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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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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 14. 09:59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04 만인보

 

高銀

1997, 창작과비평사

 

시흥시대야도서관

SB001793

 

811.6

고67만  5

 

창비전작시

 

나는 김홍도의 풍속도에서 씨름꾼이나 엿장수, 매맞는 아이, 엿보는 소악패, 늙은 부부, 장에 가는 농민, 음흉한 양반 등등 거기 살아 있는 백성들의 표정과 동작을 보면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이승의 엄숙함을 느낀다. 이런 점은 중동이나 인도의 벽화 또는 두루마리 그림에서도 느끼며, 특히 브뤼겔의 그림을 보면서는 그가 뚜렷한 의도를 지니고 당대의 잡다한 민중을 모든 가치와 관념과 인식의 중심으로 파악하려 했다는 눈치를 채게 된다. 『만인보』는 마치 들꽃이나 잡초처럼 강산에 번성하고 스러져간 당대인의 모습을 시인 자신의 체험적 스냅사진 속에서 재현하고 있는 '이야기 시'이다. 작은 수백 수천의 조약돌을 모아 바다를 형성화해내듯이 그의 이러한 작업은 서사시가 흔히 놓치게 되는 서정성과 개개인의 자상한 인생 체험을 밑바탕으로 하여, 오히려 시인 고은의 전생애와 동시대를 총체적으로 담아내는 대하 서사시의 성과를 얻게 하고 있다.

- 소설가 황석영

 

신명의 언어로 충만한 시인 고은, 그의 신명의 언어가 그가 이 세상에 와서 알게 된 사람들 하나 하나와 살아서 만날 때 낳아지는 것이 『만인보』 연작이다. 그 만남을 지켜보는 시인의 시선에는 달관의 지혜가 담겨 있다. 그 지혜로 시인은 "사람의 추악까지 포함하는 승엄성"을 포착해내고 민중적 생명력의 온전한 모습을 길어내어 생동하는 한국어의 급박하면서도 여유 있는 리듬을 싣고 있다. 『만인보』의 만남이 거듭할수록 시인의 신명은 더욱더 살아 뜀뛸 것이다. 그가 시의 숨결을 놓치지 않는 한.

- 문학평론가 성민엽

 

고은(高銀)

1933년 전북 군산 출생.

1958년 『현대문학』에 시 「봄밤의 말씀」「눈길」「천은사운」 등을 추천받아 등단.

1960년 첫시집 『피안감성』 간행. 이후 시 · 소설 · 수필 · 평론 등에 걸쳐 100여 권의 저서 간행.

1984년 『고은시선집』 간행.

1986년 『만인보』 간행 시작

1987 ~ 94년 서사시 『백두산』 간행.

제3회 만해문학상, 제1회 대산문학상, 중앙문화대상 등 수상.

 

차례

 

소리 제사 / 구시렁제 / 용남이 / 백운산 고아 / 만물상회 주인 내외 / 반찬 한 가지 / 미륵이 / 홍래란 놈 / 재선이 어머니 / 이몽학 / 미제 분임이 / 목수 동렬이 / 쥐  불 / 이용악 / 안주귀신 / 점백이 누나 / 상술이 장모 / 상술이 막내 / 김춘추와 김유신 / 사기꾼 사상가 / 어린 기섭이 / 쇠딱지 / 어청도 돌 / 사낙배기 쌍동이 어머니 / 개차반 / 잿정지 노파 / 홍대용 / 진자 오빠 / 중뜸 재수네 아기 / 진동이 / 작은당고모 / 수만이 / 백두개 사부인 / 영  조 / 곰보댁 / 문치달이 / 미제 유끼꼬 / 오복상회 며느리 / 방죽가 개똥이 누나 / 종석이 / 김재덕 / 아래뜸 달순이네 저녁 / 권상로 / 수철이 고모 / 김명술이 형제 / 정자나무 / 김절구 / 대보름 / 따옥이 / 상래 아저씨 어머니 / 해망동 / 점백이 / 명산동 유곽시장 용철이 / 계  백 / 군산 요단강 / 미제 김동길 / 웃말 쌍동이 / 쌀봉이 / 당북리 왕고모 / 군산 희소관 / 관여산 앉은뱅이 / 옥정골 각띠영감 / 조병옥 / 눈물단지 / 마정봉 / 두 장님 / 원당리 성구 아저씨 / 개사리 문순길이 마누라 / 문순길이 장모 / 전우 / 선제리 한약방 의원영감 / 세규 동생 / 잿정지 이부자네 딸년 / 독점 순자 / 미제 곰배정 영감 / 미제 진달풍이 / 눈 내리는 날 / 처녀 장사 / 미제 김기만 / 함경도 사람 / 계집종 갑이 / 군산 히빠리마찌 / 백두개 유서방 / 화산리 / 중마름 오의방이 / 오막살이 / 심부름 / 군산 전도부인 / 오성산 냇물 / 황등 순자 / 황등 돌산영감 / 팽  총 / 가사메 사람 / 개사리 문판수 / 화순이 / 북창 정염 / 홍성복이 / 신만순 / 파도소리 / 진규 할아버지 / 큰바람의 노래 / 육촌 금동이 / 나포 고자 / 장군리댁 / 오남이 내외 / 최전무 / 임영자 / 김도섭 영감 / 싸  움

