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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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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01 박태상의 동유럽문화예술산책

 

박태상

2002, 생각의 나무

 

시흥시대야도서관

EM028830

 

982.02

박883동

 

탐사와 산책 12

 

누가 도나우강에서 뱃놀이를 했는가

 

박태상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미시간주립대학교(MSU)에서 객원교수를 지냈고, 한국방송대학교 울산지역대 학장을 거쳐 현재 인문학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동시에 사단법인 [서울평양학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두 권의 문학평론집 '전통부재시대의 한국문학'과 '엽기 패러디 시대의 한국문학' 및 한 권의 영화평론집 '영화, 어떤 문화코드로 읽을 것인가'를 출간했고, 대통령자문기구인 민주평통자문위원(상임위원)과 옥천 지용제 운영위원 겸 홍보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동안 KBS 라디오 한민족

 

 

목차

 

책머리에 | 동유럽, 그 치열한 지성과 냉혹한 역사적 현실의 세계

 

쇼팽이 사랑한 여인, 쇼팽이 사랑한 음악 | 바르샤바의 쇼팽박물관

크라쿠프에서 괴테를 만나다 | 폴란드 왕립 소금광산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 다뉴브 강과 부다페스트의 슬픔

여인천하 | 루카치 박물관과 쉔브룬 궁전

모차르트, 베토벤과 동거하다 |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음악가 무덤

프라하의 봄 | <2000어 선언>과 밀란 쿤데라

비세흐라트의 향기 | 체코의 자랑 프라하 성

카프카의 연인들 | 프라하의 명소 카프카 박물관

신세계를 펼쳐라 | 드보르자크의 예술세계

어떻게 살아남아야만 하는가 | 브레히트 박물관의 신비로움

베를린판 분서갱유 | 독일의 명문 흄볼트 대학

한국을 독립시켜라 | 세칠리엔호프 궁전과 포츠담 선언

헤겔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가 | 헤겔 철학의 세계정신

도브리 젠 | 레닌 묘와 고리키 박물관

단테스, 콘체로바를 포기하라 | 러시아의 위대한 시인 푸슈킨

에르미타쥬 미술관과 '황금의 방' |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자존심

캔버스를 허리춤에 차고 예술을 창조한 화가 | 사실주의 화가의 대명사 일리야 레핀

아르바트 거리와 젊은 예술인들 | 러시아 전통의 이콘 페인팅

민족이 우선인가, 세계화가 먼저인가 | 림스키 코르사코프와 표트르 차이코프스키

 

쇼팽 박물관 내부 폴란드 젤라조바 볼라에 있는 쇼팽 박물관의 내부이다. "피아노의 시인"이라는 별명답게 피아노를 중심으로 한 소품들의 조화가 인상적이다.

쇼팽 초상 감상적이면서도 다소 신경질적인 쇼팽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는 쇼팽의 초상이다. 상드의 회고에 의하면 쇼팽이 가장 사랑한 여인은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고 한다.

밖에서 본 쇼팽 박물관 쇼팽 박물관은 고즈넉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풍긴다. 바르샤바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쇼팽을 사랑하는 외국의 관광객들로 늘 붐비고 있다.

쇼팽의 가족사진 박물관 벽에 붙어 있는 쇼팽의 가족들 사진이다. 프랑스인이었던 쇼팽의 아버지 니콜라스는 프랑스 대혁명 당시 사회적인 불안을 피해 폴란드로 이주했는데, 연초공장에서 회계 일을 하던 중 백작의 집에 프랑스어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됐다. 그곳에서 옛 귀족 출신 가정부 유스티나와 결혼, 1남 3녀를 얻었다. 그 가운데 둘째가 쇼팽이다.

조르주 상드의 초상화 쇼팽의 연인 조르주 상드의 초상화. 당대의 화가 들라크르와의 그림으로도 유명하다. 격정적이면서도 섬세한 조르주 상드의 내면이 잘 드러나 있는 그림이다.

