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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03 뿌기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③ 고려

 

 

 

이병희 지음

2015, 가람기획

 

군자도서관

SE070153

 

911

뿌298ㄱ2   3

 

쟁점과 사료로 풀어쓴 새로운 한국사

 

풍부한 사료와 충실한 해설로 다시읽는 한국사

왕건의 건국에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까지, 화려한 고려 왕조 속으로!

 

사람이 제 구실을 하며 올바로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를 하나만 지적해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내력來歷을 거짓이나 꾸밈없이 제대로 기억하는 일이라 할 것이다. 기억상실증에 걸려 부모와 형제, 스승과 친구를 알지 못하고 자기가 누군지 어떤 일을 하던 사람인지도 알지 못한 채 살고 있다면 설령 그 삶이 유복하더라도 그것을 그의 정당한 삶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력을 잘 기억하는 것은 곧 나를 나일 수 있게 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그리고 그 기억은 거짓 없는 사실에 기초한 것이어야만 한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고 해도 진짜라고 믿었던 집안의 족보가 조작되었다면 자기의 뿌리를 의심하고 방황하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일 터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력을 우리는 ‘역사歷史’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역사를 자신의 존망을 걸고 똑바로 알아야만 한다. 역사란 그저 단순한 호기심에서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것이 아니다. 자기 역사를 모르고서는 사람이 제 구실을 할 수가 없고 자기 역사를 잘못 알아서는 남의 삶을 사는 것이 되기에, 정신을 차리고 온갖 힘을 다하여 이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같은 이치로, 우리가 한국 사람으로서 이 시대를 올바로 살아가려면 우리 역사 곧 국사를 바르게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국사는 우리 민족이 지금까지 살아온 내력에 대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개정 신판 간행사」에서

 

지은이

이병희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문학 석사 · 박사 학위를 받았다. 목포대학교 사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박사 학위 논문은 「고려 후기 사원 경제의 연구」(1992)이며, 대표 논저로 「고려 시대 전남 지방의 향 · 부곡」(1998), 「고려 후기 농지 개간과 신생촌」(2003), 「고려 시기 사원의 술 생산과 소비」(2013) 외에 다수가 있으며, 저서로는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3』(2002), 『고려 후기 사원 경제 연구』(2008), 『고려 시기 사원 경제 연구』(2009) 등이 있다.

 

차례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개정 신판 간행사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초판 간행사

「고려편」 개정 신판 머리말

초판 머리말

 

Ⅰ. 정치 영역

        1. 호족의 지원을 받아 통일하다 · 고려와 호족 종합

        2. 중앙 관제를 확립하다 · 3성과 도병마사

        3. 지방 행정 제도를 정비하다 · 5도 양계와 주현 · 속현

        4. 지방 세력을 견제하다 · 사심관과 기인

        5. 군사 제도의 형성과 변천 · 경군과 주현군

        6. 벼슬길에 오르는 두 가지 방법 · 과거제와 음서

        7. 지배층의 갈등, 고려를 흔들다 ·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8. 무신들이 난을 일으키다 · 무신란

        9. 무인, 국정을 운영하다 · 무인 집권과 정방

        10. 원이 내정에 간섭하다 · 원의 간섭과 부원 세력

        11.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노력 · 반원 정책과 전민변정

        12. 고려, 역사 속으로 저물다 · 위화도 회군과 고려의 종언

 

Ⅱ. 경제 영역

        1. 지배층에게 토지를 나누어주다 · 전시과

        2. 농업은 경제의 중심 · 토지 소유와 농업 생산

        3. 물화의 교역이 활기를 띠다 · 국내의 상업 활동

        4. 철전, 동전, 그리고 은병 · 화폐의 주조와 사용

        5. 각종 물품을 생산하다 · 수공업

        6. 땅에서 세금을 거두다 · 결부제와 전조

        7. 현물과 노동력을 걷다 · 공부와 요역

        8. 농장, 사전에서 발달하다 · 농장의 발달

        9. 사원도 경제 활동의 주체 · 사원 경제

 

