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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6. 15. 12:53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61 Frida Kahlo 프리다 칼로

 

지은이 | 클라우디아 바우어, 옮긴이 | 정연진

2007, 예경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20003

 

650.8

아887ㅇ  3

 

ART SPECIAL 3

 

Frida Kahlo | 프리다 칼로

 

"나는 다른 수단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그림을 통해 표현할 수 있었다. …… 내가 그림을 통해 원하는 것은

단지 이것뿐이었다."

- 1939년, 프리다 칼로

 

멕시코의 민속 미술과 개인적 고통의 경험을 승화시켜

꾸미지 않은 솔직함과 당당함으로 서구 백인 남성의

미술계에 도전장을 던졌던 프리다 칼로!!!

영화보다도 더 영화 같았던 그녀의 삶은 작품과 함께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다. 풍부한 사진 자료와 그림을

독특한 형식으로 녹여낸 이 책은 프리다의 생생한

육성을 들려준다. 프리다 칼로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짙은 눈썹 아래 감추어진 수수께끼 같은

눈길을 따라 따라가다 보면, 다채롭고 매혹적인 그녀의

삶과 예술이 펼쳐질 것이다.

 

프리다 칼로 | Frida Kahlo(1907-1954)

불꽃과 같은 사랑과 작품을 남기고 떠난 멕시코의 화가.

원시주의적인 양식으로 그린 화려한 색조의 개성 넘치는 프리다의 자화상은 한번 보면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1907년 멕시코시티 교외 코요아칸에서 출생한 프리다는 어릴 때 소아마비로 다리를 절게 되었고 1925년 교통사고로 크게 다쳐 평생 30여 차례나 수술을 받는 등 끊임없이 육체적 고통과 싸워야 했다.

또한 20세기 벽화운동의 거장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과 이혼, 별거와 재결합을 거듭하며 작품 못지않게 극적인 삶으로도 유명하다. 끊임없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과 그에 굴복하지 않는 투지는 그녀의 삶과 작품의 원동력이 되었다.

지은이 | 클라우디아 바우어 Claudia Bauer는 미술시가이며 뮌헨에서 편집자이자 작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이 | 정연진은 독일 베를린 예술대학과 슈트트가르트 예술대학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동시통역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동대학원 연구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동대학원 및 서강대학교에 출강 중이다.

 

1907


>> 막달레나 카르멘 프리에다 칼로, 멕시코 교외의 코요아칸 마을에서 탄생하다.


>> 여성화가 파울라 모더존-베커, 보르프스 베데에서 사망하다.

>> 마리아 몬테소리, 로마에서 첫 학교 및 유치원을 개교하다.

>> 아스트리트 린트그렌 탄생하다.

 

1924


>> 프리다, 이미 2년 전부터 멕시코시티 국립대학 예비학교를 다니다.


>>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53세로 모스크바에서 뇌졸증으로 사망하다.

>> 베를린 국제전파매체박람회(IFB) 첫 개장하다.

>> 말론 브란도, 오마하(네브래스카)에서 탄생하다.

 

1925



>> 프리다, 9월 17일 대형 교통사고로 수개월 동안 입원하다. 예비학교에 복귀할 수 없었던 프리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다.


>> 아돌프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 발간되다.

>> 중국 혁명 발발하다.

>> 만하임 미술관에서 미술사에 새로운 시대를 열 <신즉물주의> 전시회 개막되다.

>> 예술가 장 탱글리 탄생하다.

 

1929



>> 8월 21일, 프리다와 디에고 리베라 결혼하다.

>> 디에고, 공산당에서 제명당하고, 프리다도 디에고를 따라 탈당하다.



>> 10월 25일, 뉴욕증시 대폭락하다. 이 날은 후에 경제대공황을 알리는 서곡인 '검은 금요일'로 불리다.

>> 바티칸 시국 독립하다.

>> 뉴욕 현대미술관 개장하다.

 

1932



>> 프리다, 디에고와 디트로이트에 머무는 동안 두 번째 유산을 경험하다.

>> 9월에 프리다의 어머니 마틸데 사망하다.


>> 마하트마 간디, 천민 억압에 항거하여 옥중단식 감행하다.

>> 구 소련, 사회주의적 현실주의를 국가 공식 예술기조로 표방하다. 자유예술 활동이 금지되다.

>> 독일 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 탄생하다.

 

1939-45

 

>> 프리다, 1939년에 파리 '멕시코' 전시회에 출품하다.

>> 같은 해 디에고로부터 이혼당하다.

>> 1940년 디에고와 재혼하다.

>> 아버지 기예르모, 1941년에 사망하다.

>> 프리다, 1941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다.

>> 프리다, 1943년부터 멕시코시티 국립미술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 독일 군대의 폴란드 침공. 2차 세계대전 발발하다(1939년 말).

>> 피카소, 미로, 달리 등 스페인 예술가들, 프랑코의 파시즘 정권에 항거하는 작품 활동을 펼치다.

>> 1945년 8월 17일,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 투하되다.

>> 1945년, UN 설립되다.

 

1946



>> 프리다, 작품 <모세>로 교육부 주최 국립전시회에서 수상.

>> 프리다, 뉴욕에서 대형 척추수술을 받다.


>> 뉘른베르크 재판 첫 선고가 내려지다.

>> UNESCO 설립되다.

>>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탄생하다.

 

1949

 

>> 프리다의 건강이 점점 더 악화되다.

 

>> 마오쩌둥, 중화인민공화국 건립을 선포하다.

>> 구소련, 첫 원폭 실험,

>> 월렘 드 쿠 닝, 잭슨 폴록 같은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이 뉴욕에서 예술가 동맹인 '성마른 자들(The Irascibles)'을 결성하다.

