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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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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4. 30. 17:50 내가 읽은 책들/2018년도

2018-023 온갖 것들의 낮

 

 

 

유계영 시집

2016, 민음사

 

대야도서관

SB110693

 

811.7

민67ㅁ  216

 

민음의 시 216

 

어떤 시인은 세계 내에 견고한 집을 지으려 하고, 어떤 시인은 세계의 옥타브 밖으로 나아가려 한다. 유계영은 물론 후자 쪽이다. 영혼의 패턴이나 생각의 알고리즘에서 일탈하는 문장들, 섬세한 불확실성을 통해 진실에 닿으려는 행간들……

하지만 여기까지만 말하면 되는 것일까? 그런 시들은 이미 충분히 많지 않은가? 이런 질문과 함께 머뭇거린다면, 우리는 유계영의 시를 아직 덜 읽은 것인지도 모른다. 속이 보이는 심해어처럼 유연한 문장들을 덜 느낀 것인지도 모른다.

이 스타카토 풍의 불안과 공포를, 시간과 공간이 어긋나는 건조한 밤을, 입체파 회화처럼 단절되면서 동시에 연결되는 몸과 얼굴 들을, 아직 덜 살아 낸 것인지도 모른다. 특유의 미니멀한 호흡 속에서, 세계가 팽창하기 시작한다.

-이장욱(시인)

 

 

유계영

 

1985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으며

2010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으로 등단했다.

 

당신은 무엇으로도 얼굴을 가리지 않은 채 날 본다

나는 달아날 수 없을 만큼만 뻗는 다리로 날 본다

 

2015년 가을

유계영

 


차 례

 

1부

 

시작은 코스모스

유리

내일의 처세술

모형

생각의자

퍼니스트 홈 비디오

생활의 발견

 

2부

 

뛰는 사람

출구

호랑의 눈

상온을 기준으로

하루 종일 반복할 수 있는 일에 대한 목록

지그재그

에그

일요일에 분명하고 월요일에 사라지는 월요일

아이스크림

니진스키

 

3부

 

복화술사

생일 카드 받겠지

잠 속의 잠

빛나는 토르소

늑대

오래된 오렌지

휴일

불이야

암막 커튼으로 이루어진 장면 묘사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중이야

배우 훈련

일주일

오늘은 나의 날

구름이나

 

4부

 

위하여

오가 죽는 세계

안개 풍경

큰소리로 울어라

곡예사

새벽 시간

내일의 토모

룰루는 조르조트의 개

재연 배우 모모

눈 천사가 지워진 자리

한 줄로 서기

온갖 것들의 낮

콩소메 맛

발가락들

사월

악필 연습

식육

녹는점

 

작품 해설 ┃ 양경언

큰 소리로, 훗!

 

지그재그

 

레이디는 상자에서 빠져나오며 마술에 대해 생각했다

 

미치기 직전의 상태로 끝까지 살아가는 식물처럼

나는 아프고 너는 지켜보기만 했는데

너를 좋아해서 웃어만 지는 얼굴

 

잘려 나간 팔다리가 식어 가는 동안에도

몸에서는 부드러운 털이 자라났지

 

모자 속의 토끼

사과 속의 코끼리 같은

순진한 준비물과

대괄호가 많은 아이들의 말속에서

레이디는 죽었다 살았다를 반복했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무릎이

명상의 밧줄처럼 잘 땋여

거기 남았다

우린 모두 그가 다녀온 공간을 위로하고 있다

 

레이디는 상자에서 빠져나오며 마술에 대해 생각했다

통증으로만 구성된 꿈을 꾸었다는 듯이

이 놀라운 상자를

마술사에게도 만들어 주겠다고 생각했다

 

내일의 처세술

 

옷소매 속에서 자라나는 병든 팔

밤은 파이프 모양의 긴 겨드랑이

 

대재앙 오 초 전

마주 앉은 사람들 일부러 크게 웃는다

 

창밖을 서성이는 짐승과 눈 마주치면

 

가장 오래 사는 물 영원한 물 썩어도 이로운 물

사람들은 물의 자세를 배우기 위해 눕고

그 위에 눕는다

 

복면을 쓴 등 뒤의 어둠

빛을 믿는 사람만을 겁준다

 

모두 달라지고 아무도 망하지 않는 꿈

창문이 있던 벽의 흰 자리를 짚어 본다

 

광대버섯의 연기

 

쓰레기 더미 속에서 자라나는 쓰레기

먹다 남긴 태양

 

천천히 말을 해

운동장의 흐린 햇살 위에 아이들이 벗어 놓은 가발

이곳에선 모두 농아가 된다

 

공기 속의 말을 떨어뜨리지 않는 신체 훈련

다 할 수 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가 좋다

 

퍼니스트 홈 비디오

 

고양이가 도넛처럼 요염하게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고

나를 보는 일

고양이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뒷목이 뻣뻣해지는 것이로구나

생각하는 일

 

