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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 한국사 속의 한국사 ① 선사에서 고려까지

 

 

고석규 · 고영진 지음

2016, 느낌이 있는 책

 

대야도서관

SB114466

 

911

고54ㅎ  1

 

역사소비시대의 역사 읽기

 

"역사소비시대에 소통과 공감으로 미래를 열어가는

한국사의 새로운 답"

 

 

_한영우(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어느 때보다 올바른 역사인식이 절실한 시대. 저자도 지적했듯 '새는 좌ㆍ우의 두 날개로 날아야 한다.'는 말이 실감나는 때입니다. 균형 있는 시각으로 바람직한 한국사의 답을 찾고 있는 이 책이 많은 독자들에게 꾸준히 사랑받기를 바랍니다.

_이태진(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닭목을 비틀면 새벽은 안 온다》라는 제 작품이 있습니다. 그 말은 어디까지나 역설이었지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역사의 주인공임을 인식할 때 역사는 결코 민중을 배반하지 않습니다. 《한국사 속의 한국사》, 이 책 내가 역사의 주인공임을 일깨워 주는 책입니다. 과거의 역사를 발판 삼아 역사의 주인공으로서 오늘을 살며, 바람직한 미래를 창조해 나가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력히 추천합니다.

_허영만(만화가)

 

많은 분들이 역사전공자도 아닌 저에게 어떻게 역사 공부를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아마도 제가 진행하는 KBS <역사저널 그날>이 역사 대중화에 기여한 증거겠지요. 방송가 뿐만 아니라 문화예술계도 역사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오랜 내공으로 다져진 두 분의 역사학자가 우리 역사를 분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든든한 토대를 마련해 주고 있어 반갑습니다.

_최원정(KBS-TV <역사저널 그날> 아나운서)

 

지은이 고석규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석ㆍ박사를 마쳤고, 1995년부터 국립목포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초빙연구원, U. C. Berkeley 방문학자, 역사문화학회ㆍ인문콘텐츠학회 부회장 등을 거쳤다. 제6대 국립목포대학교 총장, 국ㆍ공립대학교 총장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2014 자랑스런 서울대 사학인'으로 선정되었고 도시사학회 회장을 거쳐 지금은 호남사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다양한 사회 경험을 토대로 시대를 선도하는 새로운 주제를 찾아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대중을 위한 한국사 서술에 깊은 관심을 갖고 많은 실적을 내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역사 속의 역사 읽기》 1ㆍ2ㆍ3권(2인 공저, 풀빛, 1996), 《근대도시 목포의 역사ㆍ공간ㆍ문화》(서울대 출판부, 2004), 《21세기 한국학, 어떻게 할 것인가?》(공저, 한림대 한국학연구소, 푸른역사, 2005),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上(공저, 한국사연구회 편, 지식산업사, 2008) 등이 있다.

 

지은이 고영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석ㆍ박사를 마쳤고 1994년부터 광주대학교 교양학부를 거쳐 관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학술진흥재단 인문학분야 책임전문위원, Unversity of Washington과 Harvard University 방문교수, <역사와 현실> 편집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역사를 단절보다는 관계의 측면에서 보는 관계사, 관계의 역사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으며, 역사 대중화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 중기 예학사상사》(한길사, 1995), 《역사 속의 역사 읽기》 1 · 2 · 3권(2인 공저, 풀빛, 1996), 《조선시대 사상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풀빛, 1999), 《조선시대사 2 - 인간과 사회》(공저, 푸른역사, 2015), 《경계의 역사학에서 관계의 역사학으로》(푸른역사, 2016, 근간) 등이 있다.

 

CONTENTS

 

서장 역사 소비 시대의 역사읽기

        1. 역사란 무엇인가?
        2. 진영논리를 넘어서
        3. 한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들
        4. 근대성의 경험
        5. 역사 소비 시대의 역사 읽기



제1장 선사 시대 생활의 자취

        1. 한국인의 기원
        2. 원시와 첨단의 만남
        3. 그림과 주술
        4. 단군신화
        5. 최초의 국가, 고조선
        6. 고대인의 생활



제2장 삼국의 성립에서 통일까지

        1. ‘한’ 민족과 삼한, 그리고 가야
        2. 삼국의 성립과 사회 구성
        3. 광개토대왕비와 칠지도
        4. 밖으로 열린 문화, 백제
        5. 고구려의 영웅, 고구려의 멸망
        6. 삼국의 통일



제3장 신라, 천년의 역사


        1. 골품제의 운명
        2. 촌락문서에 나타난 신라 사회
        3. 장보고와 해상왕국
        4. 신라의 여왕, 신라의 문화
        5. 금석문과 목간
        6. 호족과 6두품의 대두



제4장 신라의 불교


        1. 이차돈의 순교
        2. 불교계의 새 바람, 원효
        3. 의상과 화엄 종단
        4. 신라의 불교미술
        5. 선종 구산문의 성립



제5장 발해사의 주인 찾기


        1. 발해의 건국과 대조
        2. 발해의 대외 관계
        3. 발해의 사회 구성과 문화



제6장 고려의 건국


        1. 태조 왕건과 후삼국의 통일
        2. 호족 연합 정권
        3. 고려의 복잡한 지배이념
        4. 고려의 다원적 대외 관계



제7장 고려의 사회와 경제


        1. 고려 사회 성격 논쟁
        2. 전시과와 고려 경제
        3. 고려의 문화와 삶의 모습
        4. 가족과 친족, 그리고 여성
        5. 본관제와 향도



제8장 귀족 사회의 동요


        1. 이자겸의 난과 의천
        2. 묘청의 난과 풍수지리설
        3. 무신 정권의 성립
        4. 만적의 난



제9장 대몽 항쟁과 개혁


        1. 대몽 항쟁과 강화도
        2. 삼별초의 난
        3. 지눌과 결사 운동
        4. 원의 간섭과 부원(附元) 세력
        5. 공민왕의 개혁정치
        6. 성리학의 수용

 

 

서장 | 역사 소비 시대의

      역사읽기

 

1 역사란 무엇인가?

