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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 29. 16:51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12 고대 로마를 찾아서


클로드 모아티 지음, 김윤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30


082

시156ㅅ  25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025


로마, 이름만 들어도 그 찬란함과 영광이 눈앞에

그려지는 제국, 콜로세움, 판테온, 트라야누스 기념주는

20세기란 장구한 세월을 견디고 굳건히 살아남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간의 탄성을 자아낸 것은

바로 로마의 조각상들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육체와 함께

그 순간의 섬세한 감정까지 붙잡아 놓은 듯한 예술의

극치였다. 로마의 문화와 예술은 미를 동경하는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경지이다.


첫째 선이 있다.

기념주, 궁륭천장, 개선문에 보이는

순수하고 힘있는 선은 수학적 엄밀성을 수반한다.

둘째 색이 있다. 분홍색, 황토색, 담황색

건물 외관과 붉은 색, 녹색, 푸른색, 실내벽화,

그리고 대리석 조각상이 있다. 신, 영웅,

역사적 인물, 전능한 황제, 선, 색, 대리석 ---

이것은 로마라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몸을 지닌 세 가지 양태이다.

곡선과 직선에 의한 고대 로마의 부활은 엄청난

규모의 고고학적, 건축학적 계획사업이었다.

이 사업에서는 때때로 정확성보다는 미를 추구하는

것이 더 매력적인 일로 여겨지기도 했다.





A la recherche de la Rome antique


차례


제1장 로마, 영원의 도시

제2장 인문주의자의 시대

제3장 개인적 소장품에서 예술사로

제4장 나폴레옹 지배하의 로마

제5장 이성의 시대

제6장 하나의 신화에서 다른 것으로

기록과 증언

그림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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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아티 Claude Moatti

클로드 모아티 박사는 B. C. 2세기에서 A. D. 1세기에 해당하는 로마 공화정 말기와 로마 제정 초기에 일어났던 정치사상과 문화적 위기를 연구하고 있다. 고대 로마 발굴사와 로마 고고학의 '창안'에 관한 연구를 새롭게 한 그녀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연구 가운데 최초의 발견물들을 제시하고 있다.


옮긴이 : 김윤

1963년생.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및 동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하였다. <중세시대 영국과 프랑스의 도시> <프랑스 혁명의 창조> <계몽사상의 실천> <봉건제의 위기> 등의 논문을 다수 번역하였다.

 

제1장

로마, 영원의 도시

 

수세기에 걸쳐 여러 번 파괴되고 파묻히면서도, 로마는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영원의 도시 -- 위대한 지적, 정치적, 예술적 수도 -- 는 비록 전설의 베일이 그 폐허를 덮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았다.

14세기 작가인 파치오 데글리 우베르티의 《디타몬도》는 가상 여행을 기록한 것이다. 파치오와 안내인인 고대 지리학자 솔리누스는 강둑에서 울고 있는 늙은 여자를 만난다. 그녀는 의인화된 로마이다. 그녀는 시인에게 자신의 역사와 지난날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12세기에 황제와 교황간의 투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실베스테르 교황에게 제국을 바쳤다는 전통적 믿음 -- 이것은 교황에게 정치적 힘을 부여하는 기반이 된다 -- 이 되살아났다. 12세기에 성 실베스테르 예배당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들은 이 사건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그림에서 콘스탄티누스는 교황에게 왕관을 바치고 있다.

17세기에 동판 인쇄된 막시무스 원형극장(위), B. C. 1세기 말에 세워진 매장 기념물 메타 레미(가운데). 16세기에 동판 인쇄된 트라야누스 기념주의 횡단면(아래).

판테온의 돔에서 하늘을 향해 열린, 지름 9m의 구멍(위). 17세기의 그림에 나타난 판테온 정면도(아래).

마에르텐 반 헴스케르크의 그림들은 카를 5세가 로마를 약탈하고 난 이후인 1532년과 1536년 사이에 제작되었다. 이 예술가는 점점 정확하고 사실적인 관찰자가 되었다. 그는 기념물들의 옛 모습을 추측하지도 않았고 개작하여 날조하지도 않았다. 16세기에 콜로세움은 실제로 이와 같은 모습이었다.

