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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28. 11:00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110 사탄과 약혼한 마녀

 

장-미셸 살망 지음, 은위영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26

 

082

시158ㅅ  21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21

 

Les sorcieres, fiancees de Satan

 

15세기 말부터 서구에는 마녀 사냥의

물결이 거세게 몰아닥쳤다. 행실이 나쁘다거나

무언가 의심쩍은 구석이 있는 사람은, 특히나

여자일 경우 어김없이 화형장의

불길 속으로 던져졌다. 이처럼 유럽을

광기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마녀 사냥의 배후에는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종교적 갈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인쇄술의 발달도 여기에 한몫을 했다.

악마론의 연구서들이 전 유럽으로 급속히

전파되었던 것이다.

 

"태생을 보면,

마녀에게는 배우자도 가족도 없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운석(隕石)같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괴물. 누가 감히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으리.

마녀는 어디 있는가. 접근이 불가능한 지 어느 곳,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얽히고 설킨 광야의 한끝이 아닐까.

혹은 한밤중 선사의 어느 고인돌 아래쯤,

그녀가 거기 있다 한들, 그녀는 여전히 혼자,

그러니 두렵지 않을 자가 누가 있나.

사나운 불길이 그녀를 에워싸고 있다고는 하지만

누가 이를 믿으랴. 그녀는 그저 한 여인일 뿐인데,

거칠고 무서운 삶이라 한들 그녀가 여자임을

잊게 할까, 여인의 본성을…….

 

모든 것은 사탄에서 비롯하나니, 살아 숨쉬며

저주하는 마녀들이란 사탄의 보금자리.

사람들은 마녀가 두렵다 말들 하지만, 마녀가 없다면,

그들은 권태로움에 죽을 것임을 고백해야 하리."

 

쥘 미셀레(Jules Michelet), <La Sorciere>

 


|차례|

 

제1장 마녀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제2장 마녀사냥

제3장 무자비한 사법장치

제4장 마법인가, 마술인가?

제5장 마법의 몰락

기록과 증언

그림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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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 미셸 살망 Jean-Michel Sallmann

1950년 1월에 태어난 장-미셸 살망은 파리 제10대학에서 근대사를 가르치고 있으며, 근대 이탈리아의 종교 · 문화사를 연구하고 있다. 이단 재판을 통해 16세기의 주술을 연구하며, <보물 탐색자와 운명의 장난꾼 : 16세기 나폴리의 초자연 현상에 대한 연구>(1988)를 출간한 바 있으며, 현재는 카톨릭교회 개혁기에 있어서 나폴리 왕국에 나타난 성인(聖人)과 성녀(聖女)에 관한 저서를 준비하고 잇다.

 

옮긴이 : 은위영

1964년 전주 출생.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파리 제10대학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번역서로는 <지식과 권력> 등이 있다.

 

제1장

마녀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마법은 암흑의 시대에만 존재하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마법은 세계와 세계를 움직이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을 표상하는 인식양식이다. 마녀들의 집회, 마법의 의식, 이단재판 그리고 화형은 시작과 끝을 가진 하나의 역사이며 아직도 인간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화가이며 조각가인 한스 발퉁 그린은 중세 말엽, 최초로 마녀사냥에 참여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악마에 대한 신화가 남부 독일에서도 비롯되었음을 보여 준다.

종교재판의 희생자들은 산베니토(sanbenito, 지옥의 옷)를 걸치고 화형대에 올랐으며 사람들은 처형 직전 산베니토를 벗겨 냈다. 또한 자손만대에 이르기까지 그 죄과를 미치게 한다는 의미에서 교회 입구에 그들의 이름과 함께 그들이 입었던 속옷을 내걸었다.

15세기 말과 16세기 초에 자행된 스페인 종교재판은 그 잔인함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렇지만 이 탄압의 주요한 희생자들은 개종한 유대인과 무어인 그리고 이교도 들이었다.

베로나 공회(公會)의 발표에 따르면, 보두교는 1184년 이래 프랑스, 이탈리아, 현재의 스위스 영내, 그리고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계속해서 전파되었다고 한다. 보두교인은 1555년부터 보두아 지역 골짜기에 교회를 세웠으며 예배를 통해 개혁사상의 부흥을 꾀했다. 16세기 중엽에서 17세기 말까지 있었던 여러 차례의 탄압으로 푸예, 칼라브르, 피에몽 등지에서 많은 보두교인이 처형당했다.

