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황영찬

Tag

Notice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 total
  • today
  • yesterday

2015-057 미라 - 영원으로의 여행


프랑스와즈 뒤낭, 로제르 리슈탕베르 지음 / 이종인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37


082

시156ㅅ  32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32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죽음은 무엇이었으며,

왜 그들은 시체를 영구히 보존하려고 했을까?

생명을 잃고 바싹 마른 몸만 남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이 책을 펼치는 순간,

왕릉 속의 석관이 열리고 그 안에 누워 있던 미라의 붕대가

풀어지면서 2천 년 전의 비밀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관 속의 미라는 평온한 얼굴로

고대 이집트인들의 삶과 죽음을 들려준다.


수천 년간 내려온

시체 보존 기술을 전수받은 이집트의

방부처리사들은 죽음 속에다 삶의

외관을 되살리려 하였다.

다음에 나오는 미라들은 이집트의

서쪽 마을인 두치의 공동묘지에서 발견된 것들로,

방부처리사의 놀라운 기술을 보여준다.

이 미라들을 현대적인 기술로 분석해 봄으로써,

학자들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삶과 죽음에 관한 많은 생각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


Les Momies, un voyage dans l'eternite


차례


제1장 미라의 부활

제2장 미라 제작 기술

제3장 불멸을 향한 갈증

제4장 죽은 자의 세계와 산 자의 세계

제5장 과학적 연구

기록과 증언

연보

참고문헌

그림목록

찾아보기


프랑수아즈 뒤낭 Francoise Dunand

프랑수아즈 뒤낭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2대학의 종교사 교수로 재직중이며, 카이로에 있는 프랑수아 동양고고학 연구소(IFAO)의 위원을 역임했다. 뒤낭은 고대 이집트의 신앙과 종교적 관습에 관한 논문과 책을 발표했으며, 1983년부터는 IFAO의 두치 고대공동묘지 발굴 작업을 지휘하고 있다.


로제르 리슈탕베르 Roger Lichtenberg

로제르 리슈탕베르는 현직 의사이며, 파리에 있는 아튀르-베르네 연구소의 방사선부를 책임맡고 있다. 1976년 람세스 2세 미라 조사팀에 참여했으며, 미라 연구와 방사선 임상학에 관한 논문을 여러 편 발표하였다. 리슈탕베르는 1982년부터 두치의 미라들에 대한 인류학적 · 고생물학적 연구에서 X선 촬영을 총지휘하고 있다.


옮긴이 : 이종인

1954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였고, 한국 브리태니커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번역서로는 시공 디스터버리 총서 1번 <문자의 역사> 23번 <셰익스피어> 28번 <붓다> 33번 <세잔>이 있으며, 그외 <절망이 아닌 선택> <증발> <때로는 낯선 타인처럼> 등이 있다.


제1장

미라의 부활


이집트를 여행한 옛 사람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B.C. 5세기의 저술에서 이 낯선 나라 사람들은 "모든 풍습이 다른 나라와 다르다."고 썼다. 예를 들어 그리스 사람들은 시체를 화장한 반면, 이집트 사람들은 시체에 생명의 모습을 주려고 애썼다. 이러한 저작들 덕분에, 이집트는 늘 미라의 땅으로 기억되어 왔다.

17세기만 해도 미라는 여전히 공상의 대상이었다(위). 기자의 제2 피라미드 대현실(大玄室)을 그린 조반니 바티스타 벨조니의 석판화(1818)는 한층 정밀한 묘사를 보여 준다.

1908년, 맨체스터 대학의 마가렛 머레이(앞치마를 두른 이)가 12왕조(B.C. 1991-1786년경) 시대의 성인 남성 미라에 대한 병리학적 검사에 착수했다. 이 미라는 영국의 위대한 고고학자 윌리엄 매튜 플린더스  페트리 경이 나일강 하류에서 공식적인 탐사작업을 벌이던 중 발견한 것이다. 1858년 이후 카이로에 있는 고대유물관리국의 허가 없이는 유적지 발굴이나 유물의 해외반출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불라크의 전원 주택 복도에서 발견된 유물을 그린 루이지 마예의 그림(위). 《이집트 풍경》(1801~1804)에 수록. 아래는 람세스 2세의 미라.

하워드 카터가 금도금한 네 개의 성골함 중 하나를 열고 있다. 가장 안쪽에 있는 성골함에는 투탄카멘의 목관을 넣은 석관이 들어 있었다.

전실(前室)에서 발견된 투탄카멘의 흉상. 채색 회반죽을 덧칠한 이 나무 흉상은 생생한 표정을 담고 있으며, 아문신을 연상시키는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머리장식의 용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람세스 2세 시대의 인물인 카에무세트 왕자의 장례용 가면은 사카라에서 발견되었다.

