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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7. 31. 14:33 내가 읽은 책들/2017년도

2017-035 사임당의 뜰

 

 

 

탁현규 지음

2017, 안그라픽스

 

대야도서관

SB114755

 

653.11

탁94ㅅ

 

사임당의 뜰에는 무엇이 숨겨져 있을까

간송미술관 연구원 탁현규가

오감으로 찾아낸 사임당 화첩 속 생명들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덮여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땅에서 풀벌레와 어울리는 삶은 돈을 내고 경험하는 사치스런 행위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꽃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으랴.

 

아파트의 베란다처럼 작은 공간을 각종 식물이 가득한 작은 뜰로 바꿔 놓는 재주를 가진 사람들은 모두 사임당의 후손이다. 아침마다 화분에 물주는 정성이 아직 남아 있는 한국인은 우리 시대의 초충도를 그릴 힘이 있다. 그런 힘을 북돋워 주는 선배가 바로 사임당이다.

 

신사임당 申師任堂, 1504-1551

 

호는 사임당師任堂,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진사 신명화進士 申命和의 딸이며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모부인母夫人이다. 경사經史에 밝고 언행言行이 뛰어났으며 시서화詩書畵에 두루 능했다. 초충草蟲, 포도葡萄, 산수山水, 어해魚蟹를 잘 그렸다.

 

이매창 李梅窓, 1529-1592

 

호는 매창梅窓,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이원수李元秀와 사임당 신씨가 낳은 4남 3녀 가운데 맏딸이다.

어머니 사임당처럼 경사에 밝고 시서화에 능하여 '작은 사임당'으로 불렸다. 묵매墨梅와 화조花鳥를 잘 그렸다.

 

"옛사람들은 뜰에 사는 작은 생물에서도 사람이 걸어가야 할 올바른 길을 보았다. 미물은 더 이상 미물이 아니라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생명이다. 사임당이 그린 초충도를 감상하는 일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교육일지도 모른다. 미물을 사랑하는 마음은 생명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으로 나아간다. 이것이 바로 사임당이 초충도를 그렸던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탁현규 卓賢奎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미술사전공으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그림소담』 『고화정담』 『조선 시대 삼장탱화 연구』 등이 있다.

 

현재 간송미술관 연구원으로 있으며 서울교육대학교, 경인교육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등에 출강하고 있다.

 

눈이 보고 싶어 하고 귀가 듣고 싶어 하고

입이 먹고 싶어 하고 코가 냄새 맡고 싶어 하는 것 중에

뜰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윌리엄 로손 William Lawson

 

차례

 

뜰에 들어서며


사임당의 화첩


묵포도

쏘가리



사임당초충화첩 간송미술관

달개비와 추규

민들레와 땅꽈리

맨드라미와 도라지

오이와 개미취

가지와 땅딸기

수박과 개미취

원추리와 패랭이

양귀비와 호랑나비



신사임당필초충도 국립중앙박물관

수박과 들쥐

가지와 방아깨비

오이와 개구리

양귀비와 도마뱀

원추리와 개구리

맨드라미와 쇠똥벌레

여뀌와 사마귀

추규와 개구리



신사임당초충도병 오죽헌시립박물관

오이와 메뚜기

수박꽃과 쇠똥벌레

수박과 여치

가지와 사마귀

맨드라미와 개구리

양귀비와 풍뎅이

봉선화와 잠자리

원추리와 벌



매창의 화첩

월매도

신죽쌍작

월야노안

화간쟁명



함께 이야기 나누며

매창과의 대화

율곡과의 대화

사임당과의 대화



뜰을 나오며

용어 해설

도판 출처

참고 문헌

 

 

묵포도 31.5×21.7cm, 비단에 먹, 간송미술관 소장

 

