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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8. 29. 11:44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80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해방과 분단, 친일파 편

 

서중석 답하다 김덕련 묻고 정리하다

2015, 오월의 봄

 

 

대야도서관

SB0486692

 

911.07

서76ㅅ  1

 

꿈같이 찾아온 해방, 그리고 뒤이은 분단

한반도는 왜 분단으로 치달았나?

친일파, 분단 세력은 어떻게 기득권을 잡았는가?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 서중석 교수의 역사 왜곡 바로잡기!

 

우리에게는 '역사의 죄인'이 있다. 우선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이 쉽게 떠오를 것이다. 이승만을 존경하는 사람들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이 거기 포함된다. 이들은 이승만을 살리고 나아가 그를 '건국의 아버지' '국부'로 만들어놓을 수만 있으면 '역사의 죄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나아가 이승만이 국부가 되면 권력이나 사회적 지위, 기득권을 계속 움켜쥘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

우리에게는 '역사의 힘'이 있다. 항일 독립 운동과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 줄기차게 계속된 것도, 우리 제헌 헌법에 자유 · 평등의 독립 운동 정신이 담겨 있는 것도 역사의 힘이다. 우리 국민이 친일파, 분단, 독재를 있어선 안 되는 잘못된 것으로 보는 것도 역사의 힘이다. 막강한 힘의 지원을 받은 역사 교과서가 참패한 것도 그렇다.

- '책머리에' 중에서

 

서중석

1948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했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9년부터 1988년까지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했으며, 6월항쟁 당시 《신동아》 취재기자로 역사적 현장에서 그날의 사건들을 생생히 목격하고 기록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이며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아시아 평화와 역사교육 연대 상임 공동대표, 제주 4 · 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80년대 민중의 삶과 투쟁》 《한국 근현대 민족문제 연구》 《한국 현대 민족운동 연구 1 · 2》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남북협상 : 김규식의 길, 김구의 길》 《조봉암과 1950년대》(상 · 하) 《비극의 현대 지도자》 《배반당한 한국 민족주의》 《이승만의 정치이데올로기》 《한국 현대사 60년》 《이승만과 제1공화국》 《대한민국 선거이야기》 《지배자의 국가 민중의 나라》 《6월항쟁》 등이 있다.


김덕련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를 거쳐 프레시안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신문사 일을 하면서 틈틈이 역사 관련 책 작업을 함께해왔다. 《세계를 바꾸는 파업》, 《근현대사 신문》(2권), 《세계사와 함께 보는 타임라인 한국사》(5권)를 함께 쓰고 만들었다

 

차례

 

책머리에
연표

 

                                                     해방과 분단                                            

 

첫 번째 마당                 어느 날 갑자기 온 해방?

                                   우리는 해방을 주체적으로 맞았다

 

두 번째 마당                 자유는 미국이 준 선물?

                                   그들은 점령군이었다

 

세 번째 마당                 한국 '최고의 혁명가' 여운형이 친일파?

                                   "극우, 참 비열하다"

 

네 번째 마당                조선일보도 공감한 민족적 과제

                                  토지 개혁과 친일파 처단

 

다섯 번째 마당            역사를 바꾼 신탁 통치 논쟁

                                 좌우익은 왜 그토록 싸웠는가

 

여섯 번째 마당           좌익은 신탁 통치를 찬성했다?

                                김일성 '엉터리 신년사'의 비밀

 

일곱 번째 마당          12번 테러와 암살도

                               '정의로운 바보'를 꺾지 못했다

 

여덟 번째 마당          남북 협상,

                               분단을 막기 위한 최후의 노력

 

아홉 번째 마당          한반도의 분단,

                               미국의 책임이 무거울 수밖에 없는 이유

 

 번째 마당             북한의 통일 논리,

                               왜 전면전으로 갈 수밖에 없었나

 

열한 번째 마당          제주 사람들이 폭도?

