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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23. 12:55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33 붓다 - 꺼지지 않는 등불

 

장 부아슬리에 지음, 이종인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33

 

082

시158ㅅ  28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28

 

기원전 6세기, 북인도의 왕자 싯다르타

가우타마는 가족과 부귀영화를 버리고 우주 만물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품고 그 답을 찾아 고행에 나섰다.

훗날 싯다르타는 붓다로 알려지며 전세계에 퍼진

불교의 창시자가 되었다. 실고 고통스러운 구도의 여정

끝에 붓다가 얻은 진리와 지혜의 실체는 무엇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그분이 오셨다.

온 세상을 비추는 분, 세상을 보호해 주시는 분,

눈먼 세상에 부패의 고통을 꿰뚫는 안목을

주시는 분. 당신은 선한 싸움의 승자가 되셨고

선업으로 당신의 소원을 성취하였다.

정법(淨法)으로 완성을 이루셨으니

당신은 중생의 갈애를 해갈시켜 주시리라.

수렁을 건너셨어도 단 한 점의 죄도

없으시니 가우타마는 이제 굳건한 대지 위에 섰다.

그분은 급류에 휩싸인 중생들을 제도하시리라.

대덕(大德)이여, 당신은 거룩하시니

온 세상에 당할 자 없으며,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같이 이 세상의 법에 물들지 아니하도다.

몽매에 빠진 이 세상을 깨울 수 있는 분,

지혜의 등불을 가지신 분, 그분은 당신뿐이로다.

오랫동안 고뇌를 겪고, 부패의 고통 속에서

괴로움을 받는 세상에 그분이 오셨다.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해 주시는 치유의 왕으로서."

<랄리타비스타라>, 23장

 

차례

 

La sagesse du Bouddha

 

제1장 붓다 시대의 인도

제2장 보살

제3장 깨달음과 첫번째 설법

제4장 가르침과 유행(遊行)

제5장 반열반(般涅槃)

제6장 가르침의 전파

기록과 증언

용어풀이

연보

참고문헌

그림목록

찾아보기

 

장 부아슬리에 Jean Boisselier

문학 박사이자 인도학 박사인 장 부아슬리에는 프랑스 동양학 학교위원, 프놈펜 박물관 큐레이터, 앙코르 유물보존위원회의 과학탐사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파리 동남아시아 예술, 고고학, 불교학의 권위자이며, 동남아시아 각국에서 고고학적 탐사를 벌이고 그 분야에 관한 200여 편의 논문과 11권의 저서를 낸 바 있다.

 

옮긴이 : 이종인

1954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으며, 한국 브리태니카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번역서로는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번 <문자의 역사> 23번 <셰익스피어>와 <절망이 아닌 선택> <증발> <때로는 낯선 타인처럼> 등이 있다.

 

제1장

붓다 시대의 인도

 

붓다와 불교가 처음 등장한 B.C. 6세기는 아시아 전역, 즉 그리스 동쪽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정신적 운동이 벌어지던 시기였다. 인도에서는 그러한 움직임이 그보다 훨씬 전에 시작되었다. 그곳에서는 예수가 지상에 오기 이미 2,000년 전부터 우주관, 자기인식, 존재의 운명 등에 대한 사유가 집단적 상상력의 원천이 되어 있었고, 이러한 사유는 그 어떤 것보다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히말라야에 위치한 신화적인 아나바타프타 호수는 사자, 황소, 말, 코끼리 등이 살고 있는 지역에 물을 대는 4대 강의 수원이라고 한다. 이 호수는 세계가 파괴되었다가 거듭날 때, 맨 마지막에 사라졌다가 맨 처음에 다시 나타난다. 17세기 그림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강은 겐지스이다.

