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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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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5 나는 매일 감동을 만나고 싶다 - 히사이시 조가 말하는 창조성의 비밀

 

 

히사이시 조 지음 | 이선희 옮김

2016, 샘터

 

대야도서관

SB112140

 

674.804

히52ㄴ

 

아우름 11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인문교양 시리즈 아우름

'Aurum'은 라틴어로 '빛나는 새벽'이란 뜻입니다.

우리의 감성과 지성에 빛나는 새벽을 여는 책을 만들어 갑니다.

세대를 아우르는 지혜, 앞 세대가 다음 세대를 껴안는 사랑을 담습니다.

 

히사이시 조 久石讓

1950년생. 일본국립음악대학교 작곡과를 졸업한 후, 1982년 첫 번째 앨범 <INFORMATION>을 발표했다. 1984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의 음악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영화음악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천공의 성 라퓨타>(1986), <이웃집 토토로>(1988), <마녀 배달부 키키>(1989), <붉은 돼지>(1992) 등의 음악을 담당했으며, <모노노케 히메>(1997)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최우수 영화음악상을 받으며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이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 <벼랑 위의 포뇨>(2008) 등의 작품을 통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동반관계를 이어가며 세계적 영화음악가 중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한다.

일본의 작가주의 감독인 기타노 다케시와는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1992), <소나티네>(1993), <키즈 리턴>(1996), <하나-비>(1997), <기쿠지로의 여름>(1999) 등의 작품을 함께 작업했다. 영화 외에도 수많은 드라마, CF, 다큐멘터리에서 음악을 작곡하고 프로듀싱했으며, 2001년에는 <쿼텟>이란 영화로 감독 데뷔를 하기도 했다.

《나는 매일 감동을 만나고 싶다》는 히사이시 조가 처음으로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밝힌 책으로, 음악가로서의 열정뿐 아니라 창조성의 비밀, 확고한 인생철학까지 그의 모든 것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옮긴이 이선희

서울에서 태어나, 부산대학교 일어일문학과와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교육대학원에서 수학했다.  부산대학교 외국어학당 한국어 강사를 거쳐 삼성물산, 숭실대학교 등에서 일본어를 강의했다. 현재 KBS 아카데미 일본어 영상번역과정 강사이며, 방송 및 출판번역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비밀》, 《방황하는 칼날》, 《검은 집》, 《천국까지 100마일》 등이 있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벼랑 위의 포뇨>, <추억의 마니>, <하나와 앨리스 : 살인 사건> 등의 애니메이션을 우리말로 옮겼다.

 

나는 작곡가이다.

작곡가의 기본 명제는 '좋은 곡을 만드는 것'이다.

누군가 "작곡가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계속 곡을 쓰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 히사이시 조

 

|차례|

 

여는 글 음악은 곧 나 자신이다

 

1장. 감성과 마주하라

예술가와 비즈니스맨의 차이
일류의 조건
감독의 마음에 들기 위해 작곡하지는 않는다
감성이란 무엇일까?
아이디어는 무의식 속에 번뜩인다
그 자리의 분위기를 잡아라



2장. 직감력을 연마하라

질보다 양으로 승부하라
느끼는 힘을 연마하라
컵을 보고 꽃병이라고 할 수 있는가!
직감은 행운을 끌어당긴다
수준은 낮은 쪽으로 향한다
실패의 원인은 내부에 있다

3장. 영상과 음악의 공존

침묵을 두려워하지 말라
상상력을 환기시키는 음악
매번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진검승부한다
세계관은 최초의 5분 안에 결정된다
음악가로서의 가능성을 넓히는 영화음악
프로의 일원이라는 자부심
작품의 인격
음악가의 시점으로 만든 <쿼텟>


4장. 음악, 그 신비함에 대하여

음악은 기억의 스위치이다
새로운 도전-나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너는 세계 제일이다
최고의 청중은 나 자신이다



5장. 창조성의 본질

전통악기는 뜨거운 감자
후세에 전통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일의 의미는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은가
감수성 그리고 강인한 힘



6장. 시대의 바람을 읽는다

아시아에서 불어오는 바람
혼돈 속에 있는 아시아 파워
온리 원의 함정
나는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싶다

 

composer,

1. 다양한 음악을 창작하는 사람. 때로는 고전 음악, 민요, 대중음악 따위를 새로운 기법으로 편곡하기도 한다.
2. 영화, 또는 영상에 필요한 멜로디, 리듬, 화성에 맞추어 음악을 작곡하는 사람.
3. 애니메이션에 들어가는 음악을 스크립트스토리보드분위기에 맞추어 주제 음악, 배경 음악 등을 작곡하는 전문 음악가.

 

mix down, ミックスダウン, mixed foursome

녹음된 여러 트랙오디오 신호를 작업 목적에 따라 믹싱으로 단일 트랙의 프로그램으로 제작하는 것.
음량, 음원의 위치 등 균형을 맞추고, 음색의 변화나 특수한 음향적인 효과를 더해 2개의 채널(channel) 또는 상황에 맞는 채널 수에 맞추어 손질하는 작업.

 

존 케이지John Cage, John Milton Cage Jr. 작곡가

1912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출생하였다. 포모나대학교를 졸업하고 H.카우엘, A.쇤베르크에게 작곡을 배웠다. 1936∼1938년 시애틀의 코니시스쿨에서 교직생활을 하면서 타악기만으로 앙상블을 조직하고 1951년경부터는 독자적인 음악사상에 입각하여 문제작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또 1952년 독일의 도나웨신겐에서 개최된 현대음악제에서는 《4분 33초》라는 작품을 발표, 음악에 우연적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유럽음악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우연성이나 불확실성은 작곡기법의 하나로서 널리 채용되고 있다. 주요작품으로는 《Imaginary Landscape No.4》(1951)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콘서트》(1954∼1958) 《Variations I》(1958) 등이 있으며, 또 도안악보()의 창안 등 독창성 넘치는 활동도 하였다.

 

빈코 글로보카르Vinko Globokar

안데르니 출생. 모국의 뤼브리야나음악원과 파리음악원에서 트롬본을 배우고, R.레이보비츠와 L.베리오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그 뒤 케른음악원에서 트롬본을 가르치고(1968), 프리 뮤직을 위한 단체 ‘뉴포닉 아트’를 결성하였다(1972). 현재는 파리의 음악연구기관인 ‘이르캄’의 연구원이다. 트롬본 연주자로서는 순환호흡에 의한 무한주법()을 위시한 많은 새로운 주법을 개발하였고, 작곡가로서는 5개의 트롬본을 위한 《디스쿨 II》(1967~1968), 앙상블을 위한 《라보라토리움》(1973) 등의 작품이 있다.

 

우연성의 음악chance operation, indeterminacy

작곡이나 연주에 우연성()을 채용한 음악을 가리킨다. <챈스 오퍼레이션>, <불확정성의 음악>, <알레아토리크> 등의 용어도 사용된다. 작곡이나 연주에 일종의 우연성을 이용하는 것은, 즉흥연주에서 볼 수 있듯이 동서를 불문하고 예로부터 존재했다. 바로크 시대의 통주저음이나 고전파 시대의 카덴짜도 그 한 예이다. 그러나 <우연성의 음악>은 20세기 후반의 우연성을 한층 적극적으로 취급한 음악을 뜻한다. 1951년 존 케이지는 중국의 역법()을 이용해서 피아노곡 ≪변화의 음악 music of changes≫을 작곡한 이후, 작곡과 연주 쌍방의 차원에서 불확정한 요소를 지닌 작품을 많이 발표했다. 이러한 케이지의 발상에는, 불교의 선() 사상이나 에릭 사티의 음악 또는 다다이즘의 예술 운동이 있었다. 케이지의 <우연성의 음악>은 M. 펠트만, C. 볼프, E. 브라운 등 미국의 새세대 작곡가에 큰 영향을 주었다. 케이지의 음악과 그 사상은 1954년 10월에 도나우에싱겐 음악제에서 소개되어, P. 불레즈, K. 시톡하우젠 등에 충격을 주었다.