 

올바른 역사인식을 갖는 것은 민주주의 실현의 기초가 된다. 반대로 잘못된 역사인식은 민주화를 가로막는 장벽이 된다. 올바른 역사인식을 갖고 있는 국민이야말로 역사 발전의 동력이 되고 진정한 역사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역사로부터 기대하여야 할 것은 국민들이 민주주의의 기초인 현명하고 책임 있는 유권자가 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회적 경험의 기록들이다.

_로버트 V. 다이엘스Robert V. Daniels 《역사학 입문Studying History How and Why》이란 책에서 역사와 국민의식에 대해

 

"아빠, 도대체 역사란 무엇에 쓰는 것인지 이야기 좀 해 주세요." 몇 년 전, 내 가까운 친척뻘 되는 어린 소년이 역사가인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다. 나는 독자들이 읽게 될 이 책이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이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_마르크 블로흐 《역사를 위한 변명》의 서장

 

마르크 블로흐

그는 《역사를 위한 변명》을 통해 자신의 삶과 현실을 어떻게 하나로 통합하고 승화시켰는가를 잘 보여 주었다.

 

2 진영논리를 넘어서

 

좌 · 우로 나누는 진영논리는 생각들을 고립시켜 사고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벽이 된다. 분단국가라는 현실이 이런 상황을 낳는 원인이 되고 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듯 진영논리에 머무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듯 생각을 고립시켜 사고의 발전을 가로막는 진영논리에 머무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3 한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들

 

한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들은 조선 시대와 일제 강점기, 현대로 이어지는 역사적 맥락을 단절적 또는 이분법적 시각으로 보기보다는 연속적, 접합적, 혼용적 시각으로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지점에서 합치한다.

 

상공에서 바라본 한반도

반도라는 지리적 위치로 인해 타율적으로 역사를 발전시켜 왔다고 주장하는 타율성론이 있지만, 우리 역사는 선사 시대 이래 고대 국가, 중세 사회를 거쳐 오늘날까지 면면히 발전해 왔다.

 

4 근대성의 경험

 

우리의 근대란 식민지로서 겪은 근대였다. 따라서 제국주의가 겪은 근대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파행적;이다. 그러나 비록 파행적일지라도 '파행적 근대성' 그 자체로 확립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근대성의 경험은 근대화가 유럽 봉건사회를 체계적으로 파괴하고 세계 전체로 확대되면서 인류에게 초래한 보편적인 경험이다. 근본적으로는 세계적 규모의 자본주의에 의해 추동되는 근대성은 비록 시간과 정도에 차이가 있을지라도 인류 전체가 공유하는 경험이 되었다.

_마샬 버먼Marshall Berman 《현대성의 경험》에서

 

조선 정조 때 관군이 익혔던 24가지 궁중 기예를 재현하는 젊은이들

경계가 무너지고 국경의 의미가 약해질수록 민족 혹은 국가라는 공동체는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는 우리 것을 찾으려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5 역사 소비 시대의

    역사 읽기

 

대중이 원하는 역사는 무엇인가? 이를 이해한 전제 위에서 인지적 공감을 이끌 수 있는 역사서술이 중요하다. 의무만을 강조할 수는 없다. 흥미, 재미가 필요하다. 흥미를 통해 의미를 전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볼셰비키 혁명의 시작을 알린 순양함 아브로라호

국내 유력 일간지에서 뽑은 20세기 역사적 사건 중 전문가들이 선정한 최고의 사건은 볼셰비키 혁명이었다.

 

제1장 | 선사 시대

       생활의 자취

 

1 한국인의 기원

 

혈연만 같다고 해서 민족이 되는 것은 아니다. 민족이라는 것은 생물학적인 인종과 다른 개념이다. 단순히 언어나 경제적인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역사적이고 복합적이며 총체적인 개념이다.

 

공주 석장리 유적

1963년, 고고학 관련 조사차 한국에 머물고 있던 미국인 앨버트 모어는 홍수로 무너져 내린 공주 석장리 강변에서 뗀석기를 발견했다. 이듬해 11월, 연세대학교 손보기 교수가 이끄는 답사팀은 석장리에서 첫 번째 발굴을 실시,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구석기 시대 인류의 흔적을 찾아냈다.

 

2 원시와 첨단의 만남

 

고고학이 발굴 또는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것은 아득히 멀리 떨어진 원시의 흔적들이다. 고고학은 이런 원시의 흔적들을 최첨단과학을 총동원하여 연구한다. 원시와 최첨단 과학이 만나는 자리, 그 자리에 고고학이 있다.

 

아슐리안형 주먹도끼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에서 동아시아 최초로 발견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서울 암사동 선사 주거지

한반도에서 본격적인 신석기 시대가 시작된 것은 기원전 6000년경으로 보고 있다. 1967년부터 본격적인 발굴 작업을 시작. 6000년 전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 30여 채가 발굴되었다.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빗살무늬토기

빗갈무늬토기는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 유적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남한강변 가파른 산중턱에 자리 잡은 여주 흔암리 선사 주거지

이곳에서 발견된 16개 움집 화덕 자리와 토기 안에서 보리, 조, 수수, 콩 등의 탄화 곡물과 탄화된 쌀이 발견되었다.

