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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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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5 고갱 - 고귀한 야만인

 

프랑수아즈 카생 지음, 이희재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35

 

082

시156ㅅ  30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30

 

Gauguin, "Ce malgre moi de sauvage"

 

언제나 원시의 파라다이스를

동경했던 폴 고갱. 그의 삶이 끝없는 출발의

연속이었던 것은 필연이었다. 파리,

코펜하겐, 퐁타벤, 마르티니크, 아를, 마침내 타히티로,

"나는 평화 속에서 존재하기 위하여, 문명의 손길로부터

나 자신을 자유롭게 지키기 위하여 떠나는 것이다."

고갱은 세계를 보는 시작과 예술의

행로를 변화시켰다. 벌거벗은 원시 세계와 투박한

여인의 검은 몸을 통해.

 

남태평양으로

출발하면서 고갱이 꿈꾸었던 것은

목가적인 은둔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영감(랭보가

말한 "고대 향연의 비밀을 푸는 열쇠").

오래 전에 망각된 종교와 전통, 장대한 원시

신화의 발견이었다. 지나치게 문명화되고 서양화된

타히티의 현실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고갱은

프랑스령 파페에테의 영사였던 자크 앙투안

뫼랑후가 반 세기 전에 낸 민속지 보고서

<오세아니아 일주기>를 활용하여 <마오리의 고대

신앙>을 펴냈다. 이 책은 가장 많이 알려진

자신의 그림 몇 점과 수채화 삽화를 곁들여

그가 직접 펜으로 쓴 필사본이다.

고갱은 보라보라 섬에 살았다는 폴리네시아의

신과 여신으로 이루어진 라에오이 종족의

이야기를 여기에 담았다.

 

차례

제1장 화가의 길

제2장 브르타뉴와 열대를 처음 만나다

제3장 인디언과 섬세한 남자

제4장 이아 오라나 타히티

제5장 몽파르나스의 열대

제6장 마지막 정열의 불꽃

기록과 증언

그림목록

찾아보기

 

프랑수아즈 카생 Francois Cachin

오르세 미술관의 감독이자 국립 미술관의 행정 감독관인 프랑수아즈 카생은 <폴 클레> <이탈리아 미래주의> <마네> <고갱> 등과 같은 굵직굵직한 전시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폴 시냑> <드가, 조각과 판화> <고갱>의 저자이기도 하며, 특히 고갱에 관한 책은 여러 권 집필한 바 있다.

 

옮긴이 : 이희재

1961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했고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말하기의 다른 방법> <포크는 왜 네 갈퀴를 달게 되었나> <꿈과 상상의 여행> <추적> 등이 있다.

제1장

화가의 길

 

아득한 옛날부터, 화가의 길로 들어선 사람에게는 오직 모방이라는 과제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장래의 화가는 부모 대에서 자식 대로 면면히 이어져 온 전통에 따라 수업했다. 그는 코흘리개 시절부터 전색제와 테레빈유의 악취를 맡고 때로는 포즈도 취하고 때로는 조수 노릇도 하면서 자랐다. 도제살이는 집안에서 이루어졌으며, 화가의 첫 작업실은 자기 집 지붕 밑이었다. 그러다가 낭만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정반대 성향을 지닌 개인들이 점차로 나타난다. 화가가 되겠다는 그들의 욕망은 반역행위였으며, 도피는 참된 나를 탐구하는 대단히 개인적인 탐구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이었다. 세잔과 마네가 그러했고, 고갱 역시 그러했다.

젊어서 찍은 사진을 토대로, 고갱은 타계한 지 23년이 지난 1890년 어머니 알린의 초상화를 그렸다.

1838년, 플로라 트리스탄(1803~1844)은 낭만적 사회주의의 여걸이었다. 그녀는 방랑벽 있고 반항적인 손자를 매료시켰을 것이 틀림없는 제목을 단 자서전 《천민의 방랑》을 출간했다.

페루의 주전자.

1800년대의 리마.

아들의 서류더미 사이에서 발견된 알린 고갱의 젊었을 적 사진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고갱이 이국미를 강조하여 그린 초상화의 토대가 되었다.

 

"리마의 전통의상으로 성장(盛裝)한 어머니의 모습은 얼마나 우아하고 아름다웠던가. 비단 베일은 눈만 드러내고 얼굴을 거의 다 덮었다. 어머니의 눈빛은 따사로우면서도 흡인력이 있었으며, 너무도 맑고 자애로웠다."

폴 고갱

《전후(前後)》

고갱의 초기 걸작 중 하나인 <바느질하는 메테>의 집안 정경은 당시의 평화롭던 생활을 반영한다.

1883년, 고갱과 피사로는 각각 스승과 제자의 초상화를 그렸다. 고갱의 선에는 피사로의 거침없는 스케치에서 볼 수 있는 힘과 예리함이 결여되어 있다. 노화가의 견해로는 이 젊은 화가는 다소 성급하게 전업화가로 나서려 하고 있었다.

"누드화를 그린 현대 화가 중에서 현실의 음조를 이보다 더 격렬히 두드린 사람은 없었노라고 나는 감히 단언할 수 있다."

