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황영찬

Tag

Notice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 total
  • today
  • yesterday
2014. 6. 23. 10:20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065 화석 - 사라져버린 세계의 흔적들

 

이베트 게라르 발리 지음, 강금희 옮김

1995,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07197

 

082

시156ㅅ 10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010

 

우리의 선조들은 바위에 남아 있는

엄청나게 큰 물고기나 새의 흔적을 보고 경배하면서

온갖 신화를 만들어 왔다.

외눈박이 거인의 뼈라든가, 하늘에서 떨어진

호박이라든가, 새의 눈물방울이라든가 하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신화의 베일이

벗겨지고 과학이 자리를 잡으면서,

화석이 된 생물체들은 오늘날 지구상에 살고 있는

생물체들의 먼 조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1900년 8월 동부

시베리아, 베레조프카 강변에서 라무트족 사냥꾼

두 명이 매머드의 사체를 발견했다

꽁꽁 얼어붙은 매머드는 전혀 부패되지 않은 채

완전한 골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방 행정관은 이 사실을 이르쿠츠크 총독에게 알렸고,

총독은 페테르부르크 과학 아카데미에 보고했다.

 

1901년 5월 페테르부르크,

헤르츠, 세바스티아노프, 피첸마이어라는

세 명의 여행객이 이르쿠츠크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들은 과학 아카데미가 파견한 과학자들로,

매머드의 사채를 옮겨갈 임무를 띠고 있었다.

그들의 수중에는 1만 6,000루불의

조사비용이 들어 있었다. 이르쿠츠크에서 내린 그들은

또다시 썰매로 갈아타고 베레조프카까지

6,000km나 되는 거리를 달려갔다.

긴 여정이었다. 9월 2일, 마침내 일행은

콜림스크에 도착했다.

 

9월 14일, 낙엽송 사이로 허공을 가리키고 있는 매머드의 사체가

보였다. 코와 다리는 흙과 얼음 속에 파묻혀 있었다.

 

꽁꽁 얼어붙은 땅에서 사체를 파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랜 숙의 끝에 해결책이 강구되었다. 비면을 데워서 얼음을

녹이기로 했다. 그들은 매머드 주위에 통나무집을 지었다.

두 개의 화덕을 이용해서 언 땅을 녹이기로 했다.

통나무집은 사우나실 같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악취가 심해졌다.

살점이 물러지면서 피부가 떨어져 나가고 내장이 드러났다.

위장 속에는 백리향과 미나리아재비, 그리고 용담 등이 남아 있었다.

매머드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먹은 음식물이었다.

땅 속에는 털이 잔뜩 흨어져 있었다.

세 명의 과학자들은 해체작업을 하는 데 무려 6주를

소비해야 했다. 10월 10일, 마침내 작업이 끝났다.

큰 덩어리는 가죽 포대에 집어 넣고 꿰매기로 했다.

 

하지만 1,000kg이나 되는 뼈와 살, 그리고 내장 따위를

어떻게 운반할 것인가. 시베리아의 추위가 해답을 가져다 주었다.

통나무집에서 꺼낸 부대들을 다시 얼리는 데는

단 하룻밤이면 족했다. 그렇게 해서 10월 15일 아침에

역사적인 광경이 빙원 위에서 전개되었다.

말이 끄는 여러 대의 썰매 위에 인간의 눈으로 직접 볼 수 없었던

거대한 매머드가 실려 가고 있었다.

 

Les fossiles, empreinte des mondes disparus

 

차례

 

제1장 신화와 전설

2장 화석의 비밀을 찾아서

3장 과학자의 시대

제4장 선사시대의 제왕

제5장 애호가와 전문가

제6장 공룡쟁탈전

기록과 증언

그림목록

찾아보기

 

이베트 게라르 발리 Yvette Gayrard-Valy

국립 과학연구소(CNRS)에 소속된 파리 자연사 박물관 고생물학 연구실에 근무하면서 화석에 관한 연구를 했다. 그녀는 PUF사에서 발행한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라는 시리즈 가운데서 <고생물학>을 집필했다.

