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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23. 14:01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090 아스텍 제국 - 그 영광과 몰락


세르주 그뤼진스키 지음, 윤학로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21


082

시156ㅅ 16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016



인간 신이 지배했던 아스텍 제국.

그들은 강력하고 찬란하고 잔인한 문명을 일구어냈다.

중앙 아메리카에 첫발을 내디딘 스페인

병사들은 그들의 문명을 보고 놀라 겁을 집어

먹을 정도였다. 검과 신화로 상징될 수 있는 두 문화의

충돌에서 승리는 유럽인들의 몫이었다. 왕궁을 차지한

정복자들은 닥치는 대로 아스텍 문명을 파괴했고 유럽 문명을

이식했으나, 아스텍 문명의 빛줄기는 여전히

찬연한 빛을 발하고 있다.


1519년 에르난 코르테스

(Hernan Cortes)에 의한 멕시코 정복은 역사와

전설의 가장 독특한 만남이었다.

1519년 2월 10일, 코르테스는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먼저 쿠바를 침공했다.


에르난 코르테스가 멕시코에 상륙한

1519년은, 아스테카의 역(曆)이 정한 52년을 주기로

반복되는 케트살코아틀(Quetzalcoatl)의

귀환 날짜와 일치했다.

아스텍인들은 케트살코아틀, 즉 깃털 달린 뱀이

다른 신들과 돌아온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먼 옛날 깃털 달린 뱀이 떠났던 동쪽으로부터 온,

철옷을 입고, 턱수염을 기르고, 피부가 하얀

이상한 사람들, 멕시코에서는 아무도 본 적이

없는 말(馬)을 소유한 사람들,

혹시 그들은 신이 아닐까?


아스텍의 황제 목테수마는 그렇게 믿었다.

스 비극적인 오인 때문에 역사의

한 장이 뒤바뀌게 되었다.

코르테스의 충실한 동료이자 역사가였던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Bernal Diaz del

Castillo)가 그 중요한 에피소드를 기록으로 남겼다.

"1519년 3월 12일, 우리는 함선을 이끌고 인디오들이 타바스코강이라 부르는 그리할바강에 도착했다……. 1만 2,000명이 넘는 전사들이 결집해 있었다……. 그들은 용감하게 돌진해 와서 카누로 우리를 포위하고 화살을 퍼부었다. 그것은 소나기 같았다. ……"

"코르테스가 치안책임자 후안 데 에스칼란테를…… 지체하지 않고 비야리카로 파견했다. 에스칼란테의 임무는 닻과 밧줄, 돛 따위 쓸 만한 물건을 거둬들이고 보트를 제외한 모든 군함을 침몰시키는 일이었다."

"위대하고 막강한 멕시코의 황제 목테수마는 우리가 그의 도시로 쳐들어올까 두려워한 나머지, 틀락스칼라의 아군 진지로 고위관리 다섯 명을 보내 환영의 뜻을 표했다. …… 그들은 금화 1,000피아스트르에 상당하는 …… 값진 선물을 가져왔다."

"추리가 틀락스칼라에 입성했을 때, 거리는 물론이려니와 지붕 위까지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수많은 인디오들이 우리를 구경하려고 몰려나왔다. 그들은 우리를 보며 즐거워했다……. 우리가 그 도시에 입성한 날은 1519년 9월 23일이었다."

"코르테스가 목테수마에게 다가갔고 둘은 서로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했다. …… 코르테스는 마르가리타스(margaritas)라는 정교하게 가공된 채색 유리구슬로 만든 목걸이를 선물로 가지고 왔다. …… 그는 목테수마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막 식사를 끝냈을 때, 목테수마가…… 호사스럽게 차려 입고서 여러 왕자를 대동한 채 우리를 방문했다. 왕자들은 모두 황제의 친척들이다……. 회의가 끝나자 목테수마는 코르테스에게 여러 가지 모양으로 세공한 금붙이를 선사했다."

"용맹하고 성미가 불 같은 후안 데 에스칼란테가 그의 병사들 가운데에서 가장 민첩하고 강건한 병사들을 차출했다……. 에스칼란테는 멕시코인의 요새로 떠났다. 에스칼란테군과 멕시코 전사는 새벽녘에 서로 맞닥뜨렸다."

"목테수마의 궁전으로 들어선 코르테스는 여느 때처럼 황제엑 인사를 올리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당신이 고함을 치거나 소동을 일으킨다면, 우리 병사들에게 처형될 것이오. 그들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명심하시오."


차례


제1장 툴라, 문명의 신기루

제2장 제국의 건축가

제3장 세계를 정복한 아스텍인

제4장 두 세계의 충돌

제5장 투쟁에서 협력으로

제6장 정복 이후

기록과 증언

그림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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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주 그뤼진스키 Serge Gruzinski

세르주 그뤼진스키는 1949년 11월 5일 투르코앵에서 태어났다. 문학박사이자 고문서학자이며, 카사 데 벨라스케스의 회원이기도 하다. 국립 역사 연구소의 외무부 파견 연구원(1978~1982)이기도 했던 그는 현재 국립 과학 연구소에서 연구 책임자로 재직하고 있으며, 멕시코, 중앙 아메리카, 안데스 연구 센터의 부소장직을 맡고 있다. 그뤼진스키는 이탈리아와 스페인, 미국, 그리고 7년 간 거주했던 멕시코 등지에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수많은 논문을 발표한 그는 아르쉬브 콩탕포렌 출판사에서 <멕시코의 인간신 : 16-17세기 인디오의 권력과 식민 사회>(1985)를 출간했고,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상상적인 것의 식민지화>를 출간했다.