 

강화도 하점면 부근리 고인돌

강화도에는 약 150여 기의 고인돌이 있다. '강화 부근리 지석묘'라는 이름으로 사적 제137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고인돌은 2개의 고인돌을 덮고 있는 덮개돌의 길이가 약 6.4밑, 폭이 5.2미터에 이르고 무게는 50톤이나 나가는 아주 큰 고인돌이다.

 

전북 고창 고인돌군

고창은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조밀한 고인돌 분포 지역이다. 고창 죽림리, 상갑리 일대에는 북방식, 남방식, 개석식 등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 445기가 분포하고 있다.

 

3 그림과 주술

 

인간의 인지가 발달하면서부터 미지의 세계, 초자연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수단으로 암벽에 그림을 그리는 기원 행위가 있지 않았을까? 사냥이 잘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그림을 그렸을 수도 있다.

 

고령 장기리 암각화

발견 당시 지명을 따라 양전동 암각화라고도 불리며, 추상적인 기하학적 문양이 새겨져 있다.

 

울주 반구대 암각화 탁본(부분)

퇴적암 위에 다양한 동물과 사냥 장면을 그렸다.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원시 신앙 특유의 주술적 목적을 잘 드러내고 있다.

 

부안 죽막동 제사 유적

물살이 세고 바람이 강한 죽막동 바닷가는 교역에 나선 배가 침몰하는 일이 잦았다. 이곳에서 제사 유적이 발견된 것은 바다신에게 항해를 무사히 마치게 해 달라고 빌었기 때문이다.

 

농사 짓는 사람들 모습이 새겨진 농경문 청동기

농사를 짓는 일은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닐까?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4 단군 신화

 

신화란 비합리적이라고 해서 무조건 부정해서도 안 되고 문자 그대로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신화란 그 사회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화에서 역사적 사실을 추출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것이다.

 

단군 영정

고조선을 세운 첫 단군왕검의 초상화이다.

 

중국 지안 장천 1호분 벽화

신단수로 보이는 나무 아래 곰과 호랑이가 그려져 있다.

 

5 최초의 국가, 고조선

 

고조선은 요하 지역을 중심으로 상당 기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기원전 4세기경에 등장한 연나라와의 전쟁에서 밀려 한반도의 평양 지역으로 중심지를 이동해 갔다.

 

초기 고조선 유적으로 보여지는 중국 랴오닝성 해성시 석목성 고인돌

고조선의 세력 범위에서 볼 수 있는 탁자식 고인돌 형태를 띠고 있다.

 

범금팔조

 

1.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2. 남에게 상해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배상한다.

3. 도둑질한 자는 그 집의 노비로 삼는다. 만약 죄를 씻고자 할 때는 50만 전을 내야 한다. 그러나 죄를 씻고 평민이 되어도 이를 천하게 여겨 결혼할 때 짝을 구할 수 없다.

_《한서》<지리지> 연나라 조

 

 

중국 랴오닝성에 있는 강상무덤

고조선 사회의 성격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무덤이다.

 

님아 가람 건느지 마소

그예 님은 건느시네

가람에 쌓여 쉬 오시니

어저 님을 어이 하리

_<공후인箜篌引>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6 고대인의 생활

 

온돌은 삼국 시대 초기부터 등장한다. 삼국 시대 중반까지도 움집이나 귀틀집 같은 데서 살다가 추운 고구려 지역에서부터 온돌이 서서히 보급되었다. 방바닥 전체에 구들을 깐 전면적인 온돌이 널리 사용된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였다.

 

쌀농사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쌀이 보편적인 먹거리로 식탁에 오른 것은 삼국시대 중반 정도이다.

 

고대인들이 장을 담갔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콩이 재배되고 메주가 있었다면 장을 담그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고구려 안악 3호분 벽화에 그려진 수박희 모습

 

누에고치

부자나 귀족들은 누에고치에서 나온 명주를 짜서 옷을 해 입었다.

 

고구려 안악 3호분 고분벽화에서는 고구려 귀족 여인의 화려한 옷과 머리 모양을 볼 수 있다.

 

제2장 | 삼국의 성립에서

       통일까지

 

1 '한'민족과 삼한,

    그리고 가야

 

'한'이란 호칭은 기원 전후하여 한반도 남쪽에 자리 잡았던 마한 · 진한 · 변한이라는 부족 이름에서 나왔다. 한반도의 북부 지방과 만주 지역에는 예맥족예맥족이 있었다. 예맥족은 예족과 맥족으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하는데, 뒤에 부여 · 고구려 등의 나라를 세웠다.

 

솟대는 분명 소도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무당이 신과 접속하는 것도 솟대 혹은 소도와 관계가 있다.

 

전남 나주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

반남 일대에 가야 정도에 해당하는 정치체가 있었음을 뒷받침하는 유물이다.

 

옹관묘

영산강 유역의 나주시 반남면 일대 고대 옹관고분 사회는 아직 그 답을 기다리는 수수께끼처럼 남아 있다. 사진은 국립나주박물관 전시실

 

2 삼국의 성립과 사회 구성

 

고구려나 신라의 신화가 초보적인 국가 성립 단계를 전승해 주고 있다면 백제의 건국 신화는 한 단계 나아간 고대 국가 성립의 단계를 반영하고 있다. 또한 고구려와 백제의 신화를 보면 양국의 왕실이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중국 길림성 환인현에 있는 오녀산성

고구려 초기 수도였던 졸본성으로 추정된다.

 

3 광개토대왕비와

    칠지도

 

임나일본부설의 근거 가운데 하나로 들고 있는 것이 광개토대왕비이다. 그러나 비문변조설을 비롯하여 해석상의 문제 등을 제기하면서 학계에서는 이를 부정하고 있다. 따라서 비문의 글자에만 머물러 있기보다는 동아시아의 국제적인 역학 관계에 폭넓게 주목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광개토대왕비

장수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지금의 지린성)에 세운 것으로, 높이가 무려 6.4미터에 이르는 동양 최대의 비석이다.

