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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7.22 2015-070 저녁의 연인들
2015. 7. 22. 16:43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70 저녁의 연인들


황학주 시집

2007, 랜덤하우스



시흥시대야도서관

SB000031


811.6

황92저


문예중앙시선 20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선정 2007 우수문학도서


황학주의 시가 변했다. 이제, 어디서도 언어를 비틀고 왜곡하고 차단하는 불화의 테크닉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상처가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상처가 완전히 가실 수 있겠는가!) 어두운 숲이나 깊은 구멍 문고리 어머니 같은 은유적 언어들이 이를 감싸고 가린다. 그래서 그의 언어들은 읽는 이의 가슴으로 흘러들어와 기억의 풍경들을 밝혀주고 땡그렁땡그렁 울린다. 우리는 풍경에서 왔으며, 지금도 풍경 속에 있으며, 앞으로도 풍경 속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슬픈 그 풍경이 우리 마음을 울리고 우리 이마를 세차게 때린다.

- 최하림(시인)


황학주 시인을 뵙지 못한 것이 10여 년은 되었는가. 가을날 그의 새 시집 원고 『저녁의 연인들』이 도착했다. 첫 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마음은 붉어진다. 언제나 그러하듯 이 시집에서도 황 시인은 무척 말을 아낀다. 그리하여 한 줄 한 줄 숨을 죽이며 천천히 읽어나가야 한다. 읽다가 책장을 가끔은 접고 숨을 한번 내쉬어야 한다. ……내가 국경을 넘어 떠돌아다닐 동안 황 시인 역시 국경을 넘어다닌 흔적이 역력하다. 그 밑은 그리고 고즈넉하고 검고 따뜻하다. 서울 방학동 시절의 다정하나 스스로를 몰락 지경으로 이끌 것 같은 시정이 긴 세월 동안 따뜻하게 뭉쳐 있다가 너무 세게 펴 보이면 들킬세라 조용하게 숨죽여 있다. 서늘한 서정이라는 비수가 세계의 빛과 어둠을 향하여 은은한 빛을 보내고 있다. 『저녁의 연인들』이 당신에게 수줍은 말을 계속 걸어온다면 당신도 어쩌면 국경을 넘은 자인지도 모르겠다. 지정학적의 국격이 아니라 마음의 어느 국경. 그 안에서 견디는 자. 그 견딤의 순간들. 당신, 그리고 우리들 모두가 그리하여 이 시집의 동반자가 될지도 모르겠다.

- 허수경(시인)


황학주

1954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1987년 시집 『사람』으로 등단한 이래 『내가 드디어 하나님보다』『갈 수 없는 쓸쓸함』『늦게 가는 것으로 길을 삼는다』『너무나 얇은 생의 담요』『루시』 등의 시집을 펴냈다.


시인의 말


수줍은 중년이다.

고개를 숙여야 하는 낮은 집을 출입하고 있다.

이런 마음의 집에 '저녁' 외에 달리 무슨 이름을 달겠는가.

짝, 도 좋다.


2006년 가을

황학주


|차례|


● 제1부


화대

마음

쇠귀나물

오이밭에서

사과나무밭 밑동들

세일즈맨, 백 칸 건물 속으로

겨울 양수리

젓가락, 내 마음은

얼레지

탑이 있는 풍경

막 어두워지는 숲길


● 제2부


버스

북 치는 인형

그해 여름

흰 염소

꽃 없이

뉘엿뉘엿 눈발 속으로 가는 일

거기는

두 번째 가는 정선

어느 날

장독대

익어가는 달-백중 무렵

극장


● 제3부


저녁의 연인들

베네치아의 연인

열대야

덜 닦인 방

은디라이

옛 부두

비어(飛魚)