옮긴이 : 윤학로

1959년 서울 출생.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를 졸업한 후 동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강원대학교 불어불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잇다. 번역서로는 <연극이란 무엇인가><철학의 역사><레비 스트로스의 미학 에세이> 등이 있다.


제1장

툴라, 문명의 신기루


스페인 정복 이후의 역사를 기술하려는 초기 멕시코 역사가들에게 하나의 이미지가 끊임없이 떠오른다. 다름 아닌 '대도시 툴라'의 이미지이다. 그들이 멕시코 역사를 기술할 때 툴라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왕국의 수도였던 툴라는 고대 멕시코 역사 전반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겨 놓았다.

16세기에 디에고 두란이 그린 그림. 이주가 시작될 무렵, 멕시카족의 초기 역사를 표현했다. 당시 멕시카족은 동굴에 거주하며 수렵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수천 년 전 중앙 멕시코에서는 옥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아메리카 최초의 농경문화가 탄생햇다.

<아스카티틀란 사본(寫本)>의 한 부분으로 멕시카족이 맨 처음 이주하던 때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멕시카족은 산악지대를 통과했는데, 그곳에는 선인장과 용설란, 등심초와 전나무, 종려나무가 자랐고, 야생동물이 우글거렸다.

사냥과 전쟁을 관장하는 북쪽의 신, 카막스틀리. 믹스코아틀이라 부르며 추앙했다.

꽃과 사랑, 춤과 시의 신. 소치필리의 상(像).

<텔레리아노 레멘시스 사본>에, 역사의 각 단계는 날짜 밑에 달력에 쓰이는 상형문자로 표시되어 잇다. 이주하는 멕시카 부족은 다양한 자치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쟁과 태양의 신 우이트실로포츠틀리는 멕시카족의 수호자이며(위, 왼쪽), '남쪽의 벌새'라는 뜻이다. '연기 거울'이라는 의미의 보이지 않는 신 테스카틀리포카는 밤, 북쪽과 관련이 있다(위, 오른쪽). '싹을 틔우는 자'라는 틀락록은 비의 신으로 농부들의 추앙을 받았다(아래, 오른쪽). '부관' 파이날(아래, 왼쪽)은 급류를 의미한다.

구전설화에 따르면, 멕시코 중부 고원지대에 살았던 일곱 부족은 민족적으로 동일한 기원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대지를 둘러싸고 있는 바다 저편에 위치한 마을이나 '일곱 개의 동굴'인 치코모스톡에서 이주해 왔다. 일곱 개의 동굴에서 왔다는 일곱 부족은 아콜우아(Acolhua), 찰카(Chalca), 치남파네카(Chinampaneca), 콜우아(Colhua), 테파넥(Tepanecs), 틀라우이카(Tlahuica), 틀라테포트스카(Tlatepotzca)이다.

이주(移住)를 기록한 한 자료에 따르면, 멕시카족은 '물고기'를 소유한 사람들의 땅' 미초아칸을 횡단하여 테노치티틀란에 정착했다고 한다. 미초아칸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그들은 우이트실로포츠틀리신을 알현하고는 비록 그곳이 그들에게 약속된 땅은 아니더라도 그 지역에 거주하게 해달라고 청했다.

멕시카족이 테노치티틀란 건국의 상징으로 생각했던 선인장에 앉아 뱀을 먹고 있는 독수리는 그들 건국신화의 원형(原型)이 아니다. 16세기 자료에는 뱀이 아니라 선인장 열매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제물로 바쳐진 희생물의 심장을 상징한다. 스페인 사람들은 이 신화가 제시하는 은유를 놓치지 않고, 심장을 독수리에 먹히는 뱀(뱀은 악이라는 관념과 밀접한 연상작용을 일으킨다)으로 대체시켰다. 그뒤 이 장면은 스페인 왕조인 합스부르크가(家)의 문장(紋章)에 등장한다.

여러 가지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여 멕시카족은 거대한 돌덩이를 잘라 내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잘라 낸 덩어리를 연마용구로 윤을 낸 뒤, 피라미드 신전과 왕궁을 건설하는 데 사용했다.

부유채원(浮遊菜園)이라 할, 말뚝으로 고정된 갈대 뗏목 치남파스는 호수 밑바닥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허리에 두르는 막스틀라틀(maxtlatl)과 면 망토 틸마틀리(tilmatli)를 걸치고 있는 원주민 국왕.

'아스텍 제국'은 전쟁과 외교를 병행하여 1세기도 지나지 않아 지배권을 장악했다. 이 당시에 멕시코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처럼, 하나나 그 이상 되는 자문단의 지원을 받고, 고관(高官)들이 군사와 행정을 담당하는 절대군주제의 통치구조를 가지고 있던 수많은 작은 독립국가들로 분열되어 있었다. 아스텍 제국은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번영을 이루었다. 삼각동맹의 지배권을 받쳐주던 원동력은 종속 도시국가들이 바치는 공물이었다. 공물목록에는 공물의 종류와 수량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공물목록을 보면 살아있는 새, 보석, 옥수수, 금, 피망, 옷, 면제품, 담요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금은세공은 밀랍세공술을 이용했다. 우선 세공술사가 나타내려는 형상을 석탄에 조각해 넣는다. 이것이 주형이 되는데, 여기에 밀랍을 녹여 붓는다. 밀랍이 식은 뒤 이를 떼어 내고는 그 위에 금이나 은을 녹인 액체를 바르면 원하는 제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몬테 알반 무덤에서 발굴된 보물. 시페토텍신의 마스크(위)와 갑옷의 가슴받이(아래)와 같은 보물은 스페인 사람들의 탐욕에 희생되지 않고 보존된 몇 안 되는 금속 유품들이다. 아스텍인은 검소한 옷을 즐겨 입었으나, 보석장신구나 머리모양은 호사스럽게 갖추었다. 이것은 지위와 부귀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제2장

