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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08 조선의 아버지들

 

 

백승종 지음

2016, 사우

 

대야도서관

SB112273

 

911.05

백57ㅈ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할 진정한 아버지다움

 

아버지 노릇이 힘겨운 이들에게 들려주는

의연하고 뭉클하고 속 깊은 이야기!

 


조선의 아버지들이 애써 추구한 인생의 가치는 상당 부분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그들은 힘써 현실 사회의 문제를 극복하려 했고, 매사에 성실한 태도를 견지하였다. 성별과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을 존중하였으며, 비상한 인내심과 자상함으로 끝까지 가족을 보살피고 사랑하였다.

이 책에서 우리가 만날 12명의 아버지들은 그들이 속한 사회와 계층 곧 시대의 고뇌를 반영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피와 땀으로 역사에 아로새긴 발자취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고자 부단히 노력한 개인의 삶 자체인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아버지란 과연 무엇인가'를 묻는 내 단순한 질문에 대한 그들의 뜻 깊은 답변이다.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아버지로서 인생의 좌표 하나를 만날 수 잇기를 바란다.

- '책을 펴내며' 중에서


 


아버지한테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시대.

월급 때문에 아버지라는 이름이 유지되는 시대에

역사학자 백승종이 조선시대 12명 아버지에게 묻는다.

 

"어떻게 해야 자식을 크게 키울 수 있는가?"

"어떻게 자식에게 그토록 깊은 존경을 받았는가?"

"아버지로서 세상에 기여하는 길은 무엇인가?"


 

백승종

 

독일 튀빙겐대학교에서 중국 및 한국학과 철학박사를 취득했다. 튀빙겐대학교 한국학과 교수, 베를린자유대학교 한국학과 임시학과장, 보훔대학교 한국학과장 대리, 프랑스 국립사회과학원 및 독일 막스플랑크역사연구소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를 지냈고, 현재 과학기술교육대학교 대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90년대부터 미시사 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신문, 방송, 공개 강연을 통해 일반 시민들과 함께 역사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작업에 힘을 쏟고 있으며, 수년째 서당에서 제자들과 더불어 고전을 읽고 있다.

저서로 《한국 사회사 연구》, 《동독 도편수 레셀의 북한 추억》, 《그 나라의 역사와 말》, 《대숲에 앉아 천명도를 그리네》, 《한국의 예언문화사》, 《정감록 역모사건의 진실게임》, 《예언가, 우리 역사를 말하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제52회 한국출판문화상), 《정감록 미스터리》,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 《금서, 시대를 읽다》(한국출판학술상), 《역설》 외 여러 권이 있다.

 

차례

 

책을 펴내며 아버지의 길을 묻는 우리에게 그들이 들려주는 뜻 깊은 답변

01유배지의 아버지 정약용

“벼슬길에 오른 사람처럼 당당하라”

아내의 낡은 치마폭에 써 보낸 편지/인생의 봄날이 열리는 듯하였으나/하루아침에 폐족의 위기에 직면하여/“저쪽에서 돌을 던지면 옥돌로 보답하라”/“절대 서울을 떠나지 마라”/아들에게 권한 공부법/오랜 세월 떨어져 지내는 아버지 마음/유배라는 형벌은 하늘이 주신 기회/흙수저 아들의 재기

02 | 한 시대의 아버지 이황

잔소리 대신 편지로 아들을 일깨우다

부부관계의 책임은 남편에게 있다/살림살이와 공부 어느 것도 소홀히 하지 말 것/종이든 양반이든 귀하지 않은 목숨이 없으니/애써 가르쳐도 자식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부귀영화란 뜬구름 같은 것

03 | 세상에 저항한 가난한 아버지 박세당

“독서와 글씨 연습으로 근심을 잊어라”

예법보다 자식의 건강이 먼저/아무리 가난해도 탐심에 휘둘릴 수는 없는 일/아들이 마음을 낼 때까지 강요하지 않고 기다렸다가/대학자가 아들에게 가르친 글쓰기 요령/금쪽같은 둘째 아들을 잃고/뜻을 굽히지 않는 학자의 용기



04 | 불법 이혼남 김숙자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다

이혼, 인생의 굴레가 되다/운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경전의 가르침이 곧 일상생활/하찮은 직책이라도 정성을 다하라/바보 같고, 존경스러운 어른/마침내 사림파의 기틀을 세우다



05 | 알뜰한 살림꾼 이익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너그러웠던

단정하고 꼿꼿한 풍모에 공경하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아버지와 형을 잃고/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애쓴 남다른 선비/절약하지 않으면 방도가 없다/콩죽 한 그릇으로도 풍족해/세상을 구하는 것이 진정한 효도/꼭 핏줄이 통해야만 아버지일까



06 | 사화도 꺾지 못한 기개 유계린

위기를 기회로 바꿔준 열 가지 교훈

해남 성내에 숨어 산 사연/개인적 욕심을 차단하려면/거가십훈의 네 가지 요체/늘 마음을 공정하게 하라/아들의 무한한 존경을 받은 아버지/사림파의 찬란한 부활

07 | 스승이자 친구이자 아버지 김장생

부자간에 서로 공경하고 예를 다하다

《소학》에 나오는 내용 그대로 산 아버지와 아들/인생의 파도, 시대의 격랑에 맞서/뜻이 높아도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처지/이름조차 직접 부르기 어려운 성덕군자/예학은 조선을 살릴 실천 학문/예학의 본질에서 벗어난 예송논쟁/이 무례한 세상에서 예를 생각하니

08 | 천재 예술가 김정희

위로와 사랑이 가득 담긴 편지를 쓰고 또 쓰다

서자 아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서예의 네 가지 비법/글 읽기를 중지하지 마라/아내에게 투정도 부리고 세심하게 챙기기도 하고/“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나물이오”

09 | 거룩한 영웅 이순신

유달리 깊고 큰 사랑

최고의 경영자였던 변방의 장수/탁월한 문장가이자 예리한 지식인/영웅의 사생활/가족들이 그립고 외롭구나/통곡하고 또 통곡했다

10 | 딸바보 김인후

한없이 따뜻하고 자상했던 큰 선비

의리를 위해 벼슬도 마다하고/자식 잃은 슬픔 어이 견디리/시가에 홀로 남을 딸 걱정에/사위 웃음소리에 번뇌와 병이 한꺼번에 물러가네/선비가 조심해야 할 세 가지

11 | 청백리 이항복

의를 위해 죽음으로 맞서다

재치와 기개가 넘치는 소년/고지식한 장인, 기민한 사위/‘오성과 한음’ 이야기에 담긴 민중의 꿈/노련한 선배 같은 아버지/손자 교육에 열성인 ‘꼰대’ 할아버지/어찌 가족의 안위를 위해 뜻을 굽히랴

12 | 비극의 주인공 영조

그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휘령전 앞에서 아들을 죽인 이유/누구의 책임인가/아버지의 기대와 실망/아버지 영조의 불안한 심리/맹자가 말하는 좋은 부자관계의 비결/사도제사의 정신병/엽기적인 사건의 원인

참고문헌

 

01 | 유배지의 아버지 | 정약용

 

병든 아내 낡은 치마를 보내, 천리 먼 길에 애틋한 마음 전해 왔네.

