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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3 조선의 선비들, 인문학을 말하다

 

 

 

김봉규 글 · 사진 | 홍종남 기획

2013, 행복한미래

 

대야도서관

SB089977

 

911.05

김45ㅈ

 

한국 역사 인물을 통해 본 인문학 공부법

 

한국사를 바꾼 인물 No. 07

 

불천위 인물 51人 조

 

김봉· 사진

 

김봉규 님은 1959년 경북 칠곡에서 태어났습니다. 경북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으며, 삼성생명, 한국조폐공사 등을 거쳐 1990년 영남일보에 입사했습니다. 영남일보에 입사한 후 24년 동안 언론인의 길을 걷고 있으며, 영남일보에서는 사회부, 경제부, 문화부 등 편집국 기자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어 문화부장과 체육부장을 거쳐 현재 논설위원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인문학에 관심이 많으며, 한국의 '혼'과 한국의 '문화'에 대한 글을 주로 써 왔습니다. 『조선의 선비들, 인문학을 말하다』는 한국사의 인물을 통한 인문학 공부법을 제시한 책입니다.

그동안 집필한 저서에는 『불맥佛脈, 한국의 선사들』, 『마음이 한가해지는 미술산책』, 『길따라 숲찾아』,『머리카락 짚신』, 『한국의 혼, 누정』등이 있습니다.

 

홍종남 기획

 

【한국사를 바꾼 인물】 시리즈는 한국의 역사 인물을 재조명하는 책입니다. 한국의 역사 인물을 재조명하는 과정에서 '이순신'을 만났고, 그 과정에서 『이순신 파워인맥』, 『이순신 수국 프로젝트』, 『이순신 백의종군』, 『이순신의조일전쟁』, 『조선의 프로젝트 매니저 이순신을 만나다』 등의 책을 기획하였습니다. 앞으로 【한국사를 바꾼 인물】 시리즈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역사 도서를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선비士 ;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에 대한 호칭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인문학人文學 ;

 

인간과 인간의 문화에 관심을 갖는 학문 분야

(출처 : 『두산백과』)

 

불천위不遷位란?

 

국가와 유림이 영원히 기릴 만하다고 인정한 훌륭한 인물을 대상으로 한다. 보통 제사를 지낼 때 4대까지 모시는데, 4대 봉사奉祀가 끝난 뒤에도 없애지 않고 계속 제사를 지내며 기리는 신위神位의 주인공을 뜻한다.

 

차례

 

│프롤로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불천위'

 

1부. 학문學은 왜 하는가?

 
01. 조선 시대 사대부 지식인의 주류 사상을 만들다  |김종직|
02. "먼저 사람이 돼야 한다"며 《소학》의 가르침을 강조한 선비  |김굉필|
03. 벼슬과 출세보다 선비의 복된 삶을 실천하다  |이현보|
04. 벼슬하는 아들이 보낸 감 한 접 돌려보낸, 청렴한 삶  |이   황|
05. 정파에 휘둘리지 않은 재상, 임금도 그에게 의지했다  |노수신|
06. 정치와 학문을 접목시킨 조선 후기 대표적 학자 관료  |이원조|
07. 인재를 알아보는 특출한 혜안, 이순신을 지켜내다  |류성룡|
08. 벼슬보다 학문, 퇴계 학맥 이은 영남 유림의 거목  |류치명|
09. 평생 후학 양성하며 성리학을 꽃피운 '작은 퇴계'  |이상정|
10.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양대 석학의 가르침을 받아 학자의 길을 가다  |오   운|
스페셜 페이지  불천위란?



2부. 정의義를 위해서는 목숨도 돌보지 않는 선비정신

 
11. 선비의 '절의'가 무엇인지 제시하다  |권   벌|
12. 뛰어난 학문과 인품, 청나라 대신도 탄복하다  |이원정|
13. 임금에게도 직언을 서슴지 않은 '대궐 안 호랑이' |김성일|
14.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강직한 삶, 선비의 사표가 되다  |김일손|
15. 천하의 임금에게도 정론을 이야기한 '신하의 정석' |정경세|
16. 대의명분을 위해 목숨도 돌보지 않는 선비의 삶을 살다  |조덕린|
17. 이순신의 인품과 능력을 알아본 선비, 그의 목숨을 구하다  |정   탁|
18. 죽음과 바꾼 불사이군의 절개, '신하의 길'을 보여 주다  |하위지|
19. 죽음을 무릅쓴 선비의 도, 언행일치의 삶을 살아가다  |이   해|
20. 탁월한 언변과 문장력, 대명 외교의 달인되다  |황여일|
스페셜페이지  불천위 문화의 핵심 '불천위 제사'


3부. 백성民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다

 
21. 녹봉까지 털어 가난한 백성을 구휼한 공직자의 자세  |김양진|
22. 권세가를 찾아가지 않고, 사사롭게 공무를 처리하지 않은 관리의 길  |류중영|
23. 조선 시대판 행동하는 지식인, 실사구시의 전형을 보여 주다  |최흥원|
24. 청렴과 결백의 삶, '선비의 정석' 보여 주다  |김계행|
25. 조선의 청백리, 21세기의 복지를 제시하다  |조   정|
26. "공무를 수행하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 자신보다 백성의 안위를 생각하다  |배삼익|
27. 백성의 삶을 알고 선비의 도리를 지킨 지식인의 전형을 보이다  |김응조|
28. 암행어사 이몽룡의 실제 인물, 애민의 삶을 살다  |성이성|
29. 360년간 후세의 물 걱정을 덜게 한 정책을 실천하다  |신지제|
30. 문무를 겸비한 선량한 관리로 역사에 기록되다  |이   정|
스페셜페이지  불천위 제사 참관기



4부. 나라國와 가족을 먼저 생각하다

31. 일흔 살에 전쟁터에 나가 전사한, 조선 무신의 정석  |최진립|
32. 문무를 겸비한 선비, 반란 평정으로 공신에 오르다  |손   소|
33. 부친과 함께 의병 활동에 참가한 선비, 효孝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다  |남경훈|
34. 부하를 혈육처럼 사랑한 무장, 선정의 모범을 보여 주다  |박의장|
35. 효제충신의 삶, 지식인의 실천 덕목을 제시하다  |송희규|
36. 문무를 함께 갖춘 충신, 격문과 대화로 적을 물리치다  |장말손|
37. 깨끗한 벼슬 생활로 조선 시대 청백리의 교과서  |곽안방|
38. 책과 함께 한 선비, 임진왜란 일어나자 의병 일으켜  |정세아|
39. 인사권자도 어찌할 수 없었던 인재 등용의 원칙을 보여 주다  |이동표|
40. 각별한 충효의 실천, 당대 '선비의 귀감'이 되다  |변중일|
스페셜페이지  시호, 그것이 알고 싶다 : 사대부가 최고의 '사후 명함'



5부. 무엇을 하든 마음心 공부가 중요하다


41.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한 '벼슬하지 않은 선비'  |권   구|
42.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 저술  |권문해|
43. '조선 시대의 갈릴레이', 천문학을 꽃피우다  |김   담|
44. 38년 서울 벼슬 생활 동안 셋방을 전전한 청빈의 삶  |박승임|
45. 조선 시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을 살다  |최항경|
46. 학문 불모지 관서 지방에 학문을 일으켜 후진을 양성한 '초야의 현인'  |조호익|
47. 군자의 학문 외길 걸은 '선비의 정석'  |장흥효|
48. 자녀 교육을 위해 벼슬길을 접은 선비, 죽어서 판서가 되다  |김   진|
49. 의義가 아니면 벼슬도 초개처럼 버린다  |김   령|
50. 큰 뜻을 펼치려 한 그 선비, 은거한 까닭은  |이시명|
51. 조선 성리학의 선구자, 독자적인 조선의 학문을 정립하다  |이언적|
스페셜페이지  불천위의 신주와 감실 이야기

│에필로그│ 다시 주목해야 할 불천위종가 문화

 

|1부|

학문學은

하는가?

 

01 조선 시대 사대부 지식인의

   주류 사상을 만들다

 

김 종 직

 

조선시대 사대부 지식인의 주류 사상을 만들다 : 김종직(점필재종택)

 

'아내가 금산에서 돌아오다[室人自金山還]'

- 김종직(1475년 1월)

 

그대는 완산의 새[각주:1]2를 배워서 [我學東門氏]
지난해의 근심을 조금 잊었다네 [稍忘前歲憂]
밤이 깊도록 촛불 밝히고 얘기한 것이 [夜闌秉燭語]
절반은 먹고 사는 걱정이었거늘 [半是營生謨]
인간사 장차 어떠할까 [人事且如何]
백년이 참으로 길기만 하구나 [百世眞悠悠]

 

각주 1 완산조完山鳥 : 새끼를 잃고 슬피 우는 어미 새 이야기로 공자가어에 나온다

각주 2 동문오東門吳 : 춘추 시대 위나라 사람으로 자식이 죽었는 데도 슬퍼하지 않았던 인물

 

점필재가 사용하던 옥벼루 '필옹옥우畢翁玉友'. 성종의 하사품이라고 한다.

점필재종택(고령군 쌍림면 합가1리) 전경. 사당은 오른쪽 건물로 대부분의 종택처럼 종택 본채 오른쪽 뒤에 자리 잡고 있다. 사당에는 중앙에 불천위 신주가, 좌우에는 종손 4대조 신주가 봉안돼 있다.

점필재 흉상(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점필재가 태어나고 별세한 곳인 추원재追遠齎 앞 정원에 자리하고 있다. 이 뒷산에 점필재 묘소가 있다.

 

02 "먼저 사람이 돼야 한다"며

《소학》의 가르침을 강조한 선비

 

김 굉 필

 

"먼저 사람이 돼야 한다"며 《소학》의 가르침을 강조한 선비 : 김굉필(도동서원 전경)

 

움직이거나 머물고 있을 때 항상 평상심을 갖도록 하라 [動靜有常], 항상 마음을 바로 해서 착한 본성을 따르라 [正心率性], 갓을 바로 쓰고 꿇어앉아라 [正冠危坐], 신선이 되고자 하는 도교와 부처가 되려는 불교를 깊이 배척하라 [深斥仙佛], 옛 버릇을 철저히 없애라 [痛絶舊習], 욕심을 막고 분함을 참아라 [窒欲懲忿], 하늘의 뜻을 알고 어짐에 힘쓰도록 하라 [知命敦仁], 가난에 만족하며 분수를 지켜라 [安貧守分], 사치를 버리고 검소함을 따르라 [去奢從儉], 날마다 새로워지는 공부를 하라 [日新工夫], 책을 많이 읽고 깊이 생각하도록 하라 [讀書窮理], 말을 함부로 하지마라 [不妄語],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두 갈래로 하지 마라 [主一不二], 잘 생각하고 게으르지 말고 항상 부지런하라 [克念克勤], 말을 아끼고 말의 의미를 깊이 새기도록 하라 [知言], 일의 기미를 알도록 하라 [知幾], 마지막을 시작할 때처럼 조심하라 [愼終如始], 공경하는 마음을 지니고 성실함이 있으라 [持敬存誠]

- 한빙계(寒氷戒) : 가난하고 얼음처럼 찬 이성으로 지켜야 할 계율

 

김굉필의 불천위 신주를 모시고 있는 한훤당종택의 사당(대구시 달성군 현풍면 지리). 다른 대부분의 종택 사당과는 달리 단청이 칠해져 있다.

한훤당종택(대구시 현풍면 지리). 6 · 25 전쟁 때 사당을 제외한 다른 건물은 대부분 불타버려 새로 지었다.

사당 안에 있는 신주를 넣어 두는 감실. 나라에서 만들어 내려준 감실은 2005년경 도난을 당하고, 지금의 것은 그 모양을 본떠 새로 만든 것이다.

 

03 벼슬과 출세보다 선비의 복된

삶을 실천하다

 

이 현 보

 

벼슬과 출세보다 선비의 복된 삶을 실천하다 : 이현보(농암종택 긍구당)

 

사신史臣은 논한다. 이현보는 일찍이 늙은 어버이를 위해 외직을 요청해 여덟 고을을 다스렸는데 모든 곳에서 명성과 치적이 있었다. (중종실록)

 

경상도관찰사 김당이 아뢰기를 "…(중략)… 신이 이 고을(성주)을 살피러 가니, 고을 사람들이 길을 막고 이현보를 유임시켜주도록 지성스럽게 청했습니다." (중종실록)

 

충주목사에 임명됐다. …(중략)… 번거롭고 가혹한 세금을 개선했다. 잘 다스려 백성들이 기뻐했고, 이곳(충주)을 떠나던 날, 쫓아와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길을 메웠다. (퇴계의 <농암 행장>)

 

이현보는 영달을 좋아하지 않고, 자주 부모를 위해 외직을 구했다. 드디어 부모가 별세하자 직위가 2품이고 건강도 좋았지만, 조정을 떠나기를 여러 차례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식자들은 그에게 만족을 아는 지족지지知足之志의 식견이 있다고 했다. (중종실록)

 

아아! 선생의 선생다운 바는 학문과 현달이 아니고, 벼슬과 나이가 많다는 것도 아니다. 오직 정계를 자진해서 은퇴한 것이라 하겠다. 대개 유사 이래 벼슬한 사람이 용퇴한 경우로는 한나라 소광疏廣 · 소수疏受와 당나라 양거원楊巨源 외에는 다시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우리나라는 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이 수천 년을 내려왔는데, 유독 농암 선생께서 쇠퇴한 풍속 가운데서 분연히 일어나 소광 · 소수 · 양거원의 자취를 이어 용퇴한 것이다. 회재 · 충재께서 전송 대열에 서고, 모재 · 퇴계께서 시를 지어 작별했으니, 소광 · 소수가 떠날 때의 100량 수레가 줄을 이은 영광에 비유하겠는가.

은퇴의 기쁨을 도연명의 '귀거래'ㅇ[ 비유하고, 그의 '귀거래사'를 본떠 지음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말뿐이오 간 사람 없어

전원이 황폐하니 아니 가고 어쩔 꼬

초당에 청풍명월이 나며 들며 기다리나니

- '효빈가', 이현보가 은퇴의 기쁨을 도연명의 '귀거래'ㅇ[ 비유하고, 그의 '귀거래사'를 본떠 지음

 

경상도관찰사 시절(1537년)의 농암 초상화. 보물 제872호. 대구 동화사 화승畵僧 옥준이 그린 것으로 전한다.

이현보가 46세 때인 1512년 고향집 옆 농암 바위 위에 지어 어버이를 즐겁게 해드린 정자 애일당愛日堂. 애일당의 '애일'은 '부모가 살아계신 나날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의미다.

이현보의 효행과 경로 정신을 기려 선조 임금이 이현보의 아들(매암 이숙량)에게 내린 휘호인 '적선積善'.

 

04 벼슬하는 아들이 보낸 감 한 접

   돌려보낸, 청렴한 삶

 

이 황

 

벼슬하는 아들이 보낸 감 한 접 돌려보낸, 청렴한 삶 : 이황(퇴계 묘소)

 

선생의 학문은 명백하고 쉽다. 선생의 도는 광명정대하다. 선생의 덕은 온화한 바람이요, 경사스러울 때 이는 서운瑞雲이다. 선생의 글은 의복이며 음식이다. 선생의 마음과 도량은 가을 하늘 밝은 달이며, 탁 틔어 보이는 얼음 유리 항아리다. 선생의 기상은 순결해 아름답게 갈고 닦은 금과 옥이다. 산악처럼 무겁고 소와 샘처럼 깊고 고요하다. 바라보면 안다. 선생이 성덕군자가 되었음을…….

 

경의 나이 비록 일흔이나 다른 사람과 같지 않기 때문에 허락하지 아니하노라. 그 관직을 교체하지 않는 것은 경의 어진 덕을 생각해 우선 갈망하는 것을 들어준 것이지 사면하고 물러가는 것은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정으로 돌아오는 날을 내가 날마다 바라니, 역마를 타고 올라와서 나의 바람에 부응하기 바란다.