 

옮긴이 : 강금희

1949년 서울 출생.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후 프로방스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번역서로는 <그리고 나의 남은 이야기> <낮은 땅의 사람들> 등이 있다.

 

제1장

신화와 전설

 

생물의 역사는 수십억 년에 이른다. 그렇게 볼 때 인류는 갓난아기에 불과하다. 인류의 탄생 이전에도 지구에는 다양한 생물이 존재하고 잇었다.

생물은 죽어서 돌이 되었다. 인간은 선사시대부터 돌이 된 생물에게 매력을 느껴 왓다. 길가나 모래밭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상한 돌을 바라보면서 끝없는 공상에 빠져들었고, 다양한 전설을 만들어 냈다. 신과 악마, 그리고 괴수의 전설……

죽음을 초월한 생명의 자취. 죽은 물고기를 둘러싸고 있던 모래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돌로 변했다. 물고기의 흔적을 남긴 채…….

1875년 그리말디(이탈리아)의 그로타 데이 판시올리동굴('아이들의 동굴'이라는 뜻)에서, 두 사람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한 사람은 나이 든 여자였고 다른 사람은 젊은 남자였다. 그들은 무릎을 접은 채 앞뒤로 포개져서 묻혀 있었으며, 그들 곁에는 부싯돌이 놓여 있었다. 뼈는 붉은색을 띠었고 척추와 두개골에는 작은 조개 따위 화석이 줄지어 붙어 있었다. 무덤은 후기 구석기시대에 속한다. 이 뼈는 3만 5,000년 전에 살았던 호모 사피엔스의 유골로 이때는 매머드와 순록, 영양들이 스텝과 툰드라에서 마음껏 뛰놀던 제4빙하기 말기에 해당한다. 반면에 인간은 동굴과 바위 밑 등에 숨어서 생활했다.

전설에 따르면, 색슨족 수녀원장 성녀 힐다가 휘트비 지방에 수도원을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저주받은 그곳에는 작은 뱀들이 우글거렸는데, 힐다가 뱀들의 목을 베어서 돌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위의 암모나이트 화석은 너무도 교묘하게 위조되어 사람들은 암모나이트에 뱀의 머리가 달려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성녀 힐다의 전설을 기리기 위해 휘트비시 문장에는 뱀의 머리가 달린 암모나이트가 새겨져 있다.

외눈박이 거인의 형상. 판화, 슬뤼페리우스 작, 1572년, 파리 장식미술관.

 

"우리는 무법자 키클로페스의 나라에 도착했다. 그는 불사신이 되고자 하는 욕심쟁이 거인으로, 밭을 갈지도 않았고 씨를 뿌리지도 않았다. 우리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서 월계수 그늘에 가려진 동굴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염소와 양 등 수많은 짐승들이 높은 울타리에 갇힌 채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울타리 주위에는 옥석과 쭉 늘어선 소나무 그리고 잎이 무성한 떡갈나무가 있었다. 바로 그곳에 엄청나게 큰 남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양을 기르면서 다른 거인들과 멀리 떨어져 생활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동료들을 방문하지 않았으며, 이 세상의 법률 따위에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거인은 키가 하도커서 마치 구름을 뚫을 듯했다. 도무지 빵을 먹고 사는 인간이라고는 생각되지가 않았다. 그는 우뚝 솟아 있는 산마저도 내려다봐야 할 만큼 키가 컸다. 그래서 그를 쳐다보고 있으면 높이 솟아 있는 산봉우리를 올려다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호머 《오디세이》

 

악당으로 알려진 유럽의 용은 연기와 불을 내뿜는 끔찍한 대형 파충류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헤라클레스, 성 미카엘, 성 조지 같은 영웅들이 용을 물리쳤다고 한다. 나바호 인디언의 전설에 따르면 애리조나주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규산화된 나무둥치들은 그들의 조상이 이 지역에 살기 시작했을 때 처치한 거인 예트소(Yetso)의 유해라고 전한다. 다른 인디언 부족의 전설에서는 천둥신이 쏜 화살대이거나 신과 거인 사이에 벌어진 싸움에서 파괴된 무기의 잔해라고 한다.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성게의 껍질은 마법의 힘을 가진 뱀알이라는 이유로 수집대상이 되었다 한다. 사람들은 성게의 껍질이 왕에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게 도와준다고 믿었다.

