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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5. 19. 10:26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52 로댕 - 신의 손을 지닌 인간


엘렌 피네 지음 / 이희재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36


082

시156ㅅ  31


시공디스커버리 총서 31


현대의 미켈란젤로, 조각의 거장이란

화려한 말이 뒤따랐던 천재 조각가 로댕.

그가차가운 조각들 속에 인간의 고뇌와 열정, 애증을

그대로 담을 수 있었던 것은, 로댕 자신이 너무도

열정적이고 감성적이었기 때문이다. 제자 카미유 클로델과의

복잡하고도 열렬한 연애조차 뛰어난 천재성의

상징으로 용납될 만큼 극도의 추앙을 받았던 로댕은,

20세기 현대 조각의 창조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별의 순간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이 남자들이

어떻게 여행을 시작했는가를 생생히 표현했으며,

각자의 가슴이 삶의 기억으로 가득 차

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기억을 짊어진 채 이제 유서 깊은

도시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지푸라기처럼 버릴 각오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눈앞에 나타난 여섯 사내는 비슷한 두 형제를

제외하고는 생김새가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스스로 그러한 결정을

내렸으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고 있었다. 그것은 생에 매달리려 하는

육신의 고통을 이겨내고 영혼의 길을

따르는 삶이었다……."

"그는 팔을 축 늘어뜨린 채

세월의 무게게 지친 듯

무거운 걸음을 옮겨 놓는

노인을 만들어 냈다. ……

그는 열쇠를 든 사내를

깎아 냈다. 사내 안에는

아직 살아야 할 숱한 세월이

남아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은

갑작스럽게 다가온 이 마지막

순간으로 응축되어 있었다.

…… 그는 정신을 집중하려는

듯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고독을 맛보려는 듯이, 숙인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쥔 남자를 창조해

냈다. 그는 두 형제를 다듬어 냈다.

한 사람은 뒤를 돌아보고, 또 한

사람은 굳은 결심을 한 듯 아니면 다

체념하고 사형집행인에게 이미

목숨을 내놓은 듯 고개를 떨구고

있다."


"그리고 그는 '막 생명이

빠져 나가는'

남자(귀스타브

주프루아)의 수수께끼

같은 몸짓을 만들어 냈다.

발걸음을 뗀 그는

다시 한번 고개를

돌린다.

도시가

아니라.

눈물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동료들이 아니라,

스스로를

마지막으로

돌아보기

위해서……."


"이 손짓은 모든 불확실성, 아직

도래하지 않은 행복, 이제부터

헛되이 기다려야 할 슬픔, 어디에

살고 있을지 모르나 그가 언젠가

만나야 할 사람들, 미래와

그 이후의 모든 가능성. 늘

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리라.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종착점에서

고요히

찾아오리라 믿었던

죽음 이후의 모든

가능성을 놓아 버리고

있다."


차례


제1장 타고난 예술가

제2장 배고픈 시절

제3장 걸작, 또 걸작

제4장 새로운 인간

제5장 명성

기록과 증언

참고문헌

그림목록

찾아보기


로댕 Rodin, les mains du genie


엘렌 피네 Helene Pinet

1976년부터 로댕 박물관 사진부 큐레이터로 활동하기 시작한 엘렌 피네는, <로댕의 사진들>을 비롯해 <로댕> <조각가> <그 시대의 사진들>과 같은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옮긴이 : 이희재

서울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였고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26번 <마티스>와 30번 <고갱>이 있으며, 그의 <말하기의 다른 방법> <포크는 왜 네 갈퀴를 달게 되었나> <꿈과 상상의 여행> <추적> 등이 있다.


제1장

타고난 예술가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는 위대한 인물이지만 우리는 그들과 능히 겨룰 수 있다.' 너는 이렇게 말했지. 우리가 환상으로 충만한 별세계에 살고 있던 그 무렵에 말이야. 그때 우리는 구름 사이로 빠끔 공간이 열리면서 우리 머리 위로 쏟아지던 햇무리를 볼 수 있었어. 너는 그때 잠시 숨을 멈추고는, 저 암흑을 꿰뚫고 스무 살 청년 앞에 어떤 운명이 가로놓여 있는지 알아내고 말겠다고 말했지."

조각가 레옹 푸르케

젊은 로댕(1862경, 아래), 위는 프랑수아 비아르가 그린 <4시의 살롱>.