- 선조 유지(1570년)

 

네가 어버이를 봉양하는 마음으로 나에게 여러 가지 물건을 보내왔구나. 그러나 이러한 물건들은 한 고을을 다스리는 네가 사적으로 어버이에게 보내서는 안되는 매우 부적절한 것들이다. 나는 처음부터 너의 고을에 번거로움을 끼치지 않으려고 하는데, 네가 이처럼 물건을 보내오면 내 마음이 어떠하겠느냐. …(중략)… 나의 뜻을 자세히 살펴주기 바란다.

- 벼슬하는 아들이 집으로 물건을 보내오자 이황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략)… 벼슬을 하고 있으면 많이 접근해 오므로 다른 때보다 더 조심해야 한다. 평범한 재주의 네가 쇠잔한 고을을 맡아 공사의 일을 양쪽 다 능히 해낼 수 있을까. 이것이 내가 깊이 근심하는 일이다. 그런데 관물官物을 인정 쓰는 데 다 써버린다는 것은 국가에 죄를 짓는 일이다. 봉화에서 보낸 물건은 누가 갖다준 것이더냐? 이번에 보낸 감 한 접은 되돌려보내니 관에서 쓸 곳에 충당해라.

- 1570년 아들이 봉화에서 감 한 접을 보내오자 퇴계는 편지와 함께 감을 돌려보냈다.

 

모든 일에 삼가고 조심해라. 후회스럽고 부끄러운 일은 저지르지 마라. 관리의 마음은 지극히 맑아야 하고,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부정한 일을 저지르고 만다. 항상 조심하고 경계하라.

- 이 황

 

부부는 남녀가 처음 만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친밀한 관계를 이룬다. 또 한편 가장 바르게 해야 하고, 가장 조심해야 하는 처지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의 도가 부부에서 발단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은 모두 예와 존경함을 잊어버리고 서로 버릇없이 친하여, 마침내 모욕하고 거만하며 인격을 멸시해버린다. 이러한 일은 서로 손님처럼 공경하지 않은 때문이다.

- 손자가 장가를 갔을 때 보낸 편지

 

퇴계의 묘소 앞에 있는 비석. 퇴계의 유언대로 앞면에는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 늘그막에 도산으로 물러나 은거한 진성이공의 묘)라고 새겨져 있다.

 

퇴계가 남긴 유훈

 

첫째, 나라에서 베풀어 주는 장례는 사양하라.

둘째, 기름과 꿀로 만드는 과자를 쓰지 마라.

셋째, 비석을 세우지 마라.

넷째, 비문을 기고봉(기대승)한테 쓰게 하지 마라.

다섯째, 모든 예법은 현재에 마땅하게 하면서 옛날에서 멀게 하지 마라.

 

퇴계 불천위 신주가 들어 있는 감실의 모습.

 

05 정파에 휘둘리지 않은 재상,

임금도 그에게 의지했다

 

노 수 신

 

정파에 휘둘리지 않은 재상, 임금도 그에게 의지했다 : 노수신(봉산서원)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지키는 데는 태산 같은 공적이 있고, 임금을 섬기는 데는 숨김 없이 극진하였으며, 백성을 위해서는 올바른 제도를 실시했다. 효심은 지극했으며 학문이 깊고 문장은 뛰어났다.

- 1694년, 숙종이 소재穌齎 노수신(1515~1590년)에게 시호 '문간文簡'을 내리면서 보낸 사제문賜祭文에 담긴 내용

 

누가 기생을 보내 날 부르는가

나는 이런 것 즐기러 여기 온 게 아닌데

조각배 저어 돌아가야 할 시간 늦었구나

아름다운 산수가 세상 밖 그림이네

- 친구들과 함께 동호東湖로 나가 산보하던 중 호당학사湖堂學士가 기녀를 보내 노수신을 불렀을 때 거절으 뜻을 담은 시

 

그대가 이 붓을 주었으니

그대로 인해 내 글이 능해지리라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

훗날 청운의 꿈을 펼치리

- 6세 때(1520년) 어떤 이가 붓을 선물로 주자 지었다는 시

 

내가 이 섬에 들어온 후부터                                …(중략)…

이 글을 몇 번이나 썼던가                                   작은 전복 열 개나 익었고

한 번 쓰면 백혼이 끊어지니                                큰 숭어 세 마리는 포 떠 두었지

혼이 있은들 얼마나 남았으랴                              제주 감귤도 열여섯 개

지금 이미 15년이나 되는데                                 김이며 아홉 단 나물들

…(중략)…                                                         어찌 하루아침에 갑자기 구했을까

오늘 새벽 인편을 만나                                        여러 날에 걸쳐 서서히 모아두었네

모아두었던 것 모두 꺼냈네

- 노수신이 진도 유배시절, 어버이에게 음식물을 챙겨 보낸 후 지은 시

 

 

 

 

 

노수신이 세운 그의 조부 노후盧珝와 부친 노홍盧鴻의 신도비神道碑. 비문 글씨는 상주시 화북면 소곡리에 있었으나 1992년에 옮겨 지금은 소재종택(상주시 화서면 사산리) 뒤에 있다.

소재종택 사당인 도정사道正祠.

 

06 정치와 학문을 접목시킨 조선 후기

   대표적 학자 관료

 

이 원 조

 

정치와 학문을 접목시킨 조선 후기 대표적 학자 관료 : 이뤈조(만산일폭루)

 

기호학자는 주로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일삼아 오류가 없을 수 없고, 영남학자는 오로지 답습하는데 치중하기에 전혀 참신함이 없다. 답습하기만 하여 실제로 깨닫는 바가 없는 것보다는 차라리 오류가 있더라도 스스로 터득해 깨달음이 있는 것이 좋다. 언뜻 보면 길을 따라가며 한결같이 정자·주자의 전통을 따르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공허한 말일 따름이니, 남에게 베풀어도 증세에 따라 처방하는 이익이 없고 스스로 간직해도 심신으로 체험하는 효과가 없다.

- 이원조

 

학문의 길은 선과 악을 분별하여 착실하게 선을 실천하는 것일 뿐이다. 선이 무엇인지 아는 것보다 더 큰 지혜가 없고, 선을 지켜 나가는 것보다 더 큰 어짊이 없으며, 선을 실천하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없다. 그러므로 천하만사는 선을 따르는 것일 뿐이다.

- 이원조

 

응와종택 사랑채인 사미당. 이 사미당 마루에 불천위 제사상이 차려진다.

 

오늘날 나라 일을 맡은 자들은 오직 눈앞의 일만 처리하며 구차하게 세월 보내기를 계책으로 삼고 있다. 사사로움을 좇아 일을 처리하면서 '부득이하다不得已'라고 하고, 고치기 어려운 폐단이 잇으면 '어찌할 도리가 없다無奈何'하니, '부득이' '무내하' 이 여섯 자야말로 나라를 망치는 말이다. 요즘 같이 기강이 해이해진 시기에 정령을 시행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바가 없지 않지만, 위에 있는 자들이 만약 과감한 뜻으로 쇄신해 백관들을 독려한다면 천하에 어찌 끝내 고치지 못할 폐단이 있을 것이며, 어찌 참으로 부득이한 일이 있겠는가. 예를 들어 과거장에서 불법이 자행되는 폐단이 '부득이', '무내하'가 특히 심한 경우이지만, 이를 막으라는 어명이 내려질 때는 분명 실효가 있어 급제자 명단이 발표되기만 하면 사람들이 모두 공정하다고 생각하니, 이로 미루어보면 폐단을 고치고 바꾸기가 어렵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기회를 놓치게 되는 까닭은 매번 규범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견고하지 못하고 법의 시행이 엄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한 것은 오로지 수령의 탐학으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탐학이 수령의 죄만은 아니다. 재상이 사치하는 까닭에 수령에게 뇌물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고, 수령은 재상의 요구 때문에 백성을 찾취하지 않을 수 없다. 일 년에 한 번 하던 문안 인사가 계절마다 하는 문안으로 바뀌고, 계절 문안은 매월 문안으로 바뀌었다. 옛날에는 음식이나 의복으로 하던 문안이 지금은 순전히 돈으로 변해 약값이라는 명목을 삼는데, 많으면 1천 냥이요 적어도 1백 냥을 내려가지 않는다. …(중략)… 뇌물을 받는 재상부터 먼저 형벌로 다스리는 것이 사치한 세태를 혁파해 질박하고 검소한 풍속으로 되돌리는 발본색원의 방법이 될 것이다.

- 이원조

 

사료명을 짓고 난 이듬해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읽었다. 깊고도 그윽한 맛이 있었다. …(중략)… 평생 동안 이 경지를 추구하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병이 심해져 전념해 읽을 수 없게 되자 손가는 대로 《당송팔가문》을 한 권 잡고 한가하게 읽어 내려갔다. 처음에는 송구스런 마음으로 놀라울 따름이었는데, 읽어 내려가는 도중에 달콤히 취했다가 끝내는 황황히 추구하여 얻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전에 무슨 책을 읽었는지조차 잊어버렸으니, 어물전에 오래 있다가 비린내를 느끼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중략)… 오호라 반성하리로다.

- 이원조

 

응와 불천위 제사는 신주와 함께 응와 이원조의 초상을 모셔놓고 지낸다.

 

07 인재를 알아보는 특출한 혜안,

이순신을 지켜내다

 

류 성 룡

 

인재를 알아보는 특출한 혜안, 이순신을 지켜내다 : 류성룡(충효당)

 

조선 전역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군량 운반에 지친 노인과 어린아이들이 곳곳에 쓰러져 있었다. 힘이 있는 자들은 모두 도적이 되었으며, 전염병이 창궐하여 살아남은 사람도 별로 없었다. 심지어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잡아먹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죽이는 지경에 이르러 길가에는 죽은 사람들의 뼈가 잡초처럼 흩어져 있었다.

- 《징비록》

 

나도 명나라 군사들과 함께 들어갔는데, 성 안의 백성들은 백에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살아있는 사람조차 모두 굶주리고 병들어 있어 얼굴빛이 귀신 같았다. 날씨마저 더워서 성 안이 죽은 사람과 말이 썩는 냄새로 가득했는데, 코를 막지 않고는 한 걸음도 떼기가 힘들었다. 건물은 관청과 개인 집을 막론하고 모두 없어져버렸고, 왜적들이 거처하던 숭례문에서 남산 밑에 이르는 지역만 조금 남아 있었다. 종묘와 대궐, 종루 등 대로 서쪽에 자리 잡은 모든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재로 변해 잇었다. 나는 먼저 종묘를 찾아 엎드려 통곡했다.

- 《징비록》

 

100년에 걸친 태평성대로 인해 우리 백성들은 전쟁을 잊고 지내다가 갑자기 왜적의 침입을 맞게 되자 우왕좌왕하다가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 《징비록》

 

당시 적은 파죽지세로 몰아닥쳐 불과 10일만에 서울까지 들이닥쳤으니,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손을 써볼 겨를이 없었으며, 용감한 장수라도 과감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그런 까닭에 민심 또한 흩어져 수습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 방법이 서울을 함락시키는 데 뛰어난 계략이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적은 항상 이긴다고만 생각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여러 갈래로 흩어져 마음대로 날뛰었다. 그러나 군사는 나누면 약해지기 마련이다. 천 리에 걸쳐 전선을 형성하고 시간이 지나니, 아무리 강한 화살이라 해도 멀리 가다 보면 헝겊 한 장 뚫지 못하는 이치와 같았던 것이다. …(중략)… 왜적의 계략이 잘못된 것은 우리에게는 천우신조였다.

- 《징비록》

 

나의 한 평생에 세 가지의 회한이 있으니, 군주와 어버이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 것이 그 첫째 한이요, 관작과 위계가 너무나 지나쳤는데도 일찍이 물러나지 못한 것이 그 둘째의 한이요, 도道를 배울 뜻을 가졌음에도 이를 성취하지 못한 것이 셋째 한이다.

- '세 가지 회한三恨'

 

서애 류성룡의 위패가 모셔진 병산서원(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입교당에서 바라본 만대루와 병산 풍경.

서애 불천위 제사상에 오르는 중개떡. 밀가루와 술, 꿀 등으로 만들며, 류성룡이 생시에 좋아했던 음식이다.

제수가 진설된 서애 불천위 제사상.

 

08 벼슬보다 학문, 퇴계 학맥 이은

   영남 유림의 거목

 

류 치 명

 

 

벼슬보다 학문, 퇴계 학맥 이은 영남 유림의 거목 : 류치명(만우정)

 

초산서 회가回駕하실 때 진지 지을 쌀이 없어서 아랫마을 망지네 댁에 가서 쌀을 꾸어 밥을 지었나니라. 부인께서는 평생에 모시치마를 입어보지 못하였다가 선생이 초선부사를 가시게 되자 말씀하시기를 사랑에서 지금 만금태수를 가시니 모시치마를 얻어 입어보겠다 하셨으나 불행히 돌아가시니 관 안에서 모시치마를 썼나니라.

- 《가세영언 家世零言》

 

정재 불천위 신주 감실과 신주(정재와 두 부인 신주). 신주 덮개 색깔은 원칙이 있으나 종가별로 그 색깔이 다양하다.

정재종택(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전경. 불천위 제사를 지내던 곳이나 지금은 종손이 사는 안동시내 아파트에서 지낸다.

정재종택 사당. 불천위 신주(맨 서쪽)와 4대조 신주가 모셔져  있다.

 

09 평생 후학 양성하며 성리학을 꽃피운

   '작은 퇴계'

 

이 상 정

 

평생 후학 양성하며 성리학을 꽃피운 '작은 퇴계' : 이상정(고산서원)

이상정 신주를 봉안하고 있는 대산종택 사당. 종손 4대조 신주가 함께 봉안돼 있다.

이상정의 대표적 저술 중 하나인 《이기휘편理氣彙編》과 이상정의 글씨인 '만수재晩修齎' 현판.

 

10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양대 석학의

가르침을 받아 학자의 길을 가다

 

오 운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양대 석학의 가르침을 받아 학자의 길을 가다 : 오운(죽유신주 감실)

 

죽유는 평생 아래의 아전들과 귀를 대고 말한 적이 없다. 이 점이 다른 사람들이 미치기 어려운 점이다. 또한 자기를 굽혀서 귀한 사람을 받들지 않았다. 아첨하지도 않았고, 자신을 더럽히지도 않았으니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

- 오운을 가까이서 보아왔던 선비의 평

 

임금이 오운에게 하사한 《대학》. 가려진 부분에 오운 이름이 쓰여 있다.

죽유종택에 전해 내려온 돌화로. 오운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1920년 대홍수 후 이건한 현재의 죽유종택(고령군 쌍림면 송림리). 오른쪽 건물은 사당이고, 왼쪽 건물은 사랑채다. 이건 전의 죽유종택(쌍림면 매촌리)은 죽유 오운 아들이 처음 건립했다.

불천위 문화의 근간인 불천위 제사는 종가의 사당에 봉안된 불천위 신주를 제청으로 모셔오는 축주(出主) 의식으로 시작된다. 사진은 서애동택인 충효당(안동 하회마을)의 불천위 제사 때 신주를 모셔오는 모습(2010년 6월).

 

 

|2부|

정의義를 위해서는

목숨도 돌보지

않는 선비정신

 

 

11 선비의 '절의'가 무엇인지

   제시하다

 

권 벌

 

 

선비의 '절의'가 무엇인지 제시하다 : 권벌(청암정)

 

요순은 천하를 만백성의 소유로 보고 자기 자신을 그것과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임금이 그 자리를 천하의 공기公器로 여긴다면 그의 용심은 넓게 두루 미쳐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힐 수 있지만, 만약 천하를 자기의 소유물로 여긴다면 사사로운 일만을 생각하고 또 욕심이 일어나게 되어 자신을 위하고 욕심을 채우는 일만 하게 됩니다. …(중략)… 말세의 임금들은 그가 있는 지위를 자신의 사물로 여긴 나머지 조금만 급박한 일이 있을 것 같으면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 없앴는데, 이는 모두 그 사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 권벌, 1518년(중종 13년) 6월

 

당시 사람들은 그들의 억울함을 알면서도 감히 구제하지 못했는데, 권벌만은 이에 맞서 그들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음이 명백하다는 것을 힘껏 논계하였다. 충성스러운 걱정이 말에 나타나고 의기가 얼굴색에 드러나 비록 간신들이 죽 늘어서서 으르렁거리며 눈을 흘기는데도 전혀 되돌아보지 않고 늠름한 기상이 추상같았으니, 절의를 굳게 지키는 대장부라 일컬을 만했다.

