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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2. 10:52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087 아프리카 탐험 - 나일강의 수원을 찾아서


안 위공 지음, 한양환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20


082

시156ㅅ  15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5


탐험가들을 매료시킨 검은 대륙 아프리카.

원시 자연 상태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아프리카 내륙 지방은 탐험가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생명을 걸고 아프리카 오지를 답사하여

신비에 싸인 미지의 세계를 세상 사람들에게 소개했던

위대한 탐험가들, 그러나 이들의 업적은

유럽 열강을 부추겨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전락시키는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다음 날 나는 그 유명한

모시와투냐(Mosi-oa-Tounya) 폭포를 찾아나섰다.

칼라이(Calai)를 출발해서 얼마간의 항해 끝에 물보라에

싸여 있는 거대한 물기둥을 발견할 수 있었다. 폭포

가까이에 위치한 섬에 내린 순간 너무도 놀라운 장관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폭이 1,000미터나 되는 강이 겨우

20미터 반경에 불과한 웅덩이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일찍이 내가 본 적이 없는 이루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나는 이를 빅토리아 폭포라고

명명하고 그 근처에 백여 개의 복숭아와 살구씨,

그리고 상당한 양의 커피 씨앗을 뿌렸다.

한 원주민으로 하여금 둘레에 울타리를 치고 돌보도록

한 후 나는 바로 옆에 서 있는 나무 등걸에 내 이름의 약자를

새기고 그 밑에 1885년이라고 새겨 놓았다."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차례


제1장 검은 대륙의 발견

제2장 나일강의 수원을 찾아서

제3장 리빙스턴의 남아프리카 탐험

제4장 밀림 속으로

제5장 탐험가의 세계

기록과 증언

그림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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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위공 Anne Hugon

파리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젊은 여성학자이다. 수년 전부터 아프리카 대륙 탐험사에 관한 연구를 해왔으며, 메리 킹슬리(Mary Kingsley)의 탐험기를 번역하기도 했다. 리용 제2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는 그녀는, 현재 아프리카 대륙 내에서의 선교 활동사에 관한 글을 집필하고 있다.


옮긴이 : 한양환

1958년 공주 출생.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한 후 파리 제1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남대학교와 교원대학교에 출강하고 있으며, 아프리카 문제 연구소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다수의 아프리카 관련 논문을 썼으며, 번역서로는 <프랑스의 고용보험> <중국> 등이 있다.






제1장

검은 대륙의 발견


19세기 초엽까지도 아프리카 내륙지역은 전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땅(terra incognita)'이었다. 그후 탐험가들은 각 지역을 답사하여 하천과 산세를 확인했고 다양한 동식물군(群)에 대한 연구목록을 작성했으며 아프리카인과도 유대를 다져 왔다. 그러나 불과 1세기 후에 이 땅은 유럽 열간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탐험가들은 새로운 바람을 일으킴으로써 유럽 제국주의가 아프리카 대륙에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셈이다.

1300년대에 아프리카를 여행한 이븐 바투타도 낙타를 이용하여 아프리카 지리에 관해 많은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15세기에 제작된 세계지도는 당시 지리적으로 혼동되던 나일강과 니제르강이 텐트로 표시된 아프리카 왕국에서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보여 준다.

박물학자인 조지프 뱅크스경은 1768년 쿡 선장이 지휘한 태평양 탐험에 동참했고 2년 뒤에는 아프리카협회를 창설했다. 대무역상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여러 명의 과학자와 영국 황태자가 포함되어 있는 실질적인 후원자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노예폐지론자가 탄원서를 제출하는 이 그림은 1826년 발간된 아멜리아 오피의 《흑인의 비애》에 등장한다. 노예폐지론자들은 노예무역을 금지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탄원서를 제출하거나 인쇄물을 배포하여 여론에 호소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투쟁을 전개했다.(위) 19세기 노예폐지론자의 판화(아래)에서 쇠사슬에 묶인 흑인을 볼 수 있다. 노예폐지론자들은 흑인도 한 형제자매라는 형제애를 강조했는데, 이는 선의에서 우러나온 것이지만 그들의 태도는 스스로 큰형임을 자처하며 동정적인 인종차별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1840년 런던에서 개최된 노예해방협회의 총회장면. 1830년부터 노예제도는 영국령 식민지역 내네서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다. 노예폐지론을 찬성하는 계층은 주로 상류층 인사와 산업자본가였다. 특히 이들 산업자본가는 경제적 이해관계와 연관해서 노예폐지론을 지지했다.