염하려다

다시 살아난 아버지

자주 뒷목을 잡곤 했던 일

아버지 한 번 더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의 유머 감각에 감탄하는 일

거리의 보도불록에서 밟은 껌을

집안까지 끌고 들어오는 일

죽음까지 끌고 가는 일

 

공 앞에서 아주 잠깐 애국하고

다시 저주하는 일

같은 채도의 사방연속꽃무늬

꽃무늬의 방에서 벌어지는 일

 

아버지가 도넉처럼 요염하게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고

나를 보는 일

용서를 빌 때는 반말이 좋다는 걸 깨닫는 일

 

대부분의 코미디가

운 나쁜 캐릭터의 수치심으로 마무리되는 일

 

새벽 시간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여자애들이

플라스틱처럼 반짝였다

빨갛게 부어오른 귀를 만지면서

청과상의 열매들 속니를 부딪치고

가끔은 놀라운 소리가 났다

버려진 개들이 살던 집을 기억해 내려고

자꾸만 꿈속을 밟고 다녔다

칭찬 끝에 남겨진 표정과 같이

아무도 고갤 들지 못했고

 

젖먹이들은 얼굴을 달게 절이느라

일찍 잠에서 깼다

 

아이스크림

 

거리의 모든 사람들아

너는 벗겨지고 흰 깃발이 드러난다

너는 벗겨지고 바깥에서 문 잠그는 소리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

너희가 잠자코만 있어 준다면

미래에서 온 시간 여행자의 귀를 만져 본다면

이런 느낌일 거야

 

방향을 멈춘 깃발의 긴장

너도 나도 다 가진 비밀이라면

난 다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봐, 이렇게 쉬운 평화

 

거리의 모든 사람들아

너는 외계의 메시지이고

너는 우주와의 시차이다

양산 속의 꽃무늬가 지르는 비명 때문에

나는 인상을 쓰고야 만다

 

우리가 사랑한 계절에는

아무 이름도 붙일 수 없는 것

태양이면서도 태양이 아닌 것 때로는

태양이기만 한 것

바깥으로 통하는 문이 녹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온갖 것들의 낮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요

하나의 의문으로

 

빨강에서 검정까지

경사면에서 묘지까지

항문에서 시작해 입술까지를

공원이라 불렀다

 

바람이 불자 화분이 넘어졌다

화분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고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어제 탔던 남자를 오늘도 탔다

내가 누구인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어제 먹어 치운 빵을 태양이 등에 업고

나는 태양을 등에 업고

너는 나를 등에 업고

비둘기가 아주 잠깐 날아올랐지만

 

층층이 흔들렸다

공원의 한낮이 우르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날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집으로 돌아갔다

 

 

바람이 자신의 주술을 주머니에 차고 온다

먼눈에게 어둠은 가장 평범한 장소

노인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을 때를 대비해

가까운 물건의 이름을 자꾸 불러 본다

살든 죽든 무엇이든 두렵지 않다

 

노인의 아이는 빨간 모과를 줍고

노인의 아이는 화가를 만나네

노인의 아이는 태양을 그리며

 

바람은 수면 위에서 갈증을 씻는다

깎아 놓은 모과가 검어진다

그건 너무 오래 칼을 노려본 탓

 

오늘이 불편하면 내일을 기다리면 된다

주머니에 차고 온 술병을 무덤 위에 붓는다

 

암막 커튼으로 이루어진 장면 묘사

 

얼굴을 감싸고 선 나는

곁눈 속에서만 사는 귀신이 가장 두렵다

자기 색을 내는 편이 좋겠지

하지만 그들은 없는 색, 나쁜 색

 

커다란 밤이 날개를 젓고 있다

 

정말 투명해

천사의 쌍꺼풀처럼

가려움증 앓는 불빛들로 창밖은 가득해

 

곁눈으로 내 코를 쳐다보면

처음 본 얼굴이 길게 누워 있다

만지고 싶어서 손을 뻗으나

수수한 외투를 걸치고 불룩해진 테두리

수많은 도형이 몸을 내밀고 있다

 

그래도 가장 슬픈 건 나의 죽음일 것이다

 

하루 종일 반복할 수 있는 일에 대한 목록

 

나는 점성촌의 개

나는 점성촌의 젖은 개

밤은 오해로부터 내린다

 

살찐 여자의 배 둘레처럼 아래로 흐르는 시간

밤이 찢어진 발바닥을 내린다

낙과와 신을 가려낼 수 있는

지면 위로 내린다

 

너는 언 빨래의 몽유병

빨랬줄에 걸린 해의 고민을 내린다

어린이를 벗는 어린이가 말한다

 

비가 온다

 

우리는 찢을 수 있어

익사한 몸들이 걸터앉은 물결을

몸의 질서를 벗어난 뼈의 잠영을

찢을 수 있어

 

