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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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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12.12 2018-058 세상의 모든 최대화
2018. 12. 12. 17:04 내가 읽은 책들/2018년도

2018-058 세상의 모든 최대화

 

 

 

황유원 시집

2016, 민음사

 

대야도서관

SB110685

 

811.7

민67ㅁ  219

 

민음의 시 219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를 읽으면 이토록 풍부한 이미지들이 시 한 편 한 편에서 이렇게 다양하게 끓어오를 수가 있단 말인가 하고 놀라게 된다. 그다음엔 다양한 지점들을 연결하는 시적 화자의 보폭과 리듬, 라임 등등과 함께 여행을 끝낸 후의 저녁의 흐린 빛, 고즈넉함까지 선물받게 된다.

- 김혜순(시인)

 

황유원의 작품들은 얼음의 밑바닥을 흘러가는 무결처럼 적막하고 견고한 시 세계를 전편에 걸쳐 유지하고 있다. 사념적인 요소 역시 날것으로 엉뚱하게 등장하여 시 세계를 망쳐 놓지 않고 낱말 하나하나의 내부로 스며든다.

- 서동욱(시인, 문학평론가)

 

그에게는 죽는 시늉하거나 아픈척 하며 군중을 모으는 기존의 작태를 찾아볼 수 없다. 그는 활달했다. 모든 랭보들의 특징은 징징대지 않는 것, 부채 의식 없이, 급가속으로 상상의 세계를 야금하는 대장간은 우리 시에서 차려져 본 적이 별로 없다.

- 작품해설에서 | 성기완(시인, 밴드 3호선버터플라이 멤버)

 

황유원

1982년 울산에서 태어났다.

2013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로

제34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차례

 

1부

 

루마니아 풍습

북유럽 환상곡

풍차의 육체미

바람 부는 날

새처럼 우는 성(聖) 프란체스코를 위한 demo tape

새들의 선회 연구 -한 장의 사진

간단한 몇 가지 동작들

쌓아 올려 본 여름

비 맞는 운동장

총칭하는 종소리

바라나시 4부작

 

2부

 

레코드 속 밀림

구경거리

지네의 밤 -Massive Attack

개미지옥(前) -백주(白晝)의 악마

개미지옥(後)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전변(轉變)

달팽이 집을 지읍시다

몬순 블루스

변신 자라

공룡 인형

크레파스로 그린 세계 열기구 축제

잘린 목들의 합창

돌고래시 -자크 메욜에게

 

3부

 

초겨울에 대한 반가사유

세상의 모든 최대화

인벤션

매달린 것들은 다

극치의 수피즘

논스톱 투 브라질

halo

항구의 겨울

밤의 황량한 목록들

양 모양의 수면 양말

끝없는 밤

바톤 터치

天天來

해성장

시베리아 주제에 의한 다섯 개의 사운드트랙

 

4부

 

전국에 비

오디토리엄

레코드의 회전 -Billie Holiday

1시 11시

사랑하는 천사들

많은 물소리

한려수도

첩첩산중

모두가 쏟아지는 햇살 속에 있었다

가을 축제

인식의 힘 -Notes on Blindness

일체감

 

작품 해설 │ 성기완

조선어 연금술사 통관보고서

 

새들의 선회 연구

- 한 장의 사진

 

일단 사진으로 찍으면 정지.

한곳으로 집중되는 힘들과 지금 막

펼쳐지려 하는 힘들이 만들어 내는

그대들의 온갖 선(線)들도

그대로 정지.

 

그러나 찍기 전까지는 선회,

찍고 난 후에도 선회,

둥글고 둥글게 사과를 깎는 것처럼

공중의 껍질을 밀어내듯 부드러운 과도(果刀)의 동작으로 선회

새들이 선회한 자리에선 사과 향기가 나고

 

더 큰 원을 그려 봐야 원은 끊어지지 않아

다만 바닥에 떨어지는 사과 껍질처럼 착지할 뿐

천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꼭 천 년 후에도 그럴 것처럼

깎아 놓은 사과의 속살 같은 하늘 남겨 두고서

그대로 착지.

 

그리고 그 자리에 다름 아닌

네가 있을 것.

내가 지른 사과를 부리로 쪼아 먹으며

부드러운 턱 운동과 함께

그 자리에서 가장 둥글게 울고 있는

네가 있을 것.

높은 곳에서 떨어진 사과가 산산조각 날 때

퍼지는 향기에는 상처 하나 없음을 수상히 여기다

그냥 거기 드러누워 언덕이 되어 버리는

언덕이 되어 그 향기 들이마시는

너는 잇을 것.

 

흔적도 남지 않는 삶이 아니라

다 살아 낸 삶이 남아 있는 흔적과

이제 다 끝났다는 착각의 평화가 동시에 미끄러지는

넉넉하고 공평한 언덕,

평일이 모두 종말한 후

혼자 남겨진 주말의 완벽한 휴식 같고

졸음이 꼳아지는 베개 위로 흘러내리는

내용 없는 오후 같은 너의 언덕

 

거기 항상 내가 있을 것.

어떤 새가 또 태어나는 동안

어떤 새는 새로 태어나기도 한다고 말해 주는 내가

너처럼 나도 그렇게 항상

네 옆에 있을 것.

비 그치고 나뭇가지에 줄줄이 매달린 물방울 열매들

그걸 따 먹는 새들의 목구멍이 순간 얼마나 맑고 시원해지는지!

옆에서 함께 숨죽이고 지켜보는 심정이 되어

찰칵, 그대로 정지했다가

 

함께, 다시 날아오를 것

 

달팽이 집을 지읍시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돌아 버린 것들 틈바구니에 있느나 돌아 버린 건지 아니면 나도 원래 그들 중 하나여서 내가 너희들을 더욱 돌아 버리게 한 것들 중 하나였는지 한참을 헷갈리느라 정말이지 아주 돌아 버릴 지경인데……

 

   하루는 몸속에 팽이 하나 돌려 놓고

 

   그 팽이가 쓰러질 때까지 생각해 본다

 

   자꾸만꿈만꾸자는 그 말,

   그 속으로 들어가면

   끝없는 나선계단을 걸어 내려가야 하는 주문처럼

 

   몸속에 팽이를 돌려 놓고

   서서히 거기

   빠져들어 본다

   내 몸 안으로 나를 한 걸음씩 걸어

   들어가게 해 본다

 

   인체의 신비를 모두 파헤치고 난 후

   두려워할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극도로 나른해질 때까지

 

   모든 게 주어진 조건 속에서 일어나는 당연한 일임을 알게 됐을 땐

   팽이는 이미 멈춰 있을 것이고

 

   쓰러지고 나서도 생각해 본다

   절벽 끝으로 몰린 머리가 새하얘질 때까지

 

   팽이는 힘이 다하고 나면 제풀에

   쓰러지고 마는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슬퍼하고 자시고 ㅘㄹ 것도

   그럴

   겨를도 없이

 

   그러나 저 보름달!

   보름달이 뜨면

   슬퍼하는 이 여럿

   기뻐하는 이도 여럿

 

   강강수월래를 추며 다 같이 돌아 버리는 밤이 여럿

 

   달팽이 안에서 달팽이 밖으로

   달이 팽이처럼 돌아간다

   제자리에서 최고 속도로

   최면을 걸어

   나는 달팽이라고

   라르고(Largo), 라아르고오오오오

 

   달팽이 속의 달이 뜨고

   그 둥그런 탄창 같은 달이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달팽이 속의 팽이처럼 돌아가기 시, 작, 하, 고,

 

   그럼 나는 그걸 한 번 힘껏! 후려쳐 보는 것이다

   더욱 빨라지는 강강수월래

   달팽이 안에 천둥이 치고

   번개가 껍질을 박살 내고

 

   달팽이의 술주정!

   빈 술병 위를 기어가는 달팽이!

   번개 문양으로 박살 난 술병 위를 지그재그로 기어 다니는,

   집에서 쫓겨나 급한 김에 자기 집만을 들쳐 메고 나온

   늙고! 무능한! 달팽이!

