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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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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2. 13. 14:47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18 만인보 


高銀

1996, 창작과비평사

 

시흥시대야도서관

SB001798


811.6

고67만  10


창비전작시----------------------------------------------------------------------


큰 명제에 대한 시대적 일탈이 여기저기서 눈여겨지는 때에 시와 시인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이 있어야겠다. 그것은 근원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뜨겁게 현실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접어두고 나서 나는 그 이념의 혐의와 상관없이 먼저 인간의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이나 사회 · 역사 · 문명 전반에 대한 통합적 인식이 인간의 문제로 귀결되는 사실에 새삼 눈떠야 했다. 인간의 실존적 정화 내지 승화만이 이제까지 쌓아온 모든 고비들을 넘기는 일의 시작이라는 것도 거기에 포함된다.

세상에 어디 '시적 인간'의 가능성이 그 싹수마저 보이고 있느냐라고 고개를 젓지 말기 바란다. 바로 이런 판에서 시인보다 먼저 시적 인간이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므로.

다만 그런 인간에게서 메시아적이기보다 연인적이기까지 한 친화를 경험하는 것이 창조의 축복과도 닿아 있을 터이다.

「머리말」에서


고은(高銀)

1933년 전북 군산 출생.

1958년 『현대문학』에 시 「봄밤의 말씀」「눈길」「천은사운」 등을 추천받아 등단.

1960년 첫시집 『피안감성』 간행. 이후 시 · 소설 · 수필 · 평론 등에 걸쳐 100여 권의 저서 간행.

1984년 『고은시선집』 간행.

1986년 『만인보』 간행 시작

1987 ~ 94년 서사시 『백두산』 간행.

제3회 만해문학상, 제1회 대산문학상, 중앙문화대상 등 수상.


차례


머리말

함석헌 / 전태일 / 육영수 / 늙은 절름발이 / 우의정 한효순 / 이소선 / 김대중 / 차인출 / 윤반웅 / 증  살 / 계훈제 / 이상훈 / 이돈명 / 문재린 / 설  총 / 김수환 / 천관우 / 안국동 / 서대문 현저동 노인 / 허병섭 / 장준하 / 이인영 / 선우휘 / 관철동 삼일여관 / 박고석 / 서울역 지게꾼 / 원각사 행자 / 정연주 / 이우성 / 이문영 / 유일한 / 공중변소 낙서꾼 / 마니산 참성단 / 이응로 / 정경화 / 윤이상 / 지명관 / 김이옥 / 강원룡 / 두 의사 / 강운구 / 오종우 / 산중 혁명 / 황인철 / 문국주 / 대원암 탄허 / 막걸리반공법 / 서경덕 / 이해학 / 장기표 / 김  윤 / 연산군 / 함세웅 / 남정현 / 안병무 / 박난주(朴蘭州) / 길진섭 / 대전발 0시 50분 / 봉천동 이씨 / 노동자 김진수 / 청진동 옥자 / 안수길 / 지석영 / 정구영 / 칠보 들노래 / 홍성우 / 대법정 정리(廷吏) 김두식 / 고영근 / 곽태영 / 김홍도 / 권호경 / 김승훈 / 최일남 / 홍남순 / 강세황 / 가짜 문둥이 / 화곡동 수리공 / 이종찬 장군 / 유진오 / 신상초 / 최정호 / 신선시 / 이규태 / 오충일 / 정경모 / 김정한 / 김숭경 / 유원식 / 문익점 / 박명호 / 박철웅 / 박철웅 / 목요상 / 만일제 / 박목월 / 고상돈 / 정태기 / 이희승 / 고선지 / 김종철 / 낭만 아가씨들 / 광주 조아라 / 차순이 / 대왕암 / 김윤수 / 김병곤 / 청계천 뚝방 홍씨 / 김지하 / 성삼문 / 소년수


