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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2. 4. 16:30 내가 읽은 책들/2017년도

2017-047 시가 있는 간이역

 

 

 

최  학 지음

2012, 서정시학

 

대야도서관

SB079844

 

811.7

최92ㄱ

 

지금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지구라는 행성 하나도 우주에서는

지극히 작은 역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선로에 놓인 돌맹이 한 개 같은 지상의 역에서

사람은 떠나고 남는다. 아득한 만남과 아득한 이별이 그렇게

우주의 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역은 떠나옴과 떠나감의 지정학적 좌표다. 가고 옴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떠남의 동질성은 불변이다. 떠남은 공간의 이동, 관계의 유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움직이지 않았는데 상대가 변하는 것 또한 떠남의 양태가 된다. 이런 떠남의 형식 가운데 시간만큼 야멸스러운 것은 없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이윽고 모든 것을 무화시킨다.

 

근근이 우리의 기억이 흘러 간 것 변해 버린 것을 환원 혹은 복원시켜보려고 시간의 통로 속에서 안간 힘을 쓰지만 부질없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역이 이런 안쓰러운 회억과 그 부질없음을 확인하는 공간으로 대체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회상과 과거 반추의 상관성으로 볼라치면 대도시의 역이건 산골 간이역이건 별반 차이가 없다. 전통적 농경사회의 몰락과 근대 산업사회 성립의 접합점에 철도가 있음은 누구나 아는 바다. 새로운 문명은 기존의 문명을 재빠르게 지우며 스스로 몸집을 불려가지만 그 또한 다가오는 새 문명의 먹잇감이 되게 마련이다.

- 본문 중에서

 

최  학

 

경북 경산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과 및 같은 대학 대학원 졸업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으로 문단 등단

1979년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 당선

현재 우송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

저서로는 「잠시 머무는 땅」「그물의 눈」「식구들의 세월」「손님」 등의 창작집과 「겨울 소나기」「안개울음」「서북풍」「미륵을 기다리며」「화담명월」 등의 장편소설이 있음. 그밖에 「배갈을 알아야 중국이 보인다」「니하오 난징」 등의 중국 관련 저서가 있음

jegang@yahoo.co.kr

 

|차례|

 