- 사신史臣의 논평

 

정순붕鄭順朋의 소疎가 이미 올라갔으니 류관 등이 뼈도 못추리게 되어 구제할 수 없는 형세였는데 …(중략)… 권벌은 그들의 무죄를 주장하였으니 대개 머리를 베고 가슴에 구멍을 낸다 해도 말을 바꾸지 않을 실로 무쇠 같은 사람眞鐵漢이었다.

- 사신의 논평

 

평소 글 읽기를 좋아해 비록 관청에 숙직하는 자리에서도 책 읽기를 멈추지 않았고, 성현의 언행이 절실하고 요긴한 대목을 만나면 반드시 아들과 조카를 불러 펴 보이며 반복해 가르쳤다. 늘 말하기를 '학문은 반드시 자기를 위한 것이요, 과거시험은 지엽적인 일일 뿐'이라고 했다. 말년에는 더욱 《근사록》을 좋아해 소매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중종이 재상 등을 불러 후원에서 꽃을 구경하고 각기 즐기면서 취하라고 한 적이 있었다. 공이 부축받고 나간 후 궁중의 어떤 이가 작은 《근사록》을 주웠는데, 누구의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 임금이 말하기를 '권벌이 떨어뜨린 것이다'하시고는 명하여 이를 돌려보냈다.

- 이황, 권벌 행장行狀에서

 

 

권벌이 도포 소매에 넣어 항상 지니고 다녔다는 《근사록》. 보물로 지정돼 있다.

충재종택 사당 전경. 다른 종가와 달리 불천위 제사를 지내는 제청을 사당 옆에 별도로 건립해 사용하고 있다. 오른쪽이 제청이 있는 갱장각이다.

충재 불천위 제사 때 사용하는 동곳떡을 쌓고 있는 모습(충재종가 제공).

 

12 뛰어난 학문과 인품,

   청나라 대신도 탄복하다

 

이 원 정

 

 

뛰어난 학문과 인품, 청나라 대신도 탄복하다 : 이원정(동산재)

 

봄은 오고 또 오고 풀은 푸르고 또 푸르네

나도 이 봄 오고 이 풀 푸른 것처럼

어느 날 고향에 돌아가 노모를 볼 수 있으리요

- 《사친곡思親曲》

 

 

이원종의 유품 중 갓 끈을 꿰는 관자貫子와 갓 장신구인 옥로.

귀암종택 사당 내 귀암 이원정 부부 신주와 감실. 부부의 신주가 별도의 함에 봉안돼 있다.

최근 중건한 귀암종택 사당과 사당 내부 모습.

 

13 임금에게도 직언을 서슴지 않은

'대궐 안 호랑이'

 

김 성 일

 

 

임금에게도 직언을 서슴지 않은 '대월 안 호랑이' : 김성일(학봉종택)

 

류성룡과 조목, 김성일은 이황의 문하에서 배웠다. 김성일은 마음가짐이 굳세고 꿋꿋하며 학문이 독실했다. 모습은 고상하고 위엄이 있으며, 행동거지는 가지런했다. 바른 말이 조정에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으나, 그 충성과 절개가 빼어나게 남달라서 다른 사람들이 감히 다른 의견을 내지 못했다.

- 학봉鶴峯 김성일(1538~1593년)을 평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요사이 추위에 모두들 어찌 계신지 가장 염려하네. 나는 산음고을에 와서 몸은 무사히 있으나 봄이 오면 도적이 대항할 것이니 어찌할 줄 모르겠네. 또 직산 있던 옷은 다 왔으니 추워하고 있는가 염려 마오. 장모 뫼시고 설 잘 쇠시오. 자식들에게 편지 쓰지 못하였네. 감사라 하여도 음식을 가까스로 먹고 다니니 아무 것도 보내지 못하오. 살아서 서로 다시 보면 그 때나 나을까 모르지만, 가필 못하네. 그리워하지 말고 편안히 계시오. 섣달 스무나흗날.

- 안동의 부인에게 한글로 보낸 편지

 

 

- 학봉이 사용하던 안경과 안경집.

학봉이 자신의 부인에게 보낸 한글 편지.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에 있는 백운정에서 바라본 반변천 풍경. 백운정은 김성일의 형인 귀봉 김수일이 지었으며, 김성일이 형제들과 학문을 닦던 정자다.

학봉종택(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안채 대청에 차려진 학봉 불천위 제사상. 제청에 내걸린 대형 탁본('中流砥柱', '百世淸風') 족자가 인상적이다.

 

14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강직한 삶,

   선비의 사표가 되다

 

김 일 손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강직한 삶, 선비의 사표가 되다 : 김일손(자계서원)

 

옛말에 '40세는 되어야 벼슬살이에 힘쓸 수 있다'고 했는데 …(중략)… 지금 신은 나이 30 미만이온데 화려한 요직인 한원翰苑(예문관), 옥서玉署(홍문관), 사관과 이조전랑 등을 거치면서 승진해왔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청선淸選'이라고 합니다. 신이 무슨 재능이 있어 이 분에 넘치는 직책들을 감당하겠습니까. …(중략)… 속히 신의 직임을 교체해 물러나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10년의 여가를 주시어 독서함으로써 수도하고 학업의 발전을 얻은 다음에 종사하게 하여 주소서.

- 1492년 이조좌랑의 부름을 받고 올린 상소

 

김일손은 문장과 학문이 모두 뛰어나며 재능과 기량을 겸비했고…(중략)… 또한 지략이 넓고 깊어 가히 낭묘廊廟(의정부)의 직책을 맡길 만하다. 나는 그의 언론을 듣고자 누차 백부栢府(사헌부)의 요직을 맡긴 바 있고…(중략)… 비록 다른 관직에 제수하더라도 반드시 경사經史(홍문관과 춘추관)의 직임을 겸하도록 했는데 장차 보상지관輔相之官(수상)으로 크게 쓰고자 함이다. 그런데 다만 그의 나이가 젊어 그의 뜻은 크고 성품은 너무 준엄하며, 기상은 너무 날카롭고 언론은 심하게 곧으며 행적은 너무 고상하니 마땅히 그의 노성老成을 기다려 쓸 수밖에 없구나.

- 성종이 탁영에 대해, 경연에서 참찬관參贊官 조위曺偉에게 한 말

 

 

김일손이 애용하던 거문고 '탁영금'(보물 제957호).

김일손 시호(文愍) 교지(1835년). 보기 드물게 금박을 섞어 만든 붉은 장지를 사용했다.

성종이 김일손에게 하사한 벼루 '매화연'

 

15 천하의 임금에게도 정론을 이야기한

'신하의 정석'

 

정 경 세

 

 

천하의 임금에게도 정론을 이야기한 '신하의 정석' : 정경세(계정)

 

전하께서 덕을 닦고 뜻을 세움에 있어서 능히 게을리함이 없다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당파를 짓는 습속이 그대로 남아있어 서로 협력하는 공효는 드러나지 않았으며, 무비武備를 강화하는 계책이 정해지지 않아서 적들을 토벌할 기약은 아득하기만 합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어진 이를 구하고 계책을 정하는 일에 능히 해이해지지 않았음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중략)… 삼가 바라건대, 굳은 신념으로 변하지 말고 힘써 덕을 지켜 일신의 사욕으로 공도公道를 해치지 말고, 안일로 태홀怠忽을 싹틔우지 말고, 목전의 성과를 생각하며 서둘지 말고 끊임없이 뜻을 견지하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자연히 날로 성상의 덕이 새로워지고 정치의 교화가 높아질 것입니다. 혹시라도 구습을 그대로 따르면서 방심해 지나치거나 점차 안일을 탐해 세월을 허송하는 버릇이 생긴다면, 뜻은 날로 나태해지고 기운이 날로 위축되어 세월은 유수처럼 흐르는데 만사는 아득하여 일찍이 품었던 뜻을 하나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된다면 다만 신들만이 전하를 위해 애석해 할 뿐만 아니라, 천년 뒤에도 반드시 전하를 위해 길게 탄식을 토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 1623년(인조 1년) 인조가 반정으로 친정하게 되고, 정경세가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된 후에 올린 차자 내용 중 일부

 

백성을 도탄에서 구해내는 일은 힘을 관대하게 쓰고 후생에 노력함으로써 이뤄져야 하고, 그 두 가지의 근본은 절검節儉에 있습니다. 듣건대 근년에 국가의 세입이 세출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니 나라꼴이 말이 아닙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관혼상제는 날로 허례허식에 빠지고, 시정 상인들의 돈을 빌려 다음 해의 세입으로 끌어들여 쓰면서도 오히려 절검할 줄 모르는데, 어찌 군주로서 마치 추운 날씨에 구걸하는 어린아이가 살아갈 방책을 궁리하는 식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단 말입니까.

- 만언소萬言疏

 

 

우복종택 사당(상주시 외서면 우산리). 이 사당은 종택 울타리 안에 있고, 역시 불천위인 우복 정경세의 6대손 입재 정종로 신주는 종택 울타리 밖의 별도 사당에 모시고 있다.

우복종택 사당에 걸린, 우복 정경세를 위한 사제문 현판. 정조가 내린 사제문이다.

 

16 대의명분을 위해 목숨도 돌보지 않는

   선비의 삶을 살다

 

조 덕 린

 

 

대의명분을 위해 목숨도 돌보지 않는 선비의 삶을 살다 : 조덕린(옥천종택 전경)

 

우리나라는 땅이 좁은데 그 속에서 또 당론이 갈라져 화합하지 못하고 공평하지도 못한 상황이며, 그것이 이미 고질이 되었습니다. 근자에는 둘이 셋이 되고, 셋이 넷으로 되어 한 쪽만 뽑아 쓰고 셋을 버리며, 발령을 내기도 전에 미리 당색黨色을 먼저 정하게 되니, 어찌 어진 이를 얻을 수 있으며 정치가 바르게 될 수가 있겠습니까.

- 십조목의 상소문十條疏

 

우리나라는 중국 · 일본과 국교를 맺어 해마다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고, 근래에는 흉년이 거듭되어 조세수입이 감소해 국고는 거의 고갈상태이고, 군수 비축도 바닥이 났으나 낭비되는 비용이 바닷물처럼 과다해 돈 쓰기를 분토糞土처럼 하면서도 책임있는 관리는 그 자리를 물러나지도 않습니다. 이래서야 천승天乘의 나라라도 어찌 가난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 조덕린이 올린 십조소 중 일부

 

그때를 당하여 조정은 뒤숭숭하고 어지러워 당론만 제멋대로 주장하니 나라를 걱정하고 근심함을  참으면서 보고 넘길 수가 없어서, 간장의 피를 토해 티끌만큼이라도 효과가 있기를 도모하고자 했다.

- 십조소에 대해 번암樊巖 채제공(1720~1799년)의 평

 

이로부터 영남의 사기가 더 한층 돋구어졌으니[從此矯南增士氣]

세상에는 바야흐로 글 읽는 인물 있음을 알았도다[世間方有讀書人]

하지만 그대는 험한 귀양길을 예사로이 잘도 가시니[猶然視若康莊去]

평생에 쌓은 수양의 힘을 알겠노라[定力平生見左符]

- 이만유李萬維

 

 

조덕린이 이인좌의 난(1728년) 평정에 참여하고 고향에 돌아온 후에 세워 제자를 가르치던 창주정사滄洲精舍. 영양 청기에 있었으나 현재는 옥천종택 옆에 있다. 창주는 조덕린의 호다.

 

인생이 만났다가 헤어질 때가 있는 것이니 어찌 한탄하리오마는 몸에 악명을 입었으니 세상에 욕이 되었다. 비록 내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오히려 너희가 더욱 힘써 수양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 조덕린이 집에 있는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옥천종택 사당(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이 사당에는 옥천 조덕린 불천위 부부 신주만 봉안돼 있다.

 

 

17 이순신의 인품과 능력을 알아본 선비,

   그의 목숨을 구하다

 

정 탁

 

 

이순신의 인뭎과 능력을 알아본 선비, 그의 목숨을 구하다 : 정탁(읍호정)

 

 

벼슬 자리 두루 두루 거쳤으나

여러 사람의 바람에 다 부합되었네

재상의 자리에 오르고

정권 핵심부서에 발탁되었지만

치우침도 기울어짐도 없어서

공정한 도리와 균형을 유지했고

과격하지도 부화뇌동하지도 않아서

훌륭한 명성 오래도록 누리었네

많은 관료들이 모범으로 삼았고

과인의 덕을 의지하여 이루었으니

물을 건널 때의 배와 같았고

가물 때 소낙비와 같았네

예전에 있었다고 들었던 것

오늘날 그것을 보았네

- 약포가 별세하자 선조 임금이 칙사 예조좌랑 조정을 보내 제사 지낸 글賜祭文의 일부

 

인재란 것은 나라의 보배로운 그릇이라 비록 통역관이나 회계 맡은 사람도 진실로 재주와 기술이 있기만 하면 모두 사랑하고 아끼는 것이 마땅하거늘, 하물며 장수의 자질을 가진 자로서 적을 막아내는데 가장 관계 깊은 이에 대해서 오직 법률만 가지고 논하고 조금도 용서함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순신은 참으로 장수의 자질을 가졌고, 또한 해전과 육전에 재주를 겸비해 못하는 일이 없는 바, 이런 인물은 쉽게 얻지 못할 뿐더러 변방 백성들이 의지하고 적들이 무서워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죄명이 엄중하여 조금도 용서할 도리가 없다며 공로와 허물을 비교해보지도 않고, 또 공로를 더 세울만한 능력이 있고 없음도 생각하지 않으며, 그리고 그간 사정을 찬찬히 살펴봄도 없이 끝내 큰 벌을 내리는 데까지 이르게 하면, 앞으로는 다른 모든 공로 있는 자들도 스스로 더 나아가지 않을 것이며, 능력 있는 자들도 또한 스스로 더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일개 순신의 죽음은 아깝지 않으나 국가에 관계됨이 가볍지 않으니 어찌 우려되는 중대 사안이 아니겠습니까. …(중략)… 비옵건대 은혜로운 하명으로 문초를 특감해 주어 그로 하여금 공로를 세워 스스로 보람 있게 하시면 성상의 은혜를 천지부모와 같이 받들어 목숨을 걸고 은혜를 갚으려는 뜻이 반드시 누구 못지 않을 것입니다.

- 신구차伸救箚

 

평생의 독서는 늘 시국의 어려움을 구제하기 위한 일이었는데[讀書常擬濟時艱]

분주한 벼슬살이로 얼마나 오랜 세월 보냈던가[奔走紅塵幾暑寒]

왜구의 난리 칠년 동안 한 가지 계책도 내지 못하고[寇亂七年無一策]

도리어 백발이 되어서야 비로소 고향에 돌아온 것이 부끄럽도다[還白髮始歸山]

- '우회寓懷'

 

경연 중에 우연히 듣고 영정을 모셔와 보니 그 모습이 거룩하고 의연하구나. 선조조의 유명한 재상이 별세한 지 100년이 지난 후에 화상으로나마 다시 왕궁에 들어왔으니 특별히 그 명을 써 넣어 영남 사람의 귀감이 되게 하노라.

- 영조는 1756년 경연 도중에 정탁의 덕행이 훌륭함을 듣고 정탁 5대손 정옥에게 초상화를 모셔 오게 한 후 화상찬을 지어 정옥에게 화상축 머리에 쓰게 했다. 

 

 

정탁이 사용하던 벼루.

약포 정탁을 기리는 도정서원道正書院(예천군 호명면 황지리) 전경. 1640년 약포 사당이 세워졌고, 1697년 도정서원으로 승격했다. 약포의 셋째 아들 청풍자淸風子 정윤목도 함께 배향하고 있다.