 

   잊을 만하면 언제나

   잊지 못할 일이 날 들이받고

   밤새 나는 아주 멀리 가서

   아침이면 아주 먼 거리가 되어 있곤 했다

 

   그 위로 왕소금 같은 비가 내리고

 

   지치면 오늘도 그냥 그 자리에서 곯아떨어지는 이가 여럿

 

세상의 모든 최대화

 

화물칸에 일렉기타를 한 만 대쯤 싣고 가는 세상에서 가장 길고, 무거운 마음

 

   그 속을 누가 알겠냐마는 철로만은 알지,

   짓밟힌 몸길이를 짓밟힌 시간으로 나눠 기차가 절망하기 시작한 지점에서부터 자기 합리화에 성공하는 지점까지 걸린 속도를 계산해내며 자기를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짓밟고 가는 기차의 무게를 참고 견디지

 

   기차가 아무리 짓밟고 가도 손가락도 발가락도 잘리지 않는 건 손가락도 발가락도, 아무것도 없어서

 

   손가락을 잃은 기타리스트는 알지 흉측한 음악을 만들 바에야 약을 먹고 죽는 게 낫다는 걸

   발가락이 없는 애벌레는 알지 발가락이 없으면 기어서라도, 가고 싶은 곳엔 가고 봐야 한다는 걸

 

   말하자면 비시각적 음표들의 시각적 극대화

 

   그러나 약은 치료하기도 하는 것,

 

   병명보다 더 많은 치료제를 잔뜩 싣고 가던 기차가 마침내 말기에 다다라 포기하고 탈선할 때

   눈 내린 들판에 처박힌 기차에서 동그란 알약들이 쏟아져나올 때의 기분이란

 

   그 기분 누가 알겠냐마는 환자들만은 알지,

   환자들은 꿈속에서 거기까지 걸어가 그 약을 모두 주워 먹은 다음날 아침 병실에서 깨어나 기차의 차가운 몸을 이해하지 넘어진 채 몸을 뒤로 돌리던 기차를 이해하며 몸을 정확히 당신들 반대편으로 돌리지

 

   현실도피는 없어, 현실의 최대화만이 있을 뿐

 

   오늘밤 그들의 기도가 기차처럼 길어져 결국 지구를 몇 바퀴씩이나 돈 기도들의 속도가 기차를 조금씩 허공에 뜨게 해 마침내 이륙한 기차를 바라보며 철로가 난생처음으로 편안해질 수 있다는 희망,

   을 품자마자 기차는 곤두박질치고

   지진처럼 지축이 흔들려 복부를 강타당한 남자처럼 철로가 신물을 토할 때 신물 위로 기타가 쏟아지는 기분

 

   그 기분은 누가 알까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 꿈에서 엎질러진 아이나 알까

 

   아무리 길게 써도 저 레일에는 모자랄 것이므로 여기서 그만둬도 상관은 없겠지만

 

   고요한 밤, 캐롤을 싣고 가다 넘어져 모두 엎질러버린 아주아주 거룩한 밤, 깨진 전구를 뛰어넘어 크리스마스의 본질을 거침없이 이해하고 산타를 엉망진창으로 때려눕히고

 

   지구가 한 바퀴 돌기 전까지 기타를 모두 수리해야 하는 수리공의 마음은 망가진 리프(riff)들을 밤새 고치고 있는 기타리스트밖에 모르지

 

   너에겐 싣고 가다 넘어져 모두 엎질러 버릴 만한 그 무엇이 있나? 넘쳐서 어쩔 수 없이 들켜버리는 리듬이라도 있니?

   넘쳐서 어쩔 수 없이 들켜 버리는 리듬을 타고 비옥한 꿈속을 달리다 넘어지는 곳이 늘 절벽 앞이어서 느껴보는

   아찔함, 그 뒤에 웅크리고 앉아 그 리듬을 정면으로

   견뎌본 적 있니!

 

   구겨진 리듬을 잘 펼치면 과연 어디까지 펼쳐질 수 있을지, 무엇까지 덮어볼 수 있을지를 가늠하며 최대한 붉은 와인을 박스째 주문해

 

   뱃속에 와인을 만 박스나 싣고 가는 기차가 오늘밤 도무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유를 누가 이해하겠냐마는

   사랑을 한 박스나 마시고도 제대로 서 있는* 조니 미첼은 이해하지, 어쩌면 술집을 이름표처럼 달고 다니다 이름을 아무 데서나 콸콸 쏟아 버리던 에이미 와인하우스**도 이해하지

 

   잠시 동안의 짧고 굵은 경악과 모든 최대화에 따르는 극심한 부작용, 그때마다

   벌어진 가랑이 사이로 경적을 울리며 긴 열차 한 대 빨려들어오는 느낌, 결국 일망타진 당하고 마는 느낌을

 

   너무 긴 문장에겐 이제 그만, 쉼표를

 

———

 

* Joni Mitchell, 「A Case of You」중에서.

** Amy Winehouse.

 

바람 부는 날

 

   바람 부는 날 야외에서 한 접시의 물회를

   바람 속에 흔들리는 모든 것들의 친화력과 공평함

   그러나 고층 빌딩의 견고함

   원피스의 펄럭임은 야외에 달린 커튼

   걸어다니는 커튼, 긴 머리의 자유로움과

   저 여잔 머릴 가르길 참 잘했다는 생각

   바람 부는 날 멀리서 바라보면 바람에 천천히 흔들리고 있는 빌딩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플라스틱 테이블에 올려진 물회에 뜨거운 밥 한 그릇을

   소주 한 병을 시키고 잔 세 개를 부딪칠 때 불어오는 바람

   바다보다 더 바다 같은

   바람보다 더 바람 같은 바람의 통로 안에 담겨 한 접시의 물회를

   이제 더 큰 바람이 불어오겠지

   암 그렇고말고

   바람 속에 흔들리던 것들 죄다 이륙하고 테이블이 뒤집히고 원피스가 팬티 위로 올라가고 술병이 차례로 추락할 거야 만물지중(萬物之衆)이 낙하하고 비행하는 난장판이 펼쳐질 거야 그 전에 딱,

   한 접시의 물회를

   바람이 사라지기 전에 어서 마지막 잔을 비우고 그 속에 한 잔의 바람과 평화를

   이 세상 모든 바람이 지금 여기로 불고 있다는 착각

   지금 이 바람은 우릴 모른 척하고 지나간다는 확신

   이 모든 접시들과 수저들이 처음 보는 우릴 기억하고 있다는 믿음

   이 모든 게 바람이 하는 젓가락질이라는 망상

   그 와중에도 이 골목은 계속 길어져서 아무리 긴 바람도 결국 빠져나가지 못할 거란, 그러나 바람에는 길이가 없을 거란

   헛된, 몽상

   그러나 얼음이 다 녹기 전에 한치 학꽁치 미주구리 문어 대가리

   바람 속으로 날아드는 새들이 생선을 다 채가기 전에 쌈장을 찍고 마늘을 올려서

   김에도 싸서 너의 입에 한 번,

   나의 입에 한 번

   바람 속에 흔들리는 모든 것들의 친화력과 공평함

   오늘 왜 난 자꾸 눈물이 날까

   이봐 그러고 있지 말고 저길 좀 봐

   어느새 일렬로 늘어선 소주병들이 진한 방풍림 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이봐 앞에 앉아서 자꾸 핸드폰이나 쳐다볼 바엔 차라리 지나가는 여자 다리를 쳐다보지 그래

   난장판이 되기 직전 빈 접시의 바람을 집어먹는 나무젓가락의 튼튼함

   우리가 이제부터 불어올 모든 바람을 이 한 잔의 공간 속에 모두 쑤셔 담을 순 없겠지만

   마침표같이 눌러놨던 동멩이들 죄다 굴려 버리는 바람

   그러나 어딘가에선 반드시 멈출 돌멩이들을 바라보며

   바람 부는 날 바람 속에 흔들리는 모든 것들의 취기에 시원한 사이다 한 잔씩을 따라 주며

   너도 한 잔,

   나도 한 잔

   빈 잔은 이제 그냥 빈 잔으로 남겨 두고

 

 

간단한 몇 가지 동작들

 

   우리 함께 땀 흘릴 때 땀구멍에서 새어 나오는 오래된 기도 냄새가 있어

   일인용 침대처럼 홀로 삐걱이던 밤, 젖은 수건처럼 비틀어 짰을 기도의 오래된 물

 

   냄새의 모든 단추를 풀고 들어가면 나오는 깊은 산정호수가 있어

   타오르며 한사코 공중에 매달리는 물안개와 그 속으로 안기는 새들의 자욱한 날갯소리

 

   그리고

 

   커튼이 없다면 지금 이 방으로 부는 바람은 아무

   쓸모도 없을 정도로 아름답게

   커튼이 흔들리고 있어

 

   그럴 때 사방에선

 

   서서히

 

   프로펠러가 돌아가기 시작하고

 

   지친 손가락들 잘려 나가는 대신 풀들이 땅 가까이로 좀 더

   몸을 눕히고 구원처럼 나는 너에게로 조금

   가까워지고 시간은 밤, 계절은 여름으로

   가까스로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동안

   다시 그때 그 주발의 오후로

 

*

 

   그날의 커튼은 기억하지 바람이 어떤 순서로

   어떤 강도로 허공을 쓰다듬었는지

   그날의 바람은 기억하지 하늘에 내고선

   공중에 적은 다음 바람에 날려 버리지

 

   시원한 열차에 올라 창밖 풍경을 다 갖고 싶어라고 말해 버리자, 리듬에 맞춰

   시원찮은 문장들 따윈 바람에 날려 보내며

 

   그동안, 새들이 낳고 먹이고 길러 낸 둥근 평화

   우리가 컵에 담으면 컵이 되고 바다에 담으면 바다의 바닥까지

   내려가 보는 물처럼 될 순 없겠지만 그동안 새들의 선회를 낳은 둥근 평화

   우리가 사물 소리를 잘 내는 흑인처럼

   지나가다 내 보는 헬리콥터 소리만으로 갑자기 모두

   얼굴 가리고 고개 숙이게 만들 순 없겠지만

   둥근 호수의 면상에 이는 무수한 파문, 떨어지면서 으악이 되는 모든 음악의 속 시원함

 