오랜 세월에 붉은빛은 이미 바래, 늘그막에 드는 마음 서글픔뿐이네.

마름질하여 작은 서첩으로 꾸며, 자식들 일깨우는 글귀를 적었다오.

부디 어버이 마음 헤아려 오래도록 가슴 깊이 새겼으면 좋겠소.

- 《하피첩》(보물 제1683-2호)

 

나는 이것(아내의 활옷)을 잘라내어 조그만 첩자(帖子)를 만들고, 붓끝이 가는 대로 훈계하는 말을 써서 두 아들에게 전해주었다. 훗날 그들은 내 글을 읽고 느끼는 바가 있으리라. 양친 부모의 손때 묻은 자취를 바라보면 그리운 마음이 뭉클 솟아날 것이 아닌가.

- '하피첩(霞帔帖)에 제함'(《다산시문집》 제14권)

 

용(정약용)이 이에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을 지어 올렸다. 활차(滑車)와 고륜(鼓輪)은 작은 힘을 이용해서 큰 무게를 옮길 수 있었다. 성을 짓는 일을 마치자 주상(정조)께서 말씀하셨다. "다행히 기중가(起重架)를 써서 돈 4만 냥의 비용을 줄였다."

-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금정역은 홍주 땅에 있다. 그 역(驛)에서 일하는 아전과 하인들 중에는 서교(西敎)를 믿는 사람이 많았다. 주상(정조)께서는 용으로 하여금 그들을 깨우치게 하여 서교를 금지하게 하려 하신 것이었다. (<자찬묘지명>)

 

(정약)용의 형 약전, 약종 및 이기양, 권철신, 오석충, 홍낙민, 김건순, 김백순 등이 차례로 옥에 들어갔다. 그런데 (문제의) 문서들 가운데는 도리어 (정약)용의 누명을 밝게 벗게 해줄 만한 증거가 많이 있었다. 그리하여 (정약용에게는) 형틀을 벗기고 의금부 안에서 자유를 허락했다. (<자찬묘지명>)

 

무진년 봄에 다산(茶山)으로 옮겼다. 대(臺)를 쌓고 못을 파서 꽃과 나무를 심어놓고, 물을 끌어들여 비류폭포(飛流瀑布)를 만들었다. 그리고 동암(東庵)과 서암(西庵)의 두 암자를 수리해서 1천여 권을 비치해두고 글을 지으면서 스스로 즐겼다." (<자찬묘지명>)

 

지금은 내 이름이 죄인 명부에 적혀 있으므로, 너희에게 시골집에 숨어 지내라고 하였다. 그러나 미래에는 서울에서 가까운 10리 이내에 살라. 가세가 쇠락하여 도성 안에 들어갈 형편이 못 되면, 근교에 터를 잡고 과일나무를 심고 채소를 가꾸며 생계를 유지하라. 그리하여 재산이 조금 모이면 서울 한복판으로 옮겨라.

 

우리 집안은 선대로부터 붕당(朋黨) 문제에 관계하지 않았다. 더구나 (우리가) 곤경에 처하자 그때부터는 괴롭게도 옛 친구들이 (우리 집안을) 연못에 밀어넣고 돌을 던지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너희들은 이런 내 말을 명심하라. 당파의 사사로운 마음을 부디 깨끗이 청산해버려야 한다.

 

내가 지난번에도 거듭 말하였듯이, 청족(淸族, 죄를 입지 않은 양반 집안)은 독서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존경을 받는 법이다. 하지만 (너희처럼 가문이) 폐족이 된 처지라면 학문에 힘쓰지 않으면 (그 형편이) 더욱 가증스럽게 되고 만다. 지금 너희들은 스스로를 천시하고 비루하게 여기지만, 그런 태도야말로 너희 스스로를 비통하게 만드는 꼴이다. 너희들이 끝끝내 공부를 하지 않고 자포자기하고 만다면, 나의 저술이며 내가 간추려 뽑은 글들은 장차 누가 책으로 엮고 교정해서 보존하겠느냐?

- <두 아들에게 부침>

 

근래에 나이 젊은 소년들이 원나라와 명나라의 경박한 사람들이 지은 보잘것없는 문장을 모방해서 절구(絶句)나 단율(短律)을 짓고, 건방지게도 당세에 뛰어난 문장이라고 자부한다.

 

문장은 우선 경학(經學)으로 근기(根基)를 확고히 세운 뒤에 사서(史書)를 섭렵해서 정치의 득실과 치란(治亂)의 근원을 밝혀야 한다. 또 실용 학문에 마음을 두어 옛사람들이 지은 경제(經濟)에 관한 서적을 즐겨 읽어야 한다. 그리하여 마음속으로 항상 만백성을 윤택하게 하고 만물을 기르려는 마음을 세웠으면 좋겠다. 비로소 독서하는 군자가 되는 방법이 그것이다.

 

수십 년 전부터 괴이한 주장이 횡행한 나머지 우리나라의 지적 성과를 우습게 알아, 선현의 문집을 읽지 않는 풍습이 있다. 이것은 큰 병통이다. 사대부의 자제가 국조(國朝, 조선 왕조)의 고사(故事)를 알지 못하고 선배의 문집을 읽지 않는다면, 그의 학문이 설사 고금을 꿰뚫었다 할지라도 조잡할 뿐이다. 시집(詩集) 따위를 읽는 것은 급하지 않다. (선배들의) 상소문, 차자(箚子), 묘문(墓文), 편지(書牘) 등을 읽어 모름지기 안목을 넓히라.

 

(유교 경전 공부의) 여가에 《고려사(高麗史)》·《반계수록(磻溪隨錄)》(유형원의 저서), 《서애집(西厓集)》(유성룡의 문집), 《징비록(懲毖錄)》(유성룡이 임진왜란 때의 실상을 회고한 글), 《성호사설(星湖僿說)》(이익의 저서), 《문헌통고(文獻通考)》(송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기록한 일종의 백과사전) 등의 서적을 읽으면서 그 요점을 초록하는 일 또한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설사 부득이하게 시를 쓰더라도) 모름지기 《삼국사(三國史)》, 《고려사》, 《국조보감(國朝寶鑑)》, 《여지승람(輿地勝覽)》, 《징비록》,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여러 문헌을 구해서 역사적 사실을 채집하고, (관련이 있는) 지역을 고찰해서 시어로 활용해라. 그렇게 해야 세상에 이름을 얻을 수 있고, 후세에 남을 작품이 될 것이다.

- <연아(淵兒)에게 부침>

 

지금 생각으로는 경오년(1810) 봄에 네 아우를 돌려보내려 한다. 그전까지 너는 세월을 허송하려 하느냐? 여러모로 잘 생각해서, 집에 있으면서도 공부할 가망이 있거든 네 아우가 돌아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동생과 교대하게 이곳으로 오라. 만일 사정상 (집에서 공부가 될) 가망이 전혀 없거든, 내년(1809) 봄에 날씨가 좀 따뜻해지면 만사를 제쳐두고 이리 내려와서 함께 공부하도록 해라.

