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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8 Egon Schiele 에곤 실레


지은이 | 이자벨 쿨, 옮긴이 | 정연진

207, 예경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19934


650.8

아887ㅇ  2


●ART SPECIAL 2


"나는 모든 몸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그려낼 뿐이다."

- 에곤 실레



독특한 색감과 터치, 에로틱하고 과감한 인체묘사로 세기말 오스트리아의 불안한 시대정신과 아름다움을 전하는 에곤 실레!!! 이 책은 실레의 인생과 작품, 그 주변의 여인들의 이야기뿐만아니라, 그가 태어난 지 100년이 넘게 지난 현재, 어떤 모습으로 조명되고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매혹적이지만 다소 충격적이기까지 한 초상화와 자화상 외에도 진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풍경화까지 실레의 아름다운 작품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귀한 사진 자료나 독특한 지면 구성 또한 읽는 이의 눈과 정신을 사로잡을 것이다.


에곤 실레 Egon Schiele(1890-1918)

짧지만 강렬했던 삶을 살았던 오스트리아의 화가. 독특한 색깔과 터치, 에로틱하고 과감한 인체묘사로 유명하다. 스물여덟의 나이로 삶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성에 대한 강박, 고독, 죽음 등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1890년 빈 근처 툴른에서 태어난 실레는 학창시절 아르 누보의 일환인 독일의 유겐트슈틸 운동에서 영향을 받는다. 그 무렵 빈 현대미술의 거장인 구스타프 클림트를 만났으며, 그 결과 화려하고 장식적인 초상화를 그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색과 동떨어진 독특한 색감과 선명한 윤곽선으로 자신만의 독자적인 양식을 개발하게 된다. 그는 처음부터 인물 표현에 몰두했고, 성적인 주제를 노골적이고 자극적으로 묘사해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1909년 동료들과 '신예술 그룹'을 결성했으며, 1911년부터 유럽 곳곳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1918년 빈에서 열린 분리파 전시회 때에는 실레의 작품을 위한 특별 전시실이 따로 마련되기도 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다.


변천사

에곤 실레의 작품들을 한 눈에 펼쳐보면 그 예술적 다양성을 느낄 수 있다.

초기의 사실주의에서 말기의 표현주의까지, 다채로운 유화에서 미니멀한 드로잉까지,

그리고 개성 강렬한 초상화에서 멜랑콜릭한 풍경화까지…….


초상화

1910

1912-1913

1913

1910

1918

>> "이 사람처럼 색을 만들어 내고, 색을 섞어 내고, 또 색을 아름다운 화음처럼 펼쳐내는 예를 나는 지금껏 보지 못했다네." - 하인리히 베네쉬, 에곤 실레에 대해.


풍경화

1907

1911

1912

1916

1917-18

>> "나는 들판을 지나 저 둥근 언덕을 넘어 쉬지 않고 달려가 흙에 입맞춤 하고 싶네……. 부드럽고 따듯한 들꽃 내음 가득 마시고 싶네……." - 에곤 실레, 자연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면서.


소묘

1910

1914

1915

1917

1918

>> "실레의 작품에서 나체만을 보는 사람들은, 외설스런 나체 이외에 아무것도 보지 않는 사람들은 도저히 깨우칠 도리가 없다."-아르투어 뢰슬러, 실레의 친구이자 수집가


차례


그때 그 시절

빛과 그림자


최고가 되기까지

신新 예술가로 출발하다


예술

화가와 거울과 사다리


철도 역장의 아들에서 예술가로


사랑

사랑은 셋에서 하나를 버리는 것


지금도 우리 곁에

뒤늦은 명성


그때 그 시절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우리의 고향 빈

이 시대 예술의 원천이라네."

