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황영찬

Tag

Notice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 total
  • today
  • yesterday

2014-042 과학으로 여는 세계 불가사의 2

 

이종호 지음

2006, 문화유람

 

 

시흥시대야도서관

EM051303

 

001.44

이75세 2

 

신과 미지의 수수께끼에 도전한 인간들의 이야기

 

이종호

과학자이자 고대 문명 탐사가. 프랑스 유학 시절부터 세계의 여러 유적지를 탐사하며 연구를 시작해 기초 없이 50층 이상의 빌딩을 지을 수 있는 '역피라미드 공법' 등으로 20여 개 국가에서 특허권을 얻는 등 지금도 문명과 과학 · 역사를 넘나들며 많은 연구와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 프랑스 페르피냥대학교에서 공학박사 학위와 과학국가박사 학위 취득

· 프랑스 문부성이 주최하는 우수 논문 제출상 수상

· 해외유치 과학자로 귀국

· 한국과학기술연구소 ·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등에서 연구활동

· 과학기술처장관상 · 태양에너지학회상 · 국민훈장 석류장 수상

 

<저서>

『세계사를 뒤흔든 발굴

『현대과학으로 다시 보는 한국의 유산 21가지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명예의 전당에 오른 한국의 과학자들』(박택규 공저)

『피라미드 과학

『노벨상이 만든 세상(물리, 화학, 생리 의학)』 등 다수

 

contents

 

머리말

 

1부 전설을 만든 사람들

1장 | 모세 기적의 무대를 찾아서

2장 | 시바의 여왕은 누구인가

3장 | 알렉산드로스대왕과 석굴암

4장 | 역사를 휩쓸고 사라진 인물, 아틸라

5장 | 마르코 폴로의 너무나 길고 멀었던 여행

 

2부 인간수수께끼

6장 | 아서왕과 몽타쥬

7장 | 잔 다르크를 둘러싼 소문들

8장 | 드라큘라는 족보가 있다

9장 | 노스트라다무스가 보낸 암호

 

3부 극한에 선 인간들

10장 | 검투사의 영광과 비애

11장 | 사라진 로마군단

12장 | 정조대와 남자들의 착각

13장 | 인간의 상상력과 잔인함이 빚은 마녀사냥

14장 | 기요틴, 인간에 대한 마지막 자비

15장 | 도곤족의 시리우스 미스터리

 

미주

참고문헌

광주리를 타고 나일강을 떠내려가던 어린 모세는 우연히 이집트 왕녀(파라오의 누이)에게 발견되어 이집트의 왕족이 된다.

메렌프타 왕의 석비로 역사 기록에 충실했던 고대 이집트의 유물 중에서 이스라엘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모세의 탈출과 같은 대사건에 대한 이집트측의 기록이 없다는 점을 들어 모세의 이야기는 창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위는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와 레무스, 아래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최초로 통일 왕국을 세운 사르곤 왕.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어머이 실비아가 군신(軍神) 마르스에게 겁탈을 당해 낳은 쌍둥이 자식들로 광주리에 넣어진 채 티베르 강에 버려졌다. 이들은 우연히 광주리를 발견한 늑대의 젖을 먹고 자라 훗날 로마를 건국한다. 사르곤 왕의 신화와도 공통된 부분이 많다.

모세가 파라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려보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시나이반도 남쪽에 있는 시내산.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 여호와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라는 명을 받는다.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집트를 탈출해 가나안으로 가던 중 다시 이 산에 올라 여호와로부터 '십계(十戒)'를 받는다.

로마에 있는 모세상.

서아시아 시리아 사막 가운데에 있는 유적지 팔미라. 구약성서에는 '타테몰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시바의 여왕이 이 지역의 여왕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솔로몬을 만나는 시바 여왕.

아라비아반도에서 예멘의 수도 동쪽으로 약 100킬로미터, 1,200미터 고원에 있는 도시인 마리브의 유적지. 고대 시바 왕국의 수도였다는 주장이 있다.

언약의 궤(법궤). 하나님과 인간의 약속인 10가지 계명이 새겨진 석판이 안에 있다.

에티오피아 악숨에 있는 시바의 목욕탕.

이집트 제18왕조 제5대의 여왕, 하트셉수트.