 

광개토대왕비문 탁본(부분)

전성기 고구려 모습을 담은 거대 비석의 탁본으로 고대사에 대한 국제적 논쟁의 초점이 되고 있다.

 

칠지도

가지가 일곱 개 뻗은 칼이라 하여 칠지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앞면과 뒷면에 새겨진 글자로 백제와 왜의 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어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 왔다.

 

4 밖으로 열린 문화,

    백제

 

고대 사회에서 한강 유역은 여러 문화와 주민들이 빈번하게 교차하는 곳이었다. 이에 일찍부터 농경 문화를 중심으로 한 포용적이고 개방적인 문화가 형성되었다. 한강을 기반으로 해서 최초로 국가를 세웠던 나라가 바로 백제이다.

 

백제 초기의 돌무지무덤이 모여 있는 서울 송파구 석촌동 고분군

다양한 모습을 한 여덟 개의 무덤 가운데 눈여겨봐야 할 것은 3호분이다. 한 변의 길이가 50미터에 이르는 아주 큰 무덤이다.

 

백제 금동대향로

1993년 10월. 부여 능산리의 절터에서 1300여 년의 긴 잠을 깨고 나와 백제의 예술세계를 다시 쓰게 하였다.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5 고구려의 영웅,

    고구려의 멸망

 

고구려의 멸망은 지배층들이 통치의 명분을 상실할 때 국민들의 지지를 받기 어렵고, 결국 외세의 침입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게 되어 끝내는 망하고 만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충북 단양에 있는 온달산성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해발 427미터 높이에 돌로 쌓은 성이다.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인 온달 장군은 신라에게 빼앗긴 죽령 이북을 되찾기 위해 이곳까지 내려왔다가 결국 전사했다.

 

신통한 계책은 천문을 헤아리며

묘한 꾀는 지리를 꿰뚫는구나

싸움마다 이겨 공이 이미 높았으니

족할 줄 알아서 그만둠이 어떠하리

_을지문덕이 고구려를 침략해 온 수나라의 장수 우중문에게 주었다는 시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대묘에 그려진 현무도

강서대묘 안벽에 그려졌으며 서쪽으로 나아가는 자세이다. 웅혼한 기상과 생동감이 느껴지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

말 탄 무사들이 산과 들을 달리며 활을 쏘아 호랑이, 사슴, 토끼 등을 사냥하는 모습을 생동감 있고 힘차게 그렸다. 활 잘 쏘는 기마 민족의 활달한 기상을 담고 있다.

 

연개소문유적비

강화도에는 연개소문이 고려산 북쪽 시루미산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또한 그가 물을 마셨다는 오정(우물), 군사들을 훈련시켰다는 연못 등이 남아 있다. 인천 강화군 하점면 소재

 

6 삼국의 통일

 

삼국의 주민들이 한데 어울려 당나라 군사를 물리치는 데 고난을 함께함으로써 진실한 의미의 통일에 돌입하는 역사적 진전이 있었다. 신라의 통일은 불완전하나마 백제와 고구려 멸망 이후 삼국의 주민이 경합하여 외세를 물리침으로써 최초로 민족의 통일을 완성시켰다.

 

월지(안압지)

신라 문무왕이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무너뜨리고 신라의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서라벌(경주)에 세운 동궁(임해전)터. '안압지'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제3장 | 신라, 천년의 역사

 

1 골품제의 운명

 

골품제는 경주의 왕경인王京人들을 대상으로 한 제도였다. 때문에 나라 사람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조선 시기의 신분제와는 달랐다. 그렇다고 해서 일반 평민들이 차별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임신서기석

두 친구가 유학 공부와 나라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 내용을 기록한 비석이다. 이 비석을 통해 신라가 삼국 통일 이후 유교 사상을 기반으로 나라를 이끌어 가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2 촌락문서에 나타

    신라 사회

 

포장지라는 전혀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던 촌락문서가 천여 년의 세월을 두고 다시 제 용도를 찾아 훌륭한 정보를 전해 주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천년의 만남이란 영화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닌가 보다.

 

좌파리가반문서

일본 도다이지 쇼소인에서 유기 그릇의 일종인 좌파리가반 사이에서 발견된 통일신라 시대의 공문서 2장을 말한다. 공물과 녹봉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755년경에 작성된 신라 촌락문서

일본 도다이지 쇼소인에서 발견된 것으로, 지금의 청주 부근 4개 촌락의 면적, 인구수, 농경지 규모, 과실수, 가축 수 등을 기록해 놓았다.

 

효녀 지은은 한기군의 백성인 연권의 딸이었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그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나이 32세가 되도록 시집을 가지 않고 조석으로 보살피며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봉양할 거리가 없어 혹은 품팔이도 하고 혹은 구걸도 하여 밥을 얻어다 봉양하기를 오래 하니 피곤함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부잣집에 가서 자청하여 몸을 팔아 노비가 되고 쌀 10여 석을 받았다. 종일토록 그 집에서 일을 하고 날이 저물어야 밥을 지어 가지고 돌아와 봉양했는데, 이렇게 하기를 3~4일 동안 하였다. 그 어머니가 딸에게 이르기를 "전에는 밥이 거칠어도 맛이 좋았는데, 지금은 밥이 좋아도 맛은 전과 같지 않고 속을 칼로 에는 것과 같으니 웬일이냐." 하였다. 딸이 사실대로 고하매 어머니가 "나 때문에 네가 종이 되었다니 빨리 죽느니만 같지 못하다." 하며 소리를 내어 크게 울고 딸 또한 울어서 그 슬픈 정상이 길가는 사람을 감동케 하였다.

