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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3 만인보 


高銀

2006, 창작과비평사

 

 

시흥시대야도서관

SB001796


811.6

고67만  8


창비전작시


나는 고은의 『만인보』를 읽으면서 인간에 대한 종교적 연민을 배운다. 나는 사람의 삶의 형태에 따라서 어느 쪽인가 하면 사람과 미움의 마음이 분명한 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찌들어진 운명의 땅에 태어나 온갖 삶의 형태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사라져간 인간들에 대해서 사랑이나 미움보다 연민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다만 『만인보』를 읽음으로 말미암아서 나 자신이 인간과 삶에 대해서 더욱 경건해지는 것만으로도 『만인보』와 그 작가 고은에 대해서 감사한다.

- 한양대 교수 ·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이영희

 

일찍이 발자끄는 빠리의 호적부와 경쟁하겠다고 호언히였다. 뛰어난 소설가라면 모름지기 이만해야 한다. 그런데 한 시인이 있어 우리 민족의 호적부와 겨루겠다는 서원(誓願)을 세웠다. 고난으로 축복받은 이땅에서 살아갔던 평균적 인물들의 눈부신 삶과 탁월한 역사적 개인들의 평균적 삶의 자태를 교직한 『만인보』에서 시인은 문득 일천 강물 위에 은빛 도장을 찍는 달빛이 되어 독자들을 저 망망한 민중사의 바다로 인도한다. 소도둑과 혁명가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깨달음을 백과사전적 전개 속에서 추구하는 『만인보』는 진실로 민족서사시적 위엄을 스스로 갖추고 있다.

- 문학평론가 최원식



고  은  高  銀

1958년 처녀시를 발표한 이래 시 · 소설 · 평론 등에 걸쳐 130여권의 저서를 간행했다. 서사시 『백두산』『만인보』와 『고은시선집』 1 · 2 『고은전집』(전38권)을 출간했다. 현재 세계 시아카데미 회원(한국대표)이다.


차례


머리노래 금강 / 이름 몇 백 / 외할머니 오랜 동무 / 탁  류 / 장항 부두 1 / 순동이 / 장항 기생 / 굴뚝님 / 대천역 / 장항 부두 2 / 대천 이문구 / 나물장수 성산댁 / 봉림이 / 읍장 신중헌 / 짝 / 옛 외가 / 순남이 / 지서방 / 이관구 / 우영감 / 유재필 / 재필이 아버지 / 재필이 어머니 / 대천장 할망구 / 비인만 어부 / 구멍가게 나길섭 / 유영모 / 대천 노창길이 / 화양 정순이 / 행  인 / 솔리 추씨 / 송내 처녀 / 어린 거지 / 삼  절 / 은옥이 / 김돈중 / 제련소 소장 / 대천장 소장 / 대천장 임씨 / 인  월 / 대천 박형사 마누라 / 고봉산이 / 고서방 / 마서 나상하 / 화냥년 옥분이 / 나영순 / 복산이 아범 / 길  례 / 고  종 / 윤서방 / 삼남매 / 청라 도령 우활식 / 석봉이 / 복남이 누나 / 고광순 / 고광훈 / 본마누라 / 김수관씨 / 팔룡이 / 팔룡이 마누라 / 그  손 / 전상국 / 철  새 / 승철이 할머니 / 임  화 / 대복이 아버지 / 봉  자 / 두  로 / 다홍치마 / 뒷산 도사 / 서장옥 / 대천 호박 / 이한종 어르신 / 사모님 / 아기씨 / 머슴 석주 / 송광사 사미 / 귀먹짜가리 / 김학기 / 복산이 에미 / 상거지 노인 / 정순이 / 청라 배창덕 / 창덕이 마누라 / 채완묵이 / 대천장 여장군 / 여서방 / 창조 할아버지의 기절 / 창조 누나 / 박성춘 / 윤덕산 / 덕산이 마누라 / 그 움집 / 우군칙의 머리 / 대복이 아버지 / 대복이 어머니 / 부월이 / 앵  무 / 산업과장 / 보령군수 / 심봉사 / 심  청 / 부  채 / 최건달 전처 / 최건달 / 창호 큰어머니 / 귀동이 아버지 / 성삼문 / 창덕이 아들 형제 / 정  자 / 파리 부자 / 똥통쟁이 / 김암덕 / 신석공이 / 신석공이 마누라 / 신석공이 딸 / 신석공이 어머니 / 김주사 / 이먹고노장 / 대천동국민학교 돈선생 / 비인 염생원 / 삼거리 주모 / 상사병 / 화양 우희만 부부 / 원남이 아비 / 세 젊은이 / 권  율 / 만호 마누라 / 얌전이 / 장항 고진모 / 이발사 주백이 아비 / 주백이