정탁의 초상화(보물 제487호). 1604년 어명에 의해 화사畵師가 그렸다.

 

18 죽음과 바꾼 불사이군의 절개

'신하의 길'을 보여 주다

 

하 위 지

 

 

죽음과 바꾼 불사이군의 절개, '신하의 길'을 보여 주다 : 하위지(창렬서원) 

 

 

남아의 득실 예나 지금이나 같고[男兒得失古猶今]

머리 위에는 분명히 해가 비치고 있네[頭上分明白日臨]

도롱이를 빌려주는 것은 뜻이 있으니[持贈蓑衣應有意]

오호五湖의 부슬비 속에서 다시 만나리[五湖煙雨好相尋]

- 박팽년이 도롱이를 빌려달라고 한 데 대해 화답하는 시答朴彭年借蓑衣

 

 

예조에서 작성한 하위지 불천위 문서(1804년 5월)

 

 

 

19 죽음을 무릅쓴 선비의 도,

언행일치의 삶을 살아가다

 

 

이 해

 

 

죽음을 무릅쓴 선비의 도, 언행일치의 삶을 살아가다 : 이해(온계종택)

 

 

공은 덕성이 너그럽고 도량이 넓었다. …(중략)… 남과 더불어 말을 할 때는 온화하고 정성스러워 사납거나 거만한 기색이 없었다. 그러나 조정에서 옳고是 그름非, 나아감進과 물러남退 등을 논의할 때는 남달리 두드러지고 꼿꼿한 면이 있었다. 일찍이 화복禍福과 이해利害를 비교해서 남보다 앞서 나가거나 뒤로 물러나 숨는 일이 없었다. 군자들은 이러한 점 때문에 그를 흠모하고 사랑했으나, 소인들은 이러한 점 때문에 그를 원수처럼 미워했다.

- 영남 유생 300여 명이 온계溫溪 이해(1496~1550년)에게 시호諡號를 내려 줄 것을 나라에 청했고, 그에 따라 시장諡狀이 작성됐다. 시장에 담겨 있는 내용 중 일부

 

 

이해 부인 신주의 안쪽. 보기 드물게 부인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해와 동생 이황이 태어난 노송정종택 태실(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온계 이해의 신도비. 온계종택 부근에 있다.

 

20 탁월한 언변과 문장력,

   대명 외교의 달인되다

 

황 여 일

 

 

탁월한 언변과 문장력, 대명 외교의 달인되다 : 황여일(해월종택 전경)

 

 

어젯밤 은하수 신선 쪽배에 내려와 [銀河昨夜下靈槎]

취한 객 진주(삼척)로 드니 흥이 점점 더하는구나 [醉入眞珠興漸多]

홀로 죽서루에 오르니 아무도 없는데 [獨上竹樓人不見]

옥피리 부니 그 소리 물결 위로 퍼지노라 [還吹玉篴向凌波]

- 14세 때 처음 간성杆城 향시에 응시해 진사 1등을 차지하고 돌아오는 길에 삼척 죽서루竹西樓에서 지은 시

 

만리 푸른 바다 백구의 몸으로 우연히 인간의 추잡한 세계에 들어가네

[滄波萬里白鷗身 偶落人間滿目塵] …(후략)…

- 1585년 30세 별시에서 을과 1등으로 합격하고,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에 발탁되어 출사하면서 집안의 아우들에게 지어준 시

 

동해에 노련자 있어 그 사람 또한 바른 말을 하였네. 많은 사람이 진을 높이는데 너 홀로 주나라 섬겼네. 변설로 삼군을 물리치니 무기 아닌 석 자 혀였지. 나의 일편심도 천추에 그대와 같다네 [東海有魯連 其人亦抗節 擧世欲宗秦 爾獨戴周日 談笑却三軍 其機在寸舌 我有一片心 千秋與君說]

- 1589년 11월 일본 사신 현소玄蘇가 와서 통신사를 보낼 것을 청하니, 조정 대신들이 대부분 허락하자는 쪽으로 기울었으나 황여일은 홀로 불가함을 역설하며 "통신사를 두어도 전쟁은 나고, 두지 않아도 날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통하지 않고 난에 대비하는 것이 좋다"라고 했다. 김성일이 이 소문을 듣고 지은 시

 

만고의 비장한 뜻으로, 새 한 마리 창공을 지나네. 찬 연기 동작銅雀대를 가리고, 장화章華(초나라 궁전 이름)는 가을풀에 묻혀 있네. 요순보다 앞선다고 경탄하고, 탕무湯武와 같다고 야단들이네. 상강湘江에 둥근 달 밝은데, 눈물로 죽지가竹枝歌 듣고 있네.

- 임제가 지은 책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을 보고 지은 시

 

도성을 나오니 학을 탄 것처럼 가볍고 [出郭身如駕鶴]

동문 밖 십리는 그림 속에 흘러가네 [東臺十里畵中行]

새로 보는 금수강산 화려하기만 하고 [新開錦繡山容淡]

넓게 펼쳐진 물은 유리처럼 맑구나 [厚展琉璃水面淸]

한 발만 나와도 그 아름다움 알겠는데 [一步卽知丘壑美]

2년 동안 왜 그렇게 얽매였는지 [兩年胡被簿書縈]

송어국 국화술에 노어회 생각하니 [松羹菊露鱸魚膾]

고향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네 [怱憶吾鄕興益生]

- 1612년 창원부사에 제수되고, 이듬해 봄에는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아와서 지은 시

 

 

 

 

해월종택(울진군 기성면 사동리) 내 해월헌海月軒. 해월이 33세 때(1588년) 처음 지어 공부하고 수양하던 건물로, 63세 때 벼슬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만귀헌晩歸軒'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해월종택 사당(울진군 기성면 사동리). 불천위인 황여일 부부 신주와 해월 종손 4대조 신주가 봉안돼 있다.

해월 불천위 신주를 봉안하고 있는 감실. 다른 종가의 감실과는 형태가 많이 다른 점이 눈길을 끈다.

 

 

불천위 제례 문화의 중심 공간은 불천위 위패를 모시는 종택의 사당이다. 사진은 회재종택 무첨당의 사당(경주 양동마을).

불천위 제사는 불천위 신주를 사당에서 제청으로 모셔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사진은 학봉 불천위제사 때 불천위 신주를 모셔오기 위해 안동 학봉종택의 사당으로 향하는 제관들(2010년 6월).

종택 사당이나 별묘에 불천위 신주를 모신다. 사진은 학봉 김성일 부부 불천위 신주.

 

|3부|

백성民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다

 

21 녹봉까지 털어 가난한 백성을 구휼한

   공직자의 자세

 

김 양 진

 

 

녹봉까지 털어 가난한 백성을 구휼한 공직자의 자세 : 김양진(허백당 종택)

김양진 부부 신주. 신주에 종손 이름을 쓰지 않은 점이 다른 종가의 불천위 신주와의 차이점이다.

허백당 불천위 신주가 단독으로 봉안돼 있는 대지大枝 별묘別廟(예천군 호명면 직산리).

허백당 불천위 사당인 대지별묘 내부 모습.

 

 

22 권세가를 찾아가지 않고, 사사롭게

   공무를 처리하지 않은 관리의 길

 

류 중 영

 

 

권세가를 찾아가지 않고, 사사롭게 공무를 처리하지 않은 관리의 길 : 류중영(입암고택)

 

 

나가고 들어감에 일정함이 없으니

간혹 밝았다가 어두워지기도 하네

나쁜 것은 숨김으로 몰래 점점 더 자라나고

착한 것은 사물을 접하며 도리어 감소되네

…(중략)

뜻은 항상 겉과 속이 일치되도록 하고

생각간사함을 경계해 잡됨이 없게 하고

감정은 방자함이 없이 경을 지키라

한낮에는 여러 사람의 눈을 경계하며

어둠 속에서는 자신을 돌이켜 보라

- '자기 양심을 속이지 말라[毋自欺賦]' 중 일부

 

 

류중영의 아들인 겸암 류운룡이 스스로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겸암정사. 하회마을 건너편 강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입암고택 사당 건물은 두 채이다. 한 곳에는 입암 불천위 및 4대조 신주가, 다른 한 곳에는 겸암 불천위 신주가 봉안돼 있다.

 

 

23 조선 시대판 행동하는 지식인,

   실사구시의 전형을 보여주다

 

최 흥 원

 

 

조선 시대판 행동하는 지식인, 실사구시의 전형을 보여 주다 : 최흥원(백불고택)

백불암이 자신의 방 벽에 걸어두고 보면서 마음 수행의 도구로 삼았던 '경敬'자 패牌.

최흥원이 영조의 명으로 류형원의 《반계수록》을 교정한 보본당. 백불암종택(대구시 동구 둔산동) 경내에 있는 이 건물은 최흥원의 5대조 대암 최동집의 불천위 제사를 모시기 위해 1753년 건립했다. 대암 별묘別廟는 이 건물 뒤에 있다.

백불암 최흥원의 신주가 봉안돼 있는 백불암종택 사당 전경. 1711년에 창건된 이 사당에는 백불암 신주와 4대조 신주가 함께 모셔져 있다.

 

 

24 청렴과 결백의 삶,

   '선비의 정석'을 보여 주다

 

김 계 행

 

 

청렴과 결백의 삶, '선비의 정석' 보여 주다 : 김계행(만휴정)

 

 

우리 집에는 보물이 없네 [吾家無寶物]

보물이 있다면 오직 청백뿐이네 [寶物惟淸白]

- 김계행 자신의 호이자 당호堂號인 '보백당寶白堂'의 의미를 해설한 시

 

나는 오랫동안 임금을 지척에서 모셨다. 그러나 조금도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했다. 살았을 때 조금도 보탬이 되지 못했으니, 장례 역시 간략하게 치르는 것이 좋겠다. 또한 절대 비석을 세워 내 생애를 미화하는 비문을 남기지 마라. 이는 거짓된 명성을 얻는 것이니,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 자신의 삶을 평가하면서 남긴 유언

 

 

1706년 지역 유림이 김계행을 기려 건립한 묵계서원. 종택 부근에 있다.

김계행 사후 약 400년이 지난 1909년 왕이 내린 불천위 칙명 교지.

 

 

25 조선의 청백리,

21세기의 복지를 제시하다

 

조 정

 

 

조선의 청백리, 21세기의 복지를 제시하다 : 조정(양진당)

 

 

공은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욕심, 옳고 그름의 사이에 털끝만큼이라도 틈이 있으면 일도양단一刀兩斷한다. 그렇기에 그 출처와 거취가 의에 비추어 늘 너그럽고 여유가 있었다.

- 평원(平原) 이광정이 쓴 검간黔澗 조정(1555~1636년)의 행장 중 그를 평한 부분

 

 

검간종택인 양진당(상주시 낙동면 승곡리) 전경.

검간 조정이 만년에 독서를 하며 주변을 소요하던 옥류정玉流亭(상주시 낙동면 승곡리). 앞에 내가 흐르고 고목이 우거져 주변 풍광이 수려하다. 근처 암벽에 '검간선생 장구지소[黔澗先生 杖屨之所]'라는 음각 글씨가 새겨져 있다.

 

 

26 "공무를 수행하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

   자신보다 백성의 안위를 생각하다

 

배 삼 익

 

 

 

"공무를 수행하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 자신보다 백성의 안위를 생각하다 : 배삼익(임연재종택 사당)

 

 

내 나이 열여섯 살 때 한성漢城 감시監試를 보았는데, 그해 가을에 임연재가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두각을 나타내 동료들의 추앙을 받았다. 그는 고금의 일을 논하는데 막힘이 없고, 나는 그의 처소로 가서 그 이야기를 들었다. 시험을 치던 전날 밤 나는 그의 처소에 가서 잠을 잤다. …(중략)… 닭이 홰를 치자 그가 박차듯이 나를 일으켜 나란히 말을 타고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뜰 가운데 큰 회나무 아래서 나무를 우러러보니 불빛 속에 겹겹의 녹색 나뭇잎이 아름답게 빛났다. 시제詩題가 나오자 그는 그다지 생각하지도 않고 날이 저물기 전에 두 편 모두를 완성하고도 왕성하게 힘이 남아 있었다. 나는 시는 완성했으나 쓰지는 못하고 있는데 그가 대신 썼다. 채점을 하자 나는 다행히 합격했지만, 그는 뜻을 펴지 못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감에 내가 다시 술을 지니고 가서 전송하면서 요행과 불행이라는 말로 작별했다.

- 서애 류성룡(1542~1607년)이 지은 <배삼익 신도비명>

 

 

임연재 배삼익의 친필. 함께 공부한 설원당雪月堂 김부륜(1531~98년)을 전송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27 백성의 삶을 알고 선비의 도리를 지킨

지식인의 전형을 보이다

 

김 응 조

 

 

학문을 일삼았으나 천기天機를 알지 못하고, 관직에 있었으나 시정時政에 통달하지 못했다. 선비는 사람이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의 근본을 견고하게 하는 것을 사모하고, 해바라기가 햇빛 쪽으로 기우는 것은 사물의 본성이다. 인간의 삶은 남가일몽에서 깨어남과 같고, 만 가지 계책은 그림자를 잡으려는 것과 같아라. 저 학가산鶴駕山과 사천沙川을 바라보니 물은 맑고 산은 푸르러, 천년만년 혼백을 비추리라.

- <자명自銘>에서

 

 

학사 김응조의 유려한 초서 작품 '남애정사잡영南厓精舍雜詠'. 학사가 1634년 영주 갈산 남쪽에 남애정사를 짓고, 주변 8곳의 풍광을 읊은 내용이다. 그중 1수는 없어지고 나머지는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돼 있다.

 

 

28 암행어사 이몽룡의 실제 인물,

애민의 삶을 살다

 

성 이 성

 

 

암행어사 이몽룡의 실제 인물, 애민의 삶을 살다 : 성이성(계서종택)

 

 

11월8일=아침에 외정원外政院에 나아가 패牌를 받았다. 봉서封書를 받아 나와 남관왕묘南關王廟(중국의 관우를 모시기 위해 한양 남대문 밖에 세운 사당)에서 개봉해 보니 나는 호남으로, 이해창은 영남으로 암행하게 돼 있었다. 오시午時에 한강을 건너 신원新院에서 말을 먹이고, 밤 2경에 용인 땅에 도착했다.

11월10일=말을 바꾸어 타고 마두馬頭, 대마부大馬夫, 복마부卜馬夫, 중마부中馬夫를 거느리고 천안 아래 5리쯤 되는 주막에서 아침을 먹었다. …(중략)… 이날은 100리를 왔다.

11월13일=집집마다 양반이라 하여 집안에 행인이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아주 작은 집에 들어가니 11세 정도 되는 작은 아이가…(후략)…

11월14일=고창의 윗마을 이득립의 집에서 묵었다. 고창의 여러 가지 일을 자세히 물어보았다. …(중략)… 감사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말해 주었다. 감사의 치적을 부정적으로 말함이 역력했다. …(중략)… 백성을 침탈하는 일은 별로 없으나 취하지 않은 날이 없으며 취했을 때는 정사를 살피지 않는다. 행동거지의 허물은 불문가지不問可知라.

12월1일=광한루에 도착하니 노기老妓 여진女眞과 노리老吏 강경남이 와서 절했다. 날이 저물어 모두 물리치고 소동小童 · 서리書吏와 누각 난간에 나가 앉으니, 흰 눈빛이 들에 가득차고 대숲이 모두 흰색이었다. 소년시절 일을 생각하며 밤 깊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 《호남암행록湖南暗行錄》 중 일부

 

오늘의 일은 마땅히 조용히 강구하여 지극히 바른 곳으로 돌아가기를 구하기에 힘쓴 뒤에야 존친尊親의 도道와 종묘의 예禮를 온전히 할 텐데, 전하께서는 한갓 지정至情에 가리어 도리를 살피지 못하고 매양 엄중한 분부로 꺾어 말씀하시기를 ‘세력에 아부한다’, ‘노리는 것이 있다’, ‘사욕을 이루려 한다’라고 하십니다. …(중략)… 이미 그 지위에 두고 일을 맡겼으면서 하루아침에 뜻에 거슬린다고 하여 뜻밖의 말씀으로 억지로 그 죄를 정해 입을 열지 못하게 하니, 이것이 과연 성주聖主로서의 말씀일 수가 있으며, 예로서 신하를 부리는 도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중략)… 이번에 종묘에 드는 일이 전하의 뜻이므로 저들(영합하는 신하들)도 또한 행할 만하다고 말하지만, 만일 전하께서 행할 수 없다고 여기신다면 저들은 또 불가하다고 할 것입니다. …(중략)… 직언하는 선비가 물러나자 뜻이나 맞추며 아첨하는 사람이 나오고 충간忠諫의 길이 막혀서 영합하는 풍조가 만연하면, 전하의 욕망은 이룰 수 있겠지만 나라 일은 끝내 어떻게 되겠습니까.