약으로 사용된 두꺼비돌. 사람들은 다른 화석과 마찬가지로 두꺼비돌(실제로는 물고기의 이빨)이 마력을 갖고 잇으며, 이 돌은 두꺼비의 머릿속에서 형성된다고 생각했다.

귀부인과 유니콘. 유니콘의 뿔(실제로는 코끼리나 코뿔소, 또는 일각과 고래의 어금니)은 기적의 묘약으로 여겨졌다.

날개 달린 용을 표현한 17세기 목판화.

 

"태양이 지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구름이 몰려온 것처럼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것은 거대한 새가 만든 그림자였습니다. 커다란 새는 우리 쪽으로 날아왔습니다. 나는 전에 선원이 말했던, '로크(roc)'라는 새를 생각해 냈습니다. 그리고는 조금 전에 보았던, 둥근 모양의 거대한 지붕이 로크새의 알임을 깨달았습니다. 내 생각이 옳았습니다. 어미 로크는 둥근 지붕에 내려앉더니 알을 품었습니다. 새가 가까이 날아왔을 때, 나는 알에다 몸을 바짝 기대고 있었습니다. 눈앞에 커다란 나무둥치와 같은 것이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나무둥치가 아니라 새의 발이었습니다. 동이 트자 로크새는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땅을 쳐다볼 수가 없을 만큼 높은 곳으로 나를 데리고서 말입니다."

《천일야화》

 

제2장

화석의 비밀을 찾아서

 

마을에 전설이 쫙 퍼져 있었다. 학자들은 질문을 계속한다. 수수께끼 돌의 비밀은 무엇인가? 그것은 언제 생겨난 것인가? …… 하지만 사람들의 탐구와 관계없이 돌은 좀처럼 비밀을 드러내지 않았다.

귀족들은 자신들이 훌륭한 진품진열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래서 거기에다 상당히 많은 재산을 쏟아 부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합스부르크가(家) 사람들이 다양한 진품을 수집했다. 그 같은 유행은 18세기가 되자 최고조에 달했다. 파리에서만 수집품을 쌓아 놓은 방의 숫자가 1742년에는 17개, 1757년에는 21개, 그리고 1780년에는 60개에 달했다. 특히 유명한 것은 백만장자인 조제프 보니에드 라 모송의 것이다. 루알지방의 루드성에는 깜짝 놀랄 만큼 귀중한 진품들이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수집실이 오늘날 박물관의 원형이 되었다.

게스너가 쓴 《화석의 모든 것》의 표지. 1558년, 취리히.

설석이 무시무시한 상어의 이빨로 판명되기까지는 긴 세월이 흘러야 했다. 이 사실이 밝혀진 뒤에도 설석의 마력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설석의 마력이 다소 과장되어 잇음을 인정하면서도, 치통을 가라앉히는 힘이 깃들여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1665년에 닐스 스텐센은 피렌체에 머물고 있었다. 메디치가의 대공(大公) 페르디난트 2세의 비호를 받으면서 병원에서 연구를 할 수 있었다. 대공은 그에게 상어 머리를 전달했다. 그것을 분석한 후, 그는 설석이 상어의 이빨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예수회의 수도사 아타나시우스 키르허는 판화집 《지하의 세계》에서 거대한 뼈의 목록을 작성했다. 하지만 그 자신이 거인의 전설을 믿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보카치오가 91m라고 주장했던 폴리페무스의 신장을 9m로 끌어내렸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납득하기가 쉽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거인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위엄이 크게 손상된 것이지만……. 키르허로 인해서 거인의 전설도 종말을 맞게 된다.