순동이


흐린 물 금강 하류

장항제련소 굴뚝

그 굴뚝의 기나긴 연기 바다로 이어진다

누가 말했던가

조선에서 제일 적막한 장항읍 거리

이쪽에서 저쪽까지 한번 걸어가면 끝나는 거리

그 거리 어중간 국밥집 남창옥

술손님 밥손님 기다려보아야

하루 서너 패로

더 올 사람 없는 남창옥

한밤중 남포불 심지 줄여

불빛은 남겨두어야지

그 집 중노미 하루 하품 열 번

나이 서른이 넘어도

부여 고란사 중인가 땡초인가

계집을 흙 보듯 하고

그저 시키는 일

술청 닦고 쓸고 물 길어다 부을 따름


이 사람이 장항 토박이

이순동이

한산 이씨 순동이

옛날 옛적 고려 이색 이어서

정승 이산해 후손인데

이제 상밥집 중노니 신세라

제 고조할애비가 남인이면 어떻고

제 증조할애비가 농풀월이면 어떻단 말인가


남창옥 주인 마누라

불여우 마누라

이 닦을 때 소금 많이 쓰지 말라 하자

아예 순동이

모래 파다가

모래로 이 닦고 르르르르 헹구어내는데


그런 남창옥 잘되는 일 별로 없다

키우던 개도 슬슬 나가버린다


봉림이


그렇게 달밤에 박꽃 같더니

열다섯 살에

그 봉림이 단발머리

고무줄 줄넘기 멈출 줄 모르는

열다섯 살에


차령산맥이 강원도 오대산에서 비롯하여

원주 치악산으로 올라섰다가

그것이 경기 충청 서운산 흑성산 지나

차령 넘으면

청양 두메 이루다가

이윽고 보령 서천 들판을 건너뛰어

장항제련소 우뚝 솟아

그만 바다로 빠져버린다

그러나 거기서 끝장내지 못하고

다시 한번 솟아나

고군산 선유도 장자도 되어

거기에 동백꽃도 피는데


장항 선창가 봉림이 시집갈 때

시집가기 전날 밤

싱숭생숭

제련소 굴뚝에 대고

장항 선창가 고물상 딸 봉림이

얌전한 봉림이

제 아버지 친구가

서천군 문산면 봉림산 이름 따서

이름 지은 봉림이

다른 것은 그만두고

부디 부디 여드름만 없애주시오 하고 빌며

아버지 술 끊게 해주시오 하고 빌며

어둔 밤 눈물 흘리며 빌고 빌었다

그 여드름쟁이 봉림이


강바람인지 바닷바람인지 비단 같은 밤


순남이


금강 개펄 개흙 범벅으로

변변치도 않은 바지락 캐는 순남이

아버지가 글 배우면

화냥년 된다고

학교 보내지 않아

바지락 캐는 순남이

제 또래 아이들

책보 메고

딸깍딸깍 필통소리 내며

학교 파하고 오는 것 보아도

부러운 생각 눈꼽만치도 없이

개펄 비탈에 맨발 푹 빠지며

바지락 따개비

졸따개비 캐는 순남이


소원 하나

고군산 선유도

그 섬에 가보는 것

석양머리 불타는 바다 바라보며

어느새 저 혼자 캄캄한 처녀가 되어버린 순남이


은옥이


언제나 빨간 두 볼의 은옥이

1 · 4후퇴 때

경기도 연천에서 피난길 나섰는 데

의정부 지나

그만 부모가 폭격으로 죽어버리고

어린 은옥이 하나 살아나

제 이름 송은옥이만은 용케 붙들고

한강 건너

수원이라

천안이라

홍성 예산이라

이렇게 바닷가 대천까지 흘러오며

어느덧 시악시 꼴 박혔다

그 모진 고생으로

어설픈 초다짐밖에는

밥 한 끼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

어느덧 무거운 시악시 꼴 박혔다

대천 복숭아 과수원 조만석이네 양녀로 들어가