쇼팽의 초상 쇼팽의 깔끔하면서도 창백한 인상은 뭇 여성들로부터 모성 본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실생활에서도 쇼팽은 내성적인 성격으로 고독을 무척 즐겼다고 하는데 이런 성격은 그의 음악세계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쇼팽의 정원에 있는 음악비 조르주 상드, 보진스카 등의 연인들과 뜨겁게 사랑했지만 끝내 평안을 얻지 못했던 쇼팽. 그래서 그런지 그의 음악비는 어딘지 모르게 외롭고 쓸쓸하게 보인다. 그의 장례식장에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흘렀다.

쇼팽의 초상화 평소에 바흐를 존경했던 쇼팽. 그의 표정에서는 바흐 음악에서 느낄 수 있는 단아한 귀족미와 고전적인 절제, 그리고 세련된 자족감이 느껴진다.

왕립 소금광산 박물관 폴란드 크라쿠프에 있는 소금광산 박물관의 전경이다. 소금광산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명소로 광산 안에는 광부들이 새긴 조각물들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다.

소금광산 내 연못 폴란드 크라쿠프에 있는 왕립 소금광산 내의 연못. 둘레에 관광객들을 위한 다리가 놓여져 있다.

이집트로의 피난 왕립 소금광산 내에 있는 성 킹가 성당 벽에 조각된 작품으로 당시의 광부들의 손에 의해 제작되었다.

최후의 만찬 성 킹가 성당 벽에 조각된 작품으로 조각가이며 광부인 안토니오 비로덱에 의해 제작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화 <최후의 만찬>을 모사한 작품이다.

괴테의 초상 근엄하면서도 낭만적인 멋을 갖춘 귀족이며 신사였던 괴테의 위엄과 매력이 잘 드러나 있는 초상화이다.

울리케 폰 레베초 괴테는 74세 때 19세의 울리케 폰 레베초에게 청혼하였다. 괴테는 1823년 뵈멘으로 마지막 온천여행을 떠났는데 그곳에서 그가 묵었던 집 주인의 손녀인 우아한 그녀에게서 열정적 사랑을 느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국회의사당 헝가리 민주의회정치의 현장인 동시에 1982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1956년의 5 . 6혁명 당시 부다페스트 공과대학 학생들은 이곳에서 소련군의 철수와 헝가리의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연좌데모를 벌였다. 이 사건은 헝가리 민주화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헝가리 국립미술관 부다페스트 부다 왕궁에 있는 국립미술관. 현재 여러 부속 박물관과 국립 세치니도서관을 수용하는 문화센터 역할을 하고 있다.

 

다눕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의 쏘련제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순간,

바숴진 네 두부는 소스라쳐 삼십 보 상공으로 튀었다.

두부를 잃은 목통에서는 피가

네 낯익은 거리의 포도를 적시며 흘렀다.

너는 열세 살이라고 그랬다.

네 죽음에서는 한 송이 꽃도

흰 깃의 한 마디 비둘기도 날지 않았다.

네 죽음을 보듬고 부다페스트의 밤은 목놓아 울 수도 없었다.

죽어서 한결 가비여운 네 영혼은

감시의 일만의 눈초리도 미칠 수 없는

다눕강 푸른 물결 위에 와서

오히려 죽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 높이 울었다.

다눕강은 맑고 잔잔한 흐름일까,

요한 스트라우스의 그대로의 선율일까,

음악에도 없고 세계지도에도 이름이 없는

한강의 모래 사장의 말없는 모래알을 움켜 쥐고

왜 열세 살 난 한국의 소녀는 영문도 모르고 죽어갔을까,

죽어갔을까, 악마는 등 뒤에서 웃고 있었는데

열세 살 난 한국의 소녀는

잡히는 것 아무 것도 없는

두 손을 허공에 저으며 죽어갔을까,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네가 한 행동은

네 혼자 한 것 같지가 않다.

- 김춘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중 일부

 

가브리엘 천사상 영웅의 광장에 조각되어 있는 조각으로 헝가리 국민들의 선민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헝가리 국민들은 가브리엘 천사가 신에 의탁해 헝가리를 보호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마차시 성당 부다페스트의 명소 중 하나인 마차시 성당의 모습. 18세기 초에 세운 삼위일체상이 유명하며 신고딕 양식의 뾰족탑이 관광객의 눈길을 끌고 있다. 특히 성당의 채색 모자이크 기와 지붕이 무척 화려하고 아름답다.

