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책들/2011년도

2011-126 공문의 사람들

황영찬 2011. 11. 22. 08:28
2011-126 공문의 사람들

김덕균 지음
2004, 논형



시흥시대야도서관
EM042087


152.21
김241공


스승은 제자를 만들고 제자는 스승을 만든다


공자와 그 제자들의 사상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를 수천 년간 사로잡았다.
『논어』는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어렵기도 하지만
재밌기도 하다. 원문을 고집하면 어렵지만,
다양한 상상력을 동원하면 흥미로워진다.
공자의 제자들은 각계각층을 망라하고 있다.
그들의 캐릭터를 살펴보면 『논어』만큼 재밌는 책도 없다.
공자의 수제자 안연은 현대적 안목에서는 예스맨이다.
가장 갑갑한 사람이다. 용기가 출중하고 정의로웠던 자로는
스승 공자에게 유일하게 노라고 대답할 수 있었던 제자이다.
주변에서 공자보다 칭송 받았던 자공은
오늘날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여겨진다.
공자와 그 제자들은 파란만장한 대화를 통해
다양한 인생의 파노라마를 보여주며, 우리에게 다양한
학문의 세계를 가르쳐 준다.


지은이 김덕균金德均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으로 중국 산동사회과학원 박사후과정(Post-Doc)을 수료하였다.
1991년부터 성균관대, 중앙대, 동덕여대, 한국예술종합학교, 감신대, 협성대, 대전대, 유한대에서 강의하다가 중국산동사범대학 외국인교수, 산동사회과학원 연구학자, 서일대학 교양과 교수를 역임하고, 지금은 성산효도대학원대학교 효학과 주임교수로 재직중이다.
공저로는 『현대중국의 모색』(동녘),『왕양명철학연구』(청계),『동양철학의 자연과 인간』(아세아문화사),『동양사상』(전통문화연구회), 『정보기술사회의 윤리매뉴얼』(서광사),『儒家傳統與人權 · 民主思想』(齊魯書社, ※中文板)이 있고, 역주서로 『명이대방록』(제41회 백상출판문화상 번역부문 수상작, 한길사),『잠서』(한국학술진흥재단 동서양명저번역 지원사업, 소명)와 번역본으로 『중국봉건사회의 정치사상』(동녘)이 있다. 그밖에 효학, 양명학, 실학 등 관련분야의 연구논문 30여 편이 있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논어』「위정」)


 ▲ 공자성적도(孔子聖蹟圖)

▲ 공자의 고향 곡부(曲阜) 니산(尼山)

▲ 행단(杏壇)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장소

 목차

저자서문
천리마와 파리
수많은 제자들
끼니는 굶어도 학문을 좋아했던 안연
의리의 사나이 자로
스승보다 높게 평가된 자공
소극적이었지만 약삭빨랐던 염구
말 많고 비판적이었던 재여
겁쟁이면서도 효자였던 증삼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썼던 자유
정렬이 넘쳤던 자장
대기만성형 자하
독야청청했던 민자건
군주감으로서의 중궁
말 많고 근심 많던 사마우
공자집안의 가신 원헌
전과자이면서도 공자의 사위로 선택된 공야장
능력있고 근실해서 조카사위로 삼은 남궁괄
군자 자천
인정받았지만 벼슬을 사양한 칠조개
삐딱했던 자금
공자의 운전기사 번지
스승 공자의 외모를 닮았던 유약
덕행이 뛰어났으나 몹쓸 병에 걸린 염백우
시세파악능력이 뛰어났던 자고
품격있는 예절로 손님을 대접하던 공서화
낭만이 넘쳤던 증석
자식 사랑이 절절했던 안로
스승의 잘못을 전달한 무마기
청렴하였던 담대멸명
욕심 많은 신장
동료를 헐뜯은 공백료
참고자료

▲ 중국 곡부의 대성전(大成殿)

▲ 공자와 안연 앞선 사람이 공자이고 뒤가 안연이다.(先聖小像)

 끼니는 굶어도 학문을 좋아했던 안연

안연(顔淵, B.C. 521~490)의 이름은 회(回)이고, 자는 자연(子淵), 혹은 안연, 존칭해서 안자(顔子)라 한다. 자타가 공인하는 공자의 수제자였다. 공자보다 30세 연하이고, 29세때 머리가 세었으며, 31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628년 당나라 시절 선사(先師)로 추존된 이후 739년 연공(兗公), 1009년 송나라 때 연국공(兗國公), 1330년 원나라 때 연국복성공(兗國復聖公), 1530년 명나라 때 복성(復聖)이라 추봉되었다. 시호를 통해서도 명실공히 공자의 수제자였음을 알게 된다.

 『논어』 속으로…

 공자가 말했다. "안연은 나와 하루종일 마주앉아 공부할 때 듣고 만 있었다. 그래서 난 저가 어리석은 바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물러가 행동하는 것을 보았더니 내가 가르친 것을 제대로 실천하였다. 안연은 절대로 어리석은 바보가 아니다." (子曰 : 吾與回言終日, 不違如愚. 退而省其私, 亦足以發. 回也不愚. 「爲政」)

 공자가 안연에게 말했다. "기용하면 나아가 행동하고 버리면 은둔하는 것은 오직 너와 나만이 할 수 있을 뿐이다." (子謂顔淵曰, 用之則行, 舍之則藏, 惟我與爾有是夫. 「述而」)

 애공이 물었다. "당신의 제자가운데 누가 가장 학문하는 것을 좋아합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안연이란 자는 배우기를 좋아하고,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으며, 잘못을 거듭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는 단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없으니 아직 학문을 좋아하는 제자가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哀公問 : 弟子孰爲好學? 孔子對曰 : 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 「雍也」)

 공자가 말했다. "안연은 그 마음이 3개월 동안 인을 떠나지 않았고, 나머지 제자들은 한 달에 한번 정도만 인에 이를 뿐이었다." (子曰 " 回也, 其心三月不違仁, 其餘則日月至焉而已矣. 「옹야」)

 공자가 말했다. "어질구나 안연이여! 밥 한 그릇과 물 한 바가지로 누추한 곳에서 사는 것을 다른 사람같으면 그것을 근심하며 견디지 못할 터인데, 안연은 그 즐거움을 변치 않으니 어질구나 안연이여!" (子曰 : 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 回也! 「옹야」)

 공자가 말했다. "안연은 나의 어떠한 말에도 기뻐하지 않음이 없으니 나를 도와주지 않는 사람이다." (子曰 : 回也非助我者也, 於吾言無所不說. 「先進」)

 공자가 말했다. "안연은 (진리를 깨우친데) 가까이 갔지만, 끼니를 자주 굶었다." (子曰 : 回也其庶乎, 屢空. 「先進」)

 공자가 말했다. "(진리를) 알려주면 게을리 하지 않는 자는 안연일 뿐이다." (子曰 : 語之而不惰者, 其回也與! 「子罕」)

 의리의 사나이 자로

자로(子路, B.C. 542~480)의 성은 중(仲), 이름은 유(由), 자가 자로, 혹 계로(季路)라고도 했다. 공자보다 9세 연하로 제자중 최고 연장자였다. 노나라 변(卞), 지금이 산동성 사수현(泗水縣) 천림(泉林) 사람이다. 공문십철의 한사람. 739년 위후(衛侯), 1009년 송나라 때 하내후(河內侯), 그 뒤 위공(衛公)으로 추봉되었다.

