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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9 재즈 - 원초적 열망의 서사시


아르노 메들랭, 프랑크 베르제로 지음, 장동현 옮김, 성기완 감수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34


082

시158ㅅ 29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29


L'epopee du jazz, Au-dela du bop


마일즈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 찰스 망거스,

오네트 콜먼, 그들의 이름은 곧 재즈이다. 열정과 회환이

녹아 탄생한 재즈는 1940년대부터 1960년대의

전성기를 거치며 흑인들의 리듬에서 전세계인의 음악으로

성장하였다. 이 시기에 프리 재즈, 웨스트 코스트 쿨,

하드 밥, 모들 재즈, 퓨전과 같은 다양한 재즈 스타일이 수많은

재즈 귀재들과 함께 태어났다. 새로운 음악 형식들이 탄생과

소멸을 거듭하는 가운데, 시간이 흐를수록 유독 더 많은

사랑을 받는 재즈의 매력은 무엇일까?


"재즈 - 아마도 그것은

문자 그대로 아무 의미 없는 음악일 것이다.

아니면 의미와는 작별을 했으리라,

오히려 그것에 집착하기 위해서."


알랭 제르베르,

<Le Matin>, 1982년 7월 9일


차례


제1장 비밥에서 무엇이 나올까?

제2장 하드 밥과 모던 재즈를 향해서

제3장 자유로 가는 길

제4장 변화로 가는 길

제5장 조각조각 찢어진 재즈

기록과 증언

그림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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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노 메를랭 Arnaud Merlin

1963년생인 아르노 메를랭은 소르본 대학과 파리고등음악원에서 음악을 공부한 뒤 저널리스트로 활동하였다. 잡지 <재즈 오 Jazz Hot> <재즈 아 파리 Jazz a Paris> <몽드 드 라 뮈지크 Monde de la Musique>에 참여했으며, <재즈의 비망록> <프랑스에서의 재즈>를 공동 집필했다.


프랑크 베르제로 Franck Bergerot

1953년생인 프랑크 베르제로는 일찍이 대중음악과 재즈에 심취하였다. <재즈 오> <몽드 드 라 뮈지크>에 글을 기고하고 있으며 파리 제10대학에서 재즈의 역사를 강의하고 있다.


옮긴이 : 장동현

1959년 안동 출생.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위대한 음악가 바흐> <시간의 도둑> <작지만 소중한 것들> <성공기업을 창출하는 폴러어십과 리더십> 등을 번역하였다.


감수 : 성기완

1967년생.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한 후 동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재즈 평론가로 활동중이다. <뉴스 플러스> <월간 음악> <상상> 등에 재즈와 록에 관한 글을 기고하였으며 <뮤직 비디오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공동 번역하였다.


제1장

비밥에서 무엇이 나올까?


부분적으로 흑인 노예들이 불렀던 영가에서 발전한 재즈는 유일하게 미국에서 발생한 음악형식이다. 그것은 흑인이 창조한, 흑인을 위한 음악이었다. 오랫동안 재즈는 단순한 오락거리로만 인식되었다. 그러나 1940년대 비밥의 출현과 함께 젊은 재즈 음악가들이 아방가르드에 합류했다. 밥이 모던 재즈의 문을 연 것이다. 이제 재즈의 기원과 아무 상관도 없는 아티스트들이 이 특별한 표현방식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찰리 파커(섹소폰을 불고 있는 사람)가 1949년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이며 교사였던 레니 트리스타노 및 다른 연주자들과 연주를 하고 있다.

마일즈 데이비스, 리 코니츠, 제리 멀리건(왼쪽부터)이 캐피틀 레코드사에서 《쿨의 탄생》을 녹음하고 있다.

위의 앨범을 발매한 프레스티지 레코드사는 스탠 게츠, 제리 멀리건, 마일즈 데이비스(첫번째 LP판을 위한 연주에서), 리 코니츠 6중주단(조지 러셀의 초현대적 작곡에 기초한, 전설적인 앨범 《에즈 세틱(Ezz-thetics)》에서)의 작품을 통해서 일종의 새로운 개념을 보여 주었다.

포 브러더스. 테너 섹소폰 세 사람과 바리톤 섹소폰 한 사람, 즉 스탠 게츠, 알 콘, 주트 심스, 서지 찰로프샘 마로비츠의 반주로 연주를 하고 있다. 이들은 실제로는 아무 관계도 없었지만 레스터 영의 백인 웨스트 코스트 추종자 가운데 진정한 형제들이었다.

