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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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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2. 22. 12:41 내가 읽은 책들/2017년도

2017-006 목수의 인문학

 

 

임병희 글, 이우일 그림

2015, 비아북

 

대야도서관

SB103805

 

584.04

임44ㅁ

 

木手 人文學

 

목수가 된 인문학자의 인생 · 철학 · 고전 3막 18장

 

“인생은 계획 중에

벌어지는 일이다!

 

人生未定,

스슬 삶의 철학을 정립하는 DIY 인문학


자신 앞에 놓인 재료, 공구, 마감재를 가직 나만의 철학을 조립한다. 치열한 고민 끝에 만들어가는 철학이 삶을 버티는 힘이 된다. 자존감을 키우는 성장의 철학!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인문학이다.

 

1막

삶의 재료들


겨울을 견뎌낸 추재(秋材)의 나이테가 더 짙은 색과 깊은 밀도를 가지듯 고난의 순간을 충실히 보내야 나를 영글게 할 수 있다.

 

2막

삶을 바꾸는 공구들


재료를 갖추고 세상에 나가는 순간 방황은 시작된다. 톱질과 대패질로 목재가 가구로 바뀌듯이 인고의 시간을 거치지 않으면 삶도 바뀌지 않는다.

 

3막

삶의 찬란한 마감재들


샌딩과 오일로 마감을 하면 가구는 완성이 되지만 삶에 완성이란 없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겪어야 할 일은 겪어야 지나간다.

 

임병희

방황 속에서도 끊임없이 길을 찾으려 했다. 시를 쓰고 싶은 마음에 문학을 전공했으나 시적 상상력의 빈곤에 좌절하고 신화를 공부하겠다는 마음으로 문화인류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에서 무당과 굿판을 찾아다니며 신화가 문자에 한정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무엇’을 보느냐에서 ‘어떻게’ 보느냐로 사고체계의 전환이 시작된 시점이다.

2004년 어느 날, 문득 베이징으로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생각지도 않게 7년을 머물렀다. 버리고 떠난 길이었으나 돌아올 때는 또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와버렸다. 중국사회과학원에 입학하여 동북아신화를 연구한 것이 그랬고 좋은 인연을 만나 동양고전의 맛을 알게 된 것 또한 그랬다. 신화적 구조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고 삶이 씁쓸해지는 순간 고전을 펼쳐보는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신화와 고전의 철학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무엇이 되기 위해 한 공부가 아니었기에 하고 싶은 그 무엇도 할 수 있었다. ‘나무와 늘보’라는 공방에서 목공 수업을 받으며 매일 혼자만의 출근을 시작했다. 정신없이 가구를 만드는 과정에서 사서(四書)와 노장(老莊)이 튀어나왔다. 나무를 만지고 다듬어 연결하면 가구가 만들어지듯 생각과 생각을 연결하면 상상력의 세계가 지어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앞으로 또 어떤 방황을 할지 모르지만 그것 역시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인생임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같은 대학 문화인류학과에서 종교민속을 전공했고 <판타지 소설과 온라인게임의 신화 구조 분석>이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중국사회과학원에서 동북아신화와 문명 및 역사의 비교를 통한 한국신화의 확장을 시도했다. <한국신화역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중국남방일보 출판사에서 《韓國神話歷史》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 외에도 《인문라이더를 위한 상상력사전》을 썼다.

 

이우일

독특한 캐릭터와 허를 찌르는 기발함, 일상을 전복하는 발칙한 상상력으로 만화, 일러스트레이션, 수필 등을 오가며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전방위 예술가다.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를 졸업했고, 주요 작품으로는 《도날드 닭》,  《신나는 노빈손》 시리즈, 《삼인삼색 미학 오디세이 2》, 《김영하 이우일의 영화 이야기》, 《용선생의 시끌벅적 한국사》 시리즈 등이 있다.

 

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


흐르는 물은

구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물이 흘러 구덩이에 닿는다. 움푹 팬 구덩이에 물이 스민다. 결국 구덩이가 다 찰 때까지 물은 흐르지 않는다. 구덩이를 다 채우고 나서야 물은 앞으로 나아간다. 건너뛰고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가구의 뼈대가 없으면 샌딩도 할 수 없다. 뼈대를 만들었다 해도 샌딩을 하지 않으면 가구를 즐길 수 없게 된다. 사람들은 한 번에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나 역시 그렇다. 지난한 과정 없이 자고 일어나면, 눈 한 번 감고 나면 무언가가 이루어져 있기를 바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부질없는 생각인 줄 알면서도 그런 바람을 품고 산다. 소중하지 않은 것들은 없다. 그것을 겪어야, 그 과정을 지나야 그곳에 닿을 수 있다.

힘들고 외로울 때 우리는 그것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지만 그만큼 힘들어야, 그만큼 외로워야 슬픔과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다. 물이 구덩이를 건너뛸 수 없는 것처럼 우리네 인생도 겪어야 하는 일은 모두 겪어야 지나간다. - 본문 중에서해도

 

차례

 

서문 _ 인생미정人生未定, 나도 내가 목수가 될 줄 몰랐다!



1막 삶의 재료들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1장 춘재와 추재 그 순간이 고난이라 할지라도 충실하라
2장 경첩 경첩을 달았으면 문을 열어라
3장 자투리 어떻게 보느냐가 무엇을 만들지를 결정한다
4장 무늬목 포장으로 속을 감추려 하지 마라. 대신 속을 키워라
5장 가죽나무 새로운 길을 가고 싶다면 새로운 생각을 해라
6장 집성목 우리는 모두 조금 모자라다

2막 삶을 바꾸는 공구들
      방황,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1장 분도기 지금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2장 그 길을 알고 집중하고 마음을 다하라
3장 비트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이다
4장 루터테이블 실수를 통해 배워라. 실수는 스승이다
5장 직각자 직각은 모두에게 직각이어야 한다
6장 대패 껍질을 까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라

3막 삶의 찬란한 마감재들
      가구에는 완성이 있어도 인생에 완성은 없다


1장 디자인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라. 다를 뿐 틀리지 않다
2장 의자 네 안에 그것이 있다
3장 세상을 살아가는 또 다른 방법
4장 샌딩 겪을 것은 겪어야 한다
5장 오일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6장 목공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닌 삶

 

계절은 소리 없이 찾아온다.

늦게야 계절이 바뀜을 알고 또 지난 계절을 그리워한다.

나는 이렇듯 무심히 계절을 보내는데,

나무는 쉼 없이 준비하여 꽃을 피운다.

나무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려

겨우내 안으로 안으로 침잠하는데,

나만이 침잠없이 꽃을 피우려 했구나.

 

하늘의 도는 활을 매는 것과 같다. 높은 곳은 밀어 내리고 낮은 곳은 들어 올리며, 남는 곳은 덜어내고 부족한 곳은 보충한다. 하늘의 도는 남는 것을 덜어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데 사람의 도는 그렇지 않으니 부족한 것을 덜어 남는 사람에게 바치는구나. - 《도덕경道德經》 77장

天之道, 其猶張弓與, 高者抑之, 下者擧之, 有餘者損之, 不足者補之, 天之道, 損有餘而補不足, 人之道則不然, 損不足以奉有餘.

'함께'라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는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 자연은 그렇게 산다. 나무가 봄과 여름에는 빨리 자라고 가을과 겨울에는 더디 자라는 것처럼 자연은 변화에 맞추어 합당한 자신의 길을 찾는다. 그것이 하늘의 도이자 자연의 순리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다. 만이 가진 자는 더 많이, 적게 가진 자는 더 적게 가진다. 그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으려 한다. 모두가 욕심이다. 욕심은 타인을 해치고 사회를 망친다. 때로는 그 욕심이 자신을 향하게 된다.

 

발끝으로 서는 자는 오래 설 수 없고, 황새처럼 가랑이를 벌리고 걷는 자는 오래 걸을 수 없다. 스스로 나타내는 자는 나타나지 않고, 스스로 옳다고 하는 자는 드러나지 않는다. 스스로 자랑하는 자는 공이 없고 스스로 칭찬하는 자는 오래가지 못한다. - 《도덕경》 24장

企者不立, 跨者不行, 自見者不明, 自是者不彰, 自伐者無功, 自矜者不長.

준비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고 생각하지 않으면 깊어질 수 없으며 체력을 키우지 않으면 오래갈 수 없다. 조금 더 높아 보이기 위해 발끝으로 선 까치발은 금방 가라앉는다. 자신의 페이스를 넘어 욕심을 부리면 잠시 동안은 빨라보일지 몰라도 점차 속도와 밀도가 떨어지고 말 것이다. 빨리 단단히 자라기 바라지만 결과는 반대다. 늦고 무르게 성장하여 급기야는 스스로 무너지는 결과를 낳는다.