오토 바그너, 1903년


왈츠음악과 세계대전 사이에서

에곤 실레가 시골에서 보낸 시간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빈은 그에게 고향 같은 곳이었다. 빈은 실레가 예술가로서 명성을 쌓기 시작한 곳이기 때문이다. 군주제 수도의 상징이던 빈은 당시 현대적 대도시로 탈바꿈하던 시기였고, 수많은 예술가도 모더니즘의 바람에 합류하고 있었다. 아르투어 슈니츨러는 펜대를, 구스타프 말러는 지휘봉을, 구스타프 클림트는 붓을 잡고 말이다.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여인의 초상화는 에곤 실레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청색과 금색이 어우러진 드레스를 입은 그림 속 여인은 클림트의 애인이자 절친한 친구인 에밀리에 플뢰게로, 클림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분리파 미술관, 1897-1899년.


"오스트리아에선 누구나 자기가 아닌 다른 존재로 변한다."

- 구스타프 말러


"전통은 불꽃을 계속 살리는 것이지, 잿더미를 숭상하는 것이 아니다."

- 구스타프 클림트

빈 시민들은 친근한 단골카페를 자주 찾아 신문을 읽거나, 빈 커피를 마시거나, 삼삼오오 모여 토론을 즐겼다. 미하엘러 광장에 위치한 그리엔슈타이들 카페는 빈 모더니즘의 집결지와 같은 곳이었다.

유겐트슈틸 예술가들이 정진하던 목표는 총체예술이었다. 총체예술 장르에 포스터가 빠질 리 없다. 위는 '빈 공방'을 홍보하는 포스터로, 마리아 리 카르츠 작품이다.

실레는 스스로를 '은으로 된 클림트'라고 칭하곤 했다. 그렇다면 이 1910년 사진의 주인공인 '오리지널' 클림트는 금인 셈일까?

외면 | 구스타프 클림트의 대작 <베토벤 프리즈>는 예술 애호가들로부터 외면당했다. 그들의 눈에는 빈 분리파 미술관의 벽을 장식한 이 24미터 길이의 작품이 아름답지도 않을 뿐더러 경외심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1902년 클림트에 의해 탄생한 베토벤 기념전시회는 결국 엄청난 재정적 손해만 끼치고 막을 내렸다.

유토피아 | 클림트가 거장 베토벤을 기리며 제작한 이 벽화는 "예술과 사랑을 통한 인간의 구원"이라는 클림트 자신의 유토피아를 표현한 것이다. 작품 속 영웅은 온갖 위험과 폭력을 이겨내고 사랑하는 여인의 포옹을 통해 구원받는다.


최고가 되기까지



"이 사람처럼, 색을 만들어 내고,

색을 섞어 내고, 또 색을

아름다운 화음처럼 펼쳐내는 예를

나는 지금껏 보지 못했다네."

하인리히 베네쉬


스타 예술가

자긍심 강한 성격의 에곤 실레는 이미 18세에 처음으로 전시에 작품을 출품하는 경험을 쌓았다. 실레는 대중의 관심부족에 대해 불만을 가질 일이 없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가까운 지인들의 평가가 후하지 못했더라도 그에게는 그를 꾸준하고 열렬히 지원하는 후원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레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대단했다.

실레의 벗이자 작품수집가였던 베네쉬는 이미 1917년에 실레가 그린 드로잉을 70점이나 소유하고 있었다.


"나는 동시에 모든 역할을 맡고 있다. 하지만 절대 모든 종류의 일을 동시에 하진 않는다."

- 에곤 실레, 1910년경

1914년에 찍은 이 사진처럼, 실레는 카메라 앞에서 즐겨 포즈를 취하곤 했다.

창설되자 마자 전시회를 가진 '노이쿤스트그루페(신예술 그룹)'의 포스터. 안톤 파이슈타우어의 디자인이다.


"우리는 인재들이 오스트리아를 떠나는 일이 더 이상 없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오스트리아가 이룩했던 과거의 영광을 다시 한번 맛볼 수 있기를 ……."

- 에곤 실레

예술평론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아르투어 뢰슬러는 실레의 돈독한 동반자이자 열렬한 후원자였다.

아르투어 뢰슬러는 일찍이 실레의 재능을 발견하고 가까이 지냈다. 사진은 두 사람이 트라운 호숫가에서 여름날을 즐기는 모습이다.