글로리에터 전경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별궁이었던 쉔부룬 궁전의 뒤편 언덕에 만들어진 글로리에터(글로리아 게이트)

오스트리아 쉔부룬 궁전의 전경 40년 간의 통치로 여인천하 시대를 열었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야심이 그대로 표현된 대궁전. 궁전의 방이 무려 1,441개나 된다.

글로리에터 측면 쉔부룬 궁전의 뒤편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글로리에터의 모습도 가까이에서 보면 매우 웅장하고 아름답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스케일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무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의 중심가에 위치한 비엔나 중앙 묘지 안의 '음악가 무덤'에 있는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의 무덤과 그 조형물.

모차르트의 초상 천재성과 장난기, 그리고 광기가 느껴지는 모차르트의 초상. 그는 감정의 기복이 심했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재능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비엔나 현지에 가면 모차르트에 대한 비엔나 시민들의 사랑을 어디에서든지 쉽게 느낄 수 있다.

구스타프 말러 표식 비엔나의 오페라하우스 가는 길에 위치한 '보행자의 거리'에 새겨진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별 모양의 표식

모차르트의 초상 그의 음악은 고귀한 기품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동심에 찬 느낌을 잘 표현해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의 음악'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또한 그는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전개되는 음악을 만드는 타고난 리듬감을 가지고 있었다.

모차르트의 가족 일찍부터 천재적 재능을 나타냈던 모차르트는 14세가 되기 전에 피아노, 바이올린, 관현악을 위한 많은 곡을 작곡했다. 그의 아버지는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인식하고 그를 데리고 유럽 전역에 연주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모차르트의 두 아들 모차르트는 결혼을 해서 세 아들을 두었지만 첫아들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잃고 만다. 그림은 둘째아들과 셋째아들이다.

 

죽음이란 우리가 그걸 아주 가깝게 생각한다면, 우리 존재의 참다운 목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최근 몇 해 동안에 인류의 가장 좋은, 가장 진실한 친구인 이 죽음과 대단히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죽음의 영상은 제겐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퍽이나 부드럽고 진정으로 위안을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죽음이 참다운 행복으로 통하는 문의 열쇠라는 것을 터득할 기회를 주신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이렇게도 젊은 나이에 저는 밤마다 언젠가는 제가 살아 잇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자리에 드는 때가 한 번도 없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줄곧 내가 얼마나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를 당신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거요. 나를 지배하고 있는 감정을 나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오. 무지무지하게 날 괴롭히는 일종의 공허감 - 일종의 그리움 - 그것은 결코 충족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 것이오. 끈질기게 내게 달라붙어 오히려 날이 갈수록 더욱 강해질 뿐이라오.

- 병상에 누워있던 부친(1787)과 바덴에서 요양중이던 병약한 아내 콘스탄츠(1791)에게 보낸 편지

 

한 어버이가 자식들을 넓은 세상에 내보낼 때, 가장 훌륭하고 고명한 벗에게 맡겨 보호와 지도를 부탁하는 것은 곧 자기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경애하는 고명한 벗이여! 여기 6명의 자식(하이든 4중주곡의 6편)을 그대에게 보냅니다. 부디 그들의 다정한 친권자가 되어 주시기를…… 이후로 나는 그들에 대한 모든 권리를 당신께 양도합니다.

 

베토벤 초상 섬약한 듯하면서도 강직하고 신경질적이면서도 초인적인 예술혼을 가지고 있던 베토벤의 내성이 잘 드러나 있는 초상화이다.

베토벤 임종시의 초상 베토벤은 1819년 완전한 귀머거리가 된다. 그런 가운데서도 작곡하는 일을 멈추지 않던 그는 계속되는 병마와 싸우다가 1827년 세상을 떠난다. 그의 죽음에 대해 온 유럽의 지식인들은 깊은 애도를 표했다. 20,000명의 사람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고 그의 운구 행렬을 따르던 젊은이 가운데는 슈베르트도 있었다.