 

1954

 

 

>> 프리다, 코요아칸의 고향집 '카사 아슬'에서 7월 13일 사망하다. 공식 사인은 폐색전증.

 

>> 엘비스 프레슬리, 히트곡 <That's All Right, Mama>로 유명세를 타다.

>> 미국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의 공산주의자 색출작업이 절정에 다다르다.

>> 미국대법원, 공공교육 시설의 인종차별을 철폐하다.

>> 앙리 마티스, 11월 3일 니스에서 사망하다.

 

1957

 

 

 

>> 디에고, 11월 24일 자신의 작업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다.

 

>> 영화배우 험프리 보가트가 사망하다.

>> 구소련, 세계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지구궤도에 쏘아 올리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파리 루브르 박물관 방문객에 의해 약한 손상을 입다.

 

1958

 

 

>> '카사 아술'을 박물관으로 꾸며 개장하다.

 

>> 작가 리온 포이히트방거, 미국에서 사망하다.

>> 미술가 키스 해링,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커츠타운에서 탄생하다.


 


차례


그때 그 시절

¡비바 멕시코!


최고가 되기까지

디에고의 그늘에서


예술

캔버스를 거울삼아


불안한 영혼


사랑

비둘기와 코끼리


지금도 우리 곁에

프리다 칼로 슈퍼스타


그때 그 시절



"무릎꿇은 채로 사느니

선 채로 죽는 것이 낫다."

멕시코 혁명가 ● 에밀리아노 사파타


격동의 시기 속에서 


…프라다는 성장기를 보냈다. 당시 멕시코에서 농부, 노동자, 인디오족들은 새 정부 수립을 요구하며 해방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더 나은 세상과 빈곤 탈출을 원했다. 이에 디에고 리베라를 위시한 벽화예술가들은 민중의 귀가 되어 벽화에 정치적 메시지를 담아냈다.


아즈텍 문명의 예술


'Toltecatl'이란 고대 아스텍어로 '예술가'란 뜻인데, 아스텟족은 고유 언어로 '예술가'란 단어를 표현할 수 있던 몇 안 되는 인디오 부족 중 하나였다. 예로부터 아스텍 부족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예술가는 교양 있고, 기술이 뛰어나다. 진정한 예술가는 즐거운 마음으로 작업에 임하며, …… 모든 것을 하나로 모아 화합으로 이끄는 능력을 지녔다"고 한다. 멕시코의 벽화예술들의 예술혼에서 이어받았으리라.


"멕시코는 이렇듯 모든 게 혼란스럽고 엉망인데, 농가의 풍경과 인디오들만이 여전히 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구나!"

- 프리다 칼로

독재자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30년 이상 권력을 장악하다가 1910년 자유 혁명을 통해 축출되었다.

혁명이 끝난 후엔,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벽화들이 멕시코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작업 중인 벽화예술가 | 디에고 리베라는 미국 캘리포니아 미술대학의 의뢰로 제작한 벽화에서 표현 공간을 몇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벽화가 만들어지는 작업 과정을 상세히 담았다. 한가운데 위치한 구역엔 총 지휘를 맡은 예술가가 마치 왕좌에 앉은 듯 한 손엔 붓을, 다른 한 손엔 팔레트를 든 채 임시구조물에 걸터앉아 있고, 그 주위에는 열심히 작업하는 문하생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림으로 그려낸 정치 | 벽화예술가들은 프레스코를 통해 뚜렷한 정치적 메시지를 표현했다. 예를 들어 위 작품은 디에고 리베라가 멕시코시티 교육부 청사에 그린 벽화로, 자본주의의 말로를 극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리베라가 이러한 성향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고향"인 미국에서 많은 작품 의뢰를 받은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최고가 되기까지


드랭, 자네, 그리고 나 중에서

프리다 칼로처럼 사람머리를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걸세!

파블로 피카소가 디에고 리베라에게



하룻밤 새 유명세를


…안게 된 프리다는 원칙적으로는 자신만을 위한 예술을 추구했을 뿐, 스타 화가가 되고 싶은 어떤 야망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 좋게도 필요한 시기에 적재적소에 있었던 프리다는 디에고 리베라라는 최고의 지지자를 얻기에 이른다. 이로써 프리다 칼로는 느리지만 꾸준히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생전에 뉴욕 현대미술관과 파리 루브르박물관에 작품을 전시하는 영광까지 누린다.

프리다는 예술의 메카 뉴욕에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루브르 박물관.


상속녀


디에고 리베라는 임종 얼마 전, 후원자이자 절친한 친구인 돌로레스 올메도 파티뇨에게 자신과 프리다의 재산에 대한 신탁을 위임한 바 있는데, 당시 돌로레스는 이미 프리다의 그림을 25점이나 소장하고 있는 상태였다. 돌로레스가 이 그림들을 프리다 생전에 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여인 사이에는 우정이 조금도 싹트지 못했다. 소문에 의하면 돌로레스가 디에고와 가까이 지내는 것에 대해 프리다가 강한 질투심을 보였다고 하지만, 어쩌면 프리다는 돌로레스가 자신의 첫사랑인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와 염문을 뿌렸던 것에 대해 계속 한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도나 로지타 모리요의 초상.

미국과 멕시코 사이를 가르는 축대 위에 선 프리다. 뒤로 보이는 신전의 잔해는 고국의 전통문화를, 공장굴뚝은 미국의 산업화를 상징한다. 그림의 사인으로, 잘 알려진 '프리다 칼로' 대신 자신의 중간이름인 Carmen과 디에고의 성인 Rivera를 사용한 것이 흥미롭다.


"난 요즘 그림도 조금 그리고 있어. 내가 무슨 대단한 예술가가 되겠다는 게 아니라, 그렇지 않으면 딱히 다른 할 일도 없거니와, 작업을 하고 있는 동안만은 모든 근심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지."