   그동안에도 새들의 알은 단단해지고 그 안의 출렁이는 평화,

   네 안으로 이주하는 내 입속 새 떼들의 젖은 날개에서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들의 표면장력이 튼튼해지고

   네가 회전할 때, 네 몸에서 떨어지는 땀방울들이 그리는 포물선의 아름다움

 

   그때 그 시간이 그리는 완벽한 걸음걸이와 그 안의 둥근, 평화

 

   우리가 동화 속 연인들처럼 동이 특 때까지 놓지 않고 켜 놓은 환한 양손이

   우리보다 먼저 졸다

   살짝, 가볍게 벌어지고

 

   이윽고 완전한 한 마리의 새로 펼쳐진 그것은

   불 꺼진 손안에 그대로 안긴 채

   다시 우리의 잠 속으로 날아들게 되는 거겠지

 

*

 

   숨 한 번 크게

 

   들이쉬자 하나의 둥글고 고요한 호수로 펼쳐졌다

   뒤늦게 그

 

   위로 지나가는 한 척의 쾌속정이 일으키는 수만의 물결들의 단추를 수면의 사방 끝까지 다

 

   잠가 주고 나면

 

   어느새 여기도 빈방이 되어 버린다 다른 모든 방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방은 볼 것도 없어' 당신은 그렇게 말했지만

 

   반쯤 열린 문틈으로 훔쳐본 커튼

   바람이 없으면 죽은 거나 다름없는 백색의 커튼은

 

   침묵 속에 목매단 채

 

   내리쬐는 햇살 속에

 

   환히

 

   타오르고 있었다

 

개미지옥(後)

-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이것은 싸구려 여인숙에서 꾸는 꿈

   찬비에 젖은 하루, 딱딱해진 발바닥이

   <♨욕실 완비>된 꿈자리에서 풀어지는 이야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한 마리 벌레의 예기치 못한 외박

   속에서 식지 못하고 부글, 부글거리는……

 

   마침내 뜨거운 욕탕으로 기어들어 간 개미 소년은

   몸에서 벗겨져 영혼처럼 물속에 풀리는 지렁이 살냄새도 망각한 채

   다시 한 번 그 생각에 골몰했다

 

   (집을 버리고 길을 떠도는 까닭은

   여인숙에서 꾸는 꿈이

   개미집에서 꾸는 꿈과

   다르기 때문이다

 

   삶이라는 비바람 속에서

   휘적휘적 걸어갈 만큼 시야 넓은 곤충은 없었으므로……)

 

   개도 아니면서 속으로 개소리를 지껄이다가

   다시 한 번 무지막지한 질투에 사로잡혀

   질투, 투쟁, 쟁취……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한마디 한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지렁이 비린내로 진동하던 욕탕은 어느덧

   어제 죽여 버린 암개미 냄새로 들끓고 있었고

 

   암개미가 떠나간 방에 남아

   나는 홀로 방 청소를 했었지

   계집의 유령 같은 바람이

   시종일관 밖에서 창문을 두들겨 대던 밤

   계집의 흔적이 남은 방에 홀로 갇혀

   벌이라도 받는 학생처럼

   깨끗해진 방 가운데 한참을 우두커니 서서

   죽어 가는 암개미의 시체를, 시취를,

   아니 차라리 암개미의 더러운 말들을 치워 버리기 위해

   멍든 암개미를 업고 공동묘지로 잠입했던 지난밤

   죽인다,

 

   진짜 죽여 주신다

 

   ……내가 인생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는

   죽여 주신다, 정말 나의 인생은!

 

   죽인다는 말은 내가 끝장난다는 말

   너한테 이길 수는 도저히 없다는 말

   그러나 지는 게 영광이라는 말

   그리하여 너는 이제 끝장낸다는 말

   그냥 지금 죽어 버려도 여한이 없다는 말

   차라리 사라지고 싶다는 말

   다른 삶은 무가치하게 만들어 주시는 말

 

   욕탕 속의 개미 소년은 자신이 만든 말놀이에 도취돼

   수학 시간에 배운 몽상을 노래했다

 

   결국 도형들의 세상

   원이라면 참 좋겠지만

   너무 많은 삼각형

   사각형은 차라리 두 마리

   그리고 버려진 다른 두 마리를 남겨 두지만

   너무 많은 두 마리

   너무 많은 혼자

 

   그러나 어젯밤에 하지 못한 수학 숙제가 생각나자

   곧장 회초리를 맞는 기분이 되었고

   창밖에는 여왕 폐하가 불호령을 내리시는지

 

   벼락은 우선 찢고 본다

   찢기는 것이 하늘이든

   너희들의 가죽이든

   번개가 함께하는 것은 그 때문

   벼락을 잘 보라고

   벼락에 찢겨진 것들을

   너희들은 똑똑히 쳐다보라고!

 

   개미 소년은 금세 두려워져

   박살 난 유리창 같은 표정으로

   악마에 사로잡힌 목구멍으로 외쳤다!

 

   악마! 마귀! 귀신!

 

   ……

 

   바닥에 떨어진 단어들은 더듬이가 잘린 개미 떼처럼

   맴을 돌다가 소용돌이 같은 몽상으로 변해 갔고

 

   그러자 자연스레 어제저녁의 설교가 떠올랐다

   개미들 모두 모여 똥구멍에 새카맣게 힘을 주고

   언덕에서 들었던 설교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회색 풍선의 무리 아래로

         깊어 가는 저녁 하늘, 화살표로 그어지는

         철새들의 이동 경로

         똑바른 화살표는 평화와 안정감을 주지만

         이탈하는 한 마리 새는 묘한 쾌감을 줍니다

 

   그러나 여왕 폐하께서 곧 이어서 말씀하시길,

 

   ---저 또라이 새!

 

   그러자 어디선가 갑자기,

 

   ---어딜 가나 또라이 같은 놈들 하나씩 있어

        숨통이 트이는 법이지요 (웅성웅성)

 

   이것은 어제 여왕 폐하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은

   이웃집 개미 친구의 어록에서 발췌한 문장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개미새끼!

 

   ---개미귀신은 또라이 개미들을 잔뜩 잡아먹어서

        언젠가 명주잠자리가 되어 하늘을 날겠지요

 

   이것은 악마에게 사로잡혀 길 잃고 방황하는

   처량한 개미 소년의 어록에서 발췌한 문장……

 

   방황에 지친 개미 소년은 이윽고 따뜻하고 축축한 잠에 빠져들었다

 

   …… 그때 나는 그녀를 업고 데이트 중이었지

   사랑스러운 그녀는 속옷 가게 앞에 나를 멈춰 세우더니

   저 팬티 예쁘지 않아? 우리 다시 사랑할지도 모르는데

   그때를 위해 한번 입어 봐도 될까? 씨불였어

   우린 아직 데이트 중이었는데, 속옷 가게 앞에서

   그녀는 마치 우리가 헤어진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그렇게 말했다

   나는 아직 꿈속에서도 너의 더듬이 길이를 외울 수 있을 정돈데……

   자꾸 날씨가 추워진다며 그녀는 나를 꼬옥 안았다 등 뒤에서

   어리둥절해질 정도로 세게, 그럴수록 세계는 더욱 차가워졌지만

   나는 그녀를 꼬옥 붙들고 침착히 주위를 살핀 후

   어두운 숲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결국

   그토록 뜨거웠던 욕탕도 식고 말고

   불타오르던 사랑은 불태우는 사랑이 되고 말고

   그 온갖 잿빛들 위로

   생전 처음 추락해 보는

   저 하늘 위

   한 마리

   새

 

   피가 빠져나가는 육신처럼

   당신의 음모를 엿들었을 때처럼 아득한

   현기증을 느꼈을 때

   지금껏 더할 나위 없이 고요하던 창밖

   푸른날개긴밤나비의 펼쳐진 양 날개 같던 새벽이 희미하게 접혀 오는 대지 위로

   자욱이……

   안개가 일고 있었다

   얼마나 더 많이, 오래 밟혀야 하는지

   그 광활했던 세상이 별안간 얼마나, 협소해질 수 있는지! 깨닫게 해 주며

 

   이제 불과 백 미터 앞으로 다가온 병정개미 군단이 일으키는 자욱한 군홧발 소리가

   개미굴 같은 귓속 무참히 짓밟으며

   성큼,

   성큼

 

   쳐들어오고 있었다

 

* 조지 로메로 감독의 영화.