제국의 건축가


1440년 목테수마 1세는 이트스코아틀의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했다. 일반적으로 위대한 아스텍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일컬어지는 매력적인 인물, 목테수마는 마흔이라는 이른 나이에 전설에 싸인 제국의 정권을 잡았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아스텍 제국의 시조로 각인되어 있는 목테수마의 통치는 끔찍한 재앙의 연속으로 시작되었다.

비의 신인 틀랄록.


고대 멕시코인의 역법(曆法)은 태양력의 365일과 점력(占曆, divinatory calendar)의 260일(그들의 1년 365일은 20일로 이루어지는 18개월에 5일이 더해진 그들은 달도 날도 수로 부르지 않고 각각 이름을 붙였는데, 1~13까지의 수를 週와 같이 연속시켜 각 날의 이름을 배열하여 썼으므로, 260일 주기로 같은 이름의 날이 같은 번호를 취했다)이 혼합된 형태이다. 태양력의 하루하루는 그에 상응하는 제식일의 이름으로 불렸다. 1년은 변함없이 네 개의 기호, 즉 갈대, 희생제식에 쓰이는 칼, 집, 토끼 중의 하나로 시작되었다. 두 역법을 상응시키기 위해, 네 개의 기호는 주기번호 13개와 조합되고 52년이라는 순환주기가 생겼다(날의 이름은 20개뿐이므로, 매년 5일째 이름이 밀려나 결국 52년 주기로 같은 달 같은 날의 이름에 같은 주기번호가 오게 되어 있었다).

52년 한 주기에서 다른  주기로 넘어갈 때에는 중요한 제식이 베풀어졌다. 태양이 질 때 사제들은 세로 데 라에스트렐라 언덕(별의 언덕) 꼭대기에 세운 사원으로 올라가서 묘성(昴星)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희생제물의 가슴을 가르고 거기에 불을 새로 피우면 파발꾼이 횃불에 불을 붙여 제단을 밝힌다.

고대 멕시코인의 생활에서 해마다 200일에서 300일에 달하는 축제일은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그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개개인을 사회에 통합시키려 했으며, 제식의 반복을 통해 시간을 계산하고 측정하는 다양한 방식을 표현하여 했다. 소코틀(xocotl, 위)이라는 의식은 한 해의 열번째 달에 거행되었다. 허리에 두르는 옷과 종이 망토를 걸치고 손을 잡고 있는 사람들은 포로이다. 그들은 밤새도록 춤을 춰야 했는데 아침이 되면 파이날신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막대기에 꽂힌 채 화형을 당했다. 틀라츠틀리(tlachtli)라는 공놀이(아래)는 T자 두 개를 합쳐 놓은 모양을 한 경기장에서 벌어졌다. 경기는 두 진영으로 나뉜 선수들이 무릎과 엉덩이로 공을 상대편 진영으로 넘겨 보내는 방식이었다. 이때 공은 양쪽 벽에 걸어 놓은 두 개의 석조 링을 통과해야 했다. 아스텍의 다른 놀이와 마찬가지로 이 놀이도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경기장은 세계를 가리키고 공은 태양이나 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스텍족의 수명이라 할 수 있고 그들이 가장 선망하는 운명은 전투에서 죽거나 희생제식의 제단 위에서 죽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힘찬 행진 속에서 태양과 하나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젊은 전사들은 '독수리기사(eagle-knights)'가 될 수 있었다. 이것은 한 세기 동안 벌어진 대규모 전쟁 즉 '꽃의 전쟁'을 정당화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전쟁을 할 때 아스텍인은 특별한 전투복을 갖추어 입었다. '표범기사(jaguar-knights)'의 복장은 몸에 꼭 끼는 것이었다. 이츠카우이피이(ichcahuipilli)라는 갑옷과 투구는 화살을 막기 위해 속을 채워 넣어 보강했다.

왕족과 고관은 화려하기 그지없는 케트살(quetzal, 남아메리카에 서식하는 꼬리가 긴 새의 일종)의 초록 깃털이나 앵무새의 붉고 노란 깃털을 널리 애용했다.

깃털세공인의 직업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갈대로 짠 골격에 아주 흔한 깃털을 그물 모양으로 덧대어 단단한 틀을 만든다. 깃털을 고정시키는 방식은 항상 같다. 우선 깃털의 줄기에 가느다란 대나무관을 단단하게 덧댄다. 그러고 나서 용설란 실로 깃털을 한 묶음씩 시친다. 다음에는 좀더 질긴 실로 깃털묶음을 틀에 부착시킨다. 이렇게 틀이 민들어지고 나면, 진귀한 새(케트살, 마코앵무새 등)의 깃털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한다. 다시 말하면 줄기에 대나무관을 덧대고, 깃털을 시침질한 다음, 골격에 붙들어매는 것이다. 케트살의 푸른빛 도는 황금색 깃털의 흰 솜털은 장밋빛 깃털의 가장자리로 보이지 않게 한 다음 이것을 맨 위에 덧댄다. 완성품을 보석으로 장식하는 경우도 있었다.

