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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8. 29. 11:44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80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해방과 분단, 친일파 편

 

서중석 답하다 김덕련 묻고 정리하다

2015, 오월의 봄

 

 

대야도서관

SB0486692

 

911.07

서76ㅅ  1

 

꿈같이 찾아온 해방, 그리고 뒤이은 분단

한반도는 왜 분단으로 치달았나?

친일파, 분단 세력은 어떻게 기득권을 잡았는가?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 서중석 교수의 역사 왜곡 바로잡기!

 

우리에게는 '역사의 죄인'이 있다. 우선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이 쉽게 떠오를 것이다. 이승만을 존경하는 사람들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이 거기 포함된다. 이들은 이승만을 살리고 나아가 그를 '건국의 아버지' '국부'로 만들어놓을 수만 있으면 '역사의 죄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나아가 이승만이 국부가 되면 권력이나 사회적 지위, 기득권을 계속 움켜쥘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

우리에게는 '역사의 힘'이 있다. 항일 독립 운동과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 줄기차게 계속된 것도, 우리 제헌 헌법에 자유 · 평등의 독립 운동 정신이 담겨 있는 것도 역사의 힘이다. 우리 국민이 친일파, 분단, 독재를 있어선 안 되는 잘못된 것으로 보는 것도 역사의 힘이다. 막강한 힘의 지원을 받은 역사 교과서가 참패한 것도 그렇다.

- '책머리에' 중에서

 

서중석

1948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했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9년부터 1988년까지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했으며, 6월항쟁 당시 《신동아》 취재기자로 역사적 현장에서 그날의 사건들을 생생히 목격하고 기록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이며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아시아 평화와 역사교육 연대 상임 공동대표, 제주 4 · 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80년대 민중의 삶과 투쟁》 《한국 근현대 민족문제 연구》 《한국 현대 민족운동 연구 1 · 2》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남북협상 : 김규식의 길, 김구의 길》 《조봉암과 1950년대》(상 · 하) 《비극의 현대 지도자》 《배반당한 한국 민족주의》 《이승만의 정치이데올로기》 《한국 현대사 60년》 《이승만과 제1공화국》 《대한민국 선거이야기》 《지배자의 국가 민중의 나라》 《6월항쟁》 등이 있다.


김덕련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를 거쳐 프레시안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신문사 일을 하면서 틈틈이 역사 관련 책 작업을 함께해왔다. 《세계를 바꾸는 파업》, 《근현대사 신문》(2권), 《세계사와 함께 보는 타임라인 한국사》(5권)를 함께 쓰고 만들었다

 

차례

 

책머리에
연표

 

                                                     해방과 분단                                            

 

첫 번째 마당                 어느 날 갑자기 온 해방?

                                   우리는 해방을 주체적으로 맞았다

 

두 번째 마당                 자유는 미국이 준 선물?

                                   그들은 점령군이었다

 

세 번째 마당                 한국 '최고의 혁명가' 여운형이 친일파?

                                   "극우, 참 비열하다"

 

네 번째 마당                조선일보도 공감한 민족적 과제

                                  토지 개혁과 친일파 처단

 

다섯 번째 마당            역사를 바꾼 신탁 통치 논쟁

                                 좌우익은 왜 그토록 싸웠는가

 

여섯 번째 마당           좌익은 신탁 통치를 찬성했다?

                                김일성 '엉터리 신년사'의 비밀

 

일곱 번째 마당          12번 테러와 암살도

                               '정의로운 바보'를 꺾지 못했다

 

여덟 번째 마당          남북 협상,

                               분단을 막기 위한 최후의 노력

 

아홉 번째 마당          한반도의 분단,

                               미국의 책임이 무거울 수밖에 없는 이유

 

 번째 마당             북한의 통일 논리,

                               왜 전면전으로 갈 수밖에 없었나

 

열한 번째 마당          제주 사람들이 폭도?

                               "극우의 터무니없는 얘기"

 

열두 번째 마당          1948년 유엔 결의를 멋대로 해석한

                               극우 반공 정권의 괴뢰 만들기

 

열세 번째 마당          두 번 쫓겨난 대통령 띄워

                                '건국의 아버지'로 모시자고?

 

열네 번째 마당          이승만이 자유민주주의를 심었다?

                               거듭된 부정 선거 안 보이나

 

열다섯 번째 마당      농지 개혁은 이승만 덕분?

                               "결코 아니다"

 

열여섯 번째 마당      제헌 헌법의 탄생

                               평등주의의 열망을 담다

 

                                                       친  일  파                                           

 

첫 번째 마당           이승만의 6월 공세

                             역사를 과거로 퇴행시키다

 

두 번째 마당          박정희의 친일 행적은

                            어떻게 비밀이 됐나

 

세 번째 마당          친일파 세상,

                            어떻게 이런 나라가 있을 수 있나

 

네 번째 마당          "박정희 한 사람 덕에 경제 발전?

                            저열하다"

 

다섯 번째 마당      뉴라이트, 극우 반공 세력이

                           이승만, 박정희를 찬양하는 까닭

 

나가는 말

                       

 

건국준비위원회 집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여운형.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는 해방된 바로 그날부터 새로운 사회를 맞이하고 새 나라를 세우기 위한 활동에 구체적으로 착수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앞줄 왼쪽 두 번째가 이시영, 그 옆으로 김구, 김규식, 조소앙이 나란히 서 있다. 해방이 되고 한참 뒤에야 임시정부 요인들은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 까닭은 연합국이 귀국을 막았기 때문이다.

서울 경운동 삼광한의원에서 열린 조선건국동맹 모임. 왼쪽 네 번째가 여운형이다. 건국동맹은 전국에 지부를 조직하고, 해외에 있던 독립 운동 세력과도 연계해 다가올 해방을 준비했다.

한국인들은 정말 꿈같이 해방을 맞았다. 해방의 기쁨으로 환호하는 시민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경성콤그룹을 이끌던 박헌영. 경성콤그룹은 공산주의자 조직으로는 일제 말기에 국내에서 마지막으로 중요하게 지하투쟁을 한 조직이다.

1945년 9월 9일 미군이 도열한 가운데 조선총독부 건물 앞 국기 계양대에서 일장기가 내려오고 있다(왼쪽). 이어서 성조기가 게양되고 있다.

한반도에 입성한 미군의 모습. 미군은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상륙해 9월 9일 서울에 들어왔다. 그러면서 한국인들의 정치적 지유에 부분적으로 제한을 가하기 시작했고, 친일 경찰을 끌어들여 다시 일하게 하기도 했다.

1945년 북한에 들어온 소련군의 모습.

여운형(위)과 안재홍. 여운형과 안재홍은 당시 국내에 있던 주요 인사 중 마지막까지 일제에 굴복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8월 16일 휘문고보 교정에서 환영을 받는 여운형. 여운형이 1945년 8월 15일 엔도정무총감을 만났을 때 첫 번째 요구 사항이 정치범 등을 즉각 석방하라는 것이었다.

1945년 12월 6일 임시정부 환영 시가 행진. 임시정부 1진은 1945년 11월, 2진은 1945년 12월에 한국에 들어왔다.

이승만은 1945년 10월에 한국에 들어왔다. 중앙청에서 열린 귀국 환영 대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모습. 왼쪽에 앉아 있는 사람이 존 하지 사령관이다.

1945년 12월 말 우익의 반탁 집회. 친일파가 반탁 투쟁에 적극 가세해 매국노, 민족 반역자에서 갑자기 애국자로 둔갑했다.

1946년 1월 좌익의 모스크바3상회의 절대 지지 집회. 좌익은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 것이지, 신탁 통치 하나를 지지한 것이 아니었다.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임시정부 수립이었다.

동아일보 12월 27일 자 왜곡 보도 기사. 이날 동아일보는 1면 톱기사로 "소련은 신탁 통치 주장. ……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라는 제목 아래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 신탁 통치를 주장'한다고 보도했다.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미국과 소련이 개최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사진은 여운형이 미국 측 대표(위쪽), 소련 측 대표(아래쪽)와 함께 있는 모습이다.

1945년 '붉은 군대 환영 평양시민대회'에 참석한 김일성. 김일성은 1946년 1월 2일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다'고 발표한다.

미소공위를 지지하는 좌익들.

좌우 합작 시사만평. 극좌 세력과 극우 세력이 합작을 방해하는 것을 풍자하고 있다. 그림에서 악수하고 있는 인물은 여운형(왼쪽)과 김규식.

1947년 8월 3일 거행된 여운형 장례식 장면. 여운형은 12번 테러를 당하다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총격으로 암살되었다.

우익 3영수로 불리던 김규식, 이승만, 김구(왼쪽부터). 그중에서 김규식은 좌우 합작, 남북 협상만이 민족의 살길이라고 주장하며 의미 있는 활동을 펼쳤다.

남북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 북한 대표단. 오른쪽부터 김일성, 박헌영, 김원봉, 김달현, 허헌, 김두봉.

38선에 서 있는 김구. 김구는 '분단이 된다는 건 우리 몸을 두 동강 내는 것과 똑같다'고 이야기했다.

5 · 10선거 당시 모습. 선거 결과 소장파 전성시대가 출현해 1949년 6월 국회 프락치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진보적이고 민족적이던 소장파가 국회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된다.

38선은 미국이 1945년 8월 11일 '38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 양군이 점령하는 방식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안하면서 생겨났다. 결국 38선은 남북한을 가르는 분단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1945년 포츠담 회담에 참여한 클레멘트 애틀리 영국 수상,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공산당 서기장(왼쪽부터). 이 회담에서 트루먼과 스탈린은 한국 문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사실상 한국 문제는 포츠담 회담에서 논의되지 않았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보도한 신문 기사. 분단 정부 수립을 이야기한 대표적인 사례로 이승만의 정읍 발언(1946년 6월 3일)이 꼽힌다. 통일 정부 수립이 여의치 않으니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같은 것을 수립하자는 주장이었다.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위 당시 사진. 오른쪽부터 여운형, 김규식, 이묘목(영어 통역관), 말리크, 테렌티 스티코프(소련 측 대표), 허헌.

1948년 2월에 조선인민군이 창설되었다. 김일성 초상화 옆에 태극기가 휘날리는 것이 눈에 띤다.

김구 장례식. 그때 김구를 추도하는 인파는 미국 대사관 자료에 의하면 50만 명이었다고 한다. 그 인파는 우리 역사상 전무前無하고 상당히 오랫동안 후무後無한 인파였다.

1946년 10월 2일 항쟁이 일어난 대구의 모습. 10월항쟁은 자연 발생적이었으며 전국에 걸쳐 일어났다.

1948년 5월 처형을 기다리는 제주 주민들. 4 · 3사건은 제주도민 10명 중 1명꼴로 학살된 비극으로, 우리 역사 전체를 통틀어 한 지역에서 학살된 인원으로는 가장 많을 것이다.

제주 4 · 3사건 당시 무자비한 횡포를 부려 제주도민을 공포에 휩싸이게 한 서북청년회.

1948년 12월 유엔 총회에 파견된 대한민국 정부 대표단. 앞줄 왼쪽부터 조병옥, 장면, 장기영. 유엔은 대한민국을 5 · 10선거가 치러진 지역에 관할권을 갖는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했다.

1954년 북진 통일 궐기대회. 북진 통일은 이승만 정권과 반공 체제를 강화하는 데 마법과 같은 효력을 지녔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1921년 상해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승만 대통령 취임식. 이승만은 임시정부 대통령 시절 상해에는 거의 머물지 않고 미국에서 편안한 생활을 할 뿐이라는 비판을 참 많이 받았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 때의 모습.

1948년 7월 24일 이승만 대통령 취임식 장면.

최초의 대통령 직선제 선거였던 1952년 8월 5일 정부통령 선거에 사람들이 모여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 선거에서 다수의 국민이 잘 알지도 못했던 함태영이라는 노인이 부통령에 당선된다. 사진출처 : e영상역사관

왼쪽부터 이승만, 김구, 존 하지. 김구가 이승만과 상당히 오랫동안 협력한 까닭은 반탁 우익을 대단결시키기 위해서였다.

1952년 국회 부의장 시절의 조봉암(맨 오른쪽)의 모습. 나머지 두 사람은 윤치영과 신익희(가운데). 조봉암은 농지 개혁안을 만들기 위해 전국을 돌면서 농민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1950년 3월에 개정되어 공포된 농지개혁법.

북한의 토지 개혁 홍보 포스터. 토지 개혁은 북한의 지주들을 대거 월남하게 만들었다. 무상 몰수였을 뿐만 아니라 거주지를 바꾸게 했기 때문이다.

1951년 부산의 초등학교 학생들. 해방 후 한국 사회가 평준화되면서 교육열도 강해졌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들의 모습(1919년 10월 11일). 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뒷줄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임시 헌장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제로 함'이라고 공포했다.

1952년 8월 5일 정부통령 선거. 지지자들이 후보자의 대형 초상화를 들고 거리 유세를 벌이고 있다. 이때부터 부정 선거가 고약한 형태로 나타났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1946년 제1차 미소공위에 참여한 안재홍, 스티코프, 김구, 이승만(오른쪽부터). 안재홍은 제1차 미소공위가 휴회한 이후 좌우 합작 운동에 참여하면서 친일파 처단을 주장했다.

존 하지와 장택상. 장택상은 미군정의 수도경찰청 청장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친일 경찰들이 채용되었다.

1949년 반민특위 재판 광경.

반민특위로 호송되는 친일파들.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이 김연수 경성방직 사장, 그 뒤는 3 · 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최린.

박정희가 만주국 군관학교 생도로 받아달라며 혈서를 썼다는 '혈서 군관 지원'이란 제목의 만주신문(1939년 3월 31일 자) 박정희 관련 기사.

이광수는 1940년 매일신보에 실린 '창씨와 나'라는 글에서 창씨개명을 옹호했다. 이 글에서 이광수는 조선 민족의 장래를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했다고 강변했다. ⓒ민족문제연구소

10월항쟁 당시 경찰에 체포된 시민. 10월항쟁이 일어난 가장 큰 계기는 친일 경찰의 악질 행위였다.

연설 중인 김원봉의 모습. 김구와 더불어 항일 독립 운동의 상징적 존재인 김원봉은 왜 북한으로 갔을까. 1947년 초 친일 경찰의 대명사 격인 노덕술한테 고문당한 게 한 원인이 아니었을까.

