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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27. 12:55 내가 읽은 책들/2016년도

 

2016-003 타인의 고통

 

수전 손택 | 이재원 옮김

2011, 이후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E-WHO OPUS 10

 

"시청자들은 잔인하게 묘사된 폭력에 익숙해지는 걸까, 아니면 뭔가 다른 반응을 보이게 되는 걸까요? 매일같이 쏟아지는 이런 이미지 때문에 시청자들의 현실 인식이 손상될까요? 그렇다면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분쟁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염려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타인의 고통』을 쓰기 시작했을 때 제가 갖고 있던 궁금증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저는 하루 하루가 공포의 나날이고 전쟁이 진부한 일상이던 곳에서 거주하며, 이런 경험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들, 이런 경험을 단지 이미지로만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전쟁이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봤습니다. 저는 전쟁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전쟁을 실제로 이해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인상을 받았죠. 그렇지만 저는 우리, 그러니까 전쟁을 겪지 않아도 되고 안전하게 살아 왔던 사람들이 오늘날의 미디어 전문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저 전 세계적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미지들, 그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사람이 고통스럽게 된 데에는 세계가 다 엮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 그 사람의 고통이 곧 내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연민을 갖는 것, 이제 그것을 되살려야 한다.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의 저자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것. 제 아무리 이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제스처가 엿보일지라도 세계가 재연되는 방식 자체를 문제 삼을 것『타인의 고통』은 이런 책임감을 불러일으킨다. 손택의 작업은 이 책임감을 소름 끼치도록 분명하게 증언해 준다. -『뉴욕타임즈』

 

『타인의 고통』이 보여 주는 통찰들이 진부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말은 이 책에 담긴 도덕적 결단력을 무시하는 처지이다. 손택이 없었다면, 알 자지라가 방영한 이라크 어린아이의 주검이 그저 여러 사망자들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여겨졌을 것이다. -『워싱턴포스트』

 

오늘날 같은 '방관의 문화'에서 우리는 충격 받을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을까? 『타인의 고통』에 따르면 그 대답은 우리가 타인의 지나친 욕망을 어떻게 바라볼지, 또는 진실을 얘기해 얼마나 고통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에 달려 있다. -『가디언』

 

 

수전 손택 Susan Sontag

1933년 1월 뉴욕에서 태어난 수전 손택은 미국 최고의 에세이 작가이자 뛰어난 소설가이며 예술평론가이다. 1966년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과 세계에 대해 가하는 복수다"라는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담은 평론 모음집 『해석에 반대한다』를 내놓아 서구 미학의 전통을 이루던 내용과 형식의 구별,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별을 재기 발랄하게 비판해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 뒤 극작가, 영화감독, 연극연출가, 문화비평가, 사회운동가 등으로 끊임없이 변신해 가며 새로운 문화의 스타일과 감수성의 도래를 알리는 데 주력했다.

'예술에 온 정신이 팔린 심미가' 이자 '열렬한 실천가'로 불리기를 원했던 손택은 자신의 바람에 걸맞게 미국 펜클럽 회장(1987~1989)을 맡고 있는 동안 서울을 방문해 한국 정부에 구속 문인의 석방을 촉구한 바 있으며 1993년에는 사라예보 내전에 대한 전 세계인의 관심을 촉구하고자 전쟁 중인 사라예보에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11 세계무역센터 폭파 사건에 대한 미국 정부의 태도를 날카롭게 비판해 미국 내에서 격렬한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등, 행동하는 지식인의 면모를 아낌없이 보여 줬다. 2003년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거짓 이미지와 뒤틀린 진실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사상의 자유를 굳건히 수호해 왔다"는 찬사를 받으며 '독일출판협회 평화상'을 수상했다.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 '새로운 감수성의 사제' '뉴욕 지성계의 여왕'이라는 숱한 별명과 명성을 얻었던 손택은 2004년 12월,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손택의 저서로는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비평 부문 수상작 『사진에 관하여』(1977)와 '전미도서상' 소설 부문 수상작 『미국에서』(1999)를 비롯해 4권의 평론 모음집, 6권의 소설, 4권의 에세이, 1편의 영화 시나리오, 몇 편의 희곡 등이 있다. 그녀의 책들은 현재 전 세계 32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개입할 능력을

잃어가고 있는가?