 

첫째로, 나날이 네 마음씨가 나빠지고 행동이 비루해져가기 때문에 여기 와서 가르침을 받아야 하겠다. 둘째로, 네 안목이 좁아지고 지기(志氣)를 잃어가기 때문이다. 이곳에 와서 배워야 하겠다. 셋째로 너의 경학(經學)이 조잡해지고 식견이 텅 비어가는 것도 걱정이다. 그러니까 여기 와서 공부를 해야겠다. 소소한 사정들은 돌아볼 필요도 없다.

 

소싯적에는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지난 20년 동안 세상맛에 빠져 선왕(先王)의 가르침을 잊고 지냈다. 이제 마침 여가를 얻었도다!(<자찬묘지명>)

 

이공가환(李公家煥)이 문학으로 한세상에 명성을 떨쳤고, 자부(姊夫) 이승훈(李承薰)도 몸을 단속하고 뜻을 가다듬었다. 그들은 모두 성호 이 선생(李先生) 익(瀷)의 학문을 조술(祖述)하였다. 용(鏞, 정약용)도 성호의 유저(遺著)를 읽고 나서 기뻐하며 배우기로 결심하였다. )<자찬묘지명>)

 

내가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천명이요,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는 것도 천명이다. 그러므로 사람으로서 해야 할 도리를 닦지 않고, 천명만을 기다린다면 이것은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리라. 나는 사람으로서 닦아야 할 도리를 다했다. 사람이 닦아야 할 도리를 이미 다했는데도 만약 끝끝내 돌아가지 못한다면, 이 또한 천명인 것이다.

- <연아(淵兒)에게 답함>

 

유림(儒林)의 대업(大業)은 (주자가 죽은 뒤로) 크게 떨치지 못하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적막한 천 년이 지난 오늘날, 학문의 전통이 취약한 구이(九夷, 동쪽의 오랑캐로 불리던 동이족, 여기서는 조선인을 뜻함) 가운데서 이처럼 뛰어난 기이한 일(즉 정약용이 이룬 학문적 위업)이 일어났도다.

- 김매순(金邁淳)

 

아버지 정약용의 가르침

 

● 배려하고 양보하여 가족 해체를 막아라.

● 서울 부근에 살며 높은 문화 수준을 유지하라.

● 늘 심기(心氣)를 화평하게 하고 진취적인 태도를 가져라.

 

 

02 | 한 시대의 아버지 | 이황

 

서당이 반이나 지어져 절로 기쁘구나(自喜山堂半已成).

산속에서 살면서도 몸소 밭갈이는 하지 않았지(山居猶得免躬耕).

책을 하나씩 옮기고 보니 상자가 다 비어간다(移書稍稍舊龕盡).

대나무 심자 죽순 새로 돋는구나(植竹看看新箏生).

샘물 소리, 밤의 정적 깨는 줄도 모르겠네(未覺泉聲妨夜靜).

산 빛 아름다운 맑은 아침, 더더욱 좋아라(更憐山色好朝晴).

예부터 숲 속 선비는 만사를 잊고(方知自古中林士).

이름 숨긴 뜻을 이제야 알겠네(萬事渾忘欲晦名).

- <도산에서 뜻을 말하다>

 

이황의 시는 맑고 엄하며 간결하고 담박하였다. 그는 젊어서 두보의 시를 배웠고, 노년에는 주자의 시를 사랑하였다. 선생의 시는 마치 그분들의 붓끝에서 나온 것처럼 품격이 높았다.

- 제자 정유일(鄭惟一)의 시평

 

나는 두 번 장가들었지만 늘 불행했습니다. 그래도 아내를 탓하는 야박한 마음을 갖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렇게 지낸 날이 수십 년이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몹시 괴롭고 심란해, 참지 못할 지경이 된 적도 있었지요. 그렇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대륜(大倫)을 가볍게 여겨(즉 이혼해서), 홀로 계신 어머님께 근심을 끼칠 수야 있었겠습니까.

- 제자에게 보낸 편지(<이평숙에게 주다>)

 

안으로는 글공부에 전념하고, 밖으로는 살림살이를 살펴야 한다. 그러면 사풍(士風)이 퇴락되지 않아 (명성을) 해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공부는 완전히 뒷전으로 밀어놓고 살림살이에 정신을 판다면, 농부와 다를 것이 없다. 시골의 속된 사람들이나 그렇게 하는 법이다.

 

가난과 궁핍은 선비의 다반사다. 어찌 마음에 거리낄 것이 있겠느냐. 너의 아비도 평생 이로 인해, 남의 비웃음거리가 된 일이 많았다. 그러나 꿋꿋이 참고 순리로 처세(處世)하며 자신을 수양해야 한다. 그러면서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

 

너는 의탁할 곳이 없이 (처가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으니 궁색하기 짝이 없다. 네 편지를 받아 읽으면, 여러 날 동안 내 마음이 불편하다.

 

부디 괴로움을 참고 꿋꿋하게 자신을 지켜야 한다. 그저 분수대로 주어진 천명을 기다릴 뿐이다. 가난을 너무 슬퍼하거나 원망하다가 실수를 저질러 남의 웃음거리가 되지 말아야 한다.

 

듣건대, 네가 젖어미로 선택한 여종은 아직 3~4개월밖에 안 되는 자기 아이를 두고 (네가 있는) 서울로 올라간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그 아이를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근사록(近思錄)》에 이런 구절이 있느니라. "남의 자식을 죽여서 자기 자식을 살리는 짓은 매우 옳지 않은 일이다." 배운 대로 행하지 않으면 어찌 선비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래도 젖어미를 원하거든 그 아이까지 데려가서 두 아이를 함께 기르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생각 없이 곧바로 자기 아이를 버리게 하는 것은 어진 사람이 차마 하지 못할 일이며, 또 지극히 편치 않은 일이기도 하니 이 일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거라.

 

너는 본래부터 공부에 뜻이 독실하지 못하다. 집에 머물면서 일없이 세월만 보낸다면, 더더욱 공부를 망치게 될 것이다. 모름지기 서둘러서 조카 완(完)이나 아니면 독실한 뜻을 품은 친구와 더불어 책을 짊어지고 절에 올라가거라. 한겨울 동안 부지런히 공부하여라. 지금 부지런히 공부하지 않으면, 세월은 유수 같아 한번 흘러가면 다시 회복하기 어려우니라. 내 말을 천만번 마음에 새겨 소홀히 하지 마라. 소홀히 하지 마라.

 

들으니, 몽아(蒙兒, 이안도의 아명)는 아직 집 안에 있다고 한다. 《예기(禮記)》에 따르면, "남자는 열 살이 되면 집을 떠나 스승에게 배우고 바깥에서 거처한다"고 했다. 이제 아이가 벌써 열서너 살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바깥에 나가지 않으니 될 일이냐.

 

또 내가 들으니, 무당이 자주 집을 드나든다는구나. 가법(家法)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나의 어머니 때부터는 전혀 무당을 섬기지 않았다. 나 역시 언제나 그것을 금지해서 무당이 드나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단순히 옛 어른의 가르침대로 하려는 것만은 아니다. 가법이 무너지면 안 되는 법이다. 어찌하여 너는 이런 뜻도 모르고, 경솔히 고치려 드느냐.