1954년 함태영 부통령이 제3대 민의원 총선거에서 투표하고 있다. 이 선거는 대표적인 경찰 선거, 곤봉 선거로 꼽힌다. 그만큼 친일 경찰의 곤봉이 선거를 좌지우지했다. "겨레의 행복 한 표에 달렸다"는 표어가 인상적이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포항제철 공장을 시찰하고 있다. 친일파, 극우 반공 세력은 경제를 박정희 한 사람이 다 발전시킨 것처럼 주장한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1961년 박정희는 군사 정권을 승인받기 위해 미국으로 가 존 F. 케네디를 만났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2 · 26쿠데타에 실패한 군인들이 자대로 복귀하고 있다. 박정희는 일본의 2 · 26쿠데타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posted by 황영찬
2015. 8. 26. 10:46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79 상자들

 

이경림 시집

2005, 랜덤하우스중앙

 

 

시흥시대야도서관

EM047107

 

문예중앙시선 3

 

우리 시대의 불행을 이경림보다 더 지독한 말로 얽어 묶어놓기는 어려울 것이다. '상자'는 이경림이 새로 발명한 불행의 인식론이다. 여기서 '불행의'란 '불행에 대해서'라는 뜻이기도 하고 '인시하려고 애쓰지만 가망 없는'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가 상자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죽은 몸을 담고 함께 썩어갈 관에 그치지 않는다. 사방이 문이어서 도리어 사방이 벽인 이 저주받은 운명의 음모에 그치지 않는다. 모진 기억들을 담고 괴다 흐르다 화농하는 시간의 물컹하거나 단단한 덩어리에 그치지 않는다. 희망 없이 강제된 노역으로 천천히 닮아지면서 굳어지는, 또는 담은 것이 너무 많아서 결국 아무 것도 끄집어낼 수 없게 되어버린 이 육체의 가죽부대에 그치지 않는다. 무어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것들보다 먼저 달려와 눈앞을 가로막는 회한이나 절망감이라고 말해도 여전히 허룩하다. 그것들이 무엇이건 모두 상자의 형식을 가졌다는 것이 신기할 것도 없다. 오래되고 오래되어서, 끝내도 끝나지 않아서, 오히려 진부한 낯빛으로만 남은 그 불행들을 어느 구석에라도 쌓아두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먼저 알아서 상자가 되어야 한다. 아래에 눌린 것이 위의 것들을 견뎌내고, 가끔 어깨를 으쓱 올려 빛이 조금, 바람이 조금, 이경림의 말 같은 지독하고도 속도 빠른 말이 조금, 지나갈 틈을 만들기 위해서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을 골라서.                                       - 황현산(문학평론가)

 

이경림

1947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났다. 1989년 『문학과 비평』 봄호에 「굴욕의 땅에서」 외 9편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토씨찾기』『그곳에도 사거리는 있다』『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가 있고 엽편소설 『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 시평집 『울어라 내 안의 높고 낮은 파이프』 등을 펴냈다.

 

시인의 말

 

이렇게 흐물흐물한

쾨쾨한

진물 질질 흐르는

다 떨어진 상자들 뒤집어쓰고

이 캄캄한 상자 속을

언제까지 헤매야 합니까

아버지!

 

2005년 여름

이경림

 

|차례|

 

● 제1부

 

작가

아파트 뒤쪽 후미진 바위에

덤프트럭은 어디로 질주하는가

이 상자

저기, 저녁이

시금치 사러 갔다가

나, ……

고구마, 고구마들

물가에서

여우

나는 걸어간다

아침

동백 울타리

식탁 위에는 먹다 만 사과 한 개가 있다

저 쭈글쭈글한 주전자

어처구니 상자들

칠성당들

그러니까 나는

 

● 제2부

 

정육점

적멸

구덩이

이놈으 상자야 말 좀 해봐라

또……

오렌지 한 쪽

분홍빛

가방장사를 때려치운 시인

밑도…… 끝도…… 없다……

상자와 상자 사이

합장(合葬)

걸친, 엄마

나야……

청바지를 입은 소년이

다큐멘터리 개미들의 세계를 보다가 문득

머리카락 이야기

그래, 종로쯤에서

바람이 하도 모질게 부니

그곳에는

허공이 실성실성해서

 

● 제3부

 

폭우

시선

옷걸이

대칭

벌목하러 떠난 아버지를 찾아

꿈에

부엌

까마귀들

근(根)

구덩이

사실적인, 사실, 적인

나는 오늘 종일 잤다

외등

모텔 파라다이스

이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고양이! 고양이!

환(幻) 1

악몽 공장

석탄박물관

심심하고 심심한, 이,

한담(寒談)

아홉 개의 상자가 있는 에필로그

 

|작품 해설| 이경호(문학평론가)

'닫혀 있는 상자'의 내밀함

 

작가

- 상자들

 

아버지는 늘 책상머리에 앉아 원고를 쓰고 있었다 백열등 불빛 아래 원고지 빈 칸이 끝이 없었다 그는 일생 거기에다 자신을 쓰고 지웠다 그는 자신을 팔아 자식들의 신발을 사고 쌀을 샀다 그의 손으로 팔아치운 자신들이 얼마인지 자신도 몰랐다 이따금 그는 꿈에 자신들의 동창회에 다녀왔노라고 불길한 꿈이라고 이마를 찌푸렸다

어느 날 나는 팔려간 수천 명의 아버지들이 책상머리에 앉아 빈 원고지 칸에다 진짜 아버지를 써넣는 것을 보았다 그때 아버지의 등에는 희고 투명한 날개가 돋아 있었다

 

아파트 뒤쪽 후미진 바위에

- 상자들

 

들고양이처럼 누워서야 보였다

 

하늘은 얼마나 깊은 못인가

다만, 스러지기 위해 구름은 어떻게 소용돌이치는가

등짝만한 바위를 에워싸고 얼마나 많은 잡풀들이 살고 있는가

누군가 먹다 버린 과자 봉지에 코 박고 생쥐 같은 시간은 어디로 가는가

바람은 왜 자꾸 낮은 데로 몰아치는가

 

이렇게 천천히

빙글

돌며

우리는 어디로 흐르는가,

 

아파트 뒤쪽 후미진 바위 같은 것

얼마나 서늘한가

 

나, ……

- 상자들

 

나는 그때 가 전신주 밑에서 조개를 까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백발이 성성한 의 주름투성이 얼굴은 진흙빛이었다 몇백 년 그 일만 했는지 그 민첩한 손놀림이라니…… 나는 에게 이천 원을 주고 조개 한 움큼을 샀다 진흙빛 주름투성이 의 손이 덥석 나의 손에서 이천 원을 나꿔챘다 많이 파세요 나는 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아아 나는 그 전신주 아래서 몇 년이나 조개를 까 팔았을까?

 

나는 그때 역전에서 에게 소매치기 당했다 나의 뒤를 따라오던 는 나의 핸드백을 슬쩍 열고 지갑을 꺼냈다 나의 옆구리에 의 손이 닿았을 때 나는 모골이 송연했다 왜 남의 가방을 여는 거야 나가 소리치자 는 씩 웃으며 내 거니까 했다 나의 가방은 이미 의 손에 찢어져 속이 다 보였다 도둑이야 나가 소리쳤다 당황한 는 나의 얼굴을 면도날로 찍 긋고 줄행랑을 놓았다 그때 나의 서슬이 얼마나 청청했는지 누구도 를 잡을 염도 내지 못하였다 피투성이가 된 나는 찢어진 가방을 들고 가 줄행랑친 길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나는 흔적도 없었다 나

 

는 그때 무엇엔가 쫓기는 가 헐떡거리며 골목으로 뛰어드는 것을 보았다 누런 갈기를 휘날리며 희번덕거리던 는 어리둥절한 나를 스치고 쏜살같이 내달았다 나의 몸은 허공에서 나는 듯했다 가 스쳐가는 아주 잠깐 동안의 길 수많은 문들은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여기저기 겁에 질린 가 컹컹 짖어댔다 노오란 달이 어떤 파문 속에서 심하게 흔들렸다

 

아침

- 상자들

 

책상을 꼭 책상이라고

이불을 꼭 이불이라고

밥을 꼭 밥이라고

남편을 꼭 남편이라고

………………불러야 하는

슬픈 아침!

 

식구라고 불러야 하는 것들과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

끓는 찌개 속으로 연신 숟가락을 들이밀며

어떤 죄 없는 몸의 가운데 토막을 떼어 먹는다

멸치라고 불러야 하는 것들이 새우처럼 오그리고

올려다보는 앞에서

 

어떤 물컹한 뭉치들이

저녁 소 같은 것들이

 

식탁 위에는 먹다 만 사과 한 개가 있다

- 상자들

 

식탁 위에는 이빨 자국이 갈색으로 변한 먹다 만 사과 하나가 있다

사과의 살 속을 파고들었던 그 이빨은 어디 갔을까?

 

'모임이 있어 늦을 거야'

 

흰 메모지를 방석처럼 깔고 앉은 사과

(시계가 아홉시를 친다)

갈색 이빨 자국에 아홉시가 거무스름 들러붙는다

이빨은 지금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노래방이라도 갔는지 모른다

 

나는 갈색 이빨 자국이 난 식당을 보글보글 끓인다

갈색 이빨 자국이 난 노래방을 무치고

갈색 이빨 자국이 난 커피숍을 볶아놓고

저녁을 먹는다

 

갈색 이빨 자국이 난 사과가 물끄러미 나를 본다

나도 그를 본다

사과 속에 노래방이 보이고 커피숍이 보인다

한 무리의 이빨들이 사과를 먹는 것이 보인다

사과를 마시고 사과를 부르며 마침내 사과가 되는 것이 보인다

사과 속은 지금 사과를 먹은 사과들의 노래로 가득하다


저 쭈글쭈글한 주전자

- 상자들


언제부턴가 그는 뒷베란다 세탁기 그늘에 죽은 듯 있네

쭈글쭈글한 몸통을 잔뜩 기울이고 뚜껑이 열린 채

속에 물 한 방울 보이지 않는 그는 언제 주전자였나 싶으잖네


한때 나는 그를 보면 때없이 물이 먹고 싶었네

옆구리에 날아갈 듯 붙은 손잡이를 잡고 통통한 엉덩이를 슬쩍 기울이면

오므린 듯 벌어진 그의 입에서

오래 참은 노래처럼 물이 아니 그의 속이 쏟아졌었네


다시 보니 골뚜껑이 열린 줄도 모르고 아득히 주저앉은

그것의 속이 생각보다 아늑하네

그 안에 아무도 모르게 그가 키운 것들,

개미, 그리마, 이름 모를 털벌레…… 저런!

느닷없이 들여다보는 눈을 피해 줄행랑 중인 바퀴벌레 몇 마리!


둥근 벽 위 거무스름한 얼룩에 털투성이 발을 붙이고

떨어졌다간 오르고 떨어졌다간 다시 오르네


저 아애, 바닥에는 습기로 뭉쳐진 먼지들의 산이 있고

마른 웅덩이 같은 것도 있네

그곳에 언제 무슨 폭발 있었는지 작은 분화구 같은 것도 보이네

벌레들, 그 위를 혼곤히 오르내리며 한나절이 다 가네


이녘에선 여전히 천둥 치듯 세탁기가 돌고

소용돌이 속 한 바다가 거칠게 철썩거리네


그러니까 나는

- 상자들


그러니까 나는 그 상자들의 도시에서 한 상자와 연애하고 결혼하고

다시 쬐끄만 상자들을 낳았던 거죠


날새면 눈도 코도 귀도 없는 괴상자들이 막무가네 배달되어 왔죠

깨알만한 것들이, 집채만한 것들이

물렁물렁한 것들이, 딱딱한 것들이

필시 수세기를 달려왔을 그것들이

엄마 엄마 부르며 벌컥벌컥

문을 열어젖혔죠


그때 나는 매일 부엌에서 그것들의 먹이를 만드느라 바빴죠

그것들이 자라 낙타가 되고 치타가 되고 악어가 되고 물뱀이 되어

꼭 저 같은 것들을 뒤집어쓰고 어디론가 떠날 때까지

이런 봄날 하릴없이

잿빛 허공에 귀를 대고 있으니

목울대를 늘이고 귀신 소리로 우는 그것들의 울음이 들려요

그러면 문득

앞뜰을 뽀얗게 뒤집어쓰고 때 이른 목련이 솟구쳐 오르죠

글쎄 저 앙바틈한 나무 한 그루가 함뿍

희디흰 이파리 나풀거리는 여린 상자들을 매달고 달그락거리잖아요

낙타…… 치타…… 악어…… 물뱀……들이 가지마다 글쎄!


정육점

- 상자들


         보라!


저 핏빛 쇼케이스 속에

칸나처럼 피오오른 누군가의

찢어진

팔, 다리, 엉덩이, 가슴


적멸

- 상자들


헌 비닐하우스 속에서 살던 집에서 불났다

없는 지붕이,

훤히 보이던 하늘이, 순식간에


활활활활활활활활활활활활


타버린 뒤

소방관들이 만천하에 드러난 숯검댕이들을

집어올린다


숯검댕이 엄마, 숯검댕이 아빠,

영문 모르고 숯검댕이 된

아가……


둘!


밑도…… 끝도…… 없다……

- 상자들


밑도 끝도 없이 크고 투명한 저 칠판에 누가


         새가 날아간다


라고 쓰고 있다


        날개를 갸우뚱거리며 해를 똥처럼 달고 간다


라고 쓰고 있다 밑도 끝도 없이 크고 물렁하고 뿌연 저 칠판에 누가


       나-무-가-어-두-워-진-다-


라고 쓰고 있다


       나무속에누군가푸우-먹물을 불어넣는다

       나무가 검정비닐봉지처럼 부풀어 오른다


라고 쓰고 있다 밑도 끝도 없이 크고 물컹하고 희뿌옇고 어슴푸레한 저

칠판에 누군가


아이를업은여자가지나간다  검정가방을든남자가지나간다

      전봇대와쓰레기통사이로개한마리지나간다

           골목은끝이 없고  저끝에서  누군가울고  있다


라고 쓰고 있다 밑도 끝도 없이! 크고 물컹하고 희뿌옇고 어슴푸레하고

……한 저 칠판에 누군가 종일 썼다 지운다 뼈가 다 비치는 투명한 어떤 손이

종일 저 크고 물컹하고 희뿌옇고 어슴푸레한 저 칠판에……


합장(合葬)

- 상자들


나는 산소를 손질하고

동생은 낫으로 무덤 쪽으로 자꾸 그늘을 드리우는

가지들을 잘라낸다 잔가지들이 잘린 자리마다

가지 모양의 하늘이 들어앉는다

잠자리 한 쌍이 벗어놓은 옷 위에서 짝짓기하고 있다

미동도 않는다


그래,

딱 한 번 저런 사랑 본 적 있다


일곱 식구가 누운 단칸(單間)의 밤이었다.

선잠 속,

돌아눕다 문득 본 그것!


검은 바위 같았다 아니

어떤 밤의 도도록한 봉분 같았다

숨소리 하나 없었다


돌 속 같은

…………

…………만

있었다.


이윽고

깊은 물소리 같은

숨죽인 흐느낌 같은……

………


'탁'

성냥 긋는 소리……

그쪽의…… 찰나가…… 불현, 환하다

말고…… 다시……

칠흑!


진자줏빛 담뱃불이 별처럼 멀었다


나야……

- 상자들


살아 계실 때 엄마는 이따금 전화하셔서는

  -나야……

하시곤 한참 뜸 들이다가 이쪽에서 별말이 없으면

  -바쁘……구나……밥……먹……었……니?