 

미제 분임이

 

이른아침 물지게 지고

땅 보고 가는 분임이

그 눈썹 긴 분임이

 

그 마음속 열 길이나 깊어

그 무엇을 이루는지 알 길 없는 분임이

검정 치맛자락 이슬에 젖어

그 아래 바쁜 발등 젖어

 

물지게 물 하나도 흘리지 않는 분임이

 

미제 유끼꼬

 

해방 뒤에도

국민학교 졸업하고도

옛날 부르던 유끼꼬라 부르는

미제 홍설자

아버지가 똥지게 지고 지나가다가

원당리 부자집 딸년하고 가는 유끼꼬 보고

너 왜 인제 오니

하니

예 학교에서 일 있어서요 하고 얼른 지나쳤다

원당리 동무가

저 사람 누구냐 하니

우리 동네 일꾼이라고 했다

 

그런 유끼꼬 커서 큰아기 되더니

어찌나 그리 잘도 삐치는지

너 밥 먹었느냐고 하면

그럼 밥 안 먹는 사람도 있을까 하고

볼우물 엥하고 파이며

고운 입술 삐죽거린다

 

너 이쁘구나 하면

피이 마음에도 없는 말

침도 안 바른 입으로 하고

고운 입술 삐죽거린다

 

늙은 아버지 담배 다 먹고 일어나며

동네 사람들한테

이왕이면 웃는 낯으로 말해라 하니

이제 나 아이 아니어요 내가 알아서 할 일이어요

어찌 이다지 맵고 차가울까

 

방도는 하나 있다

관우 장비 같은 사내한테 시집 보내어

초죽음 몇번이면

유끼꼬

새 인물 나지

허리에 아지랭이 감기고

치맛자락에 노을 일기 시작하지

 

그 고운 입술

그 눈썹

그 부푼 가슴 녹은 땅 뚫고

솟는 새 숨인가

아리아리한 가슴 약 든 가슴

똥지게질로 키운 큰아기 가슴

 

5월 단오날 그네 솟아 어지러워라

그 아래에서도 어지러워라

 

미제 김동길

 

동네 돈만 걷었다 하면

덜컥 삼키고

동네 돈만 오면

용케 알아

덜컥 삼키는 미제 김동길이

어찌나 얼굴 번들번들거리는지

늘 팔자 펴진 신수였다

세수할 때도

반 시간이나 걸릴 때도 있는 김동길이

닦는 데 다시 닦고 닦고

수건질도 여러 번이다

제 어머니 환갑에는

군산 기생 열 명이나 불러다가

걸판지게 잔치 벌였는데

제 아우가 돈 50전 꾸어달라고 하면

이놈아 돈이란 꾸는 것이 아니라

버는 것이다 어쩌구 돌려보낸다

과연 미제 놀부 김동길이

3년 전인가 횡령사취라 해서

군산경찰서 지하실에 쇠고랑 차고 들어갔다가

곧 풀려나

콧대 더 높아졌다

어디 가나

무엇 먹을 것 없나 냄새맡았다

동네에 무슨 일 생겨나면

아니나다를까

어디 있다가

용케 나타난다

요긴한 때는 꼭 나타난다

산에서 똥 싸면

왱 하고 날아오는 똥파리인지라

 

미제 곰배정 영감

 