《구약성서》의 초기 판본에는 '야훼가 천지만물의 창조주의자 선과 악의 주관자'라고 이른다. 그러던 중 사탄 -- 히브리어로는 적(敵)을 의미한다 --의 형상이 신의 형상에서 분리되어 원죄의 근원으로 그려진 것은 B.C. 6세기부터이다.

"14세기 후반의 불행 -- 기근, 페스트, 백년전쟁 거듭되는 내란과 반란, 교회의 대분열(교황의 아비뇽 유폐에 따라 1378년에서 1417년까지 지속된 카톨릭 교회의 분열을 말한다 : 역주), 오스만투르크의 군사적 위협 --에 처한 중세인은 무한한 혼란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불행의 원인을 인간성의 과도한 발현과 교회의 타락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은 뒤범벅된 것처럼 보였으며 결말은 최후의 심판일 것이 분명했다."

J. 들뤼모

《원죄와 공포》

부르고뉴, 프랑슈콩테, 플랑드르, 아르투아의 군주 필리프 르 봉.

중세 말, 기독교는 신과 악마라는 모순된 관념 속에 부유(浮游)하면서 이원론적 특성을 드러냈다. 실제로 악마가 인간의 몸 속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마법사는 주문을 외워 바람을 일으키고 우박을 내리게 하고 미래를 예언하며, 어떤 사람으로부터 과실과 젖을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줄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이보다 놀라운 일도 얼마든지 행할 수 있다고 사람들은 전한다. 그러므로 남자든 여자든 죄인으로 판명될 경우에는 지체 없이 계율 속에 묶어 넣어야 하며, 군주는 반드시 그들을 처벌해야 한다."

《게르만 고적사》

제사에서 어린아이를 희생양으로 삼는 전형적인 제의적(祭儀的) 살인행위는 로마 군대가 기독교인과 충돌할 때 이미 저질러졌다. 기독교인은 곧 이어 유대인으로 대치되엇으며 나중에는 이교도와 마법사가 그 표적이 되었다. 13세기부터 프랑스 국왕은 여러 가지 조직적인 수법을 동원해 영토 내에 거주하는 유대인 추방을 번번히 자행했다. 이것은 종교적 열정에 따른 행위이기도 했지만, 그 배경에는 재정상의 필요성이 깔려 있었다.

근대에 주술이란 농촌사회의 특이한 현상이며 농민세계의 취약성을 표현해 준 것이었다. 흉작, 자연재해, 전염병의 원인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재물은 바로 마녀였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 가운데 플랑드르 지방의 농촌에 닥친 변화와, 농촌경제에서 목축이 갖는 중요성을 브뢰겔만큼 잘 보여 주는 화가는 없다.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플랑드르에서도 가축은 마법의 주요한 표적이 되곤 했다.

"악마의 환상과 헛것에 홀려 늘 사탄을 찾아다니는 악녀들이 확신에 차서 숨김없이 고백한다. 한밤중에 말을 타듯 동물들을 타고 이교도의 여신 다이에나, 그리고 숱하게 많은 다른 여자들과 함께 한밤의 죽음 같은 정적을 뚫고 수많은 제국들을 가로질러 간다고, 다이애나가 그들의 주인이기라도 하듯이 그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며, 그녀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특별한 날 밤에 모인다고 한다."

《카농 에피스코피》

마법의 집회를 그린 상상화들은 마녀들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가를 선명하게 드러내 준다. 중세에는 이처럼 마법사들이 반종교(反宗敎), 곧 악마의 대리자이며 광신자로 비쳤다. 악마가 변신하는 형태 또한 다양하여 그리핀(Griffin, 독수리의 머리, 날개, 발톱에 사자의 몸을 지닌 괴수 : 역주), 인간의 머리를 가진 용, 염소, 두꺼비 또는 온갖 추악한 괴물로 표현되고 있다. 악마의 목적은 오직 카톨릭의 열성적인 신자들을 배교(背敎)토록 하는 데 있었으므로, 이 집회의 의식이 커톨릭 의식과 비슷하다고 해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새로운 신자들은 악마에게서 다시 세례를 받았으며, 악마와 사랑을 나누어 태어난 아이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의식을 지낸 다음 식탁에 올렸다.


