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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6. 26. 17:11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64 세잔 - 사과 하나로 시작된 현대 미술


미셸 오 지음, 이종인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38


082

시156ㅅ  33


시공디스커버리총서 33



"나는 당신에게 회화의 진실을 말할 의무가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당신에게 보여 드리겠습니다."

평생 미술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독창적인

천재 세잔은 회화의 진실을 전달하겠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세상사와는 담을 쌓은 채

그리고 또 그렸다. 마침내 세잔은 색채의 논리를 규정하고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여 '자신의 감각을

실현하는 일'에 성공했다. 그의 작업은 곧 20세기

현대 미술의 새로운 지평이 되었다.


"자연의 모든 물상은

색채를 갖고 있으므로, 데생과

색채는 결코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색을 칠해 나감에 따라 데생도

이루어지는 것이며, 색의 조화가

이루어질수록 데생도

더욱 확실해지는 것이다. 색채가

풍부해질 때 형태는 가장 풍만해진다.

색조의 대비 및 관계가 데생과 형태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무척이나 천천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자연이 아주 복잡한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은 끝이 없습니다."

"그림이란 색채, 형태 공간 따위 다양한 관계 속에서 어떤 조화를 찾아내는 일입니다. 그렇게하여 그것을 새롭고 독창적인 논리에 따라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자연에 대한 강렬한 느낌 - 나는 그런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 이 미술적 개념을 이해하는 근본적 바탕이 되고 이 바탕에 의존해서 모든 미래의 작품들이 그 장엄함과 아름다움을 획득한다고 볼 때,


우리의 정서를 표현하는 수단에 관련한 폭넓은 지식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지식은 오로지 오랜 동안 쌓아 온 경험을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습니다."


"명암(빛과 그림자)은 곧 색채의 관계입니다. 이 두 가지 중요한 우연적 요소는 색 자체의 강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색과 색이 함께 어울릴 때의 공명도(共鳴度)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림자도 빛만큼이나 어엿한 색채입니다. 단지 명도(明度)가 떨어질 뿐이지요. 그러므로 명암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색조(色調)가 맺는 관계일 뿐입니다."


"(그림에는) 대비(對比)가 있을 뿐, 선(線)이나 모델링(modelling, 대상에 입체감을 주는 것 : 역주)은 없습니다. 그것은 명암의 대비가 아니라, 색채감(sensation of color)의 대비를 뜻합니다."


"모델링은 색조의 관계를 정확하게 맞추었을 때 얻어집니다. 색조를 조화롭게 병치(倂置)시켜 완성을 이루었을 때, 비로소 그림은 스스로 모델링을 갖추게 됩니다."


차례


Cezanne, "Puissant et solitaire"


제1장 유년 시절

제2장 인상주의 시대

제3장 자연과 평행한 조화

제4장 "이제 약속의 땅이 보입니다"

기록과 증언

참고문헌

그림목록

찾아보기


미셸 오 Michel Hoog

파리 로랑제리 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인 미셸 오는, '로베르 들로네' '19세기 러시아 회화의 리얼리즘과 시정' '르 두아니에 루소'와 같은 굵직한 전시회를 주최한 바 있다. 1971년부터 파리에 있는 에콜 드 루브르의 교수로 활동하고 있으며, 그가 펴낸 수많은 미술 서적들은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판되기도 하였다.


옮긴이 : 이종인

1954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였고, 한국 브리태니커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번역서로는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번 <문자의 역사> 23번 <셰익스피어> 28번 <붓다> 32번 <미라>가 있으며, 그외 <절망이 아닌 선택> <증발> <때로는 낯선 타인처럼> 등이 있다.


제1장

유년시절


"은행가이신 우리 아버지는 자신의 책상 뒤에서 화가가 나타났다는 것을 아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남부 프랑스의 한적한 마을 출신인 한 총명한 학생은 이렇게 말하면서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내비쳤다. 당시 은행가이던 그의 아버지가 반대했을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었다.

세잔은 자신의 사진(아래, 1860년대 초만 해도 사진은 신기한 물건이었다.)을 보면서 그린 초상화(위, 1861~1862)를 고의적으로 보기 흉하게 처리했다. 누런 안색, 응시하는 눈, 험악한 인상은 악마를 연상시킨다. 훗날 제작된 초상화들도 웃지 않는 표정으로 유명하지만, 이 초상화만큼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지는 못했다.

세잔의 누이인 마리 세잔의 초상화(위, 1866년경). 세잔의 초기 시대에 그린 몇 안 되는 여자 초상화이다. 물감은 팔레트 나이프를 사용하여 두텁게 칠해져 있는데, 세잔은 임파스토(impasto)라고 하는 이런 빠르고 거친 붓질을 애용했다. 이 기법은 널리 통용되던 관학적인 기법이나 당시 엑스에서 가르치던 부드럽고 장식적인 붓질과 성격을 달리한다.

 

세잔의 외삼촌 도미니크 오베르의 초상화
(아래, 1866)는 약 10점 정도 제작되었다. 그는 조카를 위해 군말없이 모델이 되어 주었다.

 

 

"물결치는 파도 위로 나는 달아낫다. 몇 년간 행복한 세월이 흘렀다.

우리의 날랜 두 팔이 부드러운 파도 위로 뱀처럼 헤엄쳤을 때

안녕, 포도주로 익힌 행복한 날들이여! 대어를 낚는 행운이 따르기를!"

세잔

18558년 4월 9일 에밀 졸라에게 쓴 편지

이탈리아 이민의 아들인 루이 오귀스트 세잔은 1848년 엑스에 은행을 차렸고, 큰부자가 되었다.

<4계절> 벽화(당초 자 드 부팡의 벽에 그린 것이었으나 현재는 파리의 프티 팔레 박물관에 옮겨져 있음)는 그림을 그려 넣은 벽지나 로맨틱한 커튼에 등장할 법한 여인을 그리고 있다. 아름답고 우아한 여자를 등장시킨 가을(위)과 (아래)은 이탈리아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를 연상시킨다. 야망이 엿보이는 이 초심자의 작품이 보여 주는 예리한 데생, 분명한 윤곽, 긴 팔 등은 세잔이 아이로니컬하게도 이 그림에 '앵그르'라고 서명한 이유를 말해 준다. 신고전파 화가인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는 관학적 화풍의 교과서적 전범이었던 것이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그린 이 데생은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의 효시이다. 이 그림은 1859년 1월 17일 에밀 졸라(아래)에게 보낸 편지의 여백에 그린 것으로, 세잔은 "죽음이 이곳을 지배하고 있다."고 제목을 달아 낳았다.

1863년에 사망한 외젠 들라크루아는 세잔 세대의 많은 화가들의 우상이었다. 이 그림은 세잔이 그린 들라크루아의 초상(1864~1866).

<노인의 두상>(위, 1865~1868)은 도미니크 외삼촌을 그린 초상화보다 훨씬 더 감각적이고 정교하다. <메데아와 자식들>(아래, 1879~1882)은 들라크루아의 작품의 모사작이다.

시인이자 미술비평가였던 안토니 발라브레그는 엑스 출신이었고 파리의 카페를 즐겨 찾던 소집단의 멤버였다. 무뚝뚝한 시골뜨기 세잔은 파리의 예술가들이 즐겨 드나들어 파리 예술계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지던 카페 게르부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잔은 화난 사람처럼 입을 다물고 있거나 자기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미친 듯이 화를 냈다. 마네의 심기를  건드린 적도 있었다. "마네 씨, 난 악수하지 못하겠소. 1주일 동안 손을 닦지 않은 터라."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1863)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페트 샹페트르>(1510경, 이 작품은 한때 조르조네의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했다.)를 모델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은 옷 입은 남자들 사이에 있는 벌거벗은 여체 때문에 부도덕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살롱에서 낙선한 화가들은 자기 작품을 알릴 기회가 없었다. 1863년. 낙선자들은 전시회장의 옆건물에서 낙선전을 열었다. 당시의 신문 만화에서 알 수 있듯, 낙선전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얘야, 모자를 벗으려무나. 이 불행한 자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해야지."

세잔은 기법과 주제를 성공적으로 결합시켰다. 폭력적인 장면(1867~1868년경에 제작한 <살인>)이나 어느만큼은 풍자적인 초상화를 그릴 때는 아주 신속하게 작업을 했다. 두터운 붓질과 빈번한 팔레트 나이프의 사용이 엿보이는 것이다. 반면 평온한 분위기를 담고 있는 정물화는 부드럽고 사색적인 붓질로 처리하곤 했다.

졸라에게 책을 읽어 주는 폴 알렉시스

그 역시 엑상프로방스 출신인 폴 알렉시스는 졸라의 제자였고 그의 비서로 지내기도 했다. 위 그림(1869~1870)에서 알렉시스는 책 읽어 주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이 그림은, 만족스럽지 않은 작품은 파기해 버리는 세잔으로서는 이례적인 미완성작이다. 간단히 스케치만 되어 있는 졸라의 모습은 그림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날카로운 대조를 보인다. 옆모습을 보이며 앉아 있는 알렉시스는 이 그림보다 1~2년 전인 1868년에 제작된 마네의 유명한 그림 <졸라>(아래)를 연상케 해준다. 이 그림은 졸라가 죽고 여러 해가 지난 뒤 촐라의 다락방에서 발견되었다.

세잔은 아버지가 읽고 있는 신문의 제자(題字)를 일부러 나오게 그렸다. 그 신문은 아버지가 평소에 보던 신문이 아니라, 1866년 4월과 5월에 살롱을 성토하는 기사를 게재한 《에베느망》지였다. (살롱을 '바보들의 집단'이라고 꼬집었다.) 졸라는 필명으로 게재한 글에서 살롱을 통렬히 논박하여 물의를 일으켰고, 이 신문의 편집인은 졸라의 기사를 게재하지 못하게 조처하는 한편, 졸라를 해고해 버렸다. 젊은 세잔이 그린 정물화-<설탕그릇, 배, 푸른 컵이 있는 정물>(가운데, 1863~1865)-가 안락의자 뒤에 걸려 있다. 루이 오귀스트 세잔이 아들의 정물화에 등을 돌리고 있다는 사실에 어떤 상징적 의미를 부여해야 할까?

아실 앙프레르의 초상화는 폴 고갱의 친구이며 화가인 에밀 슈프네케의 소유였다가 다시 반 고흐의 모델이며 화가인 외젠 기욤 보흐의 손으로 넘어갔다. 세잔은 후년에 이 그림을 파기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으나, 세상사람들은 언제나 이 작품에 깊은 관심을 보여 왔다-오로지 그 크기와 풍자적인 면모 때문이기는 하지만 이 그림은 1870년 이전, 세잔이 살롱 입선을 노리고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세잔은 당시 스타일, 혹은 그 자신이 말하는 '원칙'을 찾아내기 위해 탐구에 탐구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세잔은 자신의 감각을 분석하기보다는 과거 대가들의 그림을 연구하는 일에 더 몰두하고 있었다. 정면에서 바라보는 시점, 강렬한 색채, 풍자적 분위기, 대문자로 적어 넣은 제목 따위가 고풍스런 기법과 간판쟁이의 손놀림이 뒤범벅되어 있음을 잘 보여 준다. 그림 속의 안락의자는 아버지의 초상화와, (비록 아무도 앉아 있지 않지만) 1866년에 제작된 <탄호이저 서곡>에서 다시 한번 등장한다.

앙프레르를 스케치한 것.

세잔은 전통적인 테마에서 많은 것을 빌려 왔지만,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림보에 있는 그리스도>(첫번째, 두번째) 이외에는 종교화를 별로 그리지 않았다. 이 그림속의 그리스도는 프라도 박물관에 소장된 세바스티노 델 피옴보의 그림에서 모사한 것이고, 막달라 마리아(네번째, <비탄>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음)는 루브르에 있는 도메니코 페티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엑상프로방스 출신 친구인 포르튀네 마리옹은 세잔이 파리 교외로 산책을 나갈 때 자주 동무해 주었다. 그는 지질학자이며 아마추어 화가였다. <야외사생을 나가는 마리옹과 발라브레그>(1866)에는 두 친구가 야외작업을 위한 복장을 하고 나온다. 세잔이 외광파에 대한 관심을 처음으로 선언한 작품이다.

이 풍경화(1865~1867)에서 두텁게 느껴지는 형태가 나무인지 암석인지 확실하지 않다. 세잔은 모델의 얼굴을 표현할 때와 똑같은 정열을 가지고 야생적이고 원시적인 자연을 그렸다.

<대주연>(1870년경)은 아주 큰 화폭에 그려졌다. 세잔은 자신의 스타일을 완전히 바꾼 다음인 1895년에 가졌던 개인전시회에서 이 그림을 반드시 전시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이 시대(1866~1870)의 가장 인상적인 그림 중의 하나가 뤼 드 라 콩다민에 있던 졸라의 집에서 제작되었다. 세잔은 이 그림을 완성하여 졸라에게 선물했다. <유괴(강간)>(1867)는 세잔의 의도대로 366~457cm에는 못 미치고 89~117cm로 완성되었다. 콤마(,) 같은 터치로 그려진 초록색 초원은 마치 험난한 바다 같다. 이런 배경에 서 있는 구릿빛 거인의 누드는 앞으로 튀어나와 보인다. 사내는 양팔로 청흑색 머리카락을 한 창백한 여인을 안고 있다. 여인의 엉덩이에서 진청색 천이 흘러내린다. 초록색 평원과 푸른색 물체에 둘러싸인, 여인의 흰색 피부와 사내의 구릿빛 피부가 강렬한 조화를 이룬다. 저 멀리 배경에 흰 구름을 인 산은 생트빅투아르를 연상시킨다. 화면 왼쪽에 있는 두 소녀의 핑크 빛 육체가 구성에 생기를 준다."

존 리월드

《세잔 전기》(1986)

<두개골과 초가 있는 정물>(1865~1867)은 세잔의 전형적인 초기 정물화이다. 소재 선택에서는 전통에 충실한 면을 보이나 그 기법과 조명에서는 매우 현대적이다.

바늘이 없이 표현된 검은 시계는 졸라의 것이다. 탁자 밑으로 흘러내리는 테이블보는 엑스 교외의 채석장에서 볼 수 있는 바위의 표면을 연상시킨다.

<탄호이저 서곡>(1866경)은 몇 개의 직각(안락의자, 등받이 있는 소파, 작은 의자, 피아노 치는 소녀의 팔, 피아노)을 이용해 단단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림 속의 소재는 캔버스의 면과 수직 혹은 수평을 이룬다. 은은하게 퍼진 빛, 차분하게 가라앉은 색채, 안락의자의 미묘한 반사광은 베르메르나 사르댕 같은 시적 분위기를 전해 준다. 글레이즈(마른 색채 위에 칠하는 밝은 빛)의 터치로 회색과 흰색은 가볍게 진동하고 있다.

풍자만화가 스톡이 그린 세잔의 초상. 1870년 살롱에서 낙선한 아실 앙프레르의 초상화와 누드(이 그림은 전하지 않음)가 함께 그려져 있다. "팔레트 나이프, 페인트브러시, 붓 따위 여러 가지 화구로 그림을 그리는 쿠르베, 마네, 모네 등이여, 당신들은 모두 유행에 뒤떨어졌소이다, 여기 당신들의 스승 세잔을 소개하나니!" 이 풍자만화는 1870년 봄에 출간된 스톡의 주간 잡지에 수록되었다.

초기에는 그리 흔하지 않던 여성의 초상화는 오르탕스 피케를 만난 1869년 이후로 그 수가 많아졌다. <붉은색 안락의자에 앉은 세잔 부인>(1877).

철로를 부설하기 위해 허리를 잘라낸 언덕이 살벌하게 다가서는 이 풍경화(1870)는 엑스 교외에서 제작되었다. 언덕 뒤로는 생트빅투아르산이 주변을 제압하고 있다. 이 풍경화에서 처음 등장한 생트빅투아르는 그뒤 한참 잊혀졌다가 만년에 자주 등장한다.

 

제2장

인상주의 시대

 

전쟁이 터지기 몇 년 전부터 피사로는 파리 북방의 퐁투아즈라는 곳에서 젊은 제자 화가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었다. 세잔은 1872년에 오르탕스 피케와 어린 아들 폴을 데리고 그 그룹에 합류했다. 이제 불안에 떨며 자기분석에 열중하던 청년기가 막을 내리고 약 10년 가까이 평온한 시기가 이어진다.

퐁투아즈 근교의 전원풍경은 세잔의 예술적 발전에 큰 자극제가 되었다. 색채는 밝아졌고 흑과 백의 강렬한 대비는 사라지고 밝은 색채의 화음이 등장했다. <오베르에 있는 작은 집>(1873~1874경).

모네와 르누아르가 표현한 것처럼 인상파 운동은 즉흥성의 결과이거나 우연한 발견마냥 하루 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피사로, 모네, 르누아르, 기요맹 들은 근 10년 동안 한가지 방향으로 작업을 계속해 왔던 것이다. 위에서 아래로, 르누아르(프레데릭 바질, 1867), 기요맹(세잔, 1869~1872), 시슬레(르누아르, 1874), 모네(르누아르, 1875), 오베르로 야외작업을 나가는 세잔.

'겸손하고 위대한' 피사로 - 세잔은 자신에게 늘 조언을 아끼지 않은 피사로를 그렇게 불렀다 - 의 지도를 받으면서 세잔의 팔레트는 눈에 뛸만큼 밝은 색으로 바뀌었다. 위는 피사로의 <퐁투아즈에 있는 집들>, 아래는 세잔의 <메당의 집>(1879~1881경).

1874년 제1회 인상파 전시회 개최를 추진하기 위해 화가, 조각가, 판화가 등 무명 예술가 30여 명으로 모임이 결성되었다. 유명한 사진가인 나다르(펠릭스 투르나숑)가 자신이 사용하던 카퓌신 35번가의 스튜디오를 빌려 주었다. 세잔의 강렬한 그림이 관람객에게 혐오감을 줄지도 모른다고 동료들이 우려했지만, 피사로는 세잔의 그림을 꼭 출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네도 세잔을 편들어 주었다.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는 유사한 특징이 발견되지만 <오베르쉬르우아즈에 있는 목매 죽은 사람의 집>(1872~1873)은 다른 개성을 담고 있다. 그림의 구성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 선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고, 지붕, 벽, 언덕은 삼각형 모양이다. 이곳저곳에 짙은 물감이 팔레트 나이프로 발라져 있다.

 

"자네는 이런 시간에 나보고 그 <현대판 올랭피아> 얘기를 하라는 건가? 흑인 하녀가 쪼그리고 누운 추악한 여자의 몸에서 베일을 걷어 내는 광경을 넋놓고 쳐다보는 저 한심한 친구! 혹시 자네는 마네의 <올랭피아>를 기억하나? 그 작품은 이 세잔이라는 사람의 작품에 비하면 데생, 정확도, 마무리 등이 탁월한 걸작이지."

루이 르루아

《르 샤리바리》 1874년 4월 25일

<현대판 올랭피아>의 두번째 그림(위, 1873경), <현대판 올랭피아>의 첫번째 그림(아래, 1867경), 마네의 <올랭피아>(가운데, 1863).

1880년경의 세잔(위)과 <세 명의 목욕하는 여자>의 습작(아래, 1895경).

 

"붓이나 연필을 한 번도 잡아 보지 않은 사람들이그가 데생을 할 줄 모른다고 말한다. 또 그림이 부정확하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정확한 것이 아니라 고도의 기술을 통해 얻어진 세련됨이다."

조르주 리비에르

《랭프레시오니스트》 1877년 4월 14일

열광적인 미술작품 수집가인 빅토르 쇼케(위, 1877경)에게 보낸 1866년 5월 11일자 편지에서 세잔은 그를 존경한다고 말한 다음 자기는 야외작업에 매력을 느낀다고 털어놓았다. "우리 둘 다 들라크루아를 좋아한다는 점을 하나의 매개로 하여 감히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처럼 놀랍고 안정된 지성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 지성은 당신에게 얼마나 많은 목표를 달성하게 해주었단 말입니까! …… 그러나 나는 그런 행운을 타고난 것 같지 않습니다. …… 그것말고는 나에게 특별한 불만이 없습니다. 자연의 광대무변한 울타리인 하늘은 늘 나를 매혹시킵니다. 그것을 쳐다볼 때마다 기쁨에 잠깁니다." <자 드 부팡의 풀장>(아래, 1878~1879경).

고갱은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의 그림을 수집하여 오노레 도미에와 조앙 바르톨트 종킨트 옆에 걸어 놓았다. 고갱은 세잔의 작품도 석 점 갖고 있었다. 이들 중 하나인 <커피포트가 있는 정물>(1880경)은 고갱 자신의 그림 <여인 초상>(1890)의 배경에도 등장한다. "세잔의 이 정물화는 내가 갖고 있는 보물 중의 보물이야. 내가 빈털터리가 되더라도 이 그림은 갖고 있을 거야." 고갱은 1888년 6월에 친구 에밀 슈페네케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수프 그릇이 있는 정물화>(위)는 1877년경 퐁투아즈에 있는 피사로의 집에서 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평범하고 둥근 정물 위로 쏟아지는 빛은 정교한 반사광으로 처리되어 있으며, 그림자는 거의 생략되었다. 당시 루브르 박물관은 샤르댕의 위대한 정물화 열 점을 사들였는데, 이 그림은 샤르댕의 정물화를 연상시킨다. 샤르댕의 <은제 술잔>(아래).


"나는 내가 주위의 화가들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에 대한 이런 확신감은 오랜 각고 끝에 얻어진 것입니다. 나는 물론 열심히 일하지만 세련된 것을 만들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세련된 것은 바보들이나 좋아하는 것이지요. 보통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은 쟁이들의 기교의 결과물에 불과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그림은 예술적 가치가 부재하는 속된 것입니다. 나는 나의 비전을 달성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지식과 진설을 신장하는 즐거움이 잇기 때문입니다."

세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1874년 9월 26일

오베르의 파노라마적 풍경을 그린 작품(1873~1875).


"이곳의 햇빛은 정말 기가 막힙니다. 모든 물체가 마치 실루엣으로 축소되어 버리는 느낌입니다. …… 오베르 출신의 풍경화가들이 이리로 내려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세잔

카미유 피사로에게 보낸 편지 1876년 7월 2일. 에스타크

<마르세유와 마리섬>(1882경).

<라크루아 신부의 집>은 제작년도(1873)와 서명이 분명하게 들어 있는 몇 안 되는 그림 중의 하나이다. 세잔은 약 20점에 서명을 했고 약 10점에 제작년도를 적어 넣었다. 이것이 세잔 작품의 정확한 제작년도를 결정하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이다.

<맹시의 다리>(1879).


"다리를 그림 한가운데 놓고 이어 다리 옆에다 두 개의 아치를 구도의 요소로 삼은 다음, 마지막으로 앞에다 나무를 배치해 다리의 전경으로 삼았다. 왼쪽의 아치는 물에 강렬하게 어리면서 앞으로 튀어나와, 다리와 나무의 두 공간을 연결시켜 준다. 이러한 구도적 균형은 변하고 있는 듯한 물빛으로 더욱 단단하게 뒷받침되고 잇다. 물빛의 한가운데가 짙은 초록이지만 양옆은 옅은 갈색을 띠고 있음도 주목할 만하다. 다리 위쪽의 잎새 처리도 인상적이다. 세잔은 모자이크 같은 터치로 녹색과 흰색을 다양하게 변조시켜 마치 물방울이 퍼지는 듯한 빛의 효과를 이룩해 내고 있는데, 이것은 세잔이 인상파 수법에 정통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렇게 하여 세잔이 자연에서 느낀 풍성함과 여러 선들이 잘 어우러져 절묘한 회화적 공간이 창조된다. 그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화가의 정서적 긴장을 '경험'하게 ('보는' 것이 아니다) 해준다. ……이 그림은 인상주의가 획득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개척하고 있으며, 노대가(老大家, 15세기와 18세기 사이에 배출된 대가들)의 권위와 세잔 시대의 새로운 광학(光學)이 잘 결합된 찬연한 금자탑이다."