인도사의 최고대기(最古代期)인 B.C. 3000년경에 번성한 인더스 문화권은 현재의 파키스탄, 남부 아프카니스탄, 인도 3주인 펀자브, 라자스탄, 구자라트를 포함한다.이 시대는 보통 인더스 전단계(B.C. 4000~2300), 인더스 단계(B.C. 2300~1750), 인더스 후단계(B.C. 1750~1000)의 3단계로 나눠진다. 이 문화권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 자연적인 원인 때문인지 아니면 서족에서 동점(東漸)해 온 아리아족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다. 메소포타미아 문화권과 공통점이 많은 인더스 문화권은 도시적, 방어적, 상업적(항구와 선착장) 체계 및 도로망으로 잘 알려져 있다. 위는 인더스 문화권의 중요한 정착촌인 모헨조다로를 재구성한 것이다. 신비한 기명(記銘)과 장식이 새겨진 인장들(가운데, 아래)에서도 종교생활의 단서를 찾아볼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10세기 전반의 크메르 신전에서 브라흐마(사암 조각)는 베다에 기술되어 있는 창조신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브라흐마-시바-비슈누를 삼위일체로 보는 신관(神觀)에서는 중앙을 차지한 최고의 신 시바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비슈누가 나왔다고 한다.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아나바타프타 호수는 신비한 다섯 산맥에 둘러싸여 있다. 호수의 한가운데가 열락(悅樂)의 땅인 간다마다나인데 이곳에는 온갖 경이로운 존재들이 산다. 이곳에는 열반을 얻은 벽지불(辟支佛, 깨달음을 얻었지만 남을 위해 설법하지는 않는 붓다)이 기거한다. 궁극적인 열반에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 나타나야만 도달할 수 있다. 벽지불들은 달의 변화에 따라 치러지는 정화(淨化)의식을 올리기 위해 독특한 향을 내뿜는 나무 밑의 특정한 장소에 모여 있다. 그 옆에 있는 건물은 불교경전에 언급된 '그들을 기다리는 좌석'을 상징한다. 이 낙원에서는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고 여기에 사는 존재들은 다른 존재에게 우호적인 감정만을 갖고 있다. 말과 코끼리들이 각각 색깔이 다른 것은 그들의 각기 다른 성질을 나타낸다.

원래 시바신의 시종이었던 마하칼라는 10세기 탄트라 불교에서는 수호신이 되고 8법왕의 하나가 된다. 이 그림은 18세기 티베트 그림에 끔찍스런 모습으로 나타난 마하칼라이다.

 

제2장

보살

 

역사상 실존했던 붓다의 생애는 전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 생애 속에는 이적과 사실, 성과 속, 천상과 지상의 세계가 혼재한다.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까지 붓다는 한 사람의 보살('깨달음을 얻게 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6세기경 인도 아잔타 석굴의 벽화. 붓다가 아니라 대승불교의 중요한 존재 보살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림의 주인공이 어느 보살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구세주다운 장엄함과 인자함이 잘 드러나 있다.

부왕이 마련해 준 정원으로 가기 위해 동서남북 문을 나서면서 보살은 그때까지 보지 못했던 어두운 현실과 직면하게 된다.

《자타카》의 내용을 담은 B.C. 2세기경에 제작된 조각에는 동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위 부조는 원숭이에게 끌려가는 코끼리를 조각했다.

소승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미래불인 마이트레야는 현재 도솔천에서 신으로 기거하고 있다고 한다.

대승불교에서 가장 유명한 두 명의 보살이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제작되었다. 위는 8~9세기에 캄보디아에서 제작된 청동조각상이고 아래는 11~12세기 중국 남부 타리 왕국에서 제작된 것이다.

《자타카》의 내용을 담은 예술품들은 기원후의 일상생활을 짐작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를 제공해 준다. 이 그림은 한 왕자의 이야기를 길게 다룬 <마하자나카 자타카>를 그린 것인데, 5~7세기의 아름다운 궁중생활을 엿볼 수 있다.

천에 그린 이 19세기 타이 그림은 베산타라 자타카의 내용을 담고 있다. 브라만들이 베산타라의 말 네 마리를 가져가 버리자 신들이 사슴으로 변하여 마차를 끌고 있다.

시련의 끝. 아버지인 시비왕은 베산타라 왕자의 아이들을 방탕한 주자카에게서 되사들였다. 베산타라 왕자 부부는 유형을 마치고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도성으로 돌아와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사랑하는 자식들과 재회한다. 붓다의 생애에서 주요 사건이 벌어질 때는 땅이 흔들리고 폭풍우가 휘몰아친다. 이 그림을 그린 무명의 화가는 베산타라 가족의 기쁨을 나타내기 위해 타이 전통무용에서 손동작을 빌려 왔다.

이 부조에서 보살은 속세로 내려오기 전 도솔천에서 신들에게 법을 가르치는 모습으로 나온다. 조각의 전반적인 구도가 완벽하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엄숙하다. 9세기 센트럴 자바 지역에서 융성한 불교예술의 높은 경지를 알게 해준다.