제물로 바치는 포로는 더 이상 적이 아니라 신에게 보내는 사자였다. 그래서 제물의 복장은 마치 신의 복장처럼 화려했다. 병사가 포로를 생포할 때면 이렇게 말했다. "내 사랑하는 아들아!" 그러면 포로는 "존경하는 아버지!"라고 응답했다.

황제는 틀라카테쿠틀리(Tlacatecuhtli), 즉 '병사들의 주인'이라는 칭호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테노치티틀란의 군대뿐만 아니라, 동맹을 맺은 도시국가의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군사통수권은 황제의 중요 권리였다. 황제 주변의 고관대작 중에서 가장 비중 있는 사람들이, 적어도 초기에는, 군사적 책무를 맡았다.

테노치티틀란의 남성은 곧 전사를 의미했다. 그들은 많은 포로를 잡아야 승진할 수 있었고, 깃털모자를 쓰고 가죽팔찌를 차고 다닐 수 있었다. 그뒤 그들은 콰칙틀리(quachictli)나 콰우치치메카틀(quauchichimecatl)이 될 수 있었다.

전사가 승진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에는 표범기사와 독수리기사가 있었다. 표범기사는 표범가죽으로 만든 전투복을 입었고, 독수리기사는 독수리 머리 모양의 투구를 썼다.

텍스코코의 왕 네사우알코요틀은 시인이요 철학자이자 재능이 뛰어난 건축가이며, 고대 멕시코 문화를 대표하는 가장 전형적이고 세련된 대변자이다.

공물 목록. 오른쪽 아래에 말린 피멘토(멕시코 고추) 400개가 들어 있는 자루 두 개와 케트살 깃털 모자가 보인다.


제3장

세계를 정복한 아스텍인


목테수마가 세상을 떠난 3년 뒤인 1472년에는 텍스코코의 위대한 동맹자 네사우알코요틀이 죽었다. 이로써 삼각동맹은 위대한 창건자와 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 고리를 잃었다. 그후 삼각동맹은 보잘것없는 후계자들의 손에 넘어갔고 테노치티틀란은 위기와 역경을 겪게 되었다.

테노치티틀란 대신전의 한 제단. 테오칼리(teocalli, 나우아틀어로 '신의 집'이라는 의미)의 114층 계단이 제물로 바쳐진 사람의 피로 물들고 있다(위). 멕시코에 갓 당도한 스페인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래는 17세기 화폭에 담긴 멕시코의 어느 도시.

고대 멕시코에서 행해진 인간 희생제식(위)은 인간에게 소중한 소유물인 피를 신에게 바치는 의식이었다. 스페인인이 가장 놀랐던 식인제식(食人祭式, 아래)은 사실 영적인 것에 접근하는 방식이었으며, 또 하나의 성찬식이었다.

"족장을 살해하는 일은 금지되어 있었다. …… 가늘고 긴 줄로 발목이 묶인 '고귀한 포로'가 그 위에 올라갔다. 이윽고 그에게 검과 방패가 주어졌고, 그를 포로로 잡은 병사가 올라와 그와 싸움을 벌였다"

익명의 스페인 정복자

《신(新) 스페인에서 겪은 몇 가지 사건에 관한 견문담》

"포로는 잘게 저며졌다. 넓적다리는 목테수마의 식탁으로 보내졌고, 나머지는 귀족이나 그들의 친척 몫이었다. 고기는 일반적으로 죽은 자를 생포했던 사람의 집으로 보내졌다. 그들은 옥수수를 넣어 살을 익힌 다음, 작은 대접에 고깃덩어리를 나누었고, 국물과 옥수수도 함께 먹었다. 그 요리의 이름은 틀라카틀롤리(tlacatlolli)였다."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

《신스페인 풍물의 일반사》

사제들은 제단 위에 희생자를 쓰러뜨렸다. 그런 뒤 사제 하나가 흑요석 칼로 희생자의 가슴을 절개하고 심장을 꺼내 그것을 돌항아리에 넣고 삶았다. 신의 옷을 입고 신의 장신구로 치장한 희생자는 익시프틀라(ixiptla), 다시 말해 '신의 이미지(the gods image)'라 불렸다. 위의 그림은 <아스텍 사본>의 일부이고, 아래는 19세기의 복제화이다.

"도시의 형태는 정방형이었는데, 사통팔달 곧게 뚫려 있는 포장이 잘된 넓은 도로 때문에 장기판을 연상케 해준다. 그래서 중앙에서 볼 때와 마찬가지로 도시 어느 곳에서건 도시의 전체상을 조감할 수 있다."

지오바니 프란세스코 게메이 카레리

《세계여행》

아우이트소틀의 재위기간(1486~1502)을 보여 주는 달력.

스페인 정복시대의 멕시코 도시는 테노치티틀란과 틀라텔롤코를 포함한다. 정복 얼마 전에 탄생한 이 '위대한 멕시코'는 북쪽으로는 틀라텔롤코, 남쪽으로는 늪지대가 호수와 혼재해 있는 지점에 위치한 테페약에 걸쳐 번성하고 있었다. 남쪽 변경지대에는 톨탱코(등심초의 가장자리), 아카틀란(갈대의 장소), 시우이통코(목장), 아티사판(흰 물), 테페티틀란(언덕 기슭), 아마날코(물의 조각) 같은 장소가 있었고, 서쪽 영역은 아틀람파(물가)와 치치메카판(치치멕족의 강)에 위치한 부카렐리 거리까지 이르렀다. 동쪽 영역은 텍스코코 호수가 시작되는 아틀릭스코(물의 표면)에 이르렀다. 도시는 한 변이 3km인 정방형으로 총 면적은 1,000헥타르였다.

