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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 18. 14:42 내가 읽은 책들/2019년도

2019-005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1

 

 

양정무 지음

2017, 사회평론

 

대야도서관

SB114046

 

650.4

양74ㅁ   1

 

원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미술

미술하는 인간이 살아남는다

 

몰라서 난처했던 당신을 위한

미술 이야기

 

유명하다는 전시회에 가봤지만 다리만 아팠던 당신,

박물관 가이드의 설명을 열심히 들어도 머리가 하얘지는 당신,

맘먹고 미술책을 펼쳐도 열 페이지를 넘기기 힘든 당신,

안내서의 해설이나 인터넷 자료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당신,

미술이나 여행, 역사 이야기만 나오면 온화한 표정으로 과묵해지는 당신,

그래서 제대로 배우고 싶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 당신을 위한 책!

 

'인문학의 꽃' 미술의 세계에 들어선 당신에게

 

미술은 원초적이고 친숙합니다. 누구나 배우지 않아도 그림을 그리고, 지식이 없어도 미술 작품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미술은 우리에게 본능처럼 존재합니다. 하지만 미술의 역사는 그 자체가 인류의 역사라고 할 만큼 길고도 복잡한 길을 걸어왔기에 어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단순해 보이는 미술에도 역사의 무게가 담겨 있고, 새롭다는 미술에도 역사적 맥락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미술을 본다는 것은 그것을 낳은 시대와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말이며, 그 시대의 영광뿐 아니라 고민과 도전까지도 목격한다는 뜻입니다.

선진국들이 박물관과 미술관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박물관과 미술관을 통해 세계와 인류에 대한 자신의 이해의 깊이와 폭을 보여주며, 인류의 업적에 대한 존중까지도 담아냅니다.

하루 살기에도 바쁜 것이 우리네 삶이지만 미술 속에 담긴 인류의 지혜를 끄집어 낼 수 있다면 내일의 삶은 다소나마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미술에 담긴 원초적 힘을 살려내는 것, 미술에서 감동뿐 아니라 교훈을 읽어내고 세계를 보는 우리의 눈높이를 높이는 것, 그것이 이 책의 소명입니다.

- 양정무 교수, 미술 이야기를 시작하며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

 

어린 시절, 다락방에서 발견한 백과사전의 삽화에 마음을 빼앗긴 후 미술을 운명이라 믿게 됐다.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미술사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런던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이자 한국예술연구소 소장이다. 19대 한국미술사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존스홉킨스 대학교와 메릴랜드 미술대학에서 방문교수로 미술사를 연구하는 등 학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서양 미술의 발전을 상업주의와 연결시킨 연구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유학시절 도서관보다 박물관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미술관, 박물관 가이드를 가장 재미있게 하는 학생으로 유명세를 탔다. 다양한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미술사를 풀어내는 데 일가견이 있어서 지금도 여러 단체와 기관에서 강의 요청이 끊이지 않는 인기 강사다.

‘인문학의 꽃’으로 불리는 미술사를 우리 사회에 알리는 데 관심이 많다. 국립중앙박물관 강의를 비롯해 다양한 대중강연과 학술활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네이버, 매경이코노미 등 여러 매체에 관련 글을 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시간이 정지된 박물관 피렌체』, 『상인과 미술』, 『그림값의 비밀』이 있으며 번역한 책으로는 『신미술사학』, 『조토에서 세잔까지-서양회화사』, 『그리스 미술』이 있다.

 

차례

 

  미술 이야기를 시작하며

 

I 원시미술 - 미술을 아는 인간이 살아남는다

01 섹시한 돌멩이의 시대

02 그들은 동굴에서 무엇을 했을까

03 동굴벽화에 숨겨진 미스터리 코드

04 인류가 4만 년 동안 그려온 이야기

05 우리 가까이의 원시미술

 

II 이집트 미술 - 그들은 영생을 꿈꿨다

01 3000년 동안 최강대국의 지위를 누린 나라

02 변하지 않는 완벽한 세계를 그리다

03 피라미드가 들려주는 불멸의 꿈

04 네바문에서 투탕카멘까지, 고대 문명의 르네상스

05 너무나 화려했던 황혼의 빛

06 미술의 영원한 주제, 삶과 죽음

 

III 메소포타미아 미술 - 삶은 처절한 투쟁이다

01 수로가 열어준 문명의 강

02 신전을 짓고 제물을 빚어 번영을 기원하다

03 광야에서 도시혁명이 시작되다

04 권력의 목소리, 권력의 얼굴

05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결정판

 

작품 목록

사진 제공

더 익어보기

 

프랑스 내륙의 천연 돌다리 퐁다르크는 여름이면

사람들로 북적대는 이름난 휴양지다.

그러나 아직 빙하기가 끝나지 않았을 3만 년 전으로 돌아가면,

우리 조상은 이곳에서 추위와 짐승들에 맞서

사투를 벌여야 했을 것이다. 인류는 그 모든 위협을 극복하고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이곳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깊은 동굴 속에 그 비결이 숨어 있다.

- 퐁다르크, 프랑스

 

예술이 삶을 모방하는 게 아니라

삶이 예술을 모방한다.

- 오스카 와일드

 

빗살무늬토기, 서울 암사동 집터에서 출토, 신석기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우리나라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빗살무늬토기 제작 과정

 

주먹도끼, 연천 전곡리 유적에서 출토, 구석기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연천에서 발굴된 이 주먹도끼로 인도 동쪽에는 주먹도끼를 만들 만한 능력이 없었다는 학설이 뒤집어졌다.

 

돌도끼 제작 과정

존 프레레, 「서퍽 지역 혹슨에서 발견된 부싯돌 무기에 대한 기술」, 1800년 1797년 골동품 수집가 존 프레레는 약 40만 년 전에 만들어진 주먹도끼를 발견하고 세상에 알렸지만 그 발견은 19세기 중엽에야 인정받았다.

 

광고는 20세기의 동굴벽화다.

- 마셜 맥루한

 

라스코 동굴이 있는 몽티냑 몽티냑은 와인으로 유명한 보르도에서 약 180킬로미터 들어간 내륙에 위치한다.

라스코 동굴 입구 단면도

황소의 방, 프랑스 라스코 동굴, 1만7000년 전 라스코 동굴의 입구에 들어서면 황소의 방이라 불리는 넓은 홀을 만날 수 있다. 대상을 역동적으로 표현한 그림 솜씨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어마어마한 크기에 놀라게 된다.

황소의 방 파노라마, 라스코 동굴, 1만 7000년 전

입으로 안료를 뿌리는 기법으로 채색된 말

찰스 나이트, 퐁데고메에서 그림을 그리는 크로마뇽인 예술가들, 1920년, 미국자연사박물관 구석기인이 상체를 벗고 있는 것으로 묘사했지만, 동굴벽화가 그려지던 당시는 빙하기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온몸을 다 가린 옷차림이었을 확률이 높다.