 

순임금은 밭 가운데서 등용되었고 부열은 성벽을 쌓다 등용되었으며, 교력은 생선과 소금을 팔다 등용되었고 관중은 감옥에서 등용되었으며, 손숙오는 바닷가에서 등용되었고 백리해는 시장바닥에서 등용되었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그러한 사람들에게 큰일을 맡기는 명을 내리려면 반드시 먼저 그들의 심지를 괴롭히고 그들의 근육을 수고롭게 하고 그들의 육체를 굶주리게 하고 그들 자신에게 아무것도 없게 해서 그들이 하는 것이 그들이 해야 할 일과는 어긋나게 만드는데, 그것은 마음을 움직이고 자신의 성질을 참아서 그들이 해내지 못하던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다. - 《맹자孟子》<고자장구告子章句> 下

舜發於畎畝之中, 傅說舉於版築之閒, 膠鬲舉於魚鹽之中, 管夷吾舉於士, 孫叔敖舉於海, 百里奚 舉於市. 故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拂亂其所為, 所以動心忍性, 曾益其所不能.

성군이라 일컬어지는 순임금은 밭을 갈았고, 상나라의 현명한 재상 부열은 담장을 쌓는 노예였으며,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소금과 생선을 팔던 교력은 주나라 문왕에게 등용되었다. 관중과 손숙오, 그리고 백리해도 감옥과 바닷가와 시장에서 등용되어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어질게 하는 현명한 신하가 되었다. 그들은 고난 속에서 자신을 단단히 키웠다. 고난에 잡아먹힐 것이 아니라 겨울나무가 그러했던 것처럼 속에서 새순을 키우며 피울 시기를 기다렸다. 심지가 괴롭고 근육이 수고롭고 배를 주리는 일이 그들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고통을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그리고 봄이 왔을 때, 무럭무럭 자라는 나무처럼 자신의 뜻을 펼쳐냈다.

 

문 앞까지 와서도 두드리지 못했다.

두드리고도 열지 못했다.

열고 들어갔으면 닫아야 했는데,

도망갈 곳을 만든다며 닫지 않고 열어 두었다.

열어야 할 때 열지 못하고,

당아야 할 때 닫지 못하니 늘 어중간하기만 했다.

쓰지 않는 문의 경첩은 소용이 없다.

빗장이 풀리지 않으면 아무곳에도 갈 수 없다.

 

공자가 말했다. "누가 문을 경유하지 않고 밖으로 나갈 수 있겠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이 도道로 말미암지 않는 것인가?" - 《논어論語》<옹야雍也>

子曰:"雖能出不由戶?何莫由斯道也?"

문은 시작이고 끝이다. 문을 통하지 않으면 시작도 끝도 없다. 문은 통로라는 변하지 않는 하나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들어가든 나오든 문을 통해야 한다. 공자는 누구나 문을 통하는 것처럼 사람 역시 도로 말미암아야 한다고 말한다. 도로 말미암지 않으면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문을 통하듯 사람이 예를 지키고 도리를 다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공자는 말한다. 문은 우리에게 많은 이치를 알려준다.

 

현자를 만나고자 하면서도 도로써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마치 그 사람이 들어오기를 바라면서도 문을 닫아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저 의義는 길이요, 예禮는 문이다. 오직 군자만이 이 길을 따라갈 수 있고, 이 문을 통하여 드나들 수 있다. - 《맹자》<만장장구萬章章句> 下

欲見賢人而不以其道, 猶欲其入而閉之門也. 夫義路也. 門也, 惟君子, 能由是路, 出入是門也.

현명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문을 열어야 한다. 사람을 이해하고 싶다면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더 많은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생각의 문을 열어야 한다. 문을 닫으면 아무것도 만날 수 없다. 어디로도 갈 수 없다. 우리가 문을 걸어 닫고 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자물쇠를 채우고 경첩에 좀이 나도록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고, 문의 경첩은 좀먹지 않는다. - 《여씨춘추呂氏春秋

流水不腐,戶樞不蠹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다. 하지만 흐르는 물은 그 움직임으로 인해 맑음을 유지한다. 경첩이 좀먹지 않는 것은 항상 움직이기 때문이다. 움직인다는 것은 정체되어 있지 않음이다. 경첩이 움직이는 반경은 짧다. 아무리 커다란 문일지라도 경첩의 크기는 한정되고 경첩은 그 크기가 허락한 공간만을 움직인다. 그러나 반경이 짧다고 그 의미까지 좁아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곧 저것이요, 저것이 곧 이것이다. 저것에도 하나의 시是와 비非가 있고 이것에도 하나의 시와 비가 있다. 그렇다면 과연 저것과 이것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저것과 이것을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을 도추라 한다. 문짝의 지도리는 고리 속에 끼워져야 무궁에 응할 수 있다. 시 또한 하나의 무궁이요, 비 또한 하나의 무궁이다. 그러므로 밝음에 비추어 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것이다. - 《장자壯子》<제물론齊物論>

是亦彼也, 彼亦是也. 彼亦一是非, 此亦一是非. 果且有彼是乎哉? 果且无彼是乎哉? 彼是莫得其偶, 謂之道樞. 樞始得其環中, 以應无窮. 是亦一无窮, 非亦一无窮也. 故曰莫若以明.

경첩에는 이것과 저것이 함께한다. 경첩의 양 날개는 이것을 만들고 저것을 만든다. 그것은 경첩이 지도리라는 축을 중심으로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문을 열어야 하는 사람에게 문은 열리는 것이 옳다. 하지만 닫아야 하는 사람에게는 닫히는 것이 옳다. 열리는 것과 닫히는 것, 그 무엇 하나도 옳고 그름으로 시비를 가릴 수 없다. 그리고 그 둘은 갈라질 수 없다. 언제나 함께한다. 열고 닫음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그 반복은 또 무한한 가능성을 만든다. 정자는 지도리를 통해 도의 지도리는 옳고 그름, 참과 거짓의 대립을 초월한 경지임을 이야기한다.

 

무엇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다.

남겨진 물건,

남겨진 시간은 지금도 흐르고 있다.

버려두면 버려질 것이고,

생명을 부여하면 생명을 가질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송나라 사람 중에 손이 트지 않게 하는 약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대대로 세탁업에 종사했다. 한 손님이 약 만드는 방법을 백금百金에 사고자 하니 약을 가진 사람은 가족과 함께 의논하기를 "우리가 대대로 세탁업을 했지만 번 돈이 몇 푼에 불과한데, 이제 백금을 준다 하니 그것을 팝시다"라고 했다. 손님은 약 만드는 방법을 가지고 오나라로 가 오왕을 설득했다. 때마침 월나라와 전쟁이 있었는데 오왕이 그를 장수로 삼아 싸우게 했다. 오나라는 겨울은 월나라와 수전水戰을 벌였는데, 여기서 월나라를 대패시켰다. 그래서 오왕은 그를 제후로 삼았다. 손이 트지 않게 하는 방법은 한 가지이지만 어떤 사람은 이것으로 제후가 되고 어떤 사람은 세탁업을 면하지 못한 것은 쓰는 방법이 달랐기 때문이다. - 《장자》<소요유逍遙遊>

宋人有善爲不龜手之藥者, 世世以洴澼絖爲事. 客聞之, 請買其方以百金. 聚族而謀曰. "我世世爲洴澼絖, 不過數金. 今一朝而粥技百金, 請與之." 客得之, 以說吳王. 越有難, 吳王使之將, 冬與越人水戰, 大敗越人, 裂地而封之. 能不龜手, 一也. 或以封, 或不免於洴澼絖, 則所用之異也.

손이 트지 않게 하는 약은 한 가지다. 송나라 사람은 세탁업을 하며 손이 트는 것을 막는 데 그약을 썼다. 하지만 손님은 그 약의 다른 쓰임을 보았다. 그랬기에 백금을 주고 약의 비법을 사고자 했다. 손님은 그 약을 전쟁에서 군사력을 높이는 데 사용했고, 이후 제후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자투리 나무도 버려지면 그저 땔감이나 쓰레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자투리 나무의 쓰임을 찾으면 내 책상을 빛내는 소품이 된다.

 

겨울은 한 해가 남겨놓은 여분의 시간이다.

밤은 낮이 남겨놓은 여분의 시간이다.

비 오는 날은 맑은 날이 남겨놓은 여분의 시간이다. -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冬者歲之餘, 夜者日之餘, 陰雨者時之餘也.

동우에 의하면 삼여지설의 첫 번째는 겨울, 두 번째는 밤, 마지막은 비 오는 날이다. 동우는 이 시간이 마음으로 독서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했다. 한 해의 농사가 마무리되었기에 겨울은 한가로웠을 것이다. 지금처럼 전기가 온밤을 비춰주는 세상이 아니었기에 당시는 밤이 한가로웠을 것이다. 비가 오면 쉬는 일이 많았기에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한가로움을 채우는 것은 독서다.

 

가린다고 가려질까?

가리고 싶다고 가려질까?

잠시는 그렇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쉽게 가려지지 않았다.

송곳이 주머니를 뚫고 나오듯 포장지를 뜯고 나오는

나의 내용물들은 얇고 강퍅했고 부끄러웠다.

당당해지고 싶었는데,

삶은 늘 당당함을 비켜갔다.

