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황영찬

Tag

Notice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 total
  • today
  • yesterday
2015. 1. 19. 12:31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07 렘브란트 - 빛과 혼의 화가

 

파스칼 보나푸 지음, 김택 옮김

1997,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29

 

082

시158ㅅ  24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24

 

 

화려한 붓놀림, 풍부한 색채, 하늘에서

쏟아지는 듯한 빛과 어두움, 렘브란트 그림의

마력은 명성을 누리던 젊은 시절보다

고독과 파산의 연속이었던 말년에 더욱 빛났다.

강렬한 힘과 내면을 꿰뚫는 통찰력, 종교적

권능을 감지하게 하는 탁월한 빛의 처리 기법은

미술사의 영원한 신비로 남아 있다.

 

깃발이 펄럭인다.

북이 울린다, 아니 울리려 하고 있다.

대포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누가 쏘았을까?

저기 난쟁이 지신(地神)같이 생긴 기묘한 사내가

쏘았을까? 그는 정말 야릇한 옷을 입고 있다.

나뭇잎으로 덮여 있는 그의 투구는 어던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여인은 누구일까?

허리에 흰 새를 매달고 있는 그녀, 안에서 초롱

불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그녀는 누구일까?

여인은 무대 위로 나서고 있다. 우리를 향한

그녀의 얼굴에 씌인 기묘한 표정은 우리에게 뭔가를

설명하는 듯하다. 왜 이 두 인물은 행렬의 진행

방향과는 반대로 오른쪽으로 향하는 것일까?

그들이 행진을 방해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일까? 아니 그보다는

그러한 자세를 통해 군중들을 둘로 분할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들은

뒤쪽의 남자가 비스듬하게 들고 있는 긴 창의 방향에 따라

나아가고 있다. 균열은 구도의 오른쪽 구석에 두 개의 삼각형을

창출하고 있다. 그리고 좀더 가까이에서 보면 전체 구도가 네 개의

삼각형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본적인 분할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그밖의 모든 방향이 지시되고 있다.

폴 클로델

 

차례

 

제1장 도제기(徒弟期)와 야망

제2장 영광과 비탄

제3장 고독과 파멸

제4장 은둔과 죽음

기록과 증언

참고문헌

그림목록

찾아보기

 

파스칼 보나푸 Pascal Bonafoux

1949년에 태어난 파스칼 보나푸는 작가이자 미술사학자이다. 1980년부터 2년간 메디치 별장에 기거하면서 박사학위 취득을 위한 연구를 하였는데, 그가 택한 '서양화에서의 자화상'이란 주제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미술사를 섭렵할 수 있게 해주는 대단히 매혹적인 주제였다.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7번 <반 고흐>를 쓰기도 했으며, <화가의 자화상> <렘브란트 자화상> <인상주의 화가들, 초상화와 그 뒷이야기들>이란 미술 전문서 외에도 <중상>이란 소설도 발표하였다.

 

옮긴이 : 김택

1968년 서울 출생. 성균관 대학교 독어독문과와 동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하였다. 불어와 영어에도 능한 그는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반 고흐> <모네> 등의 번역서가 있다.

<풍차방앗간>(위)은 오랜 동안 렘브란트의 작품으로 알려져 왔지만 오늘날에는 그 진품성을 둘러싼 논쟁이 분분하다. 그러나 1630년에 아버지를 모델로 제작한 아래 에칭화는 그의 작품임이 분명하다.

 

제1장

도제기(徒弟期)와 야망

 

1606년 7월 15일. 네덜란드의 레이덴에서 하르멘 헤리트스존 반 레인과 코르넬리아 빌렘스도히테르 반 소이트브루크의 아들 렘브란트 반 레인이 태어났다. 이 사실은 1641년에 간행된, 레이덴의 풍물을 소개하는 한 책자에 요하네스 오를러스가 기록한 것으로 렘브란트의 출생을 말해 주는 유일한 기록이다. 렘브란트의 명성과 영광에 이르는 삶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여러 가지 요소가 불확실함을 인정해야만 한다.

레이덴 시절, 렘브란트는 존경하는 어머니를 모델로 자주 그림을 그렸다. 1631년에 그려진 이 에칭화는 근엄한 어머니의 우수에 젖은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9세기에 건설된 레이덴은 전통적으로 루그두눔 바타보룸으로 불렀다. 이 평면도는 스페인의 포위공격이 막바지에 이른 1574년의 레이덴 모습이다.

성 엘리자베스 패널화를 그린 것으로 알려진 15세기 후반의 화가가 제작한 유화 <도르트레히트가 배경에 보이는 성 엘리자베스 날의 홍수>는 무너진 제방을 묘사하고 있다. 오른쪽 위 터진 제방을 통해 물이 꼳아져 들어오고, 남자들이 홍수를 피하기 위해 가족과 가재도구, 식량 등을 보트에 싣고 있다.

주연합의 그림 수집가들은 일상생활을 묘사한 그림에 흥미를 가졌다. 헨드릭 아베르캄프가 그린 <얼음 위의 오락>(위) 얀 스텐이 그린 <식사>(가운데), 렘브란트의 에칭화 <스케이트 타는 사람>(아래)은 모두 일상생활에서 그림의 소재를 취했다.