포도는 색을 쓰지 않고 먹으로만 포도의 빛깔은 먹 빛깔과 비슷하여 먹으로 그리기에 알맞다. 그래서 먹으로 그린 포도 그림을 묵포도墨葡萄라고 부른다. 포도 그림은 사군자四君子와 어깨를 나란히 한 묵화墨畵이며, 사군자와 마찬가지로 포도 또한 여러 덕성을 갖추고 있다. 포도는 덩굴식물이다. 끊이지 않고 쭉 이어지는 덩굴줄기는 자손이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것을 뜻하고 가득 맺힌 알맹이는 자식을 많이 낳는다 하여 다산多産을 뜻한다. 또한 술을 담가 먹을 수 있으니 포도의 힘은 매우 크다. 그리고 난초와 마찬가지로 그리기도 그다지 어렵지 않다. 줄기는 글씨 쓰는 법과 멀지 않고 알맹이는 동그라미만 그리면 되니, 붓과 먹을 늘 곁에 두고 살던 선비들에게 포도 그림은 벗하기 좋았다.

 

김광국 화첩 속의 <묵포도>

 

師任堂水墨葡萄 東谿趙龜命題 金履慶書 金光國觀

사임당수묵포도 동계 조구명이 짓고 김이경이 쓰고 김광국이 보다

 

 

쏘가리 20.5×20.5c, 종이에 먹, 간송미술관 소장

 

옛사람들은 과거科擧 급제及第를 기원하며 잉어를 그렸다.

이는 등용문登龍門 고사를 말한다. 잉어가 황하 상류에 있는 용문의 폭포를 뛰어오르면 용이 되어 승천한다는 이야기다. 또한 이를 어변성룡魚變成龍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편 게를 그리는 것은 갑과甲科로 합격한다는 뜻이다. 게는 갑甲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잉어와 게는 모두 물에 사는 동물이다. 이 둘을 그린 그림을 어해도魚蟹圖라 부른다. 어해는 급제를 소망하는 그림이다.

 

붉은 잉어 홀로 뛰어오르니, 금선琴仙은 이미 종적이 없다.

어찌 연못을 좁고 더럽게 하랴. 반드시 벽력霹靂을 타리라.

紫鯉獨騰躍,  琴仙已無迹, 豈是因汚池, 會當乘霹靂

_율곡 이이

 

송시열 제사

32.8×22.5cm, 종이에 먹, 간송미술관 소장

 

나는 신 부인 필적을 자못 많이 볼 수 있었고 혹은 발어跋語를 붙이기도 했다. 이제 삼주 이중우三州 李仲羽, 1626-1688의 소장을 보니 위에 율곡 선생께서 쓰신 바의 절구가 있어 더욱 보배라 할 수 있다.

余得見申夫人筆蹟頗多, 亦或附以跋語矣,

今觀三州李仲羽所藏, 則下有栗谷先生小寫絶句, 尤可寶也. 

_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

 

 

사임당초충화첩師任堂草蟲畵帖

41×25.7cm, 종이에 채색, 간송미술관 소장

 

鷄距秋葵계거추규 달개비와 추규

 

추규는 가을에 피는 해바라기, 가을 아욱이라는 말이다.

우리에게는 추규보다 접시꽃이란 이름이 더욱 친숙하다.

촉규, 덕두화德頭花, 일일화 등 다른 이름도 많다.

담황색 꽃은 정원에 심어 가꿨다. 달개비는 잡초로 돋아났고 바랭이 풀도 함께 자랐다. 바랭이 풀은 어떤 꽃과도 잘 어울려서 약방의 감초와 같았다. 접시꽃의 노란 꽃술은 섬세하고 먹으로 그은 잎은 활달하여 강약의 대비가 잘 이루어졌다.

 

蒲公朱實포공주실 민들레와 땅꽈리

 

붉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단 땅꽈리는 가지과에 속하는 식물이다. 열매와 뿌리는 약으로 쓰인다. 밭이나 논두렁 어디에서나 잘 자란다. 열매가 오밀조밀 맺혀 있는 모습은 포도와 생김새가 비슷하다. 여름에 열매를 맺는 꽈리는 풍요함을 의미한다. 약으로도 쓰이기 때문에 그림의 소재로도 좋았다. 꽈리의 힘은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鷄冠桔梗계관길경 맨드라미와 도라지

 

맨드라미는 닭 벼슬을 닮았다. 꽃잎의 색도 닭 벼슬처럼 붉다. 그래서 맨드라미를 한자로 계관鷄冠이라 한다. 벼슬을 하면 관을 머리에 쓰기 때문이다. 따라서 맨드라미는 벼슬살이를 뜻한다. 관직에 오르고 싶은 선비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다.

