 했고, 예술을 돈벌이에 이용하려 하는 자들에 맞서 끝없이 싸웠다." 하지만 현실은 1911년 9월에 실레가 쓴 내용처럼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그 전 해에 그린 자화상 <갈색 모자를 쓴 자화상>에 비친 실레의 모습은 자신감보다는 마음고생으로 가득 차 보인다. 사회적 체면과 예술적 자유 사이에서 고민하느라 그랬을까?

몰이해 | "나는 예술을 위해, 그리고 내 연인을 위해 참고 기다릴 수 있다!" 이는 실레가 구류되어 있던 1912년에 나온 작품 <미결수의 자화상> 한 구석에 쓰여 있던 문구이다. 이 자화상에서 실레는 우울함에 빠져 고통받는 영혼을 묘사했는데, 구류 사건 이후로 실레의 그림에는 희생양적인 태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실레는 자신을 사회적 몰이해의 희생양으로 보았다.

쪼그려 앉은 두 소녀 | 에곤 실레는 이 그림에서 수채 기법을 사용하면서도 각 색의 경계가 허물어지지 않도록 했다. 실레의 그림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전형적 공간배치로 원근법이 느껴지지 않는다. 전혀 다른 인상의 두 소녀는 감상자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듯 바라본다.

강조된 실루엣 | 실레가 검은 분필과 수채화물감을 이용해 그린 발가벗은 소년의 나체화. 몸의 윤곽을 따라 검은색으로 진하게 실루엣을 그렸고, 그 주변에 흰색을 덧칠해 둘러쌈으로써 소년이 더욱 앙상해 보이게 만들었다.

살얼음 위를 걷듯 | 실레는 이런 모티브들을 요청해 의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동성애를 자연에 반하는 행위로 간주하던 당시의 시각에 비추어 보면, 실레의 이러한 살얼음 위를 걷는 듯한 행동들은 다분히 의도적이라 할 수 있다.

동반자의 모습 | 스스로를 '마임 폰 오젠'이라 칭하곤 하던 실레의 친구 에르빈 도메니크 오젠은 에곤 실레의 초상에 매우 자주 등장한다. 이 반라의 나체화가 그려진 시기는 무용수인 오젠이 크루마우에 머물고 있던 실레를 방문한 때이다. 초록빛 얼굴과 손을 한 채 종이의 반쪽에만 그려진 오젠의 형상은 종이의 경계선 밖으로 벗어나 있다.

사망 직전 누워있는 에곤 실레.

먼 곳을 응시하며 | "실레는 예술가로서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으로서도 특이한 사람이었다. …… 일상에서 겪는 일들은 그에게 있어 관심 밖이었다. 실레의 눈빛은 항상 잡다한 것들을 초월하여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인리히 베네쉬, 에곤 실레를 회상하며.

노출 | 머리카락은 쭈뼛 서 있고, 눈은 둥글게 치켜뜨고, 놀란 입은 다물어지지 않는다. 이 그림 속의 실레는 마치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놀란 듯한 모습니다. 드러낸 배, 찡그린 얼굴이 검은 옷과 대조를 이룬다.

희생양 | 실레는 아르노트 갤러리와 전시회 포스터를 제작할 때 자신을 화살이 수없이 꽂힌 성 세바스티아노로 묘사했다. 재판 회부와 구류 경험이 남긴 흔적이다. 스스로를 희생양으로 본 것은 실레뿐이 아니었다. 표현주의 화가이자 친구인 오스카 코코슈카도 자신을 그렇게 묘사한 적이 있었다.

종교 개종 | 두 여인이 무릎을 꿇고 앉은 맞은편에 수도승의 옷을 입은 사내는 실레 형상을 하고 잇다. 그림 속의 세 사람이 마치 캡슐 안에 갇힌 것 같다. 1912년에 있었던 구류사건 이후로 실레는 종종 자신을 수도승, 또는 성자로 표현하곤 했다.

피난처이자 영감의 원천 | 기록 자료에 <집들>의 모티브가 크루마우라고 명시되어 있진 않지만, 실레가 어머니 마리 수쿱의 고향을 즐겨 찾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 그림의 모티브의 출처는 크루마우였을 가능성이 높다.

늦가을 | 퇴락, 질병, 죽음 등은 모두 표현주의 예술가들이 자주 다루던 주제였다. 바람 속에 홀로 쓸쓸히 서 있는 <울타리 뒤 나무 한 그루>에서 생명의 흔적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죽은 마을 | 1910년에서 1911년 사이 실레의 그림에서는 어두운 색채와 모티브가 부쩍 눈에 띈다. 실레는 자신을 우울함으로 몰고 간 빈을 떠나지만, 상태는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다. 그 즈음 실레의 모든 창조행위에서 죽음은 큰 비중을 차지했다. 어쩌면 실레가 느꼈던 것은 1910년 시 <소나무 숲>의 마지막 줄에 나타난 것처럼 "살아있는 듯한 죽음"일지도 모른다.

전쟁 회화 | 실레는 군복무기간 동안 많은 면제 혜택을 누릴 수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가장 큰 혜택은 재능을 인정받아 사무업무와 병행하여 창작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15년에 그린 <모피 모자를 쓴 러시아 전쟁포로>는 이러한 배려의 산물이다.

가족 | <무릎을 세우고 앉아있는 여인.의 모델은 에곤 실레의 처형인 아델레 하름스이다. 실레는 아델레를 모델로 세우길 좋아했는데, 아마도 그의 이러한 처신에 아내 에디트는 곱지 않은 눈길을 보냈을 것이다.

풍성한 머리카락 | 엎드려 누워서 지루한 듯한 표정으로 팔을 괴고 감상자를 응시하는 여인의 사자갈기 같은 붉은 머리가 흐드러지게 흘러내린다. 다른 나체화와는 달리 이 그림에서 실레는 인체의 왜곡을 의도하지 않는다. 다만 배경은 여전히 생략된 채로 남아 있다.

 

사랑

 

 

"에로틱한 예술작품에도

성스러움은 깃들어 있다."

에곤 실레

 

'참새아가씨' 대 '참한 색시'

 

실레가 논란을 몰고 온 건 자유분방한 나체화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진보적인 애정행각 역시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에 충분했다. 실레는 그림의 모델과 매춘부가 동일시되던 20세기 전후 빈에서 모델 발리와 수년간에 걸친 동거생활을 한다. 하지만 결혼을 해야 할 때가 오자, 그는 결국 평범한 여인을 선택해 버린다.

 발리 노이칠.

실레가 쓴 이 편지의 수신자는 에디트와 아델레 하름스 자매이다. 이때는 실레가 아직 둘 중에 마음을 정하지 않았던 상태이다.

 

"비극은 비극으로 받아들여야 비극이 되는 것이다. 실레는 어떤 것도 비극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인리히 베네쉬

서로 꼭 껴안고 있는 에곤과 에디트 커플.

함께 산책하는 에곤 실레와 발리 노이칠.

 

"실레의 작품에서 나체만을 보는 사람들은, 외설스런 나체 이외에 아무것도 보지 않는 사람들은 도저히 깨우칠 도리가 없다."

-아르투어 뢰슬러, 1911년 에곤 실레에 대한 글에서

1918년 여름의 실레 부부.

실레가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은 임종을 얼마 앞두고 침대에 누워 있는 아내의 드로잉이다.

조감도 | 실레는 풍경화를 그리든, 나체화를 그리든, 조감도적 시각으로 모티브를 보길 즐겼다. 1911년 작품 <술이 달린 담요 위의 두 소녀> 역시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을 그린 것이다. 여기서 실레에게 원근감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 갈색의 담요로 그저 평평하게 표현되었을 뿐이다.

나체 | 실레가 나체를 모티브로 삼기 시작한 것은 20세가 되던 해였다. 그 후 1910년은 특히 많이 제작된 해인데, 이 <녹색 천을 걸친 여성의 누드>도 그 해에 그려졌다. 여체의 선은 부드럽게 그려졌고, 피부색도 자연색에 가깝다. 모티브의 완만한 곡선을 통해 아직은 유켄트슈틸이 엿보이는 그림이다.

색체의 향연 | 이 작품에서 실레는 나체의 등에 분홍빛, 초록빛, 주황빛을, 그리고 머리카락에는 푸른 보랏빛을 썼고, 등을 비롯한 팔은 과장되게 늘어나 있다. 나체화에서 이보다 더 자연에 반하는 표현이 가능할까!

머리는 생략 | 실레가 1913년에 그린 여성 모티브는 상당수가 머리를 생략한 채 그려져 있는데, 이 그림에서는 머리에 이어 발까지도 생략되었다. 빨간 스타킹을 신은 다리가 공간의 반을 차지하고, 걷어 올린 드레스는 다소 파리한 빛의 빨간색을 띤다.

행복한 한때 | 1915년 실레가 그린 아내와 조카이다. 이 때는 실레가 가족을 중심으로 모티브를 많이 삼던 시기였다. 그래서 누이 게르티와 조카 안톤의 그림도 많다. 군복무 기간 내에 허용된 예술 활동이었으므로, 나체화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어머니의 뿌리 | 비스듬히 보이는 르네상스풍의 두 집은 실레가 1917년에 그린 것으로, 오늘날 크루마우 라트론 거리에 아직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실레가 수년에 걸쳐 풍경화의 모티브로 삼은 뵈멘의 소도시 크루마우는 어머니 마리의 공향이다.

꽃잎 | 데이지, 나팔꽃, 양귀비꽃이 지면 위를 떠다닌다. 연필을 이용한 부드러운 밑그림에 수채화물감으로 채웠다. 실레는 사망하기 3년전부터 전과는 달리 사물을 그릴 때 자연주의적 묘사를 적용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원근법을 지킬 흥미는 여전히 없는 모양이다.

화면 가득한 초록빛 | "나는 모든 몸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그려낼 뿐이다"라는 실레의 말은 마치 이 말기작품에 대한 설명처럼 들린다. 이 그림에선 실레가 전에 그려내곤 했던 쓸쓸한 가을빛 해바라기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지면은 대부분 해바라기의 잎의 풍성한 초록빛을 화면 가득히 쏟아놓는 데 할애된다.

국화 | 실레는 1910년 <국화>라는 제목의 유화 작업 밑그림을 위해 총 세 점의 국화 모티브 수채화를 그린다. 이 그림의 노란 국화꽃잎은 부드럽고 약하게 보이는 반면, 지면을 가득 채운 아래의 붉은 국화꽃잎들은 마치 그림 밖으로 터져 나올 것만 같다.

꽃의 밑그림 | 에곤 실레가 붓을 이용해 그린 이 국화 그림에서도 표현주의는 여실히 드러난다. 각 꽃잎들을 그린 붓질은 자연적 사실에 입각한 묘사가 아니라, 꽃의 혼을 표출해내려는 노력인 듯하다.

 

지금도 우리 곁에

 

 

 

"실레가 되고 싶다면

머릿속에 그의 그림들

떠올리는 것으로 족하다."

니콜라이 킨스키,

라울 루이즈의 영화 <클림트>에서 맡은 실레 역에 대해.

 

점점 더 많은 애호가들이

… 실레의 매력을 새로이 발견하고 있다. 실레의 말이 옳았던 것이다. "예술은 현대적일 수 없다. 예술은 그 자체로 영원한 것이다." 물론 실레의 예술성이 인정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말이다. 대신 오늘날 실레의 작품이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전 세계에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한 가지 위로가 될 것이다. 실레에 대한 인지도는 1980년대 일어난 전시회 붐을 통해 급상승했고, 이후 경매에서는 기록적인 판매가가 매겨졌다.

 

레오폴트 박물관.

 

"에곤 실레는 나에게 있어 항상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의 극히 주관적 세계를 대변하는 그림들은 당시에도 혁명, 그 자체였다.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내게 매우 현대적으로 다가온다. 나는 특히 그가 창조해 내는 분위기를 사랑한다. 신비로운 동시에 왜곡된……. 이것은 관능을 향한 고결하고도 기이한 찬미이다!"

-이탈로 추켈리, 캘빈 클라인 수석 디자이너

에곤 실레의 생가는 오늘날 에곤 실레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실레는 그림을 그릴 줄은 알아도 팔 줄은 모르는 사람이오. 하지만 그가 다 자초한 일이요. 타인이 좋아하는 걸 그리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걸 그리는 데야 당연하지 않겠소?"

-아르투어 뢰슬러, 1913년.

최고가 | 에곤 실레의 <크루마우 전경(마을과 강)>은 2003년 최고가를 기록하며 팔렸다. 구입자는 런던에서 열린 경매에서 1916년 제작된 이 작품에 1800만 유로의 가치를 부여했다. 지금껏 팔린 실레 작품 중 가장 최고가이다.

할리우드 스타 | 칠레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해 온 라울 루이즈 감독은 존 말코비치를 주연으로 구스타프 클림트의 일생을 스크린에 담았는데, 영화에 등장하는 에곤 실레 역은 사진의 니콜라이 킨스키가 맡았다. 킨스키에 따르면, "실레 그림 속의 선들은 불꽃처럼 내 잠재 의식에 파고든다"고 한다.

연재만화 | 작가 제이미 태너는 에곤 실레의 일생을 만화로 표현해냈다. 2002년 출간된 《영원한 아이(The Perpetual Child)》에 누드화 때문에 노일렝바흐 감옥에 갇힌 에피소드가 빠졌을 리가 없다.

색채의 마술 | 화려한 색채와 다양한 무늬로 유명한 패션메이커 미소니의 컬렉션은 실레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사진은 1970년대 컬렉션 중 하나이다.

