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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5 萬人譜 16 사람과 사람들

 

고은

2004, 창비

 

시흥시대야도서관

SB001804

 

811.6

고67만 16

 

창비전작시

 

시인 고은은 20여년 전부터 한국사에 드러나고 숨겨진, 스러지고 태어나는, 추앙받고 경멸당하는, 아름답고 추악한, 떳떳하고 비굴한, 그 수많은 사람들을, 붓 대신 언어로, 그림 대신 시로, 거대한 민족사적 벽화를 그리고 있는 중이다. 거기에는 한국인이라면, 아니 인간이라면 지을 수 있고 짓지 않을 수 없는 숱한 표정들이 늘어서 있고 그들의 천태만상의 갖가지 삶의 모습들이 벅적거리고 있으며 절망과 한(恨), 운명과 열정, 기구함과 서러움의 삼라만상적 인간상들이 복작거리고 있다. 그것은 삐까쏘의 「게르니까」보다 더 착잡하고 내가 멕시코씨티의 정부청사 안에서 보았던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보다 더욱 거창한 서사를 담은 우리 한민족의 벽화를 이루고 있다. 고은은 『만인보』라는 벽화-민족사를 통해 우리의 고통스러운 역사를 되새김질하며 그 역사를 만들어오고 혹은 그것에 짓밟힌 만상의 인간들을 사랑하며 껴안고 뺨 비비며 삶의 진의와 세계의 진수를 손가락으로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고은이 그린 사람들에게서 한을 듣고 그가 그린 세계에서 향기를 맡으며 그의 만인화(萬人畵)에서 세계와 시대를 읽는다. 그리고 이제, 나는 여기 그가 그려준 거대한 벽화를 보며 분노와 치욕 그리고 운명과 사랑이 점철된 그의 '역사'를 듣고 오늘의 삶을 생각한다.

■ ■ ■ 김병익 문학평론가, 인하대 초빙교수

 

고  은  高  銀

1958년 처녀시를 발표한 이래 시 · 소설 · 평론 등에 걸쳐 130여권의 저서를 간행했다. 서사시 『백두산』『만인보』와 『고은시선집』 1 · 2 『고은전집』(전38권)을 출간했다. 현재 세계 시아카데미 회원(한국대표)이다.

 

차례

 

시인의 말

그 아낙 / 무명씨 / 김일성 / 마라도 애기무당 / 승렬이 무덤 / 에레나 / 최항 / 신건호 / 타인의 눈 / 홍길동 / 두 강물 / 제삿날 / 심유섭 영감 / 김동삼의 자손 / 호수 / 절망 / 노고단 밑 / 노예시인 / 아기 울음소리 / 소년 준호 / 신혼부부 / 김총각 / 만수 할머니 / 군고구마 장수 / 너와집 / 연애 / 귀향 / 가야금 / 수씨 딸 / 양형모 / 쯔쯔 영감 / 사진 한 장 / 고명욱 영감 / 설석우 / 그 홀아비 / 옥순이 옥분이 자매 / 엄면장 마누라 / 제석 / 신현구 / 5대의 피리 / 그해 8월 / 이휘소 / 어느 결혼 / 설악산 / 송탄 피난민수용소 / 다섯 시간의 결혼식 강좌 / 춘정 / 나 보기가 역겨워 / 사마귀 / 용돌리 두 집 / 이정순의 넋 / 사미승 등명 /과부 문씨 / 성혜랑 / 그해 겨울 들판 / 김석원 장군 / 여자 몸값 / 어느 부부 / 한 부엌 / 주저앉은 사람 / 고향 / 신국이 할아버지 / 노처녀 기명실 / 오르테가 킴 / 남자현 / 외팔이 박 / 국군 군번 1번 / 채병덕 / 신성모 / 다섯살 용식이 / 홍총각 / 수복 이후 / 폐허의 아기 / 빨갱이 1 / 빨갱이 2 / 빨갱이 3 / 빨갱이 4 / 꽃 금각(琴恪) / 교장 신진섭 / 여원재 / 변영재 / 한홍철 / 어떤 인민군 / 이종찬 / 허황후 / 김종원 / 거창 이복남 / 왕건 / 신중목 / 임채화 / 왕작제건의 씨 / 박영보 면장 / 시시한 원한인데 / 어떤 대동청년단 / 배꼽 깊은 사람 / 1 · 4후퇴의 아기 / 젖먹이 신이 / 이규완 자손 / 나, 김우남 / 할머니 / 간첩시절 / 김선기 / 돼지고기 세근 / 보안사 사병 정우신 / 제주도 중산간마을 / 옹기장수 맹길이 / 어떤 한약방 / 정순산 / 소위 학도병 / 망우리 묘지 / 칠석 장군 / 1950년 10월 3일 / 김윤근 / 인민군 / 추교명 / 최익환 / 다시 수복 / 나물도 이장 오영감 / 나물도 옆 무인도 / 장사꾼 오세도 / 늙은 농부 / 장봉도 / 영호 / 영호 누나 / 준모 고모의 마지막 밤 / 어떤 거지 / 경찰서 감방 10호 / 지장암 단풍 / 김춘보 / 이극로 / 이날치 / 상해 현계옥 / 남산 허백당 / 나윤출 / 이승태 / 사랑 / 노예 단천아 / 퇴계 모친 박씨

 

그 아낙

 

산정리 비탈

쉬웅! 꽝!

