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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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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 이불 속의 쥐

 

박남희 시집

2006, 문학과경계

 

 

시흥시대야도서관

EM049923

 

811.6

박1923이

 

경계시선 40

 

한국문학예술위원회 선정 2006 우수문학도서

 

아침에 일어나보면 천장에는 구멍이 뚫려 있고 여기저기 쥐오줌이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자고 있는데 무언가 이불 위로 툭, 떨어지더니

내 발 밑으로 기어들고 잇었다 그것을 발로 가만히 만져보니 시가 뭉클했다

박남희

경기 고양에서 태어났으며, 숭실대 국문과, 고려대 대학원을 나왔고,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폐차장 근처』가 있으며, 평론집 『존재와 거울의 시학』이 있다. 현재 계간 『창작 21』 『생각과 느낌』 편집위원으로 있으며, 숭실대와 일산문학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e-mail : nhpk528@hanmail.net

homepage : http://www.poemis.com

 

그의 시는 인간도 시간도 사랑도 상처도 구멍 속의 한 마리 벌레로 幻하게 하는 환유구조 속에 있다. 그가 본 구멍 속의 생들은 가령 지하동굴 속을 굉음을 지르며 달려드는 짐승 같은 전철을 타고 애벌레가 된 인간들이 '냉이 꽃을 지나 의정부를 지나 청량리를 지나 먹고 싶어도 돈이 없어 군침만 돌게 하는 도넛을 지나 시퍼런 한강을 지나 시퍼런 한강을 지나 직선이었던 마음이 어느새 곡선으로 휘어져 다시 원능역으로 닿는 끝없는 순환고리 속에 있다. 입구가 출구인, 어디로도 탈출구가 없는 그 속에서는 모든 것이 서로 중독되어 있다. '나무가 흙에게 중독되어 있는 동안, 참새가 구름까지 갔다가 다시 땅으로 내려앉는 동안, 지구는 참새와 나무와 흙을 떼메고 자신이 중독된 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려가는 이상한 중독의 세상! 거기서는 누구나 누군가 삼킨 먹거리들처럼 한데 엉겨서 싸우다가 끝내 하나로 섞이고야 마는 생이 되고 말지만 그는 그 이유를 알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 모든 것의 근원인 입이니까!

이경림(시인)

 

시인의 말

 

천장 반자 위로

쥐가 뛰어다니던 시절

나는 잠을 자다가 문득

발 끝에 이상한 감촉을 느꼈다

소란스럽던 천장에서

내 은유의 이불 속으로 스며든 쥐가

뭉클하게 만져졌다

 

시가 뭉클했다!!

 

2005년 늦가을

박남희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이불二不 / 병풍에 들다 / 블랙홀 / 문장이 나를 부를 때 / 허공에 돌 던지기 / 멍요일 / 못을 박으며 / 골목길 / 나는 가끔 주머니를 어머니로 읽는다 / 구겨진 시 / 개기일식 / 중독 / 나무의 우물 / 이카루스식 사랑법

 

제2부

이동 중 - 자야에게 / 천균天均 저울 / 꽃산, 가네 / 이상한 싸움 / 밥물천사 / 로또 계시록 / 봄, 55일 면허정지 / 달력 산부인과 / 불은 갑匣 속으로 들어가 숨는다 / 시뮬라크르 서울 / 사랑 / 쟁반들 / 일곱 번째 하늘 - 니체를 위하여

 

제3부

착시 / 어린 곡선 / 시란 무엇인가 / 새에게 / 추석 / 노을에 기대다 / 맑은 날, 병실에서 / 칠판을 지우며 / 지퍼 / 태초에 신은 오독誤讀을 창조했다 / 고양이는 독서 중 / 우물 / 주석에 들다 / 밥

 

제4부

버릇 / 너무 늦게 오는 저녁 - 장주의 꿈 / 하늘 오뚝이 - B 시인에게 / 사이 / 이브의 거울 / 구름 비빔밥 / 중앙선 위의 고양이 / 꽃에 관한 명상 / 주름의 강 / 동굴 속의 벽화 / 이상한 벌레 / 마리아와 게 / 사과는 썩을 때 아름답다 / 혓바닥들

