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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4. 09:14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103 바흐 - 천상의 선율

 

폴 뒤 부셰 지음, 권재우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24

 

082

시156ㅅ 19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019

 

Magnificat Jean-Sebastien Bach, le cantor

 

 

독실한 신앙심으로

신의 영광을 찬미했던 바흐.

그가 남긴 완벽한 걸작에는 인간과 하느님의 길을

오가는 선율이 흐르며, 그 내면에는 놀라운

천재성과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고매한 인격이 있다.

동시대인들은 그에게서 뛰어난 오르간 주자의

모습만을 보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의 음악을 들으며 위대한 음악가의

영혼을 느낀다.

 

"쳄발로로 연주하는

48곡의 유명한 푸가는 아름다운 시보다도 우리

마음속 깊이 파고든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분명 태초의 순수한 계율을 내면에

간직하고 있다. 나는 바흐를 가장 잘 표현한 괴테의

말을 잊을 수 없다. '천지창조 이전에 하느님이

자신과 나눈 대화.' 지상 천국이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은,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숙명이 유보된 채

우리의 순수함이 신의 은총인 어린이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순간을 의미한다."

알랭, <음악잡지> 1932년

 

차례

 

제1장 마르틴 루터 안에서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제2장 수련기

제3장 위대한 오르간 연주자

제4장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제5장 칸토르 바흐

제6장 음악의 헌정

기록과 증언

레코드 목록

참고문헌

악보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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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뒤 부셰 Paule du Bouchet

1951년에 태어난 부셰는 철학과 음악을 전공하였다. 그녀는 철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재즈 피아니스트로 활동했으며, 어린이를 위한 음악 교육에 열성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현재 갈리마르사의 발견 총서 중 음악 분야를 책임지고 있으며 청소년과 대중의 음악 이해를 위한 다수의 저서로 발표하였다.

 

옮긴이 : 권재우

1962년 서울 출생. 한국 외국어대학교 불어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현재 DRT International에서 통역 및 번역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2번 <극지방을 향한 대도전>과 <완전 범죄> <목노리의 씨앗> 등이 있다.

 

제1장

마르틴 루터 안에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1685년 3월 23일, 아이제나흐에 위치한 성 게오르크 교회에서 '시 음악가'인 요한 암브로지우스 바흐는 그의 넷째 아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아이는 가문의 전통에 따라 요한이란 이름과, 대부의 이름 제바스티안을 받았다. 바로 이곳 성 게오르크 교회의 설교단에서 150여 년 전에 루터는 교황에게 맹렬하게 도전하며 종교개혁의 포문을 열었다. 역사적인 우연의 일치인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일생 동안 종교개혁의 상징적 가치를 대변한다.

1685년 독일의 정치 양상과 제반 제도는 37년 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형성되었던 것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즉, 영토는 서로 다른 체제를 가진 다수의 공국으로 분할되었고, 제후들은 자국에서 절대권력을 휘두르면서 공국 간은 물론 주변 강대국과 동맹조약을 체결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루터교를 신봉한 소도시 아이제나흐는 작센-아이제나흐 독립공국의 중심지였다.

아이제나흐에서의 음악활동은 교회음악을 맡았던 요한 크리스토프(위)와 시립악단을 맡았던 요한 암브로지우스(아래)가 주도했다.

한스 바흐(바흐 가문의 조상이었던 파이트의 형제임이 분명함)는 뉘르팅겐 궁정예술가가 되기 전인 1580년경 목수일을 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초상화 둘레에 쓰인 라틴어 문구로 확인할 수 있다. "익살맞은 유명한 궁정의 광대이자 코믹한 바이올린 연주자인 한스 바흐는 근면하고 예의바르며 신앙심 깊은 사람이다."