이집트 룩소르에 있는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 장제전은 파라오의 장례와 제사를 모시는 곳으로 파라오의 영혼이 쉬는 공간이다.

젊은 정복자, 알렉산드로스대왕(Alexandros the Great, 기원전 356~323). 그리스 마케도니아의 왕이었던 그는 이집트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지만 그가 왕으로 재직한 기간(재위 기원전 336~323)은 길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 아폴론신전의 무녀들로부터 '천하무적'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이집트의 아몬 신전에서는 '신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았다.

알렉산드로스가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인 디오게네스와 만나고 있다. 디오게네스가 햇빛을 쬐고 있을 때 알렉산드로스가 찾아와 소원을 물었을 때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햇빛을 가리지나 말라고 했다는 말은 유명하다. 알렉산드로스는 "내가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아니었더라면 디오게네스가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호메로스의 시를 애독하여 원정(遠征) 때도 그 책을 지니고 다녔으며, 학자를 대동하여 각지를 탐험하고 측량했다.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

페르시아 원정을 떠나면서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무덤을 찾은 알렉산드로스.

긴 창으로 무장한 알렉산드로스 군대의 보병으로 영화 <알렉산더>의 한 장면이다. 기병들이 귀족으로 이루어졌던 것과 달리 보병은 주로 농민들로 구성되었다.

알렉산드로스의 군대와 페르시아군의 이수스전투를 그린 모자이크화로 폼페이에서 발견되었다.

건축가 데이노크라테스가 중건했다고 하는 에페수스(에게해 연안의 터키 지역에 있다)의 아르테미스신전. 아르테미스신전은 파르테논신전의 4배쯤 되는 규모로 그리스 시대에 만들어진 신전 중 가장 규모가 컸으며 대리석으로 지은 최초의 신전이기도 하다. 이 신전은 고대의 문명세계에서 성소로 숭배되었는데 알렉산드로스는 이곳을 방문한 뒤 "나는 막강한 도시 바빌론에서 마차들이 달리던 성벽도 보았고, 제우스신상과 공중정원, 피라미드, 마우솔로스 왕의 무덤도 보았다. 그러나 내가 아르테미스신전을 보았을 때는 해가 구름 속으로 막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아름다운 장면을 보고 내게 말했다. '올림피아를 제외하고 이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르테미스신전은 필론이 말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이다.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시작된 이집트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에는 "아름다운, 참으로 아름다운", "영원히 기억될 만한", "너무나 장엄한", "참으로 찬란한" 등과 같은 고대 시인들의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알렉산드로스는 정복지마다 그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들을 세우며 세계 국가를 꿈꾸었는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는 불행히도 당시의 영화를 돌아볼 수 있는 유적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사진은 알렉산드리아가 건설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축조된 지하묘지.

대 페르시아제국을 격파한 알렉산드로스가 승자의 기쁨을 만끽하며 고대 오리엔트의 전설적인 도시 바빌론입성하고 있다.

정복자이자 탐험가로 끝없이 전장을 누볐던 알렉산드로스의 삶을 보여주는 부조.

인도 중부 보팔 근처에 있는 산치대탑으로 인도의 불교 발전사를 집약하고 있는 것은 물론 인도에서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불교 조각 예술의 극치를 보여 준다. 지금의 모습은 아소카 왕(재위 기원전 286~232)이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고 기념하기 위해 지은 일종의 무덤탑 위에 외부를 더 확장한 것으로 1818년 한 영국인에 의해 발견된 뒤 1912년에서 1919년 사이에 복원되었다. 산치대탑에는 부처와 아소카 대왕의 삶이 조각되어 있다.

부처 조각상으로 마투라 영향을 받았다.

고행을 하는 부처상으로 사실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 간다라 미술의 대표작이다.

19세기에 시돈(지금의 레바논 근처)에서 왕실묘지가 발굴되었는데 그중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석관으로 믿어지는 것이 발견되었다.

헝가리에 있는 아틸라 동상. 유럽에서는 공포와 악을 상징하는 존재였지만 헝가리에서는 전혀 다른 대우를 받는다. 헝가리 역사의 출발점에 그가 있기 때문이다.

훈족이 연회를 즐기는 광경.

말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효과적인 무기에 전투술이 뛰어난 훈족의 공격은 파괴와 승리 그 자체였다.