유니콘을 복원한 그림. 사라진 동물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은 17세기에도 있었다. 게리케는 1663년 독일에서 발견된 코뿔소의 뼈와 매머드로 추정되는 동물의 뼈를 짜 맞춰 아래와 같은 이상한 그림을 그렸다. 이 동물은 뒷다리가 없고, 이마 한가운데에는 6m쯤 되는 뿔이 나 있다.

동식물 화석에 관해서 많은 책을 저술했던 쇼이히처는 화석이 원래 생물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화석에 관한 지식을 일반인에게 널리 알렸다. 그는 동시대의 학자들과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들 중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열렬한 홍수파였던 의사 존 우드워드와 철학자 라이프니츠도 포함되어 있었다. 1731년 쇼이히처는 《신성한 자연과학》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성서》에 대한 과학적 주석서라고 할 수 있다. 홍수 때문에 무고하게 죽어 간 물고기 화석의 그림을 이 책에서 볼 수 있다.

쇼이히처에 의해서 홍수의 증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1.2m 길이의 이 뼈는 콘스탄스 호수 근처의 오닝겐에서 1725년에 발견되었다. 이 화석은 종신세의 토탄층 속에 묻혀 있었다. 이 뼈의 조사를 의뢰받은 쇼이히처는 이것이야말로 '홍수의 증인'이라는 판정을 내렸다. 1731년. 그는 그림을 덧붙인 상세한 설명을 통해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홍수가 역사적 사실로 존재한다는 것은 수세기 전부터 인정되어 왔지만, 지금처럼 분명해진 적은 없다." 그뒤에 대형 도롱뇽으로 판명된 '홍수의 증인'은 오늘날 네덜란드 할렘시에 있는 테일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측은 화석의 이름을 안드리아스 쇼이히처라고 붙였다.

1776년 네덜란드 마에스트리히트 근처 생피에르산에서 거대한 동물의 두개골이 발견되었다. 단단한 턱에는 무시무시하게 생긴 뾰족한 이빨이 죽 늘어서 있었다. 뼈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발굴지휘를 맡은 사람은 전직 군의관이자 화석수집가인 호프만이었다. 하지만 교회는 그에게 그 땅의 주인이자 교회의 임원이기도 한 고딘에게 뼈를 돌려주라고 명령했다.

18세기에도 동식물의 분류법은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세계 각국의 표본을 모은 수집품은 하루가 다르게 풍부해져 갔다. 그러나 표본은 정리되지 않은 채 뒤섞여 있었다. 학자들은 일정한 기준도 없이 화석과 살아 있는 생물을 비교했다. 이때 카를 폰 린네가 《자연의 체계》(1735년)에서 '이명법(二名法)'을 소개했다. 이것을 이용하여 속명(屬名)과 종명(種名)에 따라 체계적인 분류를 함으로써 최초의 과학적인 접근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명법은 오늘날에도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제3장

과학자의 시대

 

1796년 1월 파리. 한 청년이 과학진흥협회의 저명인사들 앞에서 행할 강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조르주 퀴비에. 몽벨리아르에서 태어난 그는 26세였다. 파리에 도착한 지 6개월이 채 안 되었지만, 그의 이름은 이미 청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다.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박물학자로서의 경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나는 미래의 위대한 박물학자를 위해 자료를 수집한다. 어느 날 그가 나타나 이런 준비를 해둔 나를 칭송할 것이다."(조르주 퀴비에)

1802년. 자연사 박물관의 동물해부학 교수 자리가 비자 퀴비에가 곧바로 교수로 임명되었다. 비록 젊은 나이였지만 그에게는 이미 팡테옹 중앙 학교와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박물학을 강의한 경험이 있었다. 교수가 되자 퀴비에는 자신의 강좌에 비교해부학이라는 강의명을 붙였다.

퀴비에가 그린 매머드 골격.

 

"그의 강의실은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열의에 넘친 젊은이들 대부분은 해부학을 배우려는 의대생들이었다. 강의 도중에는 예전에 노르망디에서처럼 해부를 해 보이고, 그것이 끝나면 뼈를 모아서 보존했다."