제2장

마녀사냥


15세기 말부터 서구는 마녀사냥의 물결에 휩싸여 1580년에서 1670년 사이에 그 절정에 다다른다. 이 물결은 때로 극한을 달려 사회적 재앙을 부르게 된다.

"그리고 바라건대 마법사들의 원수는 바로 나임을 알라. 그들의 증오가 극에 달하면 달할수록 그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나 또한 증오가 커져 그들을 하나도 남겨 놓지 않을 것이다."

앙리 보귀에

《마법사를 저주함에 부쳐》

아바돈, 아스타로트, 마몬은 사탄의 무리를 형성하는 수많은 일당들 가운데 하나이다. 마술사들은 미래를 예측할 때 그들의 이름을 부르곤 했다.

마법 탄압에 개입한 세력은 카톨릭 교회만이 아니었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까지 영국의 성공회도 마녀사냥에 나섰다. 그러나 앵글로 색슨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악마에 대한 신화를 갖고 있지 않았다. 마녀들은 화형이 아니라 교수형에 처해졌을 뿐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시민법을 위반했을 뿐 종교적 죄악을 범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1529년 앙제에서 태어나 1596년에 사망한 장 보댕은 툴루즈에서 12년 동안 로마법을 강의했으며 그 자신 마법사로 의심받기도 했다.

바오로 3세의 재위기간(1534~1549)에는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1542년에 창설된 종교재판 성소(聖所)와 1545년에 소집된 트리엔트 공의회가 그것이다.

사법관들이 쓴 마녀사냥에 관한 논설들은 16세기 말, 사법관들이 악마신화에 대한 믿음에 집착했음을 드러낸다.

마법의 집회가 없이는 악마의 마법도 없다. 심문을 시작한 판사의 유일하고도 최종적인 관심은 마법사나 마녀에게서 마법의 집회에 참석했다는 자백을 얻어내는 것이었다. 자백은 곧 사형선고로 이어졌으며, 자백을 얻기 위해서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집회준비

 

한스 발퉁의 판화(1514년)들은 대단히 시사적이다. 무엇보다도 오디새와 박쥐의 피, 종(鍾) 부스러기와 검정가루가 들어가는 고약 또는 마법의 기름을 보자, 마녀들 가운데 하나는 마편초 불 위에 얹은 작은 솥에 약물을 끓이고 있고 다른 마녀들은 마법의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쇠스랑이나 양을 타고 구름 속으로 사라질 채비를 하고 있다. 준비가 다 된 기름을 쇠스랑에 바르며 무시무시한 봉헌 주문을 외운다. 한 마녀는 해골로 채워진 쟁반을 하늘로 들어올리고 있고 다른 마녀는 흡사 곡식이나 방울이라도 된다는 듯이 태아의 작은 두개골로 폭주로 만들어 늘어뜨리고 있다. 이어서 그들은 마법의 집회에 참석해 마법사들과 함께 짝을 짓는데, 보귀에의 말을 빌리자면 세상에서 제일 사악한 결합이다. "아들이 어머니를 가리지 않고, 오빠가 여동생을 가리지 않고, 아버지가 딸을 가리지 않는 ……. 그들이 거기에서 어떤 음란한 짓을 저지르는가 하는 것은 독자의 상상에 맡기겠다."


"고적한 여기 한밤중을 떠도는 은밀한 공포가 내 오감을 사로잡네. 기기묘묘한  천 가지 형상을 나는 보네. 또는 본다고 믿네. 어둠 속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에 기대어, 저기 마법의 집회가 열리네."

무명씨가 남긴 17세기 글

저주의 죄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희생양이 되었던 여자들은 마을공동체에서 아주 특별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약초의 비밀을 알고 있는 여인네가 종종 있었다. 긴장이 고조되고 마법에 대한 풍문이 떠돌기 시작할 때, 여인들이 지닌 특별한 능력을 두려워했던 대중들은 제일 먼저 그들을 의심했다.