리처드 베르디

《세잔》(1992)

<맹시의 다리>

"세잔은 사전에 깊이 생각하지 않은 붓질을 단 한 획도 한 적이 없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할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사람의 눈을 시원하게 하는 절묘한 색채감으로 사물의 본질을 구성하는 색채의 마술사였다,"

에밀 베르나르

《폴 세잔에 대한 회상》(1921)

세잔은 절대로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화상을 그렸으며, 심리를 표현한다기보다는 외형적 리얼리티를 추구하려고 노력했다. 두번째부터 아래로, 1880년, 1875년, 1877~1878년에 그려진 자화상. 맨 마지막 작품은 한때 피사로가 소장했다.

 

제3장

자연과 평행한 조화

 

 

 

"그림의 올바른 길을 찾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네." 세잔은 1879년 9월 24일 졸라에게 털어놓았다. 인상파 수법을 7~8년 시험한 끝에 세잔은 반사광과 색채의 그림자에 대한 분석을 최대한 해보았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1880년경부터는 세잔의 작품에 인상파의 수법과 다른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것이 과거의 수법과 갑작스런 결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수채화로 그린 <화분>(아래, 1883~1887>. 유연한 꽃줄기와 미동하는 듯한 빛이 나란히 늘어선 화분의 균일감을 깨뜨리고 있다. 세잔은 수채화에서 새로운 표현수단을 발견했다. 세잔 이전의 프랑스 화가 중에서 세잔처럼 수채화를 잘 활용한 화가는 몇 되지 않는다. <정원에 앉아 있는 세잔 부인>(위, 1879~1882).

<나무와 집>(위, 1885~1887)의 밝고 옅은 물감칠과 미묘한 색조는 수채화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검은 나뭇가지들이 확 트인 밝은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이 그림의 구성은 세잔의 작품 중에서도 돋보인다. 미술학교 선생이던 질베르에게 배운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풍경화를 그려 볼 생각이었을까? 아래는 <나무와 지붕>(1882~1883경).

세잔은 자 드 부팡에서 평화와 정적을 얻었다. 그는 그 건물(<자 드 부팡의 저택과 농가>, 1885~1887경). 멋진 호수, 공원, 나무 등을 4계절 내내 그렸고, 정원에서는 농부들과 인부들이 모델을 서 주었다. 세잔의 어머니가 사망한 지 2년째 되던 1899년 이 집은 세잔 누이의 강권으로 매각되었다. 세잔은 이사를 가기 전에 소지품을 대부분 불태워 버렸다.

<에스타크에서 본 마르세유만>(위, 1879경). <에스타크만>(아래, 1879~1883).

 

"남프랑스의 바다풍경,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푸른 바다, 울퉁불퉁한 바위산, 뜨거운 열기 속에 몽롱하고 나른해 보이는 사물, 강한 구도를 갖춘 해변들이 아주 솔직하고 세밀히 묘사되어 있다."

귀스타브 제프루아

《르 주르날》 1894년 2월 1일

<에스타크와 샤토 디프의 풍경> (1883~1885).

세잔은 종종 넓게 펼쳐진 풀경의 전경에 외딴 나무를 돌출시키곤 했다. 여기 <커다란 소나무>(1885경)에서는 나무가 화폭을 거의 다 차지하여 풍경을 가리고 있다. 가지들 사이로 땅과 하늘을 구분하기도 쉽지 않다. 세잔은 이 그림에서 나무껍질, 잎새, 땅빛깔 등을 자세히 묘사하지 않는다. 수채화에서처럼 선영(線影)이 드러나는 비스듬한 붓질로 풍경화에 일체감을 주고 있다. 수직축과 수평축이 교차하는 부분에 많이 구사된 노랑색은 나무를 실제보다 더 커 보이게 해준다. <생트빅투아르산>과 같은 장대한 구도는 없지만, 세잔이 시골풍경화에 종종 부여한 종교적 분위기가 그대로 배어 나오고 있다.

<부엌의 정물>(1888~1890)에 나오는 사물들은 두 개나 세 개 시점에서 바라본 모습들이다.

 

"천재 세잔은 그림의 전체적 구도를 재배열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전체로서의 그림을 보면 원근법의 왜곡이 더 이상 왜곡되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림이 하나의 정상적 비전을 획득하여, 새로운 질서가 그 안에서 탄생하고 또 그림 속의 사물은 지금 막 우리들 눈앞에 나타나 한데 집합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모리스 메를로 퐁티

《센스와 넌센스》(1948)

<푸른 화병>(1885~1887)은 세잔의 중기 그림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다. 이 그림 속에서 서로 아무런 연관이 없는 상징적 사물들로 이루어진 구성은 놀라운 회화적 공간을 창출하고 있다. 오른쪽에 있는 선은 문인지 혹은 벽지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색채는 캔버스에 통일성을 부여하면서 그림자 부분마저도 밝게 해주고 있다. 빛의 방향은 의도적으로 무시되고 있다.

사과와 비스킷

완숙기에 그려진 단순한 그림 중의 하나인 <사과와 비스킷>(1879~1882)은 평온기에 제작되었음을 알려 주는 특징을 잘 드러낸다. 궤짝 위에 올려놓은 접시 하나와 사과들은 완벽한 구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수채화의 뉘앙스를 풍기는 섬세한 색감(色感, 비스킷은 분홍, 접시는 연한 청색), 교묘하게 꾸민 단순함, 정물 주변의 절묘한 공간처리 등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이 정물화는 프랑스 화가 루뱅 보갱, 스페인 화가 프란치스코 드 주르바란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세잔이 이들 화가의 정물화를 보았을 것 같지는 않다.

유년시절의 사과

사과는 세잔의 스타일 실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가 정물화의 소재로 늘 사과를 선택했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세잔에게 사과는 전통적인 성애의 상징 이외에도 유년의 투쟁을 나타내는 사물이었다. 학생 시절 동급생인 졸라가 학생들에게 놀림당하는 것을 도와 주었던 세잔은, 졸라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사과를 건네받았던 것이다. 세잔은 훗날 사과 정물화를 많이 그렸다. 그는 "사과로 파리를 정복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사소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사과를 그려서 유명한 화가가 되겠다는 뜻이리라. 그림은 <테이블 위의 정물>(1883~1887)이다.

메당의 저택 서재에 앉아 있는 졸라. 1897년경에 찍은 사진.

세잔은 여러 화가들에게 지중해의 햇빛을 발견하도록 권했다. 에스타크에 있던 세잔은 모네, 르누아르, 그리고 조르주 브라크, 라울 뒤피들의 방문을 받았다. <에스타크에서 본 마르세유만>(위). <자화상>(아래, 1880).

에스타크의 바다

세잔이 에스타크 바다말고 다른 바다를 그린 적은 거의 없다(이 그림은 1883~1886년에 제작된 그림). 그러나 에스타크의 산업화가 촉진되자,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그는 이곳을 찾지 않았다. 세잔은 1902년 9월 1일 대녀(代女)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에스타크 해변은 한때 대단히 아름다웠지. 그러나 진보라는 괴물이 이 고장에도 닥쳐왔어. 그 두 발 달린 동물은 아름다운 해변을 기괴한 부두로 바꾸어 놓았는데, 그러고도 부족했는지 가스등을 달았고, 더욱 한심하게도 전등을 달았어.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세상이 되었어!"

모네나 시슬레가 그린, 햇빛 속에 반짝이는 포플러에 비교해 볼 때, 세잔의 포플러는 청동처럼 부동(不動)하는 견고함을 간직하고 있다. 음영 속에서 보이는 이 미묘한 밝음은 1885~1890년 사이에 그려진 웅장한 풍경화의 특징이다. 이들 풍경화에서 세잔은 푸생의 영웅적 풍경화가 갖고 있는 시적 평온함을 획득한다. 위에서부터 세잔의 <포플러>(1879~1882), <포플러>(모네, 1891), <루앵 인근의 모레>(시슬레, 1892).

생트빅투아르산은 시나이, 타보르, 올림피아 등과 어깨를 겨루는 성산(聖山)이 되었다. 생트빅투아르라는 이름(그 기원은 불분명함)부터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생트빅투아르산을 그린 이 그림은 1885년경에 제작되었다. 전경에 외로운 소나무를 배치한 구성은 풍경 전체에 깊이를 주기 위한 것으로서 파격적이면서도 대담하다.

<생트빅투아르 산>(위, 1882~1885) <생트빅투아리 산>(아래, 1885~1887).


"르톨로네 마을에서는 그 산이 보인다. 민둥산이기 때문에 색채라기보다 한줄기 섬광이 지나가는 흑백의 산일 뿐이다. 어떤 때는 그위에 떠 있는 구름이 산과 혼동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정반대이다. 그 멋진 산은 일견 보기에 하늘에서 갑자기 솟아난 것 같은 느낌이다. 태곳적에 석화(石化)된 듯한 연속되는 습곡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어쩌면 산밑둥에서 수직으로 솟구쳐 오르는 바위절벽이 지닌 동세(動勢)는 이런 감상을 더욱 강화해 준다. 생트빅투아르는 산과 똑같은 색깔의 하늘에서 흘러 내려와, 아니 우주공간에서 솟아 나와 거대한 암석덩어리로 굳어 버린 듯한 느낌을 준다."

페터 한트케

《생트빅투아르산의 교훈》(1980)

 

분명하고 단순한 양감(量感)을 보여 주는 세잔의 오르탕스 피케의 초상화는 입체파 화가들에게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움직이는 인물이 등장하는 <마르디 그라>(두번째, 1888)는 1870년 이후의 작품경향으로 볼 때 희귀한 그림이다. 세번째 스케치는 <마르디 그라>를 위한 습작이고, 네번째는 <커피포트와 여자>(1890~1895)이다. <온실 속의 세잔 부인>(첫번째, 1891~1892)은 오르탕스 피케를 그린 유명한 그림으로, 오르탕스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이 미완성 작품 속에서 더욱 돋보인다.

세잔의 자화상은 그의 초상화 중에서 가장 생기빌랄하고 가장 적극적이다. <자화상>(첫번째, 1895경). 두번째부터 <부드러운 모자를 쓴 자화상>(1890~1894), <중산모를 쓴 자화상>(1883~5), 한때 드가가 소장했던 <자화상>(1879~1882).

<다섯 명의 목욕하는 여자>(1879~1882>. 파블로 피카소가 한때 이 그림을 소장했다.

<목욕하는 남자들>(1890~1894)

 

제4장

"이제 약속의 땅이 보입니다"

 

세잔은 오로지 내적 확신만을 길잡이삼아 멀고 험한 길을 걸어왔다. 그는 많은 장애를 극복했고 그의 작품은 회화사에 새 지평을 열었다. 세잔은 1903년 1월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에게 수줍게 고백한다. "저는 약간의 진경(進境)을 개척했습니다. 그렇지만 왜 이렇게 많은 시간과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까? 예술은 순수한 마음을 완전히 바쳐야만 그 결실을 볼 수 있는 사제직 같은 것입니까?"

 

정물화, 인물화, 풍경화 가릴 것 없이 세잔은 자신의 모티프를 재치 있고 자유롭게 처리했다. <앉아 있는 발리에>(위, 1906년), <정물 : 사과, 배, 그리고 그릇>(아래, 1900~1904).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초상>(아래, 1899)과 볼라르의 화랑에서 1898년에 개최된 세잔 개인전시회의 카달로그(위).

세잔은 정물화의 대상으로 과일이나 병 같은 간단한 사물을 골랐고 정물의 부동상태에 움직임과 유연을 주기 위해 식탁보를 배치하곤 했다. <양파가 있는 정물>(첫번째와 세번째, 1895경)의 부분, <사과와 오렌지>(두번째와 네번째, 1895~1900경)의 부분.

수욕도 시리즈를 그리던 시기에 카드놀이하는 사람이라는 주제에 그토록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야외에서 실루엣 처리되어 마치 사람이 아닌 듯 보이는 <수욕도>의 등장인물과는 달리,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은 집중된 표정과 밀폐된 공간에서 서로 마주앉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카드놀이하는 사람>(위, 1890~1892)은 필라델피아에 있는 반스재단의 소장품으로 세잔의 소장품으로, 세잔의 그림 중 가장 큰 것 가운데 하나이며, 강한 집중과 긴장을 전해 준다. 훨씬 평온한 느낌을 주는 아래의 <카드놀이하는 사람>(1890~1892)은 뉴욕메트로폴리탄 예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등장인물들 간의 대치상황이 훨씬 완화되어 있다.

<카드놀이하는 사람> 시리즈에서 세잔은 무의식적으로 아버지와의 투쟁, 아니면 자기 자신과의 투쟁을 표현하려 하지 않았을까? 카드는 화가 세잔의 무기와 작업을 상징한다고 생각되어 왔다. 그 당시 미술평론가들의 용어로 보나, 게르부아 카페의 테이블에서 흘러다녔던 말로 보나, 카드는 마네와 인상파 화가의 단순화된 스타일과 평면구성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 석 점의 <카드놀이하는 사람>-두 점은 1890~1895년 사이에 제작(첫번째와 두번째)되었고 나머지 하나(네번째, 세번째는 부분 확대)는 1890~1892년에 제작되었다-은 두 명의 대결구도로 구성을 축소했다.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그리고 잇는 이 석 점의 그림은, 쓸데없는 배경을 생략한 가운데 자유분벙한 기법과 단호한 붓질을 통한 색채처리를 보여 준다.

<사과와 오렌지>(위, 1895~1900경), <양파가 있는 정물>(가운데, 1895경), <큐피드 석고가 있는 정물>(아래, 1895경)

만년에 세잔은 젊었을 때 즐겨 쓰던 짙은 색을 많이 썼다. 1902~1906년에 제작된 대형 수채화. <주름 잡힌 천 위의 두개골>에서 세잔은 투명성의 효과를 노리고 있다. 그는 당시의 관습과 반대로 균형을 깨면서 대상을 배치해 구성의 자유를 획득했다.

미술평론가 제프루아는 세잔이 그려 준 자기 초상화가 미완성임에도 불구하고 세잔의 대표작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서가, 책상 위의 서류, 로댕 작품의 복사 석고, 포즈를 취하기 전에 세잔이 가져온 인조 장미꽃 등 모든 것이 탁월하게 그려져 있다. 게다가 책상 앞에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그는 너무나도 세심한 손질과 풍부한 색조, 그리고 비할 바 없는 조화로움으로 표현되어 있다."

<조아생 가스케의 초상>(위, 1896)과 <팔짱을 낀 남자>(아래, 1899경)는 면(面)의 왜곡을 보여 준다.

고갱, 모네, 앙리 '르두아니에(세관관리)' 루소 등의 그림에서는 활활 타오르는 듯한 녹음(綠陰)이 자주 등장한다. 이런 그림들은 1870년대에 세잔과 인상파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탁 트인 풍경이나 거대한 하늘과 대조된다. <숲>(1895~1900).

 

"프로방스에서 좀 떨어진 곳에 왔다네. ……아주 쾌적한 곳이군. 주위를 에워싼 산들이 쾌 높은 것 같아. 두 계곡ㅇ[ 둘러싸인 호수는 젊은 처녀들이 데생을 하기에 알맞은 곳이지. 정말 고요한 자연일세. 젊은 여자 여행가의 스케치 수첩을 들추면 금방 튀어나올 법한 그런 곳이라네."

세잔

조아생 가스케에게 보낸 편지

아느시, 1896년 7월

<아느시호>(1896)

 

"나는 심심풀이로 그림을 좀 그리고 있소. 별로 재미는 없소. 하지만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호수는 제법 그럴듯하다오. 산높이가 2,000m 정도 된다지만 우리 고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오."

세잔

에밀 솔라리에게 보낸 편지

아느시, 1896년 7월

샤토 누아르

"엑스와 르톨로네 마을의 중간쯤에 위치한 샤토 누아르(검은 성)는 19세기 후반에 건축되었다. 산림이 무성한 산기슭에 난 산길 바로 위에 우뚝 솟아 있는 이 건축물은 니은 자 모양을 한 두 개 동(棟)으로 구성되어 있다. …… 그리고 각 동에는 일련의 기둥들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그러나 기둥은 아무것도 떠받치지 않기 때문에, 어쩐지 폐허 같은 인상을 준다. 좁은 고딕풍 창문과 뾰족한 지붕도 을씨년스럽다. …… 두 동 사이에는 정원이 있는데 세잔의 방에서 잘 내려다보였다. …… 이 집의 이름은 어쩐지 어색하다. 집을 온통 둘러보아도 검은 색조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이 집이 성 같아 보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집은 근처의 비베뮈 석산에서 가져온 아름다운 노란 돌로 지어졌다. …… 세잔의 그림에서는 서쪽 동의 진노란색 정면이 커다란 빨간색 헛간 문에 강조되어 노랗게 빛나고 잇다. …… 노랑은 짙은 진녹색 녹음을 압도한다."

존 리월드

<세잔 : 만년작>

(전시회 카탈로그, 1977)

<샤토 누아르의 공원>(첫번째, 1898경), <샤토 누아르 정원에 있는 피스타치오 나무>(네번째, 1900경), <샤토 누아르>(두번째, 1894~1896), 다른 <샤토 누아르>(세번째, 1904~1906)의 부분 확대.

 

녹색과 황토색의 하모니

"색채감은 빛의 깊이를 변별해 주는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그 때문에 추상작용이 일어나 화면을 채우기가 어렵고 또 공기와 물체 사이의 부드러운 접촉면(윤곽)을 정확하게 그려 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나의 이미지와 그림은 번번히 미완성으로 남습니다."

세잔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

1905년 10월 23일

웅장한 산

1896~1898년 사이에 제작된 <르톨로네 길에서 본 생트빅투아르산>(위, 아래는 부분 확대)은 탁 트인 풍경 속에 완벽한 통합을 이루어 내고 있다. 평원과 언덕들 사이에는 그 어떤 단절도 보이지 않으며 또 산과 평원도 부드럽게 이어져 있다. 하늘은 푸른색, 녹음은 녹색, 땅은 연한 황토색, 산은 연한 푸른색으로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색채가 구사되었다. 구불구불하고 불규칙한 윤곽선을 따라 색면이 단절 없이 펼쳐진다. 생트빅투아르산 작품 중 하나의 완성을 목격한 조아생 가스케는 이렇게 썼다. "캔버스는 서서히 어떤 균형감을 획득하고 있습니다. 사전에 충분히 생각해 둔 이미지가 온 사방에 퍼진 색면에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세잔은 신중하게 선택한 색을 가지고 물체 하나하나를 천천히 그려 나갔기 때문에 전체적인 풍경은 약간 진동하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는 조금씩 조금씩, 날마다 날마다 이들 색가에 확실한 조화를 주어 착 가라앉은 것 같은 명석함과 정밀함으로 그들을 한데 연결합니다."

1904년 세잔은 에밀 베르나르의 스튜디오에서 자신의 <대수욕도>(아래, 1900~1905)를 뒤에 놓고 사진을 찍었다. 부조 조각같은 구도를 취하는 이 수욕도는 거대한 수욕도의 일부분으로 여겨진다. 이 그림은 펜실베이니아 메리언에 있는 반스 재단 컬렉션에 수장된 수욕도 그림의 일부분이다.

여자들, 나무들, 그리고 하늘

"이 작품은 <대수욕도>(1900~1906)를 위한 밑그림이라기보다 별도의 독립 작품으로 시도된 듯하다. …… 이 미완성 그림에서는 인물들이 주된 관심사였던 것 같지는 않다. 아무튼 캔버스에 채워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는 점만으로도 미완성이라고 보아야 할 이 작품은, 구성 면에서가 아니라 채색 면에서 미완으로 보아야 한다. 슥슥 붓질을 한 이 그림은 청회색이 주조를 이룬 가운데, 땅, 나무, 하늘에는 약간의 녹청색이 사용되고 있다. …… 전체 구성에서 가장 짙은 부분은 중경(中景)의 진청색 삼각형인데. 그 주위에 모여든 누드 넷은 왼쪽과 오른쪽의 다른 누드들과 구분되어 있다. 이것은 세잔의 다른 수욕도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구도이다. (그러나 수채화에서는 이런 구도를 볼 수 있다.) 바탕의 흰색이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은 양옆의 누드 부분에 집중되어 있다. 중앙의 누드들은 땅바닥에 뭔가 신기한 것이라도 있는 것처럼 모두 몸을 수그리고 있다.

존 리월드

<세잔 : 만년작>

(전시회 카탈로그, 1977)

대수욕도

"이 그림은 세잔의 작품 중 가장 크고 가장 형식적인 면을 보여 주기 때문에 그의 이상적 구성을 나타낸다고 전해져 왔다. …… 이 작품은 누드들이 나무와 강과 함께 정확한 삼각형을 이루고 있어 세잔 작품 중에서는 보기 드문 균형감을 갖추고 있다. …… 이 그림의 분위기는 낯설면서도 아름답다. 전체적으로 푸른 색조를 띠고 있는 풍경 속으로 하늘, 물, 녹음이 녹아드는 듯하며 그리하여 멋지게 그려진 누드들이 돋보이고 있다."

마이어 샤피로

<폴 세잔>(1988)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위, 아래는 부분 확대)은 1889~1890년에 제작된 작품으로, 풍부한 표현력을 보여 준다. 인체의 다른 부분에 비해 지나치게 긴 오른팔은 추상예술의 백미라고 할 만하다. 세잔 같은 대가만이 인간의 강렬한 감정을 순수회화(그림에 그려진 내용이 아니라 선, 색, 형태 등으로 호소하는 그림 : 역주) 속에서 성공적으로 되살려낼 수 있는 것이다.(축쳐진 오른팔과 턱을 괸 왼팔을 대비시켜, 소년이 겪고 있는 고민의 갈등상을 드러내고 있고, 화면 뒤쪽의 보라색, 조끼의 빨간색, 소매의 흰색을 대비시켜 소년의 사색적 심리상태를 드러냈다는 뜻 : 역주)

<항해사>(위, 1902~1906)의 주인공은 세잔의 정원사 발리에이다. <앉은 사람>(아래, 1905~1906)에는 허깨비 같은 모습이 등장한다.

세잔은 자신이 느끼는 강렬한 감정을 하나의 조화로운 형태로 재구성하기 위해, 자연으로부터 직접 작업하는 자극을 필요로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감각을 그대로 전달하고 싶다. 그러나 내가 그린 느낌은 늘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이며 강렬한 서정주의를 뿜어대고 있는 것 같다."(그래서 사람들은 얼토당토않게 세잔의 시력이 나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가 만년에 그린 생트빅투아르 그림 속에서 산은 더 이상 언덕, 땅, 녹음 등과 어우러지는 파노라마의 일부분이 아니었다. 산은 이것들과는 별도로 떨어져 있는 하나의 덩어리였다. 그것은 분명 풍경의 한 부분이 아니었고 언덕, 나무, 집과 같은 차원에 놓인 물체가 아니었다. 산은 이미 다른 성질을 획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력하게 그어진 수평의 선이 산을 여타 풍경과 구분지어 놓고 있다(동세에 가득 찬 산의 모습이 세잔의 예술가적 의지에 억제되어 동세와 의지 사이에 절묘한 평형상태를 이루고 있다는 뜻 : 역주). 첫번째는 <레로브에서 바라본 생트빅투아르 산>(1904~1906)이다. 두번째부터 네번째까지는 생트빅투아르산을 그린 세 그림(1904~1906)이고, 다섯째는 레로브 언덕에서 이젤을 앞에 두고 서 있는 세잔을 화가 케 그자비에 루셀이 1906년에 찍은 사진이다.

<레로브에서 본 생트빅투아르산>(1902~1906)


최초의 현대적 화가

"세잔은 미술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대가이다. 그를 반 고흐나 폴 고갱에 견주는 일은 격에 맞지 않는다. 세잔의 업적을 생각하면 17세기의 거장 램브란트가 연상된다. <엠마오의 순례자들>을 그린 렘브란트처럼, 그는 주변적이고 부수적인 것은 깡그리 무시하고 지혜의 눈으로써 리얼리티의 심연에 뛰어들었다. 설혹 심오한 리얼리즘이 어느새 반투명한 정신적 상태로 뒤바뀌는 그 경지에까지 도달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세잔은 적어도 그런 경지에 도달하려는 후배들을 위해 분명하면서도 멋진 방법론을 하나 남겨 놓았다. 그는 우리에게 우주의 약동하는 힘을 터득하라고 가르쳤다. 그는 생명이 없는 낯선 물체들이 서로에게 변화를 주는 그 미묘한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우리는 세잔에게 대상의 색깔을 바꾸는 것은 그 대상의 구조를 바꾸는 것이라는 획기적인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미술이 선과 색체로 대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색체로 자연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입증했다. 세잔에 대한 이해는 곧 입체파의 출현을 예견하는 것이다."