라스코 동굴에서 출토된 기름 램프, 1만7000년 전 우묵한 곳에 기름을 담고 심지를 만들어 불을 붙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엑시알 갤러리의 입구, 라스코 동굴, 1만7000년 전 황소의 방을 나와 곧바로 직진하면 엑시알 갤러리의 입구가 나온다. 다양한 동물의 묘사가 벽면의 자연적인 생김새와 어울려 역동적인 효과를 연출한다.

아일랜드 엘크, 라스코 동굴의 엑시알 갤러리, 1만7000년 전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동물을 볼 수 있다는 점은 동굴벽화의 중요한 감상 지점 중 하나다.

앱스에서 샤프트로 내려가는 사다리, 라스코 동굴, 1만7000년 전 둥근 천장 아래로 샤프트로 내려가는 가파른 철제 사다리가 설치돼 있다.

내장이 튀어나온 들소와 다친 남자, 라스코 동굴의 샤프트, 1만7000년 전 황소와 사람이 만들어내는 서사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라스코 동굴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수수께끼 같은 그림이다.

네이브, 라스코 동굴, 1만7000년 전 복도를 사이에 두고 왼쪽에는 검은 암소, 오른쪽에는 물을 건너는 사슴 떼가 묘사돼 있다. 원래는 복도 바닥이 더 높았지만 사람이 다니기 편하도록 땅을 평평하게 골랐던 듯하다.

사슴 떼, 라스코 동굴의 네이브, 1만7000년 전 바위 형태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물을 건너는 사슴을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검은 암소, 라스코 동굴의 네이브, 1만7000년 전 검은 암소는 흔히 풍요의 상징으로 여겨지곤 한다.

두 마리의 유럽 들소, 라스코 동굴의 네이브, 1만7000년 전 유럽 들소 두 마리가 각자 다른 방향으로 뛰어가는 듯하다. 두 들소의 뒷다리가 겹쳐져 있어 공간감과 깊이감을 준다.

라스코 동굴 Ⅱ를 보수하는 화가들 1983년 개장한 라스코 동굴 Ⅱ도 만들어진 지 수십 년이 지났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보수가 필요하다.

베제레 계곡의 절벽 원시시대 베제레 지역은 풍요로운 곳이었기에 다양한 동물들의 교차점으로 기능했다.

베제레 계곡의 절벽을 활용해 지은 집 베제레 계곡의 절벽 아래에서는 구석기시대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이 살고 있다.

레제지 마을의 크로마뇽 호텔 실제로 호텔 뒤에는 현생인류 호모 사피엔스의 일종인 크로마뇽인의 유적이 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두개골 두 발로 걸을 수 있었던 원인猿人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중 제일 처음으로 발굴된 화석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복원도

네안데르탈인을 복원한 밀랍 인형

호모 사피엔스의 이동 경로 오랜 세월 아프리카 대륙에 머물던 호모 사피엔스는 10만 년 전에서 4만 년 전 사이, 네안데르탈인이 먼저 정착해 있던 유럽 대륙으로 빠르게 퍼져나간다.

네안데르탈인 석상 레제지국립선사박물관 앞에는 과거 자신이 누비고 다녔던 베제레 계곡을 응시하는 듯한 네안데르탈인이 육중하게 서 있다.

파블로 피카소, 황소(state I)(왼쪽)와 황소, 1만4000년 전,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 일부(오른쪽) 왼쪽의 작품은 '황소' 연작 중 첫 번째 작품으로 피카소는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를 보고 영감을 얻어 이 그림을 그렸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

들소들, 알타미라 동굴, 1만4000년 전 구석기 화가는 알타미라 동굴 천장의 들어가고 나온 표면을 이용해 다양한 자세의 황소를 역동적으로 그려냈다.

점박이 말과 손자국, 프랑스 페슈 메를 동굴, 2만2000년 전 점박이 말 두 마리가 각자 반대 방향으로 머리를 돌리고 있다. 고고학자들은 당시 이 지역에 점박이 말이 서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퐁다르크 천연 돌다리 퐁다르크가 있는 프랑스 중남부 지역에는 우리나라 중부 지역처럼 석회암 침식으로 만들어진 깊고 아름다운 동굴이 많다.

매머드 형상의 손바닥 자국, 프랑스 쇼베 동굴, 3만2000년 전 쇼베 동굴 입구에는 자신을 증명하듯 손바닥 자국이 집요하게 찍혀 있다. 이 손바닥 자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동굴곰, 쇼베 동굴, 3만2000년 전 다소 귀여운(?) 모습으로 표현됐지만, 실제 동면하고 있던 동굴곰은 머물 동굴을 찾아다니던 인간에게 큰 위험 요소였을 것이다.

동굴곰의 머리뼈가 놓인 제단, 쇼베 동굴, 3만2000년 전 발견 당시 삼각형의 돌 위에 마치 제단에 올린 것처럼 동굴곰의 머리뼈가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세 마리의 사자, 쇼베 동굴, 3만2000년 전 연속 사진을 찍어놓은 것처럼 사자 머리 세 개를 겹쳐 그려놓아 운동감이 느껴진다.

마지막 방, 쇼베 동굴, 3만2000년 전

종유석에 그려진 반인반수 쇼베 동굴 가장 깊숙한 곳에서는 두 반인반수가 겹쳐 그려진 그림을 만날 수 있다.

 

최고의 예술은 언제나 가장 종교적이고

최고의 예술가는 언제나 독실한 신자다.

- 에이브러햄 링컨

 

사냥 당한 소, 프랑스 니오 동굴, 1만1000년 전 창 또는 화살에 찔린 동물이 묘사돼 있다.

기우제를 묘사한 산족 벽화 산족은 소를 잡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기우제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에서 소는 진짜 소가 아니라 '비의 신'을 상징한다.

내장이 튀어나온 들소와 다친 남자, 라스코 동굴의 샤프트, 1만7000년 전

안드레아 만테냐, 세바스티아노 성인, 1480년, 루브르박물관 중세에서 화살은 종종 질병을 상징하는 은유로 사용됐다. 특히 흑사병이 발생했을 때 이 은유는 세바스티아노 성인을 통해 크게 유행했다.

앙리 브레이, 주술사, 1920년경 프랑스 세 형제 동굴에 그려진 동굴벽화를 재현한 그림으로, 사슴과 인간이 결합되어 주술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산족 주술사와 춤을 추는 사람들 중앙의 동물처럼 기어 다니는 주술사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다.

니콜라스 빗선, 시베리아의 샤먼, 1692년 인류학자가 최초로 기록한 시베리아 지역 주술사의 모습이다. 머리에 사슴뿔을 달고 몸에 짐승 가죽을 둘렀다.

사자 인간, 4만 년 전, 독일울름박물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조각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발렌도르프의 비너스, 2만8000년 전, 빈자연사박물관 이 조그만 조각상은 구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미술품 중 하나로 다양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발렌도르프의 비너스

흙으로 빚은 여인상, 5000년 전, 국립중앙박물관

홀레펠스의 비너스, 3만5000년 전, 블라우보이렌선사박물관

차탈회위크 유적지 터키 아나톨리아 고원에 있는 33만 평 규모의 신석기시대 유적지로, 201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차탈회위크 복원도 차탈회위크 유적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복원한 모습이다. 언덕을 따라 집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계단식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집과 집 사이의 공간이 없으며, 출입은 옥상으로 했다.