_《삼국사기》에 나오는 효녀 지은에 관한 이야기

 

강남풍속이 얄궂어

딸자식을 응석으로 키우누나.

바느질은 천하다 손끝에도 안 대고

날마다 분 바르고 거문고만 뜯는다네.

배운 바가 본래 맑은 노래가 아니라

봄바람에 들떠서 녹아난다네.

꽃다운 제 얼굴 뽐내면서

길이길이 젊은 줄만 안다오.

그는 오히려 이웃집 처녀를 비웃는다.

온종일 베틀에 앉아 수고로이 비단을 짜도

비단옷은 너에게 돌아가지 않으리.

_《동문선》에 실려 있는 최치원의 <강남녀>라는 시

 

3 장보고와 해상왕국

 

장보고는 산둥반도와 완도의 청해진을 근거지로 삼고 이 두 곳을 축으로 해서 당시 동아시아 바다를 장악하고 국제무역을 주도해 나갔다.

 

중국 산둥성 영성시 적산법화원

장보고의 활동지에 세워진 유적이다.

법화원이 있는 중국 적산법화원이 있는 중국 적산 풍경명승구 내 장보고전기관에 우뚝 서 있는 장보고상

 

4 신라의 여왕,

    신라의 문화

 

신라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활발히 국제 교류를 했다. 로마 지역과도 교류를 했으며, 아랍 지역에서도 신라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데, 그들은 신라를 금이 많이 나는 섬나라로 보았다.

 

연단에 슬픈 울음에 무지개가 해를 뚫고

추연히 품은 슬픔, 여름에 서리 내리다.

이제 내 불우함이 그들과 같은데

하늘은 어째서 징조를 보이지 않는가.

_왕거인이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노래한 시

 

신라 고분에서 발견된 로만 글라스

1500여 년 전 신라가 서역과 교역한 흔적을 나타내는 유물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천마총 천마도장니

자작나무 표면에 하늘을 나는 말을 그려 장식한 말다래로, 신라 회화의 수준을 잘 보여 준다. 말다래는 말을 탄 사람의 옷자락에 진흙 등이 튀지 않도록 말의 배 양쪽에 늘어뜨린 네모진 판이다.

 

금동미륵반가사유상(국보 제83호)

삼국 시대 금동불상을 대표하는 걸작품이다. 미소를 머금은 얼굴에서 한국인의 얼굴을 발견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경주 답사에서 빠지지 않는 유적, 첨성대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국보 제31호로 지정되어 있다.

 

5 금석문과 목간

 

고고학이란 발굴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주장을 제기할 수 있고 학계의 검증을 통해 고대사 연구를 한 단계 진전시키기도 한다.

 

사택지적비

백제의 대좌평을 지낸 사택지적이 부처를 모시는 금당과 탑을 세운 까닭, 인생의 무상함을 시로 표현한 비석이다.

 

단양 신라적성비

 

신라의 수도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청동호우

광개토대왕이 죽은 지 1년 후에 제작된 그릇으로 고구려와 신라의 문화 교류 사실을 알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6 호족과

     6두품의 대두

 

지방 세력인 호족이 무력을 바탕으로 한 세력이었다고 한다면 6두품은 중앙에서 지식을 바탕으로 한 세력이었다. 6두품 세력이 무력을 가진 호족 세력과 연대해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고 이는 결국 고려의 건국으로 이어졌다.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 갇혔다가 탈출한 금산사

 

도선이 창건한 전남 월출산 도갑사 일주문

신라 말기에 세워진 사찰로서 국보 제50호인 해탈문과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 도선국사 영정 등이 있다.

 

제4장 | 신라의 불교

 

1 이차돈의 순교

 

문화의 발전 단계에서 신라는 다른 나라들보다 한 단계 뒤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전통적인 자기만의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골품 제도와 화랑도 등에서 볼 수 있듯 자기 전통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외래문화를 수용하는 데도 갈등이 있었다.

 

이차돈순교비

신라는 이차돈의 순교라는 극적인 사건을 계기로 불교를 공인했다.

 

무려 182센티미터에 이르는 황룡사 치미

건물 자체의 크기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치미. 신라 불교는 국가와 밀착되어 성장해 나갔다.

 

2 불교계의 새 바람,

    원효

 

원효는 삼국 통일 전쟁으로 인해 거칠고 각박해진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구제하고 이끌어 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고민햇다. 결국 원효는 대중 속에 들어가서 이 문제를 실천에 옮김으로써 풀어 나갔다.

 

분황사 화쟁국사비부

경주 분황사에는 원효를 기리는 비석이 잇던 흔적이 남아 있다.

 

3 의상과 화엄 종단

 

원효가 교단을 조직하거나 제자를 교육하는 등의 일을 거의 하지 않았던 데 비해서 의상은 여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진정, 표흠, 지통 등 당시 크게 평가받았던 고승들이 모두 의상의 제자들이다.

 

의상과 관련하여 여러 설화가 전해 오는 부석사

화엄십찰 중의 하나인 구례 화엄사

화엄경의 사상을 철학적이고 교리적으로 체계화한 화엄 신앙의 중심이 되는 절이다.

 

4 신라의 불교미술

 

불교의 교리나 신앙에 기초해서 불교적인 소재를 시각적으로 보여 주기 위해 조형화한 것들 또는 예배의 대상이 되거나 교화 활동, 불교 의식을 진행하는 데 필요해서 만들어 놓은 것들이 오늘날 불교미술로 분류된다.

 

뼈항아리

신라 사회에 불교가 유행하면서 시신을 화장한 다음 재를 묻는 방식으로 장례 문화가 바뀌게 되었다. 신라 무덤은 화려한 껴묻거리를 묻는 거대한 무덤은 사라지고 뼈항아리와 뼈항아리를 넣을 수 있는 돌방무덤으로 변화되었다.