-프리다 칼로

프리다는 이 그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직접 서술했다. "여기에 헝가리계 독일 혈통이며, 예술가이자 사진작가이고, 너그러운 성품에, 박식하신 우리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를 그렸노라. (……) 존경을 표하며, 딸 프리다 칼로."

프리다는 남편 디에고를 매우 존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초상화는 단 한 점만을 남겼다.

프리다는 작품 활동을 위해 수없이 국경을 오가는 디에고와 줄곧 동행했다. 사진의 배경은 반쯤 완성된 뉴욕의 '뉴 워커스 스쿨' 벽화.

뉴욕 주재 화상인 쥘리엥 레비(아래)가 프리다의 재능을 알아보고 열어준 첫 개인전은 《타임》지에 소개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몇 년 후에는 뉴욕 현대미술관도 프리다의 작품을 전시하게 되었다(아래).

1952년 또 다시 수술을 받아야 했던 프리다는 병상을 떠나지 못하게 되자, 미술활동 초기처럼 누워서 그림을 그려나갔다.

내면을 보여주는 창 | 프리다 작품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자화상들은 마치 암호를 걸어 잠궈 놓은 영혼의 거울과도 같다. 이 자화상이 완성된 1930년 당시 프리다는 23세로, 유명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부인이 된 직후였다. 감상자를 응시하는 듯한 프리다의 모습에서 당당하고 아름다운 멕시코 여인의 자태가 느껴진다.

여배우를 추모하며 | "1938년 10월 21일 새벽 6시, 도로시 헤일이 햄프셔 하우스 빌딩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그녀를 추모하며 제작하다. 프리다 칼로" 프리다는 이 자화상에 여배우의 생전 모습을 격을 갖춰 담는 대신, 그녀의 죽음을 끔직할 정도로 상세히 묘사하는 방식을 택했다.

수상작 | 프리다가 멕시코시티 왕립미술관 국립전시회에서 2위를 수상한 작품 <모세 혹은 천지창조의 씨앗>으로, 후원자가 선물해 준 프로이트의 《모세와 유일 신앙》이란 저서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이 그림에서 프리다는 모세를 수많은 캐릭터로 표현함으로써 감상자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겨 놓는다.


예술



"나는 내가 처한 현실

그려낼 뿐이다."

프리다 칼로


자기만의 독특한 화풍은


…프리다 작품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츠리다는 줄곧 자신이 택한 길만을 걸었으며, 동시대 주류 예술계의 영향에서 자유로웠다. 프리다는 작품 활동에 있어서 독립적 창조행위를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작품세계에 영감을 주는 아이디어의 원천이 어디에서 오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 고대 중남미 예술, 서민들의 민속공예 등이 그것이다.

살바도르 달리, <재앙의 유희>, 1929. 캔버스에 유채/콜라주, 31×41cm, 개인소장.


초현실주의


1921년 이후 다다이즘에서 발생한 현대 문학과 예술의 사조. 무의식, 꿈, 그리고 상상의 세계에 대한 미학적 표현을 추구하며, 이성적 제어력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 대표적 초현실주의 예술가로는 작가이자 시인인 알드레 브르통과 화가 막스 에른스트, 살바도르 달리, 이브 탕기, 르네 마그리트 등이 있다.

프리다는 태어나자마자 인디오족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랐다. 그림에서 유모가 쓰고 있는 가면은 고대 멕시코의 것으로, 프리다가 후에 자신의 뿌리인 멕시코 문화에 가지게 될 애착을 예견하는 듯하다.

페데그랄 지방의 용암지대에 뿌리를 박고 누워있는 프리다는 이 그림에서 수사적 표현이 아닌 실제 뿌리의 묘사를 통해 고국의 대지와 자신이 융화되어 있음을 표현했다.


"나는 다른 수단으로는 도저히 표현되지 못하는 것들을 그림을 통해 표현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한 만족 외에 어떤 것도 바랄 것이 없었다."

-프리다 칼로

이 그림을 작업할 당시 프리다는 이혼상태였다. 이를 반영하듯, 목에 두른 나뭇가지의 가시는 목을 찌르고, 정면을 응시한 눈빛은 갈 길을 잃은 듯 공허하다.

<탄생 혹은 나의 탄생>은 매우 모호한 그림이다. 프리다는 당시 유산을 겪은 상태였고, 얼마 지나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프리다의 상처받은 영혼을 엿볼 수 있는 모티브이다.

조르주 브라크, 파블로 피카소나 이 그림의 후안 그리스 등은 유럽을 지배하고 있는 입체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반면 프리다는 대서양 건너 유럽대륙에서 새로이 일어나는 어떤 기조에도 휩쓸리지 않았다.

프리다의 말기 작품들은 이전처럼 자세한 묘사를 추구하지 않는다.

건강의 악화도 프리다의 삶에 대한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이를 반영하듯, 수박을 그린 정물화는 밝은 색과 생기로 넘쳐난다.

첫 자화상 | 끔찍한 교통사고 후 병상에 틀어박힌 프리다는 미술서적을 탐독하며 이탈리아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세계에 빠져 든다. 프리다가 선보인 첫 자화상 속에 나타나는 자세, 기다란 목, 우아한 손짓은 보티첼리 그림에 등장하는 여인을 연상시킨다.

욕조 속에서의 상상 | 프리다가 그린 작품 중 가장 초현실주의적인 <내가 물 속에서 본 것 혹은 물이 나에게 준 것>을 보면, 다른 작품들, 그리고 살아오며 겪은 사건들을 연상시키는 형상들로 가득하다. 오른쪽 초록 잎 사이로 프리다의 부모가 내다보고 있으며, 왼편에 물에 잠겨 떠다니는 민속의상은 한 해 전 그린 <추억 혹은 심장>에도 등장한다.