마법의 집회에 참석한 세속의 두 여인(귀부인과 그 하녀)이 나타나는 이미지는 흔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가 갖는 특정한 의미는 둘째치고 배경으로 펼쳐지고 있는 악마숭배 의식은 더욱 자세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전문가들은 두 가지 가정을 설정했다. 첫번째 가정에 따르면, 그림의 악마숭배에는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Janus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두 얼굴을 가진 신. 특히 로마 신화에서는 가장 중요한 神性으로 추앙되어 그와 어원을 공유하고 있는 주피터보다도 더 귀한 경배대상이 되기도 했다 : 역자)에 대한 로마적 의식이 재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드 랑크르는 이러한 가정과 무관하게 다음과 같이 기술한 바 있다. "자네트가 이야기하길…… 그(악마)는 야누스의 그림에서 본 것처럼 겉얼굴과 속얼굴 두 개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두번째 가정에 따르면, 이는 일반 평민들의 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역전시킨 축제의 한 종류라는 것이다. 이 경우 위와 아래의 의미가 바뀌어 위(지배자)에 있는 것이 아래(피지배자)로 환치되고 또한 아래에 있는 것이 위로 환치되어 묘사된다.

16세기의 유럽에서는 출판물의 제작과 유통은 행정관청과 교회의 철저한 통제 아래 있었다. 1559년 바오로 4세는 최초의 금서목록을 배포했다. 후임자들 또한 선임자의 정책을 이어받아 금서의 기준을 더욱 엄격하게 적용했다. 1571년, 파이 5세는 금서를 선정하고 관리할 목적으로 아예 추기경 특별 성성(聖省)을 제도화했다. 금서는 특히 이단서적들을 뜻했다. 마법이나 마술에 관련된 내용은 어차피 인쇄물의 형태로 세상에 나온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탄압조치와 관계가 없었다.


제3장

무자비한 사법장치


16세기, 마법은 이단과 마찬가지로 신에 대한 불경죄로 여겼으므로 세속법정은 기꺼이 종교재판을 수행했다. 그 같은 선택이 의미하는 바를 추론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결국 시골의 한 농부가 올가미에 걸려들었을 때, 몸을 다치지 않고 올가미에서 빠져 나올 가능성은 희박했다.

마법사냥은 잔인한 이미지와 극적인 측면을 넘어서서 형사재판의 합목적성까지 의심하게 만들었으며, 중세 말에서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는 동안 소송절차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 영향은 프랑스 대혁명 전야에 이르도록 계속되었다.

마녀의 부름에 화답하여 나타난 악마의 형상.

마법은 당시까지 유럽인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세계에 대하여 그들이 투사한 온갖 유형의 환상을 배출하는 통로였다. 16세기의 독자들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나 장 드 망드빌의 《여행》을 읽으며 아직 공상에 잠길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대륙의 발견과 더불어 수평선이 확장되면서 유럽인의 이국취미는 그 내용을 달리하게 되었다. 마법은 객관적인 지식이 오랫동안 억압했던 이러한 환상의 한 부분을 내재화시킨 것이다.

신명심판 또는 '신의 심판'은 그 기원이 게르만의 침입과 유럽의 기독교화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엄연한 사법현실이다. 그것은 무고한 사람이 신에게 버림받을 리 없다는 원칙에서 출발한다. 마녀들을 물에 던져 시험하는 선악(善惡)판별법은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서구 역사에 음울한 기억을 남겼던 종교재판은 사실 대규모 마녀사냥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종교재판의 경험이 없는 영국에서 더욱 혹독한 탄압이 이루어졌다.

종교재판 기구

기원을 따져 볼 때 종교재판은 중의적(重義的)인 성격을 갖는다. 의식(意識)을 심판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인데, 이는 로마 법령에 기초를 두면서 또한 동시에 스페인 법령체계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 그 관할권의 상층부에는 최고평의회가 자리잡고 있다. 의장에 해당하는 최고재판관과 평의원들은 세속의 군주가 임명했으며, 약 15개의 지방재판소를 통해 그 권능을 행사했다. 각 재판소는 반(反)기독교적 범죄를 단죄하는 데 신학적 논거를 제공할 것을 임무로 하는 여러 판사들과 소추를 담당하는 검사들로 구성되었다. 그 밖에도 종교재판소는 여러 '우인(友人)'의 협력을 받곤 했는데, 이들은 종교재판소에서 무보수로 일하는 일종의 경찰관 구실을 했으며, 지역 유지들은 우인이 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신앙의 이름으로