 

03 | 세상에 저항한 가난한 아버지 | 박세당

 

태보(泰輔)는 두통으로 자주 고생하고, 너(큰 아들 박태유)는 또 목이 쉬는 실음증(失音症)과숨이 가쁘고 헐떡거리는 데다 기침을 계속하는 천촉증(喘促症)에 시달린다 하니, 내 걱정이 끝도 없다. 실음증은 큰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천촉증은 상중인 네 건강을 몹시 걱정하게 하는 증세가 틀림없다. 무리하게 책을 읽지 마라. 그리고 네 원기가 부족하니, 아침저녁으로 소리 내어 울고 곡하는 것도 그만두어라.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곡하고 우는 데 달려 있지 않다. 너는 이 점을 꼭 명심하기 바란다.

- 1666년(현종 7)에 박세당이 상중(喪中)의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

 

생계가 곤란해서 매우 염려스럽다. 하지만 걱정해도 소용없는 일인 줄 알고 있다. 더는 아무 생각도 않으려 한다.

 

종이 돌아오는 편에 가져온 편지를 잘 받았다. 네가 (새어머니를) 시봉(侍奉)하며 잘 지내고 있는 줄 알게 되어, 내 마음이 편해졌다. 그런데 생계의 곤란함은 너나 나나 마찬가지라서 몹시 걱정스럽고 또 걱정스럽구나. 이 세상의 이러한 근심거리가 과연 언제쯤이면 사라질꼬, 머나먼 상고시대, 평화롭게 살며 초가집 처마 밑에서 배를 두드리며 사시던 분들이야 우리처럼 쓸데없는 생각때문에 마음을 어지럽히실 일이 없었으리라.

- 1677년(숙종 3) 10월 12일, 49세의 박세당이 큰아들 박태유에게 보낸 편지

 

네가 역사책을 읽겠다고 말했느냐. 이 부분이야말로 전부터 네게는 몹시 부족했던 것이다. 이제 네가 그쪽에 뜻을 둔다면 필경 크게 유익함이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정말 위안이 되고, 위안이 되는 일이구나.

그런데 말이다. 네가 역사책 읽는 법을 아느냐? 한꺼번에 죽 읽기만 하고 핵심적인 내용을 마음속에 간직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단다. 낮 동안에 읽은 내용을 그날 밤중이나 이튿날 아침에 조용히 앉아 곰곰이 되새겨보기를 바란다.

또 네가 읽으면서 마음에 흐뭇해했던 대목도 그렇거니와 역사 속 인물의 언행 가운데서 본받을  만한 점 또는 경계할 일을 찾아 내어 가슴 깊이 간직하기를 바란다. 이런 방법으로 역사책을 읽는다면, 금방 잊어버리지도 않게 되고 네 자신의 언행에 보탬이 적지 않을 줄로 믿는다.

역사책을 읽을 때는 이런 점을 유념해야 하느니라.

- 1666년(현종 7) 12월 9일, 박세당이 큰아들에게 보낸 편지

 

밤새 평안했느냐? 특별히 다른 일이 없으면, (선비는) 책을 읽고 글씨 쓰기를 연습하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되느니라. 이 두 가지가 네게는 마치 농부가 호미와 쟁기를 쥐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스스로를 엄히 타일러서 날마다 열심히 연습해야 한다. 만약 이를 중지하고 말면, 장차는 남의 도움을 비는 처지가 되고 말 것이다.

 

- 1675년(숙종 1) 둘째 아들 박태보에게 보낸 편지

 

과거시험 볼 날이 멀지 않았구나. 공부에 힘을 쏟아야 할 텐데, 네 몸이 아프다니 어찌 마음대로 될 수 있을까 싶다.

그런데 글짓기를 할 때는 결코 생소하고 괴상한 문체를 쓰는 병통을 고집하지 말아야 한다. 문맥이 평이하고도 순조롭게 흘러가도록 힘써야 한다. 그러면 문체가 절로 아름다워질 것이다.

특히 글의 앞뒤(首尾)를 상세히 잘 따져서 귀결점이 있게 해야, 맥락을 잃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글짓기의 요체다.

 

네가 작성한 시권(試卷, 과거 시험답안)의 글씨도 문제더구나. 비록 아주 거칠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직도 서툰 점이 없지 않다. 글짓기를 하지 않을 때는 반드시 <화담비(花潭碑)>나 <조아비(曺娥碑)>를 보고 베껴라. 그 일에도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글씨를 쓸 때는 크게만 쓰려고 하지 말고, 시권의 크기에 맞게 쓰는 연습을 하기 바란다. 과거에 익힌 글씨체는 일단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

 

글짓기를 할 때는 간략하게만 쓰려 하지 말고 (표현과 내용을) 풍부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04 | 불법 이혼남 | 김숙자

 

 

김숙자는 자기 자식을 망령되게도 서얼(庶孼)이라 일컫고, 조강지처(糟糠之妻)를 이유도 없이 내버렸습니다. 형법에 따라 그에게 곤장 80대를 치고, 이미 버린 아내를 데려다가 다시 살게 해야 합니다. (《세종실록》, 세종 5년 7월 4일)

 

아, 선공(김숙자)의 평생은 그 관직이 그 덕(德)에 못 미쳤다. 31세로 문과에 급제한 뒤 13년 동안 시골에 묻혀 지내셨다. 벼슬은 참외(參外, 7~9품의 하급관리)로 시작하여 대부(大夫, 4품 이상의 고위관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28년 동안이었다. 그 사이 여섯 번 주부(主簿)의 벼슬을 지냈고, 부령(部令)은 두 번, 현감은 세 번, 교수관, 교리(校理), 부정(副正), 사예가 각 한 번씩이었다. 역임하신 관직은 모두 당대의 흔한 벼슬자리일 뿐이었다. (이혼 문제 때문에) 불우하고 영락하여 끝내 큰 업적을 이루지 못하셨다. (……) 아, 이것이 타고난 운명이셨던가. 아니면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고야 만 것인가.

 

아들을 장가들이고 딸을 시집보낼 때면, 반드시 상대방이 세족(世族)인지, 그리고 가훈(家訓)이 있는 집안인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혼인하기로 약속한 다음에는 누구도 이간질하지 못하게 막았다.

 

정축년(丁丑年, 세조 3) 10월 밀양에서 경산으로 가다가 나(김종직)는 답계역(踏溪驛)에서 잠을 잤다. 꿈속에 신선이 나타나서, "나는 초나라 회왕(懷王, 의제) 손심이다. 서초(西楚) 패왕(覇王, 항우)에게 살해되어 빈강(彬江)에 버려진 사람이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잠에서 깨어나 생각해보니, 회왕은 중국 초나라 사람이요, 나는 동국의 사람이라. 서로 거리가 만 리나 떨어져 있는데, 내 꿈에 나타난 까닭이 무엇일까? 역사를 살펴보면 그 시신을 강물에 버렸다는 기록은 없다. 아마도 항우가 회왕을 죽이게 한 다음, 시신을 강물에 내버린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제야 이 글을 지어 의제를 조문한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4년 7월 17일)

 

05 | 알뜰한 살림꾼 | 이익

 

경기지방의 관찰사가 되어 여러 군현(郡縣)을 순행하게 되자 나는, 길을 돌아서 첨성리(瞻星里, 지금의 경기도 안산)에 있는 선생의 댁을 방문했다. 당시 선생은 81세였다는데, 처마가 낮은 허름한 지붕 아래 단정히 앉아 계셨다. 선생의 눈빛은 형형하여 쏘는 듯했고, 성긴 수염은 길게 늘어져 허리띠까지 닿을 듯했다.