2003년 10월 12일, 독일출판협회는 제55회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수전 손택에게 평화상을 시상했다. "거짓 이미지와 뒤틀린 진실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사상의 자유를 굳건히 수호해 왔다"는 것이 손택에게 평화상을 시상한 이유였다. 독일 출판협회가 잘 지적했듯이, 손택은 첫 저서 『해석에 반대한다』(1966)에서부터 최근작 『강조해야 할 것』(2002)에 이르기까지 기계로 대량 복제되는 이미지가 한 문화의 감수성을 어떻게 바꿔놓는지 다양한 방식으로 일관되게 추적해 왔다. 그리고 그 작업은 현실 참여로 이어졌다.

손택의 현실 참여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 중이던 1966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당대의 유명 시사지 『파르티잔 리뷰』에 「지금 미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기고, "미국은 대량 학살 위에 세워졌다" "미국적 삶의 특성은 인간의 성장 가능성을 향한 모독이다" "백인은 역사의 암이다" 같은 숱한 독설로 미국의 은폐된 역사, 베트남 전쟁의 허위, 아메리칸 드림의 실상을 폭로했던 것이다.

주류 대중매체는 이 일을 계기로 손택의 별명을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에서 '동시대 미국 문단의 악녀'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으나, 그 뒤로도 손택은 자신의 실천을 멈추지 않았다. 가장 최근에는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라고 얘기하며 9 · 11사건 직후 미국 사회에 불어닥친 반이성적 태도를 날카롭게 비판하기도 했으며, 이라크 전쟁 당시에는 "사이비 전쟁을 위한 사이비 선전 포고"를 그만두라고 부시 행정부를 공격하는 등, 손택은 결코 논쟁을 피하는 법이 없었다.

『타인의 고통』은 25년 전에 발표된 『사진에 관하여』(1977)와 이어지는 저서이다. 전작이 사진 이미지를 분석하면서 사람들이 현대성이라는 상황을 이해하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했다면, 이번 저서는 이미지가 사용되는 방식과 그 의미는 물론이거니와 전쟁의 본성, 연민의 한계, 양심의 명령 등까지 살펴 보고 잇다. 그래서 『타인의 고통』은 이라크 전쟁 전후의 현실 정세에 대한 '지적' 개입이기도 하가.

손택의 관찰에 따르면, 사방팔방이 폭력이나 잔혹함을 보여주는 이미지들로 뒤덮인 현대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일종의 스펙터클로 소비해 버린다. 타인의 고통이 '하룻밤의 진부한 유흥거리'가 된다면, 사람들은 타인이 겪었던 것 같은 고통을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도 그 참상에 정통지고, 진지해질 수 있는 가능성마저 비웃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손택은 이렇게 주장한다. 연민은 쉽사리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우리가 저지른 일이 아니다")까지 증명해 주는 알리바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그러니까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극복하고, 잔혹한 이미지를 보고 가지게 된 두려움을 극복해 우리의 무감각함을 떨쳐내야 한다고.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고통을 둘러싼 도상학은 기나긴 족보를 갖고 있다. 흔히 재현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간주되는 고통은 신이나 인간의 분노가 낳은 것이라고 이해되는 고통이다. 특히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으로서, 기독교 예술은 지옥의 묘사를 통해서 수세기 동안 이 두 가지 기본적인 욕망을 모두 충족시켰다.

톱에 잘리는 고문을 당하는 중세 시대의 순교자

Lucas Cranach, Die Sage als Marterinstrument, 1539.

 

숭고하거나 자엄하며, 그도 아니면 비극적인 형태로 아름다움을 담고 있으니 유혈 낭자한 전투 장면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주장은 예술가들이 제작한 전쟁의 이미지에 늘 따라붙는 주장이다. 현대가 시작될 무렵에는 원래 소름끼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을 사람들이 타고났다는 주장이 훨씬 더 쉽게 받아들여졌다. 잔악함에 대한 사랑은 연민만큼이나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Pieter Brugel, De triomt van de Dood, 1562.