J. K. 위스망

<바느질하는 수잔>에 대하여

<파리 화가의 가정, 카르셀 거리>에서 우리는 메테가 피아노 연주를 하고, 한 남자(아마 화가 자신이리라)가 지켜서서 듣는 모습을 본다. 이 대담한 구도는 드가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장갑 낀 여가수>는 드가가 1879년에 전시한 일련의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1890년에 조각되고 채색된 가수 발레리 루미의 메달은 드가의 영향과 갓 입문한 조각가의 굉장한 재능을 함께 보여 준다.

1885년 코펜하겐, 고갱의 첫 자화상은 다락방이 배경이다. 아래 사진은 비슷한 시기에 찍은 폴과 메테 부부.

<이브닝 가운을 입은 메테 고갱>의 다소 판에 박힌 모습은 그녀가 조만간 맞이하게 될 쓰라림과 악다구니의 세계와 한참 동떨어진 것이다.

다소 모호한 상황(상가집에서 밤을 새는 듯)이 배경에 펼쳐져 있는 정물화.

잠자는 딸을 그린 애정이 담긴 그림.

이 정물화는 대상의 선정과 색채에 대한 고갱의 천재적 감각, 이국적인 것에 대한 초기의 동경을 보여 준다. 고갱은 만돌린을 직접 연주했으며, 나중에 타히티에도 갖고 갔다. 벽에 걸린 그림 - 고갱이 수집한 피사로나 기요맹의 작품 - 은 당시 인상파가 선호하던 하얀 액자를 두르고 있다.

 

제2장

브르타뉴와 열대를 처음 만나다

 

아늑한 가정생활로부터 하루 아침에 떨려난 고갱은 상황에 휩쓸려, 마치 고독이라는 가시밭길을 운명적으로 선택한 사람처럼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성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갱은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하고 존경을 얻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평화롭게 작품에 전념할 수 있어야 했다. 고갱은 몇 달째 붓을 놓고 있었다. 1885년 여름부터 그는 "그림도 그리고 생활비도 줄이기 위해서 브르타뉴의 한적한 시골로" 은둔하고 싶다는 희망을 품었다.

브르타뉴 전통의상을 입은 이 자화상(1886)은 퐁다방에서 그린 것인데, 샤를 라발에게 바쳤다가 나중에 손질하여 또 다른 화가 외젠 카리에르에게 헌정되었다. 위는 <브르타뉴 여인들의 춤>의 일부.

퐁다방 시절 고갱의 옆모습. 에밀 슈페네커에게 보낸 사진이다.

글로아네크 여관은 1880년대 초 화가들 사이에서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빳빳하게 풀을 먹인 머리쓰개를 쓴 여주인이 손님, 종업원과 함께 여관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결국 고갱 하나만 유명해진다.

<브르타뉴 여인들의 춤>(1886).

<라발의 옆모습이 있는 정물>(1886). 고갱과 이 젊은 화가는 마르티니크 여행을 앞두고 있었다.

화가 고갱이 열대를 처음으로 만난(1887년) 곳은 마르티니크섬이었다. 이듬해 겨울 파리로 돌아왔을 때 그의 눈부신 작품 <열대식물>은 펠릭스 페네옹 같은 비평가, 테오 반 고흐 같은 미술상, 테오의 형 빈센트 반 고흐 같은 화가에게 격찬을 받았다.

<망고 따기>의 스케치에 해당하는 <마르티니크 여인>(부분)은 테오 반 고흐가 사들였다.

브르타뉴 조끼를 입은 고갱과 두 자녀 에밀, 알린.

고갱은 반 고흐에게 보낸 편지(아래)에서 <씨름하는 아이들>(위, 1888년 6월)에 대해 이렇게 썼다. "당신이 틀림없이 마음에 들어 할 브르타뉴의 씨름 장면을 막 그림으로 완성했습니다."

에밀 베르나르의 여동생 마들렌의 초상화. 마들렌은 1888년 여름 퐁다방에서 고갱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이 발랄하며 자립심 강한 소녀에게 홀딱 빠졌지만, 실망스럽게도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고갱의 제자로 마르티니크까지 동행한 샤를 라발이었다.

그해 여름 에밀 베르나르는 퐁다방에서 <사랑의 나무 곁의 마들렌>을 그렸다. "나의 누이는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신비스러웠다. …… 고갱도 나도 그 당시 우리가 '성격'에 대해 품고 있던 관념으로 말미암아(동생의) 겉모습 이상은 그릴 수가 없었다." 고갱은 조언을 한다는 구실로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에 여자에 관한 고갱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이 매력적인 여인의 삶은 짧고 비극적이었다. 그녀는 약혼자인 샤를 라발이 폐결핵으로 죽은 지 1년 뒤에 똑같은 병으로 죽었다.

에밀 베르나르는 1888년 여름 <풀밭의 브르타뉴 여인들>을 그렸다. 단순화된 질감과 공간, 굵은 윤곽, 변조되지 않은 순수한 색채의 확산에서 이 젊은 화가의 대담한 스타일이 고갱에게 끼친 영향을 읽을 수 있다.