- 1634년 사간원정언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선조 다섯째 아들0을 왕(원종)으로 추존하여 종묘에 들이려 할 때, 조정에서는 찬반이 엇갈려 논란이 있다가 결국 원종으로 추숭追崇되었다. 당시 간관이 된 성이성은 이에 강경한 논조의 상소를 함

 

도덕 높은 우리 님은 성품도 굳세고 밝았다 [斯文我侯 天性剛明]

뜻은 청렴에 있으니 씀씀이도 검약하였네 [志存淸儉 自奉簡約]

정사는 공평하고 송사는 이치에 맞으니 온 고을 어려운 사람 모두 살렸고 [政平訟理 闔境蘇殘]

형벌은 줄고 세금은 가벼우니 관리와 백성 모두가 편안했네 [省刑薄斂 吏民俱安]

한 해의 다스림에도 이 세상 다하도록 잊을 수 없도다 [居官一載 沒世不忘]

- 강계에 세워진 계서 <청백인정비淸白仁政碑>에 새겨진 글

 

맑고 희도다 백옥의 깨끗함이여 [淸耶白耶 白玉之白]

사랑하고 어루만지니 백성의 어버이로다 [慈之撫之 民之父母]

한 고을 묵은 일 하루아침에 새롭게 했도다 [一朝維新 百里太古]

새 해를 다스렸으나 영원토록 사모하네 [三載居官 萬世永慕]

- 담양의 <청백인정비>

 

 

계서종택 사랑채에 딸린 간이 소변소. 노인들의 편리를 위해 특별히 만들었다.

계서종택 사당 내부. 성이성 부부 신주를 비롯해 종손 4대조까지의 신주가 벽감 형태의 감실에 모셔져 있다.

 

독 안의 좋은 술은 천 사람의 피요 [金樽美酒千人血]

소반 위 기름진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다 [玉槃佳肴萬姓膏]

…(후략)…

- 호남 암행어사로 활동할 때 호남 열두 읍 수령들이 베푼 잔치 자리에서 성이성이 지은 한시

 

29 360년간 후세의 물 걱정을 덜게 한

정책을 실천하다

 

신 지 제

 

 

360년간 후세의 물 걱정을 덜게 한 정책을 실천하다 : 신지제(금산서원)

 

 

선조宣祖께서 말씀하셨다. "아! 슬프도다. 내가 덕이 없고 어두워서 스스로 피하지 못하고 큰 난리를 당하게 되어 오직 너희들 문무제신文武諸臣이 서로 도와 나라를 구했으니 수고로움이 있었던 사람에게는 반드시 보답하고, 공이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갚음이 있음을 사사로운 정에 끌려서 하는 것이 아니요, 참으로 공적인 의리에 말미암은 것이다. …(중략)… 조정의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논공행상을 할 때 어찌하여 그대가 빠졌는지, 만일 지난번 조정으로부터 상소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옛날 진晋의 개자추介子推와 같이 면산綿山에 숨어 찾아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마땅히 위로하고 어루만지는 정성을 두텁게 하여 그 노고에 보답하는 온정을 베풀고 공훈을 호성공신 3등으로 기록하고, 특히 화상을 그려 후세에 전하도록 하며, 부조묘의 사당을 특별히 세우는 특전을 내리고, 또한 벼슬을 한 계급 더해 아들이 없을 때는 생질과 사위에게 계급을 더하여 적장손嫡長孫이 대대로 이어받아 그 녹을 잃지 않고 영구히 미치도록 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시중드는 사람 4명과 노비 7명과 말구종 2명, 밭 60결, 은자 5량, 옷감 1단, 내구마 1필을 하사하니 마땅히 수령할지어다.

- <선조대왕교서>

 

 

오봉종택 사당(의성군 봉양면 귀미리). 6 · 25 전쟁 때 이 사당 마당에 큰 독을 묻고 종택 유물을 보관,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30 문무를 겸비한 선량한 관리로

   역사에 기록되다

 

이 정

 

 

문무를 겸비한 선량한 관리로 역사에 기록되다 : 이정(경류정 전경)

이정이 1435년경 평안도 영변에서 가져와 주촌종택 마당에 심은 뚝향나무(천연기념물 제314호).

 

 

우리 종가 경류정 옆에 노송나무 한그루가 있는데 가지와 줄기가 뱀처럼 꿈틀꿈틀하고 서리서리 넓적하게 얽혀서 임금이 타는 수레의 덮개처럼 되었는데, 그 높이는 두어길이 될까 말까 하나 실로 신기한 소나무다. …(중략)… 공은 젊어서 큰 뜻이 있었으나 음사벼슬로 맴돌아 그 뜻을 펴지 못했다. 그러나 3대가 내려가 대현大賢(퇴계 이황)이 나서 우리 동방에 영원한 행운을 가져왔으니, 공은 우리 이 씨의 근본이시다. …(중략)… 원래 솔이란 추운 겨울에도 변하지 않는 지조인데, 때는 바야흐로 추운 철인지라 군君과 나는 아무리 곤궁할지라도 의리를 잃지 말고 만년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더욱 힘써 선조의 지조를 더럽히지 않는다면 이 소나무에 대해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니 서로가 힘써야 할 것이다.

- 이정의 후손인 이만인李晩寅은 '나무 심은 지 400년 후 정해년丁亥年 12월'에 '경류정 노송기慶流亭 老松記'를 남겼는데 그 일부

 

적선으로 복과 경사가 불어나고 [積善由來福慶滋]

몇 대 전한 인후함이 온 집안에 넘쳐나네 [幾傳仁厚衍宗支]

군에게 권하노니 거듭 문호를 힘써 지켜 [勸君更勉持門戶]

화수회가 위씨 집처럼 해마다 이어지도록 하오 [花樹韋家歲歲追]

산 아래 높은 정자엔 형세가 아득한데 [山下高亭勢入冥]

온 집안사람 함께 기쁨 나누는구나 [合宗筵席盡歡情]

더욱 어여쁜 명월 가을밤 [更憐明月中秋夜]

텅 빈 난간 연못이 참으로 맑구나 [虛檻方池分外淸]

맛난 술 높은 정자에 달빛이 깃드니 [美酒高亭月正臨]

한 말 술에 백편 시를 읊을 뿐이오 [何須一斗百篇吟]

작은 연못에 비춘 달은 차가운 거울 같으니 [小塘灑落如寒鏡]

진실로 은자임을 깨달아 마음이 편하도다 [眞覺幽人善喩心]

- 가정 병진嘉靖 丙辰(1556년) 중추中秋 전 대사성前 大司成 황滉 삼가 지음奉稿

 

 

주촌종택 사랑채인 '고송류수각古松流水閣'

 

 

 

안채 대청과 마당을 가득 메운 제관들이 제사를 지내고 잇다(서애종가).

제사가 끝난 후 안채 마당에서도 제관들이 음복을 하고 잇다(학봉종가).

서애종가 불천위 제사에서 사용할 도적을 쌓고 있는 모습.

 

 

|4부|

나라國와 가족을

먼저

생각하다

 

 

31 일흔 살에 전쟁터에 나가 전사한,

   조선 무신의 정석

 

최 진 립

 

 

일흔 살에 전쟁터에 나가 전사한, 조선 무신의 정석 : 최진립(잠와종택)

최진립이 배향된 용산서원(경주 내남). 용산서원 현판은 당대의 명필이자 서예 이론가인 옥동 이서의 글씨다. 서원 내 최진립 위패를 모신 사당 이름인 '숭렬사우승崇烈祀宇'는 나라에서 내렸다.

잠와종택 사당 안의 잠와 신주 감실.

 

 

32 문무를 겸비한 선비,

   반란 평정으로 공신에 오르다

 

손 소

 

 

문무를 겸비한 선비, 반란 평정으로 공신에 오르다 : 손소(서백당)

 

 

금오산 푸릇푸릇 태허太虛에 솟았도다. 옛사람 그 누구가 여기에 살았던고. 나 일찍 일선군에 유적 찾아 이 산비탈에 쉬었도다. 깊은 골짝 맑은 샘물…(전략)… 옛날 길공吉公(야은 길재)은 현사賢士로서 고려 쇠운 당했건만 충군애국 일편단심 다른 뜻 전혀 없다. 아홉 번 죽더라도 굳센 절개 변할 소냐. 아태조我太祖 용흥(龍興(왕위에 오름)하니 홀연히 산에 숨어, 혁명은 운수지만 나의 뜻을 고칠 소냐. 덕이 있어 왕이련만 두 임금은 못 섬긴다.

…(중략)… 우리 임금 여러 번 불렀으나 굳은 절개 그 조정에 불참이라. 마침내 이 산에 늙음이여, 본 뜻은 요동 없다. 충성은 백일白日을 관통하고 풍성風聲은 만세에 뻗으리라. …(중략)… 나 여기 기구한 골짜기를 지나면서 슬퍼하고, 드높은 봉우리에 반환盤桓(머뭇거리며 서성임)한다. 단지 보이는 것은 잔나비 우는 깊은 골짜기요, 학이 우는 높은 산마루로다. 날은 장차 저무는데 시야는 도리어 밝아진 듯, 사고무인四顧無人 적적한데 벌목 소리만 정정하다.

- <금오산부>

 

…(전략)… 너의 공로를 생각하면 감히 포장褒奬할 것을 잊겠는가. 그러므로 너를 적개 2등공신에 책봉하여 각閣을 세워 초상을 그리고 비를 세워 공을 기록, 그 부모와 처자에까지 벼슬을 주되 두 계급씩 올리고, 자식이 없는 자는 그 생질이나 사위에게 한계급씩 올려주고, 적장자는 대대로 세습하여 그 녹을 빠짐없이 주고, 그 자손들은 정안政案에 기록하기를 2등 적개 공신 손소의 후손이라 하고, 비록 죄를 범해도 용서하며 그 효과는 영세보존된다. 그리고 사환 8명, 노비 10명, 구사丘史(공신에게 주는 지방 관노) 5명, 밭 100결, 은 20량, 옷 1습, 말 한 필을 하사하니…(후략)…

 

 

성주 고을 백성들이 진정서를 올렸다. 목사 손소의 백성을 사랑하는 정치는 근고近古에 없는 바라, 지난 경인년에는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해 온 지역이 굶주림을 면하고 백성들은 부모같이 사랑하더니, 금년에 또 흉년이 되자 마음을 다해 구휼함으로써 백성들이 잘 살았다. 이제 만기가 되어 떠나야 하지만 잉임仍任(임기가 다 된 벼슬아치를 그대로 머물게 함)하도록 계를 올리니 상감께서 허락했다.

- 정원일기政院日記

 

 

손소의 초상화. 1476년(성종 7년) 나라에서 만들어 손소에게 하사한 초상화로, 보물로 지정돼 있다.

손소에게 성종이 하사한 옥연적. 함께 하사한 산호영 · 상아도와 더불어 '송침 3보'라 불린다.

서백당 사당의 불천위 신주 감실. 소박한 형태의 감실 문 중앙에 세로 버팀목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33 부친과 함께 의병 활동에 참가한 선비,

    효孝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다

 

남 경 훈

 

 

부친과 함께 의병 활동에 참가한 선비, 효孝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다 : 남경훈(난고종택)

 

 

난고종택(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의 사당 전경. 이곳 사당은 불천위신주(맨 서쪽에 봉안) 및 4대조 신주를 모신 불천위사당과 체천위 신주를 모신 사당인 체천위별묘遞遷位別廟가 함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오른쪽 건물이 별묘다.

 

남경훈이 남긴 가르침으로 가문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가훈

▲ 어버이에게 효도하며 자식된 도리를 다하라.

▲ 자손들은 선조에게 보답하고 종통을 중히 여겨라.

▲ 일상생활에서도 근본을 두텁게 하며 직분을 다하는 것을 급선무로 하라.

▲ 행실을 조심하고 사람을 편하게 대하며 남의 장단점을 말하지 마라.

▲ 용모를 바르게 하고 절도를 지키도록 조심하라.

▲ 평소 근검하고 가례는 간소하게 하라.

▲ 공을 앞세우지 말며 칭찬을 부끄럽게 생각하라.

 

 

난고종택 사당의 3개 문 중 좌측 문 위에 '난고선생불천위지묘' 현판을 걸어 두고 있다.

난고종택 사당 내 불천위 신주 감실과 주독 모습. 신주 감실이 벽체로 돼 있고, 감실 문의 형태도 어느 종가 사당과 다른 모습이다.

 

 

34 부하를 혈육처럼 사랑한 무장,

   선정의 모범을 보여 주다

 

박 의 장

 

 

부하를 혈육처럼 사랑한 무장, 선정의 모범을 보여 주다 : 박의장(무의공종택)

 

슬프다. 너희들 사졸들아! 몸은 죽었으나 영혼만은 있을지라. 너희들은 영특하니 영혼도 밝으리라. 나의 말을 들어보라. 나의 말은 슬프구나. 군사를 훈련한 지 이제까지 7년이라. 내가 너희 장수되어 굳은 언약 서로 맺어,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고, 나의 옷을 네가 입고 너의 밥을 내가 먹고, 한 집에서 잠을 자고 활을 쏘며, 술도 나누었네. 부윤은 누구이며, 백성은 누구였더냐. 먹은 마음 같으니 혈육과 다를소냐.

- <제전망장사문祭戰亡將士文>

 

전란 중이라 아버지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하고 상주 노릇도 못했으니, 신하된 직분으로는 당연한 일이나 자식된 도리로서는 죽는 날까지 한스러움이 끝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머니 곁을 멀리 떠나지 않고 끝까지 봉양하려 했습니다. 성은이 지중해 다시 경상도 병마절도사의 임명을 받아 모자간의 안부라도 서로 듣게 되어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었는데, 이렇게 먼 서방의 공홍도수군절도사의 직을 받게 되어 팔십 노모는 밤낮 울어서 병이 날 지경이고, 모자가 천리 밖에 서로 떨어져 만나볼 수도 없으니 마음이 산란하여 사무가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모자가 죽기 전에 만나게 해주시면 살아서는 충성을 다하고 죽어서는 결초보은하겠나이다.

- 모친을 모시기 위해 공홍도수군절도사公洪道水軍節度使의 체임을 요청하는 상소문을 요약한 내용

 

 

무의공종택(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의 사당 전경.

무의공이 사용하던 복숭아 모양의 음료수 잔인 도형배(무의공종가 제공).

박의장 내외분 불천위 제사 때 사용하던 제게인 적기炙器와 향로(무의공종가 제공).