불레즈는 1957년에 <알레아>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고, 케이지의 사상을 <동양주의>라고 비판하여, 부분적으로 우연성을 이용하는 <관리된 우연성>을 주장했다. 1960년대부터 70년대에 걸쳐 이 우연성의 사상은, 기보법의 개량(도형악보)나 연주 행위 회복의 원동력이 되어, V. 글로보카르의 <집단 즉흥연주>나 시톡하우젠의 <직관()음악> 등 서양의 음악사상 자체의 반성을 재흥시키고 있다.

 

미니멀리즘minimalism

제2차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시각 예술 분야에서 출현하여 음악, 건축, 패션, 철학 등 여러 영역으로 확대되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영어에서 '최소한도의, 최소의, 극미의'라는 뜻의 '미니멀(minimal)'과 '주의'라는 뜻의 '이즘(ism)'을 결합한 미니멀리즘이라는 용어는 1960년대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미니멀리즘은 기본적으로 예술적인 기교나 각색을 최소화하고 사물의 근본 즉 본질만을 표현했을 때, 현실과 작품과의 괴리가 최소화되어 진정한 리얼리티가 달성된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회화와 조각 등 시각 예술 분야에서는 대상의 본질만을 남기고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거하는 경향으로 나타났으며, 그 결과 최소한의 색상을 사용해 기하학적인 뼈대만을 표현하는 단순한 형태의 미술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미술이론가이기도 한 도널드 주드(Donald Judd)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음악에서의 미니멀리즘은 1960년대 인기를 끌었던 필립 글래스(Philip Glass)의 단조롭고 반복적인 합주곡처럼 기본적으로 안정적인 박자에 반복과 조화를 강조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건축 디자인 분야에서도 소재와 구조를 단순화하면서도 효율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타났으며,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 리차드 풀러(Richard Buckminster Fuller)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미니멀리즘은 패션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장식적인 디자인을 가능한 제거한 심플한 디자인이나 직선적인 실루엣의 선정적인 옷, 또는 최소한의 옷으로 훌륭한 옷차림을 연출하는 방법 등이 모두 미니멀리즘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외에도 미니멀리즘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유만을 주장하는 금욕주의 철학, 복잡한 의식을 없애고 신앙의 근본으로 돌아가려는 종교적인 흐름 등 많은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니멀뮤직minimal music

1960년대 후반 미국의 작곡가 S.라일히, T.라이리 등이 처음 시도한 연주방법으로, 대개 합주연주되지만 신시사이저(전자음합성장치)의 기억회로()를 이용하여 한 사람이 연주하기도 한다. 기본적인 연주방법은, 극히 짧은 선율의 한 패턴을 몇 번이고 반복 연주하면서 점차 원래의 선율을 조금 변형시킨 패턴으로 이행()시켜 나가는데, 이렇게 연주가 중첩되면 선율과 선율 사이에 갖가지 엇갈림이 생겨 마치 청각적()인 모아레(moiré:얼룩)와 같은 효과가 나타난다. 기승전결이 분명한 종래의 극적() 음악과는 판이한, 감각적인 부유상태()를 느끼게 하는 음악으로, 이 기법은 다양한 변화를 가져와 현재는 현대음악에도 널리 쓰이고 있다. 또한 이 기법은 클래식음악뿐만 아니라 포퓰러음악, 특히 록음악에도 이용되고 있다.

 

fluegelhorn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ii Dmitrievich Shostakovich

페테르부르크 출생. 어려서부터 페테르부르크음악원 출신의 피아니스트인 어머니에게 피아노의 기초를 배우고, 11세 때 글랴세르의 음악학교에 들어가 정규의 작곡공부를 시작하였다. 러시아혁명 후인 1919년에는 페트로그라드음악원에 입학, L.니콜라이에프에게 피아노를, M.시타인베르크와 A.K.글라주노프에게 작곡을 배우고 1925년에 졸업하였다. 졸업작품인 《제1교향곡》은 소련뿐 아니라 세계 악단에 그의 이름을 떨치게 하였다.

당시 페테르부르크에는 유럽의 새로운 경향의 음악, 즉 I.F.스트라빈스키의 원시주의, A.베르크의 표현주의 작품들이 한창 연주되었으므로, 그도 그들의 작품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의 작품에 《제2교향곡》(1927) 《제3교향곡》(1929), 그리고 《피아노·트럼펫과 오케스트라의 협주곡》1933) 《피아노전주곡집》, N.V.고골에 의한 오페라 《코》(1930), 발레 《황금시대》(1930) 등이 있다.

한편 이 무렵부터 예술에서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그가 34년에 발표한 《므첸스크의 맥베스부인》이 공산당의 예술운동에 역행한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창작에 대한 이러한 간섭은 당연히 문제가 되었으나, 그는 이 비판을 견디어 내고 작풍을 전환하여 1937년의 《제5교향곡》으로 명예를 회복하고, 40년 《피아노5중주곡》으로 제1회 스탈린상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페테르부르크에서 방공감시원으로 종군하였고, 1942년 《제7교향곡》으로 다시 스탈린상을 받았다. 그러나 대전 후인 1945년에 발표한 《제9교향곡》은 그 경묘한 내용과 신고전적 작풍 때문에 “타락한 유럽 부르주아지의 형식주의에의 추종”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즉 ‘지다노프 비판’이다. 그러나 49년의 오라토리오 《숲의 노래》와 51년의 합창모음곡 《10의 시()》로 인기를 회복하고 또다시 스탈린상을 받았다.

1937∼1941년에는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1943∼1948년에는 모스크바음악원의 작곡교수를 지냈다. 작품에 15곡의 교향곡 외에 현악4중주곡을 비롯, 기악곡·오페라·오라토리오·발레음악·영화음악 등 많은 걸작을 남겼다.

 

카를 오르프Carl Orff

뮌헨 출생. 1914년 뮌헨음악대학을 졸업하고 독일 각지에서 지휘활동을 하다가 1921년 H.카민스키에게 사사, 그 영향으로 르네상스바로크음악에 흥미를 가졌다. 1924년부터는 킨터와 함께 음악과 체육을 결합시키는 데 힘썼으며, 또 E.J.달크로즈의 교육노선에 따라 1935년까지 음악교육부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음악교육용의 독특한 작품 《슐베르크 Schulwerk》를 출판하고 1937년에는 대표작의 하나인 《카르미나부라나 Carmina Burana》를 작곡하여 독자적 작풍을 확립하였다. 1943년 《카툴리 카르미나》를 발표하고 이후 《안티고네》 《아프로디테의 승리》 등 그리스 비극을 제재로 한 많은 작품을 썼다.

그의 작풍은 리듬을 중시하여 타악기를 많이 이용하고, 거기에다 단순 명쾌한 유니즌(unison)과 5회 반복의 선율을 사용하여 힘차고도 원시적인 효과를 냈다. 1950∼1960년에는 뮌헨대학교에 있었다.

 

버르토크Béla Bartók

1881년 3월 25일 헝가리의 나지센트미클로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업학교 교장이었고,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5세 무렵부터 어머니의 지도로 피아노를 배웠는데, 일찍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7세 때 자작의 소곡 「다뉴브」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발트슈타인」의 일부를 공개 연주하여 그 음악적 재능을 알렸다. 1907년, 부다페스트의 국립 헝가리 음악원 피아노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1912년에 사직하고 작곡에만 전념했다. 1940년 미국에 가서 아내와 함께 피아노 연탄 연주회를 개최했고, 같은 해 11월 25일 컬럼비아 대학은 버르토크에게 명예 음악박사의 칭호를 주었다.

그 후 병에 걸렸으나, 와병 중에도 작곡을 계속하여 그의 피아노 협주곡은 죽음 며칠 전에 완성했는데, 1945년 9월 25일 뉴욕에서 타계했다. 버르토크은 헝가리 · 루마니아 · 체코슬로바키아 등의 민요를 1만 종이나 수집하여, 그 중에 1,000곡 정도를 발표하였다. 그의 민요 연구는, 순수한 민요적 가락으로 작곡하는 하나의 태도를 만든 데에 의미가 있다. 버르토크은 ‘현대의 베토벤’으로도 비유되고, 버르토크 협회도 창립되었으며, 그 연구와 유업()이 널리 소개되고 있다.