함석헌


하얀 머리칼 나부낀다

찬바람 분다

하얀 수염 나부낀다

찬바람 분다


오로지 섭리의 역사

하얀 두루마기

하얀 고무신

성큼 한걸음 나서노라면


거기가

이 나라의 갈숲

하얀 갈꽃이 소리쳐 피어오른다


집안에는 깨어진 꽹과리 따위

대야에 담긴 얼음 따위지만

세상에 성큼 나서노라면


그에게는 끝내 글이 없다

있는 것은

어제도 오늘도허위허위 쉬지 않는 말


이 나라의 수고 많은 하늘 아래

그의 뒷모습까지도 말이었다

하얀 머리칼 나부낀다

찬바람 분다


전태일


그의 죽음은

너의 시작이었다

나의 시작이었다

하나 둘 모여들어

희뿌옇게

아침바다의 시작이었다


그는 한밤중에도 우리들의 시작이었다


육영수


1974년 8월 15일

그녀는 국립극장 단상에서 쓰러졌다

한 송이 백목련이라고

한 마리 날개 접은 백학이라고

그녀의 죽음은 고개 숙여 받들어졌다


그 정치적 산화(散華) 이후

남편은 황량한 때를 말갈기로 달렸고

딸들과

아들은 하나하나 고아가 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성난 성장에 바쳐진 슬픈 가족이었다


그녀는 드물게 영롱한 새소리로

하얀 이빨 시려

불행을 돕는 마음을 일으켜 행복했으나

그 새소리는 더이상 들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꽃도 새도 아닌 백자 항아리로 말이 없다

그해 8월 15일 이후


김대중


고난이 필요한 시대 그는 고난의 화신이었다


일본 수도의 한 호텔 안에서

토막져 죽어야 했다가 살아났다

현해탄 복판에 던져져

물귀신이 되어야 했다가 살아났다


71년 대통령선거에서

아슬아슬하게 졌다

그의 파도치는 웅변이

1백만 인파를 지진처럼 흔들어댔다

그는 혼자서도

1백만 인파였다


그로부터 박정희는 이를 갈았다


70년대 전 기간 그는

그 극한의 고난 가운데서도

밤새워 책 읽고 영어 개인교사를 드나들게 했다


모든 준비를 다 마쳤다

친지와 의논할 때도

라디오 FM 틀어놓고

도청을 막아가면서

모든 준비를 다 마쳤다

하지만 오직 하나

그가 바라는 것 대통령이 되는 것만이

아직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


박정희 뒤의 어떤 고비에도

그는 삶을 겨자씨만치도 허비하지 않았다

그렇게

정녕 70년대 한국 국민은

한국에서 가장 정밀한 그를 모르고 살 수 없었다


김수환


1969년 한국 천주교의 첫 추기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쓴 빨강 스컬캡은 신앙에 앞서 명예였다