에콜 데 보자르는 새로운 조류에 적대적이었다. 그곳에 입학하려면 여러 단계의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일단 입학을 한 뒤에도 학생들은 학기마다 재입학을 허락받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으며, 시험결과에 따라 자리를 배정받았다. 6개월마다 치르는 시험에 무난히 합격한 학생들도 시험성적에 따라 데생 시간에 앉는 자리가 달라졌다. 성적이 안 좋은 학생은 한 학기 내내 모델의 등만 보고 데생을 해야 했고, 시험에서 메달을 딴 사람만이 영구 지정석에 앉을 수 있었다. 위는 앙리 제르베가 그린 <그림 심사위원들>이다.

이 자화상은 로댕이 가게 창문을 깨뜨리면서 넘어진 1859년 이전에 그려졌음에 틀림없다. 이 사고로 남은 커다란 흉터를 로댕은 수염을 길러 감추었다, 로댕의 전기작가인 쥐디트 클라델은 이렇게 쓰고 있다. "수줍어하는 젊은이의 이목구비에서 무의식적인 자기확신이 얼마나 강하게 풍겨 나오고 있는가! 수염을 기르지 않은 어린아이에 가까운 얼굴, 곧은 콧날, 가슴속에 묻어 둔 결코 흔들리지 않는 결심을 드러내는 듯 반듯하게 다문 입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포물선을 그리며 한곳으로 모인 그의 눈썹은 결코 느슨해지지 않을 활시위처럼 팽팽한 긴장을 보여 주고 있다.

위와 비슷한 확고함은 로댕이 1959년에 제작한 아버지의 흉상에도 나타난다. 흉상에는 로마의 원로원 의원을 연상시키는 범접키 어려운 위엄이 서려 있다.

로댕과 마리아(이 사진은 1859년경에 촬여한 것이다)는 무척 사이가 좋앗다. 그녀는 로댕의 정신적 지주였으며 누구보다 로댕의 예술가적 자질을 확신했기 때문에 부모님 앞에서는 동생의 방패막이가 되어 주엇다. 신앙심이 깊었던 누이는 자식으로서의 책무와 종교적 자세에 대해서도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성령회를 창시한 에마르 신부는 신출내기 수사가 수도원 뜨락의 광에서 작업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로댕 앞에서 모델로 섰던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에마르 신부도 흉상에 표현된 자신의 모습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는 이마 위로 말려 올라간 머리 터럭이 꼭 악마의 뿔 같다고 불평했다. 로댕이 흉상을 들여다보고 있다.

 

제2장

배고픈 시절

 

"생활을 꾸려 나가기 위해서는 이 일 저 일 가릴 형편이 못 되었다. 나는 청동을 마무리했고 대리석과 돌을 다듬었으며 은(銀)세공장에서 장신구와 보석을 깎았다. 역작을 만드는 데 쏟아 부었어야 할 노력을 그렇게 엉뚱한 곳에다 분산시켜 허비한 시간이 못내 아쉽다. 그러나 생활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오귀스트 로댕

 

 

1864년의 로댕.

 

알베르 에르네 카리에 벨뢰즈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진 <거인족의 항아리>는 사실 로댕의 작품이다.

"나의 모델은 도시 여자의 우아함은 갖고 있지 않았지만 농부의 딸다운 활기 넘치는 육체와 단단한 살집을 갖고 있었다. 그녀의 활발하고 솔직하며 강인한, 왠지 남성적인 분위기가 오히려 여체의 아름다움을 살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왕 말이 난 김에 한마디만 더 보태자면, 그녀는 언제라도 나에게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를 위해 평생 그렇게 살았다." 로댕은 평생의 반려이며 모델인 로즈 뵈레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녀는 <꽃모자를 쓴 젊은 여인>(위)과 <미뇽>(아래)의 주인공으로 오인받아 왔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살롱전에서 처음으로 참가하면서 로댕은 카탈로그에 자신을 '바리예와 카리에 벨뢰즈의 제자'로 소개했다. 카리에 벨뢰즈는 싸구려 골동품을 만들어 내는 작가로 무시당했지만 실은 재능 있는 도안가이며 조형가였다. 그는 대형 조각물의 값싼 아연 소형 복제품부터 정교한 장식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을 대량 생산하기 위한 기술혁신을 감행했다.

때때로 로댕은 한 장의 종이 위에 고대 조각을 본딴 데생, 중세 미술이나 미켈란젤로를 모사한 습작을 뒤죽박죽으로 그려 넣었다. 그의 작품에 깃들인 창조력의 열쇠를 여기서 일부 찾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미지들의 관계가 항상 뚜렷한 것은 아니다.