도라지 꽃말은 사랑이라고 한다.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심심산천에 백도라지'라는 노래처럼 백도라지는 매우 귀하다. 흰 것은 모든지 귀하다. 대개는 보랏빛 도라지이다. 그림에서는 네 송이가 피었는데 두 송이는 부풀어 올랐다. 마지막 꽃은 바랭이 풀이다. 사임당은 각기 다른 꽃과 풀을 한 자리에 모아 놓았다.

 

靑瓜翠菀청과취완 오이와 개미취

 

덩굴식물의 줄기는 끊기지 않고 길게 이어진다. 사람들은 자신의 후손도 끊이지 않고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 바람을 덩굴식물 그림에 담았다. 그래도 아무 덩굴식물이나 그리지 않는다. 포도나 오이같이 맛있는 열매가 열리는 덩굴식물을 그린다. 가을에 포도가 달리고 여름에는 오이가 달린다. 한여름의 더위를 식혀주는 채소로 오이만한 것이 없다. 오이는 꽃도 예쁘다. 오이를 줄여 외라고 부르며, 오이꽃을 외꽃이라고 한다.

 

茄子地莓가자지매 가지와 땅딸기

 

가지는 사임당이 오이와 더불어 많이 그렸던 열매이다.

한자로 가지는 가자茄子라고 한다. '아들을 더한다'는 가자加子와 발음이 같다. 따라서 가지가 주렁주렁 달린 모습은 아들을 여럿 낳는다는 뜻을 가진다. 가지는 빛깔도 곱고 생긴 것도 매끈하여 탐스럽기 그지없다. 그 생김새만으로도 풍요함을 보여준다.

 

西瓜紫菀서과자완  수박과 개미취

 

수박이 온전하게 달려 있다. 수박이 그려진 그림에서 흔히 수박과 함께 지가 등장한다. 쥐들이 수박의 벌건 속살을 파먹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쥐도 보이지 않고 수박도 손상되지 않았다. 대신에 그림 아래쪽으로 기어가고 있는 벌레가 희미하게 흔적만 남아 있다.

 

萱菀石竹훤원석죽 원추리와 패랭이

 

원추리는 근심을 잊게 해 준다고 망우초忘憂草라 부르거나 아들을 얻게 해준다고 의남초宜男草라 부른다. 한자로 훤초萱草이다. 안채 뒤뜰에 원추리를 많이 심었기 때문에 남의 어머니를 훤당萱堂이라 부르게 되었다. 원추리가 있는 집이란 뜻이다. 원추리는 여인들이 머무는 곳과 동일시 되었던 꽃이다. 그만큼 여인들에게 친숙한 꽃이다.

 

貴妃蝴蝶귀비호접 양귀비와 호랑나비

 

꽃 이름에 사람 이름을 붙였다. 당나라 현종의 후궁이었던 양귀비가 얼마나 요염하고 아름다웠으면 꽃 이름으로 불릴까. 양귀비 열매의 유액은 마약 성분이 들어 있어 아편의 원료가 된다. 여인의 아름다움은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는 아편과도 같다. 그렇다면 양귀비란 꽃은 올바른 이름을 가진 셈이다. 양귀비도 위험하고 아편도 위험하다. 그 해로움을 알지만 유혹에 넘어간다.

 

 

 

신사임당필초충도申師任堂筆草蟲圖

32.8×28cm, 종이에 채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수박과 들쥐

 

수박은 오이나 포도처럼 덩굴 열매이다. 열맫 크고 씨앗도 많아 풍요를 상징한다. 수박밭에 나타난 손님은 쥐 두 마리다. 사이 좋게 수박을 파먹는 쥐들을 보자니 포만감이 느껴진다. 날카롭고 단단한 이빨을 가진 쥐만이 수박껍질을 뚫을 수 있으므로 수박밭의 단골 손님은 쥐인 셈이다.

