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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7. 25. 09:08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073 모차르트 - 신의 사랑을 받은 악동

 

미셸 파루티 지음, 권은미 옮김

2009, 시공사

 

 

시흥시군자도서관

SE011672

 

082

시15ㅅ  11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1

 

생기발랄하고 천진난만했던 천재 중의 천재,

모차르트! 그는 35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오페라 <마술 피리>를

완성한 직후였다. 그는 기적과도

같은 재능으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음악을 창조해 냈다.

음악가를 하인 취급하던 시대를 살았지만,

그는 자유인이었다. 그를 자유롭게

한 것은 바로 음악이었다.

 

1971년 여름.

작열하는 태양빛이 텐트를 뚫고 들어왔다.

숨막히는 텐트 속에서는 한 독일 삽화가가

이미지 재현에 몰두하고 있었다.

로테 라이니거.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이제 막 여러 인물들이 태어나고 있었다.

파파게노, 파파게나, 레포렐로, 피오르딜리지,

돈 조반니, 피가로, 밤의 여왕…….

그들은 모두 빛과 그림자의 경계선상에 도착해 있었다.

그림자놀이로 본 모차르트, 그것은 놀라운

마술이었다. 가볍고 암시적인 실루엣은 독특한

특징으로 오페라 대본을 환기시키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을 주었다. 거기에는 음악이 있었다.

장중하고도 가벼운 음악이…….

 

모차르트에 대한 사랑, 그리고 가위 하나와

검은 종이만 있으면 로테 라이니거는 오페라 속의 인불들을

멋지게 그려낼 수 있었다. 그녀의 펜 끝에서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코시 판 투테>,

<마술피리>의 주인공들이 차례로 탄생했다.

 

음악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대본 : 다 폰테, 시카네더

무대 장치 및 의상 : 로테 라이니거

LA VENDETTA, OH LA VENDETTA!

(복수, 그래, 복수다!)




 

차례

 

제1장 신이 주신 재능

제2장 신동에서 작곡가로

제3장 음악가와 하인

제4장 깨져 버린 환상

제5장 이제 나의 행복이 시작된다!

제6장 볼프강을 위한 레퀴엠

기록과 증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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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미셸 파루티 Michel Parouty

1945년에 태어났으며, 철학, 문학, 음악 이론을 전공했다. <국제 오페라>지에서 기자로 활동을 시작했고, 1986년부터 프랑스의 고전음악 잡지 <디아파종>의 상임 멤버로 활약하면서 국내외의 다양한 출판사업에 참여했다. <알페> <몽살바> <오페라 캐나다> <무대 잡지> <1막 잡지> <목요일의 사건> 등은 그가 출판에 참여한 잡지들이다. 1986년 페이아르 출판사에서 나온 <교양 음악의 안내>의 공동 저자이기도 한 그는 최근 오비에 몽테뉴 출판사에서 <라 트라비아타>를 출판하기도 했다.

 

옮긴이 : 권은미

1956년 대구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한 후 파리 제4대학(소르본)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불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전문 번역가로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불행한 존재>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인간과 성(聖)> 등이 있다.


제1장

신이 주신 재능


1756년 1월 27일, 가는 눈발이 잘츠부르크에 내리고 있었다. 게트라이데가 9번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마치 우리에 갇힌 곰처럼 방안을 빙빙 돌고 있었다. 침실에서 발자국 소리와 속삭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사랑하는 아내 안나 마리아가 지금 일곱번째 아이를 낳고 있는 중이었다. 아기는 볼프강이었다.


"레오폴트(아래)는 그저 평범한 인물로, 천재성은 없었으나 나름대로 재능이 있었다. 그가 남긴 《바이올린 교본》과 몇몇 교회 소나타곡은 볼프강의 초기 음악교육에 발휘되었을 그의 뛰어난 교육적 재능을 보여 준다. 그의 어머니(위)는 쾌활하고 냉정하며 상상력이 풍부하나, 소극적이고 가벼운 사람으로 보인다. 자식들의 증언에서도 그녀의 참모습을 알아낼 수 없었다."

에마누엘 부엔초트


열한 살 때의 나네를. 역시 신동이었던 그녀는 동생의 성공으로 그늘에 가려졌다. 그녀는 33세에 자작과 결혼했고, 1829년에 죽었다.