<청동의 시대>를 위해 포즈를 잡은 오귀스트 네트(위). 문제의 석고상(가운데). 훗날 프랑스 정부가 구입한 청동상(아래).

 

"(코가 주저앉은 남자.가 얼굴에서 무엇을 찾아낼 수 있는지 보여 주었다면, <청동의 시대>는 로댕이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육체를 다룰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세례 요한>(위)과 <걸어가는 남자>(가운데와 아래).

 

"어느 닐 아침 누군가 작업실 문을 두드렸다. …… 모델이 되겠다고 아브루치에서 나를 찾아온 농보였다. …… 나는 그이를 보는 순간 확고한 믿음을 가졌던 예언가 세례 요한을 떠오렸다. 사내는 옷을 벗은 다음 회전대 위에 올라섰다. 지금까지 한 번도 포즈를 잡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두 발로 굳게 버티면서 머리를 들고 상체를 곧게 폈다. 컴퍼스처럼 벌어진 두 다리가 몸무게를 똑같이 받쳐 주고 있었다. 그 솔직담백한 자세가 너무나도 마음에 들어서 나는 소리를 질렀다. '바로 걷는 사람의 모습이로군!' 나는 그이를 당장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오귀스트 로댕


제3장

걸작, 또 걸작


"한순간 관능에 따르는 고통을 보여 주는가 싶으면, 다음 순간 그는 관능을 찬양한다. 그는 삶의 고통, 죽음의 공포, 지옥 그 자체의 공포를 표현할 줄 알았다. <칼레의 시민>에서 그는 역사를 대변했고, <빅토르 위고>에서는 자연성의 요란한 분출을 표현했으며, <발자크>에서는 인간의 다면성을 보여 주었다."

미술평론가 옥타브 미르보

뫼동에 있는 로댕의 작업실. 릴케는 이렇게 썼다. "수천 개의 작품 사이를 거닐다 보면…… 창조주의 두 손에로 이끌리게 된다."

<지옥문>을 위한 최초의 구성. 문이 여덟 개의 패널로 구분되어 있는 것은 피렌체의 교회에서 본 로렌초 기베르티의 문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로댕은 건축적 구성논리보다는 형태적 연결성을 중시하게 되었다.

<지옥문>을 위한 습작(점토 습작).

<지옥문>을 위한 데생.


"밀착된 부분이 늘어날수록 두 몸뚱이는 유기적으로 가까운 화합물처럼 불 같은 충동으로 서로에게 파고들었다. 그들이 엮어 낸 새로운 결합은 아주 긴밀하게 녹아들면서 하나의 유기적 전체를 이루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릐 얼굴은 평범했다. 두툼한 코, 혈색이 안 좋은 눈꺼풀 밑으로 반짝거리는 눈동자, 길게 늘어뜨린 누런 구레나룻, 짧게 깎아서 뒤로 빗어 넘긴 머리카락, 둥그스름한 머리, 그 머리는 그가 전잖으면서도 만만치 않은 고집의 소유자임을 암시하는 듯했다. 내가 상상하는 예수의 사도들에 딱 부합되는 인물이었다."

쥘과 에드몽 드 공쿠르 《일기》. 1878년 4월

<지옥문>의 석고상.


지옥문

"그는 자기 손보다 클까 말까 한 수백 점의 인물상에 인생의 모든 정념, 온갖 쾌락의 절정, 갖가지 악의 무거운 짐을 담아 냈다. 그는 온몸을 비벼대며 동물처럼 바짝 달라붙어 이빨을 드러내고 서로의 몸을 깨물면서 한 마리의 짐승처럼 뒤엉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육체들을 창조했다. 그 육체들은 얼굴처럼 귀를 기울이고, 무언가를 집어 던지려는 팔처럼, 육체의 사슬처럼, 화환과 덩굴손처럼 뻗어 나가고 있다. 고통의 뿌리로부터 악의 즙이 솟아오르는 인간들의 군상이 거기 있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옥문>의 왼쪽 상인방.

<세 망령>.

<추락하는 사람>.

<돌아온 탕아>.

<사랑의 도피>.