 

해설 | 사변적 언술의 시적 가능성 - 엄경희

 

노을에 기대다

 

산으로 기러기 떼가 빨려 들어간다

산이 아프다

산은 천천히 노을에 기댄다

 

기러기 떼가 산에서 나와

노을 속으로 들어간다

노을이 아프다

 

산은 노을에 기댈수록

자꾸 빠져든다

노을은 점점 붉어진다

 

노을이 아름다운 건 그 안에

기러기 떼가 있기 때문이다

 

꽃에 관한 명상

 

1. 밤

매일매일 누가 그리워서 저렇듯

밤은 찾아오는가

 

밤은 그렇게 어김없이 와서

거리마다 집집마다의 가슴에

작은 등불을 걸어놓는가

 

어둠의 상처로 환한 내 몸 근처에 머물던

하늘과 지상의 등불들이 하나 둘씩 잦아들면

 

밤은 또 어디로 가서

글썽이는 어둠을 이야기하는가

 

2. 논두렁

누가 풀어놓은 울음일까

저 밤 개구리들

 

때로는

울음도 뭉치면 노래가 된다.

 

3. 風光

바람은 이따금 한데서 불어오고

빛은 괜스레 눈이 부시다

눈물이 난다

 

생각해보면

산이 강을 품고 잇었던 것이 아니라

강이 산을 떠난 것이 아니라

 

만났다 헤어지고 나면

또 하나의 산과 강,

눈물이 나다

 

4. 달

                강

            옆의 산,

        옆의 들, 옆의

    마을, 옆의 길, 옆의

구름, 옆의 바람, 옆의 어둠을,

 

거느리고

거느리고

거느리다가

 

모두 다 버린 빈 몸으로

달이 떠오른다

 

못을 박으며

 

   어쩌면 성수대교와 세계무역센터는 스스로 무너지고 싶어서 무너졌는 지도 모른다 무너지고 싶어도 무너질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무너지는 것도 행복이다

 

   그런데 무너지는 모든 것들은 구멍을 통해서 무너진다 구멍 속으로 드나드는 바람과 흐느낌과 역사와 온갖 소문들까지 무너짐에 봉사한다 언젠가 한번은 무너져 본 것이라야 구멍의 공포와 허전함과 무너짐의 짜릿한 스릴을 느낄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세상은 무너지는 것의 역사다 그렇게도 강성했던 바빌론과 로마의 벽에 나 있던 무수한 화살 구멍들, 그렇게 바빌론과 로마는 무너졌다 그 역사는 지금도 구멍을 통해 이야기되고 세상의 무수한 구멍 속으로 퍼져나간다 역사의 총탄은 케네디를 관통하고, 클린턴도 구멍 근처에서 무너졌다

 

   하지만 구멍은 스스로의 몸을 구멍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의 이름을 사랑이라고, 역사라고, 때로는 천재지변이라고 명명한다 구멍의 이름은 수시로 바뀐다

 

   나는 벽에 못을 박으며 붓 끝에서 확장되는 구멍을, 구멍의 역사를 생각한다 아니 사랑을, 절망을, 위선을, 아니 아니, 망치가 내려칠 때 내 손가락을, 그 아픔을……

 

지퍼

 

   지퍼는 잠그기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영문도 모르고 무언가 꼭꼭 걸어 잠그고 있다가 이따금 세상 밖의 풍경이 궁금해지면 그것들을 세상 밖으로 풀어놓기 위해 서 있다

 

   오늘도 밤새 해를 잠그고 있던 지퍼가 열리고 세상에 온통 어둠을 풀어놓았던 지퍼가 닫혔다 그 지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열리고 닫히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지퍼의 비밀을 모른다 나는 내가 열기 쉬운 내 방의 지퍼를 열고 밖으로 나왔다 내 양복 안주머니에 알 수 없는 수리의 지퍼가 채워진 휴대폰을 넣고 나는 세상의 무수한 지퍼를 향하여 걷는다

 

