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황영찬

Tag

Notice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 total
  • today
  • yesterday

'2018/09'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8.09.14 2018-050 임금의 도시
2018. 9. 14. 13:58 내가 읽은 책들/2018년도

2018-050 임금의 도시

 

 

 

이기봉 지음

2017, 사회평론

 

대야도서관

SB128708

 

911.0028

이18ㅇ

 

서울의 풍경과 권위의 연출

 

너무나 익숙해서 보이지 않았던

우리 풍경의 재발견!

 

문명은 어떻게 권위를 시각화했는가?

서울의 3단계 풍경은 어떻게 권위를 연출해내는가?

풍경의 아름다움 너머 우리 풍경의 원리를 밝힌다!

 

"주변에서 쉽게 접하는 우리 풍경을 보고도 그 보편성과 특수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아름답다고만 했지 그 아름다움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인식되는지에 대해서는 간과했다."

 

이기봉

 

1967년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에서 태어나 수원 수성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지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 ·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2년 2월부터 2009년 3월까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책임연구원으로 일했으며, 그 후 현재까지 국립중앙도서관 학예연구사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고대도시 경주의 탄생』, 『지리학교실』, 『조선의 도시, 권위와 상징의 공간』, 『평민 김정호의 꿈』, 『조선의 지도 천재들』, 『근대를 들어올린 거인 김정호』, 『땅과 사람을 담은 우리 옛 지도』, 『슬픈 우리 땅이름』, 『천년의 길』 등이 있다.

 

차례

 

프롤로그 - 우리 풍경의 뿌리를 찾아서

 

1 임금의 도시, 서울의 탄생

    성씨가 다른 새로운 왕이 즉위하다 / 고려의 흔적을 지워라
    최후의 수단, 천도 / 천도를 둘러싼 임금과 신하의 줄다리기
    사는 곳이 곧 권력이다 / 명분을 가진 자가 모든 걸 가진다
    태조의 승리 / 마침내 태어난  '임금의 도시'

 

2 보이지 않는 서울의 풍경

    신도시 한양의 청사진 / 궁궐 앞에 주작대로 대신 시장이 있다?
    계승과 단절, 두 마리 토끼를 잡다 / 조선시대에 태평로는 왜 없었을까?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경복궁 / 과거 보러 가는 선비의 한양 구경
    시야를 통제하며 3단계 풍경을 만들다 / 나라의 근본, 종묘와 사직
    골육상쟁의 기억을 품은 창덕궁 / 세종의 효심, 창경궁
    왕기가 서린 경희궁 / 임금의 풍경을 연출하라

 

3 우리 전통건축물은 왜 작을까?

    위치가 바뀌면 풍경이 바뀐다 / 외국의 건축물은 왜 이리 거대한 걸까?
    하늘을 찌를 듯한 삼국시대의 탑들 / 권위를 시각화하는 또 다른 방법

 

4 한국 풍경의 기원을 찾아서

    서울 풍경은 유교 때문에 생긴 것일까? / 법흥왕, 죽음까지 혁신하다
    가장 오래된 3단계 풍경 / 풍수는 지배자를 위한 사상이었다
    명당은 살기 좋은 땅일까? / 지배와 피지배의 살풍경이 남아 있는 풍수
    땅의 논리인가, 하늘의 논리인가? / 하늘, 배경으로 밀려나다
    이데올로기의 풍경

 

5 장소가 만든 역사의 풍경

    거대도시 경주의 풍경 / 그 많던 높은 목탑들은 어디로 갔을까?
    낮은 석탑이 만든 감은사의 3단계 풍경 / 목탑에서 석탑으로
    궁예, 견훤, 왕건, 그리고 도시 삼국지 / 개성은 최초의 풍수 도시였다

 

6 임금과 공간의 정치학

    고려는 풍수 때문에 망한 걸까? / 위태로운 왕권과 훈요십조
    천도가 아니면 새 나라를?묘청의 서경천도운동 / 고려 최후의 시도
    풍수는 어떻게 한반도의 문화유전자가 되었나

 

7 방어력 없는 성곽의 비밀

    선조, 도성을 버리고 피난 가다 / 한양은 왜 무방비로 함락되었을까?
    명당은 방어에 유리할까? / 서울 성벽은 왜 해자가 없고, 낮을까?
    왜 높은 성벽을 만들지 않았을까?
    산이 드문 곳에는 높은 건물을 짓고, 산이 많은 곳에는 낮은 것을 만든다
    소 잃고 산성 고치기 / 산성의 나라가 된 조선

 

8 감시와 통제의 밤 풍경

    보신각의 종소리는 아름다웠을까? / 음모의 밤 / 야경꾼과 딱다기
    물시계는 누구를 위해 흘렀을까?