두 개의 사자 장식을 한 의자에 앉은 어머니 신, 8000년 전, 아나톨리아문명박물관 차탈회위크에서 발견된 육중한 몸의 여신상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만든 구석기시대의 신앙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음을 암시한다.

복원한 차탈회위크의 예배소 벽에 걸린 황소 모형을 통해 구석기시대부터 존재했던 황소 숭배 신앙이 이 시대까지 지속됐음을 알 수 있다.

황소 벽화, 차탈회위크 유적지에서 출토, 8000년 전 거대한 황소를 사냥하는 그림으로 추정된다.

위 황소 벽화의 복원도

 

예술은 인간의 본성이요, 자연은 신의 예술이다.

- 필립 베일리

 

나미비아 칼라하리 사막 부근에 살고 있는 산족 우리에게는 부시맨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산족은 아직도 남아프리카 곳곳에 1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호주 카카두국립공원의 노우랜지 록 노우랜지 록은 아주 오래전부터 호주 원주민들에게 신성한 장소로 인식돼 온 공간으로, 깎아지른듯한 절벽이 인상적이다.

엑스레이 기법으로 그려진 벽화, 카카두국립공원, 노우랜지 록 이 그림에는 대상의 내부를 그대로 그린 것 같은 엑스레이 기법이 잘 드러나 있다.

호주 원주민의 창세 신화, 카카두국립공원, 노우랜지 록

미미 신, 카카두국립공원, 우비르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그려진 미미는 생긴 것처럼 매우 변덕스러운 신으로 전해진다.

호주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울룰루 세계에서 가장 큰 바위인 울룰루에 가면 시간과 날씨의 년화에 따라 극적으로 달라지는 웅장한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소용돌이 모양의 추상 벽화, 울룰루-카타추타국립공원 원주민만이 알고 있는 추상적인 기호가 가득하다. 울룰루에 가면 현지 원주민이 직접 벽화를 소개해주는 관광 코스가 마련돼 있다.

손과 사냥도구가 그려진 벽화, 카나본국립공원 손자국과 함께 그려진 부메랑, 그물 등의 사냥도구가 그림을 그린 부족 공동체의 정체성이라고 보기도 한다.

잭슨 폴록, 넘버 1, 1948년, 뉴욕현대미술관 미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인 잭슨 폴록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그림 오른쪽 위에 잭슨 폴록의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마왈란 마리까, 하늘에서 본 시드니, 1963년, 호주국립박물관 호주 원주민 화가 마왈란 마리까는 비행기에서 바라본 시드니를 호주 원주민만의 표현 방식으로 소화해냈다.

오귀스트 앵그르, 물에서 태어난 비너스, 1848년, 프랑스콩데미술관 18세기 서구 화단은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를 스린 그림만을 아름답다고 인정했다.

제퍼슨 데이비드 칼판트, 줄리앙 아카데미의 부그로 아틀리에, 1891년, 드영미술관 19세기에 확립된 미술 아카데미의 전통은 아직도 우리나라 미술 교육에 짙게 남아 있다.

폴 고갱,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1891년, 오르세미술관 타히티로 떠나기 전의 자신을 그린 작품이다. 고갱의 뒤편 왼쪽에는 1889년 완성한 '황색 그리스도', 오른쪽에는 1889년 완성한 '그로테스크한 얼굴 형태의 항아리'가 그려져 있다.

폴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8년, 보스턴미술관 이 작품은 고갱이 타히티 섬에서 그린 그림 중 하나다. 개인적인 일로 괴로워하며 완성해낸 그림으로, 제목에서 느껴지듯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가로 크기가 무려 3미터70센티미터가 넘는 대작이다.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1907년, 뉴욕현대미술관 종래의 모든 조형 규칙을 파괴한 피카소의 파격적인 이 그림은 당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오른쪽 두 여인의 얼굴은 입체파 탄생의 시발점으로 평가받는다. 그림의 모델은 바르셀로나의 아비뇽 거리에서 몸을 팔던 여성이라고 전해진다.

에른스트 키르히너, 모리츠부르크의 목욕하는 사람들, 1909년, 테이트모던미술관 모든 걸 벗어던지고 느긋하게 쉬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른하게 느껴진다.

아프리카 가면(왼쪽)과 '아비뇽의 처녀들' 부분(오른쪽)

 

동굴벽화를 그리든 인터넷을 이용하든

인간은 언제나 비유와 우화를 통해

역사와 진실을 이야기해왔습니다.

우리는 뿌리까지 이야기꾼입니다.

- 비번 키드론

 

울산 태화강 상류 울산 지역의 공업화로 심각하게 오염됐던 태화강은 최근 각계의 노력으로 옛날의 맑은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어 가볼 만하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보정한 이미지 단단한 바위에 뾰족한 도구로 300개가량의 형상을 새겨 놓았다.

장생포고래박물관

빗살무늬토기,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에는 곡식을 저장할 목적만으로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무늬가 과하게 들어가 있다.

마왈란 마리까, 하늘에서 본 시드니, 1963년

 

 

잔잔하게 흐르는 나일 강은

여유롭게 뱃놀이를 즐기며 이집트의 풍광을

만끽하기 좋은 관광지다. 하지만 5000년 전 이집트인은

매년 반복되는 나일 강의 범람처럼 인간의 삶도

생과 사를 오가며 영원하리라 믿었다.

범람이 잦아들면 비옥해지는 토지처럼

사후의 삶도 풍요로우리라 생각했다.

- 나일 강 유역, 이집트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저세상에 가면 신이 두 가지

질문을 할 거라고 믿었지.

'인생에서 기쁨을 찾아냈는가?'

'당신의 인생이 다른 사람을 기쁘게 했는가?'

- 영화 「버킷 리스트」에서 카터 챔버스의 대사

 

기자의 대 피라미드, 기원전 2530~2460년경, 기자 낙타 행렬과의 비교를 통해 피라미드의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다.

나일 강 유역에 새겨진 나일로미터 이집트인들은 나일로미터로 나일 강의 범람 수위를 쟀다.

센네젬의 무덤 벽화(부분), 기원전 1300년~1200년경, 테베 남자는 소를 몰며 밭을 갈고 여자는 그 뒤를 따르며 씨를 뿌리고 있다. 소와 나무의 표현이 사실적이다.

네페르마트와 왕비 이텟의 무덤 벽화(부분), 기원전 2600년경, 이집트박물관 인물의 이목구비 등 구체적인 형태는 훼손되었지만 새를 잡고 밭을 가는 행위는 잘 드러나 있다.

아스완 하이 댐 반복되는 나일 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건설한 세계 최대 규모의 댐이다.