Ⅲ. 사회 영역

        1. 고려 특유의 행정 구역 · 향 · 부곡 · 소

        2. 향리, 향촌 사회를 이끌어가다 · 향리와 향촌 사회

        3. 관료 조직의 하층 구성원 · 남반과 서리

        4. 기술관도 양반으로 승진하다 · 의관, 역관, 일관 및 기타 기술관

        5. 가장 낮은 사회 계층 · 노비와 양수척

        6. 재혼은 자유, 재산 분배는 평등 · 가족 제도

        7. 절, 수행과 교화의 공간 · 사원과 촌락

        8. 농민과 노비, 들고 일어나다 · 농민 · 노비의 난

        9. 고려 왕조 400년 도읍지 · 개경

        10. 대몽 항전기 39년 도읍지 · 강도

        11. 개경에 버금가는 제2의 도시 · 서경의 위상

        12. 바다 실크로드의 종착지 · 해양 도시 벽란도

 

Ⅳ. 사상 문화 영역

        1. 유교를 다스림의 원리로 삼다 · 시무 28조와 유교 정치 이념

        2. 고려의 공교육과 사교육 · 국자감과 12공도

        3. 고려를 밝힌 부처의 불빛 · 팔관회와 연등회

        4. 불교 사상의 통합을 꿈꾸다 · 천태종과 수선사

        5. 고려 이전의 역사를 정리하다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6. 위대한 유산 · 금속활자와 청자

        7. 다양한 사상이 유행하다 · 도교와 풍수지리설

        8. 부처의 힘으로 나라를 구하자 · 팔만대장경

        9. 새로운 유학을 받아들이다 · 성리학의 수용

        10. 불교를 배척하다 · 배불론

        11. 소리 없는 혁명 · 목면과 화약

 

Ⅴ. 대외 관계 영역

        1. 거란을 세 번 물리치다 · 강동6주와 귀주대첩

        2. 동북 땅을 둘러싼 긴장과 갈등 · 여진 정벌과 동북9성

        3. 세계 속의 ‘코리아’ · 국제 교역의 발달

        4. 거대한 적, 몽골과 싸우다 · 대몽 항쟁과 삼별초

        5. 원나라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다 · 동녕부와 쌍성총관부

        6. 남쪽의 침략, 북쪽의 침입 · 왜구와 홍건적

        7. 국내적으로 황제국을 표방하다 · 외왕내제 의식

 

부록

        왕 계보도

        연표

        찾아보기

        각 장별 아이콘 설명

 

완사천. 전라남도 나주시 송월동에 있는 샘이며, 전남기념물 제93호다. 왕건이 궁예의 장군으로서 후백제 견훤과 나주에서 싸울 때 목이 타서 샘(완사천)가에서 빨래하던 처녀에게 물을 청하자 처녀는 바가지에 물을 떠 버들잎을 띄워서 공손히 바쳤다. 왕건은 이 처녀를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곧 장화왕후 오씨였다. 장화왕후에게서 태어난 아들 무武가 제2대 왕 혜종이 되었다.

태조 왕건(877~943)의 초상화. 왕건은 후삼국 분열 시기에 호족의 지원을 끌어들이고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귀부를 받으며, 후백제의 신검군을 황산에서 격파함으로써 936년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개경에 남아 있는 회경전 터. 회경전은 조선 시대의 경복궁에 해당하는 정전正殿이었으며, 인종 이후에 선경전으로 고쳐 불렀다.

고려의 5도 양계. 고려는 전국을 5도와 양계로 나누었다. 5도는 양광도 · 서해도 · 교주도 · 전라도 · 경상도였으며 안찰사를 파견하였고, 양계는 북계와 동계로 병마사를 파견하였다. 삼경은 초기에는 수도인 개경과 서경(평양), 동경(경주)이었으나 문종대에 남경(서울)이 설치되면서 경주의 중요성이 하락하였다. 12목은 성종 때에 지방관이 파견된 대표적인 고을이었다.