   오늘도 내가 열고 들어갈 지퍼 속에는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생각하다가, 나는 화장실로 들어가 바지의 지퍼를 내린다 신속히 내 지퍼 밖으로 빠져나가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저것들은 또 어느 지퍼 속으로 들어가 잠을 잘까? 나는 아직도 내가 무수히 열어보았던 지퍼들의 주소를 모른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의 지퍼를 열고, 내가 며칠 동안 열어보았던 주소들을 확인한다 아아, 열리기를 기다리던 저 무수한 유곽들,

 

   어찌 보면 컴퓨터의 전생은 창녀였을지도 모른다

 

이상한 벌레

 

   나는 세상 속으로 고개를 내미는 무수한 벌레들의 이름을 알고 있다 그들은 권태라는 구멍 속에서 서식하다가 어둠이라는 구멍 속으로 사라진다 구멍은 그들의 집이고 껍질이다 구멍 속의 것들은 수시로 승천을 꿈꾼다 나는 사과 구멍 속에서 살던 벌레 한 마리가 구멍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걸어가다가 일순, 거미 속으로 길을 내어 걸어가는 이상한 승천을 보았다 하늘은 도처에 널려 있었으므로 승천의 방법은 다양했다 어느 날 나는 자동차 유리창에 붙어 승천을 꿈꾸는 예쁜 벌레들을 본 일이 있다 제가 붙어 있는 것도 언젠가 구멍 속을 통과해 어둠 속으로 사라질 벌레인 줄도 모르고,

 

   그 때 나는 주소를 알 수 없는 터널을 빠져나가 어디론가 달려가는 벌레의 속도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너무 빠른 벌레는 왜 달려가다가 모두 찌그러지고, 제 몸을 토해놓은 터널, 혹은 세상의 구멍들에게 제 속도의 근원을 캐묻지도 못하고 으깨지는 방법부터 터득해 재빠르게 승천하려는지, 나는 하릴없이 느리게 하늘을 기어가는 게으른 벌레에게 그 이유를 물어본 일이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느릿느릿 기어가 세상의 끝에 환한 부끄러움을 토해놓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벌레, 지상의 수많은 벌레들을 내려다보며 먼 길 가다가 기왕에 꿈틀, 스스로 벌레가 되어버린, 때로는 너무나 뜨겁고 눈부신, 화끈한 성격의 이상한 벌레, 그 정체를 알기 위해 바라보면 내 망막 속에 염소 같은 똥을 누어 잘 지워지지 않는 어둠 몇 개를 남겨놓고, 세상의 구멍 속을 빠져나온 것들이 결국 왜 똥이 되는지, 어둠이 되는지 말하지 않고 그냥 보여주는,

   이상한 벌레를 나는 알고 있다

 

버릇

 

개구리는 공중으로 뛰어오르며 오줌을 싸는 버릇이 있다

그것은 원래 개구리가 동화 속의 로케트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구리는 끝끝내 제 몸을 우주 속으로 쏘아 올리지 못하고

철퍼덕, 논 속으로 다시 처박히는 버릇이 있다

물이 개구리를 좋아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물도 버릇을 가지고 있다

물은 시간으로 향하는 버릇이 있다

태초에게는 처음과 끝이 만나는 비밀스런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물은 제 몸을 쉼 없이 아래로 흘려보내면서도

끝없이 제 기억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돌연 아찔한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던

폭포의 한때를 기억해내는 버릇이 있다

 

처음으로 제 몸을 산산이 부수고

제 몸의 어딘가에서 알 수 없는 물방울들을

무수히 방출하던 그 아득한

무지개의 때를 기억하는 버릇이 있다

 

그리하여 물은 꿈의 저쪽에서 들려오던

에누마 엘리쉬*의 목소리를 따라가

티아마트*의 두 눈 사이에서 흘러내리던

눈물을 기억하는 버릇이 있다

 

물의 본능은 뛰어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누마 엘리쉬(Enuma Ellish)는 고대 바빌론의 창조 서사시로 '태초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신화에 따르면 대모신인 '티아마트(Tiamat)'는 자신의 아들인 '마르둑(Marduk)'에 의해 피살되고 그녀의 몸은 나누어져서 두 눈은 해와 달로, 피는 하수와 바다가 되는 등 천지창조의 재료가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내가 밥을 먹을 때 밥은 식사가 되지만