순례자들에게 로마는 세계의 중심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아인지델른 여행안내서》에 나오는 아래의 지도는 도시를 완벽한 원으로 그리고 있으며, 가장 정평 있는 코스들을 보여 주고 있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왼쪽 위에 있는 바티칸에서부터 강을 건너 아래족의 라테란까지 가는 코스였다.

니콜라 푸생이 그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조각상.

 

"교황의 궁전과 라테란 궁전 앞에 청동 조각상이 있다. 이 거대한 말에 탄 사람은 몇몇 사람들은 테오도리크라고 생각했지만 로마인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라고 믿었다. 하지만 로마 쿠리아의 추기경들과 성직자들은 그를 마르쿠스나 퀸튜스 퀴리누스로 생각했다. 말 탄 사람은 꼿꼿하게 앉아 오른손으로 백성들을 인도하고 왼손으로는 고삐를 쥐고 있다."

그레고리우스 학장

중세의 어떤 사람들은 콘스탄티누스의 거대한 두상이 태양신을 나타낸다고 믿었다.

14세기 이탈리아 시인인 페트라르카(위,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 그림)는 후세에 고전문학을 부활시킨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처음에 콜라 디 리엔초(아래)는 고대의 정치형태들을 부활시키려는 열망을 구현했다. 후에 그는 독재자로 변했고 민중봉기가 일어나 죽음을 당했다. 그는 3일 동안 거리를 끌려다녔다. 그러다가 두들겨 맞고, 돌팔매질당하고, 사지를 절단당한 다음에 화형당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게 제국에 대한 권한을 부여하는 1세기의 청동판은 1346년 콜라 디 리엔초가 라테란의 바실리카 계단에서 발견한 것이다.

 

제2장

인문주의자의 시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탐험하고 있을 때 예술가, 학자, 군주, 모험가, 교황은 과거 영광의 잔해를 찾아 열심히 로마땅을 찾아 다녔다. 로마는 약탈당하고 있었다. 명문, 지도, 도면들 속에서 생명력을 되찾은 로마는 실질적으로 다시 건설되었다 -- 모두 동시에.

 

독일 고고학자인 요한 요하임 빙켈만에 따르면 라오콘 군상(이것이 발견된 황금궁전 안)은 "가장 위대한 아름다움이 가장 큰 고통 속에서 태어나는 예술적 경이이다."

로마에 대한 세밀축소 지도는 림부르 형제들의 <베리 공의 가장 풍요로운 시절>에서 나온 것이다(15세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상 위에 있는 거대한 조각상의 손과 머리는 라테란이 교황들의 정의와 정치적 권력의 장소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15세기 말과 16세기 초에 이 청동 복제품들은 카피톨리누스 언덕으로 옮겨졌는데, 이것들은 지금도 남아 있다. 네 개의 세밀화들은 15세기의 무티네시스 사본에서 나온 것이다.

몬테 테스타치오는 도자기 파편들로 이루어진 언덕으로 고대에 상업지역이었음을 보여 준다.

로마의 상징들은 가상의 기념물들과 고대 유물들 사이에 놓여 있다. 두 개의 건물 -- 정확하게는 성 베드로 성당과 성 안젤로성(城) -- 앞에 있는 공을 받쳐 든 오벨리스크(위)와 도시 성문, 다리, 성 안젤로성(아래).

원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능묘였던 성 안젤로성은 거대한 아우렐리우스 성벽으로 흡수되었던 3세기에 요새로 바귀었다. 이에 대한 수비는 16세기까지 계속해서 강화되었다. 1527년에 로마가 약탈당하고 있을 때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바티칸과 연결되어 있는 요새화된 회랑을 통해 이곳으로 피신했다.

이탈리아 인문주의자인 율리우스 폼포니우스 라에투스(위)의 적수인 교황 바오로 2세(아래).

때때로 고대 문헌 원본들과 명문들은 서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528년에 발견된 청동판은 갈리아인을 대표해서 클라우디우스가 로마 원로원에서 연설한 것을 재현한 것이다. 1세기 후에 타키투스는 그의 《연보》에서 이 연설에 대해 언급했다.