 

9 사라진 정원의 풍경

    우리나라에는 왜 정원이 별로 없을까? / 임금의 정원
    높고 웅장하게 솟은 경회루 / 조선의 미니멀리즘, 향원정
    골짜기에 숨겨진 절경, 창덕궁 후원 / 손가락이 아닌 달을 봐야 정원이 보인다
    외부로 펼쳐진 정원 / 가공하지 않은 자연 속 정원

 

에필로그 - 보이지 않는 우리 풍경을 어떻게 볼 것인가

 

 

태조 이성계의 어진

고려시대 홍건적과 왜적을 물리치며 불패의 무장으로서 명성을 쌓아가던 이성계는 자신을 따르는 강력한 사병세력을 기반으로 신진사대부의 지원을 받아 마침내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왕위에 오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왕조를 지키는 것이다. 새로 왕위에 오른 이성계에게는 새로운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해야 하는 과제가 놓여 있었다.

태조 왕건상

개성 현릉(왕건릉)에서 발견된 태조 왕건상. 머리에는 황제가 쓰는 통천관을 쓰고 있다. 불상 형식으로 제작된 왕건상은 불교의 나라였던 고려의 운명과 궤를 같이 했다. 원래 이 상은 개성 종묘에 봉안되어 제례에 쓰였는데, 이성계의 명에 의해 종묘와 함께 마전군으로 옮겨졌다가 유교예법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왕건릉에 매장되었다. 1992년 능 공사 중에 발견되어 북한의 국보로 지정되었다.

고려의 중심 개성

① 1720년쯤의 개성 모습(「광여도」). ② 공민왕릉. ③ 선죽교. 송악산을 등지고 세워진 개성은 제1의 명당이라고 불렸으며, 몽고의 침입 때문에 강화도로 옮긴 기간을 제외하고 왕건이 도읍한 이래 400여 년간 고려의 수도였다. 이성계가 모셨던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묘 등 도시 곳곳이 왕씨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또 이성계의 즉위를 반대하다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한 정몽주처럼 왕위를 찬탈한 이성계에 대한 반감이 상당했다. 이와 같이 개성은 여전히 고려의 도시여서 이성계에게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성계는 이를 극복하고 성공적인 왕조를 열기 위해 천도를 추진했다.

개성 첨성대와 서운관

고려시대 하늘을 관측했던 첨성대는 서운관에서 관리했다. 서운관은 하늘을 관측하고 절기를 측정하는 업무를 봤다. 서운관은 천문과 지리 현상을 모두 관장하고 그에 따른 길흉까지 점치는 기관이었다.고려가 쇠약해지면서 천도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질 때 큰 역할을 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도 존속하다가 세종 때에 관상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 1392

○ 1392.7.17 이성계 왕위 등극

 

    태조 : 왕조의 정당성과 왕권 강화를 위해서 천도가 필요하다. 한양으로 천도 시도.

    배극렴 · 조준 : 반대. 궁궐과 성곽을 짓지 않고 수도부터 옮기면 백성들이 곤란해질 것입니다.

 

● 1393

○ 1393.1.2

    태실중고사 권중화

    계룡산으로 천도 건의

 

    정요 : 왕비가 편치 못하고, 초적이 나타났으니

              (계룡산 행차를 중단해야 합니다).

    태조 : 내가 하지 못하면 후손들은 더욱 할 수 없을 것이다.

○ 1393.2.10

    계룡산 수도 건설 공사 시작

○ 1393.12.11

    하륜의 반대 상소로 계룡산 수도 이전 백지화

 

    하륜 : 계룡산은 국토에서 남쪽에 치우쳐 있고, 풍수상 '반드시 망할 땅'입니다.

              대신 무악을 천거합니다.