셰스홍크 2세의 것인 이 가슴장식은 재생의 상징인 풍뎅이를 묘사하고 있다(위). 프수세네스의 내장을 꺼내기 위해 복부에 뚫은 구멍을 가리기 위한 황금판(가운데). 프수세네스의 황금 샌들(아래). 타니스에서 발견된 이 유물들은 의식용 용품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제2장

미라 제작 기술


미라 제작은 B.C. 3000년 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미라 처리 기술이 완성된 것은 B.C. 1000년 전이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시체에 살아 있는 모습을 부여하는 복잡힌 기술을 터득하는 데에는 수세기에 걸친 시행착오가 필요했던 것이다.

'진저(생강)'라고 알려진 이 미라는 B.C. 3200년경에 제작되었으며, 게벨레인 사막에서 발굴되었다. 현재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진저는 자연적으로 미라화된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되고 있다. 모래 속에서 이런 미라를 발견한 고대 이집트인은 자연스레 사후세계를 꿈꾸었을 것이고 시체를 미라로 처리할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때 이후로 그들은 제물이나 일상 생활용품을 그릇에 담아 시체 곁에 놓아두기 시작했다.

시체에서 들어낸 내장을 담아 둔 카노픽 항아리. 이 항아리가 어떻게 쓰였는지 밝혀 낸 샹폴리옹은 이렇게 적어 두었다. "섬유질조직…… 동물의 냄새, 향유를 잔뜩 바른 물체를 그릇 바닥에서 발견했다. 그것은 천으로 싸여 있었다. …… 간, 뇌수, 작은뇌."

안티노에에서 심하게 파손된 미라를 발굴한 사람은 이것이 아나톨 프랑스의 소설 《타이스》의 주인공인 타이스의 미라라고 주장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창녀인 타이스는 수도승을 유혹하려다가 그에게 감화되어 평생을 사막에서 참회하면서 살았다.

아니 파피루스(19왕조)의 한 장면. 죽은 자를 썰매에 실어 영원히 쉴 곳으로 나르고 있다. 아내와 친지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다.

장식을 넣은 튜니카(소매가 짧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그리스 · 로마 사람들의 속옷)와 숄만을 걸친 '안티노에의 여자 장식사'는 파라오 시대의 전통에서 벗어나는 시체 처리 방식을 보여 준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아누비스 가면의 하나. 테라코타에 색을 칠했고 눈구멍을 둘 뚫어 놓았다.


제3장

불멸을 향한 갈증


"그대는 '라'와 같이 되어 영원을 향해 일어서서 헤엄쳐 가리라."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죽음을 이 생(生)에서 저 생(生)으로 옮겨 가는 것이라고 믿었다. 남자, 여자, 어린아이, 동물 할 것 없이 영원한 거처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미라 처리라는 준비단계를 마쳐야 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구성요소가 흩어진다고 믿었다. 그림에서 검고 바싹 마른 미라는 살아 있는 사람의 '바(영혼의 새)'와 함께 있다. 그들은 장례의 마법을 통해 영혼의 새가 언젠가는 죽은 육체와 재결합한다고 믿었다.

신왕국시대에 들어서면 서민들도 왕가의 신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타네테레트라는 여인의 관에는 아누비스를 앞세운 태양의 배가 그려져 있다.

죽은 아내와 남편이 사후세계에서 이승에서의 쾌락을 누리고 있음을 표현한 그림. 제물이 담긴 테이블과 세네트 게임 판이 부부 앞에 놓여 있다.

후네페르의 《사자의 서》에 들어 있는 그림(위). 죽은 자(그림 왼쪽)가 아누비스의 인도를 받아 심판정으로 들어가 오시리스 앞에 선다(그림 오른쪽). 가운데 장면은 심장 달기 의식이다. 악어 여신인 오페트와 암소 여신인 하토르가 웨스트의 산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아래). 이 그림은 아니의 《사자의 서》에 수록되어 있다.

"나는 이 들판을 차지했노라. …… 여기서 나는 먹고 마시고 축제를 벌였노라. 그리고 밭을 갈고 추수를 하였노라." 《사자의 서》에는 그렇게 씌어 있다. 아니의 《사자의 서》는 사후세계를 묘사한 그림을 보여 준다.

매 미라 가면을 쓴 미라는 인간의 미라처럼 정교하게 붕대처리되어 있다.

 

제4장

죽은 자의 세계와 산 자의 세계

 

 

저승에서의 삶을 이승의 삶과 같이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무덤에 많은 부장품을 넣어 주었다. 그중에는 값이 상당한 귀중품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 결과는 도굴꾼의 등장으로 나타났다. 도굴은 이집트 도처에서 자행되었고 소박한 무덤이라해도 도굴꾼의 손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관에 그려진 눈(아래, 중왕국시대)은 죽은 자도 볼 수 있도록 한다는 주술적 의미를 지닌다. 위는 19세기 초에 루이지 마예가 그린 그림으로 대피라미드 왕의 현실을 보여 준다. 여기에 있던 케오프스 파라오의 화강암 석관은 텅 빈 채로 발견되었다.