영감 | 실레의 그림에서는 모델들이 입고 있는 옷들이 작품의 캐릭터를 좌우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날 패션 디자이너들이 실레를 창조적 영감의 원천으로 삼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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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자 표시
posted by 드무 황영찬

2015-047 萬人譜 18 사람과 사람들


高銀

2004, 창비



시흥시대야도서관

SB001806


811.6

고67만  18


창비전작시


시인 고은은 20여년 전부터 한국사에 드러나고 숨겨진, 스러지고 태어나는, 추앙받고 경멸당하는, 아름답고 추악한, 떳떳하고 비굴한, 그 수많은 사람들을, 붓 대신 언어로, 그림 대신 시로, 거대한 민족사적 벽화를 그리고 있는 중이다. 거기에는 한국인이라면, 아니 인간이라면 지을 수 있고 짓지 않을 수 없는 숱한 표정들이 늘어서 있고 그들의 천태만상의 갖가지 삶의 모습들이 벅적거리고 있으며 절망과 한(恨), 운명과 열정, 기구함과 서러움의 삼라만상적 인간상들이 복작거리고 있다. 그것은 삐까쏘의 「게르니까」보다 더 착잡하고 내가 멕시코씨티의 정부청사 안에서 보았던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보다 더욱 거창한 서사를 담은 우리 한민족의 벽화를 이루고 있다. 고은은 『만인보』라는 벽화-민족사를 통해 우리의 고통스러운 역사를 되새김질하며 그 역사를 만들어오고 혹은 그것에 짓밟힌 만상의 인간들을 사랑하며 껴안고 뺨 비비며 삶의 진의와 세계의 진수를 손가락으로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고은이 그린 사람들에게서 한을 듣고 그가 그린 세계에서 향기를 맡으며 그의 만인화(萬人畵)에서 세계와 시대를 읽는다. 그리고 이제, 나는 여기 그가 그려준 거대한 벽화를 보며 분노와 치욕 그리고 운명과 사랑이 점철된 그의 '역사'를 듣고 오늘의 삶을 생각한다.

■ ■ ■ 김병익  문학평론가, 인하대 초빙교수


고  은  高  銀

1958년 처녀시를 발표한 이래 시 · 소설 · 평론 등에 걸쳐 130여권의 저서를 간행했다. 서사시 『백두산』『만인보』와 『고은시선집』 1 · 2 『고은전집』(전38권)을 출간했다. 현재 세계 시아카데미 회원(한국대표)이다.


차례


이승만 / 이윤 상사 / 개성 노인 / 아기 채영진 / 김기희 / 옥례 남편 / 최규봉 / 이삼혁 / 유기연 / 강동정치학원 / 이태랑 중령 / 이원섭 대위 / 어느 장교 / 홍덕영 / 거문도 장도준 영감 / 용녀 / 신광수 / 어린놈 혼자 / 대문 / 육군 소위 / 미친 노인 / 연보수 노인 / 완주 봉동면 총소리 / 선우휘 / 전우익 / 사미승 동명 / 1950년대 한반도의 하늘 / 1953년 강릉 황소 / 김명국 / 동대문시장 김삼룡이 / 동대문시장 육도수 / 김종호 / 박기종 / 심분례 / 김달삼 / 김재복 / 세자 불공 / 어린 문석이 / 무남촌 제사 / 지나가는 여인 / 갈보 히라노 / 박영만 / 죽통미녀 / 심주식 / 석낙구 / 기만이 영감 / 중대장 오판남 소위 / 김필순 / 갈채다방 옆 뼉다구집 / 가두방송원 최독견 / 김현수 대령 / 금강 / 지귀 / 손달수 / 소녀 봉순이 / 역관 김을현 / 1952년의 풍경 / 고와마루 / 따발총알 / 명당 / 풍년초 / 참호 / 서울역전 / 1950년 10월 김성구 / 박충남 / 꿈 / 강신재 / 열한살 국민학생 / 이만석 / 이진상 / 민재우 / 김인태 목사 / 1950년 음력 4월 8일 밤 / 선우기성 / 이승희 / 이종형 / 귀머거리 할멈 / 얼음부자 노필순이 / 백만동이 / 어린 경태 / 수도약국 / 연탄재 / 임걸출 / 대장장이 조병하 / 상문이 / 이일선 스님 / 마지막 수업 / 아기 순열이 / 근초고왕 / 이접야 / 김종오 장군 / 박진경 중령 / 송호성 장군 부인 / 임행술 / 허인애 / 서울대 수학과 교수 최윤식 / 하조대 / 김매자 / 조소앙 / 수색 복자 / 노형중 할아버지 / 제주도 계용묵 / 기선이 어머니 / 이따 만나세 / 열두살 / 김춘식 중위 / 펀치볼 혈전 전야 / 척(尺) / 10월 22일 밤 / 안병범 대령 / 비원 윤황후 / 한 노인의 독백 / 카프카를 때려치운 한 청년의 일기장 / 이황 이완 형제 / 심득구 / 영섭이 엄마 / 이완 / 김삼봉 / 신노인 / 김정호 / 임종명 중사 / 균여 / 남신동이 마누라 / 의암호 중도 / 나의 가계 / 윤석이 아저씨 아주머니 / 권철 / 허난설헌의 참(讖) / 차복이 / 조향 / 오영수 / 실어(失語) / 통역 고예환 / 쥐 / 약혼녀 / 김동삼 / 주세죽 / 정인욱 / 바 나이아가라 / 인천 청년 / 혜화동 로터리 / 유언 / 왕십리 / 이도빈 / 김천다리 / 원천호수 / 지경 주막 / 명단이


이승만


나라의 불행을 잘 썼다

나라의 모순을 잘 쓰고 남겼다


이겼다


벗어나지 못한 봉건

망명지 하와이의 임종 침대

거기서 평생의 의식을 놓았다

남은 헛소리

어린 시절

고향 황해도 두메 사투리였다

날래 오라우 날래 오라우


두번째 양자가 서 있었다


이윤 상사


1950년 6월 28일 낮

중앙청과

서울 시청에 인공기가 올라갔다

잠시 비가 멈췄다


싱거운 전투가 있었다

국군 이용문 대령의 마지막 명령


각자 해산하라


그때 일등상사 이윤이 남았다

제 가슴을 권총으로 쐈다

쓰러지며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


부모도 없다 아내도 묻어줄 전우도 하나 없었다


개성 노인


감자꽃이 피었다

어제까지

개성은 대한민국

오늘 아침까지도

개성은 대한민국


비 온 뒤

만월대 풀섶 나비떼 온데간데없다

1950년 6월 26일 낮

개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계철규 옹은 남아 있었다

큰아들 창희는

해주 외숙 만나러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작은 아들 창섭은

막 대한민국 백선엽 사단 신병으로 후퇴했다


어쩔거나

달 뜨는 밤 자랑스럽던 7천평 삼포도 감자밭도 아무 소용 없다


거문도 장도준 영감


아홉살에

아버지 잃었다 아버지의 무덤 없다


아버지가 타던 배 탔다 엉엉 울었다


그 아홉살에 시작한 고기잡이

예순아홉살에도 놓지 않는다


이름 석자 쓸 줄 모르나

물 속 멸칫길 갈칫길

조깃길 홍엇길 훤하디훤하다

물 위 마파람 동부새

정월 하늬바람 훤하다

고래파도 충무공파도 큰애기파도 순실이파도 훤하다


한평생 강아지파도 훤하디훤하다


거문도에도 인민군 건너온다 한다

장영감이 그물 걷다가 중얼거린다

뭣하러 와 왔다가 바로 돌아갈 것을


사미승 등명


외금강 신계사

사미승 등명(燈明)


나뭇짐 벌떡 일어서면

저 비로봉 영랑봉 들도 눈을 껌벅여온다


어제의 고아

내일의 혁명가 홍범도의 한때 인연

신계사 앞

신계천 물소리 젖었다


저 청산리

저 시베리아

저 대륙 아득한 황무지 타슈켄트의 아비였다

그 아비의 전생이었다


1950년대 한반도의 하늘


석달 가뭄 하늘이 미웠던 적이 있습니다

석달 폭격 하늘이 없어졌습니다

석달 공포 하늘을 바라볼 겨를 없었습니다

석달 학살 하늘밖에 남은 것 없었습니다


하느님이란

하늘에 바치는 경칭일 뿐입니다


불발탄 캐내다

다리 하나 잃은

열네살 안병기 녀석한테는

저녁 낙조의 하늘이 살아서 돌아오는 아버지였습니다


어머니의 무덤도 모르는

열다섯살 필례에게는

별 몇개 나와 있는

구름 낀 하늘이 어머니의 무덤입니다


지나가는 여인


저게 누구?

저게 누구 마누라?

세모시적삼 속 살결

백옥

낭자머리 비녀

청옥


저게 누구?

헌병대장 사택으로 들어간다

허리 곧다


한달 전 빨갱이 마누라로 체포되었을 때

죽음 대신

대장의 세번째 네번째가 되었다


곧 양품점도 차린다 한다


기만이 영감


낮에는 뻐꾸기

밤에는 벌써 귀뚜라미


마누라가 영감의 입을 가져갔나

마누라 묻은 뒤로

기만이 영감

통 말문이 막혔다


소달구지에

물외 참외 개구리참외 잔뜩 싣고

시오리장에 다녀온다


밤중 빈 달구지

다 와서야


기만이 영감 입 열려

소도로 한 말 그것뿐

세상에는 말이 자꾸 늘어나는데

말싸움 늘어나는데

기만이 영감의 말은 마누라 무덤에 영영 묻혔나


김현수 대령


1950년 6월 28일 새벽

국방부 정훈국 보도과장 김현수 대령

전쟁 발발 4일째

이제 서울은

대한민국 수도가 아니었다 다 도망쳤다

그는 혼자 남았다

명동 정훈국에서

정동방송국으로 갔다


인민군이 방송국을 접수한 뒤였다

정지! 수하?

그가 보도과장 김현수 대령이라고 말했다

말하자마자

따발총 몇발이 그의 몸을 뚫었다

쓰러진 채

권총을 뽑아들었다

세발 총탄은 허공을 뚫었다

단 한 사람 남아 있던 대한민국 장교 비겁하지 않았다

전남 보성 강골의 아버지 핏줄이었다

두달 뒤 아버지도 학살당했다


소녀 봉순이


휴전 반년이다

못 견디는 북소리 등등 들려온다

소녀 봉순이

빨래 걷어놓고 보따리 챙겨들고

길을 나섰다


북소리 둥둥 들려온다

어디든지 갈 테야

어디든지 갈 테야


칫솔도 비누도 없이

모르는 길을 나섰다

이렇게 북소리의 다음이 시작된다


1952년의 풍경


오늘 최전방

철원이 없어지고

신철원이 생겨난다


중부전선

중공군 전사 70여명

인민군 전사 40여명

아군 전사 25명

미군 전사 3명

어제보다 전사자가 더 늘었다


오늘 후방의 8월

개의 하루가 지나간다

늘어지게 자고 나

앞다리를 뻗는다 썩는 냄새 부쩍 늘었다


후방이야말로 적이다


명당


서부전선 감악산 북쪽 기슭

포탄웅덩이

황토웅덩이

거기 민간인 시체 걸쳐 있다

명당이었다


어디서 태어난 누구인지

별이 빛나는 밤

연애는 해보았는지

감기는 몇번이나 앓았는지

결혼은 했는지


벌써 썩어 문드러진 부란(腐爛)의 사내 송장이었다

포탄웅덩이

천하제일 명당이었다 아서라 말어라


1950년 10월 김성구


오랜 정

오래 이어가는 정


천년 백성에게 남아 있는 그것


그것이 강도 같은 이데올로기로 다 없어져

우익 아버지

좌익 아저씨 다 죽고

나는 핏발 섰다

잿더미 위에서 내 이름은 김성구


달겨드는 짐승 같은 세월만이 나를 먹으리라


김인태 목사


1920년대 북만주 밀산

밀산 예배당

김인태 목사

머릿기름 발라

바람에도 머리 단정했다

심방길

중절모를 써 단정했다


그는 독립운동하는 사람들 만나면

민족 찾지 말고

하느님 찾으라

오로지 하느님만 찾으라

천당 가야 한다


아편장수한테도

하느님을 찾으라

그래야 아편도 잘 팔린다


북로군정서 이강훈을 만난다

그가 김목사에게 먼저 말했다

제발 하느님 찾지 말고

민족을 찾으시라


상문이


태풍이 왔다

2년째 누워 있던 환자 상문이

벌떡 일어났다

벌떡 일어나 소리질렀다

태풍으로 문짝 떨어져나갔다

상문이 신났다


태풍이 갔다

상문이 다시 누워버렸다


아주 누워버렸다 흰 천이 덮였다


아기 순열이


문산 남쪽

두 시간의 중포탄 포격이 뚝 멈췄다

1950년 6월 26일

적막 속

숨은 사람들이 나왔다

조심스레 입이 열려 말이 나왔다

너 살아 있었구나

아저씨도 무사하셨군요

전선은

벌써 남쪽 행주산성으로 내려가 있다


초가삼간

문짝 떨어져나간 방

돌 지난 아기 순열이 혼자

두 대째

지나가는 탱크를 보고 있다


멈춘 울음은 더이상 나오지 않았다

방구석 저울대를 꼭 쥐고 있었다

엄마는 어디 갔나


김매자


화북마을 숨은 샘물

밀물에 숨은 샘물

어김없이

썰물에 나타납니다

밀물 때

밀물에 덮여 잠들어 있다가

썰물 때 나타나

비바리 물허벅에 가득 채워줍니다


스무살 김매자

물허벅 지고 돌담길 돌아옵니다

이마에 젖은 머리카락

센바람에도 일어날 줄 모릅니다

입속에는 무슨 웃음이 담겨 있는지

좀 들썩일 듯합니다

한라산이 뚜렷한 목소리로 다가옵니다

밀물 수평선 넘어 해조음도

우르르 달려옵니다

매자 혼잣말

인석씨는 잘 있는지 ……


비원 윤황후


비원 낙선재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아내 황후 윤씨

늙었다

늙어 단아했다 낭자머리 비녀에 무딘 존엄이 서렸다


세 상궁

오라버니 윤홍섭 옹

그밖의 자질구레 왕실 일가붙이 함께였다


마안 왕조의 뜰 바깥세상 없이 고요했다

닫힌 방

염주 구을리다 말다

서방정토 향해서 꽃 지듯 숨쉬고 있었다


그저 지나갈 까닭이 없다 이런 곳에도 땀이 밴 인민군이 들이닥쳤다

황후 윤씨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완


어디에도 그 쨍한 눈초리 닿았다

잠 속에서

잠들지 않았다

자객

칼기운이 오싹 다가오면

영락없이

칼집에서 칼이 벌써 나와 있었다


바스락


한밤중 3경

가랑잎새 구르는 소리이면

영락없이

칼집에 칼이 들어가 있다

어디에 고요만한 각성이 있는가


아침 저녁

부하나 구종배에게 시키지 않고

몸소 쑨 여물을 말 앞에 밀어준다


내일은 강 건너 오랑캐를 치러 간다

별들이 도우리라



폭격 뒤

삐쩍 마른 쥐가 왔다

반가웠다


너도

나도 어마나 배고프냐


다리 없는 기철이가 목침을 던져

녀석을 잡아 구워먹었다

죽을 때 내지른

녀석의 비명을 구워먹었다


전쟁은 언제 끝날지


김천다리


휴전 뒤

폭파된 다리 다시 걸렸다

새 다리는 웅크라(UNKRA) 지원 현수교

강 건너

친구 만나러

목발 짚고 건넜다


친구는 세상 떠나고 없다

그 마을 동구밖

박넝쿨 올린 주막 주모도 다른 사람이었다

그리움이 푹 꺼져버렸다


아직 풀섶에 불발탄이 잠자코 숨어 있다


원천호수


며칠째 도박 단속 풀리지 않았다

망국의 도박 발본색원한다는 것


두 꾼

여봉철

하진섭


원천호수 배 타고

호수 복판에 가 화톳장 폈다


먼 데서 바라보면 잉어잡이 틀림없다






저작자 표시
posted by 드무 황영찬

2015-046 버르토크, 그 삶과 음악


스티븐 존슨 지음 이석호 옮김

2014, PHONO



대야도서관

SB101476


670.99

존57ㅂ


Bartok His Life and Music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 시리즈 10