삼태사묘 바깥 전경. 삼태사묘는 고려 개국공신인 김선평金宣平 · 권행權幸 · 장길張吉 삼태사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중종 35년(1540) 안동부사 김광철이 현 위치에 묘를 건립하였으며, 경상도 관찰사 권철이 제전祭田을 설치하고 노복을 주었다. 또한 명종 11년(1556) 안동부사로 부임한 권소는 제전과 곡물을 더해주고 권씨 성을 가진 수석 호장戶長에게 맡겨 이식을 취하여 매년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철제 금은입사 사인참사검.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검이다. 마魔를 물리치기 위해 만들어진 주술형 검인 참사검斬邪劍 중 하나로, 십이간지 중 호랑이를 상징하는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 인시寅時에 제작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서곡리에 있는 벽화에 그려진 그림으로, 관료를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은 음곽선으로 윤곽을 먼저 잡은 다음, 그 위에 묵선墨線으로 그렸다. 얼굴의 세부와 손에 쥔 홀笏, 소매의 주름 등은 묵선으로 그렸고, 얼굴의 코 · 입술 · 관모 등은 묵선으로 그린 다음 붉은 채색을 하였다. 벽화가 그려진 무덤은 공민왕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무덤의 주인은 고려 후기의 문신인 권준으로 확인되었다.

고려 현종 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야射를 지낸 인주이씨의 시조 이허겸李許謙의 묘 앞에 세운 재실(원인재). 이허겸은 이자연의 조부이고 이자겸의 고조부이다.

주로 손을 써서 상대를 공격하거나 수련하는 전통 무예의 하나인 수박희를 하는 모습. 고구려 시대 고분 벽화에 수박희를 행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 시대에 이미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에는 매우 중요한 무예로 여겨져 무인들은 이를 익혀야 했다.

격구. 무신들이 무예를 익히는 방법으로 하던 놀이다. 타구打毬 또는 포구抛毬라고도 한다. 오늘날의 골프 또는 하키와 같이 막대기로 공을 치는 경기다. 격구擊毬에는 말을 타고 하는 기마 격구와 궁중이나 넓은 마당에서 하는 보행 격구가 있다. 무신이 한 기마 격구는 구장에서 말을 타고 막대기로 공을 쳐서 구문 밖으로 내보내는 놀이다.

『동국이상국집』. 이규보의 시문집이며 53권 13책이다. 아들 함涵이 고종 28년(1241)에 전집全集 41권을, 이듬해에 후집後集 12권을 편집하여 간행하였으며, 고종 38년에 고종의 명령으로 손자 익배益培가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에서 증보판을 간행했다. 조선 시대에도 여러 번 간행된 듯하다.

종묘에 있었던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영정.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조선 건국을 정당화시킬 목적으로 고려 공민왕 내외의 영정을 그려 조선의 종묘에 봉안하였다.

공민왕릉. 개성직할시 개풍군 해선리에 있으며, 일명 현릉이라고도 한다. 왕비 노국대장공주의 무덤인 정릉正陵과 나란히 있는 쌍무덤으로, 서쪽의 것이 현릉이다. 봉분은 지름이 13미터, 높이 6.5미터이며, 둘레돌은 화강석을 사용하였고 면석面石에는 12지신상이 돋을새김되었다. 석호石虎, 석양石羊, 장명등長明燈, 문인석과 무인석이 서 있다. 공민왕릉의 능제는 고려 말기의 능 형식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조선 시대로 이어졌다.