 

 

35 효제충신의 삶,

지식인의 실천 덕목을 제시 하다

 

송 희 규

 

 

효제충신의 삶, 지식인의 실천 덕목을 제시하다 : 송희규(백세각)

 

 

훌륭한 송공宋公

타고난 성품이 강열剛烈하여

정색正色하고 조정에 서니

아무도 그 뜻을 꺾지 못했도다

좌우에서 두드리고 흔들수록

절의와 지조는 더욱 굳었도다

비록 사람과는 어긋났어도

하늘에는 한 점 부끄러움 없었도다

- 갈암葛巖 이현일(1627~1704년)이 야계倻溪 송희규(1494~1558년)의 묘비명墓碑銘을 지으면서, 마지막 부분에서 그의 인품을 표현한 시의 일부

 

몸가짐은 다만 효도하고 공경함이며 [持身祇是孝而悌]

뜻을 세움은 마땅히 신의와 충성이다 [立志要當信與忠]

만약 사람마다 이 도리를 안다면 [若使人人知此道]

어찌 망국하고 패가할 일 있으랴 [則何亡國敗家有]

- 송희규가 7세 때 지은 시 <독소학讀小學>

 

중학中學에서 회의를 하던 날 공(야계)은 스스로 그 사태를 짐작하고 동료에게 말하기를 '대신에게 죄가 있으면 드러내 죽일 일이지, 태평성대에 밀지를 내리는 것이 어찌 밝은 세상의 일인가' 했다. 대사헌 민제인이 밀지를 극렬히 추진하려고 하자 공은 '윤원형이 임금의 외숙으로서 임금을 옳은 길로 인도하지 못하고 도리어 비밀히 국모에게 의뢰해 사람들을 해치려 하니 이것이 될 말인가. 오늘 반드시 먼저 이 사람을 제거해야만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설 것이다' 하고 김저, 박광우 등과 더불어 팔을 걷어 부치고 큰 소리를 지르는데 의기가 늠름하여 건드릴 수가 없었다.

- 《연려실기술》

 

사람의 욕심이 들어올 틈이 없으니

천리天理는 오직 밝고 빛나네

학문은 세상에 영합하지 않고 속이지 않으며

덕업은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닦였네

움직이면 천하에 도가 되고

말을 하면 천하에 법이 되네

우주의 동량을 부지扶持하면서

생민生民의 주석柱石되어 안정하게 하네

이것이 이른바 세상에 이름난 참 선비眞儒이니

성인의 덕으로 정중正中한 자이다

- <진유부眞儒賦>의 일부

 

 

야계 송희규가 1552년에 처음 건립해 만년을 보낸 백세각(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이 야계종택 안채 다락방은 파리장서 사건을 모의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백세각 건물 좌측에 있는 야계 불천위 사당. 야계 내외 신주와 종손 4대조 신주가 봉안돼 있다. 사당 단청 그림 중에 사군자가 있는 점이 특이하다.

야계 신도비神道碑(죽은 이의 삶을 기록하여 기리는 비석으로 무덤 앞이나 길목에 세움). 고산리 마을 뒤쪽에 있으며, 비문은 갈암葛巖 이현일이 지었다.

 

 

36 문무를 함께 갖춘 충신,

   격문과 대화로 적을 물리치다

 

장 말 손

 

 

문무를 함께 갖춘 충신, 격문과 대화로 적을 물리치다 : 장말손(송설헌 사당)

 

 

'타고난 성품은 순수하고 성실하며 [性質純穀]

학식은 통달하였네 [學識疏通]

충성스럽고 의로운 도리는 [忠義之道]

실로 마음 깊이 새겨 잊지 않는 바였네 [實所佩服]

- 송설헌이 별세한 후 성종이 내린 사제문賜祭文

 

황금 갑옷 담비 갖옷 입은 나그네의 정이 [金甲貂 遊子情]

쓸쓸히 낙엽 떨어지는 변방성에 울리네 [蕭蕭落木響邊城]

시서를 벗삼아 온 글 잘하는 장군이니 [詩書從事詩書將]

요망한 기운을 변방에서 싹 쓸어버릴 것을 기쁘게 보리라 [喜見妖氣塞外淸]

- 김종직

 

 

듣거니 그대 담소로 적을 물리쳐 [聞君談笑能却賊]

자잘한 무리 얼씬도 못했다지 [魚樵不敢近城池]

…(후략)…

- 허백당虛白堂 홍귀달

 

 

 

송설헌 불천위 제사가 봉행되는 연복군종택(영주시 장수면 화기리). 종택 사랑채인 화계정사花溪精舍(왼쪽)에서 제사가 진행된다.

사당의 신주 감실 등을 깨끗이 청소하는 데 사용했던 도구.

변방의 적들을 소탕한 장말손에게 세조가 하사한 패도(보물 제881호).

 

 

 

 

37 깨끗한 벼슬 생활로 조선 시대

청백리의 교과서

 

곽 안 방

 

 

 

깨끗한 벼슬 생활로 조선 시대 청백리의 교과서 : 곽안방(포산고가 사당)

 

 

 

곽안방은 마음 쓰는 것과 행신하는 것이 뛰어났고, 한가지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교유하는 벗이 그 당시의 명류들이어서 어진 사대부가 그 문에 많이 모여들었다. 벼슬을 하며 청백하기가 빙옥氷玉 같이 깨끗하여 벼슬을 그만 두고 필마행장匹馬行裝으로 돌아올 때는 나는 듯이 가벼웠다.

- 《여지승람輿地勝覽》의 <명환록名宦錄>에 기록된 내용

 

 

 

청백리 곽안방을 기리기 위해 세운 이양서원尼陽書院(대구시 달성군 현풍면 대리). 1707년 사당인 청백사淸白祠가 건립된 후 서원으로 발전했고, 대원군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됐다가 1945년 이후에 복원되었다.

곽안방종택苞山古家의 불천위 제청으로 사용되던 추보당追報堂 건물.

현풍 솔례마을에 있는 현풍 곽 씨의 십이정려각十二旌閭閣. 1598년(선조 31년)부터 영조 대에 이르기까지 솔례마을의 현풍 곽 씨 가문에 포상된 12정려를 한곳에 모은 각閣이다.

 

 

38 책과 함께 한 선비,

   임진왜란 일어나자 의병 일으켜

 

정 세 아

 

 

책과 함께 한 선비, 임진왜란 일어나자 의병 일으켜 : 정세아(강호정)

 

 

조수鳥獸와 산림山林은 공公이 멀리 숨었다 하고

병마兵馬와 병기兵器는 공이 잘 싸웠다 말하네

자벌레처럼 굽히기도 하고 매와 같이 날기도 하였으니 시대가 그러했다

공이 무엇을 구했겠는가 그 의義를 행하였다

구름처럼 산 위에서 나와 삼논三農을 윤택하게 하고

폈다가 거두어서 태공太空으로 돌아갔도다

- 영의정 조현명이 지은 호수湖叟 정세아(1535∼1612년) 신도비神道碑(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행적을 기리는 비석)에 나오는 글귀

 

다만 시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문詩文은 체백體魄에 대신할 수 있으니 시로써 무덤을 하는 것이 또한 예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는 반드시 뼈로 장사 지낸 것을 옳다 하고 시로 장사 지내는 것은 부당하다 생각하나 쓸쓸한 황혼에 장사 지내는 것이 많겠지만 이는 마침내 썩어 없어지는데 돌아갈 뿐이고 그 사람의 시는 오래되어도 썩어지지 않을 것이니 이 무덤이 얼마나 위대하겠는가.

- <시총비명詩塚碑銘>에 있는 글의 일부

 

장년의 뜻 적장의 머리 벨 것을 기약했건만

쇠잔해진 이 몸 귀밑 털이 셀 줄이야

…(중략)…

노쇠하고 병드니 어찌 출세 길 달릴 것인가

한가로이 물러나서 청류를 구경함이 내 분수에 맞다

백구도 강호수를 싫어하지 않고 찾아주니

이제부터 청안으로 죽을 때까지 쉬리라

- 시 '자호정사에 올라[登紫湖精舍]'의 일부

 

 

정세아의 묘가 있는 하천묘역(10만 여 평 :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기룡산 자락). 호수 가문의 문중묘역으로, 480여 년 전 정세아 조부의 묘가 들어선 이후 총 80여기가 모여 있으며, 200여 년 전에 현재의 묘역이 형성됐다.

호수종택 사당(영천시 대전동).

호수종택 사당 내 불천위 신주 감실. 2005년경에 도둑을 맞아 새로 복원한 감실이다.

 

 

39 인사권자도 어찌할 수 없었던

   인재 등용의 원칙을 보여 주다

 

이 동 표

 

 

 

인사권자도 어찌할 수 없었던 인재 등용의 원칙을 보여 주다 : 이동표(난은 묘소)

 

 

도화유수의 신비경이 속세에도 있고 [桃花流水在人間]

태백산의 수많은 봉우리 속 세월이 한가롭네 [太白千峰日月閒]

선비의 살림 옹졸하다 말 말아라 [莫道書生生計拙]

그래도 요즘 와서 청산을 사게 되었으니 [向來猶得買靑山]

- 귀향 후 춘양의 산수를 좋아해 그곳에 머물며 지은 시

 

 

 

이동표가 숙부로부터 선물받아 매우 아끼면서 사용했던 대형 벼루(무게 20kg, 가로 48cm, 세로 31.5cm).

 

 

40 각별한 충효의 실천,

당대 '선비의 귀감'이 되다

 

변 중 일

 

 

 

각별한 충효의 실천, 당대 '선비의 귀감'이 되다 : 변중일(간재정)

 

 

옛 사람 사모하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 [慕古是何人]

오직 내 참성품 지키기 바랄 뿐 [庶幾守我眞]

세상 밖의 일 말하지 않고 [莫論世外事]

달갑게 농사꾼이 되었네 [甘作畎中身]

어버이 돌아가실 때 효도하기 어려웠고 [親歿難爲孝]

재주 없어 끝내 뜻 펼치지 못했으니 [才疏竟不伸]

세상을 경륜해 보려던 건 그 옛날의 뜻일 뿐이고 [經營伊昔志]

청춘은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네 [無復更靑春]

- 간재簡齋 변중일(1575~1660년)이 만년에 지은 시 <술지述志>

 

…(전략)… 작은 서재를 지어 이름을 '간재'라고 써붙였다. 일찍이 듣기를 '군자의 도는 중中에 적응해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君子之道 適於中而不倚於偏]'라고 했다. …(중략)… 나는 감히 덕을 이루기를 바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덕을 숭상할 뜻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렇더라도 내가 간자를 취한 이유가 어찌 중을 버리고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취하는 것이겠는가. 나는 재주가 모자라고 뜻도 게을러 큰 일을 경영해 백성에게 혜택을 주지 못하고, 왜적이 침입해 나라가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몸을 바쳐 수치와 분통을 씻지도 못했으니 내가 장차 세상에 무슨 뜻이 있겠는가.

그래서 자취를 거두어 몸을 숨기고 그 뜻을 담아 이 서재의 이름을 지었다. 기와가 아닌 초가로 한 것은 거처함의 간이고, 담장을 흙으로 바르고 붉은 칠을 하지 않은 것은 꾸밈의 간이다. …(중략)… 말이 많고 교묘한 것이 간단하고 서툰 것만 못한 것이니, 간이란 중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원래 도를 해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간으로써 내 삶을 즐기련다. 그러나 내가 또 어찌 지나치게 간하는 사람이겠는가. 내가 바라는 것은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에 적응하기를 기할 뿐이다.

- 《간재기簡齋記》 내용 중 일부

 

 

 

간재 불천위 신주를 모시는 사당.

간재종택(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옆에 있는 정충효각旌忠孝閣. 1686년 간재의 충효를 기려 나라에서 건립한 것이다.

임진왜란 때 조모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놓는 변중일의 효심에 감동해 왜군이 증표로 주고 간 칼.

 

 

1779년(정조 3년) 10월15일에 조례祧禮(신주를 땅에 묻는 의식) 일자를 잡아 원근의 사림에 통고하니 모인 사람이 280여 명이었다. 오후에 대청 앞에 회의자리를 여니 공의公議가 일어나 '간재공의 탁월한 충효행은 이미 조정에서도 은전의 포상이 있었는데 사림에서 존모하는 정성이 어찌 없겠는가. 오늘의 자리는 조매제사埋祭祀로 거행할 것이 아니라 불천위로 모시는 제례로 바꾸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버렸다. 이에 종손과 지손들이 그 자리에 찾아가서 '사림의 논의가 이같이 정중하니 실로 후손된 사람으로서는 감축하는 바이나 뜻이 뜻대로 될 수 없는 지극히 어려운 처지가 있습니다'라고 했으나, 참석한 사람들이 자손의 겸양을 들어주지 않고 공의로 이미 결정한 대로 마무리짓고 모인 사람 중 김응탁金應鐸을 선정, 본손本孫을 대신해 고유문을 짓게 했다.

- 간재가 불천위에 오른 내력

…(전략)… 세상을 떠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라에서 특별히 정전旌典을 내려 엄연한 유각이 저기 휘황輝煌하게 서 있습니다. 세상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 조례의 날이 다가오니 뜻 있는 선비들이 모두 모여 옛 현인을 앙모함이 더욱 새로워, 이에 불천위의 예로 모실 것을 결정하니 자손들은 송구하고 두려워하면서 삼가 맑은 술과 여러가지 안주로 제주를 바쳐 올립니다.

- 김성탁이 본손을 대신해 지은 가묘부조고유문家廟不告由文 중 후반부 내용

 

 

청신재 박의장 시호 교지(1784년 · 시호 '武毅')와 농암 이현보의 시호 교지(1557년 · 시호 '孝節'). 당사자의 벼슬과 시호, 시호의 의미 등이 적혀 잇으나 시대가 달라서인지 교지의 규격이나 내용 구성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시호는 시장諡狀 작성으로 시작돼 관련 관청의 협의와 심사를 거쳐 왕이 확정하며, 시호가 확정되면 교지로 작성돼 해당 인물의 자손 집에 전달된다. 그리고 해당 가문에서는 시호를 맞는 연시延諡 행사가 치러진다. 사진은 귀암 이원정의 <시호망가諡號望記>(시호 예비명칭 3개를 정해 왕에게 올린 문서로, 국왕이 '文翼'을 지명했음이 표시돼 있음).

 

 

|5부|

무엇을 하든

마음心 공부가

중요하다

 

 

41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한

   '벼슬 하지 않은 선비'

 

권 구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한 '벼슬하지 않은 선비' : 권구(병곡종택 가묘)

 

 

비 그친 뒤 지팡이 짚고 마루 아래로 내려가

국화를 줄지어 심네

나뭇잎 지고 서리 내릴 때를 기다리면

황화가 토해내는 향기 서원에 가득하리

- 병곡屛谷 권구(1672~1749년)의 작품 <서원 뜰에 국화를 심다種菊院庭>

 

홀로 앉음이 꼭 나쁘지 않고 도리어 유익하다

속객이 문에 이르지 않아 일실이 늘 한적하고

연기는 나서 산촌을 날며 햇빛은 빈 창을 밝히네

책을 펴고 책상 앞에 정좌해 잠자코 깊은 뜻을 찾으니

흡사 옛 성현이 좌우에 나열한 듯하네

때로 문을 열고 바라보니 산천은 어지럽게 눈에 차고

반가워하며 맵씨 내는 모습들 내 쓸쓸하고 적막함을 위로하듯 하니

깊이 생각하여 뜻을 자득하고 흥구興句 자주 얻어 수심愁心을 잊네

심기는 자연히 고요하고 세상 근심 모두 사라진다

- <'홀로 앉아서獨坐>

 

내가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너의 아버지는 음식물의 감고甘苦와 의복의 편부便不 여부에 대해 말을 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평소 음식을 먹는데도 정수定數가 있어서 비록 악초라도 덜함이 없고 좋은 반찬을 만나도 더함이 없었으며, 입을 옷도 새 것 · 기운 것을 가리지 않았으며 다만 제삿날에는 웃옷을 빨라고 이야기할 뿐이었다.

- 권구의 부인이 아들에게 한 말

 

가난에는 삼락이 있으니, 입은 거친 밥과 소채蔬菜를 익혔으니 음식이 만족하기 쉬워 고량膏粱원치 않으며, 몸은 베옷을 익혔으니 의복이 편하기 쉬워 비단을 원치 않으며, 거처는 비좁은 곳을 익혔으니 쉽게 편하므로 화옥華屋을 원치 않는다.

- 병곡의 글 '가난의 三樂'

 

 

 

병곡종택 사당 내 불천위 신주 감실.

병곡종택(안동시 풍천면 가곡1리)의 당호로도 사용되던 '시습재時習齎' 현판이 걸려 있는 종택 사랑채. 이 건물 동쪽에 불천위 사당이 있다.