 

30여 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국가 차원의 정성과 공덕을 들여 완성한 불국사

 

다보탑과 석가탑

대웅전 앞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두 탑은 석가모니 부처와 다보여래가 만나는 장면을 보여 준다.

 

석굴암 본존불(국보 제24호)

석굴암은 우리나라 불교건축의 극치를 보여 주는 뛰어난 유적이다. 또한 석굴암 본존불은 우아하며 위엄 있는 모습에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경외감과 함께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성덕대왕신종

에밀레종이라고도 하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종 가운데 가장 크며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5 선종 구산문의 성립

 

신라 불교는 불교라는 특정 종교로서의 의미보다는 통일신라를 전후한 시기에 우리 문화를 형성한 기틀로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아가 신라의 불교문화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합천 가야산 해인사

신라 하대에 이르면 선종 사찰은 물론 교종 사찰조차도 수행 자체의 목적을 위해 산속에 세워지는 일이 많았다.

 

제5장 | 발해사의 주인 찾기

 

1 발해의 건국과 대조영

 

발해는 초기에 '고려高麗'라는 나라 이름을 쓰기도 했고, 일본 사람들이 발해왕을 '고려왕공려왕'이라 부르기도 했다. 고려는 당시 고구려와 같은 의미로 쓰였던 말이다.

 

2 발해의 대외 관계

 

발해는 중국과 일본, 신라의 중간점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중개지 역할을 많이 했다. 또 북방의 중앙 아시아 지역과도 연계를 맺고 교류를 했다. 발해는 그 지정학적 위치를 최대한 활용하여 국제적인 중심지로서 자신의 위상을 세워 나갈 수 있었다.

 

발해와 일본의 교류 사실을 보여 주는 목간. 발해를 일컫는 '高麗'라는 글자가 또렷하게 나타나 있다.

 

3 발해의 사회 구성과 문화

 

발해 문화는 국제적이고 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고구려적인 것, 말갈적 정서를 가진 것을, 당나라 문화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에서 전해 온 문화 요소도 있었다.

 

발해 상경성 절터에서 발견된 치미

건물 용마루 끝을 장식했던 이 치미는 녹유(녹색 유약)를 발라 구웠는데, 천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화려한 빛깔 그대로이다.

 

서릿 기운 가득한 하늘에 달빛 비치니 은하수도 밝은데

나중에 돌아갈 일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네.

홀로 앉아 지새는 긴긴 밤 근심에 젖어 마음 아픈데

홀연히 이웃집 아낙네 다듬이질 소리 들리누나.

바람결에 그 소리 끊기는 듯 이어지는 듯

밤 깊어 별빛 낮은데 잠시도 쉬지 않네.

나라 떠나와서 아무 소식 듣지 못하더니

이제 타향에서 고향소식 듣는 듯하구나.

방망이 무거운지 가벼운지

다듬이돌 평평한지 아닌지 알 길 없구나.

멀리 타국에서 가녀린 몸에 땀 흘리는 모습 측은히 여기며

밤 깊도록 옥 같은 팔로 다듬이질 하는 모습 보는 듯하네.

나그네에게 따뜻한 옷 지어 보내려고 하는 일이지만

그대 있는 방 찬 것이 먼저 걱정이구려.

비록 예의 잊어 묻기 어렵지만

속절없이 원망하는 그대 마음 모를 리야 하겠는가.

_양태사의 시

 

상경성 제2절터에 남아 있는 발해 석등

높이가 6.4미터에 이르며, 소박하고도 묵직한 발해인의 기질이 묻어난다.

 

제6장 | 고려의 건국

 

1 태조 왕건과

    후삼국의 통일

 

고려는 영토의 중앙에 있는 개경을 새 수도로 정해서 전국적으로 지리적 위계를 균등히 했다. 이런 점에서 내용적인 통합에 한발 더 다가섰으며 연호를 '천수'로 정하고 황제국을 칭하여 국가의 위상을 높였다.

 

고려 태조 왕건 청동상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왕의 실제 모습을 표현한 청동상이다. 북한 개성박물관 소장

 

의심한다면 쓰지 마라. 쓴다면 의심하지 마라.疑人不用 用人不疑"

_중국 속담

 

2 호족 연합 정권

 

태조는 호족 세력들을 지지 기반으로 후삼국을 통일한다. 따라서 호족들이 고려 왕조를 지지해야만 왕조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호족들을 아우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을 견제할 수 있는 정책들이 필요했다.

 

3 고려의 복잡한

    지배이념

 

고려는 기본적으로 불교국가였으나 유학적인 측면들도 적지 않았다. 아울러 풍수도참설의 지배를 받는 부분도 많았다. 불교는 개인적인 심성을 수행하는 데, 유학은 나라를 다스리는 합리적인 방안을 끌어내는 데 필요했다.

 

화엄경 변상도

비로자나불, 청련화보살 등의 모습이 보인다. 화엄경 제47권 변상도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4 고려의

    다원적 대외 관계

 

다원적 국제 관계의 현실에서 고려는 철저하게 실리를 추구하는 외교적 노선을 추구할 수 있었다. 명분을 지켜 나가면서 구체적인 실리를 얻어 낸 고려의 대외 정책은 오늘날 등거리 실리외교의 전형이다.

 

거란 문자가 새겨진 거울

고려와 거란의 교류를 통해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제7장 | 고려의 사회와 경제

 

1 고려 사회 성격 논쟁

 

중앙 문화와 지방 문화의 공존, 다차원의 지방 제도, 불교 · 유교 · 도교 · 풍수지리사상 등 이념적 복잡성, 다양한 나라들과의 대외무역을 통한 개방성, 변화무쌍했던 중국 등과의 외교, 이런 것들이 고려를 다원주의 사회로 이끌었다고 해석한다.