동물에 대한 애착 | 프리다의 자화상에는 동물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실제 생활에서도 칼로 · 리베라 부부는 원숭이, 개, 염소 등을 키웠다. 프리다 왼편 어깨 뒤의 고대 멕시코 형상은 프리다와 디에고가 열정적으로 수집했던 멕시코 골동품을 연상시킨다.

수집품 | 원숭이와 함께한 이 자화상은 남편 디에고 리베라와 이혼한 후인 1940년, 뉴욕의 수집가인 네이슨 위단의 의뢰로 그려졌다. 이 시기는 프리다가 전남편으로부터 금전적 독립을 하기 위해 작업 의뢰를 활발히 받던 때이다.




"이 당신에게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말고

받아두도록 하시오!"

1938년 디에고가 프리다에게


비극과 행복은


…어떻게 보면 매우 밀접한 개념이다. 특히 프리다의 삶을 관찰하면 그렇다. 프리다가 겪은 끔찍한 사고는 학문에 대한 꿈은 꺾어 버렸지만, 예술세계로 이끄는 또 다른 길을 열어 주었다. 극에서 극을 달리던 디에고와의 사랑은 큰 기쁨도 주었지만, 동시에 깊은 고통을 안겨 주면서, 프리다가 계속하여 명작들을 탄생시키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격정으로 가득 찬 자신의 이야기를 그림에 담아 낸 프리다는 우리에게 그림 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기예르모가 찍은 사족사진에는 여자아이들이 넘쳐난다.


일기장


프리다가 1940년 뒤늦게 쓰기 시작한 일기장에는 글보다는 그림이 더 많이 담겨 있다. 일기장을 가득 채운 수채화, 스케치, 시구, 짧은 메모들은 너무나 모호해서 그 명확한 진의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한편 일기장 곳곳에 보이는 화려한 색채들은 프리다의 감성을 풍부하게 담아내고 있는 데, 그 표현방식이 어떤 작품보다도 더 직접적이다.


1932년 10월 16일, 아버지 기예르모가 가장 아끼던 딸 프리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프리다는 부모인 기예르모, 마틸에와 매우 친밀한 사이였다.


"프리다와 함께 하는 삶이 정말 즐겁죠?"

-프리다 칼로

마틸데 칼데론기예르모 칼로는 1898년 2월에 결혼한다. 기예르모는 미래의 장인 밑에서 일하면서 사진촬영기술을 배웠다.

프리다는 네 자매 중 셋째였다. 사진은 1911년 프리다가 네 살 때.

프리다는 소싯적부터 가족 중에서도 특이한 구성원이었다. 자매들과 사촌들이 사진촬영을 위해 예쁜 드레스를 꺼내 입을 때, 프리다는 엉뚱하게도 신사 같은 정중앙 가르마에 양복을 입고 포즈를 취했다.

프리다는 당시 사고 상황과 비슷한 봉헌화를 하나 찾고는, 바닥에 누워있는 희생자의 모습을 자신의 자화상 같은 형상으로 덧그렸다. 위기에서 구원해 준 성자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하단의 봉헌사는 프리다가 직접 쓴 것이다.

디에고 리베라는 예술가로만 알려진 것이 아니라, 활발한 정치활동으로도 유명했다. 디에고는 공산당원으로서 정치적 가두행진에도 자주 참가해 시위대를 진두지휘하곤 했다. 사진은 1920년대 디에고가 참가한 가두시위 장면.

프리다는 디에고와 마찬가지로 멕시코 공산당원이었다. 이 벽화에서 디에고는 젊은 프리다를 계층갈등에 항거해 무장 시위하는 민중을 돕는 공산당 여성투사로 그렸다.

결혼식 1년 후, 프리다는 자신과 남편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를 그렸다. 여기 보이는 그림은 일종의 준비용 스케치라서 후에 완성된 작품과는 달리 디에고의 손에는 아직 찰레트와 붓이 들려 있지 않다.

프리다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알게 된 레오 엘뢰서 박사는 프리다에게 의료에 관한 상담을 자주 해주는 좋은 친구였다. 이 초상화는 프리다가 그에게 감사하는 의미에서 그린 작품이다.

어두운 빛깔 | 알리샤 갈란츠를 그린 이 초상화는 프리다의 초기작으로서, 귀족적인 알리샤의 자세나 우아하게 취한 손짓을 볼 때 프리다가 그린 첫 자화상과 비슷한 느낌이다. 프리다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풍을 사랑했고, 후에 당대의 그림에서 마음에 들었던 요소들을 자신의 작품세계에도 반영했다.

대가족 | 작은 여자아이로 표현된 프리다가 어릴 적 추억이 담긴 카사 아술의 마당에 서 있고, 그 뒤에 펼쳐진 멕시코 농촌을 배경으로 부모인 기예르모와 마틸데가 자리를 잡고 있다. 프리다의 손에서 나온 붉은 리본이 부모를 걸쳐 조부모에게까지 닿아 있다. 어머니 마틸데의 몸 앞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 상태의 프리다가 공중에 떠 있고, 그 밑에는 꽃 한 송이가 꽃가루를 뿌리는 동안, 후에 프리다가 될 난자가 수정되고 있다.

전통 민속 | 프리다는 디에고와 결혼한 후 자신의 멕시코 혈통에 대한 자긍심을 밖으로 표출하기 시작했다. 프리다는 특히 색깔이 화려하기로 유명한 테우아나 전통의상을 즐겨 입었는데, 테우아나 여인들은 명절엔 그림에서처럼 하얀 드레스를 입고, 화려한 레이스로 장식된 머리장식을 쓰곤 했다.