Bela Viktor Janos

Bartok 1881-1945


독특하고 새로운 자연의 소리를 창조한 작곡가,

벨러 빅토르 야노시 버르토크의 삶과 음악


동유럽 민요와 자연을 토대로 삼아 민족적 색채를 기조로 삼으면서도,

종래의 조성이나 음계에 머물지 않고 창조적이고 밀도 높은 20세기 걸작을 만들어낸

벨러 버르토크, 그의 호소력 짙은 음악은 오늘날까지도 작곡가들과 연주자들을

여전히 매혹시키고 있다. 그는 리듬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부터 악기의 음색을

취급하는 방법, 심지어는 음악가라면 누구나 사용하는 음계 같은 기초적인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독특하고 도전적인 실험을 시도했고,

피아노 독주곡, 관현악곡, 현악 사중주곡 등 손대는 장르마다

새로운 종류의 표현과 시정詩情을 담은 신선한 그릇으로 탈바꿈시켰다.


버르토크의 음악이 생경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 처음 충격의 진입 장벽만

넘고 나면 놀랍도록 아름다운 소리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참신하고 대단히 자극적인 풍경을 만나고, 섬세한 음악과 거친 강세가 귀를 때리는

음악이 공존하는 것을 보며, 때로는 그 무한한 생산력과 자기 재생력 앞에서

일종의 종교적 경외마저 느끼게 된다.

이 책의 음반 2장과 함께 버르토크의 소리 여정을 따라가 보면

여전히 깊은울림을 전하는 그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멀티미디어 전기에는 다음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1 책에 소개된 음악이 수록된 음반 2장

2 버르토크의 음악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용어집

3 버르토크의 생애와 그 당시 문화예술,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비교 연표


스티븐 존슨 Stephen Johnson

맨체스터 노던 스쿨 오브 뮤직과 리즈대학을 거쳐 맨체스터대학을 졸업했다. <인디펜던트>와 <가디언>지에 정기적으로 기고해왔고, <스포츠맨>지의 수석 음악평론가로도 활동했다. BBC 라디오 제3, 4 채널과 월드 서비스가 제작하는 프로그램에도 자주 참여했으며, 1996년에는 브루크너 사후 100주년을 기념해 특별 제작된 총 14편 분량의 다큐멘터리에도 출연했다. 《말러, 그 삶과 음악》《바그너, 그 삶과 음악》《클래식, 고전시대와의 만남》《브루크너를 기억하며》를 썼고, 《켐임브리지 지휘 안내서》에 그가 쓴 글이 포함되어 있다. 2003년의 '아마존닷컴 올해의 클래식 음악 저술가'로 선정되었고, 현재 BBC 라디오3의 <디스커버링 뮤직>에 고정 패널로 출연 중이다.


이석호

보성중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좋아해 대학 졸업 후 <그라모폰 코리아>의 편집기자를 거쳐 EMI 뮤직의 클래식 부서에서 일했다. 현재 미국에 거주 중이며, 음악과 예술 전반에 관련된 좋은 책을 쓰고 알리는 일에 사명감을 느끼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바그너, 그 삶과 음악》《스트라빈스키, 그 삶과 음악》《왜 말러인가?》가 있다.


Contents

차례


서문 
들어가며 
제1장 간추린 생애 
제2장 자연으로부터 
제3장 음악의 순수한 원천 
제4장 춤추는 리듬 
제5장 기이한 음계 
제6장 거울 
제7장 밤의 음악 
제8장 완전히 다른 세계 
제9장 절망과 희망 

부록 
용어집 
책에 나오는 주요 인물 
비교 연표 
찾아보기



음반 수록곡 목록

CD1 

1 집 밖에서 
Out of Doors, BB 89 
제3곡: 뮈제트 2:40 
No.3: Musettes 
예뇌 연도, 피아노 
Jeno Jando, piano 

2 미크로코슈모시, 제4권 
Mikrokosmos, Book VI, BB 105 
제142곡: 파리의 일기 중에서 1:29 
No.142: From the Diary of a Fly 
예뇌 연도, 피아노 
Jeno Jando, piano 

3 현, 타악기와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 
Music for Strings, Percussion and 
Celesta, BB 114 
제3악장: 아다지오 7:35 
Movement 3: Adagio 
벨기에 방송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알렉산더 
라바리, 지휘 
Belgian Radio and Television Philharmonic 
Orchestra / Alexander Rahbari 

열다섯 곡의 헝가리 농부의 노래 
Fifteen Hungarian Peasant Songs, 
BB 79 

4 제1번: 루바토 0:52 
No.1: Rubato 

5 제2번: 안단테 1:27 
No.2: Andante 

6 제3번: 포코 루바토 0:32 
No.3: Poco rubato 

7 제4번: 안단테?스케르초 0:29 
No.4: Andante: Scherzo 

8 제5번: 알레그로 0:48 
No.5: Allegro 

9 제6번: 안단테 2:34 
No.6: Andante 

10 제7번: 알레그로 0:46 
No.7: Allegro 

11 제8번: 알레그레토 0:31 
No.8: Allegretto 

12 제9번: 알레그레토 0:14 
No.9: Allegretto 

13 제10번: 같은 템포로 0:31 
No.10: L’istesso tempo 

14 제11번: 아사이 모데라토 0:40 
No.11: Assai moderato 

15 제12번: 알레그레토 0:31 
No.12: Allegretto 

16 제13번: 포코 피우 비보 0:29 
No.13: Poco piu vivo 

17 제14번: 알레그로 0:31 
No.14: Allegro 

18 제15번: 알레그로 1:23 
No.15: Allegro 
예뇌 연도, 피아노 
Jeno Jando, piano 

광시곡 1번 
Rhapsody No.1, BB 94b 

19 제1부(‘느리게’): 모데라토 4:38 
Prima parte (‘Lassu’): Moderato 

20 제2부(‘상쾌하게’): 
알레그레토 모데라토 5:40 
Seconda parte (‘Friss’): 
Allegretto moderato 
죄르지 퍼우크, 바이올린 / 예뇌 연도, 피아노 
Gyorgy Pauk, violin / Jeno Jando, piano 

21 현악 사중주 2번 
String Quartet No. 2, BB 75 
제2악장: 알레그로 몰토 카프리치오소 7:39 
Movement 2: Allegro molto capriccioso 
페르메이르 사중주단 Vermeer Quartet 

무용 모음곡 
Dance Suite, BB 86a 

22 제1악장: 모데라토 3:48 
Movement 1: Moderato 

23 제2악장: 알레그로 몰토 2:23 
Movement 2: Allegro molto 
본머스 심포니 오케스트라 / 마린 앨솝, 지휘 
Bournemouth Symphony Orchestra / 
Marin Alsop 

24 미크로코슈모시, 제6권 
Mikrokosmos, Book VI, BB 105 
제149곡: 불가리아 리듬에 의한 여섯 개의 
춤곡, 제2번 1:11 
No.149: Six Dances in Bulgarian 
Rhythm, No.2 
예뇌 연도, 피아노 
Jeno Jando, piano 

25 현악 사중주 5번 
String Quartet No.5, BB 110 
제3악장: 스케르초. 
불가리아풍으로 5:18 
Movement 3: Scherzo: 
Alla bulgarese 
페르메이르 사중주단 
Vermeer Quartet 

미크로코슈모시, 제1권 
Mikrokosmos, Book I, BB 105 

26 제35곡: 코랄 1:22 
No.35: Chorale 

27 제32곡: 도리아 선법으로 1:01 
No.32: In Dorian Mode 

28 제34곡: 프리지아 선법으로 0:52 
No.34: In Phrygian Mode 
예뇌 연도, 피아노 
Jeno Jando, piano 

29 미크로코슈모시, 제2권 
Mikrokosmos, Book II, BB 105 
제37곡: 리디아 선법으로 0:40 
No.37: In Lydian Mode 
예뇌 연도, 피아노 
Jeno Jando, piano 

30 미크로코슈모시, 제4권 
Mikrokosmos, Book IV, BB 105 
제105곡: 놀이 
(두 개의 5음 음계로 된) 0:58 
No.105: Game (with two five-tone 
scales) 
예뇌 연도, 피아노 
Jeno Jando, piano 

31 바이올린 협주곡 2번 
Violin Concerto No.2, BB 117 
제1악장: 알레그로 논 트로포 17:14 
Movement 1: Allegro non troppo 
죄르지 퍼우크, 바이올린 / 폴란드 국립 방송 
교향악단 / 안토니 비트, 지휘 
Gyorgy Pauk, violin / Polish National Radio 
Symphony Orchestra / Antoni Wit 

CD1 TT 77:03 


CD 2 

1 콘트라스트 
Contrasts, BB 116 
제2악장: 휴식: 렌토 4:45 
Movement 2: Pihen 
(Relaxation): Lento 
칼만 베르케시, 클라리넷 / 죄르지 퍼우크, 
바이올린 / 예뇌 연도, 피아노 
K?lm?n Berkes, clarinet / Gyorgy Pauk, 
violin / Jen Jando, piano 

2 피아노 협주곡 2번 
Piano Concerto No.2, BB 101 
제2악장: 아다지오? 
프레스토?아다지오 12:28 
Movement 2: Adagio ? 
Presto ? Adagio 
예뇌 연도, 피아노 / 부다페스트심포니 
오케스트라 / 언드라시 리게티, 지휘 
Jen Jando, piano / Budapest Symphony 
Orchestra / Andr?s Ligeti 

3 현악 사중주 5번 
String Quartet No.5, BB 110 
제1악장: 알레그로 7:25 
Movement 1: Allegro 
페르메이르 사중주단 
Vermeer Quartet 

4 집 밖에서 
Out of Doors, BB 89 
제4곡: 밤의 음악 5:14 
No.4: The Night’s Music 
예뇌 연도, 피아노 
Jeno Jando, piano 

5 피아노 협주곡 3번 
Piano Concerto No.3, BB 127 
제2악장: 아다지오 렐리지오소 9:32 
Movement 2: Adagio religioso 
예뇌 연도, 피아노 / 부다페스트심포니 
오케스트라 / 언드라시 리게티, 지휘 
Jeno Jando, piano / Budapest Symphony 
Orchestra / Andr?s Ligeti 

6 현악 사중주 4번 
String Quartet No.4, BB 95 
제3악장: 논 트로포 렌토 5:16 
Movement 3: Non troppo lento 
페르메이르 사중주단 
Vermeer Quartet 

7 중국의 이상한 관리 
The Miraculous Mandarin, BB 82 
마지막 장면 2:08 
Final scene: She resists 
no longer ? They embrace 
본머스 심포니 오케스트라 / 마린 앨솝, 지휘 
Bournemouth Symphony Orchestra / 
Marin Alsop 
8 바이올린 협주곡 1번 
Violin Concerto No.1, BB 48a 
제1악장: 안단테 소스테누토 10:09 
Movement 1: Andante sostenuto 
죄르지 퍼우크, 바이올린 / 폴란드 국립 방송 
교향악단 / 안토니 비트, 지휘 
Gyorgy Pauk, violin / Polish National Radio 
Symphony Orchestra / Antoni Wit 

9 야만적인 알레그로 2:49 
Allegro barbaro, BB 63 
예뇌 연도, 피아노 
Jeno Jando, piano 

10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Concerto for Orchestra, BB 123 
제4악장: 인테르메초 인테로토. 
알레그레토 4:28 
Movement 4: Intermezzo interrotto: 
Allegretto 
벨기에 방송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알렉산더 라바리, 지휘 
Belgian Radio and Television Philharmonic 
Orchestra / Alexander Rahbari 

11 현악 사중주 6번 
String Quartet No.6, BB 119 
제4악장: 메스토 6:30 
Movement 4: Mesto 
페르미에르 사중주단 
Vermeer Quartet 

12 피아노 협주곡 3번 
Piano Concerto No.3, BB 127 
제3악장: 알레그로 비바체 6:27 
Movement 3: Allegro vivace 
예뇌 연도, 피아노 / 부다페스트심포니 
오케스트라 / 언드라시 리게티, 지휘 
Jeno Jando, piano / Budapest 
Symphony Orchestra / Andr?s Ligeti 

TT 77:18


Chapter 1

A Life in Brief

제1장

간추린 생애


버르토크는 어른이 되어서도 매우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감정적인 고립감을 느끼는 일이 잦았는데, 이 또한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된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버르토크의 고등학교 졸업사진. 1899

버르토크의 여동생 엘자 버르토크(1885-1955). 1903

버르토크(왼쪽)와 코다이. 1918

조보르더라주Zobordarazs 마을(지금은 체코 공화국의 드라조프체Drazovce)에서 에디슨 축음기로 슬로바키아 민요를 녹음하고 있는 버르토크. 1907


Chapter 2

From Nature

제2장

자연으로부터


버르토크는 자연의 소리뿐만 아니라 자연의 구성적 원리를 취해 이를 음악적으로 변형시키곤 했다. 그의 기법은 아주 풍요로운 동시에 대단히 기이한 것이기도 해서, 듣는 이로 하여금 다른 행성의 표면에 발을 디딘 것만 같은 착각을 들게 하기도 한다.