알베르 글레즈, 장 메칭거

《입체파 화가에 대하여》(1912)



1871년경의 세잔.

에밀 졸라.

졸라의 시골 별장. 샤토 드 메당.

21세기 초의 세잔(위)과 졸라(아래).

엑스에 있는 스튜디오. 작업에 몰두한 세잔을 방해할 만한 요소는 아무것도 없다.

1901년에 지은 레로브 스튜디오는 생트빅투아르의 산록에서 도보로 몇 분 안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카미유 피사로가 1874년에 그린 세잔 초상화(동판화).

야외작업을 나가는 피사로(1874경).

인상파 화가이며 세잔이 스승으로 받든 카미유 피사로(오른쪽 끝)의 퐁투아즈 집 정원에 앉아 있는 세잔(왼쪽 앞). 1877년 사진.

니콜라 푸생이 그린 <폴리페무스>(1649). 화면 속의 산이 풍경을 압도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등장인물들을 완전히 위축시키지는 않고 있다.

<목졸린 여자>(1870~1872경)는 1874년의 제1차 인상파 전시회 때 물의를 일으켰던 <현대판 올랭피아>(1873경)의 극적 구도를 취하고 있다.

"그는 덩치가 크고 잘생긴 남자였으며, 알맞게 곱슬거리는 짙은 갈색 머리와 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었다. 약간 구붓한 매부리코와 크고 검은 두 눈은 루브르에 있는 아시리아 부조의 인물상을 닮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런 모습은 오래가지 않았다. 몇 년 뒤에 만난 그는 정수리부터 대머리가 되었고, 수염과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는데 머리에는 얼마만큼 흰눈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러나 눈은 예전처럼 반짝거렸다. 만년의 세잔은 또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 만년에 그를 만났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가 퇴역군인 같아 보였다고 존했다.

조르주 리비에르

《스승 폴 세잔》(1923)

마티스가 1889년에 사들인 그림 <세 명의 목욕하는 여자>(1879~1882).

한때 고갱이 소유했던 정물화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 화가 오딜롱 르동과 에두아르 뷔야르, 평론가 앙드레 멜레리오,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 화가 모리스 드니, 폴 세뤼지에, 폴 엘리에 랑송, 케르자비에 루셀, 피에르 보나르, 그리고 드니의 아내, 드니가 1900년에 그린 <세잔에게 경의를>이라는 이 그림에서 그들은 세잔에 대한 존경을 표하고 있다.

1906년의 세잔.

세잔의 아내 초상화를 스페인의 입체파 화가인 후앙 그리스가 1916년에 다시 그린 작품.

한때 모리스 드니가 소장했던 <수욕도>(1890~1894).

<오베르의 농가>(1879경).

에밀 베르나르가 1904년에 찍은 세잔의 사진.

<미디의 풍경>(1885경). "나는 내가 느낀 것을 표현하려 하며, 또한 그 느낌을 나의 개인적 미학을 통해 조직할 것입니다."

생트빅투아르산과 샤토누아르. 1904~19066년에 제작된 세잔의 그림이다.

사과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랑을 연상시킨다. <석고 큐피트가 있는 정물>(1895경).

생트빅투아르산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들 중 하나(1900~1902).

 

 


 

posted by 황영찬
2015. 6. 23. 11:07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63 萬人譜 22

 

高銀

2006, 창비

 

 

시흥시대야도서관

SB001810

 

811.6

고7만 22

 

창비전작시

 

스웨덴 Svenska Dagbladet가 뽑은 '2005 올해의 책'

 

옛일은 참혹했던 일까지도 향수를 느끼게 한다. 이번 고은 선생의 『만인보』에 그려진 4 · 19도 그러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것은 지금의 눈에 비치는 당시의 일들이 어떤 순진성 또는 순수성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령 신문팔이 소년의 용기가 계엄군을 돌아서게 하는 이야기는 그러한 순진성 또는 순수성을 드러내준다. 이것이 드러나는 것은 물론 시인의 시심이 그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만인보』는 민족 또는 민중의 서사시이다. 서사시에는 영웅이 있게 마련이고, 이 시의 영웅은 민중이지만, 모든 것이 민중이데올로기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만인보』는 정치와 관련 없는 민중의 삶, 더 나아가 혁명의 적에게도 열려 있다. 여기에 실린 「어느 임종」은 죽음에 임하여, 독수리에게 자신의 주검을 내맡기며, 내생을 사절하는, 도인의 초탈을 읊고 있다. 『만인보』의 시심은 정치를 넘어, 이러한 초연함과 일치하고, 다시 한 없는 자비심과 일치한다. ● 김우창 문학평론가, 고려대 명예교수

 

『만인보』는 이번 세기 세계문학에서 가장 탁월한 기획 가운데 하나다. 그 시들은 더할나위 없이 감칠맛 나고, 사람들 삶의 세목으로 충만하다. ● 로버트 하스(Robert Hass) The New York Review of Books 서평

 

그는 무엇보다 시적 영감을 얻은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적, 정신사적 영향력을 지닌 백과사전이다. 통찰력과 풍자와 온정을 갖고 이 차가운 불빛 속에서 인간적 자연의 하약함과 유혹을 드러내 보여준다. ● 얀 칼손(Jan Karlsson) Kristianstadsbladet 서평

 

윤회하는 세속의 그의 인물들은 무아의 경지에서 가장 강하다. 시들 속의 이야기는 마술퍼럼 마을과 밭과 개들, 그리고 새들과 인간들과 시간의 흐름을 내포한다. ● 스웨덴 국영라디오 'P1' 서평

 

고  은 高  銀

1958년 처녀시를 발표한 이래 시 · 소설 · 평론 등에 걸쳐 140여권의 저서를 간행했다. 서사시 『백두산』『만인보』와 『고은시선집』 1 · 2 『고은전집』(전38권) 등을 출간했고, 전세계 10여개 언어로 50여권의 시집 · 시선집이 간행되어 큰 반향을 얻고 있다. 현재 세계 시아카데미 회원(한국대표)로 세계시단이 주목하는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차례

 

방옥수의 시 / 신선로 / 김광석 / 안승준 / 최신자 / 김종술 / 봄날 무명씨 / 김성수 / 김영호의 친구 / 어부 김기돈 / 권찬주 / 이창원 / 이귀봉 / 안종길 / 홍종필 / 최기태 / 김평도 / 진수만이 / 박지두 옹 / 서울의 한 풍경 / 이효의 / 안부자 / 삼섭이 / 임원협 영감 / 임동성 / 김승하 / 김현기 / 김용실 / 박동춘 / 김관식 / 이상현 / 이시광 / 김영길 / 원일순 / 고해길 / 효덕이 / 한쪽 눈 눈물 / 백제 마구간지기 사기라는 사내의 행로 / 효덕이 / 최경순 / 늙은 막일꾼 / 구자숙 / 꼬냑 / 김영준 / 오막살이 영감 / 홍순선 / 김찬우 / 최기두 / 심자룡 / 가실 / 두 주검 / 김용안 / 이정옥 / 김경이 / 장인서 / 최정규 / 차명진 / 강관순 / 성엽이 / 김재복 / 이근형 / 이강섭 / 박순희 / 장기수 / 서대문 최현식 / 김지태 / 이영 / 김철호 / 이수길 / 조근남 / 채광석 / 안응헌 / 김재준 / 강석원 / 김호석 / 박완식 / 김치호 / 조주광 / 천년 농사 / 순복이 / 팔짱 낀 여자 / 박래욱 / 발바리 / 그의 고백 / 그 아버지 / 박동희 / 유대수 / 김응수 / 박경식 / 이종량 / 정환규 / 정삼근 / 전청언 / 그 아기 / 임진표 / 이후락 / 석정선 / 차성원 / 정임석 / 권장근 / 이성룡 / 김창무 / 장형 / 옥여 자매 / 기숙이 / 선비의 길 / 강기학 / 최동섭 / 최봉섭 / 나영주 / 정규철 / 최태식 / 정태성 / 소매치기 전일중 / 안창완 / 박쥐 / 강명석 / 다정도 할사 / 차대공 / 권한승 / 김호남 / 박재옥 / 장도영 / 조용수 / 김철곤 / 임순자 / 장인보 / 이규복 / 고운이시여 고운이시여 / 이판갑 / 최현식 / 김두호 / 이학수 / 봉원집 / 빈 죽음 / 김도연 / 지복수 / 어떤 청년 / 종로3가의 소리 / 최봉옥 / 저무는 충무로

 

방옥수의 시

 

그 혁명 어느날

사랑하는 남자 방옥수가 총 맞아 죽었습니다

임수인은 머리 풀고

회문산에 들어가

혼자 살았습니다

두렵지 않았습니다

외롭지 않았습니다

혼자 뻐꾸기로 두견새로

띠밭 일구어 살았습니다 머리 잘랐습니다

고운 살결 굳어버렸습니다

 

20년 뒤 어느날

그네가 세상 떠나버렸습니다

 

그네 유품 하잘것 없었습니다

백팔염주 한 벌과 만년필

염주는 심심풀이로 목에 걸었을 테고

만년필은 필시 남자의 것이었습니다

또 한가지 다음과 같은 접고 접힌 분홍색 쪽지가 있었습니다

 

이세상 어디에도

저세상 어디에도

영 이별은 없다 하더이다 꽃도 달도 사람도 그렇다 하더이다

 

지난날 방옥수의 글월이었을까

그러고 보니

그러고 보니

아 그러고 보니

4월혁명은 한 편의 서정시도 벙어리로 남겼습니다

 

이세상 어디에도

이별은 없다 하더이다

 

이런 거짓말이 어느덧 흰구름 이는 참말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봄날 무명씨

 

금호동 마루 옥수동 비탈에서

한강이 내려다보인다

개나리가

잿빛 세상 잿빛 마음을

잘도 바꿔놓았다

 

기뻐라

 

한강물도 느리게 느리게 가며

눈 시리게 새로운 개나리를 바라본다 돌아다본다

 

금호동 마루 옥수동 비탈에서

한강 건너

압구정 터 과수원이 내려다보인다

봄 배추밭도

어느날은

봄 배추밭에 나온 삽사리도 내려다보인다

 

세상에는 자유당만 있다

자유당 임흥순만 있다

그러나 야당 유옥우도 잇다

 

금호동 마루 옥수동 비탈

백년 사랑할 듯 사랑하던 사람

저세상의 사람이 내려다보인다

봄날 내 호주머니는 빈 새집인 양 텅 비었다

 

약수동 네거리 식당에 가서

곰탕 한 그릇만

사먹었으면 좋겠다

막걸리 한 사발만

마셨으면 좋겠다

 

금호동 마루 옥수동 비탈에서

한강이 내려다보인다

개나리가

한창 벙어리로 벙어리로 피어 있다

 

김영호의 친구

 

마산 중앙중학교 3년생

영호군

제1차 의거의 밤

남성동 파출소 앞에서

총 맞아 죽었다

 

열여덟살의 일생

 

네살 때부터 고누를 두고

다섯살 때부터 바둑을 두었다 가포리 바닷가에 한번 간 적 있다

 

다음날 뒷산

영호군의 친구 인섭군이 외쳤다

내 이름 오인섭을 버리고

네 이름 김영호로 살겠다

영호야

이제 내가 너이다

 

메아리가 있었다 내가 너이다 너이다

 

어부 김기돈

 

거룻배 위

혼자 앉아

홍합을 잡아올린다

바다는 막막하고 뭍은 피를 흘리고 있다

 

오늘 따라

잡히지 않는다

빈 갈고리

빈 갈고리

 

그러다가 덜렁 무거운 것이 걸렸다

잡아당겼다

시체

흰 메리야스

잿빛 반지

눈두덩에 55센티 최루탄이 박혀 있다

 

거룻배가 기우뚱거렸다

 

김주열 시체

어부 김기돈은 불려가

사찰계 형사의 모진 닦달을 받았다

 

너 누가 시켜

그 송장 건져냈느냐

너에게 시킨

빨갱이가 누구냐

숨기지 말고 말해

그렇지 않으면

네가 바다 밑 홍합된다

 

아무도 시킨 적 없소 죽이든지 죽여 던지든지 마음대로 하시오

 

서울의 한 풍경

 

여기는 신촌 노고산 기슭

개구리가 오다가 도로 간다

사랑하면 무엇이고 궁금한 아이가 되어버리나

 

토끼풀밭에 벌렁 누운

순옥이 물었다

 

왜 하늘은 파래?

 

사랑하면 할수록 행복도 불안해지나

 

10년 뒤에도

우리 지금처럼 행복할까

 

이런 순옥이 말에 대답 없다

돌아다보니

공광식이는 잠들어 있다

파리 한 마리가 왔다가 도로 간다

 

순옥이가 혼자 콧노래를 불렀다

남쪽나라 십자성은 어머님 얼굴

 

지금 종로1가 계엄사령관 송요찬의 지프차가 지나가고 있다

 

돌항아리 같은

돌대가리 같은 장군이

검은 안경 쓰고 기우뚱 지프차가 지나가고 있다

 

한쪽 눈 눈물

 

밤 기차는 운명이다

친구들은 벌써 캔맥주 네개째다

시끌벅적하다

그 가운데 창가의 유보섭

한밤중 조치원역을 지나갈 때

지난날 조치원에서 일하셨던 아버지 생각으로

가슴 저렸다

 

아버지는 한쪽 다리 절뚝거리며

조치원 화물취급소에서 근무하셨다

어린 시절 유보섭도

여기서 자라났다

 

5년 전 그 아버지는 어머니가 계신 저세상에 가셨다

 

친구들은 캔맥주 다섯개 여섯개 째다

시끌벅적하다

창밖은 캄캄하다 불빛이 화살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차창 쪽 눈은 눈물

다른 쪽 눈은 말없는 눈웃음이었다

 

통일호 야간급행은 지칠 줄 모르고 간다

이따금 나타나는 간이역들 사그리 무시하고 간다

 

어느덧 친구들은 하나둘 곯아떨어지고

유보섭만 다른 쪽 눈마저 눈물

유보섭의 마음은 깊고 깊다 저세상도 들어 있다 아무도 모르겠다

 

백제 마구간지기 사기라는 사내의 행로

 

옛 스키타이 사람들

어떻게 말을 타기 시작했던가

자주 말등에서 떨어져

다쳤으리라

마구 달리는 동안 떨어져

생발목이 부러지기도 하였으리라

그러다가

그러다가

말등에 익어

태어난 듯

말등에 익어

나이 다섯 여섯 살이면

냉큼 말등에 올라

바람인 듯 내달렸으리라

이랴

이랴

채찍 휘둘러

말엉덩이 냉큼 쳐대었으리라

 

그러다가

그러다가

말등에 안장 놓고 말에 재갈도 먹였으리라

 

고구려에도

백제에도 이런 말 타는 핏줄 이어져

기원 370년

기마군대 늠름하였다

백제군

고구려 깊숙이 쳐들어갔다

근초고왕 태자

근구수 장군 앞에

적 고구려 진영에서 뛰쳐나온 자가 앞잡이로 대령하였다

 

그를 앞세워

적 정예군을 무찌르니

그밖의 장병은 붉은 깃발만 괜히 휘날리다 다 투항해버렸다

그 전쟁을 백제의 승리로 이끌었다

투항자 사기

그는 본디 백제인이었다

백제 기마군 마구간지기였다

 

어느날 장군 애마의 말굽을 망가뜨려

그 길로 고구려로 달아난 것

 

과연 말이나 소는

고구려 백제에서

사람값을 다하였으니

죽은 딸 시신도

소나 말로 주고 찾아왔다

 

하물며 장군의 애마를 못 쓰게 만든 죄 커서

적지로 달아났던 것

달아났다가

고국 정복군이 닥치자

목숨 부지하려고

투항한 것

적진을 자세하게 알려준 것

 

그러나 그 마구간지기 사기는

말 한 필 사서 바칠 때까지

지난날의 장군이 거느린 부대에

말굽 온전한 말 한 필 사서 바칠 때까지

1일 1식

마구간 말똥 말오줌

청소

마구간 검불

마구간 말먹이 여물통

날마다 밤마다 날라야 하였다

3년 노역형

어느새 팍 늙어버린 사기

갈비뼈 속

한숨소리 났다

 

오도가도 못하고 팍 늙어버렸다 이제 조국도 적국도 없어졌다

 

늙은 막일꾼

 

혁명은 태어났다

혁명은 자라났다

누구의 붉은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누구들의 푸른 이데올로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은

하얀 우연의 정의(正義)

혁명은 불쑥 튀어나왔다

담모퉁이에서

두런두런 나타났다

혁명은 나아갔다

누구의 노란 전략에 의해서가 아니라

 

안된다

안돼

이승만 독재는 안돼

 

탄압의 모든 이유는 반공

반공은

독재의 만사형통

안된다

안돼

여기저기서

안암동 젊은이들이

연건동 젊은이들이

신촌 젊은이들이

흑석동 젊은이들이

 

아니

신설동 어린이들이

동대문 어린이들이

 

종로 관철동 늙은이들이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다섯 여섯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들불이 일어났다

대구 들불

마산 들불

대전

광주 들불이 일어났다

아 서울 들불이 일어났다

태평로 들불

세종로 들불

아 4월혁명의 들불

 

4월 26일 낮

동대문 밖 신설동 네거리에서

안병채가

총 맞아 쓰러졌다

누군가가

일으켰으나

이미 주검

 

늙은 아버지 안병근 씨는

막일꾼이었다

 

내 자식 손

일만 한 손

내 자식 등짝

남의 짐만 진 등짝

 

막일꾼 아들은 죽고

막일꾼 아버지는 살아 있었다

4월 혁명의 눈물

 

오막살이 영감

 

서정리 바위배기 언덕

해송 언저리

오막살이 집 한 채

오막살이 지붕에는

박 한 덩어리

사립문 없고

울타리 없다

아예 마당도 없다

뱀이 섬돌 밑 똬리 틀고 있다가 가기도 한다

 

윗말에서 낮닭이 한번 운다

 

그 오막살이 영감 합죽이영감

안마을

윗마을 초상 나면

슬슬 일어나서

초상집 간다 차일 쳐주고 궂은일 도맡아 한다

 

막걸리 한 사발

밥 만 국 한 사발

더도 덜도 말고

그것이 품삯이었다

 

누가 시답지 않은 반말로 물었다

 

자네

본관 어디신가

 

모르오 청주인지 전주인지

 

자네

김가는 정말 김가인가 피가 아닌가

 

성이야

어찌 내가 마음대로 달겠소

그냥 어릴 때부터

김가였소

 

허허

자네 집 방 안에 세간은 있나

 

고리짝 하나 없소

농짝 하나 없소

이 내 몸 하나

겨울에는

여름옷 두 벌 껴입고

여름에는

한 벌 벗거나

두 벌 다 벗거나

 

방문 한 짝

자물쇠도 열쇠도 없다오

 

그러나 오두막 굴뚝 아래

맨드라미 하나는

올해도 닭벼슬 시뻘겋게 소리친다오

 

아쭈 자네 정수동인가 김삿갓인가

 

닭벼슬이 소리친다

시뻘겋게 소리친다

아쭈

 

천년 농사

 

내 이름 알아서 무엇하리오

박아무개

장아무개

그중의 하나

임아무개

임칠성이오

고래실 조각논 110평

고개 넘어

비알밭 30평

 

더 바라는 것 없소

 

딸아이 하나 시집가고

아들 하나 자라나

고등학교 갔다오면

교복 벗고

허드레옷 입고

소 몰고 각시풀 뜯기러 가오

 

더 바랄 것 없소

 

아침 인시(寅時) 어둑어둑

논 쪽으로 큰절 올리고

밭 쪽으로 큰절 올린다오

 

더 바랄 것 없소

 

천년 농사 이어온 조상 핏줄

나에게는 논이 하늘이고

밭이 대세지보살이라오

 

나에게는 절간도 예배당도

소용없소

 

저녁 해시(亥時) 어둑어둑

재 너머 밭 쪽으로 큰절 올리고

고래실 논 쪽으로 큰절 올리고

 

더 바랄 것 없소

 

내일모레

마누라하고

오랜만에 딸네집 다니러 가오

 

팔짱 낀 여자

 

1960년 한국 과부는 총 50만 6천명에 이르렀다

전쟁과부 중

몇천명은 해를 거듭하며 재혼하거나

개가했다

전생과부가 아니더라도

그냥 과부들도

하나둘 시시한 새살림을 위해

지난날의 반지를 팔아버렸다

하지만

전쟁 뒤 10년

아직도 이 강산의 과부는

논의 뜸부기

뒷산 두견이로 흔하디흔했다

 

그네들의 한으로

한국의 밤하늘 뭇별들 침 삼키듯 울음 삼키듯 찬란했다

어쩌다 비장하게 사라지는 별똥별이 있었다

과부별인듯

과부별인듯

 

1960년 다음해 봄

한국 창녀는 총 4만명을 넘었다

그네들의 몸으로

한국의 젊은 엉터리들이 자꾸 늘어나고 있었다

그네들이 번 화대 몇푼으로

두고 온 고향의 동생이 공부를 했다

 

기생 7백여명이

난만한 밤 요정에서 국회부의장의 술을 따르고

권력에 바짝 눌어붙은

정욕의 술을 따르고

충성스러운 장관의 개다리 사타구니를 달래주었다

장구소리로 밤이 으슥토록

아코디언 소리로

전자오르간 소리로 으슥토록

 

그들에게

한국은 천국이었다

절대빈곤 보릿고개의 한국은

절대 지옥이 아니었다

 

이에 질세라

기우뚱거리는

베니어판 위에

백노지 쫘악 깔고

거기에

빈대떡 놓고

막걸리 놓고

소주 놓고

밀주도 놓고

젓가락 니나노가 시작되는 술집들

니나노 작부 3400명

 

명동 빠아 오아씨스

남포동 마도로스

청춘

불야성 카사부랑카 등 여급 2300명

 

금자가 마리아가 된 댄서 1200명

 

밥만 먹여주세요

잠만 재워주세요

밤중의 식모방 주인영감이 덮쳐도

한강물에 배가 지나가고요

 

생쥐꼬리

월급도 감지덕지

하녀 1870명

 

저 캠프 아이젠하워 밖

양공주촌

양공주 3천명

미군 동거 온리 3천명

아니 민족공주 몇천명

 

이 온갖 몸의 행위자야말로

조국의 폐허에서 태어났고

조국의 폐허에서 살아남았다

이 몸의 운명이야말로

조국의 폐허를 다시 삶의 무대로 만들었다

그네들의 나락으로

그네들의 자포자기로

한국의 봄 얼음이 풀려 떠내려갓다

죽은 송장도

그 얼음덩이 타고 떠내려갔다

 

이런 한국여성의 시절

그러나 아직도 깜깜절벽 남녀부동석의 시절

빠리에서 돌아온

이병복이

그의 남편 권옥연의 팔짱 끼고

화신 앞을 지나간다

 

모든 사람에게 그것은 충격이었다

세상에

세상에

여자가 남자하고

팔짱을 끼다니

세상에

세상에

아이고 망측해라

아이고 말세

 

그의 고백

 

나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나의 아버지가 빨갱이여도

나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나의 아버지가 나를 낳은 것은 사실이나

틀림없는 사실이나

천번이라도

틀림없는 사실이나

나의 아버지는 나의 원수입니다

나의 삼촌이 민청 면지부 간부였을지라도

나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나의 매형이 야산대에

한두번 참가했더라도

나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나의 외사촌 관호형

그 자식이 의용군에 따라갔어도

나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나는 빨갱이가 싫어서

자장면집 빨간색 춘첩(春帖)도 뜯어냈습니다

나는 빨갱이가 싫어서

태극기의 태극 빨간색을

검정색으로 덮어버렸습니다

나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나는 가을 빨간 단풍잎들도 마구 후려쳤습니다

나는 니나노집 작부의

빨간 구찌베니 주둥이를 짝 찢어버렸습니다

병원비 몽땅 냈습니다

손해배상 몽땅 냈습니다

 