"우리는 앞서 여러 번 텍스코코의 왕 네사우알피이가 마술사나 마법사의 명성을 누렸다는 사실을 언급한 바 있다. 인디오들에게서 들은 가장 설득력 있는 의견은 그가 악마와 계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디에고 두란

《신스페인 인디오의 역사》

점력(占曆)의 날들은 20개의 기호로 표시되었다. 수생동물, 바람, 집, 도마뱀, 뱀, 죽음, 노루, 토끼, 물, 개, 원숭이, 풀, 갈대, 표범, 독수리, 콘도르, 지진, 규석, 비, 꽃이 그것이다. 기호들은 언제나 동일한 순서로 이어졌고, 하나하나의 기호에는 1에서 13까지 주기번호가 매겨졌다.

소코요트신(Xocoyotzin, 젊은이)이라고 알려진 목테수마 2세는 1502년 재위에 오르자마자 치난틀라와 믹스텍 지역에서 전투를 벌여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려 했다.

1945년에 제작된 디에고 리베라의 프레스코화. <위대한 테노치티틀란, 옥수수 장수>

흰 옥수수와 검은 콩

"시장에는 인디오들의 일용할 양식이 모두 나와 있었다. 상인들은 흰색, 짙은 하늘색, 검은색, 붉은색, 노란색 등을 띠고 있는 말린 옥수수 낟알, 얼룩덜룩한 강남콩, 큰 콩, 갈색, 회색, 붉은색, 노란색을 띠는 명아주 씨, 흰색이나 검은색, 또는 주름진 치아(chia, 샐비어)와 소금, 칠면조, 조개, 집토끼, 산토끼, 사슴, 오리, 물새, 갈매기, 야생거위 등을 팔고 있었다. 용설란 시럽과 벌꿀을 파는 상인도 있었다."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

《신스페인 풍물의 일반사》


1942년에 제작된 디에고 리베라의 프레스코화. <테노치티틀란의 시장, 깃털 모자이크 제조와 금 세공>.

금, 은, 그리고 깃털

"군주는 시장과 시장에서 판매되는 모든 상품을 감독했다. 그의 관리이전 도시 거주자이건, 가난한 자이건, 불행한 자이건 다시 말해 그의 모든 백성이 속거나 경멸당하거나 손해를 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온갖 상품들을 일정한 장소를 지정해 주고 그곳에서만 사고 팔게 한 것도 시장을 감독하는 한 방법이었다. 상품들은 이곳저곳 함부로 뒤섞여 있으면 안 되었다. 군주는 또한 시장감독관을 임명하기도 했다. 시장감독관은 시장에서 벌어지는 일에 일일이 관여하며 그곳에 널려 있는 모든 상품을 관리했다. 결국 시장감독관은 부당행위가 이루어지지는 않는가, 상품가격은 적절한가 하는 점까지 신경을 썼다."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

《신스페인 풍물의 일반사》

1950년에 제작된 디에고 리베라의 프레스코화. <황제에게 과일, 담배, 카카오, 바닐라를 바치다>.

토토낙족이 벌이는 행사

"토토낙족은 북쪽 지방에 살고 있었는데, 자신들은 우악스텍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길쭉한 얼굴과 납작한 두상을 지녔다. 매우 무더운 그들의 거주지에는 온갖 먹을 것과 과일이 풍성했으나 카카오는 없었다. 호박(琥珀)이나 그들이 소치오코트소틀(Xochiocotzotl)이라고 하는 향기로운 나무의 진은 풍부했다. 형형색색으로 칠한 야자잎 깔개와 방석을 만들기도 했다. 그 지역에는 면화도 자랐으며 어떤 사람은 나무에서 자라는 면화를 발견했다. 그들은 보석 장신구나 목걸이를 즐겨 했으며, 깃털이나 다른 귀금속으로 장식한 옷을 잘 입었으며, 여자들은 우아하게 채색한 치마를 입었다. 그들이 면도하는 방식은 참으로 기이했다."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

《신스페인 풍물의 일반사》

"그 도시는 너무나 웅장하고 아름다워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도시는 그라나다보다 웅장했고, 그라나다보다 강건한 방어시설을 갖추었으며, 건물과 주민의 수도 그라나다보다 많았다.

에르난 코르테스

<멕시코에서 보낸 편지>


제4장

두 세계의 충돌


16세기 초엽에 목테수마 2세는 자신이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절대적인 지위는 오래가지 못했고, 황제는 운명의 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운명은 턱수염이 텁수룩한 하얀 사람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거의 무표정하고 납빛에 가까운 코르테스의 얼굴은 좀더 길었더라면 더욱 기품이 있어 보였을 것이다. 그의 눈빛은 부드러우면서도 근엄했다. 얼굴에는 짙은 색 수염이 듬성듬성 나 있었고, 수염과 같은 색깔을 띤 머리 모양은 유행을 따르고 있었다. 그는 넓은 가슴과 떡 벌어진 어깨, 배가 나오지 않아 늘씬한 몸매, 미끈한 다리를 지닌 멋쟁이였다."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

《신스페인 정복사》

"스페인 병사들이 들이닥치기 10년 전 불행의 첫 전조가 하늘에 나타났다. 그것은 혀를 날름대는 불꽃이나 불길, 아니면 먼동이 트는 것과 비슷했다. 그것은 하늘을 뚫고 내려오는 빗방울 같았다."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

《신스페인 풍물의 일반사》

시팍토날신(왼쪽)과 시팍토날의 부인 옥소모코가 동굴 안에서 점력, '토날라마틀(tonalamatl)'을 작성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그림은 아스텍에서 발굴된 사본 가운데 내용에서나 그림과 그 보존상태에서 가장 완벽한 것인 <보르보니쿠스 사본>에서 발췌했다.