제바스티안이 4학년으로 입학했던 오르트루프의 라틴어 학교는 평판이 좋았다. 재학생수가 많았던 것이 그 증거라 할 수 있는데, 1695년 당시 인구 4,000명이 채 못 되는 도시에서 재학생은 300명이나 되었다. 교과내용은 라틴어, 문장 연습, 그리스어 입문, 《신약성서》 강독, 수사학, 수학, 지리, 자연과학이 포함되었고, 거기에다가 성악과 음악 일반에 관한 깊이 있는 연구(주당 4~5시간)까지 추가되었다.

바흐 소유가 언급된 루터교 《성서》의 속표지.

이탈리아 사람 자롤라모 프레스코발디는 건반악기 음악의 위대한 천재였으며 특히 오르간의 대가였다.

"나에게 와서, 내 작품의 음악양식과 연주법에 대해 여러 차례 충고를 해주었던 걸출한 쳄발로 거장들 중 몇몇 사람들의 겸손한 태도로 미루어 볼 때, 내 곡을 호의적으로 평가한 곳에서는, 내가 그들의 음악을 완성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일러준 것을 내게 감사하리란 기대를 갖게 되었다."

쿠프랭(아래)

1717년

"함부르크에서는 라이네케(라이켄)란 뛰어난 오르간 연주자이자 작곡가의 예술이 번창했다."

F. W. 마르푸르크

《악성(樂聖)들의 전설》

(1760)

 

제2장

수련기

 

1702년 부활절, 제바스티안은 뤼네부르크의 성 미카엘 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그는 17세로서 대학에 입학할 나이였다. 하지만 대학 입학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음악이 그의 직업이자 생계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는 오르간 연주자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바흐 가문 출신답게 그는 고향인 튀링겐으로 눈을 돌렸다. 장거하우젠, 아이제나흐, 아른슈타트 등 세 곳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1241년에 함부르크와 공동으로 한자동맹을 결성한 부유하고 발전된 도시 뤼베크에는 고딕양식 교회의 높은 첨탑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다. 그리고 북스테후데라는 카리스마적 존재가 활동하고 있었다. 후진 양성과 대중 연주를 통한 선구적인 활동으로 그는 독일 음악계의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1637년경에 태어난 북스테후데(그림의 왼쪽)는 1668년 뤼베크의 성 마리아 교회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되어 1707년 사망할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북독일 최고의 오르간 음악가인 그의 작품은 니콜라우스 브륀스와 게오르크 뵘 등 많은 젊은 작곡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음악분야에서 루터의 활동은 '노래하는 것은 두 배로 기도하는 것'이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을 따랐다. 루터는 음악을 좋아하여 직접 연주하기도 했다. 그는 노래를 했고 플루트와 류트를 연주했다. 음악은 그에게 마르지 않는 영적인 샘이자 하느님과의 확실한 매개체였다. 1524년에는 일반인을 위한 최초의 체계적인 예배용 성가집이 출간되었다. 여기에는 43곡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그중 독일어로 된 23곡은 마르틴 루터의 것이었다. 또한 그외에도 코랄 <내 주는 강한 성이로다>(위 악보)를 비롯한 13곡의 다른 노래들도 있었다. 루터가 작곡한 36곡의 코랄은 16~17세기의 모든 예배용 성가집의 근간이 되었다.

1581년 화재로 폐허가 된 소도시 아른슈타트는 점차 재건되었다. 1684년 '새교회'라 명명된 교회의 장엄한 낙성식이 있었다. 주민들이 모금을 하여 1699년 새 오르간을 제작하기로 결정되었고, 1703년 완성되었다. 바로 이 오르간으로 훌륭한 연주를 하여 바흐는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대체 그가 어떤 권리로 요즘 수상한 젊은 처녀를 불러들여 함께 연주를 하는지 그에게 물어 봅시다."