▲ 공자가 태산을 지날 때 폭정에 시달려 울고 있는 여인을 보고 자로와 자공 등 제자들에게 "가혹한 정치가 호랑이보다 무섭다(苛政猛於虎)"고 말하는 장면.(泰山問政)

 『논어』 속으로…

 자로가 말했다. "선생님께서 삼군을 통솔하신다면 누구와 함께 하시겠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으려 하고, 맨몸으로 강을 건너려다 죽어도 후회함이 없는 자와는 함께 하지 않겠다. 반드시 일을 할 때에는 두려워할 줄도 알고, 일을 잘 도모할 줄도 알아서 성공하게끔 만드는 자와 함께 하겠다." (子路曰 : 子行三軍, 則誰與? 子曰 : 暴虎馮河, 死而無悔者, 吾不與也. 必也臨事而懼, 好謀而成者也. 「述而」)

 공자가 말했다. "자로야! 내가 너에게 안다는 것에 대해서 가르쳐 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 아는 것이다." (子曰 : 由! 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爲政」)

 공자가 말했다. "진리가 행해지지 않으니, 내 뗏목을 타고 바다를 항해하려 한다. 이 때 나를 따라올 사람은 아마 자로 뿐일 것이다." 자로가 스 소릴 듣고는 기뻐하였다. 그러자 공자가 말했다. "넌 용기는 나보다 나을지 모르지만 사리를 헤아려 맞게 하는 분별력은 한참 떨어진다." (子曰 : 道不行, 乘桴浮干海, 從我者其由與? 子路聞之喜. 子曰 : 由也好勇過我, 無所取材. 「公冶長」)

 맹무백이 물었다. "자로는 인한 사람입니까?" 공자가 대답햇다. "모르겠다." 다시 (맹무백이) 묻자, 공자가 대답햇다. "자로는 천승의 나라에서 군사를 다스리게 할 수는 있지만, 인한 지는 잘 모르겠다." (孟武伯問 : 子路仁乎? 子曰 : 不知也, 又問, 子曰 : 由也, 千乘之國, 可使治其賦也, 不知其仁也. 「공야장」)

 공자가 말했다. "자로가 비파소리를 어찌해서 내 문안에서 연주하는가?" 문인들이 자로를 불경하게 생각하자 공자가 말했다. "자로는 당에는 올랐지만 아직 방에는 들어오지 못했다." (由之瑟, 奚爲於丘之門. 門人, 不敬子路. 子曰, 由也, 升堂矣, 未入於室也. 「선진」)

 "자로는 거칠다." (由也, 喭. 「선진」)

 공자가 말했다. "내 나이가 너희들보다 많다해서 나를 어렵게 여기지 말라. 너희들이 평소에 말하기를 '나를 알아주지 못한다'고 하는데, 만일 혹시라도 알아준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자로가 경솔하게 대답하였다. "천승의 제후국이 강대국사이에 끼어 간섭을 받으며 전쟁의 위협이 가해져 그 때문에 기근이 들었다 하더라도 제가 그 나라를 다스리면 3년 안에 위축된 백성들을 용맹스럽게 하고, 또 의리를 실천하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공자가 살며시 웃었다. (子曰 : 以吾一日 長乎爾, 毋吾以也. 居則曰 : 不吾知也! 如或知爾, 則何以哉? 子路率爾而對曰 : 千乘之國, 攝乎大國之間, 加之以師旅, 因之以饑饉 ; 由也爲之, 比及三年, 可使有勇, 且知方也, 夫子哂之. 「선진」)

 자로가 물었다. "군자도 용맹을 좋아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군자는 의를 소중하게 여긴다. 군자가 용맹한 것만을 좋아하고 의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세상을 어지럽히게 되고, 소인이 용맹한 것만을 좋아하고 의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도적이 된다." (子路曰 : 君子尙勇乎? 子曰 : 君子義以爲上. 君子有勇而無義爲亂, 小人有勇而無義爲盜. 「陽貨」)

 공자가 말했다. "한마디 말로 송사를 결단할 수 있는 사람은 자로일 것이다. 자로는 승낙하는 것을 묵히지 않았다." (子曰, 片言可以折獄者, 其由也與. 子路, 無宿諾. 「顔淵」)

 자로는 좋은 말을 듣고 아직 미처 실천하지 못했으면 혹시나 다른 말을 들을까 두려워하였다. (子路, 有聞, 未之能行, 唯恐有聞. 「公冶長」)

 공자가 음란하기로 소문난 남자를 만나자 자로가 화를 내었다. 그러자 공자가 맹세하며 말했다. "내 맹세코 잘못된 짓을 하였다면 하늘이 나를 버리실 것이다. 하늘이 나를 버리실 것이다." (子見南子, 子路不說. 夫子矢之曰 : 予所否者, 天厭之! 天厭之! 「옹야」)

 스승보다 높게 평가된 자공

자공(子貢, B.C. 520~?)의 성은 단목(端木)이고, 명은 사(賜), 자가 자공이다. 위(衛, 지금의 하남)나라 사람이다. 공자보다 31세 연하라고 전한다. 공문십철의 한사람. 739년 당나라 때 려후(黎侯), 1009년 송나라 때 려양공(黎陽公), 려공(黎公)으로 추봉되었다.

▲ 만인궁장(萬仞宮牆) 곡부성(曲阜城)의 남문(南門)으로 자공이 스승 공자를 높이 추앙하며 한 만인(萬仞)을 상징하는 담장.

▲ 대성전 용기둥(龍柱)과 현판 생민미유(生民未有) 용무늬는 황제와 황제에 준하는 성인에게만 부여된 특권이고, 그 자리에 오른 공자를 "후대에 태어난 사람가운데 아직 이런 이는 없었다(生民未有)"고 칭송한 현판

▲ 공자 사후 3년상을 치른 제자들이 각기 고향으로 돌아갔고, 그 후에도 무덤 주위를 지키며 살던 사람들이 100여호나 되었다. (治任別歸)

▲ 공자 사후 보통 제자들이 3년상을 치뤘지만 자공만이 홀로남아 3년을 더한 3년상을 치룬 묘막 앞에 자공이 손수 심었다는 해나무(子貢水植楷)

 『논어』 속으로…

 자공이 물었다. "가난하면서 아첨함이 없고, 부유하면서 교만함이 없다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햇다. "괜찮다.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며, 부자이면서도 예의를 좋아하는 자만은 못하다." (子貢曰 :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學而」)

 공자가 말했다. "자공과 더불어 비로소 시를 논할 수 있게 되었구나. 지나간 것을 말해 주자 다가 오는 것을 아는 구나."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知來者, 「학이」)

 숙손무숙이 조정에서 대부들에게 말했다. "자공이 공자보다 낫다." 자복경백이 이 말을 자공에게 일러주자 자공이 말했다. "나의 담장은 겨우 어깨 정도 만한 높이에 지나지 않다. 그래서 누구나 짐안의 좋은 것들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런데 선생님의 담장은 여러 길이나 되어 도저히 볼 수 없다. 그래서 그 문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집안의 아름다운 모습과 수많은 사람들의 오가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 그런데 그 문안으로 들어가 이를 볼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러니 숙손무숙의 말이 또한 당연하지 않겠는가." (叔孫武叔語大夫於朝, 曰 : 子貢賢於仲尼. 子服景伯以告子貢. 子貢曰 : 警之宮牆, 賜之牆也及肩, 窺見室家之好. 夫子之牆數仞, 不得其門而入, 不見宗廟之美, 百官之富. 得其門者或寡矣, 夫子之云, 不亦宜乎! 「자장」)