트라야누스 황제가 세운 신전, 100년경, 아길키아 섬 규모는 작지만 이집트 고유의 파피루스 모양으로 장식한 기둥이 눈에 띈다.

칼립샤 신전 부조, 기원전 20년, 아스완 로마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 파라오처럼 표현되어 있다. 로마가 이집트 문화를 존중했음을 알 수 있다.

 

유행은 한때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

- 이브 생 로랑

 

아부심벨 신전, 기원전 1250년경, 아스완 바위산을 깎아 만든 신전에서 위엄이 느껴진다. 관람객은 람세스 2세의 거상 사이에 난 문을 통해 신전에 입장한다.

구슬과 신성문자로 장식한 고대 이집트 목걸이, 제작연도 미상, 베를린박물관 각종 상징물 모양의 작은 장식이 정교하게 연결되어 있다. 화려한 색채가 시선을 끈다.

투탕카멘 펜던트, 기원전 1350년경, 이집트 박물관 각종 상징물이 완벽한 수준으로 조화를 이루었다.

아메넴헷 왕과 헤맷 왕비의 무덤 벽화, 기원전 1800년경, 리슈트 정면성의 원리에 따라 그려진 왕과 왕비, 각종 물건들이 보인다. 채색이 지금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다.

나르메르 왕의 팔레트, 기원전 3100년경, 이집트박물관 이집트박물관에 간다면 꼭 보아야 하는 매우 중요한 유물이다. 몸체부분이 세 단으로 나뉘어 있고 단마다 그림이 새겨져 있다.

아멘호텝 3세의 신하 라모세의 가족 무덤에 새겨진 부조, 기원전 1355년경, 테베 짙은 눈화장이 두드러진다. 얼굴은 측면, 눈은 정면으로 표현되어 있다.

나르메르 왕의 팔레트(뒷면, 부분) 각각 크기가 다른 세 명의 인물과 커다랗게 그려진 매가 화면 곳곳을 차지하고 있다.

네바문 무덤 벽화의 악사와 무희, 기원전 1400년경, 영국박물관 자유롭고 유연한 동작으로 춤을 추는 무희와 정면을 바라보며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의 모습에서 정면성의 원리는 높은 신분의 인물에게만 적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메넴헷 왕과 헤맷 왕비의 무덤 벽화(부분, 왼쪽)와 네바문 무덤 벽화의 악사와 무희(부분, 오른쪽) 신분이 높은 사람을 그릴 때는 정면성의 원리에 충실히 따랐지만 신분이 낮은 사람은 정면성의 원리에 따르지 않았다.

나르메르 왕의 비서실장(뒷면, 부분) 한 손에 나르메르 왕의 슬리퍼를 든 '비서 실장'이 작게 그려져 있다.

거대한 매가 당당한 모습으로 파피루스 위에 서 있다. 상 이집트(매)가 하 이집트(파피루스)를 정복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집트 항공기의 날개에 그려진 호루스 호루스는 지금도 이집트의 상징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깃발을 든 병사들 뒤로 거대하게 조각된 나르메르 왕이 걷고 있다. 오른쪽에는 목이 잘린 적군의 시체가 즐비하다.

나르메르 왕의 팔레트(앞면, 부분) 거대한 황소가 성벽을 파괴하고 있다. 황소의 발 아래에는 쓰러진 적군이 짓밟히는 모습이 보인다.

나르메르 왕의 팔레트(뒷면, 부분) 섬세한 황소 머리 문양이 장식된 나르메르 왕의 의복에 실제 황소 꼬리가 매달려 있다.

나르메르 왕의 팔레트(앞면, 부분) 팔레트의 맨 윗부분의 황소 두 마리 사이에 물고기처럼 생긴 신성문자가 보인다. 신성문자는 나르메르 왕의 이름으로 추정된다.

헤시라의 초상, 기원전 2610년경, 이집트박물관 커다란 나무 패널에 새겨진 조각으로, 이집트의 서기이자 의사였던 헤시라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파쉐리 미라, 기원전 664~332년경, 루브르박물관 얼굴과 온몸은 붕대로 감았으며 교차하여 모은 팔 위로는 호루스 모양의 장식을 덮었다.

영국박물관에 전시된 미라를 둘러싼 관람객 이집트인의 내세관에 따르면 박물관에 전시된 미라와 미라를 구경하는 관람객 사이에는 아무런 경계도 없다.

라호테프와 그의 부인 네페르트, 기원전 2570년경, 이집트박물관 부부가 나란히 앉아 있는 인체 조각상이다.

라호테프와 그의 부인 네페르트(부분) 두 조각 다 눈을 그려 넣는 대신 유리알을 사용했다. 그 덕분에 조각이 사람 같은 눈빛을 지니게 되었다.

서기 좌상, 기원전 2450년경, 루브르박물관 책상다리를 하고 글을 쓰는 모습이 마치 살아 있는 듯 생생하다. 눈에 유리알이 박혀 있어서 형형한 눈빛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소인 세넵과 그의 가족, 기원전 2200년경, 이집트박물관 위쪽에는 부부가, 아래쪽에는 두 아이가 조각되어 있다.

러노페르의 조각, 기원전 2500년경, 이집트박물관 입상이며 뒤쪽의 기둥과 조각이 발을 딛고 있는 받침대가 그대로 남아 있다.

 

모두가 시간을 두려워하지만

피라미드만이 세월을 비웃는다.

- 아라비아 속담

 

세프세스카프 마스타바, 기원전 2500년경, 사카라 주로 귀족의 무덤으로 만들어진 마스타바는 고대 이집트의 초기 무덤 양식이다.

조세르 왕의 계단식 피라미드, 기원전 2660년경, 사카라 마스타바보다 훨씬 커진 규모가 눈에 띈다. 계단식 피라미드는 훗날 대 피라미드로 발전한다.

기자 대 피라미드, 기원전 2530~2460년경, 기자 세 개의 거대한 피라미드가 모여 있다. 우리는 보통 '피라미드'라고 하면 이 모습을 떠올린다. 단 한 사람을 위한 무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규모다.

조세르 왕의 좌상, 기원전 2610년경, 이집트박물관 위엄을 갖춘 다소 경직된 자세로 제작되었다. 원래 유리나 수정으로 눈을 만들어 넣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는 소실되었다.

기자의 대 피라미드, 기원전 2530~2460년경, 기자 각각 쿠푸(왼쪽으로부터 첫번째), 카프레(두번째), 멘카우레 왕(세번째)의 무덤이며 가장 큰 것이 쿠푸 피라미드, 윗부분에 마감재가 남은 것이 카프레 피라미드다.

쿠푸 피라미드의 내부 구조

진시황릉 근처 병마용갱에서 발견된 진흙 병사들, 기원전 246~208년, 중국 산시성 이곳에는 6000개 이상의 병사 모형이 묻혀 있었다고 한다. 이 병사들의 생김새는 모두 다르다.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 표면

멘카우레 왕과 하토르 여신, 노메의 의인화 형상, 기원전 2460년, 이집트박물관 왕과 여신들의 당당함이 느껴진다.