 

● 1394

○ 1394.8.11

    태조 무악 시찰. 서운관 관원과의 논쟁

 

    서운광 관원 : 무악은 좋지 못합니다. 개성에서 궁궐을 다시 짓는 게 좋습니다.

    태조 : 개성이 지기가 쇠했다고 상소를 올린 곳이 서운관이다. 다른 곳은 어디가 좋은가?

    서운관 관원 : 가장 좋은 명당은 개성이고, 그다음이 한양입니다.

○ 1394.8.12

    태조, 한양으로 행차

 

    태조 : 형세를 보니 도읍으로 삼을 만하다. 조운이 잘 통하고, 사방으로 거리가 균등해 나라 ㅇㄴ영에 편리할 것이다.

    무학대사 : 사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도읍이 될 만합니다.

    신하들 :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 한다면 한양이 좋습니다.

 

    정도전 : 국가의 흥망은 인간 세계에 있는 것이지 지기의 성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석린 : 무악은 수도로 삼기에 너무 좁습니다.

    이직 : 수도 이전은 하늘과 백성들을 설득시킨 후에 가능합니다.

○ 1394.8.24

    한양으로 천도 확정

○ 1394.10.25

    태조 한양으로 천도 선언

○ 1394.10.28

    한양에 도착하여 집무 시작

개성 성균관

공민왕 때 유학을 전담하게 된 성균관은 조선 건국의 핵심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을 대거 양성한다. 나라의 흥망이 풍수에 있지 않다고 말하는 정도전은 강경한 유학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정도전을 제외한 다른 개국공신들은 오랫동안 이어온 풍수를 판단 근거로 인정함으로써 신진사대부 역시 풍수의 영향력 안에 있음을 보여준다.

「한양도성도」

18세기 후반 편찬된 『여지도』에 수록된 지도로 시각적으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궁궐과 종묘사직, 산세, 간선도로 등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지도를 보면 한양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를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복궁

종묘

사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남대문(숭례문)

동대문(흥인지문)

북대문(숙정문)

수선전도로 본 한양의 도시 설계

한양은 북쪽으로는 북악산, 남쪽으로는 남산, 서쪽으로는 인왕산, 동쪽으로는 낙산에 둘러싸여 있고, 청계천이 한가운데로 지나가는 지형이다. 조선 건국 때 정궁으로 지어진 경복궁이 왼쪽에 자리잡고 있고, 종묘는 궁궐 왼쪽에 사직은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동대문과 서대문을 잇는 동서대로는 직선으로 곧게 나 있는 반면, 남대문에서 시전으로 이어지는 남대문로는 활처럼 휘어져 있다. 서대문은 일제에 의해 철거되어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육조거리 : 정무를 담당한 여섯 부서,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와 한성부 관청이 있었다.

 

운종가 :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이는 거리라는 의미로 국가에 물자를 보급하는 시전이 설치되어 중심 상업 지역 기능을 했다.

한양과 북경의 도시 구조 비교

두 도시 모두 『주례』「고공기」를 바탕으로 건설되었지만, 구조에서 확연한 차이를 볼 수 있다. 북경의 경우, 한눈에 보기에도 직사각형과 좌우대칭의 형태로 엄격하게 '좌묘우사', '전조후시'의 원리가 적용되어 있다. 자금성에서 천안문을 거쳐 외성 정문인 영정문까지 마차 아홉대가 나란히 지날 수 있는 대로가 직선으로 놓여 있다. 반면 한양의 경우 경복궁이 중앙에 위치해 있지 않고, 시장이 경복궁 앞에 위치해 '전조후시'의 원리가 지켜지지 않았다. 또한 경복궁과 남대문까지 직선대로를 만들지도 않았다.

숭례문(남대문)에서 광화문 가는 길

숭례문에서 경복궁으로 가기 위해서는 직선도로 대신 두 번에 걸쳐 꺾어지는 복잡한 길로 돌아가야 했다. 숭례문에서 출발해서 지금의 종로인 운종가에서 한번 꺽고, 육조거리 앞에서 다시 한 번 꺽어야 경복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1900년대 남대문로

1900년대 구한말 당시 남대문로의 모습. 임금이 사는 궁과 정문인 남대문까지의 길이 휘어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건물들 너머로 북악산이 보인다. 낮은 초가집과 기와집으로 이뤄진 풍경에서 북악산은 지금보다 훨씬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광화문광장(육조거리)에서 본 경복궁

어느 대문에서 어느 길로 와도 보이지 않던 경복궁이 육조거리로 들어서는 순간 북악산과 함께 시야에 펼쳐진다.