화초인간 | 이 초상화의 주인공은 원예가인 루터 버뱅크로, 프리다는 그를 직접 알지도 못했고, 또 이 초상화가 그려질 당시 그림의 주인공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디에고와 프리다는 한때 버뱅크의 번식이론에 매우 심취한 적이 있었다. 프리다의 상상 속의 버뱅크는 반은 인간, 반은 화초이고, 뼈만 남은 인간의 사체에서 생명에너지를 뽑고 사는 존재이다.

실험 | 프리다가 작품을 만들어 내면서 유화가 아닌 다른 방식을 사용한 적은 단 한 번 있는데, 디트로이트에서 겪은 유산의 아픔(아래 그림 참조)을 묘사한 이 석판화가 그것이다. 왼편에는 세로로 "이 에디션들은 네 경험에 비춰보았을 때 좋은 것도 아니었고 나쁜 것도 아니었다. 열심히 일하라! 그러면 더 좋은 작품을 얻을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가혹한 운명 | 프리다는 1932년 7월, 유산으로 인해 디트로이트 헨리 포드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끝없는 눈물을 흘리며 병상에 누워 있는 프리다에게서 마치 탯줄 같은 빨간 줄이 뻗어 나와 유산을 상징하는 형상들이라든지 달팽이나 꽃처럼 성적인 상징의 형상들과 연결되어 있다. 공중에 떠 있는 듯한 프리다를 배경으로 펼쳐진 황량한 산업단지의 풍경은 프리다가 느끼는 절망과 외로움의 감정을 더욱 강렬하게 전한다.

멕시코를 향한 그리움| 프리다가 이 그림에 착수할 당시 디에고는 뉴욕 록펠러센터에 거대한 벽화를 그리고 있었다. 디에고가 미국에서 예술가로서 높은 명성을 누리며 상류사회와 교류하는 동안, 프리다는 어서 디에고와 함께 다시 멕시코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도시 정글 속에서 홀로 길을 잃은 듯한 테우아나 전통의상이 프리다의 그리움을 상징한다.

밝은 모습 | 목걸이를 하고 있는 프리다의 모습을 담은 이 인상 깊은 자화상은 위의 작품 <내 드레스가 거기에 걸려있다 혹은 뉴욕>과 같은 해에 그려졌지만, 그림 속 당당한 모습에서 당시 프리다를 괴롭혔던 향수병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이 그림 속의 프리다는 유산의 괴로움까지도 씻어낸 듯 밝은 모습이다.

 디에고는 디트로이트 미술학교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자, 프리다와 함께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북서부 도시인 이리(Erie)로 거처를 옮긴다. 이 사진은 건축가 앨버트 칸과 만날 당시 찍은 것이다.

디에고가 자신의 여동생 크리스티나와 깊은 관계를 맺어 왂다는 사실을 알게 된 프리다는 슬픔을 삭이지 못해 긴 머리를 잘라 버렸다. 이 사진은 그 직후 친구인 루시엔느 블로흐가 찍은 것이다.

디에고는 록펠러 센터에 그렸다가공산주의 사상을 연상케 하는 모티브로 논란을 일으켜 파기되었던 문제의 벽화를 후에 멕시코시티에 다시 복원했다.

프리다의 첫 개인전을 주관했던 쥘리앵 레비의 애정은 프리다의 작품세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후에 공개된 레비 개인 소장의 몇 사진들은 그들이 더 깊은 관계였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파리에서 그림을 전시할 당시, 프리다는  동료예술가인 마르셸 뒤상의 집에서 머물렀다. 프리다에게 그는 "온갖 뜨내기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진정한 친구가 되어준 사람이었다.

붉은 이념 | 레오 트로츠키에게 헌정한 자화상은 트로츠키의 정치이념에 대한 암시로 가득 차 있다. 하얀 커튼은 트로츠키가 대항하여 투쟁하던 러시아 혁명의 반대세력인 '백색파'를 의미한다. 반면 프리다는 입술엔 새빨간 립스틱을, 그리고 손톱에는 빨간 매니큐어를 칠하고, 붉은 상의를 입어 '적색파'임을 나타내어 자신은 트로츠키의 편임을 상징하였다.

회색빛 나날들 | 우아하게 의자에 앉은 프리다는 그림의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다. 배경이 되는 방은 온통 회색빛에 황량하기만 하고, 프리다가 입은 검은 옷은 테우아나 여인들이 장례식에 입는 의상이다. 프리다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는 예술가로서 성공가도를 달릴 시기였지만. 전시회가 길어질수록 사랑하는 남편과 떨어져 있는 기간도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높은 곳에 바쳐지다 | 화상 피에르 콜르가 멕시코를 주제로 기획한 그룹전에 전시되었다가 루브르 박물관이 구입한 자화상이다. 이로써 프리다는 유명 박물관에 그림을 제공하게 된 첫 남미 여성 예술가가 되었다.

이별의 아픔 | 1939년, 프리다는 디에고와 이혼하게 된다. 프리다는 매우 괴로워했고, 이별의 아픔을 그림을 통해 달랬다. 두 명의 프리다가 상처받기 쉬운 심장을 드러내 놓고 있는 이 그림은 프리다의 작품들 중에서도 명작으로 꼽힌다. 오른쪽에 앉은 프리다의 손에는 디에고의 어린시절 사진이 있는 작은 메달이 들려있고, 이 메달은 핏줄을 통해 심장과 연결되어 있는데, 왼쪽에 앉은 프리다는 메달을 가위로 잘라 버린다.

고통 받는 육신 | 프라다는 18세에 겪은 끔찍한 버스사고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보정기구를 착용해야 했다. 프리다가 보는 자신은 갈라진 틈으로 척추 대신 부러진 기둥이 보이는 육체였다. 몸에 수없이 박힌 바늘은 프리다가 겪어야 하는 만성적 고통을 상징한다.