중앙선 간현역  간현역에서_ 김용진

경춘선 강촌역  눈 내리는 강촌역_ 김종익

경춘선 경강역  경강역에서_ 이기인

경부선 고모역  고모역_ 구상

태백선 고한역  검은 민들레_ 정호승

충북선 공전역  천둥산 박달재_ 오탁번

전라선 관촌역  간이역_ 송종찬

장항선 광천역  기차표를 끊으며_ 이정록

중앙선 구둔역  구둔역_ 설태수

전라선 구례구역  구례구역의 사랑노래_ 고재종

정선선 구절리역  구절리 바람소리_ 이향지

영동선 나한정역  스위치백_ 복효근

경춘선 남춘천역  남춘천역_ 전동균

경전선 남평역  사평역에서_ 곽재구

영동선 녹동역  녹동역_ 곽대근

중앙선 단양역  단양역 앞에서_ 백우선

경부선 대전역  대전역에서_ 양애경

장항선 대천역  장항선 열차를 타고_ 정완희

영동선 도경역  도경역_ 박선옥

장항선 도고역  도고 도고역_ 류외향

영동선 동점역  귀가_ 허만하

경춘선 마석역  파초우(芭焦雨)_ 조지훈

경부선 매포역  매포역_ 이은봉

경전선 명봉역  명봉역_ 박라연

중앙선 모량역  모량역_ 도광의

동해남부선 모화역  모화역에서_ 구광렬

호남선 몽탄역  몽탄역_ 박라연

경부선 물금역  물금역_ 박해수

경부선 밀양역  새벽 밀양역_ 전성호

호남선 백양사역  백양사역_ 이진명

경부선 병점역  병점(餠店)_ 최정례

부산지하철 하단역  하단역 지나며_ 강경주

경부선 부산역  2월에 쓴 시_ 홍수희

장항선 삽교역(수덕사역)  수덕사역_ 정호승

서울역  서울역_ 유안진

중앙선 석불역  석불역(石佛驛)_ 나희덕

경전선 석정리역  다시 석정역_ 김정호

수도권 전철 성북역  다시 성북역_ 강윤후

진해선 성주사역  성주사 간이역_ 정영자

수도권 전철 송내역  송내역에 내리면_ 김승동

중앙선 송포역  송포역에서_ 김찬일

경의선 수색역  수색역(水色驛)_ 이수익

경부선 수원역  수원역_ 박덕규

영동선 승부역  그 소리들_ 나희덕

경춘선 김유정역  나의 고향_ 김유정

전라선 신풍역  신풍역_ 도광의

정선선 아우라지역  아우라지 간이역_ 최동호

안산선 대야미역  대야미역_ 홍신선

전라선 압록역  압록역이라고 있다_ 김종제

영동선 양원역  양원역에 가면_ 강봉환

전라선 여수역  여수역_ 정호승

경부선 연화역  연화역을 지나며_ 이성렬

전라선 오수역  오수역에서_ 안도현

경부선 왜관역  비 내리는 왜관역에서_ 김찬일

경부선 원동역  원동역_ 강영환

동해남부선 월내역  월내(月內), 바다가 보이는 간이역_ 손태수

경의선 월롱역  월롱_ 김성대

경원선 월정리역  월정리역_ 정일남

경부선 유천역  유천역_ 이우걸

호남선 익산역  솜리정거장_ 심호택

서울교외선 일영역  일영역의 어둠_ 함동선

태백선 자미원역  자미원역_ 조정

영동선 정동진역  겨울 정동진에 가면_ 최동호

호남선 정주역  정주역_ 이장욱

경부선 조치원역  조치원_ 기형도

수도권 전철 주안역  주안역을 지나며_ 원동은

태백선 증산역  증산역에서_ 박영희

경원선 철원역  철원역에서_ 정호승

경부선 청도역  청도를 지나며_ 정희성

태백선 추전역  추전역_ 고은

영동선 통리역  통리역_ 황주경

경부선 평택역  평택역에서_ 조석구

동해남부선 포항역  포항 역전을 지나며_ 정건우

경전선 한림정역  한림정 역에서 잠이 들다_ 강현덕

호남선 함열역  함열을 지나며_ 김완하

경부선 황간역  _ 한성기

 

 

간현역에서

 

김용진

 

언젠가는 다시 찾으리라던

간현역

황혼 길에 찾아오니

 

무심한 세월 그 자리

구석구석엔

사람 냄새 풍기는데

 

강줄기 끼고 돌아가는

중앙선 열차는

숨 가쁘게 허덕이고

 

오가는 사람들

깊은 사연 품에 끼고

말없이 오르내리네

 

유유히 흐르는 섬강 중기

천년 두고 흘렀어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고

 

세월 낚는 태공들

숨죽이고 앉았는데

백로 한 쌍 날아간다.

 

 

 

고모역

 

구  상

 

고모역을 지나칠 양이면

어머니가 기다리신다.

대문 밖에 나오셔서 기다리신다.

이제는 아내보다도 별로 안 늙으신

그제 그 모습으로

38선 넘던 그 날 바래주시듯

행길까지 나오셔 기다리신다.

 

천방지축 하루 해를 보내고

책가방엔 빈 도시락을 쩔렁대며

통학차로 돌아오던 어릴 때처럼

이제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만큼이나

머리가 희어진 나를

역까지 나오셔 기다리신다.

 

이북 고향에 홀로 남으신 채

그 생사조차 모르는 어머니가

예까지 오셔서 기다리신다.