황제 발렌티니아누스3세의 어머니로 훈족의 대왕 아틸라와 협력하고 다투며 서로마제국의 최후를 장식했던 여걸인 플라키디아의 마우솔레움(무덤 건축물) 천장 장식.

유럽 역사에 '신의 징벌'로 불릴 만큼 공포의 대명사로 통했던 아틸라(Attila)는 뿔이 달린 악마로 묘사되기도 했다.

물의 도시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훈족의 공격이 있자 해안으로 도망쳐 온 사람들이 "나도 여기에 왔다"라는 뜻으로 한 "베니에티암"이 지금의 도시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교황 레오1세와 아틸라가 만나는 장면으로 라파엘로의 그림이다.

독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으로 꼽히는 노이슈반슈타인 성. 1200년경에 쓰여진 게르만 문학의 고전, <니벨룽겐의 노래>를 토대로 바그너는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를 썼다. 이 오페라에 감동한 바비에르의 왕 루이2세가 직접 설계해 성이 건설되었는데 안쪽의 벽면은 <니벨룽겐의 노래>와 관련된 벽화들이 장식하고 있다. <니벨룽겐의 노래>는 훈족이 독일 지역을 휩쓸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웅 서사시이다. 훈족은 독일 중부 라인 지방에 게르만족 일파가 세운 부르군트 왕국을 437년에 멸망시킨 적이 있는데 이후 453년, 훈족의 왕 아틸라는 갑자기 잠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게르만족 출신의 왕비 옆에서 급사한다. 게르만인들에게는 이 사건이 왕비가 복수극을 펼친 것으로 전승되었고, <니벨룽겐의 노래>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녹아 있다.

훈족이 쓰던 동복(청동솥).

전설이 된 아틸라의 최후.

영화 <아틸라>.

한때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무역을 독점하며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해상 도시국가를 이루었던 베네치아의 상징인 성 마르코 대성당과 광장. 역사적으로 유명한 상인들 중에는 베네치아 출신이 많다. 광장을 중심으로 긴 회랑이 둘러싸고 있는데 여기에는 오래 전부터 '플로리안' 같은 유명한 카페들이 있어 저명한 문인들이나 사상가들이 흔적을 남겼다. 나폴레옹은 이 광장을 "유럽의 가장 우아한 응접실"이라고 했다.

고대 그리스 출신의 천문학자이자 지리학자인 클라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Klaudios Ptolemaeos, 85?~165?)(위)와 그의 세계지도(아래). 그가 남긴 천문학 지식은 코페르니쿠스 이전까지만 해도 최고 수준이었다. 유럽에서는 15세기가 되어서야 그의 천문 지식을 이해하는 학자들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 바탕에서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 같은 학자가 탄생했다.

카라코룸(Karakorum). 1235년에 몽골 원조의 제2대 황제 오고타이가 몽골 고원의 중심에 세운 몽골제국의 수도로 유라시아 각지에서 많은 사절과 전도사와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쿠빌라이가 수도를 중국의 베이징(北京)으로 옮길 때까지 약 20년 동안 번성했다.

동로마(비잔틴)제국과 오스만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아시아와 유럽 대륙에 걸쳐 있는 도시로 중근동 무역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마르코 폴로의 아버지와 숙부는 한때 이곳에서 상인으로 활약했다.

몽골제국의 5대 황제(칸)이자 중국 원나라의 시조인 쿠빌라이칸(1216~1294). 일찍이 몽골의 중국 방면 대총독에 임명되었던 그는 형 몽케칸이 사망하자 치열한 내부 다툼을 거쳐 수도를 연경(燕京, 지금의 베이징)으로 하는 원나라를 세웠다. 그는 멀리 티베트는 물론 베트남까지 공략했으며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대부분을 장악했다. 세조(世祖)로 불리기도 한다.

아버지, 숙부와 함께 동방으로 멀고 먼 여행을 떠나는 마르코 폴로. 그러나 그는 25년이 지난 뒤에야 베네치아로 돌아온다.

고비 사막. 마르코 폴로는 톈산 남로를 거쳐 고비 사막을 지나 중국에 도착했다.