1616년, 아드리안 피테르츠 반 데 베네는 1609년에 체결된 12년간의 휴전을 그림으로 상징했다. 그림 가운데 앞쪽으로 나와 있는 부부는 마침내 자유를 얻은 주연합을 상징한다. 그러나 불화와 질투가 나무 뒤에 숨어 있다.

17세기의 판화에서 볼 수 있듯, 장식적인 박공 지붕과 많은 창으로 멋을 낸 동인도 회사 건물의 화려한 정면은, 해외무역을 통해 새롭게 부상한 주연합의 막강한 지위를 상징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북부 네덜란드의 선원들은 1595~1600년에 여러 차례 원거리 항해에 나서 인도 해안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창고를 세웠다. 향료무역이 짭짤한 수익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많은 석박들이 시장과 거래처를 먼저 차지하기 위해 앞다투어 출항을 서둘렀다. 1602년, 여러 회사들이 연합해 막강한 힘을 가진 동인도회사를 설립했다. <동인도 회사의 네덜란드 함대>라는 제목을 단 이 작품은 그들의 업적을 기념하려는 동인도회사의 의뢰를 받아 루돌프 바크로이센이 제작했다. 그림에 등장하는 선박 대부분은 다층갑판과 이중 선수루(船首樓)를 자랑하는 세대박이 범선이며, 무게가 600톤에서 1,000톤에 이르렀다.(당시 운행되던 선박은, 상선이건 해적선이건, 일반적으로이 정도 규모였다.)

네덜란드 화가 프란스 할스는 열정보다는 엄격함을 미덕으로 삼는 세대에 속하는 사람이다. 이 초상화는 그가 하를렘의 판사였던 파울루스 반 베레스타인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1575년 설립되어 전유럽에 명성을 떨친 레이덴 대학은 네덜란드에서 가장 오래 된 대학이다. 야곱 반 스바넨뷔르흐가 제작한 판화(위)를 보면 도서관은 학습의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다. 도서관에는 가장 초기에 인쇄된 과학과 철학 관련 서적이 소장되어 있었다. 반 스바넨뷔르흐는 레이덴 대학의 해부학 강의실도 판화에 담았다.(아래) 이미 1600년대 초기에 많은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명 교수들이 해부학 강의를 했다.

<발람과 당나귀>(위). 1626년. 렘브란트가 이 작품을 그렸을 때 그는 약관 20세였다. 그는 그림에 'RL'이라고 서명했는데, L은 그가 태어난 고향인 레이덴을 의미했다.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에 있는 피테르 라스트만의 작업실에서 스승의 <천사와 예언자 발람>(아래)을 보았을 것이고, 그림의 주제를 스승의 작품에서 빌려 왔음이 틀림없다. 렘브란트는 당나귀를 타고 있는 예언자의 모습은 라스트만의 그것과 비슷하게 처리했지만 천사의 경우는 주름진 옷의 곡선을 강조하여 라스트만의 정적인 표현과 달리 동적인 느낌을 부여했다. 이로써 렘브란트가 원화를 자유롭게 다루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매장>은 피테르 라스트만이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후에 그린 것으로 빛을 다루는 면에서 카라바조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빛과 그림자를 통해 양감을 나타내는 명암법)가 사용되고 있지만, 구도에서나 극적 효과를 창출하는 데에서 렘브란트의 그림과 비교할 수 없다.

얀 리벤스와 렘브란트는 공동작업실에서 같이 일했다. 렘브란트는 'RL'로 서명했고, 리벤스는 1635년경 제작한 그의 <자화상>(위)에 'IL'로 서명했다. 약자 L은 리벤스의 이름이거나 태어난 고향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바다, 하늘, 폭풍우, 구름, 안개는 네덜란드인의 삶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아래 그림은 살로몬 반 로이스달의 <나룻배>이다.

피테르 얀츠 산헤담의 <하를렘의 성 바보 성당>은 프레스코화나 유화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성당의 간소한 내부를 보여 준다.

<돌팔매질당하는 성 스테반>에서 렘브란트는 전유럽에 확산되고 있던 회화의 새로운 장르를 시도했다. 당시 회화는 역사 기술을 의미했다. 렘브란트는 돌로 쳐 죽이려는 사람들에 둘러싸였어도 평화로운 표정을 지은 성자의 얼굴에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흰 수염을 기른 노인>(위, 1626)의 주인공은 렘브란트의 아버지였을 것이다. 노인은 <성전에서 상인을 쫓아내는 그리스도>(아래)의 몇몇 등장인물과 닮았다.

1626년에 렘브란트가 나무에 그린 이 그림에는 <티투스의 관용> <만리우스 토르퀴아투스의 아들의 비난> <브루투스의 판결>, <페틸리우스 케레알리스 앞에 반역자들을 잡아오다> 등 여러 제목이 붙어 있다. 이미 스무 살 때부터 그의 역사화 제작에서의 탁월성과 창조력이 돋보이기 시작했다. 홀(笏)에 가려진 사람은 렘브란트 자신이다.