루이 룰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고대동물의 뼈가 파리 주변의 채석장에 집중되어 있었다. 마치 현대인에게 과거의 일을 알려 주기 위해서, 자연이 특별히 보존해 두기라도 한 것처럼……."

조르주 퀴비에

1788년. 코끼리만큼이나 거대한 뼈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발견되었다. '파라과이의 동물'이라고 이름붙여진 뼈는 스페인의 국왕 카를로스 3세에게 보내졌고, 자연스러워 보이게끔 조립되어 전시되었다. 뼈의 모양을 그린 스케치가 유럽 전역에서 대량으로 나돌았다. 퀴비에도 그것을 입수할 수가 있었다. 그는 그것에 메가테리움 아메리카눔(Megatherium americanum)이라고 이름붙였고, 나무늘보와 아주 비슷하기 때문에 그 무리로 분류했다. 그것은 오늘날 빈치류유모(貧齒類有毛, gravigrade) 아목(亞目)으로 분류되어 있다.

몽마르트르에서 발견된 뼈를 토대로, 퀴비에는 맥과 비슷한 동물을 재현해서 팔라에오테리움이라 이름붙였다.

늙어서 두 눈을 잃어버린 라마르크는 1829년에 고독하게 생애를 마쳤다. 하지만 그의 저서는 20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다윈 사상의 원천이 되었다.

프로테록토푸스(proteroctopus). 낙지의 화석. 프랑스 론알프 지방. 주라기 퇴적암에서(1억 5,000만 년 전), 이 화석은 현재 알려져 있는 낙지 화석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내장과 다리, 빨판 등의 흔적이 선명하게 보존되어 있다.

 

캄필로그나투스(Campylognathus). 공중을 날아다니는 파충류, 또는 익룡류, 독일 바이에른 지방 주라기 편암에서(1억 3,500만 년 전), 거대한 날개는 비상할 때만 사용되었다. 육식성인 이 동물은 하늘을 날면서 물고기를 잡아먹었다.

아르케옵테릭스(Archaeoptryx). 가장 오래된 조류, 시조새,. 독일 바이에른 지방 주라기 지층에서(1억 5,000만 년 전). 시조새는 파충류에서 조류로 바뀌는 이행기릐 생물이다. 이 화석을 보면 이 새는 이행기의 형태로 파충류의 특징, 예를 들어 이빨, 발톱, 긴 꼬리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답게 보존된 화석에서 볼 수 있듯이 새의 날개와 깃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타르보사우루스(Tarbosaurus). 몽고 백악기에 출토된 공룡. 타르보사우루스 속은 육식성이며 북아메리카의 티라노사우루스 속과 같은 무리이다. 몽고 중앙부는 화석 척추동물의 무덤이다. 국제 연구팀이 이곳을 정기적으로 탐사하고 있다.

세이무리아 바이로렌시스(Seymouria baylorensis). 양서류. 미국 텍사스 석탄기(2억 9,000만 년 전). 세이무리아 바이로렌시스 속은 석탄기 때 갯벌에서 서식하고 있었다. 사진의 세이무리아는 진흙 밑을 걷고 잇는 모양으로 화석이 남아 있었다.

아다피스 마그누스(Adapis magnus)의 머리 부분. 프랑스. 피레네 지방 케르시 제3기 시신세의 인회토에서(4,500만 년 전). 아다피스 과는 화석으로만 존재한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영장류에 속한다.

오른쪽부터 다윈, 라이엘, 후커.

 

지구의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이 라이엘의 생각이었다. 이럴 경우 멸종된 생물이 언젠가는 지구상에 다시 출현할 것이다. "숲 속에서는 이구아노돈을, 바다에서는 이크시오사우루스를, 그리고 나무고사리 사이에서는 프테로닥틸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고 《지질학 원리》에서 서술하고 있다.

1825년. 도르비니는 고생물학에 관한 초기 연구성과를 책으로 펴냈다. 남아메리카에서 돌아온 뒤 도르비니는 층서(層序) 고생물학 연구에 전념하여 무척추동물 화석의 층서학적 의의를 밝혔다.

찰스 다윈을 풍자한 그림.