육조 거리에서 바라본 광화문 옛 풍경

고층건물이 즐비한 오늘날 과거의 광화문 풍경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현대의 흔적을 지우고 조상들이 보았을 권위의 풍경을 그려보아야만 우리 풍경을 이해할 수 있다.

종묘의 3단계 풍경

하늘에서 종묘를 내려보면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과 정전의 방향이 일치하지 않고 틀어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진입로에서부터 외대문과 보현봉을 일치시키기 위해 진입로가 정북이 아니라 서북북 방향을 향해 있다.

「동궐도」로 본 창덕궁 구조

정문과 정전이 일직선상에 위치한 일반적인 궁궐들과 달리 창덕궁은 특이하게 돈화문에서 인정전까지 진입로가 어긋나 있다. 돈화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고, 금천교를 건너 왼쪽으로 꺽어야만 정전인 인정전이 나온다. 이렇게 조성한 이유는 창덕궁 앞에 종묘가 있어서 3단계 풍경을 위한 진입로 조성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창덕궁의 독특한 궂는 3단계 풍경을 만들기 위한 노력의 결과이다.

 

돈화문 안의 보현봉

돈화문 앞에서 바라보면 문 틀 안에 보현봉이 한 폭의 그림처럼 자리잡고 있다. 서울이 산에 둘러싸인 지형이라 해도 이런 멋진 광경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돈화문을 보현봉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세웠으며 이 문이 엄밀한 구도 하에 건축되었음을 보여준다.

함춘원 방향에서 본 창경궁의 3단계 풍경

창경궁은 이미 지어진 종묘와 창덕궁 때문에 3단계 풍경을 연출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종묘와 창덕궁처럼 하늘산을 보현봉이 아닌 인왕산 왼편의 안산으로 잡아 창덕궁과 전혀 다른 새로운 풍경을 구현했다.

「동궐도」속 창덕궁과 전경

창덕궁과 창경궁은 쌍둥이처럼 바로 옆에 붙어 있다. 창덕궁은 정전, 정문, 진입로가 남향이지만 창경궁은 동향이다. 홍화문 앞부터 함춘원의 언덕이 시작되기 때문에 나중에 지어진 창경궁은 지형의 제약을 받았고, 그 결과 3단계 풍경의 하늘산도 바뀌었다.

경희궁의 3단계 풍경

경희궁 역시 창덕궁과 마찬가지로 숭정문 방향과 진입로를 조정해서 인왕산을 배경으로 하는 3단계 풍경을 구현하고 있다.

거리에 따른 북악산과 광화문 비율 변화

조선시대에 없었던 태평로에서 광화문을 바라보면 북악산에 비해 경복궁은 매우 작게 보인다. 궁궐이 초라하게 보인다는 것은 임금의 권위가 약화되는 일이다. 이 때문에 한양의 도시계획자들은 하늘 - 산 - 궁이라는 세 가지 요소의 적절한 비율을 유지하기 위해 숭례문에서 경복궁까지 직선도로를 만들지 않았다.

근정전의 앞뜰

근정전의 아름다운 자태도 유심히 살펴봐야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앞뜰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앞뜰의 규모에 따라 근정전의 크기와 느낌이 달라지기 때문에 너무 넓어서도 좁아서도 안 된다. 근정전의 크기에 비례해서 앞뜰도 조성되었다. 거대한 북악산이 근정전과 일치되어 근정전 뒤로 숨어들어 간 것처럼 보이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

5층 목조건물인 법주사의 팔상전은 상륜부의 높이까지 22.7m로 조선시대 가장 높은 건축물이다.