아른슈타트 장로회의 보고서(1706년 11월)

바흐의 초기 칸타타들은 1712년경까지는 파헬벨, 뵘, 북스테후데와 바흐 가문 선조들의 작품들과 유사했다. 일반적으로 기악부는 짧았고 리듬과 사용된 성부의 수뿐만 아니라 박자에서도 상호간에 조화를 이루었다. 성악군이 기악군과 경쟁하는 콘체르타토의 원칙이 폭넓게 사용되었다. 또한 마찬가지로 아리오소(arioso)도 가장 중요한 형식이었다. 아리오소란 리토르넬리(ritornelli, 기악의 짧은 종결부)로 분할되는 일종의 레치타티보였다.

 

제3장

위대한 오르간 연주자

 

1708년 7월, 바흐는 작센-바이마르 공 빌헬름 에른스트에게 궁정교회의 오르간 연주자 자리를 제안받고 바이마르에 정착했다. 그는 이미 전주곡과 푸가, 소나타, 파르티타, 토카타, 코랄, 칸타타 등 수많은 장르를 섭렵했다. 그러나 그가 튀링겐 지역에서 유명해진 것은 작곡 실력보다 오르간 연주 실력이었다.

"받침대가 세워진 난간 뒤로 흑백 바둑판 무늬 바닥에 제단이 있엇다. 그 위로는 피라미드 형태의 천개(天蓋)가 천장에서부터 드리워져 있었다. …… 사실(私室)로 연결된 공의 단상이 제대를 향하고 있었던 것은 아마도 지붕밑 회랑에 놓인 오르간을 보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C. S. 테리(1930년)

작센-바이마르 공 빌헬름 에른스트는, 자신의 공국을 확장하거나 다른 공국과의 연합을 결성하거나 통치지역의 경계를 부흥시키는 일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집착이라 할 정도로 몰두했던 종교를 제외하면 문화만이 그의 유일한 관심사였다. 그는 오페라단을 결성하고, 실력 있는 음악가를 궁정음악가로 임명했으며, 고전학 관련 자료실과 전시실을 만들었다.


빌헬름 4세가 건축한 빌헬름스부르그성은 통치자의 숙소인 로테스 슐로스와 골데스 슐로스, 두 개의 성으로 이루어졌으며, 주위에 성곽을 쌓아 놓았다. 빌헬름스부르크성은 1774년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그 자리에 새로 슐로스 괴테성이 세워졌다.

성 마리아 교회(위)는 1713년에 오르간 제작자인 크리스토프 쿤치우스 덕분에 새로운 오르간을 보유하게 되었다. 바흐는 당시 수리중인 바이마르의 오르간보다 성능이 우수한 이 오르간에 더 마음이 끌렸다.


1684년 태어난 발터는 바흐의 육촌이다. 1707년에 바이마르에 있는 성 베드로와 바오로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다.

'이탈리아 양식의 협주곡'이라는 개념은, 코렐리의 열렬한 찬양자인 게오르크 무파트 같은 작곡가들의 활발한 활동으로 독일 음악계에 수용되었다. 무파트는 자신의 기악곡 모음집(1701년) 서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나는 이탈리아 협주곡이 지닌 다양성에 주목했다. 이 협주곡 가운데 몇 곡은 내가 작곡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하모니'를 지닌 그런 이탈리아 음악을 독일에 소개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16세기 이후 이탈리아의 작곡가들은 대개 바이올린 연주의 대가들이었다. 당시의 연주실력은 오늘의 명 바이올리니스트들에 비해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다. 비발디의 동시대인은 이구동성으로 그를 진정한 바이올린의 천재로 꼽았다. 아르농쿠르 역시 그들과 같은 심정이었다. "바로크 양식과 마찬가지로 바이올린은 진정한 이탈리아의 산물이다. ……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이 점차 전유럽을 휩쓴 것과 마찬가지로 바이올린은 기악의 중심이 되었다." (《음악 대담》, 1984년)

텔레만은 당대의 가장 저명한 작곡가였다. 그는 열두 살에 첫 오페라를 작곡했고 리코더, 바이올린, 쳄발로 등을 연주할 수 있었다. 그는 전유럽에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떨쳤으며, 특히 1730년에는 파리애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음악양식의 발전에 늘 앞장선 그는 이탈리아 양식과 프랑스 양식을 완벽하게 구사했고 이 두 양식의 결합에서도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했다.