부유한 주류공장장 아우구스트 레더러는 실레에게 아들 에리히의 초상화를 그려줄 것을 의뢰했다.

표현주의 표방을 위해 출간된 독일 간행지 《디 악치온》은 1916년에는 한 회분을 모두 실레의 시로 채워 발간한 바 있다.

실레가 그린 빈 분리파 제49회 전시회 포스터. 1918년 초에 생을 마감한 클림트를 위해 빈 의자가 마련되어 있다.

실레는 사진 속 그림처럼 작품에서 헐벗은 나무와 같은 늦가을 분위기를 자주 연출했다.

아버지와 아들 | 실레가 만난 첫 수집가는 그의 삶의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하인리히 베네쉬와 오토 베네쉬 부자를 그린 초상화는 기하학적 모티브를 통해 표현되었으며, 실레의 그림들이 으레 그렇듯, 피부색도 자연 본래의 색과는 거리가 멀다.

스승에서 모델로 | 클로스터노이부르크에서 실레에게 회화를 가르쳤던 막스 카러를 그린 이 작품은 실레의 초기 표현주의 초상화 중 하나다. 실레는 스승을 전체 구도에서 오른쪽 구석으로 몰고 왼쪽을 비워 두었다.

친구이자 후원자 | 아르투어 뢰슬러 또한 당연히 실레에게 초상화를 의뢰했다. 흙색이 지배적인 이 화풍 속 모델은 깊이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다. 가운데 위치한 큼직한 손이 시선을 끈다.

옷 바꿔 입기 | 이 그림 속에 보이는 모습은 평범한 디자인의 치마를 입은 에디트 실레이지만, 원래는 체크무늬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림의 구입자인 빈 벨베데레 박물관장은 국립박물관에 걸기엔 옷의 분위기가 너무 화려하다는 이유로, 치마를 다르게 덧그려 달라고 요청했다.

은밀한 밀착 | 실레는 초기 초상화에 자주 나타나곤 했던 초록빛 피부색을 <포옹>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다. 이 그림은 1918년 분리파 미술관의 대전시회에 선보였던 작품이다. 그림의 주인공은 에곤과 에디트가 아닐까?

어두운 비전 | 꽤 큰 규격의 유화인 <죽음과 소녀>도 1918년 분리파 미술관의 대 전시회에 출품되었던 작품이다. 그림 속 붉은 머리 소녀의 모델은 실레의 애인인 발리 노이칠로 추정된다.


예술



"예술

현대적일 수 없다.

예술은 그 자체로

영원한 것이다."

에곤 실레


항상 새로운 물가를 찾아서

실레는 지칠 줄 모르는 예술가였다. 12년의 창작기간 동안 그는 드로잉, 수채화, 시각디자인을 포함한 도화지 작품 2000점, 유화 300점, 그리고 방대한 양의 시를 남겼다. 실레의 작품세계에서 이기적 도도함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실레의 관심은 온통 자기 예술과 이를 통해 대변되는 그 자신뿐이었다. 실레가 가장 즐겨 그렸던 모티브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실레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기 전까지 자화상을 100여 점이나 남겼다.

실레가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시각은 비정하리만치 예리했고, 모든 미술 형식을 벗어나는 행위였다.


실레의 풍경화들은 그 특유의 자극적인 나체화의 그늘에 가려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했다. 이 <나무 네 그루>라는 그림이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성을 보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예술학교 학생증에 부착되었던 실레의 사진.


"어떤 이들은 잔인한 전쟁의 공포를 느끼고서야 예술이 단순히 사치생활의 일환 그 이상이라는 걸 깨닫는 모양이네."

- 1917년 3월 2일, 실레가 안톤 페슈카에게

빈 현대미술의 거장, 구스타프 클림트.

빛나는 장식을 배경으로 잠든 다나에의 모습에서 클림트 풍의 양식이 물씬 느껴진다.

1909년 신예술그룹 회원의 초상을 그린 실레는 <화가 안톤 파이슈타우어의 초상>에서 클림트와는 달리 배경에 어떤 장식도 하지 않는다.