푸른 사과 속 같은


● 제4부


저수지

소렌토에 멈춘 저녁

종점을 기다린다

K의 이사

동강 한때

가슴검은도요

예전에, 방직공 목련

삭정이

내가 했던 일


● 제5부


그 집 뒤꼍

퇴근 열차

간병

두 남자

용산역

지루한 오후

노인

조선대 뒷산을 넘어 할머니에게 어머니 심부름을 다녔다

굽은 소나무 그림자


|작품 해설| 송승환(시인 · 문학평론가)

정지된 세계의 비유와 성찰


저녁의 연인들


침대처럼 사실은 마음이란 너무 작아서

뒤척이기만 하지 여태도 제 마음 한번 멀리 벗어나지 못했으니

나만이 당신에게 다녀오곤 하던 밤이 가장 컸습니다

이제 찾아오는 모든 저녁의 애인들이

인적 드문 길을 한동안 잡아들 수 있도록

당신이 나를 수습할 수 있도록

올리브나무 세 그루만 마당에 심었으면


진흙탕을 걷어내고

진흙탕의 뒤를 따라오는 웅덩이를 걷어낼 때까지

사랑은 발을 벗어 단풍물 들이며 걷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이 아니라면 어디 사는지 나를 찾지도 않았을

매 순간 당신이 있었던 옹이 박인 허리 근처가 아득합니다

내가 가고,

나는 없지만 당신이 나와 다른 이유로 울더라도


나를 배경으로 저물다 보면

역 광장 국수 만 불빛에 서서 먹은 추운 세월들이

쏘옥 빠진 올리브나무로

쓸어둔 마당가에 꽂혀 있기도 할 것 같습니다


당신이 올리브나무로 내 생에 들러주었으니

이제 운동도 시작하고 오래 살기만 하면.


북 치는 인형


누가 내 이야기를 한다 며칠째 학교 뒷문으로

기차가 지나간다


발 없는 아이가

나귀에 매달려

하굣길

10리를 간다


퇴짜 맞은 것은 만삭인 낮달도 마찬가지

아무도 낳을 생각이 없다


등교할 힘도 없는

놀미낭가이네 흙집 지붕 위

딸려 올라가는 소시지나무 열매가 때로 달려 잇다

불도 못 때주고 먹이지도 못하는

불모의 자지들


새 발자국 몇 개 빗방울 무늬로 찍힌 운동장

누가 내 이야기를 한다


며칠째 학교 뒷문으로

텅 빈

기차가 지나가면

낙엽들이 개처럼 쫓아나간다


서랍을 열면

가슴에 달빛처럼 접힌

나보다 더 아픈 사람

꿍짝꿍짝 발을 맞춘다


푸른 사과 속 같은


사탕수수밭 뒤쪽에

일렬횡대로 앉아

아침이면 사내들과도 함께 일을 보는


사과 베어 먹으며 돌아앉은 여자

엉덩이 한쪽에 푸른 멍이 들어 있다


얘들아, 버펄로 수레 조심하렴


늘어난 데 없이 번지는

한 채의 꽃구덩이가 일렁이며

등굣길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든다


푸른 사과 속 같은

여자의 그림자

사과씨 묻혀 있는 멍을 닦는다


버스


갑자기 버스가 나타났다

비 내릴 때 나의 마음을 태울 차가 저렇게 분명하게 오는 일이 거북하지 않나 일단 그렇지 않나

해 진 뒤에 마음은 배롱나무 계단을 오르내리는데

버스가 오면 나는 손을 들지도 않고 돌아서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보다 당신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불빛을 켠 밝은 내부, 담쏙 받아 든 자두 광주리 같은 저녁을 태우고 버스가 온다