우리는 어제 태어난 개의 꿈을 꾼다

 

에그

 

깃발보다 가볍게 펄럭이는 깃발의 그림자

깃에 기대어 죽는 바람의 명장면

 

새는 뜻하지 않게 키우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은

알아서 찾아왔다는 사실이다

창밖의 무례한 아침처럼

그러니까 다가올 키스처럼

어떻게 두어도 자연스럽지 않은 혀의 위치처럼

새는 뜻하지 않게 시작된 것이다

 

새가 머무는 날

홀쭉한 빛줄기에 매달리는 어둠을 쪼며

짧게 나누어 지는 잠

 

그런 잠은 싫었던 거야

삼백육십오 일 유려한 발목의 처녀처럼

하나의 목숨으론 모자라

죽음은 탄생보다 부드러운 과정

 

새는 알을 남기고 간 것이다

나는 알을 처음 본 게 아니지만

곧 태어날 새는 어미를 전혀 알지 못한다

알 속의 혀가 입술의 위치를 짚어 보는

그런 명장면

 

일요일에 분명하고 월요일에 사라지는 월요일

 

3과 4의 사이

강물은 신발을 모은다

여름의 집에 불을 지르고 온

가을의 유령들이 모인다

나는 자꾸 깨닫는 사람

눈과 눈 사이를 찌를 수 있도록

물결을 평평히 눌러 두었다

 

0과 1의 사이

천사는 자신이 거대한 태아라는 사실이 싫다

고작 이런 대우나 받으려고 착하게 산 게 아니야

통통한 발을 벗어 버리고

차라리

 

괴물이 되고 싶어 하는 건 우리뿐

 

9와 0의 사이

극락조 : 부리를 머금고 발을 꺾어 신은 새

유령 : 어둠에 기댄 것처럼 서 있기

오늘도 해가 두 발로 지지만

 

0과 1의 사이

바늘의 말투를 훔치려다 비가 되었다

말 없는 사람들이 돌을 던지러 강가로 몰려왔다

유령들은 강의 괘를 따르며 빠른 노래를 불렀다

 

생일 카드 받겠지

 

예뻐지고 싶은데

아무 때고 울음이 났다

공중화장살의 변기 위에서

밥숟가락의 무게를 고민하는 식탁 앞에서

왜 하필 교회의 첨탑 위에서

달력 속의 월요일을 헤아리면서

철면피처럼

 

괜찮은 부모를 가졌다는 건

게으름에 대한 핑계가 부족해지는 일

왜 하필 옮겨 적을 수 없는 나무의 독설처럼

사려 깊을까 어머니

 

아침은 그렇게 오는 게 아니죠

모퉁이를 돌 때마다 열리는 새로운 골목의 끝에

내가 발가벗고 서 있는 거예요

아침은 그렇게 밝는 거예요

 

나는 오늘 태어났고

내일은 손 닿지 않는 곳의 가려움을 견디는 재미

내년이면 나도

생일 카드 받겠지

 

눈 천사가 지워진 자리

 

난간에 걸터앉은 아이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누운 해골이 포개지고 있어

 

검음이라 부르던 개가 있었다

새끼에게 뒷다리를 물려 죽은 검음

땅이 일어 삽날이 구겨졌다

나는 검음을 공터에 내던지고

돌아오며 발꿈치가 아팠다

 

숨을 참고 눈을 뜨지 않는 것

팔다리를 가지런히 놓고 꼼짝하지 않는 것

내가 연습한 죽은의 구체

냉장고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상해 가는 밑반찬들

 

누군가 나를 흔든다면

엎드려 자던 가축의 네 다리처럼

갑자기 나타나 보여 주는 것

혓바닥의 모래처럼 뜨거워지는 것

안경알을 찌르는 빛이 되는 것

 

수면 위로 올라가

천연덕스럽게 눈을 뜨고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를 아는지

우리가 연습한 놀이의 이름을

알고 있는지

 

생각의자

 

불가능해요 그건 안 돼요

간밤에 얼굴이 더 심심해졌어요

 

너를 나라고 생각한 기간이 있었다

 

몸은 도무지 아름다운 구석이라곤 없는데

나는 내 몸을 생각할 때마다 아름다움에 놀랐다

 

나는 고작 허리부터 발끝까지의 나무를 생각할 수 있다

냉동육처럼 활발한 비밀을 간직한 나무의 하반긴을 생각할 수 있다

 

나무의 상반신은 구름이 되고 없다

 

어떤 나무의 꽃말은 까다로움이다

 

사람들은 하루를 스물네 마디로 잘라 둔 뒤부터

공평하게 우울을 나눠 가졌다

나는 나도 아닌데

왜 너를 나라고 생각했을까

 

의자를 열고 들어가 앉자

늙은 여자가 날 떠났다

나는 더 오래 늙기 위한 새 의자를 고른다

나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정의를 내리려고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