고갱이 일본 판화에 지고 있는 빚은 <벼랑에 선 소가 있는 바다 풍경>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굽어보는 조망, 명암 없는 색채의 확산은 서로 맞물린 형태들의 추상적인 조합을 만들어 내고 있다.

고갱과 샤플레는 브르타뉴의 생활상을 담은 꽃병을 함께 만들었다.

초심자의 작품?

마리 잔 글로아네크는 고갱이 퐁다방에서 묵었던 하숙집을 운영했다. 1888년 그는 여주인의 성명축일(聖名祝日, 본인과 같은 이름을 가진 성인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 : 역주)을 맞아 이 정물화를 선사했다. 한때 이 그림을 소유했던 화가 모리스 드니에 따르면 글로아네크 부인은 대담한 색상과 단순화된 새로운 스타일을 가진 이 그림을 탐탁치 않게 여겼고, "(그녀가) 그림을 받도록 하기 위해 고갱은 '마들렌 B'라고 서명하여 이것을 초심자의 작품으로 꾸몄다."

그림에서의 상징주의

1888년 늦여름에 그린 <예배 뒤의 환상> 또는 <천사와 싸우는 야곱>은 나중에 선명한 빛깔과 단순성을 부르짖으면서 고갱과 퐁다방의 젊은 화가들이 주장했던 종합주의 화풍의 선언문 구실을 하게 되었다. 이 그림을 논한 장문의 글에서 비평가 알베르 오리에는 고갱에게 상징주의 미술학교의 교장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나는 이 인물들 속에서 매우 소박하고 미신에 가까운 단순성을 성취했다고 생각합니다. 전반적으로 이 그림은 아주 무거운 느낌을 줍니다. 이 그림에서 풍경과 싸움은 예배가 끝난 뒤 기도를 올리고 있는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입니다. 자연스러워 보이는 사람들과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는 풍경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의 대비는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1888년 퐁다방에서 빈센트 반 고흐에게 쓴 편지

우리는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강아지 세 마리가 있는 정물>을 그린 1888년 여름 무렵 고갱이 "어린아이처럼 그리기"를 꿈꾸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강아지 세 마리, 컵 세 개 등 그림의 주제 자체가 동심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초보적이며 일견 서툴러 보이는 기법인데, 이것은 원시적 소박성에 대한 의도적 추구를 반영하고 있다.

 

제3장

인디언과 섬세한 남자

 

테오 반 고흐는 고갱에게 참다운 관심을 가졌고 그의 천재성을 믿었던 최초의 미술상이었다. 테오 덕분에 고갱은 1888년이라는 중대한 해에 흔들림없이 그림에 몰두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고갱은 자신이 만들기 시작한 혁신적인-그러나 곧 물의를 빚게 되었던-작품을 테오에게 보냈다. 고갱은 마르티니크에서 돌아온 뒤 빈센트 반 고흐와 만났다. 그러나 당시만 하더라도 고갱은 빈센트를 단지 미술상의 형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었다.

고갱은 아내 메테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이렇게 묘사한 적이 있다. "내 안에는 두 가지 기질, 곧 인디언과 섬세한 남자가 공존해 있다는 걸 알아주기 바라오." 예술가, 고독한 영웅은 남편, 가장과 공존하고 있었다. 1889년 말 그는 자신을 후광을 단 성자 혹은 마술사로 그렸다. 그림 속의 인물은 예언의 상징인 뱀을 들고서 비법을 전수하고 있다.

'나의 벗 빈센트 (반 고흐)에게'라는 글이 적혀 있는 고갱의 자화상 <레 미제라불>. 두 사람 공동의 친구였던 젊은 화가 에밀 베르나르의 옆얼굴도 오른쪽 위에 보인다.

빈센트의 동생이며 그의 정신적 지주, 재정적 후원자였던 테오 반 고흐는 유명한 부조 & 발라동 화랑에서 현대미술을 담당하고 있었다.

 

"동심이 어린 꽃송이와 소녀 같은 배경은 우리의 예술적 순수성을 나타냅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에 대해서 말한다면, 사회의 억압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사랑과 힘은 부랑자처럼 바뀝니다. 우리 인상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나 자신을 장발장처럼 그림으로써 나는 나 개인을 넘어서서 사회로부터 비참하게 희생된 우리 모두의 자화상을 그리려고 했습니다."

1888년 10월 반 고흐에게 보낸 편지

아를에 있는 시인의 뜰에서 보낸 시절에 제작된 동일한 장면을 그린 그림 두 점. 한때는 반대로 간주되기도 했지만, 고갱의 <아를의 노부인>(위)은 반 고흐의 유화(아래)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카페에서>(1888년 11월)는 아를의 라마르틴 광장에 있는 종착역이라는 카페의 내부를 담았다. 카페의 내부를 담았다. 카페 주인 지누 부부는 반 고흐를 위해 자주 포즈를 취해 주었다. 지누 부인은 반 고흐가 그린 유명한 <아를의 여인>의 모델이기도 하다.