버스가 오나 보러 나와 한번쯤은 세상이 우리에게 시간을 맞춰줄 수도 있지 싶다

당신을 먼저 집으로 보내는 것인데

2, 3일 후 4, 5일 후 무려하게 따라갈 수도 있지 싶다

우레 치는 길은 옷고름을 풀어가

버스가 오는 걸 미끄러지듯 받아 안는다

언젠가는 다가올 슬픔 중 가장 귀한

버스가 온다면 사랑하다고 꼬집는 묵언도 쓸데없을 것이다

그런 시간이면 가까스로 불이 붙는 라이터가 입술 주위를 밝힐 것이다

지금은 손을 들지 않고 버스를 보낼 수도 있는

누가봐도 생에게 또박또박 대꾸를 할 수 있는 시간 언저리


곧 버스가 끊기는 밤이 된다

슬프면 안 된다

그 뒤에는 자연사박물관이 있다


그해 여름


멀리 간 날이었다

무서우리만치 많은 나무들이 몰려왔다

다함이 있어야 혼이 들어간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박물관 앞에서 여자를 처음 보고서

눈을 감았다 뜰 때 아주 먼 시간이 어둔 화덕에 피어 있었다

찌그려 신은 한 켤레 시간을 세족시키며

여강(驪江) 가 꽃 피듯 일없이 여자가 앉았다

무슨 물고기를 먹은 그 오후와 저녁 사이

그 식당은 지금 없어졌다 침이 마르듯이


낌새가 없는 일이었지만 식당 뒤

공사장 붉은 흙더미와 고랑 흑백 어딘가에

수줍은 중년이 어떻게 손을 들고 있었나

오색을 다 내줘버린 자작나무

몸 떨군 가장자리로 가만가만 가져가는

저녁처럼 여자 혼자 살고 있는 곳

이승에서 하루쯤이면 갈 수 있는 곳

요행이 떠나면 잊을 수 있을 듯도 해

그 한나절은 기념이 되었다


알 수는 없었지만

마음이 피는 일엔 다함이 있어야 한다는 걸

여자가 눈짓해준 그해 여름


사과나무밭 밑동들


부석사 까치가 쪼고 있는 늙은 사과나무 밑동들


시간이 꼭꼭 씹어 쌓아둔 시커먼 밑동과 엉덩이를 맞대고

나는 눌러앉아 있었다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아닌 연애가 여물었다 떨어지고

점점 말수가 줄다 경청하는 귀만 커다랗게 남겨진 노인일까

베이고 없는 사과나무들

질질거리며 소변 보는 마지막 모습만 얼어 있었다

저녁은 그사이

망한 부석 아랫도리와 바닥 모를 말을 나누며

얼룩얼룩했다


저런, 자필 사인한 이별 같은 노을에

젖어 벌어지는 사과나무 한 그루

털썩 주저앉아

몇 해 전 내 몸에 들어오지 않았나 묻고 있었다


종점을 기다린다


종점을 기다린다 흰 우산살을 펴며


비가 쉬지 않고 새드는 가게 처마 밑

물받이가 비벼서 내려 보내는 빗방울

뭐라고 하나

빗소리

불 꺼진 창만 골라

사납게 뛰어들 때


허리띠를 풀면 내려가는 바지처럼

눈이 풀어지면 스르르 종점에 닿으련만 버스가 오지 않는다

정류장에서 매일 저녁 출생 지점으로 돌아가는

일용의 여행자, 상속받은 귀가를 기다린다

봄비에 젖어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하러 오라는 듯

눈이 흐린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다


거리는 파인 도마처럼 펼쳐져 있고

탈을 든 영혼처럼 손목을 놀리는 비

포플러나무가 팔을 붙인 채 염주비를 돌린다

빗소리를 감았다 풀었다 하는 배뇨를 참고 있는 사람의 골목이 먹갈치처럼 흘러가며


종점을 기다린다

낙수 고랑을 타고 그 한 집

불 꺼진 방으로 가는

 

극장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제 것을 주물럭거리며 아프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으로는 미완성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 누군가 젖을 살짝 들어올리면 동그래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멀그스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만 일어나라고 등 떠밀지 않아도

환하게 불 들어오며 종영될 인간 극장

 