선교사들이 저술한 기행문에서 볼 수 있듯이 교회를 포함해 학교와 진료소는 선교사업의 주요거점이었고 이들 부속기관에서는 다양한 자선사업을 벌였다. 리빙스턴은 개종(改宗)에 따르는 필요충분조건을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누구든 문자를 해독하고 기독교의 근본을 이해하지 않고는 세례를 받을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주장했던 것처럼 기독교의 개종이 순수한 영적 차원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당시 복음전도를 위해 선교사들은 개종한 자에게 그 대가로 연장이나 의복 따위 산업제품을 제공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물질적 대가를 바라고 거짓 개종한 사람들이 속출했다. 리빙스턴이 남아프리카인에게 설교하는 그림.

18세기 런던은 세계 상업의 중심지였고 아프리카와 연관된 모든 지적, 상업적 활동의 메카였다. 토머스 알롬의 그림은 19세기 런던항의 모습을 보여 준다. 영국 제2의 항구도시 리버풀은 검은 대륙과 노예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척할 수 있었지만,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노예무역 열기가 수그러들자 경기가 다소 침체되었다. 바로 이곳에서 수많은 탐험가들이 증기화물선을 타고 아프리카로 향했다.

장 밥티스트 마르샹

탐험가 새뮤얼 베이커가 그린 수채화는 라투카(Latooka), 장례식 춤을 묘사한 것이다. 종종 유럽인은 매혹적이긴 하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의식을 통해 원주민들로부터 성대하게 환대받았다.

리처드 버턴 경은 동양적인 품성과 이미지를 지니려고 했다. 그는 아편을 복용하고 방탕한 친구들과 어울렸으며 동성연애자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에 대한 이 같은 나쁜 평판은 그의 군경력을 손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총을 들고 열대림에 도전할 모든 준비를 갖춘 헨리 모턴 스탠리의 자신만만한 태도는 탐험가의 전형을 보여 준다.

리빙스턴이 제작한 빅토리아 폭포 지도.

셔와호를 표시한 지도. 리빙스턴. 왕립지리학회, 런던

지질학자로서 1843년부터 영국 왕립지리학회의 종신 회장을 역임한 로드릭 머치슨경은 논리정연하면서도 권위적이었으며 든든한 재력을 바탕으로 많은 추종자들과 더불어 과학발전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나일강 수원을 찾으려는 탐험대를 적극 후원해 주었다. 이에 감사하는 뜻에서 베이커는 앨버트호에서 내려오는 폭포에 머치슨이라 이름붙였다.

아홉 자녀들 중 일곱 명과 자리를 같이한 빅토리아 여왕. 스펙과 그랜트 등은 아프리카의 왕을 제압하기 위해 아무런 주저 없이 영국 여왕의 아들임을 자처하기도 했다.


제2장

나일강의 수원을 찾아서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라고 기록했다. 이집트 문명의 발상지인 나일강은 신성한 대상이었으며 오랫동안 지리학적 신비로 남아 있었다. 나일강은 과연 어디에서 흘러오는 것일까? 사람들은 나일강이 세상의 끝 또는 그 너머에서 발원한다고 생각했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뒤, 19세기에 이르러서야 탐험가들은 나일강의 신비를 벗길 수 었었다.

탐험가 존 해닝 스펙의 초상. 스펙은 나일강의 수원을 알아냈으나 자신의 업적을 인정받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위대한 탐험가 스펙은 세속적인 명성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70만 권의 장서를 소장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는 프톨레마이오스. 중세 말까지 사람들은 그의 저서를 많이 읽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유명한 저서 《지리학》이 15세기에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이 책을 참고해서 고대 아프리카 지도가 제작되었다.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아프리카 남부지방은 실체가 명확하지 않으며 서부 해안선 윤곽 역시 확실치 못하다. 그러나 나일강의 묘사는 어느 정도 정확성을 띠었다. 당시 사람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보다 헤로도토스의 견해를 더욱 일반적으로 받아들였다.

제임스 브루스는 많은 지식인들과 교류를 가졌으며 때때로 그들에게서 큰 도움을 받기도 했다. 한번은 항해 도중에 탐험기재를 분실하여 탐험을 중도에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때 뷔퐁이 루이 15세를 설득하여 그에게 필요한 자재를 급송해 준 적이 있었다. 브루스가 스린 에티오피아의 동식물.