물으셨다 띄엄띄엄,

낮게,

무슨 큰 실례라도 한 사람처럼 ……

  -무슨 일예요?

(왜 나는 그때 그렇게 퉁명스러웠을까?)

  -아냐……, 그냥, ……

싱겁게,

그저 밥 얘기만 얼버무리다가 끊은 그

전화…… 오늘,

내가 한다 태평양 건너 딸에게


  -나야, …… 밥…… 먹었니…… 밥 잘 챙겨……

밥, …… 밥, …… 밥, ……

하다가 그만 목이 매어

가만히 있는데 딸애는

  -어! 어! 어!

  -엄마, 나 지금 바빠, 나중에……

일방적으로 전화…… 끊긴다.

전화선같이 가느다란 무엇이

태평양의 이쪽 저쪽을 붙잡고 위태롭게 흔들리다

툭, 끊어진다


나, 문득 '밥'의 ㅂ 속에 오도마니 갇혀

창밖을 본다

비행기 한 대 꽁무니에 희고 가느다란 끈을 달고

허공의 시퍼런 중심을 건너고 있다

나무들은…… 쥐 죽은 듯!

있다


나, 문득 저 나무에게 전화하고 싶다

저 이파리 뒤의 어둠에게

그 뒤의 뒤의 뒤의……

꼭 나뭇잎만한 터널 속 어딘가로 문득 사라진 식구(食口)에게


  -나야아…… 엄마…… 나야아,

  아버지이, …… 나야아…… 나아


칭얼거리는 아이처럼 나 지금

저 돌맹이 같은 것들에 대고!


다큐멘터리 개미들의 세계를 보다가 문득

- 상자들


개미굴 속으로 들어간다

  →

       허리

       가 잘

          록한                                없다              입구가

       개미                      한점                             출구인

 들이                                   바람

            구멍                        있다

            마다                                  뻗어

        빽빽                                        사방

  하다                                    사지

살같이            가는         길들이




                          개미새끼만한나무들은미동도없이서있다문득

       그림자하나없는길이미친듯떨린다

                                    저    문

                              밖에

                                무슨

                             일이

                        있나

                           ?????????????????????????



                                       곡괭이를들고일터

              맞대고 싸우는 놈                         가는 놈

                      더듬이를                                  집

                                     가는 놈                      지키

                                비틀                                 는

출구가                          지고                               놈

         입구인                          등에                요리

                그길                            것을        하는

           위                               먹을             놈

     더듬이를                           간다               애  보는

  한껏 세운                        오고                    놈 칼 가는

        개미들 정신없이                              놈               

                                                       장작

                                                          패는

                                                   놈 낚시

다있도놈은죽듯는자서에섶길금따이놈는하


그래, 종로쯤에서

- 상자들


우리, 한번 만나자

몸도 마음도 없이

파고다공원 벤치에 앉아 시시덕거리는

늙은 바람처럼

매연으로 찌든 홍매화처럼


그래, 거기, 한 늙도 젊도 않은 아낙이

낮도깨비같이 화장을 하고

장고를 치고 있으리라

한 늙은이는 공중변소 뒤에서 울고,

세월에 표정을 다 내어준 인생들이

데스마스크처럼 앉아 있으리라


그것들 위로

사월! 사월! 사월!

아우성치며 벚꽃잎 회오리치리라

그래, 회오리치는 것들의 그 아득함으로


고단(孤單)을 쓰개치마처럼 뒤집어쓰고 헤매던 날들의 그 막막함으로

우리 청진동쯤에서 한번 만나자

네거리에 갇혀 한 백 년 입 다문 인경처럼

어느 해장국집 푹 삶긴 시래기처럼……

……그렇게

…………물끄러미……우리………


바람이 하도 모질게 부니

- 상자들


집이 운다


집이 우는 것은 지붕이 우는 것 지붕 위의

기왓장이 우는 것 지붕 밑의

서까래가 우는 것 그 밑에

사방 벽이 우는 것 벽 속의

철근이 우는 것 철근을 에워싸고 있는

모래가 우는 것 모래 속에 잠든

수만 리 바다가 우는 것


집이 우는 것은 기둥이 우는 것 기둥이 된

적송(赤松)이 우는 것 몇 겁(劫)의 허공을 걸어와 소나무가 된

늙은 햇살이 우는 것


집이 우는 것은 바닥이 우는 것 그 아래

구들장이 우는 것 그 아래,

주춧돌이 우는 것 그것들이 네 발로 잡고

발이 부르트도록 굴리는

지구가 우는 것!


이 칠흑 속, 지구가 운다.

어느 막막한 날 새벽,

불 꺼진 방에 우두커니 앉아

속울음 들키던 아버지처럼!


그곳에는

- 상자들


어머니, 그곳에는 아직도 노오란 속이 다 보이는 길쭉길쭉한 상자들만

하늘을 찌를 듯 서 있었습니다 풀 한 포기 없었습니다 저마다 속에 캄캄한

층계를 감춘 그것들이 납작 눌린 돌맹이 같은 수많은 방들을 가진 그것들이

남몰래 치르르르 물소리를 흘리며 정수리에서 맴도는 해를 제 몸의 사방

벼랑으로 밀어내리며 떨어져 내린 해의 부스러기에 덴 발을 묻고 있었습니다


하여, 더욱 깊고 어두워진 길들을 대낮에도 불을 켜고 달렸습니다 밤마다 나는

빠알간 경고등을 켠 실핏줄 같은 길들이 그것들을 친친 감고 캄캄한 하늘을 날아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머니, 그곳의 밤은 제 빛에 그림자마저 빼앗긴 그것들이 스스로 어둠이 되어

우두망찰 서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디선가 자꾸 아이가 울었습니다


허공이 실성실성해서

- 상자들


물끄러미 유리창으로 들여다보고 있어

쥐 죽은 듯 조용한 방

늙은 탁자와 늙은 티브이와 늙은 소파가 쭈그리고 앉아 있어


…………탁

누군가 소리치며 복도를 지나가


  세 살배기 막내동생의 임종이 있어

  아이의 검다 못해 푸르른 눈동자 속에 아주 잠깐

  들어앉은 쬐끄만 세상이 보여


멀쩡하던 하늘에서 주먹만한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해

순식간에 여기저기 고랑이 파이고 흙탕물이 넘칠 듯 쏟아져 내려

누군가의 생이 곤두박질치나봐


…………탁

누군가 아래층에서 소리치며 지나가


  외할아버지 돌아가신 날

  차비가 없어 장례에도 못 내려간 엄마가 넋 나간 듯 앉아

  있었어

  창백한 손으로 삯뜨개를 하고 있던 엄마

  백 년 전의 이야기야


나는 그때 허공이었어 허공에 둥둥 떠다니던

고봉밥이었어 원재네 국수집 구수한 멸치 국물이었어

동구 밖 팽나무에 걸려 있던 썩은 그네를 타고

한도 끝도 없이 날아올라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달빛이었어


세…………탁

누군가 끝없이 계단을 내려가


늙은 탁자와 늙은 티브이와 늙은……

쥐 죽은 듯 쭈그리고

있어 (있어!)


부엌

- 상자들


  그때 그녀는 거기 머무르는 허공들처럼 아주 조용한 환자였다 매일 반복되는 한가지 일만 빼고는

  일은 대개 새벽녘에 터졌다 내가 잠든 틈을 타 그녀는 조용히 공격해왔다

  그녀는 소리 없이 산소 호스를 뽑고 침대를 내려가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문 쪽으로 갔다 인기척에 놀란 내가 억지로 그녀를 데려와 다시 침대에 뉘며물었다

  - 엄마 어디 가시는 거예요?

  - 어딜 가긴, 부엌에 가지, 빨리 밥을 지어야지

  - 아이구 엄마두 여긴 병원이에요 부엌은 없어요

  - 무슨 소리냐 부엌이 없다니 그럼 넌 뭘로 도시락을 싸가고 너희 아버진 어떻게 아침을 드시니?

  - 엄만 지금 아파요. 이제 밥 따윈 안 해도 된다구요!

  - 큰일날 소리! 아버지 깨시기 전에 서둘러야지

  - 엄마! 여긴 병원이라구요 부엌은 없어요!

  - 얘야, 세상에! 부엌이 없는 곳이 어디 있니? 어디나 부엌은 있지 저기 보렴 부엌으로 나가는 문이 비스듬히 열렸잖니?

  - 저긴 부엌이 아니에요 복도예요

  - 그래? 언제 부엌이 복도가 되었단 말이냐? 밥하던 여자들은 다 어딜 가구?

  - 밖으로 나갔어뇨 엄마. 밥 ㄸ윈 이제 아무도 안 해요 보세요. 저기 줄줄이 걸어나가는 여자들을요

  - 깔깔깔 (그는 정말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

     얘야, 정말 어리석구나 저 복도를 지나 저 회색 문을 열고 나가면 더 큰 부엌이! 정말 큰 부엌이 있단다 저기 봐라 엄청나게 큰 밥솥을 걸고 여자들이 밥하는 것이 보이잖니? 된장 끓이는 냄새가 천지에 가득하구나

  - 엄마 제발 정신 차리세요. 여긴 병원이란 말예요

  - 계집애가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드는 게 아니란다 아버지 화나시겠다 어여 밥하러 가자 아이구 얘야, 숨이 이렇게 차서 어떻게 밥을 하니? (모기만한 소리로) 누가 부엌으로 가는 길에 저렇게 긴 복도를 만들었을까? 세상에! 별일도 다 있지 무슨 여자들이 저렇게 오래 걸어 부엌으로 갈까?

 

  엄마는 입술이 점점 파래지더니 까무러쳐서 오래 깨어나지 못했다 그때 나는 그녀가 기어이 그 긴 복도를 걸어 나가 엄청나게 큰 부엌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엄마의 청국장 냄새가 중환자실에 가득했다

 

까마귀들

- 상자들

 

나는 까마득 높은 곳으로부터 까마귀 한 마리가 떨어져 내리는 꿈을 꿨어요

다시 잠이 들었고 두 마리 까마귀가 떨어져 내리는 꿈을 꿨어요 다시

잠이 들었고 세 마리 까마귀가 떨어져 내리는 꿈을 꿨어요

네 마리, 다섯 마리, 여섯 마리…… 길이 온통 까마귀로 가득할 때까지 나는

다시 잠이 들고 꿈을 꿨어요 죽은 까마귀들 위로 차들이 흘러가고

땀에 절은 사람들이 지나갔어요 그 자리, 희거나 불그죽죽한 목련들이

순식간에 피고 졌어요 그때 나는 그 까마귀들이 그대로 목련으로 피었다가

졌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누군가 봄이 다 갔다고 수군거렸어요

 

근(根)

- 상자들

 

그는 이미 온몸의 근육과 세포를 다 동원해서 숨쉬고 있었다

상기된 두 볼과 충혈된 눈으로 가까스로 그는 말했다

 

- 오줌이 마렵구나

- 소변기를 대드릴게요 아버지

- 나는 누가 보면 소변을 못 보는데

 

그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썼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바람 빠진 풍선 같은 그의 근에다 소변기를 대니 피고름 같은 것이 간신히 떨어져 내렸다

 

나는 그때 그 근의 끝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 끝에서 떨어져 내린 피고름이 수세기를 흘러온 냇물이라는 걸 알았다

어릴 적, 나는 트레머리를 하고 피부가 유난히 흰 젊은 엄마가

그 물에 쌀을 씻어 안치고 상추를 씻어 정갈하게 밥상을 차리는 걸 보았다

그때 나는 그 냇물이 밤새 아이 웃음소리를 내며 깔깔깔 흘러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구덩이

(그들은 이혼을 이야기한다)

- 상자들

 

(캘리포니아 작은 도시의 한 식당에서 그녀는 말했다)

사는 게 얼마나 지긋지긋한 건지 이제 알 것………………

남자는 다 그렇단다 철딱서니라곤 없는 동물………………

난 이제 정말 지쳤………………………………………………

그래도 살다 보면 혹시…………………………………………

내게 다시 그런 말………………………………………………

아이는 어떻………………………………………………………

 

한 스패니시 여인은 지치고 찌든 얼굴로 혼자 밥을 먹고

서너 살 먹은 서양 계집아이는 지나치게 화려한 캔디를 빨고

아이스크림을 든 산만한 엉덩이가 지나간다

 

털투성이 자본들이 사방에서 어슬렁거린다

 

나도 한땐 그런 생각을 했단다…………………………………

그런데 왜 하지 못했…………………………………………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거짓말! 난 그게 얼마나 위선인지 알……………………!!!

 

바야흐로 그녀는 눈물로 식탁 위에 물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그는 식도가 터져나가는 통증에 시달리며 중얼거린다

 

얘야 캘리포니아에는 왜 비가 내리지 않니 저녁 바람은 왜 이리 차니

왜 젖은, 젖은 빨래가 순식간에 과자처럼 바스락거리니

스컹크는 왜 밤마다………………………………………

그 런 데…… 얘야 …… 도대체…… 왜……매일……새파란 하늘에

독수리 같은 까마귀가………………

 

사실적인, 사실, 적인

- 상자들

 

이제 아버지는 없다

아버지는 아버지 밖으로 사라졌다

본시, 세상은 아버지와 아버지,

또 아버지와 아버지들 사이에

사실적으로, 사실, 적으로 있었다

사실적인 아버지는 뜨거웠으나 사실, 적인 아버지는 얼음 같았다

나는 그런 아버지들 사이에서 사실적으로 아니,

사실, 적으로 갈팡질팡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죽었다

아버지는 아버지 이후로 스며든 것일까

아버지 이전으로 돌아간 것일까?

생각해보니 사실적도, 사실, 적도 아니었던 아버지!

 

아버지가 지고 나니 세상이 사실적으로 캄캄하다

나는 밤마다 사실적인 아버지를 헤맨다

누르면 쑥쑥 둘어가는 묵 같은 아버지, 검은 안개 같은 아버지,

아아 사실적이 아닌, 사실, 적도 아닌 아버지는

왜 이리 슬픈가?