리 코니츠원 마시는 레니 트리스타노 문하에 속했다. 트리스타노의 냉정함과 지적인 접근법은 비판의 대상이었다. 즉 그의 주관심사가 내적인 집중, 상호간의 듣기, 끝없는 상상, 일상적인 형식에서 벗어난 진정한 화법이라는 점을 모두가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아트 페퍼 + 일레븐(Art Pepper+Eleven)》은 웨스트 코스트 스타일의 전형이다. 음반을 만들어 낸 음악가들(피트 캔둘리, 잭 셸든, 버드 생크, 빌 퍼킨스, 리치 카뮤카, 러스 프리맨, 멜 루이스)의 면면이 그렇고, 이스트 코스트 밥(디지 길레스피, 찰리 파커, 셀로니어스 몽크의 작품들)과 비교되는 면이 그렇다. 마지막으로 캘리포니아 편곡가들이 공유한 소리의 우아함을 볼 때도 그렇다. 이 음반 안에는 웨스트 코스트 음악의 패러독스가 존재한다. 일부 음악가들이 안락하게 돈을 벌던 할리우드와, 아트 페퍼가 마약 중독자로서 일생을 보낸 샌 퀜틴 형무소 사이 어딘가에.

데이브 브루벡(웨스트 코스트 재즈의 극단적인 예인 유명한 <테이크 화이브(Take Five)>의 작곡가)은 다리우스 미요와 함께 공부했다. 그는 빌 스미스, 조 모렐로, 폴 데스먼드 같은 동반자들과 함께 캘리포니아 공동체의 외연을확대시켰다.

제임스 딘 같은 외모, 긴장이 풀린 듯한 스타일, 순수한 서정주의의 소유자였던 트럼펫 주자 쳇 베이커는 처음에는 마일즈 데이비스의 신통치 않은 모방자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후일, 루이 암스트롱 이후 최고의 즉흥연주가로 인정받았다.

펭귄 그림으로 유명한 드러머 셸리 만의 앨범 《더 스리 앤드 더 투(The Three & the Two)》는 현재 수집가들의 애호품이다. 이 실험성 강한 음악은 디지 길레스피의 빅 밴드와 마일즈 데이비스 9중주단에서 편곡가로 일하던 피아니스트 존 루이스의 열정어린 피아노 연주에 힘입은 바 크다. 루이스는 자신의 《모던 재즈 4중주단(The Modern Jazz Quartet)》(아래, 앨범 표지)과 함께 클래식 음악의 캐논 형식을 다시 찾았고, 작곡가 군터 슐러와 함께 '제3의 물결'을 만들어 냈다. 이 제3의 물결은 클래식 음악의 형식에 재즈의 즉흥연주와 필링을 결합한 것이다.

덱스터 고든은 쿨에 레스터 영의 가르침을 동화시킨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을 만들어 냈다.


제2장

하드 밥과 모던 재즈를 향해서


쿨이 웨스트 코스트에서 인기를 얻고 있을 때, 이스트 코스트의 흑인 음악가들 역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밥을 대규모 앙상블에 적합하게 만들었고, 형식을 풍부하게 만들었으며, 표현기법을 마스터했고, 새로운 리듬을 실험하고 있었다. 1950년대 중반이 되자, 그들은 미국 흑인 음악의 특징을 보존하기 위해 블루스와 흑인 영가에서 끌어낸 하드 톤(hardened tone)을 개발해 냈다.

마일즈 데이비스(위)와 셀로니어스 몽크(아래). 비범한 두 사람은 1950년대 중반 미국 흑인 음악을 풍요롭게 하는 데 주역이 되었다.

디지 길레스피의 빅 밴드(위)는 신세대 편곡가들과 일했다. 길 풀러, 조지 러셀, 존 루이스, 치코 오패릴, 테드 다메론(아래)이 그들이다. 다메론의 작품에는 오늘날 빅 밴드의 특징을 예고하는 유연함이 깃들여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의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밥 음악가들은 프랑스에서 선풍을 일으켰다. 1963년 녹음된 《파리의 버드 파웰(Bud Powell in Paris)》(위). 토미 포터, 보리스 비앙, 케니 도햄, 줄리엣 그레코, 마일즈 데이비스, 미셸 비앙, 찰리 파커, 1949년(아래).