 

제4장

선사시대의 제왕

 

퀴비에의 방법을 이용함으로써 베일에 싸여 있던 동물의 존재가 차례차례 밝혀지게 되었고, 마침내 공룡의 존재도 밝혀지게 되었다. '무시무시한 도마뱀(Dinosauria)'이라고 불렸던 공룡은 1억 6,000만 년이나 지상에서 군림했다. 그리고 영원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영국의 별난 화석수집가 토머스 호킨스는 삽화가 곁들여진 자신의 책에다 《바다의 큰 용》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19세기 초, 이크시오사우루스와 두 마리의 플레시오사우룻의 싸움은 고뇌하는 세대에게 악몽을 꾸게 만들었다.

버클랜드는 화석이 홍수때문에 생겨났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애썼다. 그는 모든 발견물을 이 같은 관점에서 해석하려고 했다. 예를 들면 소와 사슴 뼈 옆에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코뿔소의 해골을 발견했을 때 그는 홍수의 격류가 구덩이 속으로 코뿔소를 몰아넣었고 그때에 진흙과 자갈이 구덩이를 가득 메웠다고 주장했다. 그림은 코뿔소의 유해를 발굴하는 장면.

버클랜드 《홍수의 유물》

맨틀은 루이스라는 작은 도시의 개업의였다. 화석 수집품으로 가득한 그의 집은 마치 박물관 같았다. 1833년에 그는 브라이턴의 해수욕장 근처에다가 넓은 집을 마련햇다. 그리고는 가족과 화석을 모두 이동시켰다. 하지만 그는 취미에 정신이 팔려서 본업에 태만했다. 그 결과 자신의 저서인 《지질학의 불가사의》가 출간된 해에 귀중한 수집품을 4,000파운드에 대영박물관에다 팔아야만 했다. 귀중한 화석을 빼앗기고, 가족들에게마저 버림받은 맨틀은 런던에서 고독하게 인생을 마감했다. 루이스에 남아 있는 그의 집에는 '그는 이구아노돈을 발견했다.'는 표지판이 걸려 있다.

리처드 오언은 1804년 영국 랭카스터에서 태어났다. 그는 의학을 공부한 후에 모든 정열을 해부학에다 쏟아 부었다. 그리고 1836년에 교수로 임명되었다. 여러 권의 연구서를 저술했던 그는 영국 과학계의 지도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1853년 12월 31일. 수정궁에서 만찬회가 열렸다. 이구아노돈의 모형 속에다가 연회용 테이블을 놓고 그 주위에 손님들이 둘러앉았다.

수정궁은 원래 1851년에 개최될 만국박람회를 위해서 건축된 것이었다. 하지만 인기가 너무 좋아서 3년 후에는 런던 교외로 옮겨지게 되었다. 정원에는 태곳적 영국 동물의 복원품을 재현해 놓자는 의견이 채택되었다. 화가이자 조각가인 워터하우스 호킨스가 오언의 지도를 받아 공룡의 모형을 제작했다.

베르니사르의 화석 지층에서는 완전한 이구아노돈의 뼈 화석 열 개와 여러 개의 불완전한 화석이 발견되었다. 이렇게 많은 사체들이 왜 한 곳에 몰려 있는 것일까. 초식성인 이구아노돈은 무리를 이루고 사는 동물이었다. 1억 2,000만 년 전. 이 지방의 기후는 습하고 따스해서 늪지가 많았다. 위험에 직면한 이구아노돈 무리가 도망치다가 늪지에 빠진 게 아닐까. 아니면 비교적 건조한 시기에 물을 구하러 갔다가 진흙에 발을 헛디뎠던 게 아닐까.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다.

 

제5장

애호가와 전문가

 

상상 속에서 괴물을 그리던 시대는 지나갔다. 하지만 현실은 상상의 세계를 초월하고 잇었다. 공룡은 상상 속의 어떤 거인보다도 덩치가 컸다. 아직 단단히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는 수수께끼의 세계로 한 발자국씩 내딛으면서, 고생물학은 최후의 수수께끼를 풀어내려 노력하고 있다. 이 문제에서만큼은 직업적 전문가와 아마추어 애호가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가 동일한 출발선상에 서 있었다.