카프레 왕의 조각상(부분), 기원전 2500년경, 이집트박물관 왕의 어깨 뒤로는 매의 형상을 한 호루스가 있다. 이 호루스는 왕을 수호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님과 동시에 실질적으로 조각상의 목을 받치는 역할을 한다.

조세르 왕의 좌상(부분) 카프레 조각상과 비교하면 거친 마감과 다소 부자연스러운 신체 표현이 엿보인다.

대 피라미드 앞에 위치한 스핑크스, 기원전 2650년경, 기자 얼굴 부분이 많이 훼손되었지만 그 규모와 생김새에서 당당한 위용이 느껴진다. 마치 파라오의 무덤을 지키는 파수꾼 같다.

스핑크스와 꿈의 석비, 기원전 2650년경, 기자 앞쪽에 자리한 석비는 투트모세 4세가 세운 기념비다. 여기에는 1000년 동안 모래언덕 아래 묻혀 있던 스핑크스를 발굴한 사연이 적혀 있다.

카프레 왕의 계곡신전 기둥, 기원전 2500년경, 기자 돌을 깎아 만든 기둥과 벽면이 정확한 직각을 이루고 있다. 고대 이집트의 기술력을 알 수 있다.

태양의 배, 기원전 2650년경, 기자 카프레 신전에서 발굴했으며 모든 부속이 조각난 채로 발견되었다. 길이가 약 4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배다.

고대 이집트 신성문자 각종 새, 사람, 눈 등 여러 모양의 그림으로 이루어진 문자다. 이 문자는 19세기에 들어서야 해독되었다.

낙소스의 스핑크스, 기원전 570년경, 델포이고고학박물관 그리스인들은 이집트 문명을 폄훼하려는 의도로 몇몇 이집트 신의 이름을 부정적으로 지었다.

 

부귀에는 날개가 달려있고

권세는 하룻밤의 꿈이다.

- W. 쿠퍼

 

신왕국 왕들의 무덤이 있는 왕들의 계곡, 기원전 1519~1000년경, 룩소르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사막 계곡 같지만 곳곳에 파라오들이 묻혀 있다.

네바문 무덤벽화, 늪지의 새 사냥, 기원전 1350년경, 영국박물관 선명한 색채와 세밀하게 표현된 동물들의 모습이 인상 깊다.

네바문 무덤벽화, 연못이 있는 정원, 기원전 1350년경, 영국박물관 연못을 둘러싼 나무들과 연못 안 다양한 물고기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나무 열매도 다채롭게 채색되어 있다.

연못이 있는 정원(부분) 왼쪽, 오른쪽의 새와 물고기가 각각 왼쪽, 오른쪽을 향해 있다. 또 새는 한쌍, 물고기는 한 마리씩 그려져 있다. 약간의 예외도 있어서 더욱 흥미롭다.

사자의 서(부분), 기원전 1275년경, 영국박물관 망자의 영혼이 신들의 안내를 받으며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 그림 속에서 차분함과 엄숙함이 느껴진다.

사자의 서(부분) 망자를 안내하는 호루스와 심판관의 자리에 앉아 있는 저승의 왕 오시리스의 모습이 보인다.

하트셉수트 장제전 조각, 기원전 1480년경, 데이르 알 바하리 조각상의 얼굴이나 외형에 여성 파라오의 정체성이 반영되었으며 파라오의 상징물을 양손에 들고 있다.

하트셉수트 장제전, 기원전 1460년경, 데이르 알 바하리 자연 암반을 깎아 만든 엄청난 규모의 사원이다. 3층으로 되어 있는 이 사원은 균형잡힌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우아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품고 있다.

하트셉수트 장제전 입구, 기원전 1460년경 자신의 사후를 위해 거대한 사원을 지을 만큼 강력한 권력을 가졌던 하트셉수트 여왕이 웅장하고 위엄 있는 파라오의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아멘호텝 4세 조각, 기원전 1350년경, 이집트박물관 고대 이집트 역사상 가장 개혁적인 왕이었던 아멘호텝 4세의 조각상이다. 그의 개혁 정책으로 미술에도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아멘호텝 4세 조각, 기원전 1350년경, 이집트박물관 이 조각상에서 아멘호텝 4세는 여성인지 남성인지 알아보기 어려운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고대 이집트 미술에서 전무후무한 조각이라고 할 수 있다.

네페르티티로 추정되는 조각상, 기원전 1350년경, 루브르박물관 아멘호텝 4세의 치세 기간 미술에 나타난 변화를 잘 보요주는 조각상으로, 신체표면과 옷주름이 인상적이다.

아크나톤 가족의 모습을 담은 부조, 기원전 1350년경, 베를린이집트박물관 아멘호텝 4세와 그의 부인 네페르티티 왕비, 딸들이 단란한 한때를 보내고 있다. 태양의 신 아톤의 손길이 아멘호텝 4세 가족을 축복하듯이 보듬어준다.

네페르티티 왕비의 흉상, 기원전 1340년경, 베를린이집트박물관 깔끔한 형태와 엄숙한 표정에서 왕비의 위엄이 느껴진다. 목의 길이는 비현실적으로 길지만 머리에 쓴 관과 어우러져 균형을 이룬다.

네페르티티 왕비 흉상(정면), 기원전 1340년경, 베를린이집트박물관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 기원전 1330년경, 이집트박물관 투탕카멘 미라의 얼굴을 덮고 있던 이 화려한 황금마스크에는 무려 11킬로그램의 금이 사용되었으며 각종 화려한 보석들로 장식되었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견된 궤짝, 기원전 1330년, 이집트박물관 이 궤짝에는 전차를 타고 전장을 누비는 용맹한 투탕카멘의 모습이 묘사되었다. 적군들은 모두 쓰러지거나 도망치고 있다.

투탕카멘의 황금 의자, 기원전 1335년경, 이집트박물관 황금으로 만들어진 투탕카멘의 의자는 기본적인 구조와 장식 측면에서 모두 높은 완성도를 보인다. 의자 다리의 형태, 뒷면과 옆면의 장식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의자의 뒷부분과 양옆에는 고개를 들고 있는 코브라의 모습이 장식되어 있다. 이 코브라는 파라오를 보호하는 상징물이다.

의자 등받이에는 태양신 아톤에게서 나오는 빛이 투탕카멘과 그의 부인을 감싸고 있다. 투탕카멘은 이집트 역사에서는 가장 불운했던 왕이지만 후대인에게는 화려한 미술 작품의 주인공으로 기억된다.

 

모든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다.

-세네카

 

람세스 2세의 미라, 이집트박물관 80년의 재위동안 신왕국의 번영을 이끌었던 람세스 2세의 생전의 권위와 미라의 모습이 극적 대비를 이룬다.

람세스 2세의 조각상, 기원전 1200년경, 룩소르 신전 람세스 2세의 조각상은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만들어져 잇다. 이 조각 역시 람세스 2세의 청년 시절 모습을 담았다.