네사우알피이는 꿈속에서 목테수마를 불러 미래의 전조를 보여 주며 이렇게 말했다. "그대 재위기간에 닥쳐올 기이하고 경이로운 사건을 알려 주겠소."

디에고 두란

《신스페인 원주민의 역사》

점력에 사용되는 기호들. 토날포우케(tonalpouhque)라고 불렸던 전문직 사제는 탄생, 결혼, 상인이 먼 나라로 떠나는 일, 족장의 선출 따위 특수한 상황에서 기호와 숫자의 의미를 해독해 주곤 했다.

스페인인과 아스텍인의 전투(위). 아래에 보이는 초록색 깃털모자는 코르테스가 목테수마에게 받은 기나긴 보물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코르테스는 1519년 7월에 이것을 카를로스 5세에게 보냈고, 그뒤 카를로스 5세는 조카에게 선물했다.

"도냐 마리나는 뛰어난 여인이었으며, 어린 시절부터 도시의 추장이었고, 봉신(封臣)이었다.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파이날라라는 도시의 영주였는데 파이날라는 여러 도시의 맹주였다."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

《신스페인 정복사》

위 그림에서 선물을 받는 코르테스 옆에 마리나가 서 있다.

"논의가 계속되었다. 우리는 친구로서 그에게 충고했다. 말썽이 일어날 수 있는 소지를 남기지 않기 위해 항구에 정박한 선박을 몽땅 파괴해 버리자고 말이다. 내륙으로 진군해 들어가는 동안 반란이 발생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

《신스페인 정복사》

에르난 코르테스는 항구에 정박해 있는 함대의 선박을 남김없이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목테수마 궁전의 코르테스. 1689년 작.

"목테수마 황제는 200명의 영주들을 거느리고 나를 마중하러 나왔다. 그들은 모두 맨발이었고 특이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평인에 비해 아주 호사스러워 보였다."

에르난 코르테스

《멕시코 정복》

"옷을 들어올리고, 그는 내게 자신의 몸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손으로 팔과 몸통을 만지면서 '보시다시피 나도 당신과 똑같이 살과 뼈를 가진 인간이오.' 하고 말했다. 그는 작별을 고했고, 잠시 후 닭과 빵, 과일, 숙소에 필요한 용품들을 보내 왔다. 나는 후한 대접을 받으며 6일을 지냈다."

에르난 코르테스

《멕시코 정복》

스페인 군대의 포로가 된 목테수마가 죽은 후, 동생 쿠이틀라우악과 조카 쿠아우테목이 아스텍의 지도자가 되었다. 아스텍군에게 포위당한 코르테스는 도시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슬픈 밤(noche triste)'이라고 부르는 비오는 야밤을 틈타, 스페인 군대는 테노치티틀란을 강둑과 연결하는 도로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던 아스텍 병사들은 그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스페인 병사들의 반 이상과 그들을 돕던 원주민 거의 전부가 학살되거나 포로로 잡혔다.

코르테스는 '슬픈 밤'의 패배를 앙갚음할 작전을 준비했다. 포병과 기병의 진용을 새롭게 정비하고, 특히 스페인군의 군사적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돛단배 13척을 건조했다. 스페인군은 그동안 수상작전에서 열세를 보였던 것이다.

1520년 7월 '슬픈 밤' 이후 코르테스의 병사들은 테노치티틀란에서 정신없이 도주했다. 그때 아스텍군은 오툼바에서 코르테스와 스페인 병사의 퇴각을 봉쇄하려 했다. 치열한 접전에서 심각한 전력 손실을 맛보았지만, 스페인 병사들은 결국 승ㄹ리자가 되었고, 틀락스칼라를 재탈환하여 그곳에서 군사력을 보강할 수 있었다. 그들은 부상병을 치료하면서 테노치티틀란을 총공격할 준비를 했다.


제5장

투쟁에서 협력으로


'어제의 군주들'이 모두 패배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멕시카와 텍스코코 귀족 중 일부는 침략자들은 언젠가 떠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반(反)스페인당'이라 할 이들은 구(舊)체제의 복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코르테스는 그들의 마지막 환상을 산산이 부수고 말았다.

16세기에 제작된 아스텍의 도시, 테노치티틀란의 도시계획도(위). 난폭한 개를 동원한 고문(아래).

산 후안 데 울우아의 추장이 자신의 신앙을 포기할 수 없다고 고집하자, 코르테스는 추장을 체포하고 신전으로 난입해 이교도 사제들과 원주민들이 아연실색해 있는 가운데 우상을 파괴해 버렸다. 다음날 바르톨로메오 데 올메도 신부는 성체배례를 집전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일용하는 곡식과 채소를 반죽해 우상을 만들었다. 곡식과 채소를 가루로 빻아 섞은 다음, 사제가 사람의 가슴속에서 꺼낸 아직도 뛰고 있는 심장의 피를 넣고 함께 빚는다. 이렇게 우상을 만들고 나면 그들은 더 많은 심장을 우상에게 봉헌한다."