 숙손무숙이 공자를 비난하며 헐뜯자 자공이 말했다. "그렇게 하지 말라. 공자는 비난할 수 없다. 보통 사람들의 똑똑함은 언덕과 같아서 넘을 수 있지만, 공자는 해와 달과 같아서 넘을 수 없다. 사람들이 비록 스스로 관계를 끊고자 하여도 어떻게 해와 달이 같아서 넘을 수 없다. 사람들이 비록 스스로 관계를 끊고자 하여도 어떻게 해와 달이 해가 되겠는가? 다만 자기의 분수를 알지 못함을 보일 뿐이다.." (叔孫武叔毁仲尼. 子貢曰 : 無以爲也, 仲尼不可毁也. 他人之賢者, 丘陵也, 猶可踰也 ; 仲尼, 日月也, 無得而踰焉. 人雖欲自絶, 其何傷於日月乎? 多見其不知量也! 「자장」)

 자공이 고유제를 지내면서 바치는 희생양을 없애려고 하였다. 그러자 공자가 말했다. "너는 그 양을 아까워하느냐" 나는 예를 아까워한다." (子貢, 欲去告朔之餼羊, 子曰 : 賜也, 爾愛其禮. 「八佾」)

 공자가 말했다. "자공은 천명을 받지 않았는데도 재산을 늘렸다. 억측하면 자주 맞았다." (賜不愛命而貨殖焉, 億則屢中. 「先進」)

 소극적이었지만 약삭빨랐던 염구

염구(冉求, B.C. 522~489)는 자가 자유(子有), 혹은 염유(冉有)라 했다.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 29세 아래로, 염백우(冉伯牛, 冉耕) · 중궁(仲弓, 冉雍)과는 가족관계이다. 공문십철의 한사람. 안연 · 자로 · 자공과 함께 공자의 주요 제자 4명으로 공자의 유랑 14년간 동행하였다.  739년 당나라 때 서후(徐侯), 1009년 송나라 때 팽성공(彭城公), 그 뒤 서공(徐公)으로 추봉되었다.

 『논어』 속으로…

 (공자가 만일 너희를 써준다면 어찌하겠는가 라고 묻자 염구가 대답하였다) "사방960~70리, 혹은 50~60리쯤 되는 작은 나라를 제가 다스리게 된다면 3년 안에 백성들을 풍족하게 해 줄 수 있으며, 그 예악과 같은 것은 군자를 기다렸다 맡기겠습니다." (方六七十, 如五六十, 求也爲之, 比及三年, 可使足民. 如其禮樂, 以俟君子. 「선진」)

 염구가 말했다. "제가 선생님의 가르침9道)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힘이 부족할 따름입니다." 공자가 말했다. "힘이 부족한 사람은 할 수 있는데 까지 해보고 포기하지만, 너는 그것조차 하지 않는다. 너는 스스로 한계를 긋는 것이다." (冉求曰 : 非不說子之道, 力不足也. 子曰 : 力不足者, 中道而廢, 今女畵. 「옹야」)

 계씨가 주공보다 부유하였는데도 염구는 그를 위해 가혹하게 세금을 거둬들여 재산을 더 늘려주었다. 공자가 말했다. "염구는 이제 우리 무리가 아니니, 애들아! 북을 울려 죄를 성토함이 옳다." (季氏富於周公, 而求也爲之聚斂而附益之. 子曰 : 非吾徒也. 小子鳴鼓而攻之, 可也. 「선진」)

 "염구는 숫자만 채우는 신하라고 말할 수 있다." (求也, 可謂具臣矣. 「선진」)

 "염구는 천 가구 정도 되는 큰 마을이나 백승정도의 경대부 집안에서 관리 노릇할 수는 있지만, 인 한지는 잘 모르겠다." (求也, 千室之邑, 百乘之家, 可使爲之宰也, 不知其仁也. 「공야장」)

 "염구는 다재다능하기 때문에 정치에 종사하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求也藝, 於徒政乎何有. 「옹야」)

 말 많고 비판적이었던 재여

재여(宰予, B.C. 522~458)는 자가 자아(子我), 혹 재아(宰我)라고도 하였다. 739년 당나라 때 제후(齊侯), 1009년 송나라 때 임치공(臨菑公), 제공(齊公)이라 추봉하였다.

 『논어』 속으로…

 재여가 낮잠을 자자 공자가 말했다. "썩은 나무로는 조각할 수 없고, 썩은 흙으로 만든 담장은 흙손질 할 수 없다. 내가 재여를 꾸짖어봤자 무엇하리요!" (宰予畵寢. 子曰 : 朽木不可雕也, 糞土之牆不可杇也, 於予與何誅. 「공양장」)

 공자가 말했다. "전에는 사람들의 말을 단지 듣기만 하고 그들이 그것을 실행할 것으로 믿었으나, 지금은 말하는 것을 듣고 동시에 그 행동을 관찰한다. 재여와의 경험때문에 이렇게 변한 것이다." (子曰 : 始吾於人也, 聽其言而信其行 ; 今吾於人也, 聽其言而觀其行, 於予與改是. 「공야장」)

 재여가 물었다. "인자는 비록 우물에 사람이 빠졌다 말해 주더라도 (우물에 빠진 사람을 구제하고자 하여) 따라서 우물에 들어갈 것입니다." 공자가 말했다. "어찌 그렇게 하겠는가? 군자를 (우물까지) 가게 할 수는 있으나 빠지게 할 수는 없다. (이치에 있는 말로) 속일 수는 있으나, (터무니없는 말로) 속일 수는 없을 것이다." (宰我問曰 : 仁者, 雖告之曰 : 井有仁焉, 其從之也? 子曰 : 何爲其然也? 君子可逝也, 不可陷也 ; 可欺也, 不可罔也. 「옹야」)

재여가 물었다. "3년상은 너무 길다고 생각합니다. 군자가 3년 동안 예를 시행하지 않으면 예가 반드시 무너지고, 3년 동안 음악을 익히지 않으면 음악이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묵은 곡식은 다 없어지고 새 곡식이 오르며, 불씨 만드는 나무도 바뀌어지니, 1년이면 그런대로 족할 것 같습니다." 공자가 대답했다. "(3년상을 치르지 않고서도) 쌀밥을 먹고 비단 옷을 입는 것이 너는 편안하냐?" 재여가 대답했다. "예, 편안합니다." 공자가 말했다. "네가 편안하면 너는 그렇게 해라. 군자가 상을 당하면 맛있는 것을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하며,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으며, 거처함에 편안하지 않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인데, 네가 편안하면 너는 그렇게 하거라." 재여가 나가자 공자가 말했다. "재여의 인하지 못함이여! 자식은 태어나서 3년이 지난 뒤에야 부모의 품을 벗어나게 된다. 3년상은 온천하의 공통된 상례인데, 재여에게도 그 부모에게서 받은 3년의 사랑이 있었는가?" (宰我問 : 三年之喪, 期已久矣. 君子三年不爲禮, 禮必壞 ; 三年不爲樂, 樂必崩. 舊穀旣沒, 新穀旣升, 鑽燧改火, 期可已矣. 子曰 : 食夫稻, 衣夫錦, 於女安乎? 曰 : 安. 女安則爲之! 夫君子之居喪, 食旨不甘, 聞樂不樂, 居處不安, 故不爲也. 今女安, 則爲之! 宰我出. 子曰 : 予之不仁也! 子生三年, 然後免於父母之懷. 夫三年之喪, 天下之通喪也. 予也有三年之愛於其父母乎? 「양화」)

 애공이 재여에게 토지신 제사에 쓰는 위패의 나무종류에 대해 묻자 재여가 대답했다. "하후씨는 소나무를 심어 사주로 사용하였고, 은나라 사람들은 잣나무를 사용하였고, 주나라 사람들은 밤나무를 사용하였으니, (밤나무를 사용한 이유는) 백성들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하려고 해서였습니다." (哀公問社於宰我. 宰我對曰 : 夏后氏以松, 殷人以柏, 周人以栗, 曰使民戰栗. 「팔일」)

 겁쟁이면서도 효자였던 증삼

증삼(曾參, B.C. 505~436)은 남무성(南武城)사람으로 자는 자여(子輿)이고, 공자보다 46세 연하였다. 668년 당나라 때 태자소보(太子少保), 739년에 성백(郕伯), 1009년 송나라 때 성후(郕侯), 1111년 무성후(武城侯), 1267년 성국공(郕國公), 1330년 원나라 때 성국종성공(郕國宗聖公)으로 추봉되었고, 대대로 추존되면서 스승 공자보다는 못하지만 '종성(宗聖)'이란 칭호를 받았다.