 

교묘한 말과 아첨하는 빛을 띠는 자 중에 어진 자가 드물다. - 《논어》<학이學而>

巧言令色, 鮮矣仁.

공자가 《논어》에서 이 말을 한 것은 한 번이 아니다. <양화陽貨> 편에서도 '교언영색巧言令色'을 이야기하며 교묘한 말과 아첨하는 빛을 경계한다. 가구에서 사람을 현혹하는 것은 무늬목이 아니라 무늬목을 속이는 교묘한 말과 원목처럼 보이게 찍은 사진들, 잘 드러나지 않게 표기된 재질이다.

 

눈이 밝지 못하는 것은 흑백을 판별하지 못하는 것이고, 귀가 밝지 못하는 것은 소리의 청탁을 식별하지 못하는 것이며, 지력이 밝지 못하는 것은 이해득실의 한계를 판단하지 못하는 것이다. 눈이 흑백을 판별하지 못하는 상태를 맹盲이라 하고, 귀가 소리의 청탁을 식별하지 못하는 상태를 농聾이라 하며 지력이 사리분별을 바르게 할 수 없는 상태를 광狂이라 한다. 맹이 되면 환한 대낮이라해도 앞을 보지 못해 위태로운 곳을 피할 수 없고, 농이 되면 천둥소리도 듣지 못하며, 광이 되면 인세의 법령을 피할 만한 사고력이 없으므로 형벌의 화를 받게 된다. - 《한비자韓非子》<해로解老>

目不明則不能決黑白之分, 耳不聰則不能別清濁之聲, 智識亂則不能審得失之地, 目不能決黑白之色則謂之盲, 耳不能別清濁之聲則謂之聾, 心不能審得失之地則謂之狂, 盲則不能避晝日之險, 聾則不能知雷霆之害, 狂則不能免人間法令之禍.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전부가 아니고 들리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다. 보이고 들리는 것은 현상일 뿐이다. 그 현상 속에서 드러나지 않는 것을 찾아내는 힘이 통찰력이다.

 

장차 배신할 사람은 그 말에 부끄러움이 있고, 마음속에 의심이 있는 자는 그 말이 갈라진다. 길한 사람은 말이 적고, 조급한 사람은 말이 많다. 선을 속이는 사람은 그 말이 놀고, 지조를 잃은 사람은 그 말이 비굴하다. - 《주역周易》<계사전繫辭傳> 下

將叛者, 其辭慙, 中心疑者, 其辭枝, 吉人之辭, 寡, 躁人之辭, 多, 誣善之人, 其辭游, 失其守者, 其辭屈.

 

 

드러난 것에 단서가 있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감출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기미나 전조는 어디에나 있다. 단지 그것을 파악하지 못할 뿐이다. 겉을 통해 속을 알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언제나 달디단 말에 속아 땅을 치고 후회하는 일이 반복될 것이다.

 

공자가 말했다. "바탕이 꾸밈을 이기면 거칠어지고, 꾸밈이 바탕을 이기면 화려해진다. 꾸밈과 바탕이 조화를 이룬 뒤에야 군자라고 할 수 있다. - 《논어》<옹야>

子曰 :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

공자는 꾸밈과 바탕이 조화를 이루는 문질빈빈文質彬彬 연후에야 군자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바탕은 내용이고 꾸밈은 형식이다. 바탕은 속이고 꾸밈은 겉이다. 바탕이 착한 사람도 예를 모르면 거칠어 대하기 힘들고 잘 꾸민 사람이라도 그 속이 검으면 함께할 수 없다. 본성의 바탕에 예를 갖추어야 비로소 군자가 된다.

 

나는 쉽게 한정지었다.

하나의 면을 보면 그 하나의 면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보는 세상은 늘 흑백의 평면이었다.

나는 평면 속에서 입체를 찾았고

흑과 백의 세상에 나만의 색이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게 잘못이었다. 나는 나무를 통해 달리 보는 법을 알았다.

그것을 가죽나무가 알려주었다.

 

맹자가 고자에게 일러 말했다. "산속의 작은 길도 많이 다니면 큰길이 되지만 잠시 다니지 않으면 곧 띠(풀)가 우거져 막혀버리는 법이거늘, 이제 그 띠가 자네 마음을 막아버렸구나." - 《맹자》<진심장구盡心章句> 下

孟子謂高子曰 : "山徑之蹊間, 介然用之而成路, 爲間不用則茅塞之矣, 茅塞子之心矣

걷지 않으면, 길은 없어진다. 금방 띠가 우거져 길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된다. 문제는 마음의 길도 그렇다는 데 있다. 마음에도 길이 있고 생각에도 길이 있다. 그 길도 가지 않으면 띠가 우거지듯 막히고 굳어버린다. 굳은 마음, 막힌 생각은 더 이상 새로움을 품지 못한다. 굳어버린 마음으로 사물과 세상을 대하면 참혹한 일상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혜자가 장자에게 일러 말했다. "나에게 커다란 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가죽나무라고 합니다. 큰 줄기에는 옹종이 있어 먹줄을 댈 수 없고, 작은 가지는 꼬불꼬불 구부러져 규규로 잴 수 없으니 땅 위에 서 있기는 하나 장인이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선생의 말도 크기는 하지만 아무 쓸데가 없으니 사람들이 모두 피합니다."

장자가 말했다. "당신만 혼자 살쾡이를 보지 못했군요. 몸을 낮추어 먹이를 기다리다 동서로 뛰어오르며 높고 낮은 곳을 가리지 않다 덫이나 그물에 걸려 죽습니다. 그런데 이우라는 소는 그 크기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만 한데, 이 소가 그렇게 커도 쥐를 잡지 못합니다. 당신은 큰 나무가 있지만 그것을 쓸데가 없어 고민한다 합니다. 어째서 그 나무를 이무것도 없는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 광막한 들에 심으려 하지 않습니까? 그 나무 주위를 아무 할 일 없이 방황하고 소요하면서 그 아래 누워 잘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까? 그렇게 하면 도끼에 의해 잘리지도 않을 것이며 어떤 것에도 해로움이 없을 것인데, 어찌 쓸데가 없음을 괴로워한단 말입니까?" - 《장자》<소요유>

惠子謂莊子曰 : "吾有大樹, 人謂之樗, 其大本擁腫而不中繩墨, 其小枝卷曲而不中規矩, 立之塗, 匠者不顧. 今子之言, 大而無用, 衆所同去也. "

莊子曰 : "子獨不見狸狌乎? 卑身而伏, 以候敖者, 東西跳梁, 不避高下, 中於機辟, 死於罔罟, 今夫斄牛, 其大若垂天地雲, 此能爲大矣, 而不能執鼠. 今子有大樹, 患其无用, 何不樹之於無何有之鄕, 廣莫之野, 彷徨乎無爲其側, 逍遙乎寢臥其下. 不夭斤斧, 物无害者, 無所可用, 安所困苦哉."

살쾡이는 먹이를 잡는 자신의 능력 때문에 이리저리 뛰다가 죽는다. 이우라는 소는 아무리 커도 쥐를 잡지 못한다. 그 자신의 효용이 때로는 자신을 죽이는 일이 되고, 사람들이 큰 효용이 있다 여기는 것도 쓸모없을 때가 있다. 하나의 사물에는 언제나 다른 면이 있다.

혜자에게 구부러지고 옹종 많은 가죽나무는 자리만 차지하는, 쓸모없는 사물에 불과했다. 그래서 혜자는 가죽나무를 무용無用이라 했다. 치수를 재고 재단을 해서 길고 널찍한 판자로 만들어야 무엇이든 만들 수 있을 텐데, 가죽나무로는 그럴 수 없었다. 가지가 하도 꼬부라져 치수를 잴 수 없었다. 옹종이 많아 먹줄을 댈 수 없고 톱으로 자르기도 힘이 드니 장인들은 아예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은 혜자의 생각일 뿐이었다.

 

송나라에 형씨荊氏들이 사는 곳이 있었다. 가래나무, 잣나무, 뽕나무가 많아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그것이 한두 줌 이상 크면 원숭이 말뚝으로 베어 가고, 서너 아름이 되면 고관 집 용마룻감으로 베어 가고, 일고여덟 아름이 되면 귀인댁 · 부잣집의 널판자감으로 베어 간다. 그래서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중도에 도끼에 찍혀 죽고 만다. 이것이 쓸모 있는 재목들의 환난이라는 것이다. - 《장자》<인간세人間世>

宋有荊氏者, 宜楸柏桑, 其拱把而上者, 求狙猴之, 杙者斬之. 三圍四圍, 求高名之麗者斬之,  七圍八圍, 貴人富商之家, 求樿傍者斬之. 故未終其天年, 而中道之夭於斧斤, 此材之患也.

가죽나무는 그 모습으로 인해 살아남는다. 굵고 곧은 나무들은 목재를 만들려는 사람들에게 찍히고 베어진다. 하지만 가죽나무는 장인에게 쓸모없음으로 인해 살아남았다. 장인에게 쓸모없음이 가죽나무에게 쓸모없음이 가죽나무에게는 생존의 조건이 되었다.