<은둔자들>을 연상케 하는 <후광이 있는 두 남성>은 빈 공방에서 작업한 엽서 디자인이었는데, 결국 대량 인쇄되지는 않았다.

반영 | 실레의 작업에는 거울이 자주 쓰였다. 1910년 연필로 그린 이 인체 드로잉에선 실레도 모델이 되었다.

주관적 시각 | 구두 끝까지 다 그리기엔 종이가 모자랐던 걸까? 실레는 대상에서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부분까지만 그려 버리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 이외의 것은 모두 과감히 생략해 버리거나, 부스러기만 남겼다.

스캔들 | 세기말 빈에서 동성애는 금기사항이었다. 하지만 실레에게 금기라는 단어는 통용되지 않는 모양이다. <레즈비언 커플>이란 제목의 이 작품은 실레가 수없이 다룬 동성애 주제의 작품들 중 하나일 뿐이다. 여기서도 실레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곳만 그리고 나머지 신체부분은 아예 암시조차 하지 않는다.

묘하게 오려낸 컷 | 종이 위에 보이는 것은 다리, 골반, 팔뿐. 위로 걷어 올린 웃옷의 녹색을 제외하고는 어떤 색도 사용하지 않았다. 구아슈로 강조한 선만이 몸의 선을 드러낼 뿐이다.

수집광 | 책 더미를 배경으로 앉아 있는 후고 콜러 박사는 예술적 감각을 갖춘 사업가로, 엄청난 양의 서적을 보유하고 있는 인물이었고, 실레 또한 콜러 박사의 이런 이미지를 그림 속에 영원히 보존한다. 실레는 이 그림만큼 공간의 배경에 공을 들인 적이 일찍이 없었다. 실레가 요절하기 몇 달 전에 그린, 거의 마지막 작품이다.

공허한 눈빛 | 카를 자코브셰크는 실레가 예술학교에 나가던 시절 학급동료이자, 신예술그룹의 창립멤버였고, 피스코의 갤러리에서 열린 첫 전시회에도 참여한 바 있다. 하지만 자코브셰크는 불행히도 창작예술가로서는 운이 잘 풀리지 않았고, 결국은 미술교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신세가 되었다. 수척하게 마르고, 까칠한 수염에 구겨진 양복 안에는 셔츠도 입지 않은 초라한 모습의 친구, 실레가 그린 이 초상화에선 미화되지 않은 현실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삶과 죽음 | 시체처럼 창백한 엄마와 아기의 모습에서 실레를 사로잡았던 삶과 죽음의 세계가 엿보인다. 이 그림의 배경에는 실레가 직접 겪어야 했던 1차 세계대전도 잇지만, 그의 가족사도 있다. 실레는 어렸을 때 누나를, 그리고 청소년기에 아버지를 잃는다.

가족 | 실레는 1918년 전쟁 당시엔 이 유화에 <쭈그리고 앉은 두 사람>이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그가 죽은 후에 제목이 <가족>으로 바뀌고 이 작품이 초상화라는 분석이 내려졌다. 실제로 그림 속 남성의 얼굴을 보면 실레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그림 속의 여인은 아내 에디트가 아니고, 게다가 여인의 다리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아이는 뒤늦게 덧그려진 것이다. 이전에는 대신 꽃다발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변두리 | <변두리> 혹은 <주택가 Ⅲ> 속에는 점점이 작은 인물들이 배치되어 전체적 분위기를 밝게 유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알록달록한 집들은 왠지 스산해 보인다. 온통 까만 창문에다 불빛이 내비치는 집도 없다. 검게 채워진 배경은 다채로운 집들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색의 유희 | <변두리의 집과 빨래>에서 관찰자는 좁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 집들을 바라보고 잇다. 저택 2층의 벽면, 그리고 빨래들은 회색 빛 벽에 비해 강한 색채를 띤다.




"난 이 모든 걸 앞으로도 겪을 것이라는게

기쁘다오. 왜냐하면 이런 슬픈 경험이야말로

창조적 인간을 빚어내기 때문이지."