 『논어』 속으로…

 "증삼은 아둔한 인간이다." (參也, 魯. 「선진」)

 공자가 말했다. "나의 도는 하나로 꿰뚫고 있노라." 증삼이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공자가 나가자 증삼에게 문인들이 물었다. "무슨 말입니까?" 증삼이 대답했다. "선생님의 도는 충과 서일 뿐이다." (子曰 : 參乎! 吾道一以貫之. 曾子曰 : 唯. 子出. 門人問曰 : 何謂也? 曾子曰 :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이인」)

 증자가 말했다. "선비는 넓고 굳세지 않을 수 없다. 임무는 막중한데 갈 길은 멀구나!" (曾子曰 :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태백」)

 증자가 말했다. "나는 하루에 세 가지로 나를 돌아본다. 남을 위해 일을 도모하는데 충성스럽지 않았는가? 친구와 사귀는데 성실하지 않았는가? 스승에게서 전수 받은 것을 복습하지 않았는가? (曾子曰 : 吾日三省吾身 :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학이」)

 증자가 말했다. "마지막을 삼가하며 잘하고, 오래 전에 돌아가신 분을 잘 추모하면 백성의 덕은 후한 데로 돌아간다. (曾子曰 : 愼終追遠, 民德歸厚矣. 「학이」)"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썼던 자유

오(吳)나라 출신인 자유(子游, B.C. 506~?)의 성은 언(言)이고, 이름은 언(偃)이니, 우리 식으로 부르면 언언이다. 공자보다 45세.(『가어』에는 35세) 연하이다. 공문십철의 한사람으로 예법을 공부했고 문학으로 이름을 날렸다. 739년 당나라 때 오후(吳侯), 1009년 송나라 때 단양공(丹陽公), 그 뒤 오공(吳公)으로 추봉되었다.

 『논어』 속으로…

 공자가 무성 땅에 가서 현악소리를 듣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닭 잡는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느냐?" 자유가 대답했다. "예전에 전 선생님께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가 쉽다고 말입니다." 공자가 말했다. "얘들아, 자유의 말이 옳다. 방금 내가 한 말은 농담이었다." (子之武城, 聞弦歌之聲. 夫子莞爾而笑, 曰 : 割雞焉用牛刀? 子游對曰 : 昔者偃也聞諸夫 子曰 : 君子學道則愛人, 小人學道則使也. 子曰 : 二三子! 偃之言是也. 前言戱之耳. 「양화」)

 자유가 말했다. "군주를 섬김에 자주 간언하면 욕을 당하고, 친구 사이에 자주 충고하면 소원해 지는 것이다." (子游曰 : 事君數, 斯辱矣, 朋友數, 斯疏矣. 「이인」)

 공자가 질문했다. "너는 인물을 얻었느냐?" 자유가 대답했다 "담대멸명이란 자가 있는데, 길을 다닐 적에 지름길을 따르지 않으며, 공적인 일이 아니면 일찍이 저의 집에 들른 적이 없습니다." (子曰 : 女得人焉爾乎? 曰 : 有澹臺滅明者, 行不由徑, 非公事, 未嘗至偃之室也. 「옹야」)

 자유가 효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했다. "지금의 효라는 것은 물질적으로 봉양 잘하는 것만을 말한다. 그러나 개나 말에게도 모두 길러주는 것은 있으니, 공경하는 마음이 없으면 무엇이 그것과 다르겠는가?" (子游問孝. 子曰 : 今之孝者, 是謂能養. 至於犬馬, 皆能有養 ; 不敬, 何以別乎? 「위정」)

 정렬이 넘쳤던 자장

자장(子張)의 성은 전손(顓孫), 이름은 사(師), 자장은 자이며, 공자보다 48세 연하이다. 진9陳)나라 사람으로 전해진다. 739년 당나라 때 진백(陳伯), 1009년 송나라 때 완구후(宛邱侯), 그 후 진공(陳公)으로 추봉되었고, 공문십철의 한사람.

 『논어』 속으로…

 자공이 물었다. "자장과 자하 두 사람가운데 누가 현명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자장은 지나치고, 자하는 미치지 못한다." 자공이 물었다. "그렇다면 자장이 나은 것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지나친 것과 미치지 못하는 것은 다 같다." (子貢問 : 師與商也孰賢? 子曰 : 師也過, 商也不及. 曰 : 然則師愈與? 子曰 : 過猶不及. 「선진」)

 자장이 벼슬하는 방법을 배우려고 하자, 공자가 대답했다. "많이 듣고서 의심나는 것을 빼버리고 그 나머지를 삼가해서 말하게 되면 허물이 적어질 것이다. 많이 보고서 그 위태로운 것을 빼버리고 그 나머지를 삼가해서 행동하면 후회하는 일이 적어질 것이다. 말하는 것에 허물이 적고, 행동하는 것에 후회가 적으면, 봉록은 그 가운데 있다." (子張學干祿. 子曰 : 多聞闕疑, 愼言其餘, 則寡尤 ; 多見闕殆, 愼行其餘, 則寡悔. 言寡尤, 行寡悔, 祿在其中矣. 「위정」)

 자장이 질문했다. "선비가 어떠하여야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가 물었다. "네가 말하는 도달이란 무엇인가?" 자장이 대답했다. "나라에 있어도 반드시 소문이 나며, 집안에 있어도 반드시 소문이 나는 것입니다." 공자가 대답했다. "(네가 말하는) 그것은 소문일 뿐이지 도달한 것은 아니다. 도달했다고 하는 것은 질박하고 정직하며 의를 좋아하며 남의 말을 살피고 얼굴빛을 관찰하며 생각해서 몸을 낮추는 것이니, 나라에서도 반드시 도달하고, 집안에서도 반드시 도달하는 것이다. 소문이라는 것은 얼굴빛은 인을 취하나 실제로는 위배되며 그대로 머물면서 의심하지 않는 것이니, 나라에 있어도 반드시 소문이 나며, 집안에 있어도 반드시 소문이 나는 것이다." (子張問 : 士何斯可謂之達矣? 子曰 : 何哉, 爾所謂達者? 子張對曰 : 在邦必聞, 在家必聞. 子曰 : 是聞也, 非達也. 夫達也者, 質直而好義, 察言而觀色, 慮以下人. 在邦必達, 在家必達. 夫聞也者, 色取仁而行達, 居之不疑. 在邦必聞, 在家必聞. 「안연」)

 자유가 말했다. "나의 벗 자장은 어려운 일을 잘하나 인하지는 못하다." (子游曰 : 吾友張也, 爲難能也, 然而未仁. 「자장」)

 증자가 말했다. "당당하구나 자장이여, 그러나 함께 인을 실천하기는 어렵다." (曾子曰 : 堂堂乎張也, 難與竝爲仁矣. 「자장」)

 자장이 말했다. "선비가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바치며, 이득을 보면 의로운지 생각하고, 제사할 땐 공경을 생각하고, 상사엔 슬픔을 생각한다면, 괜찮다." (子張曰 : 士見危致命, 見得思義, 祭思敬, 喪思哀, 其可已矣. 「자장」)

 자장이 말했다. "덕을 잡음이 넓지 못하고, 도를 믿음이 독실하지 못하면, 어찌 있다고 말하며, 어찌 없다고 말하겠는가?"