키는 작으나

그 몸집 오동통하고 상냥하고

과수원의 고된 일

남정네 두 품이나 해내고


수문리 동네사람들

아이고 은옥이 좀 보아 은옥이 좀 보아

하고 이르던 시악시인데

그러나 이 고장이

충청도 잔반 땅이라

아무 막대기 하나 선 데 없이

그저 떠돌이로 온 은옥인지라

누구도 선뜻 데려가지 않았다

그런 신세라 워낙 은옥이도

늘 어린 시절 고향 그리워하며

시집을 가도

고향 총각한데 가겠다고 입버릇이었는데

어디 경기도 연천 포천이복사꽃 피던 춘색이던가

아직도 폿소리 포연 자욱한 싸움판이 아니던가


그래도 말이 씨 되어

그런 세월 지나서

휴전이라고

총소리 뚝 그쳤을 때

이때다 하고

은옥이 머릿수건 벗고

고향 달려가

실컷 울고불고

양친부모 허묘라도 써두고 나니

마침 총각 있어

만나자마자 성례 치르고

싸움 끝난 폐허에서

가시버시 되니

그렇게 시작하여

떡두꺼비 아들 낳아

그 아들 업고

친정 오듯

대천 수문리 과수원집에 와서

며칠 머물며

어린것한테

과수원 찬바람 마구 쏘이고 돌아갔다

 

대천 이씨네 사랑방 머슴들 입초시에는

으례 은옥이 방덩이가 올랐는데

누가 보기나 했나

그 박속 같은 방덩이

그 살살살 눈 녹는 방덩이

사철 안식교 구제품이나 걸치고

손등 터 구리셀린 바르지 않는 날 없으나

그 손등 손가락 가지런히 예쁘디예쁜 손가락

그 은옥이 방덩이는 고사하고

그 손가락도 이제 없다

 

자 포 떨어졌거든

졸장기라도 두어보아

어서

 

석봉이

 

전실 자식 남매 석봉이 석근이 앞세우고

석봉이 에미 재취로 들어와서

또 아들 낳으니

그게 원수지 어디 형제이겠는가

의붓아비야

남의 자식 꼴 못 보고

에미는 에미대로

전실 자식도 자식이요

새 자식도 자식인지라

 

그저 불 때면

매운 내에 눈물바람으로 날 저무는구나

 

이런 집구석에서 견디다가

석봉이는

제 누이 석근이 데리고

그놈의 집구석 뛰쳐나갔다

 

한사코 남의 집 중 노릇 따위는 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손재주 좋더니

끝내 남의 호주머니에 잘도 드나들었다

 

석근아

이 오라비가

너 굶겨 죽이지 않는다

그러면서 훔쳐온 돈 쏟아놓으면

단발머리 석근이가

그 돈 얌전히 팽기며 훌쩍거린다

 

오빠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여 !

 

이 계집애가 짜기는 왜 짜

 

팔룡이

 

무창포에서

헌 유자망이나 만지작거리다가

대천으로 온 팔룡이

여기 와서

무슨 대수가 있나

막벌이는 거지 사촌이기 십상이지

 

한 마리 용도 거추장스러운데

여덟 마리 용으로 이름 지어놓았으니

아이고

그놈의 용트림에 얽히고 설켜

길이 트인 적 없는

팔룡이

 

어느덧 세상을 제대로 보기 싫어하여

아이들도 질색이고

아이들 노래도 질색이고

이른봄 개나리 피어도

그 개나리 꽃가지 낫으로 쳐내버리고

 

어찌 이런 인간이 되었는지

세상과는 도무지 맞지 않은 사람

최팔룡이

남의 품 팔러 가서도

반품에 그냥 돌아와버리는 사람

딱도 한 사람 최팔룡이

 