고고학자이며 지질학자였던 카이요는 기린, 타조, 나일강 지역 주민들(그림은 전통복 차림을 한 나일강 연안 주민들이다), 메로웨 문명의 사라진 영광, 아비시리 폭포 등 아프리카의 여러 풍물에 매료되었다. 그는 한때 이집트인으로부터 배척당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맹수 사냥꾼으로 유명한 존 스펙은 식물학자이자 지질학자였다. 히말라야와 티베트 여행을 통해 스펙은 모험심을 길렀고, 훌륭한 탐험가로서의 자질을 갖출 수 있었다.

리처드 버턴은 동양의 풍물과 미지의 땅을 향한 모험에 매료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순례자로 변장하여 메카에 잠입한 것이 그의 최초 기행(奇行)이었다(위). 그는 아프리카 동부에 위치한 이교도 금단지역인 하라르(아래)에 은거하기도 했다. 뛰어난 언어학자인 버턴은 아랍어와 힌두어를 포함해 30개가 넘는 언어를 구사했으며, 《아라비안 나이트》와 인도의 외설스런 문학작품을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끝없는 야망을 지닌 버턴은 까다로운 성격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권위주의자로, 몹시 자만심이 강했으며 성마른데다가 전통적인 가치를 경시하기도 했다. 그는 하위직 외교관으로서 일생을 마쳤는데, 아래 사진은 트리에스테에 살고 있을 무렵인 그의 말년에 찍은 사진이다.


버턴은 탐험가들이 타고 다닌 당나귀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고집 세고 버릇도 나쁜 당나귀는 말과에 속하는 동물이 지닌 못된 버릇 네 가지를 가지고 있다. 뒷걸음질 치고 비틀거리고 뒷발로 차는가 하면 도망치기 일쑤이다."

스펙의 수채화.

스펙은 무테사왕을 비난했으나 스탠리는 그를 흠모했다.

"드디어 탐험의 목표가 달성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고대 나일강이 빅토리아 냔자호에서 발원한다고 생각했다. 일찍이 예언했던 것처럼 냔자호는 우리 종교의 창시자(모세)가 바구니에 실려 떠내려온 성스러운 강의 근원임을 확신했다"라고 리폰 폭포에 도착하던 날 스펙은 그의 일기에 이렇게 적어 두었다.

1880년에 제작된 이 판화는 콘도코로에서 이루어진 스펙과 그랜트와 베이커의 만남을 묘사하고 있다. "여러 척의 선박들이 정박해 있는 강가에서 우리는 멀리서 급히 뛰어오는 사람을 발견하고 우리가 찾고 있던 사람이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곧 오랜 친구인 베이커의 뜨거운 악수가 나를 착각에서 깨어나게 했다. 이 뜻밖의 해후는 무척 큰 감동을 주었다."

곤도코로에서

스펙

본국으로 무사히 귀환한 스펙과 그랜트를 위해 왕립지리학회에서 주최한 환영회는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열광하는 지지자들 앞에서 학회장은 이들에게 메달을 수여했다. 이 같은 모임은 유명한 탐험가가 참석할 경우 더욱 성황을 이루었다.

새뮤얼 베이커는 1821년에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에 나가는 대신 집에서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은 탓으로, 그는 보수주의적 기질과 강한 개인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 여러 차례 경험한 여행을 통해서도 이러한 편협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는 전투, 스포츠, 사냥에 참가하기 위해 스리랑카와 발칸 지역을 두루 여행한 적이 있다. 영국이 많은 식민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종적 우월을 자부하던 베이커는 19세기 인종차별주의적 이론이 대두되기 이전에 이미 앵글로 색슨족이 인간세계의 우등민족임을 확신하고 있었으며, 외국인 혐오감을 바탕으로 자신의 공적을 과시하기 위해 글을 쓰곤 했다. 그러나 그는 회화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 주었다. 수채화(위)에서 베이커는 쇼아에 있는 자신과 아내를 그렸으며, 아래 그림에서는 시르강 지역의 무인(武人)을 표현했다.

캄라시왕이 파견한 사절이 왕이 베이커를 스펙의 '형제'로 인정한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탐험가 새뮤얼 베이커가 그린 <앨버트 냔자호 항해>이다.