 

나의 천사, 나의 전부, 나의 분신이여!

 

오늘은 몇 마디만, 그것도 (그대의) 연필로……

겨우 내일쯤에는 거처가 정해질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건 정말 공연한 시간의 낭비입니다……!

숙명적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깊은 고뇌는 무엇을 위한 것인지……. 우리들의 사랑은 희생과 단념 이외에는 아무런 방법도 없을 것인지……. 그대가 나만의 존재가 아니고 내가 그대만의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은 영영 변치 않을 것인지…….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당면한 문제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은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며, 나는 그대를, 그대는 나를 위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한 마음 한 뜻으로 될 수만 있었던들 나도 그리고 그대도 이렇게 괴로워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여행은 지긋지긋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저께 아침 4시에야 겨우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중략)…….

조만간 만나겠지만 오늘도 이 며칠 동안의 내 생활에 관한 나의 생각을 전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이 서로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따금 나는 말이란 전혀 쓸모 없는 것이라고 느끼기도 합니다. 명랑한 마음으로…….

내가 그대에게 있어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항상 나의 진실하고 유일한 보물, 나의 모든 것이 되어 주십시오. 그 이외의 것은 무엇이나 신에게 맡길 수밖에 없겠지요.

그대의 성실한 루드비히

베토벤 무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의 중심가에 위치한 비엔나 중앙 묘지 안의 '음악가 무덤'에 있는 베토벤의 무덤과 그 조형물.

스트라호프 수도원 1126년 세워진 유서 깊은 스트라호프 수도원의 언덕에서 바라본 체코의 수도 프라하 시의 전경.

스테판 성당 체코의 명물 스테판 성당. 체코 가톨릭을 대표하는 성당으로 체코 국민들에게 정신적인 위안을 주는 유서 깊은 건축물이다.

밀란 쿤데라 체코 사회의 정치적 알레고리를 함의적으로 깔고 있는 작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세계 문단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

체코 대통령 궁 체코의 하벨 대통령이 집무하고 있는 대통령 궁의 정문과 그 조각물.

 

역사의 경우도 개체의 삶에 있어서와 상황이 비슷하다. 단 하나의 체코인들의 역사가 있을 뿐이다. 어느날엔가 그것은 토마스의 삶과 마찬가지로 끝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두 번 다시 반복될 수 없을 것이다. ……보헤미아의 역사와 유럽의 역사는 불행하게도 인류의 무경험에 의해 그려진 두 개의 스케치다. 역사란 개별적인 인간의 삶과 똑같이 가벼운 존재다. 그것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휘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밀란 쿤데라 체코를 대표하는 작가인 밀란 쿤데라는 음대 교수의 아들로 출생했다. 1975년 체코에서 프랑스로 망명, 주로 프랑스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한국에도 활발히 번역 출간되고 있다.

영화 <프라하의 봄> 포스터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 <프라하의 봄> 포스터. 줄리엣 비노쉬, 레나 올린이 상반된 캐릭터인 테레사와 사비나의 역할을 맡아 열연했다.

틴 성당 프라하의 구시가지 광장에 있는 틴 성당. 벽공을 향해 솟아 있는 첨탑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다.

코흘 분수 프라하의 대통령 궁 안의 정원에 있는 코흘 분수. 초기 바로크 양식으로 만들어졌으며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태양을 상징하는 사자가 받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성 비투스 성당의 내부 체코 프라하에 있는 성 비투스 성당의 내부 모습이다. 고딕 양식을 적용한, 끝이 맞물리는 아치형의 첨탑(98미터)을 가지고 있는 것이 퍽 인상적인데, 3세기 영국 성인 비투스를 추앙하여 건축한 것이라고 한다.