1506년 라오콘 군상(아래)의 발견은 모든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고대 예술의 걸작이라고 간주한 이것을 열심히 모사했다. 16세기 중반의 그림(위)은 페데리코 추카리가 그린 것이다. 최근에 로마 남쪽 스페르론가 발굴은 라오콘 군상이 본래 로마 조각상이 아니라 청동으로 된 헬레니즘 작품의 대리석 모사품임을 암시하고 있다.

라파엘로가 그린 교황 레오 10세.

아폴로 벨베데레. B. C. 4세기 그리스 조각상의 로마 복제품.

로마는 16세기 중반에 자그마치 90개나 되는 사설 박물관을 보유하고 있었다. 울리세 알드로반디의 《로마시의 고대 유물들》(1576) 같은 당시의 도서목록들을 보면, 고대 예술을 수집하고 궁전을 박물관으로 전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던가를 이해할 수 있다. 마에르텐 반 헴스케르크가 그린 궁전 안뜰에서 우리는 고대 조각상들을 강조하기 위해 근대 건축술을 활용하려 한 시도를 엿볼 수 있다.

하드리아누스 별장 수채화.

하드리아누스 별장에서 비둘기 모자이크 같은 동물 모자이크가 많이 발견되었다.

16세기 중반에 로마 지도들이 많이 제작되었다. 여기에서 복제된 피로 리고리오의 고고학 지도(1551)는 요새화된 로마 서쪽의 산등성이인 야니쿨룸에서 바라본 도시에 대한 일종의 항공관측 형태를 띠고 있다. 지도에서 팔라티누스 언덕, 포룸, 카피톨리누스 언덕, 고대 기념물의 잔해와 같은 중요한 장소들을 찾을 수 있다.

조르조 바사리가 프레스코 화법으로 그린 성 베드로 바실리카 건물.

16세기 로마 지도자들은 유적 보호와 근대화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교황 식스투스 5세(재위 1585~1590)는 자신의 공식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와 함께 고대 유적들을 희생시켜서 전망을 넓게 트는 건설 계획을 세웠다.

《바티칸의 오벨리스크 운반에 관하여》 권두화에 있는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

1536년경 성 베드로 바실리카를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1590년 5월에 완공되었다. 점차 근대 로마가 건설되고 있는 중이었다.

네로의 원형극장에 있는 오벨리스크를 내리는 데 100명의 일꾼들이 6일 동안 일했고, 발판을 만들고 동물을 이용해서 이것을 옮기는 데 꼬박 한 달이 걸렸다. 이 사건을 묘사한 위 그림은 당시에 그린 것이다.

결국 1586년 9월 10일에 오벨리스크는 숨을 죽이고 있는 군중들 앞에서 성 베드로 성당 광장에 세워졌다. 수많은 받침돌이 높이 25m가 넘는 모놀리스(monolith, 돌 하나로 만든 기둥)를 떠받쳤고, 네 마리의 청동사자가 주위를 둘러쌌다.

 

"나는 내 머스켓총으로 좀더 빽빽하고, 두텁게 얼겨붙어 있는 접전지역을 조준했다. 그리고 다른 군인들을 지휘하고 있는 오른쪽 가운데에 있는 군인을 겨냥햇다. 재빨리 알렉산드로와 체키노 쪽을 돌아보면서 상대편에서 발사하는 총탄의 섬광을 피할 수 있는 요령을 가르쳐 준 다음 발사명령을 내렸다. 우리가 각각 두 발씩 쏘고 난 뒤 조심스럽게 벽을 살펴보니 적들은 혼비백산한 것 같았다. 우리가 쏜 총에 부르봉 공작이 죽은 것이다."

벤베누토 첼리니

헴스케르크가 묘사한, 참패의 와중에서 죽음을 맞은 부르봉 공작 카를.

로마 약탈에 대해 알려진 당대의 진술은 없다. 그 당시 전투를 묘사한 이 그림은 나중에 그린 것이다.