여섯 살 난 볼프강의 초상. 그가 입고 있는 의상은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에게서 받은 것으로, 황후의 아들 막시밀리안이 입던 옷이다.


화려한 도시 빈

1760년 요제프 황태자와 이자벨라의 결혼식 때 황궁에서 열린 축하연. 황태자의 결혼식은 황실의 화려한 축제를 여는 구실로서 백성들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적절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즐거워하는 사람들 속에서 느끼는 고독감, 즉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적당한 순간 두각을 드러내야 하는 것은 공식 직함을 찾는 음악가들의 운명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에서의 일자리보다 더 매력적인 장래가 어디 있겠는가? 앞줄에 앉은 한 소년의 모습에서 2년 후 빈 궁정에서 환영받게 될 여섯 살의 볼프강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의 수도

요제프와 이자벨라의 결혼 축하 음악회. 1558년부터 1806년까지 독일 신성 로마 제국의 중심지였던 빈은 마리아 테레지아 시절, 계속 번창하는 도시였고 인구도 8만 8,000명에서 17만 5,000명으로 늘어났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수도는 외국인에게도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이러한 전통은 20세기까지 남아 있으며 모든 예술분야에도 반영되었다. 한 국가가 유럽 인종의 완벽한 결집체를 이루었다면 그것은 바로 합스부르크 제국이었다. 모차르트 당시 빈은 계몽주의 시대 유럽의 등대였으며 그 도시를 특징짓던 세계주의가 그 증거였다. 18세기 말, 빈의 활력이 가장 화려한 빛을 발했던 부분은 바로 황실의 보호 아래 벌어졌던 각종 예술활동, 특히 음악분야이다.

빈 궁정의 꼬마 볼프강.  "우리는 3시부터 6시까지 황후와 같이 있었소. 황제께서 친히 아이가 바이올린 연주할 방까지 안내해 주셨소."

1762년 10월 16일

레오폴트

볼프강과 퐁파두르 후작부인.

그림 남작.

콩티 공(公)의 다과회

이 풍속화는 1766년 여름 볼프강이 두번째로 파리를 방문했을 때 미셀 바르텔레미 올리비에가 그린 것으로 콩티 공의 저택 템플궁의 거울홀에서 펼쳐진 장면이다. 당시 열 살이던 볼프강은 하프시코드 앞에 앉아 있다. 그 옆에는 라모 작품의 명해석가인 테너 피에르 젤리오트가 서 있다. 악기를 조율하고 있는 그는 왕실악단의 바이올린 및 기타 연주자이다. 프랑스에서는 모임을 자주 가졌다. 그들 모임에는 항상 음악이 뒤따랐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음악에 큰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모차르트는 몇 년 후 1778년 5월 1일 편지에서 "의자와 탁자, 벽에게 연주해야 한다."고 불평했다.


여덟 살 된 작곡가의 본격적인 첫 작품. 두 곡의 <하프시코드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K. 6~7>로, 1763~1764년 겨울 동안 작곡되었다(위). 1716년의 프랑스 하프시코드(아래).Six Sonates pour le clavecin qui peuvent se jouer avec l'accompagnement de violon ou flute traversière... Oeuvre III. [KV 10-15]

피아노에 앉은 볼프강(아래)과 소나타 모음곡 표지(위). "지금 나는 엄청난 지출을 감당해야 하오. 영국 여왕에게 (그녀의 요청으로) 헌정될 볼프강의 소나타 여섯 곡을 인쇄해야 하기 때문이오."

1764년 11월 27일

레오폴트

30세의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와 아홉 살 된 볼프강과의 우정이 시작되었다. 이탈리아 문화에 젖어 있던 바흐는 독일 음악보다 덜 엄격한 아름다운 선율을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제2장

신동에서 작곡가로


모차르트는 이제 열한 살이 되었다. 그는 이미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고, 어린 두 어깨 위에는 영광의 무게가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신동의 후광은 끝났다. 이제 볼프강은 자신이 '꼬마 괴물'이 아니라 진정한 음악가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여야 했다. 그가 시선을 돌린 곳은 오페라의 나라 이탈리아였다.

어린 볼프강.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할레에 있던 그는 1712년에 런던에 정착했고 1742년 <메시아>를 작곡했다. 그는 이탈리아식 오페라 및 오라토리오 장르의 최고 권위자였다.