제3장

리빙스턴의 남아프리카 탐험


"나는 방대하고 비옥한 아프리카 대륙이 그 신비의 베일을 벗고 유럽인의 경제생활에 유용한 상업시장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 마지막으로 나의 기록이 이 미지의 대륙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 촉진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데이비드 리빙스턴

《선교여행과 남아프리카에서의 연구》

리빙스턴은 선교사, 탐험가, 문명의 사절로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유럽인과 아프리카인을 위해 봉사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나는 열 살 때 방적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했다."라고 리빙스턴은 탐험기에 적고 있다. 리빙스턴이 다닌 공장은 블랜타이어에 있었다. 그는 아침 6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일했다. 또한 야간학교에서 10시까지 수업을 받은 후 자정까지 공부에 전념했다.

"1840년, 3개월의 항해 끝에 나는 케이프타운에 도착했다. 소가 이끄는 마차를 타고 내륙으로 들어가기 위해 알고아만으로 향했다. …… 그곳에서 16년 간 의료봉사와 선교사업에 헌신했다."

리빙스턴

탐험기(期)기에서 식민지 경영기로의 과도기라 할 수 있는 1879년에서 1890년 사이에 조지프 톰슨 또한 잠베지강에서 대호수 지역까지 탐사를 벌였다. 지질학자인 톰슨은 5,000km를 탐험하여 이룬 지리학적 발견 성과보다 그 탐험방법을 통해 더욱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정력가였으나, 언제나 대원들을 사려 깊게 대했고, 분쟁 없이 평화로운 가운데 탐험을 수행해 나가려 노력했다.

리빙스턴은 그의 가족을 동반해 응가미호에 이르렀다.

"수레들을 포기한 지 열이틀째 되는 날. 1849년 8월 1일, 우리는 응가미호의 북동쪽 끝 호수의 만곡부에 도착했다. 우리는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그 아름다운 호수를 음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호수의 수심이 얕아 상업용 선박통로로 사용할 수 없는 점이 못내 아쉬웠다.

리빙스턴

리빙스턴이 잠베지강에서 수집한 노 젓는 흑인들의 뱃노래 중에, "아무도 모른다네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모른다네 그가 어디로 가는지."라는 구절이 있다. 리빙스턴은 "현지주민은 잠베지강을 영물(靈物)로 여겼다."라고 적고 있다. 앙골라에서 인도양까지 2,700km를 흐르는 잠베지강에는 계곡과 폭포가 많아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데 어려움이 따랐다. 위의 수채화는 리빙스턴의 소형증기선 마 로버트호이다.

리빙스턴이 일기를 적어 놓은 종이쪽지(위). 그는 가능한 한 장비를 줄이고자 했는데, 이 때문에 물자부족을 감수해야 했다. 풍경을 묘사하고 탐험행로를 설명하고 육분의(아래)를 이용해 지형지물을 측정하여 그 결과를 기록할 때 쓰는 종이는 무엇보다 귀한 물품이었다. 여행중에 쌓인 피로 때문에 탐험에 관련된 여러 사항을 모두 머릿속에 담는다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그때마다 기록해 두어야 했다. 또한 그는 탐험 도중 불운을 당했을 때 문서를 그들이 만나는 첫번째 백인에게 넘겨주라고 대원들에게 지시해 두었다.

"20분 간 항해한 끝에 우리는 '포효하는 연기'라고 불리는 물안개기둥을 발견했다. 거대한 기둥은 구름과 닿아 있는 듯했다. 밑동이 흰 물안개기둥은 위로 올라갈수록 색깔이 차츰 짙어졌기 때문에 땅에서 솟아오르는 연기기둥처럼 보이기도 했으며, 주변의 큰 나무들이 함께 어우러진 풍경은 이루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강기슭과 점점이 흩어져 있는 섬들에는 환상적인 나무들이 무성해 있었다."

리빙스턴

《선교여행과 남아프리카에서의 연구》

토머스 베인스가 그린 테테 지방을 흐르는 잠베지강 지도(위). 리빙스턴(가운데)과 치세라를 통과하는 리빙스턴 탐험대(아래)

리빙스턴은 노예무역에 대한 식민관청의 묵인을 신랄히 비판했다. "다음날 50명이 넘는 노예가 석방되었다. ……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듯이, 노예대상의 우두머리는 테테 지역에서 노예무역을 수행할 수 있는 권리를 관할 총독에게 허가받았음을 강조했다."