 

장님에게는 아름다운 무늬를 보일 필요가 없고 귀머거리에게는 음악소리가 필요 없다. 어찌 육체적으로만 장님과 귀머거리가 있겠나. 정신면에서도 그런 것이 있다. - 《장자》<소요유>

瞽者无以與文章之觀, 聾者无以與乎鍾鼓之聲. 豈唯形骸有聾盲哉? 夫知亦有之.

볼 수 있는 눈이 없는 사람에게 아름다운 무늬는 무의미하다. 들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음악이 필요치 않다. 그것은 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보고 통찰하고 듣고 이해하는 생각과 마음이 없다면 그 사람은 생각의 장님이며 마음의 귀머거리일 것이다. 생각의 눈을 뜨고 마음의 귀를 열지 않으면 그려진 선을 따라 색을 채우는 일밖에 할 수 없다.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방안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저기 바깥에 있는데,

혼자서는 어디도 갈 수 없었다.

이 나무는 이렇게 많은 조각이 모여 넓디넓은 면을 이루는데,

나는 어디 한 조각도 되지 못한 채

따로 떨어져 있었다.

 

제나라 선왕이 물었다. "문왕의 동산이 사방 70리라고 하는데 그런 일이 있습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옛 기록에 그러한 것이 있습니다."

제 선왕이 말했다. "그처럼 컸습니까?"

맹자가 말했다. "백성들은 오히려 작다고 여겼습니다."

제 선왕이 말하기를, "과인의 동산은 사방 40리인데도 백성들이 오히려 크다고 여기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맹자가 말했다. "문왕의 동산은 사방 70리이지만 꼴 베고 나무하는 사람과 꿩 잡고 토끼 잡는 사람과 함께 썼으니 작다고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 《맹자孟자》<양혜왕梁惠王> 下

齊宣王問曰 : "文王之囿, 方七十里, 有諸."

孟子對曰 : "於傳 有之. 曰, 若是其大乎. 曰, 民猶以爲小也."

曰 : "寡人之囿, 方四十里, 民猶以爲大, 何也."

曰 : "文王之囿, 方七十里, 芻蕘者往焉, 雉兔者往焉, 與民同之, 民以爲小, 不亦宜乎."

제나라 선왕은 주나라의 성군이라 일컬어지는 문왕보다 자신이 더 낫다며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문왕의 동산은 70리이지만 자신은 40리에 불과하다고 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 중요한 것은 동산의 크기가 아니었다. 문왕의 동산은 70리였지만 그 동산을 백성과 함께 썼기에 백성들은 그것을 작다 여겼다. 제 선왕의 동산은 40리이지만 왕 혼자 그것을 썼기에 백성들은 그것이 크다고 여겼던 것이다.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에 집중되어 있다. 그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수레바퀴의 유용성이 있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든다. 그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그릇의 유용성이 있다. 지게문과 창문을 뚫어 방을 만든다. 그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집의 유용성이 잇다. 그러므로 무엇인가 있는 것에서 이로움을 얻는 것은 그것의 아무것도 없는 유용성이 근본에 있기 때문이다. - 《도덕경》 11장

三十輻共一穀, 當其無有車之用, 埏稙以爲器, 當其無有器之用, 鑿戶牖以爲室, 當其無有室之用,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통으로 된 바퀴는 얼마 가지 않아 부서지고 말 것이다. 그릇을 만드는 이유는 그릇에 무엇인가를 채우기 위함이다. 집을 짓고 방을 만드는 것 역시 그 안에 들어가 살기 위함이다. 유형의 무언가를 만드는 것은 그 안의 비어 있는 공간을 얻기 위함이다.

 

공자가 말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 《논어》<이인里仁>

子曰 : "德不孤 必有鄰."

잠시 외로울 수 있다. 그러나 덕을 갖춘 사람에게는 그를 따르는 사람이 있고 그와 함께해 주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들과 더불어 덕은 더욱 퍼져나가고 빛이 난다.

 

후회하고 참담해하고 의심하고 돌아보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삶이란 오차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편차를 줄여나가는 과정이다.

가끔 내가 어디로 가고있는지 반문할 때까 있다.

내 삶의 각도를 물을 때도 있다.

구부러지고 경사져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울 때도 잇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본다.

내가 어디쯤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덕으로 정치를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북극성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어 뭇 별들이 그를 둘러싸고 도는 것과 같다. - 《논어論語》<위정爲政>

爲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 而衆星共之.

공자는 정치를 별자리에 비유했다. 덕이라는 것은 북극성처럼 정치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지고의 가치다. 북극성은 또한 지극함을 의미한다. 지극한 덕으로 다스릴 때 백성은 평안해지고 나라는 부강해진다.

 

공손추가 물었다. "백이와 이윤은 어떠하였습니까?"

맹자가 말햇다. "갖지 않았다. 자기 임금이 아니면 섬기지 아니하고 자기 백성이 아니면 부리지 아니하며 나라가 태평하면 나아가 벼슬하고 혼란하면 물러나 들어앉는 것이 백이였다.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고 누구를 부린들 백성이 아니겠나, 하며 나라가 태평해도 나아가 벼슬하고 혼란해도 나아가 벼슬하는 것이 이윤이었다. 나아가 벼슬할 만하면 벼슬하고, 그만두어야 할 만하면 그만두며, 오래 있을 만하면 오래 머물고 빨리 떠날 만하면 빨리 떠나가는 것이 공자였다. 이들은 다 성인이었다. 나는 아직 그렇게 할 수 없지만 공자를 본받는 것이 소원이다." - 《맹자孟子》<공손추公孫추丑> 上

曰 : "伯夷伊尹何如."

曰 : "不同道, 非其君不事, 非其民不使, 治則進, 亂則退, 伯夷也. 何事非君, 何使非民, 治亦進 亂亦進, 伊尹也. 可以仕則仕, 可以止則止, 可以久則久, 可以速則速, 孔子也. 皆古聖人也, 吾未能有行焉, 乃所願則學孔子也."

은나라 고죽국 왕자였던 백이는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하자 그것은 인의仁義가 아니라며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했다. 그러나 한 포기 고사리 역시 주나라 땅의 것이라며 굶어 죽었다. 이윤은 상나라를 건국한 탕왕을 도와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탕의 아들인 외병과 중임을 연달아 모셨다. 그러나 탕의 손자인 태갑이 왕위에 올라 정사를 돌보지 않자 태갑을 축출하고 3년간 정사를 돌보았다. 하지만 태갑이 뉘우치자 다시 자리를 돌려주었다. 백이와 이윤은 명분이 다르다. 북극성도 다르다. 백이는 어떻게 오른 왕인가를 실천의 지침으로 삼았고 이윤은 왕이 누구인지가 아니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에 집중했다. 비슷한 상황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했지만 맹자는 백이와 이윤을 성인이라 칭했다.

 

톱을 들 때면 두려움이 앞선다.

톱질은 인생의 행로와 같고 그래서 또 방황이다.

톱은 자신의 길을 가려 하고 나는 곧게 뻗은

연필 선을 따라 톱을 움직이고 싶다.

어르고 달래보아도 톱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

으름장을 놓으면 톱은 도리어 어깃장을 놓는다.

 

자신을 바르게 하고 남에게 구하지 않으면 곧 원망이 없으니, 위로는 하늘을 원망치 아니하고 아래로는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 까닭에 군자는 쉬움에 거하며 명命을 기다리고, 소인은 위험을 행하며 요행을 기대한다. 공자는 활쏘기는 군자와 비슷함이 있으니 정곡을 잃으면 돌이켜 그 자신에게서 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 《중용中庸》

正己而不求於人, 則無怨, 上不怨天, 下不尤人. 故君子居易以俟命, 小人行險以徼幸. 子曰射有似乎君子, 失諸正鵠, 反求諸其身.

공자는 활쏘기와 군자에 비슷함이 있다고 했다. 활을 쏜다. 명중시킬 줄 알았던 화살이 과녁을 비켜간다. 그것이 어디 활과 과녁의 탓이랴. 활의 강도에 따른 비거리와 바람의 방향, 그리고 과녁의 위치를 계산하지 못한 탓이리라. 정확히 조준하지 않았기에 화살은 과녁을 벗어난다. 아니면 다른 변수를 극복할 수 있을  만큼 강한 힘을 활에 싣지 못한 탓이다. 조준을 한 사람, 활을 쏜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자신이다.

 

사물의 이치가 궁구된 뒤에야 앎에 이르고, 앎에 이른 뒤에야 뜻이 정성스럽게 되고, 뜻이 정성스러워진 뒤에야 마음이 바르고, 마음이 바른 뒤에야 자신의 덕이 닦이고, 자신의 덕이 닦인 뒤에야 집안이 정돈되고, 집안이 정돈된 뒤에야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진 뒤에야 천하가 화평케 될 것이다. - 《대학大學》

物格而后知至, 知至而后意誠, 意誠而后心正, 心正而后身修, 身修而后家齊, 家齊而后國治, 國治而后天下平.