"나는 그저 그렇게 여기지만 빈센트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카페(장면)를 그렸다. 사실 그것은 나에게 어울리는 주제가 아니며 천박한 술집의 색깔은 나하고 맞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작품에 나타나 있을 때는 그런 대로 보아 주지만 내 그림에서는 조금 망설여진다. …… 위에는 붉은 벽지와 창녀 셋이 있는데 그중 한 명은 돌돌 마는 종이를 온 머리에 처발랐다. …… 전경에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아를의 여인이 있다. …… 한 줄기 파란 연기가 가로지르기는 하지만, 앞의 여인은 너무나 진부하다."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갱이 본 반 고흐

"빈센트가 아끼는 주제인 해바라기 정물화를 그리는 모습을 그려 보자는 생각이 우연히 떠올랐다. 초상화를 완성하여 보여주니까 그는 이렇게 말햇다. '나긴 난데 어쩐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뒤에 반 고흐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그림에 대한 자기의 느낌을 몇 마디 덧붙였다. "나긴 난데, 예전의 극심한 피로와 과열 상태에 있었던 모습 같다."(1889년 9월 10일) 이젤 옆의 해바라기는 돗자리를 깐 의자 위에 놓여 있다. 나중에 반 고흐는 고갱의 부재를 상징하기 위하여 <고갱의 의자>라고 제목을 단 그림에서 촛대 하나만 놓여 있는 텅 빈 의자를 그렸다. 위에서 조망하는 시선과 탈중심적인 구도는 갈등과 실의를 전달하는데, 그 점에서 이 작품을 심리적 초상으로 읽는 시각도 가능하다.

아를의 브르타뉴 여인

<아를의 포도 수확 : 궁핍한 생활>에서 고갱은 전경에 보이는 여인의 피로와 실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페루의 미라(아래)와 같은 자세로 그녀를 그렸다.

 

"위의 크롬옐로 빛깔을 배경으로 삼각형을 이룬 자줏빛 포도나무들 왼쪽에는 회색 앞치마를 두른 검은 옷의 브르타뉴 여인이 있네. 검은 보디스를 껴입고 연한 청록색 드레스를 입은 두 여인이 허리를 숙이고 있지. …… 아를에서 본 어떤 포도원을 그린 그림이라네. 그 안에 브르타뉴 여인을 집어 넣긴 했지만, 정확성이 다는 아니잖아! 내가 올해 그린 최고의 유화라네!"

에밀 베르나르에게

<황색 그리스도>(1889년 가을, 위)의 모델은 퐁다방 부근의 트레말로에 있는 한 성당의 채색 나무 십자가상이다. <예배 뒤의 환영>에서처럼 고갱은 자신이 매일 접했던 브르타뉴의 여인들을 성화 안에 등장시켰다. 아래는 퐁다방 시절 입고 다니던 브르타뉴 전통의상 차림을 한 고갱의 사진이다.

최근에 완성한 <황색 그리스도>(거울에 비쳐 거꾸로이다)와 자화상 형식을 취한 도자기 앞에 선 고갱의 자화상(1889-1890). 그는 이 담배 넣는 항아리를 마들렌 베르나르에게 주었다가 퇴짜맞았다. 그녀는 편지에다 이렇게 썼다. "그것은 야만인 고갱의 머리와 왠지 모르게 닮았다."

고갱은 동일한 주제를 다양한 매질로 재현하곤 했다. 1889년 봄에 그린 유화 <파도 속에서>(위)는 고갱이 파리 전시회에서 보았던 화장실 안의 여인을 그린 드가의 누드화에서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파도의 모티프와 농담 없는 색채의 드넓은 확산은 일본 목판화의 영향이다. 채색 부조 <신비로워야 하리니>(아래)는 이 장면을 재현하면서 동시에 타히티 누드화를 예감케 한다.

비록 모델에게 퇴짜를 맞기는 했지만 마리 안젤리크 사트르의 초상화 <아름다운 천사>는 고갱이 타히티 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1891년 드루오 호텔에서 열었던 작품 공매에서 드가에게 팔렸다. 테오 반 고흐는 그림을 넘겨받은 후 형에게 어떻게 편지를 썼다. "일본 목판화처럼 …… 아주 정교하게 배열된 그림이야. …… 여인은 마치 암소처럼 보이지만 소탈하고 신선한 맛이 있어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일게 만들지."

1888년 여름 폴 세뤼지에는 고갱의 지도아래 농담 없는 순수한 색채만을 이용한 <사랑의 나무>를 그렸다. 훗날 나비파로 알려지는 화가집단은 이 채색나무 패널에 <부적>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었다. 그들은 볼피니 카페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고갱과 그 동료들의 그림을 본 뒤 흠뻑 빠져들었다.

1889년에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는 기계진열실(철거됨)과 에펠탑 같은 거대한 철제 구조물의 각축장이었다. 아래는 막 문을 연 에펠탑의 밑부분이고, 위는 자바민속관에서 춤을 추는 무용수들이다.

고갱은 1889년 파리에서 잠시 기숙했던 슈페네커의 집안 분위기를 냉소적으로 그렸다.