 대기만성형 자하

자하(子夏)는 성이 복(卜)이고, 이름은 상(商)으로, 공자보다 44세 연하였다. 진(晉)나라 운국인9溫國人)이라고도 하고 위(衛)나라 사람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온국이 원래는 위나라에 속해 있었기에 통상 위나라 사람으로 통했다. 공문십철의 한 사람. 739년 위후(衛侯), 1009년 송나라 때 동아공(東阿公), 혹은 하동공(河東公), 그 뒤 위공(衛公)이라 추봉되었다.

 『논어』 속으로…

 자하가 물었다. "(전해져 내려오는 시구 가운데) '아름답게 웃는 얼굴에 보조개가 예쁘며, 아름다운 눈의 맑은 눈동자가 선명하구나! 흰 비단으로 광채를 내도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그림 그리는 일은 먼저 흰 바탕이 있은 뒤에 색을 칠해 다듬는다는 뜻이다." 자하가 말했다. "예가 뒤라는 말이군요." 공자가 말했다. "나를 불러일으키는 자가 자하로다! 비로소 너와 더불어 시를 말할 수 있게 되었구나!" (子夏問曰 : '巧笑倩兮, 美目盼兮, 素以爲絢兮.' 何謂也? 子曰 : 繪事後素. 曰 : 禮後乎? 子曰 : 起予者商也! 始可與言詩已矣. 「팔일」)

 자하가 효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는 것이 어렵다. 부형에게 일이 있으면 제자가 그 수고로움을 대신하고, 술과 밥이 있으면 부형을 잡숫게 하는 것을 일찍이 효라고 할 수 있겠는가? (子夏問孝. 子曰 : 危難, 有事弟子服其勞, 有酒食先生饌, 曾是以爲孝乎? 「위정」)

 자하가 말했다. "온갖 노동자들은 공장에 있으면서 그 일을 이루고, 군자는 배워서 그 도를 지극히 한다." (子夏曰 : 百工居肆以成其事, 君子學以致其道. 「자장」)

 자하가 말했다. "큰 덕(큰 일)이 한계를 넘지 않으면, 작은 덕(작은 일)은 출입하여도 괜찮다." (子夏曰 : 大德不踰閑, 小德出入可也. 「자장」)

 자하가 말했다. "군자는 (백성들에게) 신임을 얻은 뒤에 그 백성을 부리니, 신임을 얻지 못하고 부리면 자신들을 괴롭힌다고 여긴다. 신임을 얻은 뒤에 간해야 하니, 신임을 얻지 못하고 간하면 자기를 비방한다고 여긴다." (子夏曰 : 君子信而後勞其民, 未信則以爲厲己也 ; 信而後鍊, 未信則以爲謗己也. 「자장」)

 자하가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했다. "속성으로 뭔가를 하려고 서두르지 말고, 작은 이익에 한눈 팔지 말아라. 서두르면 이르지 못하고 작은 이익에 한눈 팔면 큰 일을 이루지 못한다." (問政. 子曰 : 無欲速, 無見小利. 欲速, 則不達 ; 見小利, 則大事不成. 「자로」)

 공자가 자하에게 말했다. "너는 군자유가 되고, 소인유가 되지 말라." (子謂子夏曰 : 女爲君子儒, 無爲小人儒. 「옹야」)

 자하가 말했다. "벼슬하면서 여가가 있으면 학문을 하고, 학문을 하고서 여가가 있으면 벼슬을 하라." (子夏曰 : 仕而優則學, 學而優則仕. 「자장」)

 자하가 말했다. "배우기를 널리 하고 뜻을 독실히 하며, 절실하게 묻고 가까이 (현실에 필요한 것을) 생각하면 인이 그 가운데 있다." (子夏曰 : 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 仁在其中矣. 「자장」)

 자하가 말했다. "날마다 모르는 것을 알며, 날마다 능한 것을 잊지 않으면 학문을 좋아한다고 이를 만하다." (子夏曰 : 日知其所亡, 月無忘其所能, 可謂好學也已矣. 「자장」)

 독야청청했던 민자건

민자건(閔子騫, B.C. 536~478)은 성이 민이고 이름은 손(損), 자가 자건이다. 공자보다 15세가 적었다.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어려서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계모의 학대를 받으며 자랐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런 계모에게도 효성을 다해 증삼과 더불어 효의 대명사로 불린다. 당나라 개원(開元) 8년(720) 조칙으로 십철(十哲)이 되었고, 개원 27년(739)에는 비후(費侯)로 추봉되었다.

 『논어』 속으로…

 계씨가 민자건을 비재로 삼으려고 하자, 민자건이 말했다. "나를 위해 잘 말해 다오. 만일 다시 나를 부르러 온다면 나는 반드시 노나라를 떠나 제나라 문수가에 있을 것이다."(季氏使閔子騫爲費宰. 閔子騫曰 : 善爲我辭焉. 如有復我者, 則吾必在汶上矣. 「옹야」)

 군주감으로서의 중궁

중궁(仲弓, B.C. 522~?)의 성은 염(冉)이고, 이름은 옹(雍), 자가 중궁, 혹은 자궁(子弓)이라고도 하였다. 노나라 사람이다. 공문십철의 한 사람. 739년 당나라 때 설후(薛侯), 1009년 송나라 때 천하비공(天下邳公), 1265년에는 설공(薛公)으로 추봉되었다.

 『논어』 속으로…

 공자가 말했다. "중궁은 군왕의 지위에 오르게 할만하다." (子曰 : 雍也可使南面. 「옹야」)

 중궁이 인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문밖을 나서서는 귀중한 손님을 대접하듯이 하고, 백성을 부릴 때에는 큰 제사를 받들 듯이 신중하게 하라.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 그렇게 하면 제후의 나라에서도 원망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대신의 집에서도 원망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仲弓問仁. 子曰 : 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己所不欲, 勿施於人. 在邦無怨, 在家無怨. 仲弓曰 : 雍踓不敏, 請事斯語矣. 「안연」)

 중궁이 계씨의 재상이 되어 정치를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유사에게 먼저 시키고 (그들의) 작은 허물을 용서해 주며, 어진 사람과 재능 있는 사람을 등용해야 한다." 또 중궁이 물었다. "어떻게 어진 사람과 유능한 사람을 알아보고서 등용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네가 아는 자를 등용하면, 네가 미처 모르는 자를 남들이 내버려두겠는가?" (仲弓爲季氏宰, 問政. 子曰 : 先有司, 赦小過, 擧賢才. 曰 : 焉如賢才而擧之? 曰 : 擧爾所知. 爾所不知, 人其舍諸? 「자로」)

