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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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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8. 17:27 내가 읽은 책들/2016년도

2016-023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 2

 

금난새 지음

2007, 생각의나무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07096

 

670.15

금19219클 2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012

 

클래식 음악 입문자들을 위한 가장 재미있고 훌륭한 안내서

금난새

 

행복을 선사하는 무대 위의 나는 새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베를린 음대에서 라벤슈타인에게 사사했다. 1977년 최고 명성의 카라얀 콩쿠르에 입상한 후 KBS교향악단과 수원시향의 지휘봉을 잡았으며, 1998년 '벤처 오케스트라' 유라시안 필하모닉을 창단했다.

연주회마다 선보인 '파격'과 '독특한 시도'는 클래식 음악회는 딱딱하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청중과 함께 호흡하는 무대를 만들어냈다. 특히 '해설이 있는 청소년 음악회'는 지휘자 금난새를 스타덤에 올린 간판 프로그램으로 6년간 전회 전석 매진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클래식 음악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도서관 음악회', '해설이 있는 오페라', '포스코 로비 콘서트', '캠퍼스 심포니 페스티벌', '뮤직 인 잉글리쉬' 등 철저한 고객지향의 프로젝트로 큰 호응을 얻었으며, 메세나협의회 홍보대사로 활동하며 기업의 문화예술 지원사업 참여를 적극적으로 이끌고 있다. 기업과 예술의 호혜적 파트너십을 이루어낸 공적으로 2006 한국 CEO 그랑프리 문화예술부붐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2006년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예술감독으로 취임하였으며, 경희대 음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신선한 발상으로 늘 새로운 도전을 즐기는 지휘자 금난새는 클래식 음악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는 정다운 메신저로서 무대와 청중을 찾아 정력적인 활동을 계속 펼쳐 가고 있다.

 

1970년    서울대 음대 작곡과 졸업

1974년    카라얀 국제 지휘콩쿠르 입상

1980년    KBS교향악단 전임 지휘자

1989년    KBS교향악단과 국내 최초 오케스트라 녹음 출반.

             (생상 '동물의 사육제', 프로코피에프 '피터와 늑대')

1992년    수원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1994년    '해설이 있는 청소년음악회' 기획 · 진행

1998년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창단

2002년    CJ그룹과 오케스트라 후원 계약 체결, 한국기업메세나협의회 홍보대사

2005년    유라시안 필하모닉 충무아트홀 상주(~2006. 12. 31)

2006년    베르사유 특별연주, 류블리아나 뮤직페스티벌 총청연주

             경기필하모닉 예술감독 취임

 

현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경희대 교수

 

차례

 

머리말

 

1 체코 민족의 자긍심을 음악으로 드높인

    드보르작 vs 스메타나

보헤미아의 브람스, 드보르작 | 체코 국민음악의 아버지, 스메타나 | 정육점집 아들에서 국민 작곡가로 | 스메타나의 지극한 나라 사랑 | 신세계에서 고향을 그리다 | 불행으로 점철된 비운의 생애

|금난새의 추천음악|

 

2 오스트리아 최후의 낭만적 심포니스트

    말러 vs 부루크너

20세기에 불어온 말러 열풍 | 네번째 위대한 B, 브루크너 | 작곡가이자 지휘자로서의 '이중생활' | 초등학교 선생님에서 늦깎이 작곡가로 | 영원한 주제, 삶과 죽음 | 성스럽게 쌓아올린 9개의 교향곡 | 교향곡 9번의 징크스

|금난새의 추천음악|

 

3 맑고 투명한 북구의 서정 시인

   시벨리우스 vs 그리그

핀란드의 음악 영웅, 시벨리우스 | 북구의 쇼팽, 그리그 | 법학도에서 작곡가로 | 친구를 만나다, 민족음악에 눈뜨다 | 러시아가 두려워한 금지곡 <핀란디아> | 별장 '아이놀라', 그리고 30년의 침묵 | 솔베이그의 노래, 그 지고지순한 사부곡

|금난새의 추천음악|

 

4 스탈린 시대를 견뎌낸 러시아 현대음악가

    쇼스타코비치 vs 프로코피에프

스탈린 체제하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운동 | 조국 러시아를 지키다 | 망명의 길을 떠나다 | 스탈린의 탄압을 극복하고 | 돌아온 탕아, 걸작을 쏟아내다 | 영화 음악과 재즈에도 관심 |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쓴 음악동화

|금난새의 추천음악|

 