그러나 가장 겸허한 사람이었다

70년대 이래

그는 한번도 분노를 터뜨리지 않아도

항상 강했다


그는 행동이기보다 행동의 요소였다


하늘에 별이 있음을

땅에 꽃이 있음을

아들을 잉태하기 전의

젊은 마리아처럼 노래했다


그에게는 잔잔한 밤바다가 있다

함께 앉아 있는 동안

어느새 훤히 먼동 튼다


그러다가 진실로 흙으로 빚어낸 사람

독이나

옹기거나


장준하


경기도 포천군 이동 약사봉 아래

장준하가 추락한 곳은 으슥하다

그의 죽음보다

그의 의문 없는 삶이 먼저 떠오른다

난초잎새 같은

머리칼 쳐올려 깎은 흰 얼굴

그 어디에

큰 간담 있음을 내색이나 하겠는가


임시수도 부산에서

미국의 후원으로 월간지를 창간했다

하기야

광복군 시절의 OSS 인연에 이어

USIS 인연도 있을 법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야릇하다

한국 지식인들의 역사의식 저항의식까지

파고들었다

북한에서 태어나

남한에 사는 계몽지식인들이 뭉치는 쎈터를 후원했다


발행인 장준하는 아내와 함께

잡지를 찍어

리어카에 싣고

서점마다 돌리기도 했다


김준엽 노능걸 들과

중국 서주에서

멀고먼 사천 중경까지 갔던 사람

가서 김구 주석의 가난한 환영을 받았던 사람


박정희더러

밀수왕초라고 마구 공격하던 사람


박정희 3선개헌 반대의 싸움을

앞장서서 이끌다가

그의 죽음으로도

싸움을 이끌었다


선우휘


선우휘 신상초 고정훈

이 서북의 사나이들

서북지방 기독교와는 동떨어져

술 한번 마셨다 하면

바지 저고리

다 벗어던지고 마셨다


우리에게는 남은 사진 한 장이 있다

한국전쟁의 1 · 4 후퇴 당시

평양 대동강 철교 가득히

남으로 남으로 피란민 건너는 광경이다

온통 흰옷뿐

흰옷밖에 입을 줄 모르는 사람뿐


바로 그들의 피란을 이끌었던 사람

1950년대 휴머니즘은

거기서부터였다

1950년대 전후 휴머니즘 문학은

거기서부터였다


육군 대령 선우휘

그는 군복 입은 전후의 작가였다

후방의 음울한 작가 손창섭

짚차 달려 자갈 튕기며

전방의 작가 선우휘


훨씬 뒤 마당에는 명아주 따위 잡초 우거지도록 방치했다

그 잡초야말로 그에게는 꽃이었던가


유일한


1970년에 20프로의 한국인 한 사람이 죽었다

9세에 미국으로 떠났다가

그곳에서 고학생이었다

어느 만큼 애국자였다가

돌아와 유한양행을 차렸다


20프로의 한국인으로

80프로 이상의 한국을 꿈꾸었다

모든 것을 돌려주었다

그의 딸에게도 주지 않고

세상에 돌려주었다

단 한푼도


물질이 소유의 것이 아니라

공공의 것이었던 바가

태초이거늘


이응로


동백림사건으로

고국에 왔다

고국의 중앙정보부에 왔다

고국의 대전교도소에 왔다


웬일인지

감방에서 붓과 페인트를 구할 수 있었다

4 · 6배판 정도의 책만한

베니어판이면 되었다


거기에 뚝 멈춰선 황소를 그렸다

정지된 분노와도

발기된 성기의 화석과도 같았다

한 송이 꽃도 그렸다


대전교도소 사상범 사방

겨울의 철창을

비닐로 막았다 하나

방안은 영하의 냉방

손 곱아

붓이 잡히지 않았다

손가락을 움직여

붓을 잡았다


가까스로 봄이 와 꽃이 피었다

베니어판 위

그리하여 빠리로 돌아간 뒤

그의 한지 묵화

그의 상형문자 묵화

그의 민중무한 묵화

그것들이 하나하나 이루어졌다


그 육중한 대머리에

모락모락 김이 났다

으스스한 빠리 교외의 겨울에도

보리밭처럼

보리밭 위 종달새처럼

조국이 녹아들어

질척거렸다


정경화


전란이 지나간 뒤

엄마는 어린 딸을

사랑하는 딸을

바이올린으로 만들었다


만들어지는 단련과

이미 만들어진 천재가

길고 긴 미로를 통과했다


한국이 인권 없는 나라 서열 8위일 때

코리아게이트의 추악으로 들끓을 때

그런 나라에서 피어난

화려한 꽃이었다


기립박수 속에서

그의 바이올린 연주는

한국의 성층권에서

세계의 대기권으로 내려갔다


윤이상


가서 동양을 펼쳐라

바다 밑 용왕으로부터 명을 받았다

한 마리 다친 용은

그렇게 태어났다

그렇게 떠났다


그 용이 광복절 초청의 이름 아래

잡혀왔다

그 용이 감방 벽에 쇠붙이에 머리를 치받았다

타살을 거부할 마지막 자결의 힘으로

쏟아지는 피로 유서를 썼다

아들아 나는 역사와 민족 앞에

부끄러움 없다 간첩 사건은 조작이다……