 중궁이 자상백자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그의 간략함도 괜찮다." 중궁이 말했다. "자신이 공경하면서 간략하게 행동하며 인민을 대한다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간략함에 처하고 다시 간략하게 행동한다면 너무 간략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중궁의 말이 옳다." (仲弓問子桑伯子, 子曰 : 可也簡. 仲弓曰 : 居敬而行簡, 以臨其民, 不亦可乎? 居簡而行簡, 無乃大簡乎? 子曰 : 雍之言然. 「옹야」)

 공자가 중궁에게 말했다. "얼룩소 새끼가 색깔이 붉고 또 뿔이 제대로 났다면 비록 쓰지 않고자 하나 산천의 신이야 어찌 그것을 버리겠는가? (子謂仲弓曰 : 冢牛之子騂且角, 踓欲勿用, 山川其舍諸? 「옹야」)

 어떤 사람이 말했다. "중궁은 인하기는 한데, 너무나 말재간이 없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말재주를 어디에 쓰겠는가. 약삭빠른 구변으로 남의 말을 막아서 자주 남에게 미움만 박을 뿐이니, 그가 인한지는 모르겠으나, 말재주를 어디에다 쓰겠는가?" (或曰 : 雍也仁而不佞. 子曰 : 焉用佞? 屢憎於人. 不知其仁, 焉用佞? 「공야장」)

 말 많고 근심 많던 사마우

사마우(司馬牛)에 대해서는 『집주』에 "이름이 리(犁)이고 상퇴(向魋)의 아우"라고 하는 기록이 전부이다.

 『논어』 속으로…

 사마우가 인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인이란, 그 말함을 참아서 하는 것이다." 다시 물었다. "그 말하는 것을 참아서 하면 인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이것을 행하기 어려우니, 말함에 참아서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마우가 군자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군자는 걱정하지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사마우가 또 물었다. "걱정하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군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안으로 반성하여 조그마한 하자도 없으니, 어찌 근심하며 어찌 두려워하겠는가?" 사마우가 걱정하며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형제가 있는데, 나만이 홀로 없구나! 자하가 그 소리를 듣고 말했다.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려 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하더라. 군자가 공경함에 잃는 게 없으며, 남에게 공손함에 예절이 있으면 사해 안의 모두가 형제인데, 군자가 어찌 형제 없음을 걱정하겠는가?" (司馬牛問仁. 子曰 : 仁者其言也訒. 曰 : 其言也訒, 斯謂之仁已乎? 子曰 : 爲之難, 言之得無訒乎? 司馬牛問君子, 子曰 : 君子不憂不懼. 曰 : 不憂不懼, 斯謂之君子已乎? 子曰 : 內省不灸, 夫何憂何懼? 司馬牛憂曰 : 人皆有兄弟, 我獨亡. 子夏曰 : 商問之矣 : 死生有命, 富貴在天. 君子敬而無失, 與人恭而有禮. 四海之內, 皆兄弟也. 君子何患乎無兄弟也? 「안연」)

 공자집안의 가신 원헌

원헌9原憲)의 자는 자사(子思)이고, 이름이 헌(憲)이며, 원사(原思)라고도 한다. 공자보다 36세 연하이고, 송나라사람이다.

 『논어』 속으로…

 원헌이 (공자의) 가신으로 있을 때 녹봉으로 곡식 9백을 주었지만 원헌이 이를 받지 않았다. 공자가 말했다. "사양하지 말고, 너의 이웃집과 마을 및 향당에 주려므나!" (原思爲之宰, 與之粟九百, 辭. 子曰 : 毋! 以與爾鄰里鄕黨乎! 「옹야」)

 원헌이 부끄러움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 녹만 먹으며,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 녹만 먹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또 물었다. "이기기를 좋아하고, 자기의 공로를 자랑하며, 원망하고, 탐욕을 행하지 않으면 인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그렇게 하는 것도) 어렵다고는 할 수 잇으나, 인인지는 내가 알지 못하겠다." (憲問恥. 子曰 : 邦有道, 穀 ; 邦無道, 穀, 恥也. 克伐怨欲不行焉, 可以焉仁矣? 子曰 : 可以爲難矣, 仁則吾不知也. 「헌문」)

 전과자이면서도 공자의 사위로 선택된 공야장

공야장(公冶長)의 성은 공야(公冶), 이름은 장(長), 자는 자장(子長)이다. 일설에는 이름이 장(萇), 자가 자지(子芝)라고도 했다. 제나라 사람이라고도 하고, 노나라 사람이라고도 한다. 739년 당나라 때 거백(莒伯), 1009년 송나라 때 고밀후(高密侯), 1530년 명나라 때 선현공야자(先賢公冶子)라 추봉되었다.

 『논어』 속으로…

 공자가 공야장을 평가하면서 "그를 사윗감으로 삼을 만하다. 비록 그가 포승줄에 묶여 옥중에 있었으나 그의 죄가 아니다."하고는 그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子謂公冶長, 可妻也. 踓在縲絏之中, 非其罪也. 以其子妻之. 「공야장」)

 능력있고 근실해서 조카사위로 삼은 남궁괄

남궁괄(南宮括)은 자가 자용(子容), 시호는 경숙(敬叔)이고, 노나라 대부 맹의자(孟懿子)의 형이다. 본래 성은 중손(仲孫)이고 이름은 문(聞)이었는데, 거주하던 곳이 남궁(南宮)이라서 남궁을 성으로 했다고 한다.

 『논어』 속으로…

 남궁괄이 공자에게 물었다. "예라고 하는 사람은 활을 잘 쏘았고, 오라고 하는 사람은 힘이 세어 육지에서 배를 끌고 다녔지만, 모두 제대로 죽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우왕과 직은 몸소 농사를 지었는데도 천하를 소유하였습니다." 공자가 대답을 않고 잇다가 남궁괄이 나가자 공자가 말했다. "군자로구나! 이 사람이여! 덕을 숭상하는구나! 이 사람이여!" (南宮括問於孔子曰 : 羿善射, 奡盪舟, 俱不得其死然 ; 禹稷躬稼, 而有天下. 夫子不答, 南宮括出. 子曰 : 君子哉若人! 尙德哉若人! 「헌문」)

 공자가 남궁괄을 평가하며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는 버려지지 않을 것이요,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형벌을 면할 것이다"하고, 형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냇다. (子謂南容, 邦有道, 不廢 ; 邦無道, 免於刑戮. 以其兄之子妻之. 「공야장」)

 "남용이 백규란 내용의 시를 (하루에) 세 번 반복해서 외우니, 공자가 그 형님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南容三復白圭, 孔子以其兄之子妻之. 「선진」)

 군자 자천

성은 복(宓), 명은 부제(不齊), 자가 자천(子賤)이고, 공자보다 30세(「가어」엔 49세) 연하이다.

 『논어』 속으로…

 공자가 자천에 대해 평가했다. "군자로구나! 이 사람이여! 노나라에 군자가 없었다면,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러한 덕을 취했겠는가?" (子謂子賤, 君子哉若人! 魯無君子者, 斯焉取斯? 「공야장」)

 인정받았지만 벼슬을 사양한 칠조개

칠조개(漆雕開, B.C. 540~?)는 성이 칠조(漆雕), 이름이 개(開), 자가 자약(子若) · 자개(子開)이다. 노나라 사람이라는 설도 있고, 채(蔡)나라 사람이라는 설도 있다. 공자보다 11세 연하이다. 원래 이름은 계(啓)였는데 한(漢)나라 경제(景帝)의 이름이 계(啓)였기 때문에 개(開)로 개명한 것이다. 옛날부터 왕의 이름은 피하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739년 당나라 때 등백(滕伯), 1009년 송나라 때 평여후(平輿侯)로 추봉되었고, 현재 산동성 곡부 공묘 동무(東廡)에 종사되어 있다.