에곤 실레


짧고, 그리고 굵게

…에곤 실레는 그렇게 살다 갔다. 소도시 툴른의 따분함도 어린 실레의 그림욕구를 누르진 못했다. 실레는 오히려 오고 가는 열차든, 남부 오스트리아의 풍경이든,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면 모두 열정을 가지고 관찰했다. 성장한 실레는 결국 스스로의 거대한 잠재력에 이끌려 빈으로 향한다. 21세의 실레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정의를 내리듯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간이다. 나는 죽음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한다." 실레의 짧고 굵었던 인생을 이보다 더 잘 드러낸 문장이 있을까.

게르티는 오빠 실레의 그림뿐 아니라 빈 공방에서도 모델 역할을 했다.



붓과 팔레트를 손에 든 15세의 에곤 실레. 카메라를 바라보는 눈길이 아직은 수줍기 짝이 없다.


"나는 나를 사랑했다…….

나는 분노에 찬 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에서 분노가 사라지도록 그들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려 했고,

나를 시기하는 사람들에겐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주며 말해주려 했다.

난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고……."

-에곤 실레, <상상>에서

실레 가족은 아버지의 직업 상 툴른 역사에서 살았다.

실레의 부모인 마리 수쿱아돌프 실레가 약혼 당시 찍은 사진.

실레 가족은 1904년 빈 북쪽의 클로스터노이부르크로 거처를 옮긴다. 클로스터노이부르크는 후에 실레의 작품에 여러 번 등장한다.

판토마임 공연 중인 실레의 친구 에르빈 도메니크 오젠과 무용수 모아.

두 화가들. 후에 매제가 된 신예술그룹 회원 안톤 페슈카와 크루마우에서 함께 한 에곤 실레.

신입생 | 에곤 실레가 빈 예술학교에 입학하기 몇 주 전 그린 자화상이다. 당시 실레는 16세였다. 실레는 이 작품에서 목탄뿐 아니라 바림 효과나 스프레이 기법을 적절히 사용하고 있는데, 특히 스프레이 효과는 당시 분리파 화가들도 즐겨 쓰는 기술이었다.

자기초상 | "난 내가 예술가로서 엄청난 성장을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양한 경험을 했고, 예술을 돈벌이에 이용하려 하는 자들에 맞서 끝없이 싸웠다." 하지만 현실은 1911년 9월에 실레가 쓴 내용처럼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그 전 해에 그린 자화상 <갈색 모자를 쓴 자화상>에 비친 실레의 모습은 자신감보다는 마음고생으로 가득 차 보인다. 사회적 체면과 예술적 자유 사이에서 고민하느라 그랬을까?

몰이해 | "나는 예술을 위해, 그리고 내 연인을 위해 참고 기다릴 수 있다!" 이는 실레가 구류되어 있던 1912년에 나온 작품 <미결수의 자화상> 한 구석에 쓰여 있던 문구이다. 이 자화상에서 실레는 우울함에 빠져 고통받는 영혼을 묘사했는데, 구류 사건 이후로 실레의 그림에는 희생양적인 태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실레는 자신을 사회적 몰이해의 희생양으로 보았다.

쪼그려 앉은 두 소녀 | 에곤 실레는 이 그림에서 수채 기법을 사용하면서도 각 색의 경계가 허물어지지 않도록 했다. 실레의 그림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전형적 공간배치로 원근법이 느껴지지 않는다. 전혀 다른 인상의 두 소녀는 감상자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듯 바라본다.

강조된 실루엣 | 실레가 검은 분필과 수채화물감을 이용해 그린 발가벗은 소년의 나체화. 몸의 윤곽을 따라 검은색으로 진하게 실루엣을 그렸고, 그 주변에 흰색을 덧칠해 둘러쌈으로써 소년이 더욱 앙상해 보이게 만들었다.

살얼음 위를 걷듯 | 실레는 이런 모티브들을 요청해 의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동성애를 자연에 반하는 행위로 간주하던 당시의 시각에 비추어 보면, 실레의 이러한 살얼음 위를 걷는 듯한 행동들은 다분히 의도적이라 할 수 있다.

