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황영찬

Tag

Notice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 total
  • today
  • yesterday
2018. 4. 16. 15:48 내가 읽은 책들/2018년도

2018-020 땅은 주검을 호락호락 받아주지 않는다

 

 

 

조은 시집

2007, 민음사

 

시흥시대야도서관

SB003259

 

811.6

조67 땅

 

조은의 시에서 전원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농촌과 다름없다. 글자 그대로 밭과 과수원이 있을 뿐이며, 더 있다면 "즐비한 돼지우리와 뒷간의 악취" 같은 것들에 친화력이 강한 그의 의식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시에서 드러나는 것은 전원일 수 없는 전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강한 친화력에 이끌려 시 속에 고개를 내밀고 있는 전원적 사물들의 모습이다. 작품의 곳곳에 산재해 있는 이러한 정황들을 단순히 잘 그려진 이미지로만 읽을 때, 우리는 조은의 시에서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전원적 사물들은 대부분의 시에서 그려지듯 농촌의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차용된 것이 아니며 순수한 자연도 아니다. 그것은 보다 포괄적이고 인간과 함께 살고 또 살아 있는 존재이다. 더 자세히 적자면 조은의 시 쓰기는 전원 지향의 정신으로 자기 회복, 또는 자기 수정을 위한 운동이다.

- 오규원(시인)

 

조은

1960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1988년 《세계의 문학》에 시 「땅은 주검을 호락호락 받아 주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 『무덤을 맴도는 이유』, 『따뜻한 흙』과 산문집 『벼랑에서 살다』, 『조용한 열정』 등이 있다.

 

自序

 

지하철 속에서, 만원 버스 속에서, 밀리며 출구를 찾지 못하며 하루를 시작한다.몸만 부딪치는 (아, 정신은 다 어쩌고) 밀폐된 공간 속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계, 그런 세계가 있다면, 정녕 잇기만 하다면, 이곳의 몸과 마음이 이보다는 편하리라.

 

내게 서툰 사랑의 흔적들을 남길 수 있게 해 준 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1991년 3월

조은

 

차례

 

自序

 

1

지금은 비가...

오늘은

과수원에서

전원일기(田園一期) 1

전원일기(田園一期) 2

전원일기(田園一期) 3

전원일기(田園一期) 4

산이 무너지고...

그가 여는 문에는

빈 달

겨울나무

파꽃

그는 햇볕이 봄눈만큼 짧게 남은 도시를

병(病)

사람들

밤이 덮은 나무들은 밤보다 더 어둡고

반란처럼



2

땅은 주검을 호락호락 받아 주지 않는다

그늘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눈이 내리고 1

눈이 내리고 2

눈이 내리고 3

쓰레기 하치장 1

쓰레기 하치장 2

쓰레기 하치장 3

장관(壯觀)

망월동에서

마이산에서

나를 멈추게 하며

원자력 병원



3

시(詩)

사물(四物)

사랑의 위력으로

폭우

웃을 때마다 물이

소용돌이

이곳이 왜 이리 시끄러운가

십자가

그림

저녁 무렵

유토피아처럼

오늘은 어디로

고립된 우리는 각각 고립되어

지독한 이 어둠보다 더 무서운

민들레 꽃

밤안개

바다

보름달

노을

지금 이 순간처럼

비 오는 풍경에서부터

전설처럼

꽃을 꺾다가

사진 속에는

해당화가 피고

부석사(浮石寺)

3월

남해 기행

 

작품 해설 / 오규원

물과 벼랑

 

전원일기(田園一期) 1

 

  그곳으로 옮기는 이삿짐을 꾸리며 가족들은 평화로운 날들이 주렁주렁 열리리라 믿었다. 즐비한 돼지우리와 뒷간 악취도 신비롭던 그 봄 잡목 숲을 일궈 과실나무를 심었다. 어린 과실나무가 빗물을 걸러 먹는 소리를 들으며 우리의 낮잠은 달고 깊었다. 빗물에는 삭정이들만 떠내려갔다. 야산을 감싼 꽃잎은 넓었고 인근 비행장을 이륙하는 비행기 소리에 비탈의 도라지 밭이 세상을 희끗희끗 열었다. 아버지는 포클레인이 작업을 하고 있는 곳으로 가며 저수지에서 발을 씻었다. 아버지의 물살이 저수지에 가득 찼다. 멀리서 보는 아버지는 잔잔히 굽이쳐 산 하나를 넘어갔다.