 

가지와 방아깨비

 

자줏빛 탐스러운 굵은 가지는 앞서 썼듯이 자식을 많이 낳는다는 의미를 가진다. 물론 그 생김새만으로도 풍요로운 결실을 맺는다는 뜻은 충분하다. 그런데 사임당 그림을 통해 하얀 가지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흰 가지는 희귀하기 때문에 아들이 고귀한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오이와 개구리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도 오이밭에 있는 개구리를 그렸다. 개구리는 왜 오이밭에 자주 있는 것일까? 어쩌면 정선이 그린 초충도의 모범이 사임당 그림이었을지도 모른다.

오이 덩굴의 줄기 끝에 노란 외꽃이 피었다. 수박꽃과 오이꽃의 생김새가 비슷하다. 같은 부류의 식물이어서 그런가 보다. 수박꽃을 한 송이만 그렸는데 오이꽃도 한 송이만 그렸다. 꽃은 여러 송이 그리면 맛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오이도 가지처럼 두 개 정도만 달려야 번잡하지 않다. 균형을 맞추려고 두 개의 오이와 강아지 풀을 그렸다. 사임당의 그림은 모든 것에서 균형을 갖추었다.

 

양귀비와 도마뱀

 

패랭이가 양귀비 자태에 가렸다. 어느 꽃인들 양귀비와 겨루어 빛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대신 패랭이 네 송이가 피어서 서로 사이 좋아 보인다. 양귀비는 한 송이만으로 충분하다. 지존至尊은 여럿일 수 없기 때문이다. 꽃의 키도 나비보다 높아서 모든 생명체를 내려본다. 꽃의 여왕은 모란이지만 양귀비 또한 여왕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 패랭이는 여왕의 시녀들 같다. 색도 붉은 색으로 비슷하여 잘 어울린다. 파란 달개비와 붉은 패랭이는 색에서 음양陰陽의 조화를 이루었다.

 

원추리와 개구리

 

등황색의 원추리 꽃잎에 거뭇한 얼룩이 생긴 것은 흰색 안료인 호분이 산화되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선명한 빛깔이었을 것이다. 이는 흰 나비도 마찬가지다. 원추리 꽃대에 매미가 가만히 매달려 있다. 많은 화가가 매미의 등을 그린 것과 다르게 사임당은 등을 그리지 않고 매미의 다리와 배를 그렸다.

 

맨드라미와 쇠똥벌레

 

쇠똥구리가 쇠똥을 굴리는데 두 마리는 붙어 있고 한 마리는 떨어져 나갔다. 두 마리가 힘을 모아 굴리는 것 같지만 도와주는 척하면서 결국엔 한 마리가 빼앗아 간다고 한다. 그렇다면 맨 왼쪽 쇠똥구리가 저 쇠똥의 원래 임자였는지도 모른다. 쇠똥구리는 뒷발로 쇠똥을 굴리고 앞발로 긴다고 하는데 사임당은 이를 정확하게 옮겨 놓았다. 쇠똥구리는 자기 몸보다 더 큰 쇠똥을 잘도 굴린다.

 

여뀌와 사마귀

 

사임당 초충도 중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이 초충도이다. 그런데 그동안 이 그림의 꽃을 산차조기라고 잘못 불러왔다. 그림 속 꽃은 산차조기가 아니라 여뀌이다. 꽃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면 결코 틀릴 수 없는 일인데 이 그림을 해설했던 많은 이가 산차조기와 여뀌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던 것이다. 참으로 그림을 그린 사임당에게 부끄러운 일이다.