머리가 잘린 이 자화상(위)은 고갱이 스스로를 예술때문에 처벌당한 범죄자로, 현대의 그리스도로, 후대의 오르페우스로 보았음을 암시한다. 상징이기는 했으나, 이것은 아래에 있는 <일본 판화가 있는 정물>에서 꽃을 품은 실용품으로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

친구요 제자였으며 마리 앙리의 여관에서 함께 묵었던 메이에르 드 한의 목조 흉상.

 

제4장

이아 오라나 타히티

 

"나는 평화롭게 살기 위해, 문명의 껍질을 벗겨 내기 위해 떠나려는 것입니다. 나는 그저 소박한, 아주 소박한 예술을 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염되지 않은 자연에서 나를 새롭게 바꾸고 오직 야성적인 것만을 보고 원주민들이 사는 대로 살면서, 마음에 떠오른 것을 마치 어린아이처럼 전달하겠다는 관심사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원시적인 표현 수단으로밖에는 전달되지 못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올바르고 참된 수단입니다."

1891년 쥘 위레와 가진 《에코 드 파리》지 회견에서

도착하고 얼마 뒤 고갱이 그린 <도끼를 든 남자>(위)는 단순하고 평온한 타히티의 일상생활을 특징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고갱은 테하마나라는 여인(아래)과 2년을 함께 지냈다.

작은 식민지 항구 파페에테는 1800년대 말에 이미 서구화되었다.

작품 <나페아 파아이포이포(언제 결혼하세요?)>를 위한 습작.

<베란다의 집안 풍경>. 흔히 <시에스타>라고 불린다(1892). 등을 보이고 앉은 방문객은 친구들과 그늘에서 담소를 나누기 위해 왔다. 다림질하는 모습도 보인다.

<타히티의 식사>(1891)는 굳은 표정으로 무언가를 의식하고 있는 세 아이를 그린 정물화이다. 앞에 바나나(타히티어로는 '페이') 뭉치가 보인다. 바나나는 그 화려한 색상과 강한 장식적 효과때문에 고갱이 즐겨 썼던 모티프이다.

<타 마테테>(장터)는 실제로 목격한 장면을 담고 있다. 파페에테의 젊은 창녀들이 진열대의 물건들처럼 나란히 앉아 있다. 테베의 이집트 무덤 벽화를 재현한 듯한 느낌도 준다. 고갱은 테베 벽화의 사진을 갖고 있었다.

고갱이 도착해서 바로 그리기 시작했던 타히티의 수많은 매력적인 얼굴 가운데 하나.

《노아 노아》에 따르면 <꽃의 여인>(바히네 노 테티아레)은 고갱 앞에서 포즈를 취해 준 최초의 타히티 여성이었다.

<이아 오라나 마리아>는 아베 마리아의 타히티 말이다. 1891년 고갱은 《성서》의 한 대목을 남태평양적 시각으로 해석한 이 작품에 대해서 다니엘 드 몽프레에게 이렇게 썼다. "노란 날개를 단 천사가 두 타히티 여인에게 마리아와 예수를 가리키고 있네. 마리아와 예수도 타히티인이고, …… 인물들은 허리에 적당히 두르는 '파레우'라는 꽃무늬 무명치마만 걸치고 있어. 꽃이 핀 나무와 산의 배경은 아주 짙고, 길은 연보라, 앞은 초록색이야. 왼쪽에 바나나가 있지. 이 그림은 그런 대로 내 마음에 드는군."

<파타타 테 미티>(바닷가)는 1892년에 그렸다. 헤엄을 치는 타히티 처녀들의 모습은 화가의 눈을 사로잡았으리라. 그곳은 원시의 에덴. 공짜로 쓸 수 있는 우아한 모델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풍부한 색상과 장식적인 패턴(앞부분)이 고갱의 그림에서 점차 중요한 몸을 차지한다.

<테 나베 나베 페누아>(환희의 땅)의 젊은 타히티 여인은 보로부두르의 사원 부조에 나오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고갱은 보로부두르 사원의 모형을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보앗다. 이 타히티의 이브는 사과가 아니라 공작 깃털을 닮은 가공의 꽃을 들었으며, 뱀-타히티에는 뱀이 없었다-대신 진흥 날개를 단 전설의 도마뱀이 등장한다.

테하마나의 이 정교한 목각상은 옆머리에 꽃을 단 고갱의 여인을 보여 준다.

점묘법으로 그린 수채화는 <테 나베 나베 페누아>(환희의 땅)의 변형으로 고갱이 지상에서 찾아낸 낙원 타히티의 이브를 그리고 있다.

《노아 노아》에 나오는 두 장의 삽화. 위는 폴리네시아의 신, 히나와 파투를 그린 수채화에다 히나와 파투를 묘사한 목판화와 꽃으로 치장한 한 타히티 개종자의 사진을 덧붙인 작품이다.

<메하리 메투아 노 테하마나>(테하마나의 선조)의 귀티가 흐르는 여인은 고갱의 정부이다. 뒤에 보이는 환상적 장식은 고대의 신비한 분위기를 낳기 위한 장치이다(위). 아래의 스케치는 이 작품을 위한 밑그림이었을 것이다.