성 비투스 성당의 외부 프라하 성의 언덕에 우뚝 솟아 있는 프라하 최대의 고딕 양식 건물로 10세기부터 점차적으로 건축이 진행되었다. 우측 중앙의 성 바츨라프(체코의 고대 왕으로 체코의 수호성인 중의 한 사람) 예배당과 좌측 바로 앞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유명하다. 지하에는 찰스 4세를 비롯한 체코 역대 왕들의 무덤이 있다.

하벨 대통령 시인이자 희곡작가로 활동했던 하벨은 첨예한 정치적 상황에서도 소신 있는 입장을 밝혀 체코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그는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한다.

카프카 초상 체코 프라하를 세계적인 문학적 수도로 만들어버린 프란츠 카프카. 그의 문학의 본딜은 '결여성'에서 발견된다.

황금골목의 상점 카프카의 막내동생 오트라의 집이 있었던 황금골목에 위치한 상점으로 현재 카프카와 관련된 기념품 등을 관광객들에게 팔고 있다. 역시 프라하의 명소이다.

청년 시절의 카프카 비범했지만 소심해서 평생을 프라하에서 살았던 카프카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에 골몰한 채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다. 그는 이 시절 보험회사에 취직하였으나 창작시간이 전혀 나지 않자 그만두기도 한다.

카프카와 그의 누이들 카프카에게는 세 명의 여동생이 있었는데 유독 막내동생 오트라와는 각별한 사이였다고 한다.

드보르자크 동상 체코 프라하 시내에 있는 드보르자크 음악박물관 정원에 있는 드보르자크의 동상. 조각가 데젠호프의 작품이다.

 

친애하는 친구 S에게

 

내가 편지를 먼저 써야 할 정도로 그대가 오랜 기간 동안 왜 편지를 쓰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먼저 밝힐 것은 최근에 비엔나에 와서 나는 매우 경쾌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비에스바덴 출신인 브람스 박사와 함께 보낸다는 사실 때문이지요. 나는 그동안 그가 그렇게 즐거운 표정을 짓는 것을 결코 본 적이 없었어요. 우리는 매일 낮에 만나서 밤늦게까지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보냈지요. 나와 담소를 나누는 것은 브람스 자신을 흡족하게 하는 일인 것처럼 보였소. 그래서 나는 그의 예술가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그의 매력을 칭송하게 되었소. 그리고 브람스의 내면에 감추어진 마음과 영혼에 대해 흠뻑 빠져들게 되었던 것이오.

- 드보르자크가 브람스와의 친교에대해 친구 심록(Simrock)에게 보낸 편지

 

드보르자크 음악박물관의 외관 프라하 시내인 카를로뷰 20번지에 위치한 드보르자크 음악박물관의 우아한 모습. 그의 음악세계의 정교함과 섬세함을 그대로 반영한듯한 건축적 조형이다.

드보르자크의 초상 제자들을 가르칠 때 무척 엄격했다고 전해지는 드보르자크는 스메타나와 더불어 체코 음악을 세계에 알린 대음악가이다. 그는 <슬라브 무곡> 등으로 민족 정서를 반영하는 곡을 쓰기도 했고 <신세계 교향곡> 같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과 찬탄을 표현하는 곡을 남기기도 했다.

브레히트 박물관 표현주의 예술의 거장이며 20세기 연극이론의 기초를 마련했던 브레히트와 그의 아내 헬레나가 함께 살았던, 베를린의 카우세 스트라세 125번지에 위치한 브레히트 박물관.

브레히트와 그의 아들 브레히트와 그의 아들 프랑크의 단란했던 모습. 브레히트는 평생 애용했던 담배를, 아들 프랑크는 과일을 손에 들고 있다.

브레히트와 헬레나 브레히트는 마리아네 초프와 29세 때 이혼하고 만났던 연극배우 출신의 열정적인 여인 헬레나에게 사랑을 느낀다. 브레히트와 헬레나의 다정한 한때.

브레히트의 가족사진 왼쪽이 브레히트이고 가운데가 그의 동생이다. 그의 아버지는 제지공장을 운영하는 중산층이었고 브레히트는 부모의 바람대로 처음에 의대에 진학하지만 곧 문학의 세계에 심취하기 시작한다.