콜레르트Kolberg 사의 첼레스타

레오나르도 피보나치. 아라비아에서 발달한 수학을 섭렵하여 이를 정리 · 소개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여러 나라의 수학을 부흥시킨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1202년 저술한 《주판서珠板書》는 당시의 수학서의 결정판이다.


Chapter 3

Pure Sources

제3장

음악의 순수한 원천


그가 관심을 보인 대상은 조국 헝가리의 농민 음악 그 자체에 국한되기보다는 오히려 그가 무엇보다 귀하게 여기던 자연과의 관계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모든' 농민 사회의 음악이었다.

러요시 코슈트. 1851

에디슨은 1877년에 '틴호일'의 축음기를 발명한 이후로 다양한 축음기를 만들었다.

에디슨의 신제품 축음기 홍보를 위한 광고. 1898

에디슨의 조수이자 역사상 최초의 녹음 엔지니어라 할 수 있는 테오 방게만(오른쪽)이 동료들과 녹음 재생 검사를 하고 있다. 1905


Chapter 4

Dancing Rhythms

제4장

춤추는 리듬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버르토크는 불가리아의 음악 문화를 진지하게 탐험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는 '복합' 댄스 리듬을 발견했다. 이는 헝가리, 루마니아 혹은 슬로바키아 지방의 '순수' 민속음악에서는 찾을 수 없는 새로운 요소였다.

부다페스트. 1900년경

헝가리의 전통 악기 타로거토

데이브 브루벡. 1972. 하인리히 클라프Heinrich Klaffs 컬렉션


Chapter 5

Strange Scales

제5장

기이한 음계


음렬주의자들에게는 서른두 개의 반복 음렬 중 어느 하나라도 오페라 한 편을 완성할 수 있을 정도의 밑재료가 되겠지만, 버르토크는 여기에 창의력을 아낌없이 쏟아부었고, 이는 계산기를 두드려가며 음표를 채워가는 음렬주의들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인 것이다.

버르토크. 1922

예후디 메뉴인. 1943

 

Chapter 6

Mirrors

제6장

거울

 

버르토크의 펜끝에서 쏟아져 나온 음악은 대단한 활력과 기묘한 시정詩情을 담고 있어, 딱딱하고 튼튼한 형식적 '그릇'을 앞에 두고 곡을 쓰는 것이 그의 악상을 옥죄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거기에 자유의 날개를 달아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연주자들과 리허설 중인 베니 굿맨(왼쪽에서 세 번 째). 당시로서는 드물게 흑인을 포함한 악단 캄보combo(소규모 재즈악단)를 편성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헝가리 바이올리니스트 옐리 다라니와 함께한 영국 연주 여행. 1922

 

Chapter 7

Night Music

제7장

밤의 음악

 

그는 땅거미가 내리고 난 뒤 장대한 헝가리의 평원을 마주했을 때 들려오는 소리의 천변만화에 매혹되어,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듯 귀를 떼지 못했던 적이 여러 번이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버르토크와 지휘자 프리츠 라이너Fritz Reiner(1888-1963). 셀프타이머로 촬영한 사진. 1943년경

 

Chapter 8

A World Apart

제8장

완전히 다른 세계

 

그의 독특한 내부 세계는 스스로 경험한 소리의 현상 및 대상을 다른 보통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경험하는 인식과는 매우 다른 차원의 것으로 변모시키는 동력이었다.

버르토크. 1927

버르토크가 사랑에 빠졌던 바이올리니스트 슈테피 게예르

 

Chapter 9

Despair and Hope

제9장

절망과 희망

 

버르토크의 마지막 완성작은 그렇게 '자연스러운' 조성을 신명나게 재확인하고 끝을 맺는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궁극의 비인간적 공포를 맞닥뜨린 상황에서도 자연에 대한 찬미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듯이.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구소련을 대표하는 작곡가로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틀 속에서 19세기적인 음악 형식을 취했다. 특히 만년에 이르기까지 작곡한 열다섯 곡의 교향곡과 같은 수의 현악 사중주는 20세기를 대표하는 교향곡과 실내악곡으로 꼽힌다.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에 있는 버르토크 조각상.

부다페스트 버르토크 기념관에 있는 버르토크 조각상.

버르토크의 얼굴이 새겨 있는 헝가리 1000포린트 지폐 앞면. 1983



저작자 표시
posted by 드무 황영찬

2015-045 고갱 - 고귀한 야만인

 

프랑수아즈 카생 지음, 이희재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35

 

082

시156ㅅ  30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30

 

Gauguin, "Ce malgre moi de sauvage"

 

언제나 원시의 파라다이스를

동경했던 폴 고갱. 그의 삶이 끝없는 출발의

연속이었던 것은 필연이었다. 파리,

코펜하겐, 퐁타벤, 마르티니크, 아를, 마침내 타히티로,

"나는 평화 속에서 존재하기 위하여, 문명의 손길로부터

나 자신을 자유롭게 지키기 위하여 떠나는 것이다."

고갱은 세계를 보는 시작과 예술의

행로를 변화시켰다. 벌거벗은 원시 세계와 투박한

여인의 검은 몸을 통해.

 

남태평양으로

출발하면서 고갱이 꿈꾸었던 것은

목가적인 은둔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영감(랭보가

말한 "고대 향연의 비밀을 푸는 열쇠").

오래 전에 망각된 종교와 전통, 장대한 원시

신화의 발견이었다. 지나치게 문명화되고 서양화된

타히티의 현실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고갱은

프랑스령 파페에테의 영사였던 자크 앙투안

뫼랑후가 반 세기 전에 낸 민속지 보고서

<오세아니아 일주기>를 활용하여 <마오리의 고대

신앙>을 펴냈다. 이 책은 가장 많이 알려진

자신의 그림 몇 점과 수채화 삽화를 곁들여

그가 직접 펜으로 쓴 필사본이다.

고갱은 보라보라 섬에 살았다는 폴리네시아의

신과 여신으로 이루어진 라에오이 종족의

이야기를 여기에 담았다.

 

차례

제1장 화가의 길

제2장 브르타뉴와 열대를 처음 만나다

제3장 인디언과 섬세한 남자

제4장 이아 오라나 타히티

제5장 몽파르나스의 열대

제6장 마지막 정열의 불꽃

기록과 증언

그림목록

찾아보기

 

프랑수아즈 카생 Francois Cachin

오르세 미술관의 감독이자 국립 미술관의 행정 감독관인 프랑수아즈 카생은 <폴 클레> <이탈리아 미래주의> <마네> <고갱> 등과 같은 굵직굵직한 전시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폴 시냑> <드가, 조각과 판화> <고갱>의 저자이기도 하며, 특히 고갱에 관한 책은 여러 권 집필한 바 있다.

 

옮긴이 : 이희재

1961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했고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말하기의 다른 방법> <포크는 왜 네 갈퀴를 달게 되었나> <꿈과 상상의 여행> <추적> 등이 있다.

제1장

화가의 길

 

아득한 옛날부터, 화가의 길로 들어선 사람에게는 오직 모방이라는 과제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장래의 화가는 부모 대에서 자식 대로 면면히 이어져 온 전통에 따라 수업했다. 그는 코흘리개 시절부터 전색제와 테레빈유의 악취를 맡고 때로는 포즈도 취하고 때로는 조수 노릇도 하면서 자랐다. 도제살이는 집안에서 이루어졌으며, 화가의 첫 작업실은 자기 집 지붕 밑이었다. 그러다가 낭만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정반대 성향을 지닌 개인들이 점차로 나타난다. 화가가 되겠다는 그들의 욕망은 반역행위였으며, 도피는 참된 나를 탐구하는 대단히 개인적인 탐구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이었다. 세잔과 마네가 그러했고, 고갱 역시 그러했다.

젊어서 찍은 사진을 토대로, 고갱은 타계한 지 23년이 지난 1890년 어머니 알린의 초상화를 그렸다.

1838년, 플로라 트리스탄(1803~1844)은 낭만적 사회주의의 여걸이었다. 그녀는 방랑벽 있고 반항적인 손자를 매료시켰을 것이 틀림없는 제목을 단 자서전 《천민의 방랑》을 출간했다.

페루의 주전자.

1800년대의 리마.

아들의 서류더미 사이에서 발견된 알린 고갱의 젊었을 적 사진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고갱이 이국미를 강조하여 그린 초상화의 토대가 되었다.

 

"리마의 전통의상으로 성장(盛裝)한 어머니의 모습은 얼마나 우아하고 아름다웠던가. 비단 베일은 눈만 드러내고 얼굴을 거의 다 덮었다. 어머니의 눈빛은 따사로우면서도 흡인력이 있었으며, 너무도 맑고 자애로웠다."

폴 고갱

《전후(前後)》

고갱의 초기 걸작 중 하나인 <바느질하는 메테>의 집안 정경은 당시의 평화롭던 생활을 반영한다.

1883년, 고갱과 피사로는 각각 스승과 제자의 초상화를 그렸다. 고갱의 선에는 피사로의 거침없는 스케치에서 볼 수 있는 힘과 예리함이 결여되어 있다. 노화가의 견해로는 이 젊은 화가는 다소 성급하게 전업화가로 나서려 하고 있었다.

"누드화를 그린 현대 화가 중에서 현실의 음조를 이보다 더 격렬히 두드린 사람은 없었노라고 나는 감히 단언할 수 있다."

J. K. 위스망

<바느질하는 수잔>에 대하여

<파리 화가의 가정, 카르셀 거리>에서 우리는 메테가 피아노 연주를 하고, 한 남자(아마 화가 자신이리라)가 지켜서서 듣는 모습을 본다. 이 대담한 구도는 드가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장갑 낀 여가수>는 드가가 1879년에 전시한 일련의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1890년에 조각되고 채색된 가수 발레리 루미의 메달은 드가의 영향과 갓 입문한 조각가의 굉장한 재능을 함께 보여 준다.

1885년 코펜하겐, 고갱의 첫 자화상은 다락방이 배경이다. 아래 사진은 비슷한 시기에 찍은 폴과 메테 부부.

<이브닝 가운을 입은 메테 고갱>의 다소 판에 박힌 모습은 그녀가 조만간 맞이하게 될 쓰라림과 악다구니의 세계와 한참 동떨어진 것이다.

다소 모호한 상황(상가집에서 밤을 새는 듯)이 배경에 펼쳐져 있는 정물화.

잠자는 딸을 그린 애정이 담긴 그림.

이 정물화는 대상의 선정과 색채에 대한 고갱의 천재적 감각, 이국적인 것에 대한 초기의 동경을 보여 준다. 고갱은 만돌린을 직접 연주했으며, 나중에 타히티에도 갖고 갔다. 벽에 걸린 그림 - 고갱이 수집한 피사로나 기요맹의 작품 - 은 당시 인상파가 선호하던 하얀 액자를 두르고 있다.

 

제2장

브르타뉴와 열대를 처음 만나다

 

아늑한 가정생활로부터 하루 아침에 떨려난 고갱은 상황에 휩쓸려, 마치 고독이라는 가시밭길을 운명적으로 선택한 사람처럼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성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갱은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하고 존경을 얻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평화롭게 작품에 전념할 수 있어야 했다. 고갱은 몇 달째 붓을 놓고 있었다. 1885년 여름부터 그는 "그림도 그리고 생활비도 줄이기 위해서 브르타뉴의 한적한 시골로" 은둔하고 싶다는 희망을 품었다.

브르타뉴 전통의상을 입은 이 자화상(1886)은 퐁다방에서 그린 것인데, 샤를 라발에게 바쳤다가 나중에 손질하여 또 다른 화가 외젠 카리에르에게 헌정되었다. 위는 <브르타뉴 여인들의 춤>의 일부.

퐁다방 시절 고갱의 옆모습. 에밀 슈페네커에게 보낸 사진이다.

글로아네크 여관은 1880년대 초 화가들 사이에서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빳빳하게 풀을 먹인 머리쓰개를 쓴 여주인이 손님, 종업원과 함께 여관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결국 고갱 하나만 유명해진다.

<브르타뉴 여인들의 춤>(1886).

<라발의 옆모습이 있는 정물>(1886). 고갱과 이 젊은 화가는 마르티니크 여행을 앞두고 있었다.

화가 고갱이 열대를 처음으로 만난(1887년) 곳은 마르티니크섬이었다. 이듬해 겨울 파리로 돌아왔을 때 그의 눈부신 작품 <열대식물>은 펠릭스 페네옹 같은 비평가, 테오 반 고흐 같은 미술상, 테오의 형 빈센트 반 고흐 같은 화가에게 격찬을 받았다.

<망고 따기>의 스케치에 해당하는 <마르티니크 여인>(부분)은 테오 반 고흐가 사들였다.

브르타뉴 조끼를 입은 고갱과 두 자녀 에밀, 알린.

고갱은 반 고흐에게 보낸 편지(아래)에서 <씨름하는 아이들>(위, 1888년 6월)에 대해 이렇게 썼다. "당신이 틀림없이 마음에 들어 할 브르타뉴의 씨름 장면을 막 그림으로 완성했습니다."

에밀 베르나르의 여동생 마들렌의 초상화. 마들렌은 1888년 여름 퐁다방에서 고갱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이 발랄하며 자립심 강한 소녀에게 홀딱 빠졌지만, 실망스럽게도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고갱의 제자로 마르티니크까지 동행한 샤를 라발이었다.

그해 여름 에밀 베르나르는 퐁다방에서 <사랑의 나무 곁의 마들렌>을 그렸다. "나의 누이는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신비스러웠다. …… 고갱도 나도 그 당시 우리가 '성격'에 대해 품고 있던 관념으로 말미암아(동생의) 겉모습 이상은 그릴 수가 없었다." 고갱은 조언을 한다는 구실로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에 여자에 관한 고갱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이 매력적인 여인의 삶은 짧고 비극적이었다. 그녀는 약혼자인 샤를 라발이 폐결핵으로 죽은 지 1년 뒤에 똑같은 병으로 죽었다.

에밀 베르나르는 1888년 여름 <풀밭의 브르타뉴 여인들>을 그렸다. 단순화된 질감과 공간, 굵은 윤곽, 변조되지 않은 순수한 색채의 확산에서 이 젊은 화가의 대담한 스타일이 고갱에게 끼친 영향을 읽을 수 있다.