에르난 코르테스

《멕시코 정복》

아스텍인의 전통 종교의식(위). 멕시코 대주교, 돈 페드로 모야 데 콘트레라스(아래)는 신스페인의 첫번째 종교재판관이었다.

원주민의 기독교 개종사업은 극도로 잔인한 능률성을 갖추고 있었다. 스페인 병사들이 아스텍의 우상을 파괴하는 장면(위). 틀락스칼라 영주들의 세례식(아래).

1539년 종교재판소는 텍스코코의 추장 돈 카를로스 오메토츠트신을 화형에 처한다고 선고해 충격을 몰고 왔다. 후일 그곳에 교회가 세워졌다.

코르테스는 바르톨레메 데 올메도 신부에게 인디오에게 세례를 주는 책임을 맡겼다. 탁월한 신학자이자 지식인인 그는 인디오의 기질을 이해했고, 종종 스페인 정복자들의 넘치는 혈기와 난폭성을 조절하는 역할을 했다.

스페인인은 원주민들이 선물로 바친 여인 20명을 데리고 타바스코를 떠났다(위). 그들 중 한 여인은 마리나라는 세례명을 받았고, 코르테스의 통역자이자 정부(情婦)가 되었다(아래).


"틀락스칼라의 늙은 추장 시코텡가가 코르테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당신을 열렬히 사랑한다는 사실, 당신에게 기쁨을 주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을 알려 드리기 위해 당신에게 우리의 딸을 주어 당신의 아내로 삼고 후손을 보도록 하고 싶습니다."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

《신스페인 정복사》

펠리페 2세 치하(1556~1598)의 스페인 군대 문장.

후안 게르손이라는 원주민 화가는 <테카마찰코의 묵시록>이라는 프레스코화를 제작했다. 그는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토착적인 요소와 유럽적인 요소를 혼합해 그림을 구성했다. 원주민 화가들은 스페인인의 요구에 부합함으로써 식민지의 실상을 표현할 수 있었고, 그들의 예술세계에 충실할 수 있었다. 물론 토착적인 요소가 서구의 도상학적(圖像學的) 도구에 체계적으로 순응되면서 토착적인 요소의 본래 의미와 기법이 변형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 두 요소의 대결구도에서 진정한 예술적 표현기법이 탄생했던 것이다.

1554년 한 스페인 선교사의 지휘 아래 상형문자와 스페인어를 함께 사용한 사본이 만들어졌다. 선교사들은, 특히 초창기에, 그림을 원주민과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편리한 도구로 보았다.

1550년과 1564년 사이에 돈 루이스 데 벨라스코 총독의 요구에 따라 2.5m×7m짜리 <리엔소 데 틀락스칼라 사본>이 제작되었다. 사본에는 틀락스칼라인의 눈에 비친 정복과정이 87장의 그림들로 복원되어 있다. 카를로스 5세의 문장 아래로 틀락스칼라의 통치자들, 총독, 행정관들이 보인다.

당시 아스텍의 의사. 티시틀(ticitl)이 알고 있던 의학적 지식으로는 스페인인이 옮겨 온 전염병 앞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질병은 신들의 의지나 마술사의 마법 따위 초자연적인 원인 탓으로 돌렸고, 티시틀은 점괘나 마법을 푸는 마법, 또는 일종의 안수(按手) 의식에 의존했다. 그러나 그는 골절치료, 고약 처방, 지혈, 약용식물에서 약제를 추출하는 일 따위에는 능했다.


제6장

정복 이후


17세기부터 식민지 멕시코를 뒤흔든 혼란 속에 토착 원주민 사회가 분열되고 파괴되었다. 소수 귀족들이 스페인 정복 이전으로 소급되는 자신들의 전통성을 자랑스레 고집했지만, 그것은 스페인적 생활방식에 충성스런 복제물에 지나지 않았다.

16세기 말 멕시코에는 백인과 유색인종의 혼혈인이 이미 2만 5,000명 선을 넘었다. 반세기 후 그 수는 40만 명으로 증가했다. 혼혈인은 스페인의 이주민이 대부분 남자였던 만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18세기 말에는 혼혈인이 150만 명에 육박했다. 인디오 아내와 함께 일하고 있는 로보(lobo, 뮬라토와 인디오의 혼혈).

정복 초기, 스페인 국왕은 정복자들이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내버려두고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정복자들이 주도권을 가지는 것을 경계했던 국왕은 그들이 오랫동안 요구하던 권한을 허락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1529년 11월부터 국왕은 신하들 중에서 매사 신중하고 근면한 대영주를 선택하여 왕을 대신하여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멕시코를 통치하게 했다. 약 3세기 동안 62명의 총독들이 멕시코를 통치하게 되는데, 첫번째로 안토니오 데 멘도사가 1535년에 멕시코에 부임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이로써 정복자의 시대가 끝나고 행정가의 시대가 시작된 셈이었다. 안토니오 데 멘도사(1535~1549), 루이스 데 벨라스코(1550~1564), 마르틴 엔리케스(1568~1580) 등 뛰어난 세 총독이 통치했던 16세기는 멕시코가 평화를 구가한 시기였다. 그동안 정복이 계속되었고, 멕시코의 경제상황은 정복자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총독의 관저(아래)는 위용을 뽐냈고, 토착 영주(위)들은 관저의 웅장함에 매료되곤 했다.