 

 

  그가 가는 곳으로 아치형의 길이 닫혔다. 산의 원래 모습은 저런 것일까. 도깨비바늘이 파고드는 그의 살 속에서 친숙한 말들이 수더분히 떨어졌다. 습한 웃음이 날아 올랐다. 우리는 멈춰 상수리나무를 흔들었다. 쉬고 싶은 씨앗들이 우루루 일어섰다. 숲이 끝나는 곳에서는 언제나 빛이 온전했다. 나뭇잎에 묻힌 그와 내 몸이 우연히 빛났다. 지층에 섞이는 산 그림자. 숲을 타고앉은 태양이 어두워지도록 우리는 가을 산에 말려들었다. 간혹 뒤쳐진 그가 보이지 않았다. 허기진 들짐승의 울음소리를 흘리며 산이 몸을 뒤척였다. 산은 우리를 동요하며 며칠을 쉴 새없이 비워지고 잇었다.

 

마이산에서

- 악화되며 나를 덮쳐 오는 의혹이여. 그는 무엇을 굳게 믿어 이 많은

  돌들을 탑의 이름으로 재웠는가

 

관광버스 몇 대분의 사람들이 돌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일찍이 산을

굴러 내린 돌덩이들이 받쳐 든 탑의 몸체가

사진기를 들이대는 사람들 머릿속에 음지를 만든다

산을 불리는 스피커의 목탁 소리

바람도 헛발을 디뎠을 이 산 아래서

내가 마시는 물에는 짙은 흙냄새가 난다

(그를 잠그던 정적이 깊었으리라)

저 바람에 쓸리는 풀들의 몸뚱이 위로

번쩍번쩍 들리는 풀들의 눈빛처럼

돌탑을 쌓았을 사람의 그때 그 믿음처럼

탑들은 오늘도 아슬하고 견고하다

관광객의 말소리 사이로 물이 바위를 미는 소리

낮게 낮게 들려오고

그 어디서 날아오르는 새

새가 날아간 곳으로 나무들은 쉬지 않고 가지를 뻗는다

꽃이 피는 기척에 돌아보면

우는가 썩는가 잠잠한 꽃송이들 초목들

(그를 잠그던 정적이 깊었으리라)

돌탑들은 오늘도 견고하다

그대 삶의 골격이여

숨어 있는 의미여

 

민들레 꽃

 

가랑이 사이에 묻혀 있던 그녀의 얼굴이 들린다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태양의 귀도가 그녀 쪽으로 바뀐다

먼 곳으로 질주하던 바람이 급하게 멈췄다가

가던 길을 장악한다 이 순간에도 길이 있는

그곳에 부지런히 때를 입히는 수많은 별들 때문에

길은 한결같이 양끝이 흐리다

그곳으로부터 억만 년 오고 가는 사람들과 태양은

그늘을 왕성하게 늘어뜨리고 대지는

그 아래서 힘껏 육신을 굴리고

누렇게 뜬 그녀의 얼굴 위로

세상이 한동안 오묘하게 정지한다

 

날아가리라!

죽음마저 신선하지 않은 고인 물속 같은

이 밝은 평화를 버리고

산산이 부서지고

가벼워져

 

땅은 주검을 호락호락 받아 주지 않는다

 

흙 속 뿌리가 삽을 물고 놓아 주질 않는다.

흘 속 돌들이 삽을 물고 놓아 주질 않는다.

그의 주검 곁 방향을 잃은 개미들 등으로

잡풀 그림자가 희끗희끗 옮겨 다니고

우리를 받아 뼈를 앉힐 땅도

주검을 호락호락 받아 주지 않는다. 않는다. 않는다.

만물은 저마다 제 눈을 뜨고

하늘이 겨운 그림자를 낮은 곳에 널어 말린다.

울음이 삶에 쉬 섞이지 않는 이 순간

까치와 쓰르라미 개밥풀 둥근 나무의 많은 나뭇가지

개구리 파리 벌 모두 어우러져 바람을 일구고

부러진 나뭇가지 마른 잎에도 쉬고 있는 생물이 보인다.

바람이 빗기는 산. 그는 누워 있고

내일도 정직할 모습은 주검뿐인가.

산을 올라오는 것들이 모래로 날린다.

구석에 이렇듯 묻혀야 할 우리의 몸뚱이와

주검이 이토록 밋밋해서

이다지도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인가. 알 수 없는 우리는

가면서 어디로 휘청거리는 것인가.