생각하는 사람

"그는 말없이 생각에 잠긴 채 앉아 있다. 그는 행위하는 인간의 모든 힘을 기울여 사유하고 있다. 그의 온몸이 머리가 되었고 그의 혈관에 흐르는 피는 뇌가 되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브>(첫번째)의 모델이던 이탈리아 여인이 임신중이어서 로댕은 작품을 끝없이 수정해야 했다. 자식들을 집어삼키는 <우골리노>(두번째). <아담>(세번째)과 <이브>의 거대한 형상은 <지옥문>을 장식했다. <한때는 투구 제작자의 아리따운 아내였던 여인>(네번째).

1887년의 로댕.

 

"뛰어난 흉상은 모델의 도덕적, 육체적 현실을 드러내고 내밀한 생각을 표현하며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장점과 약점을 파고든다. 모든 가면이 벗겨진다. …… 예술가는 순전히 감수성에만 의존해 계몽가, 예언가가 된다."

오귀스트 로댕

빅토르 위고의 동상(위)과 에칭(아래)이다.

 

"모델 앞에서 나는 마치 초상화를 그릴 때와 같이, 진실을 그대로 옮기고자 하는 욕망에 휩싸여 작업한다. 나는 자연을 수정하지 않으며 나 자신을 모델 안에 집어 넣는다. 모델이 나를 이끈다. 나는 오직 모델을 통해서만 작업할 수 있다. 인간의 형상은 나를 강화시키고 나에게 자양분을 준다."

오귀스트 로댕

5년간 카미유 클로델과 한 작업실에서 일하면서 로댕은 갖가지 문제에 조언을 주었으며 그녀를 모델로 쓰기도 했다.

<칼레의 시민>에 등장하는 한 인물의 손이 붙어 있는 카미유의 석고 흉상(위). <사색>(아래)에 대해 릴케는 "돌의 무거운 잠에서 서서히 솟아오르는 삶을 바라보는 초월적인 시선"이라 평했다.

욕망과 순결이 함께하는 포옹

"남자는 고개를 숙였고 여자는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입은 두 존재의 내밀한 합일을 봉인하는 입맞춤 속에서 만난다. 입술과 입술의 만남으로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 이 입맞춤은, 비범한 예술의 마법을 통해, 그 사색적인 표현에서뿐 아니라 목덜미에서 발바닥까지 두 사람의 온몸을 똑같이 관통하는 전율 속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모든 뼈와 근육과 신경과 살이 구부러지고 펼쳐지고 부풀어오르면서 숭고하게 다가오는, 남자의 등을 이루는 모든 섬유질 속에서, 연인의 다리를 부비기 위해 움직이려는 듯 서서히 뒤틀리는 남자의 다리 속에서, 열정과 교태에 휩쓸려 자신의 존재 전부를 들어올리고 있는 바닥에 닿을락말락 한 여자의 발 속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귀스타브 주프루아

카미유의 재능을 파악한 로댕은 이렇게 단언했다. "나는 그녀에게 황금밭을 알려 주었지만 그녀가 발견한 황금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다." <오로라>(위)는 카미유를 모델로 해 만들어졌다. 작업중인 카미유(아래).

"여자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잇다. 너그러움, 자부심, 참을성을 담은 표정으로 여자는 남자를 내려다본다. 남자는 꽃밭에 파묻힌 듯 여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그 역시 무릎을 꿇고 있지만 여자보다 훨씬 더 밑으로 돌을 파고들엇다. 그의 손은 쓸모 없는 공허한 물건처럼 뒤로 뻗어 있다. …… 이 작품 안에는 어딘지 연옥의 분위기가 살아 있다. 천국은 가깝지만 아직은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옥 또한 가까워 아직은 완전히 잊혀지지 않았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영원한 우상>에 대해

옷을 입지 않은 상태의 '장 데르'.

14세기의 기록은 이렇게 전한다. 1347년 칼레시를 포위한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는, 칼레시의 중요 인사 여섯 명이 모자와 신발을 신지 않고 목에 밧줄을 두른 채 칼레시와 성곽의 열쇠를 들고 시를 떠난다는 조건으로 시민들을 살려주겠다고 약속했다. 로댕이 제시한 최초의 소형 모형은 군상으로 제작되었다.