밥이 나를 먹을 때 밥은 거대한 우주가 된다

 

내가 먹는 모든 것은 밥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밥은 아니다

그것은 나를 먹은 커다란 우주의 밥이다

나는 밥이라는 거대한 우주 속에서

밥이 되어 살고 있다

나는 밥을 먹고 거대한 우주의 밥이 된다

 

밥은 먹을 때는 잠시 포만감을 느끼지만

금방 다시 배가 고파진다

포만감은 밥의 기표가 아니다

포만감과 배고픔은 관념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배고픔에 속지 않는다

 

나는 누군가에게 먹히는 걸 좋아한다

밥이기 때문이다

하늘에 떠 있는 별들도 구름도 모두

나의 밥이지만

나 역시 그들의 밥이다

 

밥은 일방적으로 먹히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배고프므로 밥을 먹을 뿐

태양이 내 입속으로 들어가

항문으로 나오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내 속에서 밤과 낮이 교차할 때

배가 고픈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나는 단지 밥이므로,

 

주석에 들다

 

어제 벽제 화장터에서

亡者를 따라다니는 상주와 하객들이

저승으로 떠난 한 생의 주석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이가 드는 일이

주석을 더 많이 거느리게 되는 일이라는 것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삼 일 전에 돌아가신 외삼촌에게도

몇 줄의 주석이 붙고 팔십 평생의 생애가

둥근 봉분 모양의 주석에 들었다

나는 길게 늘어선 주석 끝에서

미처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한 울음과

흐릿한 눈물 몇 방물 떨구고 산을 내려왔다

 

망자는 죽어서도 주석을 거느린다

하지만 자연은

능소화가 나팔꽃의 주석인지

억새가 갈대의 주석인지

스스로 주석을 달고 해석해 주지 않는다

 

산이 새를 주석으로 거느리듯이

새가 산을 주석으로 거느리듯이

자연은 본문과 주석을 구별하지 않는다

망자는 자연이 되어서야 스스로도 주석이 된다

외삼촌도 어제 비로소 재가 되어

우주라는 거대한 텍스트의 주석에 들었다

 

태초에 신은 오독誤讀을 창조했다

 

   그래서 인간은 태초부터 세상을 제각각 다르게 읽는다 세상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몸조차 오독한다 오독은 인간 생존의 필수 조건이다 그리하여 어둠은 어둠끼리 물방물은 물방울끼리 책을 읽듯 서로의 몸을 섞어 신이 만들어 놓은 세상의 질서와 경계를 허물고 그들만의 새로운 질서를 창조했다 그들에게는 오독이야말로 빛나는 창조성이다 그들의 문법은 세상에서 새롭게 빛났으며 모든 피조물들이 오독을 통해 새롭게 신이 되었다

 

   비가 온다 태초에도 그렇게 비는 내렸으리라 그 때도 개굴개굴 개구리는 또 논배미에서 그렇게 울었으리라 그러나 이 땅의 창세기는 갔다 그리고 창세기는 또 이렇게 왔다 물질이 물질을 만들고 그 물질이 또 다른 물질을 만드는 끝없는 자기증식의 법칙이야말로 창조의 제일원리이다 오독을 통한 자기증식, 오독을 통해서 논바닥의 벼는 자라고 세상은 시끄럽고 그래서 살 만하고 행복하고, 행복이 불행이고 불행이 행복일 수 있는 오독의 법칙 아래서

 

   우리 모두는 오독의 주인이다 이 땅의 모든 길들은 누군가 읽고 간 문장이다 그래서 날이 밝으면 새로운 길이 뚫리고 그 길로 갖가지 옷을 걸쳐 입은 단어들이 오독의 표지판 쪽으로 달려간다 지금 빗방울 후둑이며 나를 읽고 세상을 읽고 있는 저것들, 나는 그들에게 내 몸을 맡긴다 이 땅의 새로운 창세기를 맡긴다 태초는 오늘 또 그렇게 시작했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