1626년에 제작된 <염소를 훔쳤다고 토비트에게 질책당하는 안나>의 제재는 《성서》(<토비트서> 2:11-14)에서 얻은 것이다. 뜨거운 참새 똥에 맞아 눈이 먼 토비트는 아내가 데려온 동물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토비트는 아내를 불러 물었다. "그 녀석을 어디에서 가져왔소? 설마 훔쳐 온거 아니오! 어서 주인에게 돌려주구려. 훔친 가축을 먹을 권리는 없소." 아내가 말했다. "그게 아니랍니다. 급료에 덧붙여 받은 선물이에요." 그러나 토비토는 아내를 믿지 않았고 계속 염소를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일렀다. 그러자 아내가 말했다. "당신이 베푼 은혜와 선행은 어디에 있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당신이 그들을 위해 한 일을 알고 당신 편이 되어 줄 거예요." 토비트는 한숨을 쉬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슬픔의 기도를 올렸다.

<큰 모자를 쓰고 지팡이에 기대어 있는 거지>(위, 1629)는 렘브란트가 여러 해 동안 레이덴의 거지들을 모델로 해 제작한 드로잉과 에칭화 중 하나이다. 그의 에칭 바늘은 찢어진 옷과 주름진 얼굴을 표현할 때 영감을 얻은 듯하다. 어머니의 얼굴을 표현한 에칭화(아래)는 1628년 작품이다.

<작업실의 화가>(1628경). 이젤 위에 기댄 채 빛을 가득 받고 있는 화판을 응시하는 화가는 렘브란트 자신이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완성된 그림일까, 거친 스케치일까? 그는 작업복 대신 고객이라도 맞이할 듯 성장하고 있다.

알브레히트 뒤러 같은 다른 화가들의 판화작품은 렘브란트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지팡이에 기대어 있는 손이 불편한 거지>(위)에서 프랑스의 판화가이자 에칭화가인 자크 칼로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잇다. 아래는 칼로의 <목발 짚은 거지>이다.

콘스탄테인 호이겐스는 1626년경 얀 리벤스에게 초상화를 주문했다. 그는 최초로 렘브란트 비평을 썼으며, 특히 빛과 그림자의 사용을 자세히 다루었다.

호이겐스는 1629년에 제작된 렘브란트의 <은화 30전을 돌려주는 유다>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레이덴을 떠난 해인 1631년, 렘브란트는 <예언자 안나>를 그렸다. 안나는 부모를 따라 성전에 온 어린 예수가 메시아임을 알아보았다. 이 그림의 모델을 선 렘브란트의 어머니는 아들의 천재성을 알아보았을까?

<노파> 또는 <렘브란트의 어머니>는 헤리트 다우의 작품이다. 다우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스승의 그림을 모사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스승이나 동료의 그림을 베끼는 일이 흔했다. 모사는 '날조'가 아니라 학습하고 조언을 주는 한 방법이었다.

 

제2장

영광과 비탄

 

"유럽에서 보기 드문, 인도산(産) 희귀품으로 가득한 배들이 이곳에 도착하오. 이것을 보는 것이 과수원에서 자라는 과일을 보는 것만큼 즐거움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소? 화려한 삶과 진귀한 물건을 이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곳이 또 어디 있겠소?"

 

르네 데카르트

얀 반 데르 헤이덴이 그린 <암스테르담의 헤렌흐라흐트>(위)에서 부유층의 저택을 볼 수 있다. 렘브란트의 에칭화 <암스테르담의 전경>(아래)에는 항구, 배, 풍차, 시계탑, 창고 등 도시의 다양한 모습이 펼쳐져 있다.

르네 데카르트의 초상화는 프란스 할스의 그림을 모사한 것이다. 그림은 위대한 철학자와 재기 넘치는 초상화가의 조우를 들려준다.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는 1608년에 착공하여 1611년에 완공되었다. 거래는 건물 내부가 아니라 안뜰에서 이루어졌는데, 비가 오면 사람들은 회랑 안으로 몰려들었다.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의 안뜰>은 네덜란드의 화가 에마뉘엘 데 비테가 제작한 1653년의 것으로, 당시 막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 온 비데는 건축화에 전념하고 있었다.

"어둠에서 내려오는 나선형 계단과 힐끗 보이는 황량한 복도는, 감상자로 하여금 빛나는 물질을 분비하는 이상한 조가비의 내부를 엿보고 있는 기분을 갖게 한다. 모호하며 설명하기 힘든 방법으로 정신을 비유하고 있는 이러한 구성은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사유, 심오한 사유, 그리고 인식이 풍부한 존재로부터 형성된 사유를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폴 발레리

《네덜란드를 다녀와서》 중 <데카르트와 렘브란트> (1926)

해부학 강의를 화폭에 담은 전통은 이보다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바스티안 에그베르츠 박사의 해부학 강의를 담고 잇는 토마스 데 카이세르의 그림(위)이나 피테르 미켈츠 반 미레벨트가 그린 반 데르메르 박사의 해부학 강의(아래)가 대표적인 예이다.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에서 튈프 교수 곁에 모여 있는 명사들은 의사가 아니다. 중앙의 인물이 들고 있는 명단에서 정부관리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림을 불후의 명작으로 만든 사람은 바로 화가 자신, 렘브란트이다.