안토니오 보시오 《지하 로마》

 

제3장

개인적 소장품에서 예술사로

 

18세기에 로마와 유적들은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하나의 유행, 예술가들에게 인기 있는 주제, 영원히 기억에 남는 성지순례의 목적지로 자리잡았다. 고대 유물에 대한 광적인 열기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부유한 수집가들은 박물관을 건립하기 시작했고, 독일 고고학자 요한 요아힘 빙켈만은 예술사의 기초를 마련했다.

로마 조각상들의 잔존물은 18세기 화가들에게 인기 있는 주제였다. 미카엘 스웨르츠의 <작업실>.

복제가인 바르톨로메오 카바체피(위)는 본래의 양식, 시대, 재료 등을 고려하는 새로운 복제방법을 완성하여 그것들의 기원을 복원하였다. 요한 조파니가 그린 <자신의 갤러리에 있는 찰스 타운리>(아래), 자크 사블레가 그린 <고대 유물 애호가 방문>(가운데).

작가들이 고대 문헌을 모았듯이 예술가들도 고대 조각품과 회화들을 수집했다. 16세기의 예술사가인 조르조 바사리는 한 조각가의 집을 보고 "그 모두는 경이로운 것들로 꽉 차 있었다."고 했다. 이러한 고대와 근대의 물건들은 대리석, 청동상, 회화를 망라한 것이다. 고대 예술은 모델분만 아니라 위선을 내세우는 데도 한몫 했다. 이런 경향은 17세기까지 지속되었다. 교황과 군주들은 가장 뛰어난 소장품을 얻기 위해 경쟁했다. <코르넬리스 반 데어 게스트의 작업실>은 빌렘 반 하에흐트가 그린 것이다.

오늘날 보르게제 별장 부지는 로마에서 가장 큰 공원이고, 카시노는 가장 훌륭한 박물관 중 하나이다.

스키피오의 무덤. 조반니 바티스타 피라네시의 《로마의 고대 유물》에 나오는 판화. 1756.

아우구스투스가 세운 성 세바스티아누스 성문 밖 아피아 가도에 있는, 해방된 사람들의 납골당은 수천 개의 유골단지 벽감이 들어 있는 세 개의 인접한 큰 방들로 이루어진 커다란 건축물이었다. 피라네시의 판화는 이 무덤을 발견했던 사람이 느꼈던 엄숙함을 전해 주고 있다. 19세기에, 특히 이 지역에서 다른 납골당들(유골단지를 위한 벽감이 있는 지하실)이 아피아 가도를 따라 발견되었다.

하드리아누스 능묘의 주변을 재현한 조반니 바티스타 피라네시의 조감도.

피라네시 시대 당시에 캄포 바치노로 알려진 포룸은 파묻혀 있던 고대 유물의 파편이 발견되는 지역이었다.

시간이 파괴한 콜로세움

콜로세움은 무너졌고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다. 식스투스 5세는 이곳을 양모공장으로 바꾸려 했었고, 다른 사람들은 예배장소로 사용하려 했다. (심지어 이곳에서 강신술(降神術) 모임을 열기도 했다.) 그러다가 1730년에 지진으로 결정적인 손상을 입었다.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나무로 만든 담장을 기둥 사이에 채워 넣게 했는데, 카날레토가 그린 그림에 이것이 보인다. 꼭대기에 보이는 식물들은 실제 존재했던 것이다.

신전이 교회로

테베레 강가에 위치했던 이 두 개의 공화정 시대 신전들은 교회로 바뀌었기 때문에 보존될 수 있었다. 운명신의 신전은 산타마리아 에지치아카로 불렀다. 둥근 헤라클래스 신전은 성 스테파노가 되었고, 이후 1560년에 산타 마리아 델 솔레가 되었다. 이어지는 세기 동안 두 신전은 근대 건축물들 속으로 흡수되었다.