삼척에 있는 공양왕릉. 공양왕(재위 1389~1392)은 신종의 7대손이며 정원부원군 왕균의 아들이다. 고려 마지막 왕으로 이성계 세력에 의해 폐위된 뒤 원주에 추방되어 공양군으로 강등되었다가 2년 뒤 삼척에서 살해되었다. 공양왕릉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도 있는데, 문화재청에서는 고양시에 있는 것을 공식 안정되고 있다.

어제비장전변상. 『어제비장전』 제6권(1977년 무렵에 발견)에 삽입된 위의 판화는 초조대장경에서 인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5점의 변상도 가운데 위의 그림은 제3도로서 전 · 중 · 원경으로 전체 화면을 구성하고 있는 산수 속에 인물들을 적절히 배치한 일종의 산수 인물화다. 산과 구름, 내川와 나무의 배치가 매우 자연스러워 판화라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으며, 인물의 형태나 몸짓도 상당히 세련된 격조 높은 그림이다.

「미륵하생경변상도」 하단에 그려진 농민의 모습. 불화는 불교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그림이지만, 때로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전하기도 한다. 이 불화에는 농민들이 곡식을 베고 옮기는 것이 그려져 잇어 당시 농민의 생활 모습을 추측할 수 있다.

고려 시대에 사용했던 철제 농기구로 위의 사진은 낫이다. 낫은 곡물을 수확할 때 사용하는 농기구다.

행상의 모습. 행상에는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물품을 파는 상인도 있고, 소규모로 가까운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호매呼賣 행위를 하는 상인도 잇다. 고려 시대에도 이런 행상이 잇어 백성 사이를 오가며 필요한 물품을 공급했을 것이다.

고려 시대의 화폐. 성종 때 칠전을 주조해 사용하도록 했으나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 숙종 때 해동통보 · 해동중보 · 삼한통보 등 많은 동전을 주조하여 사용토록 하였다. 은병은 가치가 커서 일반인들이 사용할 수 없었으며, 주로 지배층이 고액 거래에서 사용했다. 사진에 보이는 것은 고려 시대에 유통된 동전이다.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정병靑銅銀入絲蒲柳水禽文淨甁. 고려 시대 대표적인 정병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높이가 37.5센티미터로 국보 제92호다. 수양버들이 늘어져 잇으며 오리를 비롯한 물새들이 헤엄치거나 날아오르는 풍경이 그려져 잇다. 상감청자와 나전칠기 등 상감 기법이 발달하던 11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퍙안북도 동창군 학성리에서 출토된 11세기 초의 고려 시대 화살촉.

염제신 초상. 전남 나주시 삼영동 충경서원에 소장되어 있으며, 보물 제1097호다. 비단에 채색하였고 작자는 미상이나 공민왕이 그렸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전체적으로 필치가 섬세하고 작품의 품격이 뛰어나 고려 시대 초상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그림의 주인공인 염제신은 충혜왕 · 충목왕 · 충정왕 · 공민왕 · 우왕 등 고려의 다섯 왕을 섬긴 권세가다.

통도사국장생석표. 선종 2년(1085) 호부의 승인을 받아 세웠으며, 가로 60센티미터, 세로 166센티미터이다. 보물 74호이다. 고려 시대 사원에는 종종 국가의 승인을 받아 세운 장생표가 있는데, 사원의 권역을 표시하였다. 장생표가 세워진 영역 내의 민과 토지에 대해서 사원은 배타적 · 독점적 지배를 할 수 있었다. 통도사에는 여러 개의 장생표가 세워졌으나 현재는 2기만이 남아 있다.

사천매향비. 경남 사천시 곤양면 흥사리에 있는 고려 말기의 매향비로 1977년에 발견되었으며, 보물 제614호다. 우왕 13년(1387)에 매향한 곳에 세운 비석으로 4,100인이 결계結契하여 국태민안國泰民安과 미륵보살의 하생下生을 염원하는 총 204자의 축원문이 큰 바위 밑면(길이 1.6미터, 너비 1.2미터)에 새겨져 있다.