                               "극우의 터무니없는 얘기"

 

열두 번째 마당          1948년 유엔 결의를 멋대로 해석한

                               극우 반공 정권의 괴뢰 만들기

 

열세 번째 마당          두 번 쫓겨난 대통령 띄워

                                '건국의 아버지'로 모시자고?

 

열네 번째 마당          이승만이 자유민주주의를 심었다?

                               거듭된 부정 선거 안 보이나

 

열다섯 번째 마당      농지 개혁은 이승만 덕분?

                               "결코 아니다"

 

열여섯 번째 마당      제헌 헌법의 탄생

                               평등주의의 열망을 담다

 

                                                       친  일  파                                           

 

첫 번째 마당           이승만의 6월 공세

                             역사를 과거로 퇴행시키다

 

두 번째 마당          박정희의 친일 행적은

                            어떻게 비밀이 됐나

 

세 번째 마당          친일파 세상,

                            어떻게 이런 나라가 있을 수 있나

 

네 번째 마당          "박정희 한 사람 덕에 경제 발전?

                            저열하다"

 

다섯 번째 마당      뉴라이트, 극우 반공 세력이

                           이승만, 박정희를 찬양하는 까닭

 

나가는 말

                       

 

건국준비위원회 집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여운형.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는 해방된 바로 그날부터 새로운 사회를 맞이하고 새 나라를 세우기 위한 활동에 구체적으로 착수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앞줄 왼쪽 두 번째가 이시영, 그 옆으로 김구, 김규식, 조소앙이 나란히 서 있다. 해방이 되고 한참 뒤에야 임시정부 요인들은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 까닭은 연합국이 귀국을 막았기 때문이다.

서울 경운동 삼광한의원에서 열린 조선건국동맹 모임. 왼쪽 네 번째가 여운형이다. 건국동맹은 전국에 지부를 조직하고, 해외에 있던 독립 운동 세력과도 연계해 다가올 해방을 준비했다.

한국인들은 정말 꿈같이 해방을 맞았다. 해방의 기쁨으로 환호하는 시민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경성콤그룹을 이끌던 박헌영. 경성콤그룹은 공산주의자 조직으로는 일제 말기에 국내에서 마지막으로 중요하게 지하투쟁을 한 조직이다.

1945년 9월 9일 미군이 도열한 가운데 조선총독부 건물 앞 국기 계양대에서 일장기가 내려오고 있다(왼쪽). 이어서 성조기가 게양되고 있다.

한반도에 입성한 미군의 모습. 미군은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상륙해 9월 9일 서울에 들어왔다. 그러면서 한국인들의 정치적 지유에 부분적으로 제한을 가하기 시작했고, 친일 경찰을 끌어들여 다시 일하게 하기도 했다.

1945년 북한에 들어온 소련군의 모습.

여운형(위)과 안재홍. 여운형과 안재홍은 당시 국내에 있던 주요 인사 중 마지막까지 일제에 굴복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8월 16일 휘문고보 교정에서 환영을 받는 여운형. 여운형이 1945년 8월 15일 엔도정무총감을 만났을 때 첫 번째 요구 사항이 정치범 등을 즉각 석방하라는 것이었다.

1945년 12월 6일 임시정부 환영 시가 행진. 임시정부 1진은 1945년 11월, 2진은 1945년 12월에 한국에 들어왔다.

이승만은 1945년 10월에 한국에 들어왔다. 중앙청에서 열린 귀국 환영 대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모습. 왼쪽에 앉아 있는 사람이 존 하지 사령관이다.

1945년 12월 말 우익의 반탁 집회. 친일파가 반탁 투쟁에 적극 가세해 매국노, 민족 반역자에서 갑자기 애국자로 둔갑했다.

1946년 1월 좌익의 모스크바3상회의 절대 지지 집회. 좌익은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 것이지, 신탁 통치 하나를 지지한 것이 아니었다.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임시정부 수립이었다.