광부와 화가들도 고생물학 연구에 공헌했다. 광부는 갱도에서 태곳적 산물을 발견했고, 화가는 사라진 동물을 소생시켰다. 그림은 찰스 나이트가 그린 매머드의 모습이다.

1억 년 전 텍사스주에서는 플레시오사우루스의 끔찍한 싸움이 벌어졌다. 보물과 같은 그들의 골격이 댈러스 근교 티드웰의 소유지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고생물학의 발전은 이처럼 우연한 발견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애호가가 중요한 것인데, 그들이 무턱대고 화석산지를 파헤치는 폐해도 생겨났다.

매어리 애닝은 주로 라임 레지스 해안을 따라서 화석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화석이 발견되면 그 지점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개에게 지키게 하고 도와 줄 사람을 데리러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사람을 부르러 간 사이에 토사가 붕괴되는 바람에 개가 깔려 죽고 말았다.

1908년 6월 15일 디플로도쿠스 전시가 시작된 날. 파리의 자연사박물관 고생물학 전시실에서는 성대한 연회가 베풀어졌다. 차림표는 주라기와 에리온 포터주, 고생물학풍의 오드블, 올리고새(漸新世)의 혀넙치, 엔텔로돈의 등심 페리에 소스, 화산 모양 얼음과자, 디저트 등이었다.

1907년, 앤드류 카네기는 미국과 프랑스 사이의 우호증진을 위해서 디플로도쿠스 복제골격을 프랑스에 기증하기로 결정했다. 1908년 4월, 뼈가 들어 있는 34개의 상자가 파리 자연사박물관에 도착했다. 카네기 박물관의 관장 홀랜드 교수와 그의 조수가 프랑스로 건너왔다. 그리고 그들은 복제품 조립과정을 감독했다.

미지의 동물을 복원하는 데, 학자와 예술가의 상상력이 많이 동원되었다. 수정궁의 코뿔소(16세기), 아베르티니의 유니콘(18세기) 등은 상상이 낳은 산물이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제멋대로의 공상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화석동물의 본래 모습을 재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워터하우스 호킨스(위)나 C. 나이트(아래)의 작품에는 아직도 공상적인 요소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해부학적으로 볼 때 납득할 만한 복원이 가능해진 것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제6장

공룡쟁탈전

 

1800년대 후반, 북아메리카의 고생물학자들은 그때까지 사람들이 살지 않던 광활한 지역으로 탐사를 나섰다. 일찍이 유럽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린 거인과 괴물들이 피난처로 삼았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 땅은 풍부한 화석산지임이 밝혀졌다.

즈드네크 뷔리앙(Zdenek Burian)이 그린 디플로도쿠스.

조지프 레이디는 미국에서 척추동물 화석을 최초로 연구했던 사람이다. 그의 옆에 있는 것은 북아메리카에서는 최초로 발견되었던 공룡, 하드로사우루스(Hadrosaurus)의 뼈 화석이다.

에드워드 히치콕은 평생동안 코네티컷 계곡에서 발견된 발자국 화석이 거대한 새의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그는 그가 발견한 화석이 암허스트 대학의 애플턴 캐비넷에 전시된 화석과 동일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새의 발구조와 아주 유사했던 초기 공룡의 발자국으로 판명되었다.