흘 속 뿌리는 삽을 물고 놓아 주질 않고

허공에 빠진 내 손은 무겁고 공허하고

다시 보는 하늘도 강도 허공에 머리를 두고 신음하는구나.

세상은 우리의 그 무엇도 섣불리 받아 주지 않고

아카시아가 긁은 내 팔에 지금 고이는 것

살아 있는 것에는 눈물만 질벅하고

 

산이 무너지고

 

1

그는 섬기던

산이 무너진 곳에 밭을 일구었다

깊고 깊은 지평선에는 모래가 날리고

교회의 첨탑만을 내밀고 마을은 숨어 있다

바람이 지나간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반전하는

목화밭이 깊은 샘물처럼 깨끗하다

 

2

어둠이 진흙처럼 차 들어온다

목화송이는 제 의지대로 흔들리지 않는다

별도 비어 있다

새 우는 소리가 사막보다 깊다

두고 온 가족처럼 닿고 싶은 경지처럼 마을은

가깝고도 머얼고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흙에

밤의 한구석이 반짝거린다

 

 

  우리가 발을 디딜 때마다 숲이 깊어진다. 둥치 큰 나무의 나이테와 뿌리를 따라 걷다가 우리는 나무 속으로 뛰어든다. 혹이 많은 바람이 지나간다. 누가 웃을 때 줄기이며 기우는 해에 매달리고 바람은 숲에서 굽은 것을 구부린다. 숲은 때로 숫돌처럼 번들거린다. 흥이 많은 사람들은 얏호! 야앗호! 허연 뿌리를 내놓은 몇 그루 나무가 보이는 비탈 아래 풀들이 허리까지 두리번거린다. 나무들이 하늘을 이룬 숲에서는 어둠은 나뭇가지나 풀잎 끝을 둥글리며 숲을 저벅저벅 걸어 다닌다. 누구의 손을 따라 우리들의 허리가 아래 마을의 입구까지 굽는다. 언덕을 내려가는 우리들의 다리에 붉은 흙이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다. 돌아보니 숲은 왜소하다. 아, 숲으로 날아가는 새들이 신기하다.

 

반란처럼

 

소 한 마리가 어둠이 모이는 개울을 건너옵니다

소가 지나온 들판은 어둠을 몰고 사방으로 몸을 젖힙니다

명랑하게 들리던 아이들의 웃음이

소의 발길마다 걸려 첨벙거립니다

길게 소가 울 때마다 달빛이 우수수 우수수

내가 없는 세상으로 이탈합니다

바람은 이 세상과 쟁기처럼 부딪치며 물속으로 가라앉고

어둠을 비끄러매며 별들은 차고 단단합니다

아이들 눈빛이 총총한 별에 걸려 헉헉거립니다

소 한 마리가 개울에서 물을 먹고 있습니다

굳어 있던 모래밭이 소의 등을 넘어 이곳으로 기울고

어두운 물의 걸림돌로 소는 멈춰 있습니다

뒷숲 벌레 울음이 낭자합니다

삐그덕거리는 문소리가 고조되고

소 한 마리가 개울을 건너옵니다

반란처럼 제 외양간으로

 

전원일기(田園一期) 2

 

연일 폭락하는 값에 판매를 위탁한 과일이 실려 나가고

아버지가 뿌리치는 밥상이 마당에서 우주처럼 돌았다

아버지의 분노는 나뭇가지 끝으로 치달았다

농한 과일들이 마당까지 굴러 와

그곳의 아버지를 자극했다

발길이 끊긴 이웃에서 날아오는 웃음과

된장 냄새를 따라다니는 내 모습이 서러워 올랴보는 하늘에서

흙바람이 일어 나를 가두었다

밤마다 부엌에서 범죄처럼 소리 죽여 밥을 먹어도

밥을 먹고 물을 마셔도 아버지와 공유하는 허기 속에는

어둠만 깊이 물살 쳤다

암울하게 굴러가는 세상을 발목에 차고 마당에 서서 보면

아버지의 그림자가 문에 꽉 끼어 날마다 신음했다

늑골에 박힌 내 별이 불길하게 떨었다

새벽부터 아버지의 방 앞을 뒹구는 과일을 쓸어 모아

돼지우리에 처넣는 나를 피해 동네 사람들은

발소리를 줄여 들판으로 갔다

 

시(詩)

 