익어가는 달

- 백중 무렵

 

혈흔을 감싸안고

이사 가는

밤마다 다리가 아픈

영생

 

예전에, 방직공 목련

 

날마다 달이 도장을 찍으러 오는

누이의 세숫대야 속에

목련이 졌다

 

그날 목련꽃이 쏟아진 마당에 사람들이 하루 종일 오가고

나는 운동화 끈을 푼 뒤란에서

한 10년 한자리서 눈 맞은 사람 하나 손잡아 끌었습니다

앞바다에 굴러 떨어뜨린 배추며 돼지 똥값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때 잡고 다니던 손처럼 고물고물 해안선을 건네준 후

아버지를 모아 난바다에 내다 버린 나는 자주 도시락이 없었고

나라도 집을 나가야 할 것 같은 점 많은 식구들이 있었다고

그렇게 쉽게 어른이 되었다고 해야 되었습니다

홑거적 속에서 날갯짓을 하며

너무 늦어 돌아가면 빚이 될 것 같은

목련,

씨줄과 날줄 끌어 녹슨 세숫대야를 방직하며

울컥 쏟아졌습니다

 

두 남자

 

정신이 돌아오는 길목은 언제나 치욕이다

간병인 아줌마에게 엉덩이를 보이는 게

허, 화가 나는 아버지

 

허 참,

파르스름한 엉덩판에서 똥을 긁어내는 동안

 

쓰레받기 하나 비석처럼 들고 서 있는 내 그림자

이 진땀과 냄새 우려내는 데를 생각하고 잇다

 

자신의 것만은 아닌 똥물 진물 골목 위를 걷는

팔순, 침대 이쪽으로 기우뚱하는 순간에

저쪽을 흐지부지 잊어버린다

 

단 한 번도 동이 나지 않은 똥 웅덩이

한옆에서

슬쩍슬쩍 똥빨래를 만작대는 달빛에 나도 스며서,

 

쇠귀나물

 

유리병이 버려진 논물 위로

소의 귀 모양을 한 풀잎들이 나와

아, 아, 아, 입을 갖다 대며 쭈그리고 앉아 놀던 학교 길

손을 묻어 물을 만지면 꼼지락거리는 소녀가 느껴졌다

막 뜯은 편지 봉투처럼 가난한 마음을 들고

나이 많은 남자를 만나 배배 꼬인 연애를 하러 가던

누나는 중학교밖에 못 마치고

쇠귀나물 뽑힌 논에서 모를 심었다

 

쇠대나물 쇠태나물 쇠택나물 수사 곡사 급사 택사 물택사

버려지면 이름도 아무렇게나 불린다

물집 잡힌 하얀 꽃잎 우리 누나

중퇴한 교실 창 안에 대고 친구들에게 뭐라고 했나

쇠귀에 뭐라고 했나

소리치고 밀쳐도 남자는 꿈쩍을 않고

세상에 골똘해야 하는 일을 쇠귀에 속삭이는 일로 알았던

 

유리병 안에 들어간 나비가 팔랑거린다

쇠귀나물 잎 떨어진 자리가 구드러지고 있다

 

오이밭에서

 

오이 살색을 살피며 생각한다 싱싱하고 오톨도톨하던

몸의 나이에 신세 안 지고 올 수는 없었구나

자기 가시로 박음질된 오이의 몸에

넓삐죽한 칼을 대며, 자신을 깎아보지도 못한

물렁한 포대자루 못생긴 그림자 둑길 하나 두고 앉아 있다

 

살짝 잠이 모자란 오이가 잎 속에 있다

임신한 차림으로 길게 넘어진 오이 옆에

부은 목젖처럼 잎 하나가 돋는다

새끼들이 모두 나와 있는 오이밭

덩굴손으로 붙들고 있는 젖은 어머니들

 