 

serendipity

세렌디피티(serendipity)는 "뜻밖의 발견(을 하는 능력), 의도하지 않은 발견, 운 좋게 발견한 것"을 뜻한다. 형용사형은serendipitous이며, '뜻밖에 행운을 발견 하는 사람'은 serendipper라고 한다. 영국 작가 호러스 월폴(Horace Walpole, 1717~1797)이 1754년에 쓴 「The Three Princes of Serendip」이라는 우화()에 근거하여 만든 말이다. Serendip이라는 섬 왕국의 세 왕자가 섬을 떠나 세상을 겪으면서 뜻밖의 발견을 했다는데 착안한 것이다. Serendip은 스리랑카(Sri Lanka)의 옛 이름이다.1)

원래는 14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아미르 호스로 델라비(Amir Khusrow Dellavi)의 민담집 『8개의 천국』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하는데, 이야기는 좀 황당하다. 예컨대, 어느 날 낙타를 잃어버린 한 아프리카인을 만나자 세 소년은 낙타를 보지도 않았지만 자세히 설명한다. 그 낙타는 애꾸고 이빨이 하나 빠졌고 다리를 저는데, 한쪽에는 기름, 한쪽에는 꿀을 싣고 있으며, 임신한 여인이 곁에 따라간다는 것이다. 낙타 주인은 이들이 낙타를 훔쳤다고 생각하고 국왕에게 고발했지만, 얼마 후 낙타를 도로 찾아 이들은 감옥에서 풀려나온다. 왕이 어떻게 보지도 않은 낙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느냐고 물었는데, 그들의 답은 이렇다.

"길가의 왼쪽 풀만 뜯어먹었으니 낙타의 오른쪽 눈이 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뜯어먹은 풀이 일부 떨어져나온 것으로 보아 이가 빠졌다. 한쪽 발자국이 다른 쪽 발자국보다 약하니 다리를 절고 있다. 길 한쪽에는 개미들이 모여들고 다른 쪽에는 벌이 부지런히 오가니 이는 기름과 꿀을 조금씩 흘렸기 때문이다. 그 옆에 난 샌들 자국으로 보아 여자가 낙타를 몰고 가고 있다. 게다가 축축한 흔적이 있는데 냄새를 맡아보니 사내의 욕정을 불러일으키는 데다가 땅에 손을 짚고 일어난 표시도 있으니 그 여자는 분명 임신부다."2)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Robert K. Merton, 1910~2003)은 엘리너 바버(Elinor Barber)와 같이 쓴 『세린디피티의 여행과 모험(The Travels and Adventures of Serendipity)』(2003)에서 세린디피티를 과학적 방법론의 하나로 발전시켰다.3) 역사가 돈 리트너(Don Rittner)는 "역사는 타이밍과 인맥 환경과 세린디피티가 어우러져 만들어진다(History is an intricate web of timing, people, circumstances, and serendipity)"고 했는데, 특히 과학 분야에선 이런 사례가 많다. 예컨대, 오르가논(Organon) 사는 건초열(hay fever)성 알러지를 위한 항히스타민제를 개발하다가 실패했지만 실험에 참가했던 직원과 피실험자가 유례없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톨본(Tolvon)이라는 항우울제를 개발하게 된다. 또 알렉산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 1881~1955)은 1928년 페니실린 곰팡이를 발견했으나 그 효능은 10년이 지나서 옥스퍼드 대학의 하워드 플로리(Howard Florey, 1898~1968)라는 병리학자가 우연히 알아냈으며, 애초 협심증 치료제로 개발된 비아그라(Viagra)도 실험 참가자들이 남은 약을 반납하지 않아 알아보니 발기부전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4)

세렌디피티는 최근에는 IT 분야에서 많이 쓰이는 말이 되었다. 일본 저널리스트 모리 겐(, 1968~)은 인터넷은 스위치를 켜면 자동적으로 정보가 나오는 TV와 달리, 사용자의 선택에 따라 정보가 제공되기 때문에 예기치 않은 발견이나 새로운 만남, 즉 세렌디피티의 상실을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예측된 범위의 것만 추천되고 자신의 사고조차 의도적으로 규정될 가능성이 높다. 상황을 단순히 낙관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5)

그러나 구글의 '순간 검색(Instant Search)'은 세렌디피티를 제공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와 관련, 조용호는 이렇게 말한다. "순간 검색은 구글 검색 창에 검색 단어를 입력하면 글자가 입력되는 족족 검색 결과가 화면에 뿌려지는 방식이다. 단어를 다 입력하고 검색 버튼을 누른 후에야 결과를 볼 수 있던 사용자들에게는 새로운 서비스인 것이다. 구글은 사용자 편의성 제고 및 단어를 입력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검색 결과를 통해 세렌디피티, 즉 '우연한 발견의 즐거움'을 서비스로 제공한 것이다. 물론 구글의 의도가 사용자 가치를 올리는 데만 국한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6)

세계 최대의 온라인 스토어인 아마존(Amazon.com)의 창업자 제프 베저스(Jeff Bezos, 1964~)는 재미 삼아 차고에서 중고책 몇 권을 판 경험이 자신의 세렌디피티였다고 했고, 페이스북을 만든 마크 저커버그(Mark Zuckerberg, 1984~)도 자신의 성공을 세렌디피티로 설명했다. 하긴 구멍가게를 하듯 4명의 대학생이 시작한 일이 딱 8년 만에 1,000억 달러 가치, 연 매출 40억 달러의 괴물로 성장했으니,7) 이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랴. 저커버그는 이 기적과 같은 일에 대해 『타임』(2010년 12월 27일)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사람들이 행하는 세렌디피티라는 개념을 갖고 있어요. 뜻밖의 행운인 거죠. 가령 레스토랑에 가서 한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를 우연히 마주치는 것과 같은 거죠. 굉장한 경험이죠. 그 상황이 그렇게 마법처럼 보이는 이유는 대체로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저는 사실 그런 상황들이 실제로는 흔하다고 생각해요. 아무도 우리가 그 중의 99퍼센트를 놓치고 있는 거겠죠."

저커버그와 인터뷰를 한 레브 그로스먼(Lev Grossman)은 이런 해설을 덧붙였다. "페이스북이 원하는 건 외롭고 비사교적인 세계를 무작위적 확률로 친근한 세계로, 뜻밖의 발견이 있는 세계로 전환하는 것이다. 당신은 사람들이 이루는 네트워크 속에서 일하며 살게 될 것이고, 결코 다시는 혼자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인터넷, 그리고 전 세계는 하나의 가족처럼, 하나의 대학 기숙사처럼, 혹은 직장 동료들이 최고의 친구들이기도 한 하나의 사무실과 같은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8)

온갖 유형의 세렌디피티 가운데 가장 가슴 떨리는 건 역시 사랑의 세렌디피티일 게다. 피터 첼솜(Peter Chelsom) 감독의 〈세렌디피티〉(2001)가 바로 그런 살 떨리는 감격을 그린 영화다. 첼솜은 그간 늘 적자만 보는 영화를 만들다가 이 영화를 통해 최초의 대박을 터뜨렸으니, 그에겐 다른 이유로 살 떨리는 영화가 아니었을까?