나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빨간 금붕어도 꺼내어

눌러 죽여버렸습니다

 

나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나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나는 이승만 각하의 눈깔입니다

나는 반공연맹 흰 똥 푸른 똥 변소입니다

 

나는 죽어도 빨갱이가 아닙니다

 

그 아버지

 

어미가 제 새끼 다섯 마리 고루 핥아주었다

제 새끼 오줌 다 핥아먹고

제 새끼 똥 흔적 없이 다 핥아먹었다

 

새끼들 궁둥이 깨끗하다

막 나기 시작하는

젖비린내 나는 몸뚱이 깨끗하다

 

아비는 필요없다

 

전라북도 완주군 지주 진달권 영감께서는

맏아들

맏며느리

둘째아들

첫째딸

셋째아들

넷째아들

다섯째아들

둘째딸

여섯째아들

죽은 다섯째아들의 무덤

두루두루

골고루 챙기는 것으로 세월을 보냇다

 

마누라는 있는 듯 없는 듯하다

마당에는 거위 울음소리가 있고

거위 똥이 있다

 

장차 그 아들딸에게 나누어줄 논과 밭

산과 과수원을 챙겼다

밤중에 나누어두었다

밤중에도 혼자서 땅문서 꺼내놓고 이것저것 챙겼다

 

그 형제자매들 어머니는 필요없다

 

선비의 길

 

이이(李珥)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을 펼친다

 

제3장 몸가짐〔持身〕의 장

아홉가지 수련의 항목

하나 발모양을 무겁게 하라 경솔과 거만 다 피하라

둘 손모양을 공손히하라

셋 눈모양을 단정히하라 훔쳐보지 마라

넷 입모양을 움직이지 마라

다섯 소리를 조용히 내라 트림도 삼가라

여섯 머리모양을 곧게 하라

일곱 숨쉬는 모양을 숙연케 하라

여덟 서 있는 모양을 덕스럽게 하라

아홉 얼굴모양을 장엄하게 하라

 

아홉가지 지혜 수련을 위한 항목

 

하나 바르게 보라 바르게 생각하라

둘 밝게 들어라

셋 안색 온화하게 하라

넷 언제나 공손함을 생각하라

다섯 말을 충실하게 하도록 하라

여섯 일마다 공경스럽게 정성스럽게 할 것을 생각하라

일곱 의심나는 것은 바로 물어라

여덟 분할 때는 어려움을 먼저 생각하라

아홉 옳은 것을 얻었을 때 그것이 옳은가를 생각하라

 

이런 수련을 지나 한 사람의 조선 성리학 선비가 만들어진다

그 조선 선비 사흘 굶어도 의젓이 앉아

그 조선 선비 바른 말하고 사약 앞에

의젓이 앉아

 

그 조선 선비

나라가 기울어질 때

분연히 일어섰다

그중 일어서지 않은 선비 있다

도포 입고

『중용』 『대학』만 읽고 있는 제천 선비

육만손 영감 있다

 

그의 아들 육관섭이

아버지의 제자들을

다 내쫓앆다

 

다정도 할사

 

조선 4대 임금 세종 연간

청백리에 녹선(錄選)된 세 정승

영의정 황희

영의정 맹사성

좌의정 유관

그 가운데 유관 대감 거동 보아라

 

여름 한 달 넘게 장맛비 왔다

유관 대감과

그의 부인

지붕이 줄줄 새니

종이우산 하나 펴들고 앉았다

 

다정도 할사

 

유관 대감께서 말했다

우산도 없는 집은 어떻겠소 그나마 우리는 낫소그려

부인이 그 걱정 달랬다

우산 없는 집은 그 집대로 다른 마련이 있을 것이오

 

다정도 할사

 

방 안의 그릇마다 빗물 떨어지는 소리

궁상각치우

 

고운이시여 고운이시여

 

조선 서유거(徐有擧)의 『교인계원필경서(校印桂苑筆耕序)』는 말한다

최치원

공의 이름은 최치원 자는 해부(海夫) 고운(孤雲)은 그의 호이다

호남 옥구 사람이다

 

청나라 포송령의 소설 『요재지이(聊齋志異)』 강남오통지사(江南五通之事)는 말한다

신라 말기에 최승은 이 고을(桂州, 지금의 沃溝)에 태수가 되었는데

그의 처가 아들을 낳으니 치원이라 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기 보통이 아니었다

고군산도의 옛 이름은 문창군(文昌郡)이다 또 고기가 많이 잡히니

당나라 장삿배가 자주 왕래했다 장사꾼이 치원을 좋아하여

드디어 싣고 당나라로 가서 과거에 통과하여 벼슬하게 되었다 뒤에

고국으로 돌아가 산수를 방랑했다 고군산도에 있는 월영대(月影坮)는

곧 선생이 거문고를 타던 곳이다

 

당에 들어가 18세 소년으로 급제하니 과연 도교의 별 문창성(文昌星)을

과거를 비는 신으로 삼아온 바 고려 때 최공을 문창후로 추존하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문창초등학교가 군산 교외 바닷가에 있다

 

고운이시여

고운이시여

문창후 고운이시여

동쪽 나라 시의 아비시여

 

돌 한 덩이에게도 물 한 구비에게도 떳떳한 시 아니거든

시를 말하지 말라 하신 아비시여

천년 전 가야산에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으신 아비시여

삼가 당신의 후인 어쭙잖은 몇다발 시편 불태우지 못하고 세상이나 희롱하며 떠돌고 있나이다

 

고운이시여

고운이시여

다시 한번 태어나소서 태어나 밤 하늘에 시의 미친 밤 이루소서

 

어떤 청년

 

태평로 국회의사당 거리

시청 앞

서울역 앞

종로

세종로 거리

 

수백개 횃불들이 춤추며 소리치며 타올랐다

횃불데모는 흉흉했다

장면 정권 타도하자

횃불데모는 섬뜩했다

4월혁명 배신했다 그놈이 그놈이다

횃불데모는 공포였고 또 공포였고 매캐한 불안이었다

북으로 가자

남으로 가자

 

횃불데모 이틀째 참가한 청년 현중구

이제 그는 제기동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고교 중퇴 실업자가 아니라

태평로의 혁명가였다

횃불데모 맨 앞에서

우렁우렁한 구호 외쳐댔다

지정구호 말고

즉흥구호 마구 외쳤다

 

장면 정권 타도하자

그놈이 그놈이다

중앙청은 우리 것이다

중앙청으로 가자

중앙청으로 가자

 

한 혁신정당은 그를 설득했다

현동지 우리와 함께

나라와 민족을 구해냅시다

한 혁신정당은 그를 반대했다

안되오

저런 맹목적인 자

저런 난폭한 자는

반드시 우리에게 해가 될 것이오

 

그러나

그는 밤이면 나타나 외치고 외쳤다 장면 정권 타도하자

 

종로3가의 소리

 

이 쌍놈으 새끼

씹값 떼어먹고 튀는 새끼

이 쌍놈으 새끼

지 에미 씹구멍으로

도로 기어들어가 숨막혀 뒈질 새끼

 

치사한 새끼

떼어먹을 게 없어

씹값 떼어먹고 사라진 새끼

이 쌍놈으 새끼

 

뭐 오줌 싸고 와서

한번 더 하자고

이대로 꼼짝 말고

누워 있어 어쩌고 저쩌고

 

더러운 새끼

속여먹을 게 없어

나를 속여먹어

이 쌍놈으 새끼

 

제 에비 좆

썩어문드러진

그 좆으로 낳은 새끼

이 쌍놈으 새끼

 

네놈의 새끼

네놈의 여편네

네놈의 자식들 다 뒈져라

이 쌍놈으 새끼

 

종로3가 단성사 골목

이렇게 욕 퍼붓는 한밤중이 숙연하다

창녀 우옥자

그네 얼굴 빼어난 미모

나이 25세

어디서 이런 짙푸른 욕이 나오나 숙연하고 숙연하다

 

저무는 충무로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튀는 놈들은 지식인이다

혁명이 나면

가장 먼저 사라지는 놈들은 지식인이다

 

그뒤 혁명의 거리에

가장 먼저 나타나는 놈들은 지식인이다

무지랭이들

일자무식 머저리들의 주검 널린 그 거리에

 

놈들은 혁명을 찬양하고 혁명의 논리를 만들어낸다

할렐루야

놈들은 혁명을 벌써 제것으로 만든다

 

결국 놈들은 혁명을 모독한다 혁명을 배반한다

 

1961년 3월

벌써 1년 미만으로

혁명은 없어져가고 있다

서울 충무로 입구 주점 오스카

그 술집 한구석 벽에 기대어 음독자살한

계영제 군

신흥대 야간부 학생

종잇조각 낙서가 유서였다

 

두번의 데모 속에서

나는 도망쳤다

네번의 데모 속에서

내가 밀려났을 때

앞으로 나아갔던

내 친구 안진호 군

이제라도

그대의 뒤 따르겠다 

 

 

 

posted by 황영찬
2015. 6. 20. 12:41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62 환단고기를 찾아서 2 - 일본왕실의 만행과 음모

 

신용우 장편소설

2013, 작가와비평

 

대야도서관

SB102401

 

813.7

신65ㅎ  2

 

일본왕실 지하서고에서 숨 막히는

우리 역사서 20만 권의 진실

대한의 딸들을 성매매도구로 전비를 벌어들인 매춘제국 일본!

 

환단고기를 찾아서 2

일본왕실의 만행과 음모

 

신용우의 소설에서 역사는 살아 숨 쉰다. 그는 역사를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미래를 설계하는 지침으로 삼는다.

일본은 예로부터 광개토대왕의 비문까지 고쳐가면서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우리의 고조선에서 대진국 발해의 역사까지

앗아가려 하고 있는 이 판국에 우리 역사가들은 무엇을 하는가?

여기 소설가 신용우가 우리의 자랑스런 고조선과 고구려, 대진국 발해의 역사와 광역을

현실로 가져와 되살려 놓는다. 또한 그 역사들이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증거들을 제시한다. 그 특유의 메타픽션적 역사 접근은 역사가 과거에 묻혀

숨 막히는 것을 방관하지 않고 우리 곁에서 함께 웃고 숨 쉬게 한다.

특히 유난히 왜곡된 부분이 많은 우리나라 역사의 찢기고 기워진 아픈 구석을 찾아 명쾌하게 치료한다.

그의 작품을 읽고 나면 십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기분을 느끼는데, 이는 그만의 매력이다.

이번 작품에서도 신용우는 여지없이 그 매력을 발산한다. 일제에 의해 깊은 상처를 입은

우리의 역사를 그가 소생시키고 있다. 일제가 우리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거둬들인 역사와 문화,

예술 서적이 총 51종 20여만 권이라는 기록이 그의 눈을 비껴 갈 수는 없었다.

그 책들의 행방을 추적해 나가는 것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우리가 흔히 말하듯이 잃어버린 역사가 아니라 반드시 찾을 수 있는 역사라는 것을

그가 우리 앞에 보여주고 있다.

부디 이 작품이 우리나라 역사바로세우기에 큰 몫을 하기를 바라며,

이런 작품을 쓰는 신용우 작가의 노력이야말로 우리 후대를 위해 가장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민용태(시인, 스페인 왕립 한림원 위원, 고려대 명예교수)

 

 

지은이 신 용 우

1957년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했다. 제21회 외대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장편소설 『천추태후』, 『명성황후는 시해당하지 않았다』, 『요동묵시록』(상, 하), 『요동별곡』, 『도라산 역』(1, 2), 『철수야! 안 철수?』를 출간했다. 그중 『요동별곡』은 세계일보 스포츠월드 연재소설로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 교양도서로 선정되었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라는 역사관을 바탕으로, 역사를 연구하고 배우는 목적은 역사를 거울삼아 인류의 평화로운 미래를 설계하기 위한 것임을 강조한다. 왜곡된 역사는 아무 의미가 없음을 역설하며 일본과 중국에 의해 찢기고 왜곡된 우리나라 역사바로세우기를 주제로 소설을 쓴다. 요동 수복과 대마도 되찾기, 통일에 대한 관심 역시 역사 속에서 그 뿌리를 찾아 글로 표현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역사를 바로 알리고 올바른 역사를 바탕으로 풍성한 삶과 희망찬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라는 역사관을 소설로만 쓰는 것이 아니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우리 민족의 웅대한 기상을 가슴에 담고, 역사를 거울삼아 현실의 삶에 투영시킴으로써 보다나은 현재의 삶과 미래를 설계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방송, 기업, 관공서, 교사연수회, 학생특강, 포럼 등 각종 매체와 단체 등에서 각각의 눈높이와 특성에 맞게 역사 특강을 하고 있으며 신문과 잡지 등에 칼럼을 쓰고 있다.

 

차례

 

작가서문 : 우리 역사의 진실은 우리 스스로 찾아야 한다

 

프롤로그 :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사명

 

1. 죽음도 바껴간 사연

2. 왕실 지하비밀서고에서 숨 막히는 고조선

3. 모택동이 돌려주려는 고구려 땅, 김일성이 사양했다

4. 이글거리는 활화산, 백성들

5. 멀고도 긴 여행

6. 일본왕실전문 파파로치 전문

7. 일본의 <새 역사 창조단>

8.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9. 나라가 망하면 집안도 망한다

10. 아버지와 어머니를 함께 떠나보내다

11. 열세 살 성규와 열다섯 소희의 징집

12. 총알받이와 성매매도구

13. 독립자금을 댄 지주의 아들이 반동?

14. 사무라이의 피를 지배해야 애가 생긴다?

15. 보여도 밝힐 수 없는 진실

16. 환단고기의 실상과 허상

17. 고구려(高句麗)가 지배했던 우리 땅 구려(句麗)벌

 

에필로그 : 마침은 시작입니다

 

posted by 황영찬
2015. 6. 15. 12:53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61 Frida Kahlo 프리다 칼로

 

지은이 | 클라우디아 바우어, 옮긴이 | 정연진

2007, 예경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20003

 

650.8

아887ㅇ  3

 

ART SPECIAL 3

 

Frida Kahlo | 프리다 칼로

 

"나는 다른 수단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그림을 통해 표현할 수 있었다. …… 내가 그림을 통해 원하는 것은

단지 이것뿐이었다."

- 1939년, 프리다 칼로

 

멕시코의 민속 미술과 개인적 고통의 경험을 승화시켜

꾸미지 않은 솔직함과 당당함으로 서구 백인 남성의

미술계에 도전장을 던졌던 프리다 칼로!!!

영화보다도 더 영화 같았던 그녀의 삶은 작품과 함께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다. 풍부한 사진 자료와 그림을

독특한 형식으로 녹여낸 이 책은 프리다의 생생한

육성을 들려준다. 프리다 칼로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짙은 눈썹 아래 감추어진 수수께끼 같은

눈길을 따라 따라가다 보면, 다채롭고 매혹적인 그녀의

삶과 예술이 펼쳐질 것이다.

 

프리다 칼로 | Frida Kahlo(1907-1954)

불꽃과 같은 사랑과 작품을 남기고 떠난 멕시코의 화가.

원시주의적인 양식으로 그린 화려한 색조의 개성 넘치는 프리다의 자화상은 한번 보면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1907년 멕시코시티 교외 코요아칸에서 출생한 프리다는 어릴 때 소아마비로 다리를 절게 되었고 1925년 교통사고로 크게 다쳐 평생 30여 차례나 수술을 받는 등 끊임없이 육체적 고통과 싸워야 했다.

또한 20세기 벽화운동의 거장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과 이혼, 별거와 재결합을 거듭하며 작품 못지않게 극적인 삶으로도 유명하다. 끊임없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과 그에 굴복하지 않는 투지는 그녀의 삶과 작품의 원동력이 되었다.

지은이 | 클라우디아 바우어 Claudia Bauer는 미술시가이며 뮌헨에서 편집자이자 작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이 | 정연진은 독일 베를린 예술대학과 슈트트가르트 예술대학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동시통역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동대학원 연구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동대학원 및 서강대학교에 출강 중이다.

 

1907


>> 막달레나 카르멘 프리에다 칼로, 멕시코 교외의 코요아칸 마을에서 탄생하다.


>> 여성화가 파울라 모더존-베커, 보르프스 베데에서 사망하다.

>> 마리아 몬테소리, 로마에서 첫 학교 및 유치원을 개교하다.

>> 아스트리트 린트그렌 탄생하다.

 

1924


>> 프리다, 이미 2년 전부터 멕시코시티 국립대학 예비학교를 다니다.


>>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53세로 모스크바에서 뇌졸증으로 사망하다.

>> 베를린 국제전파매체박람회(IFB) 첫 개장하다.

>> 말론 브란도, 오마하(네브래스카)에서 탄생하다.

 

1925



>> 프리다, 9월 17일 대형 교통사고로 수개월 동안 입원하다. 예비학교에 복귀할 수 없었던 프리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다.


>> 아돌프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 발간되다.

>> 중국 혁명 발발하다.

>> 만하임 미술관에서 미술사에 새로운 시대를 열 <신즉물주의> 전시회 개막되다.

>> 예술가 장 탱글리 탄생하다.

 

1929



>> 8월 21일, 프리다와 디에고 리베라 결혼하다.

>> 디에고, 공산당에서 제명당하고, 프리다도 디에고를 따라 탈당하다.



>> 10월 25일, 뉴욕증시 대폭락하다. 이 날은 후에 경제대공황을 알리는 서곡인 '검은 금요일'로 불리다.

>> 바티칸 시국 독립하다.

>> 뉴욕 현대미술관 개장하다.

 

1932



>> 프리다, 디에고와 디트로이트에 머무는 동안 두 번째 유산을 경험하다.

>> 9월에 프리다의 어머니 마틸데 사망하다.


>> 마하트마 간디, 천민 억압에 항거하여 옥중단식 감행하다.

>> 구 소련, 사회주의적 현실주의를 국가 공식 예술기조로 표방하다. 자유예술 활동이 금지되다.

>> 독일 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 탄생하다.

 

1939-45

 

>> 프리다, 1939년에 파리 '멕시코' 전시회에 출품하다.

>> 같은 해 디에고로부터 이혼당하다.

>> 1940년 디에고와 재혼하다.

>> 아버지 기예르모, 1941년에 사망하다.

>> 프리다, 1941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다.

>> 프리다, 1943년부터 멕시코시티 국립미술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 독일 군대의 폴란드 침공. 2차 세계대전 발발하다(1939년 말).

>> 피카소, 미로, 달리 등 스페인 예술가들, 프랑코의 파시즘 정권에 항거하는 작품 활동을 펼치다.

>> 1945년 8월 17일,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 투하되다.

>> 1945년, UN 설립되다.

 

1946



>> 프리다, 작품 <모세>로 교육부 주최 국립전시회에서 수상.

>> 프리다, 뉴욕에서 대형 척추수술을 받다.


>> 뉘른베르크 재판 첫 선고가 내려지다.

>> UNESCO 설립되다.

>>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탄생하다.

 

1949

 

>> 프리다의 건강이 점점 더 악화되다.

 

>> 마오쩌둥, 중화인민공화국 건립을 선포하다.

>> 구소련, 첫 원폭 실험,

>> 월렘 드 쿠 닝, 잭슨 폴록 같은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이 뉴욕에서 예술가 동맹인 '성마른 자들(The Irascibles)'을 결성하다.

 

1954

 

 

>> 프리다, 코요아칸의 고향집 '카사 아슬'에서 7월 13일 사망하다. 공식 사인은 폐색전증.

 

>> 엘비스 프레슬리, 히트곡 <That's All Right, Mama>로 유명세를 타다.

>> 미국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의 공산주의자 색출작업이 절정에 다다르다.

>> 미국대법원, 공공교육 시설의 인종차별을 철폐하다.

>> 앙리 마티스, 11월 3일 니스에서 사망하다.

 

1957

 

 

 

>> 디에고, 11월 24일 자신의 작업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다.

 

>> 영화배우 험프리 보가트가 사망하다.

>> 구소련, 세계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지구궤도에 쏘아 올리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파리 루브르 박물관 방문객에 의해 약한 손상을 입다.

 

1958

 

 

>> '카사 아술'을 박물관으로 꾸며 개장하다.

 

>> 작가 리온 포이히트방거, 미국에서 사망하다.

>> 미술가 키스 해링,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커츠타운에서 탄생하다.


 


차례


그때 그 시절

¡비바 멕시코!


최고가 되기까지

디에고의 그늘에서


예술

캔버스를 거울삼아


불안한 영혼


사랑

비둘기와 코끼리


지금도 우리 곁에

프리다 칼로 슈퍼스타


그때 그 시절



"무릎꿇은 채로 사느니

선 채로 죽는 것이 낫다."

멕시코 혁명가 ● 에밀리아노 사파타


격동의 시기 속에서 


…프라다는 성장기를 보냈다. 당시 멕시코에서 농부, 노동자, 인디오족들은 새 정부 수립을 요구하며 해방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더 나은 세상과 빈곤 탈출을 원했다. 이에 디에고 리베라를 위시한 벽화예술가들은 민중의 귀가 되어 벽화에 정치적 메시지를 담아냈다.


아즈텍 문명의 예술


'Toltecatl'이란 고대 아스텍어로 '예술가'란 뜻인데, 아스텟족은 고유 언어로 '예술가'란 단어를 표현할 수 있던 몇 안 되는 인디오 부족 중 하나였다. 예로부터 아스텍 부족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예술가는 교양 있고, 기술이 뛰어나다. 진정한 예술가는 즐거운 마음으로 작업에 임하며, …… 모든 것을 하나로 모아 화합으로 이끄는 능력을 지녔다"고 한다. 멕시코의 벽화예술들의 예술혼에서 이어받았으리라.


"멕시코는 이렇듯 모든 게 혼란스럽고 엉망인데, 농가의 풍경과 인디오들만이 여전히 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구나!"

- 프리다 칼로

독재자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30년 이상 권력을 장악하다가 1910년 자유 혁명을 통해 축출되었다.

혁명이 끝난 후엔,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벽화들이 멕시코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작업 중인 벽화예술가 | 디에고 리베라는 미국 캘리포니아 미술대학의 의뢰로 제작한 벽화에서 표현 공간을 몇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벽화가 만들어지는 작업 과정을 상세히 담았다. 한가운데 위치한 구역엔 총 지휘를 맡은 예술가가 마치 왕좌에 앉은 듯 한 손엔 붓을, 다른 한 손엔 팔레트를 든 채 임시구조물에 걸터앉아 있고, 그 주위에는 열심히 작업하는 문하생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림으로 그려낸 정치 | 벽화예술가들은 프레스코를 통해 뚜렷한 정치적 메시지를 표현했다. 예를 들어 위 작품은 디에고 리베라가 멕시코시티 교육부 청사에 그린 벽화로, 자본주의의 말로를 극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리베라가 이러한 성향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고향"인 미국에서 많은 작품 의뢰를 받은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최고가 되기까지


드랭, 자네, 그리고 나 중에서

프리다 칼로처럼 사람머리를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걸세!

파블로 피카소가 디에고 리베라에게



하룻밤 새 유명세를


…안게 된 프리다는 원칙적으로는 자신만을 위한 예술을 추구했을 뿐, 스타 화가가 되고 싶은 어떤 야망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 좋게도 필요한 시기에 적재적소에 있었던 프리다는 디에고 리베라라는 최고의 지지자를 얻기에 이른다. 이로써 프리다 칼로는 느리지만 꾸준히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생전에 뉴욕 현대미술관과 파리 루브르박물관에 작품을 전시하는 영광까지 누린다.

프리다는 예술의 메카 뉴욕에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루브르 박물관.


상속녀


디에고 리베라는 임종 얼마 전, 후원자이자 절친한 친구인 돌로레스 올메도 파티뇨에게 자신과 프리다의 재산에 대한 신탁을 위임한 바 있는데, 당시 돌로레스는 이미 프리다의 그림을 25점이나 소장하고 있는 상태였다. 돌로레스가 이 그림들을 프리다 생전에 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여인 사이에는 우정이 조금도 싹트지 못했다. 소문에 의하면 돌로레스가 디에고와 가까이 지내는 것에 대해 프리다가 강한 질투심을 보였다고 하지만, 어쩌면 프리다는 돌로레스가 자신의 첫사랑인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와 염문을 뿌렸던 것에 대해 계속 한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도나 로지타 모리요의 초상.