 

 

 

구둔역

 

설태수

 

간이역 모퉁이의 녹슨 철로

기차가 다니는 철길처럼

속살까지 부비며

달밤에도 빛나고 싶건만

그렇게 소멸되고 싶건만

버려진 철로는 바람과 비와 눈을

적막을 견딜 수 없어

소리 없이 제 몸 찔러가며

검붉게 사위어가고 있다

취한 듯 스러지고 있다

 

 

 

스위치백

 

복효근

 

기차가 앞만 보며 돌진한다고 말하지 말라 태백산을 넘어가는 기차를 타보았는가 동해 정동진에서 해돋이를 보기 위해 전라선 야간열차를 탔다가 기차가 영동선 흥전역에 들어서 갑자기 뒤쪽을 향해 거꾸로 되달릴 때 황당한 가슴을 어찌하지 못한 적이 있다 그러나, 한없이 물러섰던 기차가 다시 앞으로 치달아 영동선 흥전역과 나한정역 사이 태백 준령을 그렇게 지그재그로 넘는 걸 알고 다시 가슴을 쓸어내린 적이 있다 기차가 태백산을 넘는 방법, 스위치백이라고 하던가. 후진의 힘이 기차를 태백 너머로 밀어 올린다. 이제 어느 날 갑자기 나의 길이 나를 뒤로 끌고 갈 때 죽을 것처럼은 놀라지 않기로 한다. 기차를 타고 태백을 넘어보면 안다 깜깜한 가슴 깊이 처박힌 태양이 후진의 힘으로 산 너머 동해 저 너머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어둠 속에 깨어 퍼덕이는 정동진의 바닷새들도 스위치백으로 날아오른다.

 

 

 

도경역

 

박선옥

 

누구나 마음의 역 하나 지니고 사는가

키를 낮추며 들어간 세상의 막장에서

봉합된 시간을 뜯어보기에는

기억의 삽 끝이 너무 무디어 있다

 

한 번도 내게서 떠난 적이 없는 나

다시 돌아 갈 곳도 없는 삶의 간이역에서

추억을 유품처럼 챙기다가 털고 일어설 때

저마다 역 하나 지니고 사는 이유를

내 허물어져가는 얼굴에서 묻는다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의 간이역 하나 지니고 살아가는가

 

 

 

동점역

 

허만하

 

투명한 유리창이 거울이 되는 지점이 잇었다. 천천히 휘어지며 멀어져 가던 석포역 뒷모습과 도경을 지나서야 외로운 외등같이 모습을 드러내던 강원도 들머리 동점역 사이의 한 지점. 철거덕거리는 철교 건너는 소리가 조바심처럼 가슴에 울리던 산협의 짧은 구간. 이마를 차창에 기댄 채 한 사나이가 자기 얼굴 위에 겹치는 아내와 어린 두 딸의 기다림을 그림처런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지점. 윤곽을 잃어버린 먹빛 산덩이 헤치며 무수한 오렌지 빛 창이 아름다운 피리소리처럼 지나던 그 지점.

 

 

 

명봉역

 

박라연

 

역사의 느티나무도 조금,

6 · 25와 여순사건과 애주 사이에서 놓친

역 근처의 양조장도 조금,

안사 올 역장도

아버지를 기억할 역원도 없는데

호주머니 속 깊숙이 차표 감추시고

나가시려다 실랑이 벌이시던

시공(時空)도 조금,

 

산나물 장수 방물장수들의 노동을

통째로 사주시던

자네 밥 아직 안 먹었지? 내밀던

아버지 밥도 조금,

내 몫까지 함부로 인심을 써?

복(福) 한번 고파봐라, 신이 몸소

아버지 밥 다 가져가버린 것 같다는

 

어머니 세계관도 조금,

위치며 자태가

어진 아내 미안한 남편이어서

아버지 산소도 조금,

명봉역이다

 

명봉역을 MBC 베스트 극장에서

만난 날

화면 속의 느티나무더러

아버지! 불러본다

 

 

 

모량역

 

도광의

 

산수유꽃 개나리 하도 피어

역사(驛舍) 지붕도 노란꽃이 핀다

열차가 모량역을 지날 때

작은 못 수줍게 얼굴을 내미는

까치가 앉았다 날아가는 순간

나뭇가지 가늘게 떨리다가

찰방대는 못물에 잠긴다

산수유꽃 개나리 하도 피어

마을 지붕들도 노란꽃이 핀다

열차가 모량역을 지나면서

까치짐이 못물에 잠기면

박목월 선생을 생각하는

내 마음도 꽃이 피어 물에 잠긴다

 