상공에서 본 카르나크 대신전, 룩소르 카르나크 대신전은 밀라노 성당처럼 거대한 성당이 7개 정도 들어가는 규모다.

스핑크스의 길, 카르나크 대신전 아문 신전 내부의 길 양쪽에 열 지어 있는 스핑크스를 닮은 조각상 때문에 '스핑크스의 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사실 이 조각상은 스핑크스가 아닌 아문신의 상징이다.

카르나크 대신전 중 아문 신전의 내부, 기원전 1500~1100년경, 룩소르 거대한 규모의 카르나크 대신전은 신왕국의 번영과 파라오의 막대한 권력을 나타내는 증거다. 신전 곳곳에는 파라오와 신들의 조각이 서 있다.

카르나크 대신전의 열주전 6층 건물 높이의 기둥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카르나크 신전 내부에는 형태가 온전하게 보존된 창문이 남아 있다. 고대 이집트인의 뛰어난 석재 가공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

templo de debod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데보드 신전, 기원전 200년경, 마드리드 1968년 이집트 정부는 수몰 위기에 처한 아부심벨을 이전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스페인 정부에 이 신전을 선물했다. 현재 스페인마드리드에 있다.

룩소르 신전 앞의 오벨리스크, 기원전 1300년경, 룩소르 태양신을 상징하는 이 오벨리스크는 30~40미터에 이르는 돌덩이를 통째로 깎아 만들었다.

로마 성 베드로 광장의 오벨리스크, 기원전 2494~2345년경, 로마 기원후 40년 로마의 칼리굴라 황제가 이집트에서 약탈해왔다. 유럽의 도시 곳곳에는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트가 있다.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도 이집트의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다.

카르나크 대신전의 열주전

아부심벨, 기원전 1250년, 아스완 아부심벨은 람세스 2세가 자신과 아애 네페르티리를 위해 지은 것으로, 한때 수몰될 위기에 처했지만 안전한 위치로 옮겨졌다.

아부심벨 대신전 입구의 람세스 2세 거상, 기원전 1250년

아부심벨 소신전, 기원전 1250년경 자연 암반을 깎아 만든 이 신전은 람세스 2세의 부인인 네페르티리를 모시고 있다.

어둠에 싸인 저승의 신 프타 아부심벨 내부에는 일 년에 두 번 햇빛이 들어오는데, 그깨 저승의 신 프타에게는 빛이 비치지 않는다. 철저한 계산에 따른 설계 덕분이다.

이 모형을 통해 지금은 수몰된 원래 아부심벨 신전의 위치와 이전 후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아부심벨 신전을 통째로 이전하는 것은 엄청난 대공사였다. 크레인을 동원하여 거대한 신상을 재조립하고 있다.

로제타스톤, 기원전 196년경, 영국박물관 나일 강 하류 로제타에서 발견된 이 비석은 이집트 신성문자 해독의 열쇠가 되었다.

남아 있는 파편을 통해 재구성한 로제타스톤의 전체 모습

샹폴리옹이 해석한 이집트 상형문자표 왼쪽이 그리스 알파벳이고 오른쪽이 이집트 상형문자다.

샹폴리옹이 읽어낸 '프톨레마이오스'와 '클레오파트라'

 

죽음을 무시하지 말고 인정하라.

죽음 역시 자연의 섭리 중 하나이므로.

- 베르톨트 브레히트

 

장군총, 413~490년경, 중국 집안현 장군총은 폭 33미터, 높이 13미터로 이집트의 일반적인 피라미드와 비슷한 크기다.

석촌동 고분군, 2세기 후반, 서울 석촌동 서울 석촌동에 위치한 백제 고분군 덕분에 가까운 곳에서도 우리 조상들이 만든 피라미드를 만날 수 있다.

경주 대릉원 전경, 4~6세기, 경주 멀리 작은 언덕처럼 솟아 있는 것이 모두 무덤이다. 12만 평의 대지에 23기의 고분이 모여 있다.

카노푸스 단지, 기원전 1200년경, 베를린이집트박물관 카노푸스 단지 안에는 창자, 폐, 간 등 장기가 보관되어 있다. 뚜껑 모양은 각 장기의 수호신을 형상화한 것이다.

키키 스미스, 무제, 1986년, 휘트니미술관 12개의 유리병에 침, 눈물, 오줌 등 인간의 체액을 담아 보여준다.

키키 스미스, 누트, 1993년 몸통이 사라지고 팔다리만 남은 누트 여신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신화가 사라져 버린 현대사회의 단면을 상징한다.

하늘의 여신 누트, 기원전 1250년경, 영국박물관 고대 이집트인은 하늘의 여신 누트가 몸으로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고 믿었다.

정복수, 사람2, 2009년 인간의 신체를 내장 기관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하나의 기계로 표현했다.

 

중동의 지배자였던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는

만국의 문을 제외하고는 모두 파괴되어 흔적만 남아 있다.

그러나 2500년 전 저 문을 거쳐 도시에 들어서면

누구나 거대한 왕궁과 곳곳에 새겨진 정교한 조각 앞에서

완전히 압도되었을 것이다.

척박한 땅에서 치열한 경쟁을 통해 도시를 세우고 문명을 일궈온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미술을 자신을 지키는 방패이자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무기로 사용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 페르세폴리스의 만국의 문, 이란

 

경작지가 생기는 곳에 다른 기술과 예술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따라서 농부야말로 바로 인간 문명의 선구자이다.

- 대니엘 웹스터

 

문명을 잉태한 두 강 사이의 땅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는 오늘날 이란과 이라크 지역에 해당된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유역은 비옥한 토질 덕분에 인류 역사상 농업이 제일 먼저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 강 하류 지역의 생활상 오늘날 두 강 하류에 사는 사람들은 갈대를 이용해 집을 짓고 살고 있다.

바빌로니아 수로 지도 점토판, 기원전 1680년경, 노르웨이, 개인소장 이 점토판에는 구석구석 물이 흘러들도록 만들어진 체계적이고 조밀한 수로 시스템이 새겨져 있다.

 

예술은 사람들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수단 중 하나다.

- 레프 톨스토이

 

현재의 우루크 과거의 영광은 사라지고 흙무더기처럼 보이는 폐허만 남아 있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6000년 전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대도시였을 것이다.

백색신전과 지구라트, 기원전 3000년경, 이라크 현재 우루크에 남아 있는 백색신전은 훼손되어 그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다.

백색신전과 지구라트 상상도 원래는 이렇게 높은 기단 위에 신전이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사에서 발견된 도기, 기원전 5000~4000년경, 루브르박물관 곡식 저장용 그릇으로 추정되는 이 도기는 농업 활동이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물이기도 하다.

텔 알 우바이드에서 발견된 도기, 기원전 4500~4000년경, 보스턴미술관 수사에서 발견된 도기와는 달리 추상적인 형태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와르카 병, 기원전 3200~3000년경, 이라크국립박물관 이라크의 국보급 화병으로, 메소포타미아 초기 미술의 특징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 이라크국립박물관이 대대적 약탈을 당했을 때도 도둑맞았던 와르카 병은 몇 달 만에 훼손된 채 다시 돌아왔다.