Umberto Boccioni, La citta che sale, 1910.

Umberto Boccioni, Carica der lanceri, 1915.

Gino Severini, Treno blindato, 1915.

 

미래주의의 지도자 마리네티는 에티오피아 전쟁을 앞둔 1935년, "전쟁은 아름답다"라는 말로 파시스트 무솔리니를 지지했다. 그의 동료 화가들이 즐겨 그린 주제도 전쟁, 속도, 육체의 기계화에 대한 찬양이었다.

 

대중에게 공개된 사진들 가운데 심하게 손상된 육체가 담긴 사진들은 흔히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찍힌 사진들이다. 저널리즘의 이런 관행은 이국적인(다시 말해서 식민지의) 인종을 구경거리로 만들던 1백여 년 묵은 관행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비록 적이 아닐지라도 타자는 (백인들처럼) 보는 사람이 아니라 보여지는 사람 취급을 당한다.

비아프라 내전 당시 기아로 고통받는 어린아이, 1969.

타인의 고통을 보여주는 이미지들은 그런 고통이 이 세상의 미개한 곳과 뒤떨어진 곳, 즉 가난한 나라들에서만 빚어진다는 믿음을 조장하곤 한다.

 

사진 없는 전쟁,

즉 저 뛰어난 전쟁의 미학을 갖추지 않은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카메라와 총, 그러니까 피사체를 '쏘는' 카메라와 인간을 쏘는 총을 동일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행위는 곧 사진을 찍은 행위인 것이다.

 

미군에게 사살된 베트남민족해방전선 병사의 주검

"위대한 역사적 사건을 매우 꼼꼼히 보존하려는 행위와 자신이 지닌 무기로 적들의 위치를 정확히 몇 초, 몇 미터 단위까지 추적해 그들을 섬멸하려는 행위는 모두 똑같은 사고방식에서 수행된다"(에른스트 윙거, 1930).

 

옮긴이 ● 이재원

중앙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급진적 문화 이론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현재 1960~70년대의 아방가르드 정치단체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역사를 소개하는 책을 집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오래된 습관 복잡한 반성 1, 2』(이후 1997~1998/공저)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사진에 관하여』(이후 2005), 『속도와 정치』(그린비 2004), 『은유로서의 질병』(이후 2002), 『신좌파의 상상력 : 전 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년』(난장 2009) 등이 있다.

 

차  례

 

한국의 독자들에게

 

타인의 고통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감사의 말

 

부록

  1. 문학은 자유이다

  2. 현실의 전투, 공허한 은유

  3.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4. 우리가 코소보에 와 있는 이유

 

옮긴이 후기

사진작가 찾아보기

인명 찾아보기

사진 출처

 

"……정복당한 자들을!"

      ------------- 보들레르

 

"체험이라는 추잡한 보모……"

     -------------- 테 니 슨

▲ 타일러 힉스, 『처형당하는 탈레반』, 카불, 2001.

2001년 10월 7일부터 전개된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시, 미국의 사진작가 힉스(Tyler Hicks, 1968~  )가 카불에서 찍은 사진. "처형당하는 탈레반 Taliban Execution"이라는 제목의 이 사진들은 총 7장인데 『뉴욕타임스』에는 세 장만 실렸다. 2002년 2월 26일 힉스는 이 사진들로 제59회 '국제 올해의 사진상'을 수상했다.

 

▲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전쟁에 반대하는 전쟁』, 1924.

▲ 로버트 카파, 「어느 공화군 병사의 죽음」(두 번째 도판), 『뷔』, 1936.

▲ 「어느 공화군 병사의 죽음」(첫 번째 도판)이 실린 『라이프』, 1937.

▲ 헨드리크 골치우스, 『카드모스의 동료들을 집어삼키는 용』, 1588.