고갱이 일본 판화에 지고 있는 빚은 <벼랑에 선 소가 있는 바다 풍경>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굽어보는 조망, 명암 없는 색채의 확산은 서로 맞물린 형태들의 추상적인 조합을 만들어 내고 있다.

고갱과 샤플레는 브르타뉴의 생활상을 담은 꽃병을 함께 만들었다.

초심자의 작품?

마리 잔 글로아네크는 고갱이 퐁다방에서 묵었던 하숙집을 운영했다. 1888년 그는 여주인의 성명축일(聖名祝日, 본인과 같은 이름을 가진 성인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 : 역주)을 맞아 이 정물화를 선사했다. 한때 이 그림을 소유했던 화가 모리스 드니에 따르면 글로아네크 부인은 대담한 색상과 단순화된 새로운 스타일을 가진 이 그림을 탐탁치 않게 여겼고, "(그녀가) 그림을 받도록 하기 위해 고갱은 '마들렌 B'라고 서명하여 이것을 초심자의 작품으로 꾸몄다."

그림에서의 상징주의

1888년 늦여름에 그린 <예배 뒤의 환상> 또는 <천사와 싸우는 야곱>은 나중에 선명한 빛깔과 단순성을 부르짖으면서 고갱과 퐁다방의 젊은 화가들이 주장했던 종합주의 화풍의 선언문 구실을 하게 되었다. 이 그림을 논한 장문의 글에서 비평가 알베르 오리에는 고갱에게 상징주의 미술학교의 교장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나는 이 인물들 속에서 매우 소박하고 미신에 가까운 단순성을 성취했다고 생각합니다. 전반적으로 이 그림은 아주 무거운 느낌을 줍니다. 이 그림에서 풍경과 싸움은 예배가 끝난 뒤 기도를 올리고 있는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입니다. 자연스러워 보이는 사람들과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는 풍경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의 대비는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1888년 퐁다방에서 빈센트 반 고흐에게 쓴 편지

우리는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강아지 세 마리가 있는 정물>을 그린 1888년 여름 무렵 고갱이 "어린아이처럼 그리기"를 꿈꾸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강아지 세 마리, 컵 세 개 등 그림의 주제 자체가 동심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초보적이며 일견 서툴러 보이는 기법인데, 이것은 원시적 소박성에 대한 의도적 추구를 반영하고 있다.

 

제3장

인디언과 섬세한 남자

 

테오 반 고흐는 고갱에게 참다운 관심을 가졌고 그의 천재성을 믿었던 최초의 미술상이었다. 테오 덕분에 고갱은 1888년이라는 중대한 해에 흔들림없이 그림에 몰두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고갱은 자신이 만들기 시작한 혁신적인-그러나 곧 물의를 빚게 되었던-작품을 테오에게 보냈다. 고갱은 마르티니크에서 돌아온 뒤 빈센트 반 고흐와 만났다. 그러나 당시만 하더라도 고갱은 빈센트를 단지 미술상의 형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었다.

고갱은 아내 메테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이렇게 묘사한 적이 있다. "내 안에는 두 가지 기질, 곧 인디언과 섬세한 남자가 공존해 있다는 걸 알아주기 바라오." 예술가, 고독한 영웅은 남편, 가장과 공존하고 있었다. 1889년 말 그는 자신을 후광을 단 성자 혹은 마술사로 그렸다. 그림 속의 인물은 예언의 상징인 뱀을 들고서 비법을 전수하고 있다.

'나의 벗 빈센트 (반 고흐)에게'라는 글이 적혀 있는 고갱의 자화상 <레 미제라불>. 두 사람 공동의 친구였던 젊은 화가 에밀 베르나르의 옆얼굴도 오른쪽 위에 보인다.

빈센트의 동생이며 그의 정신적 지주, 재정적 후원자였던 테오 반 고흐는 유명한 부조 & 발라동 화랑에서 현대미술을 담당하고 있었다.

 

"동심이 어린 꽃송이와 소녀 같은 배경은 우리의 예술적 순수성을 나타냅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에 대해서 말한다면, 사회의 억압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사랑과 힘은 부랑자처럼 바뀝니다. 우리 인상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나 자신을 장발장처럼 그림으로써 나는 나 개인을 넘어서서 사회로부터 비참하게 희생된 우리 모두의 자화상을 그리려고 했습니다."

1888년 10월 반 고흐에게 보낸 편지

아를에 있는 시인의 뜰에서 보낸 시절에 제작된 동일한 장면을 그린 그림 두 점. 한때는 반대로 간주되기도 했지만, 고갱의 <아를의 노부인>(위)은 반 고흐의 유화(아래)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카페에서>(1888년 11월)는 아를의 라마르틴 광장에 있는 종착역이라는 카페의 내부를 담았다. 카페의 내부를 담았다. 카페 주인 지누 부부는 반 고흐를 위해 자주 포즈를 취해 주었다. 지누 부인은 반 고흐가 그린 유명한 <아를의 여인>의 모델이기도 하다.

"나는 그저 그렇게 여기지만 빈센트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카페(장면)를 그렸다. 사실 그것은 나에게 어울리는 주제가 아니며 천박한 술집의 색깔은 나하고 맞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작품에 나타나 있을 때는 그런 대로 보아 주지만 내 그림에서는 조금 망설여진다. …… 위에는 붉은 벽지와 창녀 셋이 있는데 그중 한 명은 돌돌 마는 종이를 온 머리에 처발랐다. …… 전경에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아를의 여인이 있다. …… 한 줄기 파란 연기가 가로지르기는 하지만, 앞의 여인은 너무나 진부하다."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갱이 본 반 고흐

"빈센트가 아끼는 주제인 해바라기 정물화를 그리는 모습을 그려 보자는 생각이 우연히 떠올랐다. 초상화를 완성하여 보여주니까 그는 이렇게 말햇다. '나긴 난데 어쩐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뒤에 반 고흐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그림에 대한 자기의 느낌을 몇 마디 덧붙였다. "나긴 난데, 예전의 극심한 피로와 과열 상태에 있었던 모습 같다."(1889년 9월 10일) 이젤 옆의 해바라기는 돗자리를 깐 의자 위에 놓여 있다. 나중에 반 고흐는 고갱의 부재를 상징하기 위하여 <고갱의 의자>라고 제목을 단 그림에서 촛대 하나만 놓여 있는 텅 빈 의자를 그렸다. 위에서 조망하는 시선과 탈중심적인 구도는 갈등과 실의를 전달하는데, 그 점에서 이 작품을 심리적 초상으로 읽는 시각도 가능하다.

아를의 브르타뉴 여인

<아를의 포도 수확 : 궁핍한 생활>에서 고갱은 전경에 보이는 여인의 피로와 실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페루의 미라(아래)와 같은 자세로 그녀를 그렸다.

 

"위의 크롬옐로 빛깔을 배경으로 삼각형을 이룬 자줏빛 포도나무들 왼쪽에는 회색 앞치마를 두른 검은 옷의 브르타뉴 여인이 있네. 검은 보디스를 껴입고 연한 청록색 드레스를 입은 두 여인이 허리를 숙이고 있지. …… 아를에서 본 어떤 포도원을 그린 그림이라네. 그 안에 브르타뉴 여인을 집어 넣긴 했지만, 정확성이 다는 아니잖아! 내가 올해 그린 최고의 유화라네!"

에밀 베르나르에게

<황색 그리스도>(1889년 가을, 위)의 모델은 퐁다방 부근의 트레말로에 있는 한 성당의 채색 나무 십자가상이다. <예배 뒤의 환영>에서처럼 고갱은 자신이 매일 접했던 브르타뉴의 여인들을 성화 안에 등장시켰다. 아래는 퐁다방 시절 입고 다니던 브르타뉴 전통의상 차림을 한 고갱의 사진이다.

최근에 완성한 <황색 그리스도>(거울에 비쳐 거꾸로이다)와 자화상 형식을 취한 도자기 앞에 선 고갱의 자화상(1889-1890). 그는 이 담배 넣는 항아리를 마들렌 베르나르에게 주었다가 퇴짜맞았다. 그녀는 편지에다 이렇게 썼다. "그것은 야만인 고갱의 머리와 왠지 모르게 닮았다."

고갱은 동일한 주제를 다양한 매질로 재현하곤 했다. 1889년 봄에 그린 유화 <파도 속에서>(위)는 고갱이 파리 전시회에서 보았던 화장실 안의 여인을 그린 드가의 누드화에서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파도의 모티프와 농담 없는 색채의 드넓은 확산은 일본 목판화의 영향이다. 채색 부조 <신비로워야 하리니>(아래)는 이 장면을 재현하면서 동시에 타히티 누드화를 예감케 한다.

비록 모델에게 퇴짜를 맞기는 했지만 마리 안젤리크 사트르의 초상화 <아름다운 천사>는 고갱이 타히티 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1891년 드루오 호텔에서 열었던 작품 공매에서 드가에게 팔렸다. 테오 반 고흐는 그림을 넘겨받은 후 형에게 어떻게 편지를 썼다. "일본 목판화처럼 …… 아주 정교하게 배열된 그림이야. …… 여인은 마치 암소처럼 보이지만 소탈하고 신선한 맛이 있어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일게 만들지."

1888년 여름 폴 세뤼지에는 고갱의 지도아래 농담 없는 순수한 색채만을 이용한 <사랑의 나무>를 그렸다. 훗날 나비파로 알려지는 화가집단은 이 채색나무 패널에 <부적>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었다. 그들은 볼피니 카페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고갱과 그 동료들의 그림을 본 뒤 흠뻑 빠져들었다.

1889년에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는 기계진열실(철거됨)과 에펠탑 같은 거대한 철제 구조물의 각축장이었다. 아래는 막 문을 연 에펠탑의 밑부분이고, 위는 자바민속관에서 춤을 추는 무용수들이다.

고갱은 1889년 파리에서 잠시 기숙했던 슈페네커의 집안 분위기를 냉소적으로 그렸다.

머리가 잘린 이 자화상(위)은 고갱이 스스로를 예술때문에 처벌당한 범죄자로, 현대의 그리스도로, 후대의 오르페우스로 보았음을 암시한다. 상징이기는 했으나, 이것은 아래에 있는 <일본 판화가 있는 정물>에서 꽃을 품은 실용품으로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

친구요 제자였으며 마리 앙리의 여관에서 함께 묵었던 메이에르 드 한의 목조 흉상.

 

제4장

이아 오라나 타히티

 

"나는 평화롭게 살기 위해, 문명의 껍질을 벗겨 내기 위해 떠나려는 것입니다. 나는 그저 소박한, 아주 소박한 예술을 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염되지 않은 자연에서 나를 새롭게 바꾸고 오직 야성적인 것만을 보고 원주민들이 사는 대로 살면서, 마음에 떠오른 것을 마치 어린아이처럼 전달하겠다는 관심사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원시적인 표현 수단으로밖에는 전달되지 못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올바르고 참된 수단입니다."

1891년 쥘 위레와 가진 《에코 드 파리》지 회견에서

도착하고 얼마 뒤 고갱이 그린 <도끼를 든 남자>(위)는 단순하고 평온한 타히티의 일상생활을 특징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고갱은 테하마나라는 여인(아래)과 2년을 함께 지냈다.

작은 식민지 항구 파페에테는 1800년대 말에 이미 서구화되었다.

작품 <나페아 파아이포이포(언제 결혼하세요?)>를 위한 습작.

<베란다의 집안 풍경>. 흔히 <시에스타>라고 불린다(1892). 등을 보이고 앉은 방문객은 친구들과 그늘에서 담소를 나누기 위해 왔다. 다림질하는 모습도 보인다.

<타히티의 식사>(1891)는 굳은 표정으로 무언가를 의식하고 있는 세 아이를 그린 정물화이다. 앞에 바나나(타히티어로는 '페이') 뭉치가 보인다. 바나나는 그 화려한 색상과 강한 장식적 효과때문에 고갱이 즐겨 썼던 모티프이다.

<타 마테테>(장터)는 실제로 목격한 장면을 담고 있다. 파페에테의 젊은 창녀들이 진열대의 물건들처럼 나란히 앉아 있다. 테베의 이집트 무덤 벽화를 재현한 듯한 느낌도 준다. 고갱은 테베 벽화의 사진을 갖고 있었다.

고갱이 도착해서 바로 그리기 시작했던 타히티의 수많은 매력적인 얼굴 가운데 하나.

《노아 노아》에 따르면 <꽃의 여인>(바히네 노 테티아레)은 고갱 앞에서 포즈를 취해 준 최초의 타히티 여성이었다.

<이아 오라나 마리아>는 아베 마리아의 타히티 말이다. 1891년 고갱은 《성서》의 한 대목을 남태평양적 시각으로 해석한 이 작품에 대해서 다니엘 드 몽프레에게 이렇게 썼다. "노란 날개를 단 천사가 두 타히티 여인에게 마리아와 예수를 가리키고 있네. 마리아와 예수도 타히티인이고, …… 인물들은 허리에 적당히 두르는 '파레우'라는 꽃무늬 무명치마만 걸치고 있어. 꽃이 핀 나무와 산의 배경은 아주 짙고, 길은 연보라, 앞은 초록색이야. 왼쪽에 바나나가 있지. 이 그림은 그런 대로 내 마음에 드는군."

<파타타 테 미티>(바닷가)는 1892년에 그렸다. 헤엄을 치는 타히티 처녀들의 모습은 화가의 눈을 사로잡았으리라. 그곳은 원시의 에덴. 공짜로 쓸 수 있는 우아한 모델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풍부한 색상과 장식적인 패턴(앞부분)이 고갱의 그림에서 점차 중요한 몸을 차지한다.

<테 나베 나베 페누아>(환희의 땅)의 젊은 타히티 여인은 보로부두르의 사원 부조에 나오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고갱은 보로부두르 사원의 모형을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보앗다. 이 타히티의 이브는 사과가 아니라 공작 깃털을 닮은 가공의 꽃을 들었으며, 뱀-타히티에는 뱀이 없었다-대신 진흥 날개를 단 전설의 도마뱀이 등장한다.

테하마나의 이 정교한 목각상은 옆머리에 꽃을 단 고갱의 여인을 보여 준다.

점묘법으로 그린 수채화는 <테 나베 나베 페누아>(환희의 땅)의 변형으로 고갱이 지상에서 찾아낸 낙원 타히티의 이브를 그리고 있다.