나는 눈물을 흘리며 사실적인 아닌 아버지 품에

사실, 적이 아닌 딸이 되어 안긴다

 

나는 오늘 종일 잤다

- 상자들

 

나는 오늘 종일 잤다

 

  허공이 조금조금 갈라지고

  갈라진 틈새로 면돗날 같은 햇빛이 내리긋고

 

나는 잤다

 

  소나기가 쏟아지고 우박이 퍼붓고

  세월에 부관참시(剖棺斬屍)된 집들의 지붕이 비스듬이 흘러내리고

 

나는

 

  지붕 아래 한 방의 노오란 구들장 속으로 수세기 내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막무가내 내리덮이는 눈꺼풀 사이에서

  한 짐승과 사랑하고 결혼하고 반인반수(半人半獸)를 낳고,

  낳으면서 다만, 눈 뜨기 위하여

 

잤다

 

  벽지 위에는 주근깨투성이 산나리꽃이 킬킬킬 피어 오르고

  깨진 유리창으로 짐승들의 울부짖음이 날아들고

  청정 위에는 무언가 끊임없이 뚜벅,

  뚜벅 걸어가고 그 사이에서 나는

 

잤다

 

  졸린 생을 어쩌지 못해 잤다

  들숨 날숨이 뒤엉켜 캄캄해질 때까지 잤다

  멀건 대낮이 멀건 밤이 되고 멀건 밤이 멀건 아침이

  될 때까지 잤다

  팔 다리 엉덩이 배꼽이 몽땅 캄캄해질 때까지 잤다

  팔 다리 엉덩이 배꼽이 몽땅 환해질 때까지 잤다

  아아, 이 짧은 잠 속의

  기이인……………………………하루

 

모델 파라다이스

- 상자들

 

한 오십쯤 된 여자와 남자가 간다

 

수제(手製) 태양들이 줄지어 번쩍이는 밤,

사이사이, 창궐하는 어둠에 푹푹 빠지며,

 

자세히 보니 한 오백 살 된 계집아이와 사내아이가

묵은 느티나무 밑둥 같은 허리를 돌려 감고 간다

얼굴에 제 살아온 날의 지도를 펼쳐들고

무슨 음모처럼

컴컴한 골목으로 들어간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다는 당뇨(糖尿)의 늙은 사자와,

수 세기 전 누군가 채워준 녹슨 족쇄를 절그렁거리는

저 다섯 살 철부지 노파!

엽기적으로 푸르스름한 시대의 인광(燐光)이 잡아 끄는

모텔 파라다이스로

키득키득

울며

 

이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신생아실에서)

- 상자들

 

그가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얼마나 험한 길을 얼마나 오래 걸어왔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피투성이 주름투성이의 몸으로 조막만한 인류가

지금 막 도착해 울음을 터뜨렸다고 말할 수 있을 뿐

 

울음을 그친 그는

아련한 눈빛으로 형광등 불빛을 보다가

창 쪽을 보다가

희고 높다란 벽을 보다가

흰 옷에 흰 투구를 쓴 직립의 괴짐승들을 보고는 그만

무슨 입맛 돋우는 먹을거리라고 생각했는지

라일락빛 입술을 씰룩거리며 이리저리

혀를 내두르다가

문득

 

단풍잎 같은 손을 들어

가만가만

가까운 허공을

긁어보는 것이었는데

 

환(幻) 1

- 상자들

 

성묘하러 갔다 보았죠

당신 무덤 앞 상석 위에서 당신이

손바닥만한 사마귀 한 마리로 환(幻)

하시어

갓 태어난 연둣빛 아기 메뚜기 한 마리 잡숫고 계시는 거

 

미칠 듯 고요하던 그 식사!

 

발 아래론 시뻘건 개비름의 날짜들이 기어가구요

아카시아 개여뀌 엉겅퀴 호라지좆

온갖 못난 것들이 뒤엉킨 굴헝이 있었구요

더 멀리는

모르는 척 산 모퉁이를 돌아가는

능청맞은 낙동강이 있었구요

 

악몽 공장

- 상자들

 

그 공장이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멀리서 보면 그곳은 그림처럼 아름다워서 나는 하마터면 아,

하는 탄성을 입 밖으로 내보낼 뻔 하였다

 

누군가 말했다

그 속에 죽어도 꺼지지 않는 용광로가 있고 그 끝에서

펄펄 끓는 쇳물이 쏟아져 나와 불의 길을 만들고 있다고

사방에서 물고 물리는 기름투성이 기계들이 쩔꺽거리며

거대한 피댓줄을 돌리고 있다고

그 끝에 기막히게 정교한 세공품들이 쏟아진다고

주전자 모양으로, 커피잔 모양으로

쟁반 모양으로, 숟가락 모양으로

아집(我執) 모양으로, 고통(苦痛) 모양으로,

굴욕(屈辱) 모양으로

긍휼(矜恤) 모양으로

 

석탄박물관

- 상자들

 

박물관이 된 막장을 보았어

입구에 들어서면 은은하게 음악이 깔리고

- 어서 오십시오 **광업소 석탄박물관입니다

안내 방송이 들리고

잘 진열된 석탄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곳

 

얼마나 죽은 듯,

얼마나 오래,

얼마나 납작하게 엎드려야

소나무 전나무 고사리 속새 도라지 더덕 만삼 좀딱취 같은 것들이

돌이 되는지

얼마나 허리띠를 졸라매야

능구렁이 삼엽충 지네 전갈 같은 날짜들이

캄캄하게 석탄이 되는지

달걀만한 홀로그램으로 뜬 광부가 말하고 있었어

창백한 손가락을 들어 막장 쪽을 가리키며

 

저기! 사십오 도 각도로 곡괭이를 든 채 밀랍 인형이 되어버린

칠성이 아버지를 보라고

 

저기! 탄가루가 범벅인 도시락을 반쯤 남긴 채 홀로그램이 된

경식이 아버지도 있다고,

 

여기저기, 몰래 진폐(塵肺)의 가슴을 쥐어뜯으며

홀로그램이 되어가는 자들의 독거 막장이 보였어

 

곡괭이 같은 슬픔을 들쳐멘 쬐끄만 해의 광부들이

허공탄차에 실려 막장으로 쏟아지고 있었어

 

심심하고 심심한, 이,

- 상자들

 

가을날, 방바닥을 뒹굴뒹굴 굴러다니는, 이,

가을날, 등때기와 배때기가 붙은, 이,

가을날, 전화 한 통 오지 않는, 이,

가을날, 속 있는 것들을 다 속으로 들어가버린, 이,

가을날, 천장에서 쥐새끼 한 마리 찍찍거리지 않는, 이,

가을날

 

  위층에서 유령들이 수군거린다 징징 짠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 흐윽흐윽 흐흐흐

  흐느낌만 흐드러지는 이!

가을날,

  벽속으로 누군가 몰래 물을 들이붓는다

  물이 철근 기둥을 타고 하염없이 내려간다

  벽지에 스민다 집이 퉁퉁 불어터진다 흐물흐물 풀린다

 

더엉 더엉 더엉

처연하게

벽시계가 운다 치르르르르르

냉장고가 울고 텔레비전이 운다

가스레인지가, 신발장이, 탁자가, 의자가, 운다

(귀뚜라미는 울지 않는다)

 

심심하고 심심한,

이!……

 

 

 

 

posted by 황영찬
2015. 8. 25. 09:54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78 Auguste Rodin 오귀스트 로댕

 

지은이 | 라르스 뢰퍼 , 옮긴이 | 정연진

2008, 예경

 

 

시흥시대야도서관

SB040163

 

650.8

아887ㅇ  6

 

ART SPECIAL 6

 

Auguste Rodin | 오귀스트 로댕

 

"사람들은 내 조각 <걸어가는 사람>에 머리가 없다고 비판하지.

그런데, 도대체 걷는 데 왜 머리가 필요한 거요?"

- 오귀스트 로댕

 

당대의 평론가들은 로댕의 작품을 보고 '괴물'이라고

비난하며 그를 외톨이로 몰았다. 하지만 로댕은 이러한 비평

따위는 아랑곳없이 예술에 대한 사랑으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추구했고, 지금까지도 수많은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책은 로댕이 활동하던 19세기 말 매혹

적인 파리로부터 카미유 클로델과의 사랑을 비롯한 그의

굴곡 많은 삶, 그의 예술 세계, 영화 <카미유 클로델> 및

오늘날 우리 곁에 남아 있는 로댕에 대한 흔적 등

다양한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오귀스트 로댕 Auguste Rodin(1840~1917)

근대 조각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프랑스의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은 14살에 국립공예실기학교에 입학하면서 조각의 길에 들어선다. 1864년 살롱에 처음으로 <코가 깨진 사나이>를 출품했으나, 너무나 생생한 사실적인 묘사에 심사위원들이 거부감을 느껴 낙선되고 말았다. 이후 유럽 각지와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훗날 자신의 예술세계 기반을 다져갔다. 1878년 파리에 돌아온 로댕은 살롱에 <청동시대>를 출품하는데, 작품의 뛰어난 사실성으로 인해 살아 있는 모델에서 직접 석고형을 뜬 것이 아니냐는 비난을 받으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로댕은 <입맞춤>, <지옥의 문>, <생각하는 사람>, <칼레의 시민>, <발자크 상> 등 무수한 걸작들을 만들었다. 사실적 기법 아래서 인간의 희노애락과 치솟아 오르는 생명의 약동과 영혼까지 묘사한 로댕의 작품들은 근대 조각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1840-53

세계사

>> 1840년 영국에서 역사상 첫 우표인 '페니 블랙' 발행.

>> 1841년 홍콩, 영국령으로 귀속.

>> 1845년 아일랜드 대기근 발생.

>> 1850년 오노레 드 발자크 사망.

>> 1851년 런던에서 첫 만국박람회 개최, 허먼 멜빌의 《모비 딕》 출간.

 

로댕의 예술세계

>>1840년 11월 12일 프랑수아 오귀스트 로댕, 파리에서 출생.

>> 1848년부터는 기독교리형제학교, 1851년부터는 숙부가 운영하는 보배기숙학교에 다님.

1854-661

 

>> 1856년 지그문트 프로이트(위 사진) 출생.

>> 1857년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 출판, 저자와 출판자 모두 "미풍 양속을 해친 행위"로 인해 벌금형이 내려짐.

>> 1859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출간.

>> 1860년 에이브러햄 링컨이 미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됨.

 

>> 1854년 "프티트 에콜"에 입학.

>> 1858년 보자르 미술학교의 입학시험에 세 번 연속으로 낙방, 장식업자와 부조제작자의 조수로 일함.

 

1862-64

>> 1862년 10권으로 된 빅토르 위고의 장편소설 《레 미제라블》 출간.

>> 구스타프 클림트(위 사진) 출생.

>> 1863년 런던에서 역사상 첫 지하철 개통, 프랑스에서는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가 논란을 일으킴.

 

>> 1862년 누나 마리아 사망. 로댕, 성령회 수도원에 들어감.

>> 1863년 에마르 신부의 흉상 제작. 수도원 생활 청산.

>> 1864년부터 알베르-에르네스트 카리에-벨뢰즈에게 고용되어 일함. 같은 해에 로즈 뵈레와 만남.

 

1865-71

>> 1865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암살로 사망.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뮌헨에서 초연.

>> 1867년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 출간. 샤를 보들레르 사망.

>> 1871년 시카고 대화재 참사.

 

>> 1866년 아들 오귀스트 외젠 뵈레 출생.

>>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발발. 국립방위군에 자원.

>> 1871년 국립방위군에서 나쁜 시력으로 제대. 카리에-벨레즈(위 사진)를 따라 벨기에로 이주. 어머니 사망.

 

1872-76

>> 1872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개관.

>> 1873년 하인리히 슐리만이 트로이에서 '프리아모스의 보물' 발견.

>> 1875년 작가 토마스만 출생.

>> 1876년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전화기 발명(위 사진).

 

>> 1874년 브뤼셀에서 다수 건축 프로젝트에 참가.

>> 1875년과 1876년에 걸친 이탈리아 여행, 미켈란젤로의 예술 연구.

 

1877-80

>> 1879년 토마스 에디슨이 백열전등 발명.

>> 1880년 콘라드 두덴이 라이프치히에서 《독일어 정서법 사전》 출간. 화가인 프란츠 마르크와 에른스트 키르히너 출생.

 

>> 1877년 '주조 스캔들'로 구설수에 오름. <청동시대>가 모델을 그대로 본 떠 만든 작품이라 비판 받음.

>> 1880년 명예 회복과 동시에 <지옥의 문> 의뢰 받음.

 

1881-86

>> 1881년 루이 파스퇴르가 광견병 예방백신 개발.

>> 1883년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추간. 리하르트 바그너와 카를 마르크스 사망.

 

>> 1883년 카미유 클로델(위)과 만남. 아버지 사망.

>> 1884년 <칼레의 시민> 제작 의뢰 받음.

 

1887-92

 

>> 1888년 빈센트 반 고흐가 귀에 의문의 부상을 입음.

>> 1889년 파리에 물랭루즈 개장. 아돌프 히틀러 출생.

>> 1890년 화가 에곤 실레 출생. 빈센트 반 고흐 사망.

>> 1891년 러시아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 건설 시작.

 

>> 1887년 레종 도뇌르 슈발리에 훈장 받음.

>> 1888년 보들레르의 《악의 꽃》 삽화 그림.

>> 1889년 빅토르 위고 기념비 제작 의뢰 받음.

>> 1891년 오노레 드 발자크 기념비 제작 의뢰 받음.

>> 1892년 레종 도뇌르 오피시에 훈장 받음.

 

1893-98

 

 

>> 1893년 카를 마이(위)의 인디안 '위니투' 이야기 마지막 권 출간.

>> 1894년 니콜라이 2세가 러시아 마지막 황제로 재위. 파리 상젤리제에서 첫 자동차 전시회 개최.

>>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파리에서 첫 영화 상영.

>> 1896년 앙트완 앙리 베크렐이 방사능 발견.

 

>> 1895년 <칼레의 시민> 공개식.

>> 1897년 뫼동의 브리앙 저택에 정착함.

>> 1898년 카미유 클로델과 영원히 결별.

 

1899-1910

 

>> 1899년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출간. 에리히 캐스트너 출생.

>> 1906년 4월 18일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및 화재로 도시 황폐화(위).

>>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러일전쟁 종식 중재로 노벨평화상 수상.

 

>>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로댕을 위한 단독 전시관 마련.

>> 1902년 무용가 이사도라 던컨과 만남. 후에 로댕에게 고용될 작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만남.

>> 1904년 슈와쥘 공작 부인과 만남.

 

1911-17

>> 1911년 노르웨이인 로알 아문센(위)이 영국인 로버트 스코트를 간발의 차로 앞지르고 먼저 남극점에 도달. 스코트는 귀향길에 사망.

>>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 1915년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 발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출간.

 

>> 1913년 카미유 클로델, 정신병원에 수감됨.

>> 1916년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함.

>> 1917년 1월 29일 반려자 로즈 뵈레와 결혼. 2월 14일 로즈 뵈레 사망. 11월 17일 오귀스트 로댕 사망.

 

지은이 | 라르스 뢰퍼Lars Roper은 현재 베를린에 살고 있으며, 자유 기고작가, 여행기록 작가 및 전시회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잇다.

 

옮긴이 | 정연진은 독일 베를린 예술대학을 졸업하고 슈투트가르트 예술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국제회의통역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대학원에서 통번역학 박사과정 중에 있고, 동대학원 및 서강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차례

 

그때 그 시절

급변하는 사회

 

최고가 되기까지

예술가의 피

 

예술

조각 속에 깃든 우주

 

일용직 노동자가 꾼 천재의 꿈

 

사랑

헌신이냐 열정이냐

 

지금도 우리 곁에

세계 시민 곁의 로댕

 

그때 그 시절

 

 

"파리여,

소년을 유혹하는,

남자가슴을 뛰게 하는,

그리고 늙은이에게 위안을 주는 도시여!"