해부학 강의실 건물 정면에는 튤립이 조각되어 있는데 튤립은 튈프 교수를 의미한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교수의 이름은 네덜란드어로 튤립을 의미하며 네덜란드의 국화(國花)가 튤립인 것이다. 1622년 행정관에 임명되고 후에 두 번이나 시장에 당선된 튈프는 암스테르담 사회에서 성공한 인물이었다. 렘브란트는 이 그림을 위해 플랑드르의 유명한 해부학자이자 티치아노의 친구인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의 판화 <인간의 육체를 그리는 것에 대하여>(1543)를 연구했을 것이다.

렘브란트가 약혼을 기념해 그린 사스키아의 첫 초상화(위)에는 순종적이고 체념한 듯한 인상이 깃들여 있다. <깃털장식 달린 모자를 쓰고 미소 짓는 사스키아>(아래)를 위해 모델을 선 사스키아가 그것이 모델로서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임을 알았을까?

<십자가를 세우다>(위)에서는 대각선의 빛이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세우는 병사들 위로 쏟아지고 있다. <십자가에서 내려지다>(아래)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그림은 1634년 주연합의 총독인 프레데릭 헨리의 주문에 따라 제작한 다섯 점 중 하나이다. 이 작품들의 공통된 주제는 그리스도의 수난이다.

단색으로 처리된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의 매장>(1639경)을 렘브란트가 총독을 위해 제작한 그림 다섯 점 중 하나의 습작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전문가들이 있다. 이 다섯 작품의 캔버스 양쪽 위가 둥글다는 사실을 참조할 때 이런 주장도 설득력을 지닌다.

렘브란트는 총독의 그림 주문을 연결해 준 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눈이 머는 삼손>을 콘스탄테인 호이겐스에게 주었다. 폭력적인 장면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구성의 대담성에서 볼 때 이탈리아 회화 전통과 유사한 면이 있다.

<팬케이크를 굽는 여인>(위)이나 제자인 페르디난트 볼이 그린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아래) 등 렘브란트는 그의 작업실에서 모든 종류의 주제를 소화해 냈다.

사랑하는 모델 사스키아

렘브란트가 그린 이 그림(위)은 <마우솔루스의 유골을 받는 아르테미시아> 혹은 <독배를 받는 소포니시바>로 알려져 있다. 제목이야 어쨌든 그림은 부부간의 정절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많은 그림에서 렘브란트의 환상을 대변하는 인물로 등장하는 사스키아가 역시 모델이 되고 있다. <사스키아와 함께 있는 자화상>(아래, 1636)에도 사스키아가 등장한다.

여신과 여인

렘브란트는 사스키아를 있는 그대로 초상화에 담지 않았다. 사스키아는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한다. <플로라로 변신한 사스키아>(위)에서 사스키아는 이탈리아 농촌지방의 여신으로 등장한다. 아마 누군가에게 로마의 창녀들이 플로라의 가호를 기원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작품을 그린 듯한데, 사실 그림에 흐르는 관능의 의미는 그림 자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렘브란트는 사스키아가 쓴 화관에 튤립 한 송이를 끼워 넣음으로써 로마의 여신에 네덜란드적 요소를 부여하고 있다. <사스키아 반 월렌보르흐의 초상>(아래)에서 렘브란트는 그녀를 우아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그녀의 모자는 렘브란트가 프랑스의 패션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점을 말해 준다. 두 작품은 모두 1634년에 제작되었다.

<사스키아와 함께 있는 자화상>(1636)은 그가 아내의 지참금을 낭비하고 있다고 헐뜯는 사람들에게 띄우는 답변이다. 렘브란트가 그들에게 잔을 들어 보이고 있다.

<세입 징수 장관 얀 오이텐보하르트> 혹은 <금을 계량하는 사람>. 1639년.

렘브란트가 분할 상환을 조건으로 구입한 신트 안토니스브레스트라트 집.

1639년, 렘브란트는 라파엘로의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초상화>(위, 1516)를 모사했다(아래).

이 드로잉 밑에는 '작업복을 입은 렘브란트'라는 메모가 붙어 있다.

<도살된 소>(1640)에는 3차원적인 조형감이 놀라울 정도로 잘 표현되었으나, 몇몇 전문가들은 그 진품성을 의심하고 있다.

메노파의 전도사이자 부유한 상인, 코르넬리스 클라츠 안슬로는 렘브란트가 제작한 초상화 세 점의 주인공이다. 드로잉(위), 유화(가운데), 에칭화(아래).