 

레코드 속 밀림

 

 

1

 

예술은 두 종류,

차가워지거나 뜨거워지거나

 

목이 쉬면 빛이 바래는 가사가 있고

휘발된 노래 밑바닥에 반정부군처럼 살아남아

지구 반대편 지원군을 불러모으는 가사가 있지

그러거나 말거나 변함없는 사실은

 

마음을 다하면

판은 돌아가는 거

 

2

 

봄밤, 짐승들이 합창하는

레코드 속 밀림의 고요

식지 않은 피를 싣고서 최대한 무리하지 않게

어슬렁거리는 무리들

 

이것이 바로 열대우림에서 맞는 봄밤

따뜻한 비를 맞는 호랑이들의 피부에 핀 착한 꽃들이 질 때

그들을 달래며 저어보는 부드러운 밀림서(書)

 

호랑이는 두 종류,

찢어지거나 불타오르거나

 

밤의 정적 속에 점화되는 눈알들의 냉정함

밤의 고요 속에 이글대는 살가죽의 뜨거움

 

그걸 헷갈리면 당신은 끝장

 

마음이 다하면, 결국

판은 그만 돌아가는 거

 

3

 

울울창창 밀림이 깊어만 가는 밤이고

그래 봤자 무료한 반복재생

겨우 ㅁ과 ㄹ의 자리바꿈에 불과하겠지만

 

마음이 다한 자린 이미 겨울이어서

두꺼운 침묵 한 장 껴입고 사냥을 나설 때

얼굴엔 짜작, 단번에 금이 가는 거

 

잊고 지냈던 화려함들은 어느새 훌륭한 장작이 되어 있었네

그 위에서 불타는 마음

 

4

 

호랑이 요리는 두 종류,

꽁꽁 언 눈알의 단단한 차가움과

가죽의 뜨거운 화염

 

차가운 눈빛 삼킬 땐

밀림에 찬비 내려

 

이글거리던 내장이 식고

칼로 썬 화염 씹어 먹을 땐

뜨거운 아궁이 속에서 들끓는 비명

누구라도 뻘뻘 땀을 흘리지

젖는 건 마찬가지

 

있을 수 없지 밀림의 암전(暗轉)이란

호랑이의 얌전은 가당치 않아

 

그러므로 우리란,

산산조각 난 레코드판에서

죽지도 못하고 기어이 기어 나오고 있는 것

 

마음이 있는 한.

 

개미지옥(前)

- 백주(白晝)의 악마*

 

잠시 그 생각에 골몰해 있던 개미 소년은

어느새 대열에서 멀어져

혼자 남은 자신을 발견했다

 

당황해서, 불개미도 아닌데

두 더듬이로부터 통통한 배에 이르기까지

온몸은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열심히 고기를 굽는 불판처럼 정상을 독차지한 태양은

오로지 자신만의 사업에 골몰하고 있었는데

 

어제 여왕 폐하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은

이웃집 개미 친구를 떠올린 개미 소년은

더욱 벌겋게 달아오른 몸으로

한동안을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개미는 고기도 아닌데

뜨거워진 태양에 어쩔 줄을 몰랐고

검은색 거대한 갑충들이 코 고는 소리가

기다란 풀을 간질이는 몽상적 오후 한 시였다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개미 소년이 떠올린 짓이라곤

즉석에서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일,

그렇다고 개미는 식물성도 아닌데

마치 새파란 풀잎처럼 떨리는 음성으로

 

오, 하늘의 흰 구름 떼는 달달한 빵 조각!

제가 한입 뜯어먹어도 폐가 되진 않을는지?

 

오, 하늘의 흰 구름 떼는 방금 잡은 신선한 양고기!

제가 한입 뜯어먹어도 놀라시진 않을는지?

 

그러나 노래는 영 신통치 않았고

오로지 배가 고프다는 사실만을 떠올려 줄 뿐이어서

개미 소년은 힘을 아끼기 위해 다시금 멈춰 섰다

노래 부른다고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꾸짖으시던 어른 개미들을 떠올리며

어른들 말씀이 다 틀린 건 아니었구나

생각하며 먹을 걸 찾아 주위를 둘러보던 중

저 멀리,

송장벌레 사내들이 지렁이 아가씨를 습격하고 잇는 광경이 포착됐다

 

지렁이 아가씨는 수치심에 몸을 배배 꼬고 있었지만

지렁이 아가씨의 꼬리에 얻어맞은 송장벌레 한 마리의 허벅지가

퍼렇게 멍이 드는 꼬락서니를 지켜보며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영 틀린 건 아니었구나

생각하며 다가가 말을 건넸다

 

--- 송장벌레 선생님들, 안녕하신지

       바쁘신 와중에 죄송한 부탁이지만

       감히 제가 이 파티에 동참해도 될는지 여쭙고자

       이렇게 용기 내어 말을 걸어 봅니다

 

--- 우훼훼, 개미 선생도 원 별말씀을 다!

       즐거움은 나눌수록 배가 되는 법

       불개미들의 어록에 이런 속담은 없나 보죠?

 

늘 모든 걸 혼자서 독차지하던 개미 소년은

심한 부끄러움에 대충 말을 얼버무렸고

선생이란 말에 다시 한 번 얼굴 붉히며

감사를 표하고 파티에 참석했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지렁이 비린내 진동하는 몸 이끌고

개미 소년은 다시 길을 떠났네

구름 떼는 그새 나쁜 일이 있었는지

영 어두운 표정으로 변해 있었고

개미 소년은 잘 알지도 못하는 길을

별 수 없이 열심히 걸었네

 

(둘이 같이 고기를 굽다가

하나가 돌연 채식주의자로 변해 버렸을 때

남은 하나는 좋아라 고기나 씹었어야 했을까

아니면 불판을 엎어 버렸어야 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잡초처럼 조금씩

악(惡)이 싹텄고

 

악의로 가득 찬 개미 소년은 뜨거웠던 자신의 붉은색 이마가

서서히 식어 가고 잇음을 느꼈다

 

하늘에서 회충같이 얇고 긴

 

비가 내리고 잇었다

 

*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

 

지네의 밤

- Massive Attack

 

   누구도 지네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아주 멍청한 밤일세

 

   허물을 벗을 때마다 아주 길어지는 지네들이 기어 다니는

   아주 검고, 붉은!

   빛나는 키틴질의 밤이란 말일세

 

   어디선가 자네 마누라가 허물을 벗고 잇을 아주 은밀한 밤이라고 말하면 자네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

 

   지네의 밤,

   온 마디가 하나의 악절인

   여러 편의 악장이 이어진 교향곡이 방구석을 기어 다니는 아주 웅장한 밤이란 생각이 들지, 않느냔 말일세

 

   그 많은 다리가 고작 한 마리의 것이라니

   그 많은 다리가 한꺼번에 움직일 때마다 와르르 연주되는 음악은 썩, 훌륭하지 않은가! 이 말일세

 

   상상할 수나 있겠나?

   수백만 년 전, 우리가 고작 네발로 기어 다녔을 뿐이던 시절

   그때 어디 감히 음악 같은 게 있었겠나

 

   자네가 침대 위로 무지막지하게 내팽개쳐지기 시작할 때

   누군가는 이미 먹히고 있고

   누군가는 이미 먹고 있다는 걸

   이제 자네도 알 만한 나이가 되지 않았는가, 이 말일세

 

   누군가는 은밀히 어둠 속에서 하이힐을 벗고 잇고

   누군가는 더욱 은밀히 구석에서 입맛을 다시고 있다는 걸

   지네나 자네나 둘 다 모른 척, 잠들어 봤자

   우리는 다리가 아주 많이 달린 징그럽고 아름다운 꿈에 실린 채 또 온갖 곳들로 데려가지고 있겠지

   거기 털은 또 얼마나 많이 나 있겠나?

 

   몇 시산을 걸어 올라간 끝에 도달한 아주 높은 언덕, 위에서 수백 미터나 되는 열차,

   소화불량이던 역의 플랫폼과 대합실 전부를 집어삼키고 가는 열차가 겨우 한 마리 다족류로 보인 적이 있다네

   데칸고원에서 였지

   그러나 한 마리 지네가 낳는 새끼의 수는 또 얼마나 많은가, 이 말일세

   거기 다리는 또 몇 개나 달려 있겠나?

 

   지네의 밤,

   생각만으로 혼미해지는

   믿을 수 없이 빛나는 횡설수설의 밤일세

 

   나는 인류의 미래보단 지네에게 할당된 다리 수를 믿겠네

   지네가 계속 태어나 열차보다 오래 살아남을 거란 쪽에 내 두 다리를 걸겠네

   갓 태어난 지네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보게, 지네가 기어 다닐 땐 문틈으로 바람 부는 소리가 난다네

   문도 안 열어 놨는데 문은 이미, 벌써, 언제나 열려 있었고

   지네가 늘어날수록 바람은 더 크고 아름다워져 문을 미친 듯이 열어제끼고 박살 날 만큼 세게! 닫아 버리겠지

   세상 모든 지네들의 다리를 헤아리다 바람 속에서 잠들어 버리고만 싶은 밤일세

 

   갑자기 모든 게 너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네

   자네는 이걸 고작 유사 생물학적 키네틱아트 정도로 생각하고 있나?