칼레의 시민

'피에르 당드리외'의 누드 점토모형을 다듬고 있는 로댕(위). 옷을 입힌 '외스타슈 드 생피에르'의 점토 모형(아래). 로댕은 자주 편지를 띄워 칼레시장에게 작업의 진척사항을 알렸다. "누드상, 다시말해서 의상 아래 부분은 모두 끝냈습니다. 비록 옷에 가려 눈에 보이지 않기는 하지만, 이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란 걸 아마 나중에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제4장

새로운 인간


"만일 진실이 몰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것이라면 후세인들은 나의 <발자크>를 파괴할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영원한 것이므로, 나는 나의 작품이 받아들여지리라 장담할 수 있다. 사람들이 비웃는 이 작품, 마음먹은 대로 부수기가 여의치 않으니까 기를 쓰고 조롱하는 이 작품은, 나의 필생의 역작이며 미학적 동력이다. 이것을 창조한 날부터 나는 새로운 인간이 되었다."

오귀스트 로댕

살롱전에서 거부당한 발자크 상이 뫼동의 정원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발자크의 두 모습.

1914년 2월의 로댕.


"여러 해 동안 로댕은 이 인물에게 온통 빠져들었다. 그는 발자크의 고향을 방문해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투렌의 풍광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그는 발자크의 편지를 읽었으며 발자크의 초상화를 연구했다. 그리고 발자크의 작품을 꾸준히 여러 번 반복해 읽어 나갔다. ……발자크의 정신에서 자극을 얻은 로댕은 차츰 작가의 외관을 다듬어 나가기 시작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형태에서 형태가 나오듯이 로댕의 구상은 서서히 무르익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발자크를 보았다. 그는 힘차게 앞으로 내딛는 당당한 체구의 소유자로서 육중한 몸집이 늘어진 외투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굵은 목덜미까지 내려왔으며 풍성한 머리털 속에서 자신의 창조적 열정으로 끓어오르는 얼굴. 자신의 구상에 매혹된 얼굴이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얼굴은 근본적인 힘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생산적인 힘으로 넘쳐흐르는 발자크, 시대를 창조하고 숱한 운명을 쏟아 낸 사람의 얼굴이었다. …… 그것은 강한 집중력과 비장감이 엄습한 순간에 로댕이 본 발자크의 모습이었다. 로댕은 그 모습을 충실하게 살려 나갔다. 로댕의 구상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발자크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자세로 서 있게 될 것이다. 두 발은 약간 벌린채 팔짱을 끼고 있다. 그는 허리띠가 달려 있지 않은, 바닥까지 내려오는 긴 가운을 입게 될 것이다."

발자크를 옹호하는 진영에는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위), 화가 클로드 모네 같은 쟁쟁한 작가와 예술가가 많이 가담하고 있었다. 모네는 로댕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실컷들 떠들라고 하십시오. 당신은 전무후무한 업적을 쌓았으니까요." 논쟁은 예술의 영역을 넘어섰고 일반 대중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갖기에 이르렀다. 1898년 살롱전에 출품된 <발자크>(아래)는 비대한 괴물, 형체 없는 뚱뚱보, 거대한 태아(胎兒)라는 혹평을 받았다.

 

카미유 클로델(위)과 결별한 다음 로댕은 1896년부터 로즈 뵈레(가운데)와 뫼동의 빌라데브릴랑(아래)에서 살았다. 그는 철거되던 이시성(城)에서 구한 건물 정면을 이 집에 덧붙였고, 1900년 회고전을 가진 후에는 알마 전시관에 있던 별채를 옮겨 놓았다. 

언제나 남편을 '로댕 선생님'이라고 칭했던 로즈 뵈레는 로댕이 퍼부어대는 온갖 모욕과 바람기를 견뎌 냈다. 그러나 카미유 클로델은 로댕을 다른 여인과 공유하기를 거부했고 그에게 의존하지 않으려 했다. 그녀는 자기 스스로 일어서고자 했으며 자신의 예술적 성공은 어느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재능 덕분이라고 굳게 믿었다. 로댕은 카미유가 1888년경에 만든 자신의 흉상을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아주 높은 받침대 위에서 뫼동의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칼레의 시민>. 로댕은 이렇게 높은 받침대를 원했다.

뮤즈와 함께 있는 작가의 모습을 그린 <빅토르 위고>의 완성품은 1897년 살롱전에 전시되었다. 1906년, 로댕은 <비극의 뮤즈>와 <사색>을 여기서 분리해 두 형상을 별개 작품으로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제5장

명성

 

"나의 '조각'을 보여 주고 내가 이해하는 조각의 내용을 드러냄으로써 나는 예술에 무언가를 기여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고 로댕은 말했다. <발자크>로 물의를 빚고 카미유 클로델과 갈라선 뒤 로댕의 관심사는 달라졌다. 그는 마침내 경제적 안정을 이루었으며 그의 작품세계도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로댕은 남은 힘을 자신의 모든 조각과 소장품을 전시하는 박물관을 세우는데 쏟아 부었다.