동반자의 모습 | 스스로를 '마임 폰 오젠'이라 칭하곤 하던 실레의 친구 에르빈 도메니크 오젠은 에곤 실레의 초상에 매우 자주 등장한다. 이 반라의 나체화가 그려진 시기는 무용수인 오젠이 크루마우에 머물고 있던 실레를 방문한 때이다. 초록빛 얼굴과 손을 한 채 종이의 반쪽에만 그려진 오젠의 형상은 종이의 경계선 밖으로 벗어나 있다.

사망 직전 누워있는 에곤 실레.

먼 곳을 응시하며 | "실레는 예술가로서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으로서도 특이한 사람이었다. …… 일상에서 겪는 일들은 그에게 있어 관심 밖이었다. 실레의 눈빛은 항상 잡다한 것들을 초월하여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인리히 베네쉬, 에곤 실레를 회상하며.

노출 | 머리카락은 쭈뼛 서 있고, 눈은 둥글게 치켜뜨고, 놀란 입은 다물어지지 않는다. 이 그림 속의 실레는 마치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놀란 듯한 모습니다. 드러낸 배, 찡그린 얼굴이 검은 옷과 대조를 이룬다.

희생양 | 실레는 아르노트 갤러리와 전시회 포스터를 제작할 때 자신을 화살이 수없이 꽂힌 성 세바스티아노로 묘사했다. 재판 회부와 구류 경험이 남긴 흔적이다. 스스로를 희생양으로 본 것은 실레뿐이 아니었다. 표현주의 화가이자 친구인 오스카 코코슈카도 자신을 그렇게 묘사한 적이 있었다.

종교 개종 | 두 여인이 무릎을 꿇고 앉은 맞은편에 수도승의 옷을 입은 사내는 실레 형상을 하고 잇다. 그림 속의 세 사람이 마치 캡슐 안에 갇힌 것 같다. 1912년에 있었던 구류사건 이후로 실레는 종종 자신을 수도승, 또는 성자로 표현하곤 했다.

피난처이자 영감의 원천 | 기록 자료에 <집들>의 모티브가 크루마우라고 명시되어 있진 않지만, 실레가 어머니 마리 수쿱의 고향을 즐겨 찾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 그림의 모티브의 출처는 크루마우였을 가능성이 높다.

늦가을 | 퇴락, 질병, 죽음 등은 모두 표현주의 예술가들이 자주 다루던 주제였다. 바람 속에 홀로 쓸쓸히 서 있는 <울타리 뒤 나무 한 그루>에서 생명의 흔적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죽은 마을 | 1910년에서 1911년 사이 실레의 그림에서는 어두운 색채와 모티브가 부쩍 눈에 띈다. 실레는 자신을 우울함으로 몰고 간 빈을 떠나지만, 상태는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다. 그 즈음 실레의 모든 창조행위에서 죽음은 큰 비중을 차지했다. 어쩌면 실레가 느꼈던 것은 1910년 시 <소나무 숲>의 마지막 줄에 나타난 것처럼 "살아있는 듯한 죽음"일지도 모른다.

전쟁 회화 | 실레는 군복무기간 동안 많은 면제 혜택을 누릴 수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가장 큰 혜택은 재능을 인정받아 사무업무와 병행하여 창작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15년에 그린 <모피 모자를 쓴 러시아 전쟁포로>는 이러한 배려의 산물이다.

가족 | <무릎을 세우고 앉아있는 여인.의 모델은 에곤 실레의 처형인 아델레 하름스이다. 실레는 아델레를 모델로 세우길 좋아했는데, 아마도 그의 이러한 처신에 아내 에디트는 곱지 않은 눈길을 보냈을 것이다.

풍성한 머리카락 | 엎드려 누워서 지루한 듯한 표정으로 팔을 괴고 감상자를 응시하는 여인의 사자갈기 같은 붉은 머리가 흐드러지게 흘러내린다. 다른 나체화와는 달리 이 그림에서 실레는 인체의 왜곡을 의도하지 않는다. 다만 배경은 여전히 생략된 채로 남아 있다.