 

모화역에서

 

구광렬

 

기다림이 있다는 건

사랑이 있다는 것

사랑 없인 하루도 힘든데,

오늘 철길따라 걷는다

 

떠난 기차는 정시에 돌아오지 않는가

그냥 스치어도 좋다

나, 사랑할 때 슬픔은 기억하나

외로움은 낯선데

오늘

모든 것 그리웁구나

 

내릴 사람 없고

반길 사람 없어도

기차를 보련다

너무나 그리워

기차라도 만나련다

 

 

 

몽탄역

 

박라연

 

밤 기차를 타본 사람은 안다

 

마음속엔 몇 개의 몽탄(夢灘)역이 있다는 것

역사 너머 저마다 연못 있다는 것

꿈으로나 만나보는

꿈이어서 다행인 풍경 있다는 것

옛날 그림자들 걸어 나와

구불구불한 생(生)의 왼편과 오른편에

달불을 켠다는 것

연꽃 눈 뜨는 순간의 떨림 수정으로

구른다는 것

앞마당에 목백일홍은 심지 마라

붉은 울음 빼내어 너, 주면 어쩔래

화룡점정(畵龍點睛)의 붓과는 눈 마주치지 마라

네, 속내 빼내어 화선지에 넣으면 어쩔래

어머니의 노래 끝날 무렵

만삭의 근심들 몸 푸는가

온몸에 반딧불 켜고 있는 저 허공

몽탄역!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

달불의 연기처럼 스며드는

지는 해도 문득 외박하고 싶어지는

첫사랑, 몽탄행(行) 열차에게

길은

꿈길뿐이라는 것

 

 

 

석불역(石佛驛)

 

나희덕

 

석불이라고는 잇을 것 같지 않은

작은 동네에 집이 세 채

 

그가 돌로부터 왔음을

불타는 돌이었음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모습으로

 

눈 녹는 역사 마당에

쓰러질 듯 서로를 고이고 잇는

연탄재들

 

기차가 석불역을 떠나려는 순간

나는 그를 알아보았다

 

소신공양을 끝내고 막 돋아나는 그 살빛!

 

 

 

송포역에서

 

김찬일

 

아직 열차 오지 않는다

어디쯤 오다가 바람에 져버린 꽃잎 싣고 있는지

빨간 잠자리 앉아 조는 여문 수수나무 몸짓에 눈 주고 있는지

이미 달려 온 길 되돌아 갈 수 없는 열차는 슬픈 가을처럼 달려 올 텐데

대합실에 앉아 기다리는 사람들은

가야할 길 흔들리는 코스모스 위로 나는

잠자리 따라 먼눈으로 그려 보는데 열차 오지 않는다

오지 않아도 그만일 완행열차는

송포역에서 흘러나오는 연착의 방송으로

안도하는 사람들의 기억 위로 달려오고 있다

이제는 가을빛 담은 보퉁이 머리에 이고

가슴 두근거리며 기다리는 사람들

열차는 시간을 떨어뜨리며

어디가 종점인지도 모를

기억의 언덕 넘어

가을 속 달려오는

송포역에서

 

 

 

그 소리들

 

나희덕

 

승부역에 가면

하늘도 세 평 꽃밭도 세 평

 

이 봉우리에서 저 봉우리로

구름 옮겨가는 소리

지붕이 지붕에게 중얼거리는 소리

그 소리에 뒤척이는 길 위로

모녀가 손잡고 마을을 내려오는 소리

발밑의 흙들이 자글거리는 소리

계곡물이 얼음장 건드리며 가는 소리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송아지

다시 고개 돌리고 여물 되새기는 소리

마른 꽃대들 싸르락거리는 소리

소리만 이야기하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겨울 승부역

그 소리들로 하염없이 붐비는

 