그는 죽어가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무기수의 겨울이었다

떠다 둔 식수가 얼어버리는 감방에서

용은 웅숭그린 채

담요 둘러쓰고

엎드린 채


양자강 언저리 장주(莊周)의 나비를 꿈꾸었다

그의 5선지는 살아났다

천둥 치고

무너지고

그리고 적요했다


세계는 그의 음악을

정장(正裝)의 경건성으로 받들었다

말러 이후인가


장기표


그의 순정은 사명이었다

무엇인가를 말해야 했다

혼자일 때도

그는 마음속에서

말해야 했다

말하는 동안

그에게는 기쁨조차도 슬픔이었다


1977년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서울구치소

3사 상 감방에서

나는 그대를 만났지

그대는 항소심이고

나는 1심이었지


추운 날 손가락 펴가며

묵사지에

골필 항소장을 쓰고 있었지


어머니는 항상 전태일의 어머니였지

그의 몸 90퍼센트는 꿈

나머지 10퍼센트에

아내와

어린 두 딸이 있다


고등학생 때는 산사에 들어갔고

대학생 때는

시대의 최전선에 섰다

하얀 낮

머루 눈

나막신 소리 같은 목소리

정치와

인간을 혼동하는 정신

그대는 그렇게

시집가는 신부의 다홍치마였지


함세웅


한국의 천주께서는

참 깨끗한 아들 하나를

거룩한 볼모로 삼으셨나이다

너희들

너희들

이 사람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거든

나를 함부로 망각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하얀 칼라 제복의 여고생들이

저쪽으로 가고 있다

저쪽에서 천주의 아들이 혼자 오고 있다

가고 오고

그 아들은 파란 하늘에 물들어 있다


맑은 얼굴

맑은 눈

비온 뒤라면 무지개 걸려


그러나 독재나 어떤 잔재 따위에는

진흙탕 싸움을 사양할 수 없다

그 아들은 한국 천주교회에서

지(知)와 신앙으로 집을 지었다


그는 도시의 신부다 두메로 가면 안 된다


지석영


사람들은 그의 종두법에 의하여

팔뚝에

우두를 맞기 시작하였다

사내든

계집이든

팔뚝 윗부분에

우두자국 흉터가 달빛에 드러나며 번쩍거렸다


켈로이드 체질의 우두자국은

바야흐로 꿈틀대다 멈춘 버러지었다


그러나 그의 사업이 또 하나 있다

어려운 한문 버리고

쉬운 한글을 쓰자 하였다

쉬운 한글 가로쓰기로 쓰자 하였다


이것은 그 무렵 일본의 영어교도 모리가

한자는 물론이거니와

아예 일본어를 버리고

영어로 말하고

영어로 쓰자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최일남


술 취하면 노래 열 개 스무 개가

줄 서서 흘러나오지만

하늘의 별들이

땅 위의 노래를 위하여 깜박인다

별이기보다

먼 등불인 양


지극히 정다우나 지극히 어꾸수하나

지극히 공적인 사람

한번도 찬란한 적 없으나

어느 곳도

헛디딘 곳이어서는 안되었다


그는 그의 과녘 적중을 자랑하지 않는다

세월이 갈수록

그는 무서운 사람이어서

날 저물어

추운 개울물 건너

타락을 모르는 무서운 사람이어서


우리나라가 아주 망해버리지는 않을 터


홍남순


광주에 가면 홍남순 옹이 있다

무등산이 있고

무등산이 내려보는 곳에

홍남순 옹이 있다


그런디 그것이……

송충이 같은 눈썹이 꿈틀거리며

반대라기보다

그저 언짢은 듯이


그 눈썹 그 머리가

몇년 뒤

하루아침 하얗게 셀 줄이야

어디에도 판사인지

변호사인지

그런 자취 도무지 없이

그저 마을 좌장으로

조끼 입고

조끼 단추 다 끼고

팔짱 끼고 앉아


그런디 그것이……

광주시 북판 궁동

그의 집 겸

그의 사무실 사랑방이야

하루 내내

이 사람 저 사람

드나들어

발 고린내도 남아 있다


그런디 그것이……


유진오


일본제국 헌법과 독일 바이마르 헌법을 본떠

법률유보 아래 자유권을 두어

양원제

의원내각제로 원안을 만들었다

이른바 유진오안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통령중심제

국회 단원제로 뜯어고쳐

사실상 제헌헌법은 누더기 개헌으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초안을 고친 것이기보다