   쉽고 간단할 것, 그네라도 타는 것처럼

   그러니 자네도 한번 지네를 타고 인간이 한 번도 기어들어 가 보지 못한 곡선 속으로 기어들어 가 지네처럼 둥글게 몸을 말고 빛나 보는 게 어떻겠나

 

   지네는 술에 떡이 돼 바닥을 기어 다니는 여대생으로 둔갑할 수도 있고

   술이 깨고 나면 기립할 수도 있을 것이네 물론 지금의 자네나 나 같은 모습으로도

   그러곤 사랑하는 이들을 힘껏 껴안아 줄 테지

   사랑하면 두 팔로만 안아도 좋은데

   몇십 개의 팔에 안기는 기분은 또 어떻겠나!

 

   테이블 위에는 자신을 통째로 토하며 죽어 가는 지네가 담긴 하나의 술병이 놓여 있고

 

   쓰러진 솔병에서 흘러나온 술은 테이블 위로 활짝 펼쳐지다 모서리에 이르러 줄줄 혹은 뚝뚝 떨어지는 거겠지

   또다른 지평으로, 부드러운 평면으로! 오늘 밤, 네가 갖고 놀던 장난감이 너를 갖고 놀고 있었다는 걸 발견하게 될 때까지

   나는 모든 다리들이 연결된 모든 몸뚱아리들을 밤새 지맘대로 끌고 다니는 것을 허용하노라

 

   지네의 밤,

   빛나는 키틴질의 밤이고

   최상급의 모든 나머지를 무력화시켜 버리는 밤

 

   저기 길고 놀라운 웃음소리가 꺄르르르르 기어가고만 있네

 

   지네 한 마리가 한 번에 들 수 있는 악기 수는 또 얼마나 많겠나?

   지네 한 마리가 한 번에 들 수 있는 모든 기타와 보컬들과 드럼들과 베이스들이 내장한 온 마디가 저려오는 경련과 발작 들이 구불구불 기어 다니는 바닥은 분명,

   간지러울 거야 그럴 땐 바닥에 드러누워 하하하히히히히 드르륵드르르륵! 하루 종일 열렸다 닫혔다도 해 보고 웃음으로 제 얼굴 뒤흔들다 얼굴이 와장창! 무너져 내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나쁜 거? 나쁜 건 없지

   그런 건 이미 무수한 다리들을 빌려 이 땅에서 서서히 증발하고 있을 거야

 

   털이 너무 많이 난 횡설수설,

   광란의 로큰롤일세

 

변신 자라

 

꿈에 변신하는 자라를 보았다

육안으로 볼 때마다 그것은

시도 때도 없이 근처 사물들 중 하나로 변해

나는 그것이 자라인지 뻔한 사물들 중 하나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꿈에서만 얻을 수 있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인해

그것이 본래 자라이며

어려서부터 완벽하게 익힌 엄폐술을 통해

끝없이 사물로 변해 가는 중이며

어딘가로 끝없이 향해 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변신한다는 건

본모습을 가린다는 것

가장 흔한 무언가로

이를테면 대웅전 앞의 석등이나

연못에 가라앉는 대야로 변해

잠시 세상 속에 섞여 들어

세상에 둘도 없는 네 모습을 가린다는 거

불과하다

그것은 그것에 불과하다

사회적 통념의 확대재생산

기껏해야 자기 위안으로서의 이론적 지식들

그것은 한갓 벽에 불과하다

변신 자라가 얼마나 충실히 주변의 사물로 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하등 차이가 없는 것

자라야,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

넘어서지 못한 채

벽 앞에 선 채

사물처럼 굳어 가고 있다는 거

그런다고 감추고 싶은 과거가 숨겨질 줄 아는가

모든 착각이 일시적이길 바라며

영원한 이합집산에 그치고 마는가

내가 시선을 거두지 않으면 자라는 계속 사물로 남을 것이다

그 상태를 죽을 때까지 유지할 것이다

내가 여지껏 배운 지식이란 무엇이었나

물속에서 나오려던 자라는 순간 자신을 쳐다보는 나를 느끼고는

낡은 질그릇 비슷한 무언가로 변해 다시 물속에 가라앉았고

내가 그걸 꺼내려고 손으로 집자

몇 조각 진흙으로 허물어지고 말았다

나무 사발로 변했더라면 괜찮았을 것을

 

공룡 인형*

 

마당은 공룡 인형들로 무너질 듯하다

한때 지구의 주인이었던 것들이

이제 작은 고무 인형이 된 채 마당을 걸어다니다 이렇게 문득

정지해 있는 것이다

누가 정지 버튼이라도 누른 듯

더 이상 잡아먹지도

으르렁거리지도 못하고

마당에 늘어져 잇는 공룡들

가끔 누가 와서 가지고 논다

그들에게 목소리와 동작을 부여하는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과 음성

공룡의 상상력에 대해서라면 생각해 본 적 없지만

아마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자신들이 작고 말랑말랑한 고무 인형이 되어

아이의 몸 빌어 움직이게 될 날이 올 줄은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을까

마당에 저녁이 오고

지겨워진 아이가 공룡들 내팽개친 채 자릴 떠나면

그들은 쓰러진 채 고요하고

다시 일어설 줄을 모른다

같은 어둠이지만

한때는 이불처럼 덮고 자던 어둠이

이제는 모든 움직임을 잃은 인형들을 덮어 주기 위해 천천히

마당 위로 깔릴 때

아이는 조금 늙어 있고

바람 한 번 불자

중생대부터 있어 온 은행나무 잎 마당에 떨어진다

은행나무는 자신이 은행나무 인형이 되는 꼴을 보게 될 날은

아마 없을 거라고 확신하는 듯하고

마당은 이 온갖 것들로 인해 잠시

폐허가 되어 본다

누가 와 재생 버튼이라도 누르고 간 듯

폐허가 되어 흘러갔고

오래전이라고도

오랜 후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 Inspired by 『Sentimental Journey / Spring Journey』, 아라키 노부요시.

 

크레파스로 그린 세계 열기구 축제

 

아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예술은 늘 크레파스의 몫이었지

진한 크레파스 냄새 교실 구석구석 배어서

머리는 곧잘 어질어질해졌어

어질어질해져서 환상은 시작됐지

 

아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별은 늘 크레파스의 몫이었지

허나 노란색 크레파스의 몸 열심히 도화지에 문질러 봐도 낮에는 소용없었어

검은 물감 쏟아져 세상이 온통 어둑어둑해질 때

그제야 찬란한 무독성 빛은 시작됐지

 

아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낮은 너무 경박스러웠고

밤이 새도록 세상은 철썩 철썩

파도 소린지 채찍 소린지 모를 기묘한 리듬을

얇은 문틈으로 흘려보냈어

 

곧잘 반으로 뚝,

부러지곤 하던 크레파스

반으로 부러진 크레파스의 옷은 금세 누더기가 되고 말았지만

아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아무도 크레파스를 욕하진 않았지

크레파스 향에 중독된 마음

저녁을 온통 물들이던 크레파스의 부드러운 각질

그림 좀 못 그렸다고 아무나 픽, 죽어 버리진 않았지

 

우리가 크레파스만큼 진했고

크레파스만큼 작았을 때

희멀건 수채 물감과는 감히 섞이지도 않았고

부러진 크레파스들 틈에서 잠들면

세상은 본드 같은 거 없이도

알록달록 잘만 부풀어 올랐지

28색이 다 뭐야, 16색이면 족한걸

더러운 건 필요도 없었고

더러워질 필요도 없었지

 

크레파스 온통 손에 묻히고

씻지 않아도 더럽지 않았던

아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열기구 같은 건 그림책에서밖에 못 봤지만

매일 16종의 열기구에 매달린 영혼들은

밤낮으로 두둥실 그림 속 그림 밖 온갖 나라들로 사라져갔네

 

이제 아이는 아닌 아이가

창문을 열어 이리저리 낡은 하늘 뒤적거려 보지만

동료들과 피운 담배 연기가 이 도시의 하늘 꽉 채운, 너무

두꺼운 경치만이 펼쳐질 뿐이어서

마치 처음 만들어진 엔진과 프로펠러

같은 심정이 된 아이는 마침내 떨리는 두 손 앞으로 내밀어

타자를 치기 시작하네

오로지 열기구에 대해서

 

새하얀 하늘 위에 그어지고

어두운 팔목 위에 그어지던 거대한 열기구 같은 문장들이

아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열기구가 세운 찬란한 비행기록들과

런던 파리 리에주 부쿠레슈티

크레파스처럼 아주 기이 --- 러진 열기구에 폭격당한 도시들의 이름을 지나

폭탄 가득 실은 거대한 구름 떼 구경하러 집 밖으로 뛰쳐나와 머리 위로 검고 육중한 그림자

드리우는 와중에도 하늘에서 시선 떼지 못한 채

점, 저엄, 부풀어 오르는 탄성을 내뿜다 사라져 버린 시민들의 인화성 몽상에 이르자

 

바람을 먹은 문장들은 압정이라도 밟은 양 비틀,

 

거렸고 비틀, 비틀

 

거려서 타르르르르! 다시 환상은 시작됐지

 

아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예술은 늘 크레파스의 몫이었지

그건 문방구에서 훔칠 수도 있고

짝지한테 "야 그것 좀 줘 봐"

하고 잠깐 빌릴 수도 있어서

빌딩 숲 사이로 아무도 몰래 한 무리의

열기구들을 떠오르게 하는 것쯤

내겐 여전히 일도 아니지

 

* "아이가 아이였을 때(Als das Kind Kind war)", 빔 벤더스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오프닝에서 나오는 페터 한트케의 시의 반복구.