 

"보살은 도솔천을 떠날 차비를 갖추었다. 그가 그곳을 떠나오자 그의 몸에서 엄청난 광휘가 솟구쳐 나왔다. 그 빛으로 삼천대천(三千大千) 세계는 환하게 빛나게 되었다. 그 빛은 신광(神光)보다 더 환하고, 더 풍성하고, 더 멀리 퍼졌다. 일찍이 그런 빛은 이 세계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랄리타비스트라》 5장

 

마야데비 왕비의 꿈은 바르후트 유적(B.C. 2세기에 세워진 거대한 불탑 유적지)에서 나온 원형 부조에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커다란 코끼리는 붓다의 화신이 아니라 마야데비의 꿈속에 나온 코끼리를 그린 것으로 보아야 한다.

붓다는 갠지스강의 중부 유역, 그러니까 우타르 프라데시의 중부 지역에서 활동했다. 붓다의 탄신지 카필라바스투는 네팔 남부에 있다.

'인간이 손을 대기도 전에' 신들이 먼저 껴안은 보살은 땅 위에 똑바로 서면서 자신이 마지막 삶을 보내기 위해 태어났음을 알았다. 그리고 동서남북 사방으로 차례차례 일곱 걸음을 내딛었다.

티베트 그림이 늘 그렇듯이 대단히 장식적인 구성을 가진 이 그림은 붓다의 탄생 설화를 종합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이 그림에 묘사된 여러 세부사항은 《랄리타비스타라》에서 빌려 온 것으로 보인다. 오른쪽에는 붓다의 어머니인 마야데비 왕비가 '번개를 닮은 오른팔을 뻗쳐' 그녀를 반기는 듯한 무우수 나뭇가지를 잡는다. 왼쪽에는 땅에서 갑자기 솟아오른 커다란 연꽃 위에 보살이 서 있다. 그의 위에는 나가 왕인 난다와 우파난다가 하늘 속에서 상체만 드러낸 채 보살을 씻기기 위해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 두 줄기를 쏟아 붓고 있다. 그 위의 공중에는 진귀한 일산이 등장한다. 그리고 연꽃 위에 선 보살은 우주의 시방(十方)을 사자(獅子)와 같은 얼굴로 쳐다본다. 그의 얼굴에는 삼십이상이 나타나 있다. 이어 그는 동서남북 상하로 방향을 잡으면서 각각 일곱 걸음을 간다. 그가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연꽃이 땅에서 솟아오른다. 어머니의 태내에 신들이 마련해 둔 보전(寶殿)-붓다가 열 달 동안 어머니와 접촉하지 않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곳-은 탄신 후 대범천왕이 범천으로 가져가서 성물로 소중하게 보관한다. 보살의 유난히 긴 팔은 삼십이상의 하나이다.

"보살이 거처하게 될 첫번째 정원에는 온갖 좋은 위안물이 다 갖춰져 있었다. 소라고둥, 큰북, 중간북, 작은북, 비파 등이 저마다 아름다운 가락을 내뿜어 그가 깨어 있는 동안 형형색색의 소리를 빚으며 교향악을 들려주고, 나긋나긋하고 부드럽고 상냥하며 달콤한 목소리를 가진 여자들이 시종 매혹적인 노래를 들려주나니……."

《랄리타비스타라》 1장 

 

제3장

깨달음과 첫번째 설법

 

마지막 장애를 모두 극복한 보살은 마침내 오랜 탐구를 완성했다. 네 가지의 거룩한 진리(四聖諦)를 소유하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 되었던 것이다. 이제 보살은 자기가 발견한 법을 가지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그 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보살이 마라를 항복시킨 사실 - 또는 욕망에 사로잡힌 중생들 위에 군림하는 모든 사악한 힘을 복속시킨 사실 - 은 비유의 방법으로만 묘사할 수 있었다. 신자들에게 마라의 위협을 좀더 사실적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불교 경전 역시 이런 비유의 수법을 썼다. 이 그림이 경전의 내용을 그대로 재현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무튼 마라의 위협을 잘 드러내기 위해 가장 무섭고 악마적인 존재를 묘사하고 있다. 또 불교가 전파된 모든 지역에서는 악마를 나타내는 용어가 통일되어 있었다. 이 그림은 마라의 공격을 묘사한 중국의 비단 채색화이다.

스리랑카 폴론나루와에 있는 12세기의 석상은 선정에 들어간 붓다를 묘사하고 있다. 붓다의 생애 중 어떤 순간을 표현하고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법륜은 아소카왕 이래 불법과 포교의 대표적 상징이었으나, 5~6세기에 들어오면 인도에서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그러나 드바라바티 고대 왕국(오늘날 타이의 중부와 서부)에서는 7~9세기에 걸쳐 법륜이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어떤 때는 굉장히 커다란 법륜이 제작되었는데(지름이 1.83m가 넘는 것도 있다), 주로 기둥 위에 올려 놓거나 최초의 설법을 상징하는 네 마리 사슴으로 장식했다. 8세기에 제작된 위에 보이는 법륜이나 기둥에는 가끔 불법(佛法)을 새겨 넣기도 했다.