뉴욕의 크리스마스이브, 모두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선물을 사느라 바쁜 블루밍데일 백화점에서 조나단(존 큐잭 분)과 사라(케이트 베킨세일 분)는 각자 자신의 애인에게 줄 선물을 고르다가 마지막 남은 장갑을 동시에 잡으면서 첫 만남을 갖게 되지만, 평소 운명적인 사랑을 원했던 사 라는 다음 만남을 거절하면서 운명에 미래를 맡기자고 제안한다.9)

〈Serendipity〉

Serendipity

결국 두 사람은 7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는데, 이걸 아름답다고 하긴 어려울 것 같다. 둘 다 서로의 약혼자와 결혼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 일련의 세렌디피티에 의해 다시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인데, 파혼당할 두 남녀를 희생으로 하는 사랑 노름을 세렌디피티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각주

  1. John Bemelmans Marciano, 『Toponymity: An Atlas of Words』(New York: Bloomsbury, 2010), pp.109~111; Martin H. Manser, 『Get to the Roots: A Dictionary of Word & Phrase Origins』(New York: Avon Books, 1990), p.205.
  2. 주경철,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170] 세렌디피티」, 『조선일보』, 2012년 7월 5일.
  3. Serendipity, Wikipedia.
  4. 임귀열, 「임귀열 영어」, 『한국일보』, 2013년 5월 29일.
  5. 모리 켄, 하연수 옮김, 『구글 · 아마존화하는 사회』(경영정신, 2006/2008), 219쪽.
  6. 조용호, 『플랫폼전쟁』(21세기북스, 2011), 241쪽.
  7. Mathew Ingram, 「Why It's Not Easy Being Mark Zuckerberg」, 『The Washington Post』, July 27, 2012.
  8. 마샤 아미든 루스타드(Marcia Amidon Lusted), 조순익 옮김, 『마크 주커버그: 20대 페이스북 CEO, 8억 제국의 대통령』(해피스토리, 2011/2012), 107쪽.
  9. Serendipity(film), Wikipedia.

 

안토닌 드보르작Antonin, Dvořák

네라호제베스 태생인 보히미아(체코)의 작곡가. 여인숙과 정육점을 경영하는 가난한 가정의 8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6세 때 프라하의 오르간 학교에 입학했으나, 학비를 벌기 위해 마을의 악대나 교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19세 때에 오르간 학교를 졸업하고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출발하여, 이윽고 선배인 스메타나에게 발견되어 그가 지휘하는 체코 국민 가극장 관현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있으면서, 10년 동안 작곡 공부를 계속했다. 32세 때에는 프라하의 훌륭한 교회의 오르가니스트가 되면서 생활의 안정을 얻어, 많은 학생에게 음악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의 작풍은 처음에 독일 음악의 영향하에 있었으며, 특히 바그너의 감화는 강했다. 또 그를 인정하여 세상에 소개한 것은 브람스였다. 그러나 이윽고 보히미아의 민족적 색채가 강한 경향으로 전향하여, 가극에서는 왕성하게 국민적 제재를 사용했다.

초기의 작품으로는 《스타바트 마테르》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고, 이 곡을 지휘하기 위해서 1884년에 영국으로 초대되어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그 뒤도 여러 차례 영국으로 건너갔다. 1891년에 프라하 음악원의 교수가 되었으나, 그 이듬해 초빙되어 뉴욕의 국민 음악원의 원장으로 3년간 재직했다. 이 사이에 작곡한 교향곡 《신세계에서》는 그의 최대 걸작이 되었다. 이 곡은 흑인의 민족 음악과 보히미아의 향토 음악을 결합시킨 명곡으로, 이 밖에도 흑인의 민요의 특색을 살린 현악 4 중주곡 (작품 96)과 5 중주곡(작품 97)도 작곡했다. 귀국 후 1901년부터는 프라하 음악원의 원장으로 취임했으며, 문하생으로는 수크와 노바크가 나왔다. 그는 스메타나의 유산을 이어받고, 이 나라의 국민 음악을 세계적으로 육성시켰는데, 독일 음악, 특히 브람스의 영향을 받아 대규모적인 순음악을 많이 작곡하여 보히미아 국민주의 최대의 작곡가가 되었다.

[주요 작품] 9곡의 가극, 9곡의 교향곡 중 제 9 번 《신세계에서》(1893), 5곡의 교향시, 서곡, 3개의 슬라브 랩소디, 슬라브 춤곡집, 바이올린 협주곡, 첼로 협주곡(1865), 피아노 3중주곡 《둠키》(1891), 현악 4 중주곡 《아메리카》(1893), 피아노5중주곡, 외에 많은 실내악곡, 피아노곡, 《스타바트 마테르》(1877), 합창곡, 가극 등 다수.

 

쿨라우Daniel Frederik Rudolph Kuhlau

하노바 근교 유르첸 출생. 독일계 사람으로 함부르크에서 화성학을 배우고 1810년 코펜하겐으로 건너가 1813년 궁정작곡가()의 칭호를 받았다. 작품으로는 오페라, 플루트5중주곡, 피아노4중주곡, 피아노콘체르토, 바이올린소나타, 피아노소나타 및 소나티나 등이 있으며, 특히 피아노소나티나는 피아노 초급학습자의 학습곡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올 러쉬all rush, オールラッシ

1. 촬영한 러쉬(rush film, 촬영한 네거 원판들에서 복사 인화된 포지 필름)를 스토리보드에 따라 연결한 것. 러쉬 프린트의 편집이 완성되면 네거 원판을 러쉬 필름의 순서대로 접합해서 네거 필름의 편집을 완성한다.
2. 편집 작업을 끝내고 완전하게 이은 러쉬 필름.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소리 작업을 한다. 최종 리테이크도 이것을 보고 진행한다.

 

트랙 다운track down

멀티트랙의 녹음 테이프에 수록된 신호를 재생하면서 밸런스를 좋게 믹싱하여 2트랙의 마스터 테이프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이펙트 처리도 이 때 하며 트랙 다운에 따라 음악의 인상이 크게 변한다. TD, 믹스 다운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트랙 다운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

미국 뉴욕주()에서 재즈음악가의 아들로 태어나 캘리포니아대학교(UCLA)에서 작곡을 배우고 줄리아드학교에서 작곡과 피아노, 지휘법을 배웠다. 졸업 후 작은 클럽에서 재즈 피아니스트로 일하다가 텔레비전 및 영화의 음악을 편곡하면서 1960년대 초부터 영화음악에 입문했다.

1971년 노먼 주이슨(Norman Jewison) 감독의 《지붕 위의 바이올린 Fiddler on the Roof》으로 아카데미 편곡상을 받은 이래 로널드 님(Ronald Neame) 감독의 《포세이돈 어드벤처 The Poseidon Adventure》(1972), 《타워링 The Towering Inferno》(1974), 조지 루카스(George Lucas) 감독의 《스타워즈 Star Wars》(1977),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 감독의 《조스 Jaws》(1975)《이티 E.T. The Extra-Terrestrial》(1982)《쉰들러 리스트 Schindler’s List》(1993) 등으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했다. 아카데미 영화음악상 후보작만도 32편에 이르며 그래미상도 17회나 수상했다.

1980년대부터 미국 영화음악을 실제적으로 이끌고 있으며, 대규모 오케스트라에 의한 웅장한 사운드를 사용한 뛰어난 구성력으로, 오랫동안 수많은 영화음악을 작곡하면서도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항상 새로운 분위기의 음악을 창조해왔으며, 특히 《인디애나 존스 Indiana Jones and the Temple of Doom》(1984)와 《스타워즈》(1977) 시리즈에서는 팝과 클래식을 절묘하게 결합하여 많은 사랑을 받았고, 《쉰들러 리스트》《아미스타드》 등에서는 잔잔하면도 안정된 음악을 들려주었다.

《현악기를 위한 에세이》(1966) 《바이올린협주곡》(1976) 《첼로협주곡》(1994) 등의 콘서트용 작품도 작곡했으며, 로스앤젤레스올림픽(1984)의 팡파르와 애틀랜타올림픽(1996)의 공식 주제음악도 작곡했으며, 지휘자로서의 자질도 뛰어나 기량을 인정받았다. 1980년부터 1993년까지 보스턴팝스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지내면서 많은 음반을 발표했다.

 

한스 짐머Hans Zimmer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영화음악가로 유명한 한스 짐머는 신디사이저 연주자였던 경력을 바탕으로 화려한 전자음과 긴박한 스펙터클을 선사한다. 드류 베리모어(Drew Barrymore)와 아담 샌들러(Adam Sandler)가 주연한 영화 「웨딩 싱어 The Wedding Singer」 (1998)에서 들을 수 있던 버글스(Buggles)의 유명한 히트곡 〈Video Killed The Radio Star〉가 바로 한스 짐머가 프로듀스한 작품이라면 그의 취향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는 「레인맨 Rain Man」(1988) 이후 승승장구하던 그는 계속해서 소방관들의 애환을 그린 「분노의 역류 Backdraft」(1991), 숀 코너리(Sean Connery)의 매력이 물씬 풍기는 「더 록 The Rock」, 검투사의 화려한 일대기를 그린 「글래디에이터 Gladiator」(2000) 및 스펙타클한 볼거리로 치장된 블록버스터 「진주만 Pearl Harbot」(2001) 등을 통해 선 굵은 음악을 들려주었다. 그렇다고 그의 작곡 스타일이 액션영화에만 편중된 것도 아니다.