리옹 출신의 루이 마르샹(아래)은 열 살 때부터 왕궁의 오르간 연주자로 봉직했다. 그는 1717년에 독일 순회연주를 시도했는데, 망신살이 뻗쳤던 드레스덴(위)의 에피소드는 연보에도 기록되어 전한다. 그는 파리로 돌아가 성 프란체스코회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일했으며 그곳의 수도사들을 가르쳤다.

 

제4장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1718년 11월 15일, 쾨텐에서 거행된 바흐의 일곱번째 아기의 세례식에 고귀한 대부와 대모들이 모였다. 레오폴트 공의 일가 세 사람과 지체 높은 귀족 두 사람이 참석한 것이다. 이는 제바스티안이 얼마나 신망을 받고 있었는지를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는 자신보다 아홉 살 연하인 공과 친구처럼 지냇다. 카펠마이스터로서 그가 연봉 400탈러를 받은 것은 궁정의 대신과 같은 대우였다.


 

바흐가 도착했을 때 인구가 5,000명이었던 작센의 작은 도시 쾨텐(아래)에는 1603년 이후 안할트 공국의 분할로 탄생된 소공국이 자리잡고 있었다. 넓고 쾌적한 쾨텐의 왕궁은 중앙의 웅장한 성과 화려한 프랑스식 정원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레오폴트 공은 기젤라 아그네스 폰 라트의 아들이다. 아그네스가 신봉한 루터교는 칼벵파의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레오폴트는 교양 있는 제후이며 나무랄 데 없는 음악가이기도 했다. 그는 바이올린과 비올라 다 감바를 다룰 줄 알았고 황홀하리만큼 노래를 잘 불렀다. 바흐는 "그는 음악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음악을 알고 있다."라고 말했는데, 아마 그 이상의 천사는 없을 것이다.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여섯 개의 작품들과 무반주 첼로를 위한 여섯 개의 모음곡들이 고난도의 연주기교를 필요로 하는 것을 보면, 바흐는 비르투오소들을 염두에 두고 작곡했음을 알 수 잇다. 바이올린 연주가로는 두 사람을 떠올릴 수 있다. 첫번째 인물은 J. G. 피젠델인데, 그는 독일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로 명성을 날렸고,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작품을 직접 작곡하기도 했다. 또한 비발디와 알비노니, 텔레만도 그에게 소품들을 헌사했다. 두번째 인물은 쾨텐 궁정의 수석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J. 스피스였다. 그러나 바흐 자신도 바이올린 연주 실력이 상당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가 처음 고용계약을 맺은 것도 바이올린 연주자로서였다. 테크닉 문제를 놓고 사람들은 한때 가당찮은 가설을 내놓은 적이 있었다. 즉, 바흐 시대에는 활이 구부러지고 짧아서 두 현을 동시에 누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도 연주가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곡들은 첼로 연주자인 크리스티안 베른하르트 리니케나 아니면 비올라 다 감바 연주자인 크리스티안 페르디난트 아벨 - 그는 뛰어난 첼로 연주자이기도 했다 - 을 위해 작곡했을 것이다.

포르켈은, 바흐와 그의 세 아들들은, "유년시절부터 화목한 가정에서 훌륭한 음악을 들을 기회를 누렸다."고 전해 준다.

날마다 '궁정'에서 연주회가 열릴 때면 레오폴트는 아름다운 바리톤으로 노래를 불렀다. 혹은 통주저음을 연주하기 위해 쳄발로 앞에 앉아 있거나 비올라 다 감바를 연주했다. 궁전에는 그가 독일과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가져온 귀중한 악기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악기를 구입하는 임무를 맡은 바흐는 당대의 일급 현악기 제조인들, 특히 슈타이너에게서 악기를 공급받았다.