용기 | 프리다는 1946년에 대규모 허리수술을 받아야 했다. 프리다는 고통 때문에 평생 많은 수술을 받았지만, 매번 일시적인 효과뿐이었다. 오른쪽에 앉은 프리다가 손에 들고 있는 깃발에는 자신을 응원하는 문구가 적혀있다. "희망의 나무여, 용기를 잃지 말기를!"

프리다는 1943년 멕시코시티 국립미술학교에서 강의를 맡게 된다. 이 자화상에서는 스승을 둘러싸고 있는 네 마리의 원숭이는 프리다가 "로스 프리도스"라는 애칭으로 부르곤 했던 네 명의 제자들을 상징한다.

프리다는 사망하기 수년 전부터 부쩍 정치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기 시작했고, 1948년에는 1929년에 탈퇴했던 공산당에 재가입한다. 사진은 디에고와 함께 시위활동에 침여한 프리다.

프리다는 멕시코에서 첫 개인전이 열린 개막식 날 병세가 악화되어, 구급차를 타고 들것에 실려 갤러리에 입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날은 프리다 생애 가장 중요한 날이 되었다.

다리 절단수술 전 프리다가 일기장에 적은 내용이다. "다리가 뭐 하러 필요해. 내겐 날 수 있는 날개가 있는 걸……."

죽기 직전, 프리다는 휠체어에 앉아 디에고와 함께 집회에 참여했다.

감성의 역사 | 프리다가 일기를 쓰기 시작한 건 비교적 나이가 들고부터이다. 프리다는 일기장에 주변 사건에 대해서만 쓴 것이 아니라, 마음 속 감성을 연상시키는 비밀스러운 스케치, 수채화, 시구 등도 함께 실었다. 이 그림은 상상 속의 "무시무시한 눈의 공룡"과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는 여자를 보여 주고 있다.

당을 위하여 충성 | "난 내 몸이 허락하는 한, 내 작은 힘이라도 혁명을 위해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혁명은 내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는 일기장의 일부분은 프리다가 말기에 얼마나 공산주의에 심취했는지 짐작케 한다. 엥겔스, 미르크스,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 등은 프리다에게 마치 자신을 보호하는 성자 같은 존재가 되었다.

대지가 선사하는 열매 | 프리다가 가끔 그리곤 했던 정물화들은 단순히 꽃이나 과일 등을 그대로 따라 그리는 차원의 정물화가 아니라, 나름대로 숨겨진 깊은 의미를 담고 잇다. 여기서 붉은 과육은 프리다의 상처 입은 육신을 상징하며, 흐릿하고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보이는 과일과 야채의 조화는 육감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무성한 잎 속에 숨겨진 이중적 의미 | <태양과 삶>은 언뜻 보기엔 단순히 최초를 그린 그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림을 깊이 관찰하면, 붉은 태양 뒤로 성적 묘사가 펼쳐진 것이 보인다. 태양 뒤로 꽃봉오리 속에 보이는 것은 울고 있는 태아의 형상으로, 아이를 갖고 싶은 프리다의 마음을 나타낸다.

생명의 꽃 | 프리다가 1944년에 그린 이 이국적인 꽃 그림은 육체적 사랑과 번식행위의 신비에 대한 경의를 담은 작품이다.

표현력 | 프리다가 세상을 뜨기 3년 전에 탄생한 작품 <원(圓)>은 매우 영적이고 강한 표현력을 뿜어낸다. 내면에 꿈틀거리는 강한 성적 에너지와 점점 허물어져 가는 육신에 대한 절망이 동시에 내재된 인상 깊은 작품이다.

유토피아 | 프리다의 공산주의 찬양은 말기에 가까워지면서 점차 기괴한 모습을 띤다. 프리다는 마치 공산주의 우상들이 자신을 육체적 고통에서 해방해 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프리다가 사망한 해에 완성된 작품 <마르크스주의가 병자를 낫게 할지니>에선 목발을 집어 던지고 그림 중앙에 우뚝 선 프리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지막 작품 | 프리다가 당당한 자세로 대형 스탈린 초상화 앞에 앉아 있다. 그림은 산만하고 초조하며 거칠기까지 하다. 끊임없는 육체적 고통을 덜기 위해 섞어 먹었던 약과 술은 프리다에게 어쩔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말았다.


사랑


"난 이상하게도 한 여인을

사랑하면 할수록, 더 많은

상처를 주고 싶었다.

프리다는 이런 나의 역겨운 성격으로

인한 희생양 중에 가장 대표적인 여인

일 뿐이었다."

디에고 리베라, 1955년 집필한 자서전에서




불타는 정열만큼


…프리다의 연애사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것이다. 동료예술가뿐 아니라, 러시아 혁명가인 레오 트로츠키까지도 모두 프리다에게 반해 버리지만, 정작 프리다가 가장 사랑한 사람은 프리다를 가장 실망시킨 사람이었다. 못 말리는 카사노바였던 디에고 리베라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다른 여자들과 바람을 피워댔다.

프리다가 신부 · 신랑으로 그린 두 사람.

<내 동생 크리스티나의 초상>.

레오 트로츠키.


프리다의 여인들


지독히 이성애적이었던 디에고조차도 인정한 사실이 있은;, "여자 둘이 만나면 전혀 다른 차원의 놀라운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디에고는 프리다 주위의 남성들에게는 질투심에 불타 공격적인 성향을 드러냈지만, 프리다의 레즈비언 애인들에게는 지극히 관대했다. 그 수가 한두 명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성과의 경우에는 달리, 프리다의 동성애적 사랑은 짧게 끝났으며, 정열적인 밤을 보내는 상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평생을 같이할 사랑 : 온갖 비극과 대립 속에서도 프리다와 디에고는 항상 서로에게 다시 돌아가곤 했고, 결국 최후의 순간까지 운명을 함께했다. 이 사진은 1954년 프리다가 세상을 뜨기 직전에 촬용한 것이다.