패츠 나바로는 동료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코드 진행(chord progression)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그들이 코드 진행에 관해서 더 많이 알게 될 때, 코드 진행에 대해서 편안하게 될 때 우리는 진정한 모던 재즈를 만들게 될 것이다." 찰리 파커의 메시지에 들어 있는 근대성이 완벽하게 흡수된 것은 패츠 나바로와 그의 영향을 받은 클리포드 브라운을 통해서이다.

"그가 '내' 뒤에서 연주하는 것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몽크하고 같이 연주하려면 콜트레인처럼 연주해야 한다. 그 빈 공간하며 흐트러진 주법, 그는 늘 그런 식으로 연주하곤 했다."

마일즈 데이비스

《마일즈, 자서전》

1954년 12월 24일, 몽크와 마일즈 데이비스가 <와츠 뉴(What's New)>를 프레스티지사에서 함께 녹음했을 때 클리포드 브라운은 이 곡을 가수 헬렌 메릴을 위해서 즉흥연주를 했다. 이 곡은 재즈 역사에서 걸작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같은 해 브라운은 드러머 아트 블래키와 피아니스트, 호레이스 실버와 함께 하드 밥의 리더가 될 재즈 메신저스(Jazz Messengers)의 첫번째 공연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클리포드 브라운은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었는데, 그 당시 드러머인 맥스 로치와 함께 있었다. 그때 맥스 로치는 색소폰 주자인 소니 롤린스도 포함되어 있는 5중주단을 이끌고 있었다. 오늘날까지 트럼펫 주자 가운데 브라운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특히 윈턴 마살리스의 초기 레코드를 보면 그 점이 매우 두드러진다.

메카시 상원의원(위)이 미국의 공산당 세력 확대에 대해 지도를 펴놓고 설명하고 있다. 이 '마녀 사냥'은 반동의 물결에 휩싸인 미국 사회 구석구석으로 파고들었다. 얼마 후에 매카시즘은 퇴조했지만 흑인에 대한 대우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1959년 8월 26일, 마일즈 데이비스는 그가 일하던 버드랜드 앞에서 "지나가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난폭하게 체포되었다(아래).

이 포스터의 사이키델릭한 느낌은 1960년대의 팝 음악 청중이 솔에 보여 준 관심을 증명하고 있다.


제3장

자유로 가는 길


존 콜트레인은 1960년대 초반 모던 재즈의 주역이었다. 그는 자신들의 음악을 지배적인 백인 문화에서 해방시키려는, 분노한 젊은 흑인 음악가들의 리더였다. 흑인 인권운동을 배경으로, 재즈 음악가들은 미국 사회 주류의 심미안을 거부하고 프리 재즈라는 새로운 것을 창조해 냈다.

찰스 밍거스는 프리 재즈의 가혹한 비판자였다. 그는 프리 재즈가 이룩한 내용보다 그 업적에 더 비판적이었다.

첫번째 녹음(위, 《블루 트레인(Blue Train)》, 1957년, 블루 노트사) 후, 존 콜트레인은 비밥의 하모니 체계에서 탈출하려고 시도했다. 빌 에번스와 마일즈 데이비스(대표작으로 《카인드 오브 블루》, 1959년)의 모들 경향에서 그는 어렴풋이나마 해결책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 해결책 위에서 1961년, 그는 매코이 타이너, 지미 개리슨(아래), 앨빈 존스와 함께 유명한 4중주단을 결성한다.

콜트레인의 앨범 《옴(Om)》(위)과 파로아 샌더스의 《타우이드(Tauhid)》(가운데). 콜트레인의 1966년 이후의 밴드(아래).

《프리 재즈(Free Jazz)》

피아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콜먼과 돈 체리는 여전히 비밥에 등을 돌렸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는 두 악기 사이의 완벽한 앙상블을 유지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역동적이고 자발적인 관계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인종차별에 대한 저항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 사이에 미국 대도시에서는 흑인 거주 지역의 인구가 급격하게 늘었다. 1960년대에 와서 집단 거주 지역은 격렬한 인종폭동의 발원지였고, 이따금 경찰의 야만성을 드러내는 장소가 되었다. 인종차별(아래) 폐지에 대한 오랜 청원 끝에 지도자들은 단호한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사회적 평등과 문화적 차이에 대한 존중을 얻기 위한 투쟁은 갈수록 격렬해졌다. 아프리카로 돌아가자는 운동까지도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둘 정도였다(위).