바흐는 독일 음악의 중심지라는 함부르크의 명성보다는 성 야곱 교회의 오르간에 더 마음이 끌렸다. 그가 그 자리를 간절히 원한 것은 바로 그 오르간 때문이었다.

 

몇 년 전에 한 비르투오소가 어떤 주요 도시의 오르간 연주자 자리에 지원했다. …… 유복한 장인의 아들 역시 그 자리에 지원했는데, 그의 연주는 손가락의 힘이 아니라 돈의 힘으로 훌륭해 보이는 것 같았다. 결국 자리는 장인의 아들에게 돌아갔다.

마테존

1728년

에르트만 노이마이스터.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은 본래 제목이 아니다. 이 이름은 역사가인 스피타가 1873년에 붙였다.

 

후작의 음악가들은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한 번도 연주한 적이 없다. 무관심 속에서 서가에 꽂혀 있던 바흐의 귀중한 자필원고는 수많은 협주곡 악보들과 섞여 있다가 후작이 죽자 그의 후손들이 나눠 가졌다.

<골트베르크 변주곡>과 <이탈리아 협주곡>을 제외하고 바흐는 어떤 악기로 그의 쳄발로곡을 연주해야 할지 명시하지 않았다.

바흐가 재혼한 지 8일 만인 1722년 12월 11일에, 레오폴트 공은 사촌인 안할트-베른부르크의 프레데리카 헨리에타와 결혼했다. 공의 결혼 축하 행사는 다섯 주일이나 계속되었는데, 바흐는 그 기간에 두 곡의 칸타타(아쉽게도 소실되었다.)를 작곡했다. 그 하나는 부부의 앞날을 축복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새로 맞이한 공의 부인에게 헌정하는 곡이었다.

1723년 라이프치히로 떠날 무렵 바흐의 아이들은 모두 다섯이었다.카타리나 도로테아가 열다섯 살, 빌헬름 프리데만이 열네 살, 카를필리프 에마누엘이 여덟 살, J. 곳프리트 베른하르트가 일곱 살, 그리고 갓난아이 크리스티아나 수잔나 헨리에타(1726년에 사망)가 있었다. 1724년에서 1742년 사이에 12명의 아이들이 더 태어났다. 그중 다섯 아이만이 다섯 살을 넘겼다. 마리아 바르바라가 여윈 세 명의 아이들까지 합해서 바흐는 모두 20명의 아이들을 낳았지만 그중 10명이 어린 나이에 죽고 말았다.


제5장

칸토르 바흐


1722년 6월 5일,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학교의 칸토르인 요한 쿠나우가 세상을 떠났다. 신교의 보루이자 인구 2만의 권위 있는 대학도시인 라이프치히는 음악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칸토르는 악장의 임무뿐 아니라 그 도시의 모든 교회들을 총괄하는 '음악감독'으로서, 1212년 학교가 설립된 이후로 위대한 칸토르들이 계보를 이루며 위업을 쌓고 있었다. 바흐는 이 자리에 지원했다.

라이프치히는 상업의 요충지로서 해마다 세 번씩 유명한 박람회가 열려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13세기 로마 양식으로 건축된 성 토마스 교회(위)는 15세기에 고딕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음의 천재 바흐는 거대하고 경사가 급한 교회 지붕을 타고 흐를 음량을 감안하여 자신의 성스러운 음악을 작곡했다.

성 토마스 학교는 라이프치히에서 거행되는 모든 장례식 - 가난한 사람들과 아이들의 장례식은 제외 -과 때로는 결혼식에 참석할 임무를 맡고 있었다.