중포탄이 터졌다

돌덩이들

흙들

군용트럭에 탄 인부들

산산조각으로 솟아올랐다

솟아올라 흩어져 다 떨어졌다

 

자욱이 먼저 내려앉았다

 

한 아낙이 처박힌 머리 들고 일어섰다

왼쪽 팔이 남아 있다

어서 피 멎어라

 

타인의 눈

 

그 전쟁은

모르는 사람과도 주고받던 인삿말을 앗아갔다

느린 말씨도

순하디순한 말씨도 앗아갔다

말들이 빨라졌다

말들이 날섰다

가을 썬득썬득한 바람 속

사람들의 해맑은 눈빛들도 앗아갔다

차츰

사람뿐 아니라

소와 말의 눈도 자갈밭 머리에서 충혈되어 사나웠다

 

대전역전

껌팔이 아이 하나가

다른 아이 하나를 죽도록 패대고 있었다

삥 둘러서서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바람이 먼지를 일으켜세웠다

 

누구에게도

고향산천의 정든 얼굴은 없었다

 

너와집

 

밥 짓는 저녁연기 거룩하고 거룩하다

1945년 8월 10일 이전까지

한반도는 하나였다

1945년 8월 10일 이후

한반도는 둘이었다

북위 38도선을 그어

남쪽은 미군이 진주하고

북쪽은 소련군이 진주하기로 미국이 제안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은

한반도의 해방이었다

그러나

한반도의 분단이었다

 

한반도의 허리

강원도 인제군 소양강 언덕배기

옛 화전민

너와집 한 채에

북위 38도선이 지나갔다

 

북쪽 경비대가 차지했다

남쪽 경비대가 대들었다

서로 우리 집이라고

우리 땅이라고 외쳤다

공포를 쏘아대며

위협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묘안이 나왔다

이 집을

아예 허물어버리자

그러자

 

증조할아버지 적부터 살아온

두메산골 너와집이 없어졌다

그 집 주인

임봉술이 영감 62세

손녀 임가시나 14세

두 사람 이불짐 지고 떠났다

 

할아버지는 눈물도 없이 내내 울었고

손녀는 울지 않았다

다시 못 볼

저 아래 소양강을 보았다

 

사진 한 장

 

황해도 평산 젊은이 신도준이

1951년 8월

서부전선 임진강물

신새벽에 건넜다

아버지 어머니 젊었을 때 함께 찍은 사진 한 장

입에 물고

곧장 헤엄쳐 강을 건넜다

 

남쪽나라 서울이었다 폐허였다

거지노릇으로

남쪽 사람이 되었다

거지 작파하고

왕대폿집 심부름꾼이다가

구두닦이

구두 날라다주는 심부름꾼이다가

구두닦이 되어

 

판잣집 한 채 샀다

 

북의 고향 떠난 지 15년 뒤

그는 서울 충무로 3가 배우학원 이사장이었다

어머니 아버지 사진 확대해서

벽에 걸어두었다

누가 물었다

어느 시대 영화배우들이냐고

 

그 홀아비

 

1955년 겨울 영동 두메

경부선 기적소리가 멀리 들려왔다

기적소리 있으면

세상은 아직 세상 그대로였다

산들이 서로 벌거숭이

밤에는 덜덜 떨겠지

산들이 서로 벌거숭이 닮아

누가 누군지 몰랐다

 

오천산

미륵산

촛대봉

앞산

쌍봉리 뒷산

누가 누군지 몰랐다

 

아이들이 그리는 것은

벌거숭이 붉은 산

황토산

그리하여 황소 울음소리도

붉은 울음이었다

 

그런 산등성이 석양머리

한 사람 지친 걸음이 넘어온다

누굴까?