종교재판은 중세 말엽부터 점차 형사심판 체계로 변해 갔다. 콜베르의 형사대심령(刑事大審令)은 이러한 변화를 프랑스 법령체계 내에 정식으로 수용하는 계ㅏㄴ에서 기가 되었다(1670년). 이 절차는 피고소인에게 가히 '악마적인' 것이어서 그는 자신의 죄목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세상과 격리되어 고문과 싸우면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야만 했다. 다만 마법의 혐의에 연루되어 있는 한, 구체적인 물적 증거를 확보할 것을 의무화한 콜베르의 법령은 사실상 증거 수집이 무척 힘든 이 부분의 재판에서 미미하나마 하나의 발전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판사와 검사의 역할이 거의 구분되어 있지 않은 것과 재판이 비밀리에 진행되며 변호사가 없다는 것, 그리고 여전히 고문이 자행되는 것은 예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이러한 재판절차가 프랑스에서 공식적으로 폐기된 것은 1780년에 이르러서였다. 그런데 당시는 이미 유럽 전역에서 고문이 자취를 감추고 있을 때였다.

"사람을 죽이는 대가로 악마는 마법사들에게 어떤 보상을 하는가……?" 자백에 따르자면 …… "그가 세상의 모든 재물을 약속했나니."

1679년 5월 29일에 부비니에서 화형당한 고귀용의 재판기록

개종하지 않는 이교도를 기다리고 있는 형벌은 태형과 징역, 팔다리를 꺾어서 바퀴에 매달아 죽이는 차형(車刑), 그리고 화형 따위였다. 마녀들의 경우에는 이런 방법말고도 훨씬 간단한 대안이 있었다. 그들이 고문을 이기고 마법의 집회에 참여했음을 부인하는 데 성공했다 할지라도 모든 의심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향에서 추방당하거나 마을공동체에서 퇴거당했으며, 이것은 마녀라는 손가락질이 따라다니는 한 또 다른 형태의 사형이었던 것이다.

"(마녀들은) 저주의 불길 위에 솥을 얹어, 사람의 몸이나 동물에서 채집한 여러 성분과 독초들을 끓인다."

툴루즈 종교재판소에서 심판받았던 안 마리의 증언

마법의 주술을 걸기 위해서는 교수형에 처해진 사람의 이빨을 사용하는 것이 즉효라는, 세간의 믿음을 풍자한 고야의 그림.

1560년에서 1670년 사이에 남서부 독일은 가혹한 마녀사냥의 한 시기를 보냈는데, 이때 최소한 3,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비젠타이크 마을에서는 1562년 한 해 동안에 63명의 여자가 마녀로 몰려 화형대 위에 올랐으며, 오베르마르히탈에서는 1586년과 1588년 사이의 3년 동안, 43명의 여자와 11명의 남자가, 곧 전체 인구의 약 7%가 마법과 관련되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1560년에서 1670년 사이에 남서부 독일은 가혹한 마녀사냥의 한 시기를 보냈는데, 이때 최소한 3,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비젠타이크 마을에서는 1562년 한 해 동안에 63명의 여자가 마녀로 몰려 화형대 위에 올랐으며, 오베르마르히탈에서는 1586년과 1588년 사이의 3년 동안, 43명의 여자와 11명의 남자가, 곧 전체 인구의 약 7%가 마법과 관련되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제4장

마법인가, 마술인가?

 

북유럽, 특히 종교개혁으로 신교를 수용한 국가에 인접해 있는 카톨릭교 신봉 지역에서는 불에 의지하여 마귀를 쫓는 의식이 성행했다. 악마적 마법론은 이단론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반면,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와 같이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비교적 적게 노출되었던 지중해 연안 국가들에서는 '운명의 장난꾼들', 다시 말해 마법사나 마술사가 악마와 계약을 맺은 자들로 의심받지 않았다.

제의적(祭儀的) 마술은 마법과 별도로 발달되었다. 16세기에 절덩에 달한 마술은 오직 비기(秘記)의 전수자들만이 알고 있는 방법을 이용해 신의 비밀을 캐려 했다는 점에서 진정한 그노시스(gnosis, 신학에서 말하는 영적, 신비적 인식 : 역주)였다.