동아일보 12월 27일 자 왜곡 보도 기사. 이날 동아일보는 1면 톱기사로 "소련은 신탁 통치 주장. ……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라는 제목 아래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 신탁 통치를 주장'한다고 보도했다.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미국과 소련이 개최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사진은 여운형이 미국 측 대표(위쪽), 소련 측 대표(아래쪽)와 함께 있는 모습이다.

1945년 '붉은 군대 환영 평양시민대회'에 참석한 김일성. 김일성은 1946년 1월 2일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다'고 발표한다.

미소공위를 지지하는 좌익들.

좌우 합작 시사만평. 극좌 세력과 극우 세력이 합작을 방해하는 것을 풍자하고 있다. 그림에서 악수하고 있는 인물은 여운형(왼쪽)과 김규식.

1947년 8월 3일 거행된 여운형 장례식 장면. 여운형은 12번 테러를 당하다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총격으로 암살되었다.

우익 3영수로 불리던 김규식, 이승만, 김구(왼쪽부터). 그중에서 김규식은 좌우 합작, 남북 협상만이 민족의 살길이라고 주장하며 의미 있는 활동을 펼쳤다.

남북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 북한 대표단. 오른쪽부터 김일성, 박헌영, 김원봉, 김달현, 허헌, 김두봉.

38선에 서 있는 김구. 김구는 '분단이 된다는 건 우리 몸을 두 동강 내는 것과 똑같다'고 이야기했다.

5 · 10선거 당시 모습. 선거 결과 소장파 전성시대가 출현해 1949년 6월 국회 프락치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진보적이고 민족적이던 소장파가 국회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된다.

38선은 미국이 1945년 8월 11일 '38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 양군이 점령하는 방식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안하면서 생겨났다. 결국 38선은 남북한을 가르는 분단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1945년 포츠담 회담에 참여한 클레멘트 애틀리 영국 수상,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공산당 서기장(왼쪽부터). 이 회담에서 트루먼과 스탈린은 한국 문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사실상 한국 문제는 포츠담 회담에서 논의되지 않았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보도한 신문 기사. 분단 정부 수립을 이야기한 대표적인 사례로 이승만의 정읍 발언(1946년 6월 3일)이 꼽힌다. 통일 정부 수립이 여의치 않으니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같은 것을 수립하자는 주장이었다.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위 당시 사진. 오른쪽부터 여운형, 김규식, 이묘목(영어 통역관), 말리크, 테렌티 스티코프(소련 측 대표), 허헌.

1948년 2월에 조선인민군이 창설되었다. 김일성 초상화 옆에 태극기가 휘날리는 것이 눈에 띤다.

김구 장례식. 그때 김구를 추도하는 인파는 미국 대사관 자료에 의하면 50만 명이었다고 한다. 그 인파는 우리 역사상 전무前無하고 상당히 오랫동안 후무後無한 인파였다.

1946년 10월 2일 항쟁이 일어난 대구의 모습. 10월항쟁은 자연 발생적이었으며 전국에 걸쳐 일어났다.

1948년 5월 처형을 기다리는 제주 주민들. 4 · 3사건은 제주도민 10명 중 1명꼴로 학살된 비극으로, 우리 역사 전체를 통틀어 한 지역에서 학살된 인원으로는 가장 많을 것이다.

제주 4 · 3사건 당시 무자비한 횡포를 부려 제주도민을 공포에 휩싸이게 한 서북청년회.

1948년 12월 유엔 총회에 파견된 대한민국 정부 대표단. 앞줄 왼쪽부터 조병옥, 장면, 장기영. 유엔은 대한민국을 5 · 10선거가 치러진 지역에 관할권을 갖는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했다.