《노아 노아》에 나오는 두 장의 삽화. 위는 폴리네시아의 신, 히나와 파투를 그린 수채화에다 히나와 파투를 묘사한 목판화와 꽃으로 치장한 한 타히티 개종자의 사진을 덧붙인 작품이다.

<메하리 메투아 노 테하마나>(테하마나의 선조)의 귀티가 흐르는 여인은 고갱의 정부이다. 뒤에 보이는 환상적 장식은 고대의 신비한 분위기를 낳기 위한 장치이다(위). 아래의 스케치는 이 작품을 위한 밑그림이었을 것이다.

<마나오 투파파우>(저승사자의 눈길)의 모델이 반대방향으로 누워 있는 수채화는 고갱이 나중에 파리로 돌아갔을 때 타히티를 무대로 한 자신의 작품들에 대한 세인의 거리감을 줄이기 위해 쓴 《노아 노아》 필사본의 삽화로 다시 등장한다.

필사본 《마오리의 고대 신앙》에 나오는 삽화.

저승사자

고갱의 타히티 작품전이 주목을 받지 못한 데는 타히티어로 된 그림 제목도 한 가지 이유로 작용했다. <마나오 투파파우>라는 이 작품만 해도 그렇다. 화단에서는 원주민 신화의 조명을 내건 이런 사이비 민속주의에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예컨대 피사로는 고갱이 "오세아니아의 원주민을 약탈한다."고 몰아세웠다. 고갱은 이해받으려는 욕심이 앞선 나머지 지나치게 작품의 의미를 드러내는 위험을 감수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갱을 진정으로 아끼는 이들은 이런 설화성의 부각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타히티 유화의 풍요한 이국미는 드가에게 감동을 안겼다. 이 모델의 얼굴과 투파파우(저승사자)는 고갱이 1894년 파리에서 제작한 목판화(아래)에 다시 나타난다.

초호의 한가로움

목가적인 1892년 작 <아레아레아>(기쁨)에서 한 여인이 타히티 피리(vivo)를 불고 있고 해변의 나무 그늘 아래에서 그녀의 친구가 가만히 듣고 있다. 1893년 뒤랑뤼엘에서 열린 고갱의 타히티 작품전을 찾은 사람들은 특히 앞에 보이는 빨간 개에 관심 혹은 두려움을 가졌다. 뒤편의 여인들은 폴리네시아의 토속신앙에서 전통무 타무레를 추고 있다.

"순수한 베로네제 그린, 순수한 주홍빛"

고갱은 다니엘 드 몽프레에게 쓴 편지(1892년 12월)에서 이 그림을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으로 꼽았다. "일단은 <타히티의 전원>이라고 프랑스어 제목을 붙였네. 그에 해당하는 카나카어를 찾을 수가 없었거든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순수한 베로네제 그린 하며 순수한 주홍빛 하며-오래 된 네덜란드 그림이나 고색창연한 태피스트리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드네."

이 대형 파스텔화는 <파라우 나 테 바루아 이노>(악마의 유혹)의 주인공을 위한 습작이다. 제목과 처녀의 수줍은 모습은 그 그림의 주제가 낙원에서 쫓겨난 이브라는 것을 말해 준다.

<껍데기를 쓴 신상>. 고갱의 '초야만적인 조각' 중 하나이다. 식인종 이빨을 가진 이 무시무시한 신은 보로부두르 유적의 불상처럼 반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

 

제5장

몽파르나스의 열대

 

1893년 12월. 고갱은 재능을 인정받고 경제적으로 안정을 누리며 무엇보다도 자신을 아껴 주던 친구들을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파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고갱은 혼자였다. 아니 혼자나 마찬가지였다. 반 고흐 형제, 알베르 오리에, 메이에르 드 한은 죽었고, 라발은 죽어 가고 있었으며, 메테, 몽프레, 세갱은 멀리 있었다. 그리고 피사로, 에밀 베르나르와의 관계는 악화되어 있었다.

위의 누드화의 모델은 고갱의 애인인 안나 라 자바네즈이다(1894). 아래는 《노아 노아》에 나오는 목판화이다.

상징주의 시인 샤를 모리스. 그는 고갱의 《노아 노아》 원고를 다듬어 주었다.

고갱이 뒤랑 뤼엘 전시회에서 포즈를 위했다. 그의 뒤편에 드가가 개인소장품으로 구입한 <테 파아투루마>(사색하는 여인)의 일부가 보인다.

베르생제토리가(街)에 있는 고갱의 화실을 자주 찾았던 스웨덴의 첼리스트 프리츠 슈네클루트. 고갱은 드가의 오케스트라 그림을 염두에 두었던 듯싶은데, 첼로의 장식적인 형태와 주황빛 색체를 강조하고 있다. 이 그림은 고갱의 글 속에서 드러나는 음악과 색채 사이의 비유를 연상케 한다.

이 목판화들은 고갱이 《노아 노아》를 위해 새겼던 일련의 작품 가운데 일부이다. <테 파루루>(사랑의 몸짓, 위), <테 나베 나베 페누아>(환희의 땅)의 두 판본. 가운데는 흑백, 아래는 색을 넣었다.

1894년 고갱의 화실에서 어울렸던 사교 및 음악 연주 모임. 첼리스트 프리츠 슈네클루트는 복판에 앉아 있다. 서 있는 사람은 (왼쪽부터) <부적>을 그린 화가 폴 세뤼지에, 안나 라 자바네즈, 그리고 뒤에 나비파로 활동하는 조각가 조르주 라콩브이다.

1898년 무렵의 안나 라 자바네즈. 알폰세 무차 촬영. 아래는 1894년에 그린 그림의 일부로 안나의 발치에 앉아 있는 애완 원숭이를 표현하고 있다.

1891년 1월에 고갱이 그린 말라르메의 초상화. 고갱의 유일한 에칭화이다.

고갱의 화실은 <모자가 있는 자화상>의 무대가 되었다. 배경에서 그가 집착했던 그림 <마나오 투파파우>. 타히티 천을 씌운 긴 의자의 일부, 그가 노랗게 칠한 벽을 볼 수 있다. 고갱은 이 그림 뒷면에다가 친구인 윌리엄 몰라드의 초상화를 그렸다.

유명한 양털 벙거지를 쓴 화가의 사진(아래). 이 사진을 기초로 한 <팔레트가 있는 자화상>(위)은 고갱을 옹호했던 상징주의 시인 샤를 모리스에게 헌정되었다.

"이제까지 그 누구도 하지 않았던 시도라고 나는 자신 있게 주장한다." <오비리>를 두고 고갱은 이렇게 말했다.

"이 기이한 형상과 잔혹한 수수께끼. 스테판 말라르메에게."라는 글귀가 적힌 <오비리>의 목판화.


제6장

마지막 정열의 불꽃


1895년 6월 28일 파리 역 리옹 행 개찰구.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고갱은 울고 있었다. 최후의 남태평양 여행이 막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병고와 술과 절망에 찌든 고갱은, 마침내 그 어떤 객기도 허세도 음모도 퇴색시키지 못할 참다운 고결함에 이르게 된다.

<백마>(위)는 하얗다기보다는 녹색빛이 감돈다.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말 타는 타히티 사람들은 두번째 타히티 체류 시절에 고갱이 즐겨 다루던 주제이다. 이 무렵 고갱은 울창한 녹음에 싸여 있는 사람들을 자주 그렸다. 아래는 날짜가 밝혀져 있지 않은 타히티 여인들의 스케치.

고갱이 죽은 직후 빅토르 세갈렌은 마르키즈 제도에 있는 고갱의 작업실을 찾았다. 발견된 유작 중에는 <골고다 부근의 자화상>(1896년 여름)도 있었다. 세갈렌은 이 그림을 이렇게 평했다. "아주 뛰어난 …… 자화상. 멀리 십자가처럼 보이는 것을 배경으로 다부진 상체를 곧게 편 모습이다. 땅딸막한 체구에 입술은 아래로 처져 있고 눈꺼풀은 무겁다.

고갱은 외동딸 알린을 가장 아꼈다.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적은 《알린을 위한 메모》도 딸에게 바쳤을 정도였다. 딸의 사망 소식에 접한 고갱은 1897-1898년 겨울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테 아라이 바히네>. "방금 대작을 완성했네. 가로 1.39m, 세로 1m 크기야. …… 알몸의 여왕이 녹색 융단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지. …… 그렇게 깊은 울림을 주는 색은 나도 난생 처음 보았다네."

몽프레에게

1896년 4월

<바이트 구필>은 파페에테의 부유한 변호사의 어린 딸을 그리고 있다. 타히티에 체류하는 동안 고갱이 화료를 받고 백인을 위해 그린 몇 안 되는 그림 중의 하나이다.

고갱과 함께 살았던 파후라가 딸을 낳았지만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테 타마리 노 아투아>(신의 아이)는 지쳐 누워 있는 산모말고도 아기를 막 데려가려고 하는 투파파우-<저승사자의 눈길>에서 나왔던 인물-를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를 위한 스케치. 트레이싱 페이퍼 위에다 그리고 수채화로 강조했다(위). 가운데는 완성된 유화의 일부. 팔을 괸 여인들이 생각에 잠겨 있다. 새(아래)는 <우리는……>의 중앙에 그려진 것이다.

<두 번 다시>의 타히티 모델은 고갱이 높이 평가한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 마네의 <올림피아>에 등장하는 나체 여인과 함께 고전의 반열에 올라섰다.

 

"<두 번 다시>라는 제목은 에드가 앨런 포의 <갈가마귀>가 아니라 망을 보는 악마의 새라네. 채색은 신통치 않지만…… 관계없네. 나는 이 그림이 좋으니까."

몽프레에게

1897년 2월 14일

 

풍자지 《게프》에 게재된 돼지를 타고 있는 원숭이 그림(위). 고갱은 《게프》에 글과 삽화를 기고했다. 《현대정신과 카톨릭교》 원고 표지를 위한 전사화(轉寫畵, 아래). 고갱은 이 글에서 당대의 교회와 복음정신의 쇠락을 통렬히 공박했다.

<다니엘 드 몽프레에게 바친 자화상>.

마르키즈 제도에 있던 고갱의 '쾌락의 집' 이웃이 그렸다.

고갱의 '쾌락의 집'에 걸려 있던 이 목각 현판은 한때 계단을 올라가면 나타나는 침실 입구에 걸려 있었다. 고갱의 작품에서 이미 나온 모티프들이 이 다색 부조에서 다시 나타난다. 예를 들어 가장 밑에 보이는 <신비로워야 하리니><사랑을 하면 그대는 행복하리라>는 10년 전 브르타뉴 시절의 조각작품을 연상시킨다.

마르키즈의 화가

<말 탄 사람들> 또는 <여울>(1901)은 뒤러의 <기사, 죽음, 악마>(이 그림의 복제화를 고갱은 자신의 《전후》 필사본 뒤표지에다 붙였다)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분홍 두건을 쓴 앞선 인물이 혹시 투파파우는 아닐까? 어쨌든 말 탄 사람들이 뚫고 지나가는 어둑어둑한 공간, 병풍처럼 둘러선 나무 줄기와 가지, 눈부신 해변과 그 너머로 보이는 바다가 조화를 이루어 화려하고 신비로운 장면을 연출한다.

열대의 경마장

<해변의 말 탄 사람들>(1902)에는 앞 그림과 같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개울을 건너고 어둠침침한 울창한 숲을 지나 빛과 색이 넘치는 공간으로 빠져 나온 그들은 멀리서 파도가 넘실거리는 분홍빛 모래 위를 자유롭게 달린다. 비록 무대는 열대이지만 이 장면은 드가의 <경마장>을 연상시킨다. 그만큼 고갱이 드가에게서 받은 영향은 컸다.

<해바라기가 있는 정물>은 고갱이 타히티를 떠나기 직전인 1901년에 그렸다. 2년 전 그는 다니엘 드 몽프레에게 해바라기 씨를 비롯하여 정원에 뿌릴 꽃씨를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타히티에는 해바라기가 없었다. 빈센트 반 고흐를 추모하려던 것일까?

빨간 머리의 아름다운 마르키즈 여인 토호타우아는 <부채를 든 여인>의 모델이었다. 아래는 고갱의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토호타우아이다.

고갱이 말년에 그린 뛰어난 남태평양 누드화 가운데 하나인 <원시의 이야기>(1902)는 폴리네시아, 아시아, 유대-기독교의 모든 신화를 집약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죽기 얼마 전 노안(老眼)과 병마에 시달리던 고갱의 가슴아픈 자화상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는 고갱의 가장 유명한 대작이다. 화가에 다르면 이 그림은 "올이 뭉치고 주름투성이인 삼베에다 곧바로 그렸기 때문에 표면이 무척 거친 인상을 준다."

오른족 아래에는 잠든 아기와 쪼그려 앉은 세 여인이 있다. 주홍색 옷을 입은 두 인물은 머리를 맛대고 무언가를 숙의하고 있다. 원근법을 무시하고 의도적으로 크게 그린 쪼그려 앉은 여자는 한 손을 들어 감히 자신들의 운명을 숙고하는 두 인물을 놀라운 듯이 바라보고 있다. 가운데 인물은 과일을 따고 있다. 아이 옆에 고양이 두 마리가 있다. 암염소도 보인다. 율동감 있는 신비스러운 포즈로 양팔을 들어올린 신상(神像)은 다가올 세상을 암시하는 듯하다. 앉은 인물은 신상 쪽으로 귀를 곤두세웠다. 마지막으로 노파가 있다. 죽음을 목전에 둔 그녀는 자기 생각에 골몰해 있는 듯하다. 노파의 발치에 있는, 도마뱀을 타고 앉은 야릇한 흰 새는 알맹이 없는 말의 공허함을 상징한다.이 모든 것의 배경은 시내를 끼고 있는 숲지대이다. 색조의 변화는 있지만 풍경은 균일하게 청색과 녹색 기운을 품고 있다. 대담한 오렌지 빛깔의 벌거벗은 인물들이 눈길을 끈다.

몽프레에게

1898년 2월

<마르티니크의 전원>. 《볼피니 모음곡》에서, 1889.

코펜하겐의 메테 고갱.

<브르타뉴의 기쁨>. 《볼피니 모음곡》에서, 1889.

<울타리 옆의 브르타뉴 여인들>. 《볼피니 모음곡》에서, 1889.