마스토돈의 발굴

1799년, 오렌지 지방의 농장주인 존 메이스튼이 토탄(土炭) 지층을 파헤치다가 한 무더기 거대한 뼈를 발견했다. 그는 100명쯤 되는 이웃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땅을 파내고 뼈를 발굴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 서둘러서 작업하는 바람에 많은 뼈들이 손상되었다. 2년 후, 필라델피아의 부유한 화석스집가 찰스 윌슨 필이 이곳을 발굴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메이스튼한테 100달러를 주고 문제의 토탄지를 양도받았다. 그는 펌프와 커다란 바퀴가 달린 정교한 기구를 이용해 배수작업을 했다. 호기심에 가득 차 몰려든 사람들이 필이 마스토돈의 골격을 끌어올리는 것을 구경했다. 필이 발굴해 낸 골격은 완벽했다. 그런데 아래턱뼈가 보이지 않았다. 분실된 뼈를 찾아 주변을 샅샅이 뒤진 발굴단은 마침내 그것을 발견했다. 거대한 이빨을 보고 사람들은 뼈의 주인공이 육식동물이라고 단정지었다. 하지만 그 같은 생각은 오류임이 판명되었다. 어느 시대에 살았든 간에 장비류(長鼻類) 동물은 모두가 초식성이라는 것이 오늘날의 정설이다.

금방이라도 공룡사냥을 떠날 준비를 마친 듯 장총을 들고 있는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마시(뒷불 중앙).

커머 블러프에서 아서 레익스는 작업반장인 리드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레익스는 과학적인 태도를 가지고 발굴작업을 해 나갔다. 그는 모든 화석을 그림으로 그리고 나서 주석을 달았다. 그런 그를 보고, 리드는 게으르다고 비난했다. 레익스가 곡괭이보다는 붓을 더 선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수채화 시리즈 덕분에 공룡사냥꾼의 일상생활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림은 레익스가 그린 것으로, 화석을 조사하고 있는 마시 교수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커머 블러프의 나인 마일채석장에서 뉴욕 자연사박물관의 고생물학자들이 공룡을 운반하기 전에 석고로 보강하고 있는 장면이다. 보강재료로는 석고 외에 쌀을 삶아 만든 풀이 이용되었다.

고생물학자인 바넘 브라운은 레드디어강 유역에서 완전한 화석을 여러 개 발굴했다. 1912년에 찍은 이 사진은 코리토사우루스의 화석을 파내고 있는 장면이다. 코리토사우루스는 백악기가 끝날 무렵에 서식했던, 벼슬이 달린 거대한 공룡이다.

모사사우루스와 프테라노돈

즈드네크 뷔리앙은 《선사시대 동물》(1941년)을 발표함으로써 고생물학의 최신 가설을 시각화했다. 헤엄치고 있는 두 마리의 동물은 몸길이가 8m에 이르는 파충류 모사사우루스이다. 육식성인 이 동물의 추진력은 강력한 꼬리에 있다. 바다 위를 날고 있는 익룡은 지구의 역사를 통틀어서 체구가 가장 큰 프테라노돈(날개를 폈을 때의 길이가 16m에 달하는 것도 있다고 한다)이다. 프테라노돈은 거대한 부리로 물고기를 잡아먹는다. 머리 뒤쪽에 이상한 돌기가 나 있는데 이것은 거대한 부리의 균형을 잡아 주는 역할을 한다. 모사사우루스와 프테라노돈 역시 공룡과 마찬가지로 백악기 말기에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풍부한 상상력이 동원되어 제작된 1886년의 판화로 선사시대의 거대한 동물을 묘사하고 있다.

쥘 베른의 초상. 사진. 촬영자 미상, 19세기.

맨틀이 공룡 화석을 발견하고 복원작업을 시작할 무렵, 독일의 식물학자이자 고생물학자인 프란츠 웅거는 이 괴물을 그렸다. 순수한 상상력의 산물인 괴물은 19세기 표현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티라노사우루스, 프레스코화, 찰스 나이트 작. 시카고, 필드 자연사 박물관.

바다의 괴물. 뷔리앙 작, 《선사시대 동물》, 1941년.

물고기 화석. 판화. 18세기, 파리 국립도서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자화상. 토리노 왕립도서관.

팔리시의 초상화.

바랑드의 초상. 사진. 촬영자 미상, 19세기.

제막식 직던에 고생물학 전시실에서 촬영한 사진. 중앙에 있는 사람이 카네기 박물관의 관장인 홀랜드 교수. 그 오른쪽이 파리 자연사 박물관의 고생물학 교수인 마르슬랭 불.

고생물학 전시실의 디플로도쿠스. 사진.

었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