마틴 루터 킹 목사(첫번째, 린든 B. 존슨 대통령과 만나는 모습)는 1963년 역사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워싱턴에서 25만명이 참여한 비폭력 행진을 벌인 것이다. 비폭력보다 대항 폭력을 선호한 맬컴 X(세번째)는 '블랙 파워' 운동의 선구자였다. 그 운동은 스토클리 카마이클과 '블랙 팬서즈'에 의해 전파되었다(네번째, 행진하고 있는 블랙 팬서즈).

많은 재즈 음악가들이 둘 이상의 악기를 연주했다. 대개 색소폰 주자들이 그랬다. 그들은 소프라노 색소폰에서 바리톤 색소폰, 심지어 플루트까지 다루었다. 프리 재즈는 이 현상을 체계화시켰다. 비록 '새로운 것'의 가장자리에 있었지만 롤랜드 커크는 둘 이상의 악기로 연주에 변화를 주었다. 그는 동시에 세 개의 색소폰을 불었고, 플루트로도 연주했으며, 호루라기와 사이렌을 이용하기도 했다.

두 개의 역사적인 프리 배즈 음반.

《오 예(Oh Yeah)》(위)는 찰스 밍거스가 취입한 고전적인 앨범인데 흑인 교회에 모인 청중들의 감탄사나 후렴구를 상기시키는 타이틀이다. 1959년 컬럼비아사에서 녹음해 혹평을 받은 유명한 <페이블즈 오브 포버스(Fables of Faubus)>는 《밍거스 아움(Mingus Ah Um)》(아래)에 들어 있다. 격렬한 풍자투의 가사는 아칸소 주지사 오벌 포버스가 1957년 리틀록에서의 학교 통합에 반대한 것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아웃 투 런치(Out to lunch)》

1960년대 후반, 앤서니 브랙스턴은 구조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프리 재즈가 이룩한 성과와 화해시켰다. 그의 악보(아래), 제목과 앨범 표지(위)는 그의 작업을 증명해 주고 있다.

1930년대 유럽 재즈의 선봉에는 미국의 즉흥연주들의 선도 아래 장고 라인하르트가 있었다.

아르헨티나의 색소폰 주자 가토 바르비에리(위)는 돈 체리의 유명한 《컴플리트 커뮤니언(Complete Communion)》에서 오네트 콜먼과 합류하여 유명해졌다. 그는 1968년 남아프리카의 피아니스트돌라 브랜드를 만나 결정적으로 변신했다. 어릴 때 남아프리카의 크호사족과 접촉한 적이 있는 피아노 주자 겸 밴드 리더인 크리스 맥그리거(아래)는 1964년 다인종 6중주단인 블루 노츠(Blue Notes)와 함께 아파르트헤이트를 피해 탈출했다. 유럽에 정착한 그는 브라더후드 오브 브레스(Brotherhood of Breath)를 만들었다.

 

제4장

변화로 가는 길

 

 

1960년대와 그 이후에 프리 재즈의 선구자들이 거부했던 것들을 흡수하려는 음악가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테크닉을 감정의 방해물로 보는 대신 포용했다. 재즈는 세계 곳곳에서 마주치는 록, 클래식, 기타 전통음악 형식에 영향을 받으면서 그 지평을 넓혀 갔다.

두 앨범 표지. 위는 마일즈 데이비스의 《네페르티티(Nefertiti)》이고, 아래는 조 핸더슨의 《인 앤 아웃(In'n Out)》이다.

어느 날 누군가가 듀크 엘링턴에게 아방가르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간단하게 대꾸했다. "아방가르드라면 나에게는 폴 곤잘레스가 있습니다."  이 말을 인용하면서 색소폰의 데이비드 머레이는 이렇게 덧붙였다. "만약 서정주의를 이야기하고 싶다면 폴 곤잘레스가 바로 그 화신입니다." 그러나 이런 평가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곤잘레스는 재즈사를 다룬 책들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빌 에번스는 1929년에 태어나 어린 시절 바이올린을 공부했다. 나중에 뉴올리언스에서 공부할 때 피아노로 바꿨다. 그는 1954년 무렵 하모니와 작곡을 마스터했다. 에번스는 1956년, 《뉴 재즈 컨셉션즈(New Jazz Conceptions)》에 이어 《에브리바디 디그즈 빌 에번스(Everybody Digs Bill Evans)》를 녹음했다. 그의 트리오 경력이 처음으로 성공을 거둔 것은 1961년 뉴욕의 빌리지 뱅가드에서 가진 라이브 녹음판이었다. 또한 1962년에 《인터플레이(Interplay)》에서 작은 그룹을 이끌기도 했다.