격물은 사물의 참된 모습을 밝힌다는 것이고, 치지란 그로써 사물의 이치를 알게 됨을 의미한다. 사물에 부딪혀 이치를 파악한 후에야 뜻은 정성스러워진다. 정성스럽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에 마음을 쏟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뜻을 두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알고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하는 것이다. 정성스러워지면 마음이 바르게 된다. 이렇게 자신을 닦아가야 천하를 화평케 하는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다.

 

"제가 좋아하는 바는 도道로, 그것은 기술에 앞섭니다. 처음 제가 소를 해체할 때는 눈에 소 이외에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3년 후에는 소가 보이지 않았고 지금에 이르러 저는 영감으로써 대할 뿐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관은 멈춰버리고 영감만 작용하고 있습니다. 뼈와 살이 붙어 있는 틈을 젖히는 것이나 뼈마디에 있는 큰 구멍에 칼을 집어넣는 것이나 모두 자연의 이치를 따릅니다. 뼈와 살이 합틴 곳에서는 칼이 걸린 적이 한 번도 없는데 하물며 큰 뼈에 부딪치는 일이야 있겠습니까? 훌륭한 포정은 1년에 한 번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살을 베기 때문이며, 일반 포정은 한 달에 한 번 칼을 바꾸니 그것은 뼈에 칼이 부딪쳐 칼이 부러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칼을 19년 동안이나 썼고 또 잡은 소도 수천 마리나 되지만 그 칼날은 지금 막 새로 숫돌에다 간 것 같습니다. 저 뼈에는 틈이 있고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틈이 있는 데 넣으므로 넓고 넓어 그 칼날을 휘둘러도 반드시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19년이나 되었어도 그것은 막 숫돌에다 갈아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막상 뼈와 심줄이 한데 얽힌 곳을 만났을 때는 저도 그 다루기 어려움을 보고 조심하여 곧 눈길을 멈추고 행동을 천천히 하며 칼을 놀리는 것도 매우 미묘해집니다. 그러다가 쩍 갈라지면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듯 고기가 와르르 떨어집니다. 그때야 칼을 들고 일어서서 사방을 바라보며 머뭇머뭇 만족해하며 칼을 잘 닦아 집어넣습니다." - 《장자壯子》<양생주養生主>

臣之所好者, 道也, 進乎技矣, 始臣之解牛之時, 所見无非全牛者. 三年之後, 未嘗見全牛也. 方今之時,  臣以神遇, 而不以目視, 官知之而神欲行, 依乎天理, 批大卻, 導大窾, 因其固然, 枝經肯綮之未嘗, 而況大軱乎. 良包歲更刀, 割也, 族包月更刀, 折也, 今臣之刀十九年矣, 所解數千牛矣, 而刀刃若新發於硎, 彼節者有閒, 而刀刃者無厚, 以無厚入有閒, 恢恢乎其於遊刃, 必有餘地矣. 是以十九年, 而刀刃若新發於硎, 雖然, 每至於族, 吾見其難爲, 怵然爲戒, 視爲止, 行爲遲, 動刀甚微, 謋然已解, 
如士委地, 提刀而立, 爲之四顧, 爲之躊躇滿志, 善刀而藏之.

문혜군은 포정의 말을 듣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이니 포정에게서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하고 병에 걸리지 않는 양생법을 배웠다고 했다. 포정이 베고 자른 것이 단지 고기뿐이었을까? 고기를 자르는 포정에게서 나는 베고 자르며 살아가야 하는 삶의 도리를 본다. 결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은 순리를 따름이다. 틈이 없어 보이는 그 작은 공간에서도 포정은 칼이 여유 있게 놀 수 있는 여지를 발견한다. 그러나 뼈와 심줄이 얽힌 곳에서는 결만 따라 움직일 수 없다. 잘라내야 한다. 잘라내는 것은 또한 칼의 이치다. 하지만 칼을 상하지 않게 잘라내기 위해서는 손을 미묘하게 움직여야 하고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새가 바람을 역행하고 물고기가 물살을 거슬러도 몸을 해하지 않는 것과 같다.

 

나사의 크기가 다르다.

그러면 다른 크기의 비트를 끼운다.

나사의 모양이 다르다.

그러면 다른 모양의 비트를 끼운다.

삶에서 부딪히는 상황과 맥락은 모두 다르다.

우리는 어떤 비트를 준비해야 할까?

정밀하고 한결같아야 진실로 그 중中을 잡을 수 있다.

 

군자는 때에 맞게 처신한다. 이는 즉, 중中을 잡는 것을 이른다. 천년이 흘러도 부절이 꼭 들어맞는 것처럼 그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 - 《중용장구中庸章句》

君子時中, 則執中之謂也, 世之相後, 千有餘年, 而其言之不異, 如合符節.

관리의 신표, 그것이 부절符節이다. 옛날, 특히 중국의 사신은 부절을 가지고 있었다. 부절은 온전한 하나의 형체가 아니었다. 옥이나 대나무로 만든 신표에 증인을 찍고 이를 둘로 갈랐다. 하나는 자신이 가지고 다른 하나는 조정에 보관했다. 하나에서 나와 둘이 되었으니 그 둘은 꼭 맞았다. 부절이 꼭 들어맞는 것처럼 세상에는 들어맞아야 할 것이 있다.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들어맞아야 한다. 나아가야 할 때 나아가고,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야 한다. 일은 때에 들어맞아야 하고 나와 나의 사명이 들어맞아야 한다. 문제는 들어맞지 않을 때 생긴다. 그 들어맞음이 중용中庸이다.

 

군자의 도는 광대하면서도 은미하다. 필부의 어리석음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지극함에 이르면 비록 성인일지라도 또한 알지 못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필부의 불초함으로도 가히 행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비록 성인일지라도 또한 할 수 없는 바가 있는 것이다. - 《중용》

君子之道, 費而隱, 夫婦之愚, 可以與知焉, 及其至也, 雖聖人, 亦有所不知焉, 夫婦之不肖, 可以能行焉, 及其至也, 雖聖人, 亦有所不能焉.

은미하다는 것은 아주 미세하다는 것이다. 군자의 도는 아주 크고 또한 아주 작다. 우리 삶에는 쉽게 행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원칙과 신념도 그렇다. 하지만 그것이 아주 커지면 행하기 어려운 일이 된다. 반대로 그것이 아주 작은 부분에까지 미치면 성인도 행할 수 없는 부분이 된다. 거짓을 말하지 않고자 하는 일이 부와 명예를 넘어 목숨에까지 이르면 할 수 없는 큰일이 되고 그것이 모든 생활의 세세한 부분으로 옮겨가면 또한 하기 힘든 일이 된다. 사람은 눈앞의 것을 보지만 그 분자구조까지는 볼 수 없고 또 멀리는 우주를 바라볼 수 없다.

 

희노애락이 나타나지 않은 것을 중이라 하고 나타나서 모두 절節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 중은 천하의 대본大本이요, 화는 천하의 달도達道다. 중과 화에 이르면 천지가 자리 잡히며 만물이 자란다. - 《중용》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어떠한 치우침이 없는 상태가 중이다. 사사로운 감정이나 개인의 이익에 치우치지 않으면 공정할 수 있다. 그것이 그 상황과 맥락에 꼭 들어맞게 발산되면 어울림의 화和가 된다. 그럼 천지를 평안케 하는 지극함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자로가 물었다.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합니까?"

공자가 말했다. "아버지와 형이 계시는데 어떻게 듣는다고 바로 행할 것이냐?"

염유가 물었다.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합니까?"

공자가 말했다.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할 것이다."

공서화가 말했다. "유(자로의 이름)가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합니까' 하니 선생님께서는 '아버지와 형이 계시지 않느냐'고 하셨지만 구(염유의 이름)가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합니까' 하고 물으니 선생님께서는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아 감히 묻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구는 물러서는 까닭에 나아가게 한 것이고 유는 남들과 함께하는 까닭에 물러서게 한 것이다. - 《논어》<선진先進>

子路問 : "聞斯行諸?"

子曰 : "有父兄在, 如之何其聞斯行之?"

冉有問 : "聞斯行諸?"

子曰 : "聞斯行之."

公西華曰 : "由也問, '聞斯行諸', 子曰 : '有父兄在.' 求也問, '聞斯行諸?'.

子曰 : '聞斯行之.' 赤也惑, 敢問."

子曰 : "求也退, 故進之. 由也兼人, 故退之."

같은 모양이라도 홈이 크면 큰 비트를 쓰고 홈이 작으면 작은 비트를 쓴다. 공자의 말은 컵에 물을 붓고 따르는 일과 같다. 유는 너무 적극적이라 무모할 염려가 있었고 구는 소극적이어서 실천에 약했다. 그리하여 공자는 적극적인 자로는 가라앉히고 소극적인 염유는 북돋아주려 했던 것이다. 하나의 물음에 대한 공자의 답은 다르다. 공자는 중을 지키고 있다.