가시 분화구 밑 싱싱한 지층을 섬벅 베어 문다

읽고 싶은 백 권의 기갈을 잃어버렸다 오이밭에서

물맛 좋은 가슴 한 짝 덜렁, 그랬다

물벼락 같은 오이 냄새 아래

땅벌레가 취해서 옴직옴직 돌아가는 참이다

 

막 어두워지는 숲길

 

숲길이 막 어두워져 더 걸어 들어갈까 말까 하는 갈피에서

무슨 빛인가 발그레하게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숲이 항아리를 씻어두었는지

무슨 빛인가,

 

여름날 길을 달리한 모든 가지들 위에

밥 묵은 손바닥처럼 얹히는 것이었습니다

노란 양푼을 업은 금달맞이꽃이 눈에 띄는 것이었습니다

 

그 길은 언젠가 두 사람이 걸어

이끼 앉은 돌 틈에서 목탑(木塔)을 들어내던 곳

찬 이슬을 지닐 때까지 구부러들어야 했던

어둠의 설움의 친정이었을,

 

숲에선 하루해를 핥아준 냄새가 나고

지하 대수층에 다니러 가는 해가 밤나무 밑으로 접어들면

마른 새가 엎드려 있어도 좋을

눈동자 같은 둥지가 밝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굽은 소나무 그림자

 

등 뒤에서 나의 가장 먼 곳의 문고리를 잡는 것이었다

등 뒤에는 오래 오래된 마룻장이 있었다

극락전까지 걸어가는 시월이면

등 뒤로 찔러오는 것처럼 깊어

슬픔과 함께 피어오르는 망향은 확인해줄 수도 없다

 

연못 수면에 살짝 쓰러진 꽃을

받쳐 들고

오래 걸어서 갈고리가 되도록 구부러진 가지로

극락전까지

핏줄을 대가는

그림자

 

은디라이

 

  국경을 건너는 소들도 우기(雨期)는 추워 자꾸 옆구리가 부딪친다. 넘어지지 읺으려고 벽에 가 먼저 부딪치던 시간들이 인간에게도 있었다. 옥수수밭이 피어나 달리는 목동 뒤로 돌아온다. 참 오래전 아버지 어릴 적부터 맨발로 다니며 넘어져본 일 없는 은디라이. 집 나간 황소 틀어쥐고 오던 날 쓰러진 옥수수꽃 위에 맨발 탈탈 털던 어린 은디라이. 내가 준 신발은 조금 작고 스웨터는 기장이 길다. 송아지는 친구라서 한 방에 재우고 염소는 아버지 꼭 닮은 의심이 들어 울타리 안에 밀어 넣던 은디라이. 내가 준 신발을 신고 멀리도 걸어 오늘도 돌아오지 않는다. 아직 만나지 못한 은디라이마저 잃어버린 나.

 

탑이 있는 풍경

 

눈 내리는 날 기우뚱 탑이 발목께를 보고 있다 어딘가에 구멍이 있다

 

한번씩 낫을 휘둘러 허공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눈을 춤추게 하는

바람, 날아 내리는 눈들이 구멍을 통해 쌓일 때

 

빈 마당은 점점 구멍이 배불러와 어디론가 빠지고 있겠구나

 

탑은 자기가 큰 구멍에 빠진 것을 모르거나 모른 척한다

 

두 번째 가는 정선

 

처음 가던 정선 고랑 파듯 고불탕고불탕 내려가던

 

마음으로는 벌써 다녀온 귤암리 가수리 많지

아무리 못 만들어도 저렇게 못생긴 소나무 하나는

 

물 내려가는 산자락에 낳을 수 있겠다 싶은

 

할머니 마음에 따라붙는 동강할미꽃

가는 팔목이 어여 어여 목줄을 당긴다

 

여기 어디쯤 5백 평은 너무 큰 땅

그 땅 쓸만한 시간이 있어서 어디엔가 당신이 살고 있을까

 

지겟다리를 받친 고목의 허리가 떠오르고

해는 빈 도시락 가방을 들고 기울었다

 

허벅지 홀쭉해진 시골 저녁에만 떠오르는 길을

어디선가 갈 수는 있겠지

 

땅에 관해서는 물이 알아봐줄 일이다.