메어리 리빙스턴(위)은 잠베지강 유역에 머물고 있던 남편을 만나기 위해 영국을 출발했다. 강인한 체력과 아프리카에 대한 충분한 사전지식을 숙지했던 메어리였지만, 병에 걸려 동료 의사의 정성스런 치료에도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1862년 4월 사망했다. 그녀는 바오밥나무 아래에 안장되었다.(아래)

리빙스턴의 소형증기선 마 로버트. 정원 36명. 12톤 급 소형증기선은 1858년 탐험을 위해 특별히 제작되었다. 연료소비량이 많고 부식에도 약했던 마 로버트는 속력도 많이 낼 수가 없어 '천식환자(Ashmatic)'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베인스 그림.

스탠리와 리빙스턴의 역사적 만남을 스탠리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양측으로 늘어선 호기심이 가득한 원주민 사이를 지나 아랍인들이 서 있는 곳까지 갔다. '흰 수염을 기른 노인'을 발견한 나는 당장에 그에게 달려가 포옹하고 싶었지만 모여든 군중에 위축되었고 또 그가 나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몰랐기 때문에 그저 형식적인 예절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정중히 그에게 다가간 나는 헬멧을 벗어 들고…….

"잔잔한 호수는 하늘의 푸르름을 반사하며 에머랄드빛을 쏘아댔다."

탕가니카호에서 스탠리

범람하는 강과 싸우고 있는 리빙스턴과 그의 짐끈들.

리빙스턴은 작은 마을에서 그의 일생을 마감했다. 마지막까지 리빙스턴을 간호하던 흑인들은 기도하는 자세로 죽음을 맞이한 그의 최후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

리빙스턴의 유해가 잔지바르에 도착한 것은 1874년 2월이었다. 그의 시신은 각종 서류를 비롯한 그의 유품과 함께 아서 랭에게 전달되었고, 아덴에서 말와호에 옮겨져 4월 16일에야 영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리빙스턴의 시신은 사우샘프턴에서 런던으로 이송되었다. 친구들과 윌리엄 퍼거슨 경이 왼쪽 어깨에 남아 있는 상처자국으로 본인임을 확인했다. 이 상처는 1843년 사자에게 물려 골절상을 입었을 때 남은 것이다.

리빙스턴의 충실한 하인 제이콥 웨인라잇이 잔지바르항에서 고인의 유물을 지키고 있다.


제4장

밀림 속으로


"리빙스턴은 루알라바강을 항해해 내려간다는 것이 어리석은 모험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그렇다. 내가 다시 모험을 한다면 최소한 200명의 소총수를 동반할 것이다. 사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을 백인이 읽을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을 전지전능한 신의 섭리에 맡긴 채 나는 모험을 계속할 것이며 이 글을 계속 써 나갈 것이다."

스탠리

《탐험일기》

캐머런(위)은 1875년에 포르투갈 노예무역상의 활동지역을 횡단했다. 그는 이 지역에서 최초로 인류학적이고 식물학적인 탐사활동을 벌였고 지형을 자세히 관찰해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우기중에 행한 탐험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지만 31개월 간의 여정을 통틀어 사망자는 두 명에 불과했다. 로보이강을 건너는 캐머런 탐험대(아래).

티푸 티브는 중부 아프리카의 가장 유력한 대상으로, 잔지바르 왕의 통제에서 벗어나 낭궤지방에 군림했다. 그는 부하들을 파견해 노예와 상아를 약탈했다.

스탠리의 젊었을 때 모습. 존 롤랜즈는 1841년 영국의 웨일스 지방에서 하녀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14세 되던 해에 미국행 선박에 소년선원으로 고용되어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어떤 상인의 양자로 입양되어 헨리 모턴 스탠리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1865년에 기자생활에 입문한 스탠리는 《뉴욕 헤럴드》에 아비시니아에 관한 기사를 기재했으며 리빙스턴을 구출하여 전설적인 명성을 얻었다.

스탠리는 탐험을 함께한 세 명의 유럽인이 살아 대서양에 다다르지 못했음을 비탄했다. 열대기후에 적응하지 못한 개의 죽음도 슬픈 일이었다. 그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프랭크 포콕, 프레데릭 바커, 잔지바르의 소년, 에드워드 포콕, 칼루루.