미국과 멕시코 사이를 가르는 축대 위에 선 프리다. 뒤로 보이는 신전의 잔해는 고국의 전통문화를, 공장굴뚝은 미국의 산업화를 상징한다. 그림의 사인으로, 잘 알려진 '프리다 칼로' 대신 자신의 중간이름인 Carmen과 디에고의 성인 Rivera를 사용한 것이 흥미롭다.


"난 요즘 그림도 조금 그리고 있어. 내가 무슨 대단한 예술가가 되겠다는 게 아니라, 그렇지 않으면 딱히 다른 할 일도 없거니와, 작업을 하고 있는 동안만은 모든 근심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지."

-프리다 칼로

프리다는 이 그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직접 서술했다. "여기에 헝가리계 독일 혈통이며, 예술가이자 사진작가이고, 너그러운 성품에, 박식하신 우리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를 그렸노라. (……) 존경을 표하며, 딸 프리다 칼로."

프리다는 남편 디에고를 매우 존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초상화는 단 한 점만을 남겼다.

프리다는 작품 활동을 위해 수없이 국경을 오가는 디에고와 줄곧 동행했다. 사진의 배경은 반쯤 완성된 뉴욕의 '뉴 워커스 스쿨' 벽화.

뉴욕 주재 화상인 쥘리엥 레비(아래)가 프리다의 재능을 알아보고 열어준 첫 개인전은 《타임》지에 소개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몇 년 후에는 뉴욕 현대미술관도 프리다의 작품을 전시하게 되었다(아래).

1952년 또 다시 수술을 받아야 했던 프리다는 병상을 떠나지 못하게 되자, 미술활동 초기처럼 누워서 그림을 그려나갔다.

내면을 보여주는 창 | 프리다 작품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자화상들은 마치 암호를 걸어 잠궈 놓은 영혼의 거울과도 같다. 이 자화상이 완성된 1930년 당시 프리다는 23세로, 유명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부인이 된 직후였다. 감상자를 응시하는 듯한 프리다의 모습에서 당당하고 아름다운 멕시코 여인의 자태가 느껴진다.

여배우를 추모하며 | "1938년 10월 21일 새벽 6시, 도로시 헤일이 햄프셔 하우스 빌딩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그녀를 추모하며 제작하다. 프리다 칼로" 프리다는 이 자화상에 여배우의 생전 모습을 격을 갖춰 담는 대신, 그녀의 죽음을 끔직할 정도로 상세히 묘사하는 방식을 택했다.

수상작 | 프리다가 멕시코시티 왕립미술관 국립전시회에서 2위를 수상한 작품 <모세 혹은 천지창조의 씨앗>으로, 후원자가 선물해 준 프로이트의 《모세와 유일 신앙》이란 저서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이 그림에서 프리다는 모세를 수많은 캐릭터로 표현함으로써 감상자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겨 놓는다.


예술



"나는 내가 처한 현실

그려낼 뿐이다."

프리다 칼로


자기만의 독특한 화풍은


…프리다 작품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츠리다는 줄곧 자신이 택한 길만을 걸었으며, 동시대 주류 예술계의 영향에서 자유로웠다. 프리다는 작품 활동에 있어서 독립적 창조행위를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작품세계에 영감을 주는 아이디어의 원천이 어디에서 오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 고대 중남미 예술, 서민들의 민속공예 등이 그것이다.

살바도르 달리, <재앙의 유희>, 1929. 캔버스에 유채/콜라주, 31×41cm, 개인소장.


초현실주의


1921년 이후 다다이즘에서 발생한 현대 문학과 예술의 사조. 무의식, 꿈, 그리고 상상의 세계에 대한 미학적 표현을 추구하며, 이성적 제어력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 대표적 초현실주의 예술가로는 작가이자 시인인 알드레 브르통과 화가 막스 에른스트, 살바도르 달리, 이브 탕기, 르네 마그리트 등이 있다.

프리다는 태어나자마자 인디오족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랐다. 그림에서 유모가 쓰고 있는 가면은 고대 멕시코의 것으로, 프리다가 후에 자신의 뿌리인 멕시코 문화에 가지게 될 애착을 예견하는 듯하다.

페데그랄 지방의 용암지대에 뿌리를 박고 누워있는 프리다는 이 그림에서 수사적 표현이 아닌 실제 뿌리의 묘사를 통해 고국의 대지와 자신이 융화되어 있음을 표현했다.


"나는 다른 수단으로는 도저히 표현되지 못하는 것들을 그림을 통해 표현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한 만족 외에 어떤 것도 바랄 것이 없었다."

-프리다 칼로

이 그림을 작업할 당시 프리다는 이혼상태였다. 이를 반영하듯, 목에 두른 나뭇가지의 가시는 목을 찌르고, 정면을 응시한 눈빛은 갈 길을 잃은 듯 공허하다.

<탄생 혹은 나의 탄생>은 매우 모호한 그림이다. 프리다는 당시 유산을 겪은 상태였고, 얼마 지나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프리다의 상처받은 영혼을 엿볼 수 있는 모티브이다.

조르주 브라크, 파블로 피카소나 이 그림의 후안 그리스 등은 유럽을 지배하고 있는 입체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반면 프리다는 대서양 건너 유럽대륙에서 새로이 일어나는 어떤 기조에도 휩쓸리지 않았다.

프리다의 말기 작품들은 이전처럼 자세한 묘사를 추구하지 않는다.

건강의 악화도 프리다의 삶에 대한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이를 반영하듯, 수박을 그린 정물화는 밝은 색과 생기로 넘쳐난다.

첫 자화상 | 끔찍한 교통사고 후 병상에 틀어박힌 프리다는 미술서적을 탐독하며 이탈리아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세계에 빠져 든다. 프리다가 선보인 첫 자화상 속에 나타나는 자세, 기다란 목, 우아한 손짓은 보티첼리 그림에 등장하는 여인을 연상시킨다.

욕조 속에서의 상상 | 프리다가 그린 작품 중 가장 초현실주의적인 <내가 물 속에서 본 것 혹은 물이 나에게 준 것>을 보면, 다른 작품들, 그리고 살아오며 겪은 사건들을 연상시키는 형상들로 가득하다. 오른쪽 초록 잎 사이로 프리다의 부모가 내다보고 있으며, 왼편에 물에 잠겨 떠다니는 민속의상은 한 해 전 그린 <추억 혹은 심장>에도 등장한다.

동물에 대한 애착 | 프리다의 자화상에는 동물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실제 생활에서도 칼로 · 리베라 부부는 원숭이, 개, 염소 등을 키웠다. 프리다 왼편 어깨 뒤의 고대 멕시코 형상은 프리다와 디에고가 열정적으로 수집했던 멕시코 골동품을 연상시킨다.

수집품 | 원숭이와 함께한 이 자화상은 남편 디에고 리베라와 이혼한 후인 1940년, 뉴욕의 수집가인 네이슨 위단의 의뢰로 그려졌다. 이 시기는 프리다가 전남편으로부터 금전적 독립을 하기 위해 작업 의뢰를 활발히 받던 때이다.




"이 당신에게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말고

받아두도록 하시오!"

1938년 디에고가 프리다에게


비극과 행복은


…어떻게 보면 매우 밀접한 개념이다. 특히 프리다의 삶을 관찰하면 그렇다. 프리다가 겪은 끔찍한 사고는 학문에 대한 꿈은 꺾어 버렸지만, 예술세계로 이끄는 또 다른 길을 열어 주었다. 극에서 극을 달리던 디에고와의 사랑은 큰 기쁨도 주었지만, 동시에 깊은 고통을 안겨 주면서, 프리다가 계속하여 명작들을 탄생시키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격정으로 가득 찬 자신의 이야기를 그림에 담아 낸 프리다는 우리에게 그림 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기예르모가 찍은 사족사진에는 여자아이들이 넘쳐난다.


일기장


프리다가 1940년 뒤늦게 쓰기 시작한 일기장에는 글보다는 그림이 더 많이 담겨 있다. 일기장을 가득 채운 수채화, 스케치, 시구, 짧은 메모들은 너무나 모호해서 그 명확한 진의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한편 일기장 곳곳에 보이는 화려한 색채들은 프리다의 감성을 풍부하게 담아내고 있는 데, 그 표현방식이 어떤 작품보다도 더 직접적이다.


1932년 10월 16일, 아버지 기예르모가 가장 아끼던 딸 프리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프리다는 부모인 기예르모, 마틸에와 매우 친밀한 사이였다.


"프리다와 함께 하는 삶이 정말 즐겁죠?"

-프리다 칼로

마틸데 칼데론기예르모 칼로는 1898년 2월에 결혼한다. 기예르모는 미래의 장인 밑에서 일하면서 사진촬영기술을 배웠다.

프리다는 네 자매 중 셋째였다. 사진은 1911년 프리다가 네 살 때.

프리다는 소싯적부터 가족 중에서도 특이한 구성원이었다. 자매들과 사촌들이 사진촬영을 위해 예쁜 드레스를 꺼내 입을 때, 프리다는 엉뚱하게도 신사 같은 정중앙 가르마에 양복을 입고 포즈를 취했다.

프리다는 당시 사고 상황과 비슷한 봉헌화를 하나 찾고는, 바닥에 누워있는 희생자의 모습을 자신의 자화상 같은 형상으로 덧그렸다. 위기에서 구원해 준 성자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하단의 봉헌사는 프리다가 직접 쓴 것이다.

디에고 리베라는 예술가로만 알려진 것이 아니라, 활발한 정치활동으로도 유명했다. 디에고는 공산당원으로서 정치적 가두행진에도 자주 참가해 시위대를 진두지휘하곤 했다. 사진은 1920년대 디에고가 참가한 가두시위 장면.

프리다는 디에고와 마찬가지로 멕시코 공산당원이었다. 이 벽화에서 디에고는 젊은 프리다를 계층갈등에 항거해 무장 시위하는 민중을 돕는 공산당 여성투사로 그렸다.

결혼식 1년 후, 프리다는 자신과 남편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를 그렸다. 여기 보이는 그림은 일종의 준비용 스케치라서 후에 완성된 작품과는 달리 디에고의 손에는 아직 찰레트와 붓이 들려 있지 않다.

프리다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알게 된 레오 엘뢰서 박사는 프리다에게 의료에 관한 상담을 자주 해주는 좋은 친구였다. 이 초상화는 프리다가 그에게 감사하는 의미에서 그린 작품이다.

어두운 빛깔 | 알리샤 갈란츠를 그린 이 초상화는 프리다의 초기작으로서, 귀족적인 알리샤의 자세나 우아하게 취한 손짓을 볼 때 프리다가 그린 첫 자화상과 비슷한 느낌이다. 프리다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풍을 사랑했고, 후에 당대의 그림에서 마음에 들었던 요소들을 자신의 작품세계에도 반영했다.

대가족 | 작은 여자아이로 표현된 프리다가 어릴 적 추억이 담긴 카사 아술의 마당에 서 있고, 그 뒤에 펼쳐진 멕시코 농촌을 배경으로 부모인 기예르모와 마틸데가 자리를 잡고 있다. 프리다의 손에서 나온 붉은 리본이 부모를 걸쳐 조부모에게까지 닿아 있다. 어머니 마틸데의 몸 앞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 상태의 프리다가 공중에 떠 있고, 그 밑에는 꽃 한 송이가 꽃가루를 뿌리는 동안, 후에 프리다가 될 난자가 수정되고 있다.

전통 민속 | 프리다는 디에고와 결혼한 후 자신의 멕시코 혈통에 대한 자긍심을 밖으로 표출하기 시작했다. 프리다는 특히 색깔이 화려하기로 유명한 테우아나 전통의상을 즐겨 입었는데, 테우아나 여인들은 명절엔 그림에서처럼 하얀 드레스를 입고, 화려한 레이스로 장식된 머리장식을 쓰곤 했다.

화초인간 | 이 초상화의 주인공은 원예가인 루터 버뱅크로, 프리다는 그를 직접 알지도 못했고, 또 이 초상화가 그려질 당시 그림의 주인공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디에고와 프리다는 한때 버뱅크의 번식이론에 매우 심취한 적이 있었다. 프리다의 상상 속의 버뱅크는 반은 인간, 반은 화초이고, 뼈만 남은 인간의 사체에서 생명에너지를 뽑고 사는 존재이다.

실험 | 프리다가 작품을 만들어 내면서 유화가 아닌 다른 방식을 사용한 적은 단 한 번 있는데, 디트로이트에서 겪은 유산의 아픔(아래 그림 참조)을 묘사한 이 석판화가 그것이다. 왼편에는 세로로 "이 에디션들은 네 경험에 비춰보았을 때 좋은 것도 아니었고 나쁜 것도 아니었다. 열심히 일하라! 그러면 더 좋은 작품을 얻을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가혹한 운명 | 프리다는 1932년 7월, 유산으로 인해 디트로이트 헨리 포드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끝없는 눈물을 흘리며 병상에 누워 있는 프리다에게서 마치 탯줄 같은 빨간 줄이 뻗어 나와 유산을 상징하는 형상들이라든지 달팽이나 꽃처럼 성적인 상징의 형상들과 연결되어 있다. 공중에 떠 있는 듯한 프리다를 배경으로 펼쳐진 황량한 산업단지의 풍경은 프리다가 느끼는 절망과 외로움의 감정을 더욱 강렬하게 전한다.

멕시코를 향한 그리움| 프리다가 이 그림에 착수할 당시 디에고는 뉴욕 록펠러센터에 거대한 벽화를 그리고 있었다. 디에고가 미국에서 예술가로서 높은 명성을 누리며 상류사회와 교류하는 동안, 프리다는 어서 디에고와 함께 다시 멕시코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도시 정글 속에서 홀로 길을 잃은 듯한 테우아나 전통의상이 프리다의 그리움을 상징한다.

밝은 모습 | 목걸이를 하고 있는 프리다의 모습을 담은 이 인상 깊은 자화상은 위의 작품 <내 드레스가 거기에 걸려있다 혹은 뉴욕>과 같은 해에 그려졌지만, 그림 속 당당한 모습에서 당시 프리다를 괴롭혔던 향수병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이 그림 속의 프리다는 유산의 괴로움까지도 씻어낸 듯 밝은 모습이다.

 디에고는 디트로이트 미술학교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자, 프리다와 함께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북서부 도시인 이리(Erie)로 거처를 옮긴다. 이 사진은 건축가 앨버트 칸과 만날 당시 찍은 것이다.

디에고가 자신의 여동생 크리스티나와 깊은 관계를 맺어 왂다는 사실을 알게 된 프리다는 슬픔을 삭이지 못해 긴 머리를 잘라 버렸다. 이 사진은 그 직후 친구인 루시엔느 블로흐가 찍은 것이다.

디에고는 록펠러 센터에 그렸다가공산주의 사상을 연상케 하는 모티브로 논란을 일으켜 파기되었던 문제의 벽화를 후에 멕시코시티에 다시 복원했다.

프리다의 첫 개인전을 주관했던 쥘리앵 레비의 애정은 프리다의 작품세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후에 공개된 레비 개인 소장의 몇 사진들은 그들이 더 깊은 관계였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파리에서 그림을 전시할 당시, 프리다는  동료예술가인 마르셸 뒤상의 집에서 머물렀다. 프리다에게 그는 "온갖 뜨내기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진정한 친구가 되어준 사람이었다.

붉은 이념 | 레오 트로츠키에게 헌정한 자화상은 트로츠키의 정치이념에 대한 암시로 가득 차 있다. 하얀 커튼은 트로츠키가 대항하여 투쟁하던 러시아 혁명의 반대세력인 '백색파'를 의미한다. 반면 프리다는 입술엔 새빨간 립스틱을, 그리고 손톱에는 빨간 매니큐어를 칠하고, 붉은 상의를 입어 '적색파'임을 나타내어 자신은 트로츠키의 편임을 상징하였다.

회색빛 나날들 | 우아하게 의자에 앉은 프리다는 그림의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다. 배경이 되는 방은 온통 회색빛에 황량하기만 하고, 프리다가 입은 검은 옷은 테우아나 여인들이 장례식에 입는 의상이다. 프리다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는 예술가로서 성공가도를 달릴 시기였지만. 전시회가 길어질수록 사랑하는 남편과 떨어져 있는 기간도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높은 곳에 바쳐지다 | 화상 피에르 콜르가 멕시코를 주제로 기획한 그룹전에 전시되었다가 루브르 박물관이 구입한 자화상이다. 이로써 프리다는 유명 박물관에 그림을 제공하게 된 첫 남미 여성 예술가가 되었다.

이별의 아픔 | 1939년, 프리다는 디에고와 이혼하게 된다. 프리다는 매우 괴로워했고, 이별의 아픔을 그림을 통해 달랬다. 두 명의 프리다가 상처받기 쉬운 심장을 드러내 놓고 있는 이 그림은 프리다의 작품들 중에서도 명작으로 꼽힌다. 오른쪽에 앉은 프리다의 손에는 디에고의 어린시절 사진이 있는 작은 메달이 들려있고, 이 메달은 핏줄을 통해 심장과 연결되어 있는데, 왼쪽에 앉은 프리다는 메달을 가위로 잘라 버린다.

고통 받는 육신 | 프라다는 18세에 겪은 끔찍한 버스사고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보정기구를 착용해야 했다. 프리다가 보는 자신은 갈라진 틈으로 척추 대신 부러진 기둥이 보이는 육체였다. 몸에 수없이 박힌 바늘은 프리다가 겪어야 하는 만성적 고통을 상징한다.

용기 | 프리다는 1946년에 대규모 허리수술을 받아야 했다. 프리다는 고통 때문에 평생 많은 수술을 받았지만, 매번 일시적인 효과뿐이었다. 오른쪽에 앉은 프리다가 손에 들고 있는 깃발에는 자신을 응원하는 문구가 적혀있다. "희망의 나무여, 용기를 잃지 말기를!"

프리다는 1943년 멕시코시티 국립미술학교에서 강의를 맡게 된다. 이 자화상에서는 스승을 둘러싸고 있는 네 마리의 원숭이는 프리다가 "로스 프리도스"라는 애칭으로 부르곤 했던 네 명의 제자들을 상징한다.

프리다는 사망하기 수년 전부터 부쩍 정치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기 시작했고, 1948년에는 1929년에 탈퇴했던 공산당에 재가입한다. 사진은 디에고와 함께 시위활동에 침여한 프리다.

프리다는 멕시코에서 첫 개인전이 열린 개막식 날 병세가 악화되어, 구급차를 타고 들것에 실려 갤러리에 입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날은 프리다 생애 가장 중요한 날이 되었다.

다리 절단수술 전 프리다가 일기장에 적은 내용이다. "다리가 뭐 하러 필요해. 내겐 날 수 있는 날개가 있는 걸……."

죽기 직전, 프리다는 휠체어에 앉아 디에고와 함께 집회에 참여했다.

감성의 역사 | 프리다가 일기를 쓰기 시작한 건 비교적 나이가 들고부터이다. 프리다는 일기장에 주변 사건에 대해서만 쓴 것이 아니라, 마음 속 감성을 연상시키는 비밀스러운 스케치, 수채화, 시구 등도 함께 실었다. 이 그림은 상상 속의 "무시무시한 눈의 공룡"과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는 여자를 보여 주고 있다.

당을 위하여 충성 | "난 내 몸이 허락하는 한, 내 작은 힘이라도 혁명을 위해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혁명은 내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는 일기장의 일부분은 프리다가 말기에 얼마나 공산주의에 심취했는지 짐작케 한다. 엥겔스, 미르크스,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 등은 프리다에게 마치 자신을 보호하는 성자 같은 존재가 되었다.

대지가 선사하는 열매 | 프리다가 가끔 그리곤 했던 정물화들은 단순히 꽃이나 과일 등을 그대로 따라 그리는 차원의 정물화가 아니라, 나름대로 숨겨진 깊은 의미를 담고 잇다. 여기서 붉은 과육은 프리다의 상처 입은 육신을 상징하며, 흐릿하고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보이는 과일과 야채의 조화는 육감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무성한 잎 속에 숨겨진 이중적 의미 | <태양과 삶>은 언뜻 보기엔 단순히 최초를 그린 그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림을 깊이 관찰하면, 붉은 태양 뒤로 성적 묘사가 펼쳐진 것이 보인다. 태양 뒤로 꽃봉오리 속에 보이는 것은 울고 있는 태아의 형상으로, 아이를 갖고 싶은 프리다의 마음을 나타낸다.

생명의 꽃 | 프리다가 1944년에 그린 이 이국적인 꽃 그림은 육체적 사랑과 번식행위의 신비에 대한 경의를 담은 작품이다.

표현력 | 프리다가 세상을 뜨기 3년 전에 탄생한 작품 <원(圓)>은 매우 영적이고 강한 표현력을 뿜어낸다. 내면에 꿈틀거리는 강한 성적 에너지와 점점 허물어져 가는 육신에 대한 절망이 동시에 내재된 인상 깊은 작품이다.

유토피아 | 프리다의 공산주의 찬양은 말기에 가까워지면서 점차 기괴한 모습을 띤다. 프리다는 마치 공산주의 우상들이 자신을 육체적 고통에서 해방해 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프리다가 사망한 해에 완성된 작품 <마르크스주의가 병자를 낫게 할지니>에선 목발을 집어 던지고 그림 중앙에 우뚝 선 프리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지막 작품 | 프리다가 당당한 자세로 대형 스탈린 초상화 앞에 앉아 있다. 그림은 산만하고 초조하며 거칠기까지 하다. 끊임없는 육체적 고통을 덜기 위해 섞어 먹었던 약과 술은 프리다에게 어쩔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말았다.


사랑


"난 이상하게도 한 여인을

사랑하면 할수록, 더 많은

상처를 주고 싶었다.

프리다는 이런 나의 역겨운 성격으로

인한 희생양 중에 가장 대표적인 여인

일 뿐이었다."

디에고 리베라, 1955년 집필한 자서전에서




불타는 정열만큼


…프리다의 연애사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것이다. 동료예술가뿐 아니라, 러시아 혁명가인 레오 트로츠키까지도 모두 프리다에게 반해 버리지만, 정작 프리다가 가장 사랑한 사람은 프리다를 가장 실망시킨 사람이었다. 못 말리는 카사노바였던 디에고 리베라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다른 여자들과 바람을 피워댔다.

프리다가 신부 · 신랑으로 그린 두 사람.

<내 동생 크리스티나의 초상>.

레오 트로츠키.


프리다의 여인들


지독히 이성애적이었던 디에고조차도 인정한 사실이 있은;, "여자 둘이 만나면 전혀 다른 차원의 놀라운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디에고는 프리다 주위의 남성들에게는 질투심에 불타 공격적인 성향을 드러냈지만, 프리다의 레즈비언 애인들에게는 지극히 관대했다. 그 수가 한두 명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성과의 경우에는 달리, 프리다의 동성애적 사랑은 짧게 끝났으며, 정열적인 밤을 보내는 상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평생을 같이할 사랑 : 온갖 비극과 대립 속에서도 프리다와 디에고는 항상 서로에게 다시 돌아가곤 했고, 결국 최후의 순간까지 운명을 함께했다. 이 사진은 1954년 프리다가 세상을 뜨기 직전에 촬용한 것이다.

친구인 돌로레스 델 리오를 위해 그린 작품 <숲 속의 두 누드>에서처럼, 프리다는 동성애적 취향을 숨김없이 드러내곤 했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두 번의 큰 사고를 당했는데, 첫 번째 사고는 경전철과 충돌한 것이고, 두 번째 사고는 디에고와 만난 것이다."

-프리다 칼로

디에고가 국립학교 예비학교 건물에 벽화 <천지창조>를 그릴 당시, 아직 학생이었던 프리다는 처음으로 디에고를 대면한다. 하지만 유명화가인 디에고를 칭송하는 대신, 프리다의 머릿속에 가득한 건 동아리 친구들과 디에고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는 것뿐이었다.

프리다를 알게 되기 전까지 디에고는 루페 마린과 결혼한 상태였다.

디에고의 자화상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고집스러운 인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은 디에고라면 모두 사족을 못 쓰고 그를 흠모했다.