 

추규와 개구리

 

접시꽃, 촉규, 추규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어숭이꽃. 그런데 어쩐지 어숭이란 말은 낯설다. 어숭이는 서울말이라는데, 사임당이 한양에서 살았기 때문에 어숭이라고 그림의 이름을 달았을런지 모르겠다. 이름이란 것을 쉽게 바꿀 수 없긴 하지만 어숭이보다 추규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추규는 옆에 있는 도라지꽃과 피는 시기가 같다.

 

 

신사임당초충도병申師任堂草蟲圖屛

48.6×35.9cm, 종이에 채색, 오죽헌시립박물관 소장

 

오이와 메뚜기

 

나비와 메뚜기가 오이밭에 날아들었다. 패랭이도 올라온다. 노란 외꽃과 붉은 패랭이꽃, 초록 오이 덩굴이 한데 어우러져 색에서도 조화롭다. 다른 사임당의 그림과 다르게 땅이 기울어졌다. 패랭이와 오이 덩굴도 비스듬하게 벋어 나갔다. 이전보다 공간감이 늘어났다. 줄기와 잎의 표현도 더욱 섬세하고 능숙하다.

 

수박꽃과 쇠똥벌레

 

앞선 쇠똥벌레와 뒤따르는 쇠똥벌레 역시 뒤쪽 공간으로 들어간다. 재미있는 점은 그림에 쇠똥이 없다는 것이다. 벌레는 쇠똥을 찾으러 간다. 이전까지는 벌레와 쇠똥을 모두 그렸다. 이제는 쇠똥을 그리지 않는다. 다 그리지 않는 것이 세련된 것이라면 이 그림이 그렇다. 이는 수박 덩굴에 꽃만 피고 열매는 열리지 않은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앞으로 수박이 열릴 것이 기대된다.

 

수박과 여치

 

앞의 그림 다음에 이 그림이 놓인 이유가 이제서야 밝혀졌다. 수박 덩굴에 수박이 열렸다. 앞선 그림 속 잎과 이 그림 속 잎이 똑같다. 따라서 앞 장면에서 시간이 흐른 후의 모습이라 짐작할 수 있다.

 

가지와 사마귀

 

사마귀는 어떤 것이든 앞에 있으면 날카로운 앞발을 들고 서 있는데 뒤나 옆으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용맹을 상징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사임당 초충도에는 가지와 방아깨비의 조합이 있었다. 산딸기가 같이 있는 것도 똑같다. 차이점은 쇠뜨기와 벌, 개미가 이 초충도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훨씬 간략하게 그렸다. 그래서 가지의 개수도 두 개밖에 되지 않는다.

 

맨드라미와 개구리

 

맨드라미 꽃대가 길게 뻗었다. 좌우로 돋아난 잎은 농담이 다르다. 입체감을 주는 하나의 방법이다. 먹의 농담을 달리 하는 것을 음악에 비유하면 세기의 차이다. 다시 말해서 강약과 중강약처럼 세기를 조절하는 것이다. 이럴 때 리듬이 생긴다. 더군다나 꽃대가 부드럽게 휘어서 리듬감이 더욱 살아난다. 줄기 끝에는 주황색 맨드라미가 활짝 피었다. 아래에 그려진 네 송이도 이어서 꽃을 피울 것이다. 맨드라미 꽃은 크고 화려하므로 여러 송이를 그리지 않아도 된다.

 

양귀비와 풍뎅이

 

거미는 다리가 양쪽에 네 개씩 여덟 개인데 그림 속 곤충은 다리가 여섯 개이다. 따라서 '풀거미'라고 할 수 없다. 역시 많은 그림설명이 풀거미라고 되풀이하였다. 풍뎅이 종류이지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양귀비 세 송이는 열렸고 한 송이는 봉오리가 맺혔다. 양귀비 외에 다른 꽃은 그리지 않은 것은 여전하다. 그래도 달랑 양귀비만 있으면 허전하니 바랭이 풀이 뒤에서 감싸 올랐다. 화면에서 주인공인 꽃이 가장 높아야 하는 법이지만 이번에는 바랭이 잎이 끝까지 올라갔다.