1954년 북진 통일 궐기대회. 북진 통일은 이승만 정권과 반공 체제를 강화하는 데 마법과 같은 효력을 지녔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1921년 상해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승만 대통령 취임식. 이승만은 임시정부 대통령 시절 상해에는 거의 머물지 않고 미국에서 편안한 생활을 할 뿐이라는 비판을 참 많이 받았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 때의 모습.

1948년 7월 24일 이승만 대통령 취임식 장면.

최초의 대통령 직선제 선거였던 1952년 8월 5일 정부통령 선거에 사람들이 모여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 선거에서 다수의 국민이 잘 알지도 못했던 함태영이라는 노인이 부통령에 당선된다. 사진출처 : e영상역사관

왼쪽부터 이승만, 김구, 존 하지. 김구가 이승만과 상당히 오랫동안 협력한 까닭은 반탁 우익을 대단결시키기 위해서였다.

1952년 국회 부의장 시절의 조봉암(맨 오른쪽)의 모습. 나머지 두 사람은 윤치영과 신익희(가운데). 조봉암은 농지 개혁안을 만들기 위해 전국을 돌면서 농민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1950년 3월에 개정되어 공포된 농지개혁법.

북한의 토지 개혁 홍보 포스터. 토지 개혁은 북한의 지주들을 대거 월남하게 만들었다. 무상 몰수였을 뿐만 아니라 거주지를 바꾸게 했기 때문이다.

1951년 부산의 초등학교 학생들. 해방 후 한국 사회가 평준화되면서 교육열도 강해졌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들의 모습(1919년 10월 11일). 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뒷줄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임시 헌장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제로 함'이라고 공포했다.

1952년 8월 5일 정부통령 선거. 지지자들이 후보자의 대형 초상화를 들고 거리 유세를 벌이고 있다. 이때부터 부정 선거가 고약한 형태로 나타났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1946년 제1차 미소공위에 참여한 안재홍, 스티코프, 김구, 이승만(오른쪽부터). 안재홍은 제1차 미소공위가 휴회한 이후 좌우 합작 운동에 참여하면서 친일파 처단을 주장했다.

존 하지와 장택상. 장택상은 미군정의 수도경찰청 청장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친일 경찰들이 채용되었다.

1949년 반민특위 재판 광경.

반민특위로 호송되는 친일파들.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이 김연수 경성방직 사장, 그 뒤는 3 · 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최린.

박정희가 만주국 군관학교 생도로 받아달라며 혈서를 썼다는 '혈서 군관 지원'이란 제목의 만주신문(1939년 3월 31일 자) 박정희 관련 기사.

이광수는 1940년 매일신보에 실린 '창씨와 나'라는 글에서 창씨개명을 옹호했다. 이 글에서 이광수는 조선 민족의 장래를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했다고 강변했다. ⓒ민족문제연구소

10월항쟁 당시 경찰에 체포된 시민. 10월항쟁이 일어난 가장 큰 계기는 친일 경찰의 악질 행위였다.

연설 중인 김원봉의 모습. 김구와 더불어 항일 독립 운동의 상징적 존재인 김원봉은 왜 북한으로 갔을까. 1947년 초 친일 경찰의 대명사 격인 노덕술한테 고문당한 게 한 원인이 아니었을까.

1954년 함태영 부통령이 제3대 민의원 총선거에서 투표하고 있다. 이 선거는 대표적인 경찰 선거, 곤봉 선거로 꼽힌다. 그만큼 친일 경찰의 곤봉이 선거를 좌지우지했다. "겨레의 행복 한 표에 달렸다"는 표어가 인상적이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포항제철 공장을 시찰하고 있다. 친일파, 극우 반공 세력은 경제를 박정희 한 사람이 다 발전시킨 것처럼 주장한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1961년 박정희는 군사 정권을 승인받기 위해 미국으로 가 존 F. 케네디를 만났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2 · 26쿠데타에 실패한 군인들이 자대로 복귀하고 있다. 박정희는 일본의 2 · 26쿠데타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