렘브란트는 종종 서두르지 않고 조심스러운 준비작업을 해 나갔다. 예를 들어 1640년에 그가 드로잉한 안슬로의 초상화가 그러하다. 1641년, 렘브란트는 이 그림을 얼굴 부분이 좀더 정확하게 묘사된 에칭화로 다시 제작했다. 시인인 요스 반 덴 본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렘브란트가 실제로 그리려 했던 것은 코르넬리스의 목소리이다. 그의 외관은 그를 재현한 것에 불과하다. 보여지지 않는 부분은 소리로 알 수 있다. 안슬로를 보고자 하는 사람은 그의 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렘브란트가 시도한 것은 하나의 도전이었다. 펼쳐진 책을 가리키는 손(아래)에서 안슬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은가? 같은 해(1641)에 렘브란트는 안슬로의 초상화를 하나 더 제작했다(가운데). 여기서 안슬로의 손은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여인을 향하고 있다.

네덜란드 회화의 황금기를 산 거장들은 부드럽고 빛으로 충만한 풍경을 사건이나 에피소드를 전개시키기 위한 배경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렘브란트의 풍경은 이러한 무대장치와 전혀 달랐다. 그는 있는 사실을 그린 것이 아니라, '신화'를 그렸다. 렘브란트가 일상의 삶에서 조심스럽게 취한 요소들은 그들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돌다리가 있는 풍경>(1637)의 왼쪽에는 선술집이 있고, 오른쪽에는 교회의 첨탑이 보이는데, 이는 17세기 네덜란드인의 삶을 구성하고 있던 두 개의 극단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모델을 드로잉하는 화가>(1639)는 미술도구, 장식품으로 가득 찬 작업실을 보여 주고 있다.

니콜라스 브로이닝흐의 얼굴을 비추며 소매와 손을 가로지르고 있는 빛은 키아로스쿠로 기법의 정수를 보여 준다. 이 초상화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강렬함이며 이 강렬함의 신비는 빛을 빈틈없이 통제하는 렘브란트의 능력에 숨어 있다.

둔부에 손을 올려 놓고 있는 이 인물은 프란스 바닝 코크이다. 결혼 덕분에 부자가 된 그는 재산 이외에도 '퓌르메를란트의 영주'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다. 후에 그는 제임스 2세에게 작위를 수여받았다. 그를 그린 이 초상화는 바르톨로뫼스가 그린 <암스테르담의 고귀한 사수(射手) 길드의 이사>이다. 렘브란트의 <야경>보다 10년 후에 제작된 이 그림은 코크가 원하던 것을 정확히 그려 내고 있다. 우아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코크를 둘러싸고 미술품이 널려 있다.

렘브란트는 유화와 드로잉, 에칭화를 통해 여러 가지 옷을 걸친 사스키아의 웃는 모습, 순종적인 모습, 인내하는 모습, 기뻐하는 모습 등을 재현한다. 1641년 에칭화로 제작한 <크고 흰 머리쓰개를 한 병든 사스키아>(위)에서 사스키아는 뺨이 푹 꺼진 채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며 기진맥진해 있다. 1639년에 스케치로 그려 둔 <병상에 누운 사스키아>(아래, 오른쪽)를 기초로 에칭화 <사자(死者)를 보고 놀라는 청년>과 <처녀의 죽음>을 제작한 것은 렘브란트에게 어떤 예감이 들었기 때문일까?

1715년, <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의 부대>는 후에 왕궁이 되는 니베스타드호이스 2층에 전시되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두 문 사이의 벽에 맞추기 위해, 사람들은 위 25cm, 아래 15cm, 왼쪽 30cm, 오른쪽 10cm 정도를 잘라 냈다.

먼지와 세월의 때는 그림의 색조를 떨어뜨렸고, 그래서 코크 대장의 부대를 그린 이 그림은 <야경>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제3장

고독과 파멸

 

"비평가들이 뭐라고 말하든 간에 이 그림은 다른 모든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살아 남을 것이다. 이 그림은 구상이 예술적이고 인물의 다양한 배치가 무척 독창적이며, 무엇보다 강렬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이것과 비교할 때 다른 그림들은 놀이카드처럼 보이고 만다."

렘브란트의 제자 사뮈엘 반 호그스트라텐

 

《<야경>으로 알려진 <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의 부대>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면 <야경>(위, 세부)의 칼날 뒤쪽에서 밖을 응시하는 눈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렘브란트의 눈이다. 사뮈엘 반 호그스트라텐이 제작한 <슬리퍼>(아래)의 색조는 이 그림과 전혀 다르다.

에칭화 <세 그루의 나무>(1643)는 폭풍이 지나가는 여름 하늘을 묘사하고 있다. 놀랄 정도로 정확히 표현된 빛과 그림자의 대립은 고요함과 동시에 역동적인 힘을 전해 준다.

티투스의 유모 게르테 디르크스. 1642년경 제작된 렘브란트의 드로잉.

이 에칭화는 <프랑스식 침대>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렘브란트가 아니다. 이 제목은 그림의 주제를 제대로 담고 있지 않다.

<버드나무 밑의 성 제롬>은 《성서》를 해석한 그림일까? 은둔자의 생활을 담은 이 에칭화는 1648년에 제작되었다.