몇 안 되는 컬러 사진(위, 1907). <대성당>(아래).

 

"명성이 찾아들기 전 로댕은 외로웠다. 그리고 그가 일구어 낸 명성은 그를 전보다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따지고 보면 명성이란, 새로운 이름의 주변부에 응축된 오해의 총화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로댕은 캄보디아의 전통무용(네번째는 마르세유에서 열린 식민지 박람회에 참석한 캄보디아 왕을 수행한 한 무희를 스케치하는 로댕)과 러시아 발레단의 율동미(첫번째와 두번째는 니진스키의 두 모습으로, 온몸이 잠재된 에너지를 분출해 내려는 듯 용수철마냥 표현되어 있다)에 빠져들었다. 미국의 미술수집가 케이트 심슨(세번째)과 그에게 강한 인상을 준 일본 여배우 하나코(다섯번째)의 흉상(여섯번째)도 만들었다.

로댕과 <신의 손>.

"누드는 진정한 나의 종교이다"

1900년경부터 로댕은 여성의 누드 선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지금 남아 있는 이 도발적인 그림들-에로틱한 누드와 레스비언 커플을 포함해-은 모두 1,500점이 넘는다. 상징주의 시인이며 비평가인 아서 사이먼스는 이렇게 썼다. " 이 놀라운 누드화에서 우리는 드가를 능가하는 단순성으로 묘사되고 있는 여성을 발견한다. 동물로서의 여성, 어떤 면에서는 백치로서의 여성이다. 일본인이라도 이처럼 빛나는 휘갈김을 통해 그림을 단순화시키지 못했다. …… 이것들은 조각가의 데생, 조각가의 노트이며, 따라서 조각가의 눈에 비친 형태를 화가보다 더욱 간명하고 더욱 담백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것들은 화가의 데생과 다른 언어로 발언하며, 그 과정에서 선에서 빛을 포착하는 지점들, 윤곽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곡선을 찾아 나간다. 화가의 데생을 볼 때 우리는 색을 본다. 그러나 조각가의 압축된 이 노트에서 우리는 마치 대리석을 손끝에 만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내 눈이 본 것을 나의 손은 어느 만큼 느끼는가?"

"작업에 임할 때 나는 사람의 육체에 관한 완벽한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육체의 구석구석에 관한 깊은 '느낌'을 갖고 잇어야 한다는 사실을 당신은 모르나요? 말하자면 나는 인간의 육체가 그리는 선을 육화시켜야 하는 겁니다. 그 선들은 나의 본능에 깊이 뿌리박혀 있으며 나 자신의 일부가 되어야 하지요. 나는 손끝에서 그것들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나의 눈에서 나의 손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나는 내가 이해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어요. 보세요! 이 데생은 무엇입니까? 이 양감을 표현하면서 나는 모델로부터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어요. 왜냐고요? 어느것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는 확신을 갖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모델을 종이에 표현하는 기술문제가 모델에 대한 나의 감정, 눈으로 손으로 전달되는 느낌의 흐름을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눈을 떨구는 순간 그 흐름은 멈추어 버립니다. 나의 데생이 나 자신을 검증하는 유일한 수단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지요. …… 나의 목표는, 내 눈이 본 것을 나의 손은 어느만큼 느끼는가를 검증하는 데 있습니다."

오귀스트 로댕

앤서니 루도비치의 《오귀스트 로댕의 개인적 추억》(1926)에서

 

릴케는 비롱관에서 로댕에게 받은 책상을 고맙게 여겼다. 그것은 "나의 원고를 마을처럼 펼쳐 놓을 수 있는 드넓고 비옥한 벌판이 될 것이다."

로댕은 이집트 청동상, 작은 조각, 페르시아 소품, 그리스-로마의 흉상과 토르소를 수집했다. 이것들은 헛간, 뜰, 작업실, 식탁까지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뫼동의 이시성(城) 앞에 있는 로댕의 무덤을 <생각하는 사람>이 굽어보고 있다. 로댕은 로즈 뵈레 옆에 묻혔다. 장례식에는 로댕의 친구들과 각계 인사들이 참석했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