네덜란드의 화가 골치우스(Hendrik Goltzius, 1558 ~ 1617)가 그리스 신화의 영웅 카드모스의 모험을 주제로 그린 연작 판화. 페니키아의 왕 아게노르의 아들이자 테베의 건설자이기도 한 카드모스는 자기의 부하들을 죽인 용을 퇴치했는데, 여신 아테나의 권고로 용의 이빨을 땅에 심었더니 땅 속에서 무장한 병사들이 나왔다고 한다. '스파르토이'(땅에 뿌려진 남자들)라고도 불렸던 이들은 테베의 조상이 됐다.

▲ 자크 칼로, 『전쟁의 비참함과 불운』, 1633.

프랑스의 판화가로서 메디치 가의 코시모 2세(Cosimo Ⅱ de' Medici, 1590 ~ 1621)에게 후원을 받아 이탈리아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던 칼로(Jacques Callot, 1592 ~ 1635)는 주로 당대의 풍습이나 사건을 담은 작품을 남겼다. 특히 자신의 고향을 약탈한 프랑스군의 만행을 다룬 연작 판화 『전쟁의 비참함과 불운 Les Miseres et les Malbeurs de la Guerre』은 고야의 『전쟁의 참화 Los desatres de la guerra』(1820)와 함께 전쟁의 참상을 다룬 걸작 판화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 프란시스코 고야, 『전쟁의 참화』, 1820. (도판 37, 39)

▲ 로저 펜턴, 「죽음의 그림자로 뒤덮인 계곡」, 발라클라바, 1855.

영국의 시인 테니슨은 「경기병단의 돌격 The Charge of Light Brigade」(1864)이라는 시에서 발라클라바의 참사를 이렇게 추모했다.

 

"돌격하라, 경기병단이여!"

당황한 자 그 누구였던가?

병사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어쩔 줄 몰라하는 병사는 단 한 명도 없었음을.

반발한 병사는 아무도 없었다,

이유를 물어본 병사도 없었다,

모든 병사들은 그저 돌격해 죽어갔을 뿐.

죽음의 계곡 속으로

   6백 명의 병사들이 말을 타고 달려간다.

▲ 펠리체 베아토, 「시칸다바그 궁전의 내부」, 럭나우, 1857.

시칸다바그 궁전이 있던 럭나우는 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의 주도州都로서, 세포이항쟁(1857 ~ 59) 당시 델리, 칸푸르와 더불어 반영反英 항쟁의 3대 거점이기도 했다. 1857년 7월 2일 ~ 11월 16일, 캠벨 장군(Colin Cambell, 1792 ~ 1863)이 이끌던 영국군이 이곳에 거점을 뒀던 세포이(푼잡 제4연대와 하이랜더 제93연대) 반란군 1천8백 명을 모조리 살육했다. 캠벨 장군은 인도인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기 위해서 세포이들의 시체를 묻지 못하게 하고 그냥 썩어가도록 방치했다고 한다.

▲ 알렉산더 가드너, 「어느 반란군 저격병의 집」, 게티즈버그, 1862.

▲ 로베르 두아노, 「시청 앞에서의 입맞춤」, 파리, 1950.

▲ 조 로젠탈, 「이오 섬에서의 국기 게양」, 스리바치 산, 1945.

이오 섬은 일본 동경의 남쪽 해상 오가사와라 제도 중앙에 있는 화산섬으로서, 이 섬의 남서부에 있는 산이 스리바치 산이다. 1944년 일본군이 이곳의 주민을 강제 퇴거시키고 자신들의 전진기지로 삼았으나, 1945년 2월 23일 미국 해병대가 이곳을 탈환한 뒤부터는 미군의 공군기지로 사용됐다.

▲ 예프게니 칼데이, 「독일 국회의사당 위에서 나부끼는 붉은 깃발」, 베를린, 1945.

▲ 작자 미상, 「네덜란드 하우스 도서관」, 런던, 1940.

▲ 에디 애덤스, 「처형당하는 베트콩 포로」, 사이공, 1968.