 

하인리히 하이네

 

 

"파리에는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 있소."

작곡가 프레데릭 쇼팽이 1831년에 남긴 말은 당시 파리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여기선 당신이 재미있어하든, 지루해하든, 웃든, 울든, 마음대로 해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소. 이 도시에 있는 수천 명이 또같은 짓을 하고 있기 때문이오. 다만, 방식만 조금씩 다를 뿐이지."

사진작가 샤를 마르빌은 주로 19세기 파리의 거리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사진은 오 마리 가(街).

 

마음껏 즐기자

파리 시민을 지루하게 만드는 것은 죄악이었다. 전쟁과 혁명으로 세월을 보냈던 파리 시민들이 원하는 것은 즐기고, 즐기고, 또 즐기는 것뿐이었다.

로댕은 신사복을 차려입고 파리의 거리를 누비며 구경거리를 찾아다니길 좋아했다. 로댕이 활동 초기에 전시회를 기획하는 데에는 귀스타브 카유보트의 재정적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동시대 미술가의 작품 수집을 즐겼던 카유보트 역시 화가였는데, 약 500점의 작품을 남겼다. 위 작품은 카유보트의 1877년 작(作)인 <파리의 거리>이다.

 

"파리라는 도시가 좋은 점이 뭔지 아나? 누가 여기서 어떻게 태어나서 살아가고 죽는지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점이지."

-오노레 드 발자크

샤를 보들레르(1821-67)의 상징주의적 작품들은 로댕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향하는 전환기에는 뢴트겐선 촬영 기술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 기술이 발명되어 화제가 되었다. 사진은 1896년 전신 촬영 사진으로, 아홉 개의 부분 사진을 모아 붙인 것이다.

자연 속에서 | 클로드 모네나 오귀스트 르누아르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은 화실에서 벗어나 야외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연의 풍경과 색채를 순간의 모습 그대로 화폭에 담으려 했다. 이는 화실에서라면 불가능했을 작업이었다. 그래서 인상주의 작품들은 풍경화가 주류를 이룬다. 그 대표작 중 하나인 르누아르의 <작은 배>.

상징주의자 | 스위스 출신 화가인 아르놀트 뵈클린은 회화를 통해 문학 작품이 주류를 이루던 상징주의에 합류했다. 상징주의는 상징을 통해 현실 세계를 표현하는 예술 사조이다. 뵈클린은 당대의 다른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동화 같은 풍경을 배경으로 고대 신화의 모티브를 담아내는 작업을 즐겼다. 그의 작품 <가을의 사색>은 보는 이로 하여금 명상에 잠기게 한다. 

 

최고가 되기까지

 

"명성을 얻기 부터

로댕외로운 사람이었다.

찾아온 명성

그를 더욱 외롭게 만들었을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건 괴물이야!"

 

아카데미 미술을 추종한 비평가들이 로댕의 작품을 평한 말이다. 로댕이 좌절할 때마다 다시 일어나 두 배로 노력한 것은 예술을 향한 그의 사랑 때문이었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1906년 해고되기까지 6개월간 로댕을 보좌한다.

 

작은 왕궁

로댕이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하자, 그를 흠모한 모델, 일꾼, 제자, 조수, 비서들이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어 작은 왕궁을 형성하였다. 로댕의 일거수일투족에 경외심을 표하던 이들은 로댕이 더욱 까다롭고 독선적으로 변해가는 데 일조하였다.

 

"우리가 삶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고, 또 일을 통해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잇기 때문이다."

- 오귀스트 로댕

<세례 요한>은 로댕에게 수상의 영광을 안겨준다.

희망 | 로댕의 초기 작품인 <코가 부러진 사나이>는 '비비'라는 이름의 가난한 이웃 사내를 모델로 삼았는데, 예술가들로부터 "고대의 아름다움을 간직했다"며 호평을 받았다. 로댕은 살롱전에서 큰 반향을 일으킬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출품했지만, 보수적인 성향의 살롱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을 외면해버린다.

공모전 | 1877년 말, 로댕은 드디어 자신만의 작품에 몰두할 수 있게 된다. 이때부터 로댕은 가능한 한 모든 공모전에 도전장을 던지기 시작한다. 작품 <무기를 들어라>는 파리 '데팡스'전 출품을 위해 1879년에 제작되었지만, 1922년 승전 기념비로 베르됭 시에 설치되면서 빛을 보게 되었다.

로댕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작품을 소개할 기회를 얻었다.

로댕이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알마 광장에 세운 '로댕관'

뫼동에 있는 '빌라 드 브리앙'

로댕의 저택 '오텔 비롱'의 사무실에 앉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 시인 릴케는 로댕의 괴팍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를 천재로 받들었다.

| 로댕의 작업실에 들어서면 손을 비롯한 다양한 인체 부위 조각품 수백 개가 바닥과 선반을 가득 메우고 있다. 로댕은 이 부분 조각품들을 작품을 위한 자투리가 아닌 완전한 예술품으로 다루고 애정을 쏟았다. 오늘날 세계적인 명작으로 꼽히는 작품 <대성당>에서 로댕은 두 개의 손을 조합하여 대성당의 건축양식을 형상화하였다.

참수 | 자신의 조각품에 대해 불완전하다는 비평이 쏟아지자, 로댕은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다시는 완전한 작품을 만들지 않으리라! 난 고대의 전통을 따르겠어!" 그리고 이를 실천에 옮긴 첫 작품이 바로 이 <걷고 있는 남자>라고 한다. 로댕에 관한 회고록에 따르면 이 작품은 <세례 요한>의 주조에서 목만 떼어낸 것이라 하고, 다른 기록에서는 이 작품이 <세례 요한>을 위한 습작이라는 주장도 있다.

무용수 | 조각가에게 있어서 무용수의 몸짓은 영감의 원천이자 도전의 대상이기도 하다. 로댕이 이러한 도전을 마다할 리가 없었다. 폴란드 출신의 러시아 발레 무용가이자 안무가인 바슬라브 니진스키를 표현한 조각품은 위대한 조각가와 위대한 무용가의 재능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다.

삼매경 | <명상> 혹은 <내면의 소리>로 불리는 이 조각품은 원래 <지옥의 문>을 구성하며 제작되었다. 무언가에 깊이 심취한 듯한 이 귀부인의 모습은 보들레르의 《악의 꽃》 삽화에도 등장한다. 로댕은 후에 빅토르 위고 기념비에 접목하는 과정에서 이 조각품의 양팔과 무릎을 잘라냈고, 그 모습을 더 마음에 들어 했다.

열쇠가 되는 인물 | <생각하는 사람>은 로댕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잇다. 원래 로댕의 계획은 단테의 모습을 형상화하여 <지옥의 문>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게 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조각품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사색하는 인간 혹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고뇌하는 창조자의 모습을 상징하는 작품이 되었다.

모욕 | 문호 발자크의 기념비 제작을 의뢰한 문인협회는 빠르게 완성하길 바라며 로댕을 더욱 독촉했다. 그러나 로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발자크> 상을 개인적으로 자신의 미학에 획을 긋는 작품으로 완성시키고자 했다. 이윽고 1898년 로댕의 완성품을 전달받은 문인협회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대문호 발자크를 "괴물로 만들었다"며 로댕을 비난했다.

 

예술

 

"예술이란 인내 정성을 요구하는 것

그리고 노동 없이는 불가능한 것."

 

오귀스트 로댕

 

평범하라고? 그럴 수는 없어!

 

로댕이 명성을 얻을 때까지 수십 년이 걸렸지만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평범함이다. 로댕의 눈에 평범한 자는 "예술을 창조하는 게 아니라 자연을 흉내 내기만 한다. 자연을 관찰만 할 뿐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가는 사물을 보는 법을 안다. 그리고 그의 눈과 마음이 함께 자연의 품 안에 깊이 안긴다."

 

"예술적 영감? 우습군! 그건 이성도, 의미도 없는 낡아빠진 낭만적 정서에 불과하네. 스무 살 청년이 벼락을 맞고는 갑자기 대리석을 깎아내서 후에 걸작이 될 작품을 위한 습작을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영감이라네. 상상력의 광란 상태이지! …… 그러나 이렇게 광기에 불타 만들어진 작품들은 아낌없이 부수어버려야 한다네."

- 오귀스트 로댕

로댕의 작품 중 늙은 여인을 모티브 삼은 작품은 <한때는 아름다웠던 투구 제작자의 아내>뿐이다.

<청동시대>의 모델이었던 오귀스트 네이. 로댕은 이 사진으로 자신의 작품이 저질스러운 복제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려 했다.

 

"사실 작업에 필요한 건 기술적 능력과 지식뿐이지만, 사람들이 믿고 싶어 하는 건 그게 아니야. 사람들은 현실적인 것보다는 특이한 것, 초인적인 것을 믿고 싶어 한다네. 물론, 예술적 영감에 비하면 기술과 지식, 시간, 고찰 같은 요소는 그다지 멋있어 보이지 않겠지. 그렇지만 이 요소들이야말로 예술을 만들어내는 기본 틀이라네."

- 오귀스트 로댕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얻은 건 로댕뿐만이 아니었다. (아래 : 로댕의 드로잉 <악마를 보고 놀라는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예를 들어 외젠 들라크루아는 1822년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를 통해 신곡의 한 장면을 연출한다.

로댕은 출판업자 폴 갈리마르의 의뢰로 1887년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초판의 삽화 작업을 맡는다.

로댕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면밀히 탐구하였고, 때로는 이를 위해 이탈리아에 가기도 했다. 위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승리>.

<발자크> 상을 완성하기 위해 로댕은 수많은 습작을 만들어냈는데, 그중에는 걸어가는 나체의 모습도 있었다.

로댕의 우주 |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온갖 희망을 버릴지어다." 단테의 문학에 묘사된 지옥의 문 위에 씌어진 문구이다. 희망을 버린 건 로댕의 추종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지옥의 문>이 로댕 생전에 완성되기는 어려워 보였기 때문이다. 로댕은 35년의 세월을 <지옥의 문>에 쏟아 넣었다. 결국 이 작품은 미완성으로 끝맺었지만, 어떤 작품보다도 로댕의 우주를 잘 나타내고 있다.

지옥편 | <떨어지는 사람>은 그나마 힘으로 <지옥의 문> 틀에 매달려 버티고 있다. 그러나 그도 머지않아 저 아래 있는 저주받은 자들 속으로 떨어질 것이다. 단테 알리게리가 《신곡》에서 묘사했듯이 말이다. 로댕의 작품 세계를 깊이 느끼고 싶다면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을 읽어보아야 한다.

이중성 | <입맞춤>에서 두 연인은 애정 깊은 입맞춤을 나누는 듯하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작품을 보면, 두 연인들이 상당한 거리를 두고 앉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간절한 당부 | 오르페우스는 뛰어난 음악 솜씨 덕택에 지하 세계로 간 연인 에우리디케를 다시 데려올 수 있게 되었다. 둘이 함께 이승으로 돌아가던 중, 에우리디케의 발걸음 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오르페우스는 걱정이 된 나머지 페르세포네의 당부를 잊고 그만 뒤를 돌아본다. 그러자 에우리디케는 죽음의 세계로 돌아가버린다.

새로운 시각 | 조각이라면 받침대가 있던 것이 당연시되던 당시에, 바닥에 조각을 놓는 것은 매우 특이한 방식이었다. 1885년 작품인 <순교자> 또한 그러한 양식을 띠고 있어서, 위에서 작품을 내려다보도록 하고 있다. 오늘날 이 작품은 결국 대부분의 박물관에서 받침대 위에 놓여 전시된다.

| 낭만파 문호 노발리스가 말했던 "사랑, 우주의 숨결"은 로댕의 1884년 작품 <영원한 봄>에 정확히 들어맞는 표현이다. 사랑에 빠져 꼭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젊은 연인의 모습은 얼어붙은 세상이 깨어나고 만물이 태동하는 계절인 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로댕은 1883년 동료 조각가인 쥘 달루의 흉상을 제작한다. 그러나 달루에게 <빅토르 위고>의 수주를 빼앗긴 후, 둘의 관계는 차갑게 식어버렸다.

작업실에서 자신의 작품에 둘러싸여 서 있는 로댕. 1902년 촬영.

로댕이 그린 에로틱한 드로잉에서 모델들은 자유분방한 포즈를 취한다. <달, 프시케>

민주주의 예술 | 칼레 시의 고위관리들은 여럿을 위한 기념비보다는 단 한 명의 영웅을 내세우고 싶어 했다. 반면, 로댕은 군상을 통해 공동의 시민의식을 표현하고자 했다. 로댕이 생각하기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의 요청에 응하여 칼레 시를 구하려 햇던 여섯 명의 자원자 모두가 영웅이었기 때문이다.

아이 | 대리석에서 뻗어 나온 <신의 손>은 혼돈 속에서 솟아올라 나와 이 세상을 향한다. 그리고 점토로 첫 인류를 빚어낸다. 로댕이 이 작품을 만든 과정도 이와 비슷했다. 로댕은 손 조각품 중 큰 작품을 골라서, 그 위에 적당한 크기의 누드 조각품을 담았다. 작업실 안에서 우주를 창조하듯 말이다.

천연 대리석 | 손은 로댕의 예술 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로댕은 <대성당>이나 <신의 손>처럼 <악마의 손>에서도 두 개의 기존 작품을 하나로 조립했다. 그러나 로댕이 너무 앞서 간다고 비판받은 것은 대상을 조합했기 때문이 아니라, 거친 천연 대리석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욕정 | 귀부인에서 신분 낮은 모델에 이르기까지 로댕은 여인을 사랑했을 뿐 아니라, 넘치는 욕정의 소유자였다. 여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위해 드로잉과 조각품들의 모델을 서주었고, 그의 애인이 되어주기도 했다.

느낌 | 1893년 작품 <트리톤과 네레이드>를 통해 로댕은 부분 조각품에 대한 철학을 완성하는 단계에 이른다. 남녀가 서로 뒤엉켜 한 점토에서 나와 형태를 이루는 모습 속에 로댕의 언어가 깃들어 있다.

위대한 자연 | <설교자 솔로몬> 혹은 <전도서>는 구약성경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로댕은 이 여인의 관능적인 포즈를 보고 전도서의 구절이 생각났을 것이다.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로댕은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책보다도 아름다운 게 자연이라오. 다만, 어떻게 읽어야 가장 아름다운지 알고 읽어야 하지."

 

 

"살아 있는 모든 생물

공기를 들이마시고, 영혼을 뱉어낸다.

나는 그러한 과정

묘사하고 싶은 것이다."