 

총칭하는 종소리

 

빗속에 울리는 종소리

그것을 우중(雨中) 행군이라 총칭한다

모든 것을 총칭하느라 아주 멀리까지 퍼진 종소리가

좍좍 비를 맞으며

불완전 군장으로

판초도 없이 푹

숙이고 간다

속옷까지 젖어 버린 종소리

이 지경까지 헐벗은 행군

종소리는 좌우로 밀착하고 종소리는 불현듯

천둥을 함축한다

구름을 소화한다 번개를 배출한다

전투기를 잡아먹고 초음속 비행하는 소리를 흉내 내는 구름들

과거시와 현대시와 미래시를 압축하고 속으로 깜빡깜빡 비상등을 켜 보며

격추당하는 소리를 흉내 내는 삐뚤빼뚤 사선들

꽃밭에는 꽃들이 모여 살고요

종 속에는 기합이 모여들지요

총동원할 것

물집을 식량을 다양한 군사 지식을

뭉쳐서 장음(長音)이 되는 온갖 단음(短音)들을

이를테면 바다가 넓은 줄 알아 무한정 마셔대는 고래들*처럼

불가능을 진동시키며 오로지 웅웅거림으로써만 기능할 것

집중된 독재자의 연설

뻗어 나간다

마이크 없이

온몸을 마이크로 쓸 줄 알아서

퍼붓는 빗속에 플러그를 꼽아 버리며

종은 종 안의 인간을 여기 다 풀어놓기로 한다

종소리는

죽지 않는다 낙오하지 않는다 오직 적멸에 들뿐

푹 젖은 상하의 탈의하지 않는다

그 앞에 고개 숙이고 땅바닥에 최대한 가까워져

절하는 세상 모든 빗소리들

그 대량의 고개 숙임들 위로 종은 또 한 번 와락 종 속의 내부를

쏟아내고야 만다

귓구멍 속으로 기어들어가 장착되고

만장일치로 폭발을 시도하기로

이제 제발 작작 좀 해라

세상의 장단에 좀 놀아나면 어때

해가 좀 뜬다

계급도 군번도 없다

빗소리 잦아 들어

이때를 경배하라

마른 종의 침묵이 귓속 심해로 가라앉는 소리

속에서 쫙

벌어진 채 다시는 붙지 않는

다리처럼 턱관절처럼

연한 식물의 줄기들 같은 흔들림 속에서

쥐 죽은 듯 취침할 것

좌로 취침하든

우로 취침하든

아무려면 어때

그것을 궁극의 잠꼬대라 총칭한다

이것이 내 몸에서 난 소리라는 사실에 뒤늦게 놀라 뒤틀리며

그 놀람이 내려친 맑음 속에서

골 때리도록

골 때리도록

이토록 청정한 무량광 속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

너라는 운해에 스며들고 있었다

운해의 성분들을 뒤엎고 갈아치우며

도처에서 세워지고 무너져 내리는 음향의 적멸보궁이 되어

와라

와서 나의 극광이 되어라

허공 속으로 쫙

찢어지는 번개처럼

한달음에 달려가 두 눈 꽉 감고

최선의 소리로

최전선의 소리로

확! 거기 뛰어들어라 울려 퍼져라

두 발 쭉 뻗어 버려라

가서 너의 극락이 되겠다

 

* "鯨知海大無糧飮", 出處未詳.

 

비 맞는 운동장

 

비 맞는 운동장을 본 적이 있는가

단 한 방울의 비도 피할 수 없이

그 넓은 운동장에서 빗줄기 하나 피할 데 없이

누구도 달리지 않아 혼자 비 맞는 운동장

어쩌면 운동장은 자발적으로 비 맞고 있다

아주 비에 환장을 한 것처럼

혼자서만 비를 다 맞으려는 저 사지(四肢)의 펼쳐짐

머리끝까지 난 화를 식히기 위해서라면

운동장 전체에 내리는 비로도 부족하다는 듯이

벌서는 사람이 되어 비를 맞고

벤치에 앉은 사람이 되어 비를 맞고

아예 하늘 보고 드러누운 사람이 되어 비를 맞다가

바닥을 향해 엎드려뻗쳐 한 사람이 되어 비를 맞아 버린다

혼자 비 맞고 있는 운동장, 누가 그쪽으로

우산을 든 채 걸어 들어가는 걸 본 적이 있다

검은 우산을 들고 있어서 멀리서 보면 무슨 작은

구멍 같아 보이는 사람이 벌써 몇 바퀴째

혼자서 운동장을 돌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도 비 맞으며 뛰놀진 않는 운동장

웅덩이 위로 빗방울만 뛰노는 운동장에서

어쩌면 운동장 구석구석에 우산을 씌워 주기 위해

어쩌면 그건 그냥 운동장의 가슴에 난 구멍이

빗물에 이리저리 떠다니고 있는 건지도 몰랐지만

공중을 달려온 비들이

골인 지점을 통과한 주자들처럼 모두

함께 운동장 위로 엎질러지는 동안

고여서 잠시, 한 뭉테기로 휴식하는 동안

우산은 분명

운동하고 있었다

혼자서 공 차고 노는 사람이

혼자서 차고

혼자서 받으러 가듯

비바람에 고개 숙이며 간신히 거꾸로

뒤집어지지 않는 운동이었다

상하 전후 좌우로 쏟아지는 여름의 십자포화(十字砲火)를 견디며

마치 자기가 배수구라도 되겠다는 양

그 구멍 속으로 이 시의 제목까지 다 빨려 들어가 버려

종이 위엔 작은 구멍 하나만이 남아 있을 때까지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자신을 소멸시키겠다는 듯이

가까스로 만들어 낸 비좁은 내부 속으로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소릴

집중시키고 있었다

 

쌓아 올려 본 여름

 

여름이다

혼자 점심을 사 먹고 운동장 계단에 앉아 있는 여름

괜히 끊었던 담배 한 갑을 사서 정말 딱

한 대만 피우고 계단 위에 누워 보는 여름이다

개미들이 무언갈 미친 듯이 찾아 헤매는 여름

동네 아저씨 하나 학교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고

오갈 데 없이 앉아 보는 여름이고

땃 한 대 피운 담배곽을 모르는 누군가에게 통째로 줘버리는 여름

그 누군가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눈알 속의 여름이다

개미들아 내게 올라타서 놀다 가라

더 이상 날지 못하고 천천히 기는 매미들아

내 옆에 와서 생을 마쳐라

고장난 티비나 세탁기 컴퓨터 삽니다

그래도 괜찮다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나는 콘크리트 위에서 죽은 매미의 몸을 흙 위로 옮겨 주는 여름이고

공 차는 소리와 구름이 흘러가는 색깔이 구분되지 않는 여름

누워 있는 나를 슬쩍 구름 위로 옮겨 주는

힘이 남아돌고 시간이 남아도는 여름이다

아까 그 아저씨가 애들이 하는 축구를

승부차기까지 다 보고 있는 여름이고

그물은 골의 힘만큼만 출렁이다가

곧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여름

여름은 이윽고 자리를 비우고 잠시 화장실에 갈 것이다

수돗물 틀어 놓고 그 소리 듣고 있자면

잠시 폭포 앞에 서 보는 기분

여름이다

땀과 물이 뒤섞여

배수구로 집중되고 있는 여름

잠깐 누워 있던 여름이 깜박 조느라

구름 떼로부터 도처에 자유낙하 중인 여름

오면 오고

가면 가는 여름이다

짧은 치마를 입고 또각또각 걸어가는 여자보다는

그여자의 다리와 볼록한 궁둥이를 멍하니 쳐다보다 고개를

돌리고 마는 노인의 표정에 더 반응해 보는 여름

너는 자꾸 치마를 끌어내리고

나는 여름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본다

여름이다

지난해 여름에 이어

또다시 여름

내년 여름은 아직 안 왔지만

내년에도 여름은 오는 거겠지

어떤 확신에 가까운 여름

여름에게도 얼굴이라는 것이 있다면 참

볼만할 거야

운동장처럼

하얗게 웃고 있을지도

모든 것을 증발시키며

정신이 증발했을 때

홀로 버려질 몸뚱이처럼

드러누워 있는 운동장 위에 홀로

드러누운 여름

나는 여름의 타오름 속에 슬쩍 몸을 끼얹고

잠시 같이 타올라 보는

여름

여름이다

여름이고

여름이고

여름이고

여름

나는 돌을 쌓듯이 거기 여름을 쌓아 놓고

발로 한번 차 본다

 