 

베네치아의 연인

 

사랑이 풀꽃 반지를 만드는 때가 오면

가로등 지지지 제 몸 지지는 소리를 내고,

사랑이 배를 놓아 첫날밤 같은 한순간을 미끄러지면

부끄러움은 돛처럼 쫑긋한 귀가 서 있었다

 

불쑥 엉뚱한 섬이 나오는 골목을 지나

곤돌라는 낡은 기둥 같은 시간에 옆구리를 거꾸로 댔다

언제든 석양에서 되돌아 나갈 수 있다는 듯

그러니 우리는 함께 있지 못한 아침까지 인정할 것 같다

우리는 저렇듯 우박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고랑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으니 말이 많지도 않을 것 같다

 

쇄골 위에서 정전이 되자 사랑은 잠이 들고

긴 머리가 허리까지, 가물가물 물속으로 흘러갔다

사실은 가운을 여민 바다는 제 몸을 씻지도 못했다

오해를 피해 잊혀져가는 과거처럼 비치는

장신구는 본능의 하부에 풀어놓앗다 허벅지 안쪽 같은

둥글고 민감한 안 보이는 그곳

 

베네치아 빈 길에 잠자리에 든 이승들이

유실된 연인이 되어 물에 뜨고

물에 닿아 아픈 부위로 된 궁륭을 안았다

태양은 살 있는 모든 부위에서 번개처럼 빠져나가리라

사나흘쯤 밤낮이 심장 놓인 그대로 가고 잇었다

 

소렌토에 멈춘 저녁

 

올리브나무 박은 하늘이 풍덩 기울며

바다 공터를 여는

이 모퉁이

 

사랑은 온다 대리석 기둥 틈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해는 보랏빛 포도식초를 찍으며 구관과 신관 사이에

한옆으로 비껴 앉아 있다

 

사랑은

큰 포대자루 같은 절벽 위에서

바다 이야기를 꺼내면서부터이다

 

유람선이 동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섬은 바다에 잘 들어맞는다

그 뒤에까지 돌아가 보지 않아도

사랑은 과거에도 앞으로 좀 쏠려 있었다

 

열대야

 

불을 끈 늦은 밤, 2층 방문을 앞뒤로 다 열었다

너무 커서 짤 수 없는 빨랫감을 들고 아버지를 부르는 듯

아래층 노모의 목소리 마른 물받이통 타고 들리고

 

건넛방 창문마저 밀치는 순간

옆집 2층 열린 창 속으로 벗은 할머님의 전신

굽은 등에 비스듬히 수건을 두르고 있다가

황급히 냉장고 문을 닫으며 몸을 숨긴다

냉장고 불빛에 잠깐 어른한 노년의 알몸

후끈한 잠실에 비스듬히 앉은 고치 같았다

할머님 곁엔 재작년 돌아가신 그 댁 할아버님이

주전부리 오디 같은

너무 여물어 쇤 뽕잎 같은 걸로라도 누웠을 것 같고

 

아래층 아버지가 흠흠 일없이 마당을 거니신다

밖엔 바람이 좀 있다 하면서 2층의 기척을 살피는 중이셨다면

그 언젠가 언질을 주던 능소화 그림자와 함께였을 것이다

망측하게, 위층 애들이 있는데

아버지를 핀잔하는 어머니 한밤중 쌀 씻는 소리

 

오 뜨거운 것의 아름다움은 땅 저 아래쪽으로부터 오래전 내게 왔을 것

깊어지는 밤 달빛을 제 몸에 버무려서

옆집 담 위로 능소화가 쭉 올라와 들여다본다

 

덜 닦인 방

 