담배를 문 브레히트 평소에 담배를 무척이나 즐겼던 브레히트는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사진을 많이 남겼다. 브레히트 박물관에는 그가 애용했던 수많은 재떨이들이 전시되어 있다.

베를린의 국회의사당 가운데 상단부의 투명한 유리 돔이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돔을 투명한 유리로 만든 것은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투명한 정치를 펼치자는 독일 정치인들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마르크스 엥겔스 동상 베를린의 국립미술관과 베를리너 돔 근처에 있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동상. 이들이 전개한 '토대와 상부구조', '리얼리즘 소설이론'은 이후 많은 경제학자, 문예비평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베를린 장벽 원래는 동독과 서독 양쪽에서 만든 장벽이 있었으나, 현재는 한쪽 벽만 슈프레 강 주변에 남아 있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벽 위에 그려진 전위예술가들의 그림이 분단의 상흔을 회상케 하고 있다.

베를린판 분서갱유의 역사유 흄볼트 대학 법과대학 앞 광장에 놓여 있는 역사적인 유물이다. 히틀러가 자신의 체제에 동조하지 않은 지성인들의 책을 끌어내어서 불태워버린 것을 고발하고 있다. 투명한 유리창 밑에 빈 서가가 보인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세계 최고의 관현악단으로 키워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푸르트벵글러, 토스카니니 등과 더불어 20세기 최고의 지휘자로 꼽힌다.

포츠담에 모인 세 정상 1945년 6월에 열린 포츠담 회담에 참석한 미국 영국 소련의 세 지도자. 왼쪽부터 처칠, 투루먼, 스탈린이다. 처음에는 미국 대표로 루스벨트, 영국 대표로 처칠이 참석했으나 뒤에 투루먼과 애틀리로 바뀌었다.

세칠리엔호프 궁전 역사적인 포츠담 회담이 열렸던 장소로 이곳에서 한국의 독립이 재확인되었다.

쉬로스 세칠리엔호프 호엔촐레른가의 마지막 왕인 빌헬름 1세의 아들 빌헬름 2세의 부인으로 세칠리엔호프 궁전은 그녀의 이름으로부터 나왔다.

포츠담 회담이 열렸던 회담장 독일 베를린의 부란덴부르크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1945년 6월 역사적인 포츠담 회담이 시작되었다.

헤겔의 무덤 독일 베를린 공동묘지에 있는 헤겔의 무덤. 헤겔은 평소에 존경했던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의 옆에 묻히기를 원했고, 그의 희망대로 사후에 피히테 곁에 묻혔다.

헤겔의 초상 과묵하지만 사려 깊고 논리적이었던 헤겔의 성격이 잘 드러나 있는 초상이다. 헤겔은 무척 성실한 철학자였으며 그의 생애 동안 점진적으로 자신의 논리를 보완 완성해 나갔다.

횔더린(위)와 피히테(아래)의 초상 헤겔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두 사람. 튀빙겐 대학의 동창이었던 횔더린과 철학자로서의 전범을 보여주었던 피히테.

청년 헤겔의 초상 비록 보잘것 없는 보수를 받으며 예나 대학의 강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청년 헤겔은 이 시절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정립할 기회를 갖는다. 그의 철학은 후일 마르크스 철학의 기본 동력으로 작용해 세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다.

 

나는 정찰을 위해서 말을 타고 거리를 지나가는 황제-이 세계정신-를 보았습니다. 그러한 개인을 본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기분이며, 그 개인은 한 점에 집중되어 잇고, 마상에 앉아서 세계를 쥐고 그것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목요일부터 월요일까지의 그러한 사태전개는 놀라지 않고는 불가능한, 이 예외적인 개인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 나폴레옹을 접하게 된 것에 감격하여 남긴 글

 

당신이 만약 허락한다면, 나는 당신이 현재의 처지에서보다 대학교육을 위해서 더욱더 활동적인 공헌을 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사태가 아직 불확실하기 때문에 이 나의 편지가 터무니없고 쓸데없는 것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쓰는 데는 그만한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즉 어떤 사랑스럽고 마음씨 고운 처녀와의 관계가 그것이다. 내 행운은 부분적으로 내가 대학에서 한 자리를 얻는다는 조건과 결부된 것이다.