성이 곰배정가라

곰배정 영감으로 통하는

미제 웃말 정동필이 영감

수염끝이 배꼽까지 닿을 영감

그 헌걸찬 허위대에

목소리는 새된 소리다

꼭 부랄 발린 사내 목소리

 

금방 무너질 듯한 사랑채지만

기와집이라

조심조심 쓰는 기와집이라

아직도 덕 있어 먹을 것 흔하다

부자가 망해도 3년 먹을 것 있다더니

아직도 먹고 마실 것 흔하다

 

술 한잔 입에 안 대고

담배연기 모르는 곰배정 영감인데

그러나 종중일에는 앞장 서고

종중 일가

먼 일가 두루 보살핀다

한 달에 한 번씩 국거리 한 치룽씩 돌리기도 한다

 

일가뿐 아니라

남남한테도 돼지고기 내장 사다가 돌리기도 한다

떡했다 하면

몇 말씩 해서 돌리기도 한다

옛날 덕행 본받는지

웃말 가난뱅이 굶는 날

밤중에 그  집 단지

보리쌀 채워놓고 오기도 한다

 

핫옷 한 벌 없는 집에는

헌 솜 갖다 놓는다

그 솜 틀어다가

옷에 넣든지 이불에 넣든지 하라고 갖다 놓는다

 

그러던 곰배정 영감

항상 불그데데한 영감

물 데워라 해서 목간하고

손톱 발톱 깨끗이 깎고 나서

다음날 새벽 그대로 세상 떠났다

 

곰배정 영감 마누라도 손이 커서

광목 40마씩 나누어 주어

동네 사람들 복 입게 하고

초상집 일 돕는 아낙들도

광목 2마씩 행주치마 해 입혔다

 

그 곰배정 영감 상여 한번 느려터져

미제 선제리 사이 5리를 하루 내내 걸렸다

유소보장 펄럭이며

언제나 그 자리 있는 듯했다

지나가던 사람도 멈추고 어쩌다 자전거도 멈췄다

선제어 너머

대기마을 수성산 기슭에

큼지막이 무덤 쓰고 난 뒤

비가 알맞게 왔다

촉촉이 오다가 그쳤다

 

그 영감 떠 난 뒤 10년 동안

농사꾼들 비 오는 날 놀 때는

제기랄것 곰배정 영감이나 살아 있으면

고깃근이나 실컷 얻어먹을 텐데

제기랄 그놈의 곰배집 영감이나 살아 있으면

이런 날 오리지떡이나 얻어먹을 텐데

 

미제 진달풍이

 

괴팍한 대가리에서

기계충 떠나지 않는 달풍이

학교 가서도

선생한테 미움만 받는 달풍이

아이들한테서도

찐 감자 얻어먹지 못하는 달풍이

선생한테 혼나고

변소에 가 엉덩이 까 내리고 앉아

똥도 안 싸면서

실컷 울고 나오는 달풍이

 

1년 뒤 한 학년 올라가자

기계충 없어졌다

방귀 뀌는 버릇도 없어졌다

누더기옷도

새옷으로 바뀌었다

 

광산 갔던 아버지가 돌아온 것이다

 

미제 김기만

 

미제 부자 김재구 영감의 큰아들 기만이

제 앞으로 떼어준 논 2만 평 있고

밭 5천 평이나 있는데

그 논밭 날려버리고

다시 본가에 의지가지 살아간다

 

얌전하디얌전한 그의 어머니 아금발라

아들 기르는 데도

온갖 정성 다했건만

부자집 자식 사람 되기 어렵다

 

진작부터 양복 마춰 입고 나서서

군산 선술집 떠돌며

실컷 놀다가 온다

지친 몸으로 풀린 눈으로 온다

사흘 만에 엿새 만에

돈 떨어져 온다

 

그런 기만이 조용히 바라보는 사람 있다

바로 재구 영감의 서자 기선이다

그는 작은댁 소생인데

동네 사람 칭송이 자자하다

 

아무리 노라리판에 미친 기만이건만

제 배다른 동생 기선이만 보면

술이 화닥닥 깨어버린다

고개 돌려 속으로만 퍼부어댄다

이 첩의 넌 자식놈아 네가 나 비웃고 있지

 

그러나 기선이 고요한 얼굴

바람 한 점 안 받는 물 같은 얼굴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