 

오귀스트 로댕

 

어느 문맹자의 위대한 발견

 

오귀스트 로댕이 그림만큼 좋아한 건 없었다. 부모와 교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로댕은 거의 문맹 수준이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로댕이 고집세다는 것이었는데, 그는 부모를 조른 끝에 무료 미술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허락을 받는다. 이곳, '프티 에콜'에서도 여전히 외톨이였던 로댕은 교정을 돌아다니다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을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

로댕은 미켈란젤로(위는 미켈란젤로의 작품 <모세>)에 대해 탐구한다. "나는 밤새도록 스케치를 했다. 미켈란젤로를 흉내 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미켈란젤로를 어떻게 이해했는지에 대한 생각을 그려낸 것이었다."

 

'부르주아 전담 예술가'

수년간 일용직으로 근근히 생활했던 로댕에게 드디어 행운이 찾아왔다. 조각가이자 상인인 알베르-에르네스트 카리에-벨뢰즈가 젊은 로댕의 재능을 간파하고, 그에게 고난이도의 장식 조각품 제작을 맡긴 것이다. 그러나 카리에-벨뢰즈는 아무리 중요한 일을 맡겨도 서명은 반드시 본인의 이름으로 하였다.

C. H. 오브리가 1862년에 촬영한 젊은 로댕의 모습에서 일생을 예술에 바치려는 굳은 의지가 보인다. 이러한 의지가 없었다면, 향후 그가 수십 년간 겪게 될 무명 시절과 혹독한 비평을 견뎌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생물이 이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나가려는 이유는 뭘까? 이토록 고통스러운데도 삶을 사랑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 이것은 지금도, 앞으로도 나를 괴롭히는 질문일 것이다."

 

- 오귀스트 로댕

로댕이 1860년에 그린 로렌 지방 출신의 어머니, 마리 셰페르.

피에르-쥘리앵 에마르 신부의 흉상을 만들고 있는 젊은날의 로댕, 1863년 사진.

굳게 닫힌 마음 | <웅크린 여인>은 원래 <지옥의 문> 가장자리 기둥에 삽입될 모티브로 제작되었으며, 청동조로 제작된 개별 작품으로 친다면 로댕의 작품 중에서도 매우 대담한 편이다.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듯한 여인의 자세가 주는 의미는 오늘날에도 밝혀지지 않았다.

최초의 여인 | <이브>는 자신이 벌거벗은 것과 죄를 범한 것을 알아차리고, 부끄러운 몸짓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피한다. 로댕은 이브를 유혹의 주체가 아닌, 인류 최초의 어머니로 묘사하려 했다. 로댕은 <이브>를 <지옥의 문> 오른편에 설치했다. <아담>은 건너편에 위치한다.

아름다운 실루엣 | <나는 아름답다>는 원래 <지옥의 문>에 설치되었던 두 점의 개별적인 작품인 <떨어지는 남자>와 <웅크린 여인>을 다시 조합한 것으로 새로운 예술적 시도를 선보인다. 이 작품의 두 남녀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지도 않고 매우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어우러져 있어, 두 오브제 간의 관계가 무엇인지 짐작하기 어렵게 만든다.

"영원한 터널" | 이 작품에서 <신의 전령 이리스>는 허벅지를 벌려, 화가 쿠르베가 말하는 '세상의 근원'을 드러내 보인다. 로댕은 반면 은밀한 부위를 가리켜 "영원한 터널" 혹은 "판 신의 재래"라고 부르곤 했다. 자신의 삶에서도 여인이라면 모두 사랑했던 로댕이기에, 그가 예술 세계에서도 여인의 모두를 표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낭만의 극치 : 로댕은 내연의 처인 로즈를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흉상 <미뇽>을 제작한다.

로댕의 작업실에서 일하고 있는 카미유 클로델(왼쪽)과 제시 립스콤. 1888년 사진.

로댕의 우주 : 1904-05년 사이에 촬영된 뫼동의 작업실.

저택 '오텔 비롱'의 오귀스트 로댕. 1915년 사진.

임종한 오귀스트 로댕.

죽음의 나락으로 |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에 나오는 '이카로스의 추락'은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리스 신화였고, 로댕도 이 이야기에 심취했다. 이카로스는 나무에 밀랍으로 깃털을 붙여 만든 날개를 달고 하늘 높이 올라간다. 그러나 너무 자만한 나머지 태양에 가까이 다가갔다가 밀랍이 녹아내리는 바람에 추락해서 죽는다.

우화 속 주인공 | 로댕의 부분 조각품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감상자에게 질문을 던지길 좋아했는데, 이는 고대 우화를 모티브로 삼은 작품들도 마찬가지였다. 황소의 머리와 신앙의 다리를 가진 미노타우로스가 저항하는 님프를 무릎에 앉히려는 광경은 고대 우화와도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다. 이 대리석 작품은 <목신과 님프> 혹은 <주피터 타우로스>라는 애칭으로도 불렸다.

추락한 천사 | <천사의 추락>은 샤를 보들레르의 문학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작품이다. 이처럼 두 여인의 인체가 어우러진 모습을 담은 작품은 <지옥의 문>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추락한 카리아티드>와 <아델레의 토르소>이다.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아 | 예술가인 피그말리온은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고, 온통 조각으로만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자신이 빚어낸 상아 여인상이 완성되자,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만다. 이를 알게 된 비너스는 여인상을 '갈라테아'라는 살아 있는 여인으로 둔갑시켜준다.

에로스와 프시케 | 로댕은 1905년에 <에로스와 프시케>를 만들면서 플레이우스가 2세기에 쓴 소설 《황금 당나귀》의 내용을 근거로 삼았다고 한다. 오늘날은 이 조각품의 제목이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주장도 없지 않다. 에로스의 상징인 날개나 활 등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

 

"여인이란 성스러운 존재이다."

 

오귀스트 로댕

 

기사도와 외설

 

로댕에게 있어 여인과 예술은 가장 위대한 두 가지 요소였다. 로댕은 여인들을 찬양하고 신성화했으며, 여인들을 위해 기사도 정신을 발휘했다. 반면 자신의 외설적인 드로잉을 통해서는 모델의 은밀한 부위를 그대로 보여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요란하게 치장하기 좋아했던 슈와젤 공작부인은 한때 로댕의 애인이었다.

 

"나는 자연을 미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자연과 동화되려는 것이다. 나는 자연이 나를 이끌고 가도록 맡긴다. 나는 인간 이외에는 대상으로 삼고 싶은 것이 없다. 인체가 만들어내는 형상은 나에게 다가와 나를 압도해 버린다. 나는 나체를 보면 끝없는 찬미와 깊은 경외심을 느낀다."

- 오귀스트 로댕

 

 

젊은 카미유 클로델과 오귀스트 로댕은 서로 싸우고, 배우고, 사랑하고, 경멸하고는, 또다시 사랑에 빠졌다. 로댕은 회상하길, 자신은 카미유에게 금을 찾는 법을 가르쳐주었으며, 그녀에게 "찾은 금은 그냥 가져도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스승이자 애인 : 카미유 클로델이 만든 오귀스트 로댕의 흉상. 1888년.

 

"로댕은 여인들의 얼굴을 아름다운 인체에 속한 일부분으로 보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여인들의 눈과 입은 단순히 얼굴에만 속한 모티브가 아니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로즈 뵈레는 로댕의 에로틱한 행각들을 묵묵히 견뎌낸다.

사랑의 굴레 | <영원한 우상>의 두 연인들 둘레에는 보이지 않는 굴레가 씌워져 있는 듯하다. 남성은 사랑하는 여성 앞에 무릎을 꿇고 가슴에 입맞춤하려 하고 잇다. 여인은 몸을 뒤로 젖혀 뿌리치고 싶지만, 어쩌지 못하는 자세이다. 두 연인은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떨어지지 못하는 괴로움 사이에서 불안한 공존을 유지하고 있다.

절망 | "잡으려 애쓸수록 더욱 잘 빠져나가기 마련"이라는 속담이 이만큼 잘 어울리는 작품도 없을 것이다. 두 남녀가 서로 등을 마주한 <달아나는 여인>은 단테의 《신곡》을 모티브로 삼은 것이다. 파울로가 아무리 잡으려 애써도 품 안에서 빠져나가는 프란체스카의 모습을 묘사했다.

거친 표면 | 카미유 클로델은 로댕의 작품 곳곳에 등장한다. 이 중 초기 작품인 <사색>에서 로댕은 카미유의 표정을 감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고 한다. 이에 반해, 카미유의 몸은 머리를 받치고 있는 무거운 대리석 덩어리일 뿐이다. 몸뚱이를 대신한 대리석의 거친 표면은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로댕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표출하고 있다.

시인의 찬미 | 시인 릴케는 젊은 시절에 <다나이드>를 보며 그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엎드려 쏟아져 내리는 머리카락…… 대리석을 따라 천천히, 길게 이어지는 등의 곡선, 흐느끼는 듯 돌 속에 파묻어버린 얼굴, 그리고 작은 소리로 생명을 꿈꾸는 꽃송이 같은 손……."

뫼동에서 로즈 뵈레와 함께 한 오귀스트 로댕. 1913년 가을.

과거의 그늘 속에 갇힌 카미유 클로델. 1929년 사진.

슈와젤 공작부인과의 내연 관계는 모든 이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사랑은 리듬을 타고 | 카미유 클로델의 작품인 <왈츠>는 포옹하듯 왈츠의 리듬에 맡긴 연인들을 그려낸다. 이 작품은 클로델이 로댕과 가장 친밀했던 1895년에 제작되었는데, 유켄트슈틸 양식을 따르면서도 남녀 모두 강인한 인체로 표현되어 전반적으로 역동성이 느껴진다.

영감의 보물창고 | 로댕은 오비디우스의 《변신》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기원후 1년경에 씌어진 이 시집은 당시 시대 상황을 로마와 그리스 신화에 빗대어 묘사했다. 특히 오비디우스는 인간 혹은 신이 동물이나 식물로 변형하는 신화 모티브에 심취했다.

아상블라주 | <이별>은 로댕이 즐겨 쓰던 조합 방식인 '아상블라주' 기법을 사용한 작품이다. 머리는 카미유 클로델의 얼굴을, 손은 <칼레의 시민>의 습작 조각을 사용한 듯하다. <이별>은 클로델이 작업실을 떠나던 시점인 1892년에 완성되었다.

남겨진 자 | <성숙>에서 젊은 여인인 클로델은 로댕과 결별한 후의 마음을 그려내 듯, 늙은 여인에게 이끌려가는 늙은 남성을 향해 애원하듯 팔을 뻗고 있다. 로댕은 클로델을 사랑했지만, 일생 동안 자신의 곁을 지킨 로즈를 떠나지 않았다.

 

지금도 우리 곁에

 

"나는 어제내일

잇는 다리이다."

 

브뤼노 뉘탱이 연출한 영화 <카미유 클로델>에서 오귀스트 로댕 역을 맡아 열연한 제라르 드파르디외.

 

시민 곁으로

 

<칼레의 시민>을 감상하고 싶은가? 그렇다고 반드시 칼레로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코펜하겐에 가도 같은 작품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도쿄가 더 가까운가? 아니면 워싱턴은? 로댕의 <칼레의 시민>은 더 이상 칼레에만 있지 않다. 원본을 토대로 12점이 주조되어 전 세계에 퍼져 있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사람>의 주조 역시 현재 전 세계에 퍼져 있다.

브리앙 저택 : 로댕의 "열정의 삶 속 한순간"(릴케)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로댕의 능력은 대리석을 통해 고통과 육욕을 표현하는 수준을 뛰어넘는다. …… 그는이루지 못한 욕망 때문에 흐르는 눈물을 보여주었고, 죽음의 허무한 나락으로 추락하는 인간을 보여주었다."

 

- 옥타브 미르보, 오귀스트 로댕에 관하여

쥘 E. 마스트바움의 로댕 소장품은 오늘날 필라델피아 로댕 미술관에서 감상할 수 있다.

거장의 유산 | 파리 로댕 미술관은 로댕이 죽기 전까지 수년간 기거했던 오텔 비롱에 위치하며, 로댕의 작품뿐 아니라 카미유 클로델의 작품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이 밖에도 빈센트 반 고흐, 오귀스트 르누아리, 외젠 카리에르 등의 유화를 비롯한 로댕의 소장품들도 전시되어 있다.

 

posted by 황영찬

2015-076 규원사화 揆園史話

 

북애 지음, 高東永 譯註

1993, 한뿌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7872

 

911.021

북63규

 

한민족의 역사

 

揆園史話

● 우리 나라 선비들이 남한산성의 부끄러움 때문에 밤낮 이를 갈면서, 임진왜란 때에 신통치 못한 도움을준 명나라에게 보답하고자 하니 한심하다.

고려이후 수백년동안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사신을 보내면서도 이를 조금도 한스럽게 여기지않다가 졸지에 만주를 원수로 여기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 본문에서 -

 

● 우리의 근거를 말살하려던 기도는 오랜세월동안 계속되었다. 그런 속에서 나라가 이어 올 수 있었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이제 조상의 문화유산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겨레의 뿌리를 확인하려는 기운이 세차게 일고 있다.

이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대세이다.

끝내 이름을 밝히지 못하고 목메어 탄식하며 이 책을 쓴 북애 노인의 높은 뜻을 기리며 지금 어디엔가에 깊숙히 감춰져 있을 옛 기록들을 찾아내어 잘못 인식된 우리의 국사가 하루속히 바로 잡혀지기를 바란다.

- 옮긴이의 말에서 -

 

목숨을 걸지 않았다면

쓸 수 없었다.

 

규원사화는 300여년 동안

금서로 묶여 있던 사서이다.

166755년에 저술된 이 책은

말살하려던 우리의 상고사를 40여권의

사서를 참고하여 바로잡은 책이다.

모화사상이 극에 달했던 때에

이런 글을 썼다는 것은 목숨을 걸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이 책은 우리 역사를 어떻게 인식하며

이해해야 할 것인가에 관하여

명확히 밝혀 놓았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더하고 있다.