바라나시 4부작

 

연날리기

 

갠지스 강변에 가면 늘 연 날리는 아이들이 있지

하늘 끝까지 풀어 올린 연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생각할 때

마음 다 놓아 버리고선 어두워진 강변 신나게 내달리지

 

그러던 어느 날 보이지 않던 연들 강풍에 흔들리고

팽팽하던 실들 낚싯줄처럼 요동치기 시작하면

잊고 있던 실에 마음 베이는 아이 하나둘쯤, 있었는지도 몰라

 

하늘이 없었다면 떨어질 것도, 다시 띄울 것도 없었겠지만

어차피 우린 모두 하늘에 담겨 헤엄치는 아이들

한때 하늘을 점령할 듯 연 날리던 아이들

 

그동안 너무 많은 연을 띄웠으므로

팽팽히 당겨진 수만 개 연줄들로 뒤엉킨 마음은

아직도 줄 놓는 법 알지 못하지

 

누가 뭐래도 하늘엔 줄이 없어

줄 달린 연들이 어쩔래야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어차피 우린 모두 하늘에 빠져 익사하는 아이들

 

POSTCARD

 

   안녕, 늘 오랜만인 당신. 내가 흰 소들에 대해 말해 준 적 있었던가. 골목에서 사람들의 이야기 빼곡히 담긴 신문지나 아직 밥 냄새 채 가시지 않은 종이 접시 다윌 꼭꼭 씹어 먹는 소들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나 누군가에게 엽서 한 장 쓰고 싶어지는 저녁이야

 

   오전에는 파리 떼처럼 잉잉대며 하늘 유영하고 있는 수백 마리 연의 무리 올려다보다 그만 그동안 우리 함께 하늘로 띄웠던 몇 개의 연들을 떠올려 버렸어. 이젠 연줄 모두 끊어 버린 하늘인 척해 버려도 괜찮은 걸까, 하고 생각했을 때 방금 화장터에 도착한 20인분의 목재가 구석에서 풍기던 유난히도 쓸쓸하고 축추한 냄새

 

   오늘도 일곱 시면 텅 빈 배를 붙잡고 태양은 죽어 가지만 어쩌겠어. 이미 열기는 식었고 네가 내 메일 읽느라 밥을 태울 일도 이제는 없을 텐데. 그러나 창을 열면 어느새 새로운 계절이 도착해 있을 저녁은 과연 지금 어디쯤 오고 있을까, 라고 쓰고 저녁 하늘에 붙어 보려 애쓰는 우표들을 한없이 바라보는 날들이 있어. 지금 네가 읽는 하늘은 어떤 표정의 구름들 배달하고 있을까, 당신의 하늘 아래 서서 몰래 올려다보고 싶어지는 자녁에

 

다시, 연날리기

 

온종일을 날고 달리고 뒤엉키고 부서지느라

결국 만신창이가 되고 만 연은

초져녁 조용한 강물에 수장시켜 주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골목에 남은 빛 쪼아 먹던 새들은

검붉게 번진 하늘 너머로 떼 지어 흡수되는 중이었고

골목 여기저기 버려진 혹성처럼 처박혀 있는 노인들

적막한 그들의 얼굴은 이미

바람 모두 쫓아낸 하늘의 심심함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방문 앞에 이르러 열쇠를 찾고 있을 때

언제부터였을까,

모르는 새 나의 발목에 감겨 여기까지 풀려 온

연줄을 보았다

(그때 몇 겹의 비린 바람

도처에서 서서히 일어나고……)

 

이 밤, 외로운 누군가 나를 날리며 놀고 있는 것일까

 

당신의 발목에도 어쩌면 연줄이 감겨 있는지요

우주의 가장 어두운 아래층에서, 생의 마지막일 무엇처럼

그렇게 나를 간신히 붙들고 있는 당신

혹은 내 간절히 붙들고 싶던 당신

각기 다른 장소, 다른 시간 속에서 우린

사이좋게 둘이서, 고요한 하늘에 나란히 손잡고 빠져

보기 좋게 익사하고 있었습니다

 

아르띠 뿌자*

 

떠나 버렸다고

버려 버렸다고 믿은 것들 전부

다시 다 되돌아왔다

내가 달려 나가 줍지 않아도 남이 주워다

대문 앞까지 가져다주는 날 있었다

그놈에게 한바탕 욕지거릴 하더라도

돌아온 것, 다시 내쫓을 순 없었고

 

가트**에서 푼돈 주고 사 강물에 띄워 보낸 디야***

떠나보낸 줄 알고 뒤돌아보면 이미

그 자리에 없다

사라진 게 아니라 디야 파는 아이가

떠내려갈까, 금세 다시 떠올려 좌판에 되돌려 놓은 것

누가 거기다 대고 꽃 모두 시들 때까지 온갖

 

추잡한 욕 퍼붓는 것 보았지만

어떤 침몰한 기억도 깊은 강바닥 물고기들이 알아보곤

그 앞에서 잠시 놀다가는 법

 

피어난 죄로 무참히 꺾여서

헐값에 팔리고

다시 실에 묶여 떠내려가지도 못하는 빛,

 

그 빛을 사고 또 샀다

모든 여정(旅程) 탕진하고

마침내 두 주머니 텅 빈

부랑자가 되어 있었을 때까지

 

……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

물에 푹 젖은 연처럼 무거워진 몸으로

누가 울고 있었다

 

한 번 뒤돌아볼 때마다 깊어지는 수위를 느끼며

 

그럼 이제 안녕,

이라는 말에 스미는 뒤늦은 추위를 느끼며

 

이미 멀리

 

떠내려가 있었다

 

* 불로써 신께 경배드리고 은총을 받는 제식.

** 강으로 이어진 계단.

*** 작은 양초와 꽃을 담은 나뭇잎 보트.

 

풍차의 육체미

 

그냥 풍차가 됐으면

바람 불면 돌아가다

바람 자면 멈추는

돈키호테도

로시난테도 아닌

그냥 븅 븅

힘차게 제자리를 지키고픈

달려가서 안기고픈 남자의 규모로

븅 븅

잘리지도 않아서 영원히 자를 수 있는 공중을 썰며

븅 븅

호프나 한잔하고 부리는 호기로

정오 조금 지난 시간에 벌써 뒤풀이를 계획하는 아저씨 아줌마들이

일단 목부터 축이고 볼 때

그 목구멍들을 통해 넘어가는 힘으로

븅 븅

네가 런던에서 파리로 넘어가는 버스에서 보고 반한 육체미

븅 븅

내가 암스테르담에서 보고 매달려 돌아가고 싶던 힘찬 팔

난 지금 혼자 콩나물해장국 한 그릇을 비운 후 장충단공원에 앉아

문자나 주고받으며 당신들의 잡담을 엿듣고 있을 뿐인데

여긴 풍차가 하나도 없는데

난 갑자기 풍차가 되고 싶고

븅 븅

뭐라도 잡고 돌리고 싶고

뭐라도 븅 븅 돌아갔음 좋겠는데

여름바람에 감사하며

담배 피는 영감탱이들을 피해 부채 부치고 있는 할머니의

고약한 표정도 예쁘게 봐줄 수 있는

풍차가 됐으면

븅 븅

꽃받 오가는 꿀벌들의 날개 소리를

딱 100배만 확대한 음량으로

븅 븅

위풍당당

힘차게

난 버스도 안 타고 있는데

갑자기 내려서 좀 걷고 싶은 기분이고

식당에서 보던 야구경기를

여기저기 계단에 앉아 손에 스마트폰을 든 사람들이 이어서

봐주고 있는 듯한 기분이고

계속되는 경기

븅 븅 븅

계속되는 안타

붕 부웅 붕

계속되는 향기

부웅      부우웅   브응

소리를 녹음해줄 순 있지만

모양을 녹화해줄 순 있지만

지금 이 향기를 첨부해줄 순 없네

내가 풍차가 아니라서

힘찬 팔이 아니라서

마음에 드는 사실 몇 가지

부우웅븅 븅  븅

풍차는 없어도

딱 몇 초만

풍차가 됐으면

 

halo*

 

그것은 하나의 침몰이다

 

아침에 날기 시작해 저녁 무렵 진화한 새들이 하나둘

떨어질 때 일어나는 세계의 변형이자

밤부터 얼기 시작해 새벽 무렵 정점을 찍은 투명함이 긴장을

 

놓아 버리자마자 엎질러지는

 

물바다, 거대한 선박이 항해할 때 동반되는

소리의 커다란 모호함이다

 

덜 녹은 얼음들이 뜬 채로 밤 지새우는 동안 녹이 슨

면도날, 거울의 절벽에 매달린 채 점점 둥글어져 가는

핏방울, 그저 그런 선상(船上) 파티에 참가할 때

배에서 내리면 발 디딜 곳 하나 없다는 생각만으로

머릿속 한복판이 대서양처럼

새하얘짐이다

 

어쩌면, 하나의 탄생이다 의지와는 상관없는

 

웅장하고 불안한 선박의 노골적인 엔진 소리 같은

 

그것은 고문에 가까운 하나의 이미지, 제 발로 살아 움직이는 고래들처럼

물속에 물을 토하며 거대해진다

포악하게, 악착같이, 굴착기처럼 파고드는

물속에서만 본색을 드러내는 웅장한 소리

혹은 백상아리의 피부를 쓰다듬는 물결들의 환희이거나

이빨에 물어 뜯겨 너덜거리는 살들의 춤

얼음을 깨며 쇄빙선은 싱싱해지고

 

눈 속에 구명보트 같은 눈빛 숨기고 얼어 가는

생선들은 선박의 마음을 이해하느라 더욱 단단해져 간다

그것은 하나의 무너짐,

깨진 얼음들이 살 위로 쏟아져 흰 빛 아래 방치됨이고

 

밤은 물컵처럼 시원해진다

희미하게 전진하며 나의 흰 배가 너의 흰 배 위에 가닿듯

그것은 밤새 퇴고하는 손이 그리는 궤적의 탁월함

 

닻을 내리고 쉴 것이다

 

* Alva Noto + Ryuichi Sakamoto의 곡.