 『논어』 속으로…

 공자가 칠조개에게 벼슬하도록 하자, 칠조개가 대답했다. "저는 벼슬하는 것에 대해 아직 자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흐믓하게 여겼다. (子使漆雕開仕, 對曰 : 吾斯之未能信. 子說. 「공야장」)

 삐딱했던 자금

자금(子禽, B.C. 511~?)은 성이 진(陳), 이름이 항(亢), 자가 자금이고, 때론 자항(子亢)이라고도 했다. 진(陳)나라 사람이다. 739년 당나라 때 영백(潁伯), 1009년 송나라 때 남돈후(南頓侯)로 추봉되었고, 1530년 명나라 때 선현진자(先賢陳子)로 칭송되었다.

 『논어』 속으로…

 자금이 자공에게 물었다. "공자가 이 나라에 오시면 반드시 정치에 대해 물으시던데, 그것은 공자가 구하신 것입니까? 아니면 그런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까?" 자공이 말했다. "공자는 온순하고 양선하고 공손하고 검소하고 겸양하시는 것으로 얻었으니, 공자가 구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구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子禽問於子貢曰 : 夫子至於是邦也, 必聞其政, 求之與? 抑與之與? 子貢曰 : 夫子溫良恭儉讓以得之. 夫子之求之也, 其諸異乎人之求之與. 「학이」)

 자금이 공자의 아들 백어에게 물었다. "그대는 (선생님으로부터) 무슨 특별한 가르침을 들은 게 있는가? 백어가 대답했다. "없었다. 일찍이 혼자 서 계실 때에는 내가 빨리 그 앞을 걸어가는데 '시를 배웠느냐?'하고 물으시길래 '못했습니다'라고 했더니,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다' 하시기에, 물러나 시를 배웠노라. 또 다른 날 홀로 서 계시는 앞을 빠른 걸음으로 그 앞을 지나는데, '예를 배웠느냐?'고 물으시길래 '못했습니다'라고 했더니, '예를 배우지 않으면 설 수 없다'고 하시기에 물러나 예를 배웠노라. 이 두 가지를 들었다." 자금이 물러나와 기뻐하며 말햇다. "하나를 물어서 셋을 들었으니 시를 듣고 예를 들었으며, 또 군자가 그 아들을 멀리하는 것을 들었노라." (陳亢問於伯魚曰 : 子亦有異聞乎? 對曰 : 未也. 嘗獨立, 鯉趨而過庭. 曰 : 學詩乎? 對曰 : 未也. 不學詩, 無以言. 鯉退而學詩. 他日又獨立, 鯉趨而過庭. 曰 : 學禮乎? 對曰 : 未也. 不學禮, 無以立. 鯉退而學禮. 聞斯二者. 陳亢退而喜曰 : 問一得三, 聞詩, 聞禮, 又聞君子之遠其子也. 「계씨」)

 "선생(자공)이 공손해서 그렇지 공자가 어찌 선생보다 낫겠습니까?" (陳子禽謂子貢曰 : 子爲恭也, 仲尼豈賢於子乎? 「자장」)

▲ 번지가 무우에서 공자에게 "덕을 숭상하고, 악함을 바로잡고, 의혹 분별하는 것"을 질문하는 과정(舞雩從遊)

 공자의 운전기사 번지

번지(樊遲)의 성은 번(樊), 이름은 수(須), 자는 자지(子遲), 혹 번지라고도 했다. 노나라 사람이라고도 하고 제(齊)나라 사람이라는 설도 있다. 공자보다 36세(「열전」) 혹은 46세(「가어」) 연하라고 전한다. 용력(勇力)이 있어서 어린 나이에 계씨 밑에서 벼슬하였다. 노나라 애공(哀公) 11년(B. C. 484) 제나라가 노나라를 정벌할 때 그는 염구(冉求)를 도와 제나라 군대를 물리쳤다고 하며, 이로 인해 그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739년 당나라 때 번백(樊伯), 1009년 송나라 때 익도후(益都侯)로 추봉되었고, 현재 산동성 공묘 서무(西廡)에 종사되어 있다.

 『논어』 속으로…

 번지가 인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대답했다. "거처함에 공손히 하고, 일을 집행하는데 경건히 하고, 사람들을 대할 때에 진실해야 한다. 이것은 비록 이적이 사는 지역에 가더라도 버려서는 안 된다." (樊遲問仁, 子曰 : 居處恭, 執事敬, 與人忠, 踓之夷狄, 不可棄也. 「자로」)

 번지가 농사짓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대답했다. "나는 저 농촌의 늙은 농부만도 못하다." 번지가 채소 농사에 대해 질문하자 공자가 대답했다. "나는 저 늙은 채소 농사하는 사람만도 못하다." 번지가 나가자 공자가 말했다. "번지는 소인이로구나! 윗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윗사람을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고, 윗사람이 의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고, 윗사람이 신을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실정대로 하지 않는 이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방의 백성들이 자식을 포대기에 업고 올 것이니, 어찌 농사짓는 것을 쓸 필요가 있겠는가?" (樊遲請學稼, 子曰 : 吾不如老農. 請學爲圃. 曰 : 吾不如老圃. 樊遲出, 子曰 : 小人哉, 樊須也! 上好禮, 則民莫敢不敬, 上好義, 則民莫敢不服 ; 上好信, 則民莫敢不用情. 夫如是, 則四方之民襁負其子而至矣, 焉用稼? 「자로」)

 번지가 지혜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사람이 지켜야할 도리에 힘쓰고 귀신을 공경은 하되 멀리한다면 지혜롭다고 하겠다." 또 인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인자는 어려운 일을 먼저하고 얻는 것을 뒤에 한다. 이렇게 한다면 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樊遲問知. 子曰 : 務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謂知矣. 問仁. 曰 : 仁者先難而後獲, 可謂仁矣. 「옹야」)

 번지가 공자를 따라서 무우 아래에서 유유히 노닐면서 물었다. "감히 덕을 높이며, 간특함을 닦으며, 의혹 분별하는 것에 대해 묻습니다." 공자가 대답했다. "좋은 질문이로구나! 일을 먼저하고 이득 얻는 일을 뒤에 하는 것이 덕을 높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기의 악함을 다스리고 남의 악함을 다스리않는 것이 간특함을 닦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루 아침의 분노로 자신을 잊어서 화가 부모에게까지 미치게 함이 의혹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樊遲從遊於舞雩之下, 曰 : 敢問崇德 脩慝 辨惑. 子曰 : 善哉問! 先事後得, 非崇德與? 攻其惡, 無攻人之惡, 非脩慝與? 一朝之忿, 忘其身, 以及其親, 非惑與? 「안연」)

 번지가 인을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또 지혜를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사람을 아는 것이다." 번지가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자. 공자가 말했다. "정직한 사람을 들어 쓰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리면 부정한 자로 하여금 곧게 할 수 있는 것이다." (樊遲問仁. 子曰 : 愛人, 問知. 子曰 : 知人. 樊遲未達. 子曰 : 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 「안연」)

 스승 공자의 외모를 닮았던 유약

유약(有若)은 자가 자유(子有), 세칭 유자(有子)라고 했다. 공자보다 43세(「가어」는 36세) 연하라고 했다. 노나라 사람이다. 739년 당나라 때 변백(汴伯)으로 1009년 송나라 때 평음후(平陰侯)로 추봉되었고, 현재 중국 산동성 곡부 공묘에 종사되어 있다.