<마나오 투파파우>(저승사자의 눈길)의 모델이 반대방향으로 누워 있는 수채화는 고갱이 나중에 파리로 돌아갔을 때 타히티를 무대로 한 자신의 작품들에 대한 세인의 거리감을 줄이기 위해 쓴 《노아 노아》 필사본의 삽화로 다시 등장한다.

필사본 《마오리의 고대 신앙》에 나오는 삽화.

저승사자

고갱의 타히티 작품전이 주목을 받지 못한 데는 타히티어로 된 그림 제목도 한 가지 이유로 작용했다. <마나오 투파파우>라는 이 작품만 해도 그렇다. 화단에서는 원주민 신화의 조명을 내건 이런 사이비 민속주의에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예컨대 피사로는 고갱이 "오세아니아의 원주민을 약탈한다."고 몰아세웠다. 고갱은 이해받으려는 욕심이 앞선 나머지 지나치게 작품의 의미를 드러내는 위험을 감수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갱을 진정으로 아끼는 이들은 이런 설화성의 부각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타히티 유화의 풍요한 이국미는 드가에게 감동을 안겼다. 이 모델의 얼굴과 투파파우(저승사자)는 고갱이 1894년 파리에서 제작한 목판화(아래)에 다시 나타난다.

초호의 한가로움

목가적인 1892년 작 <아레아레아>(기쁨)에서 한 여인이 타히티 피리(vivo)를 불고 있고 해변의 나무 그늘 아래에서 그녀의 친구가 가만히 듣고 있다. 1893년 뒤랑뤼엘에서 열린 고갱의 타히티 작품전을 찾은 사람들은 특히 앞에 보이는 빨간 개에 관심 혹은 두려움을 가졌다. 뒤편의 여인들은 폴리네시아의 토속신앙에서 전통무 타무레를 추고 있다.

"순수한 베로네제 그린, 순수한 주홍빛"

고갱은 다니엘 드 몽프레에게 쓴 편지(1892년 12월)에서 이 그림을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으로 꼽았다. "일단은 <타히티의 전원>이라고 프랑스어 제목을 붙였네. 그에 해당하는 카나카어를 찾을 수가 없었거든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순수한 베로네제 그린 하며 순수한 주홍빛 하며-오래 된 네덜란드 그림이나 고색창연한 태피스트리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드네."

이 대형 파스텔화는 <파라우 나 테 바루아 이노>(악마의 유혹)의 주인공을 위한 습작이다. 제목과 처녀의 수줍은 모습은 그 그림의 주제가 낙원에서 쫓겨난 이브라는 것을 말해 준다.

<껍데기를 쓴 신상>. 고갱의 '초야만적인 조각' 중 하나이다. 식인종 이빨을 가진 이 무시무시한 신은 보로부두르 유적의 불상처럼 반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

 

제5장

몽파르나스의 열대

 

1893년 12월. 고갱은 재능을 인정받고 경제적으로 안정을 누리며 무엇보다도 자신을 아껴 주던 친구들을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파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고갱은 혼자였다. 아니 혼자나 마찬가지였다. 반 고흐 형제, 알베르 오리에, 메이에르 드 한은 죽었고, 라발은 죽어 가고 있었으며, 메테, 몽프레, 세갱은 멀리 있었다. 그리고 피사로, 에밀 베르나르와의 관계는 악화되어 있었다.

위의 누드화의 모델은 고갱의 애인인 안나 라 자바네즈이다(1894). 아래는 《노아 노아》에 나오는 목판화이다.

상징주의 시인 샤를 모리스. 그는 고갱의 《노아 노아》 원고를 다듬어 주었다.

고갱이 뒤랑 뤼엘 전시회에서 포즈를 위했다. 그의 뒤편에 드가가 개인소장품으로 구입한 <테 파아투루마>(사색하는 여인)의 일부가 보인다.

베르생제토리가(街)에 있는 고갱의 화실을 자주 찾았던 스웨덴의 첼리스트 프리츠 슈네클루트. 고갱은 드가의 오케스트라 그림을 염두에 두었던 듯싶은데, 첼로의 장식적인 형태와 주황빛 색체를 강조하고 있다. 이 그림은 고갱의 글 속에서 드러나는 음악과 색채 사이의 비유를 연상케 한다.

이 목판화들은 고갱이 《노아 노아》를 위해 새겼던 일련의 작품 가운데 일부이다. <테 파루루>(사랑의 몸짓, 위), <테 나베 나베 페누아>(환희의 땅)의 두 판본. 가운데는 흑백, 아래는 색을 넣었다.

1894년 고갱의 화실에서 어울렸던 사교 및 음악 연주 모임. 첼리스트 프리츠 슈네클루트는 복판에 앉아 있다. 서 있는 사람은 (왼쪽부터) <부적>을 그린 화가 폴 세뤼지에, 안나 라 자바네즈, 그리고 뒤에 나비파로 활동하는 조각가 조르주 라콩브이다.

1898년 무렵의 안나 라 자바네즈. 알폰세 무차 촬영. 아래는 1894년에 그린 그림의 일부로 안나의 발치에 앉아 있는 애완 원숭이를 표현하고 있다.