중국 간쑤성 서쪽에 있는 돈황(敦煌, 둔황이라고도 함) 석굴. 수많은 동굴에 갖가지 벽화와 조각이 넘치는 불교의 세계적인 유산이다. 돈황 석굴이 근처에 있는 돈황은 오아시스 도시이자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실크로드의 관문으로 동서가 교역을 하고 문화를 교류하는 거점이었다.

위먼관 망루. 돈황에서 가까운 곳에 있으며 교통과 군사의 요충지로 중국의 서역 진출의 관문이었다.

베이징 교외에 있는 루거우차오(노구교)는 마르코 폴로가 서양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고 소개하며 유명해져 '마르코 폴로 다리'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 다리는 1937년에 일어난 중일전쟁의 시발점이 된 곳이기도 하다. 그해 7월 7일 다리 근처에서 야간 전투훈련을 실시하던 일본군이 총소리를 듣고 즉시 점호를 해보니 병사 한 명이 없어져서 중국군과의 전투에 돌입하는 사건(노구교 사건, 7 · 7 사변이라 부르기도 한다)이 일어난 것이다. 나중에 그 병사는 용변을 보러 갔던 것으로 드러났다.

글래스턴베리 토어(토어는 켈트어로 언덕의 뜻). 아서왕이 떠났다고 하는 아발론이라고 하는 신비한 땅의 위치를 두고 학자들의 주장이 갈리는데 그중에서 글래스턴베리 토어 지역이 가장 유력하다. 언덕 정상에는 의문의 탑이 하나 있는 등 수수께끼에 싸여 있는 곳이다.

영국 윈체스터 성에 있는 아서왕의 원탁.

잃어버린 성배를 찾아서 떠나는 모험은 수많은 중세 작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좋은 소재였다.

글래스턴베리에 있는 챌리스 우물로 요셉이 성재를 숨긴 곳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프랑스 랭스에 있는 랭스 대성당. 프랑크의 메로빙거 왕조를 세운 클로비스1세 이후로 프랑스의 왕들은 이곳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랭스 대성당에서 열린 샤를7세의 대관식과 잔다르크.

샤를7세.

프랑스 루앙에 있는 잔다르크 탑. 잔다르크가 영국군에게 사로잡힌 뒤 종교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갇혀 있던 곳이다.

파리에 있는 잔 다르크(1412~1431)의 동상. 잔 다르크는 사후 가톨릭의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1897년에 발표한 드라큘라 소설로 유명해진 영국의 작가, 스토커(B. Stoker, 1847~1912).

1931년에 개봉된 영화에서의 드라큘라.

드라큘라 영화에 등장하는 희생자들은 흔히 미모의 여인들이다.

드라큘라 전설의 배경이 되었던 브란 성. 드라큘라 성으로 더 유명한 이곳은 루마니아 남부의 아르제슈주(州) 쿠르테아 데 아르제슈시(市)에 있다.

블라드 드라큘라.

블라드 드라큘라가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택한 방법은 말뚝을 박아 죽이는 것이었다.

모하메드2세. 블라드 드라큘라의 상대는 불행히도 비잔틴(동로마) 제국을 무너뜨린 오스만제국의 정복자, 모하메드2세였다. 모하메드2세의 줄기찬 유럽 공략 앞에서 드라큘라는 파란 많은 삶에 종지부를 찍는다.

엘리자베스 바토리(Elizabeth Bathory, 1560~1614). 아름다움을 뽐내며 수많은 정부를 거느리고 살았던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외모에 집착하는 만큼 세월이 주는 주름살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공포의 축제를 열며 성을 피로 물들이는 것이었다.

흡혈박쥐의 이미지는 흡혈귀(吸血鬼)를 연상시킨다. 실제 흡혈귀를 뜻하는 '뱀파이어(Vampire)'에는 흡혈박쥐의 뜻도 있다.

동방정교는 '그리스정교'라고도 한다. 로마 교회는 전체 교회를 로마 · 콘스탄티노플 · 알렉산드리아 · 안티오키아 · 예루살렘의 5대 교구로 나누어 관할했다. 그러나 7세기부터 이슬람 사라센제국이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교구를 제외한 지역을 점령했고, 이후 두 교구가 동서(東西) 양쪽에서 세력을 확보해 간다. 이 과정에서 동방의 콘스탄티노플 교회가 황제를 교회의 수장(首長)으로 하는 반면 서방의 로마 교회는 황제권과 독립된 입장을 견지하는 등 견해 차이가 커졌다. 결정적으로 11세기에 로마 교황 레오9세와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가 정면충돌하면서 콘스탄티노플 교회는 로마 교회와 갈라져 동방정교(그리스정교)로 독립하였다. 사진은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중심이었던 성 소피아 대성당.