왜 이렇게 정강이 뼈가 덜그럭거릴까

혼자

문밖에 나와 앉는다

고향보다 친숙한 어둠의

새로 돋은 떡잎을 뜯어내며

네게로 가는 길 구석구석마다 불빛을 내거는

이 축축한 발광(發光)

이 축축한 풍요

아아 문득

저 먼 곳으로부터 못 박혀 오는

석탄같이 아득한 파도 소리

왜 이렇게 정강이 뼈가 덜그럭거릴까

오늘 이 밤이 천국만큼 멀다

 

웃을 때마다 물이

 

물이 빠진다 웃을 때마다

몸에 고인 한 모금의 물마저

빠진다 웃을 때마다

웃고 있는 나의 정강이께로

흙이 올라오며 철렁거린다

 

물의 충혈된 눈을 아무데서나

불쑥불쑥 보는 내가

이렇게 힘겹게 흙의 결을 풀고

빌등을 뚫고 올라오는 이 매운 삶의

돌부리를 뽑아 던지고 있는 건가

내가 물로 내려 낮게

타오르고 있는 건가

 

물이 맑은 뿌리를 내 몸에 담그고 바다

멀리까지 이어진 것도 같고

내 몸에 머리를

두고 있는 것도 같고

늙은 저 농부의 주름이 깊은 골을 따라오며

샘이 얕은 나를 꿰뚫는 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

사막처럼

 

3월

 

바람이 핼쑥하다

타고 있는 사람들의 발걸음

숨은 향기가 분수 같다

급소를 때리는 빗줄기

비틀대는 땅

산란기의 연어 떼처럼 거슬러 오르는

그녀는

물방울로 굴러 내린다

착각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이 낯익어 보인다

 

 

  우리는 꿈틀거리는 안개 망 위로 머리를 필사적으로 들어올린다 안개가 목을 비트는 이곳에서 마주치는 우리들 눈빛은 빳빳한 지느러미를 일으켜 함께 침잠하다 불쑥불쑥 멈춘다 형체도 삭아 버린 대지를 쓰다듬으며 물소리가 안개 속에서 파문을 일으킨다. 그때마다 우리들 머리 위로 키를 돋우며 안개망이 좁혀지고 우리들 몸에서도 물 흐르는 소리가 신비하게 고조된다 문득 안개가 가린 오늘 이 세상이 너무도 명료하다

 

그늘

 

숲을 서성거린다.

숲은 하늘이 얼룩진 허공에서 뿌리를 틀고 있다.

바람은 본능으로 숲을 밟고 지나간다.

(숲이 거대하면 두려움이 거대하다)

문득문득 떨어져 나가는 나뭇가지를 물고

세상은 언덕 너머 너머

 

우리들 몸은 그늘로 꽉 차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거대하게 부풀며 숲은 한 몸같이

꿈틀거린다. 비대한 물소리를 따라 도는

풀들의 얽힌 허리 또한 난무하고

이곳에서 풀들은 일생 동안 정수리가 날카롭다.

멈춰 있는 물처럼 이토록 몸이 굳어 나는

한순간도 숲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늘만 일렁이며 눈빛을 바꾼다.

당신과 내가 만날 때는 그늘이 겹쳐진다.

 

태양은 오늘도 머리맡에 단내를 풍기고

하늘은 퇴색한 채

얼마나 완고하게 과거로 기우는지

하늘이 누렇게 탈색된 허공 속에는

드물게 뻗는 크고 울퉁불퉁한 뿌리에 부딪쳐

온종일 추락하는 것들과 그 아래로

썩고 있는 새의 주검들.

경직된 몸은 천천히 회전하며

깊고 더러운 것들을 뿌리로 감으며

 

밤이 덮은 나무들은 밤보다 더 어둡고

 

  돌 하나를 주웠다. 비 내리는 철로 변에 별처럼 젖어 있었다. 기차가 반원을 그리며 지나간 뒤에도 오랫동안 돌들은 덜그럭거렸다. 바람이 뒤에서 불어오고 꽃들이 몸을 놓아 버리고 떨어지는 그곳을 걸어 그린밸트를 지나고 다리를 건너고 이곳에 올 때까지 정말 별처럼. 반짝반짝 어둠을 균열시키며 돌들이 아직도 제 몸에 물 가두는 소리. 돌 속 술렁이는 소리. 젖은 새들이 낮게 낮게 이동하던 그 철로 변이 뒤척인다. 밤이 덮은 나무들은 밤보다 더 어둡고