정도사 5층석탑 조성 형지기形止記. 1905년 폐사지의 5층석탑을 해체하여 서울 경복궁으로 옮길 때 탑 속의 유합鍮合 안에서 종이에 묵서墨書한 형태로 발견된 문서다. 이 형지기는 54행 2,000여 자에 이르는데, 현종 10년(1019)에서 현종 22년에 이르기까지 경산부京山府의 임내였던 약목군(오늘날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의 향리와 백성들이 자기 지역 내의 정두사에 5층석탑을 건립하는 과정을 기록하였다.

개성 첨성대. 고려 시대에는 천문 관측을 위한 기관으로 서운관이 있었으며 천문 관측도 활발했다. 『고려사』「천문지」에는 일식과 혜성의 출현이나 주요 행성들의 여러 가지 이상 현상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고려 시대 기술관이 있던 일관日官은 해와 달, 별의 움직임을 세밀히 관측했으며 역서曆書를 편찬했다. 사진은 고려의 옛 궁성터인 만월대 서문 밖에 있는 고려 시대 천문 관측 건축물로, 첨성대엿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지정至正 14년(1354) 노비 문서. 고려 공민왕 때의 노비 문서로 「소지所志」4장 「입안立案」 2장 모두 6장으로 되어 있으며 보물 제483호다. 공민왕 때 직장동정直長同正으로 있던 윤광전尹光琠이 소윤少尹의 관직을 가진 자신의 적장자嫡長子 단학丹鶴에게 노비를 상속해주는 증서다.

고려 말 호적. 사진은 1391~1392년 무렵에 작성된 화령부和寧府 호적의 일부로 추정되는 문서다. 닥나무 종이에 쓰여 있으며 원본은 세로 56센티미터, 가로 50센티미터 내외인데, 모두 8폭을 이어 전체 386센티미터이다. 첫째 폭은 사심 이성계가 소유하고 있는 노비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으며, 둘째 폭은 호구 성적을 위한 세부 규정, 셋째 폭에서 여덟째 폭은 실제 시행된 호적의 내용을 담고 있다.

거창 둔마리 고분 벽화의 주악천녀상. 적외선 사진을 통해 남쪽에 3명, 북쪽에 2명 등 주악무도천녀奏樂舞蹈天女들이 그려져 있음이 밝혀졌다. 사진 위쪽의 천녀는 빗어 올려 얹은 머리에 둥근 관을 썼고 얼굴은 타원형이며 입에는 피리를 물고 왼쪽 손은 위로 올려 과일 같은 것이 담긴 접시를 들고 있다. 사진 아래의 또 다른 천녀도 마찬가지로 머리에 보관을 썼으며 입에는 피리를 물고 있다. 천녀들의 상의는 어깨에 스카프 같은 것을 걸쳐서 앞으로 늘어뜨려 불교 계통의 옷이라는 느낌을 준다. 고려 시기 여인상을 엿볼 수 있다.

수덕사 대웅전.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에 있는 건물이며, 국보 제49호로 단층 맞배지붕 주심포柱心包 집이다. 외관은 각 부재部材가 크고 굵기 때문에 안정감이 있으며 측면이 특히 아름답다. 건물의 건립 연대(1308)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다른 건물의 건립 연대를 추정하는 기준을 제공한다.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관촉사에 있는 고려 시대의 석불로, 보물 제218호다. 높이 18.12미터나 되는 커다란 불상이며 관을 쓰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얼굴은 이마가 좁고 턱이 넓으며 옆으로 길게 째진 눈, 넓은 코, 한 일一 자로 꼭 다문 큰 입이 토속적인 느낌을 준다. 목은 굵고 삼도三道가 있으며 귀는 어깨까지 내려와 매달린 느낌이다. 이 불상은 광종 19년(968)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에 있는 고려 중기의 건물로 곡보 제18호다. 정면 5칸, 측면 3칸, 단층 팔작지붕 주심포계 건물이다. 이 불전佛殿은 1916년의 해체, 수리 때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의하면 고려 우왕 2년(1376) 중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구조 수법이나 세부 양식이 묵서명 연대의 건물로는 볼 수 없고, 적어도 13세기 초까지 올려볼 수 있다.