고요도 세 평

 

 

 

신풍역

 

도광의

 

익산과 목포를 오가던

통일호 열차

덕양역, 여천역, 미평역을 지나

하루 두 번 기차가 지나가면

바람도 아물아물 숨을 쉰다

19시 45분 막차가 출발하면

오고 가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

기차만 바다 곁에 머물다 떠나간다

 

 

 

압록역이라고 있

 

김종제

 

당신은 열차를 타고

저 윗동네 북녘의 어디 아닌

남도 땅을 휘돌아가다가

섬진강을 지켜보는

압록역에 닿을 수 있다

하루에 일곱 번 밖에 서지 않고

다섯 명도 채 타지 않는다는

빈손 같은 간이역이다

압록역에는 폐교처럼

사라져 가는 것만 있다

산안개처럼 떠나가는 것만 있다

여기가 나무 집결지였다

지게에 실려 온 놈에다

우마차에 끌려온 놈에다

뱃장 좋게 차 타고 온 놈까지

죄다 압록역에 모여 놓다가

서울로 올려보냈다

나무 대신 연탄을 땐다고

여기 모래가 최고 중의 최고라고

또 몽땅 서울로 실려 갔다

나를 먹여 살린 압록역이다

강도 흐르고 역도 흐르고

내가 또 압록역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데

베어지고 파냈던 상처도

압록의 강물로 흘러가고 있다

 

 

 

양원역에 가면

 

강봉환

 

눈과 귀와 가슴으로만 가야 하는 역이 있다 하늘 아래 땅이 있고

그리고 거기 역처럼 보이는

어쩌면 걸어서 가는 게 훪씬 나은 역이 있다

물어물어 찾아 와도 다시 갈 길이 먼 역이 있다

물 맑은 계곡에 손 한번 담그고 한참을 산야에 묻혀

그렇게 강줄기 따라 가야만 하는 역이 있다

좁은 길 따라 어르신에게 양보하며 물어 찾다보면

다리를 지나고 폐교분교를 지나 마치 성냥갑처럼

거기엔 간찬을 보고서야 겨우겨우 여기가 양원역임을…

번듯한 플랫폼 간판마저도 없는 간이역엔

주민들의 애환만이 서려있는 하늘아래 역이었다

철길 따라 걸어서 가는 게 왠지 편안한 양원역,

이 마을사람들이 지어 붙인 양원역이라는 간판부터

그렇게 보통사람들만의 역이 거기에 우뚝 서 있다

 

 

 

오수역에서

 

안도현

 

너의 아픔 곁에서

너의 아픔 속속들이 적시지 못할바에는

나, 서둘러 떠날란다

 

오수 발 서울행 새벽 기차 기적소리

 

 

 

월내(月內), 바다가 보이는 간이역

 

손택수

 

달 속에서 파도가 일렁인다

동해남부선이 가끔씩 철로보다 더 가늘고 긴

여운을 남기며 지나가는 간이역

지상에서 발톱을 다친 물새들이

하늘을 날고 있다 역사 가까운

초등학교 쪽에선 풍금소리가 새어나오고

풍금소리에 맞춰 개망초, 달개비, 참나리

고만고만한 꽃들이 하교길에

한눈을 팔며 놀고 있는 것도 보인다

돌담 위에는 푸른 고양이,

고양이 수염처럼 빳빳한 햇살이 설핏해졌다

선로보수 작업 중 잠시 머무는 동안

잠시 머물며 줄담배를 피우는 동안

달이 끄는 힘에 따라 내려선 눈

길은 플랫폼 벤치에 골똘히 앉아 있고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저 마을 어딘가에 생두부 한 모에