장례식에서 부를 코랄과 모테트를 정하는 사람은 칸토르이다. 결혼식 참석에 대한 사례금은 1탈러이며 그 이상을 요구할 수는 없다. 음악과 악기는 모두 칸토르가 관리하며, 교회의 오르간 주자와 음악가들을 지휘하는 것도 칸토르의 임무이다. 성탄절과 춘절기의 합창 연주 때문에 부당하게 정상 수업을 중지해서는 안 된다. …… 장례식에는 검은색 정장에 망토를 갖춘 제복을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앉는 순서대로 장례행렬을 따르며, 합창할 때에는 화음을 정확하게 맞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 토마스 학교에 대한

라이프치히 시상임참사회

규정'에서 발췌

학생들의 가장 큰 수입은 거리에서 코랄을 들려주는 이른바 합창연주의 대가였다. 합창연주는 1주일에 세 번, 수요일, 금요일, 일요일 오후 세 시간 동안(단 그 시간에 장례식이 없을 경우)만 허락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번 돈은 매주 목요일과 일요일에 모금을 담당한 여덟 명의 어린 학생들이 헌금함을 들고 나가 받아 왔다.

 

"2시경, 음악가와 그의 가족들이 성 토마스 학교의 새로이 단장한 숙소에 입주하기 위해 두 대의 마차를 타고 도착했습니다."

1723년 5월 29일

홀슈타인에서 온 서한에서

요한 하인리히 에르네스티(아래)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1691년에 같은 대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680년 이래 성 니콜라이 교회의 설교자이자 토마스 학교의 공동 교장을 맡았던 그는 1684년 이 학교의 교장직에 취임했다. 오랜 전통을 지닌 토마스 학교는 라이프치히의 초등 · 중등 학교를 이끌어가는 두 축 가운데 하나였다. 또 다른 축인 성 니콜라이 학교는 부유층의 학교로 자리를 잡았고, 성 토마스 학교는 가난한 계층의 학교였다. 성 토마스 학교에서는 음악을 가르친 반면에 성 니콜라이 학교는 음악교육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바흐는 1735~1736년 겨울에 <마태 수난곡>을 공들여 완성했는데, 하느님의 말씀은 붉은색 잉크로 적어 넣었다.

j. 마티아스 게스너가 성 토마스 학교의 교장에 임명된 것은 바흐에게는 너무나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두 사람은 1715년 게스너가 바이마르에서 검열관과 도서관 사서직으로 일하던 무렵, 바이마르에서 처음 만난 이래 굳건한 우정을 다져 왔다. 오늘날 게스너는 고전문헌학의 선구자로 인정받고 있다.

 

라이프치히의 콜레기움 무지쿰, 매주 금요일마다 겨울에는 저녁 8시에서 10시 사이, 여름에는 4시에서 6시 사이에 카타리나가(街)에 있는 침머만 카페에 나왔다. 그러나 토요일에는 페터가의 무도회장, 수요일에는 장터 광장의 레흐만 카페, 목요일에는 헬비크 카페 등 다른 공공장소에서도 공연을 가졌다. 또한 여름에는 빈트뮐레 공원에 위치한 침머만 카페의 분점에서도 공연을 했다.

학생회

초기의 음악단체들은 학생들이 추진하여 16세기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어릴 때부터 기악과 성악 교육을 받아 온 음악적 자질이 뛰어난 독일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음악모임을 가졌다. 점차 대학에서는 연주회다운 연주회를 열 수 있는 조직적인 음악단체를 구성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1702년에 텔레만이 창립한 콜레기움 무지쿰은 대중적인 연주회를 위한 독일의 초기 음악 단체들 중 하나였다. 학생들과 전문 음악인들의 모임인 콜레기아 무지카(그림은 예나의 콜레기아 무지카)는 새로운 레퍼토리 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콜레기움 무지쿰은 교회나 오페라 극장, 궁정 등에 소속되는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단체였다. 라이프치히에는 바흐가 맡은 콜레기움 무지쿰말고도 다른 음악단체가 있었다. 1708년 이래 쿠나우의 제자인 J. 프리드리히 파슈가 창설한 유사한 단체가 활동했다. 20여 명의 기악연주자들로 구성된 이 단체는 수요일 저녁 레흐만 카페에서 음악을 들려주곤 했다.