 

사랑

 

 

"에로틱한 예술작품에도

성스러움은 깃들어 있다."

에곤 실레

 

'참새아가씨' 대 '참한 색시'

 

실레가 논란을 몰고 온 건 자유분방한 나체화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진보적인 애정행각 역시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에 충분했다. 실레는 그림의 모델과 매춘부가 동일시되던 20세기 전후 빈에서 모델 발리와 수년간에 걸친 동거생활을 한다. 하지만 결혼을 해야 할 때가 오자, 그는 결국 평범한 여인을 선택해 버린다.

 발리 노이칠.

실레가 쓴 이 편지의 수신자는 에디트와 아델레 하름스 자매이다. 이때는 실레가 아직 둘 중에 마음을 정하지 않았던 상태이다.

 

"비극은 비극으로 받아들여야 비극이 되는 것이다. 실레는 어떤 것도 비극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인리히 베네쉬

서로 꼭 껴안고 있는 에곤과 에디트 커플.

함께 산책하는 에곤 실레와 발리 노이칠.

 

"실레의 작품에서 나체만을 보는 사람들은, 외설스런 나체 이외에 아무것도 보지 않는 사람들은 도저히 깨우칠 도리가 없다."

-아르투어 뢰슬러, 1911년 에곤 실레에 대한 글에서

1918년 여름의 실레 부부.

실레가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은 임종을 얼마 앞두고 침대에 누워 있는 아내의 드로잉이다.

조감도 | 실레는 풍경화를 그리든, 나체화를 그리든, 조감도적 시각으로 모티브를 보길 즐겼다. 1911년 작품 <술이 달린 담요 위의 두 소녀> 역시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을 그린 것이다. 여기서 실레에게 원근감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 갈색의 담요로 그저 평평하게 표현되었을 뿐이다.

나체 | 실레가 나체를 모티브로 삼기 시작한 것은 20세가 되던 해였다. 그 후 1910년은 특히 많이 제작된 해인데, 이 <녹색 천을 걸친 여성의 누드>도 그 해에 그려졌다. 여체의 선은 부드럽게 그려졌고, 피부색도 자연색에 가깝다. 모티브의 완만한 곡선을 통해 아직은 유켄트슈틸이 엿보이는 그림이다.

색체의 향연 | 이 작품에서 실레는 나체의 등에 분홍빛, 초록빛, 주황빛을, 그리고 머리카락에는 푸른 보랏빛을 썼고, 등을 비롯한 팔은 과장되게 늘어나 있다. 나체화에서 이보다 더 자연에 반하는 표현이 가능할까!

머리는 생략 | 실레가 1913년에 그린 여성 모티브는 상당수가 머리를 생략한 채 그려져 있는데, 이 그림에서는 머리에 이어 발까지도 생략되었다. 빨간 스타킹을 신은 다리가 공간의 반을 차지하고, 걷어 올린 드레스는 다소 파리한 빛의 빨간색을 띤다.

행복한 한때 | 1915년 실레가 그린 아내와 조카이다. 이 때는 실레가 가족을 중심으로 모티브를 많이 삼던 시기였다. 그래서 누이 게르티와 조카 안톤의 그림도 많다. 군복무 기간 내에 허용된 예술 활동이었으므로, 나체화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어머니의 뿌리 | 비스듬히 보이는 르네상스풍의 두 집은 실레가 1917년에 그린 것으로, 오늘날 크루마우 라트론 거리에 아직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실레가 수년에 걸쳐 풍경화의 모티브로 삼은 뵈멘의 소도시 크루마우는 어머니 마리의 공향이다.

꽃잎 | 데이지, 나팔꽃, 양귀비꽃이 지면 위를 떠다닌다. 연필을 이용한 부드러운 밑그림에 수채화물감으로 채웠다. 실레는 사망하기 3년전부터 전과는 달리 사물을 그릴 때 자연주의적 묘사를 적용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원근법을 지킬 흥미는 여전히 없는 모양이다.