에밀 베르나르.

에밀 베르나르와 폴 고갱이 깎고 칠한 브르타뉴의 장롱. 1888.

타히티 푸나아이우아에 있는 고갱의 집.

폴 고갱의 초상. 다니엘 드 몽프레의 목판화.

《현대정신과 카톨릭교》의 뒤표지. 1897-1898.

<폴 고갱에게 바치는 자화상>. 빈센트 반 고흐. 1888.

<고갱의 의자>. 반 고흐. 1889.

<사랑에 빠지면 그대는 행복하리라>. 1889.

<마나오 투파파우>(저승사자의 눈길). 《노아 노아》에서. 1893-1894.

1894년경의 스트린드베리.

일본 종이에다 먹으로 찍은 <이브> 목판화.

아투오나에 있는 고갱의 '쾌락의 집' 문에 장식되어 있던 현판.

<브르타뉴의 멱감는 아이>. 《볼피니 모음곡》에서. 1889.

에드가 드가.

<자화상>. 외젠 들라크루아.

<기묘한 기구로서의 눈>. 석판화. 오딜롱 르동, 1822.

<리하르트 바그너 초상>. 오귀스트 르누아르. 1883.

 

저작자 표시
posted by 드무 황영찬

2015-044 한국의 샘물


글, 사진 / 민병준

2000, 대원사



시흥시매화도서관

SH013815


082

빛12ㄷ  238


빛깔있는 책들 238


민병준-------------------------------------------------------------------------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월간 『사람과 山』 편집장을 지냈다.  1996년 한국잡지탄생 100주년 기념 제30회 한국잡지언론상 기자부문을 수상했으며, 1997년에는 파키스탄 펀잡히말라야의 낭가파르밧(8,125미터)을 등반하기도 했다.

현재는 『주간 조선』 등 주간지와 월간지, 사보 등에서 여행과 관련된 기사를 기획 · 집필하는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의 약수』(대원사)와 등반 보고서인 『아름다운 낭가파르밧』이 있다.



|차례|


샘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강원도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샘물 약도

참고문헌

장릉  제사를 지낼 때 쓰이던 영천이 있다.

영월 청령포  단종의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삼부연폭포  깊은 협곡에서 쏟아지는 폭포수가 마치 그림 같다.

황지  태백에서 솟아난 이 물은 낙동강의 발원이다.

검룡수  하루 1 내지 2톤의 용출량을 자랑하는 검룡수는 일년 내내 수온이 일정하다.

태백산 용정  신라시대부터 지금까지 제사에 쓰이는 유서 깊은 샘물이다.

오대산 수정암  우통수 물이 마르기 시작 한 뒤부터는 석간수를 쓰고 있다.

오대산 우통수  관리가 잘 안 돼 물이 마르긴 했으나 여전히 물빛이 푸르스름하고 그윽한 맛을 지니고 있다.

오대산 적멸보궁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를 모신 5대 적멸보궁 가운데 하나로, 보궁의 어디에 진신사리를 안치했는지 알 수 없어 더욱 신비로운 곳이다.

보현청수  도둑머리고개라고도 불리는 험준한 고갯마루에 있는 또 하나의 맑은 샘물이다.


산따라 위험한 다리 건너

발을 포개며 좁은 길 걷네

위에는 백 길의 산마루가 있으니

원효가 일찍이 절을 지었네

신령한 자취는 어디로 가고

초상만 흰 비단 폭에 남았구나


차 끓이던 샘에 찬물이 고여

마셔 보니 젖갈이 맛있네

이곳에 예전에 물이 없었다면

스님들이 살기 어려웠을 것인데

원효가 와서 거처하매

단물이 돌구멍에서 솟았네

- 이규보(李奎報, 1168~1241) 「원효가 찾아드니 돌 틈으로 단물이 솟고」


원효샘  자재암 입구에 있는 샘으로 무색, 무미, 무취의 단아한 물맛을 갖고 있다.

자재암 나한전  원효샘은 나한전으로 바뀐 동굴 안에서 흘러 나오는 석간수였다.

 

숭의전  고려 태조 왕건과 7명의 임금, 정몽주를 비롯한 고려 공신 16명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연천 어수정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세운 왕건이 마시던 물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만어사의 종석너덜  1만 마리의 물고기가 변해서 된 것이라는 만어사 둘레의 돌들은 두드리면 맑은 종소리를 낸다.

보물 제564호인 영산 만년교  1780년 석수 백진기가 축조하고 1892년 현감 신현조가 석수 김내경을 시켜 중수했다고 한다.

세석평전  호야와 연진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는 철쭉이 고와 애잔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지리산 천왕봉  지리10경 가운데 첫손가락에 꼽히는 천왕일출은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고 한다.

성모석상  천년 전부터 지리산 천왕봉에 있었던 이 석상은 역사의 파란과 더불어 숱한 수난을 겪어 왔다.

지리산 천왕샘  천왕봉 바위 틈에서 흘러 나오는 이 샘물은 백두대간의 정기를 갈무리한 원시의 물 그 자체이다.

학사루  최치원이 함양에 부임하면서 지어 자주 올랐다고 전하는 누각이다.

함양 상림  신라시대에 조성된 호안림(護岸林)으로 역사상 가장 오래된 인공 숲이다.

농산정  홍류동계곡의 아름다움에 취한 고운 최치원이 노닐던 정자로 그가 지은 시와 함께 남아 있다.


첩첩한 산을 호령하며 미친 듯이 쏟아지는 물소리에

사람의 소리는 지척 사이에도 분간하기 어렵네

시비하는 소리 귀에 들릴까 두려워

흐르는 물소리로 산을 모두 귀 막게 했구나

- 고운 최치원 「제가야산독서당시(題伽倻山讀書堂詩)」


삼룡변어정과 모전석탑(국보 제30호)

과하천  김천의 명주인 과하주를 빚을 때 쓰는 샘물이다.

조령관  포장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흙길을 따라 걷다 보면 마지막 고갯마루에서 조령관을 만날 수 있다.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맹이로 다 나간다

홍두깨 방맹이 팔자 좋아

큰애기 손질에 놀아난다

문경새재 넘어갈 제

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

- 영남을 오가는 길손들이 문경새재를 넘어가며 부르던 민요

 

조령약수  문경새재를 넘나들던 선비와 장사꾼들의 목을 축여 주었던 중요한 샘물이다.

천일각  다산이 고향이 그리울 때면 올라가 구강포를 바라보며 마음을 달래곤 했던 곳이다.

백련사 동백숲과 부도  해마다 봄이 되면 붉은 동백이 지천으로 피어 장관을 연출한다.

다산초당 약천  차를 사랑했던 다산이 차를 끓일 때 이용했던 샘물로 여전히 맑은 물이 솟구쳐 오른다.

 

산골 물 차가운 소리 대밭에 감싸이고

봄 기미는 뜨락의 매화가지에 감도네

아름다운 가락이 이 속에 있으련만 달랠 곳이 없어

여러 번 어정거리다 마네

산의 정자엔 도시 쌓아 둔 책은 없고

오직 이 와경과 수경뿐이라네

새 비가 내린 귤숲은 자못 아름답구나

바위 샘물을 손수 떠서 찻병을 씻네

약 절구질 잦아지니 번거로운 곰팡이는 없건만

드물게 달이는 차풍로엔 먼지만 있네

- 다산 정약용

 

천은사 일주문의 현판  조선의 4대 명필 가운데 한 사람인 이광사가 쓴 것으로 이것을 일주문에 건 후에는 더 이상 절에서 화재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천은사 감로천  샘물이 담겨 있는 석조가 너무 커 물을 마시는 사람까지 압도하는 것이 아쉽다.

상사마을 당몰샘  수질 검사에서 대장균 없는 최상의 물로 판명되기도 한 당몰샘의 물맛은 매우 청정하다.

한국 제일 장수촌 기념비  상사마을 들머리에 서 있는 이 표석에서 당몰샘을 사랑하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구례 화엄사  지리산 자락의 이름난 사찰 가운데 가장 크고 장엄한 절이다.

낙안읍성 돌샘  예전에는 고을 수령은 물론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주로 이 샘물을 사용했다고 한다.

도갑사 석조  조선 숙종 때 커다란 화강암을 파서 만든 것이다.

영암 성천  월출산이 배출한 위인 왕인박사를 키워 낸 샘물로 이 물을 마시면 왕인박사와 같은 큰 인물을 낳을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일지암  초의선사는 작고 소박한 초막을 짓고 김정희, 정약용 등 당대의 지식인과 사귀며 다도와 선불교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일지암 유천  초의선사가 강조한 물의 여덟 가지 덕목을 갖춘 샘물이다.

달마산 금샘  바위에 뚫린 작은 굴 속에서 흘러 나오는 돌샘은 금빛으로 반짝인다는 것 때문에 더욱 신비롭다.

미황사 부도전

태안사의 현관 역할을 하는 능파각

태안사 경내의 석탑  지름 20미터 정도의 큰 연못 한 가운데 있는 이 석탑에 부처님의 사리를 모셨다고 한다.

고창 효감천  하늘이 오준이라는 사람의 효성에 감복해 내려 준 선물이다.

선운산 동불암 마애불  이 마애불의 배꼽에는 세상을 바꿔 놓을 비결이 봉해져 있었다고 전한다.

고창읍성

옥출약수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순창 고추장의 맛 비결이 바로 맑은 샘물에 있다.

강천사  기암절벽과 아기단풍의 절경으로 사랑받는 강천산에 자리잡은 비구니 도량처이다.

진안 풍혈냉천  삼복 더위에도 입김이 시릴 만큼 차가운 풍혈과 위장병, 피부병 등에 특효가 있다는 냉천은 한 쌍을 이뤄 불릴 만큼 유명하다.

진안의 진산 마이산  말의 귀를 닮은 독특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개태사  논산8경의 하나인 개태사는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한 기념으로 창건한 절집이다.

고란사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되었던 것을 고려 현종이 삼천궁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었다.

낙화암  백제의 멸망과 함께 삼천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일화 때문에 숙면함이 느껴지는 곳이다.

고란사약수  백제 왕들이 고란초를 띄워 마셨던 샘물로 왕이 마셨다고 해서 어정이라고도 한다.

만수산 무량사  매월당 김시습이 마지막으로 몸을 눕힌 곳이다. 신라시대 범일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나 절집의 방향, 위치, 와당, 석조 유물 등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량사 돌탑

무량사 샘물  차를 사랑했던 김시습이 말년에 무량사에 머물면서 차를 달일 때 썼을 샘물로, 꽤 깊은 맛을 풍긴다.

도담삼봉  단양8경 중에서도 으뜸으로 손꼽히는 제1명소이다.

김유신 장군 생가 터

연보정  김유신 장군이 마시던 샘물이지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

탄금대에서 본 남한강  탄금대는 임진왜란 때 장렬히 전사한 신립 장군의 한이 서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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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드무 황영찬

2015-043 태초 먹거리

 

이계호 지음

2013, 그리심

 

 

대야도서관

SB101015

 

517.54

이14ㅌ

 

기본이 회복되어야 한다.

 

"자연스럽고 단순한 것이 가장 좋다."

 

오늘도 여전히 똑같은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아픔속에 있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5년, 10년, 20년 뒤에 심각한 고통을 겪을 수 있는 젊은 사람들

갈 곳을 잃고 헤매는 수많은 이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이 책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내게 남은 마지막 숙제다.

 

[기본이 회복되어야 한다.]

기본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도하는 모든 것들은 오히려 몸을 망친다.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먹거리, 환경, 생활습관을 통해

잃어버린 건강을 회복하고 유지하는 것." 이것이 태초먹거리다.

 

이 분은 태초먹거리 학교를 여셨습니다. 뭔가 건강에 도움이 되는 그런 먹거리 학교는 틀림이 없는데, 사실은 이 태초먹거리 학교가 태어나게 된 데는 굉장히 가슴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2012. 3. 16_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 전 아나운서 손석희

 

강의를 들으니 우리에게 습관이라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강연 중 내용을 메모하신 분들도 많은데요. 실천에 옮기면 좋을 것 같습니다.

2012. 7. 20_KBS 1TV <강연 100도씨> 中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자연과학(화학)을 전공한 학자의 연구가 들어있습니다.

정성과 전문성이 절실함이 있는 충실한 책 한 권,

건강 잃고 고통 받는 당신 손에 쥐어드리고 싶습니다.

추천글_방송인 이금희


올바른 먹을거리에 대해서 얼마나 아세요? 이 분에게 배우면 제대로 배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분은 우리 몸의 건강을 위해서 올바른 먹을거리에 대한 학교를 운영하고 계세요.

2012. 9. 27_KBS 1TV <아침마당 '목요특강'> 中

 

결국은 이론에 불과한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서 문제점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개선하지 않으면

암의 치료도 없다는 것, 그 교훈을 주셔서 참 기본적인 것을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2013. 5. 14_MBN TV <엄지의 제왕> 자연치료 전문의 서재걸

 

돌아가고 싶은 어제와 고통스러운 오늘,

막막한 내일을 안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계호 교수는 영남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오레곤주립대학교(OSU)에서 분석화학, 이학박사 학위(Ph. D)를 받았다.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어바나-샴페인(UIUC)에서 박사 후 연구원(Postdoc.)으로 근무하였으며 미국 인디에나대학교(IU)의 방문교수로 지냈다.