절을 올리기도 전에 내 마음속에는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가까이 다가가서 모습을 뵈었더니, 화평하고 너그러우셨다. 경전에 관해 설명하실 때는 고금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내가 전에 알지 못한 말씀을 해주셨다.

- 채제공의 방문기

 

내가 선생의 문하에 수십 년을 출입하였지만, 노복을 꾸짖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선생은 노복을 형제나 친척과 똑같이 어루만지고 보살펴주었다. 부지런히 일하고 충성을 다한 노복이 죽자, 찾아가서 곡을 하셨다. 또 집에서 기르던 개가 죽으면, 묻어주게 하셨다. 매사에 내 마음의 인(仁)을 확대하여 남에게까지 닿게 하시는 법이 이와 같으셨다.

- 이병휴 <가장>

 

벼슬 없는 선비는 어려서부터 익힌 일이 책에 적힌 문자에 불과하다. 농사짓거나 장사를 하려 해도 힘이 감당하지 못한다. (이익, <삼두회서>)

 

일생 동안 밭을 갈지도 풀을 매지도 않았네(生平不耕亦不耘).

배를 두드리며 지내지만 그 방법이 남다르다오(鼓腹含哺計甚差).

하느님이 오곡을 내려주셨거니와 그 가운데 하나가 콩이라오(天生五穀菽居一).

그 가운데서도 빨간 것이 으뜸이라네(就中赤色尤稱嘉).

붉은 빛깔 불이 성하면 죽은 것도 살아나고, 검은색 물이 성하면 죽는 법이라오(火旺方生水旺死).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은 사치가 심한 것이라(甜滑輕輭味更奢).

가난한 집안 재물이 부족하면 좋은 방편이 있거니(貧家乏財善方便)

헐값에 이것(콩)을 많이 바꾸어보시오(賤價易辦此亦多).

- <반숙가(半菽歌)>(콩을 반으로 쪼개며 부르는 노래)

 

<자식을 훈계하는 여덟 가지 조목(訓子八條)>

① 항상 마음이 몸을 떠나 있는지를 잘 살펴라.

② 온유함으로 백성을 사랑하라. 작은 잘못을 용서하고, 정말 잘못이 있는지를 잘 살피라.

③ 함부로 성내지 마라. 하리(下吏, 아전이나 관청의 노비)가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너그럽게 대하라.

④ 부로(父老, 고을의 어른)들을 불러 고충을 들어보라.

⑤ 상관을 부형(父兄)처럼 섬기라.

⑥ 소송이 있을 때는 반드시 거짓말하는 사람의 이름을 기록해 두라.

⑦ 고을의 실무를 맡은 아전의 잘못이 명백하지 않을 때는 함부로 꾸짓지 마라. 조용히 관찰해보라.

⑧ 백성을 잘 다스리는 데 마음을 써라. 집안일은 걱정하지 마라. 나라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 효자다.

 

백성에게 물건을 거두는 것은 열에 여덟아홉이 그릇된 것이다. 이것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다니 안 될 말이다. 나는 고향 집에 남아서 제철에 내 밭을 경작해서 굶주림과 추위를 면할 수 있다.

 

06 | 사화도 꺾지 못한 기개 | 유계린

 

선친(유계린)의 나이 23세 되던 경신년(1500), 할아버지께서 작고하셨다. 선친은 순천에서 여막(廬幕)을 지키며 애통해하고 사모함이 지극하였다. 소상(小祥)을 마치고 일이 있어, 부득이 해남을 왕래하셨다. 그때 어머니(탐진 최씨)와 한 방에서 13일을 같이 지내셨으나, 예(禮)로써 멀리하셨다.

작별할 때가 되자 어머니께서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셨다. "열흘 넘게 머무셨으나 따뜻한 말 한마디 나누지 못했으니, 더욱 슬픕니다." 선친은 민망히 여기며 (조부의 묘소를 향해) 길을 재촉하셨다.

우리 빔 여종 눌비가 그때 그 방 안에 함께 있었던 관계로 전후 사정을 잘 알았다. 눌비는 늙을 때까지도 그때 일을 자주 말하곤 하였다. "앞뒤로 듣고 보아도, 우리 주인님(유셰린)만큼 공경할 만한 분이 안 계십니다."

 

선친은 부부 사이에도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같이 예를 갖추었다. 그러나 애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다. 35년간 함께 사셨는데, 한 번도 첩을 사랑하신 적이 없으셨다.

 

하나뿐인 아우 계근(桂近, 유희춘의 숙부)과는 서로 우애가 깊으셨다. (……) 올벼가 나오는 논(早稻田)을 그에게 다 주었다. (선친에게는) 누이가 두 명 있었는데, 조모께서 생전에 몹시 사랑했다. 그 점을 고려하여 선친은 동기간에 재물을 나눌 적에 좋은 전답과 노비는 다 그들에게 양보하셨다.

자식 사랑도 고르게 하여 편애함이 없으셨다. 새끼에게 먹이를 고루 나눠주는 뻐꾸기의 사랑이 계셨다.

 

노비들도 아끼셨다. 그들의 나쁜 점은 미워하셨지만 장점을 알려고 노력하셨다. 자상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몸에 배셨다. 그런 선친이 작고하시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노비들이 넋을 놓고 곡성을 터뜨려 마치 자기네 친부모가 돌아가신 것처럼 하였다. 마을에 사는 백성들 중에도 우리 집을 드나들던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한숨을 내쉬고 탄식하며, '덕인(德人)이 돌아가셨다'고들 하였다.

 

고을의 여러 자제들이 와서 (선친께) 수업을 받았다. 십수 년 동안 그들을 지도하는 데 조금도 게으름이 없으셨다. 아동에게 글을 가르침에 반드시 먼저 강령(綱領), 즉 대의를 알려주고 그 문맥과 이치를 펼쳤다. 그런 가르침 덕분에 작고한 형님(유성춘)도 어릴 적부터 문의(文義)에 밝았고, 글 또한 잘 지었다.

 

거가십훈

 

① 사람의 기상은 단정하고 정중해야 한다. 경솔하지 마라. 깊이 가라앉은 듯 침착하여 꼭 필요한 말만 하도록 하라.

② 재물과 여색 따위를 탐하면 잘못된 사람이 되고 만다. 너희는 이를 깊이 경계해야 한다.