1891년 1월에 고갱이 그린 말라르메의 초상화. 고갱의 유일한 에칭화이다.

고갱의 화실은 <모자가 있는 자화상>의 무대가 되었다. 배경에서 그가 집착했던 그림 <마나오 투파파우>. 타히티 천을 씌운 긴 의자의 일부, 그가 노랗게 칠한 벽을 볼 수 있다. 고갱은 이 그림 뒷면에다가 친구인 윌리엄 몰라드의 초상화를 그렸다.

유명한 양털 벙거지를 쓴 화가의 사진(아래). 이 사진을 기초로 한 <팔레트가 있는 자화상>(위)은 고갱을 옹호했던 상징주의 시인 샤를 모리스에게 헌정되었다.

"이제까지 그 누구도 하지 않았던 시도라고 나는 자신 있게 주장한다." <오비리>를 두고 고갱은 이렇게 말했다.

"이 기이한 형상과 잔혹한 수수께끼. 스테판 말라르메에게."라는 글귀가 적힌 <오비리>의 목판화.


제6장

마지막 정열의 불꽃


1895년 6월 28일 파리 역 리옹 행 개찰구.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고갱은 울고 있었다. 최후의 남태평양 여행이 막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병고와 술과 절망에 찌든 고갱은, 마침내 그 어떤 객기도 허세도 음모도 퇴색시키지 못할 참다운 고결함에 이르게 된다.

<백마>(위)는 하얗다기보다는 녹색빛이 감돈다.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말 타는 타히티 사람들은 두번째 타히티 체류 시절에 고갱이 즐겨 다루던 주제이다. 이 무렵 고갱은 울창한 녹음에 싸여 있는 사람들을 자주 그렸다. 아래는 날짜가 밝혀져 있지 않은 타히티 여인들의 스케치.

고갱이 죽은 직후 빅토르 세갈렌은 마르키즈 제도에 있는 고갱의 작업실을 찾았다. 발견된 유작 중에는 <골고다 부근의 자화상>(1896년 여름)도 있었다. 세갈렌은 이 그림을 이렇게 평했다. "아주 뛰어난 …… 자화상. 멀리 십자가처럼 보이는 것을 배경으로 다부진 상체를 곧게 편 모습이다. 땅딸막한 체구에 입술은 아래로 처져 있고 눈꺼풀은 무겁다.

고갱은 외동딸 알린을 가장 아꼈다.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적은 《알린을 위한 메모》도 딸에게 바쳤을 정도였다. 딸의 사망 소식에 접한 고갱은 1897-1898년 겨울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테 아라이 바히네>. "방금 대작을 완성했네. 가로 1.39m, 세로 1m 크기야. …… 알몸의 여왕이 녹색 융단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지. …… 그렇게 깊은 울림을 주는 색은 나도 난생 처음 보았다네."

몽프레에게

1896년 4월

<바이트 구필>은 파페에테의 부유한 변호사의 어린 딸을 그리고 있다. 타히티에 체류하는 동안 고갱이 화료를 받고 백인을 위해 그린 몇 안 되는 그림 중의 하나이다.

고갱과 함께 살았던 파후라가 딸을 낳았지만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테 타마리 노 아투아>(신의 아이)는 지쳐 누워 있는 산모말고도 아기를 막 데려가려고 하는 투파파우-<저승사자의 눈길>에서 나왔던 인물-를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를 위한 스케치. 트레이싱 페이퍼 위에다 그리고 수채화로 강조했다(위). 가운데는 완성된 유화의 일부. 팔을 괸 여인들이 생각에 잠겨 있다. 새(아래)는 <우리는……>의 중앙에 그려진 것이다.

<두 번 다시>의 타히티 모델은 고갱이 높이 평가한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 마네의 <올림피아>에 등장하는 나체 여인과 함께 고전의 반열에 올라섰다.

 

"<두 번 다시>라는 제목은 에드가 앨런 포의 <갈가마귀>가 아니라 망을 보는 악마의 새라네. 채색은 신통치 않지만…… 관계없네. 나는 이 그림이 좋으니까."

몽프레에게

1897년 2월 14일

 

풍자지 《게프》에 게재된 돼지를 타고 있는 원숭이 그림(위). 고갱은 《게프》에 글과 삽화를 기고했다. 《현대정신과 카톨릭교》 원고 표지를 위한 전사화(轉寫畵, 아래). 고갱은 이 글에서 당대의 교회와 복음정신의 쇠락을 통렬히 공박했다.

<다니엘 드 몽프레에게 바친 자화상>.

마르키즈 제도에 있던 고갱의 '쾌락의 집' 이웃이 그렸다.

고갱의 '쾌락의 집'에 걸려 있던 이 목각 현판은 한때 계단을 올라가면 나타나는 침실 입구에 걸려 있었다. 고갱의 작품에서 이미 나온 모티프들이 이 다색 부조에서 다시 나타난다. 예를 들어 가장 밑에 보이는 <신비로워야 하리니><사랑을 하면 그대는 행복하리라>는 10년 전 브르타뉴 시절의 조각작품을 연상시킨다.