누구기는 누구

절반은 돌아버리고

절반은 제정신인 그 사람

 

마누라와

아이 둘 한꺼번에

박격포탄에 맞아죽고

황소 한 마리도 죽어버리고

혼자 살아남은 사람

머리숱 많은 이종수 그사람

 

소리는 기러기 소리인 듯

높은 소리였다

 

어허 3년 전쟁으로 몇백만명이 죽어갔다

그 죽음 가운데

이종수의 가족도 있었으니

빈 외양간 들어가

여보 마누라 여보 마누라

그리고

장섭아

차선아

차섭아

이 소리밖에 나오지 않는 그 사람

 

어느 결혼

 

결혼이 독립운동가 결합이고

신혼생활이 각각 독립운동이었다

아직 그들에게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었다 동지였다

 

1919년 1월 중국 남경

남경의 선교사 사택 한 방을 빌렸다

3 · 1운동 직전 창립한

신한청년당 당수 서병호

서간도와 북만 독립운동가 김필순이 하객으로 참석했다

 

김규식과 김순애의 결혼식

맞절을 했다

그리고 사진관에 가서 결혼 기념사진을 찍었다

 

서병호는

김규식의 손윗동서

김필순은

김규식의 처남

독립운동 가계의

동서가 되고

처남매부가 되었다 순수의 시대였다

 

신혼부부는 첫날밤 합방도 하지 못한 채

신랑은 제1차 세계대전 청산을 위한 빠리 강화회의에 갈 준비를 서두르고

신부는 빠리 강화회의를 받쳐줄

국내 봉기를 위해

부산으로 가야 했다

 

강연원고와 활동 구상 그리고 여권수속 배표 구하기

옷을 꿰매기

짐싸기로

며칠 밤낮이 지나갔다

 

하객 서병호는 본국으로

김필순은 만주와 연해주로 떠났다

1919년 3월이 오고 있었다

 

어느 부부

 

서울 후암동 일본인 병원 자리 한 내과의원에는 입원실이 셋이었다

입원환자 아홉

전쟁이 났다

으레 있어온 38선 충돌사건이 아니었다

사흘 뒤

나흘 뒤

서울을 내주어야 했다

 

환자들 하나둘 나갔다 의사도 떠났다

남은 늑막염 환자 백수길

나이 서른하나

몸 약한 아내의 간호밖에는

약도 없었다

 

6월 30일 콩나물국이 먹고 싶다 말하고 눈을 영영 감았다 야간중학 교사였다

서울 중앙청에는 인공기가 내걸렸다

아내는 다음다음해

피난지 칠곡 과수원 부근 판잣집에서 눈감았다

친정언니네가 입은 옷 그대로 종이같이 가벼운 시신을 묻었다

이런 죽음들 이런 삶들 전란 중에 있으나마나

슬픔도 별로 필요없었다

 

어떤 인민군

 

거창고을 산중에도

인민군이 왔다

인민군 몇명이

몇단위로 왔다

 

열아홉

열여덟

열여섯살짜리 풋내기였다

 

순 촌놈들이라

몇마디 말 오고가면

영락없는 산골아이들

밤 박꽃처럼

순박한 아이들

 

군기는 제법 엄했다

 

한 녀석이 외딴 마을에 가서

소녀를 꼬드겨 일을 벌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전우들의 심판으로

총살당했다

 

인민군은

국민학교 아이들에게

아니

인민학교 아이들에게 열심히 노래를 가르쳤다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이긴……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태백산맥에 눈 내린다 총을 들어라 출정이다

 

그리고 「김일성 장군의 노래」도 가르쳤다

가르치다가

가르쳐

함께 노래 부르다가

그 여름날과 함께

어느날 사라졌다

 

그뒤 국군이 왔다 무거운 철모 쓴 국군이 왔다

우물물 검사한 뒤

우물물 실컷 마시고 싸움터로 떠났다

 

어떤 거지

 

식민지 후기

대구에는 대동단 사건의 주동자

이동하(李東廈)가 경영하는

하해(河海)여관이 있다

 

경북 유림단 사건으로 감옥에 갔다 온

이봉노(李鳳魯)가 경영하는

이화(李華)여관이 있다

 

또 하나 항일운동가

윤홍렬(尹洪列)과 황옥(黃鈺)이 묵고 있는

본정(本正)여관이 있다

애국자 뒷바라지 황봉이(黃鳳伊) 여인이 경영한다

 

고등계 형사 감시를 받는다

자주 그 여관에

예비검속 나와

붙잡혀가면

일주일도

10여일도 갇혔다 온다

 

그런 여관거리에

거지 행색의 사람

몇번씩 오락가락한다

애국자 이상훈(李相薰)이다

 

저게 누구야

저 거지 누구야

물으면

바로 저분이

독립운동가 이상훈 선생이시다!

 

사람들은 그 거지가

대구거리를 걸어다니는 것만으로도

독립운동을 한다고 말한다

 

세 여관에는

이상훈

신재운

김찬기

허영 들이 자주 묵었다

하루 1원 정도의 숙박비 밀리기도 한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