잭 니콜슨(Jack Nicholson)의 연기가 인상적인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As Good As It Gets」(1997), 모건 프리먼 (Morgan Freeman)이 자가용기사로 분한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Driving Miss Daisy」(1989) 등 감각적이고 서정적인 작품에서도 그의 역량은 십분 발휘되었다.

샘플링을 통해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는 한스 짐머는 제작자의 의도에 최대한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음악적 주관만을 내세우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만큼 가장 프로의식이 투철하다고 할까? 그는 다작을 뽐내면서도 어느 한 작품 그만의 스타일을 잃어버린 것이 없는 부지런한 장인이다.

 

클로드 아실 드뷔시Claude Achille Debussy

파리 근교의 생 제르망 레이(St Germain Laye)에서 8월 22일 태어났다. 딜리어스(Frederick Delius, 1862~1934)와 문호 메테를링크(Maeterlinck)도 이 해에 출생하였으며, 파리에서는 인상주의 운동이 시작되려 하던 시기였다. 양친은 도기상()을 경영했고 클로드는 맏아들로 남녀 4명의 동생이 있었다. 생활은 넉넉하지 않았으며 아버지는 자주 직업을 바꾸고 이사를 다녔다. 두 누이 동생은 칸(Canne)의 백모 집에 맡겨 두었는데, 어린 클로드는 이 백모를 찾아가는 것이 커다란 기쁨이었으며, 피아노의 기초도 여기서 배우기 시작했다.

우연히 시인 베를렌(Verlaine)의 의모()가 되는 모테(Mauté) 부인에게 음악의 재능을 인정받은 것이 그가 음악가가 되는 계기였다. 아마추어이면서도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모테는 무상으로 레슨을 맡았으며, 1872년(10세)에는 파리 음악원에 입학이 허가되는데 이윽고 클로드의 관심은 피아노에서 작곡으로 옮겨 갔다.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

3월 31일 오스트리아의 동쪽 로라우(Rohrau)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의 작가 보마르셰(Beaumarchais, 1732~1799)와 같은 해의 태생으로, 이 무렵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는 절대주의를 확립했다. 아버지는 음악을 좋아하는 마차 수리공이며, 요제프는 누나 한 사람을 포함한 12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6세 때 음악의 재능을 인정받고 수양아저씨 프랑크(프랑스)의 집에 맡겨져 교육을 받게 된다.

 

베드르지흐 스메타나Bedrich Smetana

보헤미아의 리토미실 출생. 아버지는 맥주 양조업자로 그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찍이 프라하에 나가 프록시에게 피아노와 음악이론을 배웠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 연주에 뛰어나 한때는 피아노 연주자가 될 것을 꿈꾸었으나, 1848년 오스트리아 2월혁명의 여파로 프라하에도 6월에 혁명운동이 일어나 이에 가담하였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놓인 체코슬로바키아민족으로서의 의식에 눈떠, 민족운동에서의 작곡가의 역할을 새삼 자각하게 되었다.

혁명 실패 후의 가혹한 억압시대에는 스웨덴으로 건너가(1856) 5년간 에보리에 체재, 지휘자 ·작곡가 ·피아니스트로서의 발자취를 남겼다. 1860년대 오스트리아 정부의 탄압이 느슨해지자 체코슬로바키아 민족운동이 되살아났고, 그도 귀국하여 이 민족운동의 선두에 서서 지휘자 ·작곡가 ·평론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862년 체코슬로바키아 국민극장의 전신인 가극장()이 프라하에 건립되자 이 극장을 위해 작곡한 오페라 《팔려간 신부 Prodaná nevěsta(The Bartered Bride)》를 상연, 큰 성공을 거두고, 그해 가을에는 이 가극장의 지휘자로 임명되어 여러 면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1874년 50세의 한창 나이에 숙환인 환청()이 악화되어 10월에는 귀가 전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모든 공적 활동을 중지하고 프라하 교외에 은퇴하였다. 그는 오페라에 민족적 제재를 많이 쓰고 음악에는 폴카 ·프리안트 등 민족무용의 리듬을 많이 도입하였으나, 국민오페라에서는 민요를 도입하지 않고, 정신면에서 체코적인 요소를 만들어 나가는 데 전념하였다. 또 교향시에는 리스트 등 신독일파의 수법을 도입하여 민족적인 음악을 창조하는 데 성공하였다. 주요작품으로는 《국민의용군행진곡》 《자유의 노래》 등이 있고, 오페라에는 《보헤미아의 브란덴부르크가의 사람들》(1866) 《달리보르 Dalibor》(1868) 《리부셰 Libuše》(1872) 《두 명의 홀아비》(1874) 등이 있다. 만년의 작품으로는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 Mávlast》(1874∼1879), 현악 4중주곡 《나의 생애로부터 Z mého života》(1879) 등이 있다. 

 

알렉산드르 보로딘Aleksandr Porfir'evich Borodin

페테르부르크 출생. 러시아의 귀족 게데아노프공작의 사생아로 태어나 농노() 보로딘의 호적에 얹혔다. 그 때문에 충분한 교육을 받고도 사회활동을 규제당하였으며, 그와 같은 사회적 불공정이 그의 민주사상의 원천이 되었다.

어릴 때부터 악재()를 보였고, 화학에도 열중하여 1850년 페테르부르크의과대학에 들어갔으며, 58년에는 하이델베르크대학에 유학하였다. 1862년 귀국 후는 모교의 조교수가 되고, 여기서 화학자 지닌의 제자가 되어 유기화학연구를 계속하였다.

작곡가로서는 신러시아악파(), 즉 5인조에 속한다. 연구생활의 틈을 이용한 작곡활동이었으나 러시아의 유수한 실내악 작곡가로, 또 러시아 국민음악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졌으며, 첼로의 명수이기도 했다. 작품은 동방적()인 색채가 농후하며 대표작에 교향곡 2번(1876), 현악4중주곡(1881), 오페라 《이고리공》(미완성) 등이 있다.

 

상아해안Ivory Coast,

15세기 후반 유럽 열강이 상아와 노예를 얻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들면서 상아 거래의 중심지가 되었던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코트디부아르라는 나라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 코트디부아르 또는 코트디부아르해안이라고도 한다. 최대 너비가 64km를 넘지 않으며 굴곡이 완만한 해안선을 이루고 있다. 연평균기온 24~28℃, 연강수량 2,000~3,000mm로 덥고 습하다. 해안의 동쪽 부분은 평평하고 모래가 많으며 서쪽은 바위로 된 작은 벼랑들이 있다.

모래톱이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뻗어 있으며 모래톱 뒤에는 깊은 석호가 있다. 1903년에 건설되기 시작한 철도는 이웃 나라인 부르키나파소까지 연결되었고 1950~1954년에는 아비장 항구가 건설되었다. 사산드라강, 반다마강, 코모에강, 카발라강이 흘러들고 해안을 따라 코트디부아르의 수도인 아비장을 비롯해 상페드로, 사산드라, 그랑바상 등의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딕시랜드 스타일Dixieland style

미국 남부 여러 주(딕시랜드)의 재즈 뮤지션 복장에서 영감을 얻은 스타일. 헐렁하게 폭이 넓은 라펠테일러드 재킷바지, 캉캉모에 나비넥타이, 드레스 셔츠 스타일이 대표적이다.

딕시랜드 스타일

딕시랜드 스타일출처: 패션전문자료사전

 

캠피온Jane Campion

연극연출가 아버지와 연극배우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연극을 보고 자랐다. 1975년 빅토리아대학에서 심리학과 교육학을 공부하다 적성에 맞지 않아 인류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조상의 뿌리인 유럽으로 떠나 영국 런던에서 미술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경제적 곤란으로 1년 만에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와 시드니예술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하며 루이스 브뉴엘의 영화에 심취하였고,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영화에 관심을 가졌다. 졸업한 뒤 1982년 영화와 TV학교에 들어가 1학년 때 찍은 《껍질》이 칸영화제 단편영화부문 그랑프리를 받으며 영화계에 데뷔하였다.
 
