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황영찬

Tag

Notice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 total
  • today
  • yesterday

2015-026 뉴턴 - 사과는 왜 땅으로 떨어지는가

 

장 파에르 모리 지음 / 김윤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32

 

082

시158ㅅ  27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27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나의 벗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친한 나의 친구는 진리이다."

과학혁명에 불이 붙기 시작했던 17세기에

쟁쟁한 과학자들과 겨루어 현대 과학의 아버지로

인정받은 아이작 뉴턴, 사과 한 알로 만유인력을

설명한 그는, 빛의 본질을 분석해 내고 미적분학을

창시하여 당대의 천재들을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위성으로 만들었다.

 

"지혜를 가지고 있고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감동할 줄 아는 존재라면

아무리 형편없는 망원경을 통해서라도 푸른

하늘에서 떨고 있는 은빛 초승달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보고 유쾌한 감흥이 일지 않거나,

지상의 일상생활로부터 벗어나 우주로 가는

첫번째 정류장을 향해 이동하는 기분을 느끼지

못할 수 있을까? 생각이 있는 존재라면 4개의

위성을 가진 빛나는 목성이나 신비한 띠로 둘러싸인

화려한 토성, 끝없는 밤하늘에 자줏빛과

사파이어빛을 뿜어내는 이중성(二重星)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아! 비천한 농부와 도시의 피곤한 노동자,

명성과 부가 절정에 이른 사람, 경박한 사교계

여성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만일 인간이라면,

하늘을 응시하며 얻는 내적인 기쁨이 얼마나 심오한지를

이들이 알 수 있다면,

프랑스 아니 전유럽은 총검 대신

망원경으로 뒤덮일 것이다.

이것은 우주적인 행복과 평화를

고취시킬 것이다."

 

카미유 플라마리옹, 1880년

프랑스 천문학자

 

차례

 

Newton et la mecanique celeste

 

제1장 아이작 뉴턴의 휴가

제2장 근대 천문학의 탄생

제3장 반사망원경에서 중력으로

제4장 마침내 만유인력!

제5장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다

기록과 증언

참고문헌

그림목록

 

장-파에르 모리 Jean-Pierre Maury

1937년에 태어난 장-피에르 모리는 파리 제7대학에서 물리학 교수를 지냈다. <갈릴레오> <별들의 사자> <지구는 어떻게 둥글게 되었는가> 등의 저서를 저술하였다.

 

옮긴이 : 김윤

1963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및 동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하였다.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25번 <고대 로마를 찾아서>와 <중세시대 영국과 프랑스의 도시> <프랑스 혁명의 창조> <계몽사상의 실천> <봉건제의 위기> 등의 논문을 번역하였다.

 

제1장

아이작 뉴턴의 휴가

 

1665년 여름, 끔찍한 전염병이 창궐하자 케임브리지 대학은 문을 닫고 학생들과 교수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들 중에는 막 학사학위를 받은 청년 아이작 뉴턴이 있었다. 그는 평화롭고 조용한 곳을 찾아 고향인 영국의 시골로 떠났고, 그곳에서 1년을 보냈다. 이 시기에 풍성한 발견들이 이루어졌고, 따라서 후세 역사가들은 이때를 '기적의 해'라고 부른다.

뉴턴은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오랜 휴가-의심할 여지 없이 과학사에서 가장 풍성한 결실을 맺은 시기-를 영국 중동부 링컨셔에 있는 집(위)에서 보냈다.

1665년에 발생한 대전염병은 런던에서만 7,000명이 넘는 희생자를 냈다. 당시 신문은 모든 탈출방업을 동원해 런던을 빠져 나가는 피난민과 장례행렬, 시체들로 가득찬 마차들을 보여 주고 있다.

케플러의 《세계의 조화》(1619), 그리고 무엇보다도 갈릴레이의 《두 개의 세계에 대한 대화》(1632)는 젊은 시절 뉴턴이 애독했던 저서이다. 기하학적이고 미학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사색으로 가득 차 있는 케플러의 책에서, 뉴턴은 행성운동의 세 가지 법칙을 발견했는데, 훗날 뉴턴은 이 법칙에 결정적 설명을 주게 된다. 갈릴레이를 교회재판대에 서게 만들었던 그의 저서는 근대 천문학의 선언문으로 인정받았다. 이제 사람들은 '천계의 완전성'이라는 신화를 벗어 던지게 되었으며, 천체는 더 이상 과학적 합리성보다 우위에 놓일 수 없었다.