 

사물(四物)

 

1 비

 

풀잎과 풀잎

사이가 헐거워진다 선인장 가시에 빗방울

찔린다 한 방울…… 두 방울…… 여섯

방울이 꿰이기 전에 떨어진다 이미

하나의 물방울 되어

웅덩이를

적시며 물이 차오르는 동안

흘러넘치지 않는다 우리의 물

 

2 꽃

 

바다, 작은 모래알들이 바다를 밀고 와서 해변에다 눕혔다

 

모래의 틈 속으로 이어진 좁은 길을 더듬으며 한 사람이 파도를 따라갔다

 

바다가 잡아당기고 간 모래의 귀뿌리를 따라 귀 밝은 사람들은 사람 사이로 오는구나

 

따로 남아 울다가 울음을 그치고 토하는 모래 한 줌에 향기가 났다

 

3 강

 

내리는 진눈깨비 사이로 가늘게

강이 흐른다

버스에서 내려 난감한

내 앞에서 강은

배회하는 진눈깨비를 거머쥐며

무디고 날쌔게 자신을 넓힌다

강면의 마른 집들을

움켜쥐고 한 발 더 앞으로 뻗어 나간다

 

가장 낮은 자세로

성숙하는

강의 저 율동

 

강을 찾아 모여드는 사람들

시선 밖 멀리까지

강물이 차오른다

둥. 둥. 둥. 둥둥둥둥둥둥둥둥

수평선이 처얼썩 하늘에 걸쳐진다

 

막 펼쳐 내는 첫 장의 꽃잎

그런 전류가 천지에 흐르고

마을 전체가 기름방울

하나의 무게로 떠오른다

 

진눈깨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4 반도

 

노을이 씨방처럼 터진다

뒤척이는 나무들

뿌리 그 여린 끝으로 더듬어 내는

절벽 같은 희망이 반도(半島)의 빈 가지마다

고개를 내밀고

수그리고

반도의 빈 들에서

새 한 마리 날아오른다

반도가 육중하게 자유로워진다

이윽고 미끄러지듯

미끄러지듯 자전하는 지구

 

오늘은

 

  고구마의 전분, 사람의 피, 소의 젖, 그런 것들이 별로 보인 오늘은 나의 하늘이 나를 짓이겼습니다. 하늘의 별, 사람의 눈, 나무의 잎사귀, 뿌리, 가지, 돌멩이 모두 흘러들어 허둥대는 나를 짓이겼습니다. 하늘이 마구 흘러내렸습니다.

 

  힘겹게 강을 건너온 바람이 너덜거리는 손가락만 보이고 짚단처럼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벌판의 한 그루 나무가 무너지는 하늘을 받치고 나의 이마로 걸어왔습니다.

 

  종일 별이 나를 끌어 큰 산맥을 떠넘기고 나는 냇가 바위처럼 가라앉았습니다. 가라앉아 차갑게 타고 있었습니다.

 

쓰레기 하치장 2

 

멀지 않은 곳에서 밤 기차가 교차한다.

잡역부들은 폐품을 던지며 불기둥을 높이고

연기가 들어 올리는 늘 그 하늘이

오늘따라 적막하다

어둠 속으로 주춤주춤 들어앉는 사물들 곁으로

뜸한 행인에게로 마른 풀숲으로 간간이

신화(神話)처럼 불씨가 날아온다.

 

화덕 위 라면이 끓고 있다.

뒤틀린 나의 이 하루가 몰고 오는 허기 속에는

어둠만 쌓여 묵직하고 날아와

내 몸에 앉았던 시간들이 트럭의 진동에

일어선다. 허술한 제복의 인부들은

쓰레기 더미를 중심으로 흩러지고 모이고 저들의

땀과 저들의 호흡과 저들의 희망과 반죽되면 그것들이

쓰레기 하치장을 둘러치고 빨갛게 달고 있다.

 

별들이 어느새 날카롭다.

어둠 속 내게로 이 도시의 허리로 빈 깡통 하나가 굴러내리며

흔히 널려 잇을 풀씨들을 깨운다. 빈 깡통 하나가

명멸하는 이곳의 어둠을 낮게 베며 뒹군다.

내가 서성거리는 곳에는

달도 없이 별만 날카롭다. 바람도.