모차르트 당대의 유명 작곡가였던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위)와 요한 아돌프 하세(아래). 원래 테너 가수였던 하세는 이탈리아 오페라 세리아 작곡가가 되었다. 그는 어린 볼프강에 대해 "언젠가 이 아이가 우리를 능가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음악가의 초상화. 이 그림을 통해 열두 살경의 볼프강을 연상해 볼 수 있다. "볼프강의 오페라 <보아라, 바보 아가씨>에 관해서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이가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빌어먹을 음악가들 전부가 들고일어났다는 것뿐이오. 그런 음모가 꾸며졌소. 엄청나게 나쁘게, 파멸시킬 만큼……."

1768년, 9월 14일

레오폴트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와 <알체스테> 이후 1768년 최고의 영광을 누렸다.

밀라노의 테아트로 두칼레(궁정극장). 이곳에서 모차르트의 <폰토의 왕 미트리다테>와 <루치오 실라> 그리고 하세의 <루지에로>가 초연되었다. 1776년 화재가 난 이 극장은 2년 후 '스칼라'라는 이름으로 다시 개관되었다.

학자이자 교수로서 전유럽의 존경을 받았던 마르티니 신부.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 "누나가 로마에 와 봤으면 싶어. 이 도시는 분명 누나 마음에 들 거야. 로마에 있는 수많은 다른 것들이 균형 잡힌 선을 갖고 있듯이 성 베드로 성당에도 균형미가 있어."

1770년 4월 14일

볼프강

교황 클레멘스 14세는 이미 글루크가 영광을 받았던 황금박차훈장을 볼프강에게 수여했다.

황금박차훈장을 달고 있는 볼프강. 1777년 잘츠부르크에서 그려진 이 초상화에는 그가 볼로냐와 베로나의 음악원 회원임도 쓰여 있으며, 볼프강의 평소와는 다른 격식 차린 모습이 담겨 있다.

오스트리아의 여제이며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여왕이었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정치가이자 예술애호가인 계몽군주로, 1762년에는 볼프강을 친절히 맞아 주었으나 1771년에는 그의 앞길을 막았다. 


제3장

음악가와 하인


밀라노와의 작별은 모차르트에게 쓰라림을 주었다. 변덕스러운 이탈리아는 어제까지만 해도 연인으로 떠받들던 모차르트를 더 이상 거들떠보지 않았다. 볼프강은 잘츠부르크에 갇혀 지냈다. 자극을 찾아 빈으로 가 보기도 했지만, 고향에서 풍기는 우울함을 떨쳐 버릴 수는 없었다. 궁정음악가로서의 고달픈 생활에 적응해야 했다.

19세기에 그려진 그림의 이미지처럼 모차르트와 잘츠부르크는 항상 같이 연상되었다.

그러나 1773년, 그에게 잘츠부르크는 감옥처럼 느껴지는 비좁은 시골도시였다.

"내 동생은 상당히 귀엽게 생긴 아이였다. 그러나 천연두자국으로 얼굴이 약간 흉해졌다. 게다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왔을 때는 안색이 이탈리아인처럼 누래졌다."

마리아 안나 모차르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그는 훗날 친구 에커만에게 프랑크푸르트에서 보았던 어린 모차르트를 이야기했다. "나는 일곱 살이던 모차르트가 여행중에 연주회를 열었을 때 그를 보았네. 그때 나는 열네 살쯤이었는데 가발을 쓰고 긴 칼을 찬 꼬마아이를 아직 똑똑히 기억하네."


"하느님 앞에서 정직하게 말하는 바이지만 당신 아들은 내가 아는 작곡가 중 가장 위대합니다. 그는 감각이 뛰어날 뿐 아니라 작곡에 대한 최고의 지식도 갖고 있소."

레오폴트 모차르트에게 한 하이든의 이야기


밀랍 위에 그려진 모차르트와 하이든.

볼프강의 사인.


"어제 난 코미디극인 <유행을 좇는 가족>을 보ㅓ 갔어. …… 누나의 뮌헨 동생이. 1774년 12월"

볼프강이 누나에게


"볼프강의 오페라는 리허설 과정에서 무척 인기가 많았소. 그래서 가수들이 작품을 더 잘 배울 수 있도록 공연은 1월 5일로 연기되었소. …… 한마디로 이 곡은 놀랄 정도로 인기가 있소. 이제 성공은 극장에서의 공연에 달려 있소. 하지만 배우들이 우리에게 호감을 갖고 있으니 잘 될 것이오."