태양의 백색광선이 여러 빛깔을 띤 광선의 혼합물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뉴턴은 25세였다.

위의 장치는 뉴턴이 울스소프의 자기 방에서 실험한 장치보다 훨씬 정교하다. 덧문에 뚫은 구멍, 프리즘, 스펙트럼이 투사되는 벽, 이것이 뉴턴이 이용한 전부이다.

에덴 동산의 사과를 제외하고 뉴턴의 사과만큼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준 사과는 없을 것이다. 어떤 화가는 사과가 뉴턴의 머리를 친 것으로 묘사했는데, 떨어진 사과를 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을 그린 화가도 있다(19세기 판화). 중요한 점은 사과를 관찰한 결과 사과와 달을 비교하게까지 되었다는 것이다.

위 18세기 판화는 두 가지 특징적인 사실을 보여 준다. 굉장히 많은 행성계와, 태양광선조차 뚫지 못하는 두꺼운 구름-우주의 어두움이 물질화된-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것을 부정하고 2,000년이 지난 뒤에도 이 고대의 '자욱한 어두움'은 미술가들의 상상력 속에 살아 남아 있었다.

갈릴레이는 베니스의 시의원들에게 멀리 있는 선박과 건물을 살피는 데 망원경이 아주 유용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얼마 후 갈릴레이의 새 발명품은 천체 관측에 이용되고 있었다.

티코 브라헤의 체계

르네상스인은 우주 중심에 자리 잡은 지구 둘레를 천구가 둘러싸고 있다는 프톨레마이오스적인 완벽한 우주 질서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구의 중심성과 부동성이라는 관념은 너무나도 뿌리깊어서 행성운동의 관측자료가 쌓여 갔어도 과학자들에게 선입관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16세기 네덜란드 천문학자인 티고 브라헤는, 행성들은 태양 둘레를 돌지만, 태양은 여전히 우주의 중심인 지구 둘레를 1년에 한 바퀴 돈다고 설명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체계

1543년에 코페르니쿠스의 체계가 발표되면서 모든 것이 단순해졌다. 다만 지구의 중심성과 부동성이 부인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지구는 다른 행성과 마찬가지로 태양 둘레를 돌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관측기구들이 차츰 개선되자 사람들은 행성의 모양과 크기를 알고자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행성 간의 거리, 다시 말해 태양계의 크기를 측정해야 했다. 그리고 하나의 절대적 측정단위가 보편적으로 적용되기 전에 태양과 지구, 태양과 화성 등의 상대적 거리를 결정해야 했다(1672).

1628년 데카르트가 네덜란드에 정착한 이래 교회는 더 이상 위협을 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세계의 체계'를 발표하겠다는 생각을 포기했다(아래). 왜냐하면 1633년 종교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던 갈릴레이와 같은 고통을 받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천체들 사이의 공간이 보이지 않는 물질의 소용돌이로 가득 차 있다(위)고 주장했다.

 

제2장

근대 천문학의 탄생

 

"1667년 6월 21일 화요일 하지 아침, 오주, 프레니클, 피카르, 뷔오, 리셔는 어느 돌 위에 자오선을 표시하기 위하여 천문대로 갔다." 이렇게 해서 파리 천문대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채 안 되어 그곳 천문대의 과학자들은 지구의 둘레,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 빛의 속도를 측정할 수 있었다.

1667년, 유럽의 많은 과학자들은 파리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파리 천문대가 건설되면서 파리는 가장 활발한 천문학 연구 중심지가 되었다.

파리 천문대 설립행사에서 장 밥티스트 콜베르가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회원들을 루이 14세에게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루이 14세는 1682년이 되어서야 이 천문대를 찾았던 것이다.)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와 파리 천문대는 루이 14세의 명령을 받은 콜베르의 주도 아래 설립되었다.

정확한 천문학적 측정을 가능하게 도와 준 발명품. 크리스티안 호이겐스의 진자시계.

호이겐스는 17세기를 주도한 물리학자였다. 일찍이 진자시계를 발명하고, 토성의 고리와 그 위성을 발견해 이름을 떨친 호이겐스는, 확률이론을 다룬 최초의 논문을 발표해 수학과 곡면역학에 상당한 기여를 했고, 빛의 파동론의 기초를 세웠다.

루이 14세는 카시니의 렌즈를 장치하기 위하여 말리 타워를 파리 천문대 뜰로 옮기게 했다. 카시니는 망원경 튜브를 사용하는 대신 접안렌즈를 손에 들고 다니며 떨어져 있는 목표물을 뚫어져라 바라보곤 했다.