 

그들이 떠난 것일까, 아니면 내가 떠나 보낸 것일까?

나는 나의 실수로 상처받고

또 나의 실수로 상처를 주었다.

실수이전에 기미가 있었건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실수를 했으면 고쳐야 했는데 그것조차 하지 않았다.

이젠 더 이상 반복하지 않으려 한다.

사람에게 희망이 있는 것은 잘못된 역사를

거울로 삼을 수 있기 때문아니겠나.

 

행하면서도 뚜렷이 알지 못하며 익히고서도 자세히 살피지 않는지라 죽을 때까지 따라가면서도 그 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 《맹자》<진심盡心> 上

行之而不著焉, 習矣而不察焉. 終身由之, 而不知其道者, 眔也.

앵무새는 자신의 말을 하지 않는다. 누군가 한 말을 따라 한다. 무엇을 행함에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면 앵무새의 말과 무엇이 다르겠나. 따라 하는 것은 익히는 것이 아니다. 흉내를 내는 것이다. 무언가를 익혔다 하더라도 그게 끝이 아니다. 끊임없이 살피며 생각하여 익힘을 단단히 해야 한다.

 

사람이란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어서는 안 된다. 부끄러워할 것 없음을 부끄러이 여긴다면 부끄러움이 없게 될 것이다. - 《맹자》<진심> 上

人不可以無恥, 無恥之恥, 無恥矣.

모른다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부끄러움을 감추려 하고 부끄러움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이 진정 부끄러운 일이다. 부끄러움을 알면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게 된다. 최소한 고치려는 노력은 할 수 있다.

 

소인은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꾸민다. - 《논어》<자장子張>

小人之過也必文.

잘못을 덮으면 잠시는 괜찮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잘못은 눈덩이처럼 불어 더 큰 재앙을 일으킨다. 마치 하인리히법칙처럼 말이다. 잘못을 저지르면 그 잘못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먼저 생각해야 한다.

 

공자가 말했다. "유야, 너는 여섯 가지 말과 그에 따른 여섯 가지 폐단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느냐?"

자로가 대답했다.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앉아라. 내가 너에게 말해 주겠다. 어진 것을 좋아하지만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어리석음이다. 지혜를 좋아하지만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방탕이다. 신의를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도적의 무리를 이루는 것이다. 곧음을 좋아하지만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가혹함이다. 용기를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굳세기를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과격함이다." - 《논어》<양화陽貨>

子曰 : "由也, 女聞六言六蔽矣乎?"

對曰 : "未也."

"居. 吾語女好仁不好學, 其蔽也愚, 好知不好學, 其蔽也蕩, 好信不好學, 其蔽也賊, 好直不好學, 其蔽也絞, 好勇不好學, 其蔽也亂, 好剛不好學, 其蔽也狂.   

유는 공자의 제자인 자로의 이름이다. 공자는 자로에게 배우지 않아 일어나는 여섯 가지 폐단에 대해 말한다. 어짊을 좋아하고 지혜를 좋아하고 신의를 좋아해도 배우지 않으면 폐해가 많다. 곧기만 해서는 살 수 없다. 맥락을 파악하고 넓게 보기 위해서는 배우고 생각해야 한다. 정해진 법에 따라 형량을 판결하는 판사도 그 상황을 살핀다.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장발장은 무려 19년 동안 감옥살이를 한다. 곧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가혹하게 된다. 그리고 배우며 생각해야 한다.

 

변하는 세상에서도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

나도 한결같은 사람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삶의 태도, 자세, 생각 그런 모든 것들에서 나는 쉽게 나를 합리화했다.

자는 달라지지 않건만,

나는 매일 규격이 다른 자를 가졌구나.

 

위에서 싫어하는 것을 아래에 베풀지 말고 아래에서 싫어하는 것으로 위를 섬기지 말며, 앞에서 싫어하는 것을 뒤에 먼저 하지 말고 뒤에서 싫어하는 것을 앞에서 따르게 하지 말며, 오른편에서 싫어하는 것을 왼편에 건네지 말고 왼편에서 싫어하는 것을 오른편에 건네지 않으니 이를 혈구지도라 한다. - 《대학》

所惡於上, 毋以使下, 所惡於下, 毋以事上, 所惡於前, 毋以先後, 所惡於後, 毋以從前, 所惡於右, 毋以交於左, 所惡於左, 毋以交於右, 此之謂絜矩之道.

내가 싫어하는 것은 다른 이도 싫어한다. 그럼 내가 싫어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 있을까? 반대로 내가 싫어하는 것을 누가 내게 시킨다면 어떨까?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잊고 내가 싫어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미룬다. 그러지 않는 것이 하나의 도이다. 그 도를 일러 '혈구지도絜矩之道'라 한다.

 

대저 인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서고자 함으로 남을 세우고 자신이 달하고자 함으로 남을 달하게 한다. 가까운 곳에서 깨달음을 취하는 것을 가히 인의 방법이라 할 것이다. - 《논어》<옹야雍也>

夫人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能近取譬, 可谓仁之方也已.

인이란 과시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먼저 바르게 섬으로써 다른 사람을 바르게 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먼저 달하려고 노력하고 또 달함으로써 상대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멀리 있지 않다. 생활 모습에서, 생각 모습에서 시작할 수 있다.

 

천하를 화평케 함은 그 나라를 다스림에 달려 있다. 위에서 노인을 노인으로 대접하면 백성들 사이에 효가 일어날 것이고, 위에서 어른을 어른으로 대접하면 백성들 사이에서 공경이 일어날 것이며, 위에서 고아를 궁휼히 여기면 백성들은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 혈구지도라 한다. - 《대학》

所謂平天下在治其國者, 上老老而民興孝, 上長長而民興弟, 上恤孤而民不倍, 是以君子有絜矩之道也.

노인을 노인으로, 어른을 어른으로 대접하고 어려운 사람을 돌아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당연한 일은 당연하게 행해지지 않는다. 내 아버지를 대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아버지를 대하고 내 동생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후배들을 아끼라고 말한다. 그것 역시 자신을 미루어 타인에게 미치게 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행동이다.

 

난 먼 미래에 대해 환상을 갖고 살았다.

그런데 그렇게 될 꿈만 꾸었지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

한 번의 대패질로는 매끈한 나무의 면을 얻을 수 없건만

하루의 삶으로 미래가 그려지기를 바랐다.

지금 이 순간이 한 번의 대패질, 오늘 하루가 또 한 번의 대패질.

그렇게 대패질을 하고 싶다.

 

짐승의 가죽에서 그 털을 없앤 것을 혁이라고 한다. 혁은 고친다는 뜻이다. -《설문해자說文解字》

獸皮治法其毛曰革, 革, 更也

가죽은 그대로 사용할 수 없다. 원상태의 가죽은 쉽게 부패한다. 물이 닿으면 팽창하고 마르면 딱딱하게 굳어 쓸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불필요한 성분을 제거하고 가죽을 부드럽게 하는 부두질을 피할 수 없다. 무두질이 있고 나서야 가죽은 비로소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존재로 바뀐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 바다를 말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장소에 구애되기 때문이요, 매미에게 얼음을 말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때에 굳어 잇기 때문이요, 편벽된 선비에게 도를 말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가르침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 《장자》<추수秋水>

井蛙不可以語于海者, 拘于虛也, 夏蟲不可以語與冰者, 篤于時也, 曲士不可以語于道者, 束于教也.

우물 안 객리를 '정저지와井底之蛙'라 한다. 우물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아니 우물 밖 세상을 이야기해도 믿지 못하고 거짓이라 생각한다. 하나의 고착된 이미지에 빠진 사람은 누군가 다른 일면을 말해주어도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자기가 모르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려 하지 않고 경험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시 자신의 생각과 다름이 잇어 자신이 무너질까 두려워한다.

 

해가 가면 달이 오고 달이 가면 해가 오니 해와 달이 서로 밀어 밝아진다. 추위가 가면 더위가 오고 더위가 가면 추위가 오니 추위와 더위가 서로 밀어 한 해를 이룬다. 가는 것은 굽히는 것이고 오는 것은 펴는 것이니 굽힘과 폄이 서로 교감하여 이로움을 만든다. 벌레가 굽히는 것은 펴기 위함이고 용과 뱀이 숨는 것은 몸을 보존하기 위함이며 은미한 사물의 이치를 신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은 쓰이기 위함이다. 이롭게 사용하여 몸을 편안하게 함은 덕을 높이는 것이다. - 《주역周易》<계사전繫辭傳> 下

日往則月來, 月往則日來, 日月相推而明生焉, 寒往則暑來, 暑往則寒來, 寒暑相推而歲成焉, 往者屈也, 來者信也, 屈信相感而利生焉, 屈伏伸張, 尺蠖之屈, 以求信也, 龍蛇之蟄, 以存身也, 精義入神, 以致用也, 利用安身, 以崇德也.