애초에는 통째로 운반할 계획이었던 레이디 앨리스호의 분해품. 앨리스호를 여러 조각으로 분해한 사람은 잔지바르의 목수였다. 스탠리는 약혼녀 이름을 배에 붙였던 것인데, 그가 탐험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앨리스는 이미 결혼한 후였다.

아서 젭슨은 1887년 스탠리의 마지막 탐험에 참여했다.

1900년대에 등장하는 광고,

브라자가 프랑스의 이름으로 추진했던  야심적인 식민사업에는 적지 않은 비용이 소요되었다. 비록 스탠리의 대규모 탐험에 비길 바는 아니었지만, 제1차 오고웨강 탐사에 1만 7,500프랑을 지원받은 그는 이후 무려 4만 프랑을 지출했다. 브라자의 초상.

사람들은 인간과 유사한 고릴라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폴 뒤 샤이는 그의 저서 《적도 아프리카 모험과 그 탐사》에서 고릴라의 으르렁거림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밀림 속에서 들리는 소리 중에 고릴라의 포효만큼 괴이하고 무시무시한 것은 없다. 성난 개처럼 시작된 울부짖음은 깊은 저음으로 변하는데, 그것은 멀리서 들려 오는 천둥소리와 같다.

메어리 킹슬리의 인생행로는 매우 독특했다. 1862년에 의사와 하녀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30세 되던 해 한 달 간격으로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집을 떠났다. 독학으로 라틴어, 물리, 화학과 독일어를 습득했던 킹슬리는 열정적인 여행가였던 부친에게서 탐험가 자질을 물려받았다. 여행기와 과학서적이 가득한 부친의 서재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킹슬리는 대영박물관에 새로운 어류의 표본을 기증했음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 신종 어류는 지금도 그녀의 이름을 따라 킹슬리아에(kingsleyae)로 불리고 있다. 그녀는 거추장스러운 알코올이 담긴 어항을 항상 들고 다니면서 그 속에 직접 잡거나 혹은 현지 어부에게서 구입한 물고기를 보관했다.


제5장

탐험가의 세계


얼떨결에 아프리카 탐험에 도전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아프리카가 아마추어 탐험가에게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탐험의 성공 여부는 선두에 서는 탐험가의 노련함에도 달려 있지만, 무엇보다도 짐꾼과 안내인의 능력에 좌우된다고 볼 수 있다. 출발 전의 세밀한 준비작업은 출발 후의 지구력만큼이나 중요하다.

"탐험을 준비하는 사람은 잔지바르에 체류하는 동안 분주히 움직여야 한다. 시간은 쏜살같이 빠르고, 한 순간도 낭비하는 일없이 탐험하고자 하는 지역에서 필요한 피륙, 유리제품, 철사 등을 사들여야 한다."라고 스탠리는 그의 탐험일기에 적고 있다.

콩고를 탐험중인 프랑스 탐험가, 루이 미종 대위.

탐험가는 상류 계층 출신은 아니었지만, 다독(多讀)과 자연과학에 대한 열정으로 지식인 계층에 편입될 수 있었다.

인부들이 장 밥티스트 마르샹의 보트를 분해해 운반하고 있다.

19세기 초 상아 수출량이 증가한 것은 유럽 상류층에서 수요량 증가에 따른 결과였다. 피아노 건반, 당구공, 거실의 장식용품으로 사용되던 상아의 교역은 앙골라의 쵸크웨족이나 남웨지족의 생활에 사회적, 경제적인 대변혁을 초래했다. 현지에서는 무용지물에 불과한 상아가 결국 이들 원주민을 세계경제에 편입시킨 셈이었다. 그리고 현실적인 면에서는 상아를 넘겨준 대가로 소총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프랑스의 마르샹 대위는 150명의 세네갈인 소총수를 거느렸다. 다재다능한 흑인 병사들은 짐꾼 역할은 물론 장교의 시중을 드는 하인으로도 손색이 없었다. 프랑스 우편엽서는 당시 식민정책의 홍보를 위해 자국의 위대함을 상징하는 사진을 담곤 했다.

스탠리와 그의 일꾼을 묘사한 19세기 목판화에는 1871년부터 그의 시중을 들었던 칼룰루가 보인다. "나는 그가 일을 배우는 데 남다른 자질이 있음을 발견하고 하인으로 고용했다. 더 이상 일을 잘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였다. 셀림도 식탁에서 그만큼 내가 필요한 것을 빨리 알아채지 못했다. 칼루루의 생동감과 민첩성은 상상을 초월했는데, 그의 작고 검은 두 눈은 끊임없이 사물을 관찰하고 관찰을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점을 찾아낼 뿐만 아니라 곧 필요하게 될 일까지도 생각해 냈다." 칼룰루는 1877년 스탠리가 그의 이름을 붙인 콩고강의 폭포에 휘말려 사망했다.