친구인 돌로레스 델 리오를 위해 그린 작품 <숲 속의 두 누드>에서처럼, 프리다는 동성애적 취향을 숨김없이 드러내곤 했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두 번의 큰 사고를 당했는데, 첫 번째 사고는 경전철과 충돌한 것이고, 두 번째 사고는 디에고와 만난 것이다."

-프리다 칼로

디에고가 국립학교 예비학교 건물에 벽화 <천지창조>를 그릴 당시, 아직 학생이었던 프리다는 처음으로 디에고를 대면한다. 하지만 유명화가인 디에고를 칭송하는 대신, 프리다의 머릿속에 가득한 건 동아리 친구들과 디에고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는 것뿐이었다.

프리다를 알게 되기 전까지 디에고는 루페 마린과 결혼한 상태였다.

디에고의 자화상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고집스러운 인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은 디에고라면 모두 사족을 못 쓰고 그를 흠모했다.

프리다의 어머니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프리다와 디에고를 보며 "비둘기와 코끼리"같다고 했다. 어쩌면 그리도 정확하게 들어맞는 표현을 찾았는지!

프리다는 이 작품에서 유산으로 잃은 아기들에 대한 두려움과 죄책감을 그대로 캔버스에 쏟아낸다. 한 여자아이가 망자의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마치 버려진 듯 멕시코 고원의 황량한 풍경을 배경으로 서 있다.

프리다의 여동생인 크리스티나와 불륜관계를 맺을 당시, 디에고는 마침 국립궁에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디에고는 이 벽화에 프리다와 크리스티나의 형상을 삽입하면서, 그가 두 자매 중 누구를 더 편애하는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 놓고 보여 준다.

일본인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는 프라다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디에고는 질투심에 불타 노구치를 총으로 위협하기에 이른다.

프리다는 이 그림을 레오 트로츠키를 만난 해에 그렸다. 남근 형상의 선인장이나 원숭이와 같은 육욕의 상징을 담은 이 그림은 미묘한 에로티시즘을 띠고 있다.

사진작가 니콜라스 머레이가 렌즈에 담은 프리다의 모습은 눈부신 매혹으로 넘쳐난다. 이는 사진의 주인공과 사진작가 간에 나눈 뜨거운 열정의 결과물이다.

디에고는 1930년 제작한 석판화에 프리다의 누드를 담았다.

특이한 방법으로 전하는 사랑의 메시지. 프리다는 봉투 겉을 이용해 디에고에게 사랑의 편지를 쓰고 밑에 키스자국을 남겼다. "그 어느 때보다도 당신을 사랑해! - 당신의 소녀 프리다."

프리다의 침대 천정에 누워있는 하얀 몰골은 유다의 형상으로, 멕시코인들은 부활절을 기념해 이러한 형상을 터트리곤 한다. 풍성한 꽃다발을 손에 들고 프리다의 꿈에 나타난 하얀 망자는 프리다를 지켜주는 존재인 동시에 위협하는 존재로 보이기도 한다.

왕립미술관으로 운구된 프리다의 시신을 내려다보는 디에고가 침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영결식에는 600명이 넘는 애도객들이 참석해 프리다에게 작별의 인사를 전했다.

소리 없는 탄식 | 유산을 몇 차례 겪은 프리다는 끝내 아이에 대한 미련을 극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디에고는 프리다의 절망을 그다지 이해해 주지 못했다. 디에고에게 가장 중요한 건 일이었고, "아이는 디에고에게 네 번째 순위쯤밖에" 안 되었다. 텅 비고 차가운 방을 배경으로 묘하면서도 공허한 분위기를 담은 자화상 <나와 나의 인형>은 당시 프리다가 느끼는 슬픔에 대한 표현이다.

사랑의 아픔 | <추억 혹은 심장>이 그림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매우 뚜렷하다. 프리다의 가슴을 관통하는 구멍과 바닥에 놓인 피흘리는 심장은 디에고의 끊임없는 불륜행각으로 프리다가 겪는 사랑의 아픔을 상징한다. 또한 잘려나간 심장은 고대 아스텍 민족이 신에게 바치는 희생의 제물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내살인사건 | 프리다는 이 작품에서 신문에서 읽은 기사 하나를 그림으로 묘사했다. 한 남성이 질투심에 아내를 칼로 찔러 죽이고는, 법정에서 자신은 "단도로 몇 번 찌른 것밖에 없었다"고 변명했다는 기사였다. 물론 여기서 프리다가 모티브를 통해 상징하려는 사람은 자신의 불륜행각이 얼마나 프리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안중에도 없는 디에고임은 당연하다.

쓰디쓴 눈물 | 프리다가 이 작품을 완성시킬 당시, 디에고는 여배우 마리아 펠릭스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그림을 처음으로 구입했던 아르킨과 샘 윌리엄스 부부는 프리다와 절친한 사람들로, 당시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목을 휘감은 검은 머리카락에 너무나 슬픈 표정으로 우는 프리다의 그림 속 모습을 보고, 우리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어요."

완전한 사랑 | 디에고의 58세 생일날, 프리다는 자신의 사랑고백을 그림으로 담아 선사한다. 편안한 표정의 디에고와 프라다의 얼굴은 하나로 융화되었고, 그 옆에는 남성과 여성을 상징하는 태양과 달이 떠 있다.