5 프랑스 음악계의 아름다운 아웃사이더

    비제 vs 생상

로마 대상을 거머쥔 비운의 작곡가 | 로마 대상에서 낙방한 '프랑스의 모차르트' | 근대 프랑스 음악의 아버지 | 니체도 탄복한 오페라 <카르멘> | 오페라 속의 팜파탈, 카르멘과 델릴라

|금난새의 추천음악|

 

6 현대음악의 두 거목

    스트라빈스키 vs 바르토크

파리 음악계를 발칵 뒤집어놓다 | 민요 채집에 정열 쏟은 현대음악가 | 흥행 천재 디아길레프와의 운명적 만남 | 알아주는 이 없는 외로운 창작의 길 | 평생 떠돌이 이방인으로 살다 | 천재, 백혈병에 걸리다

|금난새의 추천음악|

 

7 한 폭의 그림처럼 한 편의 영화처럼

   무소르그스키 vs 라흐마니노프

러시아 5인조의 백미 | 최후의 낭만주의자, 라흐마니노프 | 죽은 친구의 그림을 음악으로 | 신경쇠약의 슬럼프를 극복하고 | 알코올 중독과 처절한 만년 | 돌아오지 못할 망명의 길

|금난새의 추천음악|

 

서양사와 음악사 연대표

CD 수록곡 해설

 

1882년의 안톤 드보르작. 그는 브람스의 은혜를 입어 작곡가로서 성공가도에 발을 들여놓았다.

짐로크 사의 상업적 기획으로 큰 성공을 거둔 <슬라브 무곡집>의 타이틀 페이지(위)와 드보르작의 자필이 담긴 악보 첫 페이지(아래). 이 작품집으로 드보르작은 국제적인 스타가 되었다.

스메타나의 <체코 무곡집> 타이틀 페이지. 그는 오페라에 민족적 요소들을 도입했는데 특히나 폴카, 프리안트 등의 민속무용 리듬을 즐겨 차용했다.

1866년 5월 30일 체코 프라하 가설 국민극장에서 초연된 <팔려간 신부>의 상연 프로그램.

1909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된 <팔려간 신부>에서 신부 역을 맡았던 소프라노 에이미 데스틴. 이 공연에서는 말러가 지휘를 맡아 <팔려간 신부>를 미국 청중에게 처음으로 소개했다.

말년의 드보르작. 귀국 후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 상원의원을 지냈고, 프라하 음악원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간장병으로 1904년 5월 1일에 숨을 거두었다.

프라하 거리를 지나 위대한 체코인들의 안식처인 비세라드 성의 묘지로 향하는 드보르작의 장례 행렬.

1860년에 결혼한 스메타나와 그의 두번째 아내 베티나 페르디난도바. 그러나 그들의 결혼생활은 그다지 순탄하지 못했고, 스메타나는 말년 내내 전처와 두 딸을 그리워하는 나날을 보냈다.

스메타나의 후기 작품들인 <비밀>과 <악마의 벽>을 초연한 체코 국민극장 내부.

말년의 스메타나. 그는 정신착란 증세에 시달리다가 60세의 나이에 프라하 정신병원에서 최후를 맞는다. 이 사진은 마지막 정신착란이 엄습하기 직전의 모습을 담았다.

빈 국립가극장 복도에 세워진 말러의 흉상. 이 흉상은 1909년 말러가 파리를 방문했을 때 오귀스트 로댕이 빚은 것이다. 말년의 말러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는데, 그는 2년 뒤인 1911년에 숨을 거두었다.

6세 때의 말러. 그는 1860년 보헤미아 칼리슈트(현 체코령)의 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독일 문화가 지배적이었던 모라비아로 이주한 그는 유년시절부터 음악에 눈떴고, 열다섯 살부터 빈에서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페리 베라턴이 그린 안톤 브루크너의 초상화. 그의 나이 64세였던 1888년에 그려졌다. 그는 베토벤과 말러 시대 사이의 가장 중요한 교향곡 작곡가로 꼽힌다.

1892년 런던 코벤트가든에서 함부르크 가극단과 함께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를 전곡 연주 지휘했던 시절의 말러.