정순이

 

관촌 이씨네 높다란 토방머리

오뚝 서서

비 온 끝

분주한 낙숫물 떨어지는 것

언제까지나 바라보는

열다섯 살 정순이

눈 흰창 어찌나 그리 깨끗한지

그 정순이 눈 한번 더 보고지고

열흘은 기쁘리라

 

어서 바람 불어라

내가 연 날려

그 정순이

하늘 드높이 떠오른 연 바라보도록

언제까지나 바라보도록

열흘 아니라 달포는 기쁘리라 아흐 정순이

 

부월이

 

대복이 누나 부월이

아무것 없어도

꼭 하나 손바닥 반절짜리 거울

낡아서

좀 벗겨진 거울

 

그 거울 하나하고 있으면

한나절 온데 간데 없지

시집가면

살림 한번 매섭게 해낼 부월이

 

어쩌다가 백분 사서 바르는데

그 곱돌덩어리

그 부스러기 빻아 바르는데

그것 혀끝에 닿으면

쉬어터진 개살구맛 그대로라

거울 속 얼굴 찡그렸다가 이내 편다

 

거울 보다가

아무도 없는데

제풀에 흠칫 놀라

거울 두고 일어나

재빨리 부엌으로 간다

솥에 물부터 붓고

아궁이에

축축한 것 넣고

어렵사리 불 피운다

건넛마을 감나무에서

감 툭 떨어진다

대복이네 집에야

무슨 감나무 있겠는가

 

부월이 숨겨둔 거울

캄캄한 거울

 

얌전이

 

그 외보조개 웃어 써먹어보지 않고

조만호 딸 얌전이

아니 조만호 딸이 아니라

조만호 마누라 딸 얌전이

머리 곱게 곱게 딴 가시내야

팔월 한가위

널 한번 드높이 뛰어오르지 않고

널뛰며 깔깔대는

동네 시악시들

그 말만한 시악시들 웃음소리 들으며

명절 다음날

어머니 앞에서

어머니 실 감는데

실타래 두 손에 걸어 풀어주누나

밥도 하루 두 끼면 되고

무엇 하나 군입 다시지 않고

우물에 가도

동네 아낙네 뜸할 때

얼른 가 물 길어 온다

그 넓고 밋밋한 이마에 땀방울 돋아

마늘밭

묵은 소매 거름도 혼자 준다

그래도 어머니는

늘 딸에 성이 안 차

아 배추밭 벌레 안 잡고 무엇 하였어

허나 어찌 한 몸에 두 가지 일이겠는가

그 말 들으며

기명 치고 나서

그때에야 남새밭으로 나가는 얌전이

누구 하나 쳐다본 일 없으매

정작 동네 어른도

다른 동네 사람이나 다름없이 낯설어라

까치 까마귀도 낯설어라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도 낯설어라

치마 곱다랗게 기워 입은

열여덟 살 얌전이

속으로만 잉잉거리는 얌전이

 

주백이

 

이발장이 아들 주백이

어릴 때부터 없는 일 잘도 만들어내더니

국민학교 졸업하고

홍성으로 갔는데

거기서 천안으로 갔는데

천안에서 더 나아가

서울 갔는데

3년 뒤 서울 여자 하나 차고 왔다

불과 열여섯살에

벌써 계집이 생겨 차고 왔다

그런데 동네 아낙네 눈 무섭다

암만해도

여염 년이 아니라

놀던 계집이었다

하룻밤 자고 나더니

촌집 답답해하며

부채 부치는 꼴이

석박지에 얌전히 밥 먹을 년 아니었다

 

키 껑충한 주백이 아비

그것도 며느리라고

이발해서 번 돈으로

닭 사다가 닭 고아 먹이고는 했다

 

어느 날 주백이 나가고 없는 날

주백이 어미

빨래하러 나가고 없는 날

아버님

나 그 사람보다

아버님이 좋아요

아버님이 좋아요

하며

마루끝에 둔 삐뚝구두 뒤축으로

마룻바닥 콩콩 찍어대었다

치마 걷힌 다리살 살짝 드러나서

 

주백이 아비 울타리 보니 울타리가 마구 떨렸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