마르키즈의 화가

<말 탄 사람들> 또는 <여울>(1901)은 뒤러의 <기사, 죽음, 악마>(이 그림의 복제화를 고갱은 자신의 《전후》 필사본 뒤표지에다 붙였다)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분홍 두건을 쓴 앞선 인물이 혹시 투파파우는 아닐까? 어쨌든 말 탄 사람들이 뚫고 지나가는 어둑어둑한 공간, 병풍처럼 둘러선 나무 줄기와 가지, 눈부신 해변과 그 너머로 보이는 바다가 조화를 이루어 화려하고 신비로운 장면을 연출한다.

열대의 경마장

<해변의 말 탄 사람들>(1902)에는 앞 그림과 같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개울을 건너고 어둠침침한 울창한 숲을 지나 빛과 색이 넘치는 공간으로 빠져 나온 그들은 멀리서 파도가 넘실거리는 분홍빛 모래 위를 자유롭게 달린다. 비록 무대는 열대이지만 이 장면은 드가의 <경마장>을 연상시킨다. 그만큼 고갱이 드가에게서 받은 영향은 컸다.

<해바라기가 있는 정물>은 고갱이 타히티를 떠나기 직전인 1901년에 그렸다. 2년 전 그는 다니엘 드 몽프레에게 해바라기 씨를 비롯하여 정원에 뿌릴 꽃씨를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타히티에는 해바라기가 없었다. 빈센트 반 고흐를 추모하려던 것일까?

빨간 머리의 아름다운 마르키즈 여인 토호타우아는 <부채를 든 여인>의 모델이었다. 아래는 고갱의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토호타우아이다.

고갱이 말년에 그린 뛰어난 남태평양 누드화 가운데 하나인 <원시의 이야기>(1902)는 폴리네시아, 아시아, 유대-기독교의 모든 신화를 집약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죽기 얼마 전 노안(老眼)과 병마에 시달리던 고갱의 가슴아픈 자화상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는 고갱의 가장 유명한 대작이다. 화가에 다르면 이 그림은 "올이 뭉치고 주름투성이인 삼베에다 곧바로 그렸기 때문에 표면이 무척 거친 인상을 준다."

오른족 아래에는 잠든 아기와 쪼그려 앉은 세 여인이 있다. 주홍색 옷을 입은 두 인물은 머리를 맛대고 무언가를 숙의하고 있다. 원근법을 무시하고 의도적으로 크게 그린 쪼그려 앉은 여자는 한 손을 들어 감히 자신들의 운명을 숙고하는 두 인물을 놀라운 듯이 바라보고 있다. 가운데 인물은 과일을 따고 있다. 아이 옆에 고양이 두 마리가 있다. 암염소도 보인다. 율동감 있는 신비스러운 포즈로 양팔을 들어올린 신상(神像)은 다가올 세상을 암시하는 듯하다. 앉은 인물은 신상 쪽으로 귀를 곤두세웠다. 마지막으로 노파가 있다. 죽음을 목전에 둔 그녀는 자기 생각에 골몰해 있는 듯하다. 노파의 발치에 있는, 도마뱀을 타고 앉은 야릇한 흰 새는 알맹이 없는 말의 공허함을 상징한다.이 모든 것의 배경은 시내를 끼고 있는 숲지대이다. 색조의 변화는 있지만 풍경은 균일하게 청색과 녹색 기운을 품고 있다. 대담한 오렌지 빛깔의 벌거벗은 인물들이 눈길을 끈다.

몽프레에게

1898년 2월

<마르티니크의 전원>. 《볼피니 모음곡》에서, 1889.

코펜하겐의 메테 고갱.

<브르타뉴의 기쁨>. 《볼피니 모음곡》에서, 1889.

<울타리 옆의 브르타뉴 여인들>. 《볼피니 모음곡》에서, 1889.

에밀 베르나르.

에밀 베르나르와 폴 고갱이 깎고 칠한 브르타뉴의 장롱. 1888.

타히티 푸나아이우아에 있는 고갱의 집.

폴 고갱의 초상. 다니엘 드 몽프레의 목판화.

《현대정신과 카톨릭교》의 뒤표지. 1897-1898.

<폴 고갱에게 바치는 자화상>. 빈센트 반 고흐. 1888.

<고갱의 의자>. 반 고흐. 1889.

<사랑에 빠지면 그대는 행복하리라>. 1889.

<마나오 투파파우>(저승사자의 눈길). 《노아 노아》에서. 1893-1894.

1894년경의 스트린드베리.

일본 종이에다 먹으로 찍은 <이브> 목판화.

아투오나에 있는 고갱의 '쾌락의 집' 문에 장식되어 있던 현판.

<브르타뉴의 멱감는 아이>. 《볼피니 모음곡》에서. 1889.

에드가 드가.

<자화상>. 외젠 들라크루아.

<기묘한 기구로서의 눈>. 석판화. 오딜롱 르동, 1822.

<리하르트 바그너 초상>. 오귀스트 르누아르. 1883.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