프리다의 어머니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프리다와 디에고를 보며 "비둘기와 코끼리"같다고 했다. 어쩌면 그리도 정확하게 들어맞는 표현을 찾았는지!

프리다는 이 작품에서 유산으로 잃은 아기들에 대한 두려움과 죄책감을 그대로 캔버스에 쏟아낸다. 한 여자아이가 망자의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마치 버려진 듯 멕시코 고원의 황량한 풍경을 배경으로 서 있다.

프리다의 여동생인 크리스티나와 불륜관계를 맺을 당시, 디에고는 마침 국립궁에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디에고는 이 벽화에 프리다와 크리스티나의 형상을 삽입하면서, 그가 두 자매 중 누구를 더 편애하는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 놓고 보여 준다.

일본인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는 프라다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디에고는 질투심에 불타 노구치를 총으로 위협하기에 이른다.

프리다는 이 그림을 레오 트로츠키를 만난 해에 그렸다. 남근 형상의 선인장이나 원숭이와 같은 육욕의 상징을 담은 이 그림은 미묘한 에로티시즘을 띠고 있다.

사진작가 니콜라스 머레이가 렌즈에 담은 프리다의 모습은 눈부신 매혹으로 넘쳐난다. 이는 사진의 주인공과 사진작가 간에 나눈 뜨거운 열정의 결과물이다.

디에고는 1930년 제작한 석판화에 프리다의 누드를 담았다.

특이한 방법으로 전하는 사랑의 메시지. 프리다는 봉투 겉을 이용해 디에고에게 사랑의 편지를 쓰고 밑에 키스자국을 남겼다. "그 어느 때보다도 당신을 사랑해! - 당신의 소녀 프리다."

프리다의 침대 천정에 누워있는 하얀 몰골은 유다의 형상으로, 멕시코인들은 부활절을 기념해 이러한 형상을 터트리곤 한다. 풍성한 꽃다발을 손에 들고 프리다의 꿈에 나타난 하얀 망자는 프리다를 지켜주는 존재인 동시에 위협하는 존재로 보이기도 한다.

왕립미술관으로 운구된 프리다의 시신을 내려다보는 디에고가 침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영결식에는 600명이 넘는 애도객들이 참석해 프리다에게 작별의 인사를 전했다.

소리 없는 탄식 | 유산을 몇 차례 겪은 프리다는 끝내 아이에 대한 미련을 극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디에고는 프리다의 절망을 그다지 이해해 주지 못했다. 디에고에게 가장 중요한 건 일이었고, "아이는 디에고에게 네 번째 순위쯤밖에" 안 되었다. 텅 비고 차가운 방을 배경으로 묘하면서도 공허한 분위기를 담은 자화상 <나와 나의 인형>은 당시 프리다가 느끼는 슬픔에 대한 표현이다.

사랑의 아픔 | <추억 혹은 심장>이 그림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매우 뚜렷하다. 프리다의 가슴을 관통하는 구멍과 바닥에 놓인 피흘리는 심장은 디에고의 끊임없는 불륜행각으로 프리다가 겪는 사랑의 아픔을 상징한다. 또한 잘려나간 심장은 고대 아스텍 민족이 신에게 바치는 희생의 제물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내살인사건 | 프리다는 이 작품에서 신문에서 읽은 기사 하나를 그림으로 묘사했다. 한 남성이 질투심에 아내를 칼로 찔러 죽이고는, 법정에서 자신은 "단도로 몇 번 찌른 것밖에 없었다"고 변명했다는 기사였다. 물론 여기서 프리다가 모티브를 통해 상징하려는 사람은 자신의 불륜행각이 얼마나 프리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안중에도 없는 디에고임은 당연하다.

쓰디쓴 눈물 | 프리다가 이 작품을 완성시킬 당시, 디에고는 여배우 마리아 펠릭스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그림을 처음으로 구입했던 아르킨과 샘 윌리엄스 부부는 프리다와 절친한 사람들로, 당시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목을 휘감은 검은 머리카락에 너무나 슬픈 표정으로 우는 프리다의 그림 속 모습을 보고, 우리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어요."

완전한 사랑 | 디에고의 58세 생일날, 프리다는 자신의 사랑고백을 그림으로 담아 선사한다. 편안한 표정의 디에고와 프라다의 얼굴은 하나로 융화되었고, 그 옆에는 남성과 여성을 상징하는 태양과 달이 떠 있다.

"난 불쌍한 사냥감" | 프리다는 자신을 온 몸에 화살을 맞은 채 쫓기는 사냥감으로 보았다. 몸에 꽂힌 화살들은 육신의 고통뿐 아니라 디에고의 외도로 프리다가 겪는 정신적 고통도 의미한다. 화살촉에 깊은 상처를 입은 몸뚱이에도 불구하고, 사슴의 머리에 달린 프리다의 얼굴은 뿔을 높이 쳐들고 당당히 우리를 응시한다.

극단적인 커트 | 디에고와 이혼해 버린 후, 프리다는 두 번째로 머리카락을 잘라 버린다. 위에 보이는 악보는 당시 멕시코에서 유행하던 노래를 그대로 적은 것이다. "이봐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당신 머리카락 때문이었지 하지만 이제 당신의 머리는 삭발되어 버렸으니, 난 이제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여성성의 상징 | 프리다는 자화상에서 풀어 내린 머리를 보여준 적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은 아름답게 틀어 올린 머리를 하고 있었다. 반면 이 자화상에서 프리다는 자신의 길고 검은 머리를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아마도 이 머리카락은 디에고와 다시 결합한 후 프리다가 다시금 느꼈던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과 에로티시즘의 상징일 것이다.

화려한 머리장식 | 프리다의 머리를 장식하는 특이한 매듭 형태는 멕시코 남부 오악사카(Oaxaca)주의 전통 장신구를 연상하게 한다. 털실들이 프리다의 머리칼을 굽히지 못하고 그대로 서 있는 것이 흥미롭다. 머리 장식은 또한 8자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한 번에 이어서 쓸 수 있다는 점에서 8이란 숫자는 영원함의 상징이기도 하다.

우주의 혈통 | 프리다가 품에 디에고를 안고 있고 대지의 여신은 이런 프리다와 디에고를 부드럽게 끌어안고 있다. 프리다가 가장 아끼는 애완견인 '세뇨르 솔로틀'은 모든 걸 감싸 안고 보호하는 우주의 팔 위에서 평화로이 잠들어 있다. 이혼 후 재결합한 프리다와 디에고의 관계는 갈수록 더 모성애적 구도를 띠었고, 디에고에 대한 프리다의 집착 또한 더욱 커져 갔다.


지금도 우리 곁에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여성들은

프리다에게 배울 점이 많다.

프리다는 수동적인 여성의 역할을 벗어나,

항상 자신이 하고 싶은 바

추구했다."

배우 셀마 헤이엑


프리다의 흔적을


…찾는 건 오늘 날 전혀 어렵지 않다. 프리다는 지금 전례 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고, 순수예술 분야뿐 아니라, 영화감독, 작곡가, 작가, 안무가, 패션디자이너에게까지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 프리다를 가장 가까이 느낄 수 있는 곳은 코요아칸에 위치한 프리다의 고향집으로, 현재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보다 쉬운 방법은 시중에 나온 수많은 서적과 영화를 통해 살아 있는 프리다의 모습을 경험하는 것이다.

카사 아술의 작업실에 놓인 프리다의 이젤. 당시 작업 중이던 스탈린의 초상화는 끝내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프리다에게 매겨지는 가치


이미 생전에 수집가와 애호가들에게 좋은 가격에 그림을 팔 수 있었던 프리다였지만, 오늘날 미술시장에서 자신의 작품에 매겨지는 가치를 보면 아마 기절할 것이다. 프리다의 작품들은 지금 최고가를 기록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선 자화상 한 점이 무려 3백20만 달러에 낙찰된 바 있다. 이는 지금껏 디에고의 작품에 매겨졌던 수치들을 모두 뛰어 넘는 가격이었다. 이렇게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프리다의 그림을 소장하게 된 사람은 운이 좋다고 할 수 있다. 프리다의 작품이 시장에 나오는 것조차 매우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멕시코 출신 배우 셀마 헤이엑은 프리다 칼로의 역할을 맡으면서 평생의 숙원을 풀었다.

프리다가 친구 티나 모도티와 춤추는 장면. 모도타역은 배우 애슐리 주드가 맡았다.


"프리다는 모두가 반대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바는 반드시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었다. 나 또한 프리다처럼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셀마 헤이엑

여성 영화감독 줄리 테이머는 배우 셀마 헤이엑과 함께 오스카 수상작 <프리다>를 탄생해 냈다.

뉴욕 브룩클린에 위치한 '프라다의 옷장(Frida's Closet)'이라는 가게에는 멕시코 전통의 화려한 색상과 심벌로 가득한 프리다 풍의 물건들로 가득하다.

침실 | 카사 아술에 있는 디에고의 침실을 들려다보면, 마치 디에고가 줄곧 방에 있다가 지금 막 빠져나간 듯한 착각이 일 정도이다. 모자, 가방, 구두 한 켤레, 외투 등이 방에 흩어져 있고, 침대 머리맡에는 자명종이 놓여 있다. 침대 뒤 벽에 걸려 있는 것은 니콜라스 머레이가 촬영했던 프리다의 사진이다.

눈이 즐거워야 입도 즐겁다 | 프라다와 디에고가 사용하던 식당은 식도락의 즐거움만을 제공하는 곳이 아니라, 장식장 안에 몇 층에 걸쳐 진열된 멕시코 고대 유물과 민속공예품들이 위용을 자랑하는 곳이기도 했다. 안 마당의 벽에 쓰인 글씨는 "프라다와 디에고 이곳에서 살다. 1929-1954년"

카사 아술 | '파란 집'이란 뜻의 카사 아술은 파랗게 칠한 벽 때문에 붙은 이름인데, 안마당에 가면, 방문객들은 프리다 생전과 다름없이 이국적인 화초들과 고대 멕시코 토우들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마음의 휴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황영찬
2015. 6. 13. 12:33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60 권기봉의 도시산책 서울의 일상. 그리고. 역사를 걷다

 

권기봉 지음

2015, 알마

 

 

신천도서관

SG038744

 

911.6

권18ㄱ

 

걷고 생각하며 재발견하다

 

기록하지 않고 사유하지 않으면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역사는 그 의미가 사라지거나 퇴색한다.

이 책은 과거가 아닌 미래를 위한 살아 있는 '서울'의 기록이다.

 

서울에 이렇게 다양하고 깊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줄 몰랐다. 도시를 산책하며 건져 올린 이야기들은 때로 심각하고, 때로 흥미로워 깊이 빠져들게 한다. 도시를 다각도로 깊게 살피고 성찰할 줄 알아야 과거를 바탕으로 오늘과 내일의 삶터를 만들어갈 수 있다. 이 책은 도시 서울을 깊고 넓게 보고 질문을 품게 하며 우리를 대화와 토론으로 이끈다.

이용훈_서울도서관장 · 도서관문화비평가

 

이 책에서 저자가 안내하는 곳은 대개 익숙한 옛것이지만 거기서 얻는 지식과 감동과 성찰은 온통 새롭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익숙한 것에서 새것을 찾는 온고이지신의 교과서다. 흔히 가슴과 머리 사이의 거리가 가장 멀다고 하지만 역사와 예술과 문화와 삶을 종횡무진하는 저자의 부지런한 발걸음을 따라 산책하다 보면 우리는 머리와 가슴이 일치하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된다. 고마운 책이다.

노회찬_정치인

지은이 권기봉은 월악산국립공원에서 자란 산골소년이다. 1998년 서울대학교 지구과학교육과에 입학하면서 경험하게 된 서울은 '원더랜드' 그 자체였다.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 공간이 궁금해 무작정 길을 나섰는데 사람이 보이고 역사가 읽히고, 또 그 배경이 되는 건물과 장소가 시야에 들어왔다. 재발견한 메트로폴리스 서울에 대한 글쓰기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워낙 호기심이 많고, 여행 다니고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알고 싶은 것도 많았기에 대학 시절부터 학보사 기자로 활동했다. 이후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를 거쳐 2005년부터 2008년까지 SBS 기자로 현장을 누볐다. 그사이 '2002년 올해의 시민기자상' '2005년 SBS 특종상' '2008년 삼성언론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EBS <세계테마기행> <세계견문록 아틀라스> <한국기행>에 진행자로 참여하고 있으며, KBS 라디오 <우연한 여행자>와 <빅데이터로 보는 세상>에 고정 출연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명소 스토리텔링 자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나라 밖으로도 눈을 돌려 지금까지 50여 개국을 여행했는데, 최근에는 아시아를 비롯해 태평양과 인도양, 유럽의 근현대사 관련 현장으로 여행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한국 사회의 현재를 기록으로 남기고, 한국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돌아봐야 할 것들에 대한 고민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자 오늘도 호기심 천국, 세상 속을 분주하게 걷는다. 지은 책으로 《다시, 서울을 걷다》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가 있다.

 

▒ 차례

 

산책을 시작하며

 

1장 에술과 권력 그리고 서울

 

'부도'의 정체_경복궁

권력과 미술_남대문 세무서 터

친일미술가가 만든 조각상_국립4·19민주묘지

정몽주 동상을 세운 이유_양화대교 북단

'칼레의 시민'과 한국의 동상_플라토미술관

김수근의 명암_공간건축 사옥

한 건축가의 소신_세종문화회관

두 번의 재해석_국립극장

여기 '문화 독립운동가'가 있다_간송미술관

'시민문화유산 제1호'의 탄생_최순우 옛집

'한국 최초 서영화가'의 옛집이 열리다_고희동 가옥

문화인의 자취_김수영문학관

'이상의 집' 그 이면_상촌(서촌)

디자인 그 너머_남산 소월길

우미관과 김두한_종로 피맛길

변사와 남녀유별석의 추억_단성사 터

무성영화를 만나다_한국영상자료원

 

2장 사라져가는 것들과 다가오는 것들

 

궁궐을 정원으로 삼은 집?_창덕궁

파헤쳐진 내시 묘지_북한산 중골

'연신원' 철거 단상_연세대 신촌캠퍼스

다시 볼 수 없는 한국 최초의 증권거래소_명동

자동차에 밀려난 대한문_덕수궁

역사관으로 재탄생한 을사늑약의 현장_중명전

누구도 몰랐던 경술국치의 현장_남산

'동척' 관사가 남아 있다_종로구 통의동

일본군 장교 관사의 운명은?_부엉이 근린공원

서울 한복판의 태평양전쟁 흔적_경희궁 방공호

'비원'과 '후원' 사이_창덕궁

'대일본'은 낭설이다_백악산·옛 조선총독부청사·서울도서관

화재감지기 위에 단청?_동묘

철거만이 능사였을까?_조선총독부청사

일제가 끊은 지맥, 다시 잇는다_율곡로

100여 년 만에 드러난 하수관거의 의미_명동성당

서울에도 도자기 가마가 있었다?_북한산 우이천 입구

'백제 500년'의 역사가 드러나다?_풍납토성

붉은 벽돌집의 정체_딜쿠샤

대한제국 황실의 마지막 안식처_창덕궁 낙선재

600여 년의 풍파를 견뎌온 문화유산_한양도성

한양도성을 축대 삼은 동네_행촌동·장충동·혜화동

 

3장 그날의 현장을 찾아서

 

남북 대결 시대의 상흔_북한산 우이령길

최후의 바리케이드_유진상가

붕괴, 그 후 20년_삼풍백화점 터

'사직동팀'은 추억일 뿐?_서울 시립어린이도서관

'여우사냥'과 사라진 비석_경복궁 건천궁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 역사의 내막_러시아공사관 첨탑

'독립'의 또 다른 의미_독립문

'절반의 역사'만을 기억하는 역사관_서대문형무소

이리저리 또도는 '반민특위' 표석_명동 입구

그는 그곳에 폭탄을 던진 적이 없다_종각 사거리

최초의 신식무기 공장_번사창

비운의 노래 <대한제국  애국가>_탑골공원

1919년 3월 1일 그곳에서는…_인사동 태화빌딩

3·1독립만세운동의 아지트_승동교회

그 뜨거운 역사의 현장_서울역

그곳만 볼 게 아니다_운현궁

최후의 독립운동 현장 '부민관'_서울시의회청사

다시 돌아온 '마지막 임시정부청사'_경교장

절대 권력자의 집을 찾아_이화장

이름 뒤에 숨어 있는 역사_4·19혁명기념도서관

 

4장 함께 사는 서울을 꿈꾸며

 

서울역 앞 쪽방촌의 여름 그리고 겨울_동자동·갈원동

'넝마공동체' 사람들이 갈 곳은 어디?_개포동 영동 5교

겨울이면 더 바빠지는 사람들_구세군중앙회관

그때의 터줏대감은 지금 어디에_황학동 도깨비시장

"내가 어떻게 소멸해가는지 봐두게"_청계천 공구상가

"잠깐 참으라"는 팻말보다 필요한 것은…_마포대교

노동자의 생활을 '체험'한다?_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

사람이 꽃보다 먼저다_덕수궁 대한문 앞

판화가의 동분서주가 반갑지만은 않은 까닭_광화문광장

차들이 사라진 거리흫 걸으며_홍대 앞 주차장 골목과 연세로

'거리의 지뢰' 볼라드_국립서울맹학교

'황연대성취상' 그 너머_정립회관

128년 만의 재개국_우정총국

만인을 위한 의료기관을 꿈꾸다_제중원 터

"마마야 물렀거라. 지석영 대감 행차시다"_대한의원 의학박물관

'세계 제2의 피폭국가' 한국_'합천 평화의 집' 서울사무국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 터의 운명은?_종로구 송현동

지금은 사라진 '여인들만의 밤'_보신각

 

5장 변화의 기로 위에서

 

미스코리아대회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_명동예술극장

'멸종 위기'에 처한 서점들_신림동 고시촌

부대찌개의 추억_용산 미군기지

127년 만에 사라지는 백열구_경복궁 향원지

자연지세가 사라져가는 서울_화동 고갯길

복원 논란을 넘기자 이번엔…_부암동 백석동천

_청계천

왜 굳이 그 자리에 그 돈을 들여서_동대문디자인플라자

거리예술 창작센터로 변신한 취수장_옛 구의취수장

'서울 유일' 석유비축기지의 미래_매봉산

'찾아가는 시민발언대'의 이면_서울시민청

한옥 게스트하우스의 미래_북촌

'조선철도호텔' 이후 100년_웨스턴조선호텔

역사의 옷을 입은 백화점_신세계백화점 본점

국내 첫 고가차도여, 안녕!_아현고가도로

남겨둔 청계고가 교각의 의미_청계천

튼튼해서 혁신적이었던 아파트_회현 제2시범아파트

인권 감수성을 가늠하는 잣대_서울유스호스텔

 

사진 및 기사출처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전傳 흥법사 염거화상탑'(위)과 '흥법사 진공대사탑'(아래).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위)과 '거돈사 원공국사 현묘탑'(아래).

국립4·19민주묘지.

국립4·19민주묘지에 있는 김경승의 '사월 학생 혁명 기념탑'.

정몽주 동상.

남산에 있는 김경승의 '백범 김구 동상'.

'포은 정몽주 동상' 건립 비문. 제작비는 현대그룹 고 정주영 회장이 헌납했다.

플라토미술관 '칼레의 시민'.

세종로 한복판의 '세종대왕 동상'

옛 공간건축 사옥.

'아라지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로 바뀐 옛 공간건축 사옥.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외벽의 모습.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 건물(위)과 내부 조사실(아래). 물고문 등을 가능케 한 치밀한 설계가 특징적이다.

세종문화회관.

전통건축 요소를 가미해 디자인한 세종문화회관.

국립극장.

간송미술관.

간송 전형필 흉상(위)과 간송미술관 현관(아래).

최순우옛집.

최순우옛집.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 '문을 닫아 거니 곧 깊은 산속과 같다'는 뜻으로, 한적한 한옥에 머물며 한국미술 연구에 천착해온 혜곡의 정신이 엿보인다.

고희동 가옥.

옛집 내부에 재현한 춘곡의 화실.

김수영문학관에 전시되어 있는 시인의 유품.

상촌(서촌).

시인 이상이 살았던 집터. 이 한옥은 이상이 실제로 살았던 큰아버지 집이 아니다.

남산 소월길.

김현근과 스가타 고의 공동 작품 <쉼표+또다른 여정>(2011).

5 · 16군사쿠데타 이듬해인 1962년 삼일절을 맞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함께 사진을 찍은 김두한.

단성사 터.

1934년의 단성사.

한국영상자료원.

<청춘의 십자로>(1934) 포스터.

궁궐을 침범하고 들어선 창덕궁 관리소장 관사. 지금은 개인 소유로 바뀌어 있다.

개인 집의 벽이나 축대 등으로 이용되고 있는 창덕궁 서쪽 지역의 담장.

연신원.

윤동주기념관으로 이용되고 있는 옛 기숙사.

한국 최초 증권거래소.

철거되고 있는 '한국 최초의 증권거래소'.

덕수궁 대한문.

섬처럼 고립되어버린 1968년경의 대한문.

시내버스 차고지 정문으로 쓰이다 발견된 환구단 정문.

중명전.

남산 통감관저 터.

1910~1911년경의 통감 관저 진입로(위)와 현재의 모습(아래). 수령 420년 정도로 추정되는 은행나무의 위치와 형태가 닮았다.

연설하는 사람 뒤로 1936년 통감 관저 앞마당에 세운 하야시 곤스케 일본공사 동상 좌대가 보인다(위). 2006년 좌대 관석 세 개가 근처에서 발견되었다(아래).

종로구 통의동.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있던 현 외환은행 본점 자리에 서 있는 나석주 열사 동상.

부엉이 근린공원.

발견된 22개 동 가운데 2개 동을 보존해둔 일본군 위관급 장교 관사.

뤼순감옥(위)의 왼쪽 회색 건물은 러시아가, 오른쪽 붉은 건물은 일본이 지배하던 시기에 지은 것으로 그 지역의 복잡한 역사를 보여준다. 근처에 위치한 옛 일본군 뤼순전투 승전탑(아래)은 현재 전망대로 이용되고 있다.

경희궁 방공호.

창덕궁 주변의 '비원' 간판들.

옛 조선총독부청사.

'本(본)'자보다는 '弓(궁)'자를 닮은 옛 경성부청사.

동묘.

조선총독부청사 철거.

천안독립기념관 야외전시장으로 옮겨놓은 옛 조선총독부청사 첨탑.

명동성당 재개발 시 발견된 하수관거.

2012년 말 발견된 을지로 입구 사거리의 하수관거.

풍납토성.

딜쿠샤.

'행복한 마음'을 뜻하는 딜쿠샤.

창덕궁 낙선재.

'달빛기행' 중 만날 수 있는 창덕궁 주합루(위)와 어수문(아래).

한양도성.

한양도성은 조선 태조 때 쌓기 시작한 이래 현대에 들어서까지도 지속적으로 보수되고 있다.

한양도성을 담장이나 축대로 삼고 있는 경신고등학교.

북한산 우이령길.

우이령길 곳곳에 남아 있는 대전차 장애물.

유진상가.

유진상가 옥상(위)과 1층(아래).

삼풍백화점.

양재 시민의 숲 한쪽에 자리한 '삼풍 참사 희생자 위령비'.

한때 '사직동팀' 사무실로 쓰였던 현 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

경복궁 건청궁.

2007년 복원한 건청궁 전경.

을미사변이 벌어진 건청궁 곤녕합 옥호루.

복원 전 건청궁 자리에 있던 '명성황후 조난지지'비.

러시아공사관 첨탑.

정동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았던 러시아공사관.

독립문.

독립문이 들어서기 전 서 있던 영은문. 지금은 돌기둥 두 개만 남아 있다.

서대문형무소.

유관순 열사의 수형기록표.

서대문형무소 내부.

반민특위 터 표석.

반민특위가 와해되기 직전인 1949년 9월 5일 중앙청에서 열린 반민특위 조사부 책임자회의를 마치고 촬영한 기념사진(위), 원 내의 인물은 반민특위 중앙사무국 총무과장 겸 조사관을 지낸 이원용 씨다. 현 명동 KB국민은행 명동영업부 빌딩 자리에 있던 반민특위 본부 청사(아래).