1968년 2월 1일, 당시 연합통신에서 일하고 있던 미국의 사진작가 애덤스(Eddie Adams, 1933 ~  )가 찍은 이 사진은 이듬해 퓰리처상을 받았을 만큼 동시대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사진 중 하나이다. 길거리에서 즉결 처형을 감행했던 로안 준장(Nguyen Ngoc Loan, 1931 ~ 1998)은 미국으로 망명해 훗날 워싱턴 근교의 자택에서 암으로 사망했는데, 이때 밝혀진 바에 따르면 사진 속의 베트콩 포로는 로안 준장의 부하 경찰을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 엠 에인, 『무제』, 툴슬렝 감옥, 1975 ~ 79.

폴 포트 정권 시기의 캄보디아에 세워진 툴슬렝 감옥은 'S-21형무소'라고도 불렸다. 이곳에 수감됐다가 생존한 사람은 7명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이곳은 기념관으로 개조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 티모시 오셜리번, 「죽음의 추수」, 게티즈버그, 1863.

▲ 조지 스트록, 「부나 해변에 쓰러져 있는 미군 병사들의 주검」, 뉴기니, 1943.

▲ 작자 미상, 「독가스로 눈이 멀게 된 영국군 병사들」, 서부전선, 1918.

▲ 존 싱어 사전트, 『독가스를 먹은 사람들』, 1918.

1918년 미국의 화가 사전트(John Singer Sargent, 1856 ~ 1925)는 연합군의 공식 전쟁화가로 임명되어 제1차 세계대전의 잔인함을 화폭에 담으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동료 전쟁화가였던 퉁크스(Henry Tonks, 1862 ~ 1937)와 함께 서부전선(프랑스)으로 갔던 사전트는 독일군의 독가스 공격으로 눈이 멀게 된 영국군 병사들의 모습을 본 뒤 이 사진을 토대로 『독가스를 먹은 사람들 The Gassed』을 발표했다.

▲ 세바스티앙 살가도, 『이주 : 이행 중의 인류』, 1999.

『이주 : 이행 중의 인류 Migrations : Humanity in Transition』는 브라질의 사진작가 살가도(Sebastiao Salgado, 1944 ~  )가 1993년부터 1999년까지 39개국을 돌아다니며 작업한 프로젝트이다. 전쟁, 기아 같은 여러 이유로 자신이 발붙인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사람들을 찍은 이 작업은 살가도의 말에 따르면 이주민이었던 자기의 삶을 반추한 작업이자, "완전히 새롭게 재조직되고 있는 인류의 이야기"이다.

▲ 윌리엄 유진 스미스, 「목욕 중인 우에무라 토모코」, 1972.

▲ 미켈란젤로, 『피에타』, 1499.

▲ 론 하비브, 「죽어가는 이슬람 여인을 발로 차는 세르비아 민병대원」, 비옐지나, 1992.

1992년 4월 1일, 당시 『뉴스위크』에서 일하고 있던 미국의 사진작가 하비브(Ron Haviv, 1965 ~  )가 찍은 이 사진에는 슬로베니아 출신의 극우주의자 라즈나토비치(Zeljko Raznatovic, 1952 ~ 2000)가 이끌던 준準군사조직 <세르비아 의용군 Srpska Dobrovolja…ka Garda> 병사들의 모습이 찍혀 있다. 이 사진을 본 라즈나토비치는 하비브의 목에 현상금을 내걸었을 만큼 분노했다고 하는데,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하비브는 라즈나토비치의 초청으로 비옐지나에 갔다고 한다. 하비브는 『피와 꿀 Blood and Honey : A Balkan War Journal』(2000)이라는 제목으로 이때 사진들을 출판했고, 코소보 전쟁의 일급 전범 라즈나토비치는 2000년 1월 15일 암살됐다.

▲ 로렌스 바이틀러, 「린치당한 토머스 쉽과 에이브럼 스미스」, 마리온, 1930.