어느 한쪽으로만 가는 것은 없다. 겨울은 가는 것이고 봄은 오는 것이다. 가기만 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고 오기만 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내가 중심에 있으면 가는 것이 있고 오는 것이 있다. 세상 사는 것 역시 밀고 당기고 펴고 굽히는 것이다. 그 이치를 모르면 막막하기만 하고 보는 것만을 보게 되어 하나의 인간형으로 자신을 고착화하고 말 것이다.

 

때로는 틀리고 때로는 다르다.

틀린 것은 고치면 되지만 다른 것까지 고쳐야 할까?

나는 수많은 틀린 사람과 사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다른 사람과 살고 있다.

다름과 틀림을 혼동하지 않고 싶다.

나도 살고 너도 사는 그런 세상이고 싶다.

 

사람이 습기 많은 곳에서 자면 허리에 병이 생겨 죽는데, 미꾸라지도 그러한가? 사람이 높은 나무 위에 오르면 두렵고 떨리는데, 원숭이도 그러한가? 사람과 미꾸라지와 원숭이가 사는 세 자리 중 어느 것이 바른 자리인지 누가 알 수 있나? 사람은 채소와 육류를 먹고, 사슴과 노루는 풀을 뜯어먹으며, 지네는 실뱀을 먹고 독수리나 까마귀는 쥐를 즐겨 먹는데, 이 네 가지 먹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진정한 맛인지 누가 알 수 있나? 원숭이는 자신과 비슷한 원숭이와 짝을 짓고, 사슴은 노루와 놀고, 미꾸라지는 다른 물고기와 함께 노닌다. 모장과 여희는 사람들이 아름답다 하지만 물고기가 이들을 보면 물속 깊이 들어가고 새는 이들을 보면 높이 날며 사슴은 이들을 보고 자신즐 무리 속으로 들어간다. 이 네 가지 가운데 무엇이 진정 아름다운 것인지 누가 알 수 있는가? - 《장자》<제물론齊物論>

民濕寢則腰疾偏死, 鰌然乎哉? 木處則惴栗恂懼, 猿猴然乎哉? 三者孰知正處? 民食芻豢, 麋鹿食薦, 蝍蛆甘帶, 鴟鴉嗜鼠, 四者孰知正味? 猿, 猵狙以爲雌, 麋與鹿交, 鰌與魚遊, 毛嬙麗姬, 人之所美也, 魚見之深入, 鳥見之高飛, 麋鹿見之決驟, 四者孰知天下之正色哉? 自我觀之, 仁義之端, 是非之塗, 樊然淆亂, 吾惡能知其辯.

사람이 좋아하는 자리와 미꾸라지, 원숭이가 좋아하는 자리는 다르다. 사람이 먹는 것과 사슴과 독수리가 먹는 것은 다르다. 따라서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미꾸라지와 원숭이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좋지 않은 것이다. 모장과 여희는 당시 최고의 미인으로 꼽히던 아름다움의 표상이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사람에게 국한된다. 사람의 눈에 아름다운 것이지 물고기의 운에도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내 기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사람과 동물 사이에 다름이 있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다름이 있다.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화합하되 동하지 아니하고 소인은 동하되 화합하지 않는다." - 《논어論語》<자로子路>

子曰 :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화합하되 동하지 않는 것이 화이부동和而不同이고 동하나 화합하지 않는 것이 동이불화同而不和다. 군자는 화이부동하고 소인은 동이불화한다. 화이부동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과 생각이 같지 않아도 화합하여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다. 반대로 동이불화는 밖으로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은 다른 사람들과 화합하지 못하는 것이다.

 

멀리 잇다고 말한다.

너무 멀어 갈 수 없다고 포기한다.

먼곳에 있지 않다.

바로 옆에 있다.

단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

내 안에, 내 주위에 내가 필요로 하는 그것이 있다.

그것을 잡으면 갈 수 있

그것을 잡지 못하면 또 헤매야 한다.

 

공자가 말했다. "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않다. 사람이 도를 행하되 사람과 멀리 한다면 도가 될 수 없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도끼 자루를 찍어내나니 그 법은 멀지 않다'고 했다. 도끼 자루를 잡고서 도끼 자루를 찍어내되 흘끔 쳐다보고 오히려 멀다고 생각한다." - 《중용中庸》

子曰 : "道不遠人, 人之為道而遠人, 不可以為道, 詩云, 伐柯伐柯 其則不遠. 執柯以伐柯, 睨而視之, 猶以為遠."

도끼 자루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찍어낸다. 나무가 도끼 자루의 모습을 갖추자 들어 흘끔 쳐다본다. 그런데 도끼 자루가 어때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더 잘라내고 파내면서도 도끼 자루를 모른다. 자신의 손에 도끼 자루를 들고 잇으면서도 도끼 자루의 모습을 생각해내지 못한다. 마치 의자에 앉아서 의자의 높이를 고민하는 것처럼 말이다.

 

맹자가 말했다. "구하면 그것을 얻고 버리면 그것을 잃나니, 이 구한다는 것이 얻는 바에 더해지는 것은 자신에게 있는 것을 구하기 때문이다. 구하는 데 도가 있고 얻는 것에 명이 있으니 이 구하는 것에 얻는 바가 없는 것은 밖에서 그것을 구하기 때문이다."

맹자가 말했다. "만물이 모두 내게 갖추어져 있으니 반성하여 성실해지려고 하면 이만큼 큰 기쁨이 없고, 용서를 힘써 행하면 어짊을 구함에 이만큼 가까운 것이 없다." - 《맹자孟子》<진심盡心> 上

孟子曰 : "求則得之, 舍則失之, 是求有益於得也. 求之有道, 得之有命, 是求無益於得也 求在外者也."

孟子曰 : "萬物皆備於我矣, 反身而誠, 樂莫大焉, 強恕而行, 求仁莫近焉."

우리는 무언가를 구하려 하고 얻으려 한다. 하지만 먼저 그것을 구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무언가를 얻을 수 잇다. 하지만 그 구함의 도와 대상은 다른 곳에 잇지 않다. 바로 자신에게 있다. 그 자신이 가진 착함과 어짊을 구하면 바깥에서 구하지 않아도 자신은 스스로 기쁨과 어짊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모든 것은 이미 내게 갖추어져 있다.

 

공자가 말했다. "삼아, 나의 도는 하나로 꿰여 있다."

증자가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공자가 나가자 문인이 이를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무엇을 말한 것입니까?"

증자가 말했다. "선생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따름입니다." - 《논어》<이인里仁>

子曰 : "參乎, 吾道一以貫之."

曾子曰 : "唯."

子出門, 門人問曰 : "何謂也."

曾子曰 : "夫子之道忠恕而已矣."

삼은 공자의 제자 증자의 이름이다. 공자의 도가 하나로 꿰여 있다는 말에 삼은 아무런 의아함도 없이 그렇다고 대답한다. 증자와 공자가 나눈 이야기를 듣고 문인이 공자의 도가 무엇으로 꿰여 있는지를 묻는다. 그러자 증자는 공자의 도는 충과 서일 따름이라고 말한다.

 

충과 서는 도에서 멀리 어긋나지 아니하니, 자기에게 베풀어짐을 바라지 않는 것은 또한 남에게 베풀지 말아야 한다. 군자의 도가 넷인데 나는 하나도 능히 행하지 못하였다. 자식에게 요구하는 바로써 아버지 섬심을 다하지 못하였다. 신하에게 요구하는 바로써 임금을 섬기지 못하였다. 아우에게 요구하는 바로써 형 섬김을 다하지 못하였다. 벗에게 요구하는 바를 먼저 베풀지 못하였다. 덕을 실천하고 말을 섬심에 부족한 점이 있으면 힘쓰지 않을 수 없다. 그것들이 남음이 있어도 여자를 남겨둔다. 말은 행동을 돌아보고 행동은 말을 돌아보니 군자가 어찌 부지런히 힘쓰지 않으리오. - 《중용》

忠絮違道不遠, 施諸己而不遠, 亦勿施於人, 君子之道四, 丘未能一焉, 所求乎子, 以事父, 未能也. 所求乎臣, 以事君, 未能也. 所求乎弟, 以事兄, 未能也. 所求乎朋友, 先施之, 未能也. 庸德之行, 庸言之謹, 有所不足, 不敢不勉, 有餘, 不感盡, 言顧行, 行顧言, 君子胡不慥慥爾.

효가 어디에 있는가? 충심이 어디에 있는가? 공경이 어디에 있는가? 우정이 어디에 있는가? 그것들은 멀리 있지 않다. 내가 자식에게 바라는 마음, 그것을 행하면 효가 된다. 아랫사람이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는가? 그 바람이 내가 윗사람을 섬기는 도리가 된다. 형제의 우애는 내가 아우에게 바라는 것에 있다. 친구가 내게 해주었으면 하는 것을 내가 베풀면 우정은 공고해진다. 말로 행동을 돌아보고 행동으로 말을 돌아본다. 그러면 우리도 군자에 가까울 것이다.

 

물은 흐르고 비트는 회전한다.