여성의 두상(아난나 추정), 기원전 3200~3000년경, 이라크국립박물관 이 마스크는 아난나 여신 또는 여사제의 모습을 본뜬 것으로 추정된다.

눈의 우상, 기원전 3300~3000년경, 영국박물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이렇게 눈이 강조된 작은 조각상이 다수 발견되었다.

텔 아스마르 조각상군, 기원전 2900~2350년경,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등 눈을 크게 뜬 채로 손을 모으고 있는 모습과 신전에서 발견됐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아 이 조각상들은 신에게 기도나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누구나 역사를 만들 수 있지만

위대한 자만이 역사를 기록할 수 있다.

- 오스카 와일드

 

우르 복원도 우르는 두꺼운 성벽과 해자를 각춘 도시였으며 바다에 접해 있었다.

우르 지구라트(신바빌로니아 시기 복원), 기원전 600년경, 이라크

우르 왕조 무덤 발굴 장면 이 무덤이 발굴 되면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초기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푸아비 왕비 장신구 발굴 당시의 모습으로 온전한 형태를 알아볼 수는 없지만 다양한 귀금속으로 만들어진 장신구였음을 알 수 있다.

푸아비 왕비 장신구(복원), 기원전 2550~2450년경, 영국박물관 화려한 금과 라피스 라줄리 장식이 우르 문명의 도시적 성격을 보여준다.

푸아비 왕비 원통 인장, 기원전 2550~2450년경, 영국박물관 라피스 라줄리를 사용해 호화롭게 장식된 인장에는 악기 연주자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황소 머리 장식의 악기, 기원전 2550~2450년경, 영국박물관 푸아비 왕비 무덤에서 발굴된 유물로 산산조각 난 것을 복원했다.

황소 머리 장식의 악기(부분) 전체 4단으로 나뉘어 있고 각 칸에 동물, 사람, 반인반수의 모습이 자개로 장식돼 있다.

양과 황금가지, 기원전 2550~2450년경, 영국박물관 좌우대칭의 나무 위에 양이 발을 걸치고 올라가 있는 장식품이다. 황금으로 만든 나뭇가지와 선명하게 채색된 양이 인상적이다.

우르의 군기, 기원전 2550~2450년경, 영국박물관 최초 발굴자인 레오나르도 울리가 군기라는 이름을 붙여 계속 그렇게 부를 뿐 실제로는 깃발이 아니라 어떤 장식품의 부속물이었으리라고 추정된다.

우르의 군기 평화 면 삼단으로 나뉜 화면에 연회 장면이 자개장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1단 : 왕과 귀족들 2단 : 가축을 이끄는 사람들 3단 : 곡식을 나르는 사람들

우르의 군기 전쟁 면 그림 풍은 만화와도 비슷하지만 다루고 있는 내용은 무척 잔혹하다.

1단 : 권력자 앞에 선 포로 2단 : 우르 군대와 포로 행렬 3단 : 전차와 포로의 시신

아카드 통치자의 두상(사르곤 추정), 기원전 2250~2200년경, 이라크국립박물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권력자를 표현하는 방식의 전형을 보여준다.

나람신 전승비, 기원전 2230년경, 루브르박물관 적들을 밟고 서있는 위풍당당한 나람신 왕의 모습과 처참하게 쓰러져 있는 적군의 모습이 대비를 이룬다.

구데아 입상, 기원전 2090년경, 루브르박물관 우르 제3왕조 시기의 조그만 도시국가 라가시의 왕 구데아는 자신의 모습을 새긴 조각상을 여러 개 남겼다.

구데아 좌상, 기원전 2120년경, 루브르박물관 이 조각상은 머리 부분이 소실되었지만 몸에 새겨진 글자를 통해 구데아 왕의 조각상임을 알 수 있다. 무릎에는 신전의 설계도면이 새겨져 있다.

함무라비 법비, 기원전 1750년경, 루브르박물관 아랫부분에는 법 조항이, 윗부분에는 함무라비 왕과 신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높이 2.25m)

함무라비 법비(부분)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 조지 오웰

 

현재의 하투샤 히타이트 제국은 한때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호령했지만, 지금은 폐허가 되어 버린 수도 하투샤를 제외하고는 번영을 증명해 줄 유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하투샤 복원도 하투샤는 두 겹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상 도시와 하 도시로 나뉘어져 있었다.

사자의 문, 기원전 1300년경 하투샤의 성문들 가운데 하나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용맹함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사자 조각상이 문에 새겨져 있다.

사자의 문 디지털 복원도

카데시 전투, 기원전 1250년경, 이집트, 아부심벨 신전 람세스 2세의 아부심벨 신전 내부에 있는 부조로 이집트 군대가 히타이트 군대를 무찌르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카데시 전투 도해

히타이트 - 이집트 평화비문, 기원전 1258년, 이스탄불고고학박물관 이 비문은 세계 최초의 강대국 간 평화조약이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 입상, 기원전 850년경, 영국박물관

님루드 왕궁 상상도, 1853년 님루드를 발굴한 고고학자 오스틴 레이어드의 책에 실린 그림으로 님루드는 평화롭고 풍요로운 도시로 묘사되어 있다.

라마수, 기원전 883~859년경, 영국박물관 무게 10톤 이상의 거대한 돌을 통째로 깎아 만든 수호 신상으로, 성문이나 왕궁 입구에 세워져 있었다.

유물의 도난을 막기 위해 미군 탱크가 국립이라크박물관 앞을 지키고 있다.

라마수, 기원전 883~859년경,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라마수는 사람의 머리, 사자 또는 황소의 몸통, 날개를 가진 상상의 동물로 용맹함의 상징이었다.

님루드 궁전 왕좌의 방 상상도, 1854년 왕궁 내부의 왕의 접견실은 화려하게 채색된 부조로 장식되어 있었다.

영국박물관 아시리아 전시실 영국박물관 아시리아 전시실에는 아시리아 왕궁 유적에서 뜯어온 대규모 부조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생명의 나무, 기원전 865~860년경, 영국박물관 이슈르나시르팔 2세의 궁전에서 발견된 이 부조는 원래는 왕좌 뒤에 새겨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슈르나시르팔 왕의 사자 사냥, 기원전 865~860년경, 영국박물관 전차에 오른 채로 사자를 사냥하는 아슈르나시르팔 2세의 모습이 묘사된 이 조각은 님루드의 궁전에서 발견되었다.

적에게 화살을 쏘는 아시리아 궁수들, 기원전 883~859년경, 영국박물관 이슈르나시르팔 2세의 궁전에서 발견된 이 부조에는 강물로 뛰어든 적들을 향해 활을 쏘고 있는 아시리아 군대의 용맹한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라기스 전투, 기원전 700~692년경, 영국박물관 유대의 중요 도시였던 라기스를 아시리아 군대가 공격한 사건을 표현한 부조 작품으로 총길이 12미터에 이른다.