1774년 12월 28일

레오폴트

<바이올린이 있는 정물>. 우드리. 18세기. 파리 루브르박물관.

잘츠부르크의 콜로레도 대주교. 볼프강과 그의 아버지는 그를 '계율가'라는 암호로 불렀다.


제4장

깨져 버린 환상


다시 숨이 트였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음악활동에 간섭하려는 자들이 부과해 놓은 독재적 제약과 지긋지긋한 단조로움에서 탈출하고자 투쟁했고, 잘츠부르크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 자신의 재능이 세상에 빛을 발하리라 확신했던 그는 부푼 희망을 안고 뮌헨을 향해 떠났다. 스물한 살, 아직도 환상을 가질 수 있는 나이였다.


"저는 요즘 계속 최고의 기분입니다. 모든 압박에서 벗어나니 마음은 새털처럼 가볍기만 합니다."

1777년 9월 26일

볼프강

레오폴트 모차르트.


"사랑하는 아빠, 저는 시인이 아니기 때문에 단어와 구절을 예술적으로 배합해서 시를 쓸 수 없어요. 그리고 화가도 아니므로 명암의 효과를 낼 줄도 몰라요. 또 손짓과 몸짓으로 저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줄도 몰라요. 무용가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음을 통해서는 제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어요. 저는 작곡가거든요."

1777년 11월 8일

볼프강

모차르트 음악의 세련된 경쾌함은 눈부신 창의와 단련된 표현에서 나오는 완벽한 균형의 결과이다. 프라고나르의 <그네>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18세기의 상투화된 천박성과는 다른 것이다. 유쾌한 느낌을 주는 그의 작품에는 언제나 우수의 그늘이 배어 있다.

마리아 안나 테클라 모차르트 연필화. 1777-1778. 잘츠부르크 모차르트 박물관.


"나는 내 사촌누이가 아름답고 총명하며 유쾌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습니다.그녀는 많은 사람들과 어울렸고 뮌헨에서도 얼마 동안 지냈습니다. …… 우리는 서로 잘 통합니다. 그녀와 짓궂은 농담을 하면서 사람들을 비웃는 것이 아주 재미있어요."

1777년 10월 17일

볼프강

필리프 메르시에의 <음악회>. 현대 영어의 아카데미(academy)는 연구기관, 교육기관, 훈련기관 따위를 뜻한다. 그러나 모차르트 당시의 독일에서는 음악회를 준비하는 단체였으며 더 나아가 음악회 자체를 의미했다.

알로이지아 베버는 뛰어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가수였다. 모차르트가 그녀를 위해 쓴 콘서트 아리아 <테살리의 사람>은 높은 C음계 위의 G음계까지 올라간다.

프라고나르의 <음악 레슨>. 교사로서의 볼프강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편지에서 그는 단조로운 레슨에 대한 혐오감과 재능 없는 학생을 대할 때의 견디기 힘든 지루함을 밝혔다. 그는 가르친다는 것은 단지 피아노밖에 칠 줄 모르는 사람에게나 맡겨야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천재임을 알았고, 천재성은 가르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볼프강의 어머니 장례식을 치렀던 파리의 이노상 교회와 묘지. "하느님의 은혜로 저는 이 모든 일을 꿋꿋하고 담담하게 견디어 냈습니다. 어머니의 상태가 몹시 심각했을 때 전 하느님께 두 가지만 즉 어머니를 위해선 행복한 죽음을, 그리고 저에게는 힘과 용기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1778년 7월 3일

볼프강

1781년의 모차르트 가족. 나네를, 볼프강, 레오폴트 그리고 고인이 되어 그들과 함께 있는 안나 마리아의 초상화가 보인다.


"만약 너의 어머니가 만하임에서 돌아왔더라면 죽지 않았을 텐데……. 너는 더 나은 때에 파리에 도착했을 것이고, 가여운 너의 어머니는 아직 잘츠부르크에 있을 텐데."

1778년 8월 27일

레오폴트


제5장

이제 나의 행복이 시작된다!