르네상스 시대에 프랑스에서 태어난 천재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 1503~1566).

몽펠리에 의과대학(위)과 1543년의 인체 해부 강의 모습(아래).

'검은 죽음(The Black Death)'이라고 부르던 페스트가 중세 유럽을 휩쓸던 모습.

1591년에 로마에 세워진 교황 식스투스5세(재위 1585~1590)의 대리석 조각상. 그에 의해 로마의 모습이 바뀌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산 피에트로 광장에 있는 높이 40미터의 거대한 오벨리스크이다. 이집트의 태양 신앙의 상징물인 이 오벨리스크는 로마의 황제가 기원전 10년 이집트 정복 기념으로 가져와 로마의 원형경기장에 세웠던 것으로 식스투스5세가 지금의 위치에 옮기면서 우상물 꼭대기에 십자가를 안치하고 기념 미사를 거행하였다.

1555년에 출간된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

1666년 런던에서 일어난 대화재를 기념하는 탑(위)과 탑 아랫부분의 부조(아래). 9월 2일 일요일 아침에 빵집 푸딩 레인에서 시작한 불은 5일 동안 계속되며 런던의 주택 80퍼센트를 태워버렸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막스무스 역의 러셀 크로우가 콜로세움에서 싸우는 장면.

로마의 콜로세움 옆에 서 있었다는 네로의 거대한 동상(콜로소). 아래 그림은 콜로세움을 복원한 모습으로 경기장 위는 흰 천을 덮을 수 있었다.

콜로세움의 격투장 지하는 수많은 방과 복도로 되어 있다.

검투사들의 격투 장면을 그린 기원후 3세기경의 모자이크화.

클레오파트라의 미라.

로마로 이어지는 아피아 가도. 고대 로마 최초의 포장도로였다고 한다. 로마제국은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유럽 각지로 이어지는 도로를 잘 닦아 놓았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로마군의 캠프가 설치되었던 터를 공중에서 본 모습. 로마제국은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곳곳에 요새와 캠프를 설치했다.

로마군의 유명한 전술인 거북이대형을 재현한 모습. 원통형의 방패인 스쿠툼으로 외부를 완전히 가리고 창인 피룸과 글라디우스라는 칼만 바깥으로 내놓으면 대형 하나는 움직이는 요새가 된다.

중국 역사에 손꼽히는 미녀로 흉노와 한나라의 화친을 위해 희생양이 되었던 왕소군(王昭君). 중국 한나라 원제(재위 기원전 49~33) 때의 인물로 그녀가 후궁으로 있을 때 궁중화가인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그녀의 일그러진 초상화가 왕에게 보내졌다. 원제의 눈에 들지 못한 왕소군은 한나라와 흉노의 화친을 위해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와 정략 결혼을 올릴 여인으로 뽑혔다. 왕소군이 떠날 즈음 그녀를 보게 된 원제는 절세의 미모와 단아한 분위기에 반했으나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원제는 크게 노하여 궁중화가인 모연수를 참형에 처했다고 한다. 그 뒤 그녀의 슬픈 이야기는 중국 문학에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가 되었다.

사진은 한나라 때 북방의 기마민족에 대항하기 위해 쌓았던 만리장성.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만리장성은 대부분 명나라 때 건설된 것이다.

고대 로마군의 복장을 한 채 그들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중국 간쑤성의 리첸 마을 사람들.

정조대.

교황 식스투스4세(1414~1484). 그는 성직자들에게 축첩세를 부과하는 정책을 펼쳤다,

파리 클루니 박물관에 있는 정조대.

독일 로텐베르그 중세 범죄박물관에 있는 정조대.

마녀에 대한 이미지를 그린 그림으로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페스트의 창궐과 대기근, 오스만제국의 침략, 백년전쟁, 종교의 타락과 분열은 한편 새로운 희생양을 필요로 했고 그것은 '마녀'로 나타났다.