헌법 전문위원 유진오나 권승렬을 뛰어넘어

이승만의 전횡이었다

그 전횡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 대한민국 헌법만큼

남루한 세월을 살아온 것도 없으렷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헌법에는

본래의 알속 빠진 이로니

으레 유진오의 이름이 따라다닌다

소설가

대학 총장

야당 총재

그리고 대통령후보가 되기도 한다

한동안 프랑스 요리도 즐기면서

막걸리를 통 몰랐다


곱게

곱게 마고자 입고

등줄기 서늘히 등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한 사람의 귀족이 된 이래

중년 이래 저 건너 가난을 몰랐다


이규태


1930년대의 아이

1940년대의 어린이 그대로 촌사람이다

진안 장수

산골 촌사람이다

그런데 지구의를 돌려보아라


지구의 어느 구석

거기에는

반드시 그의 발자취가 있다

심지어 네팔 카트만두의 초밥집에도

그 초밥집 주인 성씨 김(金)이

한국 김씨의 한 자손임을 밝혀내는

그의 발자취가 있다


그래서 한반도 천년의 삶

켜켜이 쌓인

그 먼지투성이 가운데서

이윽고 한 마리의 새에게 날개를 달아준다


투박하기는 막걸리 뒤의 모주인가

대학도 제대로가 아니었다

전후 클래식 플레이어이기도 했다

그 뒤로는 언론인으로

사실과 상상을 묶어버려

어느 것이 상상인가


어디까지가 이규태인가


목요상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의 시대

흑암의 시대

그 흑암에 맞서

사법부의 기상을 떨친

한 판사가 있었다

끝내 법복을 벗었다


어느 시대란 어느 인간을

서론에서

각론으로 옮겨놓는다

젊은 판사는

사법부에서

입법부로 옮겼다


그러는 동안 이 나라의 사법부는 없어졌다

대법원장실에는

역대 대법원장의 사진 대신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목요상

그는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더 이상

지난날의 기상은 떨치지 않았다


인간은

한번만의 절정에서 내려가는 것인가


박목월


청록파 3인이라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이라


타고난 서정파라

인생파라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일제시대는

형산장 기슭에서

금융조합 다니느라

긴 포플러 길을

자전거 타고 다녔다


발은 유난히 크고 미욱했지만

손은 두꺼웠다

눈은 늘 서늘했다

시는 연필로 썼다


그러다가 대통령 부인이게

한동안

매주 한번씩

시 이야기를 들려준 일로


시인들

시집 낼 돈을 얻어

여러 시인들 시집 냈다


시집 뒤에는

어느 고마우신 분의 도움으로

이 시집을 냅니다라는

팻말이 박혀 있었다


그 뒤 그녀가 죽은 뒤

그 전기 써서

동작동 무덤에 가서 봉정했다

딸 근혜와 함께


아마 그 전기 밑글은

싼 원고료 받고

박재삼이 썼다던가


미리 묻힐 데

부인과 함께 정한 뒤

먼저 묻혔다

묻혀

달에 구름 가는가


고상돈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정상에 태극기가 꽂혔다

스물아홉살의 사나이가

그 태극기와 함께

그곳에 서 있었다


힘만이겠는가

뜻만이겠는가

운명만이겠는가


그 정상은 지상이 아니었다

몇만년 이래

모든 사람에게

그 정상은 천상이었다

지상에서는

먼 옛날 12세 소년 주몽이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쳐

해씨에서

고씨로 성을 바꿔

풀지붕 띳집궁궐로 나라를 세웠다

고구려 동명왕이었다

그런 뒤 오늘에 이르러

고상돈이

에베레스트에 오른 것

이제 그는

더이상의 일이 없어야 한다

동북아시아 한반도의 태극기들이

에베레스트 정상의 태극기와

함께 휘날리는 동안


이희승


키가 작아

서울의 북악

남산 낙산

아니 인왕마저

함께 키를 낮춘다


곱게

가을 햇빛에 물들어

곱게 곱게

쪼글쪼글한 대춧빛

그 대추 속

단단한 씨들이

그의 호주머니에 들어 있다


평생 욕도 못한 입

화내거나

떠벌리거나 해보지 못한 입에

밥 한 숟갈 넣어

50번은 씹어 넘긴다

딸깍발이 선비라 하지

모두들

딸깍발이 선비의 나막신이라 하지

모두들


그는 모국의 말과 글에 파묻혔으나

무슨 큰 학문이나

큰 사업도 없이

더러 시조도 썼고

벙어리 냉가슴

수필도 썼다


어김없이 반독재 반열에 은근히 이름을 올렸다

세상 떠날 때도

요란한 기적소리 없었다

보리밭 노고지리도 울지 않도록


김지하


70년대 김지하

한국의 도처에 그가 있었지

세계의 도처에 그가 있었지

드디어 감옥 7년

그 7년은 70년이었지

그의 감방 앞에는

볼품없는 화분 하나 놓여 있었지


그 무상대도 젊음 다 바쳐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