연금술은 2세기와 3세기에, 헬레니즘 풍의 신비주의 인식론이 유행하던 알렉산드리아에서 처음 모습을 나타냈다. 아랍 세계가 서구에 연금술을 전해 준 때는 12세기이다. 연금술사들은 만병통치약이며 금속을 금으로 변하게 하는 화금석(火金石)을 발견하기 위해 애썼다.

1583년, 전유럽에는 화금석의 비밀을 알아냈다는 소문이 퍼져 큰 소란이 일어났다. 3년이 지난 1586년에는 급기야 교황 시스티나 5세가 모든 형태의 예언을 금하는 특별 칙서, <하늘과 땅의 창조주>를 내리기까지 했다.

냄새와 맛이 고약했던 만드라고라(mandragora, 위)는 마취기능과 하제기능을 함께 각춘 약용식물이었으며, 사람들은 사형대 밑에서 자라는 만드라고라가 신비한 치유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마녀들의 상징이었던 뱀, 바실리스크. 그리스-로마 전설에 나오는 괴물로 사람들은 그것이 쳐다보기만 해도 당장에 죽는다고 믿었다.

몽환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몽유병자의 눈-쿠르베가 그린 이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이-은 투시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졌으며 낭만주의자들이 특히 환영하는 소재였다.

집시 여인들은 이미 16세기부터 마술의 세계를 넘나드는 무시무시한 점쟁이들로 여겨졌다. 위 그림은 집시 여인들이 자기들의 경험담을 늘어놓고 있는 장면으로 카라바조가 이를 유행시킨 이래 바로크 미술에서 흔히 다루는 주제가 되었다.

중세 말에 성행했던 강신술은 죽은 자들의 혼령을 불러내거나 매장된 시체를 찾아내 신묘한 처치를 하는 무술(巫術)이었다.


제5장

마법의 몰락


마녀사냥은 17세기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종교재판이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언제나 같은 결론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 마법에 대한 새로운 견해들이 성직자들 사이에서, 특히 의사들 사이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법의 문제를 통해 제기되는 것은 결국 기독교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문제이다.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여성이란 원죄로 각인되어 있는 존재이다. 여성은 악마의 심부름꾼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성의 육체 자체가 두려움을 자아낸다. 여성의 생리에 대한 몰이해가 인간의 모든 상상력을 극단으로 질주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보슈와 브뢰겔이 그린 악마들은 축제와 카니발에 나타나는 귀신들이나 다른 특별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데 비해, 리하카르트가 그린 악마들은 '현실주의적'이다. 격렬한 율동과 대비되는 썩어 들어가는 살은 그야말로 경이적이다.

장 비에는 16세기의 선구자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고립되어 있었다. 의사들이 마법에 관하여 의학적 견해를 용기 있게 개진하기까지는 1세기를 더 기다려야 한다.

17세기는 카톨릭 교회의 개혁기였다. 수도원의 급격한 증가와 엄격한 계율의 적용은 많은 갈등을 유발했다. 폐쇄된 공간에서 이루어진 신앙지도 사제들과 가족들의 간섭으로 여자들만 있는 수녀원에는 많은 문제가 일어났다. 마귀들린 사건들이 되풀이되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17세기에는 새로운 지적 움직임이 일어난 때이다. 이른바 계몽주의 시대인 것이다. 1653년에 사망한 가브리엘 노데는 마지랭과 크리스틴 드 쉬에드의 사서였다. 그는 마자랭을 도와 당대에 수많은 도서와 수고(手稿)들을 수집했다. 그는 마자랭의 보호와 면책특권을 누림으로써 자유주의 운동의 표상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노력도 프롱드의 난으로 말미암아 무로 돌아가고 말았다. 훗날 마자랭이 자신의 도서관을 재건할 수 있게 도와 준 이는 권좌에 복귀한 콜베르였다.

수녀원들은 교구청의 엄한 감독하에 운영되었다. 그들은 폐쇄생활의 규율이 훼손되거나 특정한 신비주의에 오염되는 것을 경계했으며 악마의 표정이 나타나는 일 따위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상부에 자주 보고되었던 신비적 견신(見神)도 17세기 수도생활의 중요한 특징을 이루었다. 이는 많은 경우 종교생활의 자율성을 요구하는 한 방편으로 수녀들 사이에서 자리잡았다.

17세기의 마법논쟁은 절대왕권의 강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리슬리외 추기경은 절대왕정의 가장 열렬한 옹호자였다.