18세기에는 악보 첫머리나 말미에 S. G. D.(또는 D. S. G. '오직 하느님께 영광'), 또는 J. J.(Jesu Juva, '구세주 예수')라는 철자를 기입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하이든의 원고에서도 비슷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스물일곱 살의 젊은 나이로 교장에 부임한 J. 아우구스트 에르네스티는 1731년 이래 성 토마스 학교의 교감직을 맡고 있었다. 탁월한 지성인이자 문헌학자이며 신학자에다가 뛰어난 작가였던 에르네스티는 음악을 시간 낭비로 여겼다. 더욱이 학교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교과제도를 개편할 필요성을 인식한 그는, 바흐의 요구사항들을 자신이 세운 학교의 발전계획에 맞서는 장애물로 생각했다. 그는 음악을 하는 학생들에게 여인숙의 싸구려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고 싶으냐고 빈정댔다. 이러한 뿌리깊은 경멸은 오랫동안 내재되어 온 불화를 폭발시킬 수밖에 없었다.

 

제6장

음악의 헌정

 

이제 이야기는 바흐의 말년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오래전의 일이고 사람들의 기억에도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어 그의 말년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그는 어렵지만 꿋꿋하게 지냈을 것이다. 바흐는 왕성한 활동을 했던 라이프치히를 떠났다. 오르간 감정사로 일한 알텐부르크, 괴를리츠, 초르타우, 나움부르크와 언제 가도 환영을 받은 드레스덴, 그리고 에마누엘이 사는 베를린으로 옮겨 다녔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음악을 싫어하던 부왕 몰래 일곱 살 때부터 베를린 성당의 오르간 주자인 고틀리프 하이네에게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다음에는 크반츠에게 플루트를, C. 하인리히 그라운에게 작곡을 배웠다. 그는 음악가로서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날 저녁 국왕은 자신의 연주회를 잊은 채 이미 노(老)바흐라고 불리던 그에게 질버만이 제작한 피아노포르테들을 연주해 보라고 했다.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피아노포르테가 놓인 이방 저방으로 따라다녔고, 바흐는 들어가는 방마다 즉석에서 연주해야 했다. …… 왕은 그후 며칠간 바흐를 데리고 다니며 포츠담에 있는 모든 오르간을 시연하게 했다."

포르켈

《J. S. 바흐의 생애》(1802년)

<음악의 헌정>에 포함된 열 개의 카논은 바흐의 최고 역작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왕이 해결해야 할 난해한 부분을 일부러 만들었다. 그는 그중 세 군데에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라틴어 문구를 자필로 적어 넣었다.

1736년에 정기간행물인 《음악총서》를 창간한 로렌츠 크리스토프 미츨러는 오래 전부터 자신이 창설한 음악협회에 스승이 가입해 줄 것을 희망했다. 음악협회의 회원수는 총 20명으로 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회원들 모두 뛰어난 음악가들이었다. 텔레만이 1739년에 가입했고, 헨델은 1745년에, 그리고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1755년에 가입했다. 최소한 1년에 한 번씩 회원들은 협회에 학술보고를 할 의무가 있었다.

J. S. B라는 문자가 대칭되어 나타나는 바흐의 봉인에는 상징적인 숫자가 숨어 있다. 왕관 위의 뾰족한 장식 일곱 개, 중앙의 꽃잎 세 개, 그리고 주위의 장식 다섯 개가 그것이다.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1714~1788).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1710~1784).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바흐(1732~1795).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1735~1782).

1885년 5월 16일에 있은 《마테 수난곡》 공연.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