 

차례

 

저자의 말

책을 옮기면서

 

조판기(肇判記)

태시기(太始記)

단군기(檀君記)

만   설(漫   說)

 

● 단군조선 역대임금

 

1세단군    왕   검(王   儉)    전2333(무진)즉위    93재위

2세단군    부   루(夫   婁)       2240(신축)           34

3세단군    가   륵(嘉   勒)       2206(을해)           51

4세단군    오   사(烏   斯)       2155(병인)           49

5세단군    구   을(丘   乙)       2106(을묘)           35

6세단군    달   문(達   門)       2071(경인)           32

7세단군    한   율(翰   栗)       2039(임술)           25

8세단군    우서한(于西翰)      2014(정해)            57

9세단군    아   술(阿   述)      1957(갑신)            28

10세단군  노   을(魯   乙)      1929(임자)            23

11세단군  도   해(道   奚)      1906(을해)            36

12세단군  아   한(阿   漢)      1870(신해)            27

13세단군  흘   달(屹   達)      1843(무인)            43

14세단군  고   불(古   弗)      1800(신유)            29

15세단군  벌   음(伐   音)      1771(경인)            32

16세단군  위   나(尉   那)      1738(계해)            18

17세단군  여   을(余   乙)      1720(신사)            63

18세단군  동   엄(冬   奄)      1657(갑신)            20

19세단군  구모소(緱牟蘇)     1637(갑신)            25

20세단군  고   홀(固   忽)      1612(기사)           11

21세단군  소   태(蘇   台)      1601(경진)           33

22세단군  색불루(索弗婁)     1568(계축)            17

23세단군  아   물(阿   勿)      1551(경오)            19

24세단군  연   나(延   那)      1532(기축)            13

25세단군  솔   나(率   那)      1519(임인)            16

26세단군  추   로(鄒   魯)      1503(무오)             9

27세단군  두   밀(豆   密)      1494(정묘)            45

28세단군  해   모(奚   牟)      1449(임자)            22

29세단군  마   휴(摩   休)      1427(갑술)             9

30세단군  나   휴(奈   休)      1418(계미)            53

31세단군  등   올(登   屼)      1365(병자)             6

 

32세단군  추   밀(鄒   密)      1359(임오)             8

 

33세단군  감   물(甘   勿)      1351(경인)             9

 

34세단군  오루문(奧婁門)      1342(기해)            20

35세단군  사   벌(沙   伐)       1322(기미)            11

 

36세단군  매   륵(買   勒)       1311(경오)            18

37세단군  마   물(麻   勿)       1293(무자)             8

 

38세단군  다   물(多   勿)       1285(병신)            19

39세단군  두   홀(豆   忽)       1266(을문)            28

40세단군  달   음(達   音)       1238(계미)            14

41세단군  음   차(音   次)       1224(정유)            19

 

42세단군  을우지(乙于支)       1205(병진)            9

 

43세단군  물   리(勿   理)        1196(을축)           15

 

44세단군  구   홀(丘   忽)        1181(경진)            7

 

45세단군  여   루(余   婁)        1174(정해)            5

 

46세단군  보   을(普   乙)        1169(임진)           11

 

47세단군  고열가(古列加)        1158(계묘)           30

 

                                             1128(계유)           1205년간

 

● 천부경(天符經)

 

일시무시일석삼극무진본

一始無始一三極無盡本

천일일지일이인일삼일적십거무궤화삼
天一一地一二人一三一積十鉅無匱

천이삼지이삼인이삼대삼합육생칠팔구운삼사성환오칠
天二三地二三人二三大合六生七八九三四成環五七

일묘연만왕만래용변불동본
一妙衍萬往萬來用變不動本

본심본태양앙명인중천지일
本心本太陽昻明人中天地一

일종무종일
一終無終一

 

● 삼일신고(三一神誥)

 

하늘(天)

 

천제께서 이르시기를

너희 무리들아, 푸르고 푸른 것이 하늘이 아니며

까마득한 것도 하늘이 아니다.

하늘은 형상과 바탕이 없고 시작과 끝이 없으며

상하와 사방이 없고 겉도 속도 다 비었으며

없는 곳이 없고 싸지 않는 것이 없느니라.

 

主若曰咨爾衆蒼蒼非天玄玄非天

주약왈자이중창창비천현현비천

天無形質無端倪無上下四方

천무형질무단예무상하사방

虛虛空空無不在無不容

허허공공무부재무불용

 

하느님(神)

 

하느님은 그 위에 더 없는 으뜸자리에 계시어

큰 덕과 큰 지혜와 큰 힘으로 하늘을 만드시고

수 없는 누리를 주관하시느니라.

또 만물을 창조하시되 티끌만한 것도 빠짐이 없으며

밝고도 신령하시어 감히 이름지어 헤아릴 수 없느니라.

음성과 기운으로 원하여 빌어도 친히 보이지 않으시나니

본성에서 그 씨를 구해보라

너희 머리 속에 늘 내려와 계시느니라.

 

在無上一位有大德大慧大力生天主無數世界

신재무상일위유대덕대혜대력생천주무수세계

造兟兟物纖塵無漏昭昭靈靈不敢名量

조신신물섬진무루소소영영불감명양

聲氣願禱絶親見自性求子降在爾腦

성기원도절친현자성구자항재이뇌

 

하늘나라(天宮)

 

하늘은 하느님의 나라니라.

거기에 하늘 궁궐이 있어 온갖 선으로 계단을 삼고

온갖 덕으로 문을 삼으니 하느님이 계시는 곳이니라.

모든 신령과 모든 밝은이들이 모시고 있어

크게 상서로우며 지극히 광명한 곳이니라.

오직 진리를 통달하고 공을 다 이룬 자라야

그 앞에 나아가 길이 쾌락을 얻으리라.

 

神國有天宮階萬善門萬德一神攸居

신국유천궁계만선문만덕일신유거

群靈諸哲護侍大吉祥大光明處

군령제철호시대길상대광명처

惟性通功完者永得快樂

유성통공완자영득쾌락

 

누리(世界)

 

너희는 총총히 널려 있는 저 별들을 보아라.

그 수가 끝이 없으며 크고 · 작고 · 밝고 · 어둡고 ·

괴롭고 · 즐거운 것이 같지 않느니라.

하느님이 여러 누리를 만드시고

태양계를 맡은 사자에게 7백 세계를 거느리게 하시니

너희 지구가 스스로 큰 것 같지만 한 알의 세계이니라.

속에 있는 불이 진동하여 터져 바다로 변하고

옮겨져 육지가 되면서 모든 형상을 이루게 되었느니라.

하느님께서 기운을 뿜어 밑을 싸주시고

햇빛과 열을 쪼이시니

걷고 · 날고 · 탈바꿈하고 · 헤엄치고 · 심는 동식물들이

번식하게 되었느니라.

爾觀森列星辰數無盡大小明暗苦樂不同

이관삼열성신수무진대소명암고락부동

一神世界勅日世界使者

일신조군세계칙일세계사자

轄七百世界爾地自大一丸世界

할칠백세계이지자대일환세계

中火震盪海幻陸遷乃成見象

중화진탕 해환육천 내성현상

呵氣包低煦日色熱行저化遊栽物繁殖

가기포저후일색열행저화유재물번식

 

참된길(眞理)

 

사람과 사물이 함께 하늘에서 삼진(三眞)을 받았으니

곧 성(性)과 명(命)과 정(精)이니라.

사람은 이것을 온전히 받으나 사물은 치우치게 받느니라.

진성(眞性)은 선하고 악한 것이 없어 상철(上哲)이 통하고

진명(眞命)은 맑고 흐린 것이 없어 중철(中哲)이 알고,

진정(眞精)은 후하고 박한 것이 없어

하철(下哲)이 간직할 수 있으니,

참으로 돌이키면 하느님과 하나가 되느니라.

무리들은 아득한 땅에 태어나면서부터

세가지 망령됨(三妄)이 뿌리내리나니

곧 마음(心) · 기(氣) · 몸(身)이니라.

마음(心)은 성(性)에 의하여 선과 악이 있는 것이나

선하면 복이 되고 악하면 화가 되느니라.

기(氣)는 명(命)에 의하여 맑고 흐림이 있는 것이니

맑으면 오래 살고 흐리면 일찍 죽느니라.

몸(身)은 정(精)에 의하여 후하고 박한 것이 있는 것이니,

후하면 귀하고 박하면 천하느니라.

참됨과 망령됨이 서로 맞서 세갈래 길을 만드나니

곧 느낌(感)과 숨쉼(息)과 닿음(觸)이니라.

이것이 열여덟 경지를 이루나니라.

느낌(感)에는

기쁨 · 두려움 · 슬픔 · 노여움 · 탐냄 · 싫어함이 있고

숨쉼(息)에는

향내나고 · 구리고 · 차고 · 덥고 · 건조하고 · 습함이 있고

닿음(觸)에는

소리 · 색깔 · 냄새 · 맛 · 음란 · 맞닿음이 있느니라.

무리들은 선하고 악함과 맑고 흐림과 후하고 박함이

서로 섞여 여러 경지의 길을 따라 마음대로 달리다가

나고 · 자라고 · 늙고 · 병들어 죽는 괴로움에 이르게 되느니라.

철인(哲人)은 느낌을 그치고(止感) 숨을 고르게 쉬며(調息)

닿음을 금하여(禁觸) 한 뜻으로 행하므로

망령된 것을 돌이켜 참에 이르러 신기(神機)를 발하게 되나니

진리를 통달하고 공적을 다 이루는 것이 이것이니라.

 

人物 同受三眞曰性命精全之偏之

인물동수삼진왈성명정전지편지

眞性無善惡上哲

진성무선악상철통

眞命無淸濁中哲

진명무청탁중철

眞精無厚薄下哲

진정무후박하철

返眞一神

반진일신

惟衆迷地三妄着根心氣身

유중미지삼망착근심기신

依性有善惡善福惡禍

의성유선악선복악화

依命有淸濁淸壽濁

의명유청탁청수탁요

依精有厚薄厚貴薄賤

의정유후박후귀박천

眞妄對作三途感息觸轉成十八境

진망대작삼도감식촉전성십팔경

喜懼哀怒貪厭芬란寒熱震濕觸聲色臭味淫抵

희구애노탐염분란한열진습성색추미음저

善惡淸濁厚薄相雜從境途任走生長肖病歿

선악청탁후박상잡종경도임주생장소병몰

止感 調息禁觸一意化行

지감조식금촉일의화행

返妄卽眞發大神機性通功完是

반망즉진 발대신기성통공완

 

 

 

posted by 황영찬

2015-074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

 

최하림 시집

2005, 랜덤하우스중앙

 

 

시흥시대야도서관

EM047113

 

문예중앙시선 1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5  우수문학도서

 

최하림 시인은 우리에게 메시지가 없는,

그러나 살아 움직이는 생생한 풍경들을 보여주고 있다.

시 속 풍경 한가운데 분명 주인공 자신이 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풍경의 주체가 되기보다는

그 풍경의 한 부분이 되어 계속해서 자신을 지워내고 있다.

우리 땅 여러 곳에 도사리고 있는 작고 아름다운 산하를

따스하게 불러모으기도 하고,

그 자연과 섞여 사는 올망졸망한 마을들의 이름까지

하나씩 독특한 색깔로 칠해주니

나 같은 떠돌이에게는 새삼 가슴 아련한 향수까지 느끼게 한다.

'지난 겨울의 기억'부터 시작하여

'빈 들'과 '잠든 새'와 '침묵의 겨울 풍경'으로 끝나는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온몸을 덮쳐오는 스산한 추위에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고,

때로 어깨를 웅크리며 두 손을 비벼대야만 했다.

홀로 떠난 우리 모두의 친구,

그 겨울 나그네의 내면을 마음으로 아끼면서,

한 줄 한 줄 극진한 정성으로 노래하고 이야기해주는

시인의 다정하고 오롯한 마음 안으로 문득 걸어들어가고 싶다.

- 마종기(시인)

 

최하림

1939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시단에 등장한 후 『우리들을 위하여』『작은 마을에서』『겨울 깊은 물소리』『속이 보이는 심연으로』『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풍경 뒤의 풍경』 등의 시집과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 미술에세이 『한국인의 멋』, 김수영 평전 『자유인의 초상』 등을 썼다.

시인의 말

 

북한강 가로 이사온 뒤에 쓴 시들을 묶는다.

많은 시들이 아직도 금강 상류에서 머물던 시기의 감회와,

감회 어린 이름들을 거느리고 있다.

이때의 '거느리고'는 '잊지 못하고'가 될 것이다.

나라는 사람은 늘 적응 속도가 느리다.

'가을이다' 말하고 나면 가을은 어느새 가버리고 없다.

 

2005년 봄

최하림

 

|차례|

 

● 제1부

지난 겨울 기억

서상(書床)

바람이 센 듯해서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쓴다

지리산 넘어 수십만 되새들이

마음의 그림자

우리가 멀리 떠나거나 잠이 든 새에

공중을 빙빙 돌며

징검다리

메밀밭에서는

공중으로 너풀너풀 날아간다

저녁 종소리 울린다

십일월이 지나는 산굽이에서

내린천을 지나

할머니들이 도란도란

 

● 제2부

나는 산 밑을 돌아간다

눈발이 날리다 말고

시월은

나는 금강천을 건너

오래된 우물

메아리

구석방

빗속으로

가을 광활

잠시, 생각의 순간에

두 여자가

별것도 없다고 투덜거리던 달도

K와 함께

그해 겨울에는

어디선지 한 소리가

해남 가는 길

 

● 제3부

기억할 만한 어느 저녁

봄날이 온다

가라앉은 밤

할머니들이 겨울배추를 다듬는다

북한강

오래오래 누워

나는, 지금

겨울 도장리

결빙(結氷)의 문장을 읽는다

시베리아 판화(版畵) 1

시베리아 판화(版畵) 2

시베리아 판화(版畵) 3

침묵 속으로

 

● 제4부

외몽고

한줄기 회오리 같은

구부러진 해안선으로

바다와 산을 넘어

저녁배에 오르다

겨울 단양행

밤의 다리

힘든 여름

소록도

촛불을 들고

시베리아 판화(版畵) 4

시베리아 판화(版畵) 5

눈과 강아지

바람과 웃음

언뜻언뜻 눈 내리고

 

|작품 해설| 김문주 / 풍경의 자연주의

 

서상(書床)

 

   시인 김혜겸이 서상(書床)을 하나 선물로 가지고 왔다 헐어낸 고가에서 나온 구멍 숭숭 뚫린 널빤지를 정성스레 다듬고 네 귀에 나무못을 박고 가운데 서랍을 단 것이었다. 도예가 이동욱이 만든 것이라고 했다 마루의 서쪽 벽면이 어울릴 것 같아 그 아래 두고 모시천을 깔고 작은 사발을 가만히 올려놓았다 흰 그늘 같은 것이 흐르는 듯했다 다음날 아침에 보니 어디로 갔는지 사발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검붉은 기가 도는 갈색 꽃병을 올려놓았다 그것 역시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시집을 한 권 올려놓았다 시집도 행방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서상(書床)은 저 홀로 제시간에 흘러가는 어둠을 보고 싶은 듯했다 그리고 여러 날들이 지나갔다 우수도 지나가고 청명도 지나갔다 한식이 내일모레라는 날 나는 시를 쓰려고 이층 서재에서 파지를 수십 장 버리다가 작파하고 한밤에 층계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려갔다 나는 마루로 내려갔다 놀랍게도 마루에는 물과 같은 시간이 넘실거리면서 가고 있었다 서상(書床)은 시간 위에 둥둥 떠가고 있었다

 

공중을 빙빙 돌며

 

공중을 빙빙돌며

새 한 마리 머뭇거리다가

버드나무 가지에 내려앉은다

순간 이파리들이 동요하고

미닫이문이 열렸다가 닫히면서

햇살이 물밀듯 들어온다

미닫이를 통해 보면

햇살을 받아들이는 건 새도

버드나무도 들녘도 아니고 그 아래

일파만파로 파동을 일으키며 흘러가는

가을 강과 가을의 기억들, 수초들

눈여겨보면 어린 날의 물거미들도

파동을 타고 어디로인지 이동해간다

모든 것들이 간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금 강을 본다

여전히 물거미들은 이동하고

구름이 모여드는지 산기슭에서는

나무들이 흔들리고 새는

버드나무 위에 있다 가을에는

물물이 빛나지 않는 것이

없다

 

결빙(結氷)의 문장을 읽는다

 

   결빙(結氷)의 문장을 읽는다 어느 시인이 북극에서 포획해 가지고 왔다는 극도로 단단하고 투명하기도 한, 이물질과도 같은, 나는 결빙(結氷)을 이해하려고 머리를 싸매고 읽는다 읽을수록 문장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해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고 바람도 없고 거리와 골목은 비좁고 마침내 폐쇄된다 나는 남은 문장을 버리고 집을 나선다 이상한 해방감이 감돌면서 나는 찬 기운이 도는 길을 지난다

 

메아리

 

   오래된 우물에 갔었지요 갈대숲에 가려 수시간을 헤맨 끝에 간신히 바위 아래 숨은 우물을 발견했습니다 마을 장로들의 말씀으로는 성호 이익(星湖李瀷) 선생께서 파셨다고도 하고 성호 문하에서 파셨다고도 하고 그보다 오래 전 사람들이 파셨다고도 했습니다 아무려면 어떻겠습니까마는 좌우지간 예사 우물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벌컥벌컥 물을 마신 다음 우리가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라도 있는 것이냐*고 가만히 물어보았습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라도…… 이유라도……

하고 메아리가 일었습니다 그와 함께 수면이 산산조각 깨어지고 얼굴이 달아났습니다 나는 놀래어 일어났지만 수면은 계속 파장을 일으키며 공중으로 퍼져가고 있었습니다

* 한 편의 시도 발표하지 않은 채 외롭게 스스로의 생을 마감한 여림의 유작시 한 구절. 나는 그를 가르친 적이 있다.