권구의 학덕을 기려 1768년에 지역민들이 지은 서당인 노동서사魯東書社(안동시 풍천면 가곡1리). 일제 강점기에는 권구의 후손인 권오설이 원흥학슬강습소를 열어 민족교육운동을 한 곳이기도 하다.

 

 

42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 저술

 

권 문 해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 저술 : 권문해(초간정)

 

 

선생께서 겨우 약관에 그 몸가짐이 어른과 같아 친구들 사이에 있을 때 만일 올바르지 못한 것을 보면 같이 어울리지 않으셨다. 그런 까닭에 다른 사람들이 어려워했다

- 권문해의 연보年譜에 나오는 기록

 

 

초간종택 사당 전경. 종택 사랑채 뒤쪽에 자리 잡고 있다.

 

 

늙으신 어머님께 맛난 음식으로 봉양하고 잠자리를 돌보아 드리는 범절 등은 모두 내가 살아 있을 때와 같이 해서, 행여 아버님으로 하여금 저승에서 슬퍼하게 하지 마라.

- 본인이 병이 깊어 회복할 기미가 없자 연로한 모친을 염려하며 남긴 유언

 

나무와 돌은 풍우에도 오래 남고 가죽나무, 상수리나무는 예전처럼 아직 살아 저토록 무성한데 그대는 홀로 어느 곳으로 간단 말인가. 서러운 상복을 입고 그대 지키고 서 있으니 둘레가 이다지도 적막하여 마음 둘 곳이 없소. 얻지 못한 아들이라도 하나 있었더라면 날 가면서 성장하여 며느리도 보고 손자도 보아 그대 앞에 향화 끊이지 않을 것을……. 오호 슬프다. 저 용문산을 바라보니 아버님의 산소가 거기인데 그 곁에 터를 잡아 그대를 장사지내려 하는 골짜기는 으슥하고 소나무는 청청히 우거져 바람소리 맑으리라. 그대는 본시 꽃과 새를 좋아했으니, 적막산중 무인고처에 홀로 된 진달래가 벗되어 드릴게요. 이제 그대가 저승에서 추울까봐 어머니가 손수 수의를 지으셨으니, 이 옷에는 피눈물이 젖어있어 천추만세를 입어도 해지지 아니 하리다. 오오! 서럽고 슬프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우주에 밤과 낮이 있음과 같고, 사물의 비롯함과 마침이 있음과 다를 바가 없는데, 이제 그대는 상여에 실려 그림자도 없는 저승으로 떠나니 나는 남아 어찌 살리오. 상여소리 한 가락에 구곡간장 미어져서 길이 슬퍼할 말마저 잊었다오.

- 자기 부인이 먼저 저 세상으로 가버리자 상을 치르면서 초간이 지은, 부인을 위한 제문

 

 

 

초간종택 백승각에 보관돼 있는 《대동운부군옥》 목판본.

초간종택(예천군 용문면 죽림리) 유물각인 백승각百承閣 안 철제 금고에 보관돼 있는 초간 불천위신주 감실. 보물급인 이 감실은 도난 방지를 위해 제사 때만 잠시 꺼내 사용하고, 평소에는 금고 속에 보관하고 있다.

 

 

43 '조선 시대의 갈릴레이'

   천문학을 꽃피우다

 

김 담

 

 

 

'조선 시대의 갈릴레이', 천문학을 꽃피우다 : 김담(무송헌 사당)

 

 

신은 시골의 천한 선비로서 …(중략)임금님의 은혜를 입고 관직이 4품에 이르렀습니다. 헤아려 보건대 지금의 신하들 중에 비록 귀척貴戚이나 훈구勳舊의 후예라도 신과 같이 성은을 온전히 입은 자는 없을 것입니다. 마땅히 몸이 상하고 머리가 부서질지라도 만분의 일이라도 성은을 갚아야 할 터인데, 어찌 감히 정을 숨기고 말을 꾸며 성총聖聰을 어지럽게 하겠습니까. …(중략)신이 생시에 어버이를 봉양하지 못하고, 병중에 의약도 지어 드리지 못했으며, 돌아가신 후 장례 치를 때도 당도하지 못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고 땅을 치며 통곡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생각하건대 마땅히 묘소 곁에 엎드려 3년상을 마치고자함은 전일의 잘못을 보상하고자 함이 아니고 금일에 힘쓸 바 오직 이것뿐이라고 여겨집니다. …(중략)역법을 헤아리는 일은 박수미와 김석제가 참으로 저보다 우월합니다. …(중략)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 1449년(세종 31년) 정월 부친상을 당해 시묘侍墓살이를 하던 중, 그 해 5월에 왕이 출사出仕하라는 특명과 함께 쌀 10석, 옷, 신발, 버선 등을 하사하며, 대궐에서 김담을 만나본 후 역법曆法을 맡아보도록 명했다. 이에 김담은 같은 달 23일에 상소를 올려 사직할 것을 청했다.

 

신의 가정이 액운을 만나 신의 백부가 지난해 9월에 돌아가시고 11월에 신의 누이도 죽고, 올해 정월에는 신의 어미가 병환이 위독해 미처 쾌차하기도 전에 신의 아비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신의 여식이 조부모 슬하에 크다가 2월에 이르러 또 죽었습니다. …(중략)… 향리로 돌아가 상제喪制를 마치고 노모를 봉양하도록 윤허해 주시기 바랍니다.

- 다음 날 올린 상소

 

 

 

영주 무섬마을에 있는 무송헌종택. 현 종손(김광호)의 족친(일본 거주 실업가)이 구입해 두었던 한옥을 종택으로 쓰라고 종손에게 희사한 건물이다. 대구에 살던 종손이 2007년부터 들어와 살고 있다.

 

 

파란 숲 사이로 백옥같이 맑은 물 흐르는데 [碧玉叢間白玉流]

꽃빛은 물 위에 길게 비치어 떠 있네 [花光長帶水光浮]

맑고 그윽한 자연은 인간의 세계가 아니니 [淸冥風露非人間]

뼛속 시원하고 정신 향기로운 꿈 속에서 노닐었네 [骨冷魂香夢裏遊]

조각 도원을 한 폭에 그려놓으니 [一片桃源一幅圖]

산중의 선경이 비단 위에 사뿐히 실렸네 [山中綃上較錙銖]

무릉에서 길 잃은 자에게 묻노니 [試問武陵迷路者]

눈 앞에 보았던 게 꿈만 같지 않았던가 [眼中還似夢中無]

- <몽유도원도>에 남긴 시의 일부

 

 

 

김담이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남긴 찬시讚詩.

김담이 제작한 천문도. 영주 소수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44 38년 서울 벼슬 생활 동안

셋방을 전전한 청빈의 삶

 

박 승 임

 

 

 

38년 서울 벼슬 생활 동안 셋방을 전전한 청빈의 삶 : 박승임(소고 사당)

 

 

천지가 어두워지더니 시월인데 서리 내리고

찬바람은 비 머금고 높은 고갯길에 불어오네

낙엽은 방자하게 뒹굴기를 반복하며

바람소리는 섬돌을 치고 깎는 듯

궁한 선비 가난하여 단벌 옷뿐이라

한 해가 저물어 가니 심정은 더욱 어려운 지경일세

반 칸 방에 불 못 때니 얼음장 같고

깨진 잔에 거미줄 친 것 민망스레 보노라

어리석은 아내 나의 생계 소홀함 꾸짖고

헛되이 밝은 창 향해 좀 먹은 책 펼치노라

아녀자들이 어떻게 궁달의 이치를 알까

만사가 하늘에 달렸으니 한 번 빙그레 웃노라

봄은 응당 심한 추위 뒤에 오나니

잠깐 동안 눈을 감고 인내하는 것 뿐이네

-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소고嘯皐 박승임(1517∼86년)의 시 <시월에 오는 비[十月雨]>

 

신이 실성하여 헛소리를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무고하게 대신의 행위를 감히 공격하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평상심을 갖고 굽어살피신다면 신 등이 부득이 항론抗論을 편다는 사실을 반드시 훤하게 아시게 될 것입니다. 만약 언관言官이 전하의 위엄에 겁을 먹고 당장 항론을 중단한다면 신 등에게 일신상의 이익은 되겠지만, 사직을 위해서는 무슨 복이 되겠습니까. 근래에 전하의 노여움이 바야흐로 높아서 대신이 배척되고 경연에서 간쟁을 맡은 신하가 잇따라 바깥으로 내쫓겼고, 오늘에 와서는 승정원이 일시에 혁퇴革退되었습니다. 이러한 실정을 목도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저의 몸에 이로운 줄 결코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감히 다시 말씀드리는 것은 전하께서 신에게 위임하신 뜻을 저버리지 아니하고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국사의 위험을 거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신의 견마지성犬馬之誠을 살피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사심이 있다고 의심하시니, 신이 어찌 감히 벼슬을 욕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빨리 신의 직을 파하소서.

- 소고가 임금께 올린 항소抗疎 중 일부

 

 

 

소고 사당 내부 모습. 소고 불천위 제사는 다른 종가와 달리 사당에서 지낸다. 그래서 신주 감실 앞에 제수 진설을 위한 큰 제사상이 마련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소고의 대표적 저서인 《강목심법》과 《성리유선》

 

 

45 조선 시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을 살다

 

최 항 경

 

 

 

조선 시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을 살다 : 최항경(재실 추원재)

 

 

선생은 날마다 반드시 새벽에 일어나 의관衣冠을 갖추고 가묘家廟에 배알한 후, 단정히 앉아서 책상을 대하고 두 아들과 더불어 종일토록 강론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비록 집안사람들이라도 그 게으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선생은 예禮를 좋아하여 이르기를 '예란 것은 잠시라도 몸에서 떠나서는 안되는 것이고 경敬은 학문을 하는 시종始終이다. 예가 아니면 경을 지닐 수 없고 경이 아니면 예를 할 수 없다'고 하였다.

- 죽헌竹軒 최항경(1560~1638년)에 대해 제자인 고산孤山 김응려가 평한 글

 

아름답고 성한 창밖의 밭둔덕 대나무는 [猗猗窓畔竹]

한겨울 추위에도 푸른 빛 변함 없네 [歲寒不改色]

나는 위무공을 사모하노니 [我思衛武公]

구십에 억시抑詩를 지어 자신을 경계했네 [九十詩猶抑]

- 최항경이 스스로 '죽헌竹軒'이라는 호를 지은 뒤 같은 제목으로 읊은 시

 

선생은 언제나 의관을 바르게 하고 꿇어앉아 있으며, 게으르거나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밤이 깊어지면 주위의 제자들이나 가족에게 물러가게 한 뒤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에 일어나 문 밖에 이르면 들어오라는 이야기를 듣고 들어가는데 선생은 이미 관대를 갖추었더라. 내가 좇아 배운 지가 30여년인데 관대를 하지 않을 때를 보지 못했다. 한강 선생이 보낸 편지가 도착하면 반드시 일어나서 받아 공경스럽게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읽기를 마친 뒤에는 반드시 다시 일어났다가 앉으셨다.

- 밤낮으로 죽헌을 곁에서 지켜본 제자의 기록

 

 

 

죽헌 최항경과 그의 두 아들 위패가 모셔져 있는 사당인 효덕사. 오암서원(성주군 수륜면 남은리) 내에 있다.

 

 

가을 깊어 서리 낀 볼에 책과 칼도 슬퍼하는데

나쁜 기운의 오랑캐 날뜀에 분개하노라

내가 만약 나이 젊은 장년이었다면

군진에 따라가서 작전을 지휘하리

- <통분시痛憤詩>

 

 

 

미수 허목의 글씨 '오암鰲巖'이 새겨진 바위. 오암서원 앞 냇가에 있다.

죽헌종택 사당에 봉안된 죽헌 불천위 신주 감실 모습.

 

 

46 학문 불모지 관서 지방에 학문을 일으켜

   후진을 양성한 '초야의 현인'

 

조 호 익

 

 

 

학문 불모지 관서 지방에 학문을 일으켜 후진을 양성한 '초야의 현인' : 조호익(망화정)

 

 

지산 조공曺公과 같은 분은 바로 초야의 현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 홍문관 대제학 김병학이 지산芝山 조호익(1545~1609년)에 대해 시호를 내려줄 것을 청하는 글로 지은 <시장諡狀>에서 지산을 묘사한 글귀

 

주자가 죽은 후 문인들이 각기 자신이 들은 바를 갖고 사방에 전수하였는데, 본래의 요지를 잃어버리고 이단으로 빠지게 되어 도道 정맥이 중국에서는 단절되고 말았다. 퇴계 선생께서는 외국 땅에서 수백 년 후에 태어나 이단에 유혹되지 않고 주자의 적전을 이었는 바, 우리 동방에서만 비견될 인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비슷한 사람조차 찾아볼 수 없으니, 실로 주자가 돌아가신 후에는 오직 퇴계 선생 한 분 뿐이다.

- 이황이 별세한 해에 <퇴계선생행록>이라는 글의 일부

 

군자는 도를 지키는 게 중한 것이고 [君子所重者在道]

오랑캐 땅에서도 행할 수 있다 했네 [謂可行於蠻貊]

환난에 처해서는 환난대로 행하니  [素患難行患難]

위로는 원망 않고 아래로는 허물 않네 [上不怨兮下不尤]

천명에 따라 맘 편하게 지낼 것이니 [隨所命而安之兮]

그 이외에 또 무엇을 구하리오 [夫何外此而焉求]

- 강동으로 가는 도중에 지은 '서정부西征賦'

 

위태롭던 종사가 막 안정이 되자 [宗社危初定]

수치 씻은 강산은 빛이 새롭네 [江山洗欲新]

갑자기 무너진 집 한 칸 얻으매 [居然得破屋]

이내 몸 살았는 줄 다시 알겠네 [方覺有玆身]

- '난리가 끝난 후 비로소 도촌에 살다[亂後始寓陶村]'

 

뒤늦게 꽃 심는다고 모두 웃지만 [裁花人笑晩]

육십 된 몸 먼 훗날은 기약 못해도 [六十遠期難]

내 나이 칠십 되고 나면 [得到稀年後]

열 번은 꽃이 핀 걸 보고말고 [猶將十度看]

- '꽃을 심다裁花'

 

 

 

지산 조호익이 말년에 거처로 마련해 정착했던 지산고택(영천시 대창면 신광리). 지금은 종손이 거주하지 않고 있고, 불천위 제사도 이곳에서 지내지 못하고 있다.

도잠서원 부근에 있는 조호익 신도비神道碑. 1642년에 세웠고, 동계 정온이 비명碑銘을 지었다.

조호익을 기리고 있는 도잠서원(영천시 대창면 용호리). 1613년 '지봉서원芝峯書院'이라 했다가 1678년 '도잠서원道岑院'이라는 편액이 내렸다.

 

 

47 군자의 학문 외길 걸은

   '선비의 정석'

 

장 흥 효

 

 

 

군자의 학문 외길 걸은 '선비의 정석' : 장흥효(광풍정 제월대)

 

 

나는 일찍이 정자程子의 뜻을 취하여 '경'자로 나의 당堂 이름을 짓고, 이것을 호로 삼았습니다. 또 주자周子의 뜻을 취해 나의 정자 이름 짓기를 '광풍정'이라 하고, 나의 대 이름을 '제월대'라 했습니다. 내 스스로 그 실상에 맞다는 것은 아니지만 고인들이 말한 것을 표적標的으로 삼아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자 할 뿐입니다. 무릇 경이 아니면 마음을 주재할 수 없고 광풍제월이 아니면 도의 체體와 용用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광풍·제월은 중국 송나라 황정견黃庭堅이 대표적 성리학자 주자의 인품을 형용하여 '가슴 속의 맑고 깨끗함이 광풍제월光風霽月(화창한 날씨의 바람과 비 갠 뒤의 달)과 같다'라고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장흥효는 글을 가르친 후 여가를 틈타 집 근처의제월대에 올라 선비들과 함께 노닐면서 예를 학습하기도 하고, 시를 읊기도 하면서 가슴이 상쾌해지도록 한가로이 마음 가는 대로 유유히 지냈다. 50여년 동안 이렇게 지내면서 안동부安東府 안으로 발길을 들인 적이 없었으므로, 이웃마을 사람들조차 그의 얼굴을 본 이가 드물었다.