운문사 전경. 경북 청도군 운문면 호거산에 있는 사원으로 진흥왕 21년(560)에 창건된 것을 608년 원광국사圓光國師가, 신라 말기에는 보양국사寶壤國師가 중건하였다. 숙종 10년(1105) 원응국사圓應國師가 중창하였다. 무인 집권 시 민란이 일어났을 때 이곳이 근거지가 되었다.

고려 궁궐 모형도. 축대를 쌓고 그 위 경사면에 건물들을 계단식으로 배치함으로써 여러 건물들이 하나의 건축군으로 묶이고 건물의 지붕이 층층으로 나타나고 있다. 만월대의 중심 축대 위에는 회경전 · 장화전 · 원덕전과 그 밖의 건물들이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고려궁지에 위치한 유수부 이방청.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 19년(1232)에 강화로 수도를 옮기고 고종 21년에 세운 궁궐과 관아 건물이 있던 곳. 정궁 이외에도 많은 궁궐이 있었다. 조선 인조 9년에 이곳에 행궁을 지었으며, 병자호란 때 청군에게 함락되었다. 그 후 다시 강화 유수부 건물을 지었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거의 불타 없어져 지금은 동헌과 이방청만 남아 있다.

대화궁 토성터. 묘청이 서경 천도를 요청하자 인종 6년(1128) 8월에 왕은 서경으로 가서 임원역지에 궁궐을 신축할 명당을 잡게 하고, 11월 공사에 착수하였다. 인종 7년 2월 공사가 끝나자 이를 대화궁이라 하였으며, 인종 9년에는 임원궁성을 쌓고 팔성당八聖堂을 건조하였다. 토성은 대화궁을 둘러싼 성이다.

배 모양이 새겨진 동경. 개성시 용산동에서 나왔으며 지름이 17.2센티미터다. 거울의 뒷면 한가운데에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돛단배를 대범한 솜씨로 돋을새김을 했는데 이것은 고려 사람들의 활발한 해상 활동을 잘 반영하고 있다.

최승로(崔承老, 927~989)는 경주 출신의 유학자다. 그가 성종에게 올린 시무 28조는 대부분 채택되어 고려의 정치 제도와 사회 운영의 기본틀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현전하는 내용은 28조 가운데 22조다.

국자감은 성종 때에 창건하였으며 충렬왕 때 성균관으로 고쳤다. 공민왕 16년(1367) 규모를 확대하여 당대의 유학자 이색과 정몽주를 교관으로 삼아 학생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김육이 중건했다.

고려 불화 「수월관음도」의 공양자상으로 일본 대덕사에 소장되어 있다. 불화에 보이는 여인은 치마 위에 저고리를 착용하고 있으며, 치마에는 꽃무늬로 추정되는 문양이 화려하게 새겨져 있다. 또 뒷머리를 크게 올려 붉은 끈을 매고 있다.

고려 시대 연등회 모습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는 고려 시대 불화 「관경변상도」

영통사대각국사비. 개성직할시 용흥동 영통사 터에 있다. 몸체는 높이 3.06미터, 너비 1.61미터, 두께 24센티미터며, 전체 높이는 4.32미터다. 귀부龜趺 · 비신 · 옥개석玉蓋石으로 구성되어 잇으며, 귀부는 화강석, 옥개석과 몸체는 대리석이다. 비의 글은 당대의 학자이며 명문장가인 김부식이 지었고, 글씨는 오언후가 고려 전기에 유행한 구양순체 해서로 써서 새겼다. 비문에는 어려서 불가에 들어가 송나라에서 천태종과 화엄종을 배우고 돌아와 천태종을 개창하기까지 대각국사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인종 3년(1125)에 세웠다.