왕릉의 두 가지 형태. 위는 케프렌의 피라미드(4왕조)이고, 아래는 사카라에 있는 메르네이트 왕비의 마스타바(1왕조)이다.

"만약 너희들 중 하나가 저 세상에서 어떤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면 '대령이오!'라고 말하라." 《사자의 서》에 있는 이 말은 죽은 주인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우샤브티스의 임무를 상기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우샤브티스에 새겨지곤 했다. 우샤브티스는 주인의 지위에 따라 몇 인치에서 몇 피트에 이르기까지 그 크기가 다양했으며, 아멘호테프의 인물상처럼 주인을 흉내내어 그들 몫의 소형 관을 갖추는 경우도 있었다.

화려한 장식을 자랑하는 이 세 개의 관은 상당한 지위를 누리던 여인 타무트네프레트의 것이다. 관뚜껑에는 여러 줄로 상형문자가 씌어 있고 장례의 신들이 그려져 있다. 그 신들 중에는 죽은 여인을 보호하듯이 감싸고 있는 날개 달린 여신도 있다. 문자를 써넣는 일은 죽은 자가 사후에도 영생을 누리게 해 달라는 기원이었다.

산 자를 보는 죽은 자의 눈

그리스-로마 시대의 이집트에서는, 죽은 자를 손쉽게 알아보려는 듯이 미라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사실주의가 유행했다. 암모니우스라는 남자(위)와 이름을 알 길이 없는 여인(아래)의 미라 초상화는 나무나 천에 색깔 있는 왁스 혹은 접착제를 섞은 안료로 그린 것이다. 표현력 풍부한 이 초상화는 당시 사람들의 범세계주의적인 면모를 보여 준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전례가 없는 이런 초상화는 폼페이에서 발견된 로마의 초상화를 연상시킨다.

아르테미도루스의 경우와 같이, 초상화는 관재나 붕대 섶에 찔러 넣었다. 이 미라는 하와라에 있는 그리스-로마 시대 공동묘지에서 출토된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지하묘지로 네모꼴 기둥과 그리스풍 삼각형 박공벽은 이 지역의 전형적인 무덤양식을 보여 준다.

투탄카멘 왕릉은 현대까지 거의 원형대로 보존된 유일한 무덤이다. 이 왕릉도 매장 직후 도굴꾼에게 훼손되었으나 다행히 부장품은 무사할 수 있었다. 위 사진들은 1922년 이 왕릉이 처음 발굴되었을 때의 모습을 보여 준다. 부장품들이 마구 흩어져 쌓여 있다. 궤짝에 찍힌 도굴꾼의 발자국이 선명하다.

20세기 초에 발굴된 미라.

애벗 파피루스는 람세스 9세 치세 때 열린 람세스 2세 무덤 도굴범들의 재판기록을 보여주고 있다. 도굴범들은 "늘 그랬던 것처럼 무덤을 약탈하러 갔다."고 자백했다. 그들은 왕과 왕비의 관을 열고 부적, 보석 등 귀중품을 탈취한 뒤 관에 불을 질렀다고 했다.

투탄카멘 왕릉의 발굴작업은 몇몇 유품을 현장에서 원형으로 복구하기도 하면서 오랜 시간 힘겹게 진행되었다. 왕릉의 유물 전체는 카이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제5장

과학적 연구


이집트학이 정립되면서 미라는 다시금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거나 제약원료 정도로 취급되던 미라가 현대 과학의 집중 탐구대상이 된 것이다. 도굴꾼의 손에서 미라를 구출해 낸 고고학자들은, 오늘날 첨단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아 이 귀중한 인간자료를 분석하고 보존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가스통 마스페로 경. 마스페로는 기자의 피라미드와 룩소르의 신전을 발굴했다.

투트모시스 2세(아래)와 투트모시스 1세(위)의 사진. 둘은 가족간의 유사성을 보여 주고 있지만, 엑스레이 사진은 후자가 투트모시스 1세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젊은 사람의 뼈대일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시프타 파라오(19왕조 말)의 왼쪽 발의 기형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편평족이라는 주장과 소아마비 후유증이라는 견해가 맞서는 것이다.

중왕국(11왕조)시대에 제작된 미라의 가면과 관재.

헤로도토스 흉상.

알렉산더 대왕의 것으로 여겨지는 석관.

람세스 6세의 현실 그림 중 새로운 태양관(solar disk)의 창조를 묘사한 부분.

투탄카멘 왕릉에는 많은 보물이 부장되어 있었다. 위는 설화석고 화병이다.

데이르엘바하리 미라 저장소에서 발견된 세티 1세의 미라.

하워드 카터가 투탄카멘 왕릉에서 장례용 긴 의자를 꺼내고 있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