기독교적 신앙을 주제로 다룬 두 그림은 렘브란트의 작품에서 거의 발견되지 않는 연극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엠마오의 그리스도>(위)에서는 석조 벽감이 그리스도의 배경에 놓여 있다. 반면 <커튼 옆에 있는 성가족>(아래)의 열려진 장막은 무대장치처럼 장면을 틀 안에 밀어 넣고 있다.

초상화의 인물은 렘브란트의 아들 티투스로 추정된다. 티투스가 태어난 것이 1641년임을 감안할 때 이 그림은 1650년경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북부 네덜란드의 농부 의상을 입고 있는 이 여성(드로잉, 1642경)은 티투스의 유모이자 렘브란트의 정부인 게르테 디르크스로 보인다. 그녀는 한마디로 골칫덩어리였고 이런 이유에선지 그녀를 모델로 그린 작품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우아한 여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흐르고 있다. 잔잔한 빛은 여인의 얼굴과 진주, 그리고 가슴만을 비친다. 여인의 눈은 렘브란트와의 친밀성을 말해 준다. 이 초상화의 주인공은 헨드리케 스토펠스로 알려져 왔다. 그녀는 사스키아의 지위와 역할을 인수받은 듯 사스키아 같이 렘브란트에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1650년 렘브란트는 에칭화를 통해 풍경을 표현하는 데 몰두해 있었다. 그렇게 볼 때 <조가비>는 예외에 속하는 작품이다. 이 그림은 해외무역을 통해 벌어들인 부를 상징하는 듯하며, 조가비의 완벽한 나선형 구조와 표면의 부드러운 형태에 렘브란트가 매료되었으리라는 사실을 일러준다.

<책상에 앉아 있는 얀 식스>(위, 드로잉, 1655). 얀 식스는 글쓰기에 전념하기 위해 1652년에 사업을 그만두었다. 그는 <식스의 다리>(아래, 에칭화, 1645)에도 등장한다.

크기(38.5×45cm)로 보나 빛과 그림자의 효과적인 사용으로 보나 <세 개의 십자가>는 렘브란트가 제작한 가장 중요한 에칭화의 하나이다.

합법적인 부인이 되지 못한 헨드리케의 이름은 렘브란트의 그림에 한번도 공식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창 밖을 내다보는 여인> 외에도 많은 그림에 등장한다.

수세기 동안 사람들은 <말탄 폴란드인>을 렘브란트의 작품으로 믿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 진품성을 의심하는 전문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렘브란트의 작품목록에서 제외된 다른 작품으로는 <황금 투구를 쓴 남자>가 있다.

<밧세바>(1654). 다윗의 잔인함에 고통받던 여인 밧세바와 교회로부터 시달림을 받던 헨드리케는 강요된 체념을 감수해야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강가에서 목욕하는 여인>(1655).

<창가에 선 헨드리케(?)>(1656~1657).

책상 너머로 필통을 달랑거리는 티투스는 이번에는 무얼 스케치할까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하다. 렘브란트의 재산목록에는 '티투스 반 레인이 사생(寫生)한 세 마리 강아지 그림'이 포함되어 있다.

렘브란트는 만테냐가 1506년에 제작한 <죽은 그리스도>(위)의 판화를 소장하고 있었다. 이 그림은 <요하네스 다이만 박사의 해부학 강의>(아래)의 모델이 되었다.

1723년에 발생한 화재로 <요하네스 다이만 박사의 해부학 강의>의 3/4이 소실되었다. 다이만 박사는 손만 보이고 박사를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던 여덟 명의 관람자 중에서는 왼손으로 시체의 두개골을 들고 있는 조수만 불에 타지 않았다. 1632년의 첫번째 해부학 강의 장면보다 더 정확하게 상황을 전달하려 했던 렘브란트는 절개된 복부를 묘사해 넣었다.

 

제4장

은둔과 죽음

 

이제 자신의 소유가 아닌 신트 안토니스데이크의 빈 집에서 렘브란트는 자신의 작품인 시인 예레미아스 데카르트의 초상화를 찬양하는 H. F. 바테르로스의 시를 읽었다. 그는 파산과 악평, 소외를 근심했을까? 그는 파산했고 따돌림받았지만 자신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넓은 갈색 깃이 달린 두툼한 외투를 입고, 헝클어진 반백의 머리 위에 하얀 모자를 쓴 렘브란트의 <자화상>(위, 세부)은 1663년경에 그려졌다. 배경으로 보이는 원은 시간을 상징한다. 아들의 초상화 <독서하는 티튜스>(아래)는 이보다 몇 년 전에 제작되었다.

위에서부터 <귀기울이려는 듯 앞으로 몸을 숙인 자화상>(1628), <주먹코를 한 자화상>(1628), <모피 모자와 밝은 옷을 입은 자화상>(1630), <화난 모습의 자화상>(1630), <소리를 지르듯 입을 벌린 자화상>(1630), <부드러운 모자를 쓴 자화상>(1634).