화면 가득한 초록빛 | "나는 모든 몸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그려낼 뿐이다"라는 실레의 말은 마치 이 말기작품에 대한 설명처럼 들린다. 이 그림에선 실레가 전에 그려내곤 했던 쓸쓸한 가을빛 해바라기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지면은 대부분 해바라기의 잎의 풍성한 초록빛을 화면 가득히 쏟아놓는 데 할애된다.

국화 | 실레는 1910년 <국화>라는 제목의 유화 작업 밑그림을 위해 총 세 점의 국화 모티브 수채화를 그린다. 이 그림의 노란 국화꽃잎은 부드럽고 약하게 보이는 반면, 지면을 가득 채운 아래의 붉은 국화꽃잎들은 마치 그림 밖으로 터져 나올 것만 같다.

꽃의 밑그림 | 에곤 실레가 붓을 이용해 그린 이 국화 그림에서도 표현주의는 여실히 드러난다. 각 꽃잎들을 그린 붓질은 자연적 사실에 입각한 묘사가 아니라, 꽃의 혼을 표출해내려는 노력인 듯하다.

 

지금도 우리 곁에

 

 

 

"실레가 되고 싶다면

머릿속에 그의 그림들

떠올리는 것으로 족하다."

니콜라이 킨스키,

라울 루이즈의 영화 <클림트>에서 맡은 실레 역에 대해.

 

점점 더 많은 애호가들이

… 실레의 매력을 새로이 발견하고 있다. 실레의 말이 옳았던 것이다. "예술은 현대적일 수 없다. 예술은 그 자체로 영원한 것이다." 물론 실레의 예술성이 인정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말이다. 대신 오늘날 실레의 작품이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전 세계에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한 가지 위로가 될 것이다. 실레에 대한 인지도는 1980년대 일어난 전시회 붐을 통해 급상승했고, 이후 경매에서는 기록적인 판매가가 매겨졌다.

 

레오폴트 박물관.

 

"에곤 실레는 나에게 있어 항상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의 극히 주관적 세계를 대변하는 그림들은 당시에도 혁명, 그 자체였다.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내게 매우 현대적으로 다가온다. 나는 특히 그가 창조해 내는 분위기를 사랑한다. 신비로운 동시에 왜곡된……. 이것은 관능을 향한 고결하고도 기이한 찬미이다!"

-이탈로 추켈리, 캘빈 클라인 수석 디자이너

에곤 실레의 생가는 오늘날 에곤 실레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실레는 그림을 그릴 줄은 알아도 팔 줄은 모르는 사람이오. 하지만 그가 다 자초한 일이요. 타인이 좋아하는 걸 그리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걸 그리는 데야 당연하지 않겠소?"

-아르투어 뢰슬러, 1913년.

최고가 | 에곤 실레의 <크루마우 전경(마을과 강)>은 2003년 최고가를 기록하며 팔렸다. 구입자는 런던에서 열린 경매에서 1916년 제작된 이 작품에 1800만 유로의 가치를 부여했다. 지금껏 팔린 실레 작품 중 가장 최고가이다.

할리우드 스타 | 칠레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해 온 라울 루이즈 감독은 존 말코비치를 주연으로 구스타프 클림트의 일생을 스크린에 담았는데, 영화에 등장하는 에곤 실레 역은 사진의 니콜라이 킨스키가 맡았다. 킨스키에 따르면, "실레 그림 속의 선들은 불꽃처럼 내 잠재 의식에 파고든다"고 한다.

연재만화 | 작가 제이미 태너는 에곤 실레의 일생을 만화로 표현해냈다. 2002년 출간된 《영원한 아이(The Perpetual Child)》에 누드화 때문에 노일렝바흐 감옥에 갇힌 에피소드가 빠졌을 리가 없다.

색채의 마술 | 화려한 색채와 다양한 무늬로 유명한 패션메이커 미소니의 컬렉션은 실레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사진은 1970년대 컬렉션 중 하나이다.

영감 | 실레의 그림에서는 모델들이 입고 있는 옷들이 작품의 캐릭터를 좌우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날 패션 디자이너들이 실레를 창조적 영감의 원천으로 삼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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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