김상옥의거터 표석.

1995년 설치된 '김익상 의사 의거 터' 표석(위)과 8년 뒤인 2003년 설치된 '한국통감부 조선총독부 터' 표석(아래).

번사창.

열과 가스 배출을 위해 굴뚝지붕을 둔 번사창.

탑골공원.

 

하늘의 신이시여 황제를 보우하소서.

나이가 끝이 없을 정도로 장수하시고

위엄과 권세를 온 세상에 떨치시고

오래도록 복록福祿이 이어지게 하소서.

하늘의 신이시여 황제를 보우하소서.

<대한제국 애국가>

<대한제국 애국가>를 만든 프란츠 에케르트.

1902년 탑골공원에서 음악회를 미친 후 팔각정 앞에서 포즈를 취한 대한제국 군악대원들.

삼일독립선언유적지 표석.

이완용 소유의 별장 태화정이 있던 곳에 들어선 태화관.

승동교회.

인사동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한 승동교회.

서울역.

강우규 의사(위)와 제3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아래).

운현궁.

일본군 헌병 초소 터에 들어서 있는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위)과 운현궁 뒤쪽에 위치한 양관(아래).

서울시의회청사.

마지막 독립운동의 순간을 증언하고 있는 표석(위)과 그 현장이었던 부민관(아래).

경교장.

1946년 경교장에서 열린 신탁통치 반대 집회.

이화장.

친일부역혐의자 김경승이 조각한 이승만 동상.

4 · 19혁명기념도서관.

3 · 15부정선거는 이후 4 · 19혁명을 불러오는 도화선이 되었다.

넝마공동체 컨테이너 철거 뒤 나붙은 현수막.

구세군 중앙회관.

1928년 처음 등장한 구세군 자선냄비.

마포대교.

마포대교에 설치되어 있는 'SOS 생명의 전화'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 내부.

황조롱이 숲.

평택 대추리 주민들의 단결을 상징화한 이윤엽 작가의 벽화.

보행 전용거리로 바뀌기 전의 신촌 연세로. 이제 보행자 외에는 버스와 긴급차량만 통행할 수 있다.

정립회관.

2012년 런던패럴림픽 '황연대성취상' 시상식. 손을 흔들고 있는 이 중 오른쪽이 황연대 전 정립회관 관장.

우정총국.

한국 최초의 우표인 '문위우표'.

제중원 터.

재동 시절의 제중원(위)과 지금의 을지로와 명동 사이로 이전한 뒤의 제중원(아래).

대한의원 의학박물관.

대한의원 의학박물관 앞뜰에 있는 지석영 동상.

'합천 평화의 집'에서는 2012년 이래 매년 비핵평화대회를 열고 있다.

사진 왼쪽의 풀밭이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가 있던 송현동 일대.

1966년 안국동에서 쌍문동으로 옮겨진 이후 2003년 경기도 여주로 다시 옮겨진 감고당.

보신각.

명동예술극장.

1960년 제4회 미스코리아대회 중 수영복 심사.

신림동 고시촌 서점 그날이 오면.

서점 '그날이 오면' 내부.

1960년 12월 2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꿀꿀이죽' 노점상 관련기사의 사진.

경복궁 향원지.

향원지 북서쪽에 있는 '한국의 전기 발상지' 표석.

2013년 무악동의 '연근바위' 파괴 현장.

부암동 백석동천.

'白石洞天(백성동천)' 각자.

무계정사 터에 있는 '武溪洞(무계동)' 각자.

무계정사 터 근처에 들어선 한옥 문화공간 '무계원'. 2014년 서울 익선동에 있던 요정 '오진암' 건물을 헐어다 지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건설 과정에서 드러난 한양도성 이간수문.

옛 구의취수장.

2013년 9월 열린 구의취수장 오픈스튜디오. 음악당 달다의 '랄라라쇼'.

매봉산 석유비축기지.

마포 석유비축기지 탱크 내부.

서울광장에서 열린 시민발언대 풍경.

"이 북은 '전시용'입니다. 두드리거나 울릴 수 없습니다"라는 경고문이 걸려 있는 청와대 앞 신문고.

웨스틴 조선호텔.

일제는 조선철도호텔을 지으며 환구단을 철저하게 파괴했다.

신세계백화점 본점.

아현고가도로.

아현고가도로 철거 전(왼쪽)과 후(오른쪽).

청계 8가와 9가 사이 청계천 위에 남겨놓은 청계고가 교각 세 개.

회현 제2시범아파트.

회현 제2시범아파트는 구름다리를 설치해 남산 중턱에서도 곧바로 출입이 가능하도록 했다.

서울유스호스텔.

현재 서울유스호스텔과 서울시청 남산별관 등으로 이용되고 있는 옛 안기부청사. 

 

 

posted by 황영찬
2015. 6. 11. 16:23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59 환단고기를 찾아서 1 : 고조선과 대마도의 진실


신용우 장편소설

2012, 작가와비평



대야도서관

SB102400


813.7

신65ㅎ 1


끊을 수 없는 대한민국과 일본 역사의 고리

1910년부터 총독부가 찬탈한 우리 역사책 51종 20여만 권은 어디에 있을까?


환단고기를 찾아서 1

고조선 대마도 진실


신용우의 소설에서 역사는 살아 숨 쉰다. 그는 역사를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미래를 설계하는 지침으로 삼는다.

일본은 예로부터 광개토대왕의 비문까지 고쳐가면서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우리의 고조선에서 대진국 발해의 역사까지

앗아가려 하고 있는 이 판국에 우리 역사가들은 무엇을 하는가?

여기 소설가 신용우가 우리의 자랑스런 고조선과 고구려, 대진국 발해의 역사와 광역을

현실로 가져와 되살려 놓는다. 또한 그 역사들이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증거들을 제시한다. 그 특유의 메타픽션적 역사 접근은 역사가 과거에 묻혀

숨 막히는 것을 방관하지 않고 우리 곁에서 함께 웃고 숨 쉬게 한다.

특히 유난히 왜곡된 부분이 많은 우리나라 역사의 찢기고 기워진 아픈 구석을 찾아 명쾌하게 치료한다.

그의 작품을 읽고 나면 십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기분을 느끼는데, 이는 그만의 매력이다.

이번 작품에서도 신용우는 여지없이 그 매력을 발산한다. 일제에 의해 깊은 상처를 입은

우리의 역사를 그가 소생시키고 있다. 일제가 우리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거둬들인 역사와 문화,

예술 서적이 총 51종 20여만 권이라는 기록이 그의 눈을 비껴 갈 수는 없었다.

그 책들의 행방을 추적해 나가는 것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우리가 흔히 말하듯이 잃어버린 역사가 아니라 반드시 찾을 수 있는 역사라는 것을

그가 우리 앞에 보여주고 있다.

부디 이 작품이 우리나라 역사바로세우기에 큰 몫을 하기를 바라며,

이런 작품을 쓰는 신용우 작가의 노력이야말로 우리 후대를 위해 가장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민용태(시인, 스페인 왕립 한림원 위원, 고려대 명예교수)


 

지은이 신 용 우

1957년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했다. 제21회 외대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장편소설 『천추태후』, 『명성황후는 시해당하지 않았다』, 『요동묵시록』(상, 하), 『요동별곡』, 『도라산 역』(1, 2), 『철수야! 안 철수?』를 출간했다. 그중 『요동별곡』은 세계일보 스포츠월드 연재소설로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 교양도서로 선정되었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라는 역사관을 바탕으로, 역사를 연구하고 배우는 목적은 역사를 거울삼아 인류의 평화로운 미래를 설계하기 위한 것임을 강조한다. 왜곡된 역사는 아무 의미가 없음을 역설하며 일본과 중국에 의해 찢기고 왜곡된 우리나라 역사바로세우기를 주제로 소설을 쓴다. 요동 수복과 대마도 되찾기, 통일에 대한 관심 역시 역사 속에서 그 뿌리를 찾아 글로 표현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역사를 바로 알리고 올바른 역사를 바탕으로 풍성한 삶과 희망찬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라는 역사관을 소설로만 쓰는 것이 아니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우리 민족의 웅대한 기상을 가슴에 담고, 역사를 거울삼아 현실의 삶에 투영시킴으로써 보다나은 현재의 삶과 미래를 설계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방송, 기업, 관공서, 교사연수회, 학생특강, 포럼 등 각종 매체와 단체 등에서 각각의 눈높이와 특성에 맞게 역사 특강을 하고 있으며 신문과 잡지 등에 칼럼을 쓰고 있다.


차례


작가서문 : 역사는 잠시 감춰질 뿐 지워지지 않는다


프롤로그 : 찾아야 할 책들


1. 시간을 감춘 땅속

2. 동행

3. 죽음도 기다려준 해야 할 일

4. '역사'라는 퍼즐 맞추기

5. 유해는 요동벌판과 대한해협에

6. 끝나지 않은 일본의 역사왜곡

7. 경상북도 칠곡군 산 321번지

8. 하야시 리스케, 이토 히로부미가 되다

9. 이토 히로부미, 역사를 칼질한 망나니

10. 아! 대마도

11. 독도와 대마도, 끊을 수 없는 인연의 땅

12. 역사는 지워도 사라지지 않는다

13. 고조선의 영광

14. 나라가 못 찾으면 백성이 찾는다

15. 가슴에 부는 따뜻한 바람, 경애

16. 기회의 붉은 피

17. 일본왕실 비밀서고의 흑막

18. 발가벗은 역사가 사져다준 선물


에필로그 : 끝나지 않은 도전

참고 지도






posted by 황영찬

2015-058 바그너, 그 삶과 음악


스티븐 존슨 지음, 이석호 옮김

2012, PHONO



능곡도서관

SF035309


670.99

존57ㅂ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 시리즈 8


Wagner His Life and Music


2CDs of music + free web access


Wilhelm Richard

Wagner

                 1813-1883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 Wilhelm Richard Wagner


바그너가 숨을 거둔 지 벌써 한 세기가 지났다. 그러나 바그너라는 인물과 그의 음악은 지금도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인간의 심리를 꿰뚫는 심오한 통찰력의 소유자로 칭송되는가 하면,지독한 난봉꾼, 파시즘의 선구자 혹은 장황한 음악을 일삼은 거만한 인물로 비난을 받기도 한다. 거대한 4부작 <반지> 사이클 또한 서양 문화가 낳은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또 어떤 이들은 창조적 과대망상증이 낳은 독보적인 사례로 일축하고 만다. 이 책은 개인적인 면과 예술적인 면을 통틀어 바그너라는 인물이 가졌던 어두운 측면들을 직시함과 동시에, 그가 내세운 훌륭한 비전은 인간으로서의 결점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전도유망과는 거리가 먼 풋내기 음악가에서 관능적이고 아름다우며 또한 가장 혁신적인 음악의 찾조자가 되기까지, 그 비범한 인생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이 멀티미디어 전기에는 다음의 내용이 포함됩니다.

1 바그너의 작품 세계를 직접 개괄적으로 느껴볼 수 있는 CD 두 장

2 낙소스 웹사이트의 '바그너의 생애와 음악' 콘텐츠 자유이용권

(CD에 담지 못한 많은 음악과 보너스 자료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스티븐 존슨 Stephen Johnson

맨체스터 노던 스쿨 오브 뮤직과 리즈 대학을 거쳐 맨체스터 대학을 졸업했다. <인디펜던트>와 <가디언> 지에 정기적으로 기고해왔고, <스코츠맨> 지의 수석 음악평론가로도 활동했다. BBC 라디오 제3, 4 채널과 월드 서비스가 제작하는 프로그램에도 자주 참여했으며, 1996년에는 브루크너 사후 100주년을 기념해 특별 제작된 총 14편분량의 다큐맨터리에도 출연했다. 《브루크너를 기억하며》를 썼고, 《케임브리지 지휘 안내서》에 그가 쓴 글이 포함되어 있다. 2003년 '아마존닷컴 올해의 클래식 음악 저술가'로 선정되었고, 현재 BBC 라디오 3의 <디스커버링 뮤직>에 고정 패널로 출연 중이다.


이석호 Lee Sukho

보성중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좋아해 대학 졸업 후 <그라모폰 코리아>의 편집기자를 거쳐 EMI 뮤직의 클래식 부서에서 일했다. 현재 미국에 거주 중이며, 음악과 예술 전반에 관련된 좋은 책을 쓰고 알리는 일에 사명감을 느끼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왜 말러인가?》(2010)와 《악마의 악기》(출판예정)가 있다.


Contents

차례


서문


제1장

시대의 풍운아


제2장

파리로 가는 길


제3장

승리와 재앙


제4장

망명


제5장

한줄기 빛


제6장

강한 성城


부록

작품해설

책에 나오는 인물들

용어집

음반 수록곡과 해설

연표

역자후기

참고문헌


www. naxos.com/naxosbooks/wagnerlifeandmusic

웹사이트의 바그너 전용공간 주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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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인 후 아래의 내용을 자유로이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등록 창에서 ISBN_9781843792000, 암호_Bayreuth


CD에 수록된 전곡

바그너와 동시대 작곡가들의 음악

동시대의 문화예술, 정치 관련 사건과 나란히 보는 바그너의 생애 연표.


Chapter 1

A Child of His Time


_

제1장

시대의 풍운아


바그너는 주변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를 사랑하고 아꼈다.


Chapter 2

The Road to Paris


_

제2장

파리로 가는 길


그에게 파리 시절은 매문賣文과 가난, 그리고 끊이지 않는 낙심으로 채워진 시련기였다.

바그너의 첫 아내 민나 플라너.

파리 시절의 젊은 바그너. E. B. 키츠의 그림(1842)


Chapter 3

Triumph and Disaster


_

제3장

승리와 재앙


1848-1849년의 정치적 배경에 비추어 볼 때 바그너의 사상은 특히 선동적이고 위험한 것으로 여겨질 소지가 다분했다.

1842년 10월 20일 드레스덴 왕립궁정 극장에서 초연된 <리엔치>의 한 장면.

1849년에 발부된 바그너의 수배 영장.


Chapter 4

Exile


_

제4장

망명


바그너는 욕망의 포기와 해소라는 고통스러운 역설을 비록 말로는 시원스럽게 풀어 설명하진 못했지만, 음악으로는 조금의 남김도 없는 극한까지 탐험해냈다.

1858년 뮌헨 시절의 프란츠 리스트.

마틸데 베젠동크. 서른두 살 때의 초상화.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 마지막 부분의 자필 악보. 바그너는 이 자필보를 마틸데 베젠동크에게 보내는 편지에 동봉했다.


Chapter 5

A Light Must Show Itself


_

제5장

한줄기 빛


"바그너를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는 차라리 하나의 질병이자 병폐가 아닐까?"

1865년 6월 10일로 예정된 <트리스탄과 이졸데> 초연을 알리는 포스터.

트립센. 바그너는 스위스 시절 이곳에 기거했다.

바그너와 그의 아들 지크프리트(1880).

바그너와 그의 후원자 루트비히 2세가 <라인의 황금>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Chapter 6

A Safe Stronghold


_

제6장

강한 성城


얼마나 열심히 바그너의 음악을 뜯어보고 분석하건 간에, 그 역설적인 아름다움과 "심오한 의미"는 여전히 그대로인 채로 남는다.

바그너와 코지마.

바그너는 1872년 5월 22일 바이로이트에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지휘했다.

1876년 8월 13일 바이로이트에서 거행된 <라인의 황금> 초연이 끝나고 열린 만찬에서 건배를 제의하고 있는 바그너. 프란츠 리스트, 코지마 바그너, 한스 폰 뷜로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동석하고 있다.


Supplement

부록

1843년 1월 2일. 드레스덴에서 열릴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초연을 알리는 포스터.

1861년 3월 13일 <탄호이저> 파리 추연을 알리는 포스터.

바이로이트에서 거행된 <라인의 황금> 초연 중 한 장면.

바이로이트에서 초연된 <니벨룽의 반지> 무대 사진.

1876년 바이로이트에서 초연된 <라인의 황금>에 출연한 라인 처녀들. 라인 강 수중의 느낌을 창조하기 위해 특별히 고안된 무대장치가 인상적이다.

1876년 <반지> 초연 무대에서 브륀힐데로 분한 아말리에 마테르나 Amalie Materna(1844-1918)





posted by 황영찬

2015-057 미라 - 영원으로의 여행


프랑스와즈 뒤낭, 로제르 리슈탕베르 지음 / 이종인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37


082

시156ㅅ  32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32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죽음은 무엇이었으며,

왜 그들은 시체를 영구히 보존하려고 했을까?

생명을 잃고 바싹 마른 몸만 남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이 책을 펼치는 순간,

왕릉 속의 석관이 열리고 그 안에 누워 있던 미라의 붕대가

풀어지면서 2천 년 전의 비밀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관 속의 미라는 평온한 얼굴로

고대 이집트인들의 삶과 죽음을 들려준다.


수천 년간 내려온

시체 보존 기술을 전수받은 이집트의

방부처리사들은 죽음 속에다 삶의

외관을 되살리려 하였다.

다음에 나오는 미라들은 이집트의

서쪽 마을인 두치의 공동묘지에서 발견된 것들로,

방부처리사의 놀라운 기술을 보여준다.

이 미라들을 현대적인 기술로 분석해 봄으로써,

학자들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삶과 죽음에 관한 많은 생각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


Les Momies, un voyage dans l'eternite


차례


제1장 미라의 부활

제2장 미라 제작 기술

제3장 불멸을 향한 갈증

제4장 죽은 자의 세계와 산 자의 세계

제5장 과학적 연구

기록과 증언

연보

참고문헌

그림목록

찾아보기


프랑수아즈 뒤낭 Francoise Dunand

프랑수아즈 뒤낭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2대학의 종교사 교수로 재직중이며, 카이로에 있는 프랑수아 동양고고학 연구소(IFAO)의 위원을 역임했다. 뒤낭은 고대 이집트의 신앙과 종교적 관습에 관한 논문과 책을 발표했으며, 1983년부터는 IFAO의 두치 고대공동묘지 발굴 작업을 지휘하고 있다.


로제르 리슈탕베르 Roger Lichtenberg

로제르 리슈탕베르는 현직 의사이며, 파리에 있는 아튀르-베르네 연구소의 방사선부를 책임맡고 있다. 1976년 람세스 2세 미라 조사팀에 참여했으며, 미라 연구와 방사선 임상학에 관한 논문을 여러 편 발표하였다. 리슈탕베르는 1982년부터 두치의 미라들에 대한 인류학적 · 고생물학적 연구에서 X선 촬영을 총지휘하고 있다.


옮긴이 : 이종인

1954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였고, 한국 브리태니커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번역서로는 시공 디스터버리 총서 1번 <문자의 역사> 23번 <셰익스피어> 28번 <붓다> 33번 <세잔>이 있으며, 그외 <절망이 아닌 선택> <증발> <때로는 낯선 타인처럼> 등이 있다.


제1장

미라의 부활


이집트를 여행한 옛 사람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B.C. 5세기의 저술에서 이 낯선 나라 사람들은 "모든 풍습이 다른 나라와 다르다."고 썼다. 예를 들어 그리스 사람들은 시체를 화장한 반면, 이집트 사람들은 시체에 생명의 모습을 주려고 애썼다. 이러한 저작들 덕분에, 이집트는 늘 미라의 땅으로 기억되어 왔다.

17세기만 해도 미라는 여전히 공상의 대상이었다(위). 기자의 제2 피라미드 대현실(大玄室)을 그린 조반니 바티스타 벨조니의 석판화(1818)는 한층 정밀한 묘사를 보여 준다.

1908년, 맨체스터 대학의 마가렛 머레이(앞치마를 두른 이)가 12왕조(B.C. 1991-1786년경) 시대의 성인 남성 미라에 대한 병리학적 검사에 착수했다. 이 미라는 영국의 위대한 고고학자 윌리엄 매튜 플린더스  페트리 경이 나일강 하류에서 공식적인 탐사작업을 벌이던 중 발견한 것이다. 1858년 이후 카이로에 있는 고대유물관리국의 허가 없이는 유적지 발굴이나 유물의 해외반출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불라크의 전원 주택 복도에서 발견된 유물을 그린 루이지 마예의 그림(위). 《이집트 풍경》(1801~1804)에 수록. 아래는 람세스 2세의 미라.

하워드 카터가 금도금한 네 개의 성골함 중 하나를 열고 있다. 가장 안쪽에 있는 성골함에는 투탄카멘의 목관을 넣은 석관이 들어 있었다.

전실(前室)에서 발견된 투탄카멘의 흉상. 채색 회반죽을 덧칠한 이 나무 흉상은 생생한 표정을 담고 있으며, 아문신을 연상시키는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머리장식의 용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람세스 2세 시대의 인물인 카에무세트 왕자의 장례용 가면은 사카라에서 발견되었다.

셰스홍크 2세의 것인 이 가슴장식은 재생의 상징인 풍뎅이를 묘사하고 있다(위). 프수세네스의 내장을 꺼내기 위해 복부에 뚫은 구멍을 가리기 위한 황금판(가운데). 프수세네스의 황금 샌들(아래). 타니스에서 발견된 이 유물들은 의식용 용품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제2장

미라 제작 기술


미라 제작은 B.C. 3000년 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미라 처리 기술이 완성된 것은 B.C. 1000년 전이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시체에 살아 있는 모습을 부여하는 복잡힌 기술을 터득하는 데에는 수세기에 걸친 시행착오가 필요했던 것이다.

'진저(생강)'라고 알려진 이 미라는 B.C. 3200년경에 제작되었으며, 게벨레인 사막에서 발굴되었다. 현재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진저는 자연적으로 미라화된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되고 있다. 모래 속에서 이런 미라를 발견한 고대 이집트인은 자연스레 사후세계를 꿈꾸었을 것이고 시체를 미라로 처리할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때 이후로 그들은 제물이나 일상 생활용품을 그릇에 담아 시체 곁에 놓아두기 시작했다.

시체에서 들어낸 내장을 담아 둔 카노픽 항아리. 이 항아리가 어떻게 쓰였는지 밝혀 낸 샹폴리옹은 이렇게 적어 두었다. "섬유질조직…… 동물의 냄새, 향유를 잔뜩 바른 물체를 그릇 바닥에서 발견했다. 그것은 천으로 싸여 있었다. …… 간, 뇌수, 작은뇌."

안티노에에서 심하게 파손된 미라를 발굴한 사람은 이것이 아나톨 프랑스의 소설 《타이스》의 주인공인 타이스의 미라라고 주장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창녀인 타이스는 수도승을 유혹하려다가 그에게 감화되어 평생을 사막에서 참회하면서 살았다.

아니 파피루스(19왕조)의 한 장면. 죽은 자를 썰매에 실어 영원히 쉴 곳으로 나르고 있다. 아내와 친지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다.

장식을 넣은 튜니카(소매가 짧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그리스 · 로마 사람들의 속옷)와 숄만을 걸친 '안티노에의 여자 장식사'는 파라오 시대의 전통에서 벗어나는 시체 처리 방식을 보여 준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아누비스 가면의 하나. 테라코타에 색을 칠했고 눈구멍을 둘 뚫어 놓았다.


제3장

불멸을 향한 갈증


"그대는 '라'와 같이 되어 영원을 향해 일어서서 헤엄쳐 가리라."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죽음을 이 생(生)에서 저 생(生)으로 옮겨 가는 것이라고 믿었다. 남자, 여자, 어린아이, 동물 할 것 없이 영원한 거처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미라 처리라는 준비단계를 마쳐야 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구성요소가 흩어진다고 믿었다. 그림에서 검고 바싹 마른 미라는 살아 있는 사람의 '바(영혼의 새)'와 함께 있다. 그들은 장례의 마법을 통해 영혼의 새가 언젠가는 죽은 육체와 재결합한다고 믿었다.

신왕국시대에 들어서면 서민들도 왕가의 신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타네테레트라는 여인의 관에는 아누비스를 앞세운 태양의 배가 그려져 있다.

죽은 아내와 남편이 사후세계에서 이승에서의 쾌락을 누리고 있음을 표현한 그림. 제물이 담긴 테이블과 세네트 게임 판이 부부 앞에 놓여 있다.