① 자금성 태화전과 ② 오사카성 천수각

자금성의 정전인 태화전은 3단 월대 때문에 시각적으로 경복궁 근정전보다 훨씬 거대하게 다가온다. 오사카성의 천수각 역시 높은 축대 위에 지어져 우뚝 솟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처럼 축대나 언덕 위를 이용해 건축물을 더욱 높게 느껴지게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세계의 거대건축물

① 태국의 왓아룬 사원. ② 티베트의 포탈라궁. ③ 이탈리아의 밀라노 대성당. ④ 인도의 타지마할. ⑤ 이집트의 피라미드. 아름다운 세계의 거대건축물의 감상은 잠시 뒤로 하고 그 너머를 살펴보자. 공통적으로 주변에 다른 높은 자연물 혹은 인공물이 없다. 우리에게 익숙한 건물 너머 우뚝 솟은 산이 있는 풍경은 세계적으로 보면 결코 보편적인 풍경이 아니다.

황룡사 복원도

황룡사 9층 목탑은 낮게 잡은 추정치조차 80m에 가까워서 23m를 넘지 못했던 조선시대 어떤 건축물과 비교해도 압도적인 높이를 자랑한다. 하지만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되어서 실제 모습이 어땠는지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남아 있지 않지만 삼국시대에는 높은 목탑들이 많이 건축되었다.

복원된 미륵사지 석탑

미륵사지는 목탑을 중앙에 두고 두 개의 석탑이 양옆에 세워졌다. 복원된 석탑의 높이는 27.7m이다. 중앙에 있었던 목탑은 50m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사는 황룡사와 같은 시기 세워졌는데 미륵사 목탑을 세웠던 백제의 기술자가 황룡사9층목탑에도 참여하였을 것이다.

인왕산에서 본 경복궁

인왕산 기슭에 위치한 배화여자대학교에서 내려다본 서울 시내 전경이다. 지금은 고층건물에 가려져 잇어 상단부만 보이지만 과거에는 경복궁 전체와 내부까지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경복궁처럼 다른 곳에서 궁궐 안을 조망할 수 있다는 것은 보편적인 모습이 아니다. 임금의 권위를 손상시킬 뿐 아니라 경비 등 안전상 문제까지 있다. 이처럼 궁궐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장소가 궁궐 가까이에 존재한다는 것은 여러 모로 일반적인 경우라고 할 수 없다.

종묘 정전

종묘는 유교사회였던 조선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유교에서 조상에 대한 제사만큼 중요한 의식은 없었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가장 먼저한 일 역시 종묘를 짓는 일이었다. 그래서 역대 왕과 왕비들의 신주를 모신 종묘는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로 여겨졌다. 신주가 늘어남에 따라 계속 증축하였고, 그 결과 지금처럼 옆으로 길다란 모습이 되었다.

경주 대릉원의 황남대총

고대로 갈수록 고분의 크기는 곧 지배자의 권력과 비례했다. 대릉원에는 왕과 왕비,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대형고분이 총 23기가 모여 있다. 이 고분들은 신라가 지방 지배를 강화하여 고대국가체제로 넘어가면서 지배층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알려준다. 이 중 황남대총은 대릉원의 고분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누구의 무덤인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두 개의 무덤으로 이루어져 잇으며 남분은 남자, 북분은 여자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네페리티티 흉상

아크나톤이 주도한 개혁의 영향을 받은 아마르나 예술의 대표작이다. 측면얼굴을 보여주는 기존 이집트 예술의 정통을 깨고 사실주의 묘사가 두드러진다. 아크나톤의 개혁이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 · 문화 · 사회 전반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준다. 관습법에서 율령의 통치체제로 발돋움하는 법흥왕 시기에도 사회 전 분야에서 변혁의 바람이 불었을 것이다.

감은사지 전경

감은사는 문무왕 수중릉으로 알려진 대왕바위 근처에 있다. 과거 감은사지의 진입로는 현재 논밭과 도로로 변해서 정면 방향을 제대로 감상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진입로를 지나쳐서 감은사지 오른쪽에 만들어진 주차장을 통해 절터로 올라가 탑을 감상하고 돌아간다. 감은사지뿐만 아니라 많은 유적지가 이렇게 주차장에서부터 관람을 시작하게끔 동선이 짜여 있다. 문화유산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문화재 자체도 중요하지만 문화재가 만들어내는 풍경을 감상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절의 건축자가 의도했던 대로 원해 정문 진입로에서부터 문화재를 감상하는 것이 중요하다.