번호가 매겨진 리어카들도 빈 나무의 뿌리도 어둠에 깔려 있고

쓰레기 더미에서 가려져 따로 놓여 있는

안락의자, 팔레트, 밤색 구두 한 켤레

 

병(病)

 

  (그는 그의 그림자에 끌려 혼자 그들을 떠나왔다 그들이 가고 있는 그곳은 떠나온 나의 확신 때문에 갈수록 불완(不完)했다)

 

  사람들의 눈빛이 그의 골수 속에서 날을 세우고 있었다.

 

  높은 산 그림자가 흩어지며 어른거렸다. 별이 우두둑 우두둑 으스러지는 그의 혼을 떠밀며 사람들이 내달렸다. 숨 가쁘게 포개지는 그들의 어깨는 신명난 들개처럼 별빛을 토막 쳤다.

 

  길은자궁속까지사람들을끌고들어가

  수렁같은칭찬을아끼지않았다

  그길의탯줄을말아쥔사람들의

  다리가살찌고있었다

 

  제구실을 못 하는 새벽 그의 뜰에는 날개를 접은 새떼. 버석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연일 그의 뜰로 흘러들었다. 먼지가 앉은 꽃들은 속절없이 떨어졌다. 우우우 무섭게 달이 벙그는 그의 밤은 넓어져

 

쓰레기 하치장 3

- 태양이 불순하게 떠오른다 환청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숨소리는 거칠고

 

저들의 아이들은 이 둑길을 걸어 학교로 갔으리라

고여 있는 세상처럼

어제의 그 자리에서 태양은 지글거리고

저들의 웃음은 풍만한 햇볓에 눌려 눅눅하고 차갑다

어제도 또 오늘도

기이하게 그림자가 닳고 있는

버섯 같은 날들이 밑도 없이 넘치는

 

오늘도 어디로

 

꽃이 지고

피기도 하는 이 밤에 벽이

울리는 기침을 누가 자꾸 한다

개 짖는 소리

흐르는 전류와 취한의 노래

자동차 급 브레이크

사이 사이로

벽이 울리도록 누가 기침을 한다

 

둥둥 떠 있는 선인장 꽃

떠 있는 지붕들

(위험하다!)

나뭇잎들은 뒹굴며 낮은 곳으로 몰리고

어제의 무수한 별들은 한순간도

제힘으로 스러지지 않고 오늘도

착각인가 한 무리의 그림자가

별을 펄쩍펄쩍 넘나든다

(위험하다!)

 

어둠을 풍차처럼 돌리며

한 무리의 사람들은 잠 속에서 어디로 가는가

알 수 없어라

밤이 다시 아침으로 발전하는 것

 

꽃이 지고

피기도 하는 이 밤에 벽이

울리는 기침을 누가 자꾸한다

 

유토피아처럼

 

유토피아처럼 과일 가게는 철거반에게 헐리고

새로 지은 상가의 층계는 말쑥하다

아파트로 들어가는 치량들과 삶이

즐거운 부인들이 구경하는 데서 냄비와 물통과 문짝과

딸아이의 속옷까지

맥어ㅓㅄ이 끌려 나와 ㄴㄹ블지는데

대단하다 정말 수차례 당해 ㅂㄴ 사람처럼

 

담담하게

두 딸과 남편의 도시락을 오늘 아침에도

꾸려 주는 저 아주머니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집을 짓는다.

철근을 넣고 모래를 거르고

꿈처럼 벽돌을 키워 올린다.

외딴 섬벽을 기어오르는 바닷물이 저들의

온몸에서 번들거린다.

무더운 팔에 햇빛이 엉기고

굽은 등으로 걸터앉는 하늘

하늘에 가려 먼 곳이 안 보인다.

판넬과 모래를 실은 트럭을 몇 차례 비켜서며

터무니없이 나는 왜 오그라드는지.

풀꽃은 왜떨어지는지.

바람은 왜 서는지.

꽃은 떨어져 어디를 찌그러뜨리고

신호등 앞 볏단같이 묶인 사람들이 보이는 이곳

무더운 바람이 범람하는 변두리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집을 짓는다.

시멘트 포대 쓸데없는 철사 토막

여자들도 보이고

하늘을 흩으며 가는 장화가 용기보다

외롭다. 질고 삐뚤은 바닥을 딛고 선 저들

하늘이 잠시 들먹거린다.