1989년 3년 동안 준비한 첫 장편영화 《스위티》를 발표하였다. 정상적인 소녀였던 스위티가 주변환경에 의해 기묘하게 변해가는 절망스러운 모습을 통해 부조리한 가족 관계를 그린 영화이다. 비평가들의 요란한 환영을 받으며 칸영화제에 출품되었지만 주목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1990년 뉴질랜드 소설가 자넷 프레임의 자서전을 원작으로 한 두 번째 장편영화 《내 책상 위의 천사》가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비롯하여 7개 부문을 수상하였다.

3년 뒤 세 번째 장편영화 《피아노》(1993)를 완성하였는데, 벙어리 미혼모 아다와 남편, 정부와의 삼각 관계를 단순한 구조 속에 복잡한 의미로 그려나갔다. 그 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고 아카데미영화제에서도 주목을 받으며 세계적인 감독이 되었다. 19세기 미국의 한 여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유럽을 여행하며 겪는 어둡고 은밀한 내면을 그린《여인의 초상》은 1996년 할리우드 자본으로 만들어졌다.

지금까지 발표한 영화들은 겉으로는 불완전한 여자 주인공들로 하여금 도덕과 권위, 사회적 관습과 성적 억압을 극복하고 진정한 자기의 정체성을 찾아가도록 한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이것은 감독 자신에 대한 정체성의 물음이기도 하며 그 물음은 오스트레일리아 영화와 여성 감독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세계적인 영화감독이 될 수 있게 한 힘이었다.

 

fairlight

 

 

 

MIDI Musical Instrument Digital Interface

신시사이저, 리듬 머신, 시퀀서, 컴퓨터 등의 연주 정보를 상호 전달하기 위해 정해진 데이터 전송 규격. MIDI 규격에서는 표준적인 송수신 인터페이스 회로와 데이터 포맷을 정의하고 있고 MIDI 규격에 대응한 기기에는 트랜스미터와 리시버 중에서 한 가지 또는 둘 다 있다. 접속에는 5핀인 DIN 커넥터를 사용하고 MIDI 규격의 기기는 보통 MIDI 인·아웃·스루의 세 가지 단자를 갖추고 있다. 또한 MIDI 케이블의 길이는 트러블 방지를 위해 15m 이내가 바람직하다.

MIDI 정보는 8비트로 구성된 여러 바이트의 메시지로, 각 메시지는 그 종류를 나타내는 스테이터스 바이트와 데이터 바이트로 이루어진다. 메시지는 크게 채널 메시지와 시스템 메시지로 나뉘며, 채널 메시지는 보이스 메시지와 모드 메시지로 다시 나눌 수 있다. 이에 비해 시스템 메시지는 MIDI 시스템 전체에 공통적으로 이용되는 것이어서 MIDI 채널 지정은 하지 않는다. 시스템 메시지는 시스템 익스크루시브, 시스템 커먼, 시스템 리얼타임으로 나눈다. 다음이 이들에 대한 설명이다.

① 보이스 메시지 : 일반 연주 정보는 모두 보이스 메시지로 정의할 수 있다. 건반을 누르거나 떼는 데 상당하는 노트 온·오프, 여러 가지 이펙트(모듈레이션 호일 또는 페달 등)를 전송하는 컨트롤 체인지, 음색을 절환()하는 프로그램 체인지, 신시사이저에 빼놓을 수 없는 베드 정보를 보내는 피치 호일 체인지, 그리고 애프터 터치가 보이스 메시지에 포함된다. 또한 애프터 터치에는 각 건반마다 정보를 출력하는 폴리포닉 키 프레셔와 전체에 걸리는 채널 프레셔가 있다.

② 모드 메시지 : MIDI에는 네 개의 모드가 있고 이 모드는 폴리·모노 모드, 옴니 온·오프가 조합되어 결정된다. 또한 MIDI에는 16개의 채널이 있어 옴니 온일 때 접속하는 기기의 MIDI 채널이 일치하지 않으면 데이터는 전송되지 않는다. 옴니 모드란 이 MID 채널을 인식 여부의 구별로 옴니 온일 때는 채널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네 개의 모드 중에서 일반적인 것이 모드3이며, 특수한 것은 모드4이다. 이 모드4에서는 한 대의 폴리포닉 신시사이저가 모노포닉 신시사이저 한 대분의 기능을 하며, 여러 개의 서로 다른 채널 메시지를 수신한다.

③ 시스템 익스클루시브 메시지 : ID 코드를 등록한 메이커 전용 메시지로, 스테이터스 ‘F0’와 EOX(엔드 오브 익스클루시브)의 사이에 임의의 양의 데이터를 끼워서 전송할 수 있다. 음색 파라미터 또는 시퀀스 데이터 등 메이커 독자 정보는 모두 이 시스템 익스클루시브 메시지로 보내진다. 다만 ID의 '7E’에는 논리얼타임, ‘7F’에는 리얼타임의 유니버설 익스클루시브가 할당되어 있고, 샘플 덤프 스탠더드 또는 MIDI 타임 코드 등이 정의되어 있다.

④ 시스템 커먼 메시지, 시스템 리얼타임 메시지 : 리듬 머신 또는 시퀀서의 제어는 시스템 커먼 메시지와 시스템 리얼타임 메시지를 통해 실행된다. 일반적으로는 송 실렉트로 연주 프로그램을 선택하여 송 포지션 포인터로 시작하고 싶은 노래의 마디를 지정한다(1비트=6MIDI 클록). 그리고 ‘FA’로 시작, ‘FC’로 중지, 'FB’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FB’는 MIDI 클록이라고도 하며, 타이밍 관리에 사용한다(♩=24).

시스템 리얼타임 메시지는 항상 다른 메시지에 우선하여 수신·처리되며 다른 메시지 사이에 인터럽트할 수도 있다. 그 밖에 메시지로는 아날로그 신시사이저의 오실레이터를 자동적으로 재튜닝하는 튠 리퀘스트, 케이블 단선을 통한 트러블을 방지하는 액티브 센싱, 초기 상태로 돌아가는 시스템 리셋, SMPTE와 마찬가지로 시·분·초·프레임으로 어드레스 관리를 하는 쿼터 프레임 메시지 ‘F1’이 있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페테르부르크 출생. 양친의 권유에 따라 페테르부르크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하면서 N.A.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작곡 개인지도를 받았다. 1908년 관현악곡 《불꽃 Feu d’artifice》으로 러시아발레단의 댜길레프에게 인정을 받고, 그의 의뢰로 발레곡 《불새 L’oiseau de feu》(1910)·《페트루슈카 Petrushka》(1911)를 작곡하여 성공을 거둠으로써 작곡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그 후 제3작인 《봄의 제전 Le Sacre du printemps》(1913)은 파리악단에서 찬반 양론의 소동을 일으켰으나, 그는 이 곡으로 당시의 전위파 기수의 한 사람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이 곡은 혁신적인 리듬과 관현악법에 의한 원시주의적인 색채감, 그리고 파괴력을 지닌 곡으로 앞의 2곡과 함께 이 시기의 그의 대표적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러시아혁명으로 조국을 떠난 그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신고전주의 작풍으로 전환하였으며, 발레곡 《풀치넬라 Pulcinella》(1919)·《병사 이야기 Histoire du soldat》(1916)·《결혼 Les noces》(1912∼1923) 등의 작품에 그의 새로운 작풍이 나타나 있다. 고전파와 바로크스타일의 정신을 부흥시키려고 한 음악풍조는 제1 ·2차 세계대전 사이에서 유럽음악의 주류를 이루었는데 그는 이 시기의 풍조에 선도적 역할을 했으며, 오페라 오라토리아인 《오이디푸스왕 Oedipus Rex》(1927)과 《시편교향곡 Symphony of Psalms》(1930) 등을 통해 이 작풍의 완성을 보았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45년 미국으로 망명, 귀화하였다. 그는 한때 침체기를 거쳐 《3악장의 교향곡 Symphony in 3 Movements》(1945)과 《미사 Mass》(1948) 등으로 재기, 다시 제2의 전기()를 맞이하였다. 이는 이미 쇤베르크일파가 취해 온 음렬작법()으로부터 12음작법()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이었으며, 《칸타타 Cantata》(1952)에서 시작하여 《아곤 Agon》(1957)과 《트레니 Threni》(1958) 등의 시도로 차차 엄격한 12음작법을 구사하였다.