그저께부터 나는 이 사랑의 마음이 나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나는 당신이 나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행운을 빌 것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그녀에게 우선 당신과 당신의 부인에게 알려야 한다고 말을 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 폰 툭허라고 부른다.

- 1811년 4월 18일 친구 니히트함머에게 보낸 편지

 

너는 나의 것 ! 나는 그녀를 내 것이라 부를 수 있네.

너의 눈짓에서

사랑의 눈짓을 되돌려주는 것을 알겠네.

오 이 기쁨, 오 최고의 행복 !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지, 너는 지금 말할 수 있네.

괴로운 가슴 속에

너무나 오랫동안 몰래 간직했던 것

그것이 이제 내게 큰 기쁨이 되네 !

 

사랑의 황홀은 말이 모자라.

얼마나 그것이 안에서 끓고 넘치는지

표현하기에는 가슴이 벅차

너의 힘이 모자라지.

 

밤에 우는 새야, 나는 네가 부러워

너의 목의 힘으로,

자연도 말하기 어려워

그렇게 함부로 이야기하기가 !

 

그녀가 입으로 말을 할 때에도

사랑은 축복

결혼의 약속은 없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주고

 

그녀가 그에게 준 깊은 표시,

입맞춤의 깊은 말은

영혼이 닻을 내리는 곳

내 마음 너의 마음 속에 넘쳐 흐르네.

- 헤겔

 

브레히트의 무덤 베를린 공동묘지에 있는 브레히트의 무덤. 브레히트는 사후에 헤겔의 무덤 옆에 묻히기를 원했다.

고리키 박물관 고리키는 『어머니』 등의 뛰어난 민중소설을 남긴 러시아의 대표적인 민족작가이다. 그는 정치적인 탄압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소신을 지켜 러시아 국민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고리키 박물관에 방문객들이 몰려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로마소노프 동상 러시아 최고의 대학인 모스크바 대학을 설립한 로마소노프의 동상.

레닌의 시신 레닌이 죽은 후 후계자 스탈린은 레닌의 우상화 작업에 착수, 권력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한다. 레닌의 시신을 방부처리한 후 공개한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이다.

담배를 피우는 고리키 고리키는 톨스토이와는 달리 출신성분이 서민계층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생계에 뛰어들어 많은 작업을 전전하였고 이 경험들은 나중에 그의 작품세계에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

어린 푸슈킨 초상 푸슈킨은 어린시절부터 감수성이 예민했고 사물에 대한 관찰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사랑, 우정, 기쁨, 슬픔 등을 언어로 표현해 내는 데 있어 천부적인 시인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푸슈킨 초상 열정적이며 다정다감하고 순수했던 푸슈킨의 초상. 그는 결국 콘체로바라는 여인을 사이에 두고 단테스라는 연적과 결투를 벌이다 목숨을 잃는다.

 

나는 그 경이의 순간을 기억한다.

내가 내 앞에 나타난 그때를

스쳐가는 환영처럼

순수한 아름다움의 정령처럼

 

희망 없는 비애의 그리움 속에서

소란한 조급함의 흥분 속에서

내게 오랫동안 그 부드러운 소리 울렸고

나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꿈꾸었다.

- 안나 페트로브나 케른에게 바친 연애시

 

네가 주인이다. 홀로 살아가라.

걸어가라 자유로운 길을,

자유로운 정신이 너를 이끄는 곳으로

좋아하는 생각의 열매를 완성하면서

고귀한 행위에 대한 어떠한 대가도 요구하지 않으며,

그것은 너 자신의 내부에 있다.

너 자신이 최고의 심판관이다.

너는 누구보다도 더 엄격하게 자신의 작품을 평가할 수 있다.

- 푸슈킨 「시인에게」

겨울궁전 예카테리나 2세 여왕이 기거하던 겨울궁전은 현재 에르미타쥬 국립 미술관의 일부로 사용되고 있다. 에르미타쥬 미술관은 세계 3대 미술관의 하나로 230만 점의 소장품을 자랑하고 있다.