신스페인의 수도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13만 7,000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신스페인의 수도 멕시코 시티는 신대륙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도시였다. 신수도에는 성당, 카사 데 로스 아술레호스(Casa de los Azulejos)와 같은 저택, 담배제조업 따위 새로운 산업이 열기를 내뿜을 공장건물, 광산 학교나 산 카를로스 순수예술 아카데미(아카데미는 마드리드 정부에서 보낸 주형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었다) 등 새로운 제도를 시행할 공공건물이 늘어서 있었다. 도시화는 안토니오 마리아 데 부카렐리 이 우르수아 총독의 지시에 따라 시작되었고, 그의 후계자들은 도시를 더 깨끗하고 아름답게 꾸미는 데 주력했다. 총독들은 도로를 포장하고, 보도를 정비하고, 쓰레기와 오수를 처리하도록 조처했으며, 목테수마가 통치하던 시대와 마찬가지로 관청에서 거리에 조명을 밝히는 일을 담당했다. 이제 멕시코 시티는 이전 시대보다 훨씬 더 건강하고 안전하고 화려한 도시가 되었다.

피라미드에서 대성당까지

멕시코 시티의 소칼로(옛 마요르 광장)에는 멕시코에서 가장 웅장한 대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회색 석재로 쌓아올린 바로크 양식의 대성당 정면 양쪽에는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두 개의 첨탑을 세웠다. 카빌도(cabildo, 시위원회)가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신대륙의 풍성함을 대변해 줄 새 성당을 건축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한 이후로, 1573년에 공사에 착스하여 1813년에야 완성되었다. 대성당은 정복 이튿날에 우이트실로포츠틀리신의 피라미드 신전에서 채취한 석재를 사용하여, 현재 성당 북서쪽의 좁은 장소에 지었던 아주 보잘것없던 성당을 대체한 것이다. 바로크풍의 정면에는 현관이 세 개 있는데, 현관 측면에는 원주가 세워져 있고, 상부에는 벽감(壁龕)을 만들고 조각품으로 장식해 놓았다. 이렇듯 대성당에서 다양한 건축양식을 볼 수 있는 것은 대성당 건축이 여러 세기에 걸쳐 이루어졌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인디오들은 변함없이 늘 먹던 전통음식을 먹으며 전통가옥에서 살았다. 그러나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벽에 성모 마리아의 초상이 걸려 있고 열린 문 밖으로 성당이 보인다.

스페인 정복자의 눈에 인디오는 무엇보다도 노동력의 제공자였다. 사실 그들은 멍에에 매인 짐승과 같았다. 16세기 말 멕시코의 경제와 사회가 서서히 발전하자, 스페인은 원주민의 노동력 착취제도를 재정비했다. 그리하여 스페인인은 거대한 영지 아시엔다스(haciendas)를 계속 세웠다. 아시엔다스의 소유주는 인디오 가족들을 끌어모아 임금을 선불해 주거나 국왕에게 바치는 공물을 선납해 주곤 했다. 인디오들은 이제 평생 빚에 시달리게 되었다.

수십 또는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먼 곳에 사는 인디오들이 걷거나 당나귀를 타고 쿠아우티틀란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소원을 빌고, 기도를 올리며, 예물을 바치고 헌화하면서 도움을 청했다. 과달루페의 성모는 멕시코 전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상이었다. 바로크풍으로 제작된 조상(彫像)을 앞세우고 마을을 행진하는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조상은 나무로 조각하고 그 위에 채색을 하여 완성하였는데, 피투성이 상처를 그대로 표현하는 등 대단히 사실적으로 제작되었다.

17세기, 더욱이 18세기 초에도, 용설란주의 준비에는 여전히 종교의식과 공양물을 불사르는 불의 봉헌이 수반되었다. 그리고 신심회(信心會)의 축제, 장례식, 천주교 의식을 마감하는 흥겨운 주연(酒宴)은 정복 이전의 집단적인 축제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8세기 말과 19세기로 접어들면서 풀케리아에도 정복자의 영향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태양력의 1년은 18개월, 1개월은 20일, 거기다 덧붙이 5일을 더해서 365일이다.

<보르보니쿠스 사본>에 등장하는 시페토텍신과 아스텍인의 어느 한 달.

테노치티틀란에 정착하기까지 고대 멕시카인이 수행했던 대장정.

어린아이들과 성인의 교육과정. <멘도사 사본>.

우이트실로포츠틀리의 메신저, 틀락록.

케트살코아틀에게 바치는 봉헌물을 그린 환상적인 판화. 동물의 피(새끼돼지와 새끼새)와 인간의 피(귀와 혀의 봉헌).

비취로 모자이크 세공한 머리가 둘 달린 뱀.

공물목록, 표범가죽.

<사아군 사본>에 실린 나비.

도시로 등짐을 지고 가는 아스텍 상인(위)과 틀라텔롤코 시장에 좌판을 벌여 놓은 상인(아래).

스페인 정복 이전 시대의 틀라텔롤코 시장 풍경.

타라스카족이 사용하던 식기.


인간 희생제식, 디에고 두란.

정상에 제식을 위한 돌(위)이 있던 태양신전(아래).

텍스코코의 왕인 네사우알피이가 목테수마에게 스페인인이 도착할 것이라고 알려 주고 있다.

천개(天蓋)가 쳐진 가마에 걸터앉은 목테수마가 코르테스와 병사들을 환영하고 있다.

타바스코에 입성한 승리자, 코르테스(1519년 3월 18일).

용설란주 축제. 멕시코인은 용설란주를 마시고 항상 취해 있었다.

스페인 정복 이후에 시례식, 장례식, 종교의식 등 수많은 카톨릭 의식들이 인디오의 전통적인 종교의식을 흡수했다.

의사와 환자(위). 과달루페 성모상(아래).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