1930년 8월 7일, 인디애나 주의 마리온이라는 도시에서 작은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던 로렌스 바이틀러는 이 충격적인 사진을 찍은 뒤 열흘 동안 대량 생산해 한 장에 50센트씩 팔았다고 한다. 중고품 소매업자라고만 알려져 있는 앨런(James Allen, 1931 ~)은 주로 기념품이나 우편엽서로 제작됐던 이런 사진들을 25년 동안 1백50장 가량 수집한 뒤, 2000년 1월 13일부터 2월 12일까지 뉴욕의 <로스 호로워츠 갤러리 The Roth Horowitz Gallery>에서 전시했다. 그 뒤 이 전시회는 미국 전역에서 끊임없이 열렸고, 이 전시회에 공개됐던 사진들은 『성역없이 : 미국의 린치 사진 Without Sanctuary : Lynching Photography in America』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 작자 미상, 「백 조각으로 찢겨 죽는 형벌」, 북경, 1905.

1905년 4월 10일 북경에서 찍힌 이 사진의 주인공 푸추리(Fou-Tchou-Li, 1887 ~ 1905)는 몽고 왕족의 아오한우안을 암살했다고 알려져 있다. 바타이유는 1925년 프랑스 최초의 정신분석가 중의 하나였던 보렐(Adrien Borel, 1886 ~ 1966)에게서 이 사진을 받았는데, 그가 '백 조각으로 찢겨 죽는 형벌 cent morceaux'이라고 소개한 이 형벌은 '능지凌遲'를 말한다. 능지는 죄인의 살갗이나 살점을 칼로 도려내는 형벌로서, 가능한 한 죄인을 살려둔 채 며칠에 걸쳐 시행함으로써 고통을 극대화하는 형벌이다(능숙한 집행자는 한 사람에게서 2만 점까지 도려낸다고 한다).

▲ 작자 미상, 「나치의 바르샤바 빈민가 소개 疎開」, 바르샤바, 1943.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었던 1943년 4월 19일 ~ 5월 16일,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는 나치에 맞선 유태인들의 대규모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약 6만여 명에 달했던 유태인 레지스탕스들은 모두 나치에게 체포되어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됐다.

▲ 올리비에로 토스카니, 「살해된 크로아티아 병사 마린코 가그로의 옷」, 1993.

▲ 베네통이 2003년부터 새로 시작한 "삶을 위한 식량" 캠페인의 포스터

이탈리아의 패션사진 작가 토스카니(Oliviero Toscani, 1942 ~)가 "전 세계 색의 우주 Universe the Colours of the World"라는 구호 아래 1984년부터 선보인 일련의 베네통 광고는 엄청난 찬반양론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살해된 크로아티아 병사 마린코 가그로의 옷」이라는 포스터는 로마 교황청에게서 '사진 테러'라는 격렬한 비판을 들었고, 각종 인권단체들에게서는 대량학살을 금지한 유엔협약을 위반한 광고라는 악평을 듣기까지 했다. 좌우간, 이 광고 캠페인으로 톡톡히 재미를 본 베네통은 2003년부터 유엔 산하 <세계식량계획 The World Food Programme>과 함께 "삶을 위한 식량 Food for Life"이라는 새로운 광고 캠페인을 시작했다.

▲ 제프 월, 「죽은 군대는 말한다(매복 뒤의 소련 정찰군 모습. 1986년 겨울, 아프가니스탄의 모코르 근처)」, 1992.

캐나다의 사진작가이자 화가인 월(Jeff Wall, 1946 ~ )은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배우들과 조수들의 도움을 받아 대규모 합성사진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1978년 <파괴된 방 The Destroyed Room>이라는 전시회를 열면서부터 라이트박스를 사용했던 월은 자신의 예술 지식을 적극 활용해(월은 예술사 석사 학위를 갖고 있다), 19세기의 서사적 역사화를 즐겨 사용됐던 구도를 차용한 작품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죽은 군대는 말한다」도 어느 신문에 실린 사진을 바탕 삼아서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제작됐는데, 월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은 "사진도, 영화도, 회화도, 광고도 아니다. 비록 모든 요소들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말이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