황금의 응접실 에르미타쥬 미술관 내부의 황금으로 꾸며진 응접실. 호화롭고 사치스러웠던 왕조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에르미타쥬 미술관 내의 응접실 아치 모양의 장식이 다채롭고 화려한 에르미타쥬 미술관 내의 응접실. 당시 황족이나 귀족들의 미의식과 유행하던 건축 양식 등을 알 수 있다.

압생트를 좋아하는 여인 피카소의 그림으로 에르미타쥬 미술관에 소장, 전시되어 있다. 이 그림은 피카소가 파리에 옮겨온 후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은 이른바 청색시대의 작품에 해당하는데, 푸른색에 대한 그의 독특한 애호는 그의 그림에 고독과, 슬픔, 연민 등의 감정을 불어넣는다.

열매를 들고 있는 여인 폴 고갱의 그림으로 역시 에르미타쥬 미술관의 소장품 중 하나이다. 원초적인 순수의 세계를 찾아 타히티에 정착한 고갱이 그곳의 원주민 소녀를 그린 그림으로 인공의 미가 거세된 순수한 생명의 매력이 잘 드러나 있다.

일리야 레핀이 그린 푸슈킨 전국민의 사랑을 받는 러시아 리얼리즘 미술의 대가인 일리야 레핀이 그린 천재 소년 시인 푸슈킨의 초상.

푸슈킨의 신혼집 푸슈킨이 갓 결혼해서 살았던 집. 아르바트 거리에 있다.

 

내가 운명에 대해 경멸을 간직해야 하는가?

내가 운명에 대해서는 고집을

그리고 내 자랑스런 젊음에 대해서는

인내를 지녀야 하는가?

- 푸슈킨

 

푸슈킨과 콘체로바의 동상 아르바트 거리에 있는 푸슈킨과 콘체로바의 동상. 정장 차림인 푸슈킨과 웨딩드레스 차림인 콘체로바의 모습이 이채롭다.

림스키 코르사코프 동상 오페라 <사드코>로 유명한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동상. 차이코프스키의 세계화 전략에 맞선 러시아 민족주의 음악의 상징적인 작곡가이다.

림스키 코르사코프 초상 강직하면서도 위엄을 갖췄던 러시아 민족주의 작곡가 코르사코프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초상화이다. 그는 민족주의적 색채를 배제했던 차이코프스키보다 러시아 국민에게 더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무소르그스키(위)와 보로딘(아래)의 초상 림스키 코르사코프, 발라키레프, 쿠이와 함께 러시아5인조로 활동, 민족주의 정신을 고취했던 위대한 민족주의 작곡가 무소르그스키와 보로딘의 초상이다.

림스키 코르사코프 부인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부인은 아름다운 것으로도 유명했지만 남편의 음악적 활동을 이해했고 무엇보다 민족음악을 정립하고자 하는 코르사코프의 노력에 동조 적극적으로 권장을 하였다.

작곡을 하는 림스키 코르사코프 말년에 작업실에서 작곡을 하고 있는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모습. 그는 말년에 러시아 설화에서 채집한 소재를 바탕으로 한 오페라 작곡에 전념한다.

차이코프스키의 초상 차이코프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활동한 코르사코프와는 달리 주로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외국으로도 활발한 연주여행을 떠났다. 그는 러시아 국내보다는 국외에서 더 많이 알려졌으며 러시아 음악의 세계화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차이코프스키의 초상 3개월 간의 짧은 결혼 생활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차이코프스키는 열렬한 팬이었던 나데주다 부인의 금전적 지원을 바탕으로 왕성한 작곡, 연주 활동을 펼치면서 점차 러시아 음악계의 거두로 자리 잡는다.

차이코프스키와 그의 부인 차이코프스키는 밀류브코바라는 여인과 단 한 번 결혼하지만 3개월 만에 헤어지고 만다. 이후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는데 그 때문인지 그에게는 동성애자였다는 의혹이 따라붙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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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