렘브란트가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고 가장 다루기 쉬운 모델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렘브란트는 수많은 자화상을 얼굴 표현이나 다양한 예술적 기법을 연구하려는 시도만은 아니었다. 그의 자화상은 불안, 항변, 절규, 그리고 변화하는 삶의 태도와 감정의 기록이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100여 점이 될 것으로 추산하나, 그 정확한 숫자는 파악하기 힘들다. 제자들의 모사품, 렘브란트 자신의 개작, 최근에 제작된 위조품, 또한 그 자신이 그린 또다른 판본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자화상 목록을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1658년의 이 자화상은 고독 속에서도 당당하고 자신감에 넘친 렘브란트를 보여 준다. 이마에는 주름살이 패어 있고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서려 있다. 수수께끼 같은 의상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경제적으로는 파산상태였지만, 자신의 힘은 파괴될 수 없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당당한 렘브란트

각각 1629년(위)과 1634년(아래)에 제작된 자화상에서 렘브란트는 똑같은 갑옷을 입고 있다. 철제 목가리개는 렘브란트가 조국에 자유를 찾아 준 주연합의 시민군과 자신을 동일시했음을 일러준다. 군대경험은 없었지만 그는 고객들과 공유했을 애국심을 형상화하곤 했다.

대가

1640년의 <자화상>은, 금, 모피, 벨벳, 자수로 장식된 넓은 모자 - 그가 즐겨 쓰던 모자이다 - 를 쓴 렘브란트가 좁다란 난간에 팔을 기대고 선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의 자세는 라파엘로의 초상화에 묘사된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모습과 같다. 렘브란트는 경매장에서 그 그림을 모사한 적이 있는데, 당시 그 그림을 사들인 사람은 화상인 알폰소 로페즈였다. 풍부한 베네치아 색채는 로페즈가 소장한 또 다른 작품을 떠올리게 해준다. 그것은 푸른 소매 옷을 입고 있는 남자를 묘사한 것으로 흔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초상화>라 불리는 티치아노의 그림이다. 결국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에서 그린 이 자화상에 이탈리아 화가들의 '독창성'을 빌려와 융화시켰던 셈이다. 이탈리아 유학이 필요불가결한 것은 아니었다.

최후의 몇 년

1660년대에 제작된 세 점의 자화상에서는 화려한 장식이나 가식을 찾아볼 수 없다. 머리에는 흰눈이 내려앉았고 살이 오른 얼굴에는 주름이 늘어났으며, 권태와 회한으로 가득한 눈길은 무감각해 보인다. 렘브란트는 흰 모자에 금색선을 첨가해 배경, 머리카락, 얼굴과 조화를 이루게 했는데, 이로써 화가는 자신의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간 듯하다.

렘브란트가 1647년에 에칭화로 묘사한 얀 식스(위)는 파산 직전의 렘브란트를 구제해 주곤 했다. 렘브란트의 세계적인 명화들은 카이제르스크론 여관(아래)에서 팔렸다.

<수도사 차림의 티투스>(1660). 이 초상화의 모델은 아들 티투스이다. 렘브란트는 거친 수도복에 드리워진 갈색 그림자를 하나하나 묘사하는 기쁨으로 티투스를 그렸을까? 아니면 관객의 눈길을 티투스의 창백한 얼굴로 이끌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일까? 혹은 티투스로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를 표현하려 했던 것일까?

1891년 스톡홀름 미술관에서 다른 제목이 붙은 채 재발견된 <율리우스 키빌리스의 음모>(위, 가운데는 세부)는 원화의 1/4만 남아 있었다. 화재 때문일까, 아니면 그림의 힘과 사실성을 감소시키기 위해 고의적으로 잘라 낸 것일까? 원화의 구성은 아래에 있는 습작으로 확인할 수 있다.

렘브란트는 참을성 없는 수집가 하르멘 베케르를 달래기 위해 위풍당당하고 위엄 있는 <주노>의 초상화를 그렸다. 얼굴, 목걸이, 오른손에서 여신의 권능을 느끼게 만드는 이 초상화는 세부가 무시되어 있으며, 왼손과 왼팔은 가까스로 스케치만 끝난 상태이다.

램브란트의 천재성이 돋보이는 <직물 제조업자 길드 이사들의 초상화>는 렘브란트의 마지막 집단초상화로 암스테르담 직물 제조업자들의 주문에 따라 제작되었다. 가운데는 렘브란트의 제자인 페르디난트 볼이 그린 <포도주 상인 길드의 초상화>이고 아래는 <직물 제조업자 길드 이사들의 초상화>를 위한 습작 드로잉이다.

렘브란트는 철학자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시칠리아 거부이자 미술품 수집가의 주문을 받고, 1653년에 <호머의 흉상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긴 아리스토텔레스>를 제작했다. 렘브란트는 시인이자 철학자,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자 친구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전사(戰士)의 미덕을 부여했다. 알렉산더 메달을 건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장님 시인인 호머의 흉상에 손을 올려 놓고 있다. 메달에 각인된 알렉산더의 흉상과 렘브란트가 1663년 제작한 <알렉산더 대왕>(아래)은 무장을 하고 투구를 쓴 팔라스 아테나의 이미지를 빌려 형상화했다.