③ 어버이를 정성껏 섬겨라. 부모님의 편지는 잘 간수해서 한 장이라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④ 가정생활에서는 마음을 공정하게 가져야 한다. 편애하면 사이가 어긋나고 윤리가 무너진다.

⑤ 결코 남에게 아부하여 자신의 절개를 굽히지 마라.

⑥ 일을 처리할 때는 순리에 맞는가를 따지고,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마라.

⑦ 편파적이고 아첨하는 사람은 삿되다. 질박하고 진실하여 변함이 없고 신의가 있는 사람이 옳다. 너희는 마땅히 이를 기억하라.

⑧ 아첨으로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며, 진정한 마음을 가지고 사물을 극진하게 대하라.

⑨ 벼슬의 어려움이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험하다. 먹고살 만하다면 전원으로 돌아갈 줄 알아야 한다. 명예와 이익만 추구하다 풍파를 맞으면 무슨 소용이 잇으랴.

⑩ 《강목(綱目)》에 관한 윤씨(尹氏)의 주석을 읽다가 저절로 춤을 추었다. 뜻이 좋은 글은 반드시 적어두고 마음의 지향을 삼으라.

 

07 | 스승이자 친구이자 아버지 | 김장생

 

침실이나 서재에 훼손된 곳이 잇으면, 신독재 선생이 손수 살펴 보고 수리하였는데 흙손질도 직접 하였다. (……) 선생(김장생)께서는 준치(준眞魚), 식혜, 메밀국수를 즐기셨다. (김집은) 식혜를 끼니마다 챙겨 그릇에 가득 담아 올리고, 국수는 사흘마다 한 번 올리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다. 당시 선생의 집이 매우 가난했다. 그러나 신독재가 음식 일체를 미리미리 준비하여 부족하지 않게 하였다. 만일 상에 올릴 고기가 없으면 몸소 그물을 들고 서당 앞 시냇가로 가서 물고기를 잡아왔다. 밭 갈고 김매고 수확하는 일이며 요역(徭役)을 바치는 일 등 집안의 모든 일을 손수 다 맡아서 어버이께 걱정을 끼치지 않았다. 그는 선생이 타시는 말도 살찌게 잘 보살폈고, 안장과 굴레 등도 항상 빈틈없이 손질하였다. 다니시는 길까지도 항상 깨끗이 쓸었다. 울타리 밑까지도 항상 손을 보았다. 이처럼 보통 사람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온갖 일을 묵묵히 차분하게 다 하면서도 전혀 힘든 기색이 없었다.

 

유심히 살펴보았더니, 사계 선생은 덕성이 얼굴에 넘치고, 기상이 온화하고 단아하셨다. 가까이 모시도 있노라면, 마치 봄바람 속에 있는 것과 같았다.

 

선생(김집)이 서제(庶弟)와 함께 노선생(김장생)을 모시고 계셨다. 마침 서제는 참봉 윤재(尹材)에게 답장을 쓰고 있었는데, 상대를 '존형(尊兄)'이라고 불렀다. 그러자 선생은, '세상 풍속이 그렇지 않다'라고 말씀하셨다. 서제가 고쳐 쓸 때까지 (선생은) 온화한 말로 거듭 타이르셨다. 노선생께서는 묵묵히 그 광경을 지켜보시더니 빙그레 웃으셨다.

 

조정에는 특별히 긴요한 일이 없다. (……) 요즈음 사대부들을 보면, 견고한 뜻은 없고 물러날 생각들만 한다. 반정을 일으킨 사람들끼리만 마음을 함께하니, 한 나라의 일을 과연 두서너 사람끼리 다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제가) 서울 가는 일에 관해 말씀드립니다. (올라오라는) 혹자의 말에도 일리가 있지만, 제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간다 해도) 지금 가는 것은, 임금을 위로하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 더구나 진언(進言)하는 도리는 자기 생각을 그대로 아뢰는 것뿐일 터입니다. (……) 형편을 보아서 진퇴를 결정하여고 합니다. 7일이나 8일 사이에 그리 가서 (아버님을) 모시고 갈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방백(方伯, 관찰사)의 회신이 아직 오지 않았고, 관청사무 또한 너무 많습니다. 9일 전에는 이곳을 떠날 수 없을 듯합니다. (아버님) 말씀대로 여기서 하회를 기다리겠습니다. 혹시 중간에 상황이 달라지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08 | 천재 예술가 | 김정희

 

모름지기 난을 치는 묘리를 터득해야만 한다. 반드시 붓을 세 번 굴리는(三轉) 방식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네가 그려서 보낸 난초를 살펴보니, 붓을 한 번에 죽 긋고는 말았구나. 붓을 세 번 굴리는 방법을 깊이 연구하여라. 요즘 난을 좀 친다고 하는 이들 가운데는 세 번 굴리는 묘법을 아는 이가 없다. 그들은 제멋대로 먹칠을 하고 있다.!

 

(난을 치는 것은) 한낱 작은 기예에 지나지 않소. 그러나 전력을 기울여 공부한다는 점에서 성인(聖人)의 격물지치 공부와 다를 것이 없소. (……) 이렇게 접근하지 않으면 상스러운 서화가나 마귀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오. '가슴속의 책 5천 권'이니 '팔 아래 금강(金剛)'과 같은 문자는 모두 여기서 비롯된 말이라오." (<석파(石坡)에게>, 《완당전집》권2)

 

네가 편지에서 고백한 말, "겨우 두어 글자를 쓰면 글자 글자가 따로 놀아, 결국은 귀일(歸一)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 깨침이 귀하다. 네가 (서법의) 문에 들어갈 수 있는 진경(進境)이 거기서 시작되느니라. 잠심(潛心)하고 힘써야 한다. 괴로움을 참고 이 한 관문을 넘어서야 통쾌한 깨달음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 깨침을 이루기가 지극히 어렵더라도 절대로 물러나지 마라. (……) 나는 지금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아직도 귀일됨을 찾니 못하였다. 너놔 같은 초학자야 말해 무엇하랴. 너의 그 한탄소리를 들으니 나는 도리어 기쁘구나, 장래에 있을 너의 성공이 그 한마디에서 시작되리라.

 

등잔불 아래 일과로 글 읽는 것은 중지하지 않았느냐? 늙은 나는 잠이 없다. 너희들의 글 읽는 소리가 어슴푸레 귓가에 늘 들리는 듯하니, 이 마음이 참으로 괴롭다.

 

지난번 가는 도중에 보낸 편지는 받아보셨지요 (……) 그사이 인편이 있었는데도 답장을 못 받았습니다. 부끄러워 아니 하셨던 가요. 나는 마음이 몹시 섭섭했다오.

 

부인이 먼저 세상을 뜨고 말았소. 먼저 줒는 것이 무에 유쾌하고 만족스러운 일이라고, 나로 하여금 두 눈 빤히 뜨고 홀로 살게 한단 말이오. 푸른 바다도 같고 먼 하늘도 같은 원한이 끝도 없습니다. (<부인예안이씨애서문(夫人禮安李氏哀逝文>)

 

젊어서부터 영특한 이름을 드날렸다. 그러나 중간에 가화(家禍)를 만나 남쪽으로 귀양 가고 북쪽으로 유배 가서 갖은 풍상에 시달렸다. 세상에 쓰이기도 하였지만 버림을 받기도 하였다. (……) 세상 사람들은 그를 송나라의 시인 소동파와 같다고 말한다. (《철종실록》, 철종 7년 10월 10일)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나물이오(大烹豆腐瓜薑菜).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면 족하다(高會夫妻兒女孫).