보조국사 지눌 영정. 보조국사는 송광사의 제1세 사주社主로서 이 진영은 다른 작품에 비해 독특한 점이 잇다. 주장자를 짚었고 의자도 다른 것에 비하여 웅대하며 장식적인 미가 돋보인다. 또한 옆면에 조각된 화초도는 매우 사실적이다. 안면의 묘사도 대단히 개성이 강하게 표현되어 고승다운 풍모가 잘 나타나 잇다.

『삼국사기』는 명종 4년(1174) 사신을 통해 송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초판을 간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13세기 후반에 성암본誠庵本이 만들어졌는데, 현재는 일부만 일본 궁내청에 소장되어 있다. 다음으로 조선 태조 3년(1394)에 3차 간행, 조선 중종 7년(1512)에 4차 간행이 있었다.

『삼국유사』는 5권 2책으로 구성되었다. 현재까지 고려 시대의 각본刻本은 발견되지 않았고, 완본으로는 조선 중종 7년(1512) 경주부사 이계복李繼福에 의하여 중간重刊된 정덕본正德本이 최고본最古本이며, 그 이전에 판각된 듯한 영본零本이 전한다.

『직지심체요절』. 정식 서명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다. 우왕 3년(1377) 7월 청주목의 교외에 있던 흥덕사에서 금속활자인 주자로 찍어낸 것이 전한다. 상하 2권 중 지금까지 전하는 것은 하권 1책(첫 장은 결락)뿐이며,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이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높이 42.1센티미터, 입지름 6.2센티미터, 밑지름 17센티미터 크기로 간송미술관 소장이며 국보 제68호다. 구연부의 아랫부분에는 꽃무늬를 둘렀고, 굽 위로는 연꽃 무늬를 둘렀다. 몸통 전체에는 구름과 학을 새겨 넣었다. 세련미의 극피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도갑사도선국사비. 도갑사를 창건한 도선국사와 중창한 수미선사의 행적을 기록한 비로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도갑사 경내에 있다. 귀부龜趺와 비신碑身, 이수를 모두 갖춘 전형적인 석비로, 전남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어 있다. 도선국사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걸쳐 활동한 승려로, 그의 풍수지리 사상은 고려 · 조선 시대를 통하여 큰 영향을 끼쳤다.

선암사도선국사진영. 도선은 신라 하대에 성행했던 선종 계통의 승려인데 고려 시대 이후에는 선승보다도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더욱 유명해졌다. 진영은 선암사와 도갑사에 전해오고 있다. 선암사에 있는 진영은 1805년에 화사畵師 도일道日에 의해 조성되었다. 오른손은 자연목의 주장자를 곧게 세워 잡고 왼손은 설법 자세를 취하고 잇으며, 그림 왼쪽에는 높은 탁자 위에 함이 놓여 있다.

해인사 대장경. 부처의 힘으로 몽골 군대를 물리치기 위하여 강화에 대장도감 본사를 두고 진주 등지에 분사分司를 설치, 고종 23년(1236)에 시작하여 고종 38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16년 만에 완성하였다. 이 대장경은 1,500여 종, 6,800여 권으로 경판 수는 81,000여 매에 이른다. 처음 강화도 선원사에 소장되었다가 조선 태조 7년(1398) 서울의 지천사를 거쳐 현재의 해인사로 이관되었다. 국보 제32호이며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안향 초상화. 안향의 영정은 경북 영주시 소수서원에 소장되어 있으며 국보 제111호다. 비단에 채색하였으며, 충숙왕 5년(1318)에 제작되었다. 충숙왕이 안향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궁중에서 일하던 원나라 화가에게 그리게 한 것으로 반신상半身像이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왼쪽을 바라보는 모습을 그렸으며, 붉은 선으로 얼굴의 윤곽을 나타내었다. 시선의 방향과 어깨선에서 강직함을 엿볼 수 있다.