잔소주를 파는 민짜집이 있을 것이다

낮게 수그린 처마와 이마를 맞대고

틈틈이 손을 꺼내어 더운 음식을 주고받는

창문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믿음은 모두 저 바다 때문이다

고압선이 지직지직 달 속으로 들어간다

청어떼가 몰려온 바다, 어부의 집에서 나온

길 하나가 낚시줄처럼 팽팽하게 바다를 당긴다

바다가 먼저 신호처럼 집어등을 밝히면

집들도 따라 연연히 불을 켜고

둥근 불빛들이 내밀하게 속삭이며

살을 섞는 월내, 밤이면 배를 띄우리라

누군가 수심 위에 수심을 드리우며

지쳐나는 뭇새들이라도 쉬어가라

쉬어가라 수평선 위에 흐르는 불빛 하나를

내다 걸리라 한 번 빠져들면 좀처럼

빠져나올 수 없는 바다, 속으로 들어갈 수 없는

기차는 잘 알고 있다 다만 스치고 지나갈 뿐인

어디에도 머물 수 없는 자도

때로는 달의 인력을 이기지 못하고

저렇게 푸른 바다를 막막하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바다가 들려주는 소리에 속절없이

귀를 맡겨야 한다는 것을

달 속에서 풍금소리가 잦아든다

물새들이 느려터진 기차를 따라오다

멀어져 간다, 달빛 두 줄기만 남았다

 

 

 

자미원역

 

조  정

 

태백선 철도는 티베트선이라 불러도 좋습니다

기차가 서지 않는 플랫폼이 오백 년 된 양은냄비처럼

빛나는 소맷부리를 햇빛에 고스란히 내놓은 길목이 잇습니다

 

좁고 긴 의자는 드문드문 어깨가 벗겨져

빗소리에 쉬 젖거나

몸 무거운 새를 붙들고 안 놓아 주기도 합니다

심심한 철로를 혼자 두고 나올 수 없어서 놓친 버스가

가을 쪽으로 흘러가는 뒷모습을 따라

터널터널 터널 몇 개 여닫고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 이 길을 밟고 가면

비폭력 무저항으로 하늘을 사열 중인 포탈라 궁이 보입니다

 

고랭지 배추밭 비탈에는 울음 울 자리가 많습니다

증산역에서 하차하여 자미원역으로 돌아가

버스를 놓쳐야 합니다

사람이 내놓은 길에게 정 대신 눈물을 쏟아주고

마른 울음을 소리칠 자리만 많습니다

 

 

 

추전역

 

고  은

 

영동선 허위허위

해발 8백 55미터의 작은 역

너 누이야

석탄가루 날려

너하고 멜로드라마로 울며불며 헤어질 수도 없다

보아라 태백산 첩천한데

무엇하려고 십자가는 여기까지 와 솟아 있느냐

따라 모든 거룩한 말이여 너는 거짓말보다 못하다




통리역


황주경


눈 내리는 날

그대,

통리역에 내리면

미궁 같은 하얀 통속에 빠지리라

기차에서

지금 막 내린 사람이나

어디론가 떠나려는 사람, 모두

대합실을 마주보고 선 두 개의 문을 열어야

겨울을 밀봉한 통속 세상으로 들어 갈 수 있다

그곳에는 기차가 끌고 온 방황의 그림자가

배낭을 둘러멘 채 통속 세상을

낯설게 두리번거리고 있을 것이며

눈발을 몰고 다니는 하얀 바람은

시린 하모니카를 불며 통속으로 미끄러질 것이다

정신없이 빠져들며 두리번거리다

손이라도 잡아 주는 사람 하나 있다면

이미 당신은 돌아 나올 길을 잊었다는 얘기

만약 당신이 눈 내리는 날

통리역에 내리게 된다면

입구를 밀봉한 코르크 마개를 뗄 때부터

꼭 돌아올 길을 표시하여야 한다

그래야만 잊었던 아리아드네의 눈물을 더듬어

역사를 찾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한림정역


강현덕


낙동강 물안개에

질식이라도 했는지

한낮의 미루나무

눈도 뜨지 못한다

기차는 오지를 않고

철컥철컥 오지를 않고


긴 의자에 삐죽 나온

못 같은 나를 돌아보다

안개 속에 감추어 둔

나의 아침을 생각하다

한림정 작은 역사에 기대

널 꿈꾸려 잠들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