1885년경 두 날개와 둥근 지붕이 천문대에 첨가되었다. 하지만 본건물은 17세기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카시니 가문은, 지안 도메니코(카시니 1세)가 콜베르의 초청으로 불로냐에서 건너온 해인 1669년부터 카시니 4세가 사임한 해인 1793년까지 파리 천문대를 이끌었다. 천문학적 연구에서 볼 때 후대 세 사람의 작업들은 카시니 1세의 업적에 비교될 수 없다. 그는 토성의 네 위성과 그 고리들의 분할을 발견했고, 리셔와 함께 태양까지의 거리를 측정했을 뿐만 아니라, 대형 달지도를 제작했고 금성의 공전주기를 계산하려고 했으며, 목성의 위성들에 대한 관찰기록을 끊임없이 수정했다.

카시니는 또한 파리 천문대의 건설과 장비설치를 감독했고, 천문대의 과학과 행정 감독관으로 재직했으며, 천문학자들을 훈련시켰다. 콜베르가 그를 몰로냐에서 파리로 초빙했음은 천문학사에서 참으로 운좋은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1572년, 스물여섯 살 난 티코 브라헤는 근대 최초로 신성(新星)을 발견하여 유명해졌다. 1577년에 덴마크 국왕은 그에게 이븐섬을 하사했고, 이곳에 그는 우라니보르그(천국의 성) 천문대를 세웠다. 왕이 죽고 나서 후계자들과 사이가 나빠진 티코 브라헤는 프라하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우라니보르그는 돌더미 속에 폐허로 전락해 버렸다.

고도육분의(첫번째), 반구경위의(두번째), 태양사분의(세번째), 사분경위의(네번째).

프라하에서 티코는 루돌프 2세의 왕실 수학자로 봉직했다. 1601년 티코가 죽자 그의 조수 요하네스 케플러가 티코의 자리를 계승했다. 티코의 천문학적 관측 성과에 존경을 감추지 않았던 케플러는, "티코는 매순간 생각에 잠겨 있었다."고 말했다. 티코는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만들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관측기구들에는 렌즈가 없었다. 따라서 정확한 관측을 수행하기 위해 그의 관측기구들은 매우 커야 했다. 이 거대한 기구들-반지름이 6m나 되는 것도 있다!-은 별들이 자오선을 지날 때 고도를 재기 위해 자오선의 수평면에 고정되어 설치되어 있었다. 망원경이 발명되자 사분의나 육분의 따위 더욱 작고 간편한 기구들로 같은 정도의 정밀한 관측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리셔는 2년 가까이 카옌에서 보냈다. 성능 좋은 장비와 유능한 조수들의 도움을 받으며, 그는 관심 있는 모든 분야의 중요한 자료들을 모을 수 있었다. 그의 《천문학, 물리학 관측》의 속표지.

1644년 덴마크 아루스에서 태어난 올라우스 뢰머(가운데, 위는 그의 천문대)는 티코의 관측 노트들을 발간하는 책임을 맡고 있는 교수의 조수로서 일했다. 따라서 피카르가 폐헉가 된 우라니보르그로 탐사를 떠날 때에 뢰머가 그를 돕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피카르는 파리로 돌아갈 때 뢰머를 데려갔고, 이 두 사람은 이후 10년 동안 공동작업을 벌였고, 특히 많은 관측기구를 개량하는 데 힘을 더했다. 그후 뢰머는 덴마크로 되돌아와서 자오선 망원경(아래)을 포함하여 자신의 기구를 여러 개 완성시켰다.


제3장

반사망원경에서 중력으로


"아울러 나는 케임브리지 대학 수학교수인 아이작 뉴턴씨가 새로운 망원경을 발명했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합니다. 지금 당신에게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이곳에서 처음 공개되고 시험해 보았을 때 그 망원경의 길이가 약 15cm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로써 1672년 1월에 호이겐스는 런던 왕립협회의 책임자인 헨리 올든버그가 보낸 편지를 통해 뉴턴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다.

뉴턴의 망원경.

최초의 과학잡지라 할 《철학회보》가 이 무렵 런던에서 발행되었고, 몇 달 뒤 《지식인의 잡지》가 파리에서 발간되었다.

1690년의 케임브리지 대학. 한데 모여 있는 수도원 건물들에는 풍족하지만 꾸밈이 없는 모습으로 줄지어 늘어선 기숙사들이 딸려 있었고, 모든 건물은 캠강 쪽으로 완만하게 경사진 언덕을 이루고 있는 정원과 잔디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 모습은 오늘날에도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헤벨리우스의 거대한 굴절망원경(1670).