말러를 만나기 전부터 전도유망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떨친 말러의 부인 알마. 그러나 말러는 아내의 활동을 지지하지 않았고, 알마는 남편이 자신의 재능을 부담스러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결혼 후부터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성 플로리아누스 수도원의 파이프 오르간. 브루크너는 이곳에서 음악교육을 받은 뒤 오르간 주자로 일했다. 이곳에서 작곡을 시작한 브루크너는 수도원에 큰 애정을 품고 있었고, 10년간 이곳의 오르간을 쳤다. 현재 이 오르간은 '브루크너의 오르간'으로 불린다.

오르간 앞에 앉은 만년의 브루크너를 묘사한 오토 벨러의 실루엣화. 브루크너는 작곡가 이전에 오르가니스트로 명성이 높아 런던과 파리에서 연주를 했는데, 그중에서 런던의 크리스털 팰리스(수정궁)에서의 콘서트가 역사적으로 유명하다.

1907년 빈 가극단의 음악감독 자리를 사임하기 직전의 말러. 그는 그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객원지휘자로 일했고, 나중에는 뉴욕 필하모닉 협회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는 타협을 모르는 투사였고, 다혈질이었으며 완벽주의자였다.

1863년 39세 때의 브루크너. 이 해에 바그너의 <탄호이저>가 린츠에서 공연되었고, 브루크너는 이에 깊은 감명을 받아 바그너를 찾아가 자신의 악보를 보여주기도 했으나 사실 그와 바그너는 음악적으로 거의 대척점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브루크너를 비롯한 여러 작곡가에게 큰 감명을 준 작곡가 바그너. 그는 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오페라와 달리 연극적 요소를 더 강하게 부각시킨 악극(Musikdrama)의 창시자로, 독일 민족주의를 고취시켜 당대 지식인 사회와 지배층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11년 말러의 장례식을 그린 쇤베르크의 그림.

핀란드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사람인 악세리 갈렌 칼레라가 1894년에 그린 시벨리우스의 초상화. 시벨리우스는 핀란드인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국보급 음악가다.

'북구의 쇼팽'이라 불리는 노르웨이 작곡가 에드바르드 그리그. 그는 노르웨이 음악을 세계에 널리 알렸을 뿐 아니라 프랑스 인상파 음악가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그에 대한 노르웨이 국민들의 애정은 각별하고 극진하다. 오늘날 세계 주요 음악제 중 하나인 베르겐 음악제가 노르웨이에서 최초로 열렸을 때 60세를 맞은 그리그는 축제의 주인공이었다.

헬싱키 음악원 바이올린 반의 시벨리우스(뒷줄 왼쪽). 이곳에서 시벨리우스는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마르틴 베겔리우스로부터 작곡을 배웠는데, 바이올리니스트를 지망했던 시벨리우스는 그 영향으로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문호 헨릭 입센. 입센과 그리그는 그리그의 청년 시절, 로마에서 만났고, 이 만남에서 <페르 귄트>라는 걸작이 탄생한다.

그리그의 고향 베르겐에 위치한 그리그 자택의 작업실.

화가 악세리 갈렌 칼레라가 그린 시벨리우스(맨 오른쪽)와 핀란드 작곡가 로베르트 카야누스, 그리고 화가 자신.

1907년 아이놀라 별장의 시벨리우스. 그는 1904년 헬싱키 근교에 이 별장을 짓고 아내의 이름을 딴 애칭을 붙였다.

아이놀라 별장에서 시벨리우스와 지휘자 유진 오먼디. 오먼디는 시벨리우스의 음악을 미국에 처음 소개하여 격찬을 받았다.

1898년 경의 그리그와 그의 부인 니나를 그린 그림. 성악가였던 니나 하구르프는 남편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다.

스탈린의 전체주의에 의한 '즈다노프 비판'의 첫번째 희생양이었던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천명될 즈음 그가 무대에 올렸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은 금지곡이 되어 29년 동안이나 암흑 속에 묻혀 있어야 했다.

교향곡 제7번을 작곡중인 쇼스타코비치. 그는 서방으로 망명한 많은 작곡가들과는 달리 끝까지 고국을 떠나려 하지 않았고, 결국 스탈린이 죽은 후 다시 복권되었다.

<빈대>의 상연을 준비하기 위해 모인 쇼스타코비치, 시인 마야코프스키, 연출가 메이어홀드 등 당대 러시아 최고의 예술가들.

소련 작곡계의 총아로 떠올랐던 젊은 시절의 쇼스타코비치. 브루노 발터, 레오폴트 스토코프스키 등 세계적인 지휘자들은 그의 교향곡을 앞 다투어 소개했다.