 

과거 시험 장면

중국에서 시작된 과거제는 시험을 치를 수 있는 자격의 제한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인 능력에 따라 관리를 선발하는 합리적인 방식이었다.

 

2 전시과와

    고려 경제

 

지방의 호족들이 중앙관료가 될 때 그 지방의 토지에 대해 왕과 계약을 맺게 되는데 이를 제도화한 것이 전시과이다. 호족이 중앙관료가 되어 왕권에 협조해 주는 대가로 전시과라는 제도를 통해 그들의 물적 기반을 인정하거나 또는 그런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3 고려의 문화와

    삶의 모습

 

고려청자에 대한 수요는 국내뿐만 아니라 송나라나 일본 등 국제 수요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지배 세력이 금나라나 원나라 같이 상대적으로 문화 수준이 낮은 이민족 왕조로 바뀌면서 수요가 격감하였다.

 

청자상감모란당초문표형주자(국보 제116호)

상감청자는 고려자기의 수준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으나 아쉽게도 하권만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남아 있다.

 

논산 관촉사 은진미륵

고려 사람들의 눈으로 본다면 은진미륵이야말로 거대함을 담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관촉사의 은진미륵과 같은 계통의 거상으로, 거칠지만 당당한 호족의 모습을 만나는 듯하다.

 

지옥의 다섯 번째 왕 염라대왕

고려 시대 때 그림으로, 염라대왕 밑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그렸다.

 

햇볕에 등 쪼이며

해 종일 밭 갈아도

농부에게 차례진 것

한말 조도 없다

이 내 팔자 바꾸어서

관청에 앉았으면

놀고도 쌓인 곡식

만 섬에 이르련만

_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에 실린 <해종일 밭 갈아도>

 

4 가족과 친족,

    그리고 여성

 

고려 시기 친족의 범위는 부계 혈연집단 뿐 아니라 모계 또는 처계까지도 포함해서 규정해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른바 양측적 친속사회로, 친족의 범위는 부계와 모계를 가리지 않고 8촌 이내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5 본관제와 향도

 

성이 비교적 오래전부터 쓰이고 있었는데, 왜 본관이라는 것을 또 만들었을까? 국가 입장에서는 조세나 역역을 징발하는 하나의 단위로 설정하는 편의성이 있고, 공동체 입장에서는 공동체의식을 보다 활성화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예천 개심사지 5층 석탑(보물 제53호)

향도의 실체를 알려 주는 귀한 기록을 새긴 석탑이다.

 

제8장 | 귀족 사회의 동요

 

1 이자겸의 난과 의천

 

이자겸의 난은 고려 전기 귀족들이 분화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갈등을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지배층들이 서로 얽혀 난맥상을 보이는 상태에서 고려는 12세기에 많은 농민들의 저항에 부딪힌다.

 

문종의 셋째 아들로서 왕실 중심의 천태종을 제창한 대각국사 의천

 

2 묘청의 난과

    풍수지리설

 

예언적 풍수지리설은 서경 천도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이념적 배경이 되었다. 풍수지리설은 단순히 미신에 그치지 않았고 국가 차원에서도 중시되는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지녓던 것이다.

 

3 무신 정권의 성립

 

무신 정권은 귀족 상호 간의 대립이 아니라 지배층 내에서 하급지배층을 구성하고 있던 무신들이 주도햇고, 그 성공으로 해서 문신귀족 사회를 붕괴시켰다는 점에서 통상적인 지배층 내부의 대립과는 차이가 있다.

 

최충헌과 그의 가족들이 지니고 다녔던 경전과 경전을 넣는 상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미륵하생경 변상도

고려의 불화 가운데 하나인 미륵하생경 변상도에는 고려 농민들의 고달픈 삶이 그려져 잇다. 일본 신노인(親王院) 소장

 

4 만적의 난

 

"장상將相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시기만 만나면 될 수 잇는 것이다. 이 나라에 다시는 천인이 없게끔 만들면 공경장상公卿將相일지라도 우리들이 누구나 다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한평생 일해서 벼슬아치 섬기는

이것이 바로 농사꾼이다.

누데기로 겨우 살을 가리고

온 하루 쉬지 않고 밭을 가노라

벼모가 파릇파릇 자랄 때부터

몇 번을 매가꾸어 이삭이 맺었건만

아무리 많아야 헛배만 불렀지

가을이면 관청에서 앗아가는 것

남김없이 몽땅 빼앗기고 나니

내 것이라곤 한 알도 없어

풀뿌리 캐어 목숨을 이어가다가

굶주려 마침내 쓰러지고 마는구나

 

서울의 홍강스레 잘사는 집엔

보배가 산더미로 쌓여 있도다

구슬같이 흰 쌀밥을

개나 돼지가 먹기도 하고

기름같이 맛있는 술을

심부름꾼 아이들도 마음대로 마시누나

이것은 모두 다 농사꾼이 이룩한 것

그들이야 본래 무엇이 있었으랴

농민들의 피땀을 빨아 모아선

제 팔자 좋아서 부자가 되었다네.

_이규보

 

제9장 | 대몽 항쟁과 개혁

 

1 대몽 항쟁과 강화도

 

민중들로서는 정부에 대한 저항도 중요했지만 외세의 침입에 대응하는 것이 먼저였다. 국가와 민족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던 것이다. 이에 비해 정부나 지배층은 그에 맞는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합천 해인사

초조대장경이 몽골 침입으로 불타자 16년에 걸쳐 다시 만든 것이 팔만대장경이다.