 

현재는 한국분석기술연구소의 소장이자 충남대학교 화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태초먹거리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 TV방송 및 라디오 출연

· KBS TV <강연 100도씨>

· KBS 1TV <아침마당>

· MBN TV <황금알>

· MBN TV <엄지의 제왕>

· MBC TV <허참의 토크&조이>

·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

· MBC 라디오 <성경섭이 만난 사람>

· 대전 극동방송 FM 93.3 (매주 월요일 오후 6시 20분)

태초먹거리 학교에서는 경제성, 상업성, 편리성에 의하여 변질된 현대먹거리를 태초먹거리로 변경하여 건강을 회복하고 유지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일일 프로그램|

태초먹거리의 기초과정으로 건강한 삶의 회복을 시작하는 프로그램

 

* 옥천 태초먹거리 학교

· 일시 : 매월 둘째주 토요일 11:00~17:00

· 장소 : 충북 옥천군 청성면 양저리 97-3번지

 

* 대전 태초먹거리 학교

· 일시 : 매월 넷째주 툐요일 11:00~17:00

· 장소 : 대전시 유성구 반석동 642-1번지 온고을 빌딩 5층

 

|숙박 프로그램|

태초먹거리 식단에 대한 구체적인 실습, 강의, 나눔, 자연농업 실습 등의 프로그램으로 구성

 

* 일시 및 장소 : 신청자에 따라 결정

 

|리더양성 프로그램|

2박 3일 과정으로 태초먹거리에 대한 같은 생각을 가지고 국내 · 외에서 태초먹거리 강의를 할 수 있는 리더양성 프로그램

 

* 일시 및 장소 : 산청자에 따라 결정

 


|등록방법|

www.itbfood.net

itbfood@naver.com

070.8270.8333


 

차례

 

시작하면서         감사합니다

                              태초먹거리 학교는 이렇게 시작하였다

                              학교도 함께 지었다

 

과거                     흙집

                              먹거리란 무엇인가

                              인간의 수명

                              인간의 원래 모습

                              인간의 정신과 육체

 

현재                     현재 우리의 모습

                             실패한 성공자

                             상대적 빈곤감

                             먹거리 안전은 생존경쟁

                             먹거리는 전쟁이다

                             침묵의 살인자

                             먹거리 변질

                             주요 영양소와 미량 영양소

                             화학비료와 농약

                             사과 40개를 먹어야 하나?

                             색깔과 보기가 좋아야 한다

                             녹색 잎채소의 유혹과 진실

                             토양이 죽어가면서 신음하고 있다

                             케이지 사육

                             보암직 먹음직

                             홍시와 곶감

                             자연식품과 정제식품

                             정상인과 암환우의 차이

                             암환우의 시행착오

 

미래                    회복하기

                            자연치유력

                            기본이 회복되어야 한다

                            주인공과 엑스트라가 바뀌었다

                            현대의학과 민간요법

                             인간의 한계

                             후성유전학

                             일류대 다람쥐

                             행복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

                             비워야 산다

                             물이 회복의 시작이다

                             정수기 종류

                             물의 종류

                             착한 먹거리

                             친환경 농업과 자연농업

                             잡초는 잡초가 아니다

                             자연농업

                             전체식

                             많이 씹자

                             다이어트

                             태초현미식

                             진액과 효소의 진실

                             단맛의 종류

                             당 지수

                             생식과 화식

                             입과 위에서 일어나는 일

                             췌장을 도와주자

                             소장과 대장

                             변비는 만병의 시작이다

                             탄수화물

                             고기가 필요하지 않다

                             지방

                             오메가3와 오메가6

                             식이섬유

                             발효식품과 술

                             식품첨가물

                             채식과 육식

                             색깔을 먹자

                             황산화지수

                             스트레스를 이렇게 풀어라 Ⅰ, Ⅱ

                             균형식이 내가 살 길이다

                             단순한 삶

                             채움과 비움

                             몸이 따뜻해야 한다

                             짬짬이 운동

                             기쁨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마무리하면서   자연스럽고 단순한 것이 가장 좋다

                             잇비 : 회복하는 운동이다

 

부록                      태초먹거리로 온 편지

 

우리는 걸어 다니는 "흙집"이다.

그래서 반드시 "관리"를 해야 한다.

 

세상에 휘둘리며 사는 삶이 아닌 자연에 동화되어 스스로를 바로 세우는 삶, 그것이 자연인의 모습이다. 그리고 누구나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기쁨을 찾아 행복을 누리며 사는 과정이다. 사람다운 기쁨이 주는 값있는 행복이야말로 사람의 가장 처음 모습인 '자연인'으로의 삶을 사는 근본적인 해답이 됨을 기억해야 한다.

 

조화.

사람의 정신과 육체가 순리대로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비로소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무조건 많이, 무조건 저렴하게!'를 외치던 시대는 이제 지났다. 이제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얼마나 많이 먹느냐"가 아니라 "어떤 것을 얼마나 건강하고 가치있게 먹느냐"이다.

 

시간이 지나 색이 변하고 맛깔스러움이 덜 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소비자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생산, 가공, 유통되고 있는 것이 현실인 만큼, 우리 스스로 자연스럽고 볼품이 좀 없어도 영양이 듬뿍 담긴 음식을 선택하는 안목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대부분의 암환우들은 잘못된 습관 때문에 심각한 질병에 노출됐음에도 불구하고, 수술 등 단기간의 병원치료 후 원래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계속 잘못된 습관을 고치지 않고 생활한다면, 언젠가는 암이 재발하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글 중에서

-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자연이다.

- 음식물로 고치지 못하는 병은 의사도 못 고친다.

- 지나치게 먹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속을 텅 비워 버리는 편이 좋은 때도 있다. 병의 힘이 최고조에 도달하지 않은 한은, 공복인 채로 있는 쪽이 병이 치료되는 것이다.

- 원래 인간은 병을 치료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의사는 그 힘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만 하면 된다. 만일 육체의 대청소가 되지 않은 채 먹을 수 있는 만큼 먹으면, 그만큼 몸에 해가 된다. 병자에게 너무 먹게 하면 병마저 키워 가는 것이 된다. 모두 정도를 넘긴다는 것은, 자연에 반하는 일이라고 똑똑히 가슴에 새겨 두어야 한다.

- 병을 고치는 것은 환자 자신이 가진 자연 치유력뿐이다. 의사가 그것을 방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또한, 병을 고쳤다고 해서 약이나 의사 자신의 덕이라고 자랑해서는 안 된다.

 

아래의 예시에 속하는 환우들은 절대로 금식과 단식을 해서는 안 된다.

- 지난 몇 개월 동안 지속해서 체중이 감소하는 환우 중에서 복부에 있는 지방 등이 빠지는 것이 아니라 팔 근육[이두박근, 삼두박근 등], 다리근육[허벅지근육, 대퇴부 등] 등이 말랑말랑해지면서 체중이 감소하는 경우

- 설사를 자주 하거나 술, 담배를 많이 했던 환우자

- 평소 추위에 많이 약했던 환우

 

인체에 물이 부족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증상이 발생할 수 있다.

- 원인없이 피곤한 경우

- 쓸데없이 화를 자주 내고 긴장하는 경우

- 몸에 힘이 없고 머리가 무거운 경우

- 잠을 잘 못자는 경우

- 원인없이 숨이 가쁜 경우

- 인내심과 집중력이 부족한 경우

- 음료가 심하게 먹고 싶을 경우

- 물에 관련된 꿈을 많이 꾸는 경우

 

요즘은 물의 종류도 참 다양하다. 생수, 약수, 육각수, 약알칼리수, 수소풍부수, 환원수, 자화수, 해양 심층수 등 골라먹기도 힘들만큼 다양한 종류의 물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인체에 필요한 양을 얼마나 정기적으로 섭취하느냐는 것이다. 물을 먹는 것이 가장 어렵고 잘 하지 못한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물을 섭취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로 자연에 순종하는 방법이라는 점, 이 한 가지만 기억해두면 좋겠다.

 

* 태초현미식

태초현미식은 소화가 잘되도록 밥과 죽의 중간 형태로서 젓가락으로 먹을 수 있도록 요리하는 방법인데, 물의 양을 조절하여 원하는 형태로 취사하면 된다. 슬로우쿠커를 이용하여 '저온'에서 7시간 동안 조리하여 영양성분이 최대한 작게 파괴되도록 조리하는 방법이다.

각자의 기호에 따라 된밥이나 진밥에 맞춰 물의 양을 조절하면 된다. 식사하고 남은 태초현미식은 냉장고에 3~4일 동안 보관할 수 있고, 자연해동 후에 먹을 수 있다. 자연해동이란 전자레인지 등을 사용하지 않고, 저녁에 식탁에 놓아두면 아침 식사를 할 때 자연적으로 해동되는 방법을 의미한다.

 

수수, 기장과 같은 다른 잡곡류를 추가하는 것도 좋다. 고소한 맛을 원하는 경우 잣 등을 추가하고, 기호에 따라 첨가물을 추가해도 좋다.

 

검은콩은 단백질을 공급하고 율무는 항암작용, 그리고 녹두는 해독작용의 기능이 있다. 통 들깨는 두 가지 기능을 하기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첫 번째로 통 들깨는 오메가3 지방산이 풍부한 먹거리로,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필수적으로, 의도적으로 많이 먹어야 하는 먹거리이다. 오메가6 지방산이 많이 포함된 참기름, 콩기름 등을 주로 먹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오메가3 지방산을 보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태초현미식을 할 때 씹는 횟수를 "하나, 둘, 셋…." 헤아릴 필요가 없이 입안에서 현미식을 씹을 때 통 들깨가 "탁탁" 터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까지 씹으면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가정에서 사용하고 있는 전기밥솥 계량컵[1컵 = 160ml]을 사용하면 된다.

 현미 : 160g [1컵]

 검은콩 : 40g [1/4컵]

 율무 : 40g [1/4컵]

 녹두 : 40g [1/4컵]

 통 들깨 : 53g [1/3컵]

 물 : 640ml [4컵]

+ tip : 수수, 기장 등을 추가하는 것이 좋다.

 

2. 요리방법

태초현미식의 요리 방법은 초등학교 학생들도 할 수 있을 만큼 쉽고 간단한 방법으로 가족들이 함께 참여하는 것이 좋다.

 

- 통 들깨는 물에 담그면 물 위로 뜨기 때문에 통 들깨를 제외한 모든 곡류를 한꺼번에 깨끗이 씻는다. 돌을 제거하기 위해 조리질한다. 통 들깨는 따로 깨끗이 씻는데, 두 손으로 비비면서 씻어 흙, 먼지, 지푸라기 등을 제거한다. 여름철에는 사용하고 남은 잡곡류를 반드시 김치냉장고 등에 냉장 보관한다.

- 슬로우쿠커에 넣고 물을 붓는다.

- 온도는 '저온'으로, '7시간' 동안 천천히 조리한다.

 

* 태초현미쑥설기

1. 재료 : 20~30인분

- 현미 : 2kg

- 통 들깨 : 250g [기호에 따라 더 많은 양을 넣어도 좋다.]

- 쑥 : 적당량 [떡집에서 구입 시에는 쑥은 농약을 뿌리지 않은 곳에서 채취한 쑥을 사용하도록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봄철에 가족과 함께 야외로 나가 농약을 뿌리지 않은 땅에서 직접 채취한 쑥을 씻은 후 삶아서 냉동고에 오랫동안 보관하는 것이 좋다.]

- 기호에 따라 콩, 건대추, 곶감, 건 호박 등을 추가해도 좋다. 변비가 심한 경우에는 취나물을 추가하는 것도 좋다.

- 단맛을 좋아하는 경우는 설탕을 첨가하지 않은 건포도를 적당량 사용한다.

 

2. 조리방법

인근에 있는 떡집에서 쑥설기를 만들어 40개로 나눈다. 냉동고에 보관하면서 자연 해동하여 섭취한다. 마찬가지로 통 들깨 터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씹어서 먹는다.

 

혀를 즐겁게 하는 먹거리는 몸이 괴롭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한다. 단맛도 적당하게 즐겨야 한다.

 식품종류

GI

포도당 = 100 

 식품종류

GI

포도당 = 100 

 쌀밥

92 

과일류 

20~60 

 현미밥

 66

 사과 (중간크기)

 38

 보리

 25

 배 (생것)

 38

 호밀

 34

 바나나

 52

 프렌치 바게트

(흰색의 단순한 것)

 95

 복숭아 (큰 것 한 개)

 42

 베이글

 72

 수박

 78

 통 밀가루 빵

 73

 오렌지 (생것)

 42

 흰 밀가루 빵

 73

 파인애플 (생것)

 66

 감자 (삶은 것)

 78

 포도 (생것)

 25

 고구마

 44

 망고

 51

 검은콩

 30

 키위

 58

 강낭콩

 28

 자두 (생것)

 39

 5분 동안 삶은 흰 면

 38

 살구

 57

 쌀국수 (삶은 것)

 40

 아이스크림

 61

 메밀국수

(인스턴트 재가열)

 46

 산딸기 요구르트,

저지방 제품

 31

 우동

 55

 우유

 41

 -

 -

 탈지유

 32

 

위장에 좋다는 유산균 음료나 건강식품을 먹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씹는 것임을 기억하자.

 

자율신경에 의해 작동되는 모든 장기들은 나름대로 규칙에 의하여 질서 있게 작동되어야 하는데, 사람들의 나쁜 습관으로 현대인의 모든 장기는 혹사당하고 있다. 혹사당한 모든 장기들을 위하여 나쁜 생활 습관을 바꾸는 것이 건강 회복의 시작이다.

 

정상적으로 배변활동을 하려면 식이섬유가 풍부한 식단으로 바꾸어야 하고, 식이섬유가 많이 포함된 식사를 천천히 꼭꼭 씹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아울러 적당량의 물을 항상 마시고 매일 가벼운 운동을 하여 장의 연동운동을 활성화하여야 한다.

 

육식과 채식도 균형 있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식사하는 것이 좋다.

- 동물도 동물답게 방목하여 물을 많이 먹고 자란 동물의 고기를 섭취한다.

- 전체 식사량의 12.5% 이하로 단백질을 섭취하는데, 콩, 잡곡류에 많이 포함된 식물성 단백질도 함께 섭취하는 것이 좋다. 따라서 식물성 단백질을 섭취하는 양만큼, 동물성 단백질 섭취량을 줄여서, 전체가 12.5% 이하가 되도록 한다.

- 질 좋은 고기를 소량 섭취할 때도 항산화 성분인 비타민C와 식이섬유가 풍부하게 포함되어 있는 각종 채소를 함께 섭취한다. 식이섬유와 비타민C는 동물성 단백질이 소화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독극물을 중화하고 체내에서 머무는 시간을 단축하는 효능을 가지고 있기에 고기를 먹을 때는 필수로 함께 먹어야 한다.

 

스트레스는 색깔 있는 채소와 과일로 해결하자!

 

하루에 몇 번을 히죽거리면 좋을까? 가끔 실없어 보일지라도 기회가 되는 대로 히죽거리며 수시로 웃는 것! 그것이야말로 값없이 얻는 건강의 첫 걸음인 셈이다.

 

무질서해진 복잡함에서 단순함으로 바꾸는 일.

그것이 진짜 행복을 찾는 첫 걸음이다.

 

기쁨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현재 내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관계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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