 

봉선화와 잠자리

 

봉선화도 여러 종이 있지만 주변에서 흔히 보는 봉선화는 붉은색이 많다. 간송미술관 사임당 화첩에도 이 그림과 같은 구성을 한 그림이 있다. 붉은 열매가 달린 것처럼 되어 있어서 지금까지는 땅꽈리로 불러 왔지만 오죽헌시립박물관 초충도 덕분에 땅꽈리가 아니라 봉선화임이 확인되었다. 붉은 열매가 맺힌 모습은 봉선화 꽃망울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원추리와 벌

 

원추리 세 송이와 소국 여러 송이가 어우러져 있다. 앞뒤로 자리해서 구성만으로도 공간이 생겼다. 특이하게 소국은 모두 꽃봉오리가 벌어지기 직전이다. 이처럼 한 송이도 피지 않는 것은 흔치 않은 경우이다. 오히려 기운이 더 좋은 것은 앞으로 꽃망울이 터질 것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림 속 원추리는 형태나 색이 그다지 곱지 않다.

 

 

매창의 화첩

 

月梅圖월매도

36×28.3cm, 종이에 먹, 오죽헌시립박물관 소장

 

오래된 매화 둥치는 세월의 무게로 그만 쪼개졌다. 하지만 두 개의 새로 난 가지가 곧게 뻗어 올라와 그 가운데 하나는 화폭 끝에 닿았다. 대나무는 부러질지언정 휘지 않고 매화는 부러져도 이내 새 가지를 낸다. 그릭 매하이 새로운 가지는 대나무처럼 곧다. 옛사람들은 그 곧음을 좋아했다.

 

新竹雙雀신죽쌍작

어린 대와 참새 한 쌍

34.8×30cm, 종이에 먹, 오죽헌시립박물관 소장

 

두 마리 새를 화폭에서 빼내면 묵죽이다. 묵죽을 친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한 세대 후에 태어나 조선 묵죽의 으뜸이 된 탄은 이정탄은 이정, 1554-1626과 어깨를 겨룰 만하다. 어린 대의 잎은 생기로 가득 차 있고 잎 사이사이는 성글지도 빽빽하지도 않다. 어린 대 뒤에 옅은 먹으로 친 죽순 또한 살아 있는 듯 싱싱하다. 대나무만 놓아도 매창은 사대부를 넘어서고 있다.

 

月夜蘆雁월야노안

달밤에 갈대와 기러기

34.8×30cm, 종이에 먹, 오죽헌시립박물관 소장

 

갈대 로蘆, 기러기 안雁은 늘을 로老, 편안할 안安과 발음이 같다. 그래서 갈대와 기러기를 그린 노안도는 노년이 편안하다는 의미를 가진다. 기러기가 주로 갈대밭에 깃들기 때문에 자연스레 생긴 상징일 것이다. 갈대는 물가에서 자라기 때문에 노안도에는 새, 꽃, 물 이렇게 세 개의 경물이 나온다. 하나가 더 붙을 경우에 달이 뜨게 된다. 가을 달밤에 갈대꽃이 무성한 물가에서 기러기떼가 날아오르는 모습은 옛사람들에게 가장 가슴 저린 광경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花間爭鳴화간쟁명

나무 사이에서 다투어 울다

34.8×30cm, 종이에 먹, 오죽헌시립박물관 소장

 

암수 정답게 참새 한 쌍이 새싹이 터오는 가지에 앉았다. 새 생명은 자라나고 새들은 지저귄다. 한 놈은 얼굴을 날개죽지에 파묻었고 한 놈은 고개를 바짝 쳐들어 벌 한 마리를 바라본다. 벌은 작기도 한데 옅은 먹으로 해서 눈에 잘 띄지 않아 찾는 재미가 있다. 매창이 먹의 농담을 조절한 솜씨가 매우 좋다, 새와 벌, 나무 모두 먹빛이지만 뚜렷이 구별된다. 두 마리의 새도 모습을 모두 드러내지 않았다. 한 마리를 다른 한 마리 뒤로 슬쩍 놓아 반쯤 드러내는 방법이 능숙하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