"난 불쌍한 사냥감" | 프리다는 자신을 온 몸에 화살을 맞은 채 쫓기는 사냥감으로 보았다. 몸에 꽂힌 화살들은 육신의 고통뿐 아니라 디에고의 외도로 프리다가 겪는 정신적 고통도 의미한다. 화살촉에 깊은 상처를 입은 몸뚱이에도 불구하고, 사슴의 머리에 달린 프리다의 얼굴은 뿔을 높이 쳐들고 당당히 우리를 응시한다.

극단적인 커트 | 디에고와 이혼해 버린 후, 프리다는 두 번째로 머리카락을 잘라 버린다. 위에 보이는 악보는 당시 멕시코에서 유행하던 노래를 그대로 적은 것이다. "이봐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당신 머리카락 때문이었지 하지만 이제 당신의 머리는 삭발되어 버렸으니, 난 이제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여성성의 상징 | 프리다는 자화상에서 풀어 내린 머리를 보여준 적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은 아름답게 틀어 올린 머리를 하고 있었다. 반면 이 자화상에서 프리다는 자신의 길고 검은 머리를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아마도 이 머리카락은 디에고와 다시 결합한 후 프리다가 다시금 느꼈던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과 에로티시즘의 상징일 것이다.

화려한 머리장식 | 프리다의 머리를 장식하는 특이한 매듭 형태는 멕시코 남부 오악사카(Oaxaca)주의 전통 장신구를 연상하게 한다. 털실들이 프리다의 머리칼을 굽히지 못하고 그대로 서 있는 것이 흥미롭다. 머리 장식은 또한 8자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한 번에 이어서 쓸 수 있다는 점에서 8이란 숫자는 영원함의 상징이기도 하다.

우주의 혈통 | 프리다가 품에 디에고를 안고 있고 대지의 여신은 이런 프리다와 디에고를 부드럽게 끌어안고 있다. 프리다가 가장 아끼는 애완견인 '세뇨르 솔로틀'은 모든 걸 감싸 안고 보호하는 우주의 팔 위에서 평화로이 잠들어 있다. 이혼 후 재결합한 프리다와 디에고의 관계는 갈수록 더 모성애적 구도를 띠었고, 디에고에 대한 프리다의 집착 또한 더욱 커져 갔다.


지금도 우리 곁에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여성들은

프리다에게 배울 점이 많다.

프리다는 수동적인 여성의 역할을 벗어나,

항상 자신이 하고 싶은 바

추구했다."

배우 셀마 헤이엑


프리다의 흔적을


…찾는 건 오늘 날 전혀 어렵지 않다. 프리다는 지금 전례 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고, 순수예술 분야뿐 아니라, 영화감독, 작곡가, 작가, 안무가, 패션디자이너에게까지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 프리다를 가장 가까이 느낄 수 있는 곳은 코요아칸에 위치한 프리다의 고향집으로, 현재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보다 쉬운 방법은 시중에 나온 수많은 서적과 영화를 통해 살아 있는 프리다의 모습을 경험하는 것이다.

카사 아술의 작업실에 놓인 프리다의 이젤. 당시 작업 중이던 스탈린의 초상화는 끝내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프리다에게 매겨지는 가치


이미 생전에 수집가와 애호가들에게 좋은 가격에 그림을 팔 수 있었던 프리다였지만, 오늘날 미술시장에서 자신의 작품에 매겨지는 가치를 보면 아마 기절할 것이다. 프리다의 작품들은 지금 최고가를 기록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선 자화상 한 점이 무려 3백20만 달러에 낙찰된 바 있다. 이는 지금껏 디에고의 작품에 매겨졌던 수치들을 모두 뛰어 넘는 가격이었다. 이렇게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프리다의 그림을 소장하게 된 사람은 운이 좋다고 할 수 있다. 프리다의 작품이 시장에 나오는 것조차 매우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멕시코 출신 배우 셀마 헤이엑은 프리다 칼로의 역할을 맡으면서 평생의 숙원을 풀었다.

프리다가 친구 티나 모도티와 춤추는 장면. 모도타역은 배우 애슐리 주드가 맡았다.


"프리다는 모두가 반대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바는 반드시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었다. 나 또한 프리다처럼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셀마 헤이엑

여성 영화감독 줄리 테이머는 배우 셀마 헤이엑과 함께 오스카 수상작 <프리다>를 탄생해 냈다.

뉴욕 브룩클린에 위치한 '프라다의 옷장(Frida's Closet)'이라는 가게에는 멕시코 전통의 화려한 색상과 심벌로 가득한 프리다 풍의 물건들로 가득하다.

침실 | 카사 아술에 있는 디에고의 침실을 들려다보면, 마치 디에고가 줄곧 방에 있다가 지금 막 빠져나간 듯한 착각이 일 정도이다. 모자, 가방, 구두 한 켤레, 외투 등이 방에 흩어져 있고, 침대 머리맡에는 자명종이 놓여 있다. 침대 뒤 벽에 걸려 있는 것은 니콜라스 머레이가 촬영했던 프리다의 사진이다.

눈이 즐거워야 입도 즐겁다 | 프라다와 디에고가 사용하던 식당은 식도락의 즐거움만을 제공하는 곳이 아니라, 장식장 안에 몇 층에 걸쳐 진열된 멕시코 고대 유물과 민속공예품들이 위용을 자랑하는 곳이기도 했다. 안 마당의 벽에 쓰인 글씨는 "프라다와 디에고 이곳에서 살다. 1929-1954년"

카사 아술 | '파란 집'이란 뜻의 카사 아술은 파랗게 칠한 벽 때문에 붙은 이름인데, 안마당에 가면, 방문객들은 프리다 생전과 다름없이 이국적인 화초들과 고대 멕시코 토우들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마음의 휴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