고대 유물의 파편들

<고대 로마의 화랑>은 로마의 프랑스 대사관저 장식가인 조반니 판니니가 그린 것이다. 우리는 이 그림에서 당시 가장 위대한 주제인 관점의 대중성, 장식, 고대 유물 수집, 유희감각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왼쪽에서 <파르네세 헤라클레스>와 <죽어 가는 갈리아인>, 오른쪽의 <스피나리오>(발에서 가시를 빼고 있는 소년)와 <라오콘 군상> 같은 조각들을 확인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기념물들 중에는 왼쪽에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베스파시아누스 신전의 세 기둥과 위쪽에 판테온, 오른쪽에 콜로세움이 있다.

요한 요하임 빙켈만에게 순백색의 조각상들은 그리스 예술의 '고귀한 단순성과 고요한 위엄'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1717년에 구두공의 아들로 태어난 빙켈만(위)은 신학적이고 인문주의적인 연구를 추구했다. 신화와 고대 예술에 대한 정열은 그를 로마로 이끌었다. 그는 헤르쿨라네움, 폼페이, 그리고 파에스툼의 발굴지를 방문했고, 자신을 사서로 고용했던 알바니 추기경의 친구가 되었다. 그는 1768년에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암살되었다.

 

제4장

나폴레옹 지배하의 로마

 

"교황은 로마에 파견될 사절단이 선정한 100점의 회화, 흉상, 항아리, 조각상들을 프랑스 공화국에 인도해야 한다. 이중에는 사절단이 선발한 500개의 필사본들뿐만 아니라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있는 유니우스 부루투스의 청동 흉상과 마르쿠스 부루투스의 대리석 흉상 두 점이 포함될 것이다."

볼로냐 협약 제8항

나폴레옹 정부는 많은 대리석 파편과 경화를 획득할 수 있는 발굴작업을 지휘했을 뿐만 아니라 -- 허버트 로버트가 그린 그림에 나타나 있다 -- 콜로세움을 청소하고 복원하는 데도 끊임없는 관심을 기울였다.

고고학자인 엔니오 퀴리노 비스콘티 자작.

고고학자 콰트르메르 드 퀸시.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교황 피우스 7세의 초상화.

피에르 앙투안 다뤼 백작은 나폴레옹의 로마 대리인이었다.

티투스 목욕탕은 1506년 라오콘 군상이 발견되었던 트라야누스 목욕탕에 덮여 있었다. 새로운 보물을 찾아서 더 많은 발굴작업이 이루어졌다. 마침내 트라야누스 목욕탕의 기저부를 발견했다.

트라야누스 포룸 발굴과 다른 프로젝트들을 도와 주었던 건축가 주세페 발라디에르.

젊은 프랑스 건축가 J. F. 메나제는 안토니우스와 파우스티나 신전 발굴을 주도했다. 그는 기둥들의 기저부와 건물 위까지 뻗은 계단들을 찾아냈고, 신전이 이상적으로 복원된 상태를 그려 냈다.

 

제5장

이성의 시대

 

19세기에는 포룸, 아피아 가도, 카타콤 같은 중요한 학술적 발굴들이 이루어졌다. 또한, 르네상스 시대 이래 때때로 무질서하고 성급한 방식으로 축적되었던 자료들 - 원본, 명문, 유물 - 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

<제1대문의 아우구스투스>에서 황제는 고요한 위엄을 발산하고 있다. 그의 가슴판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고, 꼭대기에는 하늘을 나타내는 턱수염 난 노인이 있다. 왼쪽에 날개 달린 새벽과 일출의 영혼이 뒤따르는 태양 전차가 있다. 아래 부분은 지구, 아폴로, 아르테미스이다.

프레스코화에 나오는, 담장이 처지고 나무와 새들이 가득 찬 리비아 저택의 정원은 로마 회화에만 독특하게 존재하는 매력과 신비스런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아피아 가도에 있는 이 무덤은 가장 자주 그림에 등장한다. 이것은 오랫동안 황소머리로 불렀다. 매장기념물들에 대한 전통적인 장식인 프리즈(frieze, 엔타블라처 중 아키트레이브와 코니스 사이에 있는 소벽의 띠 모양 장식) 장식이 황소머리이기 때문이다.

교황 피우스 9세가 '교황들의 지하예배당'을 방문하고 있다.