탑평리 7층 석탑(위)과 신세동 7층 전탑(아래)

탑평리 7층 석탑은 남아 있는 신라 석탑 중 가장 높은 탑으로 높이가 14.5m이다. 신세동 7층탑은 벽돌로 쌓아올린 높이 17m의 전탑으로 현존하는  신라 탑 중 가장 높다. 거대목탑들이 많았던 삼국시대와 달리 통일신라 이후에는 10m 안팎의 3층 석탑이 주류가 되었다.

감은사지 3층 석탑

신라 최초의 3층 석탑인 감은사지 3층 석탑은 당시 경주시내에 세워졌던 높은 탑들에 비해 작은 규모이다. 경주를 벗어나 산이 배경에 놓이면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석가탑

감은사지 3층 석탑과 석가탑은 같은 3층 석탑이지만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초기 3층 석탑인 감은사지 3층 석탑은 화강암을 사용한 목탑 양식으로 육중함과 웅장함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 8세기 중반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불국사의 석가탑은 아름다운 비례와 날렵함을 구현했다.

① 철원 도성 복원도

궁예는 중국 도성을 본따 평야지대인 철원에 도성을 세움으로써 자신의 웅대한 이상을 담아냈다. 사각형의 도성과 직선으로 뻗은 도로망에서 알 수 있듯이 한양보다 중국의 도성과 훨씬 닮아 있다.

② 후백제의 견훤이 수도로 삼았던 동고산성

견훤의 궁궐이 있었던 동고산성은 평야지대인 철원과 달리 낮은 산정상에 자리를 잡고 있다. 삼국시대와 후삼국시대의 많은 도시들이 동고산성처럼 방어에 유리한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③ 위에서 내려다 본 경주 시가지 원경

천년고도 경주는 풍수적으로 명당과 거리가 멀다. 경주는 산과 멀리 떨어져서 하천을 낀 평야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평야지대에 입지한 도시가 세계적으로 꽤 있는 편이지만 방어에 좋은 구릉에 만들어진 도시가 더 많았다.

송악산을 등지고 있는 만월대터

왕건이 도읍한 개성은 여러모로 한양과 많이 닮아있다. 고려 제일의 명당으로 꼽힌 개성은 사실 궁궐이 들어서기에 지형이 고르지 못했는 데 높은 축대를 사용해 이를 해결하였다. 만월대 너머로 송악산이 보이면서 서울에서 볼 수 있는 3단계 풍경과 같은 구도임을 알 수 있다.

개성의 외성과 황성, 궁성의 구조

개성은 지형에 맞게 동서대로와 남북대로를 만들었다. 외성의 남대문인 희빈문에서 출발해서 남북대로를 따라 황성의 동문인 광화문을 서쪽으로 들어가 북쪽으로 꺾기까지 만월대의 정궁을 볼 수 없다. 지형부터 성과 도로망까지 한양과 유사한 구조임을 알 수 있다.

일월오봉도

용상 뒤에 놓는 병풍으로 해와 달은 왕과 왕비를 상징한다. 임금이 용상에 앉았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그림이다. 다양한 자연물을 이용해 임금의 권위를 표현했으며, 권위를 시각화하려는 싣의 일환이다.

도선국사

신라 말에 할동했던 도선은 풍수지리의 대가였다. 훈요십조에서 볼 수 잇듯이 왕건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고려시대 활발했던 임금풍수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 왕건(942년)

서경에서 3년마다 백일 이상 머무를 것(훈요십조)

호족 사이의 위태로운 왕권

 

● 숙종(1099년)

김위제의 주장에 따라 남경 재창설

여진의 성장

 

● 인종(1135년)

묘청의 난(서경 천도 운동)

이자겸의 난과 금나라의 성장

 

● 공민왕(1360년)

한양과 백악으로 시도

원나라의 쇠퇴와 외적 침입

 

부산진순절도

임진왜란의 시작을 알리는 왜군의 부산진 침략을 그린 기록화. 영조 때 화가 변박이 그렸다.

한양 도성 성곽

18km에 이르는 한양 성곽은 언뜻 보기에는 단단한 방어 준비로 보인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차례 큰 전쟁에서 서울의 성곽은 전투 한번 제대로 치루지 않고 함락됐다.