자기의 것은 많기를 바라고, 남의 것은 적기를 바라는 것은 '나'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없어진다면 누구는 많기를 바라며 또한 누구는 적기를 바랄 것인가. 자신이 이기기를 바라고, 남이 지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내'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없다면 누구는 이기기를 바라고, 누구는 지기를 바랄 것이 있겠는가. 내가 남이고 남이 나인데 뽐낼 것이 무엇이며, 내가 하늘이고 하늘이 또한 나이니 무엇을 탓할 것이 있겠는가.

- '경당敬堂' 기문記文을 친구에게 부탁하는 글에서, 자신의 호이면서 당호인 '경당'과 정자인 광풍정光風亭 및 제월대霽月臺 이름을 지은 이유에 대해

 

경오년(1630년)을 보내고 신미년(1631년)을 맞았으니, 악惡은 경오년과 함께 떠나보내고 선善은 신미년과 함께 맞이하련다. 저 그윽한 산골짜기로부터 벗어나 이곳 춘대春臺에 오르니 요사한 안개는 걷히고 순풍이 감도는구나. 분함은 누르기를 산을 꺾듯이 하고, 욕심은 막기를 골짜기를 메우듯이 하면, 분함과 욕심이 사라지게 됨을 구름이 걷히는 가운데 해를 보듯 할 것이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면 바르지 못한 것들이 드러나지 못하게 되니 천하가 모두 나의 문에 들 것이다. 이전 날에 기욕己欲(사욕)을 극복하지 못해 인욕人欲에 빠져들었더라도 이제부터 기욕을 극복한다면 천리天理가 회복될 것이다. 극복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서 소인이 되고 군자가 될 수 있으니, 군자 되려면 반드시 기욕을 극복해야 한다.

금수가 되느냐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도 아주 미미한 것에서 비롯되니, 금수되기를 면하려 한다면 어찌 조심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저 새들도 머무를 곳을 아는데, 사람이 되어서 머물 곳을 몰라서야 될 것인가. 도는 큰 길과 같아서 눈으로 볼 수도 있고 발로 걸을 수도 있다. 만리萬理(모든 이치)를 보는 것도 한 번 보는 것에서 비롯되고, 천리千里를 가는 것도 한 번 걷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 장흥효가 신미년 새해를 맞아 작성한 글

 

경으로 마음 안을 곧게 하여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공부를 그치지 않으며

의로써 마음 바깥을 방정히 하여

그 혼자 있을 때를 더욱 조심하노라

올해 첫 달 첫날에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 살펴보니 부끄러운 일이 많구나

옛날의 잘못된 일들을 모두 씻어내고

여러 어진 사람들과 함께하기를 기약하노라

- 경당이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 설날 지은 시歲時自警

 

 

 

경당종택(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사랑채.

자신이 장만한 불천위 제사 제수祭需와 함께 한 경당 11대 종손 장성진 씨.

장흥효 불천위 신주(오른쪽)가 모셔져 있는 사당 내부. 신주함을 덮개로 덮어 두는 점이 독특하다.

 

 

 

48 자녀 교육을 위해 벼슬길을 접은 선비,

죽어서 판서가 되다

 

김 진

 

 

 

자녀 교육을 위해 벼슬길을 접은 선비, 죽어서 판서가 되다 : 김진(청계종택)

 

 

너희들이 먼 길을 왔다 갔는데 아무 탈 없이 있느냐. 나는 별 일 없으니 걱정 말아라. 너희들은 시월 전에 평해의 절로 들어가 겨울 석달 동안에 사서삼경을 공부하고 오너라. 너의 형은 게으름을 스스로 채찍질할 뜻이 없으니, 내 머리가 다 희게 되었다. 너희들 또한 편지를 보내어, 내가 너의 형에게 마음 쓰는 뜻을 알도록 하여라.

- 청계靑溪 김진(1500~80년)이 아들 수일 · 명일 · 성일 · 복일에게 보낸 편지 내용

 

큰 형(김극일)이 과거에 급제한 뒤 바로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슬하에 아이들이 여덟인데 대부분 나이가 어리거나 강보에 싸인 아이였다. 부군께서 어루만져 기르심에 있어 지극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밤에는 좌우로 안아 주시는데 아이들의 어머니 젖 달라는 소리가 매우 애처로워 부군께서 몸소 젖을 먹이시니, 비록 단 젖은 나오지 않았으나 젖을 빨면서 울음을 그치곤 했다. 부군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면 주위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아들 김성일이 지은 김진 행장行狀

 

여러 아이들이 비록 어린 나이에 어머님을 잃었지만, 이 덕분에 물과 불의 위험이나 춥고 배고픔을 면할 수 있어 무사히 오늘에 이르렀으니, 하늘 같이 높은 덕이 낳아주신 데에서만 그친 것이 아니다. 자애로운 기르심이 지극하고 가르침이 또한 엄격하시니, 비록 어린아이라도 항상 학당學堂에서 학업을 닦도록 하셨고, 마을 거리에서 무덤 만드는 흉내나 장사치의 놀이는 못하게 하셨다.

- 김성일

 

 

 

청계종택(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김진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나 지금 건물은 아들 김성일이 당시 중국 북경 상류층 주택 설계도를 가져와 지은 것이다.

청계와 그의 다섯 아들의 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사빈서원泗濱書院(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1710년에 임하면 사의리에 처음 건립됐고, 임하댐 건설로 1987년 임하면 임하리로 옮겼다가, 다시 현재 위치로 이전 · 복운해 2011년에 준공식을 가졌다.

1572년에 제작된 청계 김진 영정(보물 제1221호 · 가로 109 × 세로 142cm). 모시 바탕에 먹과 채색을 사용했다.

 

 

49 의義가 아니면 벼슬도

   초개처럼 버린다

 

김 령

 

 

 

의義가 아니면 벼슬도 초개처럼 버린다 : 김령(계암정)

김령의 부친인 설월당雪月堂 김부륜(1531~98년)이 학문과 후진 양성을 위해 건립한 '설월당'(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김령이 공부했을 이 정자는 원래 낙동강에 인접한 오천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1974년 현재 위치로 이건했다.

계암 김령의 조부인 탁청정 김유金綏가 지은 종택에 부속된 정자로 건립된 탁청정(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1541년에 건립되었는데, 영남 지방의 개인 정자로서는 그 구도가 가장 웅장하고 우아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세모에 눈 · 서리 잦더니

산천은 쌀쌀한 그 모습 감추었도다

시간은 절로 머물지 않으니

하늘 뜻 누가 능히 알겠는가

어지러이 나도는 무리는 많으나

움직이고 멈춤에는 다 때가 있다네

고요히 세상 이치를 보니

어찌 반드시 깊이 슬퍼하리오

한 밤에 거문고 타니

믿을 바 종자기鐘子期 뿐이로다

- 죽음을 3개월여 앞둔 1640년 세모에 읊은 시

 

 

 

김령이 별세할 때까지 약 40년간 쓴 일기 《계암일록》.

 

 

 

50 큰 뜻을 펼치려 한 그 선비,

은거한 까닭은

 

이 시 명

 

 

 

큰 뜻을 펼치려 한 그 선비, 은거한 까닭은 : 이시명(석천서당)

 

 

고요함을 사랑하여 홀로 산에 살고

번거로움이 싫어 손님도 끊었네

살림살이를 못하니 집이 절로 한가롭고

가르침만 있으니 아이들 때로 글을 읽는구나

- 석계의 <산에 살며山居>

 

넓고 넓은 천지는 그 큼이 끝이 없고

곧고 밝은 해와 달은 옛 그대로인데

누가 오랑캐 먼지를 보내 이 더러움 일으켜

남성일계★로 조선을 그르쳤는가

- '유감有感

★ 남성일계南城一計 : 병자호란으로 인한 남한산성 항복 굴욕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말하길 '세상에 쓰이었다면 마땅히 크게 일을 했을 것'이라 했건만, 어찌 생각했으랴! 시운이 어긋나 때를 못 만나게 될 줄을……. 포부를 펴지 못하고 물러나 가정에서 학문을 강講하며, 역사와 경서를 연구한 바가 더욱 넓고 넓었도다. 한가롭고 가난한 삶이었으나 오직 의를 따랐으며, 뜰에 가득한 난옥蘭玉(재주가 뛰어난 석계의 자제)들 그 재능 이어받았네. 서로 논변을 하는 즐거움 속에 고사리를 캐며 수산首山(영양 수비산)에 살았으니 세상사람들 그 누가 알았겠는가.

- 이시명이 세상을 뜬 후 유림의 선비들이 지은 제문

 

바다집(영해 본가)을 떠난 후 석계(석보)에서 산 지 10년이나 되었네. 내가 어떤 사람인가 스스로 살피건대, 자주 재앙을 당해 마음이 어지러웠고, 마음이 분란하여 밖이 삐걱거리고 안이 무너져 내 몸 하나도 붙일 데가 없었네. 바탕은 천진하고 우직하나 운이 풀리지 않았으니 무슨 덕이 있어 내 스스로를 새로이 할 수 있었겠는가. 시대는 어둑어둑 바야흐로 쇠하려 하고 밤은 길고 길어 새벽이 오질 아니했네. 때는 계사년(1653년), 집을 옮길 좋은 날, 좋은 때를 잡아 이사함에 꾸불꾸불 험한 길을 지나느라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수비首比를 향해 수레를 재촉했네. …(중략)… 수해 · 한해로 창고는 텅 비었네. 온 식구가 하늘의 도움을 입지 못해 아우성이었지만 그 누굴 의지할 수 있었으랴. 도토리를 주워 곡식을 대신했고, 소나무 껍질 벗겨 삶아 먹었네. 이로도 오히려 죽지 않은 것을 만족하며 애오라지 분수로 생각하고 가난을 즐겨했네. …(중략)… 요컨대 마음은 어느 곳에 두었는가. 배움에 두었을 뿐이었네. 배움은 반드시 익숙해진 이후라야 빛나는 법이네. 성인들의 가르침은 서적에 드러나 있으니 근실히 배우고 날마다 가르침 따라 공부하며 선생과 제자가 서로 토론했네. 외모 다스리길 힘써 의복을 정결히 하고 내면을 밝게 하기를 제사 지내듯이 했네. …(중략)… 나의 구하는 바가 밖(외물)에 있지 않고 안(마음)에 있으니 오히려 돈 많은 것이 무엇이 부러울 것이랴. …(중략)… 이 즐거움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것임을 아노라.

- 석보에 살다가 수비로 옮기면서 지은 글卜居賦

 

 

 

석계가 1640년에 석보로 이사 와서 지은 석계고택.

 

이제 늙은 이 몸 죽을 때가 되었으니 여러 아들과 손자들이 훗날 새와 짐승들과 무리지어 살아 인륜을 어지럽힐 폐가 생길까 염려되는구나. 내 병 없을 때 속히 저 높은 나무로 옮겨 앉을 생각을 결행하여 내 자손들로 하여금 인현仁賢의 가르침에 젖게 하는 것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학발(하얗게 센 머리털)로 병들어 누워 [鶴髮臥病]

자식을 만리 길에 보내네 [行者萬里]

자식을 만리 길에 보내면 [行者萬里]

어느 때나 돌아오나 [曷月歸矣]

학발로 병을 안았는데 [鶴髮抱病]

해는 서산에 지려하네 [西山日迫]

두 손 모아 하늘에 빌건만 [祝手于天]

하늘은 아득하니 어찌하나 [天何漠漠]

학발로 병 무릅쓰고 [鶴髮扶病]]

일어나려다가 넘어가곤 하네 [或起或踣]

지금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今尙如斯]

옷자락 떨치고 떠나갔으니 어찌하나 [絶裾何苦]

- 학발시鶴髮詩

 

 

51 조선 성리학의 선구자,

독자적인 조선의 학문을 정립하다

 

이 언 적

 

 

 

 조선 성리학의 선구자, 독자적인 조선의 학문을 정립하다 : 이언적(독락당 계정)

 

 

선생이 살아 계실 때 스스로 깊이 감추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선생이 도를 지니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내가 어리석어, 일찍이 벼슬에 나아가 선생을 우러러 보고서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 이런 문제를 가지고 깊이 물어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10여 년 전부터 병이 들어 재야에 묻혀 있으면서 하잘 것 없는 것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의지할 데를 찾아서 물을 곳이 없음을 돌아본 후에야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으로 선생의 사람됨을 흠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 퇴계 이황이 회재에 대해 평한 글

 

오호라, 우리나라가 예로부터 인현仁賢의 교화를 입었으나 그 학문은 전해지지 않았다. 고려 말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호걸스러운 선비로서 이 도에 뜻이 있고, 세상에서 또한 도학자라 칭송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후세에 칭송을 받더라도 학문의 연원을 징험할 바가 없으며, 후세의 학자들로 하여금 찾고 따르게 할 바가 없어서 지금의 암울한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선생은 학문을 주고받은 곳이 없으면서도 스스로 유가의 학문에 힘을 쏟아 어렴풋한 속에서도 날로 드러나고 덕이 행동과 딱 들어맞았으며, 밝게 글로 표현해 후세 사람에게 전해지게 했으니, 우리나라에서 찾아보아도 선생과 짝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 퇴계 이황이 회재에 대한 찬사

 

마음이란 영묘한 것으로, 안으로는 뭇 이치를 갖추고 밖의 온갖 변화에 응한다. 이 마음을 잘 함양하면 천지와 합일하게 된다. 마음을 함양하는 방법은 경敬이다. 경이란, 마음을 오롯하게 하는 것이다. 마음이 고요할 때는 곧 태극이니, 경으로써 마음을 오롯하게 해야 본체가 드러난다. 마음을 어디에 집착하거나 흐트리지 말고 고요히 간직해야 명정한 가운데 대공무사大公無私하게 된다. 천지만물이 제각기 형식을 지키면서 본성을 실현해 나가도록 도우려는 인간의 노력은 실로 경공부의 근본이 된다.

- <양심잠>

 

 

회재 불천위 제사 장소인 무첨당. 조선 중기 건물이며, 보물로 지정돼 있다.

회재 이언적을 제향하고 후진을 교육하기 위해 1572년에 건립한 옥산서원(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의 구인당求仁堂. 1574년 사액賜額을 요청하여 '옥산'이라는 이름과 서책을 하사받았다. '옥산서원玉山書院'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 작품이다.

회재종택 무첨당 대청에서 진행되는 불천위 제사 모습. 일반 제관들은 무첨당 마당에서 침례한다.

 

 

흔들리지 않는 힘이 있어 창졸간이라도 빠른 말과 급한 낯빛을 한 적이 없이, 차분하고 바름靜正으로 스스로를 지켰다. 전주 부윤 시절, 명절을 맞아 민간의 놀이를 하였다. 감사인 모재慕齋 김안국은 정인군자인데도 종종 돌아보고 웃는 일을 면하지 못했는데, 선생은 초연하게 보지 못하는 것같이 했다. 옥당에서 번을 서면서 혹 동료들과 종일토록 서로 대하여도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경을 유지하는 공부가 깊어서이지 애써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 퇴계가 지은 회재 행장 글

 

 

불천위 신주는 일정한 규격과 구조로 만들어진다. 재료는 밤나무. 신주의 앞면에는 불천위 인물의 벼슬과 시호 등을 세로 한 줄로 쓰는 것이 원칙이다. 좌로부터 도자韜藉(덮개)를 씌운 신주, 도자를 벗긴 신주, 신주의 옆모습

불천위 신주를 주독 안에 봉안해 그대로 사당에 모시는 경우도 잇으나 대부분은 감실에 모시고 있다. 감실의 모양이나 크기는 종택별로 다양하다.

보기 드물게 세로 두 줄로 관직을 쓴 정경세 신주(왼쪽) 및 두 부인의 신주.

 

 

 

 

  1. [/footnote]1가 되어서 [君爲完山鳥]
    자식 잃은 슬픔이 아직 안 그쳤는데 [哭子猶未休]
    나는 동문오[footnote]2 [본문으로]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