1934년의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

유년시절의 프로코피에프. 어머니에게 처음으로 피아노를 배운 그는 다섯 살에 즉흥연주를 했으며 아홉 살에 오페라를 작곡하는 천재적인 소질을 보였다.

러시아를 떠나기 직전의 프로코피에프. 짧은 일정을 예정하고 고국을 떠났던 그는 정치적 격변으로 인해 18년 동안이나 외국을 떠돌게 된다.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의 공연 DVD. 스탈린은 이 작품을 관람하던 도중 작품이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리하여 작품은 러시아 제일의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이 연출했던 1934년의 초연 이후 내내 금지 되었다가 흐루시초프가 집권한 이후에야 다시 무대에 올려질 수 있었다.

쇼스타코비치를 전체주의와 싸우는 투사로 묘사한 미국 《타임》지. 냉전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서방 작곡가들은 너도나도 그의 작품을 연주하려 했다.

영화, 연극, 발레에 두루 관심을 가졌던 프로코피에프의 또다른 작품,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의 한 장면.

러시아 영화사에 길이남을 에이젠슈타인과 프로코피에프의 협력작들. 영화 <이반대제>(위)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아래).

'형식주의자'로 매도당했던 러시아의 위대한 세 음악 거장. 왼쪽부터 프로코피에프, 쇼스타코비치, 하차투리안.

19세에 로마 대상을 수상하며 프랑스 음악계의 천재로 떠올랐던 작곡가 조르주 비제. 그러나 야심작 <카르멘>의 실패를 견디지 못하고 36세의 아까운 나이에 요절했다.

로마 대상을 수상할 당시 열아홉 살의 야심만만한 비제. 그는 열여덟 살에 <다윗>이라는 칸타타로 로마 대상에 도전했으나 2위 입상에 그쳤고, 다음해에 칸타타 <클로비스와 클로틸드>로 재도전, 마침내 로마 대상을 거머쥐고야 만다.

프랑스 및 전 세계의 유명 인사들이 잠들어 있는 파리 페르 라 셰즈 묘지에 있는 비제의 무덤.

비제와 동시대를 살았던 또 한 사람의 음악 천재 생상. 그의 재능은 비단 음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어서 그림과 시, 철학, 천문학 등 다방면에 대단한 식견을 보였다.

10세 무렵의 생상. 그는 1846년 5월 파리의 살 프레이엘에서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협주곡을 연주하여 '신동'으로서 이름을 널리 알렸다.

23세 때의 생상. 당시 그는 파리 음악원의 일등상을 수상한 뒤, 파리에서 가장 규모가 큰 마들렌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자리에 오름으로써 프랑스에서 가장 인정받은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또한 그해에 파리 박람회에서 주최한 작곡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했다.

제임스 맥닐 휘슬러가 그린 사라사테의 초상 <흑의 습작>. 생상이 최초로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은 이 스페인의 연주자 겸 작곡가에게 바친 것이었다.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의 공연 포스터. 초연 때 파리 시민들로부터 차갑게 외면당한 이 작품은 현재 세계 3대 오페라 중 하나로,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무대에 올려지는 작품이 되었다.

후대의 디아길레프가 무대에 올린 <카르멘>의 무대 의상 스케치.

스페인 감독 카를로스 사우라가 현대판으로 각색하여 만든 영화 <카르멘>. <카르멘>을 무대에 올리려는 배우와 연출가가 극의 내용과 똑같은 감정에 휘말리게 된다는 '극중극' 형식을 차용해 국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카르멘 역을 맡았던 19세기 미국 메조소프라노 미니 호크. 그녀는 1877년 브뤼셀 무대에서 이 역할을 처음으로 맡아 이후 500회가 넘도록 프랑스, 이탈리아, 영어 버전으로 공연하였다. 그녀는 미성(美聲)의 소유자는 아니었으나 팜 파탈인 카르멘 역할에 요구되는 강렬함과 관능적 표현의 대가였다고 전해진다.

생상의 이국취향과 신화에 대한 관심은 <삼손과 델릴라> <나일 강가에서> 등의 대표작에 반영되었다. 그림은 귀스타브 모로가 그린 <오르페우스의 목을 쥔 파코스의 무녀>(1865).

<삼손과 델릴라>의 클라이맥스 장면. 이 작품은 1877년 바이마르에서 먼저 초연되었고, 1892년이 되어서야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상연할 수 있었다.