라기스 전투(부분1) 유대 군사들이 성탑에서 화살을 쏘며 저항하고 아시리아 군사들은 사다리를 놓고 성채를 오르고 있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라기스 전투(부분2) 산 채로 포로의 살가죽을 벗기는 모습을 표현한 부조.

라기스 전투(부분3) 손이 묶인 채 끌려가는 유대 포로들의 모습과 적군의 머리를 들고 행진하는 아시리아 군인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라기스 전투(부분4)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들이 아시리아 왕 앞에서 무릎을 꿇고 생명을 구걸하는 장면이다.

루브르박물관 아시리아 전시실 루브르의 아시리아 전시실에는 사르곤 2세의 코르사바드 왕궁에서 가져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길가메시 조각상, 기원전 722~705년경, 루브르박물관 이 조각상의 모델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영웅 길가메시로 추정된다. 푸아비 왕비 무덤에서 발견된 악기(아래)에도 유사한 방식으로 길가메시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목재 운반, 기원전 700년경, 루브르박물관 왕궁을 짓기 위해 멀리 떨어진 레바논에서 목재를 운반해오는 과정을 부조로 새겼다.

아슈르바니팔 왕의 사자 사냥, 기원전 645년경, 영국박물관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 아슈르바니팔 왕이 맨손으로 사자를 제압하고 있는 장면을 새긴 부조이다.

죽어가는 암사자, 기원전 645년경, 영국박물관 화살을 맞아 다리가 마비되어가고 있는 암사자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화살을 맞고 죽어가는 사자, 기원전 645년경, 영국박물관 일부러 거칠게 표현한 배경은 화살을 맞고 몸부림치는 사자의 역동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였다.

프레드 파라드, 아슈르바니팔 청동 조각, 1988년, 샌프란시스코 한 손으로는 사자를 제압하고, 다른 손에는 점토판을 들고 있는 모습의 이 조각상은 정복군주이자 문화 군주였던 아슈르바니팔 왕의 복합적인 면모를 잘 보여준다.

홍수 신화 점토판, 기원전 600년경, 영국박물관 아슈르바니팔왕의 점토판 도서관에서 발견된 이 점토판에는 길가메시 서사시의 일부인 홍수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들라크루아,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1827년, 루브르박물관 아시리아 제국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비극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소재는 19세기 유럽 예술가들의 동경을 불러일으켰다.

 

평화는 예술의 보모이다.

- 세익스피어

 

이슈타르 문(복원), 기원전 575년, 베를린페르가몬박물관 메소포타미아의 여신 이슈타르의 이름을 붙인 이 문은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으로 들어가기 위한 입구였다.(폭 30m, 높이 14m)

이슈타르 문 조각을 발굴한 독일인들은 조각을 하나하나 분류하고 맞춰서, 문의 형태를 복원했다.

이슈타르 문에 새겨진 색색의 동물 부조는 정복 지역의 대표적 동물을 새긴 것이다.

바빌론 복원도 바빌론은 벽돌로 지은 거대한 성채로 둘러싸여 있으며, 중앙에는 지구라트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슈타르 문 복원도 이 문을 지나는 각지로부터 온 사신 또는 포로들은 거대한 바빌로니아 제국의 위엄에 주눅이 들었을 것이다.

바벨탑 복원도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바벨탑의 높이는 90미터에 달했다고 한다.

바벨탑 석비, 기원전 604~562년경, 노르웨이, 개인소장 '지구라트 카딩기라키(탑 바벨)'라는 쐐기문자 단면도와 구조도가 새겨진 이 석비는 바벨탑이 실제로 존재했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 중 하나이다.

키루스 원통, 기원전 539년경, 영국박물관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가 신바빌로니아 정복 후 만든 것으로 피정복민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파라바하르 문양, 기원전 486~465년경 페르세폴리스의 벽면에 새겨진 파라바하르 문양은, 페르시아 문명의 상징물이자 조로아스터교의 상징이기도 하다.

샤를 시피에, 페르세폴리스 상상도, 1892년 프랑스의 고고학자 시피에가 남긴 페르세폴리스의 상상도로, 높은 기단 위에 세워진 도시 페르세폴리스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고대 페르시아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는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되어 지금은 기둥과 터만 남아 있다.

페르세폴리스 평면도

페르세폴리스 입구 페르세폴리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111개씩 2단으로 이루어진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만국의 문, 기원전 486~465년경, 이란 파르스 주 페르세폴리스의 왕궁 입구에는 역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라마수 조각이 세워져 있다.

대접견실(아파다나), 기원전 486~465년경, 이란 파르스 주 흔적만으로도 거대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이곳은 페르시아 제국의 왕이 피지배민들을 접견하던 곳이었다.

대접견실 기단 부조 대접견실의 기단에는 각지의 사신들이 새겨져 있다. 위로부터 순서대로 박트리아인, 소그드인, 리디아인의 모습을 새긴 부조이다.

대접견실 계단 부조 대접견실로 향하는 계단 옆 벽에는 페르시아 근위병들의 모습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100개의 기둥이 있는 궁전, 기원전 486~465년경, 이란 파르스 주 100개의 기둥이 있던 이 거대한 건축물은 페르시아 제국의 회의실로 쓰이는 공간이었다.

다리우스 왕 궁전 기단 부조, 기원전 486~465년경, 이란 파르스 주 궁전의 기단 부분에도 앞선 왕국이 세운 왕궁들과 마찬가지로 부조가 새겨져 있다.

다리우스 왕 궁전 기단 부조 부분(위)과 아슈르바니팔 왕의 사자 사냥(아래) 다리우스 왕의 궁전 기단에 새겨진 사자 조각은 아시리아의 사자 조각에 비해 정형화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만국의 문의 기둥머리

그리스 에렉테이온 신전 기둥

이집트 카르나크 신전 기둥

페르세폴리스 기둥 구조

수사의 다리우스 왕궁 기둥머리, 기원전 510년경, 루브르박물관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이것은 기둥 전체가 아닌 머리 부분이다.

수사의 다리우스 왕궁 벽돌 장식, 기원전 510년경, 루브르박물관 푸른색으로 채색된 바탕에 페르시아 군대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알렉산더 대왕 금화, 기원전 336~323년경,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의 금화를 모두 녹여 자신의 얼굴을 새긴 금화를 만들었다.

페르시아 금화, 기원전 400년경, 애슈몰린박물관 페르시아 제국 초기 아케메네스 왕조 시기에 제작된 금화로, 순금을 재료로 왕의 이미지를 새겨 제작했다.

베히스톤 산 실크로드의 중심지에 해당하는 지역에 위치한 베히스톤 산은 평지에 우뚝 솟아올라 있어 웅장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베히스툰 비문, 기원전 486년, 이란 지상 100미터 높이의 암벽에 가로 25미터 높이 15미터 규모의 거대한 비문이 새겨져 있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