후네페르의 《사자의 서》에 들어 있는 그림(위). 죽은 자(그림 왼쪽)가 아누비스의 인도를 받아 심판정으로 들어가 오시리스 앞에 선다(그림 오른쪽). 가운데 장면은 심장 달기 의식이다. 악어 여신인 오페트와 암소 여신인 하토르가 웨스트의 산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아래). 이 그림은 아니의 《사자의 서》에 수록되어 있다.

"나는 이 들판을 차지했노라. …… 여기서 나는 먹고 마시고 축제를 벌였노라. 그리고 밭을 갈고 추수를 하였노라." 《사자의 서》에는 그렇게 씌어 있다. 아니의 《사자의 서》는 사후세계를 묘사한 그림을 보여 준다.

매 미라 가면을 쓴 미라는 인간의 미라처럼 정교하게 붕대처리되어 있다.

 

제4장

죽은 자의 세계와 산 자의 세계

 

 

저승에서의 삶을 이승의 삶과 같이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무덤에 많은 부장품을 넣어 주었다. 그중에는 값이 상당한 귀중품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 결과는 도굴꾼의 등장으로 나타났다. 도굴은 이집트 도처에서 자행되었고 소박한 무덤이라해도 도굴꾼의 손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관에 그려진 눈(아래, 중왕국시대)은 죽은 자도 볼 수 있도록 한다는 주술적 의미를 지닌다. 위는 19세기 초에 루이지 마예가 그린 그림으로 대피라미드 왕의 현실을 보여 준다. 여기에 있던 케오프스 파라오의 화강암 석관은 텅 빈 채로 발견되었다.

왕릉의 두 가지 형태. 위는 케프렌의 피라미드(4왕조)이고, 아래는 사카라에 있는 메르네이트 왕비의 마스타바(1왕조)이다.

"만약 너희들 중 하나가 저 세상에서 어떤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면 '대령이오!'라고 말하라." 《사자의 서》에 있는 이 말은 죽은 주인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우샤브티스의 임무를 상기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우샤브티스에 새겨지곤 했다. 우샤브티스는 주인의 지위에 따라 몇 인치에서 몇 피트에 이르기까지 그 크기가 다양했으며, 아멘호테프의 인물상처럼 주인을 흉내내어 그들 몫의 소형 관을 갖추는 경우도 있었다.

화려한 장식을 자랑하는 이 세 개의 관은 상당한 지위를 누리던 여인 타무트네프레트의 것이다. 관뚜껑에는 여러 줄로 상형문자가 씌어 있고 장례의 신들이 그려져 있다. 그 신들 중에는 죽은 여인을 보호하듯이 감싸고 있는 날개 달린 여신도 있다. 문자를 써넣는 일은 죽은 자가 사후에도 영생을 누리게 해 달라는 기원이었다.

산 자를 보는 죽은 자의 눈

그리스-로마 시대의 이집트에서는, 죽은 자를 손쉽게 알아보려는 듯이 미라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사실주의가 유행했다. 암모니우스라는 남자(위)와 이름을 알 길이 없는 여인(아래)의 미라 초상화는 나무나 천에 색깔 있는 왁스 혹은 접착제를 섞은 안료로 그린 것이다. 표현력 풍부한 이 초상화는 당시 사람들의 범세계주의적인 면모를 보여 준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전례가 없는 이런 초상화는 폼페이에서 발견된 로마의 초상화를 연상시킨다.

아르테미도루스의 경우와 같이, 초상화는 관재나 붕대 섶에 찔러 넣었다. 이 미라는 하와라에 있는 그리스-로마 시대 공동묘지에서 출토된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지하묘지로 네모꼴 기둥과 그리스풍 삼각형 박공벽은 이 지역의 전형적인 무덤양식을 보여 준다.

투탄카멘 왕릉은 현대까지 거의 원형대로 보존된 유일한 무덤이다. 이 왕릉도 매장 직후 도굴꾼에게 훼손되었으나 다행히 부장품은 무사할 수 있었다. 위 사진들은 1922년 이 왕릉이 처음 발굴되었을 때의 모습을 보여 준다. 부장품들이 마구 흩어져 쌓여 있다. 궤짝에 찍힌 도굴꾼의 발자국이 선명하다.

20세기 초에 발굴된 미라.

애벗 파피루스는 람세스 9세 치세 때 열린 람세스 2세 무덤 도굴범들의 재판기록을 보여주고 있다. 도굴범들은 "늘 그랬던 것처럼 무덤을 약탈하러 갔다."고 자백했다. 그들은 왕과 왕비의 관을 열고 부적, 보석 등 귀중품을 탈취한 뒤 관에 불을 질렀다고 했다.

투탄카멘 왕릉의 발굴작업은 몇몇 유품을 현장에서 원형으로 복구하기도 하면서 오랜 시간 힘겹게 진행되었다. 왕릉의 유물 전체는 카이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제5장

과학적 연구


이집트학이 정립되면서 미라는 다시금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거나 제약원료 정도로 취급되던 미라가 현대 과학의 집중 탐구대상이 된 것이다. 도굴꾼의 손에서 미라를 구출해 낸 고고학자들은, 오늘날 첨단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아 이 귀중한 인간자료를 분석하고 보존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가스통 마스페로 경. 마스페로는 기자의 피라미드와 룩소르의 신전을 발굴했다.

투트모시스 2세(아래)와 투트모시스 1세(위)의 사진. 둘은 가족간의 유사성을 보여 주고 있지만, 엑스레이 사진은 후자가 투트모시스 1세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젊은 사람의 뼈대일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시프타 파라오(19왕조 말)의 왼쪽 발의 기형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편평족이라는 주장과 소아마비 후유증이라는 견해가 맞서는 것이다.

중왕국(11왕조)시대에 제작된 미라의 가면과 관재.

헤로도토스 흉상.

알렉산더 대왕의 것으로 여겨지는 석관.

람세스 6세의 현실 그림 중 새로운 태양관(solar disk)의 창조를 묘사한 부분.

투탄카멘 왕릉에는 많은 보물이 부장되어 있었다. 위는 설화석고 화병이다.

데이르엘바하리 미라 저장소에서 발견된 세티 1세의 미라.

하워드 카터가 투탄카멘 왕릉에서 장례용 긴 의자를 꺼내고 있다.

 




posted by 황영찬

2015-056 萬人譜 21

 

高銀

2006, 창비

 

 

시흥시대야도서관

SB001809

 

811.6

고667만 21

 

창비전작시

 

스웨덴 Svenska Dagbladet가 뽑은 '2005 올해의 책'

 

옛일은 참혹했던 일까지도 향수를 느끼게 한다. 이번 고은 선생의 『만인보』에 그려진 4 · 19도 그러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것은 지금의 눈에 비치는 당시의 일들이 어떤 순진성 또는 순수성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령 신문팔이 소년의 용기가 계엄군을 돌아서게 하는 이야기는 그러한 순진성 또는 순수성을 드러내준다. 이것이 드러나는 것은 물론 시인의 시심이 그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만인보』는 민족 또는 민중의 서사시이다. 서사시에는 영웅이 있게 마련이고, 이 시의 영웅은 민중이지만, 모든 것이 민중이데올로기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만인보』는 정치와 관련 없는 민중의 삶, 더 나아가 혁명의 적에게도 열려 있다. 여기에 실린 「어느 임종」은 죽음에 임하여, 독수리에게 자신의 주검을 내맡기며, 내생을 사절하는, 도인의 초탈을 읊고 있다. 『만인보』의 시심은 정치를 넘어, 이러한 초연함과 일치하고, 다시 한 없는 자비심과 일치한다. ● 김우창 문학평론가, 고려대 명예교수

 

『만인보』는 이번 세기 세계문학에서 가장 탁월한 기획 가운데 하나다. 그 시들은 더할나위 없이 감칠맛 나고, 사람들 삶의 세목으로 충만하다. ● 로버트 하스(Robert Hass) The New York Review of Books 서평

 

그는 무엇보다 시적 영감을 얻은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적, 정신사적 영향력을 지닌 백과사전이다. 통찰력과 풍자와 온정을 갖고 이 차가운 불빛 속에서 인간적 자연의 하약함과 유혹을 드러내 보여준다. ● 얀 칼손(Jan Karlsson) Kristianstadsbladet 서평

 

윤회하는 세속의 그의 인물들은 무아의 경지에서 가장 강하다. 시들 속의 이야기는 마술퍼럼 마을과 밭과 개들, 그리고 새들과 인간들과 시간의 흐름을 내포한다. ● 스웨덴 국영라디오 'P1' 서평

고  은 高  銀

1958년 처녀시를 발표한 이래 시 · 소설 · 평론 등에 걸쳐 140여권의 저서를 간행했다. 서사시 『백두산』『만인보』와 『고은시선집』 1 · 2 『고은전집』(전38권) 등을 출간했고, 전세계 10여개 언어로 50여권의 시집 · 시선집이 간행되어 큰 반향을 얻고 있다. 현재 세계 시아카데미 회원(한국대표)로 세계시단이 주목하는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동방의 태양을 쏘라

조명암(趙鳴岩)

 

동방이 얼어붙었다

태양의 붉은 피가 얼어붙었다

 

젊은이여 이 고장 백성의 아들이여

손에 든 화살을 힘주어 쏘아보아라

태양의 가슴의 붉은 피를 쏘아 흘려라

백성이 광명에 굶주리고

강산의 줄기줄기 숨죽여 누웠으니

 

허물어진 옛터

님의 꽃잎 하나 둘

……

 

화살을 쏘라

동방의 태양을 뽑아내라

피 끓는 심장에 불을 붙여

님은 봉화 재 우에 높이 들고 서서

산과 들 곳곳에 이날의 레포를 아뢰어라

 

차례

 

시인의 말

 

어떤 임종 / 지족 / 춤 몇대 / 사색풍경(四色風景) / 어머니의 정수리 / 장충동 판잣집 대장 / 할머니의 젖 / 김주열 / 유대평 씨 / 고교생들 / 신나명 / 김정렬 / 김효덕의 아버지 / 김위술 / 고(故) 김상웅의 넋두리 / 구두닦이 / 사라호 해골 / 그 형제 / 꿈 / 이대우 / 용실이가 죽어서 왔어 / 의규군의 아버지 / 백암의 꿈 / 이승만 대통령의 사진 / 손진흥 / 신호덕이 / 여순경 김숙자의 웅변 / 유정천리 / 이장 고재순 / 마산공고 2학년 이종모 / 그의 일생 / 노원자 / 옥봉이 / 임옥남 / 박정덕이 마누라 / 그들 9형제 / 닭 두 마리의 마당 / 청주여고 2학년 신순옥 / 대전고 / 유해성 / 김효성 / 춘천고교 설정일 / 교장 김석원 / 이 충혜왕 / 동래고 유수남 / 이의남 / 박우영 / 절도 8범 / 정추봉 / 거지 / 이상은 / 이영민 / 이정길 / 채섭 채철 형제 / 평생 침대 / 생선가게 오영감 / 최기태 / 발산리 새댁 / 김선인 / 허정 / 이문길 / 어느 어머니 / 진영숙 / 진영숙의 아버지 진명옥 / 이상은 / 강명희 / 임화수 / 임화수들 / 김순자 / 이옥비 / 4월 266일 / 김경진 / 김재우 / 야산 이달 / 박우택 / 박수만 / 국민대 김수현의 결혼 / 앉은뱅이 종석이 / 박종구 / 윤석길 / 태관동 / 씻김굿 가족 / 백원배 / 장충식 / 김치호 / 정대근 / 김효덕의 어머니 / 김영호 / 오성원 / 그 어머니 주경옥 여사 / 두 혼백 / 아버지의 염불 / 어머니 이계단 / 아우 이중하 / 4월계 / 김분임 / 김정돈 옹 / 김광렬 / 어머니 이춘란 / 옛 꽃다발 / 신형사 / 이종양 / 전성천 / 화물차 감옥 / 그녀의 밤 / 김두철 / 가루 / 김기선 / 김유만 / 이강욱 / 이강석 / 그 할아범 / 프란체스카 도너 / 박마리아 / 승마 출근 / 어떤 낚시질 / 한상철 / 윤광현 / 김준호 / 이성남 / 안국동 덕성여중 3학년짜리 / 김창호의 관 / 박점도 / 이채섭 / 심정구의 어머니 / 명남이 / 어떤 쌀도둑 / 남기춘 고모의 넋 / 김왈녕 / 심은준 / 박철수 / 김창필 / 최현철

 

어떤 임종

 

바람이 온다 나는 간다

 

몽골독수리 둘이

나를 본다

 

이내 내려앉으리라

 

내생 필요없다

 

사색풍경(四色風景)

 

차츰 근세 조선정치는 제 본색에 접어들어

동인

서인이라

그 지긋지긋한 임진 정유 전란중에도

동인

서인이라

 

그러다가 동인이 갈라져

남인

북인이라

 

서인이 갈라져

노론이라

소론이라

 

심지어 옷맵시도 갈라져

노론의 저고리 옷섶은

둥글둥글 접혔고

소론의 저고리는

모가 났더니라

어디 바깥뿐인가

 

노론의 집안 아녀자 치마는

굵은 주름

소론의 치마는

여러 주름이더니라

 

아니 노론 풍류는

천하절경을 바라볼 때도

으음

소론 풍류는

허허

 

이것이 근대 독립운동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썩은 동앗줄로 이어지는

기나긴 당질(党疾) 아니던가

 

오늘밤 나 또한 나의 노론이고 나의 소론 아닌가

 

유대평 씨

 

밥 한 숟갈에 쌀알 3백개

밥 열 숟갈에 쌀알 3천개라

 

한끼 스무 숟갈이면

밥알 천개라

 

그러니 하루 세 끼면 밥알 1만 8천개 아닌가

 

내 입이 너무 크다

내 밥통이 너무 크다

 

긴 장마철

문 처닫고 70일 금식으로 숨진 도사 유대평 씨

 

비 그쳤다

 

구두닦이

 

열다섯살에 세상에 나갔다

아니

처음부터 그에게는

세상밖에 아무것도 없었다

 

홀어머니 어디로 시집갔다

삼촌집에 있다가 나왔다

차라리 세상의 찬 바람이 좋았다

빈 몸 하나

 

처음 1년은

구두닦이 아저씨 밑에서

단골손님 구두를 벗겨왔다

그 다음

구두닦이 견습

 

구두닦이 4년째

이제 시장 입구 곰살궂게 자리잡았다

 

190년 3월 15일 시위대열에 끼여들었다

함께 달려가다

가슴팍이 뜨끔 그리고 쓰러졌다 숨졌다

 

신마산 구두닦이 23명이 돈을 내어

죽은 동료를 장사지냈다

 

오성원 여기 잠들다

 

백암의 꿈

 

상하이 임정 대통령

백암 박은식 각하께서는

어느날 밤

빗소리 들으시다 잠든 밤

금나라 태조를 꿈속에서 뵙고

큰절을 올리셨다우

 

이런 순 오랑캐 짓거리라니

 

그러나 금나라는 여진

여진은 발해

발해족은 마한족 이주자

 

엄연함이여

 

두루 드넓은 만주 연해주 일대가

서로 어우러진

내 더운 핏줄 갈래갈래들이라우

 

꿈 깨어나서

큰절 올려도 무방하다우

오직 그것뿐 오직 영세일계(永世一系)의 왕검 자손 어디 계시나

 

신호덕이

 

이른 봄 배고픈데 똥거름 냄새 푸짐하구나

보리밭머리

뚝새 냉이 벌금자리 캐는 호덕이

 

하늘 속 종달새가 도리어 귀기울여 내려다보는지 몰라

호덕이 저 혼자 노래하고

노래 듣누나

 

달도 하나 해도 하나 사랑도 하나……

 

유정천리

 

1960년 2월 15일

야당 대통령후보가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죽었다

야당 후보의 죽음 두번째였다

 

대폿집이 만원이었다

고교생의 빵집도 만원이었다

 

대구 경북사대부고 2학년 학생

오석수

이영길

유효길

 

그 세 녀석이 유행가 「유정천리(有情千里)」 곡에

조사(弔辭)를 지어 붙여

개사곡을 불렀다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 뒤를 따라

장면 박사 홀로 두고 조박사도 떠나갔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당선길은 몇 구비냐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비가 온다

 

세상을 원망하랴 자유당을 원망하랴

춘삼월 15일 조기선거 웬말이냐

천리만리 타국땅 박사 죽음 웬말이냐

설움 어린 신문 들고 백성들이 울고 있다

 

교내에 퍼져갔다

시내에 퍼져갔다

전국으로 퍼져갔다

 

세 녀석 무기정학

내무부장관 최인규

책상바닥 내려치며 가로되

천인공노할 놈들 왜 그놈들 정학처분으로 끝내는가 당장 퇴학시켜라

 

그의 일생

 

나의 아버지가 빨갱이였다 합니다

나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나의 삼촌이 빨갱이였다 합니다

나는 아닙니다

나의 매형이 빨갱이였다 합니다

나는 아닙니다

나는 아닙니다

 

세월이 가혹했습니다 까마귀떼가 활발했습니다

 

나는 억지춘향 빨갱이가 되었습니다 맞아죽었습니다

 

망우리 공동묘지 동쪽 비탈 덤불

그가 고요히 묻혀 있다

 

영영 누구 하나 찾아오는 사람 없다

 

이 충혜왕

 

허허 이 왕 좀 보소

고려 제28대 충혜왕

 

정작 왕권은

원나라 천자께서 가져갔으니

황음(荒淫) 삼매에 드셨던가

 

왕에게는

거기에 안성맞춤인

어의(御醫) 유광렬이 대령하였것다

 

마마께서

동녀(童女) 100명에게 은총을 베푸시오면

마마께서 100년을 계시옵니다

 

이 말 뒤

여진 산삼

향산 녹용

사산(四山) 흰 뱀을 강정보약을 대령하였것다

 

마마께서 밤마다 전국 동녀 100명을 불러들여

성은망극의 은총을 베푸셨것다

 

그 100명 뒤 코피 두 사발 쏟으셨것다

허허 아예 서기를 작파하시고

앉기를 작파하시고

누워버리셨것다

 

며칠 누워 계시다가 그만 승하하셨것다

 

왕이라 함이

나라는 지키는 것

나라를 키우는 것

나라 안의 굶주림을 줄이는 것

나라 안팎의 문물을 떨치는 것

이런 왕업 저쪽에서

나라의 청색 짓밟고 쭉 뻗어버리는 것인고

 

평생 침대

 

이유순

 

4월혁명 한 가녘에 나섰던 처녀 예쁘고 곧은 처녀

 

서울 을지로2가에서

경찰 곤봉 맞고

경찰 총탄 맞았다

그녀의 허리

그녀의 좌측 좌골이 거덜났다

 

일어날 수 없다

일어설 수 없다

누워서

밥 먹고

누워서 오줌 눈다 똥 싼다

 

그 침묵의 얼굴이

이따금 웃음을 보였다

 

평생 누워 있다

나무들은 평생 서 있고

나는 평생 누워 있다고

찾아온 친구에게

그녀가 말한 적이 있다

그뒤로

그런 말도 더이상 나오지 않았다

수천개의 하루가 오고 또 왔다

혁명도 곧 거덜나 검은 안경 육군소장 쿠데타의 시대가 왔다

누워서

바람에 휘날린 적 없는 머리칼 오똑한 코 말없는 입술 감은 눈 빈 이마

빈 가슴

고요하고 고요하다

 

임화수들

 

4월 18일 저녁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까지 나아갔다 자랑스럽다

고대생들이

대학으로 돌아가는 길 자랑스럽다

다음날의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혁명의 전야를 장식했다

 

돌아가는 길

동대문 부근

종로5가

천일백화점 앞

 

쇠갈고리

곡괭이

쇠사슬 들을 휘둘렀다

때려눕혔다

자랑스럽던 고대생들 하나둘 널브러졌다

피가 튀었다

임화수는 임화수들

그 깡패들의 학살이 시작됐다

 

이 학살에 격분

다음날

모든 대학생과

고교생

중학생 들이 뛰쳐나왔다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나야 했다 혁명이 왔다

 

4월 18일의 학살로 4월 19일의 환희가 왔다

 

야산 이달

 

『주역』 통달

야산 이달 선생

괘 뽑아

대구 미두장에서

소 한 마릿값 10원일 때

허어 3천만원을 대번에 벌었다

1924년 봄

 

다음날

열두살 장남 건화가

용돈 좀 달라 했다

 

따귀를 쳤다

 

이놈아

이 돈이 내 돈인 줄 아느냐

이 돈은 조선 백성의 돈이다

 

차남도

삼남도 어림없었다

 

그 거액을 만주로 보냈다

자금책 임주동

연락책 이상춘 들이

잘도 전달

 

임주동은 대종교 나철의 의발(衣鉢)을 받은 사람이었다

 

1929년애도 이달 선생

만주로 독립운동자금 보냈다

광산 개발

광산 15개 지구

그리고 철원에 70가구 공동촌을 만들었다

 

『주역 철리에도 으뜸

명리에도 으뜸

그러나 어느 곳에도 그의 정처 없다

늘 바람 속이었다

늘 구름 속이었다

 

조선의 밤하늘 총총한 별빛 속이었다

1889년 태어나

198년 죽었다


그녀의 밤


남편은 혁명진압의 경찰기동대장

벌써 엿새째 집에 오지 않았다

장바구니 들고

동대문 신설동 카바레에 갔다


실내

어둠이 좋았다

어둠 속에서 블루스가 좋았다


제비사내 따라나섰다

바깥세상

어둠이 좋았다 사내 뒤가 좋았다


동일여관 구석방

한 여자의 육체가 살아난다

죽어도 좋다고

넋 놓으며

1960년 4월 어느 봄밤

한 여자가 뜨겁게 살아난다


한 여자의 음란한 혁명이었다


그 할아범


이승만의 독재가

혁명에 졌다

그의 쓰디쓴 입에서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85세였다


그 이승만과 동갑인 할아범


전남 장흥군

남녘 유채꽃 눈부신 득량만 개펄마을

옛날 농민혁명군 남은 병력

마지막

마지막 진지였던 울지리


그곳에서

굶주린 농민혁명군에게

밥을 해준 어머니의

살아남은 막내아들

관군에게

부모와 형들 다 도륙당하고

어찌어찌

살아남은 막내아들 오달복


그 할아범이 동갑내기 대통령의 신세를 한탄했다

곰방대 꺼진 담뱃불 다시 붙여 빨았다

가슴속 울적


허어

하야가 아니라 주어야 허는디

팍 죽어번져야 진짜배기 하야가 되는디

나도 그만 살고

어서 죽어버려야 쓰겄는디

끝을 왜 이리 질질 끌어


박마리아


부족을 못 견딘 여인

민족을 못 견딘 여인

이승만의 마누라 프란체스카가 그녀에게 너무 가까이 있었다


아 모든 근원은 무능하구나


승마 출근


1949년 대한민국 정부 기틀이 제법 잡혀갔다

구 조선총독부 건물이

그대로 대한민국 중앙청

농림부는 서울역 부근

내무부는 명동 입구

체신부는 정동 입구

차도 제자리 포도 제자리

각각 기틀이 잡혀갔다


국무총리는 중앙청


전국 공무원 집무시간 금주령을 내렸다

그럭저럭

정부 기틀이 잡혀갔다

베니어판 책상도 의자도 새로 맞췄다

국장 과장 명패도 맞춰다놓았다

공무원증도 발부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총독부 때 쓰던 것을

그대로 썼다


전국 공무원 집무시간 금주령을 내렸다

그러나 오정남도 오정군 오정면사무소 호적계

만년 서기 한판남은

호적등본 한자 한자 써서 발부해주고 한잔

호적초본 한자 한자 써서 발부해주고 한잔

낮 2시면

벌써 막걸리 곤드레로

천하태평 코를 골았다


그러나 중앙청은 쉬쉬쉬 금주령이 두려웠다


아침 8시 국무총리 이범석은

그가 만주벌판 독립군 그대로

자동차를 타지 않고

군마를 타고

독립군 영의정이라고

허리 꼿꼿 뽐내며 출근했다

그의 비서관 이개동도

어디서 구한

노새 한 마리 타고 충직하게 뒤따랐다

그런데 그 이개동이

남로당 지하당 첩자일 줄이야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