뉴턴 시대에는 그레고리안(위)이나 카세그레인(아래) 반사망원경은 어디에도 실재하지 않았고 서류상으로만 존재했다. 여기에 필요한 작은 곡면거울을 만들기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뉴턴의 동료들은 그의 관측기구가 소형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이는 단지 편리함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작으면 작을수록 안정감이 더 생기는 것이다. 불안정한 장비는 영상이 만들어지는 데 치명적이었기 때문에 높은 배율보다도 높은 안정성이 더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뉴턴이 고안한 작고 우아한 관측기구는 기부(基部)가 지탱해 주고 한 쌍의 금속 손잡이가 단단히 죄어 주고 있는 공을 이용하여 어떤 방향으로든 회전할 수 있었다.

뉴턴의 망원경은 관의 아래쪽 끝에 있는 나사를 회전시켜 초점을 맞추었다. 이 나사는 대물렌즈와 망원경의 뒷부분을 움직였다.

1667년과 1672년 사이에 뉴턴은 자신의 이론을 강화하기 위해 빛깔에 관한 실험에 더욱 열중했다. 어느 정도 회의적인 반응이 따랐지만, 분명히 결정적인 반대는 없었다.

곳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는 독일의 탁월한 수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철학자, 신학자, 역사가, 법률가였다. 그와 뉴턴은 각각 미분법을 개발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라이프니츠의 방법이 채택되었다.

항해의 중심이 되는 그리니치 천문대가 템스강 어귀를 내려다보고 있다. 기준 자오선이 그리니치 천문대를 지나고 있고, 그리니치 평균시간은 세계의 표준시간이다.

존 플램스티드는 찰스 2세에게 왕립 그리니치 천문대를 건립(1675)하도록 건의했으며 자신이 그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장비 설치와 지도 제작에 공헌이 컸지만, 그의 주된 업적은 3,000개에 이르는 별들의 목록을 작성한 것이다. 이러한 편찬작업은 근대 천문학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헬리가 공부했던 옥스퍼드 대학의 주위 환경은 언제나 목가적이다. 막달렌 칼리지의 탑도 여전히 나무 꼭대기 위로 솟아 있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소들이 다소 멀리 떨어진 들판에 있다.

1664년 12월 24일 뉘른베르크 하늘 위를 번개처럼 지나간 혜성에서 받은 인상을 남긴 그림.

 

제4장

마침내 만유인력!

 

 

1684년 8월, 헬리는 뉴턴에게 자문을 구하러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향했다. 자신이 풀 수 없었고 왕립협회의 다른 회원들도 쩔쩔매는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부탁할 참이었다. 뉴턴은 자신이 이미 오래 전에 그 문제를 해결했노라고 말했다. 태양계의 모든 운동은 중력의 법칙이라는 단 하나의 법칙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이제 핼리는 뉴턴이 이 사실을 공표하도록 설득해야 했다.

 

《프린키피아》를 발간하고 나서 한참 지난 뒤인 1726년의 뉴턴(위). 17세기에 있었던 한 실험(아래).

로마에서는 처녀자리에서 1680년 혜성이 출현하고 특이한 현상이 따랐다고 보고되었다. 그들은 닭들이 소리를 지르고 신비한 표시를 지닌 알을 낳은 것은 혜성의 특징이나 이동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알들을 낳은 날짜와 시간이 기록되었다. 이 판화가 명백히 보여 주듯이 혜성이 신비로운 힘을 간직하고 있다는 믿음은 1680년대에도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 특히 12별자리에 표시된 혜성의 위치가 주목할 만한데, 당시에도 그것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점성술의 초점이었다.

에드먼드 헬리는 《프린키피아》를 세상에 선보였다. 하지만 이것은 그가 개인적으로 성취한 많은 일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는 남반구의 별들을 목록화했고, 혜성들을 연구했고, 헤라클레스 자리에 있는 둥근 성단을 발견했고, 1718년에는 별들의 정확한 운동을 밝혀 냈다.

새뮤얼 페피스는 1825년까지 해독되지 않은 비밀스런 속기법을 사용해서 1659년부터 1669년까지 일기를 썼다. 이는 영국 역사에서 특히 중요한 시기의 런던의 일상생활을 보여 주는 탁월한 연대기이다.

커피점은 17세기 런던에서 사교적이고 지적인 생활의 중심지였다.