막상 마녀를 색출한다고 하더라도 마녀임을 증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길은 마녀로 지목된 자를 고문해서 고백을 받거나 주위의 증언에 의지하는 것이었다. 한번 마녀로 지목되면 더 이상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 마녀사냥꾼들은 아무런 죄책감 없이 온갖 무자비한 도구들을 동원해 상상할 수 없는 갖가지 고문들을 용의자에게 가했다.

마녀사냥꾼을 그린 그림으로 마녀사냥꾼으로 유명했던 매튜 홉킨스(위의 인물)도 등장하고 있다.

마녀재판.

인노캔티우스3세(1161~1216). 그가 교황으로 있던 시기(재위 1198~1216)는 교황권(敎皇權)의 절정기였다.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오토4세를 굴복시키는가 하면 영국의 존 왕을 파문해 그를 굴복시켰다. 제4회 십자군(1202~1204)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것도 그의 재임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가톨릭에 맞서 종교개혁을 부르짖었던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도 마녀사냥에서만큼은 같은 목소리를 냈다.

마녀사상의 지침서가 되었던 <마녀들의 쇠망치> 표지. 이 책의 출간 시점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발견된 이후라는 것은 비극이었다. 당시 이 책은 유럽을 휩쓰는 베스트셀러가 되며 마녀사냥을 이끄는 지침서가 되었다.

마녀를 화형으로만 처벌한 것은 아니다. 마녀 고문에도 그 방법이 다양했던 것처럼 마녀를 처형할 때도 갖가지 방법이 동원되었다.

1년에 한 번씩 열린다고 하는 마녀의 연회(Sabbath)로 1626년에 그린 것이다.

참형(목을 자르는 형벌)을 기다리는 젊은 여성.

카란 모스크(이슬람 사원)의 정문 앞에 있는 높이 47미터의 카란 미나레트. 우즈베키스탄의 고도(古都) 부하라에 있다. 이 탑은 12세기 무렵, 이슬람 신도들에게 기도 시간을 알려줄 용도로 건설되었지만 19세기 중반까지 죄인을 떨어뜨려 죽이는 공개처형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부하라는 알렉산드로스대왕의 동방원정군은 물론 칭기즈칸도 입상했던 도시로 실크로드의 중요 경유지였다. 이슬람문명의 절정기에는 부하라에만 300개의 이슬람 사원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카란 모스크는 약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사원이다.

기요틴.

역사적 사건의 발단이 된 마리 앙투네아트의 목걸이.

기요틴 앞에서 처형을 기다리는 루이16세(위)와 마리 앙투아네트(아래). 프랑스 혁명 당시 파리의 최고 사형집행관으로 1778년에서 1793년 퇴임할 때까지 2,900명 이상의 사형을 집행한 상송의 편지에 따르면 루이16세는 종교적 수련으로 단련된 인물이었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단두대 앞에서 루이16세는 윗옷을 함부로 벗는 것은 예의범절에 벗어난다며 코트 벗기를 거부했다. 사형집행관이 절차이므로 어쩔 수 없다고 설명하자 그는 스스로 코트를 벗었다. 수갑도 차기를 거부했지만 결국 받아들였다. 상송은 편지에 "파리, 1793년 2월 20일. 프랑스 공화국 원년"이라고 적은 뒤 "시민들이여, 이것이 위대한 날의 진실이다. 여기에 확신을 가져도 좋다"라고 적었다.

프랑스가 베트남에 기증한 기요틴.

밤하늘에 가장 밝은 별 시리우스와 주위의 별들. 시리우스는 한국과 중국에서 천랑성(天狼星)이라고도 부른다. 태양과 같은 거리에 있다면 태양보다 약 25배 밝다고 한다.

인간의 육안만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천문학 지식을 갖춘 도곤족의 진실은 무엇일까?

그리스의 천문학 서적.

갈릴레오가 천문 관측에 썼던 망원경.

도곤족 마을.

 

 

'내가 읽은 책들 > 2014년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4-044 오렌지 햇빛  (0) 2014.04.18
2014-043 한국의 화폐  (0) 2014.04.15
2014-041 한국의 약수  (0) 2014.04.04
2014-040 이불 속의 쥐  (0) 2014.04.04
2014-039 탄트라 秘典 Ⅰ  (0) 2014.04.02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