 

제4장

가르침과 유행(遊行)

 

자신이 발견한 법에 전적으로 헌신하기로 결심한 붓다는 그 가르침을 힘닿는 데까지 펼치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설법을 듣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고 고통받는 것을 몹시 안쓰럽게 여겼다. 그래서 불교의 근본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기로 결심한다.

목동과 암소. 중앙아시아 키질 동굴에서 발견된 벽화로 불법은 포교대상에 제한이 없고 누구에게나 이해될 수 있는 것임을 상징하고 있다.

승단에 들어가면 비구는 우선 여러 가지 계율을 지키도록 교육을 받는데, 이는 가르침을 쉽게 깨칠 수 있도록 돕는다. 이제 자신이 그 가르침을 널리 전파해야 한다. 광배(光背)에 둘러싸여 연꽃 위에 앉은 붓다가 가르침을 베푸는 장면을 표현한 이 벽화는 중앙아시아 쿰투라에서 발견된 7세기 작품이다.

인도 북중부 지역 산치에 세워진 B.C. 1세기 탑에서 발견된 위 부조는 붓다의 존재를 보리수 밑의 보좌, 불족석, 법륜 등의 상징물로 설명한다. 이 상징물들은 부조 속에 그려 놓은 사건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다. 위는 붓다가 카필라바스투로 귀향했을 때 석가족이 보는 데서 천도(天道)를 걸어간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아래는 범람하는 네란자라강을 묘사하고 있는데, 홍수의 피해자인 카샤파 형제(배를 탄 사람들)가 버린 희생제에 쓰이는 도구들이 강물에 떠내려가고 있다.

전지전능한 붓다가 될 사람이 잠든 아내와 갓난 아들을 내버려두고 도성을 떠났다. 가우타마의 아내는 남편이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혹은 자식을 아버지에게 소개하고 싶어했는지 알 수 없지만, 6년이 지난 지금 아들을 붓다에게 보이며 '유산'을 나눠 달라고, 왕위계승권을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 그림은 이 사건을 그린 5세기 그림이다. 그러나 불법의 발견 이외에는 어떤 것에도 미련이 없던 붓다는 가르침 이외에 유산으로 남겨 줄 것이 없었다. 아들 라훌라는 아버지 붓다의 권유로 붓다를 따라 반얀숲으로 가서 붓다의 두 수제자에게서 구족계를 받아 최초의 사미가 되었다.

B.C. 2세기에 바르후트에 있는 돌기둥에 조각된 원형부조이다.

슈라바스티에서 프라세나지트왕이 입회한 가운데 열린 토론회는 불교의 괄목할만한 교세 확장에 놀란 경쟁교단의 지도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런 토론회에서 승리자가 된 교단은 어떤 상황에서도 교세가 확장되게 마련이었다. 평상시에는 신통력 사용에 신중을 기했던 붓다도 이번만큼은 신통력을 보여 주어야 대중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먼저 '쌍둥이 기적(발에서 물을 뿜고 어깨에서 불을 뿜는 것)'을 보였고(위 부조) 뒤이어 '망고나무의 기적'을 보였다. 붓다는 망고 나무의 이파리에 자신의 균형잡힌 네 가지 모습-서 있고, 걷고, 앉아 있고, 누워 있는-이 드러나게 했다. 1734년에 제작된 아래 타이 그림은 네 가지 모습 중 세 가지만 재현하고 있다.

바르후트에서 나온 B.C. 2세기의 부조는 제석천의 신들 앞에 심어 놓은 마법의 나무 아래 앉아서 불법을 설파하는 붓다를 묘사하고 있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하늘에서 내려오심'은 인기 있는 일화였다. 불교예술가들은 붓다의 평온함과 신들의 커다란 기쁨을 즐겨 묘사했다.

불교의 지옥은 기독교의 연옥과 비슷하다. 지옥에 들어간 중생은 계율을 위반한 죄에 대하여 가혹한 징벌을 받고 다시 태어나게 된다. 방콕에서 나온, 지옥을 묘사한 이 그림은 도덕심을 고취시켜 준다.