큐비즘 화가 알베르 그레즈가 그린 스트라빈스키의 초상. 스트라빈스키는 <봄의 제전>에서 혁신적인 퀴비즘 예술 강령을 따랐으며 또한 퀴비즘을 선포한 여러 예술가들과 친분을 나누었다.

에른스트 폰 도흐나니, 졸탄 코다이와 함께 서영음악계의 변방이었던 헝가리의 음악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작곡가 벨라 바르토크.

니콜라스 레리히가 그린 발레 <봄의 제전>의 의상 스케치. 1913년 파리 상젤리제에서 초연된 이 작품의 의상은 러시아 민속의상에서 모티프를 차용했다.

레온 박스트가 디자인한 <불새>의 의상. <불새>는 스트라빈스키와 디아길레프의 첫 협력작으로, 이후 두 사람의 공동작업은 전 유럽에 러시아 발레와 음악 붐을 일으킬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부다페스트 음악원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의 젊은 벨라 바르토크.

스트라빈스키(왼쪽)와 최근 작고한 첼리스트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

영국 BBC교향악단을 지휘하는 말년의 스트라빈스키. 그는 작곡가로 서뿐만 아니라 리듬을 자유자재로 살리는 리드미컬한 지휘자로서도 유명했다.

유년기와 청년기의 바르토크. 아마추어 음악가였던 어머니와 아버지를 통해 처음으로 음악에 눈뜬 그는 오스트리아의 명문 빈 음악원의 입학 허가를 받았으나 결국 유럽 음악의 중심지인 빈으로 가지 않고 자국의 부다페스트 음악원을 선택한다.

베니 굿맨, 요제프 시게티와 함께 <컨트라스트>를 녹음하는 벨라 바르토크. 1943년 백혈병 진단을 받은 그를 위해 세르게이 쿠세비츠키. 예후디 메뉴인 등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새로운 작품들을 의뢰했다. 그는 병마와 싸우면서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과 <피아노 협주곡 제3번> 등 걸작을 쏟아냈다.

러시아 음악비평가 블라디미르 스타소프의 초상화(일리야 레핀 그림). 스타소프는 러시아 5인조 음악가들을 '막강한 소수'라 불렀으며 그들을 이론적으로 대변했다.

'최후의 낭만주의자' 라흐마니노프(보리스 샬리아핀이 그린 초상화). 190센티미터의 거구에 걸맞게 연주 스케일이 유달리 컸던 그는 모든 피아노 기법을 구사하는 천재였으며, 작곡한 피아노곡 역시 스케일이 크고 음역이 넓은 고도의 기교가 필요한 곡들이었다.

러시아 화가 일리야 레핀이 그린 <춤추는 남녀>. 이들은 우크라이나 민속무용인 고파크를 추고 있는데, 러시아 문호 고골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무소르그스키의 <민둥산의 하룻밤> <소로친스카야 시장> 등도 이 고파크 무용곡의 특색을 살린 것이 특징이다.

러시아가 낳은 불세출의 명가수 표도르 샬리아핀. 그는 라흐마니노프의 친구였으며, 무소르그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등 러시아 음악의 매력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린 러시아 음악의 전도사였다.

글라주노프의 성의 없는 지휘로 첫 공연이 실패로 돌아가 의기소침해 하던 시절의 라흐마니노프. 그는 이 시절 작곡을 포기하려고까지 생각했으나 최면요법으로 이를 극복하고 4년 뒤 재기하여 격찬을 받았다.

세번째 피아노 협주곡을 집필할 당시의 라흐마니노프.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던 만년의 무소르그스키 초상. 그는 과음한 끝에 42세 생일 직후 숨을 거두었다.

근위대의 사관학교에 입학한 13세의 무소르그스키. 귀족 자제가 군대에 복무하는 것은 당시 러시아에서는 당연한 코스였다.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근위대에 입대한 17세의 무소르그스키는 이곳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하던 보로딘과 발라키레프를 만나 그들과 자연스럽게 러시아 5인조를 형성하게 된다.

아들 라흐마니노프에게 일찍부터 피아노와 음악을 가르친 어머니 류보피 부타코바(위)와 가산을 탕진하고 파산한 부친 바실리 라흐마니노프(아래).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유년기의 라흐마니노프. 그는 엄격한 레슨으로 유명한 피아노 교수 니콜라이 즈베레프에게 피아노를 사사했는데, 즈베레프와 그의 문하생들은 안톤 루빈슈타인이나 차이코프스키와 같은 거장들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특권을 누렸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