 

09 | 거룩한 영웅 | 이순신

 

상으로 받은 물건들도 그는 휘하 장수들에게 모두 주었다. 사사로이 차지한 것이라곤 없었다. 또 백성들을 어루만져 편안하게 했다. 부하들에게 농사를 가르쳐 식량을 저축하고, 어업과 소금 제조에 힘써 진중의 생계를 꾸렸다. 덕분에 군량이 넉넉하여 끊어진 적이 없었다. 남도의 백성들도 이것으로 먹고산 이가 수만 집이었다. (윤휴, 《통제사이충무공유사》)

 

혼자 다락 위에 기대 앉아 나라의 형편을 생각하니 아침 이슬처럼 위태롭기만 하다. 그러나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인재가 없고, 밖으로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다. 사직이 장차 어찌 될는지 모르겠다. (《난중일기》, 1595년 7월 1일)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나라 일을 생각하니, 나도 몰래 눈물이 흘렀다. (《난중일기》, 1595년 1월 1일)

 

몸이 몹시 불편하여 홀로 봉창 아래 앉아 있었다. 온갖 회포가 다 일어난다. 이경복에게 장계를 지니고 가라고 보냈다. 경(庚)의 어미에게 줄 노자를 문서에 넣어 보냈다. (《난중일기》, 1593년 8월 13일)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이 몹시 위독하다고 한다. 벌써 죽고 사는 것이 결딴 나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라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은 생각이 미칠 수 없다. 허나 (아내가 죽는다면) 세 아들과 딸 하나는 장차 어떻게 살까. 마음이 쓰리고 아프다. (……) 마음이 심란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홀로 배 위에 앉아 잇었다. 그리운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세상에 어찌 나 같은 사람이 있겠는가! 아들 회는 내 심정을 알고 심히 언짢아하였다. (《난중일기》, 1597년 9월 11일)

 

밤 두 시쯤 꿈속에서 나는 말을 타고 언덕 위로 올라가는데,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속으로 떨어졌다. 쓰러지지는 않았으나, 막 내아들 면이 끌어안은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 저녁 때 천안에서 온 사람이 집안 편지를 가져왔다. 봉투를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떨리고 정신이 아찔하며 어지러웠다. 대강 겉봉을 뜯고 열(예와 동일인)의 편지를 꺼냈다. 겉면에 '통곡' 두 글자가 있었다. 면이 전사했음을 직감했다. (《난중일기》, 1597년 10월 14일))

 

새벽꿈에 고향의 남자 종 진이가 왔다. 나는 죽은 아들을 생각하여 통곡하였다. (……) 저녁 때 코피를 한 되가량 쏟았다. 밤에 앉아서 생각하다 눈물이 절로 났다. 이 아픔을 어찌 말로 다하랴! (……) 비통한 가슴 찢어질 듯하여 참지 못하겠다. (《난중일기》, 1597년 10월 19일)

 

어느새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고 또 통곡했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가. (……)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이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이런 어그러진 일이 어디 있느냐. 천지가 깜깜하고 태양조차 빛이 변햇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 너를 따라가 지하에서라도 같이 지내며 같이 울고 싶구나. 그리하면 네 형들과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을 테지. 아직 참고 살기야 한다마는 마음으로는 이미 죽고 껍데기만 이렇게 남아 울부짖는다. 이렇게 울부짖는다. 오늘 하룻밤을 보내기가 1년 같구나. (《난중일기》, 1597년 10월 14일)

 

 

 

만사 하릴 없다, 관 뚜껑 덮고 누워 괴로워했네.

병의 뿌리 깊었든가, 여러 해 동안 약을 구하기 어려웠네.

거센 바람 궂은 비, 처음 염하던 그날,

처진 나물 찬 과일로 넋 보내는 상 차렸다네.

훨훨 타는 매운 불꽃, 집에 뻗쳐 놀랐다오.

이후로 이 내 몸엔 온갖 병 더하기만.

 

내 딸이여 내 딸이여, 마음과 몸 맑았도다.

심기조차 아름다웠어, 단아하고 성실했지.

갓 자란 난초, 티 없는 구슬

빈산에 널 묻다니,

봄이 와도 모르겠네.

죄 없는 너 보내놓고 이 지경이 되었구나.

백 년이 가도 원통치

내 억장이 무너지네.

어허라! 세 번 노래하니

노래도 구슬프네.

하늘 보고 목 놓아 울건마는

하늘은 묵묵부답이시네.

 

내 딸 세상 뜬 지 어느덧 3년,

해 넘겨 다시 오니 비참하기 그지없어라.

무덤가의 가벼운 바람, 얼굴을 스치네.

내 딸의 넋, 정녕코 바람 속에 엉겨 잇으리.

 

석 자 키에 두어 치 관 두께라니.

북망산 바라보니 눈이 늘 젖도다.

가련할손 사람의 일, 슬퍼한들 무엇 하랴.

야속한 하늘의 뜻, 믿기조차 어렵네.

동야의 울음소리 목메어 차마 못 듣겠네.

퇴지의 재상 차림 헛되고 처량해라.

책상머리 저 서책은 평일의 흔적일래.

그림자라도 부질없는 꿈길에 나타나주렴.

 

내 친구 북방에 갇혀 있구나.

네 지아비는 만리 길 멀다 않고 따라갔다 하니.

가을바람 으슬으슬 끝없는 (내) 걱정.

들국화 술잔에 어리어 비치누나.

 

이것은 스승이신 하서 김 부자(부자는 큰 스승, 곧 김인후)께서 소자에게 주신 것이다. 평생 그 은혜에 보답하지는 못할망정 사모하는 마음 가눌 길 없어 (이 벼루를) 보배처럼 간직해왔노라. 어느 날 일재 (이항) 선생이 벼루를 보시고, 부러워하며 말씀하셨다. "이 벼루는 벼루가 아니라, 바로 발우(불가에서 후계자에게 물려주는 공양그릇)이거니, 그대는 명심하시게."

 

산 늙은이 잠깨어 일어나네.

창포 앞에 세수한다네.

동상(사위 조희문)의 웃음소리, 기쁘게 들려오네.

잠깐 사이에 내 번뇌와 병, 한꺼번에 물러간다오.

 

하늘 위 그대(김인후의 벗) 살고, 나는 만산 가운데 누워 있다네.

(……) 시골 살림은 마을마다 해마다 곤궁하기 그지없다오.

(……)평생 두고 먹을 약을 (그대에게) 부탁하노니, 조자(사위 조희문)로 말미암아 그게 될는지요.

 

뿌리와 가지는 기운이 서로 통한다네. 얼마나 근고하여 이 가풍을 세웠던고. 너희들은 공부하고 몸을 닦아 이어가야 하느니라! 백공(온갖 기술자)도 대대로 기궁한다(부자가 이어나감)더라.