세상은 돌고 나는 살아간다.

밀도 깊은 나무를 깎아내는 둥근 비트처럼

둥근 마음을 가지면 세상을 극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이 세상은 지옥이고 또 천상이다.

나는 어떤 세상을 살고 있을까?

 

훌륭한 전사는 무용을 떨치지 않고 싸움을 잘하는 자는 성내지 않으며, 가장 잘 이기는 자는 적을 상대하지 않고, 사람을 가장 잘 쓰는 자는 그들 앞에서 몸을 낮춘다. 이것을 다루지 않는 덕이라 하고 이것을 남의 힘을 쓰는 길이라 하며, 이것을 하늘의 지고함과 필적하는 일이라고 한다. - 《도덕경道德經》 68장

善爲士者不武, 善戰者不怒, 善勝敵者不與, 善用人者爲之下, 是謂不爭之德, 是謂用人之力, 是謂配天古之極.

사람은 자신이 잘하는 것을 내세우려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더 나은 인간처럼 보이기를 원한다. 그러나 진정 훌륭한 전사는 무용을 뽐내지 않는다.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성을 내지 않는다. 이미 자신에게 그것이 갖추어져 잇기 때문이다. 몸을 낮추어도 스스로가 비천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다투지 않으면서도 돋보이고 돋보이지 않으면서도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의 선함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잇으면서도 이에 만족한다. 까닭에 물은 도에 가깝다. 사람들이 주거지를 만드는 데는 지반이 튼튼한 땅을 좋아하고, 여러 가지 생각 중에는 뜻깊은 것을 좋아하며, 친구를 사귐에는 어진 사람을 좋아하고, 말에는 신의가 있음을 좋아하며, 정치에 있어서는 질서 있음을 좋아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는 실효 있음을 좋아하며, 행동하는 데 있어서 때를 어기지 않는 것을 좋아하면 결코 어긋나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 《도덕경》 8장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政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노자가 최상의 선이 물과 같다고 이야기한 것은 물이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있으면서도 만족하기 때문이다. 물은 또한 차별하지 않는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보면 알 수 있다. 비가 어디 더러운 곳과 깨끗한 곳을 차별하여 내리던가, 흐르는 물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물은 그곳이 어디인지 가리지 않고 변함없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살다 보면 좋은 일이 있고 나쁜 일이 있다.

힘든 일이 있고 쉬운 일도 있다.

기쁜게 받아들일 일도 있지만 못내 해야 할 일도 있다.

나쁜 일을 건너뛰고 힘든 일을 회피하며 이룰 수 있는 일은 없다.

모든 과정이 합쳐질 때 가구는 완성된다.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가난하지만 아첨하는 일이 없고, 부유해도 교만하는 일이 없다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옳은 일이다. 그러나 가난해도 도를 즐기고 부우돼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자공이 다시 말했다. "시詩에 이르기를 '여절여차如切如磋 여탁여마如琢如磨'라고 했는데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이군요."

그러자 공자가 말했다. "너와 함께 가히 시를 말할 수 있겠구나. 이미 들은 것으로 장차 있을 것까지를 아는구나." - 《논어》<학이學而>

曰 : "諂, 驕, 如."

子曰 :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子貢曰 : "云, '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 :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여절여차 여탁여마'는 끊는 듯하고 쓰는 듯하며, 쪼는 듯하고 가는 듯하다는 말이다. 여기서 '절차탁마切磋琢磨'라는 말이 나온다. 학문이나 인격을 톱으로 자르고 줄로 쓸고 끌로 쪼고 갈아 빛을 내야 한다. 그렇게 다듬고 다듬기를 끊이지 않고 반복해야 비로소 군자가 된다. 공부는 평생 동안 계속된다. 무언가를 깨닫고 얻고, 그래서 내 삶에 변화가 온다면 그것이 모두 공부다. 수양도 마찬가지다. 오늘 먹은 바른 마음이 내일에 이르고 내일에 이른 그 마음이 끊임이 없도록 갈고 닦아야 한다.

 

흐르는 물은 구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 《맹자》<진심> 上

流水之為物也, 不盈科不行.

물이 흘러 구덩이에 닿는다. 움푹 팬 구덩이에 물이 스민다. 결국 구덩이가 다 찰 때까지 물은 흐르지 않는다. 구덩이를 다 채우고 나서야 물은 앞으로 나아간다. 건너뛰고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작했으면 끝까지 가야 한다.

스스로 거기까지라고 한계를 긋지 말자.

그 한계는 내 의지의 한계일 뿐.

내 가능성의 한계가 아니다. 나는 가능성의 한계를 오해했다.

나는 하지 못할 것이라고 오해했다. 나에게 미안하다.

이제는 끝까지 가보고 싶다.

스스로에게 미안해하고 싶지 않다.

 

공자가 말했다. "학문은 비유하자면 산을 만드는 것과 같다. 마지막 한 삼태기의 흙을 더 부으면 완성할 수 있는데도 거기서 멈춘다면 그것은 내가 스스로 그만둔 것이다.학문은 또한 평지를 메우는 것과 같아서 비록 한 삼태기의 흙을 퍼넣었을 뿐이더라도 진전했다면 그만큼 내가 진보한 것이다." - 《논어》<자한子罕>

子曰 : "譬如爲山, 未成一簣, 止, 吾止也. 譬如平地, 雖覆一簣, 進, 吾往也."

산을 만드는 것과 평지를 메우는 것은 모두 같다. 마지막 한 삼태기의 흙을 부어야 산이 될 수 있는데 붓지 않았다면 그것은 산이 아니다. 하지만 반대로 한 삼태기의 흙이라도 부었다면 이미 시작한 것이다. 시작하는 것도 어렵고 마치는 것도 어렵다. 하지만 시작에는 끝이 있고 끝이 있은 후에야 또 시작할 수 있다.

 

염구가 말했다. "선생님 제가 도道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힘이 부족합니다."

공자가 말했다. "힘이 부족한 자는 중도에서 포기하지만 너는 지금 스스로 한계의 획을 긋고 있다." - 《논어》<옹야雍也>

冉求曰 : "非不子之道, 力不足也."

子曰 : "力不足者, 中道而廢, 今女畫."

공자의 문제적 제자 염구는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공자는 염구의 재능을 아꼈지만 그는 끝내 공자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 권력자인 계강자의 신하가 되었을 때 가혹한 세금을 매겨 이미 부유한 계강자의 배를 불렸던 것이다. 그때 공자는 제자들에게 염구가 더 이상 자신의 제자가 아님을 선포하고 북을 울려 그를 공격하라고 했다.

 

거리를 걸으면 지나가는 사람의 시선을 의식했다.

어딘가에 들어가면 또 누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걱정했다.

그러나 떳떳하고 당당하다면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이 아니다.

나를 위한 나의 일이다.

 

공자가 말했다.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해서 학문을 했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남을 위해 학문을 한다." - 《논어》<헌문憲問>

子曰 : 古之學者為己, 今之學者為人.

자신을 위해 학문하는 것을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 하고 남을 위해 학문하는 것을 위인지학爲人之學이라 한다. 언뜻 들으면 다른 사람을 위한 위인지학이 이상에 가까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엔 또 다른 뜻이 숨어 있다. 마치 내가 누군가에게 보이려고 공구를 꺼낸 모습과 같다. 위인지학은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하는 학문을 말한다.

 

이른바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것이니, 나쁜 냄새를 싫어함과 같고 좋은 색을 좋아함과 같다. 이것이 스스로 기꺼워함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이다.

소인이 한가하면 선하지 못한 짓을 한다. 군자를 본 뒤에는 슬며시 그 선하지 못함을 가리고 그 선함을 드러내려 한다. 사람들이 자기를 봄이 마치 그 폐와 간을 봄과 같으니, 곧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이래서 마음속에 참된 생각이 있으면 밖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 있을 때를 삼간다.

증자가 말하였다. "열 눈이 보는 바이며 열 손이 가리키는 바이니 그 엄중함이여."

부는 집을 윤택하게 하고, 덕은 몸을 윤택하게 한다.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편안해진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뜻을 성실하게 한다. - 《대학大學》

所謂誠其意者, 毋自欺也, 如惡惡臭, 如好好色, 此之謂自謙. 故君子必慎其獨也. 小人閒居為不善, 無所不至, 見君子而后, 厭然掩其不善, 而著其善. 人之視己, 如見其肺肝然, 則何益矣. 此謂誠於中, 形於外, 故君子必慎其獨也. 曾子曰 "十目所視, 十手所指, 其嚴乎!" 富潤屋, 德潤身, 心廣體胖. 故君子必誠其意.

자신의 뜻이 정성이면 스스로를 속일 필요가 없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어긋남이 없으니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내가 싫어하는 것에 편벽됨이 없으니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면 된다. 행동은 자연스럽고 마음은 흐르듯 막히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들킬까 염려하여 슬며시 감추는 것은 그 좋아함에 삿됨이 있기 때문이고 내가 싫어하는 것을 가려 보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거기에 독선과 아집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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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