 

일체감

 

가벼운 새는

풀숲에

풀잎 엮어 집을 짓고

무거운 새는

나무 위에

나뭇가지 엮어 집을 짓는다

그것은 섭리

집은 자기

집주인을 닮았다

그러므로

자기 집이 없는 사람

이를테면

자이나(Jaina) 수행자들은

누운 곳이 곧 자기 집이므로

이 세상이 다 그와 닮고

노숙자들이 한참을 배회하다

잠드는

지하철역과 골목은

점점 노숙자들을 닮아 간다

집을 버린 사람과

집에서 버려진 사람은

아무래도 서로 다른 걸 닮아 가는데

오늘은 텅빈 뱁새 집 하날

조심스레 따다

식탁 위에 올려 두었다

그건 버린 집이 아니라

다 써서 버려진 집

잠시

맑고 포근한 시절의 너를 떠올렸다

물결은 오늘 모든 바다에서

잔잔하게 일겠고

이윽고 식탁에서

없는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투명하게

무음으로

없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세상은 거의 사라졌다

 

인식의 힘

- Notes on Blindness*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내리는

빗소릴 듣고 있었고

내리는 비가 때리는

물질들이 내는 소릴 듣고 있었다

창밖에서는 둔탁한 소릴 내다

창을 열면 크고 선명해지는

빗소리는 끊이지 않았고

빗소리는 무엇 하나 소외시키지 않았으므로

비로소 간극 없이 이어진 세계 속에서

내리는 비가 때리는 온갖 물질들이 내는 소릴 듣고 있었다

내리는 비가 때리는 물질들을 하나씩 분간해 낼 때마다

세계는 확장되고 있었고

세계는 재구성되고 있었고

때로 한밤중에

가는 물줄기 어딘가 부딪치고 있을 때

밤비 오시나

엄마 또 자다 깨 오줌 누시나

분간해 낼 수 없을 때도 있지만

침대에 누워서도 듣고

창문을 열어 두고도 듣고 있었다

문득 뒤돌아보면

고요한 실내

잠시 비 그치면 다시

고요한 세계

그러나 다시 빗소리 들려오기 시작하면

때로 나는 그게 다시 멀리서 비 내리기 시작한 건지

아니면 벌거벗은 네가 욕조에 들어가 샤워를 하기

시작한 건지 분간해 낼 수 없고

그럴 때마다 세계는 뒤섞이고 있었고

세계는 재구성되고 있었다

이어지는 빗소리 속에서

볼 수 있었으면 없었을 세계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없었을 세계

비가 내리지 않을 땐 정말로 없는 세계 속에서

모든 물질들이 내리는 빗속에서 어깨동무하는 광경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게 돼 버렸을 때까지

비는 내리고 있었고

뭐가 뭔지 아는 것 따윈 하나도

중요하지 않게 돼 버렸을 때까지

비는 내리고 있었고

비는 때리고 있었고

나는 그 모든 물질들의 한가운데 있었다

나는 여전히 창가에 머물고 있었고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 신학자 존 헐(John Hull)이 실명 이후 3년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한 일기를 그대로 사용하여 제작된 단편 다큐멘터리.

 

초겨울에 대한 반가사유

 

내가 여기서 가만히 팔을 괴고 앉아 있는데 저기 식탁 위

에 놓인 물병이 흔들,

리고 있다면 저 흔들림은 나만의 흔들림

 

에서

이 세상의 흔들림

 

까지.

 

찬 마룻바닥 위

벽에 걸린 가을 풀 거꾸로 말라가는 시간 속에서

반가사유상의 왼발바닥이 새하얘진다

 

창밖에는 길어 온 물항아리 하나 하늘에 떠 있다

흔들흔들

출렁이다가

 

엎질러지는 날개들

박살나는 물항아리의

예리하고

빛나는 펼쳐짐으로

 

넓어지는 접촉면

발에서, 무릎으로

골반으로 가슴으로

번져오는 추위 속에

마침내 시려오는 머리.

 

반가사유가 뭐 별건가

시원한 바람 한 줌, 십 분여의 뻥 뚫린 환기보다 못한 것

 

엔터키 때리듯 벌떡!

일어나 창 쪽으로 달려가려다 말고

한 칸,

또 한 칸 스페이스바 누르듯

저린 발 뗀다

 

금동여래입상이 뭐 별건가

정말 오랜만에 다시 하늘색이 된 하늘

창을 열고 그 앞에 선 자라면 누구라도 잠시, 확장될 것

 

얼굴은 활주로 같은 것

그 위를 무허가로 비행하는 표정들

자주 착륙하는 낯익은 표정들과

한번 이륙한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표정들 속에서

금동여래입상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반가사유상의 사유가 새하얘지고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금동여래입상의 차이는 오로지 넘버뿐

 

스페이스 바는 누르고

엔터키는 때린다

거꾸로 할 수 있다면

날 놀래킬 것

 

그럴 때마다 촛불들이 쓰러지는 저녁 바다

불바다가 되는 수평선 수직선

경계선 따위

그 온갖 선(線)들

 

저 불이 밤바람에 옮겨붙으면, 저 불이 더 불어나면

안 된다

안 되지만

 

뭐 안 될 것도 없다

그럴 때마다 브레이크 브레이크, 멀리 해안도로에서 타이어 타는 냄새

물이 불어나듯

넘치는 불의 계절

물불 같은 거, 가리질 말 것

 

손가락도 없는 눈으로

잡을 수도 없는 구름이나 오래 매만져보는 이 늦가을, 마지막 날 아침

스페이스바 길게 누르고 있는 동안만큼

반가사유상의 사유가

엎질러지고 있는 저 하늘

 

여래입상 따위

엔터,

엔터,

거기 털썩

주저앉혀버려

 

북유럽 환상곡

 

누가 또 시벨리우스*를 풀어 놓았나 등 푸른 생선같이 차가운 하늘

 

떨리는 손 숨기기 위해

손의 멱살을 쥐어 본 적 있습니까

손톱자국 네 개 희미하게 남아

손에게 미안해지는 저녁

 

북극해는 오늘 아침 심한 배신을 당해

노을 닿는 곳마다 맑은 핏물은 우러나오고

 

잠이 오지 않을 땐 베개 속에 낮에 주워 모은 철새의 깃털을 넣어 줘 보지만

그것은 어디론가 멀리 날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만

 

감기약 캡슐처럼 감정은 여러 종류

채 다 번역하지 못한 낮은 잘 씻긴 유리 재떨이에 기대어 주는 요즘

감기 기운 너머로 담뱃갑 속 빼곡한 천사들처럼

새들의 흰 날개는 펄럭이고

 

주르륵 늘어진 실밥을 당기면

툭,

하고 단추가 떨어지듯

또 해는 지고

 

꿈이 너무 찰 땐 베개 속에 작년 봄에 주워 모은 목련을 넣어 줘 보지만

그것은 어디론가 안전하게 추락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그래도 잠이 오지 않을 때 베개를 뜯어 보면 속에는 죽은 새들의 물컹한 내장

(그건 그저 고깃덩어리고)

꿈이 너무 안락할 때 베개를 뜯어 보면 속에는 꽃잎 속에 들어갔다 갇혀 버린 벌레들의 세계

(흔해 빠졌어, 너 같은 거)

 

누가 또 시벨리우스를 다 잡아들였나 더 이상 싱싱하지 않은 하늘

 

투명한 기침 소리를 믿는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니?

라고 누가 말할 땐 굳이 콜록거리지 않아도 괜찮아

라고 다짐하는 것도

희미해진 시벨리우스 냄새 속에서 밤새 바느질을 해 보는 것도

조금은 도움이 되는 요즘

 

진한 피 맛을 볼 때까지 하늘을 사랑하는

 

* Jean Sibelius

 

 

 

 

posted by 황영찬