늘 덜 닦인 방에서

덜 갚은 빚처럼

몸서리치며 나누던 몸

 

한 국자쯤 고이고

다시 한 스푼쯤 차오르는

볕 한 줌을 시간 안에 나누느라고

 

우리여,

 

저수지

 

하얀 맨발의 연꽃잎 내려앉듯 해가 다 내려가고

흙에 접을 붙인 듯 불빛이 점점점 떠오른다

연인들이 몸의 구석구석에 노후로 깃들듯이

 

우리가 떠난 후에도

다는 안 가지고 싶어, 라고

연인들은 창문 한쪽에 써서 보여주고 있을까

문득 눈앞에나 서 있을 것 같은 펀펀한 엉덩이가

이 마음속에 언제 와 있었는지 놀라면서

수고로운 저녁을 느릿느릿 안아 들고 있을까

다 준다는 게 다 받고 싶다는 비명이었다는 것

 

그대 둥글게 앉아 있는 어둠 속으로 늦은 밥을 물리고 또 물렸다

그대 안쪽에서 가만히 받아주었다

옷가슴만한 봄이 숨죽이며 깜짝깜짝 놀라던

누가 보아도 그곳엔 저수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젖가락, 내 마음은

 

내 마음은 오래도록 바짝 마른 것에 가 있었다

 

고아원이 밤의 굴뚝을 울려대는

새 울음소리 뒤로 옮겨가고 없는 밤에

나는 시름해진 꿈들을

곧잘 눈에 잘 띄는 선반에올려놓곤 하던

젓가락처럼 몸이 긴 원장을 생각한다

 

이런 날 내 마음은

물배급차를 끌고 다닌 길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입에 물려 있던 물을 간신히 다른 입에 밀어 넣던 아이의

희미한 이름도 간직하고 있다

별이 두 개나 세 개씩 하룻밤에 떨어지면

흙칠을 한 호수 옆에 묻어야 했던 그 길을

 

가지고 있다 내 마음은

물이 없어 문을 닫은 고아원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주면

기력을 다한 살핏한 눈빛을 내 귀에 대고

고맙다고 하던 아이는

쪼개기 전의 나무젓가락처럼 두 다리가 바닥에 붙어 있었다

 

지평선에 해 빠질 동안

아이들을 세상 밖으로 가만히 달아나게 해주고 싶었다

마른 발등이 병실을 옮기는 긴 허방 붉디붉어도

우리는 무비*나 에이즈, 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지만

 

옮겨 심은 나무들이 더 이상 자라지 않아

어느 귀신이 그걸로 새 젓가락을 만들고 있으리라

 

* 동아프리카의 아이들이 에이즈를 부르는 말. '도둑'이라는 뜻을 가진 스와힐리어.

 

뉘엿뉘엿눈발 속으로 가는 일

 

여러 날 오체투지해가다

때 없이 잠에 빠뜨리는

서거나 쓰러지는 몸

 

당나귀 등에

눈밭 여기저기서 주운 나무토막 쇠똥이 모이는

자루가 삐뚜루 걸쳐 잇다

오늘 밤 달빛이 되는 영혼이 우둘투둘 들어 있는 것 같다

 

가죽 치마 깔고 쓰러지면

어디서는 눈보라가 어디서는 모래바람이

우는 마음을 알아듣는 것 같다

귀 뒤에선

나무 하나가 빗자루를 들고 휘어지고 있을 텐데

앞서 있던 전봇대들이 어느새 보이지 않는다

 

판자 조각을 댄 가죽 장갑 땅에 내리치면

낑낑대며 생의 한 귀퉁이 잡아 굴리느라

무릎뼈처럼 구부러지던 계절이 생각난다

내 안의 붉은 머리채에 낚여

꽈당 엎어지는

참, 사랑을 쉬는 일도 중요한 일이네

 

배꼽 속에 성산이 꼬르륵 부푼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