파쇼다 사건의 영웅, 장 밥티스트 마르샹 대위의 활약을 소재로 한 선전물. 마르샹은 19세기 말 프랑스의 국민적인 영웅으로 부상했다. 그는 다카르와 지부티에 이르는 대서양-홍해의 연결축을 확보하기 위한 임무를 띠고 콩고강에서 나일강에 이르는 지역을 탐사했다. 1896년, 마르샹 대위는 대규모 탐험대를 인솔하여 나일강 상류로 진격하던 중 프랑스에 대항하는 세력을 평정이라는 명분으로 무차별하게 진압하기도 했다. 1898년 7월, 마르샹 탐험대가 수단의 파쇼다(오늘날 코독)에 도착해 프랑스 국기를 게양하려고 할 때, 호레이쇼 키치너가 지휘하는 2만에 달하는 영국과 이집트 연합군이 그곳에 도착했다. 영국과 프랑스 간에 외교적 위기상황이 야기되었다. 결국 프랑스가 11월에 철수명령을 내렸다. 파쇼다 사건으로 프랑스는 외교적 굴욕을 당했는데, 국내 민족주의자들은 이 사건을 애국주의를 고취하는 선전물로 삼았다.

스펙과 그랜트의 충성스런 수행원들. 리빙스턴은 현지인에게 아프리카 횡단을 도와 준 데 대해 감사를 표했다. "세켈레투가 황소 12마리와 괭이, 유리구슬 등을 제공했고 나는 그것으로 작은 배를 하나 살 수 있었다. 그의 관대함이 없었다면 탐험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결국 동부 해안까지 갈 수 있도록 지원해 준 것은 콜롤로족과 몇몇 아프리카 부족들인 셈이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히 감사할 것이다."

리빙스턴의 '발견여행'을 수행한 추마와 수시. 여기서 발견여행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개념이다. 오래 전부터 아프리카인은 유럽인이 발견한 지역을 지배하는 왕자였다.

사실상 아프리카 흑인과 몇몇 아랍인이 대육 내부 지리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공표하지 않은 것은 외부인이 그곳에 눈독들이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무바릭 봄베이는 스펙과 버턴 탐험대에 참여했다.

체체파리는 인간과 동물에게 잠자는 병을 불러일으킨다. 체체파리의 분포는 지역에 따라 달랐는데, 리빙스턴은 체체파리가 극성을 부리는 지방을 통과할 때는 밤을 이용해 이동했다.

인부를 권총으로 겨누고 있는 스탠리는 인부를 함부로 다룬 것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행군 도중 공개재판을 열어 처벌을 결정하기도 했다. 재판을 통해 사형을 선고받은 다섯 명 중 두 명의 살인자와 한 명의 탈주자에 대한 집행은 실행되지 않았다.

콩고 원주민의 지도자. 마코코의 초상.



1739년에 제작된 이 프랑스 지도는 아프리카 서부 해안을 나타내고 있다.


무테사왕이 베푼 성대한 환영식에 입장하는 스탠리.

망설임 끝에 몇몇 탐험가는 아프리카 축제에 동참했다. 우쿨리마와 어울려 춤추고 있는 그랜트.

탕가니카호 주변의 한 원주민 부락에서 환영의 뜻을 담은 상아를 증정받는 리빙스턴.


베이커는 언제나 차분함을 보여 주었다. 소 등에 올라타 흑인 전사들의 전투력을 평가하는 모습.

노예무역을 반대하면서도 탐험가들은 종종 그들의 안전을 위해 노예상들과 행로를 같이해야 했다.

Esquisse des découvertes de R. F. Burton et de J.-H Speke dans l'Afrique orientale... / par V. A. Malte Brun - 1



아프리카의 강들에 산재하는 폭포와 급류는 증기선을 이용한 편안한 원정을 기대했던 탐험가들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윌리엄 해리슨의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 <월산>의 두 주인공.

아프리카 탐험가로 영원히 기억될 스펙과 그랜트.

《뉴욕 헤럴드》지의 사장. 제임스 고든 베넷.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