이제현 초상. 화폭 상단에 적힌 제문題文에 따르면 충숙왕 6년(1319) 이제현 나이 33세 때 충선왕을 시종하여 중국을 유람한 일이 있었는데, 충선왕은 진감여陳鑑如라는 원나라 화가를 시켜 이 그림을 그리게 했다고 한다. 또한 당대의 석학인 탕병용湯炳龍이 찬贊을 지었다. 심의深衣를 입고 공수拱手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인물을 중심으로 위쪽에는 제문과 찬문을 여유있게 배치했다.

이색 영정. 이색(李穡, 1328~1396)은 본관이 한산韓山이고 호가 목은牧隱이며, 시호가 문정文靖이다. 이제현의 문하생이며,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공민왕 16년(1367) 대사성이 되자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많은 제자를 길러내 성리학 발전에 공헌했다. 위화도 회군 이후 실권을 잡은 이성계를 반대해 유배 당하기도 했다.

『삼봉집』.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 성리학자인 정도전(鄭道傳, 1337~1398)의 시문집이다. 14권 7책이며 권근이 서문을 썼다. 『삼봉집』 권9에는 『불씨잡변』이 실려 있는데, 불씨윤회설, 인과설, 심성변心性辨, 불씨의 자비, 지옥설, 화복설, 걸식 등에 대해 비판했다. 불법이 중국에 들어온 후 불佛을 섬기다가 화를 입은 실례를 들었으며, 끝으로 불교는 이단이므로 배척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배불排佛의 정당성을 역설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문익점의 목화 시배지. 고려 말 문익점이 목화 재배를 시작한 곳으로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있으며, 사적 제108호로 지정되었다. 공민왕 12년(1363) 문익점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할 때 가져온 목화씨를 장인인 정천익에게 부탁하여 이곳에서 재배하도록 했다. 처음 재배한 이곳은 배양培養마을로 불린다.

강감찬이 태어난 낙성대.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있는 강감찬의 출생지로 서울유형문화재 제4호다.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진 날 장군이 태어났다고 하여 낙성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1974년 6월 10일 완공한 사당 안국사安國祠 안에 강감찬 장군의 영정이 있다.

윤관(?~1111) 영정. 1910년 무렵 후손들에 의하여 제작되었으며, 1987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0호로 지정되었다.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한 이후 예종 때에 이르기까지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여진과의 싸움에서 많은 공을 세운 명신이며 명장이다.

스페인의 안토니오 에레라가 제작한 서인도제국 지도가 들어 있는 책의 초판본 표지(1601). 에레라는 지도 동쪽에 한국과 일본을 그려넣었으며, 한국을 섬으로 표현하고 'Cory'라는 명칭을 붙였다.

제주도 항파두리성. 제주도 북제주군 애월읍 고성리에 있다. 해발 190~215미터 지점에 있는 항파두리 토성은 삼별초가 원종 12년(1271) 9월에 제주도로 들어와 군사력을 재정비하는 시기에 축성한 것이다. 본래 토성으로 총길이 6킬로미터에 이르는 외성을 쌓고, 안쪽에 다시 석성으로 800미터의 내성을 쌓은 이중 성곽이었으며, 각종 방어 시설뿐 아니라 궁궐과 관아까지 갖춘 요새였다.

 왕건 청동상. 왕건릉(현릉) 확대 공사 과정에서 1993년에 출토되었다. 높이는 발바닥에서 내관 뒷면 정중앙 상단까지 135.8센티미터다. 머리에 쓰고 있는 관은 황제가 쓰는 통천관通天冠이다. 고려 광종 때 조성되어 개경의 봉은사에 모셔져 있다가 조선 세종 때 왕건릉 옆에 묻은 것으로 추정된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