그 이후로는 종교음악에 관심을 두어 《설교, 설화 및 기도 a Sermon, a Narrative and a Prayer》(1961), 칸타타 《아브라함과 이삭 Abraham and Isaac》(1963), 합창곡 《케네디의 추억을 위하여 Á la mémoire de Kennedy》(1965) 등의 작품을 남겼다. 저서로는《내 생애의 연대기 Chronicle of My Life》(1935)와 그가 하버드대학에서 강연한 것을 정리한 《음악의 시학 Poetics of Music》 등이 있다.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보히미아 칼리슈트 태생인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지휘자. 유태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후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을 나타내어 음악 교육을 받고, 소년시대에는 피아니스트로 눈부신 재능을 발휘했다. 1875년 15세 때 빈 음악원에 입학하여 엡슈타인에게 피아노, 훅스에게 화성학, 크렌에게 작곡을 사사했다. 1878년에 졸업하기까지 빈 대학에서 역사, 철학, 음악사의 강의도 들었다. 이 무렵부터 바그너와 브루크너의 영향을 받았다. 1880년에 할레 가극장의 여름 지휘자가 되고, 최초의 원숙한 작품 《탄식의 노래》를 완성했다. 이듬해 라이바하 시립 가극장 지휘자, 이어 오르뮈쯔 가극장 지휘자, 카셀 시립 가극장 지휘자(1885년까지)가 되었다.

이미 말러는 지휘자로서의 역량이 널리 인정되어, 1885~6년은 프라하에서 활약하고, 1886~8년에는 라이프찌히에서 정지휘자 니키시의 밑에서 일했다. 1888년에는 부다페스트 왕립 가극장 정지휘자, 1891년에 함부르크 시립 가극장 정지휘자, 1897년에 빈 궁정 가극장 지휘자, 1898년에 빈 필하모니의 지휘자로 활약하면서 브루크너 등의 신작을 공연했다. 1908년 이후부터는 미국에 건너가, 겨울은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이나 뉴욕 필하모니를 지휘하고 여름에는 유럽으로 돌아갔다. 작곡가로서의 그의 활약이 시작된 것은 1894년으로, 이 해에는 제1교향곡의 개정판이 바이마르에서 초연되었다. 그 후에 《천명의 교향곡》 제8번을 완성했고, 1910년에 심장병의 발작을 일으켜 유럽으로 돌아가, 한없이 사랑하는 빈에서 영면하고 싶다는 희망으로 빈에 안주했다.

말러는 방대한 악기 편성과 거대한 구상을 가진 9곡의 교향곡을 완성하여, 후기 낭만파의 웅대 화려한 양식 속에 독일의 전통을 꽃피게 했는데, 가곡 분야에도 《방랑하는 젊은이의 노래》 등 여러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작품이 교향곡과 가곡에 한정되고, 더구나 이 이질적인 분야가 훌륭히 융합된 예는 음악사상 드문 일이다.

[주요 작품] 10곡의 교향곡(제 10번은 미완성) 중에서 제8번 《천명의 교향곡》(1907), 《대지의 노래》(1908), 가곡 《방랑하는 젊은이의 노래》(1883),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1888), 《죽은 아이를 기리는 노래》(1902) 등.

 

게네랄프로베generalprobe

관혁악이나 관현악을 가진 합창과 같은 대규모 작품의 총연습, 오페라의 무대 연습을 말한다. 유럽에서는 대개 일반에게 공개된다.

 

케나Quena

케나는 남아메리카 대륙 서부의 안데스 지역에서 연주되는 세로형 목관악기다. 고대 문명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 민속 악기지만, 오늘날에는 대중음악 장르와도 결합되어 연주되고 있다. 한국의 단소와 그 외형과 음색이 비슷하다.

 

 

가믈란Gamelan

1. 인도네시아의 민속 음악. 앙상블의 중심이 되는 것은 사롱, 군델, 쿤푸르, 쿠논, 스렌템, 보난 등과 같은 선율 타악기이다. 여기에 공, 쿤단 등과 같은 타악기와 레바브, 체렌픈, 시텔과 같은 현악기 및 남녀 코러스 등이 더해진다.

2. 인도네시아의 대표적 합주 악기. 자바섬(자바 양식 및 순다 양식)과 발리섬(발리 양식)에서 사용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보아도, 서양의 관현악이나 동아시아의 아악에 필적하는 대규모의 형태로서, 선율타악기를 중심으로 한 일종의 오케스트라로 간주할 수가 있다.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악기를 역할과 기능에 따라 몇 가지 그룹으로 나누어 전체의 앙상블을 꾀한다. 특징 있는 오케스트레이션을 토대로 하는 점에서는 공통이다. 자바에 있어서 악기를 그룹으로 나누는 대표적 양식은

① 주요 선율을 연주하는 악기군,

② 선율 장식을 위한 악기군,

③ 주기적인 박절법()의 박수를 합리적으로 명시하거나(콜로토미), 리듬, 템포를 받쳐 주는 악기군이라는 정도이다.

주선율을 연주하는 악기는, 데뭉, 사론, 페킨, 술렌템 등의 금속편을 엮은 것을 해머로 치는 것이다. 장식음형을 위한 것으로는 군데르(마찬가지로 금속편을 엮은 것), 보낭(냄비 모양의 금속 기구를 거꾸로 엮은 것), 감방(목금)이 사용된다. 리듬악기로는 쿤단(양면 큰북), 공, 쿤프르(동라- 종류), 카논, 쿠투크(남비 모양의 큰 것)가 활약한다. 그 밖에 르바브(라바브), 술링(세로피리), 카차피, 인성(솔로, 코러스) 등을 추가해서 대편성이 된다. 순음악으로도 연주되지만, 주로 무용 · 연극의 반주로서 중요시되고 있다.

가믈란

가믈란출처: 파퓰러음악용어사전 & 클래식음악용어사전

 

케착 댄스kecak dance

발리 무용에서 케착(Kecak) 댄스처럼 낙원의 섬 발리의 정서가 넘치는 매력적인 춤은 없을 것이다. 신에게 제물을 바친 후 시작되는 케착 댄스는 멍키 댄스라고도 부른다. 상반신을 벗은 원숭이 군단의 역할을 하는 100여 명의 남자들이 등잔불 주위를 둥그렇게 둘러싸고 개구리 울음소리를 흉내 내서 ‘케착 케착’이라고 합창하면서 춤추는 모습은 소름끼칠 만큼 박력이 있다. 케착은 가믈란 반주를 수반하지 않는 유일한 전통무용으로 돌발적인 리듬, 이상한 노래의 멜로디, 신들린 듯한 춤사위, 원숭이 군단의 군무, 아름다운 소녀의 춤에 의한 라마야나 이야기가 한 시간 정도 상연되어 이국 정서를 충분히 만끽하게 한다.

발리 섬을 대표하는 케착 댄스의 성립은 의외로 새롭고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적인 배경은 다른 발리 예능과 같이 1930년대의 관광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31년, 독일의 빅터 폰 푸렛센 감독의 영화 〈악마의 섬〉은 발리의 이국적인 풍습과 예능을 소개하여 유럽에서 대성공을 거둔다. 영화는 당시 우붓에 살고 있었던 같은 독일인 스피스가 적극적으로 협력해서 제작된 것으로 그 가운데 새롭게 고안한 케착이 처음으로 소개된다.