모차르트는 투쟁을 포기하고, 또다시 구역질 나는 콜로레도 밑에서 고통 속에 몸을 내맡기기로 했다. 그러나 그의 창작의 샘물은 이탈리아 · 독일 · 프랑스 음악과의 접촉으로 더욱 풍부해졌다. 대중은 아직 알아주지 않았지만, 모차르트는 자기 자신이 비할 데 없는 천재임을 확신했다.

18세기 그림으로 작곡에 열중하는 모차르트.

모차르트. 바바라 크라프트, 1819년, 빈 음악동우회.

"이곳 빈에서 저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유익한 사람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 저에겐 많은 영광이 주어졌고, 계약조건도 훌륭합니다. 잘츠부르크에서는 제대로 된 대우나 격려도 받지 못하면서 기껏 400굴덴을 위해 괴로워해야 합니다. 그 결과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언제나 같은 것입니다. 끔찍한 모욕을 받은 다음 다시 떠나야하는 거겠죠."

1781년 5월 12일

볼프강이 레오폴트에게

1774년 빈 궁정의 작곡가로 임명된 안토니오 살리에리. 1790년 <코시 판 투테>의 계획적인 방해로 모차르트를 난처하게 했지만, 그는 경쟁자라기보다는 선배였을 뿐이다.

모차르트와 카타리나 카발리에리. 모차르트는 그녀를 위해 <후궁으로부터의 탈출>에서 콘스탄체라는 인물을 그렸고, 빈에서 <돈 조반니>가 초연되었을 때 그녀가 엘비라 역을 맡자 아리아 <미 트라디>를 추가로 작곡했다.

19세기 판화로, 쇤브룬궁의 요제프 2세 앞에서 연주하는 모차르트. 황제는 그림에서처럼 감상에 몰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빈의 성 슈테판 대성당. 여기서 볼프강과 콘스탄체가 1782년 8월 4일 결혼식을 올렸다. 볼프강이 죽기 얼마 전인 1791년, 그는 이 성당의 악단장인 레오폴트 호프만의 무보수 보조직 임용과 함께 호프만의 사후 그의 자리를 이어도 좋다는 약속을 시청으로부터 받았다.

콘스탄체 모차르트의 초상화(1802년). 그녀는 낭비벽이 있었으며 부주의했다는 등 무성한 소문으로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아 왔다. 그러나 최근의 많은 자료에 따르면 그녀는 오히려 재정문제를 처리하는 데 유능했고, 남편의 음악을 꾸준히 성원해 주었다고 한다. 모차르트의 전기작가인 프리드리히 슐리히테그롤은 콘스탄체가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나 살아 남은 두 아이의 훌륭한 어머니였으며, 모차르트의 어리석은 결정과 지나친 행동을 견제했던 훌륭한 아내였다."라고 기록했다.

<피가로의 결혼>에서 최초로 수잔나 역을 맡았던 낸시 스토레이스.

1790년 빈의 프리메이슨 모임. 그림에서 제일 오른쪽의 얼굴이 모차르트로 확인되었다. 프리메이슨 결사는 단원의 정신적 진보수준에 따라 세 계급으로 나누었는데 입문자(apprentice), 동료(fellow), 지도자(master)가 그것이고, 각 계급에 독특한 상징물과 표지가 있었다. 모차르트가 언제 지도자가 되었는지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빨리 진급했다고 한다. 프리메이슨 결사는 단원에게 일정한 규율과 의무를 부과했다. 프리메이슨의 사상, 특히 형제애와 자비심의 영향은 그의 후기작품에 분명히 드러난다. 프리메이슨을 위한 그의 첫 작품인 가곡 <동료장인의 여행>은 1785년 3월 26일 작곡된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그의 진급 축하의식 때 쓰였을 것이다. 모차르트의 프리메이슨적 작품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칸타타 <프리메이슨의 기쁨>이다. 프리메이슨적 음악은 율동적이고 형식적인 것이 특징이다.


제6장

볼프강을 위한 레퀴엠


1787년, 모차르트는 서른한 살이었다. 앞으로 4년은 오래 전부터 그랬듯이 끊임없이 괴롭혀댄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려야 했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어두웠던 이 시기에 모차르트는 자신의 최대 걸작을 작곡했다.

미완성된 이 초상화는 1789~1790년 사이에 알로이지아의 남편 요제프 랑게가 그린 것이다.