 

바람이 센 듯해서

 

바람이 조금 센 듯해서 커튼을 치려고

유리창 앞으로 가자 나무들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희끄무레한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어디서 본 듯

했습니다 그래 말했지요

나는 아침마다 설거지하고

아내를 하나로마트에 데려다 주고

중미산을 넘어 설악동을 달린다고

요즘에는 거의 매일 설거지하고

마트에 가고 설악동으로 달리는데

공기가 심하게 부풀면서 굵은 비가

쏟아지는 날은 조심조심 브레이크를 밟고

차를 길가에 세운다고 삶이

위태롭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나무들이 흔들리고 흙탕물이 쏟아지고

차를 세우려면 왠지 슬퍼진다고

시 또한 슬퍼진다고

 

내린천을 지나

 

내린천을 지나 인제로

미시령으로 돌아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깊은 잠에 떨어졌네

꿈도 꾸지 않았네

한줄기 별똥별도

흐르지 않았네

캄캄한 잠 속을 헤매고 헤맨 뒤

또르르또르르 물소리 같은 소리가

계속 귓바퀴를 울려 나는 일어났네

물소리 같은 소리가

집을 울리고

나무도 새도

울렸네

가을은

각각의

집으로 돌아가

울고 있었네

지붕 위로 떼 지어 어스름이 달렸네

검은 바위들이 어둠에 잠겼네

아무것도 나는 알 수 없었네

경(經) 한 장 읽을 수 없었네

 

구석방

 

   산 아래 이층 목조 건물은 긴 의자와 십여 개 유리창이 일제히 남으로 열려 있어 아침이면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밤에는 별들이 내려왔다 개들이 컹컹컹컹 짖어댔다 나는 고해성사실과도 같은 이층 구석방으로 들어가 옷자락을 여미고 숨었다 구석방은 어두웠다 건축가 김수 선생님은 그날 지은 죄를 고하고 사함을 받으라고 구석방을 마련한 모양이지만 나는 고해할 줄 몰랐다 고해를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죄의 대야에 두 발을 담그고 이따금씩 잠을 잤다 잠이 들면 새들이 소리없이 언덕을 넘어가고 언덕 아래로는 밤열차가 덜커덩 덜커덩 쇠바퀴를 굴리며 지나갔다 간간이 기적을 울리며 가기도 했다 나는 자다 말고 벌떡벌떡 일어나 층계를 타고 내려갔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우유를 꺼내 마셨다 토마토도 몇 개 베어먹었다 밤은 아직도 멀었는지 창밖으로는 새까맣게 어둠이 흘러갔고 나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의자는 딱딱했다 의자가 밤 속으로 흘러갔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의자는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지리산 넘어 수십만 돼새들이

 

   지리산 넘어 수십만 되새들이 까맣게 포물선을 그리며 돌고 돌다가 대숲으로 들어간다 순간 대숯은 일망무제와 같이 흔들리고, 흔들리면서 일어서고 소리지른다

   아아 숲 속에는

   숲의 집 속에는

   피 흘리던 날들이 있다

   유리를 뚫고 천길 벼랑을

   뛰어내린 뼈아픈 날들이 있다

   이한열과 박종철이 있다 김상진이

   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다

   짐으로 돌아가던 사람들이 있다 돌아보고

   돌아보라 대숲에는 아직도 십일월의 햇빛이 사금파리처럼 부서지면서 반짝이고 아침에는 무서리 내리고 지평선이 더욱 멀고 수십만 되새들이 지리산을 넘고 또 넘어간다 십일월에는 모든 것들이 물에도 젖지 않고 흘러내려간다 

 

가라앉은 밤

 

날이 저물오가면서

세상이 줄줄이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물거미와 장구벌레 같은 것들도 파장을 그으며

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므로

한없이 고통스럽고 두려운 우리는

그것이 한 개의 돌이거나 지평선에 드러누운

나무들이라 할지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밤낮으로 지나는 골목에서도 우리는

문득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본다

 

촛불을 들고

 

   사층 붉은 벽돌집에 미군들이 살았다 원래 천주교 사제관이었던 건물은 언제나 붉은 햇빛이 가득했고 미군들은 지프차를 타고 들락날락했다 아이들은 기브 미 쪼코렛 기브 미 쪼코렛 소리질렀다 때때로 미군들은 유리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초콜릿을 종이처럼 뿌렸다 아이들은 벌떼처럼 몰려갔다 날마다 거의 유사한 풍경이 반복되었다 어느 여름날 저녁 사층 화장실 문이 열리더니 물 젖은 블론드 머리의 여군이 한 웅큼 초콜릿을 던졌다 또 아이들은 벌떼처럼 몰려갔다 아무도 여군이 벌거벗고 목욕을 하고 있었는지 변을 보고 있었는지 생각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미군들은 떠나고 아이들도 소도시를 떠나갔다 소도시는 잡초가 무성해지고 꽃들이 피어 열매를 맺었다 빨간 열매를 먹으며 어느 날 미군 전차가 두 여중생을 깔아뭉개 죽인 사건이 돌연히 일어났다 시민들은 너도나도 촛불을 켜들고 광화문으로 시청 앞으로 모여들었다 나도 촛불을 들고 시청 앞으로 갔다 시민들은 양키 고 홈! 양키 고 홈! 외쳤다 나도 양키 고 홈! 외쳤다 그러자 기억에서 사라졌던 블론드 머리가 물에 젖은 채 미로의 비너스처럼 심연에서 솟아올랐다 나는 계속 양키 고 홈을 외치면서 블론드 머리에 끌려가고 있었다

 

십일월이 지나는 산굽이에서

 

십일월이 지나는 겨울의 굽이에서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으며 가지를 늘어뜨리고 골짜기는 입을 다문다

 

토사층 아래로 흘러가는 물도 소리가 없다 강 건너

 

편으로 한 사내가 제 일정을 살피며 가듯이 겨울은

 

둥지를 지나 징검다리를 서둘러 건너간다 시간들이

 

건너간다 시간들은 다리에 걸려 더러는 시체처럼

 

쌓이고 더러는 썩고 문드러져 떠내려간다 아들아

 

너는 저 시간들을 돌아보지 말아라 시간들은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아니다 시간들은 거기 그렇게 돌과 같이

 

나둥그러져 있을 뿐…… 시간의 배후에서는 밤이 일어나고

 

미로 같은 안개가 강을 덮는다 우리는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아직도 골짜기에서는 나무들이 기다리고 새들이 기다리고

 

바람이 숨을 죽인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오래도록 걸음을 멈추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멀리 떠나거나 잠이 든 새에

 

우리가 멀리 떠나거나 잠이 든 새에

안개는 물 위로 떠올라 강을

덮고 마을을 덮는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벌판 쪽으로 창이

하나 둘 열리고

나라들이 들어서고

저녁열차가 덜커덩덜커덩 언덕 아래로

쇠바퀴를 굴리며 지나간다 다시

안 보이는 벌판 쪽으로

창이 열리고

나라들이 들어서고

십일월과 십이월이 황사와도 같이

시계를 가리며 간다 모든 시간의

그림자들이 줄지어 간다 지상엔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기각했다는

허섭스레기 같은 소문들이 가득해지고

시청 앞 광장에는 오늘 밤도 촛불시위가

계속된다 붉은 띠를 두른 전사들이

무어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외친다

우리가 멀리 떠나거나 잠이 든 새에……

안개가 물 위로 떠올라 강을 덮고

마을을 덮는 새에……

 

힘든 여름

 

   땅은 달아오르고 시간은 더디 가고 새들은 징벌처럼 서 있다 참나무와 도토리나무도 서 있다 새들은 이 가지와 저 가지 새로 빠져나가는 여름을 보며 울고 있지만 그들이 왜 우는지 아무도 돌아보려 하지 않는다 참나무와 도토리나무도 보려 하지 않는다 산 아래 마을에서는 라디오가 사정없이 볼륨을 높여 이 강산 낙화유수를 부르고 아이들이 달려가고 해는 구부러져 간다 나는 변두리애서 변두리로 이동한다 나는 수릉리에서 문호리로 간다 수입리에서 노문리로 간다 오늘도 나는 이동을 반복하면서 여름을 견딘다 나무와 새들도 각각의 방식으로 여름을 견디며 보낸다

 

소록도 7

 

   크고 작은 보퉁이를 이고 철선(鐵船)을 내린 아낙들이 울퉁불퉁한 길을 돌아가노라면 오래된 교회가 나오고 길게 휘어진 해안길이 시작된다 아낙들은 종종걸음으로 간다 때마침 계절풍이 불어와 청솔가지들은 흔들리고 바다가 차오르고 새들이 후드득후드득 날아간다 벽안의 천사들이 병원 문을 닫고 들어간다 계절풍은 그 뒤로도 세차게 계속 불어와 소나무는 소나무들끼리 판잣집은 판잣집끼리 문둥이는 문둥이들끼리 서로 부여안고 밤을 보낸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소록도는 비극적인 징조를 점점 선명하게 보이면서 벼랑으로 굴러떨어진다 검은 바다가 소록도를 집어삼킨다

 

빗속으로

 

   연일 장맛비가 줄기차게 내렸다 냉장고는 텅텅 비고 쌀독도 바닥이 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빗줄기가 가늘어진 틈을 타서 차를 몰고 중미산을 넘어갔다 양평장으로 갔다 우리는 서둘러 여주쌀과 가지 시금치 배추 고추 간고등어 들을 사가지고 오던 길로 다시 달렸다 중미산을 넘고 정배리 계곡으로 들어서자 다시 빗줄기가 굵어지고 기슭을 타고 내려온 빗물이 아스팔트 위로 철철철 흘러넘쳤다 빗물을 타고 작고 푸른 산개구리들이 수백 마리 길 가득 뛰어올랐다 나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계속 빗물과 산개구리들은 소리지르며 뛰어오르고 어둠이 빠르게 지나갔다 시간은 여섯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나는 헤드라이트를 켰다 빗물과 산개구리들이 라이트 속으로 풀쩍풀쩍 뛰어올랐다 나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천천히 바퀴가 구르고 빗물과 산개구리들이 뛰어오르고 차는 속도를 내어 달렸다 빗물과 산개구리들은 차보다 빠르게, 차 앞에서, 뒤에서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이었다


외몽고


   외몽고 지도를 들여다보면 영하의 바람과 붉은 언덕과 유목민의 말떼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달려온다


   폭설과 한파가 몰아온다 저녁이 되어 지구의 표면은 흰 물결이 굽이치면서 흘러가다가 울란바토르에 이르러 눈부신 몸을 드러낸다 지구는 실오라기 하나 없는 몸으로 선을 긋는다


   (선에 의해 그려진 네 울타리는 얼마나 높고 순수한가)


   나는 울타리 가에 초소를 세우고 외몽고를 지킨다 나는 순수주의와 역사주의 사이에서 부딪치고 부서진다 나는 작아지고 또 작아진다


   외몽고는 유적지처럼 달리는 속성도 잊어버린 채 솟아올랐다가 어느 날 자취도 없이 사구로 사라진다 천년…… 또 천년…… 언덕과 초원은 수평선이 되어 펼쳐지고 말들이 앞발을 세우고 달려간다 불과 같은 소리들이 일어선다 해조음이 바다 끝에서 일어난다


   나는 시간이 부서지고 부서지던 날의 굉음을 들으며 사구를 넘어가는 해를 오늘도 하염없이 본다.


할머니들이 도란도란


   공기가 조금씩 조금씩 부풀어 오르고 역광을 받은 나무 이파리들이 검붉게 빛나고 할머니들의 머리도 빛난다 먼지를 흠뻑 뒤집어쓴 맨드라미들이 울타리 너머로 고개를 내민다 할머니들은 마당 깊은 집으로 간다 현관문을 밀고 들어간다 할머니들의 이야기 소리가 밤내 도란도란 울린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불이 환하게 창을 밝히고 밤벌레들이 날아들고 어디서 고라니들이 내려오는지 가랑잎 서걱거리는 소리 들린다


겨울 단양행


산 아래로 구름이 내려오면서

바람이 일고 소백산은 갈수록

깊어간다 영동을 떠난 지 벌써

다섯 시간째 차는 헉헉거리며

죽령고개를 넘어 터널을 빠져나간다

시간들이 파랗게 얼어 유리창에

달라붙는다 연화봉 아래

희방정사에서는 저녁 예불을 올리는지

범종 소리 떼엥떼엥 울고

고라니들이 소나무 숲 새로

걸음을 죽인다 나는 해남길에서

저러한 고라니들을 본 적이 있다

고라니들은 숨을 죽이고 있다

고라니들이 두렵다

어스름이 내리는 골짜기로

차는 숨가쁘게 내려간다

언뜻언뜻 표지판이 보인다

'단양 20킬로미터'

20이라는 글자가 또렷이

시야에 들어오다가 사라진다

나는 달린다 범종 소리 다시

사방을 울리고 소리들이 풍경을

거두어 가지고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