발리 섬에서 예부터 전해지는 악마를 쫓는 의식 ‘상향’에서 최면 상태를 촉진할 목적으로 사용하는 ‘차(남성 합창)’를 개편하여 그 안에서 라마야나 이야기를 아름다운 소녀들이 춤추는 스타일로 창작하였다. 케착은 이른바 영화라고 하는 미디어를 위해서 새롭게 창작된 무용이다. 그 후 영화 〈악마의 섬〉을 본 유럽인 관광객이 발리에 와서 케착 관람을 청하게 되면서 이 새로운 스타일의 댄스는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발리 각지에 급격히 퍼져 갔다.

케착 댄스

케착 댄스

케착은 원래 상향이라고 하는 최면 상태의 의례 때 하던 남성 합창을 원형으로 한다. 최면 상태에서의 의례인 상향은 발리 섬에서 샤먼으로서 역할을 하는 인물 혹은 그들에 의한 춤을 가리키고, 그들은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서 비로소 춤출 수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악령에 의해 초래되는 전염병이나 재해를 예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공동체가 악마나 악령에 의해 야기된 위험에 처해졌을 때 신들과 인간 사이의 보호 관계를 확립하는 수단으로서 주술로 더럽혀진 공동체의 부정을 없애고 선과 악의 조화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 케착의 근원이 된 상향의 명칭이나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힌두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있었던 일종의 악령을 쫓는 의례(최면 상태의 무용)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푸라 달엄에서 보름날 밤에 행해지는 상향 드다리는 최면 상태에서 행하는 무용의 대표격이다. 드다리는 선녀, 천사라고 하는 의미로 도취를 유혹하는 노래와 향의 연기, 사제의 최면에 조종되어 소녀는 조용히 빙의 상태에 빠져 간다. 그리고 소녀는 최면 상태에 들어가면 신들린 채로 춤을 춘다. 이것이 상향 드다리인데 영화 〈악마의 섬〉에서는 이 의례용 춤이 클라이맥스가 되고 있다.

라마야나 이야기와 결부된 케착 댄스

라마야나 이야기와 결부된 케착 댄스

이러한 케착 형식은 1933년에 우붓 보나(Bona) 마을과 부두루(Budur) 마을의 혼성 무용단에 의해 성립되었다. 그리고 1935년에 보나 마을 사람들이 보다 발전한 형태로 상연한 것이 케착의 원형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1937년에는 〈라마야나 이야기〉와 결부된다.

라마야나 이야기는 기원전 2세기에 쓰인 인도의 서사시로, 아요디야(Ayodya) 왕국의 왕자 라마(Lama)를 주인공으로 해서 그 스토리는 중부 자바의 프람바난 사원 시바 탑의 벽면에 조각되어 동남아시아 미술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라마야나 이야기〉는 발리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어 이야기의 개요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도 갠지스 강 중류의 코사라(Kosara) 왕국에 다사라타(Dasarata) 왕과 세 명의 왕비 사이에 네 명의 왕자가 탄생했다. 첫째 왕비에게서 태어난 왕자 라마는 원래 비쉬누신의 화신으로 마왕 라비나(Rabina)를 쓰러뜨리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 라마는 위두라(Widura) 국왕의 딸 시타(Shita)와 결혼한다.

라마는 왕국의 왕위 계승자였지만 둘째 왕비의 책략으로 이복동생인 바라타가 왕위 계승자가 돼서 왕국으로부터 추방된다. 라마 왕자는 아내 시타와 남동생 락사마나와 함께 왕궁을 떠나 아라스 칸다카(Alas Kandaka) 숲에 들어간다.

마왕 라비나의 여동생 슐파나카(Surpanaka)는 숲에 놀러와 라마를 처음 보고 사랑에 빠진다. 사랑이 거절되자 라마의 아내 시타를 죽이려 하다가 오히려 락사마나(Laksmana)에 의해 코와 귀가 잘린다. 마왕 라비나는 그 보복으로 시타를 납치하여 랑카(langka) 왕궁에 유폐한다. 시타를 구원하러 가던 도중 라마와 락사마나는 원숭이 왕 스구리와(Sugriwa), 그 신하 아노만(Anoman)을 만난다. 라마는 원숭이 군단을 인솔해서 라비나가 사는 랑카(Langka)로 향한다.

랑카에서의 싸움은 계속되고 속을 태우던 라비나는 6개월에 한 번밖에 잠에서 깨지 않는 남동생 쿰바카르나(Kumbakarna)를 깨운다. 쿰바카르나는 잠에서 깬 날만은 불사신이다. 그러나 잠이 채 깨지 않은 채 눈을 떴기 때문에 쿰바카르나는 전사하고 만다. 결국 싸움은 라마와 라비나의 일대일 승부가 되어 격전 끝에 라마가 승리한다.

라마는 왕국에 되돌아와 왕위에 오르지만 시타의 정절을 의심하는 소문이 돌아 부득이 시타를 추방한다. 시타는 숲에서 쌍둥이 왕자를 낳는다. 성장한 쌍둥이를 본 라마는 자신의 아이인 것을 직관하고 시타의 정절을 신과 상의한다. 시타는 신으로부터 결백을 인정받고 라마와 시타는 재회하여 천상의 비쉬누신으로 돌아간다.

 

로케이션 헌팅Location Hunting

촬영 장소를 찾는 것을 말한다. 흔히 장소 헌팅이라고 한다. 대본에 따라 로케이션 목적에 합당한 장소를 찾아다니는 것이다. 스태프나 출연자의 이동을 생각해서 될 수 있는 한 가까운 거리이면서 변화 있는 장면을 촬영할 수 있는 장소를 선정하게 된다. 드라마나 예능 일부에서는 이를 전문으로 하는 헌팅 감독을 쓴다. 헌팅에도 전문성을 요하는 이유는 같은 장소라도 카메라 촬영 각도에 따라서 다른 그림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현명한 로케이션 헌팅은 제작비와 제작시간을 현저히 줄여 준다.

 

워터프런트Waterfront

워터프런트란 명확히 정의되어지는 용어는 아니지만 우리말로 수변공간으로 표현할 수가 있고, 더 나아가 수변공간을 가지는 육지부의 개발된 공간을 나타낸다. 일본건축학회에서는 ‘해안선에 접한 육역주변 및 그것에 특히 근접한 수역을 병행한 공간’이라고 하고 있다.

워터프론트

워터프런트는 내륙지역과 차별적인 공간적, 환경적 매력을 지니고 있는데 워터프런트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수변공간은 주변의 자연과 접하기 쉬운 공간으로서 시민에게 안정 및 재충전의 공간을 제공한다.
둘째, 역사적으로 수변공간을 중심으로 많은 도시가 형성되고 발전되어 왔고, 이러한 수변공간은 도시의 역사·문화의 중심지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셋째, 획일적인 도시환경의 내륙공간과 차별적으로 한쪽이 수변과 접하여 개방적 시야와 양호한 조망을 제공한다.

세계적으로 수변공간의 개발은 시대의 흐름에 따른 항만기능의 쇠퇴에 따라, 새로운 기능 창출을 위한 항만지역 재개발에서 비롯되었다. 과거 우리나라의 수변공간의 개발은 항만개발을 통한 물류처리 능력의 증대, 매립을 통한 국토 확장 등 1차적인 물질적 가치증진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수변공간이 가지는 장점을 활용한 개발이 요구됨에 따라 선진국에서는 워터프런트가 가지는 수변공간으로서의 특성을 살려 항만·운송·수산 등의 전통적인 기능과 레저·문화·상업 등의 친수기능을 복합화하여 다양한 용도로 개발하고 있다.

1960년대 전후로 과거 항만시설과 임해형() 산업지역이었던 수변공간은 첨단정보단지, 도시레저공간, 주거지와 상업업무지 등 새로운 도시공간으로 재개발되었다. 조그만 항구였던 샌프란시스코의 피어(pier)가 쇼핑센터로 바뀌어 관광명소가 되었고, 어촌이었던 런던의 도크랜드(Dockland)가 새로운 업무지역으로, 그리고 창고지역이었던 도쿄의 워터프런트가 미래의 정보단지로 탈바꿈되었다.

최근 우리나라도 워터프런트를 특색있는 공간으로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서울시의 경우 마곡지역에 대해 친수기능을 살린 미래형 워터프런트로의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