19세기의 모차르트 전기작가인 오토 안은 젊은 베토벤이 모차르트를 만나러 왔던 장면을 묘사했다. "모차르트의 요청에 따라 베토벤은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그것이 평소 외워 두었던 기교적인 작품이라 여겨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그걸 눈치챈 베토벤은 자유롭게 즉흥연주를 할 수 있는 주제를 달라고 그에게 간청했다. …… 어찌나 훌륭하게 피아노를 치던지 모차르트는 몇몇 친구들이 있던 옆방으로 들어가 큰소리로 "저 사람을 지켜보시오. 언젠가 온 세계를 떠들썩하게 할 것이오."라고 말했다."

 

니슬레의 석판화로, 체를리나에게 치근덕거리는 돈 조반니와 1막 마지막 부분의 엎치락뒤치락하는

상황을 표현했다.

모차르트와 콘스탄체 사이의 여섯 아이 중에 두 명만 살아 남았다. 카를 토마스(오른쪽)는 공무원이 되었고, 프란츠 볼프강은 작곡가가 되어 자신의 작품에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라고 서명했다. 둘 다 독신으로 자식 없이 죽었다. 이 초상화는 1798년도에 제작되었다.

<코시 판 투테>의 초연 프로그램. 이 오페라의 핵심 주제가 되는 욕망과 이성 사이의 갈등은 모차르트 당대의 사람들은 물론 다음 세대에게도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다. 19세기에는 원래 대본 대신 다른 이야기로 대체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오페라의 근본적인 모호성은 현대의 청중에게 가장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마술피리>의 초연 프로그램. 이 작품은 요정이야기. 철학적 우화, 프리메이슨적 오페라였으며, 그 이상으로 훌륭했다.

1791년 판화로 표현된 새잡이 파파게노(위). 가운데와 아래 그림은 1793년 공연된 <마술피리>의 장면으로, 타미노가 동물을 불러모으고 자라스트로가 등장하고 있다.

걸작의 기

독일 오페라를 쓰고자 했던 모차르트에게 <마술피리>를 제안한 사람은 시카네더였다. <마술피리> 대본구성의 바탕이 된 것은 테라손 신부의 소설 <세토스>와 브라니츠키의 오페라 <오베른, 요정들의 왕>이었다. 대본의 상당부분을 쓴 시카네더는 그 스스로 초연 때 파파게노 역을 맡기도 했다. '밤의 여왕'의 궁전을 위한 이 무대는, 1816년 베를린 공연 때 독일의 위대한 건축가 카를 프리드리히 신켈이 디자인한 것이다.

<마술피리>의 등장인물

<마술피리>의 궁성은 세 쌍의 인물에 집중된다. 젊은 타미노는 사랑하는 파미나 곁에서 입문의식을 치러 낼 준비가 되어 있다. 새잡이 파파게노는 타미노의 상대인물인 것 같다. 순진한 어린아이 같은 파파게노는 파파게나를 찾지 못할 경우 기꺼이 죽을 각오를 한다. 그리고 빛과 미덕을 상징하는 현자 자라스트로는 밤의 여왕으로 표현되는 어둠의 세력과 싸워 승리를 거둔다. 그림은 신켈이 디자인한 자라스트로의 정원무대장치이다.

프리메이슨의 영향

<마술피리>에 나오는 괴물과 요정, 변신(變身) 등의 줄거리는 마치 동양의 우화 같아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프리메이슨에 대한 모차르트와 시카네더의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주인공이 겪는 입문의식과 고대 이집트에 대한 암시, 숫자 상징으로 명백해진다. 하지만 그런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이 보여 주는 사랑과 우정, 지혜의 메시지이다. 그림은 1818년 뮌헨 공연시 시몬 크바글리오가 구상한 밤의 여왕이다.

"그의 마지막 숨결은 마치 <레퀴엠>의 팀파니 파트를 표현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그 소리는 아직 내 귀에 생생하다."

모차르트의 처제

소피 하이벨

"나는 내 재능을 다 펼치기 전에 생을 마치게 되었다. 인생은 너무나 아름답고 내 생애는 무척이나 전도유망하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누구도 운명을 바꿔 놓을 수 없고,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예측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될 것이다. 이제 나의 생을 마감한다. 여기 내가 미완으로 남겨서는 안 되는 <레퀴엠>이 있다."

모차르트

덕이고

분발이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