콘스탄티노플 성벽과 단면도

동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명성이 높았다. 방어를 위해 해자와 삼중의 성벽을 갖추고 있었으며 성벽 높이는 10미터가 넘었다. 성벽을 넘기 위해 다양한 공성도구가 사용되었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그러나 1453년 콘스탄티노플은 20톤 무게의 초대형 우르반 대포를 동원하고 방어군보다 열 배가 넘는 군사를 동원한 오스만 제국에 50일 넘는 공방전 끝에 마침내 함락된다.

옹성이 축조된 흥인지문 성벽

동대문(흥인지문)은 4대문 중 유일하게 옹성이 축조되어 있지만 실제 방어를 위해서가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가 강했다. 풍수에서 볼 때 서울은 동쪽이 약해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이름에 之를 넣어서 4자로 짓고, 옹성을 쌓았다.

중국의 산해관 성벽

만리장성 동쪽 끝에 위치한 산해관은 천하제일관이라는 현판대로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던 청나라조차 넘지 못한 요새였다. 높이 14m에 달하는 성벽을 자랑하는 산해관을 청나라는 무력으로는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의 협력으로 간신히 통과할 수 있었다.

오사카성의 해자

넓은 해자는 성벽과 함께 평지에 위치한 성의 방어력을 높이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해자는 성벽으로의 접근성과 기동성을 떨어뜨리는데,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너비와 깊이를 갖추어야 한다.

풍납토성

풍남토성은 발굴 초기에는 도성을 방어하는 작은 토성 정도로 여겨졌다. 그러나 추가 발굴조사를 통해 많은 유물과 함께 10m가 넘는 토성과 해자가 발견되면서 거대한 규모가 드러났다. 현재는 백제의 수도 위례성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구려가 쌓았던 백암산성

중국과 잦은 전투를 벌여야 했던 고구려성은 높은 성벽과 치 같은 방어력을 높이는 구조로 축조되었고, 중국 요령성의 백암산성처럼 지형을 최대한 활용해 지어졌다.

경천사지 10층 석탑

충목왕 때 세워진 경천사지 10층 석탑은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화려하고 장식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원나라의 부마국이었던 고려는 사회 전반에서 원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이런 상항에서도 풍수의 전통은 뿌리 깊게 자리 잡아 풍수에서 파생된 건축원리가 조선까지 이어진다.

한양도성과 동일한 도시 원리의 낙안읍성

낙안읍성의 구조는 한양과 동일한 도시원리로 그대로 옮겨놓았다. 남문 밖 진입로에서부터 걸어오면 금전산이 남문 위로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읍성 안으로 들어서면 읍성에서 궁의 역할을 하는 동헌이 보이지 않는다. T자로 난 대로의 왼쪽으로 꺽어 가다가 동헌 앞에서 비로소 오른쪽을 돌아보면 동헌과 금전산이 하나처럼 펼쳐진 풍경을 볼 수 있다.

남한산성의 성벽

남한산성의 성벽 높이는 평지성에 비해 높지 않지만 산비탈 자체가 성벽 역할을 하면서 높은 방어력을 가지게 해준다.

남한산성 행궁

병자호란으로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조선은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산성 내부에 행궁을 지으면서 장기항전을 준비했다.

제야의 종 행사

오늘날 제야의 종 행사는 지나간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축하하는 송구영신의 상징적인 행사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조선시대 백성들에게 보신각종은 지금보다 훨씬 권위적인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보신각종은 통금 사이렌처럼 출입을 제한하고 시간을 통제하기 위한 기준이었다.

보신각

보신각은 종로 통운교에 설치되어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렸다. 매일 오전 4시에 33번을 타종하고 오후 10시에 28번 타종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때 복구했으며, 현재의 보신각종은 세조 때 주조한 원각사종을 사용하고 있다.

자격루 모형

현재 덕수궁에 있는 자격루는 물받이통과 항아리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장영실이 만들었던 자격루는 일정 시간이 되면 자동으로 종이 치게 설계된 정교하게 만들어진 기계장치였다.

세종 때 만들어진 다양한 발명품

위에서부터 앙부일구, 측우기, 혼천의이다. 조선시대에는 자연현상을 관찰하고 측정하기 위한 다양한 도구가 발명되었다. 발명품들의 가치도 중요하지만 왜 이러한 발명품들이 만들어졌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러한 발명품들은 예측할 수 없던 날씨와 시간과 같은 자연현상을 통제의 영역으로 편입시키고자 한 노력의 일환이다.