 

제5장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다

 

모든 이론은 검증되어야 한다. 관찰된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라면, 아직 예측되지 않은 현상을 예견한 뒤 그것을 관찰하는 것은 또 다른 방법이다. 뉴턴은 지구의 양극이 평평하다는 것이 입증되리라고 주장했다. 1735년에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그의 예견을 검증해 보기로 결정했다.

중력이론으로 과학자들은 지구의 양극이 평평하고, 헬리 혜성이 다시 나타나며, 새로운 행성이 존재한다고 예견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150년 안에 사실로 밝혀졌다!

1704년 당시 62세인 뉴턴은 자신의 두번째 주요 저작인 《광학》을 발간했다. 《광학》은 인상 깊은 온갖 실험을 모아 놓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이론과 그 이론이 적용된 발견들을 포함하고 잇다. 다른 나라의 과학자들은 라틴어로 된 이 저서를 입수하자마자 이러한 실험들을 꾸준히 반복해 보았다.

자오선의 한 호의 길이를 재려고 떠난 페루 탐험대는 라플란드 탐험대보다 상당히 많은 장애물에 부딪혔기 때문에 2년 이상이나 작업이 지연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거두어 낸 성과는 놀라운 것이었으며 모페르튀의 팀이 이루어낸 것보다 더 훌륭했다고 인정받았다.

북극 탐험가인 피에르 루이 모로 드 모페르튀의 초상. 탐험에서 돌아오고 난 이후에 그린 것이다.

모페르튀와 부계르는 자기들의 성과를 《지구의 모습》에 1738년과 1739년에 각각 발표했다. 이 책들에는 통상적인 도표뿐만 아니라, 키토 근처와 라플란드의 토르네아강을 따라 행한 삼각측량을 설명하는 자세한 지도가 실려 있다.

《성서》에서는 '별'이 동방박사를 말구유로 인도했다. 혜성이었던가? 신성이었던가? 지오토가 그린 이 그림, <동방박사의 경배>에 보이는 '별'은 틀림없이 핼리 혜성이다. 이것은 1301년에 출현하여 사람들을 공포와 불안에 떨게 했다.

바이외 태피스트리에 나타난 1066년의 핼리 혜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이 해는 정복자 윌리엄이 헤이스팅스에서 앵글로색슨족과 격돌한 해이다. 이것은 재앙의 징조였다-대체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하지만 그것은 어느쪽의 재앙인가?

"그래서 진실은 / 그녀의 영향력을 넓히려고 / 아름다운 얼굴을 띠고 / 웅변도 복종시킨다." 이 4행시는 샤틀레 후작부인에게 헌정되었다. 그녀는 뉴턴의 체계에 관한 대중적인 논문을 발간했다.

핼리 혜성이 다시 나타날 때마다 이 사건을 관측하고 묘사하는 방법들이 개선되었다. 1835년의 판화(위), 1910년의 사진(아래).

허셜 망원경(아래)으로 보면, 천왕성은 작고 희미한 반점으로 보인다. 그리고 보이저 2호가 가까이 접근해서 찍은 이 합성사진에서도 상세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천왕성의 대기밀도가 매우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우 뚜렷하게 보이는 그 위성들은 그렇지 않다.

1835년에 알려진 태양계(핼리 혜성이 출현할 무렵). 천왕성은 보이지만 해왕성은 빠져 있다. 불규칙적인 천왕성의 운동은 더 멀리 있는 행성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다.

위르뱅 르베리에는 20세에 천문학에 관한 최초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나중에 천왕성의 운동을 연구했고 파리 천문대의 감독관이 되었다.

1986년에 나타난 핼리 혜성.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는 아이작 뉴턴의 무덤.

뉴턴 기념관을 위해 제작된 이 웅장한 설계도들은 18세기의 건축가인 피에르 쥘 델레핀(아래 사진의 위)과 에티엔 루이 불레(아래 사진의 아래)의 설계도이다. 하지만 실제로 건설되지는 않았다.

크룸스 언덕에서 바라본 왕립천문대(1680년경).

<최초의 금성 자오선 통과 관측>, 판화, 19세기.

 

 

 

'내가 읽은 책들 > 2015년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5-028 혼자 가는 미술관  (0) 2015.03.11
2015-027 만인보 ⑬ - 70년대 사람들  (0) 2015.03.10
2015-025 빅데이터 세상  (1) 2015.03.05
2015-024 만인보 ⑫  (0) 2015.03.05
2015-023 감각 · 착각 · 환각  (0) 2015.03.03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