 

정지운은 <천명도>에서, "사단(四端)은 이(理)에서 일어나고, 칠정(七情)은 기(氣)에서 일어난다(四端 發於理 七情 發於氣)"라고 하였다. 사단은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실마리가 되는 네 가지 마음을 가리킨다. 정지운은 이것이 '이(理)', 곧 하늘의 이치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그에 비해 칠정, 즉 희로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 기쁨 · 성냄 · 슬픔 · 두려움 · 사랑 · 미움 · 욕심)의 기분은 그때 그때의 사정에 따라 변하는 기운에서 일어난다고 이해했다.

퇴계의 견해는 약간 달랐다. "사단은 이가 일어난 것이고, 칠정은 기가 일어난 것이다(四端 理之發 七情 氣之發)"라고 했다. 사단과 칠정은 각기 '이'와 '기'로 인하여 이미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이 당시 선비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후일에 퇴계는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에게 보낸 편지에서 과거 자신의 주장을 보완했다. "사단이 일어남은 순수한 이치를 따른 것이라 불선(不善)이 없다. 하지만 칠정의 일어남에는 모두 기가 작용했으므로 선약이 있다(四端之發純理 故無不善 七情之發兼氣 故有善惡)." 간단히 풀이하면, 사단은 절대 객관이요 최고선(最高善)이지만, 칠정은 그렇지 않아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자 기대승은 이렇게 응답했다. "성(性)은 무불선(無不善, 악이 없음)이요, 정(情)은 유선악(有善惡, 선도 있고 악도 있음)임을 인정합니다. 다만 칠정 외에 사단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단도 칠정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기대승은 사단으로 표현되는 인간 본성과 칠정으로 요약되는 인간의 감정에 관한 퇴계의 정의에는 동의하면서도, 사단과 칠정을 '기'의 소관으로 인식했다. 이로써 두 학자 사이에는 사단과 칠정을 둘러싼 오랜 논쟁이 벌어졌다.

논쟁이 거듭될수록 두 사람의 입장은 조금씩 가까워졌다. 마침내 퇴계는 기대승과 자신의 견해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선언했다. '동본이말(同本異末)', 곧 근원은 같으나 지엽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평가였다. 두 사람의 주장이 인간 본성의 표현을 사단으로 인식하고, 이를 절대선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근원이 같다는 것이다. 다만 칠정의 성격에 관해서는 두 사람이 완전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엽적인 문제가 남은 것으로 판단했다.

본래 기대승은 사단칠정에 관한 철학적 질문을 고향 선배 김인후에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김인후가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다. 결국 고봉은 하서 김인후와 쌍벽을 이루었던 대학자 퇴계를 상대하여 역사적인 논쟁을 펼치게 되었다.

 

 

11 | 청백리 | 이항복

 

이항복은 호걸이었다. 그 성품도 시원시원하였다. (……) 그는 젊은 시절부터 이덕형과 나란히 이름을 떨쳤는데, 둘 다 문장가로 성공하여 높은 벼슬에 이르렀다. 일찍이 정철은 이 두 사람을 상서로운 기린과 봉에 견주어 칭송했다. (《광해군일기》의 <이항복 졸기>)

 

네 죄가 수사를 받고 있는 지금, 벼슬을 그만둔다면 네가 허약하고 겁쟁이로 보여 다들 가소롭게 여길 것이다. 일의 형세로 보아도 마땅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성실히 조사에 임해야 한다.

만일 관찰사가 너를 처벌하려고 조정에 건의할 경우에는 말이다, 체포를 하건 파직을 하건 서울의 대간(臺諫)들이 죄를 고발하여 파직에 이를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처리하든지 아무 걱정 말고 맡겨두어라.

결국 이 사건이 무사히 종결되면, 그때는 관찰사에게 이렇게 아뢰면 좋겠다.

"역졸도 백성인데, 비록 가벼운 매질을 하기는 했지만 저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제 마음이 몹시 불편합니다. 다시는 백성들을 볼 면복이 없습니다. 이 일로 수개월 동안 하명을 기다리다가 결국은 무죄 처분을 받아 더더욱 송구합니다."

이런 글을 올리고, 조정의 법에 따라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라. 그러면 이 일이 조용히 마무리될 것이다.

 

내가 듣건대, 양구현 아전들이 네게 원망을 품고 처벌을 바란다고 하는구나. 극히 무례한 일이다.

그래서 말인데, 사정상 더는 그곳에 머물지 못할 형편이거든 말이다, 설사 도주했다는 혐의를 받게 되는 일이 생기더라도, 서둘러서 꼭 빠져나와야 한다. 알겠느냐? 이 결정은 현장에서 직접 형편을 판단할 수 있는, 네 스스로가 알아서 처리할 일이다.

 

시아(時兒)가 곧 《사략(史略)》을 뗀다고 하던데 내 마음이 흡족하고 다행스럽구나. 그런데 책은 한 번 쓱 보아 넘기기만 하면 안 되느니라. 숙독하지 않으면 읽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손자가 그 책을 다 뗐다 해도, 다른 책을 펼치게 하지 말고 두고두고 되풀이 읽게 하여라. 50~60번을 반복하여 읽은 뒤라야 다른 책을 봐도 괜찮다.

 

만일 《사략》을 숙독했다면, 《통감(通鑑)》은 굳이 읽힐 필요가 없다. 그러면 《논어(論語)》를 읽어야 할 텐데, 그 공부는 또 그 나름으로 주의점이 있을 것이다.

 

시아가 일곱 권이나 되는 책(《사략》)을 읽었으면, 문리는 조금 트였겠ㄱ나. 당장 시사(時詞)ㄹㄹ 읽힉, 글쓰기(述作)를 가르쳐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문리는 있어도 글쓰기에 서툴러, 결국 서궤(書櫃, 책장)처럼 쓸데없는 공부로 끝나고 말 것이다. 절실히 경계하고 경계하라.

 

《사략》을 숙독하고 나면, 시아를 데려와야 하겠다. 여기서 내가 시도 가르치고 글쓰기도 가르칠 것이다. 다른 대가(大家)들의 책도 다 가르치고 싶다. 한 가지 책을 끝내면, 네게 보내 시아가 ㅂ모를 만나고 여기서 배운 것을 숙족하게 하자. 숙독이 끝나면, 또 이리로 와서 다른 책을 배우게 하리라. 절반은 서울에 머물고, 절반은 시골에 있게 하는 것이 시아에게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소인배가 기세를 떨쳐 다가올 재앙을 예측할 수 없었다. 두 명의 대신이 밤에 공(이항복)을 찾아와 회유하고 협박하였다. 그래도 공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들가 조카들이 눈물을 흘리며, "가족의 안위부터 살펴줏서!"라며 애원하자, 공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훈계하였다. "나는 선조 임금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재상이 되었다. 이제 늙어 죽을 목숨에 불과하다. 어찌 뜻을 굽히고 임금을 저버려, 스스로 명의(名義)를 무너뜨릴까 보냐. 내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너희는 아무 말도 하지 마라."

 

12 | 비극의 주인공 | 영조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