1965-1968년은 마일즈 데이비스에게 엄청난 창조의 시간이었다. 1965년의 《이에스피(E.S.P.)》, 1967년의 《소서러(Sorcerer)》, 1968년의 《피에 드 킬리만자로(Filles de Kilimanjaro)》가 바로 증거품이다. 그의 아내들-댄서인 프랜시즈 테일러, 배우인 시실리 타이슨, 가수인 베티 메이브리-의 얼굴이 차례대로 앨범 표지에 실렸다.

지미 핸드릭스(위)와 슬라이 스톤(아래)의 도움으로 마일즈 데이비스는 새로운 소리들과 리듬 스타일을 개발했다.

마일즈 데이비스가 1969년 8월에 녹음한 《비치즈 브루(Bitches Brew)》는 그가 몇 달 전 《인 어 사일런트 웨이》에서 시도한 방향전환을 확인해 주는 음반이다. 이후 그는 몇 시간 동안이고 계속해서 모음곡들을 연주했다. 물론 녹음하기 위해서는 편집을 해야만 했다. 그는 록 스타들(그들의 제한된 테크닉을 경멸하는 것이 누구의 눈에도 확실했다.)과 함께 무대에 선 대규모 페스티벌에서 청중을 압도했다. 이 음악에 감명을 받는 백인 재즈 음악가들의 수가 늘어갔다. 1960년대 중반 이후 개리 버틴과 그의 더블 베이스 주자 스티브 스왈로는 컨트리 뮤직의 뿌리로 돌아가 밥 딜런의 초기 포크 록을 재해석했다. 기타 주자 래리 코리엘은 강력한 증폭기를 씀으로써 얻을 수 있는 새처레이션(saturation)과 피드백의 효과를 탐험했다.

재즈 록의 등장과 아울러, 재즈 페스티벌은 그 모습이 많이 변했다. 전자악기들이 무대 위에 등장했고, 그럼 섹션의 장관을 자랑하기 위해 테크닉에서뿐만 아니라 무대 위의 자리도 더욱 확대하였다.

웨더 리포트는 네번째 앨범 《미스티리어스 트레블러(Mysterious Traveler)》로 일반 대중의 인기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컬럼비아 레코드사의 전폭적인 후원도 얻었다. 그룹의 상업적 야망은 1976년의 《블랙 마켓(Black Market)》으로 이어졌다. 그 앨범은 아프리카와 브라질 음악의 영향이 최고조에 달한 작품이다. 다음 앨범은 저 유명한 <버드랜드(Birdland)>가 들어있는 《헤비 웨더(Heavy Weather)》이다. 1980년에 나온 《나이트 패시지(Night Passage)》는 파스토리어스와 어스카인의 연주기량이 절정에 오른 작품이다. 새 리듬 섹션(빅터 베일리, 오마르 하킴)이 가세한 그들의 마지막 앨범 《스포팅 라이프(Sportin' Life)》는 1980년대 수작이었다.


제5장

조각조각 찢어진 재즈


이제 20세기가 시작되면서 탄생한 재즈의 현재 위치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가장 최근에 나타난 흐름들은 과연 재즈의 숨이 끊어져 가고 있다는 신호일까 아니면 전통이 확대된다는 신호일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은 재즈가 전세계적으로 주류에서 벗어난 다양한 음악 유형들에 영감을 주어 왔다는 사실, 즉 그것들이 이제 마감하려 하고 있는 세기를 위해 팡파르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앨범 《더 매저스티 오브 더 블루스(The Majesty of the Blues)》

'멀티컬러 필링'인 빌 프리셀, 제리 곤잘레스, 식선.

마일즈 데이비스와 디지 길레스피.

마일즈 데이비스.

셀로니어스 몽크.

아트 블래키.

가토 바르비에리.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