이 한낮 공사장

주변에서도 나는

하늘에 가려 먼 곳이 안 보이고

 

사랑의 위력으로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당신들의 말마다 모래가 날고 있다 언제나 이곳이 가파른 때문인가 내 곁에 쌓인 모래들만 비탈져 오늘도 반짝인다 지쳐 누운 낙타인가 이 모래언덕을 허물며 버둥대는 저것은 나를 꿈꾸게 할 것들은 수시로 문을 걸고 꺽꺽 울고 어두운 곳에선 별을 치부처럼 들추며 날렵하게 당신들의 달이 살찐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이 세상에서 사랑의 위력으로 날고 있는 모래의 말들아

  사랑이 깊고 깊어 내가 있는 곳으로 올라오지 못하는

 

이곳이 왜 이리 시끄러운가

 

몸 한 부위에 별을 달고 사람들이 딸랑딸랑 스쳐 간다

우왕좌왕하는 아이들의 날갯죽지가 암표처럼

불편하다 몇몇 아이들은

몸을 별 모양으로 오그리고

그림자를 몸속에 찔러 넣고

 

십자가

 

(멀리 가서 바람처럼

풀리고 싶어)

 

눈물도 은혜다

웃으며 웃으며 타오르는

저 뜨거운 망초 꽃

언젠가 다락방엔

쥐들마저 가고

손가락 한 마디도 포개지지 않는

그 피뢰침에는

별이 찔렸다

 

저녁 무렵

 

1

서너 마리 참새가 올라앉은 빨랫줄이

아무래도 땅에 닿을 듯하다

사람과 사람의 터울 사이로

치석(齒石) 같은 어둠이 깔리고

죄 없는 바람 한 자락

빨래줄을 지나가며 두 동강이 난다

무수한 바람의 허리를 뚝뚝

꺾어 버리는 우직한 사람들의 어깨선이

차츰 둥글어진다

얼핏

진화(進化)되지 않는 슬픔의 무게보다

가깝게 별이 보인다

 

2

모세의 머리털 같은 구름 한 자락에

노을이 가려져 잇다

거리마다 골목마다 주인처럼

검은 소 떼가 몰려오고

부채의 손잡이 방향으로 귀가하는 사람들

아무도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어디에 가서

돌이 되어 바람을 굴절시키는

단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으려나

천천히, 천천히 나는

돌들의 눈 속으로 차 들어가

 

사람들

 

  살아 있는 절망들이 엮이고 숲을 이룹니다. 하늘의 중심을 찌그러뜨리며 평야처럼 숲이 넓어집니다. 무덤 같은 정의가 즐비한 숲의 질서를 돌아가 보십시오. 설움이 마디마다 묻어 찐득거립니다.

 

바다

 

반짝이는 모래들은 모두 말라 있다.

물이 가까워 더욱 마른 모래들

 

빛을 확장하는 모래밭 위로 새들이

가까운 죽음처럼 어른거린다.

 

지구를 감고 도는 느린 물줄기 곁에서

모래층을 바꾸며 휘청이는 우리들의 다리에

가까운 무인도가 덫처럼 걸린다.

바다는 늘 이곳에 있다.

 

우리들 낮은 곳의 모래층을 적시며

명쾌하게 새를 날리기도 하면서

바다는

늘 이곳에 있다.

 

남해 기행

 

길어지는 섬 그림자

허리를 슬며

안개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어둠이 몸을 풀며

뒤따라오고 있었다

 

바다에서 배 안에서

벽인 창을 사이에 두고

바라보는 바다

 

바다에서도 나는

나를 가두고

두드리고 끌고 끝내

뜨거운 저 안개로도

바닷물로도

숨구멍 하나 터주지 못했다

 

멀어질수록 서둘러

가까워지는 육지

바다보다 앞서 가는 어선들

 

문득

먼 미래의 물살이

빙산을 밀고 오는지

바다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뱃머리가 흔들릴 때마다

바다의 기류가 바뀌고 있었다

 

안개가 두려운

창자 속에 섬을 하나씩 채워넣고

배는 십계명처럼

우리를 끌고

 

돌아가는 우리들

그림자가

우리들의 무릎에서 안타깝게

잠들고 잇었다

 

지금은 비가 ……

 

  벼랑에서 만나자. 부디 그곳에서 웃어 주고 악수도 벼랑에서 목숨처럼 해 다오ㅗ. 그러면 난ㄴ 노루 피를 짜서 네 입에 부어 줄까 한다.

 

  아, 기적같이

  부르고 다니는 발길 속으로

  지금은 비가 ……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