"프란체스코회 락탕스 신부의 말에 따르자면 …… 그랑디에는 화형대의 형틀에 묶인 채로 자신을 불태울 나무들에 마법을 걸었는데 이는 악마가 불길을 억제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구마서(驅魔書) 위에 떨어졌을 호두알만큼 큰 흑점을 보고 이내 단념했던 게 아닌가 추정된다."

앙주의 공증인의 증언

한 증언은 잔 데장주 수녀를 '유혹의 가시덩굴에 얽히고 찢긴, 그러나 가장 혹독한 폭풍에도 맞서 싸운 한 떨기 아름다운 흰 백합'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마귀쫓기 시험은 그녀의 성녀로서의 평판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1663년에서 1683년까지 루이 14세의 재상을 지냈던 장 밥티스트 콜베르는 형사법규를 개정하지 않았다. 그의 주도로 1667년과 1670년에 공포된 두 법령은 개혁에 앞서 기존의 형사법규를 정리하고 확정하는 것이었다.

 

한 신념의 종언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오늘날에는 더 이상 귀신들린 자도, 마술사도, 점성술사도, 정령도 존재하지 않는다. 100년 전에는 무엇을 근거로 하여 이 모든 신비들이 가능했을까. 귀족들은 모두 성채에 갇혀 지냈고 겨울밤은 길었다. 이 귀중한 놀잇감이 없었더라면 모두 권태로 죽었으리라. 모든 성에는 뤼지낭성에 사는 멜뤼진(Melusine, 토요일이면 다리가 뱀으로 변하는 요정) 요정처럼 때가 되면 돌아오는 요정들이 살았거늘 …… 마을마다 마법사나 마녀가 살았고 군주들은 자기들을 위한 점성술사를 거느렸다. 여인들이 제각기 자기들의 경험담을 털어놓을 때, 귀신들린 자들은 들판을 질주했다. 악마가 넘보았던 것은 바로 이들, 혹은 이들이 넘보았던 것은 바로 악마였다."

볼테르《철학사전》

《이광치미 씨('이광치미' 씨는 '미치광이' 씨의 글자 수수께끼이다. 'Oufle'은 'le fou'의 역순)》는 마술서들에 대한 풍자이다. 이 책은 평생 마술과 마법에 관한 책만 읽고 현실을 허구로 사는 한 가난뱅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몽테스팡 후작 부인은 1667년에서 1677년까지 태양왕 루이 14세의 정부였다. 콜베르의 보고서가 그녀의 결백함을 증명하고 있지만 1676년에 처형된 브랭빌리에 후작 부인 사건과 20여 명을 처형함으로써 마무리된 '독살사건(1677~1681)' 때문에 후작 부인은 큰 곤욕을 치렀다.

"새로운 정신은 완전한 승리자였기에 그동안의 모든 싸움을 잊게 하다가 겨우 오늘날에야 그 승리들을 기억하게 해준다. 첫 시작의 고통과 비천하고 조아하며, 야만적이면서 잔인하게도 희극적인 그 시작의 형태들을 상기시키는 것도 쓸모없지만은 않았다. 박해 속에서 여인들이, 불운한 마녀들이 대중들에게 풀어 놓은 그 새로운 정신이란! …… 그녀들은 죽었고, 죽어야 했다. 어떻게? 무엇보다도 자기들이 발전시킨 과학의 진보로 인하여, 의학으로 인하여, 자연주의자들에 의하여, 바로 자기들이 힘써 지키려 한 이 모든 것들로 인하여, 마녀들은 언제나 죽었다. 그러나 요정은 죽지 않는다. 마녀들은 죽지 않는 요정으로 다시 태어나리라. 남자들의 일을 기꺼이 떠맡았던 지난 세기의 여인들은 그 대신 자신들의 고유한 역할을 잃어버렸다. 치료와 간병, 병을 낫게 하는 요정의 역할을 …… 반(反)자연은 빛을 잃었으니 반자연이 기울어 세계에 여명이 깃들일 그날은 멀지 않았다."

쥘 미슐레

《마녀》

마녀의 체포 장면에는 언제 어디서나 똑같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세속재판관들과 마을주민인 고소인들, 그리고 등장하지 않는 때도 있지만 마녀로 지목된 희생자. 그림은 17세기에 영국에서 제작된 삽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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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