 『논어』 속으로…

 유약이 말했다. "그 사람됨이 효성스럽고 공경하면서 윗사람 범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다. 윗사람 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혼란 조장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군자는 근본에 힘쓴다. 근본이 확립되면 도가 발생한다. 효와 공경함은 인을 행하는 근본이다." (有子曰 : 其爲人也孝弟, 而好犯上者, 鮮矣 ; 不好犯上, 而好作亂者, 未之有也. 君子務本, 本立而道生.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 「학이」)

 유약이 말했다. "예의 쓰임은 조화를 귀하게 생각한다. 선왕의 도는 이것을 아름답게 생각햇다. 그래서 작은 일도 큰 일도 모두 이것으로 말미암는다. 행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조화를 알았다고 해서 조화만 하고, 예로써 절제하지 않는다면 역시 행할 수 없는 것이다." (有子曰 : 禮之用, 和爲貴, 先王之道斯爲美, 小大由之. 有所不行, 知和而和, 不以禮節之, 亦不可行也. 「학이」)

 유약이 말했다. "약속이 의리에 가까워야 그 약속한 말을 실천할 수 있다. 공손함이 예에 가까워야 치욕을 멀리할 수 있다. 그렇게 하여 가까운 사람들을 잃지 않음으로써 또한 섬길 수 있는 것이다." (有子曰 : 信近於義, 言可復也 ; 恭近於禮, 遠恥辱也 ; 因不失其親, 亦可宗也. 「학이」)

 애공이 유약에게 물었다. "매년 흉년이 들어 재용이 부족하니, 어찌 했으면 좋겠는가?" 유약이 대답했다. "어째서 철법을 쓰지 않습니까?" 애공이 반문했다. "10분의 2도 오히려 부족한데, 어떻게 10분의 1인 철법을 쓰겠는가?" 유약이 대답했다. "백성이 풍족하면 군주가 누구와 더물어 부족할 것이며, 백성이 풍족하지 못하다면 군주가 누구와 더불어 풍족하시겠습니까?" (哀公問於有若曰 : 年饑, 用不足, 如之何? 曰 : 二吾猶不足, 如之何其徹也? 對曰 : 百姓足, 君孰與不足? 百姓不足, 君孰與足? 「안연」)

 덕행이 뛰어났으나 몹쓸 병에 걸린 염백우

염백우(冉伯牛, B.C. 544~?)의 성은 염(冉), 이름은 경(耕), 자가 백우(伯牛)이다. 정현(鄭玄)은 그를 노나라 사람이라고 하였다. 739년 당나라 때 운후(鄆侯)로, 1009년 송나라 때에는 동평공(東平公)으로, 1265년에는 운공(鄆公)으로 추봉되었다. 중국 산동성 공묘에 종사되어 있다.

 『논어』 속으로…

 염백우가 질병에 걸리자 공자가 문병할 때 창문 너머로 손을 잡고 말했다. "이런 병에 걸릴 리가 없는데, 운명인가보다. 이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이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伯牛有疾, 子問之, 自牖執其手. 曰 : 亡之, 命矣夫! 斯人也而有斯疾也! 斯人也而有斯疾也! 「옹야」)

 시세파악 능력이 뛰어났던 자고

자고(子羔, B.C. 521~?)의 성은 고(高), 이름은 시(柴), 자가 자고(子羔)이고, 자고(子高)라고도 했다. 공자보다 30세(『가어』엔 40세)연하이다. 제(齊)나라 사람이라고도 하고 위(衛)나라 사람이라고도 한다. 739년 당나라 때 공백(共伯)으로, 1009년 송나라 때 공성후(共城侯)로 추봉되었다. 현재 산동성 곡부 공묘 서무(西廡)에 종사되어 있다.

 『논어』 속으로…

 자로가 자고를 비재로 추천하자, 공자가 말했다. "남의 아들을 해치는 구나!" 자로가 말했다. "백성이 있고 사직이 있는데, 어찌 반드시 글공부만을 학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그래서 난 말만 잘하는 사람을 미워한다." (子路使子羔爲費宰. 子曰 : 賊夫人之子. 子路曰 : 有民人焉, 有社稷焉. 何必讀書, 然後爲學? 子曰 : 是故惡夫佞者. 「선진」)

 품격있는 예절로 손님을 접대하던 공서화

공서화(公西華)의 성은 공서(公西), 이름은 적(赤), 자가 서화(西華) 혹 자화(子華)이다.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 42세 연하이다. 당나라 때인 739년 변백(汴伯)으로 추봉되고, 공자묘에 종사된 이후 1009년 송나라 때 평음후(平陰侯)로, 1530년 명나라 때 다시 선현공서자(先賢公西子)로 추종되었다.

 『논어』 속으로…

 공자가 말했다. "성과 인으로 말하면 내 어찌 감히 자처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성과 인을) 실천하기를 싫어하지 않으며, 남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으로 말하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공서화가 말했다. "바로 이것이 저희 제자들이 배울 수 없는 점입니다." (子曰 : 若聖與仁, 則吾豈敢? 抑爲之不厭, 誨人不倦, 則可謂云爾已矣. 公西華曰 : 正唯弟子不能學也. 「술이」)

 맹무백이 공자에게 "공서화는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공서화는 예복을 입고 띠를 띠고서 조정에 서서 빈객을 맞아 대화를 나누게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인한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孟武伯問 : 赤也何如? 子曰 : 赤也, 束帶立於朝, 可使與賓客言也, 不知其仁也. 「공야장」)

 공서화가 제나라에 심부름을 가자 염자가 그의 어머니를 위해 곡식을 줄 것을 요청하였다. 공자가 말했다. "부(6斗4升)를 주어라." 더 줄 것을 청하자, 공자가 말했다. "유(16斗)를 주어라." 그런데 염자는 이 보다 많은 5병(16斛)을 주었다. 공자가 말했다. "공서화가 제나라에 갈 때에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갖옷을 입었다. 내가 들으니, '군자는 궁핍한 자를 돌봐주고 부유한 자를 계속 도와주지 않는다'고 하였다." (子華使於齊, 冉子爲其母請粟. 子曰 : 與之釜. 請益. 曰 : 與之庾. 冉子與之粟五秉. 子曰 : 赤之適齊也, 乘肥馬, 衣輕裘. 吾聞之也, 君子周急不繼富. 「옹야」)

 공자가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자, 공서화가 대답했다. "제가 능력이 잇다는 말은 아니지만, 배우기를 원합니다. 종묘의 일과 또 제후들이 회동할 때에 현단복을 입고 장보관을 쓰고 작은 집례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赤! 爾何如? 對曰 : 非曰能之, 願學焉. 宗廟之事, 如會同, 端章甫, 願爲小相焉. 「선진」)

 낭만이 넘쳤던 증석

증석(曾晳)은 증삼의 부친으로, 이름은 점(蒧)이다.

 『논어』 속으로…

 (제자들의 포부를 묻자) 비파를 옆으로 놓고 증석이 말했다. "(제 생각은 앞서 말한) 세 사람이 갖고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공자가 말했다. "무엇이 나쁘겠는가? 또한 각기 자신의 뜻을 말하는 것이다." 증석이 말했다. "늦봄에 봄옷이 이미 이루어지면 관을 쓴 어른 5~6명과 동자 6~7명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겠습니다." (舍瑟而作, 對曰 : 異乎三子者之撰. 子曰 : 何傷乎? 亦各言其志也. 曰 : 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夫子曰 ; 吾與點也! 「선진」)

위구인해미언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