 

제5장

반열반(般涅槃)

 

붓다는 마침내 자신이 마지막 삶의 마지막 해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안 붓다는 더욱 설법에 전념했고 여러 단체, 특히 곧 지도자를 잃게 될 승단의 앞날에 대해 많이 조언했다. "나는 이미 인생의 여로를 지나 나이 80이 되었다. 이 세상에 있을 때 자기 자신을 의지처로 하라. 법을 등불로 삼고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라."

바르후트 유적에서 나온 B.C. 2세기의 부조는 붓다를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코살라국의 프라세나지트왕을 그렸다. 다졌던 왕은 붓다에게 많은 보시를 했고 국정을 포함하여 많은 사항에 대해서 붓다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마가다왕과 쿠시나가라 일대의 여섯 부족 왕들은 말라족에게 붓다의 유골을 공평하게 나누어 갖자고 요구해 왔다. 그러나 붓다의 장례식을 자기네 땅에서 거행하고 또 주관한 말라족은 유골을 모두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다른 부족들의 공손한 요구가 무력시위를 앞세운 위협으로 바뀌었다. 산치 스투파에서 나온 부조는 미연에 그친 유골전쟁을 그리고 있다.

 

제6장

가르침의 전파

 

"오, 비구들이여! 이제 중생들을 위해 길을 나서라. 많은 사람들을 제도하고 자비심을 베풀어라. 불법을 설하라. 불법의 진수를 전하라. 수행이 얼마나 사람을 청정하게 하는지 보여 주어라."

《디뱌바다나》

(기원후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게송으로,

제목은 '신통한 공적'이라는 뜻임)

 

브라만 계급으로 태어난 수제자 마하카샤파는 근엄하고 철저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바로 이런 자질 때문에 그는 1차 결집을 주재할 수 있었다.

전륜성왕-바퀴를 굴리는 사람-은 삼십이상을 갖고 있다.

성물보관함이라든가 스투파 같은 불교기념물은 불교에서 처음 만든 것은 아니었다. 이들 기념물의 기원은 청동기시대나 철기시대에 세워진 고분건축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기원후가 되면서 이들 구조물의 모습은 원추형으로 진화하여 스투파의 특징을 갖추었다. 아누라다푸라의 루반벨리세야 다가바(아래)는 19세기에 원래 모습대로 복구된 스리랑카 스투파인데 아주 초기의 모습을 재창조해냈다고 평가되고 있다. 카투만두의 보드나트에 있는 스투파(위)는 붓다들의 특징이라고 여겨지는 눈썹 사이의 털과 두 눈을 그려 넣어 아름답게 장식했다. 스투파의 양식은 지역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어 카슈미르 북동부에 있는 라다크 스투파는 티베트 형식에 큰 영향을 받았으나, 타이 수코타이의 와트 마하타트에 있는 14세기 스투파는 원시적인 형태의 스투파를 약간 길게 늘여놓은 꼴이다(가운데).

산치 대탑은 B.C. 2세기 또는 1세기경에 아소카왕이 세운 스투파의 유적 위에다 덧세운 것이다. 돌로 된 난간과 네 개의 기념비적인 기둥은 B.C. 1세기에 만든 것이다. 경건한 신자의 시주로 제작한 조각들은 목공, 금속공, 석공 등이 모두 동원되어 작업을 벌였다고 한다. 연속되는 한 편의 이야기를 묘사한 이 조각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고대 학파(바르후트)가 즐겨 다룬 자타카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붓다의 생애와 불교의 역사에서 빌려 온 장면들이 더 선호되고 있다. 서쪽 기둥에는 바퀴가 그려져 있어서 최초의 설법을 상징하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한편, 세 개의 스투파는 유골의 분배를 그리고 있으며, 가장 아래의 수평 부분에는 마라를 굴복시킨 일, 보리수 아래에서의 성도, 유골전쟁, 쿠시나가라 포위 등이 새겨져 있다.

첫번째 설법이 이루어진 곳을 기념하기 위해 아소카는 사르나트에 15.2m 높이의 돌기둥을 세웠다. 아래 부분은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고 위 부분은 사르나트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불교사원 와트 프라 시산페트는 15-16세기에 당시 타이의 수도인 아유타야의 왕궁 근처에 세워졌다. 1767년 미얀마가 타이를 침략하면서 파괴된 이 사원은 그뒤 복원되지 않았다.

최초의 설법을 하고 있는 붓다.

관대한 원숭이의 이야기를 그려 넣은 2세기 부조.

중국 순례승 현장을 그린 7세기 초상화.

요하게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