웅장한 경회루 전경

경회루는 여러모로 독특한 정원이다. 규모에서 경회루는 중국과 일본의 일반적인 누각보다 훨씬 더 큰 규모를 자랑한다. 또 연못과 연못 안의 섬 모두 사각형의 단순한 구조를 띠고 있는 점 역시 특이하다. 정원을 만들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담을 두르고 나무를 심어 시야를 막고 분리된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경회루 왼쪽으로 보이는 인왕산에서 알 수 있듯이 경회루는 탁 트인 시야를 보여준다.

동양의 대표적 정원들의 사계절

① 졸정원, ② 퇴사원, ③ 고락쿠엔, ④ 금각사. 이 정원들은 연못과 누각을 만들고, 수석 등을 배치해서 장소마다 , 또 같은 장소에서도 시선에 따라, 그리고 시간과 계절에 따라 다른 풍광을 보여준다. 동양의 이상적인 정원은 분리된 공간에 무릉도원의 이상적 모습을 담고자 했다.

성락원

성락원은 철종 때 이조판서 심상응의 별장이었다. 중국과 일본의 정원과 마찬가지로 공간을 세분화해서 시시각각 달라지는 풍경을 구현하고 물줄기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주었다.

경회루 전경

자연경관에 대한 시각적 경험을 극대화하기 위해 경회루의 크기는 커졌고, 대신 자연과 대비되는 인공연못을 최대한 단순하게 만들었다.

경회루 누각에서 본 풍경

경회루에서는 멀리 인왕산과 경복궁의 여러 전각이 한눈에 들어온다. 자연스럽게 다듬어진 기둥이 액자틀 역할을 하는 동시에 인왕산이 한 폭의 그림에 담긴 것처럼 펼쳐진다. 아기자기하게 꾸민 내부의 인공경관을 감상하는 중국과 일본의 누각과 달리 경회루는 탁 트인 외부 경관을 감상하기 위해 만들었다.

조선 3대 누각이었던 촉석루

밀양읍성의 영남루와 평양성의 부벽루와 함께 3대 누각으로 불렸던 촉석루는 남강 옆에 세워졌다. 경회루와 마찬가지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풍경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연의 풍광을 감상할 수 있게 큰 누각을 지었다. 도시입지에 풍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한국은 중국 · 일본과 달리 도시 가까이에 큰 산이 들어서 있었다. 그 결과 공간을 분리해서 인공적으로 꾸미기보다 이미 도시 안에 들어와 있는 자연공간을 이용하는 경관 감상이 더 유행하였다.

향원정

지금의 향원정은 고종 때 지어진 것으로 경회루와 동일한 조성원리가 적용되었다. 높게 솟은 북악산과 인왕산을 가리지 않고 연못과 인공섬을 단순하게 원형으로 만들어서 화려한 자연과 조화를 추구했다.

비원의 여러 모습

위에서부터 차례로 ① 부용정. ② 청의정. ③ 애련정이다. 창덕궁은 평지에 자리 잡은 경복궁과 달리 산줄기 허리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를 이용하여 골짜기 자체를 밖과 단절된 공간으로 사용했다. 비원을 둘러싼 산과 능선이 담장 역할을 하면서 골짜기 안의 화려한 자연 자체가 정원의 풍경이 된 것이다.

세검정도

조선시대 정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자 자체보다 정자가 위치한 공간과 풍경을 살펴봐야 한다. 그래서 밖에서 정자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정자 안에서 펼쳐지는 풍경이 중요하다. 한국 정원이 중국, 일본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는 이유는 도시 가까이에 산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별다른 인공적인 요소 없이도 뛰어난 풍광이 있는 곳에 정자를 세움으로써 풍류를 즐길 수 있었다.

인공정원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안압지

문무왕 때 조성된 안압지는 신라가 망하면서 폐허가 되었다가 1975년 발굴되면서 복원되었다. 굽이치듯이 설계된 연못의 외양은 동양의 인공정원 방식을 잘 보여준다. 굽이치듯이 설계된 연못의 외양은 동양의 인공정원 방식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현재 복원된 안압지는 인공정원에서 가장 중요한 외부와의 차단이 안 되어 있어서 과거의 정취를 온전히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