 

제6장

하나의 신화에서 다른 것으로

 

20세기에 고고학은 현대로 접어들었고 그 방법론을 찾아냈다. 고립된 발굴과 공화정시대와 제정시대로 제한되었던 발견의 세기가 끝난 이후, 초기 로마--왕정 로마--가 땅속 깊은 곳에서 솟아올랐고, 차츰 그 기원의 신비가 벅겨지기 시작했다.

건축가로 훈련받은 보니는 특히 지질학과 건축에 관심이 많았다. 그보다 이전 시기의 지지학 저자이자 고고학자들은 야외작업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문헌들에 의거하여 발굴작업을 했다. 보니는 직접 삽과 곡괭이를 들고 실질적인 고고학의 개척자가 되었다. 동료들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고고학이 유적지의 역사를 기원에서부터 재현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 목표는 오직 층위학(체계적으로 서로 다른 층들을 발굴하는 것)을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대 사람들은 보니의 경험에서 아무것도 얻어 내지 못했다. 층위학적 방법은 1960년대가 되어서야 체계적으로 유적지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콜로세움의 재구성.

고대 로마의 모형.

수채화법으로 재현된 로마 포룸.

 

재발견된 위대함

1937년 9월 23일에 '로마의 화신 아우구스투스 전시회'가 민족도로에 있는 전람회장에서 열렸는데, 특히 사진전시와 원형경기장, 다리, 목욕탕의 축소모델들이 눈길을 끌었다. 도시의 설계도는 란치아니의 '도시모형'을 근거로 제작된 것이었다. 전시된 자료들은 1942년 이디오피아 정복과 정권탄생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개최된 로마 국제박람회에서도 다시 사용되었다. 로마 남쪽의 모든 지구들을 이 전시를 위해 비웠으나, 제2차 세계대전과 파시즘의 패배로 작업이 중단되어 1950년대가 되어서야 완성되었다. 로마 문명 박물관은 1937년 전시회 때 사용되었던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다.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오스티아 극장은 1930년대에 복원되었다. 귀빈석과 반원형의 무대 뒤로 이전에 아치형의 기둥이 늘어선 현관이 있던 곳에, 이 세 개의 가면장식을 포함하여 대리석으로 된 건축 조각품들이 설치되었다.

로마의 문장(紋章)은 마르스신의 신성한 동물 암늑대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 늑대는 로마의 건설자이자 마르스의 아들인 로물루스와 레무스, 순결한 처녀(영원한 순결을 맹세하고 여신의 제단에서 성화를 지키는 여섯 명의 처녀 중 하나) 레아 실비아를 구했다.

 

B. C. 5세기에 유래한 청동상 암늑대에는 원래 쌍둥이가 없었다. 쌍둥이들은 15세기에 조각가가 집어 넣은 것이다. 원래의 장소는 알려져 잇지 않지만, 단테는 이 조각품을 라테란 궁전에서 보았다. 이것은 1471년에 카피톨리누스로 옮겨졌다.

포기우스로도 알려진, 역사가인 잔 프란체스코 포조 브라촐리니.

셉티조니움은 3세기 초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건설하였다. 16세기에 교황 식스투스 5세가 완전히 해제할 때까지 이 건물은 대부분 온전하게 서 있었다.

피라네시의 카에칠리아 메텔라 능묘 도판.

"콜로세움이 건재하는 한 로마는 건재하리라. 콜로세움이 무너질 때 로마도 무너지리라. 그리고 로마가 무너질 때는--전세계도." 바이런의 <차일드 해럴드(바이런의 장편 서사시)>(1818)에서.

피라네시의 《로마 유적》 제2권에 실린 권두화는 그의 매장건축물, 특히 아피아 가도의 무덤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음을 보여 준다. 여기 있는 것은 상상을 통해 재구성한 것이다.

판테온은 119년과 128년 사이에 건립되었다. 이것은 오늘날 로마에서 가장 잘 보존된 고대 기념물이다.

미셸 드 몽테뉴.

스탈 부인.

복원된 고대 유물이 19세기 로마 관광객을 환영하고 있다.

벤베누토 첼리니.

샤를 드 브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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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