스트라스부르의 부유한 상인이던 프레데릭 리헬은 1660년 암스테르담으로 입성하는 열 살 난 윌리엄 3세를 호위하던 108명의 기마 친위대 중 한 사람이었다. 그가 실물 크기의 초상화 <말 위에 올라탄 프레데릭 리헬>을 통해 영원히 남기고 싶었던 것은 왕을 호위하던 영광의 순간이었다. 기마초상화는 네덜란드 회화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만약 <말 위에 올라탄 폴란드인>이 다른 사람의 작품이라면 이 그림은 렘브란트의 유알한 기마초상화가 될 것이다. (1655년에 렘브란트가 제작한 <말 위에 올라탄 해골>에서는 말과 사람 모두가 해골의 모습을 하고 있다.) 렘브란트가 기마초상화를 그렸다는 것은 티치아노의 <샤를 5세>나 로마의 조각상에 자기 작품을 견주어 보려는 의도였다. 성직자처럼 뻣뻣한 말은 기수의 중요성을 한층 부각시켜 준다. 배경으로 왕궁의 마차와 더불어 어렴풋이 어린 왕자의 옆모습이 보인다.

라파엘로의 <자화상>은 피렌체 체류의 흔적과 함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을 짐작하게 해준다. 1682년 10월 28일. 이 작품은 메디치가의 레오폴도 추기경의 소장품이 되었다. 레오폴도는 화가들의 자화상으로 컬렉션을 만들고자 했다.

1713년 팔츠의 선제후 요한 빌헬름 폰 데어 팔츠는 메디치가의 코시모 3세에게 루벤스의 <자화상>을 선물했다. 토스카나의 대공작들은 19세기 말 이탈리아가 통일될 때까지 미술품을 수집했다.

벨라스케스의 <자화상>은 코시모 다 카스틸리오네가 토스카나 대공작을 위해 스페인에서 구입했다. 필리페 4세의 긍정화가였던 벨라스케스의 허리춤에 왕궁 의전관실 열쇠가 보인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메디치가의 코시모 3세가 암스테르담을 방문했을 때 구입한 듯하다. 오늘날 이 그림은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유태인 신부>(1665)의 등장인물을 확인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이 여인은 누구일까? 하지만 렘브란트에게 중요한 것은 그림의 대상이 자아내는 느낌이었다. 풍요로운 색채 속에서 즐거움과 정다움이 솟아 나오고 있다.

렘브란트는 나이프를 이용해 남자의 소맷자락에 금을 입혔고, 그 도드라짐이 그림자를 만들어 내고 있다. 물감을 긁거나 문지른 부분은 질감을 높여 주어, 단지 눈으로 보고 싶을 뿐만 아니라 만지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폐허>(두번째, 1650), <가족의 초상화>(첫번째)는 렘브란트가 죽은 해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세번째는 렘브란트의 가족들이 묻혀 있는 베스테르케르크의 드로잉이고, 네번째는 <자화상>(1665)이다.

<석고상을 그리는 미술 전공 학생들>. 에칭화, 1641경, 국립도서관, 파리.

<갈릴리 바다의 폭풍우>, 1633년. 렘브란트의 유일한 바다 풍경화이다.

<그리스도의 매장>, 에칭화, 1654년.

<유대인 신부>(세부), 1668년경.

<플로라로 변신한 사스키아>, 1635년.

<기도하는 다윗>, 에칭화, 1652년.

이 신비하고 작은 여자의 허릮에는 다양한 궁술(弓術)의 상징이 있다.

1650년 코크 대장의 앨범에 소장된 <야경>의 수채화 모사화는 원작이 잘려지기 전의 모습을 보여 준다.

<목사 얀 코르넬리츠 사일비우스의 사후 초상화>, 1646년.

<서재의 파우스트>, 에칭화, 1652년.

<눈먼 토비트>(세부), 에칭화, 1651년.

<왕좌에 오른 티무르 황제>, 드로잉, 1635년경, 인도의 세밀화를 모사했다.

<둑에 앉은 거지>(세부), 에칭화, 1630년, 자화상이다.

<아담과 이브>(세부화), 1638년.

렘브란트의 제자인 아브라함 퓌르네리우스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암스테르담에 있는 그림네세 슬로이스 다리의 모습>.

<아브라함의 번제(燔祭, 구약시대에 유태인이 짐승을 통째로 구워 신에게 바치던 제사 : 역주)>, 1636년.

<자화상>, 1627~1628년경.

<극락조>.

 

 

어느 초상화가 모방작일까? 렘브란트 조사계획 위원회는 위의 두 초상화의 진품성을 의심했다.

<호머의 흉상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긴 아리스토텔레스>, 1653년.

<자화상>, 1652년.

 


 

 

'내가 읽은 책들 > 2015년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5-009 동강  (0) 2015.01.27
2015-008 아주 특별한 사진수업  (0) 2015.01.20
2014-006 만인보 ⑥  (0) 2015.01.17
2014-005 HOW TO READ 키르케고르 Soren Kierkegaard  (0) 2015.01.14
2015-004 만인보 ⑤  (0) 2015.01.14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