 

강화 외성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 조정은 강화도를 지키기 위해 내성과 중성, 외성을 쌓았다. 몽골은 강화 조건으로 성을 모두 헐어 버릴 것을 요구했다. 지금 남아 있는 성은 조선 시대에 쌓은 것으로 일부가 고려 시대의 것과 겹친다.

 

2 삼별초의 난

 

외세의 침입에 대해서 끝까지 저항하는 감투정신, 자주정신의 표현을 삼별초에게서 찾을 수 잇다. 아울러 삼별초의 난은 12세기에 전개된 민중 봉기를 계승하고 수렴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실제로 삼별초의 난이 진압된 후에는 민중들의 봉기도 사라졌다.

 

삼별초군호국항몽유허비(강화도 외포리 소재)

외포리는 삼별초가 진도를 향해 출발한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권신이 정권을 잡고 손톱이나 어금니로 삼아 녹봉도 두터이 주고, 사사로이 은혜를 베풀며 죄인의 재물을 압수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권신들이 마음대로 부렸으며 그들은 앞을 다투어 힘을 다하였다. 김준이 최의를 주살하고, 임연이 김준을 주살하고, 송송례가 임유무를 주살하는 데 모두 그 힘을 빌렸다. 왕이 개경으로 환도함에 미쳐 삼별초가 회의하는 마음을 품었으므로 혁파한 것이다.

_《고려사》〈열전〉

 

진도 용장산성

진도에 정착한 삼별초는 용장산성을 쌓아 방어를 하는 한편, 궁궐과 관청을 짓고 주변에 있는 30여 개의 섬을 장악하였다.

 

제주도 항파두리성

삼별초군은 제주도 항파두리를 거점으로 삼고 끝까지 항전했으나 1273년, 여몽연합군에 의해 함락되고 만다.

 

3 지눌과 결사 운동

 

지눌의 사상 체계를 교 · 선 일치의 완성된 철학 체계라고 한다. 지눌에 의해서 주도되었던 무신 집권기의 결사 운동은 고려 중기의 부패하고 보수화된 불교를 새로운 불교로 만들기 위한 신앙 결사 운동이자 불교계의 개혁 운동이었다.

 

전남 강진군 도암면에 위치한 백련사

천태종 승려 요세가 중창한 절로, 실천 중심의 수행인들을 모아 결사를 맺었다. 송광사의 수선사와 쌍벽을 이루는 백련결사의 현장이다.

 

승보사찰 송광사

법보사찰 합천 해인사, 불보사찰 양산 통도사와 함께 삼보사찰로 불린다.

 

우리들이 아침저녁으로 하는 행적을 돌이켜보니

불법을 빙자하여 자기를 꾸미면서 남과 구별하고는

구차스럽게 이익 기르는 일만 도모하고

풍진의 세상일에 골몰하여

도덕을 닦지 않고 의식衣食만 허비하는구나.

비록 출가하였다 하더라도 무슨 덕이 있겠는가.

아! 무릇 삼계三界를 떠나려 하면서도

속세와 끊으려는 인연이 없으니

한갓 남자의 몸이 되었을 뿐 장부의 뜻은 없도다.

위로는 도를 넓히는 데 어긋나고

아래로는 중생을 이롭게 하지 못하며

중간으로는 사은四恩을 저버렸으니

아! 부끄럽구나!

……

마땅히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산림에 은둔하여 정혜사定慧社를 결성하여

항상 선정禪定을 익히고 지혜를 고르게 하기에 힘쓰자.

또 예불과 독경을 하고 나아가서는 노동하기에도 힘쓰자.

각기 소임에 따라 경영하고 인연에 따라 심성을 수양하여

한평생을 자유롭게 지내며

멀리 달사達士와 진인眞人의 고행高行을 좇는다면

어찌 쾌하지 않으리오.

_<정혜결사문>

 

보조국사 지눌

교종과 선종이 일치하는 철학 체계를 완성한 지눌은 부패하고 보수화된 불교를 새로운 불교로 만들기 위한 개혁 운동이자 신앙 결사 운동을 펼쳤다,

 

4 원의 간섭과

    부원(부원) 세력

 

몽골이 다른 지역을 정복했을 때는 대부분 직접 지배를 했다. 반면 고려의 경우는 직접 지배를 하지도 않았고 고려라는 국호도 그대로 유지하게 했다. 그 이유는 고려가 몽골에 대해 무조건 항복이 아닌 강화라는 과정을 밟아서 전쟁을 종결했기 때문이다.

 

5 공민왕의 개혁정치

 

공민왕은 즉위할 때 이미 원나라가 쇠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이 원에 잇었기 때문에 원의 정치에 정통했다. 공민왕은 이런 사정을 알고 이 기회를 이용해서 원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운동을 벌였다.

 

찬란한 이 문화를 누가 범에게 내맡기며

창검이 어찌 형제의 싸움에 번뜩이랴.

이 터전 지켜가는 국력을 바로잡아

고려가 번창함을 다시 보이라.

_ 이제현 <작은 여관에서>

 

이제현 초상화(국보 제110호)

고려 후기 대표적인 성리학자이자 진보적 지식인이었던 이제현. 충숙왕을 보필해 원나라에 갔을 당시 그려진 초상화로 알려져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공민왕 부부 초상화

공민왕은 부원 세력을 몰아내고 고려를 자주적인 국가로 세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6 성리학의 수용

 

성리학을 도입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이 당시의 신진관료들인 신흥사대부이다. 이들은 공민왕 때 크게 성장해서 하나의 정치 세력을 이룬다. 이들은 고려 후기의 격화된 사회 모순을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까에 큰 관심을 가졌다.

 

목은 이색

온건개혁파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성리학뿐 아니라 불교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나 불교를 누르는 정책을 주장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